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에 정통하신 분께 질문 드립니다. 진짜 지식인 분들만 봐주세요.

근현대사에 정통하신 분께 질문 드립니다. 진짜 지식인 분들만 봐주세요.

작성일 2009.09.08댓글 2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질문에 앞서 한민족참역사 분들에게 한 마디 하겠는데. 앞뒤 안보고 개소리 짓거려서 한민족의 참역사를 알자는 좋은 취지 흐리지 말고 제발 자중 하시거나 닥쳐 주세요. 그도 아니라면 확실하게 증명된 자료와 증거를 제시하던가 이도 아니라면 우리의 역사와 관련 없는, 그러니까 비 아시아권 지역에 이쪽 지역과는 이권문제도 별반 얽히지 않은 곳의 제 3 자들을 동원해서 정말 객관적으로 분석한뒤 자료 게시해 주세요. 어쩌다 자료 뒤적거려 보면 자기 주장이 마음씨 후덕한 주인 아점마가 얹어주는 서비스 마냥 듬뿍 첨가된 자료들이 널려 있는데... 특히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폄하만은 제발 좀... 대체 왜 당신 얼굴에 스스로 침을 뱉습니까?

 

 

 

 

 젠장, 사설이 길었습니다. 질문은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것입니다. 얼마 전 부모님 께서  박정희 대통령이 잘먹고 잘살게는 해줬는데... 라고 한탄하 듯 말씀 하시더군요. 제가 배운바로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는 독재정치의 시대라고 배웠습니다. 그 분의 집권기간때에 일어난 혁명이나 사건이 꾀나 많고 거의 공산주의를 방불케 하는 억압된 시절이었다고 말이지요. 민주주의 라는 이름이 무산해 질만큼 대단한 비리를 저지른 것은 물론이고 헌법마저 마음대로 개정한 희대의 독재자인 그 분이  잘먹고 잘살게 해줬다? 그 분 시대에는 삶이 윤택해졌고 나라가 부강해졌다?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런 업적을 이루었다면, 독재 조금 한다고 암살까지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까? 아니면 요즘 시대가 어렵다보니 부모님께서 아직 어렸던 그 때를 미화해서 말씀 하시는 걸까요? 답변이 얼마나 길던 상관 없습니다. 내공을 많이 드릴수 없어 죄송하지만 최대한 자세하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정보에 거짓이 있건 주관이 있건 상관 않겠습니다. 그걸 가리고 판별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가 할 일 이니까요. 최대한 자세하게 적어 주십시오. 그분의 일생부터 시작하는 것 만은 자제해 주시고 그 분의 집권기 부터 그 분이 추진한 사업과 그 내용, 그리고 그 분 시절에 일어 났던 항쟁등의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주십시오. 링크를 거셔도 상관 없습니다. 이 빌어먹을 호기심을 충족시킬수만 있다면 대 만족 입니다.

 

 

 

 

.... 아 그리고 제가 안티 라던가 그런 건 아니지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민족참역사 분들 제발 닥쳐 주세요. 현직 대학교 역사학 교수님들이 다 병X 라고 당당하게 말할 만큼의 실력도 없으면서 이빨만 까는 당신들의 자료는 앤간하면 보기 싫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까지 말하는데 뭘 말한다면 그건 당신들이 그러한 단체를 만든 취지에서 한 참 어긋나서 완전 사이비 종교와 비슷한 맥락으로 가게 되는 거니까 제발, 정말 제발 자중해 주세요.

 

 

 전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국노는 아닙니다. 이씨 왕조에 자꾸 태클 거시는데... (반말좀 깐다. 어린놈이 반말한다고 빈정 상하지는 말아라. 니들은 그 어린새끼 한테도 얕보일만한 짓을 사서한거다 이 10生Q들아.) 어쩌라고? 지금 이라도 우리의 선조인 이씨 왕조는 개XX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까? 과거에 어떠한 과오를 저질렀건 우리 선조다. 아 그래, 나라 팔아먹고 민족 팔아먹은게 확실한 사람들은 욕하는게 당연해. 그런데 다른 분들은. 이씨 왕조에 이렇다할 만한 왕이 없었다? 장난까냐? 그 분들은 뭐 죄다 만화나 소설에서나 등장하던 악덕 영주였냐 C足놈들아? 니들이 그렇게 개 무시하는 대학교 역사학 석박사들의 제자이신 우리 선생님 께서 그러시더라.

 

 우리가 역사를 공부 하는 것은 과거의 치부를 들춰내서 욕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앞길을 걸어가신 분들의 모든 것, 그러니까 잘한 일이든 못한 일이든 조금 더 알고 그를 지표삼아 바르게 걸어가기 위함 이란다.

 

 C足 솔직히 말해서 공부님 하고는 친하지를 않아서 졸라 이해가 안갔는데 너희 DOG BIRD 키 들 덕분에 이해했다. 앤간하면 자제해라. 하다못해 옆집 개도 지 부모 욕하거나 패면 졸라 짖드라. 그런데 니들은 왜그러냐?  외국인들이 C足 니들 자료 보고 웃는거 생각하면 내가 다 쪽팔린다. 알았냐?

 

 

 

 

 

 

 

 

 

 

 

 

 

 

 

 

 

...하 솔직히 말하자면 박정희 대통령 궁금한 김에 한민족참역사 분들 좀 까고 싶었습니다. 솔까말 그 좋은취지 다 어따 내팽개치고 뭐하는 짓인지...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업적의 공로를 찬양하는 글 한편과, 업적의 공로를 비판하는 글 한편을 게시합니다.

 

 

 

◈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업적 총람-찬양의 글.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등의 국민운동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크게 일으키셨고.투철한 애국심과 헌신으로 국가재건에 공헌하셨니다.


가난한 농촌의 아들로 태어나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시대 속에서 성장해 온 박정희 대통령... 어려움과 아픔의 세월을 몸소 겪어 왔기에 그 누구보다도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남북의 부모형제가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릴 통일조국의 실현을 희구해왔습니다.

