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족,이민족에 관하여..

유목민족,이민족에 관하여..

작성일 2004.12.1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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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처에..또는 중앙아시아쪽에..

총16개국 이상의 민족들이 살았다던데요..

아시는데로 써주세요..

그리고 이민족의 대표적인 인물이나 유명한 문화재가있으면

말해주세요

또 위구르족은 16개이상의 민족중에서 얼마나 세력권이 강했었죠?
(제일 궁금한건 위그르족에 대해서 입니다...)

마지막으로 위구르족중에 돈욕곡 석특륵 이분들의 업적을 써주세요.
(제가 알기론 당나라 어쩌고 저쩌고던데..;;= =;;)

정말 last!!글고 고창국은 어느민족이 세운거죠~?

질문중 하나라도 아는게 있으시면 답해주세요

다아시면 별5개에 뽀너스도 드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우선 유목민들의 고향은 우크라이나에서 만주에 이르는 북방초원전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유목민의 계통을 따지자면 몽골, 투르크 양 계통의 민족을 중심으로 계통표를 만들어야 합니다.(여기에 퉁구스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중요 유목민들을 설명하자면

스키타이 : 기원전 8세기경에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유목제국 오늘날의 투르키스탄과 남시베리아에서 이동하여 남러시아에 등장. 사카인의 일부로 추정,다른 사카인들은 지금의 텐산산맥일대에 잔류. 현지에 거주하던 키메르인을 격파함. 도망치던 키메르인을 추격하던 중 데르밴드 통로를 통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이라크, 이란일대에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여기서 오리엔트를 최초로 통일한 아시리아제국과 접촉.(유목세력과 정주세력 최초의 접촉, 후에 2500년간 계속될 양 세력의 전쟁을 예고)
스키타이는 오리엔트를 휩쓸어 오리엔트 정주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줌. 그들은 막대한 약탈품을 얻었고 우크라이나에서 볼가강에 이르는 광대한 남러시아 초원을 지배.

사르마트 : 기원전 4세기에 등장한 스키타이와 흡사한 종족, 3세기 후반 볼가강을 건너 스키타이를 격파하고 남러시아 초원을 장악

흉노: 투르크, 몽골족이 섞여 있는 유목민의 집단으로 기원전 9세기부터 중국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함, 기원전 3세기 후반 모든 유목집단 들이 통합되면서 오늘날의 대흥안령산맥에서 신장위구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고 중국을 압박함.
서쪽으로는 월지를 격파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쫓아내었고 쫓겨난 월지는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알렉산더 제국의 후예 박트리아를 붕괴시킴. 중국과의 끝없는 전쟁 끝에 약화되고 분열되어 중국 전한 말기 일부가 발하슈호 방면으로 이동함. 하지만 이들은 기원전 1세기경 중국군의 기습을 받았고 지도자를 잃은체 서쪽으로 모습을 감춤. 전멸되었다고 생각되었으나 400년뒤에 훈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갑자기 등장함.

선비 : 투르크계 민족으로 흉노를 차츰 대체하여 300년경 중국의 약화를 틈타, 남하하여 북중국을 지배함.

타브가치: 투르크계통의 작은 민족으로서 선비의 남하 때 동참하여 북중국을 통일함.
북위를 세움, 북중국을 타브가치의 제국으로 불리게할 정도로 이름을 떨침.

고구려 : 유목민은 아니고 농경민의 국가에 유목적인 요소를 공유한 만주에 자리잡은 세력. 기원에 관해서는 온갖학설이 난무함. 투르크계는 확실히 아니고(투르크계통인 전연,후연과의 대립) 몽골적인 요소도 갖고 있지만 퉁구스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함. 퉁구스계통인 말갈과의 깊은 관계. 전승을 감안해볼 때 유목민과 토착민이 골고루 섞였을 가능성이 있고 혼혈적인 민족이 독창적으로 변화해갔을 가능성이 있음. 한민족의 계통을 설명해주는데 매우 중요하지만 어떤 종족으로 봐야하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음.(한민족이 몽골에 가까운지 퉁구스에 가까운지 혼혈적인지는 아직도 논쟁거리)

유연: 선비의 이동이후 몽골초원을 장악한 몽골계통의 민족. 타브가치와 끊임없는 대립
결국 돌궐의 공격으로 멸망.

돌궐 : 투르크 계통, 유연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와 대립 서쪽으로 진출하여 에프탈을 멸망시키고 동쪽으로는 거란을 굴복시킴. 당의 거센공격과 내부분열로 붕괴되었다가 다시 일어나지만 투르키스탄으로 진출한 이슬람세력과의 교전에서 패배하고 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를 막지못함, 위구르의 공격으로 소멸.

훈족 : 흉노의 후예로 400년 만에 볼가강을건너 유럽에 모습을 드러냄. 사르마트의 후예 알란을 격파(일부 알란은 스페인으로 도주하여 카탈로니아인의 기원이 됨,또다른 알란인들은 오늘날 그루지아일대의 오세트인의 기원이 됨)하고 게르만 계통인 고트족을 격파하여 동고트를 복속시키고 서고트를 밀어냄. 서고트의 이동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 발생. 헝가리 초원으로 진출하여 고트계통의 게피대까지 정복하고 동, 서로마를 공격 유럽세계를 공포에 빠트림. 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훈은 후에 유럽의 사가들이 흉노를 통칭하는데 쓰임. 아틸라 사후 게피대와 동고트의 반란과 동로마의 공격으로 우크라이나로 철수되었다가 분열됨.

에프탈: 몽골적인 요소가 강한 종족으로 유연과 비슷한 시기 등장하였으나 서쪽으로 진출하여 인도와 사산조페르시아를 공격하는등 막강한 세력을 떨침. 그러나 돌궐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흩어짐.

아바르: 6세기에 유럽에 갑자기 등장함. 몽골계통으로 에프탈이나 유연의 도주세력으로 추정됨. 훈족의 잔여를 통합하고 헝가리까지 진출하여 동로마를 공격 유럽에 새로운 공포를 주지만 프랑크의 압박과 동로마의 공격등으로 쇠퇴하고 소멸함.

불가르 : 우크라이나로 도망친 훈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민족으로 투르크계통, 아바르와 함께 유럽에 진입하였으며 아바르가 소멸된 이후에도 계속 동로마를 위협함. 후에 기독교화되었고 수적으로 우세한 슬라브문화에 흡수되어 오늘날의 불가리아가 됨. 일부는 볼가강 중류와 카마강일대에 잔류하여 대불가리아를 세웠으나 칭키즈칸 몽골인들에 의해 파괴됨.

하자르 : 7세기초 볼가강 일대에서 출현하여 다케스탄과 카프카스,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전역을 지배하던 거대 유목제국, 훈족의 후예로 추정되며 아바르, 불가르와 함께 유럽으로 가지 않고 남러시아를 지배. 상당히 문명화되었지만 그로 인해 군사력이 약화되었다가 러시아와 동로마의 압박으로 11세기초 소멸.

마자르 : 오늘날의 아조프해 북방인 레베디아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투르크 계통의 핀-우구르계 유목민 9세기말 하자르의 약체를 틈타 페체넥의 공격을 받고 서쪽으로 급속히 이동하여 헝가리에 진입, 유럽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공포의 대상이 됨. 뒤에 기독교화되었으며, 헝가리라는 이름의 유럽국가가 됨.

페체넥 : 하자르의 약체를 틈타 남러시아를 장악하고 불가르와 연합하여 동로마와 마자르를 공격하지만 동로마의 반격과 오구즈와 킵착의 배후 공격으로 궤멸됨.

오구즈 : 투르크멘족 계통으로 서방으로 진출하여 페체넥을 붕괴시키지만 킵착의 공격을 받아 동화됨.

킵착: 오브강일대에서 유목하던 투르크계 유목민 키맥의 일부였지만 서쪽으로 이동하여 페체넥과 오구즈를 무너뜨리고 남러시아를 장악함. 뒤에 몽골에 복속되어 킵착칸국의 구성원이됨.

다시 동쪽으로 돌아와서

위구르: 투르크꼐통의 유목민으로 8세기 중엽 등장하여 돌궐을 무너뜨리고 초원의 지배자가 됨. 소그드문화를 받아들이고 문명화되짐나 키르키즈의 습격을 받아 몽골초원일대에서 동투르키스탄(오늘날의 신장위구르)으로 철수함

거란: 위구르 지배의 붕괴이후 세력을 키운 몽골계통의 유목민으로 몽골초원과 만주를 지배하고 송을 압박함, 뒤에 세력이 약화되어 금의 공격을 받고 멸망. 뒤에 있은 몽골제국의 금나라 공격에 적극 동참함.

