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영국,필리핀,칠레,태국

중국,영국,필리핀,칠레,태국

작성일 2004.10.25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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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들을
(1)위치 (2)인구 (3)크기 (4)역사 (5)우리나라와의 관계

이거로 써주세요

내공은 최대한 많이걸께요

내용은 한....

한 나라당
A4용지 1쪽씩이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쓰다보니 많이 됬습니다.(한나라당 한 1~2쪽?)
1.중국
①위치:아시아 동부
②인국:12억 8889만 2000명(2003)
③크기:957만 2900㎢
④역사: 동아시아에 위치한 중국지역의 문명과 그 발전의 역사. 중국 역사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상(商, 또는 은) 시기에 거북의 등껍데기와 동물뼈에 새긴 10여만 개의 갑골문과, 청동으로 제작한 용기 내부에 새긴 명각(銘刻)이다. 역사서는 기원전 100년경에 사마 천이 쓴 가 비교적 체제를 갖추고 잘 쓰여졌다. 중국인은 이를 모범으로 삼아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수세기를 거치며 당시 일어난 사건을 자세히 기록해 남겼다.

중국은 풍부한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발전해 동아시아 사회와 문화,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대에 완성된 동아시아문화권의 틀과 성격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중국은 세계 최초로 종이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지폐와 어음도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발달된 경제를 누렸다. 한편, 중국에 기반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대륙에 걸치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만들어 동서교류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과,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싸움으로 발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은 1949년 이후 공산국가가 되었으며 1980년대부터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1. 중국 문명의 시작
중국에는 역사시대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북중국에서는 50만 년 전에서 25만 년 전 사이에 베이징인이 살았고, 1만여 년 전에는 신석기 문화가 발달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양사오 문화와 룽산 문화이며, 여기에서 중국 문명이 점차 발달했다.

양사오 문화는 기원전 3000년경에 최전성기를 맞아 황하 중앙부에서 간쑤성까지 확대되었다. 얼마 후에는 룽산 문화가 발달해 중국 대부분 지역에 퍼졌다. 룽산인은 거주지에 성벽을 쌓았으며, 수수와 쌀을 재배하고 소와 양을 사육했다.

기원전 18세기에 룽산 문화에서 중국 최초의 왕조 상이 등장했다(최근에는 이보다 앞서 전설의 시대로 보는 하왕조가 실제 존재했다는 주장이 있다). 상의 중심지는 황하 유역으로, 세습 귀족이 통치하는 고도로 발달한 사회였다. 상은 뛰어난 청동기를 제작하고, 말이 끄는 전차를 개발했으며, 문자체계도 확립했다.

기원전 1122년경에 서부에 있던 주(周)가 상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256년까지 중국을 지배했다. 주 왕조는 초기에는 중심지역인 중국 북부 지역만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 지역은 반독립적인 제후에게 분봉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후들은 주 왕실에서 독립할 정도로 성장했으며, 상대적으로 왕실은 계속되는 분봉으로 갈수록 약해졌다. 기원전 771년에 주 왕실은 견융의 침입으로 수도 호경(지금의 시안)을 포기하고 동쪽의 낙읍(지금의 뤄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시대를 동주시대, 그 이전을 서주시대라고 한다.

주 왕실의 세력이 약해지자 처음에는 주 왕실을 대신해 중국을 괴롭히는 외적을 물리치는 다섯 패자가 등장했다. 그리고 다시 제후국 사이에 약육강식이 벌어지는 전국시대가 나타났다.

기원전 500년경에 공자는 새로운 도덕 규범을 제시해서 당시의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규범들을 대체했다. 이 시기 중국 사상의 발전은 많은 측면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 사상이 종교에서 철학으로 발전한 것과 비교된다.

춘추전국시대 동안 제후들은 전중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세력 다툼을 벌였다.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다른 제후국을 물리치고 강력한 중앙정부가 통치하는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수립했다. 진은 법가(法家)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며, 법가에 따라 개혁해서 중국 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법가는 권위, 행정의 효율성, 법률의 엄격성을 강조했다. 법가적인 행정과 유교 도덕 가치의 결합으로 중국은 이후 2000년 이상 존속할 수 있었다.

2. 제국시대

(1) 진(秦)·한(漢)
진은 중국을 통일한 지 불과 15년밖에 존속하지 못했지만, 중국 전통시대 내내 영향을 끼칠 만큼 큰 변화를 가져왔다. 진의 시황제는 지방 제후국들을 폐지하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도량형, 화폐, 문자체계를 표준화하고,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은 주대에 만든 짧은 성벽들을 이어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진은 무리한 군사 활동과 토목 공사를 벌여, 무거운 세금과 부역에 시달린 백성의 불만이 높아졌고, 기원전 210년에 시황제가 죽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은 순식간에 붕괴하고 한이 중국을 재통일했다. 한은 기원전 202년부터 서기 220년까지 존속했다.

한은 유가 사상을 통치의 철학 기반으로 했다. 귀족이 요직을 대부분 차지했지만, 관료의 등용과 배치에서 개인의 능력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주변 국가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육상 무역로인 비단길로 유럽과 교역하기 시작했다.

서기 8년에 왕망이 왕위를 빼앗고 신(新)을 세웠다. 그러나 25년에 광무제가 한을 재건해서 이때부터 후한(後漢)이 시작되었다. 후한 때에는 예술, 교육, 과학이 발달했다. 역사서와 사전류를 편찬했고, 고전 문학을 수집했다. 105년에는 종이를 발명했고,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다.

후한 말기에는 중앙정부에서 권력 투쟁과 부패가 점점 심해졌다. 게다가 강력해진 지방 호족들이 중앙정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220년에 한은 멸망했다. 이후 중국은 위(魏), 촉(蜀), 오(吳) 3국으로 분열했다가 진(晉)이 통일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민족이 중국 북부를 침략했다. 그 결과 304년부터 581년까지 단명한 이민족 왕조들이 북중국 전역 또는 일부를 통치했다. 한편, 남쪽에서는 317년부터 589년까지 6개의 왕조가 있었다. 수 세기에 걸친 분열기에 불교가 전역에 퍼져서 큰 영향을 미쳤다.

581년에 수(隋)가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하고 짧은 기간 통치했다. 수는 605년에 양쯔강유역과 북중국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대운하를 통해 남부에서 생산한 곡식과 산물을 좀더 쉽게 북부로 운반해서 북부의 정치·군사적 필요를 채웠다.

(2) 당(唐)
수를 이어 당이 618년에 들어서 300여 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다. 이 시기에 중국은 사회·경제·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은 1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아시아 전역과 지중해지역에서 외교관, 상인, 시인, 학자 들이 장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이백과 두보를 비롯한 뛰어난 시인이 활동했다. 불교는 여전히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중국인은 불교를 중국 현실에 맞게 개조해 선종(禪宗)과 정토종(浮土宗) 같은 불교 종파들이 발달했다.

그러나 755년에 안·사의 난이 일어난 이후 당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으며, 875년부터 884년까지 계속된 황소의 난으로 더욱 약해져서 마침내 907년에 망했다. 이후 960년에 송(宋)이 중국을 재통일할 때까지 5대 10국이 제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다.

(3) 송(宋)
송대 중국에는 두 가지 주요한 변화가 있었다. 먼저 수대에 시작한 과거제를 확립해서 사회·정치 권력이 귀족 가문에서 능력에 따라 선발한 관료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전통적인 유교의 도덕 규범에 불교와 도교의 요소와 결합한 성리학이 발달했다. 성리학은 주희가 완성했다. 송은 성리학을 국가 철학으로 확립했으며, 이후 왕조들도 성리학을 계속 지지했다.

송대에는 벼의 새 품종을 도입해서 남부에서는 1년에 2번이나 3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쌀 생산이 늘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어서 인구가 1억 명이 넘었다. 또한 과학 기술도 발달해서 나침반, 활판 인쇄술을 발명했다. 문자 해독 능력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면서 문학, 철학, 역사학이 발전했다. 송대 예술품 가운데 짙은 유약을 칠한 도자기와 풍경화는 특히 유명하다.

송은 북쪽 이민족의 잦은 공격에 시달렸다. 1127년에 송은 여진족이 세운 금(金)의 침입으로 북중국을 빼앗기고 수도를 변경(지금의 카이펑)에서 임안(지금의 항저우)으로 옮겼다. 이때부터를 남송(南宋)이라고 한다.

(4) 원(元)
13세기에는 몽골족이 중국으로 밀어닥쳤다. 몽골제국의 지도자 쿠빌라이 칸은 국호를 원으로 고쳤다. 원은 1279년부터 1368년까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중국을 지배한 이민족 왕조이다.

원은 유목민족 출신 왕조로, 한족이 대다수인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엄격한 신분 질서를 유지했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이 죽은 후에 황족 사이의 내분과 한족의 반란으로 약해졌다. 원은 14세기 중반에 홍건적의 난으로 멸망하고, 명(明)이 수립되었다.

(5) 명(明)·청(淸)
명이 중국을 통치한 1368년부터 1644년에 중국은 안정과 번영을 이룩했고, 동아시아에서 한족의 영향력이 되살아났다. 명은 중앙집권의 황제 독재 체제를 확립했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했다. 이 시기에 유학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일어나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양명학이 발달했다.

17세기 초에 여진족이 일어나 1616년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만주와 몽골을 통일해 국호를 청으로 고쳤다. 1644년에는 이자성이 명을 멸망시키자 만주족이 베이징으로 들어와 1912년까지 중국을 지배했다. 만주족은 중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기 전부터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 성리학을 지지했고, 명의 정치제도를 계승했다. 청은 1661년부터 1799년까지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으며, 중국의 영향력을 몽골, 티베트, 중앙아시아까지 확대했다. 상업, 농업, 수공업이 크게 발전하고, 인구도 급속히 늘어서 1700년의 1억 5,000만 명에서 1850년경에는 4억 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인구 증가율이 농업 생산량 증가 속도보다 빨라져 생활 수준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1760년대 이후에는 정치가 부패해서 청의 행정력이 약해졌다. 또한 이처럼 상황이 나빠지자 반만주족 비밀결사가 주도하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3. 근대 중국
(1) 서양 세력의 침략
19세기 이전까지 청 정부는 서양인에게 광저우에서만 무역할 수 있게 하고, 서양인과의 접촉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 교역에서 중국은 많은 양의 차와 비단을 수출한 반면, 수입 물품은 매우 적었다. 그러자 19세기 초에 유럽 상인들은 무역 손실을 막으려고 중국에 아편을 들여와 팔기 시작했다. 청 정부가 아편 수입을 불법화하자 유럽인은 아편을 밀수해 팔았다.

아편 밀수는 중국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고, 아편 구입으로 은(銀)이 많이 유출되어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839년 3월에 중국 관리들은 불법 무역을 중단시키려고 광저우에서 영국 상인에게서 아편 2만 상자를 몰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과 영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쉽게 승리했고, 1842년에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난징조약은 중국 최초의 불평등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양도했고, 5개의 항구를 개방해서 영국인이 체류하고 무역하게 했다. 또한 영국 관리에게 영국인이 관련된 범죄 사건을 다루고 심리할 권한(치외법권)을 주었다. 1844년에는 미국·프랑스와, 1851년에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이와 유사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은 한 국가에 허용한 권리는 다른 국가에도 주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따라서 서양 열강은 중국에서 특권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 같은 위치에 있었다.

1858년부터 1860년 사이에 중국은 서양 열강과 많은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로 중국은 무역항을 추가로 개방하고, 외국 선박이 양쯔강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으며, 외국 사절단이 중국 안에 살면서 재산을 가지는 것을 허용했다. 뿐만 아니라 열강은 베이징에 영구적인 외교 사무소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또 영국은 주룽반도를 획득했고, 러시아는 아무르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의 중국 영토를 차지했다.

(2) 태평천국운동
청 왕조는 19세기 중반에 발생한 반란들로 큰 위협을 받았다. 이 가운데 1851년부터 1864년까지 계속된 태평천국운동이 가장 컸다. 태평천국운동을 주도한 배상제회는 크리스트교 교리와 이상 사회에 대한 고대 중국 사상을 결합해서 사회를 개혁하려고 한 종교 비밀결사였다. 태평천국은 토지의 균등 분배를 주장하며 청 왕조와 유교에 도전했다. 그러나 태평천국운동은 지방 관리들이 조직한 향용의 활약과 외세의 개입으로 14년 만에 진압되었다. 서양 열강은 청 왕조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유지하기 위해서 청 정부를 지원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청 정부는 서양 문명의 장점을 인정하고 이를 배워 중국을 부강하게 하려고 양무운동을 전개했다.

(3) 청의 몰락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청은 양무운동의 보람도 없이 패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타이완섬을 일본에 할양해야 했다. 이후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는 붕괴하고 있는 청 왕조에 더욱 많은 이권과 영토를 달라고 강요했다. 중국은 유럽 각국의 식민지로 분할될 것처럼 보였으나 중국인은 강력한 민족적 단결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성장과 열강 사이의 경쟁으로 중국은 분할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한편, 열강도 어느 한 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1899년에 미국이 '중국에서 모든 국가가 같은 조건에서 중국과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자.'는 제안을 하자, 열강은 이를 승인했다. 이 정책은 열강 사이의 경쟁 때문에 가능했다.

