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와 비류 그리고 백제 건국신화?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요..;

온조와 비류 그리고 백제 건국신화?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요..;

작성일 2004.04.08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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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와 비류?백제 건국신화에 대해서 대충은 아는데 정확하게는 몰라요(제가 아는게 정학할지도) 그래서 찾아보려고 하는데 막상 찾는게 어려워서 여기에 올리게 되네요
답변 부탁합니다`-`;


#온조와 비류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의 기록이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 또는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화난을 피해 도망해 나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졸본주의 왕에겐 왕자는 없고 다만 딸 셋만 있었다. 졸본주의 왕은 주몽을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서 그의 둘째딸을 시집 보내어 그를 사위로 맞았다.

그뒤, 오래지 않아 졸본주의 왕은 죽고 주몽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 주몽은 그 졸본주 왕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이 비류요, 둘째 아들이 온조다.

이들 비류와 온조는 나중에 태자에게 용납되지 않을것을 우려하여 마침내 오간과 마려등 열사람의 부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드을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비류와 온조 일행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부아악에 올라가 근거지가 될만한 땅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서 근거지를 잡으려고 했다. 열사람의 그 부하들은 비류에게 간했다

"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멧부리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기름진 들이 펼쳐져 있고, 그리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어 그 천연으로 이룩된 요새의 이로움으로 보아 얻기가 어려운 지세이온데 이곳에서 도읍을 일으키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비류는 부하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따라온 백성들을 아우 온조와 나누어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가서 자리 잡았다.
온저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서 그 열사람의 신하들을 그의 보익으로 하여 국호를 라 했다. 그것은 한나라 성제 15년(BC 18)의 일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짠 때문으로 하여 안거할 수가 없어 되돌아왔다. 돌아와, 위례에 도읍이 바야흐로 자리 잡히고 인민들이 편안히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마침내 부끄러움과 후회로 하여 죽고 말았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백성들이 즐거워했다고 해서 그뒤 국호를 로 고쳤다. 백제의 세계는 고구려와 함께 다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를 라고 했다.

뒤에 성왕 연대에 이르러 도읍을 사자에 옮기니 지금의 부여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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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건국



백제의 기원은 역사책 마다 각각 틀리게 나와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백제(百濟)의 시조가 온조(溫祚) 1명으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비류(沸流), 온조(溫祚) 2명으로 적혀 있으며,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비류(沸流),

온조(溫祚), 구태(九台) 3명으로 적혀 있다. 또 어느 곳에서는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努)

로부터 비롯되었다고도 하니 과연 어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아직까지

역사학계의 일반으로 받아들이는 비류와 온조백제설을 시작으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백제는 비류(沸流), 온조(溫祚)가 건국한 나라의 이름이다.

비류(沸流)는 어머니 소서노(召西努)와 같이 전에 북부여(北夫餘)의 수도로 사용된 골본(忽本:심양)에서

살다가 B.C 42년에 심양 옆을 흐르는 혼하(渾河)를 따라 하류로 내려와 패수(浿水:태자하)와

대수(帶水:혼하)가 하류에서 서로 만나는 패(浿).대(帶) 지역에 정착하여 그 곳에서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의 입국(立國)을 도왔다.

그후 고주몽은 자신의 입국(立國)을 도운 소서노는 왕비로 삼았지만 역시 자신의 입국(立國)을 도운

비류(沸流)는 소서노가 낳아서 데리고 온 아이 즉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태자로 삼지 않고 전에

골본(忽本)에 있을 때 북부여(北夫餘)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낳은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이에 비류(沸流)는 자신이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맏이(伯)이고 또

고주몽의 입국(立國)을 도왔는데도 자신을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를 태자로 삼은데 불만을 품고 있다가

고주몽이 죽은 B.C 19년에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다. 이때

비류(沸流)는 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자신을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沸流)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패하였다. 그

결과 고주몽고구려 지역 대부분은 유리(琉璃)가 장악하였고, 비류(沸流)는 근거지인 패.대 지역만

장악하였다.

온조(溫祚)는 비류(沸流)가 B.C 19년에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을 때, 아무도

비류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후환을 걱정하여 B.C 18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와서 한수(漢水) 북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온조(溫祚)로, 수도 명칭을 위례성(尉禮城)이라

칭하였다. 고대말 온(百)은 단순히 100이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많다는 뜻이고, 조(祚)는 천자(天子)의

자리를 뜻하므로, 온조(溫祚)는 온(百)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帝)이라는 뜻이다. 즉 온조(溫祚)는

백제(百帝)와 같은 뜻이다. 그리고 위(尉)는 하늘에 있는 해 즉 천제(天帝)를 뜻하고, 례(禮)는 부여

무리를 뜻하므로, 위례성은 천제의 아들 무리가 살고 있는 성(城)이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온조는

해님의 아들을 상징하는 글자로 "위(尉)"자를 사용하였다.

이때 온조(溫祚)가 백제(百帝)라 칭하지 않고 온조(溫祚)라 칭한 것은 형 비류(沸流)가 칭한

백제(伯帝)와 같은 발음을 피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온조국(溫祚國)은 B.C 6년에 강원도 지방

낙랑(樂浪)이 보낸 5무리의 기마부대(五虎)에 위례성이 점령당하여 궤멸되었다.

위례성이 점령당하자 온조(溫祚)는 온조국(溫祚國)의 유민들을 데리고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다급한 처지에 빠진 온조(溫祚)는 한수(漢水) 이남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으로부터 마한(馬韓)의 동북 땅 1백 리를 할양 받아 금마산(金馬山:홍성 금마)에서

마한(馬韓)의 후국(侯國)인 십제국(十濟國)을 세웠다. 이 십제(十濟)는 10명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그 뒤

온조(溫祚)는 힘을 길러 홍성 금마 마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후부터 다시 위례(尉禮)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비류백제가 멸망하자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帝)로 바꾸었다. (*일설에 의하면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연타발의

딸이다. 처음 우태에게로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요 둘째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라 하였다. 소서노에게 장가 들어 왕비를 삼았다. 그가

창업하여 기반을 개척하는데 자못 내조가 있었으므로 주몽이 그녀를 특별히 사랑하여 후하게 대햐였고

비류 등을 자기 아들처럼 여겼었다. 주몽이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리가 찾아오자 그를 세워

태자를 삼았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도망하여 이곳에 왔을 때에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서 방업을 이루는 것을 도왔으니 그

공로가 컸다. 대왕이 세상을 뜨신 후 국가가 유리에게 귀속되니 우리들이 공연히 이곳에 있으면서 몸에

군더더기 살처럼 울울하게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선택하여 따로

국도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데리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서 거주했다"고한다.

와 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실하였다. 처음에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우니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로써 구태의 아내를 삼게 하였다. 드디어

동이에서 강국으로 되었다". 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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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와 비류는 주몽의 아들로써..
온조는 한강 하류지역에 백제를 세우고,
인천 쪽(?)인가 나라를 세우다가 망했어여,, 나리가 안조아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비류가

한강에 내려와

나라세운게

10명의신하의 도움을받아 나라를만들어서

십제였는데

신하,백성이많아서 백제가됨

지어낸거 아님

들은거임

지존 허접 답변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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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gong namnamj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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