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날 사람들에 음식에 대한 종류

엣날 사람들에 음식에 대한 종류

작성일 2007.09.28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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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박물관을 만들려고 하는데요

엣날사람들이 먹던 음식의 종류와

만드는방법 ,기구,사진을

부탁좀 드릴게요

감사내공도 팍팍*^^*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새참
농사철에 일꾼들이 하루 세 끼의 제때 식사 이외에 먹는 음식을 가리켜 새참이라고 말한다.
새참으로 콩밥, 막걸리, 돼지 불고기, 시금치, 김치, 열무김치, 무생채, 닭볶음탕, 조기구이, 상치, 쌈장, 오이 풋고추 등을 먹는다.

각 지역별 먹었던 요리

함경도 : 회냉면, 닭고기비빔밥, 가자미식해
평안도 : 내장탕, 김치말이, 노티
황해도 : 되비지탕, 닭온반, 김치순두부
경기도 : 모약과, 닭젓국, 조개죽, 주꾸미조림
강원도 : 감자수제비, 막국수, 마른오징어순대, 오징어회, 올챙이묵, 감자부침
경상도 : 골짠지, 우무냉국수, 콩가루우거지국, 콩나물장조림, 아구찜
충청도 : 호박고지적, 호박지찌개, 홍어어시육
전라도 : 비빔밥, 콩나물국밥, 죽순나물, 뱀장어구이
제주도 : 자리회, 초기죽, 메밀저배기, 청묵, 빙떡, 오매기떡

7첩반상 : 밥, 국(탕), 김치 1~2가지, 조치류(찌개1, 찜1), 간장, 초간장, 초고추장, 숙채, 생채, 조림, 구이, 전(전유어), 회, 마른반찬등 7가지 반찬으로 차린 밥상을 말한다.

9첩반상 : 7첩 반상과 똑같다, 대신 생채는 2가지,구이 2가지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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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몇 끼를 먹었을까]
조선시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체 몇 끼를 먹었을까? 지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식사를 '조석'이라 불렀다. 18세기 후반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5홉(지금의 1.5홉)을 먹으니 하루에
한 되를 먹는다고 하였다.
그러면 점심을 안 먹었단 말인가? 점심이란 말은 이미 조선 초기에 등장한다. 태종 때
대사헌 한상경은 서울 5부 학당의 교수훈도들이 하루 종일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점심도
없으니 지방의 향교만도 대우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점심은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간식 정도의 식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점심'이란 중국의 스님들이
새벽이나 저녁 공양 전에 문자 그대로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금의 중국에서도 '디엔신'이라는 말은 간식을 가리키며, 우리의
점심식사에 해당하는 말은 '우판'이라고 부른다. 오희문이 임진왜란 중에 쓴 일기
<쇄미록>에서도 간단히 먹은 경우에는 점심이라 쓰고, 푸짐하게 먹은 경우에는 낮밥이라
써서 점심과 구분하고 있다. 궁중에서도 아침, 저녁에는 '수라'를 올리고 낮에는 간단하게
국수나 다과로 '낮것'을 차렸다. 그러다가 점심이라는 말이 차츰 낮밥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결국 점심은 간식에서 간식 정도의 식사 단계를 거쳐 정식 식사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하루에 챙기는 끼니 수는 계절에 따라서도 달랐다. 19세기 중엽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대개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은 하루에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개월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고 하였다. 18세기 후반
성균관에서는 음력 2월 봄 석전제를 지낸 뒤부터 음력 8월 가을 석전제까지만 점심을
먹는데, 이때 점심이란 것도 쌀밥 몇 숟갈과 미역 몇 조각 정도였다고 한다. 즉 해가 긴
여름에는 간단한 점심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두 끼를 먹었다는
말이다.
계절뿐 아니라 노동량에 따라서도 하루에 먹는 끼니 수는 달라졌다. 중국 동북부에 살고
있는 원크족은 지금도 사냥철에는 하루 세 끼를 먹고 보통 때는 두 끼를 먹는다고 한다.
우리 나라 농촌에서 한창 바쁜 모내기 때에는 새참까지 합하여 하루에 다섯 끼도 먹는다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세 끼 식사가 정착되기 전에도 여행길에는
활동량이 많으므로 낮에 밥을 먹어야 했다. 여행객은 주막에서 중화로 허기를 채웠고, 왕도
궐 밖으로 먼 길을 거동할 때는 주정소에 잠시 머물며 간단한 낮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차려진 '낮수라'를 들었다. 겨울에 두 끼만 먹는 것도 일조시간이 짧은 이유보다도 주로
농사일을 쉬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살림 형편에 따라 빈민들은 하루 두 끼에 만족해야 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세 끼, 또는
그 이상을 먹었다는 기록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1905년 러시아 대장성에서 발간한
<한국지>에서는 한국인은 하루에 서너 번 밥을 먹는다고 하였다. 이는 아침식사 전에 죽
따위를 간단히 먹는 '조반'을 보태어 한 말인 듯한데 여기에 밤참까지 포함하면 다섯 끼가
된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자면 두 끼가 일반적이었다. 일본군 군의관들이 한국
북부지방의 생활을 조사한 <조선의 의식주>(1916)에서도 한국인의 식사 횟수는 지방에
따라, 계절에 따라, 경제력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하루 2회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끼니
수는 두 끼가 일반적이었고 간단한 간식 정도에 그치던 점심이 점차 정식 식사로 자리잡아
세 끼로 바뀌었는데, 조선시대 말까지도 완전히 세 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루 세 끼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금세기 후반부터였다.


