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덕대왕 신종이 세워 진 시기
1. 시대 통일신라시대
2. 성덕대왕 신종의 아름다운 과 멋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3. 성덕대왕 신종의 의미
우리나라 최대의 범종이자 정교한 세부 장식과 아름다운 종소리를 간직한 한국 범종 최고의 걸작.
종에 새겨진 비천상 사이 두 곳에 종의 내력과 만든 이들, 글쓴이 이름이 새겨진 종명이 있어 신라사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있습니다. 또한 화려하게 새겨진 문양과 그 새긴 방법은 신라를 대표하는 종이라고 할만하지요.
4. 성덕대왕 신종이 씌이는 곳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보시면 의식법구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5. 성덕대왕 과학적인점
맥놀이 현상과 음통의 영향으로 신비하고 아름다운 종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맥놀이 현상-두개의 다른 파장을 가진 진동이 만나면서 소리가 일정한 주기로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현상으로, 맥놀이가 1~3초에 한 번 정도로 반복될 때에 가장 좋은 소리가 납니다.
음통: 종을 칠 때에 나는 쇠 부서지는 소리를 없애 주고 소히가 멀리 퍼질수 있도록 합니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국보 제29호로 지정.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국립 경주 박물관에 소장.
한국 최대의 종으로, 에밀레종또는 봉덕사(奉德寺)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독특한 점은 위에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다는 것으로,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종에 새겨진 비천상 사이 두 곳에 종의 내력과 만든 이들, 글쓴이 이름이 새겨진 종명이 있어 신라사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있습니다. 또한 화려하게 새겨진 문양과 그 새긴 방법은 신라를 대표하는 종이라고 할만하지요.
종명(鐘銘)에 의하면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이 그의 아버지 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뒤를 이어 771년(혜공왕 7)에 구리 12만 근(27t)을 들여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했다고 합니다.
또한 종명을 지은 이는 김필월(혹은 김필해)이라고 하네요. 그의 직명(한림랑)이나 왕이 종명의 지은이로 지명한 걸 볼때 손꼽힌 문장가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형태는,
[종 모양은 입 부분에 당초문으로 된 띠가 있으며, 당초문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화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렀다. 종 위에는 웅건한 모습의 용(龍)이 음관(音管)을 감고 있다.
몸체에는 당초문을 두른 견대(肩帶)가 있고 그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 안에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연꽃을 넣었으며, 그와 대칭으로 보상화무늬와 연꽃으로 된 당좌(幢座)가 있다. 비천상(飛天像)은 양각된 종명을 사이에 두고 2구씩 상대한 4구가 연화좌(蓮花座) 위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다. 그 주위로 보상화(寶相華)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742년 부터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신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자 해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봉덕사에 달았다가 조선시대인 1460년 수해로 봉덕사가 없어지자 영묘사로 옮겼으며, 다시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였다. 1915년 8월 종각과 함께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높이는 3.75미터, 입 지름은 2.27미터, 두께는 11~25센티미터이다.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실측한 결과 18.9톤이다.
♠ 성덕대왕 신종의 가치(가치와 의의)
성덕대왕 신종은 신라시대의 종으로서 국보 제 29호이며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종의 높이가 3.33m, 입 지름이 2.27m, 두께가 2.4cm에 달한다. 한국 종의 형식을 빠짐없이 갖춘 우리나라 최대의 종이며 섬세하고 우아한 무늬와 뛰어난 쇠를 다루는 기술은 8세기 중엽 신라의 예술을 대표하는 명작이라 할 수 있다.
♠ 성덕대왕 신종의 탄생(역사적 사실)
한국 최대의 종으로,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며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기 때문에 봉덕사 종이라고도 한다. 신라 35대 경덕왕이 그의 아버지 33대 성덕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거하자 그의 아들 혜공왕이 뒤를 이어 771년(혜공왕 7)에 구리(Cu) 12만 근(72t) + 주석(Sn) 25%를 들여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던 것을 1460년(세조 6) 영묘사에 옮겨 걸었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으므로 현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 하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 성덕대왕신종의 특징(특징)
성덕대왕신종의 특징은 장중하면서도 맑은 종소리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에밀레종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로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세번 타종되었다. 이 종이 만들어진 770년 12월 14일 이후 그것이 종각에 걸려 있는한 변함 없이 서라벌에서 울려온 종소리였다. 낮게 내려앉은 저음이지만 그 맑은 여운은 긴 파장을 이루며 한없이 퍼져 나가는 그 소리는 장중하면서 맑은 소리였다.사람들은 이 소리를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다."고 하였다.
♠ 성덕대왕신종의 전설(전설)
성덕대왕신종이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그 여운의 소리가 '에밀레' 같고, 그 뜻은 "에밀레라"즉 "에미 탓으로"와 같기 때문이다. 내용인 즉 경덕왕이 대종을 만들기 위한 성금을 모으기 위하여 전국에 시주 중을 내보냈을 때 어느 민가의 아낙네가 어린애를 안고 희롱조로 "우리 집엔 시주할 것이라고는 이 애밖에 없는데요"라며 스님을 놀렸다는 것이다. 종 만드는 일에 계속 실패를 거듭하자 일관이 점을 쳐서 이것은 부정을 탄 것이니 부정을 씻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갈래로 그 부정의 원인 알아본 결과 그 아낙네 탓으로 단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애가 희생이 되어 "에밀레"로 되었다는 얘기이다. -
♠성덕대왕신종의 모양
종 모양은 입 부분에 당초무늬로 된 띠가 있으며, 당초 무늬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꽃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렀다. 종 위에는 웅건한 모습의 용(龍)이 음관(音管)을 감고 있다. 몸체에는 당초무늬를 두른 견대(肩帶)가 있고 그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 안에 각각 9개씩 모두 36개의 연꽃을 넣었으며, 그와 대칭으로 보상화 무늬와 연꽃으로 된 당좌(幢座)가 있다. 비천상(飛天像)은 양각된 종명을 사이에 두고 2구씩 상대한 4구가 연화좌(蓮花座) 위에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공양상(供養像)이다. 그 주위로 보상화(寶相華)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비천상 사이의 2개처에 이 종의 유래와 종을 만들 때 참가한 사람 및 글쓴이의 이름이 적힌 종명이 있어 신라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