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해서 알려주셈 =ㅅ=

일본에 대해서 알려주셈 =ㅅ=

작성일 2003.11.05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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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문화
2. 일본의 음식
3. 일본과 우리나라의 관계
4. 일본의 산업
하이튼 바쁘니 빨리 해주셈


#일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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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아시아 대륙 동쪽에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일본열도를 차지하는 나라.

위치 : 동북 아시아
면적 : 37만 7835㎢
인구 : 1억 2710만 명(2001)
인구밀도 : 336.4명/㎢(2001)
수도 : 도쿄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일본어
통화 : 엔(¥)
환율 : 119.13엔 = 1달러(2001.9)
1인당 국민총생산 : 3만 2035달러(1999)
면적은 37만 7835㎢, 인구는 1억 2710만 명(2001), 인구밀도는 336.4명/㎢(2001)이다. 일본어로는 ‘니혼’ 또는 ‘닛폰’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한서(漢書)에서 수서(隋書)까지 ‘왜(倭)’ 또는 ‘왜국(倭國)’으로 기록하여 왔으며, 한국에서도 일찍이 그렇게 불러 왔다. 북쪽으로 홋카이도[北海道] 북쪽의 소야[宗谷]해협 및 북동쪽의 네무로[根室]해협을 끼고 러시아의 사할린 및 쿠릴열도 남단의 구나시리섬과 대하며, 남쪽으로는 난세이[南西]제도가 타이완[臺灣] 근해까지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동해(東海)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Primorskij Kraj) 및 한국과 대하는데,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쓰시마섬[對馬島]은 부산에서 50km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 등이 산재하면서 태평양에 면한다.
1. 자연
1) 지세
일본열도는 환태평양조산대(環太平洋造山帶)의 일부로 세계의 불안정육괴(不安定陸塊)에 속한다. 태평양 북서부의 융기대(隆起帶)의 정상부가 해면 위에 드러난 것이 일본열도로, 홋카이도,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 등 4개의 큰 섬과 그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난세이제도 및 혼슈 중부에서 남쪽의 태평양으로 이어져 내리는 이즈[伊豆]·오가사와라제도로 구성된다. 호상(弧狀)으로 이어지는 이들 열도의 동쪽에는 각각 일본해구, 난세이제도해구(또는 琉球海溝), 이즈·오가사와라해구가 따르는데, 다같이 깊이 6,000m가 넘는다.

산지·평야는 조산운동의 지사(地史)를 반영하고, 또 습윤온대의 기후 조건에도 영향을 받아 그 배열과 지형이 극히 복잡하다. 일본열도의 지형구분은 지질구조를 기준으로 서남 일본과 동북 일본의 2개로 크게 구별되는데, 그 경계는 혼슈 중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이토이가와-시즈오카 구조선[漁川-靜岡構造線:新潟縣漁川市에서 靜岡縣靜岡市로 이어지는 단층구조선]이다. 지형은 지각운동이 격심했기 때문에 토지의 기복이 크고, 많은 단층에 의해 지루(地壘)와 지구(地溝)로 구획되어 전체적으로 평지가 협소한 산지지형을 이루며, 산지면적은 국토면적의 80%에 달한다. 또 새로운 지각운동의 결과 하안단구, 해안단구, 개석선상지(開析扇狀地), 융기삼각주, 융기해식대지, 해안평야 등이 각지에 형성되어 있다.

동북일본에서는 세 줄기의 산지가 남북방향으로 병행해서 달린다. 그 중에는 기타미[北見]산맥, 히다카[日高]산맥, 오우[奧羽]산맥, 미쿠니[三國]산맥, 에치고[越後]산맥, 간토[關東]산지 등 높고 험준한 산지와 기타카미고지[北上高地]·아부쿠마고지[阿武高地]·데와[出羽]산지 등 구릉성 산지가 있다.

서남일본은 다시 장대한 단층의 중앙구조선에 의해 북쪽(동해쪽)의 내대(內帶)와 남쪽(태평양쪽)의 외대(外帶)로 나뉜다. 기이[紀伊]산맥, 시코쿠산지, 규슈산지 등 외대의 산지들이 높고, 주고쿠[中國]산지, 단바[丹波]고지 등 내대의 산지는 고원상을 이룬다. 혼슈 중앙부에는 통틀어 ‘니혼 알프스’라고 통칭되는 히다[飛]산맥·기소[木曾]산맥·아카이시[赤石]산맥이 고도 3,000m급의 고봉들을 이고 솟아서 일본의 지붕을 이루며, 일본의 최고봉 후지산[富士山:3,776m]도 이 중앙부에 있다.

화산이 많은 것도 일본 지형의 특색이다. 지시마[千島], 나스[那須], 조카이[鳥海], 후지[富士], 노리쿠라[乘鞍], 하쿠산[白山], 기리시마[霧島]의 7개 화산대에 딸린 화산은 중요한 것만도 150개가 넘는다. 세계 활화산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토의 1/4이 화산재로 덮여 있다. 또 화산군에는 칼데라를 발달시킨 것도 많은데, 특히 규슈에 있는 아소[阿蘇]화산의 칼데라는 규모가 세계 제1로 알려져 있다. 화산대와 관련하여 지진대(地震帶)가 형성되어서 지진이 잦고, 또 각처에 온천도 다수 산재한다.

일본의 하천은 일반적으로 유로(流路)가 짧고, 기울기가 급하다. 하천의 계곡에는 V자곡이 많고, 강수는 그대로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면서 굵은 토사를 운반하여 산지의 곡구(谷口)에는 선상지의 발달이 현저하다. 그 부근에서는 하상(河床)의 퇴적·상승으로 해서 천정천(天井川)을 이루는 하천도 많다. 이시카리강[石狩川], 도카치강[十勝川], 기타카미강[北上川], 모가미강[最上川], 아부쿠마강, 도네강[利根川], 시나노강[信濃川], 덴류강[天龍川], 기소강[木曾川], 요도가와강[淀川], 요시노강[吉野川], 지쿠고강[筑後川] 등이 대하천인데, 유역면적이 가장 넓은 강은 도네강이고, 유로가 가장 긴 강은 시나노강이다.

일본의 평야나 분지는 대체로 규모가 몹시 작고, 각지에 두루 산재한다. 모두 하천의 퇴적에 의한 충적평야인데, 대지(臺地)와 저지(低地)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도네강을 비롯한 여러 하천 유역의 간토[關東]평야는 일본 제1의 평야이다. 그 밖에 홋카이도의 이시카리강 중·하류의 이시카리 평야, 시나노강을 비롯한 여러 하천의 범람원·삼각주·선상지로 된 에치고평야, 기소강 외 몇몇 하천의 퇴적으로 형성된 노비[濃尾]평야, 요도가와강 등 하천의 복합삼각주 및 충적지대 등으로 형성된 오사카[大阪]평야, 지쿠고강의 충적평야인 규슈의 지쿠시[筑紫]평야 등이 중요하다.

해안선은 굴곡이 몹시 심하여 그 총길이는 2만 6000km에 이르며, 해안지형이 다채롭게 발달되어 있다. 구주쿠리하마[九十九里濱浜]해안 ·사가미만[相模灣]연안 ·니가타[新潟]해안 ·미야자키[宮崎]해안에는 넓은 사빈해안이 발달하였고, 산리쿠[三陸]해안, 기이[紀伊]해안,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해안, 니시시코쿠[西四國]해안, 기타큐슈[北九州]해안에는 리아스식 해안, 쓰루가만[敦賀灣] 동안에는 단층해안, 홋카이도 오시마[渡島]반도 남동단의 에산곶[惠山岬]이나 이즈[伊豆]반도의 해안에는 화산해안, 에리모곶[襟裳岬], 무로토곶[室戶岬] 등지에는 해안단구가 있는 융기해안, 난세이제도에는 융기산호초해안 등이 발달하여 극히 변화가 많은 해안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연안에는 대륙붕이 발달되어 있고 쿠로시오[黑潮]·쓰시마 해류 등 난류와 한류인 쿠릴 해류가 교류하여 어족이 풍부하며, 또 동중국해(海) 쪽에 형성되어 있는 대륙붕에는 석탄·석유·천연가스의 매장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기후

일본은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 및 중부 내륙고지(內陸高地)가 아한대다우기후(亞寒帶多雨氣候)에 속할 뿐, 그 밖의 모든 지역이 온대다우기후에 포함된다. 그러나 아시아대륙 동쪽의 몬순아시아 지역에 들어 있으나, 해양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같은 위도에 있는 대륙동안보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더위가 심하지 않다. 한편 일본열도는 남북으로 길어 홋카이도 북단에서 난세이제도 남단까지는 위도차가 22℃나 되고, 따라서 연평균기온도 홋카이도의 와카나이[稚內]에서 6.3℃, 오키나와섬[沖繩島]의 나하[那覇]에서 22.3℃를 보여 남북차는 16℃에 달한다.

혼슈의 육지 너비는 최대 300km 정도인데, 중앙부를 척량산맥이 종주(縱走)하기 때문에 겨울에 동해 쪽 사면은 북서계절풍의 바람받이가 되어 강설일수가 지속되고, 태평양 쪽 사면은 건조한 바람이 불면서 청천(晴天)일수가 지속되는 대조적인 기후분포를 보인다. 기후구(氣候區)는 겨울의 기후차이에 의해 동해 사면과 태평양 사면 및 그 중간지역의 셋으로 나뉜다. 연강수량은 1,600∼1,700mm로 세계의 연평균강수량 1,000mm에 비해 상당히 많다. 특히 그와 같은 많은 강수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것은 장마와 태풍이다.

장마와 태풍이 가져오는 강수량은 해에 따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장마가 연강수량의 10∼40%, 태풍이 10∼35%로서, 비율은 남쪽으로 갈수록 커진다. 그 외 남부와 중부지방에서는 초여름에 장마가 잦다. 장마와 태풍은 일본의 수자원 확보에 크게 기여하는 반면 자연재해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즉, 장마가 길어지면 동북일본을 중심으로 냉해가 발생하고, 또 태풍이 잦거나 강한 태풍이 내습하면 상습적인 풍수해를 일으켜서 세계적으로 기상재해가 많은 나라가 된다.

겨울에는 시베리아 기단, 여름에는 오가사와라 기단에 덮인다.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받는 겨울은 현저하게 한랭하고, 또 동해사면은 북서계절풍이 가져오는 강설로 해서 세계 굴지의 적설지(積雪地)를 이룬다. 여름에는 전국토가 오가사와라 기단의 영향하에 들어 고온다습한 날씨가 지속된다. 봄·가을에는 양쯔강[揚子江]기단이 이동성 고기압이 되어서 일본을 덮고, 그 뒤를 저기압이 이동해 오기 때문에 날씨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 장마는 오호츠크해기단의 영향에 의한 현상이고, 열대성 저기압(태풍)은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연평균 4·5회 정도의 빈도로 혼슈·규슈에 내습한다.
2. 주민
1) 종교

일본인은 두 가지 이상의 종교를 가지는 사람이 많다. 종교별 신도수는 불교가 8400만 명, 신도(神道:자연숭배·조상숭배를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고유종교로, 神社를 중심으로 발달한 神社神道가 주류]가 9200만 명를 차지하여 일본의 양대 종교가 되고 있고, 그 밖에 신·구교를 합친 그리스도교가 84만 명 있다.
3. 역사
1) 선사시대
일본역사에서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는 일본의 신석기시대를 조몬식토기[繩文式土器]의 보급에서 연유하여 조몬[繩文]시대라고 부른다. 조몬시대인은 수렵·어획 및 식용식물의 채집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이민족이 아니라 현대의 일본인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이 논쟁 끝에 인류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이다. 그러나 제작된 조몬식토기에 현저한 지역차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전국토에 걸친 집단을 구성할 만한 결합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유적의 밀도로 보면 혼슈 중부 이동(以東)의 동북일본이 서남일본보다 그들의 생활무대로 적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BC 3세기경 서남일본에 한반도에서 미작(米作)농업이 전래되어 야요이[彌生]시대가 시작되자 일본역사는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야요이시대인은 금속기를 사용하여 도검(刀劍) 등 무기 외에 동탁(銅鐸) 등 제기(祭器)를 제작하였다.

야요이시대에는 조몬시대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생산력의 발전속도가 빨라지고 움집[竪穴住居]에 바닥이 높은 곡물 저장창고가 있는 100호 이상으로 된 취락이 발달하였다. 아직 공동체적인 사회구성이긴 하면서도 족장(族長)이 존재하고 사유재산과 신분·계급의 제도가 싹트기 시작한 사실은 유물·유적 및 문헌으로써 추정할 수 있다. 1세기 후반의 중국의 사서(史書) 《한서(漢書)》에 의하면, 왜인(倭人)은 100여 개국으로 나뉘어 한(漢)왕조에 조공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기원 전후에 소국가적인 사회조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지》에는 3세기에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다스리는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을 중심으로 하는 30에 가까운 나라로 된 연합국가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마타이국이 기타큐슈[北九州]에 있었는지, 긴키[近畿]의 야마토[大和:현재의 奈良縣에 해당되는 옛 행정구역]에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주장이 갈리고 있으나, 어쨌든 국가통일의 기운이 성숙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신분의 계층질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고대
일본의 고대사회는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이 지배하는 국가가 성립되고, 뒤이어 율령제도(律令制度)에 입각한 국가체제가 유지된 4세기 초에서 12세기 말에 이르는 시대이다. 긴키내(內)을 중심으로 하여 오진왕릉[應神王陵], 닌토쿠왕릉[仁德王陵] 등 거대한 능묘를 비롯한 많은 분묘가 조영된 고분시대인 4세기 초에는 긴키내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하여 기타큐슈까지를 포괄하는 통일국가가 생겨나서 점차 전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세습제를 확립한 오키미[大君:王]가 군림하였다.

소국(小國)의 수장(首長)들은 조정 내부에서 귀족계급을 형성하여 성(姓:한국의 姓에 해당하는 氏 위에 덧붙여서 가문의 격을 표시했던 세습적인 칭호)을 수여받고,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였다. 4세기 말엽에 백제에서 한자(漢字)·유교가 전래되고, 6세기 중엽에는 역시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일본의 문화수준이 급격히 높아졌으며, 불교를 정치기조로 삼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 등에 의해 각지에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뒤이어 645년에 씨성(氏姓)사회를 타파하고 중앙집권적인 율령국가를 수립할 것을 목적으로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단행되었으며, 덴무[天武]왕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왕의 신성(神聖)이 강화되어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율령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의 원칙이 수립됨으로써 농민은 일정한 토지를 배당받아 조(租)·용(庸)·조(調)의 세(稅)를 부담하게 되었다. 그 뒤 견당사(遣唐使)의 파견에 의해 당문화(唐文化)를 흡수한 조정은 710년 나라[奈良]에 광대한 도읍 헤이조경[平城京]을 건설하였다.

그 후 교토[京都]로 천도하기까지의 약 80년 간을 나라시대라고 부른다. 그 시대에 조정에서는 국력을 기울여서 도다이사[東大寺]의 대불(大佛) 및 여러 거찰(巨刹) 조영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현란한 불교문화가 꽃피었다. 일본의 고대사에서 조몬시대로부터 야요이시대로의 전환이 전적으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선진적인 문화의 영향에 힘입은 결과였다. 그 후 일본이 그 정치중심지를 긴키지방으로 옮겨 통일국가를 이룩한 고분시대에서 나라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문화 역시 한국의 고대문화의 절대적인 영향 밑에 자라난 문화였다.

그 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등, 특히 백제가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또 백제 멸망 후에는 그 유민(遺民)이 다수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그들 백제인과 고구려인 등이 한학, 유학, 불교 및 회화, 불상조각, 사찰건축 등의 문화예술 외에, 생활용품 제조기술, 관개시설 축조기술 등을 일본인에게 전수함으로써 그 문화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당시의 중심적 정치무대였던 나라분지[奈良盆地]를 중심으로 구다라[百濟], 와니[和爾:王仁의 音譯] 등 지명이나 구다라사[百濟寺:大安寺의 옛이름이자 별칭], 구다라사지[百濟寺址], 구다라관음[百濟觀音:法隆寺에 있는 목조 관음보살상으로 일본의 국보] 등으로 불리는 문화적인 유적·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사실로도 백제를 비롯한 한국 고대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두드러진 문화유산 중 백제인·고구려인의 손으로 된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승려의 정치개입 및 다이카개신에 공이 있었던 후지와라[藤原] 일문을 비롯한 귀족계층의 실권장악으로 왕 중심의 율령제는 난국에 직면하게 되었다.

794년에 간무[桓武]왕은 교토[京都]에 헤이안경[平安京]을 조영하여 도읍을 옮기고 율령체제의 재편성을 시도하였으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율령체제는 점차 붕괴되어 갔다. 후지와라 일문은 외척(外戚)관계를 이용하여 섭정(攝政) 또는 간파쿠[關白:왕을 보좌하여 정치를 한 令外의 관직]로서 왕의 권능을 대행하는 셋칸정치[攝關政治]를 자행하였다. 후지와라 일문 등 상류귀족은 광대한 장원(莊園)을 소유하고, 중·하류의 귀족은 고쿠시[國司:지방관]가 되어 임지에서 수탈을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율령제는 완전히 붕괴되고, 각지에 무사단(武士團)이 지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중엽 이래 다이라[平] 일족, 미나모토[源] 일족의 두 무가(武家)가 각축하다가 미나모토가 정권을 획득하여 가마쿠라[鎌倉]에 바쿠후[幕府]를 개설하였다. 교토 천도 이후부터 가마쿠라 바쿠후가 개설되기까지의 기간을 헤이안시대[平安時代]라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승려 사이초[最澄]에 의해 천태종(天台宗)이, 구카이[空海]에 의해 진언종(眞言宗)이 크게 보급되었고, 사찰은 광대한 사령(寺領)을 소유하면서 권세를 부렸다. 또 귀족들 사이에 국풍문화(國風文化)가 일어나서 가나 문자[假名文字]가 보급되었다.

3) 중세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열고, 각국(各國:國은 고대 이래의 일본의 지방행정단위)에 슈고[守護:군사 및 반란 진압 등을 맡은 관리]·지토[地頭:토지관리·年貢 징수 등을 맡은 관리]를 두어 세습적인 무가(武家)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종래의 귀족세력도 쇠퇴하지 않아 귀족과 사사(社寺:神社와 寺刹) 등 장원 영주적 지배와 무사 영주적 지배의 2원 지배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바쿠후의 실권은 쇼군[將軍 :막부의 세습적인 국가통치권자] 밑에서 정치를 통괄하는 싯켄[執權]의 직을 맡은 호조[北條] 일족에게 넘어가고, 1221년에는 조정의 권력회복을 꾀하여 고토바[後鳥羽]왕이 난을 일으켰다.

바쿠후는 난을 진압하여 지배권을 확립했으나, 2회에 걸친 원(元)의 침공을 받아 쇠퇴해갔다. 바쿠후의 지배체제의 쇠퇴와 더불어 각지에서 바쿠후 반대의 기운이 고조되고, 그 세력을 규합한 고다이고[後醍]에 의해 1333년 바쿠후는 붕괴되었다. 미나모토에 의한 바쿠후가 가마쿠라에 존속한 기간을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라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신흥 무사계급의 성장과 더불어 정토종(淨土宗)을 비롯한 많은 신흥종파가 일어났다.

문화는 계층적으로는 귀족에서 무사로, 지역적으로는 교토에서 각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가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진 뒤 고다이고왕은 왕 독재에 의한 관료국가의 수립을 기도하였으나 무사계급의 반대에 부닥쳤다. 무사 출신의 아시카가다카우지[足利尊氏]가 새로운 왕을 옹립하여 북조(北朝)를 세우자 한동안 남북조(南北朝)가 대립하는 내란이 지속되었으나, 결국 아시카가가 승리하여 1336년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바쿠후를 세웠다. 그러나 무로마치 바쿠후는 처음부터 기초가 취약하여 내분이 잦더니, 마침내 중앙정부로서의 위력을 상실하고 교토를 중심으로 한 일개 지방정부 체제에 불과한 처지가 되었다.

바쿠후에서 임명한 슈고는 점차 독립하여 임국(任國)을 영지화하고 슈고다이묘[守護大名], 즉 슈고의 신분에서 성장한 다이묘[大名:領主]가 되었으며, 다시 그들이 완전히 독립하여 상호 항쟁하는 전국(戰國) 다이묘가 됨으로써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접어들었다. 무로마치 바쿠후가 명맥을 유지한 1572년까지를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라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전국시대가 겹치기도 하여 고대에서 전해 내려온 문화재를 많이 상실하였으나, 반면 귀족화한 무사계급에 의해 기타야마문화[北山文化]·히가시야마[東山]문화로 불리는 문화가 일어나고, 또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일어난 도시의 상공업자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도(茶道), 가도[華道:꽃꽂이], 노가쿠[能樂], 수묵화(水墨畵) 등 새로운 문화가 일어났다.

4) 근대
전국시대 말기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중앙으로 진출하여 아시카가의
쇼군[將軍]을 축출하고,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는 전국통일을 완수하기 전부터 검지(檢地), 즉 농지측량이나
농민소유의 도검몰수(刀劍沒收:농민이 무사가 되는 것을 방지) 등을 단행하여
봉건적 토지소유제 확립과 신분제의 확립을 도모하였다. 1590년에 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는 1592∼93년, 1597∼98년의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여 조선에
막대한 전쟁 피해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거듭하다가 전쟁에 실패한 채 그의 사망을 계기로 철군하고 말았다.