한편, 중국이 열강에 분할될 위기에 처하자 개혁 변법하여 유신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 가운데 캉유웨이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같이 정치체제를 고쳐 국가를 부강하게 하자고 해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으나(무술변법), 보수파의 쿠데타(무술정변)로 실패로 끝났다.

(4) 의화단 운동
1890년대에 서양 세력과 크리스트교가 확산되어 중국인의 배외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산둥지방의 의화단은 부청멸양을 구호로 서양인과 크리스트교도를 공격하고 살해했다. 1900년에 의화단이 베이징까지 진출해 외국 공관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청 정부도 의화단운동을 지원해 서양에 선전포고했다. 이에 열강은 8국연합군을 조직해 베이징을 점령하고 의화단운동을 진압했다.

의화단운동 이후 청 정부는 정부와 경제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근대 학교를 세웠으며, 학생들을 외국으로 유학보내고 군대를 근대화했다. 나아가 중앙정부를 재조직하고 헌법을 답변확정할 것을 약속했으며, 각 성(省)이 의회를 구성하는 것을 허용했다.

(5) 신해혁명
청 왕조의 개혁 조치는 왕조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에는 공화국 수립 운동이 일어났다. 1905년에 혁명적인 공화주의 조직들이 제휴해서 중국동맹회를 결성했다. 쑨원이 중국동맹회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1905년부터 1911년까지 청 정부에 대항하는 무장 반란이 계속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내 1911년 10월 10일에 중국동맹회와 연합한 육군 부대가 우창에서 봉기했다. 이를 계기로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그 해 말에 이르면 남부와 중부의 모든 성이 독립을 선포했다.

4. 공화국시대의 중국

위안스카이와 막료들
쑨원은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그러나 군대와 각 지방에 기반이 없어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자리를 내주었다. 위안스카이는 국회를 파괴하는 등 반동적인 조치를 취했다.



(1) 중화민국
1911년 12월 말에 혁명 지도자들이 난징에서 회합을 가지고 중화민국을 수립하기로 해,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이 공화국의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청 정부는 위안스카이에게 공화주의자들을 분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쑨원과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1912년 2월 12일에 청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하고, 3월 10일에 위안스카이는 사임에 동의한 쑨원을 대신해서 총통이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공화주의자의 희망을 저버리고 신속하게 권력을 확대했다. 1912년에 중국동맹회는 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위안스카이와 대립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를 타도하려고(제2차 혁명)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쑨원을 비롯한 국민당 지도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해 중화혁명당을 조직했다.

위안스카이는 독재를 실시했고, 마침내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의 추종자들조차 황제가 되려는 데 반대했다. 여러 성에서 군벌들이 반제제(反帝制)운동(제3차 혁명)을 일으켜서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 군벌시대
1916년에 위안스카이가 죽자, 중앙정부의 권력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베이징에 총통이 있었지만, 북중국은 실제로 군벌이 지배했다. 1917년에 쑨원은 베이징 정부에 대항해서 남부 지역 군벌들의 지원을 받아 광저우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1922년에 이런 시도는 실패하고 내전이 확대되었다.

한편, 중국은 문화와 사회 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예를 들면, 이라는 잡지는 유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철학과 사회 이론을 제시했다. 1919년 5월 4일에 베이징에서 학생들이 파리평화회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파리평화회의에서는 패전국 독일이 제1차세계대전 동안 중국에서 가졌던 조차지들을 일본이 통제하게 했다. 이 시위로 을 비롯한 여러 신문, 잡지에서 제시했던 사상이 전파되었다. 5·4운동으로 민족주의가 성장했고, 정치 혁명이 촉발되었다.

1919년에 쑨원은 중화혁명당을 국민당으로 재조직하고 지지자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이때 최초의 공산주의 학생 조직이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결성되었다. 1921년에는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었으나 조직이 약해 코민테른은 국민당의 조직을 이용하고자 쑨원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공산당을 설득해 국민당과 제휴하도록 했다. 1924년에 국민당은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당을 개조하고(제1차 국공합작) 군벌을 제거하는 혁명을 수행하게 했다. 국민당은 북부의 군벌을 공격하려고 국민당군을 강화하고, 노동자·농민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25년에 쑨원이 죽고, 국민당의 지도권은 점차 군사령관인 장제스에게 넘어갔다. 1926년에 국민당은 북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1927년에 장제스는 국민당 내에서 공산당 세력과 국민당 좌파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당권을 장악하고 공산당과의 합작을 중단했다. 1928년에 국민당군은 베이징에 입성해 북벌을 완성하고, 1916년 이래 분열했던 중국을 단일 정부 아래로 통일했다.

(3) 국민정부
그러나 국민당의 국민정부는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으며, 일당 독재 체제였다. 공산당의 저항과 일본의 공격으로 국민정부의 통치권은 상당히 제한되었다.

1931년에 공산당은 혁명근거지를 마련하고 장시성 루이진에 중화소비에트 임시중앙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1934년에 공산당은 장제스의 군대에 밀려 루이진을 함락당하고 '대장정'에 나섰다. 1935년 말에 공산당 세력은 12,000km를 행군해 산시성(山西省)에 도착했다. 장정을 시작한 10만여 명의 공산주의자 가운데 수천 명만 겨우 살아서 산시성에 도착했다. 장정 기간 중 마오쩌둥이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장제스가 공산당과 싸우는 동안에 일본은 중국 점령지역을 점차 확대했다. 1931년에 일본은 중국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웠다. 이후 일본은 몽골 내륙과 북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군사적인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장제스는 일본에 대항하는 것보다 공산당을 분쇄하는 것을 우선시해서 일본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학생과 은 장제스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 것을 비판하며 시위를 벌이고 반일본협회를 조직했다. 한편, 서북지역에서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을 봉쇄하고 있던 군벌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1936년에 동북지방의 군벌 장쉐량은 시안에서 장제스를 납치했다(시안사변). 장제스는 내전을 끝내고 항일 통일전선을 결성할 것을 동의한 뒤에 석방되었다.

(4) 중일전쟁
1937년에 일본군은 중국과 전면전을 시작했다. 중국인이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1938년 말에 중국 동부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국민정부군은 쓰촨성으로 후퇴해 충칭을 전시 수도로 삼았다.

1941년 12월 8일에 중국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가담했다. 중국은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일본과 계속 전쟁 상태에 있어서 자원과 국력이 고갈되었다.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서 국민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국민당에 대한 지원도 줄어들었다.

공산당은 일본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정치·군사적으로 팽창했다. 공산당은 중국 북부의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워 넓은 지역을 장악했다. 공산당은 군대를 확대했고, 군인에게 음식과 피난처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조직했다. 또한 농촌에서 사회혁명을 시작해서,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토지를 농민에게 재분배했다. 1945년 8월에 전쟁이 끝났을 때, 공산당은 1억 명이 살고 있는 중국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지도자. 1946년부터 1949년까지 계속된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사진은 마오쩌둥이 1947년에 말을 타고 시안으로 이동하는 광경이다.

(5) 국공내전
1945년에 미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화해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은 타협을 통해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믿었다. 1946년 중반에 국·공이 전면전을 시작했다.

공산당의 월등한 군사 전략과 항일전쟁 과정에서 농촌에서 수행한 사회혁명으로 전세가 점차 국민당에 불리해졌다. 1949년 1월에 마오쩌둥의 군대는 톈진과 베이징을 장악하고 양쯔강을 건너 국민당원들을 남중국으로 밀어냈다. 10월 1일에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12월에 장제스와 추종자들은 타이완으로 피난했다.

5. 중화인민공화국

중국혁명
1949년에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본토에 공산정부를 세웠다. 사진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는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이다.



(1)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중국 본토에서는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 공산 통치를 시작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정부의 각 부처와 장관을 통제했다. 당시 소련은 중국에 군사·경제 원조를 해 큰 도움을 주었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에 대한 통치권을 확고히 하고, 경제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또 지주의 농지를 몰수해서 농민에게 재분배했다. 이때 수많은 지주가 살해당했다.

1953년에 중국은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착수했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산업은 해마다 15%의 빠른 성장율을 기록했다. 1957년에 이르러 모든 주요 산업은 정부 통제 아래 있었다. 농민에게는 농지를 협동농장에 합병하도록 강요하거나 설득했다. 그러나 농업 생산은 산업 생산보다 훨씬 천천히 증가했다.

(2) 대약진운동
대약진운동은 중국의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가리킨다. 대약진운동은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한 운동으로 1958년에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신념을 기초로 했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자본과 근대 기술이 부족한 현실을 무시하고, 노동자 수와 노동 시간을 늘려서 발전을 가속화하려고 노력했다. 정부는 농장 노동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협동농장을 인민공사에 병합했다. 노동자들은 시간외 노동을 했으며, 기계는 수리할 시간조차 없이 계속 가동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으로 중국 경제는 나빠졌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중국은 경제 불황과 식량 부족, 산업 생산량 감소로 어려움을 겪었다. 1962년에 이르러서는 경제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은 혁명이 추구한 가치들을 보존하면서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공산당 내부에는 '과격파'와 '온건파'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과격파는 모든 사람이 공동선(共同善)을 위해 사심없이 일하는 무계급사회를 건설하자고 요구했다. 반면 온건파는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과격파의 정책이 비현실적이며 근대화를 방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3) 중소분쟁
1960년대 초에 중국은 소련과 대립했다. 중국은 1956년 초에 소련이 서방과 평화 공존 정책을 펴는 것을 문제 삼아 소련을 비판했다. 중국은 서방과 전쟁을 치르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었고, 소련이 공산주의의 목표를 배반했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소련은 1960년에 중국에 대한 기술 지원을 중단했고, 1962년에는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에서 중국 지지를 거부했다.

1963년에 소련이 미국·영국과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하자, 중국은 소련이 반중국 책략에 가담했다고 비난하며 국교를 단절했다. 그 후 1989년이 되어서야 양국은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했다.

(4) 문화대혁명
1966년에 마오쩌둥은 공산당 과격파인 4인방을 지지하며 '문화대혁명'에 착수했다. 4인방은 당과 정부의 많은 최고위 지도자를 공산주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공직에서 축출했다. 또 학생과 젊은이로 '홍위병'이라는 군사 조직을 결성했다. 홍위병은 주요 도시에서 반혁명론자와 반마오주의자에 대항해 시위를 벌였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대학을 폐쇄했고, 교육 체계 전반이 무너졌다. 과격파는 상당수의 성과 시 정부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급진파들은 서로 경쟁하며 권력 투쟁을 벌여 폭력 사태가 자주 일어났다. 중국을 다시 혁명의 길로 올려놓으려던 마오쩌둥의 시도는 오히려 정부와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질서를 회복하고자 1967년에 군대를 소집해야만 했다. 1969년에는 공산당, 정부, 교육 체계가 점차 정상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내 4인방과 온건파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5) 서방과의 관계 개선
1970년대 초에 몇몇 서방 국가들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미국은 그때까지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를 인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다 1971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 모두가 국제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지지했다. 1971년 10월에 국제연합은 투표를 통해 타이완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연합에 가입하는 것을 승인했다.

1972년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과 회합을 가졌다. 이때 양국은 상하이성명을 발표하고 외교 관계를 맺었다.

(6) 덩샤오핑
1976년에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죽은 뒤 화궈펑이 주도하는 온건파와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이 이끄는 과격파 4인방 사이에 권력 투쟁이 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화궈펑파가 승리해서 화궈펑이 총리와 공산당 중앙의 주석이 되었다.

한편, 1977년에 개혁파 덩샤오핑이 복권되어 부총리와 공산당 부주석이 되어서 4개 현대화를 제시하고 개혁·개방을 주장하면서 신마오파인 화궈펑과 권력 싸움이 일어났다. 신마오파는 중국인은 마오쩌둥을 숭배했기 때문에 그가 제시한 모든 정책을 추종해야 한다고 믿었다. 개혁·개방파는 마오쩌둥의 지도력은 칭송하면서도, 그가 제시한 정책을 모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비판했다.

결국 1980년에 화궈펑은 권력을 잃고, 덩샤오핑이 중국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다. 화궈펑은 1980년에는 총리직을, 1981년에는 공산당 주석직을 사임했다.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이 총리에 취임하고 후야오방이 주석으로 선출되도록 지원했다.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은 모두 개혁·개방파였다.

덩샤오핑은 1980년에 부총리직을 사임했고, 1982년에는 그가 역임한 당 부주석직이 폐지되었다. 또 1989년에는 여타 당 요직과 정부 요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여전히 중국의 최고 실권자로 있었다.

개혁파는 외국과의 무역과 문화 교류를 크게 증대했고, 외국의 기술 지원을 받아 경제를 근대화했다. 1984년에 공산당은 기업 활동과 가격에 대한 정부 규제를 완화하는 경제 개혁을 시작했다.