 

박대통령의 소원은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제건설 없이는 빈곤의 추방이란 없을 뿐 아니라, 경제건설 없이는 부정촵부패의 온상이 되는 실업과 무직을 추방할 수 없고, 나아가,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 즉 자유의 힘이 넘쳐흘러 북한의 동포를 해방하고 통일을 이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박대통령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1, 2, 3, 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서, 공업입국의 터전을 튼튼히 닦아 놓았으며 바야흐로 중화학공업화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선대의 빛나는 전통과 문화를 계승발전 시키고 문예와 학술의 적극적인 창발로 문화한국 중흥에 진력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운동은 근면촵자조촵협동의 정신을 일깨우면서 새로운 정신혁명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일환으로 우리의 정신문화와 정치제도도 떳떳하게 그 국적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분단의 논리가 지배하던 냉전의 대결구조에서 벗어나, 서로 번영을 추구하는 평화와 조화의 구조로 전환하는 세계 조류에 발맞추어 27년 동안 단절되었던 남북간에 대화의 문을 열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전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국력배양의 가속화를 통해 번영된 통일조국을 구현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근로와 창의, 생산과 능률의 미덕을 사회윤리의 기본으로 삼고 일하는 국민에게는 안정 속에 보람있는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도록, 근로자의 이익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사회보장제도를 더욱 확충해 나갔습니다.

 

한민족의 엄청난 저력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도성장을 거듭하여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굳게 다지면서 세계 속의 한국으로 부상하게끔 했습니다.

 

일상 생활용품까지 우방의 원조에만 의존하던 국내 경제가 자립단계에 도달했고, 소총 한 자루 우리 손으로 만들지 못하던 우리나라 방위 산업을 국산 장거리 유도탄 시대의 막을 열게 함으로써 우리의 국력은 북한을 제압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분단된 국토를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데 신명을 다 바쳤습니다.

 

저마다 자질과 능력을 살릴 수 있도록 사회 개발정책을 계속 확충해 모든 국민이 밝고 보람찬 생활 환경에서 고루 잘 살 수 는 사회, 온 국민이 추구 하고 있는 생활의 미래상을 앞당기기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한강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켰으며, 수출입국의 물결을 5대양에 일으키고, 농어촌을 근대화하여 우리나라를 중진국 상위권에 올려놓았습니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삶을 살다간 박대통령은 물욕은 물론 자신의 재산에 대한 욕심도 전연 없었습니다.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근검, 절약하고 청렴했던 박대통령의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이 많습니다.

 

전기를 아끼려고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두었는데,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고, 대신 창문을 열어두곤 했으며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파리를 잡기 위해 손수 파리채를 휘둘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목 부분이 해져 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는 낡은 러닝셔츠를 입었고 몇 십 년을 매었던지 두 겹 가죽이 떨어져 따로 놀고 있는 허리띠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박대통령이 뇌리에 새기고 국민과 함께 나눠 가지려 했던 국방촵경제 표어는 수없이 많습니다. 증산촵수출촵건설, 근검촵절약촵저축, 근면촵자조촵협동, 한 손으로 싸우고 한 손으로 건설하자, 수출입국, 조국근대화, 유비무환, 자주 국방, 부국강병 등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국민정신의 연구촵함양촵진작에 힘써왔습니다.

 

박대통령이야말로 혁명가촵군인촵교육자촵행정가의 장점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지도자로서 임진왜란촵병자호란촵한일합방촵남북분단, 6.25동란을 거치면서 쇠잔의 길을 걷던 우리 민족에 있어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초석을 확립한 위인으로서 주요 공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 1. 수출입국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입안할 당시, 우리 정부는 수출보다는 수입 대체형 공업화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수입대체산업의 공업화에 따른 외화부족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국가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용단에 따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기본 방향을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경제개발 방향의 재정비는 선진산업국으로 도약하는 시발점인 동시에, 우리 국민을 치열한 국제 경쟁사회로 뛰어들게 한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수출제일주의를 모토로 수출진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964년 부터 매년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마련, 수출진흥정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해나갔다.

 

특히 1967?69년도는 수출산업육성에 중점을 두고, 1967년에는 수출산업 기반의 확대, 1968년에는 수출산업의 양산체제 확립, 1969년에는 수출 산업 시설의 현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수출산업 육성에 주력했다.

 

이런 체계적인 계획을 통해 기업 중 수출특화산업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한편, 수출지원제도 및 행정체제를 개선하고 해외시장 개척의욕을 고취하여, 업계를 수출지향적으로 정비하고 수출추진 체제를 확립하였다.

 

우리나라 수출정책과 수출독려의 산실은 1966년부터 박대통령이 수출최고 사령관이 되어 매월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였다. 수출진흥회위원과 정부, 학계와 연구기관을 비롯해 수출지원기관과 업계 등 유관기관 대표들 약 250여명이 참석하여 월별, 품목별, 지역별 수출동향을 점검하는 이 회의는 수출증대를 위한 모든 시책과 업계의 애로타개 등의 매월 추진상황을 점검촵보고하여, 수출진흥을 위한 시책과 제도를 하나하나 정착시켜 나갔다.

 

1979년까지 계속된 이 회의는 수출에 관한 최고전략회의로서 수출진흥종합 시책, 수출계획, 수출촉진제도, 수출독려 등을 논의하여 최종 결정하는 장이 되었다. 우리는 ‘한국의 수출’ 하면 박대통령을 연상하게 된다.

 

수출입국에 대한 노력의 결과는 점점 가시화되었다. 1962년이래 노동집약 중심으로 한 수출공업화정책이 성과를 나타내며 수출이 급속히 신장되고 고율의 경제성장이 유도되었다.

 

1962년 5천만 달러이던 수출은 1964년 1억 달러로 급신장을 보였으며, 1968년 5억 달러, 1969년 7억 달러, 그리고 1970년에는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상품 구조면에서도 1차 상품과 공산품의 수출 구성비가 1960년 83.2%대 16.8%이던 것이 1970년에는 공산품이 83.6%로 급속히 높아짐으로써 후진국의 수출구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2년 10월 유신을 거치며 박대통령은 “100억 달러 수출, 1,000 달러 소득” 이란 지표를 제시,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을 선언하면서 철강, 비철금속, 기계, 자동차, 조선, 전자, 석유화학 등을 육성하여 수출의 획기적 증대를 이룩했다. 특히 수출산업의 중화학공업화는 전자산업의 전략적 육성, 조선 공업의 수출산업화, 기계공업의 국산화, 자동차 공업의 수출전략산업화 등에 역점을 두었다.

