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맹자 노자 이런 사람들은
周(주)나라 봉건 씨족제가 무너지는 春秋時代(춘추시대)밑에서 郡縣制(군현제)의 漢帝國(한제국)이 성립하여 儒敎主義(유교주의)의 문교정책이 시작되기까지, 즉 과도기 사회가 낳은 들은 천하를 다루는 諸侯(제후)들 사이를 유세하면서 각자의 주견을 주장하고 論難(논난)하여 자유롭게 다채로운 사상계를 나타냈다. 이 상태를 百家爭鳴(백가쟁명), 百花齊放(백화제방)이라 형용한다. 그 논제는 인생관, 세계관에서부터 富國强兵術(부국병술)에 까지 걸쳤으며, 그 중에는 과학기술의 지식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있어야 할 천하 질서와 그곳에 있어서의 인간의 생활 방식에 있었다. 백가의 는 學派(학파)를 가리키며, 는 師匠(사장)을 뜻한다. 그리고 師匠(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논설집을 가리켜, 예를 들면 >라 부른다. >에서는 六家(육가)로 정리하고 있는데, 儒家(유가)의 孔子(공자).孟子(맹자), 法家(법가)의 韓非(한비), 道家(도가)의 老子(노자).莊子(장자), 墨家(묵가)의 墨子(묵자), 名家(명가)의 公孫龍(공손룡), 陰陽家(음양가)의 추연등이 저명하다.
Ⅰ. 제자백가의 역사적 성격
⑴제자백가출현의 사회적 배경
제자백가 : 춘추 말에서 전국시대에 걸쳐 출현한 독창적인 사상을 지닌 많은 학자들 춘추·전국시대에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고 문화적 업적을 이룩하여 동양사상의 기반을 마련
▶▶제자백가가 출현하게 된 사회적 배경
①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확대 : 주대의 봉건질서가 붕괴되면서 지금까지 관부나 귀족이 독점하고 있던 학문과 지식이 일반서민에게까지 확대 → 일반민의 신분상승 실현 욕구 → 문화창조 의지
②학자의 우대 : 전국시대 영토국가의 출현과 각국간의 경쟁이 부국강병 추진 → 능력있는 학자 (사인) 우대 풍조 팽배 ex) 위나라(전국 초기 중국문화의 중심) 문후 - 자하, 제나라(전국 중기 중국문화의 중심)의 선왕 - 직하의 학사
③각국의 분립이 사상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 : 중국 역사상 정치적 통일시대는 강력한 국가권력이 사상과 학문 통제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 혼란이 사상을 자유로이 발표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 마련
④도시(읍제)국가에서 영토(영역)국가로의 영토적 확대는 각 제후국의 정치적 독립과 변방국가들의 중앙문화와의 접촉이 활발해져 사상과 학문 전파가 촉진
⑵제자백가사상의 성격
▶▶제자백가사상의 공통적인 성격
①제자백가는 학단(학문적인 집단)을 중심으로 사상과 학문이 이루어졌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대의 씨족사회가 해체되면서 개인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이 가문과 전통 보다는 능력에 따라 좌우
종이의 미발명으로 책이 보급되지 못하여 개인적인 학문연구가 거의 불가능
문자의 지방적 차이성으로 독서에 의한 개인적인 지식의 획득이 곤란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에서 스승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 종제적 학풍이 학단 지배 → 객관적인 학문의 발달을 저해
②학문과 정치의 일치 : 제자백가의 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태를 바로 잡기 위한 원리를 찾는데 집중 (다만 그 방법과 강조점이 서로 다를 뿐이다)
③인간중심주의와 합리주의를 찾을 수 있다. : 동아시아 사상의 틀이 마련
제자백가 諸子百家
주(周)가 동으로 천도한 후부터는 종주권(宗主權)이 쇠약해짐에 따라 제후들이 방자하게 되어 약육강식이 잇달아 일어남에 중국 천하는 소란하게 되었다.
이시기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또는 선진시대(先秦時代)라 부르며, 중국사상의 개화 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사기(史記)』에 의하면 제자백가를 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가(道家)의 6가지로 분류하고, 『漢書藝文志』에 의하면, 6가 이외에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 시부가(詩賦家), 병가(兵家), 수술가(數術家). 방기가(方技家)의 8가를 추가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백가들은 모두 이위기를 구출하려는 의도와 목적아래서 일어난 것이며, 철학사상에 특히 기여한 것은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등이다.
유가 儒家
유가는 본래 춘추시대(春秋時代)말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서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한 학파에 불과하였으나, 한왕조(漢王朝)의 권력의 안정과 함께 그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서 중시되어 중국(中國)의 정치사상 중에서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에 왕조 정치체제가 존속한 2천년 동안 유학은 국가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교학(敎學=儒敎)으로서 종통사상의 지위를 계속 점거(占據)하였던 것이다.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유학은 각 시대의 정치 상황이나 다른 사상관계에 대응하여 그 내용을 변화, 전개하고 있다. 「유(儒)」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유약(柔弱)」을 의미한다든가 「수(須)=턱수염,에 통하여 老人」을 의미한다든가의 말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묵가(墨家)나 법가(法家)와 같은 타학파들이 이하 서술하는 것 같은 성격의 학파를 가리켜서 붙인 명칭인 듯 하다.
유가 사상의 특질을 요약하면 공자의 仁은 인간심정에 고유한 자애의 마음을 확충하는 것 , 즉 극기복례로써 완전한 인격을 이룬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그 발단은 친자지간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하며, 나아가서는 형제, 가정, 사회, 국가, 인류에게 미치는 사람의 길이며, 이것은 사람의 본성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한다. 공자는 인도를 닦아서 천도에까지 이르는 天人合一의 경계를 역설하였다. 공자의 인은 마치 석가의 慈悲나 예수의 博愛와도 비슷한 것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倫理로서 人道이므로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다만 현세인이 삶에 국한 된 것이다. 공자 다음에 자사가 나와 백여년 뒤에 맹자가 나와 공자의 도를 조술하여 성선설을 창도함으로써 4덕과 사단을 역설하여 사람의 막음에 인의예지의 덕이 고유하므로 측은(惻隠) 수오(羞郡) 사양(辞譲) 시비(是非)의 마음이 드러난다 하여 선천적 良知良能設을 주장하였다.
전국시대말의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맹자와 순자는 도덕 뿐만 아니라 경세사상을 부르짖음으로써 왕도 정치에 있어 인민의 경제적 생활기반을 마련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유가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學, 환언하면「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학문이며, 그것에 향한 실천이라고 도 할 수 있다. 「자기 (己)를 修한다」함은 개개인에 있어서의 도덕을 신뢰하여 그것을 정직하게 신장(伸長)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孟子의 性善說은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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