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 직후 당시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 직후 당시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작성일 2006.10.10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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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1931년에 일어난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는 한 대학생 입니다.

 

논문을 쓰다가 궁금한 점이 있어서 질문 올립니다.

 

 

 

1931년 침략 직후 당시에 그 현장에서 모든걸 몸으로 느끼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수십년이 지난 후 역사책을 통해 공부를 하며 그 현장을 보는것은 이해적인 부분이나 견해적인 부분이 많이 차이가 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직접 가서 보고 오지 않는 한 그때 그 사람들이 만주 침략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지 혹은 지지를 했거나 강력하게 거부를 했거나 따위는 단순히 역사책을 보고 역추를 함으로써 "아, 이 시절 이런 계층의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받았었겠구나......" 정도의 결론 밖에는 나오지 않는군요.

 

 

각설하고....제가 궁금한것은 그 침략 직후에

 

-젊은 일본 병사

-중국 공산당원 (Communist)

-중국 민족주의자 (Nationalist)

-미국 외교관

 

이 네가지 계층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침략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 당시, 결말을 모른다는 가정하에, 이 침략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거라고

믿고 있었는지가 궁금합니다.

 

 

특히...제일 궁금한 부분 두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중국 공산당원과 민족주의자들 두 그룹 모두 다 사상의 차이 이전에 다 같은 중국인인데, 일본을 싫어하는 과정에서 어떤 미묘한 견해의 차이가 있었을까 궁금합니다. 아무리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한데요 왜냐면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 항전하는 도중에도 나라 안에서 공산당과 민족주의자들의 내전이 있었다고 하거든요....알기쉽게 설명까지 해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사건에 미국은 어떤 방식으로, 직접적? 아니면 간접적? 인 역할을 했나요? 그리고 미국 외교관이 느꼈을 생각도 유추해서 간략히 정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내공 걸어놓고 너무 긴 질문을 던져놓은게 아닌가 싶네요. 지나가시다 조금이라도 아는 부분이 있으면 꼭 코멘트나 답글 달아 주세요 ^^ 너무 궁금하답니다.

 

 

 

 

 


#일본의 1931년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반갑습니다.

 

논문이라기 보다는 보고서가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듭니다만, 어쨌거나 대학생이라니 편하게 몇가지 적습니다.

 

Q> 1931년 침략 직후 당시에 그 현장에서 모든걸 몸으로 느끼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수십년이 지난 후 역사책을 통해 공부를 하며 그 현장을 보는것은 이해적인 부분이나 견해적인 부분이 많이 차이가 날 수 있지 않습니까?

A> 맞습니다. 그러므로 후대의 연구자들은 경험한 세대의 의견과 주장을 존중해야 합니다. 다만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의 틀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학문과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중요합니다.

 

Q> 우리가 직접 가서 보고 오지 않는 한 그때 그 사람들이 만주 침략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지 혹은 지지를 했거나 강력하게 거부를 했거나 따위는 단순히 역사책을 보고 역추를 함으로써 "아, 이 시절 이런 계층의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받았었겠구나......" 정도의 결론 밖에는 나오지 않는군요.

A> 바르게 본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또는 기록의 태생적인 한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한계는 주로 두가지의 문제를 낳는데 하나는 승자의 기록이 중심이 된다는 것, 하나는 남아있는 기록이 제한되어 있을 때의 편파적 해석입니다. 가령 고조선에는 다양한 지배계층과 권력다툼이 존재했을 것이지만 그 때의 사료는 중국의 정사 삼국지 뿐이므로 고조선의 지배자층 보다는 위만 등의 중국유민의 활동이 중심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중국역사가들의 고조선사 인식을 고정화시키고, 급기야 동북공정같은 작업도 시도하게 되죠.