발해 : 고구려-퉁구스적인 국가로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함. 하층민은 대부분 퉁구스 계통의 말갈인. 유목국가라기보다는 사실상 정주국가였으며 거란의 공격을 받고 멸망함. 퉁구스 계통의 말갈인들은 거란에 복속되거나 연해주 북방으로 도주.

여진(금): 말갈의 후예로 연해주 일대에서 원시적인 삶을 살던중 거란의 약체화를 틈타 거란을 무너뜨리고 북중국까지 정복하여 최초의 퉁구스 제국인 금을 세움. 몽골계통의 유목민과는 적대적이었고 결국 몽골제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 일부는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동만주에 잔류하다가 후에 명을 무너뜨리고 청을 세움

몽골제국 : 몽골계통의 유목민이 중심이되었지만 계속된 유목민들의 흡수로 거의 모든 유목민들이 복속되어 거의 모든 투르크, 몽골계통의 유목민을 지배하에 둔 진정한 통일 유목제국.



질문2)에 관해서는

핀란드의 핀족 : 핀족은 우랄어족의 일파로 이들의 원거주지는 우랄산맥 서쪽 볼가강 일대로 추정되며 기원전 500년경 발트해 지방으로 진출하여 농경을 배운뒤 주로 해상을 통해 핀란드로 이주하였습니다. 종족상으로는 거의 확실한 코카소이드(백인)입니다.

헝가리의 마자르족: 위의 글을 참조하세요.

터키의 투르크족 : 먼저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는데 터키는 문화적으로는 투르크문화를 상당수준 가지고 있지만 종족상으로는 그리스인에 가깝습니다.
터키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방은 기원전부터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그리스문화권이었고 동로마 치하에서도 변함은 없었습니다. 다만 11세기말 셀주크 투르크의 침공으로 아나톨리아가 이슬람화되면서 이슬람적인 투르크문화가 섞여들었고 차츰 주민 스스로도 투르크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 지배층인 투르크인들이 그리스인들에게 빨려 들어간 겪이었고 유전학상으로 터키인은 그리스인에 가깝습니다.
셀주크 투르크의 기원은 발하슈호의 북방의 초원지대로 이들은 앞서 설명한 오구즈의 일파(투르크멘족)로 알려져 있습니다.이들은 11세기 이동을 개시하였는데 일부는 앞서 설명한데로 유럽으로 갔다가 키맥 계통인 킵착의 공격을 받고 격파되었으나 이란방면으로 진출한 일부는 이란에서 아나톨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획득하고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아나톨리아 정복이 오늘날 터키(또는 투르키에)라고 불리는 나라를 형성하게 했습니다. 실재로 터키는 서구식 발음이고 실재로는 투르키에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라프족 : 라프족은 사메라고도 불리우며 이들의 조상은 볼가강 유역에서 서진했고 기원전 1000년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진출했습니다. 그 뒤 핀인과 계르만 계통의 노르웨이, 스웨덴 인들의 압박으로 일부만이 남게되었습니다. 이들 역시 우랄어족으로 알려져있으며 핀인과 관련이 있는 종족입니다.


사모예드족 : 이 민족은 저도 잘 모르는데 분명한 것은 라프족이나 핀족과 동일한 우랄어족의 일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사회문화




□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소비자


1. 중국인의 사고방식

1) 국민성과 역사, 지리와의 관계에 대한 간략한 고찰

중국인은 예로부터 많은 특징을 가진 국민이었다.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자긍심이 매우 강하고, 제도보다는 인간 관계(꽌시:關係)를 우선시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제도가 아닌 '關係'가 일을 한다는 말이 있다. 특히 중국인을 사귀려면 제일 먼저 "신뢰"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 서양인이 중국인을 비하시키는 데 주로 사용하는 말의 하나가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체면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이 있다. 또 우리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자신의 이익과 관계가 없거나 친구 사이가 아니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인정이 많은 우리로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외적 환경이나 외모보다는 실력과 실용을 중시하며, 결과를 보고 판단한다.

중국의 역사와 지리는 그들의 국민성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쳤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그들은 내란을 비롯해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당했다. 그래서, 쉽게 상대방에게 마음을 내어 주지 않는다. 그리고,(3)체면 중시 사상에서 설명이 있을 것이지만 역사적 배경에 의해서 명분을 중요시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상이 널리 유포되었다. 역사에 의해 지배 계층은 근 만년 가까이 지배의 위치에 있으면서 생긴 특성으로서 지배 계층은 귀족 의식, 예의 의식, 중화사상, 인내력, 절개를 중시하는 편이고, 피지배 계층은 전제정치 하에서 시달려 오면서, 농사나 자신들의 앞날을 전적으로 황제나 그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에게 의존함에 따라 일반 계층은 소극적이고 체념적 성향을 지니며, 이기주의, 이치에 밝게 되었다.

지리도 그들의 국민성에 영향을 끼쳤는데, 그걸 보면, 황허강 이북의 사람들은 정통 한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그래서, 한 예로 북경인은 학벌이 높고 권력욕 및 명예욕이 많으며 예의를 존중하는 편이다. 황허강 이남의 민족, 아니 양자강 부근의 민족은 바닷가와 가까이 있어서 아주 무역이나 상업에 밝다. 한 예가 상해인인데, 상해인은 국제적인 감각이 발달되어 있으며, 머리 회전이 빠르고 실용적이며 외관과 디자인을 중시한다. 그리고, 산동인은 몸집이 크고 성격이 단순하며 사람을 사귈 때 처음에는 경계하지만 일단 친구가 되면 의리가 변하지 않는다. 한편, 절강인은 계산이 빠르고 저축율이 높으며 추진력이 강하나 손해보는 장사는 절대 하지 않는다.

사천 지방과 복건 지방은 험난한 산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개척 적이고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복건성은 원래 산악 지역에 거주하여 가난하지만 근면하고 부지런하다. 동북3성은 술을 좋아하며 성격이 직선적이고 적극적이다.


2) 관습

음식 문화에서 식사 초대는 최고의 호의이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으며, 초대에 참석시 주인과 안내의 인도에 따르는 것이 예의이다. 초대시에는 반드시 주인에게 감사 표시를 해야 한다.

우리 나라와 많이 다른 부분의 하나가 음주 문화와 흡연에 관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첨잔하는 관습이 있어 그만 마시고 싶을 경우에는 잔을 엎어 놓던지 의사를 명확히 하는 것이 좋으며, 잔을 돌리는 습관은 없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곧 이미지의 실추로 인식된다. 담배는 중요한 사교의 수단이며 초면에도 자연스레 담배를 권하며 이야기를 나누므로 비흡연자라도 예의상 상대방이 권하는 담배는 받는 것이 좋다. 이처럼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담배는 서로의 대화와 인사의 매개물로 간주하며, 담배를 돌려 피움으로써 공유감과 소속감을 느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교통 문화에 관한 것으로는 우리가 책에서 보아서 아는 것으로 자전거가 있다. 이 자전거는 가까운 거리나 통근 수단으로 이용하고 특히 북경의 경우 3명당 2대꼴로 소유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대중 교통 수단으로는 기차가 이용되고 있다. 항공의 이용시엔 공항에서 직접 항공권 구하기는 힘드므로 여행사나 판매소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3) 체면(面子)중시 사상

중국인과 대면 중에 특히 조심해야 할 점은 절대로 중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약점을 들추어 중국인의 목슴 만큼이나 중시하는 "面子(미옌즈:체면)를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체면 중시 사고는 과거 중화사상에 젖어 있던 향수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에 의한 평균주의 사고 방식에 의해 심화되었으며 각 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집단거주의 형성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체면 중심 사상이 왜 생겨났는지 잘 모르는데 그것은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은 주·춘추 전국시대를 통해 이 명분중심사상·체면 중심 사상이 발생하였다. 패자(覇者)가 되고자 하는 많은 무인들은 천자를 옹립하는 목적으로 천자의 수호(守護)라는 명분을 외쳤다. 그리고, 그 후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계속 민중을 지키고, 국가를 편히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며, 명·청 시대에는 외세를 물리친다는 명분이 있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만년 가까이를 지속해 온 그들의 사상 속에는 명분을 중시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상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4) 현세주의적 경향

중국인들은 세상 모든 일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인 개념까지도 인간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대 서양에서 취하는 태도와는 달리 편의주의적 이며 실용주의적이다. 중국의 민족성이 상식적이고, 중국인들이 연구하는 학문은 실천 중심이라는 점은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및 공자, 맹자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5) 중화사상

중화사상이라는 말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이며 모든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전세계에 퍼져 나간다고 믿는 중국의 민족 사상이다. 중화사상이라는 말은 등에서 처음 나타났다. 과거의 한족(漢族)은 이 사상을 통해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해 왔다.

