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광 = 성덕왕?

김흥광 = 성덕왕?

작성일 2013.11.01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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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김씨의 시조 김흥광은 신문왕의 3번째 아들로 나오는데, 성덕왕의 이름이 김흥광 문제는 성덕왕은 신문왕의 2번째 아들로 나오네요 그러면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과 성덕왕이 같은 인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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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광산 김씨의 시조 김흥광은 신문왕의 3번째 아들로 나오는데, 성덕왕의 이름이 김흥광 문제는 성덕왕은 신문왕의 2번째 아들로 나오네요 그러면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과 성덕왕이 같은 인물인가요?

 

답변 : 김흥광공이 성덕왕이 아니시고 신무왕의 부친이 성덕왕으로 추존되셨습니다. 부친님균정공(均貞公)입니다.

 

한문과 한글을 병용합니다. 한문을 쓰는 이유는 한문은 여러자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해당자료에는 녹색글씨로 표기합니다.

 

아래에 광산 김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광산 김씨에 하여

 

1. 시조(始祖) : 金閼智(김알지)

 

2. 유래(由來) :

 

追尊始祖大王(추존시조대왕)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따르면 新羅第四代(신라제4) 昔脫解王(석탈해왕) 九年(9) 西紀 六五年(서기 65) 乙丑(을축) 三月四日(3 4)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八月四日(84) 밤에 脫解王(탈해왕)이 들으니 慶州(경주) 雞林(계림)에서 닭의 우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께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숲속에서 닭이 우는 것을 以上(이상)하게 여기시고 匏公(포공)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匏公(포공) () 命令(명령)을 받고 始林(시림)에 가보니 한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금빛갈의 ()가 걸려있는데 그 아래에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匏公(포공)이 돌아와 ()께 고하여 이 事實(사실)을 아뢰니 ()께서는 곧 사람을 보내어 그 金櫃(금궤)를 가져오게 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속에는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는데 그 모습이 奇異(기이)하였다. ()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臣下(신하)들에게 이르시기를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으로 아들을 내려 주신 것이아니냐하시고 그 아이를 키우시니 그는 자라면서 聰明(총명)하고 智略(지략)이 뛰어 났다. 그래서 ()께서는 그의 이름을 閼智(알지)라고 부르고 金櫃(금궤)에서 나셨다하여 ()이라는 () ()해주셨다. 이로 말미암아 始林(시림) 雞林(계림)이라고 고치시고 國號(국호) 雞林(계림)으로 고쳤다고 ()해온다. 昔脫解王(석탈해왕) 太子(태자)로서 섭정에 該當(해당)하는 大輔(대보)벼슬에 계셨으나 昔婆娑王(석파사왕)에게 讓步(양보)하시고 ()위에 오르지 않으셨다. 뒤에 始祖大王(시조대왕)이라고 追尊(추존)되셨다. 新羅(신라) 文武王碑(문무왕 비) 眞澈大師碑(진철대사비)에는 雞林金氏(계림김씨) 始祖星漢王(시조성한왕)이며 文武大王(문무대왕) 一五代祖(15대조)라고 記載(기재)되어있다.

 

: 麻貞夫人(마정부인)이시니 昔脫解王(석탈해왕) 王子(왕자) 角干康造(각간강조)의 따님이시다.

<중략>

 

八世 奈勿王(내물왕)

 