[흰쌀밥을 먹었을까, 꽁보리밥을 먹었을까]
우리 선조들은 끼니때마다 무엇을 먹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 나라 식단은
주식과 부식이 확연히 구분되어 밥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밥이라 하더라도 모두
쌀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밥 짓는 재료로 쓰이는 곡물은 우선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1827)에서는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하여, 남북의 주식이 달랐음을 시사하고 있다. 북쪽의 주식이
조였음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만 있으면 쌀밥을
먹었다. 물론 농촌에서 춘궁기부터 추수 전까지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많이 먹었겠지만
쌀밥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주식은 기본적으로 쌀밥이고 다만 북쪽에서는
조밥을 먹었다는 사실은 국내 기록은 물론 외국인 견문기에도 무수히 많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남쪽에서는 보리나 잡곡이 곁들여진 쌀밥이, 북쪽에서는 조밥이 주식이었고
경제력에 따라서도 사정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보릿고개를 겪고 난 뒤 꽁보리밥만 먹던
추억이 생생한 세대들로서는 의아해 할지도 모르므로 여기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악몽같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쓰일 군량미 조달과 일본 국내의
저임금을 뒷받침하기 위해 쌀과 콩이 수탈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에 수출되어, 정작 우리는
쌀 농사를 지어도 쌀을 먹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대신 보리, 안남미,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을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먹지 못하는 집이 많아 아이들은 얼굴에 부황이 들었다.
일제시대에는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도 단절의 시대였다.
왜 우리 민족을 포함하여 인도,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쌀밥을 먹었을까? 이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벼농사를
지어야 수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밀을 1알
뿌리면 6알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쌀은 1알을 뿌리면 평균 25알에서 30알 정도를
수확했다. 그러므로 이중환(1690-?)은 <택리지>에서 볍씨 1말을 뿌려 60말을 거두면 살기
좋은 곳이고 40, 50말을 거두는 곳이 그 다음이며 30말을 거두면 살기 힘든 곳이라 하였다.
벼농사는 노동량이 많이 투여되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밀처럼 이포제, 삼포제 농업으로 경작지를 묵혀 두지 않아도 되고 조건이 좋은 곳에서는
이모작, 삼모작을 행할 수 있어 경지 이용도와 단위 면적 당 생산량 모두 높았다. 또한
밀에는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여 고기를 곁들여 먹어야 하지만, 쌀은 기본적인 영양소가
고루 갖추어져 있어 약간의 영양소만 보충하면 될 뿐이었다. 그러기에 쌀을 재배하여
100명이 먹고 살 수 있는 넓이의 땅에 밀을 심으면 75명이 먹고 살 수 있고, 목초지를
만들어 고기를 먹는다면 9명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불교자이나교힌두교 등
고대 인도의 종교가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종교들이 발생할 무렵에
인구밀도가 적정선을 넘어서서 육식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인류학자도 있다.


