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 봉사공파에 대해 여쭙니다.

경주최씨 봉사공파에 대해 여쭙니다.

작성일 2022.09.02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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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부터 저는 경주최씨 봉사공파 00대손으로 교육받았는데
최근 경주시립도서관 족보자료를 보니 월성최씨 봉사공파 00대손에 저의 이름이 있습니다.

1. 경주최씨와 월성최씨는 같은 말인가요?
2. 월성최씨는 시조가 최진립이고 경주최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월성으로 정하였다는데
   뿌리는 경주최씨이기에 혼용하는 것인지,
3. 봉사공파는 시조가 누구이며 어느 파에서 분파한 것인지요?
   위 족보자료를 보면 18대 진망할아버지가 시조로 보입니다만.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님의 1:1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경주최씨 봉사공파에 대해 여쭙니다.

어릴때 부터 저는 경주최씨 봉사공파 00대손으로 교육받았는데

최근 경주시립도서관 족보자료를 보니 월성최씨 봉사공파 00대손에 저의 이름이 있습니다.

1. 경주최씨와 월성최씨는 같은 말인가요?

답변1 : 경주 최씨 이전에 월성 최씨이고, 다시 변하여 경주 최씨로 변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2. 월성최씨는 시조가 최진립이고 경주최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월성으로 정하였다는데

뿌리는 경주최씨이기에 혼용하는 것인지,

답변2 : 경주 최씨의 시조 최진립 공은 잘 모르겠으며, 시조는 최치원 공입니다.

3. 봉사공파는 시조가 누구이며 어느 파에서 분파한 것인지요?

위 족보자료를 보면 18대 진망할아버지가 시조로 보입니다만.

답변3 : 사성공파(司成公派)에서 분파(分派)한 봉사공파(奉事公派)는 즉(卽) 시조가 아닌, 파조(派祖)이시고, 진흥 파(震興 派)라 합니다.

답변 : 님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에서 분파한 봉사공파 이시군요.

그러나 경주 최씨 사성공파 항렬표에서 찾아본 결과로는,

경주 최씨 사성공파 항렬표 돌림자에 의해 성함을 지으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문도 모르겠으며 누구를 기준할 수가 없습니다.

조부님 : ?세 ?자 돌림이라 하셨고,

부친님 : ?세 ?자 돌림이라 하셨으며,

님은 : ?세손 ?자 돌림이라 하셨습니다.

님은 경주 최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행합니다. 이유는 한문에는 그 만큼 깊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경주 최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에 대(對)하여

1. 경주 최씨(慶州 崔氏) 시조(始祖) : 최치원(崔致遠)

2. 경주 최씨(慶州 崔氏) 유래(由來) :

시조(始祖) 최치원(崔致遠)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24세손(世孫)이며, 신라(新羅) 말기(末期)의 대문장가(大文章家)입니다. 최치원(崔致遠)은 869년(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9년) 12살의 나이로 당(唐)나라에 유학(儒學)을 간지 5년 후 17세에 과거 급제(及第)하여 승무랑시어사에 이르고 자금어의를 하사 받았으며, 제도행영 병마도총 고변의종사관을 역임(歷任)하고 귀국(歸國)하여 시독 겸(兼) 한림학사(翰林學士) 병부시랑 지서서감이 되었으나 외직을 원하여 대산, 천령, 부성 등지의 태수를 역임(歷任)하고 아손이 되었지요. 그 후 난세(亂世)를 비관하여 전국(全國)을 유랑(流浪)하다가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은거(隱居)하며 수도하다 63세로 생을 마쳤다.

그는 한시문집(漢詩文集)으로 '계원필경(桂苑筆耕)' 등의 명저(名著)를 남기었다.

3. 경주 최씨(慶州 崔氏) 인물(人物)

- 최승로(承老) :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역임하였습니다.

- 최항(沆) : 고려 현종 때 평장사를 지냈습니다.

- 최제우(濟愚) : 동학의 창시자로 유명합니다.

- 최시형(時亨) : 동학의 제2대 교주입니다.

- 최익현(益鉉) : 한말(韓末)의 거유(巨儒)로, 의병장(義兵長)으로 활약(活躍)하다가 단식(斷食)으로 일생(一生)을 마쳤습니다.

- 최준(浚) : 경주시(慶州市) 교동에서 '최부잣집'으로 이름났습니다. 이 '최부잣집'은 12대 만석(萬石), 10대 진사(進士)로 유명합니다.