一名(일명) 那密(나밀) 新羅(신라) 第 十七代王(17대왕)으로 王號(왕호) 麻立干(마입간)이니 訖解王(흘해왕)께서 아들이 없이 돌아가시자 西紀(서기) 三五六年(356) 四月(4) 王位(왕위)에 오르신 () 많은 善政(선정)을 베푸셨다. 大王二年(대왕2) 봄에 使者(사자) 各地方(각지방)에 보내시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늙은이들을 慰問(위문)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곡식 석섬씩을 하사 하셨으며 () 孝道(효도)에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官職一級(관직일급) 주셨다. ()께서는 () 始祖廟(시조묘) 祭祀(제사)를 드리셨다. 九年(9) 四月(사월)에는 倭兵(왜병)이 크게 侵入(침입)하므로 ()은 풀로 허수아비 數千個(수천개)를 만들게 하시고 옷을 입혀 사람이 兵器(병기)를 들고 있는 것 같이 僞裝(위장) 吐含山(토함산) 밑에 세우고 勇士(용사) 一千名(1천명)을 솥 고개 지금의 釜峴(부현) 동쪽 벌판에 潛伏(잠복)시켜 두었다가 () 全滅(전멸)시켰다. 大王(대왕)十一年(11) 西紀三六六年(서기366)에는 百濟(백제) 修交(수교) 하셨고 十七年(17)에는 使者(사자) 各地方(각지방)에 보내시어 곡식을 풀어 가뭄으로 허덕이는 百姓(백성) 救濟(구제) 하셨다. 十八年(18)에는 百濟(백제) 禿山城主(독산성주)(永平(영평)) 男女(남녀) ○○(삼백명)을 이끌고 降服(항복)했다. 二一六年(216)에는 衛頭(위두) 前奈(전내) 符堅(부견)에게 보내어 親善(친선)을 꾀 하셨다. () 三七年(37)에는 强盛(강성) 高句麗(고구려) 仲父伊湌大西知(중부이찬대서지)의 아들인 四寸實聖(사촌실성)(뒷날 實聖王(실성왕)) 人質(인질)로 보내셨다. 八年(38) 五月(5)에 또 倭敵(왜적) 侵犯(침범)하여 五日(오일)동안이나 金城(금성) 攻擊(공격)하였으나 城門(성문)을 굳게 잠근채 지키고 있자 () 退走(퇴주)함에 날샌 騎兵(기병) ○○(200)을 시켜 禿山(독산:영일지방) 까지 追擊(추격)하여 () 全滅(전멸)시켰다. (40)八月(8)에는 靺鞨族(말갈족) 以北方(이북방) 侵犯(침범)하였으므로 三陟地方(삼척지방)에서 擊破(격파)시켰으며 四二年(42)에는 江陵地方(강릉지방) 旱魃(한발)이 심하므로 大赦令(대사령)을 내리시는 한편 一年(1)동안 稅金(세금) 免除(면제)하셨다. 四六年(46) 西紀四一年(서기 401) 七月(7) 高句麗(고구려) 人質(인질)로 가 있던 四寸實聖(사촌실성)이 돌아 왔다. 四七年(47) 西紀四二年(서기402) 二月(2) 逝去(서거)하셨으나 在位(재위) 四七年(47)동안 여러 차례의 畏鍼(외침)을 물리치시고 자비로써 百姓(백성)들을 다스리신 聖君(성군)이시었다. () 三國史記(삼국사기) [瞻星臺(첨성대)서 남쪽 지금의 慶州(경주)시 교동 14-1번지임]

 

() : 保反夫人金氏(보반부인씨)이니 味鄒王(미추왕)의 공주이시다.

 

十一世 智證王(지증왕)

 

() 智大路(지대로) 位號智哲路(위호지철로) 西紀四三七年生(서기437년생) ()은 체격이 長大(장대)하시고 膽力(담력)이 남달리 뛰어나셨다. 西紀(서기) 五百年(500) 新羅(신라) 第三一代( 31) () 炤智王(소지왕)이 아들이 없이 돌아가시자 再從弟(재종 제) (육촌아우)로서 第二二代( 22) 王位(왕위)에 오르셨다. ()은 재래의 原始的(원시적) 文物制度(문물제도) 一新(일신)하여 새 時代(시대)를 이루셨고 麻立干(마입간)으로 써오던 王號(왕호)를 처음으로 ()이라 부르기 始作(시작)하였다. 大王(대왕) 三年(3)에는 殉葬(순장) ()하시고 農事(농사)를 장려하여 소로 밭갈이를 하는 ()을 가르쳤으며 四年(4)에는 國號(국호)를 다시 新羅(신라) ()하셨다. 五年(5)에는 喪服(상복)입는 () ()하시고 波里城(파리성) 彌實成(미실성) 珍德城(진덕성) 骨火城(골화성)()을 쌓으셨다. 六年(6)에는 州郡縣制度(주군현 제도) ()하시고 悉直州郡主(실직주군주) 異斯夫(이사부) 任命(임명)하시고 얼음을 貯藏(저장)하게 하시고 船舶(선박) 便() 圖謀(도모)하셨다. 七年(7)에는 饑饉(기근)이 심하므로 倉庫(창고)의 곡식을 풀어 百姓(백성) 救濟(구제)하시고 서울에 東市(동시) 設置(설치)하시고 陷穽(함정)을 파서 猛獸(맹수) 被害(피해)를 막도록 하셨다. 十三年(13) 六月(6)에는 異斯夫(이사부)를 시켜 智路(지로)로써 干山國(간산국) (鬱陵鳥(울릉조) 降伏(항복) 받아 병합하셨다. 十五年(15) 西紀五一四年(서기514) 逝去(서거)하시니 在任(재임) 十四年(14)이요 亨壽(형수) 七十八歲(78)이시며 諡號(시호) 智證大王(지증대왕)으로서 新羅(신라)에서 처음이로 諡號法(시호 법) 始作(시작)되었다.