과거 한족이 황허강 유역에서 농경 생활을 하면서 문명을 개척해 나갈 무렵 그 주위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다. 한족은 다른 민족과 접촉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발달시켰는데, 문화가 무르익은 서주(西周)시대에 이르면서 주위의 민족들에 대한 문화적 우월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선민(選民)이라고 믿었고, 굳건한 중화사상을 가졌다. 당시 중국의 통치자들은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天子)로 칭함으로써 우월 의식을 더욱 고취하였다. 중화사상은 그 배후에 이민족을 천시하는 개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화이(華夷) 사상이라고도 한다.

춘추 전국 시대를 거쳐 진·한·당대에 이르러서는 중화사상이 극을 이루고 있다. 그들의 문화유산이 충분히 그들이 중화사상을 가지게 끔하고 있는데 진의 만리장성, 한의 서역길(실크로드) 개척, 당의 세계 제국이 그것이다. 특히, 한과 당은 세계적인 대제국으로서 한의 서역길 개척으로 동·서의 교역이 처음으로 이루어져 로마의 사신을 받아들였고, 당의 장안은 당시 이미 백만을 넘어서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으며, 종교 또한 국제적인 제국답게 다양한 종교가 유포되었다. 그들은 예교가 없는 이민족을 성인의 도에서 벗어난 금수로 취급했다. 그래서, 중국의 천자가 모든 이민족을 덕화(德化)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 중국인의 소비 패턴

(1) 꿔칭(國情)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이 거대한 시장에서 성공하려는 외국 기업들은 반드시 '꿔칭(중국의 특징이나 고유의 정황, 즉 중국식을 의미함)'에 익숙해 져야 한다. 중국 소비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만한 가치(價値)·품질·편의(便宜)를 함께 갖춘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상품 판매자들은 절대적으로 중국인들에게 어울리는 중국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1984년 덩 샤오핑(鄧小平)은 다음과 같은 공산당 지침을 하달했다. 즉 "서구 문화와 사상은 '꿔칭'에 부합될 경우에 한해 수용한다. 중국에 맞는 사상을 장려하지만, 불순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것은 버려야 한다."

중국인들은 외국 정부나 기업들이 그들에게 강요할지도 모르는 방법이나 사상을 비판하고자 할 때 그 방법 또는 사상이 그들의 '꿔칭'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중국인들과 효과적으로 일하려면 이러한 개념을 이해한 후 설득해야 한다. 서구의 많은 시장 개척자들이 중국을 이해하고자 '관시(關係)'를 파악하는데 주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본국에서 이미 그 효과가 입증된 바 있는 기존의 상품 차별화, 상품진열관리 방법, 편리한 기술 등을 모르고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외국 기업들은 십중팔구 좌절을 맛보게 될 것이다.

서구의 시장 개척자들이 고려해야 할 '꿔칭'의 몇 가지 예를 보자. 우선, 중국은 국가 정책으로 한 가족당 한 자녀로 자녀 수를 제한하고 있다. 국민 1인당 연금비용 부담의 증가, 미혼 남성의 증가 등이 이미 다음 세대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국가 정책은 이미 가정 소비 패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최상품의 절반 이상이 각 가정의 '황제(皇帝)'로 대우받는 외아들, 외동딸을 위하여 구매된다. 특히 유아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고가 상품 분야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꿔칭'의 또 다른 예는 중국의 국가소유체제와 관련 있다. 유교 사상은 중국 문화 전체의 밑바탕이므로 '꿔칭'에 대한 그 영향력도 상당하다.


(2) 소비자 행동

중국 상점에서 붐비는 사람들이 모두 구매자는 아니다. 그들은 단지 구경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소비자들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구경하고 만지작거리기 때문에 충동구매는 거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중국 소비자는 질이 떨어지는 자국 상품에 싫증을 느끼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서구에서 수입된 상품을 동경(憧憬)하고 있다. 소비자 행동 역시 여러 면에서 '꿔칭'을 반영(反影)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길조(吉兆)의 발음을 가진 이름, 특히 권세(權勢)의 이미지를 상징(象徵)하는 상표 이름을 선호(選好)한다.

소비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중국 문화의 또 다른 하나의 측면(側面)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망설임'과 관련이 있다. 전형적인 중국인들은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는 수많을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나 남들보다 뒤떨어졌다라는 말을 듣기는 싫기 때문에 이웃이 사용한 후 이상이 없으면 그들은 그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려고 한다. 누군가 먼저 사용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중국 소비자들은 안심하고 그 상품을 구하기 위해 상점에 들이닥친다. 서로 아는 사람간의 상품소개(商品紹介)가 고객을 확대(擴大)하는 가장 강력(强力)한 방법이다.


(3) 중국인의 상관습

우리 나라 사람이 중국인과 무역을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실무 담당자를 통해 교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일반적으로 책임자를 만나 인사를 하고 승낙을 받아 내는 것으로 끝을 보려 하지만 중국인과의 거래에서는 실무 담당자의 승낙을 얻어야만 한다. 그들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중국인과 무역에서 교섭이 어려워 실패한다는 이유로 이런 것을 모르기 때문인데, 중국인은 모두 하나 하나가 공무원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상사의 명령으로 모든 일이 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중국인은 인정을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에 초조해 하지 그리고 그들은 돈벌이를 선(禪)이라 생각하고 돈 버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것으로 안다.



□ 중국의 근대 교육(近代 敎育)과 문제점(問題點)

오늘날 중국에 있어서의 교육은 단순한 학교교육보다는 젊은 사람이거나 늙은 사람이거나 간에 인간들에게 잘 봉사(奉事)하며, 인격적으로 더 훌륭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대중광고(大衆廣告)도 인민에게 교육의 일익을 담당(擔當)한다고 보고 있다. 성인들에게 공중 위생에 대해 가르친다거나, 문맹자(文盲者)를 계몽하고 새로운 기술을 가르친다든가 하는 따위에 관련된 일은 그들의 교육적인 노력의 주요한 성과로 크게 자랑하고 있다. 중국 교육에 있어서의 가장 큰 난관(難關)은 그들을 훌륭한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한가, 그들을 훌륭한 전문가(專門家)로 길러 내는 것이 더 중요한가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그들의 용어대로 말하면 공산주의자와 기술자의 문제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학생의 신분 배경, 공부를 하려는 동기(動機)등 또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모순을 극복(克服)하느냐가 오늘날 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장 큰 숙제의 하나이다.

문화혁명(文化革命)때에는 기초 교육이 경시(輕視)된 데다가, 교사는 권위(權威)를 잃어버리고 위축(萎縮)되었으며, 학생도 학습 의욕(學習意慾)을 상실하였다. 그 후, 사인방(四人幇)의 실각 후에는 비중을 두고 집중적으로 교육시키는 중점적으로 육성할 학교를 설정하여 전문 인력을 집중육성(集中育成)하고 있다.


1) 교육 환경

중국의 교육기관은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으로 나누어지며, 중학 과정까지 의무교육이다. 중등교육은 4개의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농업 전문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농업학교, 공업 기술과 지식을 가르치는 공업 학교, 그리고 전문적인 특수 기술의 습득 및 교육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 특수 전문학교와 일반 고등학교가 있으며, 일반 고등학교 과정을 거친 학생들이 대학으로 진학한다. 대학은 일반 대학 968개교, 전문대학 85개교로 총 1,053개교이며 이중 종합대학은 북경 대학, 인민 대학, 남개대학, 복단대학 등 모두 59개교이다. 대학생은 국비생과 자비생으로 나누어지며 국비생은 졸업후 국가가 정하는 직장에 5년동안 의무 복무를 해야한다. 자비생은 직장 선택의 자유가 있으나 자비생의 비중은 일류 대학일수록 매우 낮다.