(7) 톈안먼 사건
1986년 12월에 대학생들이 언론의 자유와 관료 선출을 위한 투표권을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학생들은 요구 사항을 관철하고자 여러 도시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를 수습하지 못한 후야오방은 1987년 1월에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쫓겨났다. 보수파 지도자들은 후야오방의 자유주의 견해를 비판했다. 1987년에 자오쯔양이 당 총서기가 되었고, 1988년 4월에는 리펑이 총리가 되었다. 1989년에 후야오방이 죽자, 학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베이징의 톈안먼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군대가 시위를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살해당했다. 자오쯔양은 학생들의 요구에 동정적이었다는 비난을 받고 축출되었으며, 장쩌민이 당 총서기에 취임했다.

중국 정부는 1989년에 톈안먼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시위를 벌인 많은 사람을 투옥했다. 1992년에 시위를 벌인 대다수 사람을 재판했고, 그 가운데 일부를 투옥했다. 그리고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재판받지 않고 감금되어 있던 반체제 인사들을 석방했다.

1993년에 리펑이 5년 임기의 총리직에 재선출되었고, 장쩌민은 국가 주석에 선출되어 최고위직을 3개나 맡게 되었다. 1989년에 덩샤오핑은 당과 정부의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1990년대 초까지 미쳤다. 덩샤오핑은 1997년에 사망했다.

(8) 홍콩
1984년에 중국과 영국은 신제의 조차기간이 끝나는 1997년에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중국은 1997년부터 50년 동안 홍콩이 고도의 자치를 누리며, 자유기업체제를 유지하는 것에 동의했다. 1990년에 중국은 홍콩 행정의 뼈대가 될 기본법에 찬성했다. 1997년 7월 1일에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9) 최근의 동향
1998년에 주룽지가 리펑에 이어 총리가 되었다. 주룽지는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국무원의 제1총리로 있었다. 리펑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위원장이 되었다.

1994년에 2014년 완공을 목표로 샨샤댐 공사가 시작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이 될 샨샤댐은 이창 서쪽에 있는 양쯔강에 건설될 예정이다. 이 댐이 완공되기 전에 1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새로운 곳에 정착해야 될 것이다. 댐 건설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댐이 완공되면 홍수를 막을 수 있으며 엄청난 수력을 이용해 전력을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댐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댐 건설로 인한 거주민들의 강제이주 문제, 댐 건설에 드는 막대한 비용, 환경오염 문제 등을 걱정한다.

1999년에 포르투갈은 1997년에 포르투갈과 중국이 체결한 협정에 따라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했다. 마카오는 홍콩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특별행정구가 되며, 독자적인 정치, 사법, 사회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오늘날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지속하면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힘쓰고 있다. 1998년부터는 장쩌민 주석을 정점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된 리펑과 경제통 주룽지 총리가 3각체제를 이루어 제2의 농촌개혁을 선포, 농촌경제 회생을 비롯한 중국 경제 활성화에 힘쓰고 있다. 2001년 11월에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의 가입을 승인받았다.

⑤우리나라와의 관계

(1) 역사적 변천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우리 나라는 선사시대 때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중국 역사에 우리 나라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전국시대(475∼221B.C.)의 기록으로, 이 기록에 우리 나라는 '조선'으로 언급되었다. 기원전 194년에는 한(漢)의 제후국이었던 연(燕)의 위만이 한반도에 위만조선을 세웠으나 한 무제의 침입으로 멸망했고, 대신 그 곳에 4군이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 낙랑군만이 약 400년간 계속되다가 고구려에 멸망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한 시기는 중국대륙에서 후한(後漢) 이후 삼국·남북조의 분열기를 거쳐 통일제국인 수(隋)·당(唐)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고구려·백제·신라는 중국에서 한문화와 불교 문화를 수입하여 국가 통치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는 한편, 인적·물적 교류를 활발히 했다. 특히 신라의 교류는 매우 활발하여 지금의 산둥반도지역에는 신라인의 거류지인 신라방, 신라소, 신라관 등이 세워졌다.
중국대륙에 가까이 있던 고구려는 중국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특히 통일제국을 이룬 수·당으로부터 대대적인 침략을 받았다. 수 문제는 대군을 이끌고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당 태종도 645년에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지만,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이를 물리쳤다. 그 후 당의 고종은 660년에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한반도를 통일한 후 신라와 당은 고구려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분쟁이 일어났으나, 신라는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당의 문화를 흡수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려가 건국된 시기는 중국에서 오대(五代)의 혼란기였다. 고려는 중국식 과거제를 답변확정하는 한편, 관료체제를 정비하는 등 문치주의를 표방했다. 또한 오대의 나라들과 문물의 교류와 조공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관계는 그 후 송(宋)과도 계속 이어졌는데, 송과는 962년에 처음으로 국교를 다진 이후 친선 외교를 펼쳤다. 한편, 고려는 북방에 있는 거란족, 여진족과도 지속적인 교섭을 가졌다. 13세기에 점차 강성해진 몽골족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침략했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면서까지 40년간 완강히 대항했던 고려는 1270년에 몽골과 화해했다. 그 후 몽골족이 세운 원은 고려 내정에 깊이 간섭했다. 이후 고려에는 호복과 변발 같은 원(元)의 풍습이 유행했으며, 원에서 성리학이 전래되어 이후 조선왕조의 이념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중국과의 관계는 곧 명(明)·청(淸)과의 관계이다. 조선 초기에 명과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과 명의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정과 사대부를 중심으로 점차 사대(事大)·숭명(崇明)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명의 원조를 계기로 이러한 사대주의 경향은 더욱 커져갔다.
1616년에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웠다. 그 뒤를 이은 후금의 태종이 1627년에 조선에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으며 1636년에 국호를 청이라고 고친 뒤 다시 조선에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명과 관계를 끊고 청과 군신 관계를 맺었다. 한편, 조선은 청을 통하여 청의 실용주의적인 학문 기풍과 서양의 학술과 문물도 접할 수 있었다. 로마가톨릭교가 역시 이 때 청에서 전래되었다.
19세기 말에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자, 청은 조선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 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켰다. 청은 그 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청일전쟁(1894∼95)에서 패배한 이후 조선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얼마 안 되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본토와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3·1운동 이후 상하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쑨원이 죽은 뒤 국민정부가 좌·우파로 분열되자 조선의 독립운동도 그 영향을 받아 좌·우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1945)으로 중국 내에서도 항일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며 조선의 독립운동은 중국의 항일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진행되었다.
(2) 중국과 한국
공산당이 집권한 1949년 10월 이후, 중국은 모든 친미(親美)국가를 적대국가로 간주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따라서 한국과의 외교는 단절되었고, 북한을 통해 한반도 정책을 결정했다. 그러나 중국은 1972년에 미국과 정상회담을 개최한 이후로 사회주의 노선에 충실했던 기존의 입장에서 변화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은 1973년에 대공산권 문호개방을 원칙으로 하는 6·23선언을 발표하여 중국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1978년 말 중국의 제11기 3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이후 중국은 개혁실용주의 노선과 대외개방정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대외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과 한국이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1983년에 중국의 민항기가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 때 중국은 직접 당국 관계자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했고,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과거와 다르게 변화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 일이 있은 후 중국과 한국의 교류는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확대되기 시작해 1990년까지 주로 체육, 관광, 친척 방문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1984년 2월, 데이비스컵테니스대회에 한국 선수단이 처음으로 중국에 파견된 것을 기점으로 1986년에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1988년에 서울 올림픽대회에 중국이 참여하는 등 매우 활발한 체육 교류가 이루어졌다. 한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를 계기로 중공이란 호칭 대신 '중국'이라는 명칭을 공식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이 1979년에 중국산 무연탄을 수입해 한중 간 간접무역을 개시한 이래로 양국 간의 경제 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985년에 한국은행은 대중국 투자를 허용했으며, 1988년 10월에 중국 광저우교역회가 한국 기업을 초청했다. 또한 1989년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다. 1988년에 한국 정부는 중국 관광 금지를 해제했으며, 1989년 6월 한중 해운 정기 직항로가 개통되었다. 1990년에는 중국행 우편 직송이 개시되었다. 1990년에 중국은 한국 기업의 베이징 사무소 설치를 허가했고, 1990년 10월에는 양국이 한중 무역대표부 상호 설치 합의서에 조인했다. 1991년 이후로 양국의 교류는 한층 발전해 1991년 초에 대한무역진흥공사는 베이징에 대표부를 개설했고, 그 해 10월에는 최초로 양국 외무장관 회담이 열렸다.
마침내 1992년 8월 24일, 양국은 베이징에서 한중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한중 국교 수립은 이로써 두 나라 사이의 지난 40여 년에 걸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남북한 통일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냉전시대의 마지막 유물인 동북아시아 냉전체제를 끝내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한 마지막 외적 장애가 제거되었다는 민족사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국교가 수립되고 통상이 본격화되면서 중국과 한국 간의 교역량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특히, 국제경쟁력을 상실한 한국의 제조업체들은 임금이 싼 중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한중 양국 간의 교역량은 1997년에 236억 9000만 달러에 이르러, 중국은 미국과 일본에 이은 한국의 2대 교역국이 되었고, 한국도 중국의 3대 교역국에 들게 되었다. 한국은 중국에 자동차, 철강, 유기화학 제품, 섬유직물과 전자 제품 등을 수출하여 중국에서 신발, 의류, 농산물, 광물염료 따위를 수입한다. 중화학공업 제품 수출과 원자재, 경공업 제품의 수입이라는 상호 보완적 교역 구조를 이루고 있어 양국 간의 교역 증대가 예상되고 있다.
한편, 오늘날 중국의 경제성장률과 경제적 잠재력은 중국이 향후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더욱 높게 하고 있어, 한국으로 하여금 상당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979년에 개혁과 개방정책을 표방한 이래로 중국은 연평균 9%라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룩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93년에 13%, 1994년에 11.8%의 고도 성장을 이룩하기도 했다. 무역 규모 면에서는 1994년에 약 2370억 달러로 세계 11위의 교역국이 되었고, 무역 수지도 1997년에 403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미국의 랜드연구소는 2015년에 중국의 국내총생산이 미국을 앞지를 것이며, 군사 예산도 2006년 이후에는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이 1993년에 12억 달러, 1994년에 7억 4000만 달러, 1995년에 17억 달러, 1996년에 28억 달러, 1997년에 34억 달러의 흑자를 내고 있지만, 미래에 대해서도 낙관할 수만은 없다. 한국의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사이 중국이 한국을 앞질러 세계 대국으로 발전할 경우, 한국은 국제경쟁력도 상실하고 한국의 시장을 모두 중국에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산 전자 제품이 대규모로 한국에 수입되고 있고, 국제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얻고 있는 중국 제품들의 확대는 이러한 우려를 가중시키고 있다. 한국으로서는 중국을 또 다른 경쟁자로서 인식하고, 국제경쟁력 확보를 위한 지속적인 기술 개발과 혁신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3) 중국과 북한
1949년 10월 6일, 북한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중국은 1950년 10월에 6·25전쟁에 북한측의 지원군으로 참전함으로써 혈맹 관계를 맺었다. 1961년에는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해 양국 관계를 더욱 굳건히 했다. 중국은 1953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막대한 차관을 제공했다. 1960년대에는 북한의 제3세계 진출을 지원하기도 했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 소련의 분쟁이 가열되자 북한의 전략적인 지위가 점차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중국은 북한의 대남 전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북한에 대한 정치·군사·경제 분야의 지원을 활발히 전개하여 1971년에는 무상군사원조협약을 체결했다.
1972년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미중 관계가 급진전되자,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멀어졌다. 그러나 1975년에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고, 1978년에는 화궈펑(華國鋒)과 덩샤오핑이 각각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우호적인 기존의 관계를 재개했다. 그러나 1978년에 중국이 개혁 실용주의 노선과 개방정책을 답변확정함으로써 중국의 대외정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즉, 기존의 무조건적인 친북 일변도의 한반도 정책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 변화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남북한 관계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1992년에 한중 국교 수립으로 한반도에서 북한이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의 위치를 크게 위축시켜 동북아시아에서 현재의 균형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한중 국교 수립으로 북한의 국제적 지위에 손상을 입히기는 했으나, 북한과의 유대 관계를 계속 발전시키는 가운데 북한의 대내외 정책 변화를 유도하여 북한이 새 위상을 정립하도록 적극 후원한다는 것이 중국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이러한 중국의 입장은 최근의 북한 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태도나 황장엽 망명 사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북한은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한층 더 높아졌다. 특히 교역 면에서 중국은 북한의 최대 통상국이다. 그러나 양국 간의 교역량은 남한에 비해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이는 낮은 성장률과 연이은 수해 및 고립 외교 등으로 악화된 북한의 경제 사정에서 기인한다. 북한은 경제난의 악화로 중국의 일방적인 원조만을 기대할 뿐, 수출할 물품들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1년에 한국과 중국 간의 통상액이 58억 달러에 이르렀던 반면, 북한과 중국 간의 교역 규모는 6억 달러에 머물렀던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997년 6월에 중국은 극심한 북한의 식량난을 돕고자 중국 화폐로 2만여 위안의 식량을 원조하기로 했다.
중국은 우리 나라의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위치에 있다. 더욱이 북한이 경제·군사적으로 중국에 의존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북한 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원하지 않고 있기에 북한의 무력 사용에 대해 강력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결국 북한이 많이 의존하고 있는 중국의 행보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함께 평화적인 통일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앞으로도 계속 중국과 유대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여 북한을 개방과 개혁으로 유도하는 데 중국의 역할이 자못 클 것으로 기대된다

2.영국
①위치:유럽 대륙 서쪽 북대서양
②인구:5916만 4000명(2003)
③크기:24만 4101㎢
④역사:유럽 서쪽에 있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로 이루어진 섬나라 영국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역사. 원주민, 켈트족, 로마인, 앵글족, 색슨족, 바이킹, 노르만족 등이 수 세기에 걸쳐 혼합된 문화를 만들었으며, 16세기부터 급속히 발전해 강국으로 성장했다. 특히 의회 정치와 산업혁명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801년에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의 통합 왕국에 아일랜드를 포함한 연합 왕국(United Kingdom)을 형성했다. 나중에 남아일랜드는 아일랜드공화국으로 독립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등에 식민지를 건설해서 전세계의 1/4을 차지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식민지의 독립과 자치권 획득으로 제국은 해체되었다.