 

아울러 수출용원자재의 국산화, 수출취약산업의 육성 등을 통한 수출의 질적 고도화와 종합무역상사의 육성, 그리고 수출자유지역의 설치, 외국인 투자 유치, 중소기업의 수출능력 강화 등 수출산업의 저변확대에도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74년의 석유위기도 수출로 극복하고, 1977년 12월 22일, 당초 1980년 달성키로 한 대망의 100억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앞당겼다.

 

‘한강의 기적’으로 평가되는 수출입국 정책의 성공은 우리나라를 가난하고 힘겨운 보릿고개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농경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저개발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더 나아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경제의 부상과 남북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세계13위 무역대국의 위상 역시 박대통령의 수출입국에서 발원하고 있다.

 


◐ 2.경부고속도로건설

 

고속도로 건설계획은 1967년 4월 박대통령이 제6대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대국토건설계획을 발전시켜 고속도로와 항만의 건설 및 4대강(한강촵낙동강촵금강촵영산강)유역의 종합개발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기간 중에 착수하겠다”고 그 계획을 공표하고 나서부터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 실정으로 고속도로건설이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부정 또는 회의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까지의 우리나라 교통문제를 조사한 IBRD 조사단도 교통 및 수송난을 고속도로망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건의는 물론 방향조차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원대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국가경륜의 일환으로, 1967년 11월 7일 건설부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후 본인 스스로가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국토개발계획을 비롯해 각 노선과 단면도의 비교검토 및 건설비 산출, 용지매수에 따르는 자료 등을 직접 지휘하였다. 가장 큰 문제점은 공사비였고 박대통령이 노심초사한 문제도 바로 그것이다. 박대통령은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계획조사단’을 1967년 12월 15일 발족시키고 관련자료 검토와 분석을 거쳐 3백억원 선이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68년 2월 5일 제8차 경제장관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건설 재원확보 계획을 확정했다.

 

1968년 2월 1일 원지동에서 서울?부산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첫 발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어 4월 3일 오산?대전간 공구(1백 6.6㎞), 9월 11일에는 대구~부산간(1백23㎞), 마지막 난공사 공구인 대전~대구간(1백 52㎞)은 1969년 1월 13일에 착공되었다. 재원확보 다음의 난제는 건설장비의 도입 문제였다. 정부는 비상조치로서 미촵영촵불촵스웨덴 등의 유명업체와 협의하여 건설회사부담의 상업차관으로 도입하였다.

 

가장 난공사였던 대전~대구간은 전 노선의 약 3분의 1인 1백 52㎞이지만 토목공사는 전체의 약 47%, 절토량은 약 50%, 장대교는 17개소로 60%, 그리고 터널은 전체의 90%가 이 구간에 몰려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난관을 겪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당재터널 공사가 가장 난공사로서 13회에 걸친 낙반 사고와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공기에 차질을 빚었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서울~부산 천리간에 거창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는 헬리콥터로 혹은 지프를 타고 수없이 현장을 시찰하며 공정을 살피고 현장 관계자와 인부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박대통령 친필의 ‘고속도로 구상도’, ‘서울~부산선 축선 확정도’, ‘용지 매수계획에 관한 노트’, ‘감독반 구성에 관한 지시’, ‘공정계획표’, ‘연도 조경을 지시한 메모’ 등은 박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건설 시초부터 완성까지 시종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세세히 알게 해 준다.
착공한지 2년 5개월만에 당초 3백 30억원으로 예상했던 공사비는 설계변경과 물가상승 등으로 4백 29억원,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 약 9백만명 및 장비 1백 65만대가 투입된 총 연장 4백 28㎞의 단군이래 최대토목공사인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드디어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교통촵경제촵사회촵문화촵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새로운 일대도약의 전기를 마련했고 전국을 하루생활권으로 묶음으로써 국토 및 국민생활의 균형적 발전을 이룩했으며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각을 전 국민에게 일깨워 집약된 국력으로 1980년 목표했던 1백억 달러 수출, 1천 달러 소득을 3년이나 앞당겨 달성하는 기적을 낳게 했다.

 

박대통령은 京仁, 경부, 호남, 남해, 영동, 동해, 구마, 언양~울산간 의 8개 고속도로를 완공시켜 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내세운 “조국근대화의 기본설계의 하나인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촵강릉촵부산촵목포를 잇는 기간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지켜 전 국토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고속 도로망을 구축함으로써 전 국토를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부산~마산간 고속도로는 1978년 5월에 4차선으로 착공되어 박대통령 서거 후인 1981년 9월에 준공되었다.
박대통령이 단행한 2차선 고속도로의 4차선 폭 용지확보, 접도구역의 통제, 그리고 그린벨트의 설치와 엄수는 우리나라 국토개발 백년대계와 후세를 위한 위대한 선견지명이요 영단이라 하겠다.

 

박대통령은 한국형 고속도로의 건설원칙, 즉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고속도로 건설의 아이디어를 착안해내고 실천하였다.

 


◐ 3. 새마을운동

 

아직도 근대화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어려운 농촌, 이곳을 박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잘사는 마을로 만들자는 물결이 급속하게 전개됐으니,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1970년 10월 전국 농어촌 3만4천6백65개 부락에 300여 부대의 시멘트와 철근1톤씩 무료로 배급되었다. 반드시 마을의 공동사업으로 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배분된 이 시멘트들은 마을진입로의 확장과 농가지붕 개량, 우물시설 개선 등에 사용되었는데....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정부의 기대를 훨씬 웃도는 성과를 가져왔다.

 

마을 주민들은 정부에서 배분한 시멘트에 자신들의 노동력을 투자하여 마을 공동사업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1차 연도의 새마을사업이다.