[한국음식의 상징, 김치와 고추]
밥과 함께 우리 식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김치이다. 우리 나라 식단 차림의
전형이라 할 만한 반상 차림은 뚜껑이 있는 그릇에 담겨 나오는 반찬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부른다. 첩수가 올라갈수록 점차 차림이 풍부해지기는 하지만 밥, 국,
김치는 어디에나 빠지지 않으면서 첩수에는 계산되지 않는다. 그만큼 김치는 가장
기본적인 부식이었다.
김치는 넓은 의미에서 소금, 초, 장 등에 '절인 채소'를 의미한다. 김치의 어원인 '딤채'도
'담근 채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깍두기, 오이지, 오이소박이, 단무지는 물론 장아찌까지도
김치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의 것으로는 다꾸앙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쯔께모노나 서양의 피클, 중국의 파오차이,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 인도네시아의 아차르도
초나 소금에 절인 채소, 즉 김치의 일종이다. 우리 나라의 김치는 '지'라 불렀다. 그래서
짠지, 싱건지, 오이지 등 김치류에는 지금도 '지'자가 붙는다. 초기의 김치는 단무지나
장아찌에 가까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피클, 쯔께모노, 파오차이와 비슷했던 김치가 지금은 외형상으로나 맛으로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 김치에는 젓갈과 고춧가루를 쓰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김치는 18세기부터 만들어졌다. 다만 이때까지는 아직도 무나
오이가 김치의 주재료였다. 우리가 지금 흔히 먹는 배추김치는 18세기 말 중국으로부터
크고 맛이 좋은 배추 품종을 들여온 뒤로 널리 담가지기 시작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무김치를 능가하게 되었다.
김치와 관련하여 우리 나라 향신료의 대명사로 쓰이는 고추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전기의 향신료로는 후추, 천초, 생강 등이 있었다. 그런데 후추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육류의 노린내를 없애주는 후추는 서양에서도 '금은처럼' 비싸서 유산
목록에 기재되고, 때로는 낟알로 세어 팔 정도였으며, 신대륙 개척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도 아라비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싼값에 후추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전래된 후추는 우리 나라에서도 매우 비싼 물건이어서 약용으로나 쓰일 정도였다. 조선
초기에도 왕의 하사품으로 후추가 종종 등장하였거니와,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사신이 잔치
자리에서 후추 한 움큼을 상위에 흩어놓자 악공들과 기생들이 이를 줍느라고 소란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징비록>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후추는 별로 쓰지 못하고 천초와
생강, 겨자 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추가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중미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는 '남만초'나
'왜겨자'라는 이름으로 16세기 말 조선에 전래되어 17세기부터 서서히 보급되다가 17세기
말부터 가루로 만들어 김치에 쓰이게 되었다. 고추는 19세기에는 향신료로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후추는 더 이상 고가품이 아니었으며, '산초'라고도
불리는 천초는 지금은 간혹 추어탕에나 쓰일 정도로 되었다. 우리 나라의 고추는 다른
나라의 고추 품종과 달리 매운 맛에 비해 단 맛 성분이 많고, 색소는 강렬하면서 비타민C
함유량이 매우 많다고 한다. 더구나 고추는 소금이나 젓갈과 어우러져 몸에 좋은 효소를
만들어 내며, 몸의 지방 성분을 산화시켜 열이 나게 함으로써 겨울의 추위를 이기게 하는
기능이 있다. 고추가 김장김치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기근이 들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데...]
조선 후기에 고추의 전래와 함께 특기할 만한 것이 구황식품의 전래이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솔잎, 소나무 껍질, 느릅나무 껍질, 도토리, 칡뿌리, 쑥 등이 구황식품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전시기를 일관하여 널리 사용된 것은 솔잎이었다. 솔잎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먹었는데 쩌서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들어 콩가루 등에 섞어서 죽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콩가루를 섞어 먹은 이유 중의 하나는 변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솔잎을 너무 먹어 변비가 걸릴 만큼 가난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식품이 조선에 들어왔다. 중남미지역의 신대륙을 점령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중남미 원산의 여러 가지 식품을 중국, 일본에
전했고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조선에도 이들 새로운 식품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토마토 등이 전해졌는데 이 가운데 특히 고구마와 감자는
재배방법이 까다롭지 않고 가뭄에도 잘 견뎌 새로운 구황식품으로 각광받았다. 고구마는
18세기 중엽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들여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재배되다가, 19세기에
경기도,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로 서서히 확산되었다. 고구마는 '감저'라 하였는데
고구마라는 말은 고구마의 별칭인 '효행저'를 대마도인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고꼬이모'라
부르는 것을 듣고 받아들인 말이라고 한다. 한편 감자는 16세기 후반에 남미에서 스페인에
전해진 뒤 18, 19세기에는 전 유럽에 번져나가 빈민들의 주식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마보다 늦게 19세기 전반기에 보급되었는데, 말방울 모양으로 주렁주렁 달렸다 하여
'마령서'나 북쪽에서 온 감저라 하여 '북감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감자는 추위는 물론
가뭄과 홍수에 잘 견뎌내어 전래된 지 얼마 안되어 고구마를 능가하면서 북부지역, 강원도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식사를 상징하는 숟가락과 혼자 받는 밥상]
우리 나라 식생활에서 특이한 것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인구가 약 4할,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인구가 약 3할,
젓가락을 사용하는 인구가 약 3할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느 민족이나 모두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동로마제국의 비잔티움에서 10세기경부터 식탁에
등장한 포크는 16세기에 이탈리아 상류사회로 전해져 17세기 서유럽의 식생활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으나, 신분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전 유럽에 보편화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5세기의 예절서에서 음식 먹는 손의 반대편 손으로 코를 풀라고 했던
것이나, 16세기의 사상가 몽테뉴가 너무 급하게 먹다가 종종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기록으로도 당시에 포크가 아니라 손가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일이 서양보다 훨씬 일찍 사라졌다.
손가락 대신 젓가락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젓가락뿐 아니라 숟가락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오랜 옛적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숟가락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선조 때 사람 윤국형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중국인들이 상하를
막론하고 숟가락을 쓰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도 일본에는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이 없는 것을 특별히 기록으로 남겨 놓은 바
있다.
우리는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숟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음을 나타낼 정도로 숟가락은 식사 자체를 의미하였다. 유독 우리
나라에서만 숟가락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음식에 물기가 많고 또 언제나 밥상에 오르는
국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에서도 국을 먹지만 국이라기보다는 국물에 가까워서
손으로 국그릇을 들고 입을 대어 마시므로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국은
국물을 마시는 것도 있으나 대개는 건더기가 많고 밥을 말아먹는 국이다. 미역국, 된장국,
해장국 등 거의 모든 국이 그러하다. 찌개류나 '물만 밥'도 숟가락이 필요한 음식이다.
게다가 고려 후기에는 몽고풍의 요리가 전해져 고기를 물에 넣고 삶아 그 우러난 국물과
고기를 함께 먹는 지금의 설렁탕, 곰탕이 생겨났다. 특히 국밥은 애초부터 밥을 국에
말아놓은 것인데 이런 식생활풍습은 전 세계에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젓가락 숟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유일한 민족이 되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을 차렸다. 즉 한 식탁에서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상을 받았다. 서양은 그렇지 않았다. 여럿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접시를 두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개인용 접시가 사용된 것은 17세기에
가서야 정착되었다. 서양에서 식사 때의 청결이 강조되고 식사예절이 까다롭게 발전한
것은 여럿이 한 식탁에서 맨손으로 집어먹던 습속에서 유래되었으며, 포크나 접시도
초기에는 몇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분에
관계 없이 모두 혼자서 상을 받았다. 지금은 집안에서 잔치를 할 때 교자상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잔치 때에도 독상을 받았던 사실이 당시의 기록이나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작은 소반을 몇 개씩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끼리 상에 모이거나 간혹 할아버지와 겸상을 받기도 하였지만 성인 남자는 혼자
상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서민층의 주부들은 그렇지 못해서 부엌의 부뚜막에서
간단히 먹거나, 상 옆의 방바닥에 밥주발과 국대접을 놓고 먹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런
풍습이 사라진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 또한 혼자 상을 받으므로 개인별로 정해진 그릇과
수저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아기가 돌을 맞을 때는 아기 몫의 밥주발, 국대접과 아울러
숟가락, 젓가락을 마련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서울여대 교수)