1. 고대 영국의 형성
(1) 선사시대
고고학자들은 영국이 유럽과 이어져 있던 약 50만 년 전에 원시인류가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기원전 7만 년경의 빙하기에 모두 사라지고 이후 현생인류가 건너간 것으로 본다.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빙하가 녹자 기원전 5000년경에는 영국과 대륙을 연결하던 육지가 물에 잠겼다. 기원전 4000년경에는 대륙에서 신석기 문화를 가진 이주민이 들어왔다. 이들은 시장이나 회합 장소로 생각되는 헨지를 만들었으며, 무덤과 같은 거석기념물들을 만들었다. 이것은 신석기인이 수학과 천문학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기원전 3000년부터 기원전 2500년 사이에는 네덜란드, 에스파냐, 포르투갈에서 구리를 사용하는 민족이 들어왔다. 청동기인은 바퀴와 쟁기를 사용했고, 부유한 계층이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700년 이후 켈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철기를 가지고 영국으로 들어왔다. 켈트족은 우두머리 전사가 통치했고, 요새와 집을 짓고 가축을 길렀다.

(2) 로마시대
로마는 카이사르가 기원전 55년과 기원전 54년 두 차례에 걸쳐 켄트에 상륙한 뒤에 100년이 지나서야 남부 지역(지금의 잉글랜드)을 점령했다. 그 뒤 350년 동안 이 지역은 로마의 속주였다. 서기 120년경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픽트족을 비롯한 다른 부족의 침입을 막으려고 잉글랜드 북부에, 솔웨이만에서 타인강에 이르는 장벽(하드리아누스의 벽)을 쌓았다. 로마가 점령지에 건설한 도시에는 포룸이라는 시장이 있었고, 그 주변에 공회당, 목욕탕, 신전 등이 있었으며 나무나 벽돌로 집을 지었다.

4세기에 독일에서 온 색슨족이 브리튼섬의 남동부 해안을 약탈했고, 368년에는 픽트족이 하드리아누스의 벽을 대부분 파괴했다. 5세기에 색슨족, 앵글족, 주트족 등 게르만족이 침입해 로마 문화를 파괴했기 때문에 브리튼섬에는 로마 문화의 잔재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2. 중세 영국의 발전
(1) 앵글로색슨시대
덴마크와 독일 북부에서 살고 있던 앵글로색슨족과 주트족은 449년부터 영국에 정착해 613년경까지 오늘날의 영국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 뒤 이스트앵글리아·에식스·켄트·머시아·노섬브리아·서섹스·웨섹스라는 앵글로색슨 7왕국이 발전했다. 9세기에는 에그버트가 다스리는 웨섹스가 지배 왕국이 되었다.

앵글로색슨의 왕들은 초기에는 세인(thane)이라고 하는 귀족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는 군사 지도자였으며, 9세기에는 위턴회의의 도움을 받아 통치했다.

앵글로색슨족은 영어의 기초를 이루는 독일어에 속한 언어를 사용했다. 초기에 대부분의 앵글로색슨족은 자연신을 믿었으며, 켈트족이 사는 지역에만 크리스트교가 남아 있었다. 590년경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남부의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킨 후 50년 동안 로마 수도사들이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켰다. 그래서 켈트족 크리스트교와 로마가톨릭이 공존하다가 휘트비종교회의에서 켈트족이 교황의 최고권을 받아들였다.

앵글로색슨 문학의 초기 형태는 시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서사시는 8세기경에 쓴 로, 백성을 보호하려고 용을 비롯한 괴물과 싸우는 왕을 묘사했다. 산문으로는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비드의 가 유명하다.

(2) 바이킹의 침입
8세기 말에 덴마크 출신 바이킹이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침입했다. 덴마크 바이킹인 데인족은 870년까지 웨섹스를 제외한 모든 왕국을 정복했다. 그러나 웨섹스의 앨프레드 대왕이 데인족의 침입을 막고 그들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 데인로(Danelaw)라는 지역에만 거주하게 했다. 1016년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인 크누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크누트가 1035년에 죽고 제국이 무너지자 에드워드 참회왕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에드워드 참회왕이 죽자 웨섹스 백작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노르망디공 윌리엄은 에드워드 참회왕의 먼 친척인 자신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1066년 10월 14일에 벌어진 헤이스팅스전투에서 해럴드 2세는 윌리엄에게 패했다.

(3) 노르만정복
1066년에 왕위에 오른 윌리엄 1세는 영국을 체계적으로 재조직했다. 윌리엄 1세는 세금을 징수했으며, 봉신에게 토지를 하사했다. 그 대가로 봉신은 기사로서 군사적 의무를 제공해야 했다. 이같은 토지와 군사적 봉사가 결합된 토지 보유 형태를 봉건적 보유라고 한다. 봉건제는 앵글로색슨시대부터 있었지만, 노르만족의 지배 아래서 더욱 조직화되었다. 1086년에 관리들은 과세 자료로 활용하려고 각 장원의 소유자, 규모, 가치를 조사해 둠즈데이북을 작성했다. 윌리엄 1세의 아들인 윌리엄 2세와 헨리 1세도 강력한 통치를 계속했다.

그러나 헨리 1세가 죽은 뒤에 내란을 거쳐 헨리 1세의 외손자 헨리 앙주가 헨리 2세로 왕위에 올랐다. 헨리 2세는 플랜태저넷왕가를 열었다. 헨리 2세를 이어 1189년에 즉위한 리처드 1세는 십자군원정에 참여해 국고를 낭비했고, 동생 존왕은 봉신들과 충돌하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지를 많이 잃었다. 한편, 존왕이 권력을 남용하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자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고 1215년에 왕에게 귀족의 요구 사항을 담은 대헌장을 승인하게 했다. 존의 아들 헨리 3세 때 몽포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몽포르는 봉신과 주교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최초로 시민을 참석시켰다. 이것은 나중에 의회의 발전을 가져왔다. 헨리 3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1세는 반란을 분쇄하고, 중요한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의회 발전에 공헌했다. 1295년에 소집된 모범의회는 각 주에서 2명의 기사와 각 자치시에서 시민대표 2명을 소집해서 성직자­귀족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그리고 1282년에는 웨일스를 합병했으며, 잠시 스코틀랜드를 지배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에게 밀려 왕위에서 물러났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내의 영토를 회복하려고 프랑스와 백년전쟁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영주는 국왕의 봉신으로서 장원을 가지고 있었다. 장원의 토지 일부는 이동이 자유로운 자유농이 경작했고, 나머지는 이동이 부자유스러운 농노가 경작했다. 장원의 경작지는 삼포제로 이루어졌고, 윤작을 했다. 경작지 바깥으로 공동방목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숲에서 땔감을 구하고 목초지에서 사료를 재배했다. 겨울에는 목초가 부족했으므로 농민은 가을에 가축을 도살해서 소금에 절여 저장했다.

마을마다 교회가 있었고 도시마다 주교구가 있었다. 교회는 많은 영지와 장원을 소유해서 부유했으며, 교회와 국왕은 주교 서임권을 놓고 투쟁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국왕의 자문회의가 최고 재판소였다. 한편, 노르만족 토지 보유자들은 각기 자신의 법정을 갖고 있었고, 교회도 교회 법정이 있었다. 앵글로색슨 법에서는 재판을 받는 사람이 결백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선서를 해주면 무죄가 입증된 것으로 간주했으며, 죄가 있는 사람은 시죄법(試罪法)으로 재판받았다. 시죄법은 13세기에 배심원 재판으로 대체되었다. 헨리 1세는 형사 재판에 대한 왕의 통제를 강화하려고 주법정에 국왕의 관리를 파견했다. 헨리 2세는 국왕법정을 열기 위해 지방에 순회재판관을 파견했다.

(4) 봉건제의 쇠퇴
1337년부터 1485년에 걸친 장기간의 전쟁으로 전술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장기간의 전쟁은 많은 병사를 필요로 했고, 장궁을 가진 병사가 중무장한 기사보다 훨씬 효과가 있음을 입증했다. 따라서 국왕은 군사적 봉사보다는 용병과 무기 구입에 필요한 돈을 더 요구하게 되었다.

12세기 초부터 장원 보유자 가운데 부역 대신에 돈으로 지대를 지불하게 하는 사람이 생겼고, 영주는 이 돈으로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런데 14세기부터 15세기에 흑사병이 만연하여 영주는 노동력이 부족하고 임금이 높아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직영지 경영이 손해라고 생각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임대하거나 노동력이 적게 드는 목양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여전히 농노에게 노동을 강제로 시키는 영주도 있어서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1351년에 의회는 농업노동자의 임금을 동결하는 노동자조례를 통과시켰다. 이 법에 대한 불만으로 1381년에 와트 타일러가 잉글랜드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중세 잉글랜드의 주요 수출품은 양모였다. 그러나 1336년에 에드워드 3세가 모직업을 발전시키려고 플랑드르에서 기술자를 데려온 후에 양모 수출은 쇠퇴하고 모직물 수출이 증가했다. 교역의 발전은 도시의 성장을 가져왔다. 도시는 국왕이나 영주에게서 특허장을 받았다. 도시민은 특허장으로 봉건적 부담에서 해방되고 자치권을 얻었으며, 길드를 형성해서 상업과 공업을 통제했다.

(5) 백년전쟁과 장미전쟁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의 원인은 영국이 프랑스 내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데 있었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이 우세했다. 1429년에 잔 다르크가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이자 영국군은 잔 다르크를 생포해 1431년에 화형했다. 그러나 잔 다르크 처형 이후에도 프랑스는 계속 승리를 거두어 칼레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회복하고 1452년에 전쟁을 끝냈다.

백년전쟁이 끝난 지 2년 뒤에 랭커스터가와 요크가가 왕위 계승권을 놓고 장미전쟁을 일으켰다. 1461년에 워릭 경이 이끄는 요크가는 랭커스터가의 헨리 6세를 쫓아내고 자기 가문의 사람을 에드워드 4세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그 뒤에 즉위한 에드워드 5세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숙부가 리처드 3세로 왕위에 올랐으나 지지를 받지 못했다. 1485년에 랭커스터가의 헨리 튜더가 군대를 이끌고 웨일스에 상륙해 보스워스전투에서 리처드 3세에게 승리해 헨리 7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장미전쟁도 끝이 났다.

3. 절대주의와 영국혁명
(1) 튜더왕가
튜더왕가는 평화 유지를 바라는 새로운 상인 중간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귀족 세력은 장미전쟁으로 약화되었고, 중간계급 출신 관료가 왕권을 강화했다. 헨리 7세는 튜더왕가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성실청을 세워 봉신들의 사병 소유를 금지했다. 세금 징수를 엄격히 하고 부자에게서 대부받아 재정을 확보했으며, 치안판사를 통해 지방 행정을 통제했고, 대외 정책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541년에는 아일랜드 의회가 헨리 7세를 아일랜드의 왕으로 받아들였다.

헨리 8세는 교황에게서 이혼에 대한 동의를 얻지 못하자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1534년에 의회는 영국 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폐지하고 헨리 8세를 영국국교회의 우두머리로 하는 수장법을 통과시켰다. 헨리 8세가 신교에 우호적이지 않았으므로 예배식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1530년대에 헨리 8세는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해 재정을 확보했다.

1547년에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즉위했다. 그 뒤 에드워드 6세가 16세의 나이로 죽고 즉위한 메리 1세는 로마가톨릭교도로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했다. 메리 1세의 치세 동안 프로테스탄트 300여 명이 화형당했다. 그래서 메리 1세를 '피의 메리'라고 부른다. 1558년에 메리 1세가 죽자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라 가톨릭교회로의 복귀를 철회하고 영국을 해상강국으로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1세 때 영국은 번영의 시기였다. 직물업자들은 선대제를 이용해 직물업을 확장시켰다. 이에 따라 양모 값이 오르자 몇몇 지주들은 소작인을 쫓아내고 목양장을 만들었고, 쫓겨난 소작인들은 빈민으로 전락했다. 1601년에 의회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려고 빈민구제법을 통과시켰다.

