온돌의 역사는 한국에서 온돌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함경북도 웅기(雄基)의 청동기시대움집에서 구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 중국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겨울철에 장강을 만들고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장강은 온돌의 원시적 형태로 보이며,
이러한 것은 백제나 신라에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온돌의 구조는 땅바닥에 방고래를 만들고,
구들장을 얹기 위한 두둑을 세워 그 위에 구들장을 놓습니다.
이때 아랫목에서는 낮고 주변으로 갈수록 높아지게 구들장을 놓습니다.
그리고 구들장 위에 진흙을 바르는데, 구들장과는 반대로 아랫목에는
두껍게 바르고 주변으로 갈수록 얇게 발라줍니다.
진흙을 바른 후에는 불을 지펴 건조시키고, 더욱 고운 진흙이나 황토에
짚을 섞은 것으로 재벌바름을 하여 다시 건조시키고 초배지를 바릅니다.
마지막으로 초배지가 마르고 나면 그 위에 장판지를 붙입니다.
한편, 불을 때는 아궁이에는 부뚜막과 공용되는
부뚜막아궁이와 부뚜막이 없는 함실아궁이가 있습니다.
온돌은 연소가스의 자연대류를 이용하는 것이므로
방고래는 가스가 흐를 때 저항을 줄이기 위해 아궁이쪽을 낮게 만들어주고,
또 재를 치우기 편리하고 연소가스의 역류를
방지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여러 형태가 고안되었습니다.
이러한 초목용 온돌과는 달리 현재에는
연탄온돌·온수온돌·스팀온돌·전기온돌 등 다양하고 새로운 온돌이 보급되었습니다.
연탄온돌은 8·15를 전후하여 무연탄을 온돌의 연료로 사용하면서 시작되었고,
1952년경부터 구멍탄을 사용하게 됨에 따라
초목용 온돌을 개조한 본격적인 재래식 연탄온돌이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재래식 연탄온돌은 과학적 근거없이
경험을 토대로 시공해 왔기 때문에 난방효과도 균일하지 않았고,
연탄가스중독사고가 끊이지 않아 큰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책의 하나로 1975년에 연탄온돌의 구조·재료
및 시공지침을 규정한 표준온돌시공법을 한국공업규격(KS)으로 제정·공포하였고,
또, 온돌기능사 자격증 소지자만이 시공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연료 및 난방방식의 변화와 개선에 따라 보일러를 설치하고 파이프를 매설하여
간단하게 온수를 순환시키는 등의 새로운 온돌이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온돌의 단점은 연소가스가 새어나와 방안의 사람이 중독된다든지,
방바닥이 건조되어 먼지가 일어나서 건강에 해롭다는 점 등입니다.
그러나 취사와 난방을 겸할 수 있으며 방바닥 난방법으로서 효과가 우수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용되고 있는 전통적인 난방법입니다.
온돌에 대하여
중국 고대기록에서 온돌에 관한 기사가 보이는 것은 《구당서(舊唐書)》가 가장 중국 고대기록에서 온돌에 관한 기사가 보이는 것은 《구당서(舊唐書)》가 가장 오래된 것인데, 여기에 기록된 고려(고구려를 말함)항에 보면 “겨울철에는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한다(冬月皆作長坑下然溫火亂取暖)”고 하였으며, 《신당서(新唐書)》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외에 신라와 백제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는 그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고 하며, 신라에 관해서는 “겨울에는 부엌을 집안에 만들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놓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것으로 백제에도 온돌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신라도 그 기록이 귀족계급의 생활을 말한 것으로 보아 서민층에 온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 온돌에 관한 옛기록은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대금국지(大金國志)》 《고려도경》 등이 있고, 한국의 것으로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목은집(牧隱集)》 등이 있다.
온돌의 유구(遺構)로서는 선사시대 조개무지발굴에서 발견된 웅기(雄基)의 주거지와 발해(渤海)에 있는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제5궁전지가 있다.
이와 같이 온돌은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 북부 및 중국의 동북부지방에 거주하던 부여족 계통의 민족 사이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것이 4∼5세기부터 심해진 북방계민족의 남하운동에 따라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실시되니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서도 하층계급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말한 신 ·구당서에 있는 긴 구덩이[長坑]라고 하는 것이 온돌의 원시적인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이 어떠한 형태였으며, 또 오늘날 한국에서 사용되는 온돌과 중국 동북부에서 사용되는 캉[年]의 어느쪽에 더 가까운 것인지는 고찰의 여지가 있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를 형성하던 민족의 기거양식(起居樣式)이 옛 기록과 고구려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좌식(座式)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긴 구덩이란 바닥앉기에 알맞게 만들어진, 오늘날 한국에서 사용되는 온돌에 가까운 것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온돌, 중국에서는 캉 또는 캉촹[年床]이라고 한다.
《구당서》에 기록된 장갱(長坑), 《삼조북맹회편》의 캉 및 갱은 형태를 구별할 수 없으나 송(宋)나라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는 화갱(火坑)이라 하였고, 한국의 《동국이상국집》에는 난돌(暖왼)이라고 하여 이름이 각각 다르다.
이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온돌(溫왼)이라 쓰인 것을 실록(實錄)에서 볼 수 있으나, 같은 실록에서 연돌(烟왼)이라고 쓰인 곳도 있어 초기에는 온돌이라는 이름이 고정되지 않았으나 이것이 고정된 것은 북관기사(北關記事)가 씌어진 19세기 초 이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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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난방 방식인 그들의 따뜻한 아랫목은 온가족이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자리였습니다. 침대 생활을 하는 외국인의 눈에는 그런 아랫목 문화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1904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한국 사람들은 밤마다 펄펄 끓는 방바닥에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온돌의 종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