 

그 후 박대통령은 근면, 자조, 협동하여 우수한 성과를 올린 마을부터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세우고, 주민들의 참여도에 따라 전국 3만5천개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1972년 제2차 새마을운동 때에 박대통령은 반응과 성과가 좋았던 1만6천6백개 마을에만 지원하고 잔여 1만8천여 마을에는 지원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이는 해묵은 농민들의 의타심을 고치고 자조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무기력하고 태만하던 농민에게 경쟁심과 협동정신을 주입시켜 노동의욕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에서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하여,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승화, 지속시켰다.
새마을운동은 환경개선사업부터 시작했으나 그 저변에는 농민들의 자립촵자조정신을 일깨우자는 뜻이 담겨있었기에 정신계발, 소득증대 등과 함께 삼위일체로 추진되었다. 특히 소득증대사업으로 농촌경제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가소득은 1974년부터 도시노동자 소득을 상회할 만큼 되었고 1977년에 이미 1981년 소득목표액인 140만원에 도달하였다.

 

모든 마을에 자동차가 드나들게 되었고, 모든 작은 하천에 둑이 개수되었으며, 예전의 볏짚지붕은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농가에 간이상수도 시설이 설치됨은 물론이고, 전 국토 어디에서나 전기불이 들어왔으며, 모든 법정 리, 동까지 전화가 가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모든 마을에 마을회관이 세워져서 그야말로 살맛 나는 농촌으로 탈바꿈 하였다. 그 결과 새마을운동 10주년에 해당하는 1980년 4월까지, 정부 투입 자금 2조7천5백21억원, 운동참가 연인원은 약 11억명, 새마을회관 3만5천9백 50개소, 신설농로 4만4천㎞, 폭을 넓힌 마을도로 4만㎞, 신설용수로는 4천4백 40㎞가 이뤄졌다.

 

농촌새마을운동은 더 나아가 사회 전역으로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특히 도시주민들은 농촌 새마을운동이 마을의 모습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태도나 마음가짐까지 함께 달라지게 된 것에 더욱 감명을 받았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실시해 온 남녀 새마을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이 공직자나 사회지도급인사들에게도 확대되어, 새마을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했다.
도시주민은 도시생활에 맞게, 학교는 학교대로, 기업인들은 공장새마을운동 확산, 추진에 앞장섰다.

 

이런 새마을운동의 물결은 기업 분위기와 농촌 여성 지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수의 기업인들이 농민과 함께 새마을교육을 받은 후, 종업원들의 복지후생에 많은 노력을 하게 됐으며, 농촌여성들의 발언권과 지위는 새마을 운동에 의해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가난의 악순환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왔던 우리 국민에게 짧은 기간에 자신감과 자부심을 안겨준 새마을운동...

 

순전히 박정희 대통령 개인적 구상에서 범국민적으로 번진 새마을 운동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잘사는 농어민, 잘사는 내 고장, 번영된 조국’을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새마을사업 추진을 위한 의사결정을 주민총회에서 결정케 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의식을 실천적으로 정착시키는 계기조성과 함께 민주화의 기초를 닦게 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마을운동을 민주주의 훈련도장이라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 4. 치산녹화

 

1960년대 당시 우리의 국토는 그야말로 벌거숭이였다. 과거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헐벗은 산에는 터전을 잃은 동식물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하지만 현재... 과거와 같은 산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푸르름이 눈이 부실 정도로 녹음이 우거진 대한의 산야...

 

이는 박대통령의 치산녹화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림황폐는 조선조 중반부터 인구증가와 국가의 산림관리능력 상실이 그 원인(遠因)이다. 여기에 한일합방과 일제말기부터 시작된 전쟁물자의 조달, 해방 후의 인구증가, 6.25 전쟁, 그리고 전후 복구를 위한 자재수요의 증가, 특히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임산 연료 이외에는 대체연료가 거의 없었던 사회상황이 민둥산을 만들어내는 주범이었다.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한 우리나라 특유의 온돌은 막대한 양의 나무를 소비한다. 산림이 황폐해지면서, 우리 인간 생활은 물론 자연생태계도 파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복구할만한 국가의 산림관리기능 실종까지 가세하여 산림자원이 더욱 황폐화되어 갔다.

 

해방 직후 ‘사방사업 10개년 계획(1948~57)’과 전쟁 후인 1951년에 ‘산림 보호임시조치법’과 같은 복구노력이 있긴 하였지만, 재원과 기술 부족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본격적인 복구노력은 1961년의 ‘산림법’을 제정하여 3공의 전신이 총력을 기울인 사방사업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어 ‘치산녹화 7개년계획(1965-1971)’과 ‘제1촵2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 등이 세워져 치산치수정책이 추진되었다.

 

봄철 식목일 외에도 가을철에 ‘육림의 날’을 휴일로 정하여 온 국민이 나무를 심고 가꾸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73년 박대통령은 녹화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농림부 산하의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시킨 데 이어 연두기자회견에서 10년 이내 국토녹화를 완성할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식목 및 육림 현장을 수시로 직접 찾아 지도 격려했다.

 

치산녹화과정에서 사방사업 사상 최대의 난공사이며, 단일지구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 있었으니, 바로 영일지구 사방사업이다.

 

1973년부터 77년까지 추진된 5개년 연차계획의 중에 실시된 영일지구는 일본에서 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할 때 관문으로 그 어느 곳보다도 민둥산의 모습이 흉물스러웠던 곳이다.
그런데, 지질구조상 한번 황폐되면 복구가 어려운 곳이어서 그 동안 50여 회에 걸쳐 소규모 사방사업을 실시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번 번히 복구에 실패한 곳이었다.

 

2-3년 내에 완전 복구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우량한 종자와 묘목을 선정하여 파식하고, 개량공법 등을 적용해 녹화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특히 황폐지에 노출된 암반의 등고선으로 단을 끊고 단상에 구덩이를 파고 객토를 하여 묘목을 식재 한 후, 3년마다 한번씩 추비를 주어 사방지 사후관리도 철저히 함으로써 영일지구 사방사업은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풀 한 포기 없는 벌거벗은 4,538ha의 집단 황폐지가 1973년부터 77년까지 추진된 5개년 연차계획의 성공으로 완전 복구되었다.