 

() : 廷帝王后(정제왕후) 朴氏(박씨) 伊湌登欣(이찬등흔)의 따님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牟梁部相公(모양부상공)의 따님으로 記錄(기록)되었다.

 

十九世 元聖王(원성왕)

 

() 敬信統一新羅(경신통일신라) 國運(국운)이 기울기 始作(시작)하여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계의 王統(왕통)이 끊어지고 謀反(모반) 弑害(시해)가 연이어 貞元元年(정원원년) 西紀七八五年(서기785) 元聖大王(원성대왕)께서 王位(왕위) 卽位(즉위)하시자 그 뒤는 모두 우리 敬順王大王(경순왕대왕)() 繼承(계승)하게 되었다. ()二二代王(22대 왕) 智證王(지증왕) 昇退(승퇴)하신뒤 八代(팔대) 二七一年(271)만에 다시 왕위에 오르신 분은 昭聖王(소성왕) 哀莊王(애장왕) 憲德王(헌덕왕) 興德王(흥덕왕) 僖康王(희강왕) 閔哀王(민애왕) 神武王(신무왕) 文聖王(문성왕) 憲安王(헌안왕) 憲康王(헌강왕) 定康王(정강왕) 眞聖女王(진성여왕) 孝恭王(효공왕) 敬順王(경순왕) 十四(14)()이요 그 在任年數(재임 년수) 一三五年(135)에 이른다. 大王(대왕) 奈勿王(내물왕) 十二世(12)()이시며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의 마지막 ()이신 惠恭王(혜공왕) 十六年(16) 西紀七八(서기780) 二月(이월) 伊湌(이찬)金志貞 叛亂(반란)하였을 때 伊湌(이찬) 벼슬에 있었는데 惠恭王(해공왕) ()을 받아 上大等(상대등)金良相(김량상) 合勢(합세)하여 金志貞(김지정)의 목을 베고 () 平定(평정)하는데 ()을 세우셨다. 亂離(난리) 惠恭王(혜공왕) 王妃(왕비) 弑害(시해)되었으므로 上大等(상대등) 金良相(김량상) 王位(왕위) 卽位(즉위)하시니 이가 곧 三七大(37) 大王(대왕) 宣德王(선덕왕)이시다. 西紀七八(서기780) 宣德王(선덕왕)이 왕위에 오르시자 元聖王(원성왕)께서는 首相(수상) 上大等(상대등)이 되셨다. 어느날 幞頭(복두)를 벗고 素笠(소립)을 쓰고 十二絃琴(십이현금)을 안고 天官寺(천관사) 우물에 들어가신 꿈을 꾸셨다. 餘三(여삼)이란 사람의 解夢(해몽) 祈禱(기도)하고 時期(시기)오르기를 기다리셨다. 드디어 西紀七八四年(서기784) 一月(일월) 宣德王(선덕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자 群臣(군신)들이 議論(의논)하여 周元(주원)을 다음 ()으로 推戴(추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周元(주원)의 집은 閼川(알천)건너 京北(경북) 二十里(20)에 있었고 때마침 밤중에 많은 비가 내려 閼川(알천) 강물이 넘쳐 周元(주원)이 강물을 건너오지 못하였다. [群臣(군신)들은 오늘의 暴雨(폭우)는 하늘이 주원이 ()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니 平素(평소) 德望(덕망)이 높고 君王(군왕) 體貌(체모)를 갖추신 上大等敬信(상대등 경신)을 다음 ()으로 모시자] 與論(여론)이 있어서 다시 群臣會議(군신회의)를 열어 大王(대왕) ()으로 推戴(추대)하여 新羅(신라) 三八代(38) ()이 되셨다. ()께서는 王位(왕위)에 오르시자 始祖(시조)大王(대왕) 文武王祖父(문무왕조부)이신 興平王父親(여평왕 부친) 明德王(명덕왕) 五廟(오묘)에 모시고 文武百官(문무백관) 爵位(작위) 一級(일급)씩 높이셨다. 二月(이월)에는 金元全(김원전) ()나라에 보내시니 ()나라의 德宗(덕종) 羅錦綾彩(라금릉채) 三四(34) 衣服銀盒(의복은합)() 禮物(예물)을 보내 왔었다. 이해에 가뭄이 들자 六六二三(66230의 곡식을 풀어 百姓(백성)들을 救濟(구제)하셨다. 三年(3)에는 罪人(죄인) 大赦(대면)하셨고 四年(4) 봄에는 從前(종전)에 활쏘기로 人材(인재) 登用(등용)하던 制度(제도)를 고치시어 讀書三品制(독서3품제)로써 人材(인재)를 뽑으니 春秋左氏傳禮記文選(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읽어 能通(능통)하고 論語孝經(논어효경)에 밝은 사람을 上品(상품)으로 하고 曲藝論語孝經(곡예논어효경)을 읽은 사람을 下品(하품)으로 하였다. 이것이 東方科擧制度(동방과거제도) 始初였다. 詩傳書傳春秋禮記周易史記漢書後漢書(시전서전춘추예기주역사기한서후한서) 諸子百家書(저자백가서) 能通(능통)한 사람은 特別(특별) 拔擢(발탁)하였고 이해에 가뭄이 ()하였으므로 全國(전국)에 사람을 보내시어 按撫(안무)하셨다. 五年(5)에 가뭄이 심하여 國庫(국고)를 풀어 救恤(구휼) 하셨고 六年(6)에는 碧骨堤(벽골제) 增築(증축)하여 농사를 장려 하셨다. 또 같은 해 五月(5)에는 곡식을 풀어 廣州(광주) 公州(공주)에 굶주린 百姓(백성) 救濟(구제)하셨다. 七月(칠월)에는 太子(태자) 仁謙(인겸)을 잃은 慘慽(참척)을 당하시고 太子(태자)에게 惠忠(해충)이란 詩號(시호)를 내리셨다. 前侍中伊湌悌恭(전시중이찬제공) 謀叛(모반) 하므로 잡아 죽이셨다. 惠忠太子(혜충태자)의 아드님 大河湌俊邕(대하찬준옹) 侍中(시중)으로 삼으시고 八年(8) 五月(오월)에는 王子(왕자) 義英(의영) 太子(태자) ()하셨으나 十年(10) 太子(태자)를 잃으셨다. 同年(동년) 七月(7)에는 奉恩寺(봉은사)를 세우셨고 十一年(11) 一月(1)에는 惠忠太子(혜충태자)의 아드님 俊邕(준옹)을 태자로 ()하셨다. 또 이해 四月(4) 旱魃(한발)이 심하여 ()께서 친히 죄수를 다스리시니 六月(6)에 비가 내렸다. 十二年(12) 봄에는 饑饉(기근)이 들고 疾病(질병) 流行(유행)하여 倉庫(창고)를 풀어 救濟(구제)하시었다. 十四年(14) 西紀(서기) 七九八年(798) 三月(3) 望德寺(망덕사)의 두 () 서로 마주쳤는데 이해 十二月(12) 二十九日(29) ()께서 돌아가셨으므로 元聖(원성)이라는 諡號(시호)하고 遺命(유명)에 따라 奉德寺(봉덕사) ()쪽에서 火葬(화장)하였다. 在位(재위)十四年(14)이시다. ()께서는 이 처럼 文治(문치)에 뛰어 나신 英主(영주)이셨는데 窮達之辯(궁달지변)으로 친히 身空訶腦歌(신공가뇌가)를 지으셨다.

 

() : 蓮達花夫人(연달화부인) 淑貞王后金氏(숙정왕후김씨) 角干(각간) 金神述(김신술)의 따님이시다.