그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적대세력을 물리치고 1603년에 바쿠후를
열기까지의 시대를 아즈치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라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웅장한 성관(城館)의 조영과 호화로운 무사저택의 건축 등을 중심으로 한
모모야마문화[桃山文化]가 결실을 맺었다. 또 그 시대에는 조총(鳥銃) 등 새로운
문물이나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어 이른바 남만문화(南蠻文化:포르투갈인의 내항으로
전래된 유럽 문화)가 일어났다.

한편 조선침략 때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그 후의 일본의 도자기공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또 그때 일본에 전해진 우리 활자와 활판기술은 뒤에
게이초판[慶長版]이라고 부르는 일본 최초의 목활자(木活字) 인쇄의 서적을 나오게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江戶:현재의 東京]에 도쿠가와 바쿠후(일명 에도
바쿠후)를 개설한 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폐쇄하기까지의 약 260년 동안을
에도시대[江戶時代]라고 한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봉건제도의 강화를 도모하여 쇼군[將軍]을 정점으로 하는 바쿠한 체제[幕藩體制:藩은 大名의 영지 또는 그 관할조직]를 확립하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엄중히 하였다. 전국을 200개 이상의
다이묘령[大名領]과 바쿠후 직할령으로 분할하고, 무사는 다이묘의 성관(城館)이
있는 성읍(城邑)에 거주시켰기 때문에 소비도시로서의 성읍이 다수 생겨났다. 또
그리스도교를 엄금하고 쇄국을 단행하였다.

에도시대의 바쿠한 체제를 지탱한 것은 무거운 조세를 부담한 농민이었는데, 농민은 50∼60호로 구성되는 마을에 편입되어 바쿠후 또는 한[藩]에서 파견하는 벼슬아치의 지배를 받았다. 또 농민은 전답의 매매를 금지당하고, 의식주에 대해서도 엄한
구속을 받았으며, 또 오인조(五人組)가 조직되어 납세나 범죄에 대한 연대책임을
강요당했다.

에도시대에는 초기의 분란이 수습되자 그 후에는 태평한 세월이 지속되어 도시의
신흥 상공업자, 즉 조닌[町人]을 중심으로 한 겐로쿠문화[元祿文化]가 긴키지방에
꽃피고, 뒤이어 에도를 중심으로 유흥적인 색채가 짙은 서민문화인 에도문화가
발전하였다.

에도시대 중기 이후 바쿠후와 한(藩)은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고, 그래서 전후
세 차례에 걸친 개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쿠후의 통제력은 점차 쇠퇴되었다.
무사계층의 생활이 어려워져가는 반면 상업이나 가점수업·거간제공업의 발전에
따라 조닌의 경제적 기반은 점차 강화되어, 그들이 문화의 담당자가 되었다.

도쿠가와 바쿠후 말기에는 산업혁명으로 국력이 강화된 구미제국(歐美諸國)이
내항하여 개국을 요구하였는데, 처음 그것을 거절한 바쿠후도 1853년과 1854년의
2차에 걸쳐 함대를 이끌고 온 미국의 M.페리 제독의 압력에 굴하여, 쇄국정책을
포기하였다. 그 결과 격렬한 내분항쟁이 지속되는 와중에서 반(反)바쿠후 세력이
급속히 형성되어 바쿠후체제는 내부로부터 붕괴되었다. 정권유지의 불가능을 깨달은 바쿠후는 1867년 11월 조정(朝廷)에 대한 정권 반환, 즉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제의하고, 다음날 그것이 수락됨으로써 에도시대는 끝을 맺었다.

5) 현대
일본은 대정봉환에 의해 조정이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조신(朝臣)과 반(反)바쿠후의 주동 세력인 사쓰마한[薩摩藩], 조슈한[長州藩] 등 서남웅한[西南雄藩]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하여, 공의세론(公議世論)의 존중과 개국 진취의 방침을 밝힌
5개조의 서문(五箇條ノ御誓文)을 발표하였다. 신정부는 전국을 진압한 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여 수도로 삼고,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라고 고쳤다. 또 봉건적인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급속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정부는 문명개화라고 불린 구미(歐美)의 기술·제도의 직수입을 추진하는 한편, 왕을 신격화하고
신토[神道]에 국교적(國敎的)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사족(士族)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운동을 세이난전쟁[西南戰爭]으로 진압하고, 또
번벌(藩閥) 전제정부 타도를 외치는 민권운동이 일어나서, 정부는 프로이센 헌법을
본 뜬 메이지헌법[明治憲法]을 제정하였다. 정부지도 하에 산업의 근대화가
추진되어, 제1차·제2차의 산업혁명이 달성되었다. 한편 청일(淸日)·러일[露日] 두 전쟁을 일으켜서 타이완[臺灣]·한국·사할린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다시 대륙으로
진출하여 제국주의국가로 변신하였다.

또 영일동맹(英日同盟)에 의해 동(東)아시아에서 발판을 굳히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큰 이득을 얻어 세계열강과 어깨를 겨루는 나라가
되었다. 대전 후 구미제국에 일어난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호헌(護憲)·보통선거 등의 운동이 일어났고 평화주의·국제주의의 풍조가 활발해져서 정당내각(政黨內閣)이 탄생하였다.

또 노동운동이 활발해져서 이른바 다이쇼[大正:明治 다음의 왕(1912~1926) 또는 그
年號] 데모크라시 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쇼와[昭和:大正 다음의 천황(1926∼1989) 또는 그의 연호] 초기에는 세계적 불황의 물결에 휩쓸려서 일본의 경제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륙침략을
꾀하였으며, 점차 군국주의·국수주의의 경향이 강해져갔다.

일본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서 동북 중국에 만주국을 세우고 다시 중국과
충돌하여 중·일(中日)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독일·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고,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명목으로 동부아시아를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영국 등과 대립하여 결국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였고,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6) 근세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은 일본의 비무장화와 민주화를 추진하고, 농지개혁·재벌해체 및 전쟁범죄자의 재판·공직추방을 실시하였다. 또 국민주권 하에 남녀평등 및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일본의 패전에 의하여 한국이 8·15광복을 맞았고, 만주국이 중국에 복귀하였으며, 사할린·쿠릴 열도와 타이완이 각각 소련과 중국에 반환되는 한편 오키나와[沖繩]를 미국이 분할점령하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나 전후에는 한국의 6·25전쟁에 의한 특수경기(特需景氣)로 경제부흥의 발판을 마련한 뒤 1951년의 연합국의 대일(對日) 강화조약(소련 불참)과 미일(美日) 안보조약에 의해 주권을 회복하여 자유진영에 가담하였으며, 장기간에 걸친 보수당정권 밑에서 급속히 경제대국으로 발전하였다. 경제의 급격한 발전에 의해 국민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반면 공해문제·물가상승 등을 초래하였다.

한편 소련·중국 등과 공산국가와도 국교가 회복되어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높아졌다. 1989년 1월 쇼와왕의 사망으로 1990년 11월 아키히토[明仁]가 왕에
즉위하였으며, 연호는 헤이세이[平成]이다. 1955년 이후 38년간 집권한 자민당이 1993년 중의원선거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여 정권을 상실했으며, 같은해 8월
7개의 야당연립정부인 호소카와[細川]정권이 탄생하여 전후 정치에 큰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1994년 6월에는 자민당, 사회당, 신당사키가케 등의 연립정부가 탄생하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 위원장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고, 1998년 7월 자민당 당수인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가 일본의 84대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 4월 5일 재임중 사망한 오부치 게이조의 뒤를 이어 모리 요시로[森喜郞]가 일본의 제85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취임하였다. 2001년 4월에는 자유민주당의 고이즈미 준히치로[小泉 純一郞]가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 3당의 지지로 제87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4. 정치
1) 천황제

일본의 구헌법에서 ‘통치권의 총람자(總攬者)’로 되어 있던 왕은 신헌법에서는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가지지 않는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되어,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따라 형식적인 국사(國事)행위를 하는 데 불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왕과 신도(神道)의 종교적인 연관성도 부정되었다.

2) 국회

일본에서 주권인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기관인 국회는 ‘국권의 최고기관’으로 규정되어 국정의 핵심을 이룬다.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채용했기 때문에 국회는 첫째로 총리 지명권, 중의원(衆議院:하원)의 내각 신임 또는 불신임의 의결권 등을 가진다. 둘째로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으로서 모든 법률안을 심의·의결하는 권한을 가진다. 의안의 제출권은 내각(총리)·의원 양자가 가지나 예산안 제출권은 내각만이 가진다. 또 조약의 승인도 국회의 권한에 속한다. 셋째로 미국적인 삼권분립의 이념에 입각하여 국회는 국정조사권(國政調査權), 재판관의 탄핵재판권을 가지나, 반대로 내각의 중의원 해산권, 최고재판소의 법령 위헌(違憲)심사권에 의해 견제되고 있다.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참의원(參議院)으로 구성되는데, 중의원은 예산안 심의·총리지명·조약비준 등에 관해 참의원보다 우월(優越)한 권한을 가지고, 또 일반 법안에 관해서도 양원의 의결이 다를 때는 중의원이 2/3 이상의 찬성으로 참의원의 의결을 뒤엎을 수 있다. 중의원은 임기 4년으로 의원수는 480명이며, 참의원은 임기 6년, 의원수 247명으로 3년마다 지역구와 전국구의 1/2씩을 선출하고 임기 중 해산은 없다.

3) 내각

일본의 행정권 주체인 내각의 총리는 국회의원 중에서 국회의 의결로 선출된다. 총리는 다른 20명 이내의 국무대신(大臣)을 임명하는데, 그 과반수가 국회의원이어야 한다. 내각은 행정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국회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지며, 개개의 국무위원의 독주는 금지되고 있다. 내각은 일반적인 행정권 외에 국회에 대한 의안제출권·조약체결권·예산편성권·사면(赦免) 결정권·최고재판소 장관지명권(천황이 임명) 및 판사임명권 등 권한을 가진다. 또 헌법이나 법률실시를 위한 정령(政令)을 제정하는 하급입법권을 가진다. 내각 밑에는 각 성(省)·청(廳)이 있다.

4) 지방자치

구헌법에서의 관선지사(官選知事)에 의한 지방행정에 대신하여, 신헌법에서는 주민에 의해 선출된 지사를 장(長)으로 하는 지방공공단체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인정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 및 의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특히 주민의 지방의회 해산청구권, 장(長) 및 의원의 해직(解職)청구권 등은 직접민주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시(市)·정(町)·촌(村) 자치단체의 경찰이나 교육위원 공선제(公選制)가 폐지되고, 재정면에서 중앙의 통제가 강화되는 등 지방자치의 현실은 당초의 기대에 어긋나는 점이 많다.

5) 정당

일본의 주요 정당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⑴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일본자유당(日本自由黨)과 일본민주당(日本民主黨)이 1955년 10월에 보수합동에 의해 성립된 정당으로, 1947년의 일본사회당 내각을 제외하고는 그 전신인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이 1948년 10월 제2차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내각을 출범시킨 이래 계속 정권을 확보해왔다. 1993년 8월 제1야당으로 전락해 '55년체제'가 붕괴되었다. 2001년 4월 고이즈미 준히치로[小泉 純一郞]가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 3당의 지지로 제87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 등을 끌어들여 사회당 연립정권을 발족시켜 다시 여당으로 복귀하고 1996년 무라야마 총일 퇴진 후에는 총재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1998년 오부치 게이조가 당수에 선출되어 총리에 선출되었고, 그는 정권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자유당당수 오자와를 영입해 199년 연립정부를 출범하였다. 자유민주당은 기본정책으로서 외교·안보면에서는 미일 안보조약을 축으로 하여 자위력(自衛力) 증강을 주장하고, 내정면에서는 경제의 고도성장 정책을 펴왔다. 그리고 전쟁포기를 규정한 현헌법의 개정을 기도하고 있다. 주요 지지계층은 농어민, 경영자, 관리직, 판매서비스, 노무직 등으로, 중소도시·농촌에 기반을 두고 있다.

⑵ 일본사회당(日本社會黨):일본노동조합 총평의회(總評議會) 산하의 조직노동자를 중심으로 하여 사무직, 생산공정·판매서비스 노무직, 일부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하며,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94년 연립정부 구성으로 집권한 사회당은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있다. 즉, 비무장중립원칙 포기, 미일방위조약 승인, 자위대합헌론(自衛隊合憲論) 지지, 당명개정검토 등 종래의 정책을 뒤엎는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⑶ 민사당(民社黨):전일본 노동총동맹계(系)의 조직노동자·중소기업자 계층을 지지층으로 하는 도시정당(都市政黨)으로, 야당 중에서는 자유민주당에 가장 가까운 정책을 취하고 있다. 1960년 사회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중도연정을 목표로 결정하였다. 주요 정강정책은 의회정치의 추구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확보다.

⑷ 공명당(公明黨):불교 니치렌종[日蓮宗]의 창가학회(創價學會)가 의회에 의원을 진출시킴으로써 성립된 정당으로, 1955년 지방의회에, 1956년 참의원에, 1967년 이후 중의원에 진출하였다. 중도혁신(中道革新)을 내걸고 있으며, 중소기업자·판매서비스 노무직층을 지지층으로 하는 도시정당이다. 1993년 비(非)자민세력 결집에 공헌했다.

⑸ 일본공산당(日本共産黨):1922년 지하조직으로 결성된 후 전후 합법정당으로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시적으로 세력을 떨쳤으나, 점령군에 의한 탄압 및 과격한 전술로 말미암은 국민의 지지상실 등으로 해서 크게 후퇴하였다. 미일 안보조약 폐기, 비무장중립, 자주방위, 독점자본 본위의 경제성장정책 반대 등 자유민주당에 가장 대결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지층은 자본주의체제의 비판세력으로 지식노동자, 일반노동자 및 중소기업자 등을 들수 있다.

⑹ 기타 정당으로 자민당에서 탈당하여 1993년 결성된 신당사키가케[新黨先驅], 신생당(新生黨)이 있으며, 1993년 중의원 선거에 처음 참여한 일본신당(日本新黨)이 있다.

6) 외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 외교는 대미의존(對美依存) ·반공산권(反共産圈) ·경제중심주의 외교로 특징지을 수 있다. 패전 후 1952년 4월까지의 점령기간 중에는 일본은 외교자주권을 가지지 못하고, 그 대외정책은 미국의 점령정책을 구현하는 선에서 실시되었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소련 등 공산권 제국이 조인을 거부한 가운데 강화조약과 더불어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다시 강화조약 발효일에 중일(中日)조약이 조인되었다.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일본 외교의 반공·대미의존의 노선이 확정되었고, 한편 미일 안보조약의 체결은 군사비 지출을 적극 줄이면서 경제입국의 길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의도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전후의 세계경제를 자유무역의 원칙으로 운영하고 있던 미국에 협력하는 것은 경제를 발전시켜서 국가가 살 길을 열고자 한 일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고, 또 자유무역의 원칙에 크게 지배된 전후의 세계경제 속에서 일본의 경제 중심주의는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일본은 1955년에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맹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취하는 선진 공업제국들 중에서도 점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1956년의 일·소 국교회복과 국제연합 가입에 의해 일본은 국제사회에 복귀하게 되고, 다음해에 기시[岸] 정부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중심주의, 자유주의제국 국가와의 협조,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의 견지라는 외교 3원칙을 발표하였다. 기시 정부에 의한 1960년의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은 양국간의 군사동맹의 성격을 띠었고, 1965년에는 역시 반공·대미의존의 기본노선에 따라 한일(韓日)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른 세계 각지에 대한 경제진출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중국의 UN 가입(1971)을 계기로 국제정치는 다극화 시대로 이행하였고, 1972년의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아시아에는 신정세가 진전되었다. 일본은 그와 같은 아시아의 신정세에 신속한 반응을 보여, 대통령 닉슨의 중국방문 후 같은해 9월에 총리 다나카[田中]가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간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편 종래의 타이완과의 조약을 백지화하였다.

1974년에는 일본·중국간 항공협정이 체결되어 정기항공로가 개설되고, 1978년 10월에는 중공의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 1980년 5월에 총리 화궈펑[華國鋒]이 방일(訪日)하는 등 양국관계의 급속한 강화를 시도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냉전 종식 이후 급속히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경제력에 걸맞는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선회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1992년 6월 UN평화유지활동(PKO)법을 제정하여 패전 후 처음으로 자위대 해외파병의 길을 터놓았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과의 무역역조문제 해결을 강력히 추진함에 따라 일본에 외교·경제상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일본은 서방7개국정상회담에 참여하고 있는 아시아 유일의 국가로 한반도 정세는 물론 중국의 WTO(World Trade Organization:세계무역기구) 가입 등 아시아 지역문제들에 대한 적극적 역할을 하고 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포함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강화를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7) 군사

일본은 헌법으로 전쟁을 포기하고, 육해공군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원칙은 1950년의 6·25전쟁 발발 직후 맥아더 사령부의 지시에 의해 7만 5000명의 경찰예비대가 설치됨으로써 파기되었다. 1952년 미일 안보조약이 발효되자 일본은 미군의 주둔을 인정하는 한편 일본의 재군비 의무 때문에 일본군대는 미국의 원조에 의해 점차 증가되었다.

경찰예비대는 1952년 보안대(保安隊)가 되고, 1954년 자위대(自衛隊)가 되어 명실상부한 군대로 변모하였다. 1960년의 안보조약 개정으로 자위대는 일본의 방위뿐만 아니라 재일미군(在日美軍)의 방위의무를 지게 되어, 미국의 핵우산 밑의 안보체제 하에서 일본은 급속한 군비증강을 이루어왔다. 총병력 약 24만 명으로 이 가운데 육상자위대가 14만 8676명, 해상자위대가 4만 4217명, 항공자위대가 4만 5377명 등으로 세계 유수의 군대로 성장하였다. 2001년 현재 국방비는 461억 달러이다.

5. 경제
1)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경제

전쟁에 패배한 일본의 경제는 해외 식민지·시장의 상실과 생산설비의 파괴로 인해서 붕괴되었다. 그러나 대전 후에 실시된 농지개혁이 종래의 소작농 중심의 농업을 자작농 중심의 농업으로 바꾸어 농촌시장의 확대를 가져왔고, 또 파업권 획득으로 정치적·경제적 지위가 높아진 노동자들이 도시소비시장의 확대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두 잠재적 소비시장의 확대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 한국의 6·25전쟁이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군사보급기지로서의 일본에 특수경기(特需景氣)를 낳게 하여, 중화학공업·경공업에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반공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국제시장에 복귀하는 속도도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부흥하기 시작한 일본경제는 1974년까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그와 같은 고도성장의 원인은 전반기에는 주로 농업인구의 급속한 도시유입에 의해 구미 제국보다 값싼 노동력을 써서 가격경쟁에 임할 수 있었다는 점과 달러화(貨)와 엔화[円貨]의 환율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후반기의 고도성장의 원인은 산업합리화, 기술혁신, 대형투자 등에 의해 일본제품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서 수출을 신장시켰다는 점에 있었다. 모든 산업에 오토메이션을 중심으로 한 기술혁신이 실시되고 1956~1970년까지의 기간에 주요산업의 시설투자는 7배로 늘었으며, 특히 1965년 이후부터는 국제수준을 상회하는 대형투자가 전개되었다.

수출신장은 특히 1956년 이후의 일본경제의 고도성장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1969년에 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은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로 비약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40년 만에 닥친 세계경제의 경기후퇴의 파동은 일본경제에도 장기적이고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 동안 미국이나 유럽 국가의 심한 인플레이션에 의해 일본제품이 국제적 우위에 설 수 있었으나 오늘날 그들 구미 제국의 관세정책으로 해서 일본은 제품의 생산기지를 일본 국내에서 세계 각국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적인 경기후퇴의 파동 속에서 일본 제품의 국제적 점유율을 더욱 높이겠지만, 일본의 국내시장 확대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경제는 구조적·장기적인 경기침체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1991년부터 후퇴하기 시작한 일본경제는 순환적 경기후퇴에 거품경제의 붕괴에 따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불황이 계속되고 있어 공공부문 투자 확대와 같은 경기 부양책을 실시하고 있다.

2) 산업
일본은 선진공업국으로서 제조업의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최첨단의 기술을 보유하고 생산량에서도 세계1위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⑴ 농업:일본의 농업은 오늘날에도 영세경작·가족경영·미작(米作)중심이라는 등의 점등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나, 생산성이나 경영내용면에서는 크게 변질·발전하였다. 변질·발전의 주된 요인으로는 농지개혁 후의 산업구조의 변화가 농산물시장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과 농업의 기계화에 따라 생산력이 증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동안 농민의 이농이 지속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호당 경지면적 규모가 1ha를 약간 웃도는 선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공업화의 추세에 따라 농경지의 감소가 동시에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세농가의 계속적인 이농과 더불어 근래 대규모 농가의 수가 증가되어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의 일본 농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대다수의 농가가 농업만으로는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전체 농가수의 약 87%가 농외소득(農外所得)을 얻고 있는 겸업(兼業)농가라는 점이다. 특히 그 중 약 60%는 농업소득보다 많은 농외소득을 얻고 있다. 농업생산을 부문별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 전의 농업은 한 마디로 ‘쌀과 누에고치’의 농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현재는 ‘쌀과 원예·축산’의 농업으로 바뀌어 국내시장 상대의 상품생산이 보편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전(戰前)·전후(戰後)를 통하여 미작이 일본농업의 주종이 되고 있는 데는 변함이 없으나, 그 경지면적이 크게 감소되어 재배지가 동북일본을 중심으로 한 양질 쌀산지로 집중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전작부문에서 그 신장이 현저한 것은 과수와 채소이다. 과수 작부면적은 전전의 약 3배에 이르렀는데, 귤은 중부지방 이남의 산사면 지역, 특히 키타큐슈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고, 사과는 아오모리현[靑森縣], 나가노현[長野縣]이 주산지다. 채소는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종래의 근교농지가 한층 바깥쪽으로 확산되어 가는 한편 미나미시코쿠[南四國], 미나미큐슈[南九州], 홋카이도[北海道] 등지에 원교(遠郊) 농업의 발달이 현저하다. 축산은 전전부터 산지형성이 되어 있었던 홋카이도의 젖소사육을 제외하고는, 전후에는 소비시장과의 관계 때문에 대도시 근교에서 집중적으로 사육되고 있다. 낙농업은 홋카이도가 대표적이고 그 외 게이힌[京濱]·한신[阪神] 공업지대의 주변 지역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⑵ 임업:일본은 국토의 약 70%가 삼림으로 덮인 세계 유수의 삼림국이다. 인공림은 전체의 약 33%이고, 수종은 삼나무·노송나무·소나무 등 침엽수와 졸참나무, 너도밤나무, 상수리나무 등 활엽수가 대략 반반을 차지한다. 국내 소재(素材) 생산량은 연간 3800만∼4500만㎡에 달하나 국내수요가 많아 미국, 말레이시아, 러시아 등지로부터의 수입재가 국산재를 웃돌고 있다.