 

치산녹화사업은 제1차 계획기간에 100만ha에 21억 본을 심기로 한 목표로 4년 앞당겨 108만ha에 29억 본을 식재했으며, 78년에 목표량을 초과 달성하여, 새로 2차 계획을 수립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우리나라 나무는 일부 산간오지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산림녹화운동 기간에 심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는 전국토의 어딜 가도 푸른 산을 쉽게 만나볼 수 있고, 독일, 영국,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 4대의 조림 성공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 최대의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21세기...

 

치산녹화의 성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시대를 거슬러 현재에도 남아있다.

 


◐ 5. 중화학공업육성

 

1962년 이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공업입국촵수출제일주의에 기반을 둔 경공업의 수출산업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근대화된 공업구조가 정착되고 중화학공업의 기반도 조성되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경제개발이 단순한 5개년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1980년대 1인당 GNP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경제개발목표로 세웠다.

 

그리고 “공업구조개편론”을 성안하고 1973년 박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추진선언과 함께 과학화운동전개를 강조했다.
1960년대의 정책이 공업입국, 수출제일주의였으며 1970년대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위한 중화학 공업화였다. 이를 위해 ‘중화학공업위원회’와 ‘기획단’을 두고 선진 산업국으로 나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전자, 석유화학 공업 등의 6개 업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화의 기본 바탕이며 중심이 된 포항종합제철, 아연촵동촵연촵알루미늄 등 4대 전략품목을 육성할 수 있는 온산비철금속공업기지, 천혜의 기후조건과 항만, 그리고 양질의 인력을 바탕으로 한 옥포조선공업, 품질과 가격면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기계류와 플랜트의 국산화에 기여한 창원 기계공업기지, 반도체, 컴퓨터 산업 등의 고도정밀 전자기기 산업기지인 구미전자공업단지, 석유화학제품의 국내수요 충족과 비약적인 수출증대의 기반을 마련한 울산과 여천 석유화학단지들이 바로 당시 중화학공업 추진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중화학공업 정책이 추진되기까지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종합제철 건설의 경우 경제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반대의 벽에 여러 번 부딪혔으나, 박대통령의 단호한 추진력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놓았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진행되면서 관련 과학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대덕에 업종별로 전문연구단지가 들어서고, 산업기지별 실용연구소가 만들어 지면서 장기 기초연구를 수반한 전문연구가 추진되어 나갔는데, 이들은 모두 오늘날 기초 과학연구의 기반이 되고 있다.

 

중화학공업을 이끌어 나갈 기술인력 양성 노력도 함께 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기술교육제도를 도입하여 공고교육에 의한 기능사, 대학 교육에 의한 기술자를 양성하고, 현장에 맞는 일반 기능공 양성을 위해서 각종 직업훈련원 등을 설치 운영하였다.

 

이와 함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우리의 방위산업을 선진국형 체제를 갖추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미국의 대한방위 공약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탈피해 자주국방 태세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우리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80년대 경제 미래상으로 제시된 1인당 GNP 1,000불과 수출 100억불을 당초 계획보다 3년이나 앞당겨 1977년에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세계적인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공업화, 특히 중화학공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화의 획기적인 도약이 없었다면 한국의 산업과 경제는 현재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핵심이 바로 중화학공업이다.

 


◐ 6. 자주국방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남한보다 월등한 군사력으로 적화통일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의 군사도발과 위협은 극심하였다. 북의 남침 위협을 저지하고, 무력침공 야욕을 근원적으로 포기케 하기 위해선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의 확보가 우리에겐 절실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계획의 일차적인 목표는 "부국강병"에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1970년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자주국방에 부심한 기간이었다.
당시 북한은 총기류는 물론 화포와 대포, 군함, 잠수함까지도 생산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소총 한 자루 못 만드는 실정이었다.
북한에 병기산업이 뒤져있던 상황에서 박대통령은 무기생산을 계획하고, 무기생산의 소재가 되는 중화학공업을 더욱 육성시키면서,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여하한 무기도 분해하면 부품이다’ ‘여하한 무기도 규격의 소재를 설계대로 정확히 가공해서 결합하면 소정의 성능과 호환성을 갖출 수 있다’는 소신 아래 무기의 부품별, 뭉치별로 82개의 생산공장을 지정하되 평상시에는 그 공장능력의 80%는 민수용으로, 20%만 방산용에 충당토록 하여 평시 경제성을 제고시키고 유사시에는 전 능력을 방산에 충당하도록 했다.
그 결과 1979년 말에는 최신 첨단무기를 제외한 재래식 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지상군의 기본 병기인 155mm 곡사포, 20mm 대공발칸포, 4.2인치 박격포, 3.5인치 로켓포 등 각종 화기와 5백MD 다목적 헬리콥터와 산악전용 경장갑차, 그리고 각종 실촵포탄류의 양산체제가 갖추어졌다.
특히 1978년에 들어와서는 미 탱크와 동일한 화력과 기동력을 지닌 전차를 양산하고, 마침내 9월에는 평양까지 도달하는 한국형 지대지 중장거리 유도탄을 개발, 시험발사에도 성공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유도병기 등 각종 고도정밀병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됨으로써, 독자적인 한국형 무기체계의 개발과 무기성능의 개량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방위세 신설, 향토예비군과 민방위대 창설, 병기개발위원회를 통한 국산신무기개발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초를 닦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우리 군은 역사상 최초로 해외파병을 단행했다.
국군의 월남파병은 국군의 사기와 긍지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력 증강과 국가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미군 철수 문제를 고심하던 박대통령은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 1978년 한촵미 연합사령부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한촵미간의 긴밀한 협력 하에 통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재임기간 중 미군 철수와 호전적인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라는 위기상황에서 국가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국가안보를 정책의 최상목표로 설정하고 자주국방을 적극 추진했다.

 

오직 자주국방의 일념으로부터 출발한 방위산업의 기반은 이제는 오히려 해외에 기술과 제품을 역수출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안보와 국방에 대한 집념은 오늘날 막강한 국군 육성으로 국가안보의 초석과 토대가 되고 있다.