 

二十二世 神武王(신무왕)

 

() 祐徵(우징) 八二二年(822) 四月(사월) (憲德王十四年(헌덕왕 14)) 金憲昌(김헌창) ()을 일으켰을 때 大河湌(대하찬)으로 아버님 均貞公(균정공)과 함께 三軍(삼군) 指揮(지휘)하여 공주금강고마나루(公州錦江態津)에서 크게 싸워 ()을 무찌르고 大勝利(대승리)를 거두어 亂離(난리) 平定(평정) 功勞(공로)가 있었다. 西紀八二八年(서기828) 一月(일월)에는 大河湌(대하찬)으로서 侍中(시중)이 되셨다가 西紀八三一年(서기831)(興德大王六年(흥덕대왕6)) 一月(일월)에는 侍中(시중) ()하셨다. 西紀八三四年(서기834)(興德大王九年(흥덕대왕9)) 一月(일월)에 다시 侍中(시중)이 되셨으나 다음해 西紀八三五年(서기835) 二月(이월)에 아버님 均貞公(균정공)(追尊成德王(추존성덕왕))께서 上大等(상대등)이 되시어 入相(입상)하시므로 侍中(시중) 벼슬을 辭任(사임)하셨다가 西紀八三六年 (서기836) 十二月(12) 興德王(흥덕왕)이 돌아가시자 아버님 均貞公(균정공)께서 王位(왕위)에 오르시려 하므로 金陽(김양)과 더불어 아버님을 도왔으나 亦是(역시) 王位(왕위)를 노리는 悌隆(제륭)(僖康王(희강왕) 宮中(궁중)에서 對決(대결)하여 싸운 結果(결과) ()여 아버님은 戰死(전사) 하셨으므로 神武王(신무왕)께서는 敗走(패주)하셨다. 이에 競爭者(경쟁자) (僖康王(희강왕) 新羅(신라) 第四十三代(43) 王位(왕위)에 올랐다. 西紀八三七年(서기837)(僖康王二年(희강왕2)) 四月(사월)에 아버님 均貞公(균정공)께서 失敗(실패)하여 怨望(원망)했다는 理由(이유) 僖康王(희강왕)편인 金明(김명), 利弘(리홍)() 謀害(모해)한다는 소식을 ()해 듣고 惑禍(혹화)가 미칠까 두려워 五月(오월) 家族(가족)을 거느리고 黃山津口(황산진구) ()하셨다. 그곳에서 배를 타시고 淸海鎭(청해진)으로 가시어 淸海鎭(청해진) 大使弓福(대사궁복)에게 依託(의탁)하셨다. 六月(6)에는 姑從妹夫(고종매부) 禮徵(예징) 河湌良順(하찬량순) 亦是(역시) ()하여 淸海鎭(청해진)으로 ()을 찾아 依持(의지)하였다. 마침내 僖康王(희강왕) 三年(3) 西紀八三八年(서기838) 에는 僖康王(희강왕)편에서 僖康(희강)을 세우고 均貞(균정) 敗死(패사)케한 金陽(김양), 利弘(리홍)() 反亂(반란)을 일으켜 僖康王(희강왕) 自決(자결)하고 金明(김명)이 스스로 王位(왕위)에 오르니 四十四代(44)閔哀王(민애왕)이다. 閔哀王(민애왕) 二年(2)西紀八三八年(서기838)二月(이월)에는 먼저 均貞公(균정공)을 도와 僖康王(희강왕)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失敗(실패)하였던 金陽(김양) 兵士(병사) 募集(모집)하여 淸海津(청해진)으로 ()을 찾아뵈었다. 이에 神武王(신무왕)께서는 閔哀王(민애왕) 簒位(찬위)하였다는 말을 듣고 淸海鎭大使弓福(청해진대사궁복)에게 이르시기를 [金明(김명)이 임금을 殺害(살해)하고 스스로 ()이되어 利弘(리홍) 軍部(군부) 枉殺(왕살)하였으니 같은 하늘아래서 살 수 없다. 