⑶ 수산업:일본은 북태평양 서안어장의 중심어업국으로 세계 제1의 어획량을 올리고 있다. 연안어업은 공해의 격화로 한계점에 도달해 있고, 또 어업가구도 감소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전세계의 해양에 진출한 원양어업에 의해 어획량은 계속 늘고 있다. 한편 일본인은 전통적으로 생선을 많이 먹는 민족으로, 국민 1인당 물고기소비량은 세계 제1위이다.

⑷ 광업·에너지자원:일본에서 산출되는 지하자원은 종류가 많고, 분포도 전국에 걸쳐 있으나 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매장량이 극히 미미하다. 국내에서 자급할 수 있는 것은 석회석과 황화광(黃化鑛) 정도이고, 그 밖에 비교적 산출량이 많은 구리광[銅鑛]의 자급률이 1.3%이며, 철광석은 2%, 석유는 0.3%에 불과하다. 석탄은 일본의 최대자원으로 규슈의 지쿠고[筑後]탄전, 홋카이도의 이시카리[石狩]탄전이 유명하다. 석유는 니가타[新潟]유전, 아키타[秋田]유전이 있으나 생산량이 적어 대부분을 수입한다.

종래 수력을 주로 하던 발전은 경제적으로 유리한 낙차지점의 개발이 거의 완료되자 화력발전으로 전환되었는데, 1962년부터 화력발전량이 수력발전량을 능가하였고, 1980년에는 화력발전량 67.1%, 원자력발전량 17.4%, 수력발전량 15.5%, 1999년에는 화력발전량 58.91%, 원자력발전량 30.31%, 수력발전량 8.35%의 비율이 되었다. 수력발전소는 대부분 혼슈 중앙부의 산지에 댐식 발전소로 건설되어 온 데 대하여, 화력발전소는 임해(臨海) 공업지대에 건설되어 있다. 원자력발전소는 각지에 분산 건설되어 있다.

⑸ 공업:공업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1950년 이후 설비투자의 증대, 기술혁신의 진전에 따라 중화학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신흥품목의 공업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 결과 종래부터 모든 부문의 공업이 현저한 집중률을 보여 온 도쿄[東京], 가와사키[川崎], 요코하마[橫濱] 등지를 중심으로 한 게이힌[京濱] 공업지대를 비롯하여, 나고야[名古屋], 욧카이치[四日市], 도카이[東海] 등지를 중심으로 한 주쿄[中京] 공업지대, 오사카[大阪], 아마가사키[尼崎], 고베[神戶] 등지를 중심으로 한 한신[阪神] 공업지대 등 대공업지대에 공업집중이 진척되는 동시에 그 주변지역에 신흥공업도시들이 확산되어 나갔다.

그 외 대공업은 나가사키[長崎]와 사세보[佐世保]의 조선공업, 노베오카[延岡]와 미나마타의 화학공업, 미이케[三池]탄전과 결부된 오무타[大牟田]의 화학공업, 오이타[大分]의 철강업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위의 공업지대를 연결하는 태평양 쪽의 임해부(臨海部)에는 고도성장기에 석유화학·철강 등을 기간으로 하는 콤비나트가 잇따라 건설되어, 일본 공업생산의 약 80%를 차지하는 이른바 ‘태평양 벨트 지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의 구성을 보면 1955년에는 아직 경공업이 우세하여 전체 공업생산의 55.4%를 차지했는데, 그 후 중화학공업의 신장이 현저하여 중화학공업이 1967년에는 62%, 1974년에는 67%로 계속 그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특히 성장이 두드러진 것은 기계공업으로, 1967~1972년에 걸쳐 14.7%에서 32.3%로 배 이상의 신장률을 보였고, 반대로 섬유공업과 식품공업의 비율저하가 심하였다. 전체 공업제품 출하액은 1970년 이후에도 지속적인 증가를 보여 1974년에는 약 127조 엔을 기록했으나, 1974년의 제품출하액의 상승률은 공업생산자 물가지수를 밑돌아 실질적으로는 마이너스 성장이 되었다.

그것은 1973년의 석유파동 이후의 인플레이션과 불황이 경제의 고도성장에 종지부를 찍고 산업계가 저성장시대에 접어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1980년대의 평균경제성장률은 4%였다. 1992년~1995년 사이 경제는 1980년대의 과잉투자와 버블경제로 인하여 성장률이 떨어졌다. 그러나 1996년대의 낮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3.9%의 경제성장률을 나타냈다. 1997~1998년에는 금융산업과 부동산 시장의 혼란으로 전후 최대의 경기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 1998년에 국내총생산 성장률 0.8%을 나타낸 이후 1999년과 2000년은 1%대로 올라갔으나 2001년에는 다시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다.

기업의 규모별로 일본의 공업을 보면, 한편으로는 세계의 대기업으로서 선진국가의 일류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국외에 많은 자회사(子會社)를 가진 다국적기업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거나 한 대기업이 각 부문에 약간씩 있으나, 대부분의 기업의 공장은 규모가 영세하여 하청(下請)·재하청의 형태로 대기업에 종속되어 있다.

일본의 공업은 서구의 선진국에 비해 중소기업의 비중이 매우 높으면서도 대기업과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므로 고용기회의 확대 및 해외 경쟁력 강화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일본의 공업은 대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과밀하게 집중된 탓으로 해서 대기·수질 오염을 비롯한 각종 공해를 일으키고, 또 교통난, 주택난 등 도시문제도 심각하다. 따라서 지역주민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저항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3) 교통

일본은 철도의 발달이 현저하여 철도망의 밀도는 세계 제4위이고 1996년 현재 철도연장 2만 7318㎞, 여객수송은 제1위이다. 해안을 따라 주요간선이 달리고, 지방선이 간선에서 내륙으로 분기하여 대체로 사다리 모양의 철도망을 형성한다. 한편, 일본 철도는 협궤(狹軌)인데, 1964년 교통량이 많은 도쿄~오사카 간에 표준궤도의 고속철도인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이 개통되었고, 현재 산요[山陽]·도호쿠[東北]·조에쓰[上越] 신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전국을 고속 신칸선으로 연결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대도시 주변에도 철도가 집중적으로 부설되어 여객수송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간선과 지방선의 교통수요의 차가 격심하여 교통의 지역적 격차가 커져 가는 데 문제점이 있다. 국내 교통은 최근에 사유화된 철도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신간센이라 불리는 고속열차가 도쿄와 오사카 사이의 520㎞를 3시간 정도에 달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동차교통이 급격히 발전하여, 철도와 경쟁하는 관계에 있다. 도메이[東名:東京∼名古屋] 및 메이신[名神:名古屋∼神戶] 두 고속도로를 비롯한 자동차도로가 뒤를 이어 건설되었으나, 반면 도로정비가 자동차의 급증을 뒤따르지 못하여 도시지역의 교통마비가 심화되어가고 있다. 오로연장은 1997년 현재 12만 12013㎞로 포장률은 74.8%이다.

일본의 상선대(商船隊)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거의 괴멸되었으나, 전후 정부의 원조에 의해 계획 조선이 추진되어 세계 제2의 상선국이 되었다. 산업 에너지의 전환에 따라 탱커를 비롯한 전용선(專用船)이 증가하고, 또 항만의 근대화가 진척되어 컨테이너선이 증가하고 있으며, 연안항로에는 자동차교통의 발전을 반영하여 카페리의 취항이 급증하고 있다. 100톤 이상의 상선이 1997년 현재 6,756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완성된 혼슈와 규슈 사이의 간몬[關門]해저 터널을 시작으로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세이칸해저터널(53.8km)과 혼슈와 시코쿠를 연결한 15km의 세토대교[瀨戶大橋]가 1988년 개통되어 4개의 큰 섬을 하나로 연결하는 교통망이 완성되었다.

일본항공(日本航空:JAL)을 주축으로 하는 항공교통은 매년 10% 이상씩 증가하는 국내외 승객들과 함께 발전하고 있다. 1980~1995년 사이에 국제 항공 승객수는 490만 명에서 1450만 명으로 늘었고 일본의 항공 여객수도 4350만 명에 달했다. 1954년 도쿄∼샌프란시스코선을 개설한 이래, 1966년·1967년에는 뉴욕 노선·세계일주 노선을 개설하고, 1967년에는 시베리아 경유 모스크바 노선을 열었으며, 다시 1974년에는 대(對)중국 노선을 열었다.

국내 항공교통의 발달도 현저하여 도쿄∼오사카 간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정기항공로가 열려, 국내 간선에 취항하고 있는 일본항공의 국내·국제노선이 차지하는 비율은 6:4로 국내노선의 비중이 크다. 도쿄의 국제공항으로는 종래 도쿄도[東京都]의 오타구[大田區]에 있는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이 사용되어 왔으나, 국제·국내선 항공기의 폭주로 1978년에 지바현[千葉縣] 나리타시[成田市]에 신도쿄국제공항을 만들었는데 1997년 현재 38개국의 50개 항공사가 매일 2540만 명의 승객과 160만 톤의 수화물을 취급하고 있다. 승객수는 세계에서 6번째이고 수화물의 양은 세계 최고이다. 하네다 공항은 국내선 전용공항으로 바꾸었다. 1994년 오사카 근처 해상에 간사이[關西]신국제공항이 완공되었다.

4) 관광

일본은 화산, 해안 등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온천이 많아서 자연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교토, 나라, 가마쿠라[鎌倉] 및 도쿄 등 옛 정치중심지에는 역사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하며, 그 밖에 전국 각지에 성관(城館)·사적을 비롯하여 사사(社寺:神社·寺刹) 등이 많이 있다. 또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대도시에서는 고층건물·번화가, 공원, 박물관, 미술관 등 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의 도시적인 관광자원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일본인은 근래 대중 관광여행의 시대를 맞게 되어, 관광지·관광시설의 개발이 전국적으로 활발하다. 한편 외국인 관광객의 수도 급속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는 도쿄를 찾는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고, 또한 교토, 오사카, 나라·나고야, 하코네[箱根], 닛코[日光], 가마쿠라, 이세[伊勢], 고베, 히로시마[廣島], 나가사키[長崎] 등지도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국제적인 관광도시이다.

5) 무역

일본의 무역은 주종산업인 공업에 필요한 원자재나 에너지 자원을 수입하고 공업제품을 수출하는 가공무역의 성격이 짙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의 전과 후에는 수출입품목·무역상대국의 양면에 걸쳐 큰 변화가 있다. 즉, 전전(戰前)에는 면직물·생사(生絲)를 중심으로 한 섬유제품이 수출총액의 과반을 차지하고, 목화를 중심으로 한 섬유원료가 수입총액의 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또 당시의 주요 무역상대국은 아시아 제국, 특히 중국이었고, 생사수출과 목화수입이 많은 미국이 그 뒤를 이었다.

전후에는 중화학공업의 현저한 발달로 해서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어, 1998년 수출은 4400억 달러이고 수입은 3190억 달러, 2001년 수출은 4500억 달러, 수입은 3550억 달러이다. 무역상대국으로는 전후의 정치·경제정세를 반영하여 특히 미국과 거래가 많은데, 근래 약간 감소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수출은 30%, 수입은 19% 정도의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2000).

1998년 현재 수출에서는 아시아 37.9%, 유럽 20.4%, 북미 35.6%, 남미 1.9%, 아프리카 1.8% 남태평양국가 2.6% 순이다. 수입에서는 아시아 46.2%, 유럽 16.7%, 북미 27.4%, 남미 2.6%, 아프리카 1.4%, 남태평양국가 5.6%순이다.

품목별로 보면 수출에서는 자동차, 반도체 및 전자장비, 기계류, 광학장비, 철강 순으로 주종을 이루고, 섬유제품은 그 비중이 저하되었다. 수입에서는 원유, 섬유류 기계류, 수산물, 반도체와 전자부품, LNG 순이다. 종래의 섬유공업 중심의 원료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원료로 내용이 변질되고 있다.

무역수지는 오랫동안 순조로이 흑자가 지속되어왔으나,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나 원유가격의 급등 등으로 해서 1980년에는 약 113억 달러의 입초(入超)를 기록하였으나 1992년에는 수출 3396억 달러, 수입 2330억 달러로 1070억 달러의 사상최고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 1999년 이후 미국 및 아시아 경제 침체에 따른 수출부진과 엔 약세에 따른 수입의 수요 증가로 인해 무역수지 흑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6. 사회
1) 사회보장

일본의 사회보장제도는 유럽 선진제국에 비하면 그 실시가 몹시 늦었고, 또 현행의 제도는 불비한 점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도 부분적으로 관계법이 제정 ·실시되어 오긴 했으나, ‘국민개보험 ·국민개연금’을 목표로 전국민에 대한 사회보장이 추진된 것은 전후의 1961년부터이다. 즉,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과 연금보험의 두 가지 보험에 가입할 것을 규정하였다.

의료보험은 피보험자와 그 가족의 질병 ·출산 ·사망에 대한 의료 서비스 ·요양수당금 ·매장비(埋葬費) 등을 지급하는 것으로, 임금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과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건강보험의 두 가지로 나뉜다. 연금보험은 노령 ·폐질(廢疾) ·사망에 대해 연금 또는 일시금을 지급하여 본인과 가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보험으로, 임금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후생(厚生)연금 ·공제조합 연금 ·은급(恩給)연금 및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연금제 등이 있다.

그 밖에 공무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용노동자를 대상으로 하여, 실직했을 때 지급하는 고용보험이 있다. 국가예산에서 사회보장 관계비가 차지하는 비율도 해마다 증가하여 1980년에는 21.4%에 달하였고, 1994년 국가 수입의 16.25%에 달했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보장제도 운영상태를 보면, 의료보험과 연금보험이 다같이 가입자의 소득수준과 직역에 따라 보험료의 갹출과 지급액수가 다른 것이, 여럿 병립되어 있어서 제도가 정착되지 못한 데서 오는 모순들을 내포한다. 이는 사회의 급속한 노령화와 출생률 하락으로 인한 인구 감소 추세로 사회복지제도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여러 요인들로 인해 국가연금 재정상태가 위험에 이르자 1995년 일본 정부는 7월에 ‘사회복지제도를 위한 새로운 기구’라는 이름의 자문안을 제출하였다. 특별한 권고사항으로는 공익 간호보험제도의 설립과 사회보장 대상을 가구 단위에서 개인으로 변화시키는 것 등이 있다. 이 안건은 21세기 일본 국민생활을 더욱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재건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2) 노동

일본의 실업률은 1974년에서 1980년까지 1.4∼2.4%의 범위를 유지하여 완전고용을 달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완전고용 상태에 있는 일본의 노동력인구는 25년여 정도 기간에 그 분포가 제1차산업에서 제2차·제3차산업으로 크게 바뀌었고, 또 여성 노동력인구의 증가가 현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헌법과 노동조합법에 의해 노동자의 노동 3권(三權)이 보장되었다.

1950년에는 일본노동조합 총평의회(總評議會)가 결성되어 반공민주노조로서 노동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나, 1951년에 좌파가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노동운동은 내부분열과 재편을 되풀이하였다. 그 뒤 1964년에 기존의 3개 우파 조합이 합동하여 전일본노동총동맹(약칭 同盟)이 결성되자 동맹(同盟)과 총평(總評)이 가장 우세한 두 세력을 형성하여 대립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그와 같은 노동조합의 분열·대립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에는 전통적으로 특성 있는 노사관계가 성립되어 왔다.

한번 채용한 종업원을 정년이 되기까지 해고하지 않는 ‘종신고용제’와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서열을 정하는 ‘연공임금제’의 특수한 노사관계가 경제성장을 촉진한 요인이 되었다는 견해가 오늘날 널리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거품경제로 경기가 침체기에 빠지자 기업체들은 종신고용제를 수정하고 많은 회사들이 정년 이전의 근로자들을 해고하고 새로운 사원을 채용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노동력 부족을 배경으로 임금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현재 유럽 선진국의 임금수준에 도달하였으며, 또 주당(週當) 노동시간도 프랑스, 독일, 영국 등과 맞먹거나 오히려 보다 단축되었다. 한편 기업은 노동력 부족에 대처하기 위하여 경영의 합리화나 생력화(省力化)에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런한 변화와 함께 젊은 근로자들의 사고 방식도 변화하고 있어 점차적으로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들고 있으며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찾아 직업을 옮기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1996년 일본의 15세 이상 취업인구는 6480만 명이고, 실업인구는 220만 명으로 그해 전체노동력의 3.4%를 차지하였다.



3) 교육

일본의 학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학제를 본받았기 때문에 한국의 학제와 일치한다. 소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을 기본으로 하고, 의무교육은 중학교까지 9년간으로 되어 있다. 또 수사(修士:碩士) 과정 2년, 박사과정 4년의 대학원제 및 한국의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2년 과정의 단기(短期)대학제도 한국과 흡사하다. 한국에 없는 학제로는 중학교 졸업자가 입학하는 5년제의 고등전문학교가 있는데, 중급기술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이다. 대학에서 고등학교·중학교·소학교에 이르기까지 학교간 격차가 심하여 입시 체제가 강화되어 있는 점도 한국의 경우와 흡사하다.

4) 매스커뮤니케이션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매스커뮤니케이션은 국가권력의 규제에서 벗어나서 전면적으로 활발해진 반면 인권침해나 국민윤리의 저하를 초래하는 사례가 지적되고 있다. 한편, 일본의 매스미디어, 특히 신문들은 그 동안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주 그릇된 편향성을 드러낸 보도를 함으로써, 일본의 국민여론을 오도하고, 양국의 국민감정을 손상시킨 사례가 적지 않았다.

⑴ 신문:일찍이 1880년을 전후하여 ≪아사히신문[朝日新聞]≫·≪마이니치 신문[每日新聞]≫ 등 오사카계[大阪系]의 양대 신문을 중심으로 대중신문의 시대를 맞아 오늘날에 이른다. 일본의 신문계는 중앙의 대신문·광역 블록지(紙)·현(縣)단위 지방지로 성립되어 있으나 대부분, 특히 대신문은 국내문제에 관해서는 공평·중립을 편집방침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 점에서는 전통적으로 당파성이 짙은 구미의 신문과는 다르다. 근래 스포츠·예능 전문지나 정당지·종교지의 진출도 현저하다. 1998년 현재 주요 조간신문의 부수는 요미우리(1400만 부), 아사히(1200만 부), 마이니치(650만 부)이다.

⑵ 방송:전쟁 전에는 공공방송인 일본방송협회(NHK)만이 존재하였으나 1950년부터 민간방송이 실현되었다. 또 1953년부터 방송이 시작된 텔레비전은 곧 전국에 보급되어 사회·문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최근에는 위성중계·다중(多重)방송·방송대학 설립 등 한층 다채로운 기능을 발휘해 가고 있다. 한편 라디오도 일시적인 쇠퇴를 회복하고, FM방송 등 신분야를 개척해서 독자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TV방송은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이 있다. 민영방송국은 신문사와 연계되어 있고 100여개의 VHF채널과 지역별로 UHF채널이 있다. 민영채널의 운영은 광고 수입에 의존하고 TV방송은 NHK를 제외하고 전일 방송한다. 통신사로는 사단법인 교도통신[共同通信]과 주식회사인 지지통신[時事通信]이 있다.
7. 문화

일본에는 3대 주요 전통극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이 '노'로서 14세기에 탄생했다. 무대 장치는 간단한데, 배우는 가면을 쓰고 전통 의상을 입는다. 배우들은 대사를 읊조리며 매우 천천히 움직인다. 두번째로 가부키는 17세기에 생겨났다. 가부키는 극적인 장면과 동작이 많고 의상은 정교하며 화려하다. 가부키는 관중 가까이에서 연기를 하기 위한 통로(하나미치)를 포함해 무대 장치가 복잡하다. 마지막으로 분라쿠는 인형극의 일종이다. 이는 16세기에 최초로 공연되었다. 인형은 사람의 절반 크기로 거의 실제 사람과 같다. 각 인형은 3사람이 조종하며 이들을 무대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전통 민속 음악 또한 활발하다.

민요, 민속악기연주 및 민속춤 모두가 오늘날 인기를 얻고 있다. 축제에서 민속악기 연주(특히 큰북) 및 민속춤은 관중의 눈길을 끈다. 목판화는 수많은 일본 회화 형태 중 하나이다. 잘 알려진 목판화 형태의 우키요에는 17세기에 탄생했다. 우키요에는 사람 및 자연 풍경, 일상 생활 및 극장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목판화는 지금까지도 매우 인기가 있어 학생들은 간단한 목판화 만들기를 배우며, 더러는 이 방법으로 자기만의 연하장을 만들기도 하다. 일본의 공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도자기, 제지, 직물, 칠기, 그리고 목각이다. 질기고 아름다운 일본 종이(와시)는 손으로 만든다. 이 일본 종이는 예술적이거나 실용적인 용도에 쓰인다. 오늘날 직물에 행해지는 특수 염색 및 직조 기술은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 무늬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칠기는 아름다울뿐더러 잘만 간수하면 몇 해고 보존된다. 가장 인기 있는 색상은 붉은색과 검은색이다. 일본의 도자기 공예는 12,0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도기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일본의 전통 도자기는 수백 년 동안 계승되어왔다. 근대에는 도자기도 그림, 조각과 함께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목각술 또한 전통 일본 예술의 하나다. 정교한 목각술로 사찰 및 신사를 장식하며, 많은 가정에서는 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접시, 나무인형(고케시)등의 작은 장신구를 가지고 있다.