 

기록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주요한 방법이 고고학과 문화인류학입니다. 중국은 고조선을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싶어도 고조선의 유적은 중국문명과 동질성이 없고 오히려 한반도의 문화와 유사합니다. 기록의 왜곡을 극복하는 방법은 더 있으니, 지금 자료를 통한 역추 밖에 불가능한 대학생이라고 해서 한계를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Q> 젊은 일본 병사

A> 일본병사의 얘기를 하기 전에 당시 국제정세를 약간 덧붙입니다. 유럽은 1차대전을 겪으면서 제국주의의 폐해를 통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식민지 쟁탈전과 식민지수탈에 대한 정책을 많이 수정하게 되는데, 일본정치계와 군부는 그 변화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1931년 만주사변까지 일본은 모든 식민지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덕분에 일본 국민은 승리감을 만끽하면서 정부가 주도하는 일에 반발하려는 의식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물며 전쟁터에 나가 있는 일반병사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가 1912~1926년간의 일본의 평화기와 당시 유행했던 사회주의교육을 어느 정도 받은 식자층이었다면 예외입니다.

 

Q> 중국 공산당원 (Communist)과 중국 민족주의자 (Nationalist)

A> 이 부분은 무척 범주를 정하기가 어려운데 과연 정통 공산당원이 민족개념을 중시하지 않았느냐? 또 중국국민당이 과연 민족주의자였느냐? 는 문제가 있습니다. 님이 이 두 부류를 구분하는 기준에 따라 다른 답변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양자는 공통적으로 일본을 제국주의로 파악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집단에게는 이상이 있기 마련인데 눈앞의 일제를 타도한 뒤에 만들고자 하는 중국의 모습이 다르다면, 게다가 아주 심각하게 다르며 또 상대의 그 이상이 실현될 때는 자신의 근거와 발판이 없어진다면 어찌할 것인가를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공산주의자가 일제를 타도하는 건 반가운 일인데, 타도가 끝나고 나면 나와 내 가족의 토지를 모두 압수하여 공유재산으로 만들고, 공산당의 간부들이 우선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거나 행정직을 장악할 것이 뻔한데 타협의 여지가 없다면(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고에 기초하여 민족은 허상이며 이념에 의해 가상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투철하게 믿기에,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소련과 손을 잡고 전 세계를 사회주의화하기 위해 중국인민이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한다면) 국민당원들은 어찌 생각했을까요? 또 반대로 친미적 자본주의적 국민당에 대해 공산당원은 어찌 생각했을까요?

 

분단되었더라도 협상을 통해 통일한국을 세우면 되었을 텐데 왜 김구 등의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전쟁까지 치뤄야했는지와도 비교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Q> 미국 외교관

A> 만주사변에 대해서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국가 전체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 국제연맹 총회에서 (일본이 세웠던) 괴뢰 만주국의 주권은 투표에서 완전히 부정되었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습니다.

 

그러나 중국북동부는 대체로 일본, 아니면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원래부터 인식되었던 지역이고, 일본의 침략이 중국본토의 유럽열강의 이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권을 해치는 행동이 아니었다는 점.

 

또 미국도 필리핀,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 영국은 인도 및 버마 등의 지역을 (반)식민지로써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비난할 처지는 못되었습니다. 다만, 중국이 길길이 뛰기 때문에 보조를 맞춰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간과하기 쉬운 점인데 미국은 일본이 처음으로 국교를 맺은 구미국가입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중재도 미국이 맡았고,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 때 미국은 일본이 필리핀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정하였습니다.

 

1854년부터 1931년까지 미일간의 외교관계는 추세적으로 결코 험악하다거나 균열이 발생하는 정도의 상황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게 된 계기는 1937년의 중일전쟁을 기다려야 합니다. 님이 말하는 미국 외교관이 주일, 주중 외교관이 아니라 미국국무부의 관리라면 인식 정도는 훨씬 떨어졌을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질문과 무관한 얘기인데 님이 질문하신 방은 [일본]방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세계사], [정치,외교], [중국], [미국] 등의 분야에 조금씩 나눠서 질문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겪어본 바로는 이런 질문에 대답할 만한 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인데, 저 역시 대단한 정보는 드리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고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질문을 세부적으로 하면 더 많은 전문가들이 의견을 던져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윗 분이 잘 답변해주셨고, 전 중국쪽을 전공한 사람이라 중국 관련한 쪽으로만 언급해보겠습니다. (알고자 하는 열의가 엿보여 괜히 흐뭇해지네요^^;;;)

 