 


◐ 7.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 창달

 

문화는 한 나라와 민족의 뿌리이며 정신이다.
수없이 많은 외침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그 힘은 무엇이고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느냐? 민족의 저력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질문과 해답이 박대통령의 모든 의식의 출발점이었다.

 

1,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국민소득 수준이 크게 향상되고 국가재정에 여유가 좀 생기자 박대통령은 지금이야말로 국민들에게 우리 전통문화의 유산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계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호국과 관련된 유적을 보수촵정화하였다. 그 속에 어려있는 호국자주 정신을 계발, 우리 국민들이 자주자립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함이었다.
다음, 신라의 삼국통일정신이 앞으로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통일전을 조성하고 전국 각지 선열의 유적들을 보수촵정화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사상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온 선현들의 유적도 보수촵정화하였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단군신화 유적에서부터 삼국시대와 고려촵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민족 사상의 뿌리를 일깨우고 정립한 선현들의 유적들을 보수촵정화하여 우리 민족문화를 재발견하고 자주성을 선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일반적인 전통문화유적에 대한 보수촵정화와 보존전승사업도 함께 했다.
우리 고유의 문화적 바탕 위에서 외래 문물을 수용, 이를 독창적으로 창조 발전시킨 전통문화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선사시대와 신라촵백제 문화의 연구촵조사촵발굴촵보존사업들은 그 동안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우리의 문화사를 주체적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새로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같은 문화보존을 위한 각종 사업과 함께 민족문화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할 문화시설도 건립하였는데, 경주촵공주촵부여박물관을 비롯해 국립중앙 박물관, 국립극장들도 모두 이 시기에 탄생된 것들이다.

 

1962년엔 ‘문화재보호법’이 처음 제정되면서, 음악, 연극, 춤 등의 무형문화재와 민속문화재를 문화재의 범주에 포함하고 법으로 지정해 보호받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유적총람>을 작성, 오늘날 문화재관리행정 체계의 기틀을 잡았다.
호국정신의 계승이라는 연장선상에서 국적 있는 교육도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국적 있는 교육의 발판을 마련하고, 한국적 가치관의 정립과 체계화를 위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창립, <민족문화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국적 있는 교육은 곧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새마을운동과 연계 되면서 국민적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국가개발지도이념으로 발전돼 나갔다.

 

그밖에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민속박물관 개설, 1979년에는 해외공보관 산하 해외한국문화원을 일본, 미국, 프랑스의 수도에 각각 설치해 일찍부터 한국문화의 해외선양, 보급에 힘썼다.

 

찬란했던 전통문화를 하루속히 복원해 국민들에게 문화적 정체성을 일깨워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겠다는 박대통령의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창달 이념은 지금도 우리 민족이 살아가고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생명력으로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다.

http://kr.blog.yahoo.com/kjsun9166/256

 

 

◈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비판의 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현재 다방면에서의 이해당사자들이 존재하므로 명확한 설정이 어렵다는 맹점이 있다.

 

조선일보 전 대표인 조갑제는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서민대중'이었으며 이들 속에서 박정희는 항상 영웅이었다고 보았다. 또한 봉건적 잔재와 싸웠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64] 또한 조갑제는 “박정희는 자신의 선천적 조건인 가난과 작은 체구의 문제를 극복하고 38명의 급우들을 통솔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라며 “박정희 급장의 통솔 방식이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술로 발전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은 “장사하는 사람을 제일 낮춰 본 사농공상의 시대에 상업국가론은 혁명이었다”며 초당 박제가의 ‘상업국가론’이며 이를 꽃 피워 국가발전의 틀을 닦은 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설명하였으며 “박 전 대통령은 농업국가로부터 상업국가, 즉 무역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뤄 대한민국을 흥융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1999년, 조갑제와 대담한 노태우 전대통령에 의하면 박정희 주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인용,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배신감을 느꼈으며 박정희가 유신으로 나간 것도 그런 동기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라는 교과서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박정희를 독재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수준이 높아진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그보다 훨씬 못한 시절에 야당 주장대로 민주주의식으로 했다면 나라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정렴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경제적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 세 가지를 빼고는 모두 국산을 사용하였으며 국산 넥타이를 매면 마디가 잘풀려서 상공부에 넥타이에 대한 특별지시까지 했으나 풀리지 않게 하는 납처리 기술을 로열티를 지불하고 도입할 처지가 못되어 결국 생전에 국산 넥타이를 마음껏 매보지 못했다고 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민주화 운동시에는 박 전대통령의 한쪽 측면만을 보고 비판을 했었다”면서 그러나 “지나고 나서 보니 박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의 공(功)을 알게 됐다”고 말하였으며 이어 “근대화와 민주화가 이렇게 짧은 시기에 압축적으로 된 나라가 없다. 그래서 사고의 균형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최상천은 “피도 눈물도 예의도 없는 냉혈동물의 망나니짓을 지도력이라고 치켜세우는 데는 말문이 막힌다. 사적이익을 위해 일본에 봉사한 친일파의 수준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의식이 철저히 일본화된 천황주의자” 라고 주장하였으며, 진중권은 자신의 저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전반에 걸쳐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를 파시즘적인 소설이라고 평했다. 노회찬은 박정희의 경제개발독재를 빗대어 사회주의정책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5·16 군사 정변을 ‘구국의 혁명’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박정희의 친일 행적 의혹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특히 박정희의 만주군 행적에 대해 논란이 있다. 박정희는 사망하였지만, 당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현재 생존해 있는 시점에서 아직은 박정희의 업적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경제 정책의 성공을 위한  민주주의 탄압 

 