일본 학생들은 학교에서 만요슈와 같은 고대 시집, 겐지이야기와 같은 고대 영웅 소설 및 세이쇼나곤의 옛날이야기와 같은 일기 형식의 에세이 등 일본의 전 문학을 배우고 있다. 현대 문학은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94년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받음으로써 인정받고 있다. 이 밖에도 국제적 명성을 지닌 20세기 작가로는 나쓰메 소세키, 미시마 유키오, 아니자키 존이치로 및 아베 고보 등을 들수 있다.

현대 작품의 인기 있는 또 다른 형태가 만화다. 만화는 일반적으로 각 책마다 새로운 내용을 담은 시리즈물이나, 사회 정보, 역사 또는 기타 논픽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때로 만화영화로 제작되어 극장 및 텔레비전에서 인기리에 상영되기도 한다. 일본의 만화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것에서부터 국제적인 종목에 이르기까지 널리 스포츠가 보급되어 있다. 축구, 전통무술, 겨울스포츠, 야구, 수상 스포츠등이 특히 대중화되어 있다. 외국에 잘 알려진 또 다른 전통 일본 스포츠로는 스모가 있다. 면이나 비단으로 만든 두껍고 무거운 샅바(마와시)만을 두른 거구의 두선수가 서로 쓰러뜨리거나 동아줄을 둘러친 원형의 씨름판 밖으로 밀어내는 경기다. 경기 시간은 보통 1분 미만으로 매우 짧으며, 눈깜짝할 새에 끝나기도 한다. 모든 경기는 정화의 표시로 씨름판에 한줌의 소금을 뿌리는 의식으로 시작된다. 스모 선수들은 열광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10대 중반에 시작하여 수년간 훈련한다.

일본에서는 야구와 축구가 특히 인기 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유명 선수들로 구성된 프로축구팀에 대한 일본 축구팬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프로축구는 1992년 출발과 동시에 성공적인 J리그를 이루게 된다. 또 다른 열렬한 팬들을 가지고 있는 스포츠가 야구다. 전국 고교 야구대회는 매년 봄과 여름에 2회 열린다.

8. 과학기술

일본은 우정성(MPT)이 통신 및 우정 부문의 규제기관으로 통신시장과 기술정책, 면허발부, 요금 및 번호계획 승인, 무선주파수 관리감독 등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52년 일본전신전화사(NTT)가 독점 기업으로 설립되었고, 1953년 KDD가 민영기업으로 설립되어 국제 통신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97년부터는 국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1985년부터 통신시장의 자유로운 참여로 인하여 독점사업을 해오던 NTT와 KDD는 새로운 경쟁시대를 맞이하였다. 1998년 현재 자사 전송설비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1종 사업자가 142개 있고, 제1종 사업자에게 전송설비를 임대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제2종 사업자는 5,870여 개가 있다. 교환망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NTT의 교환망은 1998년 100% 디지털화되었다.

셀룰러 전화서비스는 2000년 현재 이동전화 가입자 6388만 명에게 제공되고 있으며, 데이터 통신은 전용회선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인터넷과 기업의 근거리통신망(LAN)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1997년 7월 현재 인터넷 접속 사업자수는 1종 통신 사업자 8개를 포함하여 2,000여 개에 이르고 있으며, 인터넷 가입자수는 2000년 현재 2706만 명을 넘었다.

1997년 현재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방송사는 아사히 신문사가 소유하고 있는 민영방송사로 아사이 내셔널 브로드캐스팅과 후지 텔레비전 네트워크, 공영방송사인 NHK와 니폰 텔레비전 네트워크(NTV), 도쿄 브로드캐스팅 시스템(TBS)이 있다. 지역 방송사로는 칸사이 텔레캐스팅, 요미우리 텔레캐스팅, 마이니치 브로드캐스0팅 시스템이 있다. 1998년 6월 말 인터넷 접속을 제공하는 30개 사업자를 포함하여 총 41개의 CATV사업자가 제1종사업자로 등록되어 있다.

9. 대한관계

한국과 일본은 예로부터 문화적으로 폭넓게 교류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한국보다 먼저 개국을 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실현한 일본은 근대 열강의 세력이 한국에 밀려들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는 청(淸)·러시아와 더불어 한국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76년 한국은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게 되면서 개국을 하였으며, 그때부터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으로 청·러시아 세력을 물리친 일본은 한국으로 하여금 강제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한일협약(韓日協約)을 맺게 하고,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어 한국에 통감부(統監部)를 설치하였다.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고, 전국에서 의병들의 봉기가 잇따르는 등 거국적인 항일(抗日)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통감부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대체하여 식민지 통치를 실시하였다. 총독부는 무단정치(武斷政治)를 단행하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는 한편, 경제면에서는 한국을 일본의 독점적 상품시장 및 식량·원료 공급지로 개편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먼저 화폐·금융·수송·통신 등의 유통기구를 정비하고, 한국민족자본의 산업자본화를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하에 광대한 토지를 농민으로부터 수탈하였다. 그와 같은 식민지 정치에 대한 항거가 국내외에서 항일의거 및 독립운동으로 계속 나타나다가 1919년 마침내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한편 4월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 후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3·1운동은 일본의 무력 앞에서 수많은 사상자와 투옥자를 낸 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으나, 한국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한편, 일본으로 하여금 종래의 무단정치를 완화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정치의 실시로 언론·출판·결사·집회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허용되어 한글로 된 신문·잡지가 발간되고 각종 단체, 특히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정책전환은 효과적인 식민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비밀결사와 그 운동의 표면화를 노린 계략에 불과하였다. 국내에서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1930년까지 지속되었고, 해외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이 만주 일원 및 시베리아 등지를 거점으로 끈질기게 지속되다가 만주사변 이후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에 통합되었다. 한편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부터 한국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성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력자원 및 값싼 식민지 노동력의 착취를 전제로 일본독점자본의 한국진출이 본격화되었다. 동시에 한국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을 강화하여 한국어교육의 금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의 강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구송(口誦), 신사참배 강요 등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태평양전쟁 중에는 한민족에 대한 탄압과 착취가 한층 심해져서 1938년 ‘지원병제’, 1939년 ‘징용제(徵用制)’가 실시되어 한국 청·장년에게 병역·노역(勞役)이 강요되었고, 1942년에는 지원병제가 ‘징병제’로 바뀌었다. 또 한국학생에게도 일본학생에게 과해진 ‘학병제(學兵制)’가 똑같이 과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각계각층의 한국국민이 농산물 공출, 유기(鍮器)·철물 등 군수물자 공출, 군용기 헌납금 갹출, 송근유(松根油) 채취 등 패색이 완연한 전쟁을 강행하려는 그들의 억지시책에 시달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 한국은 그 동안의 독립운동의 결실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對日)강화조약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여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회담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회담진전을 저해한 주된 요인으로는 1953년 10월 제3차 회담에서의 구보타[久保田]망언사건(일본측의 대표 구보타가 “일본에 의한 1936년 간의 한국통치는 한국에 유익한 것이었다”고 망언한 사건), 1959년 8월 일본과 북한 적십자사 간에 체결된 재일교포 북송협정 및 일본의 독도(獨島) 영유권 주장 등을 들 수 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면서 그 해 11월 최고회의의장 박정희와 일본총리 이케다[池田] 간의 회담,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大平] 메모’ 작성 등 한·일관계의 조속한 타결을 위한 양국의 노력이 경주되어 1965년 6월 22일 ① 기본조약, ② 어업협정, ③ 경제협력협정, ④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협정, ⑤ 문화협정의 5개 협정으로 된 한·일협정이, 이어 1966년 3월에는 무역협정, 1967년 8월에는 항공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후 양국관계는 특히 경제면에서 급속히 진전되어 1967년 이후부터는 한·일정기각료회의를 발족시켜 연례회의를 개최하고 있으며, 1981년 4월 한국측에서 제기한 대일(對日) 차관교섭은 1983년 l월 대통령 전두환과 일본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간의 정상회담에서 최종타결을 보았다.
그 결과 정부개발협력자금 18억 5000만 달러, 수출입은행 차관 21억 5,000만 달러를 합하여 총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연리 6%로 대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일무역적자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시정요구가 있었으나 일본은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가 1993년 11월 대통령 김영삼과 일본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간의 정상회담에서 경제관계의 균형적 발전을 협의하기 위한 ‘한·일신경제협력기구(NIEP)’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국과 일본이 주요 무역상대국이라는 양국 상호간의 인식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미국에 이어 제2위의 수출상대국이면서 동시에 미국을 앞지르는 제1위의 수입상대국이고, 또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미국에 이어 독일과 맞먹는 제2∼3위의 수출상대국이다. 1994년만 하더라도 일본은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이 135억 2285만 달러인 데 비해, 수출은 253억 8998만 달러였다. 1998년에는 수입 122억 4000만 달러, 수출 168억 4000만 달러, 2001년에는 수입 161억 달러, 수출 260억 1000만 달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계속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한·일기본조약을 위배하면서까지 민간차원을 빙자하여 대(對)북한접촉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 정부관계자들의 망언 등으로 한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1994년 5월에는 법무장관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가, 8월에는 환경청장관 사쿠라이 신[櫻井新]이, 10월에는 통산장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가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구미열강으로부터 아시아제국(諸國)을 구하기 위한 방어전쟁이었다”라고 망언을 하는가 하면, 1995년 6월과 10월에는 전(前) 부총리 겸 외무장관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와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한일병탄조약의 합법성을 주장하여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양국이 공동개최하게 되었고 1999년 3월 총리 오부치 총리의 방한 때 한·일문화교류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1998년 10월 대통령 김대중의 국빈 방일시 양국 정상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이에 따른 부속서인 '행동계획'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은 현재 해당 부처별로 후속조치를 추진중이며, 양국 외교부에서 추진상황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2001년 10월과 2002년 3월에는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히치로[小泉 純一郞]가 방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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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000이라고 함다~~!!

일본:아시아 대륙 동쪽에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일본열도를 차지하는 나라.

위치 : 동북 아시아
면적 : 37만 7835㎢
인구 : 1억 2710만 명(2001)
인구밀도 : 336.4명/㎢(2001)
수도 : 도쿄
정체 : 입헌군주제
공용어 : 일본어
통화 : 엔(¥)
환율 : 119.13엔 = 1달러(2001.9)
1인당 국민총생산 : 3만 2035달러(1999)
면적은 37만 7835㎢, 인구는 1억 2710만 명(2001), 인구밀도는 336.4명/㎢(2001)이다. 일본어로는 ‘니혼’ 또는 ‘닛폰’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한서(漢書)에서 수서(隋書)까지 ‘왜(倭)’ 또는 ‘왜국(倭國)’으로 기록하여 왔으며, 한국에서도 일찍이 그렇게 불러 왔다. 북쪽으로 홋카이도[北海道] 북쪽의 소야[宗谷]해협 및 북동쪽의 네무로[根室]해협을 끼고 러시아의 사할린 및 쿠릴열도 남단의 구나시리섬과 대하며, 남쪽으로는 난세이[南西]제도가 타이완[臺灣] 근해까지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동해(東海)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Primorskij Kraj) 및 한국과 대하는데,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쓰시마섬[對馬島]은 부산에서 50km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 등이 산재하면서 태평양에 면한다.
1. 자연
1) 지세
일본열도는 환태평양조산대(環太平洋造山帶)의 일부로 세계의 불안정육괴(不安定陸塊)에 속한다. 태평양 북서부의 융기대(隆起帶)의 정상부가 해면 위에 드러난 것이 일본열도로, 홋카이도,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 등 4개의 큰 섬과 그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난세이제도 및 혼슈 중부에서 남쪽의 태평양으로 이어져 내리는 이즈[伊豆]·오가사와라제도로 구성된다. 호상(弧狀)으로 이어지는 이들 열도의 동쪽에는 각각 일본해구, 난세이제도해구(또는 琉球海溝), 이즈·오가사와라해구가 따르는데, 다같이 깊이 6,000m가 넘는다.

산지·평야는 조산운동의 지사(地史)를 반영하고, 또 습윤온대의 기후 조건에도 영향을 받아 그 배열과 지형이 극히 복잡하다. 일본열도의 지형구분은 지질구조를 기준으로 서남 일본과 동북 일본의 2개로 크게 구별되는데, 그 경계는 혼슈 중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이토이가와-시즈오카 구조선[漁川-靜岡構造線:新潟縣漁川市에서 靜岡縣靜岡市로 이어지는 단층구조선]이다. 지형은 지각운동이 격심했기 때문에 토지의 기복이 크고, 많은 단층에 의해 지루(地壘)와 지구(地溝)로 구획되어 전체적으로 평지가 협소한 산지지형을 이루며, 산지면적은 국토면적의 80%에 달한다. 또 새로운 지각운동의 결과 하안단구, 해안단구, 개석선상지(開析扇狀地), 융기삼각주, 융기해식대지, 해안평야 등이 각지에 형성되어 있다.

동북일본에서는 세 줄기의 산지가 남북방향으로 병행해서 달린다. 그 중에는 기타미[北見]산맥, 히다카[日高]산맥, 오우[奧羽]산맥, 미쿠니[三國]산맥, 에치고[越後]산맥, 간토[關東]산지 등 높고 험준한 산지와 기타카미고지[北上高地]·아부쿠마고지[阿武高地]·데와[出羽]산지 등 구릉성 산지가 있다.

서남일본은 다시 장대한 단층의 중앙구조선에 의해 북쪽(동해쪽)의 내대(內帶)와 남쪽(태평양쪽)의 외대(外帶)로 나뉜다. 기이[紀伊]산맥, 시코쿠산지, 규슈산지 등 외대의 산지들이 높고, 주고쿠[中國]산지, 단바[丹波]고지 등 내대의 산지는 고원상을 이룬다. 혼슈 중앙부에는 통틀어 ‘니혼 알프스’라고 통칭되는 히다[飛]산맥·기소[木曾]산맥·아카이시[赤石]산맥이 고도 3,000m급의 고봉들을 이고 솟아서 일본의 지붕을 이루며, 일본의 최고봉 후지산[富士山:3,776m]도 이 중앙부에 있다.

화산이 많은 것도 일본 지형의 특색이다. 지시마[千島], 나스[那須], 조카이[鳥海], 후지[富士], 노리쿠라[乘鞍], 하쿠산[白山], 기리시마[霧島]의 7개 화산대에 딸린 화산은 중요한 것만도 150개가 넘는다. 세계 활화산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토의 1/4이 화산재로 덮여 있다. 또 화산군에는 칼데라를 발달시킨 것도 많은데, 특히 규슈에 있는 아소[阿蘇]화산의 칼데라는 규모가 세계 제1로 알려져 있다. 화산대와 관련하여 지진대(地震帶)가 형성되어서 지진이 잦고, 또 각처에 온천도 다수 산재한다.

일본의 하천은 일반적으로 유로(流路)가 짧고, 기울기가 급하다. 하천의 계곡에는 V자곡이 많고, 강수는 그대로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면서 굵은 토사를 운반하여 산지의 곡구(谷口)에는 선상지의 발달이 현저하다. 그 부근에서는 하상(河床)의 퇴적·상승으로 해서 천정천(天井川)을 이루는 하천도 많다. 이시카리강[石狩川], 도카치강[十勝川], 기타카미강[北上川], 모가미강[最上川], 아부쿠마강, 도네강[利根川], 시나노강[信濃川], 덴류강[天龍川], 기소강[木曾川], 요도가와강[淀川], 요시노강[吉野川], 지쿠고강[筑後川] 등이 대하천인데, 유역면적이 가장 넓은 강은 도네강이고, 유로가 가장 긴 강은 시나노강이다.

일본의 평야나 분지는 대체로 규모가 몹시 작고, 각지에 두루 산재한다. 모두 하천의 퇴적에 의한 충적평야인데, 대지(臺地)와 저지(低地)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도네강을 비롯한 여러 하천 유역의 간토[關東]평야는 일본 제1의 평야이다. 그 밖에 홋카이도의 이시카리강 중·하류의 이시카리 평야, 시나노강을 비롯한 여러 하천의 범람원·삼각주·선상지로 된 에치고평야, 기소강 외 몇몇 하천의 퇴적으로 형성된 노비[濃尾]평야, 요도가와강 등 하천의 복합삼각주 및 충적지대 등으로 형성된 오사카[大阪]평야, 지쿠고강의 충적평야인 규슈의 지쿠시[筑紫]평야 등이 중요하다.

해안선은 굴곡이 몹시 심하여 그 총길이는 2만 6000km에 이르며, 해안지형이 다채롭게 발달되어 있다. 구주쿠리하마[九十九里濱浜]해안 ·사가미만[相模灣]연안 ·니가타[新潟]해안 ·미야자키[宮崎]해안에는 넓은 사빈해안이 발달하였고, 산리쿠[三陸]해안, 기이[紀伊]해안,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해안, 니시시코쿠[西四國]해안, 기타큐슈[北九州]해안에는 리아스식 해안, 쓰루가만[敦賀灣] 동안에는 단층해안, 홋카이도 오시마[渡島]반도 남동단의 에산곶[惠山岬]이나 이즈[伊豆]반도의 해안에는 화산해안, 에리모곶[襟裳岬], 무로토곶[室戶岬] 등지에는 해안단구가 있는 융기해안, 난세이제도에는 융기산호초해안 등이 발달하여 극히 변화가 많은 해안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연안에는 대륙붕이 발달되어 있고 쿠로시오[黑潮]·쓰시마 해류 등 난류와 한류인 쿠릴 해류가 교류하여 어족이 풍부하며, 또 동중국해(海) 쪽에 형성되어 있는 대륙붕에는 석탄·석유·천연가스의 매장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기후

일본은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 및 중부 내륙고지(內陸高地)가 아한대다우기후(亞寒帶多雨氣候)에 속할 뿐, 그 밖의 모든 지역이 온대다우기후에 포함된다. 그러나 아시아대륙 동쪽의 몬순아시아 지역에 들어 있으나, 해양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같은 위도에 있는 대륙동안보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더위가 심하지 않다. 한편 일본열도는 남북으로 길어 홋카이도 북단에서 난세이제도 남단까지는 위도차가 22℃나 되고, 따라서 연평균기온도 홋카이도의 와카나이[稚內]에서 6.3℃, 오키나와섬[沖繩島]의 나하[那覇]에서 22.3℃를 보여 남북차는 16℃에 달한다.

혼슈의 육지 너비는 최대 300km 정도인데, 중앙부를 척량산맥이 종주(縱走)하기 때문에 겨울에 동해 쪽 사면은 북서계절풍의 바람받이가 되어 강설일수가 지속되고, 태평양 쪽 사면은 건조한 바람이 불면서 청천(晴天)일수가 지속되는 대조적인 기후분포를 보인다. 기후구(氣候區)는 겨울의 기후차이에 의해 동해 사면과 태평양 사면 및 그 중간지역의 셋으로 나뉜다. 연강수량은 1,600∼1,700mm로 세계의 연평균강수량 1,000mm에 비해 상당히 많다. 특히 그와 같은 많은 강수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는 것은 장마와 태풍이다.

장마와 태풍이 가져오는 강수량은 해에 따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장마가 연강수량의 10∼40%, 태풍이 10∼35%로서, 비율은 남쪽으로 갈수록 커진다. 그 외 남부와 중부지방에서는 초여름에 장마가 잦다. 장마와 태풍은 일본의 수자원 확보에 크게 기여하는 반면 자연재해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즉, 장마가 길어지면 동북일본을 중심으로 냉해가 발생하고, 또 태풍이 잦거나 강한 태풍이 내습하면 상습적인 풍수해를 일으켜서 세계적으로 기상재해가 많은 나라가 된다.

겨울에는 시베리아 기단, 여름에는 오가사와라 기단에 덮인다.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받는 겨울은 현저하게 한랭하고, 또 동해사면은 북서계절풍이 가져오는 강설로 해서 세계 굴지의 적설지(積雪地)를 이룬다. 여름에는 전국토가 오가사와라 기단의 영향하에 들어 고온다습한 날씨가 지속된다. 봄·가을에는 양쯔강[揚子江]기단이 이동성 고기압이 되어서 일본을 덮고, 그 뒤를 저기압이 이동해 오기 때문에 날씨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 장마는 오호츠크해기단의 영향에 의한 현상이고, 열대성 저기압(태풍)은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연평균 4·5회 정도의 빈도로 혼슈·규슈에 내습한다.
2. 주민
1) 종교

일본인은 두 가지 이상의 종교를 가지는 사람이 많다. 종교별 신도수는 불교가 8400만 명, 신도(神道:자연숭배·조상숭배를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고유종교로, 神社를 중심으로 발달한 神社神道가 주류]가 9200만 명를 차지하여 일본의 양대 종교가 되고 있고, 그 밖에 신·구교를 합친 그리스도교가 84만 명 있다.
3. 역사
1) 선사시대
일본역사에서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는 일본의 신석기시대를 조몬식토기[繩文式土器]의 보급에서 연유하여 조몬[繩文]시대라고 부른다. 조몬시대인은 수렵·어획 및 식용식물의 채집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이민족이 아니라 현대의 일본인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이 논쟁 끝에 인류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이다. 그러나 제작된 조몬식토기에 현저한 지역차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전국토에 걸친 집단을 구성할 만한 결합관계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유적의 밀도로 보면 혼슈 중부 이동(以東)의 동북일본이 서남일본보다 그들의 생활무대로 적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BC 3세기경 서남일본에 한반도에서 미작(米作)농업이 전래되어 야요이[彌生]시대가 시작되자 일본역사는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야요이시대인은 금속기를 사용하여 도검(刀劍) 등 무기 외에 동탁(銅鐸) 등 제기(祭器)를 제작하였다.