2) 교육기관의 현황

1988년 현재 전국 소학교의 학령 아동 취학률은 97.15%, 중학진학율은 71.5%, 중학교에서 후기 중등교육 기관으로의 진학율은 40.2%이었다. 소수 민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는 소학교 12만 개교, 중학교 1.1만 개교, 중등사범학교 189교, 고등사범학교 35개교, 민족학교 12개교, 고등교육기관 107개교가 있고, 학생수는 983.6만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23개 민족, 600만 명은 29개 민족어로 교육을 받고 있다. 현재 중국 정부의 문맹율은 25%정도로 알려져있다중국의 교육 관리 부문의 문제를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교육의 낭비이다. 오랜기간동안 중국 교육 각 분야의 인력공급구조와 경제 구조는 서로 적절히 조화를 이루지 못해 결과적으로 한쪽으로 교육의 낭비를 초래한 반면 또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 수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기형적 구조를 낳게 했다. 중국은 오랫동안 보통 중학생을 양성하는 데 역랑을 집중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적절히 공급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취업난을 야기시켰다. 즉 중국의 교육은 내실있는 교육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고 투자정책도 일정한 조건과 범위 내에서만 유용하고 자금사용의 방향, 구성 및 상호작용문제등이 진지하게 연구된 적이 없었다. 이러한 교육의 낭비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국 정부는 1980년 이후로 학교의 양적 팽창을 줄이고 교육의 내용에 내실을 기하게 된다. 위의 표를 살펴보면 학교의 수가 감소함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중국 정부의 위와 같은 정책 때문이다.


3) 낮은 교육 수준

의무교육의 확대, 교육 강화 정책 등에 힘입어 82년 22.8%에 달하던 문맹률이 90년에는 15.9:%로 저하되는 등 상당히 교육 수준이 향상되었으나 아직도 높은 문맹률과 낮은 대졸자 비율 등을 감안할 경우 여전히 낮은 교육 수준을 보이고 있어 고급인력 부족 현상의 주요인이 되고 있다.



□ 중국의 언론

중국은 12억 인구에 한반도의 46배에 달하는 9백60만km2의 국토를 가지고 있고,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중국어를 사용하는 대국이며 건국이래 우리 나라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나라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중국 언론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겠다.


1. 공산국가 언론 매체 이용의 특징

공산국가에서는 어떤 메시지의 부정적 효과에 보다 많은 경계심을 품고 있으며 사회 이념과 상반되는 메시지는 금지되고 사소한 탈선도 결코 용인되지 않으며, 오직 승인 받은 아이디어만 일반 대중에게 유입되도록 언론 매체는 철저하게 통제된다는 것이다. 어떤 정보와 어떤 아이디어가 언론 매체를 통해 유출 되어야 하고, 누가 어떤 정보와 아이디어에 접근해야 할 것인가의 결정이 계획적으로 시도된다.


2. 중국 언론의 특징

중국의 모든언론기관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선전·선동조직이요, 여론 기관으로서 특수한 성격과 기능·임무가 부여되어 있다. 중국의 언론은 당의 직접 지도체계 속에 편입되어 있는 신문·잡지류를 '당기관지'라고 부른다. 따라서 대부분의 유력 일간지들은 당기관지이며 '刊種'이나 매체의 유형에 관계없이 영향력 있는 간행물은 당의 직접 지도체계 속에서 운용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언론은 곧 당기관지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3. 언론 매체의 현황

1993년 말 발행되는 신문은 총 949종에 달한다. 일간지의 총 수는 247종에 이르며 이 중 당기관지가 172종으로 70%를 차지하고 있다. 또 한국어를 비롯한 13개 소수민족어로 발행되는 신문도 80개 나된다. 특히 과학기술, 경제교육, 정치법률과 관련된 전문지의 급속한 신장은 1980년대 중국 신문 발전의 최대 특징으로서 현대화 건설의 추진에 따른 필연적인 추세로 분석되고 있다.


4. 중국의 신화 통신사

신화 통신사는 중화 인민공화국의 국가 통신사이다. 그것은 국무원의 한 구성 부분이며 국가가 집중, 통괄하는 뉴스 배포 기관이다. 신화사는 1931년 11월 7일 강서성 소비에트 지구의 서금(瑞金)에서 창건되었으며 당시 홍색중화신문사(紅色中華新聞社)라고 불려졌다.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신화사는 중앙의 결정에 따라 점차 전국 각지의 조직을 통일, 조정하여 집중, 통합된 국가 통신사가 되었으며, 역사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장기간의 조직 정비 후 현재 신화사는 전국 규모의 통신사의 임무를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식 사회주의의 현대화된 세계적인 규모의 통신사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현재 해외 지사는 90개이고, 국내 29개의 성, 시, 자치구 및 홍콩에 모두 지사가 설립되어 있으며, 성 관할의 대도시에도 주재 기자단이 파견되어 있다. 인민해방군내에도 인민해방군 총지사가 설립되어 있으며, 해군, 공군, 및 각 대군구에도 별도로 지사가 설립되어 있다.



□ 중국의 민족과 인구


1. 중국 민족의 구성

중국이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한족(漢族)이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마치 단일민족인 것처럼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 56개의 민족이 어울려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 민족 국가이다.현재 중국은 91.9%가 한족으로 나머지가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수 민족 가운데 인구, 천만을 넘는 민족은 장족뿐이며, 백만 이상이 회족·위그르족·묘족·만주족·티베트족·몽고족·조선족 등 모두 14민족이 있다. 이를 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민족 정책

중국은 한족을 제외하고도 55개의 소수 민족이 살고 있는 다양한 민족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에서 대규모 폭동(1959년)이 발생한 가선등을 제외하고도 대체적으로 민족간의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 당국의 소수 민족에 대한 정책에서 기인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당국의 소수 민족에 대한 정책은 크게 네 가지 즉, 다수에 의한 동질화 정책, 문화보호정책, 민족 구역 자치제, 소수 민족에 의한 간부정책으로 나누어 진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다수에 의한 동질화 정책

중국의 소수민족인구는 비록 전체 인구의 악 8.04%인 9천 4백만이 넘고, 행정구역상으로 구분한 민족자치지구의 총면적은 악 6백 십만 평방km로 전체 면적의 60%이상 가량 되기 때문에 중국 당국이 그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소수 민족을 한족과 잘 어울리게 하기 위하여 한족의 이주로 인한 동질화 정책을 펴고 있다. 이는 소수 민족이 한족에 대하여 가지는 소외감과 이질감을 한족과의 공동 생활로 어느 정도 해결하기 위함이다.


2) 문화 보호 정책

중국은 법률상을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사용과 발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도 중앙과 지방의 민족 학원에서 모두 수수 민족의 언어 과정을 두고 있고, 소수 민족 지역의 학교에서도 공통된 언어인 漢語(중국어)와 소수 민족 언어와 문자를 모두 배우고 있다. 소수 민족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풍속과 습관도 전체 소수 민족 문제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일부분이다. 중국 정부는 소수 민족의 풍속과 습관에 대하여 이중적인 정책을 가지고 있다. 소수 민족의 고유한 풍속과 습관이 사회주의 생산 건설과 소수 민족의 발전에 도움을 주면 계속 보호하고, 만일 그와 반대될 때에는 적당한 개혁을 한다. 개혁은 해당 소수 민족의 희망이 있을 때에만 진행하게 된다.


3) 민족 구역 자치제

민족 구역 자치란 통일된 구각 내의 헌법의 기초 위에서 소수 민족이 본 지구의 내부 사무를 스스로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정부는 1954년 헌법에 중국은 통일된 한민족 국가라고 규정하여 소수민족의분리와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자치권만 인정하였다. 이것은 소수 민족이 가지는 전통상의 분리 욕망의 모순과 만족을 결합시켜 민족 구역 자치제를 출현시켰다. 다시 말하면 자치권이 소수 민족이 가지는 분리 독립의 욕망을 어느 정도 만족시킬 수 있다.


4) 소수 민족에 의한 간부 정책

소수 민족 지구에 한족 간부를 파견하면, 비록 업무는 처리하겠지만 현지의 사정과 언어,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여 인민들과의 관계 및 당의 정책 관철 등 방면에도 많은 곤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양성 기관에서 교육받은 소수 민족 간부들을 해당 지역에 파견하여 민족 구역 자치 정책을 수행한다.