원하건데 將軍(장군) 軍士(군사)를 빌려서 君父(군부) 怨讐(원수)를 갚을까한다]하니 弓福(궁복)이 이를 () 承諾(승낙)하고 軍士(군사) 五千名(5000)을 주면서 그의 親知鄭年(친지정년)을 시켜 軍隊(군대) 統率(통솔)하여 反亂(반란) 平定(평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해 十二月(12) 大王(대왕)께서는 金陽(김양) 平東將軍(평동장군)으로 삼으시고 閻長張弁鄭年(염장장변정년), 駱金(낙금), 張建英(장건영), 李順行(이순행) ()과 더불어 軍士(군사)를 거느리시고 武州鐵冶縣(무주철야현)에 이르러셨다. 閔哀王(민애왕) 大監金敏周(대독김민주)를 시켜 맞아 싸우게 하였다. 大王(대왕)께서는 駱金(낙금) 李順行(이순행)을 보내시어 騎兵(기병) 三千名(3000)으로 突擊(돌격)하니 殺傷(살상) 太半(태반)이었다. 다음해 一月(일월)에 밤낮으로 行軍(행군)하여 大邱(대구)벌에 이르니 閔哀王(민애왕)은 이소식을 전해듣고 伊湌大昕(이찬대흔)() 將兵(장병)으로 하여금 막게하였다. 그러나 大王(대왕) ()이 싸워서 크게 이기고 閔哀王(민애왕)편의 軍士(군사) 過半數(과반수)를 잃었다. 閔哀王(민애왕)은 서쪽 郊外(교외)의 큰 나무아래에 있었는데 左右(좌우)에 있던 閔哀王(민애왕) 殘黨(잔당)을 깨끗이 掃蕩(소탕)하였다. 이리하여 西紀八三九年()(서기839) 四月(4) 二十六日(26) 禮徵(예징)() 推戴(추대)를 받아 王位(왕위)에 오르시니 新羅(신라) 第四十五代(신라 제 45) ()께서는 卽位(즉위)하시자 先祖(선조)이신 伊湌禮英公(이찬예영공) 追尊(추존)하여 惠康王(혜강왕)으로 ()하시고 先考(선고)이신 均貞公(균정공) 成德大王(성덕대왕)으로 追尊(추존)하고 모후를 憲穆太后(헌목태후)로 높혔다. 王子慶膺(왕자경응) 太子(태자) 冊封(책봉)하시고 淸海津大使弓福(청해진대사궁복) 感義軍使(감의군사) ()하시고 食邑二千戶(식읍2000)를 내리셨다. 한편 利弘(리홍)은 두려운 나머지 妻子(처자)를 버리고 산속에 숨었으나 騎士(기사)를 보내어 斬殺(참살)하였다. 神武王(신무왕)께서는 전에 淸海鎭大使弓福(청해진대사궁복)에게 依託(의탁)하고 또 弓福(궁복) 軍士(군사)를 빌릴 때 장차 王位(왕위)에 오르면 弓福(궁복)의 딸을 王妃(왕비)로 삼겠다고 約束(약속)을 한바있어 王位(왕위)에 오르신뒤 弓福(궁복)의 딸로서 王妃(왕비)를 삼겠다고 하였으나 여러 臣下(신하)들이 ()하기를 [弓福(궁복) 出身(출신) 徵賤(징천)하니 그 딸로서 王妃(왕비)를 삼는 것은 옳지못하다] 挽留(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해 七月(7) ()께서는 不幸(불행)하게도 逆徒(역도) 利弘(리홍)의 화살에 등을 맞으신 꿈을 꾸시고 등창이 생겨서 苦生(고생)하시다 가 十一月(11) 二十一日(21)에 돌아가셨다.