[조선시대의 술과 주막] 정연식
우리 민족은 꽤나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이다. 이런 기질은 유래가 퍽 오래 되어서
이미 고대 중국의 사서 <후한서>에 지적될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도 술은 특별한 때에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음료에 가까워서, 평상시의 힘겨운 노동에 흥과 힘을 돋우기 위한
활력소로 쓰이고 있었다. 그러기에 15세기 농서 <금양잡록>에서도 호미질 나갈 때에
술단지를 잊지 말라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평소 손님에게도 차 대신에 술을 대접하였고,
차례에도 차를 쓰지 않고 술을 썼다.
이렇게 술을 좋아한 민족이건만, 중국에는 마오타이가 있고 영국에는 위스키가 있는데,
우리에게는 애석하게도 한국을 대표할 만한 술이 아직 없다. 게다가 다양하지도 못하다.
조선시대 문헌에 전하는 것만 해도 200종을 훨씬 넘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그러한 경향은 한말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을 사실상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1909년 주세법을 만들어 술 제조에 세금을 매기고, 합병 후 1916년에는
주세령을 실시하여 양조허가를 받은 사람 외에는 술을 만들지 못하게 한 뒤 밀주단속을
벌였다. 이러한 정책은 최근까지 이어져서 공장이나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획일화된 술만이
남게 되었다.