2. 중국의 인구 규모

1993년 말 12억 8,517만명으로 세계 인구의 약 22%를 차지하며, 인구밀도는 134/km2, 인구 증가율은 1.1%(1993)이고, 1978년부터 1993년 평균 인구 증가율은 1.4%이다. 총가구수는 약 2억 5천만戶로 주택문제가 심각하다.


3. 인구구성

중국의 1991년 기준 인구구성을 성별·도시와 농촌과의 비율·교육수준·문맹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성별구성:남자 51%, 여자 49%(특히 40대 이하의 남자 비중이 높음)
- 都農구성: 도시 인구 28.1%, 농촌 인구 71.9%
- 교육수준:국졸 35%, 중졸 30%, 고졸 9%, 대학 2%(15세 이상의 인구중심)
- 문맹율 22.2%(남자 13%, 여자 31.9%)


4. 중국의 노동력

중국의 사회 노동력은 각종 기관, 기업, 단체에 종사하며 고정 임금을 지급 받는 취업 노동자(중국에서는 직공이라함), 도시 지역의 개별 노동자, 농촌의 집단 및 개별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1993년말 현재 도시와 농촌 노동력의 비율은 27:73으로 농촌 노동력의 비중이 훨씬 높다. 도시 노동력의 비중은 1952년 12%에서 점차 높아져 38년간 14%가 증가한 반면 농촌 노동력의 비중은 감소추세 있다. 산업별 노동 구성 추이는 경제 개혁 첫해인 1978년 전체 노동력 중 1차산업 70.5%, 2차산업 17.4%, 3차산업 12.1%의 구성비가 1993년에는 57.4%, 33.4%, 20.2%로 변동하였다. 중국은 아직 1차산업의 노동력 비중이 높은 농업국이지만 개혁, 개방 정책의 실시 이후 농업 부문에서 공업 및 서비스 산업 부문으로의 노동력 이동이 빠르게 진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중국의 노동 구조에서 주목할 점은 도시 지역 실업인구이다. 농촌 지역에서의 생산 방식 개혁에 따른 잉여 노동력 문제, 정부의 행정 개혁과 국영기업의 고용 제도 개혁에 따라 방출되는 잉여 노동력 문제가 중국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도시 지역 실업자 수는 1993년 말 420만 명이었으나 실업률은 2.6%로 1978년의 5.3%보다 2.7% 하락되었다(표7 참조). 이 같은 실업률 감소는 중국이 경제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기업 설립을 완화하고 또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고용 기회가 대폭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3차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도시 지역의 일부 실업자가 서비스와 상업 분야로 흡수되고 있다.



□ 중국의 종교

중국인들은 문화혁명이 끝난 1976년에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1982년의 헌법에는 「어떠한 국가기관·사회단체 또는 개인도 공민(公民)에게 종교의 신앙 또는 종교의 불신앙을 강제고 제압해서는 안되며, 종교를 믿는 공민과 믿지 않는 공민을 차별해서도 안된다.」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 이후 불교·회교·기독교(구교,신교)·도교의 각계대표들은 조직을 재건하고, 출판물을 발행하면서 종사자와 연구자를 양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

중국의 종교를 크게 나누어 보면,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이 파생된 토착적인 원시종교, 과연 종교냐 하는 논란도 있지만 종교적 요소 및 색채가 뚜렷한 유교, 중국에서 발생한 유일한 종교인 도교, 외래종교인 불교·회교, 티베트의 라마교, 보다 후대에 중국에 전래된 기독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 중국인의 종교관

중국인들의 종교관은 천지 우주간에 있어서 사람의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인에게 천인합일은 최고의 이상이며 인간이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보았다. 그래서 종교에서도 중심은 사람이다. 즉 중국에서의 종교란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 불과하다. 사람이 사람을 믿고 섬기는 것이다. 앞의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고 뒤의 사람은 죽은 사람, 곧 조상인 셈이다. 중국 사람들에게 있어 조상은 가족과 죽은 자외의 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늘 조상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혹 병이라도 나면 먼저 조상의 위패부터 살피곤 했다. 위치가 잘못되었는지, 불효를 했는지를 반성했던 것이다.

인간간의 조화는 더 나아가 자연과의 조화로 안전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천(天)·지(地)·신(神)·귀(鬼) 등 초자연이 모두 해당된다. 특이한 것은 중국인의 귀신 관념은 인본주의(人本主義)라는 데에 있다. 유가의 성현이든 도교의 신선이든, 아니면 불교의 보살이나 귀신 등은 모두가 인격화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한층 밀접해지며 부탁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들이 귀신을 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관계의 연장에 불과하다. 이는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수를 구세주로 받들면서 사람은 예배만 가능할 뿐 그 이상은 불가능한 것과는 다르다.

이처럼 중국에서의 종교란 조상, 즉 인간을 섬기는 종교가 일찍부터 뿌리를 내렸으므로 우리가 말하는 종교는 그다지 성행하지 않고 있다. 가장 성행했다는 불고도 그들이 주장하는 내세관이나 윤회론이 조상 섬기는 것과 흡사했으므로 수용이 가능했을 뿐이다. 그래서 중국에서 기독교는 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 중국의 사회복지 사업

1) 아동 복지

중국의 아동 복지는 1949년 중국 정부의 탄생이래 오늘날까지 중국 정부가 답변확정한 노선 변화를 중심으로 아동 복지 시설을 통하여 노동하는 어머니를 가진 아동의 복지를 보호·증진시키고 가정이 없거나 가정이 있더라도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돌보는 것으로 부모의 양육을 대체·보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복지 서비스이다. 아동 복지사업의 유형으로는 8주로부터 이유할 때까지 1년간 있을수 있는 작업장의 육아실, 18-42개월의 아동이 이용할수 있는 탁아소, 3살 반에서 7살까지 유아교육을 시키는 유치원들이 있다.


2) 여성 복지

여성 복지의 대표적인 대상은 여성 노동자를 들 수 있다. 여성의 모성 보호와 관련하여, 중국에서는 여성의 건강을 병원급의 '모성과 아동보호보건원'이 1990년 당시 328개소가 있었으며 '모성과 아동 보호 보건소'가 2,820개소가 있었다. 여성 노동자는 무료의료혜택을 받는데, 도시에서는 종합병원, 개인 병원의 산부인과, 부인과, 소아과에서 여성의 건강을 담당하고 있으며, 보건행정국은 여성보건요원의 훈련과 과학적 연구 작업을 관장하고 있다. 반면에, 농촌에서는 위생원과 부유 보건소에서 여성의 건강을 담당하고 있다.


3) 노인복지

노인의 복지 제도는 연금 제도가 핵심이다. 중국의 은퇴한 노인은 무료로 의료 혜택을 받으며, 도시 은퇴 노동자의 연금은 노동시간 노동 수행 정도에 따라 봉급을 환산하여 지급 받는데, 10-15년간 계속 근무한 노동자는 이런 임금의 60%의 연금을, 20년 이상 근무한 자는 75%의 연금을 받게 된다. 퇴직 연령은 남성 노동자와 관리직 종사자의 경우 60세이고, 여성 노동자의 경우 50세, 여성 관리직 종사자는 55세이다.


4) 장애인 복지

장애인에 대한 복지 서비스는 산업 재해 등 각종 사고를 입은 장애인에게 장애의 치료를 위한 급여와 완전 장애인이 된 이후의 보상 급여가 주어지고 있으며, 저소득층의 장애인 중에서 생활 능력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그 생계비의 일부를 현금 또는 현물 급여의 형태로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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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동향


□ 개황

1979년 이래의 경제조정정책에 따라 중공업위주에서 경공업 발전에도 중점을 두게 되어 식료가공, 가전제품등의 소비재나 건축자재등 국민생활수준과 직결된 제품의 생산이 크게 증가하였다. 8·5 및 2000년까지의 계획 추진에 따른 중공업 발전속도가 경공업 발전속도를 능가하였다.

기계공업은 중국의 최대 산업으로 1993년 총생산액은 3,600억元으로 24% 성장하였으며 부문별 성장율은 자동차 58.2%, 계측기 37.92%, 공작기계 34.2% 등이다. 방직공업은 93년 총생산액은 4,345억元이며 특히 가공 수준이 현저히 향상되고 수출이 대폭 증가하였다.