최씨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와서는 퇴조를 보여 겨우 문과에 42명을 배출(輩出)하였을 뿐 상신, 대제학(大提學) 가운데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시조(始祖)인 최치원(崔致遠)의 15세손(世孫) 최익대(崔益大)로, 그는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歷任)하였으나 경종 때 왕세제 책봉(冊封) 문제(問題)에 관련(關聯)하여 당시(當時) 노론(老論)의 영수였던 김창집(金昌集)이 화(禍)를 입은 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어 은거(隱居)하다가 경기도(京畿道) 수리산에서 변관명(變貫名)한 것으로 전(傳)해진다. 영조(英祖) 즉위(卽位) 후(後) 최익대(崔益大)는 사면(赦免)되었고, 그의 후손(後孫)들은 전국(全國)에 흩어져 살게 된다.

4. 경주 최씨(慶州 崔氏) 과거(科擧)급제자(及第者) (조선시대)

- 최경지(崔敬止) : 문과(文科) 세조6년(1460) 별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 최관(崔灌) : 문과(文科) 성종5년(1474)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최벽(崔璧, 1762 壬午生) : 문과(文科) 정조7년(1783)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 최유종(崔有悰, 1762 壬午生) : 문과(文科) 태종14년(1414) 친시 을과(乙科)

- 최응각(崔應珏, 1846 丙午生) : 문과(文科) 고종3년(1866) 평안도도과 을과(乙科)

- 최덕명(崔德明, 1834 甲午生) : 문과(文科) 고종3년(1866) 평안도도과 병과(丙科)

- 최중태(崔重泰, 1656 丙申生) : 문과(文科) 숙종12년(1686) 별시 병과(丙科)

- 최 예(崔汭, 1371 辛亥生) : 문과(文科) 태조2년(1393)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 최정진(崔廷鎭, 1769 己丑生) : 문과(文科) 순조3년(1803) 별시 병과(丙科)

- 최익현(崔益鉉, 1823 癸未生) : 문과(文科) 철종6년(1855) 별시 병과(丙科)등

모두 66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문과 42명, 무과 89명, 사마시 166명, 역과 86명, 의과 54명, 음양과 15명, 율과 14명, 주학 203명)

경주 최씨(慶州 崔氏)는 신라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로 하고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한다. 최치원은 12세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18세에 빈공과에 급제하여 승무랑 시어사 점수봉(承武郞侍御史內供奉)을 지냈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워 외직을 자청하여 태산(太山)[지금의 태인], 함양(咸陽), 부성(富城)[지금의 서산] 등지의 태수를 지냈다. 그 후 「시무10조(時務十條)」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자 난세를 비관하며 전국을 유랑하다가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생을 마쳤다. 저서로 한시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이 있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는 최치원(崔致遠) 이후(以後) 26파로 분파(分派)되었으며 그중 관가정 청파(觀稼亭淸派),

사성공 예파(司成公汭派), 화숙공 현우파(和淑公玄祐派), 광정공 단파(匡靖公鄲派), 정랑공 호파(正郞公灝派), 충렬공 광위파(忠烈公光位派) 등 6개 파가 주축을 이룬다. 최치원·최언위(崔彦撝)와 함께 3최로 불린 최승우(崔承祐)는 890년(진성여왕 4) 당나라에 건너가 3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고, 최언위는 885년(헌강왕 11)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집사성시랑에 올랐으며 고려 건국 후 태자사부(太子師傅)·문한(文翰)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신라 말에 원보(元甫)를 지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 최승로(崔承老)는 당대의 명신이자 뛰어난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국가의 전반적인 정책을 정리한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를 상소하여 고려 왕조의 기초를 확립했다.

사성공파 최진립(崔震立)은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하고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西生浦)에서 왜군을 섬멸하였다. 권율(權慄)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고, 병자호란 때 용인 험천에서 청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보국안민의 대도를 깨닫고 인내천을 교리로 하는 동학을 창시하였으나 1864년(고종 1)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동학 제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고, 1894년(고종 31)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사형되었다. 1907년(순종 1) 고종의 특지로 신원(伸寃)되었다.