[뿌연 술, 맑은 술, 불태운 술]
조선시대에 많은 술이 있었지만 대개는 탁주, 청주, 그리고 소주로 나뉜다. 우선
서민들이 즐겨 마신 탁주는 말 그대로 뿌연 술로서 막걸리를 가리키는데, 막걸리란 '마구
걸러낸 술'이라는 뜻이다. 탁주를 만들려면 우선 적당히 반죽된 밀가루를 둥그렇거나
네모난 모양의 누룩틀에 넣고 발로 꾹꾹 밟아 누룩을 만든다. 여기에 누룩곰팡이가
번식하면 발효가 시작된다. 그런 다음 쌀을 시루에 쪄서 꼬들꼬들하게 만든
고두밥(지에밥)을 말려서 누룩 빻은 가루와 함께 버무려 독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일정한 기간 동안 적당한 온도를 유지시키면 독 속에서 뽀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효가
진행되어 술밑이 만들어진다. 이 술밑에 물을 조금씩 부으면서 체로 걸러낸 것이 바로
탁주이다.
청주를 만드는 방법은 탁주와 거의 같다. 다만 체로 걸러내지 않고, 술 거르는 데 쓰는
용수를 술독에 넣어 용수 속에 고인 맑은 술을 떠낸 것이 청주이다. 청주는 일명
약주라고도 하였는데, 인조 때 청주를 잘 빚었던 서성의 집이 약현에 있어서 약주라
불렸다는 기록이 <임원경제지>에 나타나지만 분명치는 않다. 조선시대 청주의 대표격은
삼해주였다. 삼해주는 겨울에 빚어 버들개지가 날아다니는 봄에 먹는 술이라 하여 춘주
또는 유서주라고도 일렀는데, 한강변에서 삼해주를 빚느라고 막대한 양의 쌀이 소비되어
18세기 이후로는 제조금지령이 심심찮게 거론될 정도였다.
소주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불태운 술이라는 뜻인데, '브랜디(brandy)'도 불태운 포도주라
는 뜻의 네덜란드어 '브란더베인(brandewijn)'에서 파생된 말이다. 불태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보다는 우리말의 '고아 내린다'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우선 솥에 술밑을
채우고 그 위에 소주고리라는 증류기를 얹어 밀봉한 뒤 불을 때면 술 속의 휘발성이 강한
알코올 성분이 수분보다 먼저 증발하게 된다. 이 증기가 소주고리 윗부분에 담긴 찬물에
닿아 이슬로 맺혀져 내려오는데 이를 받아낸 것이 소주이다. 소주를 이슬 '로'자를 써서
노주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소주는 화학이 고도로 발달했던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중국 문헌에서는 아라길, 아리걸이라 하였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소주를 골 때 나는 냄새를 아라기냄새라 하고 개성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 한다. 이는 모두 소주란 뜻의 아람어 '아락(araq)'에서 유래된 말이다. 소주는
고려 후기에 원나라를 통해 우리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우리 나라 소주 산지로
유명한 개성, 안동, 제주도 등이 모두 원나라의 일본정벌과 관련된 지역이었음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예전의 소주는 지금 대량으로 생산되는 소주와는
다른 종류의 술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소주는 공장에서 만들어낸 소주 원액에 물을 타서
희석시키고 각종 첨가제를 섞은 희석식재제주이고, 예전의 소주는 안동의 안동소주, 진도의
홍주, 평양의 감홍로와 같이 가정에서 만들어낸 증류주로서 주정도수가 매우 높은 술이다.
이미 여말선초에는 소주가 꽤 널리 퍼진 듯하다. 고려 말 왜구를 막기 위해 경상도에
원수로 부임한 김진이 군무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밤낮으로 소주만 마셔대어 사람들이
'소주패'라 불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전하며,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 방우도 술을 너무
마시다가 소주를 먹고는 병이 나서 죽었다고 <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미 고려
말에는 사치를 금하기 위한 시책으로 소주를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금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며, 성종 때 기록을 보면 세졸 때에는 사대부집 잔치에만 쓰이던 소주가 지금은 보통
사람들의 잔치에도 쓰일 정도로 사치가 심하니 금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소주는 탁주나 청주에 비해 곡식이 많이 들어가고 제조공정이 복잡하여 값이 비쌌으므로
아무나 즐길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에도 소주는 비싸고
독해서 다른 술처럼 큰잔으로 마시지 못하고 조그만 잔에 따라 마셨으므로 작은 술잔을
소주잔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소주는 주로 북쪽 지방에서 마셨다. 물론 북쪽
지방에서도 일반인이 마신 소주는 대개 질이 낮은 소주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쪽
지방에서는 서민들은 탁주를, 상류층은 청주를 즐겨 마셨는데, 소주도 아주 희귀하지는
않아 서울에도 공덕리에 소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러므로 양반관료들은
소주를 종종 마셨던 듯하거니와, 달레의 <조선교회사>(1874)에서도 양반들은 여름에
꿀물과 소주를 많이 마신다고 하였다. 주로 여름에 소주를 마셨다는 것은 소주는
주정도수가 높아 더위에도 쉽게 시어지지 않으므로 오랫동안 두고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도 여름철에 제사 지낼 때에는 청주의 맛이 변하니 소주를 쓰라고 권하였다.
한편 소주는 약으로도 자주 쓰였다. 옛 사람들의 일기에도 그 편린들이 남아있는 바,
오희문은 여름에 더위를 먹고 배가 아파서 소주 석 잔을 연거푸 마셨더니 차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갑자기 새벽에 곽란이 일어나 소주로 다스리려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혼이 났다고 한다. 또한 기생충 때문에 다 죽게 된 병자가 소주 두 잔을 마시고는 벌레를
토해 내어 병이 낳았다는 말도 전하거니와, 이런 일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당시
사람들이 소주를 약으로 여겼음을 짐작케 한다. 소주 중에서도 푸른 대쪽을 구워 빼낸
진액으로 만든 죽력고나 배즙과 생강즙을 넣어 만든 이강고는 약술로 이름이 높았다.

 

 

추석의 시절음식
추석은 시기적으로 곡식과 과일 등이 풍성한 때이므로 이 즈음에는 여러 가지 시절 음식이 있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 제찬을 준비하는데, 설날의 제찬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추수의 계절 이라 햇곡식으로 밥과 떡, 술을 만든다. 철이 늦은 해에는 미리 밭벼[山稻]를 심었다가 제미(祭米) 로 쓰는 일도 있다. 이렇게 햅쌀로 밥을 지으면 맛이 좋고 기름기가 있으며, 떡도 맛이 좋다.

추석의 대표적인 절식으로는 송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송편 속에는 콩·팥·밤·대추 등을 넣는데, 모두 햇것으로 한다. 열나흗날 저녁 밝은 달을 보면서 가족들이 모여 송편을 만드는데,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며, 잘못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해서 처녀, 총각들은 송편을 예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또 임신한 여자가 태중의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 인지 궁금할 때에는 송편속에 바늘이나 솔잎을 가로 넣고 찐 다음 한쪽을 깨물어서 바늘의 귀쪽이 나 솔잎의 붙은 곳을 깨물면 딸을 낳고 바늘의 뾰족한 곳이나 솔잎의 끝쪽을 깨물면 아들을 낳는 다고 하여, 이를 점치기도 한다. 특히 올벼로 만든 송편은 올벼 송편이라 부른다.