헨리 7세 때부터 영국은 이미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도록 지원했고, 해군력을 증강했다. 엘리자베스 1세 때에는 많은 선원이 새로운 인도 항로를 발견하려고 했으며,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와 교역했다. 또 서아프리카의 노예 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1567년에 호킨스가 에스파냐 선박에 공격당한 뒤, 많은 잉글랜드 선원이 해적이 되어 에스파냐 선박을 공격했다.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적대 관계는 전쟁으로 발전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를 내세웠으나 잉글랜드의 해군에 패했다. 영국 선원들은 탐험을 계속해서 17세기 초에는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세웠다.

(2) 영국혁명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사촌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아들이 제임스 1세로 즉위했다. 즉위 전에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왕이었다. 두 왕국은 각자의 의회와 법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임스 1세는 많은 문제에 부딪혔다. 1605년에 로마가톨릭교도들은 제임스 1세 암살 음모를 꾸몄고, 청교도는 아직 형식적인 예배식을 갖고 있는 영국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다. 의회 내의 청교도들은 종교개혁과 의회의 권한 증대를 계속 요구했으나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1625년에 제임스 1세의 아들이 찰스 1세로 즉위한 뒤에 왕과 의회의 대립은 격화되었다. 1628년에 의회는 권리청원으로 의회의 통제권을 확대하려고 했다. 그러자 찰스 1세는 1629년부터 1640년까지 의회 없이 통치하며 세금을 올렸다. 종교정책에서 찰스 1세는 엄격한 국교주의를 표방한 캔터베리 대주교 로드의 정책을 지지해서 공식 기도서를 강요했다. 이에 따라 종교 의식에서 공식 기도서를 사용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처벌했다. 이런 정책으로 많은 청교도가 북아메리카로 떠났다.

한편, 1637년에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장로교에까지 기도서 사용을 확대 적용하자 스코틀랜드인은 국민맹약을 맺어 자신의 종교를 지켰다. 그러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군대를 파견하려고 전비 마련을 위한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가 세금 인준을 거부하자 곧 의회를 해산했다(단기의회).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에 찰스 1세는 의회를 다시 소집했다(장기의회). 의회는 찰스 1세에게 반대하며 스트래퍼드 백작과 로드 주교를 처형하고, 성실청을 폐지했으며, 의회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걷지 못하도록 했다. 찰스 1세는 이에 격분해 의회의 결정 사항을 거부하고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결국 1642년에 내란이 일어났다.

의회를 지지하는 의회파와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의회는 찰스 1세가 합리적으로 통치하고 부패한 측근들의 말을 듣지 않기를 원했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 신형군의 결정적인 승리로 찰스 1세는 패해 1649년에 처형당했다.

(3) 공화국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군대의 지지를 받은 크롬웰이 실력자가 되었다. 크롬웰은 수평파라는 민주주의적 집단을 탄압했고, 군대를 이용해 장기의회를 해산했다. 1653년에 호국경정부라는 군사 독재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해상정책에서는 성공했다. 1651년에 잉글랜드 선박으로만 물품을 수입하게 하는 항해법을 제정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와 대립했다. 또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와의 교역권을 두고 1655년부터 1659년까지 에스파냐와 싸웠다. 그러나 군사 통치와 무거운 세금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1658년에 크롬웰이 죽자 멍크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해 의회를 소집했다. 1660년에 의회는 왕정을 복고시키고 찰스 1세의 아들을 찰스 2세로 즉위시켰다.

(4) 왕정복고
찰스 2세는 사회의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고, 커피하우스가 처음으로 생겼다. 런던은 더욱 번잡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국교회 기도서의 사용을 강요하는 통일법이 통과되었고, 클라렌든법으로 비국교도의 설교가 금지되었다. 로마가톨릭에 대한 적대감이 지속되어 1673년에 의회는 국교도에게만 관직을 개방한다는 심사법을 통과시켰다.

1685년에 찰스 2세가 죽고 아들 제임스 2세가 즉위했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로서 로마가톨릭교도와 청교도에 대한 차별을 폐지한다는 관용선언을 해서 청교도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주교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그들을 투옥했다. 의회는 로마가톨릭으로 복귀할 것을 두려워하며 신교도인 제임스 2세의 두 딸이 왕위를 계승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1688년에 제임스 2세가 아들을 낳자 의회 지도자들은 제임스 2세의 큰딸 메리의 남편인 네덜란드의 오라네공 빌렘에게 영국을 공격하라고 부탁했다. 빌렘은 도싯에 상륙해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런던으로 행진했으며,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망갔다.

(5) 명예혁명
1688년의 사건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치자를 교체했기 때문에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의회는 빌렘(윌리엄 3세)과 메리를 공동 왕으로 추대했고, 왕권을 제한하는 권리장전을 통과시켰다. 권리장전은 로마가톨릭교도가 왕위를 계승할 수 없도록 했고, 의회가 자주 소집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의회는 로마가톨릭교도를 제외한 비국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관용법을 통과시켰다. 1701년에는 왕위 계승자가 프로테스탄트여야 한다는 왕위계승법도 통과시켰다.

1702년에 윌리엄 3세가 죽고 메리의 여동생 앤이 계승했다. 앤 여왕의 치세에 휘그당과 토리당이 성장했다. 1707년에는 연합법으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그레이트브리튼통일왕국이 되었다. 스코틀랜드는 대표를 의회에 파견하기는 했으나 법과 교회는 그대로 유지했다.

4. 산업혁명과 해외 팽창
(1) 하노버왕가
1714년에 앤 여왕이 죽자 제임스 1세의 외손자인 하노버 선제후가 조지 1세로 즉위해서 하노버왕가가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자란 조지 1세는 영어를 잘 할 줄 몰라서 월폴이 내각과 의회를 운영했다.

하노버왕가시대에는 대내적으로 스튜어트왕가의 반란이 두 차례 있었고(코바이트의 난), 대외적으로는 1739년에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으로 에스파냐·프랑스와 전쟁을 치렀으며, 1756년에는 프랑스와 식민지 무역에 관한 갈등 때문에 7년전쟁 을 치렀다. 7년전쟁이 끝난 뒤 1763년에 맺은 파리조약으로 영국은 식민지 무역에 대한 우위권을 인정받았다. 18세기 중반까지 영국의 해외무역은 계속 확대되었다. 영국은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생산물을 가공해 비싸게 팔았다.

영국은 북아메리카에 캐나다를 포함한 13개 식민지를 갖게 되었다. 1765년에 의회는 인지법을 통과시켰고, 식민지 주민은 여기에 반발했다. 결국 의회가 인지법을 철회하기는 했으나 계속 세금을 요구했고, 식민지 주민은 반란을 일으켰다. 1775년에 미국혁명이 시작되었고, 1776년에 식민지 주민은 독립선언을 했으며, 1783년에 독립을 인정받았다.

1798년에는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1801년의 연합법으로 아일랜드의 의회가 폐지되고, 그레이트 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성립했다.

한편,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 영국인은 혁명을 자유의 승리로 간주해 환영했다. 그러나 혁명이 과격해지자 1793년에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해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1815년이 되어서야 전쟁을 끝냈다. 영국은 나폴레옹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럽에서 정치적 우위를 차지했다.

(2) 농업혁명
인구 증가와 도시 성장으로 식량 수요가 증가해 농업이 수지가 맞게 되었다. 지주들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삼포제 대신 4윤작을 했다. 4윤작에서는 2개의 농경지에는 곡물을 심고 나머지 2개에는 사료로 사용되는 순무와 클로버를 심었다. 조파기(씨뿌리는 기계)가 발명되었고, 가축의 품종도 개량되었다. 19세기 초까지 공유지를 분할하는 등 인클로저운동이 일어났다.

(3) 산업혁명
18세기 말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경제·기술상으로 거대한 변화를 겪었다. 1830년까지 영국은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변모했다. 산업혁명은 석탄으로 동력을 공급받는 기계에서 일어났으므로 석탄 산지를 중심으로 공업이 발전했다. 산업 발전은 수송의 개량을 가져왔고, 농기구의 개량은 생산량을 증대시켜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빈민의 주택문제와 노동조건을 악화시켰고, 실업이 증가하는 문제를 낳았다.

영국은 18세기 초부터 엄청난 기술 발전이 있었다. 1709년부터 1750년 사이에 다비가 목탄을 사용하지 않는 코크스 제련법을 발명했다. 그 영향으로 제철업이 석탄 산지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발전했다. 18세기 초에는 뉴커먼이 광산에서 물을 퍼올리기 위해 증기기관을 발명했고, 와트가 이를 개량해 동력으로 사용했다.

기계의 발명은 제철의 발달을 가져왔다. 기계는 면화공업에서 대규모로 쓰였다. 기계와 증기 동력을 사용하면서부터 공장이 세워지고,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면화 공장, 제철소, 도자기 제조소 등에서 일하게 되었다. 여성, 아동까지 포함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받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장시간 노동을 했다. 또한 주택, 위생, 급수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5. 영국의 개혁
(1) 차티스트운동과 선거법개정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부와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변화로 사회문제가 많이 생겼다. 19세기 초에 기계 사용으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자 러다이트라는 집단은 기계를 파괴했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몇몇 노동자들은 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조합 결성은 1824년까지 조합법으로 금지되었다. 한편, 농촌에서는 가점수업의 쇠퇴로 생활이 어려워졌다.

1815년의 경제 불황으로 더욱 급속히 사회 변화가 일어났다. 1819년에 맨체스터의 세인트피터스광장에서 노동자들이 개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으나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피털루학살). 그러나 개혁은 곧 이루어졌다. 1829년에 의회는 가톨릭에 대한 제한을 폐지하는 가톨릭해방법을 통과시켰다. 1832년에는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중간계급 대부분이 투표권을 획득했고, 주민이 없는 부패 선거구도 개정되었다.

1832년의 선거법개정에도 투표권을 얻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선거법개정을 요구했다. 이들은 보통선거 실시, 의원에 대한 봉급 지급, 의원의 재산 자격 기준 폐지, 인구 비례에 의한 선거구 결정, 그리고 해마다 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했다. 이들을 차티스트라고 한다. 차티스트는 1848년에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매년 선거 실시를 제외한 모든 요구가 그 뒤에 받아들여졌다. 1867년에는 제2차 선거법개정으로 도시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1884년의 제3차 선거법개정으로 농업 노동자가 투표권을 얻었다.

(2) 노동조건의 향상
새로운 공업도시의 발전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보건, 주택, 위생, 지방 행정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도시민의 생활 조건은 모든 면에서 열악했다. 1833년부터 1853년에 걸쳐 개정된 공장법은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며, 공장감독관을 두게 했다. 1842년 광산법은 여성과 소녀, 10세 이하 소년의 갱내 노동을 금지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영국인의 생활 조건이 향상되었다. 임금이 인상되고 다양한 공장법으로 노동시간이 단축되었다. 자치 의회는 공공 도서관, 목욕탕, 상수도의 건설 등 복지정책에 힘썼다.

한편, 19세기에 영국은 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했다. 1846년에 곡물법, 1849년에 항해법을 폐지했다. 노동조합에 대한 억압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으나 1851년에 숙련공들이 금속기술자협회를 만들어 성공을 거두자 다른 숙련공들도 유사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몇몇 조합이 1868년에 노동조합 총회를 결성했고, 1871년의 노동조합법은 노조 기금을 보호해 주었다. 1875년의 고용주와 노동자법은 파업 기간 중에 작업방해(picketing)를 인정했다.

(3) 정치상의 변화
1830년부터 1841년 사이에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휘그당이 집권했다. 1835년에 로버트 필은 토리당이 전통을 존중하면서 개혁에 동참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토리당의 이름을 보수당으로 바꾸었다. 이후 보수당의 디즈레일리는 '토리 민주주의'를 제창해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반면, 휘그당은 글래드스턴의 지도 아래 자유당을 결성했다. 자유당은 중산층과 비국교도를 대변했다. 20세기 초에는 노동조합과 페이비언이라고 하는 사회주의 들이 노동당을 결성했다. 노동당은 1893년에 최초로 의회에 진출했다.

1845년에 기근으로 아일랜드의 사정이 악화되자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의 행정을 개혁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진 특권을 폐지하고 지주가 농민을 쫓아내지 못하게 했다. 또 아일랜드에 자치를 부여하려고 했으나 1886년과 1893년에 아일랜드 자치법이 의회에서 거부되어 실패했다.

(4) 식민지 확대
영국은 1867년에 북아메리카법으로 캐나다를 자치령으로 만들고, 1900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1907년에는 뉴질랜드를 자치령으로 만들었다. 인도에서는 1857년에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이 항쟁을 진압한 후에 동인도회사를 통한 인도 지배를 끝내고 영국 왕이 직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보어전쟁을 치른 뒤 1910년에 남아프리카의 4개 지역을 통합해 남아프리카연방을 세웠다.