야요이시대에는 조몬시대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생산력의 발전속도가 빨라지고 움집[竪穴住居]에 바닥이 높은 곡물 저장창고가 있는 100호 이상으로 된 취락이 발달하였다. 아직 공동체적인 사회구성이긴 하면서도 족장(族長)이 존재하고 사유재산과 신분·계급의 제도가 싹트기 시작한 사실은 유물·유적 및 문헌으로써 추정할 수 있다. 1세기 후반의 중국의 사서(史書) 《한서(漢書)》에 의하면, 왜인(倭人)은 100여 개국으로 나뉘어 한(漢)왕조에 조공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기원 전후에 소국가적인 사회조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지》<위서(魏書)>에는 3세기에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다스리는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을 중심으로 하는 30에 가까운 나라로 된 연합국가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야마타이국이 기타큐슈[北九州]에 있었는지, 긴키[近畿]의 야마토[大和:현재의 奈良縣에 해당되는 옛 행정구역]에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주장이 갈리고 있으나, 어쨌든 국가통일의 기운이 성숙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신분의 계층질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고대
일본의 고대사회는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이 지배하는 국가가 성립되고, 뒤이어 율령제도(律令制度)에 입각한 국가체제가 유지된 4세기 초에서 12세기 말에 이르는 시대이다. 긴키내(內)을 중심으로 하여 오진왕릉[應神王陵], 닌토쿠왕릉[仁德王陵] 등 거대한 능묘를 비롯한 많은 분묘가 조영된 고분시대인 4세기 초에는 긴키내의 야마토를 중심으로 하여 기타큐슈까지를 포괄하는 통일국가가 생겨나서 점차 전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세습제를 확립한 오키미[大君:王]가 군림하였다.

소국(小國)의 수장(首長)들은 조정 내부에서 귀족계급을 형성하여 성(姓:한국의 姓에 해당하는 氏 위에 덧붙여서 가문의 격을 표시했던 세습적인 칭호)을 수여받고,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였다. 4세기 말엽에 백제에서 한자(漢字)·유교가 전래되고, 6세기 중엽에는 역시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일본의 문화수준이 급격히 높아졌으며, 불교를 정치기조로 삼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 등에 의해 각지에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뒤이어 645년에 씨성(氏姓)사회를 타파하고 중앙집권적인 율령국가를 수립할 것을 목적으로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단행되었으며, 덴무[天武]왕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왕의 신성(神聖)이 강화되어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율령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의 원칙이 수립됨으로써 농민은 일정한 토지를 배당받아 조(租)·용(庸)·조(調)의 세(稅)를 부담하게 되었다. 그 뒤 견당사(遣唐使)의 파견에 의해 당문화(唐文化)를 흡수한 조정은 710년 나라[奈良]에 광대한 도읍 헤이조경[平城京]을 건설하였다.

그 후 교토[京都]로 천도하기까지의 약 80년 간을 나라시대라고 부른다. 그 시대에 조정에서는 국력을 기울여서 도다이사[東大寺]의 대불(大佛) 및 여러 거찰(巨刹) 조영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현란한 불교문화가 꽃피었다. 일본의 고대사에서 조몬시대로부터 야요이시대로의 전환이 전적으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선진적인 문화의 영향에 힘입은 결과였다. 그 후 일본이 그 정치중심지를 긴키지방으로 옮겨 통일국가를 이룩한 고분시대에서 나라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문화 역시 한국의 고대문화의 절대적인 영향 밑에 자라난 문화였다.

그 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등, 특히 백제가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고, 또 백제 멸망 후에는 그 유민(遺民)이 다수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그들 백제인과 고구려인 등이 한학, 유학, 불교 및 회화, 불상조각, 사찰건축 등의 문화예술 외에, 생활용품 제조기술, 관개시설 축조기술 등을 일본인에게 전수함으로써 그 문화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당시의 중심적 정치무대였던 나라분지[奈良盆地]를 중심으로 구다라[百濟], 와니[和爾:王仁의 音譯] 등 지명이나 구다라사[百濟寺:大安寺의 옛이름이자 별칭], 구다라사지[百濟寺址], 구다라관음[百濟觀音:法隆寺에 있는 목조 관음보살상으로 일본의 국보] 등으로 불리는 문화적인 유적·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사실로도 백제를 비롯한 한국 고대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두드러진 문화유산 중 백제인·고구려인의 손으로 된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승려의 정치개입 및 다이카개신에 공이 있었던 후지와라[藤原] 일문을 비롯한 귀족계층의 실권장악으로 왕 중심의 율령제는 난국에 직면하게 되었다.

794년에 간무[桓武]왕은 교토[京都]에 헤이안경[平安京]을 조영하여 도읍을 옮기고 율령체제의 재편성을 시도하였으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율령체제는 점차 붕괴되어 갔다. 후지와라 일문은 외척(外戚)관계를 이용하여 섭정(攝政) 또는 간파쿠[關白:왕을 보좌하여 정치를 한 令外의 관직]로서 왕의 권능을 대행하는 셋칸정치[攝關政治]를 자행하였다. 후지와라 일문 등 상류귀족은 광대한 장원(莊園)을 소유하고, 중·하류의 귀족은 고쿠시[國司:지방관]가 되어 임지에서 수탈을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율령제는 완전히 붕괴되고, 각지에 무사단(武士團)이 지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중엽 이래 다이라[平] 일족, 미나모토[源] 일족의 두 무가(武家)가 각축하다가 미나모토가 정권을 획득하여 가마쿠라[鎌倉]에 바쿠후[幕府]를 개설하였다. 교토 천도 이후부터 가마쿠라 바쿠후가 개설되기까지의 기간을 헤이안시대[平安時代]라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승려 사이초[最澄]에 의해 천태종(天台宗)이, 구카이[空海]에 의해 진언종(眞言宗)이 크게 보급되었고, 사찰은 광대한 사령(寺領)을 소유하면서 권세를 부렸다. 또 귀족들 사이에 국풍문화(國風文化)가 일어나서 가나 문자[假名文字]가 보급되었다.

3) 중세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열고, 각국(各國:國은 고대 이래의 일본의 지방행정단위)에 슈고[守護:군사 및 반란 진압 등을 맡은 관리]·지토[地頭:토지관리·年貢 징수 등을 맡은 관리]를 두어 세습적인 무가(武家)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종래의 귀족세력도 쇠퇴하지 않아 귀족과 사사(社寺:神社와 寺刹) 등 장원 영주적 지배와 무사 영주적 지배의 2원 지배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바쿠후의 실권은 쇼군[將軍 :막부의 세습적인 국가통치권자] 밑에서 정치를 통괄하는 싯켄[執權]의 직을 맡은 호조[北條] 일족에게 넘어가고, 1221년에는 조정의 권력회복을 꾀하여 고토바[後鳥羽]왕이 난을 일으켰다.

바쿠후는 난을 진압하여 지배권을 확립했으나, 2회에 걸친 원(元)의 침공을 받아 쇠퇴해갔다. 바쿠후의 지배체제의 쇠퇴와 더불어 각지에서 바쿠후 반대의 기운이 고조되고, 그 세력을 규합한 고다이고[後醍]에 의해 1333년 바쿠후는 붕괴되었다. 미나모토에 의한 바쿠후가 가마쿠라에 존속한 기간을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라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신흥 무사계급의 성장과 더불어 정토종(淨土宗)을 비롯한 많은 신흥종파가 일어났다.

문화는 계층적으로는 귀족에서 무사로, 지역적으로는 교토에서 각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가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진 뒤 고다이고왕은 왕 독재에 의한 관료국가의 수립을 기도하였으나 무사계급의 반대에 부닥쳤다. 무사 출신의 아시카가다카우지[足利尊氏]가 새로운 왕을 옹립하여 북조(北朝)를 세우자 한동안 남북조(南北朝)가 대립하는 내란이 지속되었으나, 결국 아시카가가 승리하여 1336년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바쿠후를 세웠다. 그러나 무로마치 바쿠후는 처음부터 기초가 취약하여 내분이 잦더니, 마침내 중앙정부로서의 위력을 상실하고 교토를 중심으로 한 일개 지방정부 체제에 불과한 처지가 되었다.

바쿠후에서 임명한 슈고는 점차 독립하여 임국(任國)을 영지화하고 슈고다이묘[守護大名], 즉 슈고의 신분에서 성장한 다이묘[大名:領主]가 되었으며, 다시 그들이 완전히 독립하여 상호 항쟁하는 전국(戰國) 다이묘가 됨으로써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접어들었다. 무로마치 바쿠후가 명맥을 유지한 1572년까지를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라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전국시대가 겹치기도 하여 고대에서 전해 내려온 문화재를 많이 상실하였으나, 반면 귀족화한 무사계급에 의해 기타야마문화[北山文化]·히가시야마[東山]문화로 불리는 문화가 일어나고, 또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일어난 도시의 상공업자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도(茶道), 가도[華道:꽃꽂이], 노가쿠[能樂], 수묵화(水墨畵) 등 새로운 문화가 일어났다.

4) 근대
전국시대 말기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중앙으로 진출하여 아시카가의
쇼군[將軍]을 축출하고,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는 전국통일을 완수하기 전부터 검지(檢地), 즉 농지측량이나
농민소유의 도검몰수(刀劍沒收:농민이 무사가 되는 것을 방지) 등을 단행하여
봉건적 토지소유제 확립과 신분제의 확립을 도모하였다. 1590년에 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는 1592∼93년, 1597∼98년의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여 조선에
막대한 전쟁 피해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거듭하다가 전쟁에 실패한 채 그의 사망을 계기로 철군하고 말았다.

그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적대세력을 물리치고 1603년에 바쿠후를
열기까지의 시대를 아즈치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라고 하는데, 그 시대에는
웅장한 성관(城館)의 조영과 호화로운 무사저택의 건축 등을 중심으로 한
모모야마문화[桃山文化]가 결실을 맺었다. 또 그 시대에는 조총(鳥銃) 등 새로운
문물이나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어 이른바 남만문화(南蠻文化:포르투갈인의 내항으로
전래된 유럽 문화)가 일어났다.

한편 조선침략 때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그 후의 일본의 도자기공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또 그때 일본에 전해진 우리 활자와 활판기술은 뒤에
게이초판[慶長版]이라고 부르는 일본 최초의 목활자(木活字) 인쇄의 서적을 나오게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江戶:현재의 東京]에 도쿠가와 바쿠후(일명 에도
바쿠후)를 개설한 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폐쇄하기까지의 약 260년 동안을
에도시대[江戶時代]라고 한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봉건제도의 강화를 도모하여 쇼군[將軍]을 정점으로 하는 바쿠한 체제[幕藩體制:藩은 大名의 영지 또는 그 관할조직]를 확립하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엄중히 하였다. 전국을 200개 이상의
다이묘령[大名領]과 바쿠후 직할령으로 분할하고, 무사는 다이묘의 성관(城館)이
있는 성읍(城邑)에 거주시켰기 때문에 소비도시로서의 성읍이 다수 생겨났다. 또
그리스도교를 엄금하고 쇄국을 단행하였다.

에도시대의 바쿠한 체제를 지탱한 것은 무거운 조세를 부담한 농민이었는데, 농민은 50∼60호로 구성되는 마을에 편입되어 바쿠후 또는 한[藩]에서 파견하는 벼슬아치의 지배를 받았다. 또 농민은 전답의 매매를 금지당하고, 의식주에 대해서도 엄한
구속을 받았으며, 또 오인조(五人組)가 조직되어 납세나 범죄에 대한 연대책임을
강요당했다.

에도시대에는 초기의 분란이 수습되자 그 후에는 태평한 세월이 지속되어 도시의
신흥 상공업자, 즉 조닌[町人]을 중심으로 한 겐로쿠문화[元祿文化]가 긴키지방에
꽃피고, 뒤이어 에도를 중심으로 유흥적인 색채가 짙은 서민문화인 에도문화가
발전하였다.

에도시대 중기 이후 바쿠후와 한(藩)은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고, 그래서 전후
세 차례에 걸친 개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쿠후의 통제력은 점차 쇠퇴되었다.
무사계층의 생활이 어려워져가는 반면 상업이나 가점수업·거간제공업의 발전에
따라 조닌의 경제적 기반은 점차 강화되어, 그들이 문화의 담당자가 되었다.

도쿠가와 바쿠후 말기에는 산업혁명으로 국력이 강화된 구미제국(歐美諸國)이
내항하여 개국을 요구하였는데, 처음 그것을 거절한 바쿠후도 1853년과 1854년의
2차에 걸쳐 함대를 이끌고 온 미국의 M.페리 제독의 압력에 굴하여, 쇄국정책을
포기하였다. 그 결과 격렬한 내분항쟁이 지속되는 와중에서 반(反)바쿠후 세력이
급속히 형성되어 바쿠후체제는 내부로부터 붕괴되었다. 정권유지의 불가능을 깨달은 바쿠후는 1867년 11월 조정(朝廷)에 대한 정권 반환, 즉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제의하고, 다음날 그것이 수락됨으로써 에도시대는 끝을 맺었다.

5) 현대
일본은 대정봉환에 의해 조정이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조신(朝臣)과 반(反)바쿠후의 주동 세력인 사쓰마한[薩摩藩], 조슈한[長州藩] 등 서남웅한[西南雄藩]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하여, 공의세론(公議世論)의 존중과 개국 진취의 방침을 밝힌
5개조의 서문(五箇條ノ御誓文)을 발표하였다. 신정부는 전국을 진압한 후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여 수도로 삼고,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라고 고쳤다. 또 봉건적인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급속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정부는 문명개화라고 불린 구미(歐美)의 기술·제도의 직수입을 추진하는 한편, 왕을 신격화하고
신토[神道]에 국교적(國敎的)인 성격을 부여하였다.

사족(士族)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운동을 세이난전쟁[西南戰爭]으로 진압하고, 또
번벌(藩閥) 전제정부 타도를 외치는 민권운동이 일어나서, 정부는 프로이센 헌법을
본 뜬 메이지헌법[明治憲法]을 제정하였다. 정부지도 하에 산업의 근대화가
추진되어, 제1차·제2차의 산업혁명이 달성되었다. 한편 청일(淸日)·러일[露日] 두 전쟁을 일으켜서 타이완[臺灣]·한국·사할린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다시 대륙으로
진출하여 제국주의국가로 변신하였다.

또 영일동맹(英日同盟)에 의해 동(東)아시아에서 발판을 굳히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큰 이득을 얻어 세계열강과 어깨를 겨루는 나라가
되었다. 대전 후 구미제국에 일어난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호헌(護憲)·보통선거 등의 운동이 일어났고 평화주의·국제주의의 풍조가 활발해져서 정당내각(政黨內閣)이 탄생하였다.

또 노동운동이 활발해져서 이른바 다이쇼[大正:明治 다음의 왕(1912~1926) 또는 그
年號] 데모크라시 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쇼와[昭和:大正 다음의 천황(1926∼1989) 또는 그의 연호] 초기에는 세계적 불황의 물결에 휩쓸려서 일본의 경제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륙침략을
꾀하였으며, 점차 군국주의·국수주의의 경향이 강해져갔다.

일본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서 동북 중국에 만주국을 세우고 다시 중국과
충돌하여 중·일(中日)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독일·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고,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명목으로 동부아시아를 지배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영국 등과 대립하여 결국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였고,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6) 근세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은 일본의 비무장화와 민주화를 추진하고, 농지개혁·재벌해체 및 전쟁범죄자의 재판·공직추방을 실시하였다. 또 국민주권 하에 남녀평등 및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 신헌법이 제정되었다. 일본의 패전에 의하여 한국이 8·15광복을 맞았고, 만주국이 중국에 복귀하였으며, 사할린·쿠릴 열도와 타이완이 각각 소련과 중국에 반환되는 한편 오키나와[沖繩]를 미국이 분할점령하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나 전후에는 한국의 6·25전쟁에 의한 특수경기(特需景氣)로 경제부흥의 발판을 마련한 뒤 1951년의 연합국의 대일(對日) 강화조약(소련 불참)과 미일(美日) 안보조약에 의해 주권을 회복하여 자유진영에 가담하였으며, 장기간에 걸친 보수당정권 밑에서 급속히 경제대국으로 발전하였다. 경제의 급격한 발전에 의해 국민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반면 공해문제·물가상승 등을 초래하였다.

한편 소련·중국 등과 공산국가와도 국교가 회복되어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높아졌다. 1989년 1월 쇼와왕의 사망으로 1990년 11월 아키히토[明仁]가 왕에
즉위하였으며, 연호는 헤이세이[平成]이다. 1955년 이후 38년간 집권한 자민당이 1993년 중의원선거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여 정권을 상실했으며, 같은해 8월
7개의 야당연립정부인 호소카와[細川]정권이 탄생하여 전후 정치에 큰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1994년 6월에는 자민당, 사회당, 신당사키가케 등의 연립정부가 탄생하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 위원장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고, 1998년 7월 자민당 당수인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가 일본의 84대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 4월 5일 재임중 사망한 오부치 게이조의 뒤를 이어 모리 요시로[森喜郞]가 일본의 제85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취임하였다. 2001년 4월에는 자유민주당의 고이즈미 준히치로[小泉 純一郞]가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 3당의 지지로 제87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4. 정치
1) 천황제

일본의 구헌법에서 ‘통치권의 총람자(總攬者)’로 되어 있던 왕은 신헌법에서는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가지지 않는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되어,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따라 형식적인 국사(國事)행위를 하는 데 불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왕과 신도(神道)의 종교적인 연관성도 부정되었다.

2) 국회

일본에서 주권인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기관인 국회는 ‘국권의 최고기관’으로 규정되어 국정의 핵심을 이룬다.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채용했기 때문에 국회는 첫째로 총리 지명권, 중의원(衆議院:하원)의 내각 신임 또는 불신임의 의결권 등을 가진다. 둘째로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으로서 모든 법률안을 심의·의결하는 권한을 가진다. 의안의 제출권은 내각(총리)·의원 양자가 가지나 예산안 제출권은 내각만이 가진다. 또 조약의 승인도 국회의 권한에 속한다. 셋째로 미국적인 삼권분립의 이념에 입각하여 국회는 국정조사권(國政調査權), 재판관의 탄핵재판권을 가지나, 반대로 내각의 중의원 해산권, 최고재판소의 법령 위헌(違憲)심사권에 의해 견제되고 있다.

국회는 양원제로 중의원·참의원(參議院)으로 구성되는데, 중의원은 예산안 심의·총리지명·조약비준 등에 관해 참의원보다 우월(優越)한 권한을 가지고, 또 일반 법안에 관해서도 양원의 의결이 다를 때는 중의원이 2/3 이상의 찬성으로 참의원의 의결을 뒤엎을 수 있다. 중의원은 임기 4년으로 의원수는 480명이며, 참의원은 임기 6년, 의원수 247명으로 3년마다 지역구와 전국구의 1/2씩을 선출하고 임기 중 해산은 없다.

3) 내각

일본의 행정권 주체인 내각의 총리는 국회의원 중에서 국회의 의결로 선출된다. 총리는 다른 20명 이내의 국무대신(大臣)을 임명하는데, 그 과반수가 국회의원이어야 한다. 내각은 행정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국회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지며, 개개의 국무위원의 독주는 금지되고 있다. 내각은 일반적인 행정권 외에 국회에 대한 의안제출권·조약체결권·예산편성권·사면(赦免) 결정권·최고재판소 장관지명권(천황이 임명) 및 판사임명권 등 권한을 가진다. 또 헌법이나 법률실시를 위한 정령(政令)을 제정하는 하급입법권을 가진다. 내각 밑에는 각 성(省)·청(廳)이 있다.

4) 지방자치

구헌법에서의 관선지사(官選知事)에 의한 지방행정에 대신하여, 신헌법에서는 주민에 의해 선출된 지사를 장(長)으로 하는 지방공공단체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인정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 및 의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특히 주민의 지방의회 해산청구권, 장(長) 및 의원의 해직(解職)청구권 등은 직접민주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시(市)·정(町)·촌(村) 자치단체의 경찰이나 교육위원 공선제(公選制)가 폐지되고, 재정면에서 중앙의 통제가 강화되는 등 지방자치의 현실은 당초의 기대에 어긋나는 점이 많다.

5) 정당

일본의 주요 정당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⑴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일본자유당(日本自由黨)과 일본민주당(日本民主黨)이 1955년 10월에 보수합동에 의해 성립된 정당으로, 1947년의 일본사회당 내각을 제외하고는 그 전신인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이 1948년 10월 제2차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내각을 출범시킨 이래 계속 정권을 확보해왔다. 1993년 8월 제1야당으로 전락해 '55년체제'가 붕괴되었다. 2001년 4월 고이즈미 준히치로[小泉 純一郞]가 자유민주당, 공명당, 보수당 3당의 지지로 제87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 등을 끌어들여 사회당 연립정권을 발족시켜 다시 여당으로 복귀하고 1996년 무라야마 총일 퇴진 후에는 총재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1998년 오부치 게이조가 당수에 선출되어 총리에 선출되었고, 그는 정권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자유당당수 오자와를 영입해 199년 연립정부를 출범하였다. 자유민주당은 기본정책으로서 외교·안보면에서는 미일 안보조약을 축으로 하여 자위력(自衛力) 증강을 주장하고, 내정면에서는 경제의 고도성장 정책을 펴왔다. 그리고 전쟁포기를 규정한 현헌법의 개정을 기도하고 있다. 주요 지지계층은 농어민, 경영자, 관리직, 판매서비스, 노무직 등으로, 중소도시·농촌에 기반을 두고 있다.