추석의 차례상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술이다. 추석 술은 백주(白酒)라고 하는 데, 햅쌀로 빚었기 때문에 신도주(新稻酒)라고도 한다. 추석 때는 추수를 앞 둔 시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풍족해진다. 사람들의 인심 또한 후해서 추석 때에는 서로 술대접을 하는 수가 흔하다. 또 이 때의 가장 넉넉한 안주로 황계(黃鷄)를 들 수 있는데, 봄에 알을 깬 병아리를
길러서 추석 때가 되면 잡아 먹기에 알맞게 자란다. 또 옛날에는 명절에 어른에게 선사하는 데에 닭을 많이 썼다. 친정에 근친하러 가는 딸은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가지고 갔으며, 경사가 있을 때에 도 닭을 선물했으며,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손쉬운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특히 사위가 찾아오면 장모는 닭을 잡아 대접하는 일이 흔했다. 녹두나물과 토란국도 추석의 절식이다. 녹두나물은 소양(消陽)한다고 하지만 잔치상에 잘 오르고, 토란은 몸을 보한다고 해서 즐긴다.

 

●오려 송편

 올벼로 찧은 오려쌀로 만들어서 오려 송편이라고 한다. 쌀가루에 쑥, 송기, 치자로 맛과 색을 달리하여 끓는 물로 익반죽하여 오래도록 치대어 마르지 않게 젖은 보자기로 덮어 둔다. 송편소로 거피 팥, 햇녹두, 청대콩, 꿀이나 설탕과 소금으로 맛을 낸 깨 등이 있다. 송편 반죽을 밤톨 만하게 떼어 가운데 우묵하게 우물을 파서 소를 넣고 빚는다. 시루에 솔잎을 송편 사이사이에 두어 쪄낸다. 모양은 지방마다 달라 북쪽은 대체로 크고, 서울은 작게 빚는다. 조개 모양 또는 손자국을 내서 창해도, 강원도 지방은 소박하게 빚는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쑥 대신 모시잎을 뜯어 삶아 섞는다. 쌀 대신 감자 녹말, 고구마녹말로 빚기도 한다 송편을 쪄 내어 찬물에 재빨리 넣었다가 건져 참기름을 바르는데 오래 두었다 먹거나 멀리 가져갈 것은 물에 씻지 말고, 솔잎이 붙은 채 바구니에 담아둔다. 정초에 절편이나 흰떡을 하듯이 친 떡으로 송편을 빚으면 들것한 것이 맛나다.

 

●토란탕

토란은 추석 절부터 나오기 시작하며 흙 속의 알이라 하여 토란(土卵)이라 하고, 연잎같이 잎이 퍼졌다 하여 토련(土蓮)이라 한다. 토란은 전분이 대부분이고 미끈거리기 때문에 조리할 때는 꼭 소금물이나 뜨물에 삶아 쓴다. 토란은 토란탕, 산적, 찜, 조림, 구이, 장아찌, 엿 등을 해먹는다. 토란탕은 국거리로 양지머리나 사태를 푹 곤다. 곱창과 양을 합하여 곰국을 끓여도 좋다. 흠씬 무른 고기를 절어 양념하여 넣고 무, 삶은 토란, 다시마를 넣어 폭 끓여 낸다. 산적이나 구이 등을 할 때는 갸름한 모양을 택한다.

 

●닭찜

햇닭이 살이 올라 제일 맛이 있을 계절이므로, 채소를 합하여 찜을 하든가 북어와 다시마를 넣고 갖은 양념하여 찜을 하면 구수하다. 토막낸 닭에 칼집을 넣어 양념 간장과 생강, 고추 등을 넣어서 간이 어느 정도 배면 닭을 번철에 넣고 누릇이 지져 낸다. 이때 지져서 기름을 빼면 닭 특유의 냄새도 없이 매우 맛있다. 다 되면 계란 채 썬 것으로 고명을 얹어 낸다.

 

●배숙

배수정과라 하여 곶감 대신 배를 넣은 것인데 예전에는 작고 단단한 문배를 사용하였다. 배를 통째로 삶아 꿀물이나 설탕물에 담근 것을 말한다. 생강을 편으로 썰어, 알맞은 매운 맛의 생강물을 만들어 둔다. 배는 여섯 쪽 또는 다시 반 나누어 삼각형으로 하여 가도련한 다음 속을 빼내고 등쪽에 통후추를 깊이 박는다. 생강물에 설탕으로 단맛을 내고, 배를 넣어 말갛게 익혀서 차게 식혀 그릇에 담고 잣을 띄운다. 익힌 배라 하여 이숙(梨熟)이라 한다.

 

●햇밤

햇밤을 푹 삶아서 반으로 갈라 작은 숟가락으로 파내어 체에 쳐서 밤고물을 만든다. 여기에 꿀과 계핏가루를 넣어 반죽하여 다식판에 박으면 밤다식이고, 밤 모양으로 빚으면 율란이 된다 밤을 설탕물에 넣어 졸이다가 꿀로 볶아 내면 밤초가 된다. 잣가루를 묻혀 낸다. 차례상에는 좋은 밤만 골라 속껍질까지 예쁘게 생률을 쳐서 돌려 담아 올린다.