 

() 경주 제형산 북쪽 동방리

 

() : 貞從太后(정종태후) 朴氏(박씨)의 따님이시다.

 

 

 

아래는 광산 김씨(光山 金氏)에 대한 정보입니다.

 

 

광산 김씨(光山 金氏) 에 대()하여

 

1. 광산 김씨(光山 金氏) 시조(始祖) : 김흥광(金興光)

2. 광산 김씨(光山 金氏) 유래(由來) :

 

광산 김씨(光山 金氏)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新羅) 왕실(王室)의 후손(後孫)으로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高麗)가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자 신라(新羅)의 비운(悲運)을 미리 알고 경주(慶州)를 떠나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 지금 전라남도(全羅南道)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隱居)함으로서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시초(始初)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그를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였으며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광산(光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김흥광(金興光)이 서일동에 터를 잡은 후() 고려조(高麗朝)에 와서 그의 후손(後孫)들 가운데 8명의 평장사(平章事)가 배출(輩出)되자 사람들이 그곳을 평장동이라 불렸다. 시조(始祖)의 아들 김식(金軾)은 각간(角干)을 지냈으며, 손자 김길(金佶)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高麗) 창업(創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었다. 김준(金峻)은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으며, 김책(金策) 964(광종 15)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과거제도에 급제하여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고려초기(高麗初期)부터 명문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始作)한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 형제(兄弟) ()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김광세(金光世)와 김광존(金光存)의 양대산맥(兩大山脈)으로 분파(分派)되었다.