(5) 산업의 발달
19세기에 들어와 산업이 급속도로 확대되면서 영국은 세계 산업을 주도했다. 영국은 다양한 기술 발명으로 주도적 지위를 유지했다. 베서머가 발명한 저렴한 제련법 덕택에 철 대신 강철을 널리 사용했다. 1844년에는 전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866년에는 대서양에 전신 케이블을 설치했다.

수송과 통신 분야에서도 발전이 두드러졌다. 스티븐슨이 실용화한 기관차가 1830년에 최초로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를 달렸다. 증기기선이 등장했고, 1861년에는 말이 끄는 전차가 최초로 런던에 등장했다. 2년 후에는 지하철을 건설했고, 1883년에 최초로 전기전차가 등장했다. 1890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동 지하철이 생겼고, 1905년에는 런던에 처음으로 버스와 택시가 등장했다. 1879년에는 처음으로 전화 회사가 설립되었다.

6. 20세기 이후의 영국
(1) 제1차세계대전
1906년과 1910년 1월에 자유당이 집권했으나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당이 상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자유당은 2년 동안 3번 하원을 통과한 법률은 상원이 거부할 수 없도록 해 상원의 거부권을 제한하려고 했다. 상원이 여기에 반대했으나 1910년 12월 선거에서 자유당이 다시 승리하자 상원도 이 법안을 통과시켰고, 자유당은 사회 개혁을 계속 추진했다.

19세기 말에 독일의 등장으로 영국은 '영광스런 고립'이라는 전통적인 외교정책을 포기했다. 1904년에 영국은 프랑스와 영­프 협상을 맺었는데, 여기에 러시아가 가담해 1907년에 삼국협상이 이루어졌다. 1914년에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나고 체결된 베르사유조약으로 국제연맹이 창설되었고, 영국은 독일이 갖고 있던 아프리카 식민지를 차지했다. 그러나 전쟁은 영국에 심각한 경제문제를 가져왔고 세계 제국으로서의 영국의 지위를 흔들어놓았다.

(2) 아일랜드문제
1910년부터 자유당정부는 아일랜드 자치를 요구하는 아일랜드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다. 아일랜드자치법은 1914년에 통과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얼스터지방의 몇몇 프로테스탄트가 자치를 거부해 내전이 일어나려고 했다. 이러던 중에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자치법은 실행되지 못했다.

1916년에 신페인당이 더블린에서 부활절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918년 선거에서 승리한 신페인당은 자신들의 의회를 세우고 법정, 군대를 만들었다. 영국은 경찰을 투입했고 16개월 동안 잔혹한 전투가 벌어졌다. 조지 5세는 화해를 요청했고, 로이드 조지 총리는 아일랜드 남부를 아일랜드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자치에 반대한 얼스터의 6개 주는 영국에 남도록 했다. 그러나 신페인당은 이를 거부하고 1923년까지 내전을 벌였다.

(3) 양차대전 사이
1924년 1월 선거에서 사회주의 집단과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새로운 정당인 노동당이 맥도널드의 주도로 권력을 잡았으나 11월까지만 내각을 이끌었다. 1929년 선거에서 노동당은 처음으로 다수당이 되었고 맥도널드는 다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몇 달 후에 세계경제공황이 시작되어 1931년에 맥도널드는 위기에 대처하려고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내각은 세금을 인상하고, 자유 무역을 포기했으며, 예산을 삭감했다.

제1차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산업은 잠깐 동안 부흥했다. 그러나 1920년에는 거의 200만 명이 실직했고, 동력이 석유로 바뀌면서 석탄산업이 쇠퇴했다. 1926년에는 광부들이 임금 삭감에 대항해 총파업을 했다. 1920년대 말에 세계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1932년에는 실업자가 300만 명으로 늘었다. 경기가 점차 호전되면서 런던과 남부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지역에서는 항공기, 자동차, 전기용품이 새로운 산업으로 등장했다.

(4) 제2차세계대전
1939년 3월에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9월에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 했다. 1940년 5월 10일에 처칠이 총리가 되었으며, 같은 날 독일은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를 공격했다. 6월에는 프랑스까지 독일에 점령당했다. 수백 대의 독일 비행기가 밤마다 영국을 공습했으며, 독일 잠수함이 영국으로 식량과 보급품을 운송하는 선박을 공격했다. 그러자 영국은 음식, 의복, 석탄, 기름의 엄격한 배급을 실시하면서 끝까지 버텼고, 히틀러는 영국 침공 계획을 포기했다. 전쟁은 1945년에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전쟁의 피해는 엄청났다. 영국은 약 36만 명이 죽었고, 런던을 비롯한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으며, 경제도 파탄에 이르렀다.

(5) 전후 시기
전후 대영제국은 차례로 해체되어 영국연방이 되었다. 1931년에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연방의 독립을 승인했고, 이들은 최초로 영국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민족의 독립 요구가 증가했다. 전쟁 직후 인도, 파키스탄,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등이 영국연방의 독립국이 되었다. 버마(지금의 미얀마)와 아일랜드는 독립 공화국을 선포하고 영국연방에서 탈퇴했다. 남아프리카연방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 격리 정책을 답변확정해서 1961년부터 1994년까지 영국연방이 되지 못했다가 이 정책을 폐지한 이후 영국연방에 다시 소속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는 더 많은 영국의 식민지가 독립 국가가 되었다.

전후 서유럽 국가들은 경제·정치적인 통합을 위한 다양한 조직을 결성했다. 처음에 영국은 이런 조직에 가입하는데 소극적이었다. 1950년대에 영국은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기구가 성공을 거둔 후에야 다른 6개 국과 함께 유럽자유무역협회를 결성했다.

영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6·25전쟁에도 참전했다. 1956년 7월에 이집트가 영국과 프랑스가 관리하던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고, 10월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운하를 되찾으려고 이집트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미국·소련·국제연합(UN)의 압력으로 실패했다.

1945년 선거에서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이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내세워 압승을 거두었다. 이후 6년 동안 노동당 내각은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고, 석탄·철강·철도 등 핵심 산업을 국영화했다. 그러나 노동당 내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 상황은 거의 호전되지 않았다.

1951년에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 내각이 집권해 노동당이 시행했던 변화의 대부분을 수용했다. 1955년까지 배급과 전시 통제가 해제되었다. 산업이 번창했고 일자리가 많아졌으며 임금도 나아졌다. 영국은 경제를 향상시키려고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을 신청했으나 1963년 1월에 신청이 거부되었다. 이 때문에 1964년 선거에서 해럴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이 다시 집권했다. 윌슨은 여러 경제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1966년에 윌슨내각은 세금을 인상하고 임금과 물가의 최고 한도를 정하는 긴축정책을 폈다.

1970년 선거에서는 보수당이 다시 집권해 히스가 총리가 되었다. 1973년에 영국은 유럽공동체(EC)에 가입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연료 파동, 파업을 비롯한 여러 문제가 보수당 내각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는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했다. 1969년 이후 영국은 북아일랜드를 직접 통치하면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권력을 나누어 갖는 안정된 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영국에서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자신들만의 입법 기구를 요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현 상태대로 영국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1979년에 영국 정부는 두 지역에 자신들만의 입법 기구 설립 여부를 묻는 투표를 실시했는데, 유권자들은 이를 부결시켰다.

(6) 최근의 발전
1979년 선거로 보수당이 다시 집권했으며, 대처가 첫 여성 총리가 되었다. 대처는 정부의 경제 간섭을 줄이는 데 힘썼으며,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전쟁을 과감하게 수행해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1990년에 대처의 뒤를 이어 메이저가 총리가 되었다. 1993년에 영국과 다른 유럽공동체 국가들은 정치·경제 협력을 증진시키려고 유럽연합을 형성했다. 영국은 1991년의 걸프전쟁에서 쿠웨이트를 해방시킨 지상군에 참여했다. 1994년에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유러터널이 완공되었다.

1997년에는 18년간의 보수당 통치를 끝내고 노동당이 집권해 블레어가 총리가 되었다. 블레어는 1997년 9월에 다시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입법기구 설치 여부를 묻는 투표를 실시하였는데, 이 때 유권자들은 의회 설치에 찬성했다.

또한 1997년 9월에 북아일랜드를 둘러싼 폭력을 끝내기 위한 공식적인 평화회담이 시작되었다. 이 회담에는 분쟁에 관련된 모든 정당이 참여했다. 1998년 4월에 평화회담이 끝나고,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는 이 회담에서 나온 합의안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양쪽의 주민들은 이 합의안에 찬성했다. 이 합의에 따라 세 개의 기구 즉, 북아일랜드의회,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남북아일랜드각료협의회, 아일랜드의회와 영국의회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아일랜드회의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98년 6월에 북아일랜드에서는 의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1999년 12월에 영국 하원은 새로 구성된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내각에 대한 통치권 이양을 공식 승인했다. 그러나 아일랜드공화국군의 무장해제를 둘러싸고 정치 지도자들 사이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북아일랜드의 평화는 위기를 맞았다. 2000년 2월에 영국은 아일랜드공화국군의 무기 반납 거부를 이유로 북아일랜드의 자치권을 박탈했으며, 아일랜드공화국군 또한 무장해제 협상을 중단했다.

그러나 2000년 5월에 아일랜드공화국군은 정기적인 무기 사찰을 받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평화협상이 다시 열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1999년에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서는 새 의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해 의회가 처음으로 소집되었다. 2001년 6월 총리 선거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가 재임에 성공했다.

⑤우리나라와의 관계
(1) 광복 이전
영국이 우리 나라와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1832년에 영국 상선 암허스토호가 충청도 해안에 정박하고 통상을 요구했을 때였다. 그 후 1845년에는 영국 군함이 거문도에 상륙하여 섬 이름을 '포트해밀턴'이라고 지었다. 그 뒤 1882년에 청(淸)나라의 중계로 조영조약이 체결되었고, 1883년에는 청나라의 중계 없이 직접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맺어 그 이전의 조약을 대체했다. 한편, 영국은 1885년에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며 거문도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거문도 점령사건'을 일으켰다가 조선 정부의 항의와 영국·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로 1887년에 철수했다.
이후 영국은 아프리카 등지에서 프랑스와의 식민지 건설 경쟁에 몰두하면서 상대적으로 극동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1902년에는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을 묵인하는 대신,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해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점차 일본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 영국은 일본의 만주 파병을 계기로 반일로 자세를 바꾸어 1921년에는 영일동맹을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조선과 영국 양국 간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특히 광산채굴권을 포함하여 각종 이권을 얻어내려고 힘쓰던 영국은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에 의해 한반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2) 광복 이후
일찍이 카이로회담과 포츠담회담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던 영국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3상회의에 참가하여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에 찬성했다. 그러나 1949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영국은 곧 이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대규모 군대를 한국에 파병했다. 남한 단독 수교국인 영국은 1949년 1월에 한국과 국교 수립을 합의했으며 그 해 3월에 주한 영국대사관이 설치되었고, 1950년 2월에는 주영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1986년 4월에 전두환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했고, 1986년 5월에 영국의 대처 총리가 방한했다. 1989년 11월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영국을 공식 방문했고, 1992년 11월에는 찰스 황세자 내외가 방한했다. 우리 나라와 영국 간에는 사증면제협정(1969), 항공업무에 관한 협정(1972), 이중과세방지협정(1978), 투자보장협정(1979), 문화협정(1982), 과학 및 기술 협력협정(1985), 과학기술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1986) 등이 체결되어 있다.
1983년에는 한영 수교 10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기념사업회가 구성되었으며 다양한 행사가 두 나라에서 열렸다. 오늘날 영국과 우리 나라에는 친선의원협회, 민간친선협회, 한영경제협력위원회, 대한무역자문위원회 등 각종 단체가 설립되어 있다. 런던대학교와 셰필드대학교, 헐대학교에는 한국학 연구과정이 개설되었고 더럼대학교, 케임브리지대학교 등에는 한국 음악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대영박물관에는 그림과 도자기를 비롯해 서적, 골동품, 불경과 불상 등 많은 한국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1999년에 영국의 대한 수출은 미화 20억 9823만 달러, 대한 수입은 미화 47억 7612만 달러에 이른다. 대한 수출 품목은 전기기계류, 자동차 부품, 철강 제품, 선박, 광학정밀기기 등이며, 대한 수입 품목은 섬유류, 시계류, 합판, 엽연초, 전자·요업·철강·합성수지 제품 등이다.
(3)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는 공식 수교를 맺지 않았지만, 영국은 북한과의 무역 거래를 위해 1963년에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1990년에는 북한 무역대표부가 영국에 개설되었다. 1985년의 자료에 따르면 석탄을 포함한 영국의 대북한 수출은 300만 달러, 시멘트와 아연을 포함한 영국의 대북한 수입은 300만 달러이다. 1993년에는 북한이 영국공산당을 초청하여 양국 간의 금융 및 농상 관계 확대를 의논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3.칠레
①위치:남아메리카 남서부
②인구:1532만 6000명(2003)
③크기:75만 6096㎢
④역사:(1) 초기 역사
지금의 칠레지역에는 유럽인이 이 곳에 처음 도착한 16세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북부 해안이나 아타카마사막의 남부 끝에 살고 있던 아타카마족, 디아기타족과 그 밖의 부족들은 15세기 후반에 페루의 잉카인에 정복되었다.