⑵ 일본사회당(日本社會黨):일본노동조합 총평의회(總評議會) 산하의 조직노동자를 중심으로 하여 사무직, 생산공정·판매서비스 노무직, 일부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하며,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1994년 연립정부 구성으로 집권한 사회당은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있다. 즉, 비무장중립원칙 포기, 미일방위조약 승인, 자위대합헌론(自衛隊合憲論) 지지, 당명개정검토 등 종래의 정책을 뒤엎는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⑶ 민사당(民社黨):전일본 노동총동맹계(系)의 조직노동자·중소기업자 계층을 지지층으로 하는 도시정당(都市政黨)으로, 야당 중에서는 자유민주당에 가장 가까운 정책을 취하고 있다. 1960년 사회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중도연정을 목표로 결정하였다. 주요 정강정책은 의회정치의 추구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확보다.

⑷ 공명당(公明黨):불교 니치렌종[日蓮宗]의 창가학회(創價學會)가 의회에 의원을 진출시킴으로써 성립된 정당으로, 1955년 지방의회에, 1956년 참의원에, 1967년 이후 중의원에 진출하였다. 중도혁신(中道革新)을 내걸고 있으며, 중소기업자·판매서비스 노무직층을 지지층으로 하는 도시정당이다. 1993년 비(非)자민세력 결집에 공헌했다.

⑸ 일본공산당(日本共産黨):1922년 지하조직으로 결성된 후 전후 합법정당으로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시적으로 세력을 떨쳤으나, 점령군에 의한 탄압 및 과격한 전술로 말미암은 국민의 지지상실 등으로 해서 크게 후퇴하였다. 미일 안보조약 폐기, 비무장중립, 자주방위, 독점자본 본위의 경제성장정책 반대 등 자유민주당에 가장 대결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지층은 자본주의체제의 비판세력으로 지식노동자, 일반노동자 및 중소기업자 등을 들수 있다.

⑹ 기타 정당으로 자민당에서 탈당하여 1993년 결성된 신당사키가케[新黨先驅], 신생당(新生黨)이 있으며, 1993년 중의원 선거에 처음 참여한 일본신당(日本新黨)이 있다.

6) 외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 외교는 대미의존(對美依存) ·반공산권(反共産圈) ·경제중심주의 외교로 특징지을 수 있다. 패전 후 1952년 4월까지의 점령기간 중에는 일본은 외교자주권을 가지지 못하고, 그 대외정책은 미국의 점령정책을 구현하는 선에서 실시되었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소련 등 공산권 제국이 조인을 거부한 가운데 강화조약과 더불어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다시 강화조약 발효일에 중일(中日)조약이 조인되었다.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일본 외교의 반공·대미의존의 노선이 확정되었고, 한편 미일 안보조약의 체결은 군사비 지출을 적극 줄이면서 경제입국의 길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의도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전후의 세계경제를 자유무역의 원칙으로 운영하고 있던 미국에 협력하는 것은 경제를 발전시켜서 국가가 살 길을 열고자 한 일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고, 또 자유무역의 원칙에 크게 지배된 전후의 세계경제 속에서 일본의 경제 중심주의는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일본은 1955년에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맹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취하는 선진 공업제국들 중에서도 점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1956년의 일·소 국교회복과 국제연합 가입에 의해 일본은 국제사회에 복귀하게 되고, 다음해에 기시[岸] 정부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중심주의, 자유주의제국 국가와의 협조,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의 견지라는 외교 3원칙을 발표하였다. 기시 정부에 의한 1960년의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은 양국간의 군사동맹의 성격을 띠었고, 1965년에는 역시 반공·대미의존의 기본노선에 따라 한일(韓日)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른 세계 각지에 대한 경제진출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중국의 UN 가입(1971)을 계기로 국제정치는 다극화 시대로 이행하였고, 1972년의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아시아에는 신정세가 진전되었다. 일본은 그와 같은 아시아의 신정세에 신속한 반응을 보여, 대통령 닉슨의 중국방문 후 같은해 9월에 총리 다나카[田中]가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간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편 종래의 타이완과의 조약을 백지화하였다.

1974년에는 일본·중국간 항공협정이 체결되어 정기항공로가 개설되고, 1978년 10월에는 중공의 부총리 덩샤오핑[鄧小平], 1980년 5월에 총리 화궈펑[華國鋒]이 방일(訪日)하는 등 양국관계의 급속한 강화를 시도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냉전 종식 이후 급속히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경제력에 걸맞는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선회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1992년 6월 UN평화유지활동(PKO)법을 제정하여 패전 후 처음으로 자위대 해외파병의 길을 터놓았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과의 무역역조문제 해결을 강력히 추진함에 따라 일본에 외교·경제상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일본은 서방7개국정상회담에 참여하고 있는 아시아 유일의 국가로 한반도 정세는 물론 중국의 WTO(World Trade Organization:세계무역기구) 가입 등 아시아 지역문제들에 대한 적극적 역할을 하고 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포함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강화를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7) 군사

일본은 헌법으로 전쟁을 포기하고, 육해공군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원칙은 1950년의 6·25전쟁 발발 직후 맥아더 사령부의 지시에 의해 7만 5000명의 경찰예비대가 설치됨으로써 파기되었다. 1952년 미일 안보조약이 발효되자 일본은 미군의 주둔을 인정하는 한편 일본의 재군비 의무 때문에 일본군대는 미국의 원조에 의해 점차 증가되었다.

경찰예비대는 1952년 보안대(保安隊)가 되고, 1954년 자위대(自衛隊)가 되어 명실상부한 군대로 변모하였다. 1960년의 안보조약 개정으로 자위대는 일본의 방위뿐만 아니라 재일미군(在日美軍)의 방위의무를 지게 되어, 미국의 핵우산 밑의 안보체제 하에서 일본은 급속한 군비증강을 이루어왔다. 총병력 약 24만 명으로 이 가운데 육상자위대가 14만 8676명, 해상자위대가 4만 4217명, 항공자위대가 4만 5377명 등으로 세계 유수의 군대로 성장하였다. 2001년 현재 국방비는 461억 달러이다.

5. 경제
1)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경제

전쟁에 패배한 일본의 경제는 해외 식민지·시장의 상실과 생산설비의 파괴로 인해서 붕괴되었다. 그러나 대전 후에 실시된 농지개혁이 종래의 소작농 중심의 농업을 자작농 중심의 농업으로 바꾸어 농촌시장의 확대를 가져왔고, 또 파업권 획득으로 정치적·경제적 지위가 높아진 노동자들이 도시소비시장의 확대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두 잠재적 소비시장의 확대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 한국의 6·25전쟁이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군사보급기지로서의 일본에 특수경기(特需景氣)를 낳게 하여, 중화학공업·경공업에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반공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국제시장에 복귀하는 속도도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부흥하기 시작한 일본경제는 1974년까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그와 같은 고도성장의 원인은 전반기에는 주로 농업인구의 급속한 도시유입에 의해 구미 제국보다 값싼 노동력을 써서 가격경쟁에 임할 수 있었다는 점과 달러화(貨)와 엔화[円貨]의 환율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후반기의 고도성장의 원인은 산업합리화, 기술혁신, 대형투자 등에 의해 일본제품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서 수출을 신장시켰다는 점에 있었다. 모든 산업에 오토메이션을 중심으로 한 기술혁신이 실시되고 1956~1970년까지의 기간에 주요산업의 시설투자는 7배로 늘었으며, 특히 1965년 이후부터는 국제수준을 상회하는 대형투자가 전개되었다.

수출신장은 특히 1956년 이후의 일본경제의 고도성장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1969년에 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은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로 비약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40년 만에 닥친 세계경제의 경기후퇴의 파동은 일본경제에도 장기적이고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 동안 미국이나 유럽 국가의 심한 인플레이션에 의해 일본제품이 국제적 우위에 설 수 있었으나 오늘날 그들 구미 제국의 관세정책으로 해서 일본은 제품의 생산기지를 일본 국내에서 세계 각국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적인 경기후퇴의 파동 속에서 일본 제품의 국제적 점유율을 더욱 높이겠지만, 일본의 국내시장 확대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경제는 구조적·장기적인 경기침체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1991년부터 후퇴하기 시작한 일본경제는 순환적 경기후퇴에 거품경제의 붕괴에 따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불황이 계속되고 있어 공공부문 투자 확대와 같은 경기 부양책을 실시하고 있다.

2) 산업
일본은 선진공업국으로서 제조업의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최첨단의 기술을 보유하고 생산량에서도 세계1위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⑴ 농업:일본의 농업은 오늘날에도 영세경작·가족경영·미작(米作)중심이라는 등의 점등에서 제2차 세계대전 전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나, 생산성이나 경영내용면에서는 크게 변질·발전하였다. 변질·발전의 주된 요인으로는 농지개혁 후의 산업구조의 변화가 농산물시장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과 농업의 기계화에 따라 생산력이 증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동안 농민의 이농이 지속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호당 경지면적 규모가 1ha를 약간 웃도는 선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공업화의 추세에 따라 농경지의 감소가 동시에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세농가의 계속적인 이농과 더불어 근래 대규모 농가의 수가 증가되어가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의 일본 농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대다수의 농가가 농업만으로는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전체 농가수의 약 87%가 농외소득(農外所得)을 얻고 있는 겸업(兼業)농가라는 점이다. 특히 그 중 약 60%는 농업소득보다 많은 농외소득을 얻고 있다. 농업생산을 부문별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 전의 농업은 한 마디로 ‘쌀과 누에고치’의 농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현재는 ‘쌀과 원예·축산’의 농업으로 바뀌어 국내시장 상대의 상품생산이 보편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전(戰前)·전후(戰後)를 통하여 미작이 일본농업의 주종이 되고 있는 데는 변함이 없으나, 그 경지면적이 크게 감소되어 재배지가 동북일본을 중심으로 한 양질 쌀산지로 집중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전작부문에서 그 신장이 현저한 것은 과수와 채소이다. 과수 작부면적은 전전의 약 3배에 이르렀는데, 귤은 중부지방 이남의 산사면 지역, 특히 키타큐슈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고, 사과는 아오모리현[靑森縣], 나가노현[長野縣]이 주산지다. 채소는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종래의 근교농지가 한층 바깥쪽으로 확산되어 가는 한편 미나미시코쿠[南四國], 미나미큐슈[南九州], 홋카이도[北海道] 등지에 원교(遠郊) 농업의 발달이 현저하다. 축산은 전전부터 산지형성이 되어 있었던 홋카이도의 젖소사육을 제외하고는, 전후에는 소비시장과의 관계 때문에 대도시 근교에서 집중적으로 사육되고 있다. 낙농업은 홋카이도가 대표적이고 그 외 게이힌[京濱]·한신[阪神] 공업지대의 주변 지역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⑵ 임업:일본은 국토의 약 70%가 삼림으로 덮인 세계 유수의 삼림국이다. 인공림은 전체의 약 33%이고, 수종은 삼나무·노송나무·소나무 등 침엽수와 졸참나무, 너도밤나무, 상수리나무 등 활엽수가 대략 반반을 차지한다. 국내 소재(素材) 생산량은 연간 3800만∼4500만㎡에 달하나 국내수요가 많아 미국, 말레이시아, 러시아 등지로부터의 수입재가 국산재를 웃돌고 있다.

⑶ 수산업:일본은 북태평양 서안어장의 중심어업국으로 세계 제1의 어획량을 올리고 있다. 연안어업은 공해의 격화로 한계점에 도달해 있고, 또 어업가구도 감소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전세계의 해양에 진출한 원양어업에 의해 어획량은 계속 늘고 있다. 한편 일본인은 전통적으로 생선을 많이 먹는 민족으로, 국민 1인당 물고기소비량은 세계 제1위이다.

⑷ 광업·에너지자원:일본에서 산출되는 지하자원은 종류가 많고, 분포도 전국에 걸쳐 있으나 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매장량이 극히 미미하다. 국내에서 자급할 수 있는 것은 석회석과 황화광(黃化鑛) 정도이고, 그 밖에 비교적 산출량이 많은 구리광[銅鑛]의 자급률이 1.3%이며, 철광석은 2%, 석유는 0.3%에 불과하다. 석탄은 일본의 최대자원으로 규슈의 지쿠고[筑後]탄전, 홋카이도의 이시카리[石狩]탄전이 유명하다. 석유는 니가타[新潟]유전, 아키타[秋田]유전이 있으나 생산량이 적어 대부분을 수입한다.

종래 수력을 주로 하던 발전은 경제적으로 유리한 낙차지점의 개발이 거의 완료되자 화력발전으로 전환되었는데, 1962년부터 화력발전량이 수력발전량을 능가하였고, 1980년에는 화력발전량 67.1%, 원자력발전량 17.4%, 수력발전량 15.5%, 1999년에는 화력발전량 58.91%, 원자력발전량 30.31%, 수력발전량 8.35%의 비율이 되었다. 수력발전소는 대부분 혼슈 중앙부의 산지에 댐식 발전소로 건설되어 온 데 대하여, 화력발전소는 임해(臨海) 공업지대에 건설되어 있다. 원자력발전소는 각지에 분산 건설되어 있다.

⑸ 공업:공업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특히 1950년 이후 설비투자의 증대, 기술혁신의 진전에 따라 중화학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신흥품목의 공업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 결과 종래부터 모든 부문의 공업이 현저한 집중률을 보여 온 도쿄[東京], 가와사키[川崎], 요코하마[橫濱] 등지를 중심으로 한 게이힌[京濱] 공업지대를 비롯하여, 나고야[名古屋], 욧카이치[四日市], 도카이[東海] 등지를 중심으로 한 주쿄[中京] 공업지대, 오사카[大阪], 아마가사키[尼崎], 고베[神戶] 등지를 중심으로 한 한신[阪神] 공업지대 등 대공업지대에 공업집중이 진척되는 동시에 그 주변지역에 신흥공업도시들이 확산되어 나갔다.

그 외 대공업은 나가사키[長崎]와 사세보[佐世保]의 조선공업, 노베오카[延岡]와 미나마타의 화학공업, 미이케[三池]탄전과 결부된 오무타[大牟田]의 화학공업, 오이타[大分]의 철강업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위의 공업지대를 연결하는 태평양 쪽의 임해부(臨海部)에는 고도성장기에 석유화학·철강 등을 기간으로 하는 콤비나트가 잇따라 건설되어, 일본 공업생산의 약 80%를 차지하는 이른바 ‘태평양 벨트 지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의 구성을 보면 1955년에는 아직 경공업이 우세하여 전체 공업생산의 55.4%를 차지했는데, 그 후 중화학공업의 신장이 현저하여 중화학공업이 1967년에는 62%, 1974년에는 67%로 계속 그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특히 성장이 두드러진 것은 기계공업으로, 1967~1972년에 걸쳐 14.7%에서 32.3%로 배 이상의 신장률을 보였고, 반대로 섬유공업과 식품공업의 비율저하가 심하였다. 전체 공업제품 출하액은 1970년 이후에도 지속적인 증가를 보여 1974년에는 약 127조 엔을 기록했으나, 1974년의 제품출하액의 상승률은 공업생산자 물가지수를 밑돌아 실질적으로는 마이너스 성장이 되었다.

그것은 1973년의 석유파동 이후의 인플레이션과 불황이 경제의 고도성장에 종지부를 찍고 산업계가 저성장시대에 접어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1980년대의 평균경제성장률은 4%였다. 1992년~1995년 사이 경제는 1980년대의 과잉투자와 버블경제로 인하여 성장률이 떨어졌다. 그러나 1996년대의 낮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3.9%의 경제성장률을 나타냈다. 1997~1998년에는 금융산업과 부동산 시장의 혼란으로 전후 최대의 경기 불황이 계속되고 있다. 1998년에 국내총생산 성장률 0.8%을 나타낸 이후 1999년과 2000년은 1%대로 올라갔으나 2001년에는 다시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다.

기업의 규모별로 일본의 공업을 보면, 한편으로는 세계의 대기업으로서 선진국가의 일류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국외에 많은 자회사(子會社)를 가진 다국적기업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거나 한 대기업이 각 부문에 약간씩 있으나, 대부분의 기업의 공장은 규모가 영세하여 하청(下請)·재하청의 형태로 대기업에 종속되어 있다.

일본의 공업은 서구의 선진국에 비해 중소기업의 비중이 매우 높으면서도 대기업과 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므로 고용기회의 확대 및 해외 경쟁력 강화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일본의 공업은 대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과밀하게 집중된 탓으로 해서 대기·수질 오염을 비롯한 각종 공해를 일으키고, 또 교통난, 주택난 등 도시문제도 심각하다. 따라서 지역주민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저항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3) 교통

일본은 철도의 발달이 현저하여 철도망의 밀도는 세계 제4위이고 1996년 현재 철도연장 2만 7318㎞, 여객수송은 제1위이다. 해안을 따라 주요간선이 달리고, 지방선이 간선에서 내륙으로 분기하여 대체로 사다리 모양의 철도망을 형성한다. 한편, 일본 철도는 협궤(狹軌)인데, 1964년 교통량이 많은 도쿄~오사카 간에 표준궤도의 고속철도인 도카이도 신칸센[東海道新幹線]이 개통되었고, 현재 산요[山陽]·도호쿠[東北]·조에쓰[上越] 신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전국을 고속 신칸선으로 연결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

대도시 주변에도 철도가 집중적으로 부설되어 여객수송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간선과 지방선의 교통수요의 차가 격심하여 교통의 지역적 격차가 커져 가는 데 문제점이 있다. 국내 교통은 최근에 사유화된 철도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신간센이라 불리는 고속열차가 도쿄와 오사카 사이의 520㎞를 3시간 정도에 달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동차교통이 급격히 발전하여, 철도와 경쟁하는 관계에 있다. 도메이[東名:東京∼名古屋] 및 메이신[名神:名古屋∼神戶] 두 고속도로를 비롯한 자동차도로가 뒤를 이어 건설되었으나, 반면 도로정비가 자동차의 급증을 뒤따르지 못하여 도시지역의 교통마비가 심화되어가고 있다. 오로연장은 1997년 현재 12만 12013㎞로 포장률은 74.8%이다.

일본의 상선대(商船隊)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거의 괴멸되었으나, 전후 정부의 원조에 의해 계획 조선이 추진되어 세계 제2의 상선국이 되었다. 산업 에너지의 전환에 따라 탱커를 비롯한 전용선(專用船)이 증가하고, 또 항만의 근대화가 진척되어 컨테이너선이 증가하고 있으며, 연안항로에는 자동차교통의 발전을 반영하여 카페리의 취항이 급증하고 있다. 100톤 이상의 상선이 1997년 현재 6,756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완성된 혼슈와 규슈 사이의 간몬[關門]해저 터널을 시작으로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세이칸해저터널(53.8km)과 혼슈와 시코쿠를 연결한 15km의 세토대교[瀨戶大橋]가 1988년 개통되어 4개의 큰 섬을 하나로 연결하는 교통망이 완성되었다.

일본항공(日本航空:JAL)을 주축으로 하는 항공교통은 매년 10% 이상씩 증가하는 국내외 승객들과 함께 발전하고 있다. 1980~1995년 사이에 국제 항공 승객수는 490만 명에서 1450만 명으로 늘었고 일본의 항공 여객수도 4350만 명에 달했다. 1954년 도쿄∼샌프란시스코선을 개설한 이래, 1966년·1967년에는 뉴욕 노선·세계일주 노선을 개설하고, 1967년에는 시베리아 경유 모스크바 노선을 열었으며, 다시 1974년에는 대(對)중국 노선을 열었다.

국내 항공교통의 발달도 현저하여 도쿄∼오사카 간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정기항공로가 열려, 국내 간선에 취항하고 있는 일본항공의 국내·국제노선이 차지하는 비율은 6:4로 국내노선의 비중이 크다. 도쿄의 국제공항으로는 종래 도쿄도[東京都]의 오타구[大田區]에 있는 하네다 공항[羽田空港]이 사용되어 왔으나, 국제·국내선 항공기의 폭주로 1978년에 지바현[千葉縣] 나리타시[成田市]에 신도쿄국제공항을 만들었는데 1997년 현재 38개국의 50개 항공사가 매일 2540만 명의 승객과 160만 톤의 수화물을 취급하고 있다. 승객수는 세계에서 6번째이고 수화물의 양은 세계 최고이다. 하네다 공항은 국내선 전용공항으로 바꾸었다. 1994년 오사카 근처 해상에 간사이[關西]신국제공항이 완공되었다.

4) 관광

일본은 화산, 해안 등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온천이 많아서 자연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하고, 교토, 나라, 가마쿠라[鎌倉] 및 도쿄 등 옛 정치중심지에는 역사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하며, 그 밖에 전국 각지에 성관(城館)·사적을 비롯하여 사사(社寺:神社·寺刹) 등이 많이 있다. 또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대도시에서는 고층건물·번화가, 공원, 박물관, 미술관 등 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의 도시적인 관광자원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일본인은 근래 대중 관광여행의 시대를 맞게 되어, 관광지·관광시설의 개발이 전국적으로 활발하다. 한편 외국인 관광객의 수도 급속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는 도쿄를 찾는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고, 또한 교토, 오사카, 나라·나고야, 하코네[箱根], 닛코[日光], 가마쿠라, 이세[伊勢], 고베, 히로시마[廣島], 나가사키[長崎] 등지도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국제적인 관광도시이다.