5. 司成公諱汭派(사성공휘예파) 분파된 파들,

파명(派名) 외(外)는 아래를 참조(參照)

낙선당 상유 파(樂善堂 尙柔派)

육의당 계종 파(六宜堂 繼宗派)

참봉공 봉천파(參奉公 奉天派)

참봉공 삼노파(參奉公 三老派)

참봉공 삼각파(參奉公 三恪派)

참봉공 인원파(參奉公 仁元派)

봉사공 진흥파(奉事公 震興派)

참사공 진망파(參事公 震望派)

정무공 진립파(貞武公 震立派)

사직공 삼고파(司直公 三顧派)

판관공 삼달파(判官公 三達派)

판관공 득경파(判官公 得涇派)

선략공 상부파(宣略公 尙孚派)

정무공 진망파(貞武公 震望派)

금위공 삼준파(禁衛公 三俊派)

학생공 진록파(學生公 震祿派)

진사공 병천파(進士公 秉天派)

구계공 신린파(龜溪公 臣隣派)

주부공 진곤파(主簿公 震坤派)

참군공 희유파(參軍公 希愈派)

현감공 희철파(縣監公 希哲派)

사감공 득하파(司監公 得河派)

통례공 득정파(通禮公 得汀派)

조선태조 2년에 사마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거쳐 대사성에 올랐으며 청백리에 록선 되다.

낙선당파우사일파(樂善堂派又泗日派)

배반일파우종파(培盤一派又宗派)

배반이파우명암파(培盤二派又銘岩派)

배반삼파우우박파(培盤三派又愚朴派)

배반사파우장락공파(培盤四派又掌樂公派)

배반오파우포석파(培盤五派又鮑石派)

배반육파우방내파(培盤六派又芳內派)

배반칠파우울진공파(培盤七派又蔚珍公派)

배반팔파우외와파(培盤八派又外瓦派)

백사공파(白沙公派)

석동파(石洞派)

강정파우참판공파(江亭派又參判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내금위공파(內禁衛公派)

현곡일파우종파(見谷一派又宗派)

현곡이파우서파(見谷二派又西派)

현곡삼파우동파(見谷三派又東派)

현곡사파우참의공파(見谷四派又參議公派)

현곡오파우통정공파(見谷五派又通政公派)

현곡육파우구암파(見谷六派又龜岩派)

현곡칠파우군수공파(見谷七派又郡守公派)

현곡팔파우신녕파(見谷八派又新寧派)

현곡구파우남산파(見谷九派又南山派)

활천파우봉사공파(活川派又奉事公派)

이조일파우종파(伊助一派又宗派)

이조이파우서파(伊助二派又西派)

이조삼파우악당파(伊助三派又樂堂派) 교리파(校里派)

이조사파우신을파(伊助四派又莘乙派)

이조오파우사리파(伊助五派又士里派) 륜원파(輪院派)

효자공파(孝子公派)

내덕파(內德派)

동산파(東山派)

판관공파(判官公派)

주원파우종사랑공파(周院派又從仕郞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6. 사성공파 1세 최예(諱汭) = 경주 최씨 12세

공의 휘는 예(汭)이다.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최치원)의 12세이시며 5세 선지(諱善之)의 직계손인 고려 문과 참판을 하신 홍재(諱弘載)의 2자이시다.

(참고1자 : 諱灝-정랑공파, 3자 : 諱漢-송오공파)공은

공민왕 22년 癸丑(1373)에 출생하시다.공은 이 태조 개국 2년 癸酉(1393)년 21세의 나이에 조선최초의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하였고 주서(정7품), 선공감정(정3품 오늘날 건설부차관), 병조좌랑(兵曹佐郞), 면천군수,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 등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청백리로도 명성을 날리셨고 세종 16年 甲寅年(1434)에 享年 62세로 卒하시었다. 묘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활천(活川)리 능주봉산 아래 건좌에 있다.배위는 金씨인데 고려 시중이신 관의(寬毅), 의 여식이며, 숙인이시며, 丙寅年(1446)에 壽 74세로 卒하시니 묘는 공과 함께 부장하였으며 후손들이 매년 음력 10월10일 묘제을 지내고있으며 재숙은 전천재(箭川齌)라고 한다.