칠레에서 가장 큰 인디언 부족인 아라우칸족('마푸체'라고도 함)은 센트랄계곡지대에 살았다. 아라우칸족의 호전적인 전사들은 잉카인이 남쪽으로 내려와 그들의 지역을 침공하자 잉카인을 물리쳤다. 이들은 고기를 잡고 감자, 옥수수, 콩 같은 작물을 재배했다.

1520년, 포르투갈 항해사인 마젤란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칠레에 도착했다.

(2) 에스파냐의 정복
에스파냐인들은 1533년까지 페루의 잉카인을 정복하고 금과 은을 가져갔다. 에스파냐 정복자인 디에고 데 알마그로 일행은 1535년에 페루의 남쪽 땅을 탐험하기 위해 지금의 산티아고까지 내려왔다.

1540년, 또 다른 에스파냐 사람인 페드로 데 발디비아 일행이 칠레의 센트랄계곡지대로 내려갔다. 이들은 1541년 2월 12일 산티아고에 정착촌을 건설했으나, 6개월 뒤 아라우칸족이 이 정착촌을 파괴했다. 에스파냐인들은 산티아고를 다시 세웠고, 이 외에 라세레나, 발파라이소, 콘셉시온, 발디비아, 비야리카를 건설했다. 그러나 아라우칸족이 끈질기게 저항하여 칠레 남부는 300년 이상 싸움터가 되었다.

(3) 식민지 시기
에스파냐는 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칠레를 지배했다. 칠레는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던 페루 부왕청의 일부분이었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이 곳에서는 금과 은을 발견하지 못해서 칠레에는 정착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정착민은 센트랄계곡지대에서 가축을 사육하고 밀을 경작하여 부자가 되었다.

식민지 시기에 로마가톨릭교회는 선교사들을 칠레로 보내 원주민들을 크리스트교 신자로 개종시켰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곧 식민지의 세력 있는 기관으로 성장하여 광대한 영지를 소유했고 교육 분야를 장악했다.

(4) 독립
1808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에스파냐를 점령했다. 이 기회를 틈타 칠레를 비롯한 많은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다.

1810년 9월 10일, 대지주로 이루어진 집단이 훈타(위원회)를 구성한 뒤, 훈타가 독립정부를 대신한다고 선언했다. 1811년, 칠레의 귀족 카레라가 행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카레라의 통치는 오이긴스의 도전을 받았다. 오이긴스는 페루 부왕이었던 아일랜드 이민의 아들이었다. 카레라와 오이긴스가 서로 다투는 사이에 에스파냐 군대가 1814년에 다시 식민지를 장악했다. 카레라와 오이긴스는 아르헨티나로 피신했다.

오이긴스는 1817년에 아르헨티나의 장군 산 마르틴과 함께 칠레로 돌아왔다. 1818년 4월 5일, 오이긴스는 산 마르틴의 도움을 받아 마이포강에서 에스파냐 군대를 물리치고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오이긴스는 신생국의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5) 국가의 건설
오이긴스는 1818년과 1822년에 제정된 두 차례의 헌법 준비 작업을 감독했다. 그리고 해군을 창설했으며, 로마가톨릭교회의 영향권 안에 있지 않은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칠레국립도서관을 세웠다. 또한 귀족의 작위를 없애고, 지주의 거대한 영지를 분할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권한 축소 정책을 추진했다.

독립 직후 정당이 두 개 생겨났다. 보수파들은 식민지 시기의 정책을 그대로 추진할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했다. 그러나 진보파들은 입헌정부, 토지개혁, 로마가톨릭교회의 권한 축소 등을 요구했다.

보수파들은 오이긴스가 너무 진보적이라고 생각했고, 진보파들은 오이긴스가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 한다고 의심했다. 양쪽에서 불신을 받은 오이긴스는 1823년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1823년에서 1830년까지 허약한 정부가 칠레를 통치했다. 보수파들은 짧은 내전 끝에 정권을 장악하여 30년 동안 집권했다.

1830년대에는 사업가 출신의 팔라수엘로스가 대통령 자문이라는 역할을 이용하여 정부를 쥐고 흔들었다. 1833년에 제정된 헌법은 1925년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어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었으며, 로마가톨릭교를 국교로 지정했다. 그리고 일정액의 수입이 있거나 일정 규모의 부동산을 가진 25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다.

1836년, 칠레는 페루와 볼리비아가 연맹을 결성하는 것을 막으려고 이들 국가에 선전포고를 했다. 칠레는 1839년에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1870년대에는 아타카마사막의 질산염 매장지를 놓고 칠레와 볼리비아 사이에 분쟁이 터졌다. 페루가 볼리비아 편을 들자, 칠레는 이 두 나라를 상대로 1879년에서 1883년까지 전쟁을 벌였다. 칠레는 이 전쟁에서 이겨 영토를 1/3 이상이나 늘렸다. 새로 얻은 영토에는 귀중한 광물인 구리와 질산염이 매장된 땅이 많았다.

(6) 변화의 시대
칠레의 풍부한 광물자원은 19세기 후반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은 계속되었다. 여러 해 동안 진보파의 정치 지도자들은 지나치게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890년에 의회가 발마세다 대통령이 제출한 예산안 승인을 거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다음 해인 1891년에 내전이 일어나 1만 명 이상이 죽었다. 내전이 끝난 다음 의회는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시키기로 의결했다. 1925년까지 의회는 칠레 정치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20세기 초, 질산염 수출에서 얻은 소득은 칠레 공업 발전의 촉진제가 되었다. 칠레는 제1차세계대전 때 중립을 지켰다. 전시에 화약을 만드는 원료인 질산염의 수요가 폭등함에 따라 칠레의 경제도 발전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이 합성 질산염을 수출하기 시작하자 칠레의 수출 시장은 붕괴했다. 실업률이 높아지고 파업과 폭동이 계속되어, 1920년의 대통령 선거를 방해할 정도였다. 많은 중산층 사람이 공장 노동자나 광부들과 연대하여 알레산드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알레산드리는 정치·사회적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으며, 1925년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위원회를 임명했다.

1925년에 헌법은 의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많이 복구시켰다. 전에는 의회의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 대통령을 뽑았으나,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개정했다. 새 헌법에서 인권을 강화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함에 따라 교회와 정부가 완전히 분리되었다. 또한 선거 연령을 낮추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을 주었다. 소득과 부동산 보유에 따라 선거권을 주던 조항은 1885년에 폐지되었다.

1927년, 이바녜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바녜스는 많은 사회개혁정책을 실시했고, 경제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외채를 많이 얻어왔다. 그러나 1929년에 시작된 세계경제공황은 칠레에 엄청난 경제적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7) 진보의 시대
1932년, 알레산드리는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칠레 경제를 서서히 회복시켰다.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칠레는 연합국측에 구리와 질산염 그 밖의 군수 물자를 팔았다. 1949년 총선거 때부터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주었다.

1952년에 전직 대통령 이바녜스가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바녜스는 공업화정책을 계속 추진했으나 세계 시장에서 구리 가격이 급격히 떨어져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심해졌다.

또한 1960년에는 끔찍한 지진과 해일이 칠레를 덮쳐 수천 명이 죽고 재산 피해가 엄청나게 났다. 1964년에 대통령이 된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는 제한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공공 주택을 짓는 한편, 교육과 보건 서비스의 범위를 넓혔다.

(8) 마르크스주의와 군사 통치
칠레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아옌데가 197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서반구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아옌데정부는 구리 광산과 개인 은행과 그 밖의 여러 산업을 국영화하고 광범위한 토지개혁정책을 입안했다.

그리고 최저 임금 수준을 크게 높이는 동시에 소비자 물품의 가격을 억제하려고 했다. 그러자 식량 부족이 만연하게 되었다. 1971년에 20%이던 물가 인상률이 1973년에는 무려 350%까지 폭등했다. 여기저기에서 파업이 벌어졌고, 아옌데정권의 지지자와 반대자들은 서로 과격 시위를 벌였다. 의회, 중산층, 상류층의 반대도 아옌데정권의 힘을 결정적으로 위축시켰다. 마침내 1973년 9월 11일, 군부 지도자들이 정부를 전복했다.

미국중앙정보국(CIA)은 아옌데를 제거한 군부 지도자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미국이 아옌데정부의 전복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군부 지도자들은 훈타(쿠데타 직후의 임시정부)를 결성하여 피노체트 장군을 정부 지도자로 옹립했다. 이 과정에서 훈타의 지지자와 반대자 세력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서 수천 명이 죽었다.

훈타는 많은 반대 세력을 투옥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정당활동을 금지했다. 그리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물가 상승을 억제하려고 강력하게 조치했다. 철저한 임금 억제와 물가 통제, 과일·나무·해산물의 수출 장려로 경제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업률은 여전히 높고 복지정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줄어들어 하층민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9) 최근의 동향
칠레는 심각한 사회·정치·경제 문제를 안고 있다. 1980년에 칠레 국민들은 1990년대에 정부를 점진적으로 민주화하는 새 헌법을 승인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칠레 군사정부는 계속해서 인권을 짓밟았다. 대학생, 노동조합, 로마가톨릭교 사제와 수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부를 선출하라고 피노체트에게 압력을 가했다.

1987년에 피노체트는 반대 세력의 정치활동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1988년에는 1980년의 헌법 정신을 존중하여 자신을 8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뽑아달라는 내용의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피노체트를 불신임했다. 1989년에 실시한 민간인 대통령과 의회를 뽑는 선거 때 칠레 국민은 파트리시오 아일윈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민주적 절차로 선출한 새 정부가 1990년에 들어섰으나 피노체트는 육군 총사령관직을 그대로 유지했다.

1993년에 실시한 선거에서 민주연합을 이끈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가 과반수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칠레의 민간정부는 경제를 개선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손꼽히는 경제기반을 갖추었다. 인플레이션이 억제되고, 실업률은 떨어졌다. 하층 계급을 지원하기 위한 많은 조치를 취했다.

피노체트는 1998년 3월까지 군 총사령관으로 재직한 후 종신 상원의원이 되었다. 1998년 10월에 영국 경찰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한 피노체트를 살인 및 인권탄압 혐의로 체포했다. 영국 경찰이 피노체트를 체포한 것은 에스파냐 사법 당국의 특별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에스파냐 정부는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칠레를 통치했던 피노체트가 집권 기간 중 칠레의 에스파냐 국민들을 집단학살, 고문, 납치, 테러, 반인도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했었다. 그러나 2000년 3월에 영국은 피노체트의 건강 문제를 빌미로 삼아 그를 석방했고, 피노체트는 칠레로 돌아갔다.

2000년 1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주의당의 당수인 리카르도 라고스 에스코바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라고스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칠레는 살바도르 아옌데 전 대통령이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 과정에서 피살된 이후 처음으로 사회당이 이끄는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2000년 5월에 칠레 산티아고항소법원은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을 박탈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로써 피노체트는 군정시절에 저지른 많은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한 사법처리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⑤우리나라와의 관계
남북한동시 수교-남한(1962), 북한(1992)
수출입 현황(1999)
- 대남한 수입액 455,391,000 달러(미화),
- 대남한 수출액 815,297,000 달러(미화).
남한과의 주요 협정
- 무역협정(1997), 항공협정(1978), 문화협정(1983).

4.태국
①위치: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중앙
②인구:6402만 2000명(2003)
③크기:51만 3119㎢
④역사:(1) 고대
지금의 타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5000년 전부터이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지금의 타이 북동부에 있는 논녹타마을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이 때 이미 벼를 식량으로 재배했다. 타이족의 조상은 대부분 1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중국 남부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여러 정착지를 건설했다. 1238년에는 크메르제국 북서부에 있던 주요 도읍 수코타이를 공략하여 타이족 최초의 독립 왕국인 수코타이를 세웠다. 수코타이왕국의 3대 왕인 람캄헹왕이 크메르 문자를 개량하여 타이 문자를 만들었다. 이 무렵에 수코타이왕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1350년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타이 영토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했다.

(2) 침략과 전쟁
수코타이왕국이 차츰 약해지자 1350년에 한 무리의 타이족이 지금의 타이 중부에 아유타야왕국을 건설했다. 14세기 말에 이르러 수코타이보다 세력이 커진 아유타야왕국은 마침내 1378년에 수코타이를 병합했다. 아유타야시는 14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타이의 수도였다. 이 시기에 아유타야왕국은 말레이인, 버마족, 크메르족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1431년에는 크메르제국(지금의 캄보디아)을 침공해 수도 앙코르를 점령했다.

(3) 유럽인과의 접촉
16세기 초 포르투갈 상인들이 아유타야에 도착하면서부터 타이족은 유럽인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 에스파냐, 영국, 일본, 프랑스와 무역 관계를 맺었다. 아유타야는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를 포함한 몇몇 국가에 치외법권을 부여했다.