5) 무역

일본의 무역은 주종산업인 공업에 필요한 원자재나 에너지 자원을 수입하고 공업제품을 수출하는 가공무역의 성격이 짙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의 전과 후에는 수출입품목·무역상대국의 양면에 걸쳐 큰 변화가 있다. 즉, 전전(戰前)에는 면직물·생사(生絲)를 중심으로 한 섬유제품이 수출총액의 과반을 차지하고, 목화를 중심으로 한 섬유원료가 수입총액의 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또 당시의 주요 무역상대국은 아시아 제국, 특히 중국이었고, 생사수출과 목화수입이 많은 미국이 그 뒤를 이었다.

전후에는 중화학공업의 현저한 발달로 해서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어, 1998년 수출은 4400억 달러이고 수입은 3190억 달러, 2001년 수출은 4500억 달러, 수입은 3550억 달러이다. 무역상대국으로는 전후의 정치·경제정세를 반영하여 특히 미국과 거래가 많은데, 근래 약간 감소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수출은 30%, 수입은 19% 정도의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2000).

1998년 현재 수출에서는 아시아 37.9%, 유럽 20.4%, 북미 35.6%, 남미 1.9%, 아프리카 1.8% 남태평양국가 2.6% 순이다. 수입에서는 아시아 46.2%, 유럽 16.7%, 북미 27.4%, 남미 2.6%, 아프리카 1.4%, 남태평양국가 5.6%순이다.

품목별로 보면 수출에서는 자동차, 반도체 및 전자장비, 기계류, 광학장비, 철강 순으로 주종을 이루고, 섬유제품은 그 비중이 저하되었다. 수입에서는 원유, 섬유류 기계류, 수산물, 반도체와 전자부품, LNG 순이다. 종래의 섬유공업 중심의 원료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원료로 내용이 변질되고 있다.

무역수지는 오랫동안 순조로이 흑자가 지속되어왔으나,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나 원유가격의 급등 등으로 해서 1980년에는 약 113억 달러의 입초(入超)를 기록하였으나 1992년에는 수출 3396억 달러, 수입 2330억 달러로 1070억 달러의 사상최고의 무역흑자를 기록하였다. 1999년 이후 미국 및 아시아 경제 침체에 따른 수출부진과 엔 약세에 따른 수입의 수요 증가로 인해 무역수지 흑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6. 사회
1) 사회보장

일본의 사회보장제도는 유럽 선진제국에 비하면 그 실시가 몹시 늦었고, 또 현행의 제도는 불비한 점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도 부분적으로 관계법이 제정 ·실시되어 오긴 했으나, ‘국민개보험 ·국민개연금’을 목표로 전국민에 대한 사회보장이 추진된 것은 전후의 1961년부터이다. 즉,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과 연금보험의 두 가지 보험에 가입할 것을 규정하였다.

의료보험은 피보험자와 그 가족의 질병 ·출산 ·사망에 대한 의료 서비스 ·요양수당금 ·매장비(埋葬費) 등을 지급하는 것으로, 임금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과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건강보험의 두 가지로 나뉜다. 연금보험은 노령 ·폐질(廢疾) ·사망에 대해 연금 또는 일시금을 지급하여 본인과 가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보험으로, 임금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후생(厚生)연금 ·공제조합 연금 ·은급(恩給)연금 및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연금제 등이 있다.

그 밖에 공무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용노동자를 대상으로 하여, 실직했을 때 지급하는 고용보험이 있다. 국가예산에서 사회보장 관계비가 차지하는 비율도 해마다 증가하여 1980년에는 21.4%에 달하였고, 1994년 국가 수입의 16.25%에 달했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보장제도 운영상태를 보면, 의료보험과 연금보험이 다같이 가입자의 소득수준과 직역에 따라 보험료의 갹출과 지급액수가 다른 것이, 여럿 병립되어 있어서 제도가 정착되지 못한 데서 오는 모순들을 내포한다. 이는 사회의 급속한 노령화와 출생률 하락으로 인한 인구 감소 추세로 사회복지제도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여러 요인들로 인해 국가연금 재정상태가 위험에 이르자 1995년 일본 정부는 7월에 ‘사회복지제도를 위한 새로운 기구’라는 이름의 자문안을 제출하였다. 특별한 권고사항으로는 공익 간호보험제도의 설립과 사회보장 대상을 가구 단위에서 개인으로 변화시키는 것 등이 있다. 이 안건은 21세기 일본 국민생활을 더욱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재건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2) 노동

일본의 실업률은 1974년에서 1980년까지 1.4∼2.4%의 범위를 유지하여 완전고용을 달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완전고용 상태에 있는 일본의 노동력인구는 25년여 정도 기간에 그 분포가 제1차산업에서 제2차·제3차산업으로 크게 바뀌었고, 또 여성 노동력인구의 증가가 현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헌법과 노동조합법에 의해 노동자의 노동 3권(三權)이 보장되었다.

1950년에는 일본노동조합 총평의회(總評議會)가 결성되어 반공민주노조로서 노동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나, 1951년에 좌파가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노동운동은 내부분열과 재편을 되풀이하였다. 그 뒤 1964년에 기존의 3개 우파 조합이 합동하여 전일본노동총동맹(약칭 同盟)이 결성되자 동맹(同盟)과 총평(總評)이 가장 우세한 두 세력을 형성하여 대립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그와 같은 노동조합의 분열·대립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에는 전통적으로 특성 있는 노사관계가 성립되어 왔다.

한번 채용한 종업원을 정년이 되기까지 해고하지 않는 ‘종신고용제’와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서열을 정하는 ‘연공임금제’의 특수한 노사관계가 경제성장을 촉진한 요인이 되었다는 견해가 오늘날 널리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거품경제로 경기가 침체기에 빠지자 기업체들은 종신고용제를 수정하고 많은 회사들이 정년 이전의 근로자들을 해고하고 새로운 사원을 채용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노동력 부족을 배경으로 임금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현재 유럽 선진국의 임금수준에 도달하였으며, 또 주당(週當) 노동시간도 프랑스, 독일, 영국 등과 맞먹거나 오히려 보다 단축되었다. 한편 기업은 노동력 부족에 대처하기 위하여 경영의 합리화나 생력화(省力化)에 비상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런한 변화와 함께 젊은 근로자들의 사고 방식도 변화하고 있어 점차적으로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들고 있으며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찾아 직업을 옮기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1996년 일본의 15세 이상 취업인구는 6480만 명이고, 실업인구는 220만 명으로 그해 전체노동력의 3.4%를 차지하였다.



3) 교육

일본의 학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학제를 본받았기 때문에 한국의 학제와 일치한다. 소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을 기본으로 하고, 의무교육은 중학교까지 9년간으로 되어 있다. 또 수사(修士:碩士) 과정 2년, 박사과정 4년의 대학원제 및 한국의 전문대학에 해당하는 2년 과정의 단기(短期)대학제도 한국과 흡사하다. 한국에 없는 학제로는 중학교 졸업자가 입학하는 5년제의 고등전문학교가 있는데, 중급기술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이다. 대학에서 고등학교·중학교·소학교에 이르기까지 학교간 격차가 심하여 입시 체제가 강화되어 있는 점도 한국의 경우와 흡사하다.

4) 매스커뮤니케이션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매스커뮤니케이션은 국가권력의 규제에서 벗어나서 전면적으로 활발해진 반면 인권침해나 국민윤리의 저하를 초래하는 사례가 지적되고 있다. 한편, 일본의 매스미디어, 특히 신문들은 그 동안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주 그릇된 편향성을 드러낸 보도를 함으로써, 일본의 국민여론을 오도하고, 양국의 국민감정을 손상시킨 사례가 적지 않았다.

⑴ 신문:일찍이 1880년을 전후하여 ≪아사히신문[朝日新聞]≫·≪마이니치 신문[每日新聞]≫ 등 오사카계[大阪系]의 양대 신문을 중심으로 대중신문의 시대를 맞아 오늘날에 이른다. 일본의 신문계는 중앙의 대신문·광역 블록지(紙)·현(縣)단위 지방지로 성립되어 있으나 대부분, 특히 대신문은 국내문제에 관해서는 공평·중립을 편집방침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 점에서는 전통적으로 당파성이 짙은 구미의 신문과는 다르다. 근래 스포츠·예능 전문지나 정당지·종교지의 진출도 현저하다. 1998년 현재 주요 조간신문의 부수는 요미우리(1400만 부), 아사히(1200만 부), 마이니치(650만 부)이다.

⑵ 방송:전쟁 전에는 공공방송인 일본방송협회(NHK)만이 존재하였으나 1950년부터 민간방송이 실현되었다. 또 1953년부터 방송이 시작된 텔레비전은 곧 전국에 보급되어 사회·문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최근에는 위성중계·다중(多重)방송·방송대학 설립 등 한층 다채로운 기능을 발휘해 가고 있다. 한편 라디오도 일시적인 쇠퇴를 회복하고, FM방송 등 신분야를 개척해서 독자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TV방송은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이 있다. 민영방송국은 신문사와 연계되어 있고 100여개의 VHF채널과 지역별로 UHF채널이 있다. 민영채널의 운영은 광고 수입에 의존하고 TV방송은 NHK를 제외하고 전일 방송한다. 통신사로는 사단법인 교도통신[共同通信]과 주식회사인 지지통신[時事通信]이 있다.
7. 문화

일본에는 3대 주요 전통극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이 '노'로서 14세기에 탄생했다. 무대 장치는 간단한데, 배우는 가면을 쓰고 전통 의상을 입는다. 배우들은 대사를 읊조리며 매우 천천히 움직인다. 두번째로 가부키는 17세기에 생겨났다. 가부키는 극적인 장면과 동작이 많고 의상은 정교하며 화려하다. 가부키는 관중 가까이에서 연기를 하기 위한 통로(하나미치)를 포함해 무대 장치가 복잡하다. 마지막으로 분라쿠는 인형극의 일종이다. 이는 16세기에 최초로 공연되었다. 인형은 사람의 절반 크기로 거의 실제 사람과 같다. 각 인형은 3사람이 조종하며 이들을 무대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전통 민속 음악 또한 활발하다.

민요, 민속악기연주 및 민속춤 모두가 오늘날 인기를 얻고 있다. 축제에서 민속악기 연주(특히 큰북) 및 민속춤은 관중의 눈길을 끈다. 목판화는 수많은 일본 회화 형태 중 하나이다. 잘 알려진 목판화 형태의 우키요에는 17세기에 탄생했다. 우키요에는 사람 및 자연 풍경, 일상 생활 및 극장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목판화는 지금까지도 매우 인기가 있어 학생들은 간단한 목판화 만들기를 배우며, 더러는 이 방법으로 자기만의 연하장을 만들기도 하다. 일본의 공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도자기, 제지, 직물, 칠기, 그리고 목각이다. 질기고 아름다운 일본 종이(와시)는 손으로 만든다. 이 일본 종이는 예술적이거나 실용적인 용도에 쓰인다. 오늘날 직물에 행해지는 특수 염색 및 직조 기술은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 무늬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칠기는 아름다울뿐더러 잘만 간수하면 몇 해고 보존된다. 가장 인기 있는 색상은 붉은색과 검은색이다. 일본의 도자기 공예는 12,0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도기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일본의 전통 도자기는 수백 년 동안 계승되어왔다. 근대에는 도자기도 그림, 조각과 함께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목각술 또한 전통 일본 예술의 하나다. 정교한 목각술로 사찰 및 신사를 장식하며, 많은 가정에서는 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접시, 나무인형(고케시)등의 작은 장신구를 가지고 있다.

일본 학생들은 학교에서 만요슈와 같은 고대 시집, 겐지이야기와 같은 고대 영웅 소설 및 세이쇼나곤의 옛날이야기와 같은 일기 형식의 에세이 등 일본의 전 문학을 배우고 있다. 현대 문학은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94년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받음으로써 인정받고 있다. 이 밖에도 국제적 명성을 지닌 20세기 작가로는 나쓰메 소세키, 미시마 유키오, 아니자키 존이치로 및 아베 고보 등을 들수 있다.

현대 작품의 인기 있는 또 다른 형태가 만화다. 만화는 일반적으로 각 책마다 새로운 내용을 담은 시리즈물이나, 사회 정보, 역사 또는 기타 논픽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때로 만화영화로 제작되어 극장 및 텔레비전에서 인기리에 상영되기도 한다. 일본의 만화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것에서부터 국제적인 종목에 이르기까지 널리 스포츠가 보급되어 있다. 축구, 전통무술, 겨울스포츠, 야구, 수상 스포츠등이 특히 대중화되어 있다. 외국에 잘 알려진 또 다른 전통 일본 스포츠로는 스모가 있다. 면이나 비단으로 만든 두껍고 무거운 샅바(마와시)만을 두른 거구의 두선수가 서로 쓰러뜨리거나 동아줄을 둘러친 원형의 씨름판 밖으로 밀어내는 경기다. 경기 시간은 보통 1분 미만으로 매우 짧으며, 눈깜짝할 새에 끝나기도 한다. 모든 경기는 정화의 표시로 씨름판에 한줌의 소금을 뿌리는 의식으로 시작된다. 스모 선수들은 열광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10대 중반에 시작하여 수년간 훈련한다.

일본에서는 야구와 축구가 특히 인기 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유명 선수들로 구성된 프로축구팀에 대한 일본 축구팬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프로축구는 1992년 출발과 동시에 성공적인 J리그를 이루게 된다. 또 다른 열렬한 팬들을 가지고 있는 스포츠가 야구다. 전국 고교 야구대회는 매년 봄과 여름에 2회 열린다.

8. 과학기술

일본은 우정성(MPT)이 통신 및 우정 부문의 규제기관으로 통신시장과 기술정책, 면허발부, 요금 및 번호계획 승인, 무선주파수 관리감독 등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52년 일본전신전화사(NTT)가 독점 기업으로 설립되었고, 1953년 KDD가 민영기업으로 설립되어 국제 통신사업을 시작하였으며, 1997년부터는 국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1985년부터 통신시장의 자유로운 참여로 인하여 독점사업을 해오던 NTT와 KDD는 새로운 경쟁시대를 맞이하였다. 1998년 현재 자사 전송설비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1종 사업자가 142개 있고, 제1종 사업자에게 전송설비를 임대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제2종 사업자는 5,870여 개가 있다. 교환망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NTT의 교환망은 1998년 100% 디지털화되었다.

셀룰러 전화서비스는 2000년 현재 이동전화 가입자 6388만 명에게 제공되고 있으며, 데이터 통신은 전용회선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인터넷과 기업의 근거리통신망(LAN)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1997년 7월 현재 인터넷 접속 사업자수는 1종 통신 사업자 8개를 포함하여 2,000여 개에 이르고 있으며, 인터넷 가입자수는 2000년 현재 2706만 명을 넘었다.

1997년 현재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방송사는 아사히 신문사가 소유하고 있는 민영방송사로 아사이 내셔널 브로드캐스팅과 후지 텔레비전 네트워크, 공영방송사인 NHK와 니폰 텔레비전 네트워크(NTV), 도쿄 브로드캐스팅 시스템(TBS)이 있다. 지역 방송사로는 칸사이 텔레캐스팅, 요미우리 텔레캐스팅, 마이니치 브로드캐스0팅 시스템이 있다. 1998년 6월 말 인터넷 접속을 제공하는 30개 사업자를 포함하여 총 41개의 CATV사업자가 제1종사업자로 등록되어 있다.

9. 대한관계

한국과 일본은 예로부터 문화적으로 폭넓게 교류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한국보다 먼저 개국을 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실현한 일본은 근대 열강의 세력이 한국에 밀려들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는 청(淸)·러시아와 더불어 한국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76년 한국은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게 되면서 개국을 하였으며, 그때부터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으로 청·러시아 세력을 물리친 일본은 한국으로 하여금 강제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한일협약(韓日協約)을 맺게 하고,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어 한국에 통감부(統監部)를 설치하였다.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고, 전국에서 의병들의 봉기가 잇따르는 등 거국적인 항일(抗日)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통감부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대체하여 식민지 통치를 실시하였다. 총독부는 무단정치(武斷政治)를 단행하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는 한편, 경제면에서는 한국을 일본의 독점적 상품시장 및 식량·원료 공급지로 개편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먼저 화폐·금융·수송·통신 등의 유통기구를 정비하고, 한국민족자본의 산업자본화를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하에 광대한 토지를 농민으로부터 수탈하였다. 그와 같은 식민지 정치에 대한 항거가 국내외에서 항일의거 및 독립운동으로 계속 나타나다가 1919년 마침내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한편 4월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 후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3·1운동은 일본의 무력 앞에서 수많은 사상자와 투옥자를 낸 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으나, 한국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한편, 일본으로 하여금 종래의 무단정치를 완화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정치의 실시로 언론·출판·결사·집회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허용되어 한글로 된 신문·잡지가 발간되고 각종 단체, 특히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정책전환은 효과적인 식민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비밀결사와 그 운동의 표면화를 노린 계략에 불과하였다. 국내에서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1930년까지 지속되었고, 해외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이 만주 일원 및 시베리아 등지를 거점으로 끈질기게 지속되다가 만주사변 이후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에 통합되었다. 한편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부터 한국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성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력자원 및 값싼 식민지 노동력의 착취를 전제로 일본독점자본의 한국진출이 본격화되었다. 동시에 한국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을 강화하여 한국어교육의 금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의 강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구송(口誦), 신사참배 강요 등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태평양전쟁 중에는 한민족에 대한 탄압과 착취가 한층 심해져서 1938년 ‘지원병제’, 1939년 ‘징용제(徵用制)’가 실시되어 한국 청·장년에게 병역·노역(勞役)이 강요되었고, 1942년에는 지원병제가 ‘징병제’로 바뀌었다. 또 한국학생에게도 일본학생에게 과해진 ‘학병제(學兵制)’가 똑같이 과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각계각층의 한국국민이 농산물 공출, 유기(鍮器)·철물 등 군수물자 공출, 군용기 헌납금 갹출, 송근유(松根油) 채취 등 패색이 완연한 전쟁을 강행하려는 그들의 억지시책에 시달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 한국은 그 동안의 독립운동의 결실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對日)강화조약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여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회담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회담진전을 저해한 주된 요인으로는 1953년 10월 제3차 회담에서의 구보타[久保田]망언사건(일본측의 대표 구보타가 “일본에 의한 1936년 간의 한국통치는 한국에 유익한 것이었다”고 망언한 사건), 1959년 8월 일본과 북한 적십자사 간에 체결된 재일교포 북송협정 및 일본의 독도(獨島) 영유권 주장 등을 들 수 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면서 그 해 11월 최고회의의장 박정희와 일본총리 이케다[池田] 간의 회담,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大平] 메모’ 작성 등 한·일관계의 조속한 타결을 위한 양국의 노력이 경주되어 1965년 6월 22일 ① 기본조약, ② 어업협정, ③ 경제협력협정, ④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협정, ⑤ 문화협정의 5개 협정으로 된 한·일협정이, 이어 1966년 3월에는 무역협정, 1967년 8월에는 항공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후 양국관계는 특히 경제면에서 급속히 진전되어 1967년 이후부터는 한·일정기각료회의를 발족시켜 연례회의를 개최하고 있으며, 1981년 4월 한국측에서 제기한 대일(對日) 차관교섭은 1983년 l월 대통령 전두환과 일본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간의 정상회담에서 최종타결을 보았다.
그 결과 정부개발협력자금 18억 5000만 달러, 수출입은행 차관 21억 5,000만 달러를 합하여 총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연리 6%로 대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일무역적자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시정요구가 있었으나 일본은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가 1993년 11월 대통령 김영삼과 일본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간의 정상회담에서 경제관계의 균형적 발전을 협의하기 위한 ‘한·일신경제협력기구(NIEP)’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국과 일본이 주요 무역상대국이라는 양국 상호간의 인식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미국에 이어 제2위의 수출상대국이면서 동시에 미국을 앞지르는 제1위의 수입상대국이고, 또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미국에 이어 독일과 맞먹는 제2∼3위의 수출상대국이다. 1994년만 하더라도 일본은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이 135억 2285만 달러인 데 비해, 수출은 253억 8998만 달러였다. 1998년에는 수입 122억 4000만 달러, 수출 168억 4000만 달러, 2001년에는 수입 161억 달러, 수출 260억 1000만 달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계속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한·일기본조약을 위배하면서까지 민간차원을 빙자하여 대(對)북한접촉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 정부관계자들의 망언 등으로 한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1994년 5월에는 법무장관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가, 8월에는 환경청장관 사쿠라이 신[櫻井新]이, 10월에는 통산장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가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구미열강으로부터 아시아제국(諸國)을 구하기 위한 방어전쟁이었다”라고 망언을 하는가 하면, 1995년 6월과 10월에는 전(前) 부총리 겸 외무장관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와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한일병탄조약의 합법성을 주장하여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양국이 공동개최하게 되었고 1999년 3월 총리 오부치 총리의 방한 때 한·일문화교류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1998년 10월 대통령 김대중의 국빈 방일시 양국 정상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이에 따른 부속서인 '행동계획'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은 현재 해당 부처별로 후속조치를 추진중이며, 양국 외교부에서 추진상황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2001년 10월과 2002년 3월에는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히치로[小泉 純一郞]가 방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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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란..이런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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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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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위치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있는 섬나라이다. 큰 섬은 북쪽으로터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큐슈 등 네 개인데, 그 외 오키나와섬을비롯한 작은 섬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국토의 면적은 377,835㎢이고, 이것은 세계 육지의 1/40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구는 123,611,541명(1991년)으로, 세계 총인구의 1/36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인구 밀도는 1㎢에 333명이나 된다. 국토는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한대에서 남으로는 아열대까지 넓게 분포되어있다. 또 주위가 바다로둘러싸여 있는 것은, 선박을 이용하여 국내에 부족한 자원을 대량으로 수입하거나 제품을 수출하기에 좋아, 일본의 산업 발전에 크게도움이 되어왔다.