화학공업은 1993년 총생산액 (석유화학 제외)은 1,674.4억元으로서 10.2% 증가했으며 수출산업화 및 농업용 화공품 생산에 치중하였다. 석유화학은 1993년 중국 석유화학 총공사의 생산액이 791억元으로 국외자금을 이용한 대외개방 촉진에 주력하고 있다.

철강공업에서 조강생산량은 2000년까지는 1억톤 생산이 무난할 것으로 보여 세계 최대의 조강생산국이 될 전망이다. 석탄공업은 1993년 11.4억톤 생산 (수출 1,805만톤)으로 전년 대비 2.4% 증가하였으며 인력감소 및 기계화에 주력하고 있다.

조선공업은 1993년 생산액 101.8억元, 건조선수 136척에 111.9만톤으로 전년 대비 21.4%, 36.8% 성장하였다. 선박수리는 1,042척에 10.96만톤, 1993년 건조 130만톤으로 30% 성장하였다.

경공업은 1993년 생산액 3,831억元으로 15% 성장하였다. 생산액은 식품음료 752억元, 플라스틱 제품 294억元, 제지 277억元, 금속제품 243억元, 일용화학제품 223억元이다.


□ 업종별 동향

1. 농업

중국의 농업은 1979년 이후 경제개혁에 따라 생산책임제가 도입되었으며 현재는 농업생산의 구성이 변화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농업 외에 임업, 목축업, 어업, 부업을 포함하여 광의의 농업이라 부르나 이 중에서 협의의 농업생산액은 감소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경제작물 및 부업 (특히 鄕鎭企業으로 불리는 농촌공업체)의 생산액이 증가하고 있다.

식량과 경제작물을 주로 한 농업이 농업 생산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83년까지 70%대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1984년 이후 떨어지기 시작하여 1991년에는 57%가 되었으며 목축업이 1/4을 차지하게 되었다. 1992년 독립채산제 추진을 가속화하여 각종 형식의 농업사회화 서비스 메카니즘의 건설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농작물의 구조 조정으로 고급작물의 비중이 높아졌다.

중국은 식량의 안정적 증산이 중국의 빠른 경제발전을 뒷받침하는 기초라고 판단하여 제 8차 5개년(1991 ~ 95) 기간 중 농업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였다.

이에 따라 향후 10년간 공업성장율은 3.5 ~ 4% 수준으로 지속시켜 나가는 동시에 면화 등 경제 작물생산을 꾸준히 확대시켜 나간다는 방침이다. 식량생산은 1984년 이후 1985년, 1986년, 1988년을 제외하고 4억톤대를 유지하고 있다.

가격이나 품질, 유통, 시장의 요구에 따를 수 있는 수송 체제정비와 개선이 요구되고 있으며 토지문제는 알칼리성 토양의 개량, 신규의 황무지 개간, 개발, 사막화 방지 등에 외국기술, 자본의 도입이 이루어져 차츰 진전되고 있지만 최근의 개혁, 개방 정책의 발전에 따라 우량농지가 공장이나 시설 설치를 위해 이용되어 경지면적이 감소되고 있다.

관개면적은 4,740만 헥터로 총 경지면적의 약 절반에 달했으며 우량종자의 보급이 확대되고 화학 비료의 시비량도 증대했다. 그리고 경영방법의 변화에 따라 소형 농기구 이용이 많아지고 있다.

1992년 조림면적은 8,897만畝로서 전년 대비 6% 증가하였다. 방호림, 국가조림 프로젝트와 속생풍산림 건설 등에 있어 뚜렷한 성과가 있었으며 산림 복개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1992년 수산품 생산량은 전년 대비 14.5% 증가한 1,546만톤을 기록했으며 이 중 담수어 생산량은 전년 대비 12.1%, 해산품은 16.1% 증가하였다.


2. 에너지산업

1992년에는 10.9억톤, 1993년 11.6억톤, 1994년 12.3억톤, 1995년 12.9억톤, 1996년 12.6억톤을 생산하였다. 1980 ~ 94년 기간 동안 중국 에너지생산량의 연평균 증가율은 GNP의 평균증가율보다 5.6% 포인트 낮은 4.1%에 머물렀으며 특히 석유생산의 증가율은 2.4%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1992년 이후 중국의 에너지 총소비량은 줄곧 총생산량을 넘고 있는 상황으로 에너지공급부문은 교통수송분야와 마찬가지로 중국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중국의 에너지 생산소비구조는 주로 석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석유에 대한 소비 역시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신중국 수립 후 소련의 기술원조 아래 카라마이 유전의 본격개발등 주로 서북지역이 석유산업의 중점 대상이 되었다가 1960년대는 동북 및 화북지방으로 중점이 옮겨졌다. 1970년대 들어 大慶, 勝利, 大港, 遼河 등에서 유전이 발견됨에 따라 중국은 석유수출국으로 떠올랐지만 1993년 들어 석유수입국으로 전락했으며 1996년도에도 대폭적인 원유증가가 있었다.

※ 중국의 주요 유전(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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油田名 所在地 生産量 技術導入狀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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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慶 黑龍江省 5,562 포리마 攻法
勝利 山東省 3,355 淺海油田開發
遼河 遼寧省 1,370 水薰氣攻法
新疆(카라마이) 新疆위글 自治區 702 水薰氣攻法
中原 河南省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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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섬유공업

방직공업은 이 나라의 공업화를 리드해 왔다. 특히 면방직 공업이 중심적인 역할을 해 왔는데 설비, 생산면에서 세계 최대급의 규모를 자랑하며 국제 수급에의 영향력도 크다. 면방기와 모방직기의 설비들은 규모는 크기만 생산설비의 노후가 심하고 생산품의 품질도 선진국 수준에 크게 뒤지고 있다. 생산면에서는 약 70% 정도가 순화섬사, 주로 아크릴 순사이고 혼방사가 5만톤, 순모사는 3만톤 정도에 불과하여 모방직 공업이 화섬을 중심으로 급격히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방직공업의 발전에 역점을 두어 온 중국에 있어서 화학섬유공업의 발전확대는 민생 수요에의 충당으로도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특히 이의 발전은 국산자원인 석유의 유효한 활용이기도 함과 동시에 석화공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기능을 하였다.


4. 자동차 공업

중국 자동차산업 발전 10년 계획의 중심이 되어 있는 三大三小 (長春一汽, 湖北二汽, 상해 산타나, 북경지프, 천진다이하쓰, 광주푸조) 정책이 세워진 후 공적으로는 그 이외의 프로젝트는 인가되지 않게 되어 있었다.

'三大三小' 정책의 추진현황을 보면 먼저 창춘 제 1 자동차공장 (長春一汽)은 폴크스바겐의 중형 승용차 아우디를 연산 30만대 체제로 계획했으나, 미국 내의 유휴설비를 대량으로 도입하고 엔진도 크라이슬러사에서 구형설비를 도입한 결과 중국, 미국, 유럽의 기술혼합과 신·구 설비에 의한 대량생산에 대해 큰 불안요소가 남아 있다.

후베이 제 2 자동차공장 (湖北二汽)은 외화 밸런스 문제 등이 장애가 되어 계획의 실행에 상당한 지연이 있었으나 중국의 외환사정 호전과 프랑스 정부의 금융개입에 의해 1992년부터 공장건설에 들어 갔다. 상해산타나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三大' 중에서 가장 빨리 발전했다.

현재 상해시와 폴크스바겐사는 모든 이익을 내부유보하고 설비증감에 대비하고 있다. 천진 다이하쓰는 중국의 국산화 정책에 따라서 국산화를 서두른 결과 품질문제가 발생하여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북경 지프와 광주 푸조는 중앙정부의 설정 목표인 연간 생산 10만 대에 대해 각각 6만대와 3 ~ 5만대의 하향 수정을 하였다.