 

●버섯 요리

8월에는 가지각색의 버섯이 나는 철로 옛날에는 첫째가 표고, 둘째가 송이, 셋째가 능이, 넷째가 느타리, 다섯째가 석이, 여섯째가 목이라 하였다. 그 밖의 것은 잡 버섯(싸리버섯, 밤버섯 등)이라 하고 못 먹는 것은 독버섯이라 했는데 표고가 흔치 않아 제일로 쳤다. 송이버섯은 원래 공기가 맑은 산중에서도 소나무나 잣나무 밑에서 자라 그 향과 모양이 고상하다. 조선시대 때는 남산에서 자란 것을 최고로 쳤고, 한때는 양주 망월사의 것을 최고로 쳤다. 송이로 맛나게 음식을 하려면, 양념을 되도록 적게 하고 슬쩍 익혀야 송이 특유의 향을 즐길 수 있다.

 

●송이 산적

도톰하게 저며 절어서 쇠고기와 번갈아 때워 석쇠에 굽는다.

 

●반월 송편

《동국세시기》에는 송편·시루떡·인절미·밤단자를 시절음식으로 꼽았는데, 송편은 대표적인 추석음식이다. 전하는 말로는 송편을 예쁘게 잘 빚어야 시집을 잘 간다고 하여, 여성들은 예쁜 손자욱을 내며 반월형의 송편에 꿀·밤·깨·콩 등을 넣어 맛있게 쪄냈으며 이 때 솔잎을 깔아 맛으로만 먹은 것이 아니고 후각적 향기와 시각적인 멋도 즐겼다. 추석전날 송편을 잘 빚어 놓고 추석 차례의 여러 제수를 장만한다. [사진]- 추석 절식인 송편과 토란탕. 그런데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온달[滿月]이 뜨는 추석날에 왜 반달[半月] 모양의 송편을 빚었을까 하는 일이다. 너하나 나하나 만들어 온달을 이루고자하는 공동체 의식의 발로인가 아님 그 모양새가 반달 송편이 더 예쁘기 때문인가 좀더 연구해볼 만 하다.

 

●화양적

 꼬치에 갖은 재료를 꿰어서 화려하고, 영양 면에서 치우침이 없는 별식이다. 만드는 법은 쇠고기 산적에 통도라지, 당근, 표고, 오이, 달걀을 양념하여 볶고, 익혀서 길이를 5,6센티미터, 폭을 1센티 미 터 정도로 하여 꼬치에 색색이 꿴다. 각각을 익혀서 꽃은 것이니 접시에 둥글게 색동으로 돌려 담는다. 접시 가운데 비는 곳에는 간장에 졸여 녹말로 갈쭉하게 한 홍합초를 담는다. 화양적의 맛이 조금 담백하니 잣가루에 참기름, 소금, 후추로 잣집을 만들어 얹어 낸다. 또는 밀가루, 달걀을 씌워 지져 내면 누름적이 된다. 추석은 백로, 추분의 절기이니 채소를 갈무리하여 호박 오가리, 박오가리, 가지 오가리를 한다. 농가에서는 수수 이삭을 따고 황률도 말리고 물고추도 따서 말리고, 참깨, 들깨도 털고, 박은 켠 뒤 바가지를 만든다. 또한 산에 가서 머루, 다래도 따서 오니 농가에서는 수확의 재미가 큰 반면에 바쁘기 이를 데 없다. 그 밖에 8월 음식으로 무와 호박을 섞어 시루떡을 해먹고, 또 찹쌀가루를 쪄서 쳐서 알맞게 잘라서 깨나 콩가루를 입혀 인절미를 만든다. 진 찹쌀가루를 밤알 크기로 떼어 삶은 밤고물을 묻혀 밤단자 또는 대추 다진 것을 찹쌀가루에 섞어서 고물로는 밤, 대추, 석이채 합한 것을 묻혀서 대추 단자를 만든다. 또 같은 방법으로 토란 단자도 한다. 단자는 찹쌀에 물을 많이 주면 맛이 적어지나, 빨리 굳지는 않는다. 꿀을 손에 바르고 떼어야 잘 떼어지고 맛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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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과:찹쌀을 삭히고 치고 말리는 과정, 술과 콩물의 배합, 말린 찹쌀을 기름에서 불어내는 과정 등, 우리 조상들의 무수한 노력과 인내와 지혜의 어우러져 만들어진 한과의 대표적인 과자.
눈같이 희고 가뿐한 모양에 입에 넣으면 부서질 듯 녹아 내리는 맛을 지닌 유과는 세계 어느 과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만의 전통과자.

신선로:구자탕·열구자탕(悅口子湯) ·탕구자(湯口子)라고도 한다. 여러 가지 어육과 채소를 색스럽게 돌려 담고 장국을 부어 끓이면서 먹는 음식이다. 신선로는 조선시대 연산군 때 한림호당(翰林湖堂)을 지낸 정희량(鄭希良)이 사화(戊午士禍)를 겪은 다음 갑자년(甲子年)에 다시 사화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속세를 피하여 산중에 은둔하여 살 때, 수화기제(水火旣濟)의 이치로 화로를 만들어 거기에 채소를 끓여 먹었는데, 그의 기풍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하여 그릇을 신선로라 하였다 한다. 물론 그 진부(眞否)는 확실하지 않으나, 신선로가 한 그릇으로 여러 가지 성분을 함께 먹을 수 있는 특성을 가진 음식임은 분명하다. 신선로 맨 밑바닥에는 쇠고기를 채썰어 갖은양념한 것이나 고기에 무를 섞어 곤 것을 함께 썰어 넣는다. 그 위에 생선전 ·처녑전 ·간전 ·미나리(또는 파)초대를 담고 그 위에 해삼 ·전복을 얹고 맨 위에 알지단 황백, 표고버섯, 석이버섯, 붉은고추, 쇠고기 완자, 호두 깐 것, 은행 볶은 것 등을 색조를 맞추어 돌려 담는다. 이렇게 담은 것에 쇠고기 맑은장국을 붓고 중앙 부위에 있는 노(爐)에 숯불을 담아 끓이면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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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해,, 설명을  해야할까요? ~ 죄송하지만,, 제가지금,.;; 답변을 못하겠어요,;; 정말죄송합니다,;; 다음에,,꼭 보내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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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전통음식은..