일본의 동쪽과 남서쪽에는 태평양이 있고, 또 아시아 대륙과 일본 사이에는, 오호츠크해와 동해(일본해)와 동지나해가 있다. 일본의서쪽에는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이 있다. 또 북쪽에는 사할린(카라후토), 남쪽에는 대만이 있다.

2. 일본의 지형

일본열도는 환태평양의 일부에 해당되고, 국토는 남북으로 가늘고 길며, 산이 많고 화산도 많다. 산지와 구릉에는, 침식작용에 의해작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어 복잡한 지형으로 되어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산이 많은 국토 중에서도 혼슈의 중앙부는 가장 높고, 2000m에서 3,000m 이상의 산들이 솟아 있어, 일본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혼슈의 북동부나 남서부에서는 산지나 일본 열도방향을 따라 이어져 있다. 이 산지는 교통에 방해가 되는 곳이 많지만, 삼림이 매우 무성하며, 이들은 홍수 방지나 기후를 온화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화산은 줄을 지어 분포하여 화산대를 만들고 있는 것이 많다. 화산은, 일반적으로 경치가 좋고, 가까이에온천이 솟아나, 휴양의 땅이 되고 있지만, 때로는 분화에 의해 재해를 초래하는 일도 있다. 일본의 해안선은 일반적으로 복잡하고, 그중에서도 태평양쪽은 크게 들쭉날쭉한 것이 눈에 띈다.

특히, 산리쿠해안이나 시마반도, 큐슈의 북서부 등에는 리아시스식 해안이 발달해 있다. 혼슈의 동해(일본해)쪽은 해변과 사구가 이어지는 단조로운 해안이 많지만, 태평양쪽에도 쿠쥬쿠리하마나, 카시마우라와 같이, 활모양을 한 단조로운 모래톱 해안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주위에는 태평양·동해(일본해)·동지나해·오호츠크해 등이 있으며, 태평양에는 깊이 10,000m를 넘는 이즈·오가사와라 해수가 있다. 동지나해와 오호츠크해는 얕고, 대륙붕이 펼쳐져 있다. 대륙붕에는 좋은 어장이 많고, 또,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곳도 있어, 좁은 국토에 인구가 많은 일본으로서는 대륙붕의 이용은 장래 중요한 과제이다.

3. 일본의 강과 평야

일본은 산이 많고, 게다가 산지가 해안까지 다다른 곳이 많기 때문에 강은 짧고, 흐름이 급하다. 일본에서 가장 긴 강은 시나노가와(367㎢)이고, 다음은 토네가와(322㎢)·이시카리가와 (262㎢)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긴 아프리카 나일강의 1/18(6,690㎢),
중국 양자강의 1/15(5,530㎢)익, 한국의 낙동강(525㎢), 한강(514㎢), 금강(401㎢)보다도 짧다. 일본의 강은 흐름이 급하기 때문에,비가 오면, 금방 강물이 넘친다. 그러나, 평소는 그다지 강에 물이 없고, 그 때문에, 상류에 댐이 만들어져 있는 강이 많이 있다. 또, 댐의 물은 발전이나 농업, 공업, 식수로 사용된다. 강의 중류와 하류에는 평야가 있다. 일본에서 큰 평야는, 토네가와 유역에 있는 칸토 평야·홋카이도의 이시카리 평야, 시나노가와 유역에 있는 니이가타 평야등이다. 그러나, 이들 평야도 세계의 넓은 평야에 비하면, 매우 좁다.

일본에서는 평지가 적기 때문에, 경지면적이 적다. 경지란 논이나 밭에서, 쌀, 야채, 과일을 재배하고 있는 곳이다. 경지면적이 부족한 일본에서는 그다지 경사가 급하지 않은 산은 점차 밭이 되기도 하고, 바다 등을 매립해서 논이나 밭으로 하고 있다. 바다 등을 매립해서 논이나 밭으로 하는 것을 간척이라고 한다.

<칸토평야> 간토평야는 일본에서 가장 넓은 평야이다. 이 평야는, 토네가와와 타마가와가 상류에서 운반해 온 흙과 모래로 생긴 평지와, 조금 높은 대지로 되어있다. 이 대지는 화산재 땅이다. 이러한 화산재 땅을 로움층이라고 한다. 로움증에는 그다지 물이 없기 때문에, 보리나 고구마 등을 재배하고 있다. 토네가와의 하류에는 호수가 있고, 물도 풍부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쌀을 재배하고 있다.

<이시카리 평야> 이시카리 평야는 이시카리가와 유역에 생긴 평야이다. 이시카리가와는, 홋카이도의 중앙부를 굽이쳐 흐르고 있다.참고로, 이시카리라고 하는 것은, 아이누어에서 "굽이쳐 흐른다"라는 의미이다. 이시카리 평야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넓은 평야이지만, 화산재 땅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농업에는 그다지 적당하지 않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목축이나 낙농이 성행한다. 홋카이도는,옛날 아이누족이 물고기나 짐승등을 잡아 생활하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누족은 15,000명 정도밖에 없다.


4. 일본의 산

일본에는 산이 많이 있다. 후지산은 높이가 3,776m로, 일본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 그 외에도 높은 산이 많다. 특히 혼슈의 중앙부에는 3,000m 이상의 산이 많이 솟아 있다. 이 혼슈의 중앙부에 있는 산들은 스위스 알프스를 닮았기 때문에, 일본 알프스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산이 이어져 있는 곳을 산맥이라고 한다. 일본의 산맥은 일본 열도의 정중앙을 등뼈처럼 연결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 열도 전체는 바다 속에 솟아 있는 산맥과 같다. 또, 일본에는 화산이 많이 있다. 화산 중에는 후지산처럼 지금은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 이미 활동하지 않는 사화산 등이 있다.

<후지산> 후지산은 높이가 7,776m인 매우 아름다운 산이다. 옆에 산이 없기 때문에,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전부 보인다. 또, 어디에서 보아도, 거의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후지산은 휴화산이지만, 옛날에 몇번이고 분화를 반복해서 지금같은 아름다운 모양의 산이 되었다. 후지산의 북쪽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다섯 개 있어 그 호수를 후지고코라고 한다. 후지산은 후지고코의 근처는 숲이 이어져있는데, 위쪽에는 나무도 풀도 나 있지 않다. 1년 내내 눈이 있는 곳도 있다.

<아소산> 아소산은 이중식 화산이다. 이중식 화산이란 한 번 분화한 곳이 함몰해서 화구원이 되고, 그 속에 또 화구가 생긴 것이다.아소산의 구화구는 동서가 18㎞, 남북이 24㎞나 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화구이다. 이 구화구를 보면, 처음 분화가 얼마나 컸던 가를알 수 있다. 지금은 그 중의 하구원에서, 6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농업이나 목축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화구원안을 JR도 지나고 있고,아소산의 화구원 중앙부는, 지금은 산으로 되어 있다. 그 산의 한 곳에서는 지금도 연기가 나고 있다.

5. 일본의 기후

일본의 국토는 홋카이도를 제외하면 온대에 해당하며,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 또,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기후는 일반적으로 온화하지만, 계절풍(모순)이나 장마,태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강수량이 많다. 또, 산지가 일반적으로 일본 열도의 방향을 따라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태평양측과 동해 측과의 기후차가 크고, 국토가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북쪽과 남쪽과의 기온차가 크다. 장마와 태풍은, 일본 기후의 큰 특색이지만, 홋카이도의 대부분에서는 장마를 볼 수 없고, 태풍에 시달리는 일도비교적 적다.

그러나 난세이 제도에서 키이반도에 걸친 태평양쪽은, 태풍에 시달리는 일이 많다. 일본에서는, 태평양쪽과 동해 쪽의 기후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에, 각각 태평양식 기후와 동해식 기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태평양쪽에서는 여름에는 남동 계절풍이 불어 무덥고, 여름부터 초가을에 걸쳐서는 장마나 태풍 등의 영향으로 인해서 강수량이 많다. 겨울에는 북서 계절풍이 많은 눈을 내리게 하기 때문에, 여름보다도 강수량이 많다. 남북에 있어서도 기후 차이를 볼 수 있고, 홋카이도 북단과 큐슈의 남단에서는, 연평균 기온이 약11℃나 다르다. 식물의 종류도, 북부에는 침엽수림이 많고, 남부에서는 상록의 광엽수림이 많다. 또, 홋카이도나 중앙 고지의 분지에서는, 강수량이 적고 기온의 연교차가 큰 내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보아 강수량이 많은 지방의 하나로서, 난세이제도나 이즈제도 등에서는 연강수량이 3,000㎜를 넘고, 키이반도의 남부에는 4,000㎜를 넘는 곳도 있다. 한편, 세토나이카이 연안에서는 비교적 강수량이 적고 또, 연간 일조 시간도 많아, 그 기후는 세토우치식 기후라고 불려지고 있다. 가장 강수량이 적은 곳은홋카이도의 동부로, 연 강수량이 1,000㎜ 이하인 곳이 있다.

6. 일본의 자연 재해

일본은 세계에서도 자연 재해가 많은 나라의 하나이다. 일본의 풍수해의 대부분은 태풍이나 장마가 끝날 무렵 집중 호우에 의한 것이다. 태풍철은 마침 벼의 개화기나 수확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농가의 근심도 크다. 또, 바람이나 비에 의해 집이 넘어지기도 하고, 유실되기도 하는 일이 많다.기온이 낮은 홋카이도나 토호쿠지방 등에서는 여름에 냉해가 자주 발생하고, 상해와 함께 농작물에 큰 해를 입힌다. 눈이 많은 호쿠라쿠에서는 설해가 많아, 교통이 방해를 받기도 한다. 세토나이카이 연안을 비롯해 서남 일본의 각지에서는 강수량이 적은 해에 한해를 일으키기 쉽다.

화산은 경우에 따라서는 대폭발을 일으키기도 하고, 용암이 산기슭의 마을을 태워버리기도 하고, 화산재가 바람에 실려와 넓은 범위에 내려 쌓여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는 일이 있다. 또, 일본에서는 지진에 의한 피해도 크다. 1923년 9월 1일 칸토지방에 대지진이일어났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 남을 만한 대지진이었다. 이렇게 대지진은 태평양쪽에 비교적 많지만, 1964년 니이가타 지진처럼, 동해 쪽에도 일어나는 일이 있다. 지진이나 해저 화산의 폭발 등에 의해, 해안에 높은 파도가 이는 일이 있다. 이것을 해일이라고 한다. 해일의 피해는 태평양연안, 특히 심하게 후미진 산리쿠해안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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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위치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에 있는 섬나라이다. 큰 섬은 북쪽으로터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큐슈 등 네 개인데, 그 외 오키나와섬을비롯한 작은 섬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국토의 면적은 377,835㎢이고, 이것은 세계 육지의 1/40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구는 123,611,541명(1991년)으로, 세계 총인구의 1/36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인구 밀도는 1㎢에 333명이나 된다. 국토는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한대에서 남으로는 아열대까지 넓게 분포되어있다. 또 주위가 바다로둘러싸여 있는 것은, 선박을 이용하여 국내에 부족한 자원을 대량으로 수입하거나 제품을 수출하기에 좋아, 일본의 산업 발전에 크게도움이 되어왔다.

일본의 동쪽과 남서쪽에는 태평양이 있고, 또 아시아 대륙과 일본 사이에는, 오호츠크해와 동해(일본해)와 동지나해가 있다. 일본의서쪽에는 역사적으로 관계가 깊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이 있다. 또 북쪽에는 사할린(카라후토), 남쪽에는 대만이 있다.

2. 일본의 지형

일본열도는 환태평양의 일부에 해당되고, 국토는 남북으로 가늘고 길며, 산이 많고 화산도 많다. 산지와 구릉에는, 침식작용에 의해작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어 복잡한 지형으로 되어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산이 많은 국토 중에서도 혼슈의 중앙부는 가장 높고, 2000m에서 3,000m 이상의 산들이 솟아 있어, 일본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혼슈의 북동부나 남서부에서는 산지나 일본 열도방향을 따라 이어져 있다. 이 산지는 교통에 방해가 되는 곳이 많지만, 삼림이 매우 무성하며, 이들은 홍수 방지나 기후를 온화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화산은 줄을 지어 분포하여 화산대를 만들고 있는 것이 많다. 화산은, 일반적으로 경치가 좋고, 가까이에온천이 솟아나, 휴양의 땅이 되고 있지만, 때로는 분화에 의해 재해를 초래하는 일도 있다. 일본의 해안선은 일반적으로 복잡하고, 그중에서도 태평양쪽은 크게 들쭉날쭉한 것이 눈에 띈다.

특히, 산리쿠해안이나 시마반도, 큐슈의 북서부 등에는 리아시스식 해안이 발달해 있다. 혼슈의 동해(일본해)쪽은 해변과 사구가 이어지는 단조로운 해안이 많지만, 태평양쪽에도 쿠쥬쿠리하마나, 카시마우라와 같이, 활모양을 한 단조로운 모래톱 해안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주위에는 태평양·동해(일본해)·동지나해·오호츠크해 등이 있으며, 태평양에는 깊이 10,000m를 넘는 이즈·오가사와라 해수가 있다. 동지나해와 오호츠크해는 얕고, 대륙붕이 펼쳐져 있다. 대륙붕에는 좋은 어장이 많고, 또,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곳도 있어, 좁은 국토에 인구가 많은 일본으로서는 대륙붕의 이용은 장래 중요한 과제이다.

3. 일본의 강과 평야

일본은 산이 많고, 게다가 산지가 해안까지 다다른 곳이 많기 때문에 강은 짧고, 흐름이 급하다. 일본에서 가장 긴 강은 시나노가와(367㎢)이고, 다음은 토네가와(322㎢)·이시카리가와 (262㎢)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긴 아프리카 나일강의 1/18(6,690㎢),
중국 양자강의 1/15(5,530㎢)익, 한국의 낙동강(525㎢), 한강(514㎢), 금강(401㎢)보다도 짧다. 일본의 강은 흐름이 급하기 때문에,비가 오면, 금방 강물이 넘친다. 그러나, 평소는 그다지 강에 물이 없고, 그 때문에, 상류에 댐이 만들어져 있는 강이 많이 있다. 또, 댐의 물은 발전이나 농업, 공업, 식수로 사용된다. 강의 중류와 하류에는 평야가 있다. 일본에서 큰 평야는, 토네가와 유역에 있는 칸토 평야·홋카이도의 이시카리 평야, 시나노가와 유역에 있는 니이가타 평야등이다. 그러나, 이들 평야도 세계의 넓은 평야에 비하면, 매우 좁다.

일본에서는 평지가 적기 때문에, 경지면적이 적다. 경지란 논이나 밭에서, 쌀, 야채, 과일을 재배하고 있는 곳이다. 경지면적이 부족한 일본에서는 그다지 경사가 급하지 않은 산은 점차 밭이 되기도 하고, 바다 등을 매립해서 논이나 밭으로 하고 있다. 바다 등을 매립해서 논이나 밭으로 하는 것을 간척이라고 한다.

간토평야는 일본에서 가장 넓은 평야이다. 이 평야는, 토네가와와 타마가와가 상류에서 운반해 온 흙과 모래로 생긴 평지와, 조금 높은 대지로 되어있다. 이 대지는 화산재 땅이다. 이러한 화산재 땅을 로움층이라고 한다. 로움증에는 그다지 물이 없기 때문에, 보리나 고구마 등을 재배하고 있다. 토네가와의 하류에는 호수가 있고, 물도 풍부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쌀을 재배하고 있다.

이시카리 평야는 이시카리가와 유역에 생긴 평야이다. 이시카리가와는, 홋카이도의 중앙부를 굽이쳐 흐르고 있다.참고로, 이시카리라고 하는 것은, 아이누어에서 "굽이쳐 흐른다"라는 의미이다. 이시카리 평야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넓은 평야이지만, 화산재 땅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농업에는 그다지 적당하지 않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목축이나 낙농이 성행한다. 홋카이도는,옛날 아이누족이 물고기나 짐승등을 잡아 생활하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누족은 15,000명 정도밖에 없다.


4. 일본의 산

일본에는 산이 많이 있다. 후지산은 높이가 3,776m로, 일본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 그 외에도 높은 산이 많다. 특히 혼슈의 중앙부에는 3,000m 이상의 산이 많이 솟아 있다. 이 혼슈의 중앙부에 있는 산들은 스위스 알프스를 닮았기 때문에, 일본 알프스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산이 이어져 있는 곳을 산맥이라고 한다. 일본의 산맥은 일본 열도의 정중앙을 등뼈처럼 연결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 열도 전체는 바다 속에 솟아 있는 산맥과 같다. 또, 일본에는 화산이 많이 있다. 화산 중에는 후지산처럼 지금은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 이미 활동하지 않는 사화산 등이 있다.

후지산은 높이가 7,776m인 매우 아름다운 산이다. 옆에 산이 없기 때문에,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전부 보인다. 또, 어디에서 보아도, 거의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후지산은 휴화산이지만, 옛날에 몇번이고 분화를 반복해서 지금같은 아름다운 모양의 산이 되었다. 후지산의 북쪽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다섯 개 있어 그 호수를 후지고코라고 한다. 후지산은 후지고코의 근처는 숲이 이어져있는데, 위쪽에는 나무도 풀도 나 있지 않다. 1년 내내 눈이 있는 곳도 있다.

아소산은 이중식 화산이다. 이중식 화산이란 한 번 분화한 곳이 함몰해서 화구원이 되고, 그 속에 또 화구가 생긴 것이다.아소산의 구화구는 동서가 18㎞, 남북이 24㎞나 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화구이다. 이 구화구를 보면, 처음 분화가 얼마나 컸던 가를알 수 있다. 지금은 그 중의 하구원에서, 6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농업이나 목축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화구원안을 JR도 지나고 있고,아소산의 화구원 중앙부는, 지금은 산으로 되어 있다. 그 산의 한 곳에서는 지금도 연기가 나고 있다.

5. 일본의 기후

일본의 국토는 홋카이도를 제외하면 온대에 해당하며,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 또,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기후는 일반적으로 온화하지만, 계절풍(모순)이나 장마,태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강수량이 많다. 또, 산지가 일반적으로 일본 열도의 방향을 따라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태평양측과 동해 측과의 기후차가 크고, 국토가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북쪽과 남쪽과의 기온차가 크다. 장마와 태풍은, 일본 기후의 큰 특색이지만, 홋카이도의 대부분에서는 장마를 볼 수 없고, 태풍에 시달리는 일도비교적 적다.

그러나 난세이 제도에서 키이반도에 걸친 태평양쪽은, 태풍에 시달리는 일이 많다. 일본에서는, 태평양쪽과 동해 쪽의 기후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에, 각각 태평양식 기후와 동해식 기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태평양쪽에서는 여름에는 남동 계절풍이 불어 무덥고, 여름부터 초가을에 걸쳐서는 장마나 태풍 등의 영향으로 인해서 강수량이 많다. 겨울에는 북서 계절풍이 많은 눈을 내리게 하기 때문에, 여름보다도 강수량이 많다. 남북에 있어서도 기후 차이를 볼 수 있고, 홋카이도 북단과 큐슈의 남단에서는, 연평균 기온이 약11℃나 다르다. 식물의 종류도, 북부에는 침엽수림이 많고, 남부에서는 상록의 광엽수림이 많다. 또, 홋카이도나 중앙 고지의 분지에서는, 강수량이 적고 기온의 연교차가 큰 내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보아 강수량이 많은 지방의 하나로서, 난세이제도나 이즈제도 등에서는 연강수량이 3,000㎜를 넘고, 키이반도의 남부에는 4,000㎜를 넘는 곳도 있다. 한편, 세토나이카이 연안에서는 비교적 강수량이 적고 또, 연간 일조 시간도 많아, 그 기후는 세토우치식 기후라고 불려지고 있다. 가장 강수량이 적은 곳은홋카이도의 동부로, 연 강수량이 1,000㎜ 이하인 곳이 있다.

6. 일본의 자연 재해

일본은 세계에서도 자연 재해가 많은 나라의 하나이다. 일본의 풍수해의 대부분은 태풍이나 장마가 끝날 무렵 집중 호우에 의한 것이다. 태풍철은 마침 벼의 개화기나 수확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농가의 근심도 크다. 또, 바람이나 비에 의해 집이 넘어지기도 하고, 유실되기도 하는 일이 많다.기온이 낮은 홋카이도나 토호쿠지방 등에서는 여름에 냉해가 자주 발생하고, 상해와 함께 농작물에 큰 해를 입힌다. 눈이 많은 호쿠라쿠에서는 설해가 많아, 교통이 방해를 받기도 한다. 세토나이카이 연안을 비롯해 서남 일본의 각지에서는 강수량이 적은 해에 한해를 일으키기 쉽다.

화산은 경우에 따라서는 대폭발을 일으키기도 하고, 용암이 산기슭의 마을을 태워버리기도 하고, 화산재가 바람에 실려와 넓은 범위에 내려 쌓여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는 일이 있다. 또, 일본에서는 지진에 의한 피해도 크다. 1923년 9월 1일 칸토지방에 대지진이일어났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 남을 만한 대지진이었다. 이렇게 대지진은 태평양쪽에 비교적 많지만, 1964년 니이가타 지진처럼, 동해 쪽에도 일어나는 일이 있다. 지진이나 해저 화산의 폭발 등에 의해, 해안에 높은 파도가 이는 일이 있다. 이것을 해일이라고 한다. 해일의 피해는 태평양연안, 특히 심하게 후미진 산리쿠해안에 많다.

문화http://www.guidejapan.net/History/histor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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