현재 '三大, 三小' 이외에도 연간 생산 3만대 규모의 대도시 직할령 기업 10여개 사, 연산 1,000대 전후의 소기업 100여개 사, 2,000개 사 이상의 소규모 부품기업이 난립하고 있어 이것이 부품의 표준화와 규격화를 늦추고 있는 주요 원인이며, 차량의 양산체제가 확립되지 못하고 품질향상, 코스트절감 호환성 향상의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

시장에서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지방행정의 권한 확대에 의해 지방정부 직할의 자동차 관련기업은 중앙방침을 중시하지만 가능한 한 투자노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5. 철강공업

1993년 강철생산량은 8,800만 톤에 달하여 이미 세계 4위를 차지했다. 철강기업은 주로 안산, 태원, 북경, 천진, 상해, 무한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1950년대에 중국은 100여개 품종밖에 제련하지 못하고 400여개 규격의 강재밖에 압연하지 못하였으나 현재는 1,400여개 품종을 제련하고 2만 여개 규격의 강재를 압연할 수 있다. 그 중 국제기준과 국외 선진기준에 따라 생산하는 강재가 60%를 차지하며, 상당수의 철강기업의 용광로는 1980년대의 신기술을 채용하고 일부는 이미 세계 선진대열에 들어섰다. 금세기 말의 강철생산량은 1억톤에 달할 전망이다.


6. 항공공업

현재 항공공업은 전투기, 공격기, 폭격기, 연습기 등 군용기와 국내 개발의 중형, 소형 다용도기, 헬리콥터의 제조 및 맥도날더글라스사의 MD-82형 여객기의 조립을 하고 있다. 발동기도 국내 개발기의 엔진은 국산 엔진을 탑재하는 것이 기본이고 리시 프로, 터보제트, 터보팬, 터보프롭 등 25종의 엔진을 제작하고 있다. 탑재기기로는 비행제어 시스템, 내비게이션 시스템, 각종 센서, 유압기기, 탑재병기, 낙하산 등 거의 모든 것이 제작되고 있다.

현재 종업원은 총원 42만 명, 1991년의 생산고는 75억元이었다. (참고로 자동차 공업 81만 명, 생산고 539억元) 그러나 생산고 중 74%는 비항공기 제품으로 항공기의 생산량이 적어 국제선은 물론, 국내선도 아직 대부분이 국외로부터 수입한 기재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에서 항공수송은 극히 중요하며 수요도 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여, 국내선용 기재의 국산 비율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0년에 시험비행을 실시한 자력개발의 運7은 48 ~ 52인승 여객기를 70여기 생산하여 역시 국내선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 밖에 국외 메이커와의 교류, 합작사업으로는 MD-82 외에 롤스로이스의 스페이엔진 제작, 독일 MBB사와의 MDC-75의 공동개발등을 들 수 있다. 파키스탄과 공동개발한 제트식 연습기 K-8은 1991년 1월에 첫 비행에 성공했다.


□ 공업단지

1. 7대 경제구

중국은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여 경제 발전 전략상 획일적인 정책을 시행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전부터 경제블럭을 형성하여 지역경제 진흥정책을 시행하여 왔다.

이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1950년대에는 모택동의 「10대 관계론」에 의거한 연해와 내륙의 구분, 문화혁명 기간에는 국방전략상 전국을 제 1선, 제 2선, 제 3선으로 삼분하여 전쟁에 대비하고 적 후방인 제 3선을 중시 (모택동이 1964년 10월 제기) 하였다. 이러한 제 3선에는 四川, 雲南, 貴州, 陝西, 甘肅, 靑海, 寧夏의 전역과 山西, 河南, 湖 北, 湖南의 서부지역이 지정되었다.

제 6차 5개년계획이 시행되던 1981년에서 1985년 기간에는 연해지구, 내륙지구 및 변경 소수민족지구로 경제지역이 구분되었으며 1986년에서 1990년에 이르는 제 7차 5개년계획 기간에는 동부 연해지대, 중부지대, 서부지대로 나뉘었다가 1991년부터 1995년까지의 제 8차 5개년계획 기간에는 연해지구, 내륙지구, 변경 소수민족지구, 빈곤지구로 구분되었다. 이 중에서 연해지구가 경제발전의 견인지구가 되고 소수민족지구와 빈곤지구가 정체 지구로 분류된다.

내륙지구는 대도시에서는 연해지구와 나란히 신흥산업을 개척하고 지식집약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기대되고 있어 이 내륙부 대도시의 발전여하가 1990년대 경제발전의 열쇠가 되고 있다. 같은 시기에 국가계획위원회 장기계획국이 발표한"10대 경제구"의 구분은 더한층 세밀함을 추구하고 있어 정책입안에 실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0대 구분법에서는 전국을 4개로 나누는 것이 더욱 세분화되고 있다.

1992년 봄 鄧小平의 남방사찰에 따른 개혁, 개방가속 지시에 따라 제 8차 5개년계획은 크게 변화되었으며 지역경제 진흥의 구상에도 결정적 변화가 보여진다. 슬로건은 「전방위 대외개방, 고수준의 발전」으로, 새로운 지역구분은 7대 경제구라고 한다.

7대 경제구는 上海浦東을 필두로 하는 長江 (揚子江) 沿岸地區 (上海, 江蘇, 浙江, 安徽, 湖北, 四川 등), 珠江델타地區 (廣東 등), 北京, 天津, 河北, 山東, 遼寧을 포함하는 環渤海地區, 西南과 華南 일부省, 自治區 (雲南, 廣西 등 5省 7지방), 西北地方 (新疆, 內蒙古 등), 中原地區 (黃河 중류에서 하류에 걸치는 지역인 河南 등), 東北地區 (吉林, 黑龍江 등)이다.

이 7대 경제구의 발상에는 두 개의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중국의 국민경제는 지금까지 정부와 省, 市, 自治區의 두 수준에서 기획되고 각 省의 계획을 통하여 전국의 생산력 배치가 구체화되어 왔으나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상품시장은 省의 범위를 크게 넘게 되었다는 생각, 또 하나는 동부의 연해개방 지구의 우위 성을 중부, 서부에 넓혀 내륙부의 자원우위성과 경제적, 기술적 기초를 결부시켜 경제적 연계를 도모하려고 하는 지방간의 격차 시정의 생각이 그것이다.

각 지구별 구체적 발전계획을 보면 먼저 上海浦東을 필두로 하는 長江沿岸地區는 浦東開發과 三峽댐 건설을 계기로 長江 델타지구의 개발을 견인으로 하여 長江 유역의 경제발전을 이끈다.

珠江텔타地區는 경제특구로서 廣東의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국제시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제품의 1/3이 수출되고 1/3이 省外로 판매되며 나머지 1/3이 省 內에서 판매되고 있다.

中原地區, 西北地區는 제 2유라시아대륙 횡단철도를 활용하여 무역진흥을 돌파구로 서쪽으로 진출, 동부 연해지구와의 연합에 의해 중앙아시아에 진출한다.

西南과 華南 일부 省, 自治區는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인접하여 동남아시아 시장의 개척을 목표로 한다. 東北地區는 전 동부지방의 유통과 시장의 설립을 촉진하여 동북아시아 지역의 경제환경에 참여한다.


2. 대외 개방지역

1978년에 개혁, 개방노선을 취하기 시작한 이후 1980년에 4개의 경제특구, 1984년에 14개의 연해 개방도시, 1985년에 珠江델타, 長江델타, 福建省 남부 삼각지구, 그리고 1988년에는 海南島 특구가 결정됨과 동시에 遼東반도와 山東반도를 포함하는 환발해경제권 등도 개방되어 개방지역은 남에서 북으로 연해를 따라 벨트모양으로 넓어졌다.


3. 5경제 특구

션쩐, 珠海, 汕頭, 夏門은 1979년 4월 등소평에 의해 그 설치가 제기되었던 경제특구로서 1980년에 廣東省의 션쩐, 珠海, 仙頭, 福建省 夏門의 4대 경제특구의 건설이 결정되었다.

海南省은 중국정부가 海南島를 대외개방하여 이 섬의 개발건설 방침을 정하고 1988년 4월에 중국의 제 30번째의 省으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전 省이 경제특구로 지정되어 기존의 4개 경제특구에 이어 다섯번째이며 중국에서 최대의 특구가 되었다.

경제특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주권 하에 널리 외국으로부터의 자본, 기술, 관리의 노하우를 흡수하는 역할 (4개의 창구 : 기술, 지식, 관리, 대외정책의 창구)을 가지고 제조업을 중심으로 내외기업을 유치하고 수출지향형 산업구조 (외향형)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외자에 대해서는 소득세, 토지사용, 인프라 이용, 원재료 수입, 출입국 등의 면에서 우대하고, 특히 소득세율을 통일적으로 15%로 적용하며 관세의 감면범위가 넓다.