흉년 때 곡식 창고를 개방하다

흉년은 없는 자에게는 죽음과 절망이었지만, 가진 자에게는 부를 엄청나게 증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그런 부자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최국선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거라’…”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쓴 경제학자 전진문 박사는 최부잣집이 흉년 때 경상북도 인구의 약 1할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고 추산했다. 보통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인 3, 4월에는 한달에 약 100석의 쌀을 나눠줬으므로 1만명 정도가 쌀을 얻어갔다고 가정한다. 어떤 때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수도이던 경주는 그렇게 1천년의 저력에 어울리는 한 부자 가문을 냈다. ‘경주 최부잣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가문은 조선조 중엽 진취적인 기상으로 농업을 일궈 만석꾼의 지위을 이룩한 뒤 10여대 300년 동안 이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고 선하게 활용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비록 이 집안은 다른 나라의 거대부호 가문처럼 부의 규모가 크지도 않고, 다른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성공하지도 않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평가받을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1). 모두를 살리는 부: 부의 생성과 축적 그리고 활용에서 누구를 해치지 않고 각 주체를 가능하면 모두 살리는 부를 구현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 책임)를 구현한 가문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2). 경제 외적 노하우(know-how): 부를 지켜내는 동력으로서 경제 외적 노하우를 대단히 중요하게 평가했다. 당대만의 성공이 아니라 긴 성공을 위해선 자기와 가문을 제대로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고 대비했다.

3). 가문의 장기 생존과 발전: 가문의 동질성과 순정성을 10여대 300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드물다. 더구나 전란과 민란, 외침, 식민통치, 체제 대립 등으로 점철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적 부와, 선행을 계속하는 명가문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4). 후손 교육의 성공과 그 비결로서의 기록: 드물게 가문의 도덕률, 처세술, 경영관 등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겨 후손을 교육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2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노하우 자체의 후대 전승이다. 다른 하나는 그 가문의 후손을 제대로 교육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최부잣집 300년 성공의 결정적 비밀인 교육은 성공하지 못하거나 덜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5).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마지막 승부: 일제와 해방 이후 격동기에 가문은 역사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과 대학 설립 자금으로 모두 돌린다. 300년 부를 마지막으로 자신과 가문이 아닌 민족을 위해 던진 뒤 깨끗하게 부자가문에서 내려온 것이다.

전재산을 털어 대학 세워

경주 최부잣집은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먼저 전진문 박사의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중심으로 가문의 역사를 재구성해보자.

“최부잣집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에 속한다.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마량첨사, 가덕첨사를 거쳐 경흥부사, 통정대부가 됐다. 병자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그의 셋째아들 최동량이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킨다. 그 방식은 형산강 상류의 개울이 합쳐지는 개울가에 뚝을 쌓아 대대적으로 조성한 농토에 소작인과 소출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소작인들이 선호하는 선진적인 이 병작제의 적용으로 마을 사람들이나 노비들은 적극적으로 최씨네 땅 개간에 협력했다. 농토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나아가 집안사람들은 스스로 농사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사람의 똥이나 오줌을 이용한 비료법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소출을 높였다. 이와 함께 이앙법을 도입해 적은 인원으로 넓은 논을 경작하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3대인 최국선에 이르면 가문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 가문으로 성장한다…. 집안은 대대로 근검절약을 근본으로 삼되 가난한 이와 손님들을 후대했으며, 지나치게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 가훈에 따른 선행으로 가문은 동학혁명이나 다른 민란 때도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일제에 나라를 배앗긴 뒤 최진립의 11대손인 최준은 독립운동 단체에 참가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뒤 최준은 대학을 설립해 국가를 이끌고 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인생의 목표를 위해 전재산을 털어 대구대학과 계림대학을 세운다(두 대학이 합해져 영남대학이 된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의 부는 이렇게 해서 사실상 모두 교육사업으로 승화돼 돌아간다.”