박정희는 통일의 길을 조국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은 경제적 자립이며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라고 보았다. 이후 근대화를 통해 개발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낙후한 조국을 구제하겠다는 목표을 가지고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한다. 박정희는 재임 기간 중 민족 중흥의 기치 아래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소득 증대, 저축 장려, 식량 자급 자족 실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일제 침략기와 6.25 전쟁를 거쳐 황폐화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2008년, 현대 경제연구원에서는 ‘정권별 선진화 기여 평가와 이명박 정부의 과제’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153.6%를 기록한 박정희 정부를 대한민국 선진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정권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정권초 선진화 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정권 말에는 253.6를 달성했다는 의미로서 박정희 정부에 이허 , 이어 전두환 정부 44.3%, 김영삼 정부 42.7%, 노태우 정부 36.5%, 김대중 정부 28.1%, 노무현 정부 23.8% 순이었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박 대통령이) 독재자라지만 이 시대(당시)에 열심히 엔진을 돌려놓았기 때문에 엔진이 꺼진 지금도 관성에 따라 우리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며“지난 40여년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배 이상 늘어났는데 이런 수치를 두고 어떻게 박 대통령 시대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박 대통령은 어느 정도 규모의 공장이면 준공식에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기업활동과 경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며 여타 대통령들과의 차별성을 지적했다. 윤 부회장은 또 “산업화의 기틀이 된 새마을운동을 ‘정치적 목적이 있다’며 이후 정권에서 없애버린 것도 개인적으로는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 당선자 워크숍에서 “경제민주화와 균형성장 정책이 오히려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앗아갔다”며 의원 당선자들에게 “여러분이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열린우리당의 청산 대상인 박정희 패러다임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왔고 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소신발언을 토해냈다.

 

그러나 강준만, 진중권, 한홍구 등 진보적인 학자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군사 정변으로 전복한 집권 과정,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극심한 반대자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현대, 금성, 삼성 등의 여러개 중소기업이 재벌과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포항제철로 대변되는 중화학 공업이 중추 산업으로 등장했다. 특히 새마을 운동은 베트남, 네팔, 라오스등의 개발 도상 국가에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어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08년 3월, 유엔 본부에서 열린 빈곤촵질병 퇴치를 위한 `새천년개발목표` 아프리카 주도그룹 회의 후 기자회견을 열어 경제 발전과 초고속 인터넷 접근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인 한국에서 배울 점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한국이 성공한 데는 많은 요인이 있을 수 있다"며 "나는 유엔 일부 직원들에게 아프리카 국가들이 한국 성공사례를 배울 것이 없는지에 관해 얘기해왔다"며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긍정적으로 소개했다.

 

1997년 일어난 외환 위기 IMF 구제금융사건 이후,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일부 비판적인 견해가 일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은 중소기업간 성장의 불균형을 야기했고, 박정희는 아시아 각국의 독재자들과 같이 일본과 구 소련을 모방한 관료주의 경제정책으로 산업전체를 독점하는 개발독재 형식의 정실자본주의의 양상을 띄고있었다. 미국 경영자들은 주주가치를 창출하는데 매진하는동안 , 아시아 경영자들은 현대 군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자회사 분사나 합병 파트너 모색 등 재빨리 대처할 자유나 탄력성을 갖지못하고, 대기업과의 정경 유착으로 인한 한국 재벌의 관치금융 , 통제금융 의 의존적 총체적 부실이 결국 한국 경제의 부실로 이어져 외환 위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그 외에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학자로는 경제학자 김수행이 있다. 그는 공저인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에서 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국민생활의 개선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 교수인 홍성태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토건국가'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하였으며, GNP 성장위주의 정책 속에서 "저임금-저곡가 체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착취체계"의 이중의 착취 위에 건설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아울러 개발을 위해 그의 독재가 필연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경제정책은 독재의 구실일 뿐이었다고 비판한다

 

세계은행 이사회에 한국에 관한 기조연설자로 초청된 김정렴은 " 강력한 정부주도의 '수출지향적 공업화 경제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김정렴에 의하면 박정희는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꿈과 미래상을 비전으로 국민에게 제시하였고 '잘살아 보자'고 호소하며 국민의 단결을 고무하였으며, 박정희 시대의 한국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미르달이 정의한 '경성국가'였다 "며 평가하며 "덩샤오핑은 한국을 최빈국에서 중진국 선두주자로 끌어올린 박 대통령 집권 18년간의 실적을 높이 평가했다" 덧붙였다.


◐  2000년 이후의 평가

 

◐  국내에서의 평가.

 

2000년대 들어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통령, 민족 중흥을 실현한 통치자 등의 긍정적인 평가와 시대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이자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양립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견 차는 대한민국의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나누는 하나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원한관계와 이해관계에 의한 상반된 평가가 상존하고 있으며 일부 언론에선 박정희의 구체적 친일 행적을 취재, 보도하여 박정희가 친일파인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기도 했다.

 

건국 60주년 기념 KBS 여론조사 중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업적을 많이 남긴 대통령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에서는 모든 계층으로부터 역대 대통령 중 1위로 꼽혔다.

 

2009년 8월, 전 대통령 김대중의 사망을 계기로 국가발전에 가장 높게 기여한 대통령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으며 특히 대전,충청과 대구,경북 지역에서 60%대의 높은 응답을 보였고 정당별로는 친박연대,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창조한국당 지지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IMF 사태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로 박정희의 인기는 높아졌는데, 이를 '박정희 신드롬'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 조석곤은 이러한 박정희 신드롬을 '박정희 신화'로 평가하며, 일종의 영웅사관이라고 비판한다.[92]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도 "독재자 박정희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신화 속의 허구"라 비판하며, "청산해야 할 독재통치 18년"으로 평가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하면서,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들에 의하면,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고 또한, 박정희가 서민적이고 검소한 대통령이라는 주장 역시, 각종 비리 의혹사건, 3분 폭리사건, 장준하가 폭로한 3분 밀수사건, 전두환 정권 때 밝혀진 김종필의 200억대 부정축재 사건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개발독재의 단맛을 독점해온 사회 곳곳의 수구적 보수세력과 특히 그들과 결탁된 조중동 보수언론"이 부추긴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는 강준만은 월간말의 투고글에서 IMF 사태 이후의 박정희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독재의 후신들 등에 의한 박정희 미화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외국의 긍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김재홍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3선 개헌 직전인 1970년) 한국의 로비스트가 미국의 영향력 있는 대학 교수 겸 프리랜서에게 박정희의 얼굴을 타임지 표지사진으로 게재하게 주선해 주면 5만 달러를 제공하겠노라고 제의"하는 등 박정희에 대한 외국의 호의적인 반응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박 전 대통령 식의 경제 개발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유공자이며 경제성장을 이룩하지 못한 다른 나라 독재자가 많다는 점과 한국처럼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유공자라면 유공자로 볼 수 있으며 민주화 진영이 (그간)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 분야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한국 경제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며 포악했지만 유능하고 그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안 해준 것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군사문화와 대대적 환경파괴에 근거한 박정희 시대의 발전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며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국민들로부터는 (민주화 등) 다른 욕구가 나온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적 성공이 그의 권력을 도리어 잠식했다”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객관적인 평과를 강조하였다.