특구는 수출가공구, 공업구, 기술구 (하이테크 존), 상업 금융구, 관광구 등을 겸비하여 1차 산업에서 3차 산업까지를 포함하는 종합적 경제개발지역의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경제특구는 그 입지조건면에서 汕頭, 夏門특구는 대만에 가깝고, 션쩐은 1997년에 반환된 홍콩과, 珠海는 1999년에 반환예정인 마카오와 각각 인접하고, 海南島는 동남아시아와의 접점이 되고 있는 등 외교적, 경제적인 교류점이 되고 있어 특구 경제의 근대화를 통하여 대상 지역과의 경제일체화를 도모하려는 목적도 있다.

해남도의 개발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국 최초의 외자도입에 의한 토지개발사업인 洋浦개발이다. 洋浦는 海南島의 서북부 반도에 위치하고 省都인 海口에서 140km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態谷祖 (홍콩)를 시작으로 洋浦開發有限公司가 동 구의 30km의 토지개발을 맡고 있다. 동 사는 인프라 정비를 위해 15년 내에 HK $180억을 투자하고 전공사는 3기에 걸쳐 건설할 계획이다. 동 구는 중국경제 특구 중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하는 정책구역, 자유항으로 발전될 전망이다.


4. 연해개방구

1985년 중국 국무원은 長江 삼각주 (江蘇省의 蘇州, 無錫, 常州 지구와 浙江省의 嘉興, 湖州로 구성), 珠江 삼각주 (廣東省 남부의 廣州, 佛山, 江門, 中山, 심천시와 惠州를 포괄), 東南 (민남) 삼각주 (福建省 동남부의 厦門, 장주, 泉州 등 홍콩, 마카오와 인접지역)를 연해 경제개방구로 지정하였다.

1988년 중국 발해만 연안개발전략의 주요 거점지구로서 요동반도 및 산동반도의 전지구를 연해개방지구로 확대하였으며 종래의 개방지대를 확대하였다. 그 결과 연해의 288市, 縣 면적 32㎢, 인구 1.6억의 지역이 개방지대가 되었다. 연해개방지역에 투자한 기업은 개방도시와 같은 우대를 받게 되며, 우대조건은 농촌지역에까지 확대 적용된다.


5. 경제기술개발구, 하이테크 산업개발구 등 각종 개발구(국가급 122개)

국무원이 승인한 개발구 및 각급 인민정부에서 승인한 개발구 등 약 2,700여개의 개발구가 난립하였다. 그러나 1993년 8월부터 개발구 정리에 착수하여 1995년 말 현재 국가급 개발구 122개를 포함하여 성 정부에서 승인한 개발구 등 약 500여개만 남기고 여타 개발구는 강제로 폐쇄조치하였다.

수출공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개발구는 생산성 위주의 제조기업과 신기술, 신제품의 개발과 신흥산업의 발전을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외국인 투자시 심사수속, 토지임차, 인프라시설, 세제 등에서 지방정부의 배려를 받는다.


6. 경제기술개발구 (32개)

1984년 5월 중국정부가 개방정책을 일보 진전시켜 북에서 남으로 벨트모양으로 大連, 秦皇島, 天津, 煙台, 靑島, 連雲港, 南通, 上海, 寧波, 溫州, 福州, 廣州, 湛江, 北海의 14개 연해 도시를 개방하였다.

이들 도시에서는 특구에 준하여 외자도입과 기술도입 등의 대외경제활동의 자주권이 부여되고, 투자한 기업, 외국인, 화교 등에 대한 우대 조치를 베푸는 것이 인정되었다. 또 이들 도시에는 일정구역을 구획하여 경제 기술개발구를 설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경제기술개발구는 특구와 같이 독립된 행정구는 아니지만 해당 시 정부의 직접지도 관할하에 개발구 관리 위원회가 행정관리를 담당 하고 기술의 개발, 신 산업의 발전을 목표로 하는 구역이다.

경제기술개발구에서는 공업생산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 하여 외국투자가의 기업소득세, 지방소득세, 수입관세, 공상통일세, 수출관세, 건물부동산세 등의 감면, 재투자우대, 이윤 해외송금상의 편의 등의 조치를 부여하고 있다.

경제기술 개발구 이외의 구시가에 있어서도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면 (예를 들면 기술, 지 식집약형 혹은 3천만 달러 이상의 프로젝트 등) 면세 등의 조치가 주어지고 있다. 추가적으로 1992 ~ 93년 16개 도시 (하얼빈, 장춘, 瀋陽, 영구, 곤산, 항주, 숙산, 온주, 복청융교, 동산, 혜주대아만, 관주남사, 무호, 무한, 중경)에, 1994년에는 北京, 우루무치에 경제기술개발구를 개설하였다.


7. 국가 하이테크 개발구 (52개)

제 8차 5개년 계획에서 2000년까지의 임무의 하나로서 「과학기술과 교육사업의 발전을 중요한 전략적 지위로 두고 주로 과학기술의 진보와 노동자의 자질향상에 의거한 경제성장으로 궤도를 수정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임무에 따라 국무원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1988년에 베이징시 산업개발실험구를 인가하였으며, 1991년 3월에 베이징을 포함하여 전국에 27개의 국가 하이테크개발구(무한, 남경, 瀋陽, 天津, 서안, 성도, 위해, 중산, 장춘, 하얼빈, 장사, 복주, 廣州, 합비, 중경, 항주, 계림, 정주, 란주, 석가장, 제남, 上海, 大連, 심천, 하문,해남)를 인가하였다.

이는 기존의 주요 시가지의 연구학원 지역에 설치하고 그 지역의 대학과 연구기관이 가진 기술의 산업화를 촉진하고 하이테크 산업의 진흥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1992년 전국에 추가로 25개의 개발구 (소주, 무석, 상주, 불산, 혜주, 주해, 위방, 치박, 곤명, 남창, 태원, 남녕, 우루무치, 포두, 번양, 주주, 낙양, 대경, 보계, 길림, 면양, 보정, 안산, 靑島 등)가 설립되어 합계 52개소가 되었다.


8. 보세구 (13개)

1990년 上海외교구에 최초로 설립되었으며 1991 ~ 92년 12개 (天津, 심천복천, 사두각, 大連, 廣州, 장가항, 해구, 하문, 복주, 영파, 靑島, 산두 등)가 설립되었다.


9. 변경경제합작구 (14개)

1992년 흑하, 수분하, 훈춘,만주리, 이영, 박락, 탑성, 임상, 동흥, 완정, 서려, 하구, 이련호특, 단동 등 지역에 12개에 개설되었다.


10.旅行渡假區 (11개)

1992년 大連금사탄, 靑島석노인, 강소태호, 上海황시도, 항주지강, 복건무이산, 복건미주도, 廣州남호, 곤명진지, 북해은탄, 해남삼아아용만 등에 설립되었다.


11.내륙의 개방정책

長江연안 5개방도시와 내륙성도는 1992년 「개혁·개방 가속」의 열기 속에서 중국의 대외개방을 연해에서 내륙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시책이 계속 나왔다.

첫째는 長江연안의 5도시 (蕪湖, 九江, 武漢, 岳陽, 重慶)의 개방이다. 長江의 출구인 샹하이에서는 浦東開發區의 건설이 진행되고 있고 長江 상류에서는 총공비 570억元 이라는 거대한 三峽댐 건설이 착수되고 있으며, 이 양 프로젝트를 계기로 노후도시를 대외개방하고 활성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5도시 중 武漢, 重慶, 蕪湖의 3도시에서는 이미 경제기술개발구의 설치가 인가되어 있다.

둘째는 주요 省都의 개방이다. 우선 북경, 연안에서 가까운 哈爾濱, 長春, 呼和浩特, 石家莊, 그리고 내륙지역의 활발화를 도모할 목적으로 太原, 合肥, 南昌, 鄭州, 長沙, 成都, 貴陽, 西安, 西寧, 銀川이 개방되었다.

이들 지역에 대한 국무원의 정책을 보면 개방도시의 대외경제협력의 권한을 확대한다, 개방도시가 국외의 선진기술과 관리경험을 도입하여 노후 기업을 개조하고 근대적 농업을 개발하는 것을 지원한다, 외자의 도입을 장려하고 외자기업에 대한 우대조치를 실행한다, 국무원의 허가를 얻어 경제기술개발구를 설치할 수 있다.

휴우~ 꽤 힘드네요 중국 역사 공부 열심히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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