먼저, 중국을 전공한 입장에서 왜 1931년의 만주사변을 기준으로 삼으셨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세 중국에서 공산당이 실제로 그 역량을 대내외로 떨치게 되는 것은 모택동의 대장정 이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택동이 중국공산당을 실제적으로 장악하게 되는 건 대장정 기간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대장정 이전의 중국공산당과 이후의 그것은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장정 이전의 중국공산당이라면 주로 유럽과 구소련지역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배워온 층이나 꼬뮌에서 파견된 고문들에 의해 이끌어집니다. 이들은 극좌노선이며 사회주의 이론을 그대로 실천하는 원칙주의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베이징대학에서 사서로 일하며 토론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해온 모택동과는 그 사고의 방식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모택동은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방식이나 장개석의 공산당 토벌에 대항하는 방식에서 공산당중앙과는 다른 노선을 표명합니다.  중앙은 사회주의 이론 그대로 도시에서의 무산계급의 봉기를, 모택동은 중국의 특성상 농민을 중요시하는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맞서 정규전을 고집하였으나, 모택동은 혁명근거지에 의한 비정규전이 더 효율적이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공산당 중앙의 핵심권력을 장악한 극좌파는 그들의 주장대로 싸우다 장개석 군대에 지리멸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택동은 그 잔존한 공산당원들을 이끌고 대장정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대장정 이전의 중국공산당은 다소 이상적인 극좌의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주류였으나, 대장정 이후의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농민과 함께 하며 힘을 키우게 되어 중국적 사회주의를 지향하게 됩니다. 결국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전자는 계급론에 의해 거의 무시되는 형편이지만, 후자에서는 중요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1931년의 만주사변은 대장정 이전의 중국공산당의 시기이며 민족과 민중에 기반을 둔 공산당원들은 소수파였고, 대장정 이후의 1937년의 중일전쟁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흔히 머리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이 본격화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위에서 언급하였던 두 부류의 공산당원들의 항일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제 사견임을 밝혀둡니다;;)

첫째로 두 부류의 공산당원들 공통적으로 사회주의의 특성상 제국주의 타도를 부르짖기에 일본의 만주침략은 당연히 비난의 대상이자 타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제국주의는 식민과 착취경제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사회주의 원칙상 당연한 것이겠죠.

둘째로 차이점을 생각해보자면, 전자의 공산당원이라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은 사회주의 이상향을 건설하는데에 단순한 장애물에 불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자의 공산당원이라면 조금 다른 감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노동자/농민들과 호흡하며 중국민중에 대해 조금더 깊이 생각해왔고, 그들 자신이 중국민중이었기에 민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제를 단순한 걸림돌이 아니라 중국민중의 최대의 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전자의 공산당원들은 국민당군대나 일본군대를 착취자로써 비슷하게 여긴 반면에, 후자의 공산당원들은 국민당군대보다는 일본군대를 최우선의 타도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따라서 모택동은 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켜 항일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려 애썼습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외교관의 생각을 언급하셨는데..전 그냥 한가지 생각할 꺼리만 제시하고싶군요. (확실히 말하기엔 잘 모르므로..;;)

당시 중국국민당군은 미국의 막대한 전쟁물자와 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중국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쓰여지기 위함이었지만, 2차 국공합작(이의 성사에 미국쪽에서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들은바 있습니다) 이후 항일전쟁에서 당연히 이 물자들이 투입되었던 것은 당연지사겠죠? 미국은 대외적으로 당시 일본의 침략에 대해 불간섭의 입장을 취하고는 있었다지만, 이러한 전쟁물자를 대규모로 공급하였으니 미국 외교관의 생각에 단순히 간섭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만 있지 않을꺼라는 것이지요.

 

첨언하자면, 당시 중국은 여러 사상들이 외국에서 수입되어 극우와 민족주의부터 사회주의를 비롯하여 무정부주의까지 정말 각종 사상이 난무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도 개화기 이후 이러한 과정을 거쳤지요. 어쨌든 그러므로 민족주의자라고 단순히 정형화된 모습만을 생각해선 안된다는 얘기이구요. 국민당군 같은 경우에도 사실 뜯어보면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여러 지역의 군벌들이 혼합된 상황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 당시 국민당의 정당시스템은 공산당의 그것과 거의 유사했으며 오히려 어떤 면에선 더 극단적이었다는 것을 참고로 알아두세요. 장개석은 체질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싫어하였지만, 구소련에 자기아들인가 누군가를 파견해 교육시킬 정도였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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