 

 

3. 광산 김씨(光山 金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서부(北西部)에 위치(位置)한 지명(地名)으로 본래(本來) 백제(百濟)의 무진주(武珍州)이다. 신라(新羅)시대(時代)에 이르러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757(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眞聖女王) 때는 견훤(甄萱)이 이곳에 후백제를 세워 도읍(都邑)을 정()하기도 하였다. 940(고려 태조 23) 태조(太祖)가 후백제를 정벌하고 군현을 정비하면서 무진주(武珍州)를 광주(光州)로 개편(改編)하고 도독부를 두었다. 995(성종 14) 관제개혁 때 해양도(海陽道) 소속(所屬)이 되었다가 1259(고종 46) 기주(冀州: 일명 冀陽州)라 고쳤으며, 충선왕 때 이르러 화평부(化平府)로 강등(降等)되어 공민왕(恭愍王) 때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1430(세종 12)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성종 때에는 광산현(光山縣)으로 강등(降等)되었고, 연산군(燕山君) 때 주()로 환원(還元)되었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나주부(羅州府) 관할(管轄)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10년 광주면(光州面)이 되었고, 1935년 광주읍(光州邑)이 부()로 승격(昇格)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1988년 송정시와 함께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에 편입(編入)되었고, 1995년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광산구(光山區)로 개편(改編)되었다.

 

4. 광산 김씨(光山 金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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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광산 김씨(光山 金氏) 각파(各派) 항렬표(行列表)

문정공파

 

양간공파 

36世 鉉(0)

37世 永(0)

38世 洙(0)

39世 容(0)

40 (0)

41世 善(0)

42世 淳(0)

43世 東(0)

44世 煥(0)

45世 奎(0)

46世 鏞(0)

47世 淵(0)

48世 植(0)

49世 炯(0)

50世 坤(0)

 

 

문숙공파

 

36世 鎬錫(호석)

37世 源(원한)

38世 植榮(식영)

39世 熙(희광)

40世 中聲(중성)

41世 善(0)

42世 淳(0)

43世 東(0)

44世 煥(0)

45世 奎(0)

46世 鏞(0)

47世 淵(0)

48世 植(0)

49世 炯(0)

50世 坤(0)

  

 

낭장공파

 

36世 鳴(0)

37世 致 (0)

38世 鉉(0)

39世 洪(0)

40世 植(0)

41世 熙(0)

42世 圭(0)

43世 鐘(0)

44世 浩(0)

45世 東(0)

46世 默(0)

47世 載(0)

48世 錫(0)

49世 泰(0)

50世 柱(0)

 

 

사온직장공파

 

36世 鎬(0)

37世淳泳(순영)

38世 洙(0)

39世 榮(0)

40世 均圭(균규)

41世 鎰鍾(일종)

42世 承(0)

43世 東(0)

44世 然(0)

45世 基(0)

46世 善(0)

47世 漢(0)

48世 來(0)

49世炳(0)

50世 培(0)

 


 

5. 광산 김씨(光山 金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 강원도 철원군 서면 청양리

-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덕산리

-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보동리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광동

-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화양리

-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상두리

- 경기도 양주시 주내면 마전리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척영리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신연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강정리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정리

-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완화리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방두리

-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면 난전리

-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남성촌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회현리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서호리

-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금성리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농덕리

-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태백리

-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용산리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

-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옥곡리

-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일원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삼덕리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내동리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

- 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 시목리

-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 가배리

-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세천리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동천리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난산리

- 황해도 봉산군 서종면 대한리

 

 

6. 광산 김씨(光山 金氏) 중요(重要) 인물(人物)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고려초기(高麗初期)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3세손(世孫) ()로부터 8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배출(輩出)하여 명문(名文) 가문(家門)의 기반(基盤)을 이루었으며, 15세손으로 대광(大匡)에 오른 정()의 아들인 약채(若采약항(若恒약시(若時) 3형제(兄弟)()에서 더욱 번창(繁昌)하기 시작(始作)하였다.