경주 최부잣집은 그 역사적 전통만큼이나 가훈으로도 유명하다.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생성된 가훈은 그만큼 절절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효과와 교육적 효과도 높았다. 6개조로 이뤄진 가훈을 한번 보자.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이 가훈은 파시조인 정무공 최진립의 유훈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의 외침 때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 최진립은 그러나 병자호란 때 억울하게 귀양을 간 적이 있다. 이때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당부한다. “사람이 왕후장상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상민으로선 부나 가문을 일구기 어렵다고 보고 진사까지만 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교육을 받지 않으면 부나 가문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2). 재산은 1만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후손은 부에의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정신수양에 더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나아가 경제적으로도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소작률을 낮추는 등 저절로 부의 혜택이 가문 밖으로 자연스럽게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인심을 얻고 선행을 널리 베풀라는 원칙의 구체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중요한 것은 부의 획득에서 남의 불행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적 태도이다. 이웃과 함께 가지 않는 삶은 오래가지 않고 무너진다는 철학을 신봉하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5).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근검절약이 만사의 기본이라는 철학을 이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가르치기는 어렵다. 이렇게 교육받은 살림의 주체들은 자연히 낭비나 실패가 적다. 나아가 그런 환경 속에서야 제대로 된 후손의 경제교육, 인간교육도 나올 수 있다. 이 한 가지 구체적 가르침이 실로 300년 부의 기초가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인심을 잃으면 부자 가문은 죽는다. 사람이 없으면 부는 생성될 수조차 없다. 사성파 2대조 최동량도 마을 사람과 이웃 동네 사람들, 노비들이라는 노동력이 없었다면 그 넓은 농토를 새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인심을 잃었다면 그 숱한 변란의 세월 가문은 여러 번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실제로 11대조 최현식 때에 가문은 활빈당의 무장 공격을 받았지만 누대에 걸친 선행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두 가지 물음을 상상해본다.

①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부자들을 되살려서 앞으로 100년간 가문 경쟁을 시킨다면 누가 가장 성공적일까?

② 그 부자들을 되살려서 앞으로 500년간 가문 경쟁을 시킨다면 누가 가장 성공적일까?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선 많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로스차일드? 엘리자베스? 록펠러? 빌 게이츠? 그러나 두 번째 물음에선 당연히 경주 최부잣집이 메달 후보에 들어가지 않을까?

존경받는 부를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경주 최부잣집은 ‘제대로 된 부자의 길’을 비춰주는 희망의 빛으로 우리 곁에 돌아와 있다.

7. 경주 최씨(慶州 崔氏) 사성공(司成公) 예(汭) 파(派) 항렬표(行列表)

세(世)

28

29

30

31

32

항렬자

(行列字)

석(錫)

현(鉉)

홍(洪)

해(海)

영(泳)

병(秉)

식(植)

상(相)

병(炳)

환(煥)

기(基)

채(埰)

규(圭)

세(世)

33

34

35

36

37

항렬자

(行列字)

기(錡)

진(鎭)

호(鎬)

준(浚)

수(洙)

형(涥)

주(株)

영(榮)

약(約)

희(熙)

용(容)

재(載)

용(瑢)

준(埈)

세(世)

38

39

40

41

42

항렬자

(行列字)

진(鎭)

명(銘)

전(銓)

태(泰)

원(源)

하(河)

모(模)

근(根)

림(林)

열(烈)

홍(烘)

효(孝)

균(均)

세(世)

43

44

45

46

47

항렬자

(行列字)

종(鍾)

록(錄)

낙(洛)

한(漢)

규(袿)

화(和)

8. 경주 최씨(慶州 崔氏) 인구수(人口數)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 최씨는

2000년에는 총 304,722가구 976,82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경주최씨중에 경제공파라는 파가 있나요?

제가 경주 최씨 경제 공파로 알고 있는데 갑저기 궁금해져 질문합니다. 안녕하십니까?... 경제공파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경주최씨 사성공파 32대손입니다

제가 경주최씨 사성공파 32대손입니다 제 할아버지 성함이 아마 *순 이실텐데 고조할아버지 성함이 어떻게될까요.... 仁元派) 봉사공 진흥파(奉事公 震興派) 참사공 진망파...

경주최씨 광정공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경주최씨 광정공파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를 요청합니다. 님의 1:1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경주최씨 광정공파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를 요청합니다. 답변 : 아래는 경주 최씨...

경주최씨 사성공파 학렬

경주 월성 최씨 사성공파 18~21대손 학렬이 어떻게 되나요??... (丙科) - 예(崔汭, 1371 辛亥生) : 문과(文科) 태조2년... 활천파우봉사공파(活川派又奉事公派) 이조일파우종파...

경주최씨 사성공파 항렬

경주최씨 사성공파 항렬 문의드립니다 현재 할아버지가... 활천파우봉사공파(活川派又奉事公派) 이조일파우종파...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선 많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경주최씨 사성공파 유명한분

경주최씨 사성공파 쓰는분 중에 유명한분(정치, 연예인... (丙科) - 예(崔汭, 1371 辛亥生) : 문과(文科) 태조2년... 활천파우봉사공파(活川派又奉事公派) 이조일파우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