 

이런 상반된 시각에 대해 박정희를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조희연 교수는 직접 경험한 ‘역사적 박정희’와 박정희 신드롬과 같은 현상으로 포착되는 ‘현대적 박정희’의 간극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 시대의 폭압성과 국민적 저항을 강조하는 비판 일색의 기존 담론을 성찰하고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진보 담론이 강조하듯 박정희 체제는 폭압적이었지만, 최근 ‘대중독재론’의 지적처럼 새마을운동의 지지자들이 보여 주는 ‘열광’도 함께 존재한다”며 “미국에 의존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 측면이 존재하고, 경제정책조차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며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지적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외국에서의 평가. 

1999년 8월에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인물 20인」에 오르기도 하였다. 타임은 박정희에 대해 “비록 독재적 성향을 가졌지만 한국의 최장수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경제적 약체 국가를 산업강국으로 변모시켰다고 ” 평가했다. 타임이 선정한 인물들 중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타고르, 중국의 마오쩌둥과 쑨원, 일본의 히로히토와 모리타 아키오,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베트남의 호치민과 티베트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선정되었다.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 전 수상이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국의 덩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그를 극찬하였으며[99] 독일 정부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를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산업 능력을 가진 국가로 이끌어낸 지도자"로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타 국가들의 경제성장 과정과 비교하여 '기적'으로 평가하였다

 

2004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를 언급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KBS 박권상 사장에게 KBS가 제작한 ‘영상 실록’ 가운데 박정희 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박정희에 대해 “박 대통령의 평가는 후세가 할 일이지만 그 시대, 그 환경에서는 유신인지 뭔지 그런 길밖에 없었다. 민주화도 무정부적인 민주화는 좋지 않다”며 박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했고 2002년에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을 평양에 초청하여 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된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사죄하며 “한국을 방문하면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예의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에즈라 보겔(Ezra Vogel)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에 대해 각각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큰 발전을 이룩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독재적인 리더가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그랬고, 대만과 한국이 그랬다. 중국은 덩샤오핑 치하에서 발전을 이뤘다. 모두 독재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다. 먼저 민주화부터 하라는 미국인들의 충고는 성공하지 못했다."며 개발독재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

 

기미야 다다시는 박정희를 복잡한 과정이 들어있는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로 정리했다. 그는 박정희가 사회주의자인 일부 인물을 경제적으로 미국에서 자립하고 공업화하는 데에 등용했다고 기록했다.

 

MD 사의 중역으로 일한 데이빗 심프슨은 월남전쟁 당시 청와대를 방문하여 M16 소총의 수입에 대한 결정의 보답으로 박정희에게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안했지만 박정희가 이를 거부하고 그 대신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다시금 M16 소총으로 바꾸어 육군에 지원을 요청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나는 그의 얼굴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한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런 독재 덕분에 오늘날 우리의 경제 기반이 완성 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부모님들께서 잘 살게 해줬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제적인 면에서의 성장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모든 권력(군사 및 정치, 경제)는 오직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권력을 가진 박정희는 경제적인 면에서 권력을 사사로이 사용하기보다는 국가 경제 기반을 닦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오늘날까지 박정희 대통령이 간웅으로 화자가 되는 것이 바로 이때문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1차 산업이 (농업, 임업, 수산업) 주를 이루는 낙후된 국가였습니다.

이런 나라를 산업국가로 변화하기위에서 가장 시급했던 것은 바로 도로망의 확충이였습니다.

이를 위해 박정히는 '국토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때 특정 기업에게 거의 전권을 주어 진두지휘를 하게하고 임기내에 도로망 확충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이 업적은 과정을 배제한다면 오늘날까지 칭송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과정에 있어서 한 기업에 특정 지원을 해주고, 이를 위해서 국력을 임의로 동원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독재라는 그림자가 생기게 됩니다.

독재라는 조건이 없었더라면 한 대통령의 임기에서(물론 유신을 추진함에따라 길어지긴 했습니다만) 위와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였습니다.

 

진정 나라의 경제를 살리겠다는 의지로 위와같은 산업을 일으켰는지, 독제라는 권력을 유지하기위해서 시행했던 정책인지는 본인이 아닌이상 알 길이 없겟지요.

하지만 결론으로만 본다면 분명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적인 분야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주역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독재에 관한 문제는 이미 학업을 통해 충분히 언급되고 있으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분께 질문 드립니다. 진짜 지식인 분들만...

질문에 앞서 한민족참역사 분들에게 한 마디 하겠는데. 앞뒤 안보고 개소리 짓거려서... 그 시대에는 삶이 윤택해졌고 나라가 부강해졌다?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일렉기타 질문드립니다. 니코동 'igrek-U...

... 관한 질문입니다. 일렉기타소리가 아주 다양하잖아요. 일렉기타 중에 메탈종류 소리를 개인적으로 진짜... 답변부탁드립니다. 실용음악학원은 장르에 적당하게 맞춘...

공군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현역병이나...

... 제가 궁금한 것이 있어 지식인에 도움 요청합니다. 1. 공군의 근무가 크게 방공포.... 일단 이정도 질문드립니다. 지금 공군에서 복무중이시거나 최근에 제대하신 분들의...

지식인 질문하는분 부탁드립니다

... 제발 부탁드립니다... 공감 공감 공감 공감 공감 공감 공감... 공감 진짜 열심히 한 땀 한 땀 쓰고 있는데 단답으로 쓴 사람이 채택될 때... 개빡지죠 그리고 질문 등록해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