17세기 말부터 많은 타이족 청년이 유럽에 있는 학교에 진학했다. 이 시기에 유럽 강국들이 아유타야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내정 간섭은 타이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아유타야는 유럽 국가들에 주었던 치외법권을 취소하고 서구 국가들과의 어떠한 접촉도 거부했다.

(4) 새로운 왕조 수립
1767년에 버마족이 아유타야를 침공하여 수도를 파괴했다. 그러나 탁신 장군이 곧 버마족을 몰아냈다. 탁신은 톤부리에 수도를 정하고 왕으로 즉위하여 톤부리왕조를 수립했다. 탁신은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정화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기존 불교계와 관료 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1782년에 반란이 일어나 탁신이 폐위되었고 그와 함께 톤부리왕조도 끝났다.

1782년에 탁신을 처형한 차오프라야 차크리 장군이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그는 도읍을 방콕으로 옮기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 왕조를 라타나코신왕조(방콕왕조 또는 차크리왕조)라고 한다. 이 왕조가 지금까지 타이를 통치하고 있다. 흔히 라타나코신왕조의 왕들을 라마라고 부르는데, 차크리왕이 라마 1세이고 지금의 국왕은 라마 9세이다. 1782년에 라타나코신왕조는 수도를 톤부리에서 차오프라야강 건너 방콕으로 옮겼다.

19세기에 들어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이 본격적으로 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시암 역시 영국의 압력에 굴하여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시암 역사상 매우 유능한 군주로 꼽히는 몽쿠트왕(라마 4세, 1851∼1868 재위)은 근대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서구의 고문관들을 고용하는 한편, 국민에게 서구의 언어와 근대 과학을 배우도록 장려했다.

몽쿠트의 아들인 출랄롱코른왕(라마 5세)도 이러한 근대화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출랄롱코른왕은 1873년부터 1910년까지 재위하면서 노예제를 폐지하고 광범위한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모든 어린이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공공교육제도도 확립했다. 그 결과,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하나하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상황 속에서도 타이만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5) 제1·2차 세계대전
제1차세계대전 때 시암은 독일에 대항하여 프랑스와 영국을 지원했다. 일부 시암 군인들은 유럽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했다. 시암이 이 전쟁에 원조를 한 보답으로 프랑스와 영국은 치외법권을 포기했다.

1932년,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몇몇 사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결과, 절대군주제가 무너지고 입헌군주제 정부가 들어섰다. 1935년에 프라자디포크왕은 자신의 10살짜리 조카인 마히돈(라마 8세)을 지지하며 왕위를 포기했다. 이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단(임시 통치단)이 나라를 통치했다. 정부는 군 장교와 민간인들로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민간인들이 집권했지만 1938년에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고, 1939년에 나라 이름을 타이로 바꾸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진행되던 1940년에 타이는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 출랑롱코른왕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기증했던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타이의 요구를 지지하면서 인도차이나에 이 땅을 반환하도록 강요했다. 1941년에 일본이 타이를 침공했다. 타이는 잠깐 동안 저항했지만 결국 일본과 동맹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해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군사기지를 공격했고,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1942년에 타이는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타이 내부에서는 '타이자유운동'이라는 단체가 타이에 있던 일본인들에게 저항했다.

(6) 제2차세계대전 이후
1946년에 마히돈왕이 죽자, 나이 어린 동생 푸미폰 아둔라야뎃이 왕위를 계승했다. 일본 점령기에 총리를 역임했던 피분 송크람이 1946년부터 1957년까지 타이를 통치했다. 사리트 타나라트가 피분정권을 전복했고, 이후 사리트는 1963년에 죽을 때까지 타이를 통치했다. 사리트정권은 광범위한 경제 발전을 이룩했고 미국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했다. 사리트의 뒤를 이은 타넘 키티카천도 이 정책을 계속 이어나갔다.

베트남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965년, 타이는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해 남베트남을 도와 미국과 함께 싸웠다. 1967년에는 타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을 창설했다.

1973년, 대학생들이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시민혁명을 주도했다. 이 유혈혁명으로 타놈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정치 시기는 1976년 10월에 보수파가 방콕에 있는 탐마사트대학교의 급진적인 학생들을 공격함으로써 3년만에 끝을 맺었다. 이 후 1979년에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군사정권이 권력을 장악했다.

(7) 최근의 동향
1970년대 이후 타이는 동남아시아에서 매우 잘 사는 나라에 속했다. 그러나 타이는 몇 가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1975년에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100만 명에 이르는 난민과 망명객이 타이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국제연합(UN)과 적십자사를 비롯한 민간 자원 봉사기관들이 이들에게 식량, 의복, 피난처와 의료 지원을 제공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타이 정부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1991년 2월에 군부가 정부를 장악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헌법을 폐지했다. 군부 지도자들은 새로운 헌법을 만들 의회까지 포함한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1991년 말에 새로운 헌법이 답변확정되었다. 1992년 3월에 실시된 선거로 새로운 민간정부가 구성되었다. 정부가 육군 지휘관이었던 수친다를 총리로 임명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이 와중에 군인들이 일부 시위대를 학살했다. 수친다는 5월에 사임할 수 밖에 없었고 의회는 해산되었다. 새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1992년 9월에 실시되었다. 이 후 연합시민당의 당수 리크파이가 총리로 취임했다.

1994년에는 타이와 라오스 사이에 우정의 다리가 개통되었다. 이 다리는 메콩강 주변의 나라들을 연결하는 최초의 다리이다.

1997년에 타이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바트(타이의 통화)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졌고, 주식시장이 폭락했다. 1997년과 1998년에 정부는 위기를 안정시키고 경제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개혁 정책을 폈다. 1999년 초에 타이의 경제는 개선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1997년 9월에 타이 의회는 새 입법부의 틀을 확정하는 헌법을 통과시켰다. 2000년 3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처음으로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상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⑤우리나라와의 관계
남북한 동시 수교 - 남한(1958), 북한(1975).
수출입 현황(1999)
- 대남한 수입액 1,734,649,000 달러(미화).
- 대남한 수출액 1,067,768,000 달러(미화).
남한과의 주요 협정 - 무역협정(1961), 항공협정(1967),
이중과세방지협정(1974), 일반여권사증면제협정(1981),
과학기술협력협정(1984).

5.필리핀
①위치:동남아시아
②인구:8116만 1000명(2003)
③크기:30만 76㎢
④역사
(1) 초기 역사와 식민지 시기
네그리토스족의 한 갈래인 아에타라는 부족이 필리핀 최초의 정착민이다. 이들은 약 3만 년 전에 동남아시아 본토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기원전 3000년경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온 말레이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서기 1521년에 마젤란이 이끄는 에스파냐 탐험대가 필리핀에 도착했다. 1565년에는 또 다른 에스파냐 탐험대가 이 곳에 도착해 에스파냐 영토로 선언하고 정착촌을 세웠다. 그 뒤 약 330년 동안 에스파냐가 필리핀을 통치했다. 에스파냐가 통치하는 동안 필리핀인들은 대부분 로마가톨릭교로 개종했다.
19세기에 들어 에스파냐가 필리핀의 무역을 허용하자 필리핀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부유층 젊은이들이 마닐라나 다른 나라의 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오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독립 의식이 높아졌다. 1896년에 의사인 리살이 초창기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처형되었다.
1892년에 보니파시오가 조직한 비밀 혁명단체인 '카티푸난'이 1896년에 봉기했다. 그 뒤 보니파시오가 살해되자 아기날도가 그를 이어 혁명 군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아기날도가 반군 활동을 끝내고 해외로 망명하면 필리핀에 정치 개혁을 시행하겠다고 정부가 약속하자 아기날도는 홍콩으로 망명했다.
(2) 미국의 지배와 독립
1898년, 미국과 에스파냐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망명 중이던 아기날도가 필리핀으로 돌아와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에스파냐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필리핀을 이양받았다. 아기날도는 필리핀의 독립 약속을 즉각 이행하라고 미국에 촉구했다. 1899년 1월 23일에 아기날도는 필리핀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그 해 2월 4일에 미국과 전투를 시작했다. 1901년 3월, 아기날도가 체포되었고 1년 후에 내전이 종식되었다.
1901년에 미국은 필리핀에 식민정부를 수립했다. 미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필리핀에서는 영어를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미국 기업들의 필리핀에의 투자가 늘어나면서 필리핀 경제는 점차 미국에 종속되었다.
1935년에 필리핀은 미국 헌법을 본따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이 선출한 정부를 갖춘 미국연방 국가가 되었다. 케손이 신생 국가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필리핀의 국방과 외교 문제를 담당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12월 10일에 필리핀을 침공했다. 그 뒤 1944년 10월, 맥아더 장군이 일본군을 필리핀에서 몰아낼 때까지 약 2년 동안 일본이 필리핀을 통치했다.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은 미국에서 완전히 독립해 로하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필리핀공화국을 수립했다. 1940년대 말에는 정치적 혼란과 빈곤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1949년 말에 공산당이 주동이 된 후크 세력이 인민해방군을 조직하여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벌였지만 1954년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독립 후 필리핀은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국의 원조로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그 대가로 필리핀 정부는 미국이 루손섬에 클라크 공군기지를, 수비크만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에 동의해야 했다.
(3) 최근의 동향
1965년,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되었고 1969년에 재선되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공산주의자들이 신인민군을 결성하여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벌였고, 이슬람교도도 독립을 요구했다. 마르코스는 1972년에 계엄령을 발동하여 1981년까지 군사 통치를 했다.
1973년에 마르코스는 헌법을 개정하여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마르코스의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의 반대, 계속되는 정치 불안, 점점 나빠지는 경제 사정 등이 원인이 되어 반정부 시위가 점점 격렬해졌다. 1986년 2월, 필리핀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고 마르코스는 여당 후보로 출마했다. 마르코스에 도전하고 나선 야당 후보는 마르코스의 오랜 정적이며 필리핀 군부에 의해 암살된 베니그노 아키노의 미망인인 코라손 아키노였다.
선거 결과, 마르코스가 승리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로마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을 포함하여 전 국민이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돌입했다. 국민의 저항이 극에 이르자 마르코스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후 1987년 2월,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92년에는 아키노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이었던 라모스가 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0년대 초부터 몇 개의 이슬람 단체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전투를 벌였다. 1996년에 정부와 이슬람 단체의 지도자는 전투를 중단하고, 필리핀 남부에 자치를 수립한다는 내용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정부군과 이슬람군과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1998년에 조지프 에스트라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영화배우였던 그는 라모스 정권 아래에서 부통령을 지냈다.
2000년 4월에 필리핀항공 소속의 필리핀 여객기가 추락해 승객과 승무원 134명 전원이 사망했다. 2000년, 에스트라다는 부정부패죄로 기소되었다. 그는 전국적인 항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정하면서 사임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필리핀 하원은 투표에 의해 그를 탄핵하기로 했으며, 상원은 그를 기소했다. 2001년,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에스트라다는 정치인 대부분의 지지를 잃었다. 결국 그는 항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권좌에서 물러났고,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부통령이 그 뒤를 이었다.
2001년, 필리핀 정부는 가장 큰 이슬람단체인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과 정전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납치 같은 전술을 쓰는 아부사야프와는 협상하기를 거부했다.

⑤우리나라와의 관계
남한 단독 수교(1949)
수출입 현황(1999)
- 대남한 수입액 3,128,739,000 달러(미화),
- 대남한 수출액 1,158,666,000 달러(미화).
남한과의 주요 협정 - 소포우편협정(1961), 무역협정(1961),
문화협정(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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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 음 여긴 영어를 쓴다고 해서말이죠. 싱가폴... 옛날에 영국의 식민지여서 영어를 잘한다나 어쨌다나..... 중국태국등 그 외여러나라등은(인도제외) 거의 비행기...

중국,싱가폴,남아공,필리핀,태국 등...

... 한국,중국,싱가폴,남아공,필리핀,태국의 국제학교 중 제일 환경(교육,문화,청결 등등)... 있는데요 태국국제학교 좋습니다. 100%원어민(미국, 영국, 뉴질랜드 등등)선생님에...

중3 중국/태국/캐나다 유학

... 싶어요, 중국 상해, 태국, 캐나다 셋중에서 선택하고... 호주나 필리핀, 싱가폴을 갈 생각은 없어요. 님께서... 미국/영국최고명문대를 목표해보시는게 좋다고 봅니다. 2....

필리핀이나 태국 중에서여..

... 필리핀이나 태국으로 조만간 여행을 갈거 같은데요..... 사실 물건자체는 중국에서 수입한것이 대부분이라... 돋보이는데, 영국의 버킹엄 궁전과 같이 현관 앞에...

근데 흑인이나 태국이나 필리핀 베트남...

... 한국-영국 혼혈인데 굉장히 이국적으로 귀엽죠 & 2. 중동, 아랍계도 그렇고, 중간쯤... 캄보디아면 모를까, 베트남은 중국 접경국가라, 동아시아쪽 외모를 가진 인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