 

장생(長生)은 예학(禮學)의 태두로서 그의 학문(學文)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아들 집()에게 계승되어 부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전무후무한 영광(榮光)을 누리기도 하였다. 집의 아우 반()의 여섯 아들은 모두 출중하고, 후손(後孫)이 크게 번창(繁昌)하여 광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청구영언을 낸 가인(歌人) 천택(天澤), 영의정(領議政) 상복(相福), 우의정(右議政) (), 이조판서(吏曹判書) 상휴(相休기만(箕晩기은(箕殷), 대제학 만기(萬基만중(萬重) 형제(兄弟) 등이 모두 이들의 후손(後孫)이다. 이 가운데 총융사(摠戎使)를 지낸 만기와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作家)로 유명(有名)한 만중의 후손(後孫) ()에서 많은 인물(人物)이 나와 사계 자손의 주축(主軸)을 이루었다.

 

예조판서(禮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진규(鎭圭)는 만기의 아들이며, 대제학(大提學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양택(陽澤)은 진규의 아들로서 3대 대제학(大提學), 형제(兄弟) 대제학(大提學)의 진귀(珍貴)한 기록(記錄)을 남기기도 하였다. 시문집(詩文集) 10권을 남긴 문인 춘택(春澤), 고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영수(永壽)는 진규의 형()이며, 판서(判書참찬(參贊)을 지낸 진구(鎭龜)의 후손(後孫)이다.

 

 

7. 광산 김씨(光山 金氏) 대표적(代表的) 인물(人物) 간편하게 정리해본다면,

 

김정() : 시조(始祖) 18대손(代孫)으로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랐으며, 아들인 김약채(金若采), 김약항(金若恒), 김약시(金若時) 3형제 대에서 광산김씨(光山金氏)가 번창(繁昌)하기 시작(始作)하였다.

김국광(國光) :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첫 정승(좌의정)을 지냈다.

김극성(克成) :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김장생(長生) : 김국광(金國光) 5세손(世孫). 예학(禮學)의 태두로서 그의 학문(學文)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아들 김집()에게 계승(繼承)되어 부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전무후무한 영광(榮光)을 누렸다.

김천택(天澤) : 가인(歌人). '청구영언'을 내었다

김만기(萬基) : 대제학(大提學), 총융사(摠戎使)를 지냈다.

김만중(萬重) : 김만기(金萬基)의 동생.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이다.

김진규(鎭圭) : 김만기(金萬基)의 아들.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김양택(陽澤) : 김진규(金鎭圭)의 아들. 대제학(大提學), 영의정(領議政)을 지내며 3대 대제학(大提學), 형제(兄弟) 대제학(大提學)의 진귀(珍貴)한 기록(記錄)을 남겼다.

김춘택(春澤) : 시문집(詩文集) 10권을 남긴 문인(文人)이다.

김영수(永壽) : 김진규(金鎭圭)의 형(). 고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265명의 문과급제(文科及第)()를 배출(輩出)했고 정승(政丞) 5, 대제학(大提學) 7, 청백리(淸白吏) 4, 왕비(王妃) 1명이다.

 

   

8. 광산 김씨(光山 金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광산김씨는 258,936가구 총 837,00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

 

http://www.kwangsankim.or.kr/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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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성덕왕은 경주김씨입니다.

이칭별칭 - 융기(隆基), 흥광(興光), 전광대왕(典光大王)

시대-고대/남북국/통일신라
출생 - 사망미상 ~ 737년
성격-국왕
출신지-경주
성별-남
본관-경주김씨
대표관직(경력)-신라 국왕(재위 702~73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본래 융기(隆基)였으나 뒤에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김흥광 = 성덕왕?

... 시조 김흥광성덕왕이 같은 인물인가요? 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광산 김씨의 시조 김흥광은 신문왕의 3번째 아들로 나오는데, 성덕왕의 이름이 김흥광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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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김흥광성덕왕이 같은 인물인가요? 답변 : 김흥광공이 성덕왕이 아니시고 신무왕의 부친이 성덕왕으로 추존되셨습니다. 부친님이 균정공(均貞公)입니다. 한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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