 

1. 비빔밥: 밥에 나물 ·고기 ·고명 ·양념 등을 넣어 참기름과 양념으로 비빈 밥.

2. 불고기: 쇠고기 등을 얇게 저며서 양념을 하여 쟁였다가 불에 굽는 한국요리.

3. 김치: 한국 특유의 채소 가공 식품.

4. 청국장: 무르게 익힌 콩을 뜨거운곳에서 납두균이 생기도록 띄워 만든 한국 된장.

5. 오곡밥: 한국 전통의 찹쌀 ·차조 ·붉은팥 ·찰수수 ·검은콩 등을 섞어 5가지 곡식으로 지은 밥.

6. 삼계탕: 여름철에 보신하기 위하여 닭에 인삼을 넣고 푹 고아서 먹는 한국 전통 보양식.

7. 잡채: 채소 ·버섯 ·고기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볶아서 무치는 숙채.

8. 냉면: 차게 식힌 국물에 만 국수.

9. 곶감: 생감을 가공한 건과(乾果).

10. 떡국: 맑은 장국에 가래떡을 얄팍하게 썰어 넣어 끓인 국.

11. 산적: 쇠고기 등을 길쭉하고 얇게 썰어 양념하여 꼬챙이에 꿰어서 구운 음식.

12. 갈비찜: 쇠갈비 또는 돼지갈비를 양념하여 만든 한국의 찜요리.

13. 게장: 게에다 장을 달여 부어 담근 한국 고유의 젓갈류.

14. 곰국: 쇠고기와 내장을 넣고 끓이는 국. 육탕(肉湯)이라고도 하며 보양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밥을 말면 곰탕이 되고, 사골·등뼈를 많이 넣어 끓이면 설렁탕이 된다.

15. 묵: 메밀 ·녹두 등의 앙금을 풀처럼 쑤어 식혀서 굳힌 음식.

16. 빈대떡: 녹두를 갈아서 부쳐 만든 전.

17. 수제비: 밀가루를 반죽하여 맑은장국이나 미역국에 적당한 크기로 뜯어 넣어 끓인 음식.

18. 순대: 돼지 창자에 숙주 ·우거지 ·찰밥 등과 돼지 선지를 섞어서 된장으로 간한 것을 채워서 삶은 음식.

19. 육개장: 개장국을 꺼리는 사람들이 쇠고기로 개장국처럼 맵게 끓이는 국.

20. 추어탕: 미꾸라지를 넣고 얼큰하게 끓인 국

21. 부각: 김 ·깻잎 등에 되직하게 쑨 찹쌀풀을 발라 말려 두었다가 기름에 튀긴 요리 이고요..

22. 닭찜: 닭고기를 잘게 도막내서 양념을 하고 냄비에 넣어 바특하게 푹 삶은 찜 입니다

23. 순두부찌게: 순두부는 수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두부에 비해 단위량당 영양가는 많이 떨어지지만 부드럽고 콩 특유의 향기가 그대로 살아 있어 입맛이 없을 때, 또는 노인음식으로 이용되는 식품이다.

24. 설렁탕: 소의 여러 부위를 함께 넣고 푹 끓인 국, 또는 그 국에 밥을 만 음식입니다

25. 자반: 생선 또는 콩 ·미역 ·김 ·쇠고기 등을 소금에 절이거나 간장에 조리거나 기름에 튀겨 만든 반찬이고요
26. 탕평채: 초나물에 녹두묵을 썰어 넣고 섞은 음식이라 하네요;;

27. 범벅: 옥수수 ·호박 ·감자 등을 주재료로 하고, 팥이나 콩을 함께 넣어 익혀서 먹거나 또는 곡식가루를 넣어 쑨 음식이고요..

28. 약과: 한국 전래의 과자인 유밀과(油蜜果)입니다

29. 식혜: 찹쌀을 쪄서 엿기름물을 붓고 삭힌 다음 밥알은 냉수에 헹구어 건져 놓고, 그 물에 설탕과 생강을 넣고 끓여 식힌 다음 밥알을 띄워 만든 한국 고유의 음료입니다

30. 수정과: 생강·계피편·통후추를 기호에 따라서 넣고 끓인 물에 설탕이나 꿀을 넣어 한소끔 끓여 식힌 후, 곶감을 넣고 실백을 띄워 마시는 한국 고유의 음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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