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전통 의식주

프랑스 전통 의식주

작성일 2021.09.2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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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전통 의식주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그리고 그 문화가 발달된 이유도 알려주시면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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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프랑스 전통 의식주

프랑스의 전통 의식주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그리고 그 문화가 발달된 이유도 알려주시면 감사해요

답변 : 아래는 프랑스의 의식주에 대하여 올려드립니다.

프랑스(FRANCE)에 대(對)하여

1.프랑스(FRANCE) 국기

프랑스 국기의 뜻과 의미

트리컬러(Tricolor)로 불리는 프랑스의 국기는 자유·평등·박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삼색기는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바스티유를 습격한 다음날인 7월 15일 국민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라파예트가 시민에게 나누어준 모자의 표지 빛깔에서 유래하였다. 나폴레옹 1세가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후 한때 사라졌다가 1830년 다시 라파예트에 의해 등장하였다.

원래는 깃대 쪽에 빨강이 있었는데, 1794년 국기로 공식 제정하면서 현재의 배열로 바뀌었다. 원래는 3색을 시각적으로 같은 크기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3색의 비율을 30:33:37로 불균등하게 나누었는데, 1946년 3등분으로 고쳤다.

절대왕조(絶對王朝)에 대항하여 일어난 시민혁명을 표상한 이 삼색기는 국민주권(國民主權)의 상징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그 후 유럽에서는 절대왕조가 붕괴되고 속속 시민국가가 탄생하였는데, 이렇게 탄생된 시민국가의 국기 중 대부분은 프랑스 3색기의 영향을 받아서 제정된 것인데, 아일랜드의 국기가 그 좋은 예이다.

일찍이 영국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을 계속해 오던 아일랜드에서는 1848년 젊은 혁명지도자 T.F.메가가 프랑스로부터 녹색 ·흰색 ·오렌지색의 3가지 빛깔로 된 3색기를 가지고 돌아와서 국기로 하자고 주장한 일이 있으며, 그 해 프랑스의 2월혁명을 축하하면서 프랑스의 3색기와 함께 이 기를 전국에 게양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이 기는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사용되어 오다가 1937년 독립선언과 함께 정식으로 국기가 되었다. 녹색은 가톨릭, 오렌지색은 프로테스탄트, 흰색은 양자의 결합과 우애를 표시한다고 한다.

그 밖의 나라에서도 그 나라 전통의 빛깔이나 국민들이 좋아하는 빛깔을 이용하여 3색기를 만들거나, 아니면 그 나라 독자적인 도안에다 프랑스 국기의 3색인 파랑 ·하양 ·빨강의 빛깔을 사용해 국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프랑스 3색기는 유럽뿐만 아니라 중근동(中近東) 및 중남미(中南美) 여러 나라에까지 크게 영향을 끼쳐 19세기 중기와 후기에는 식민 본국에 대한 독립투쟁의 상징으로서 3색기의 3가지 빛깔을 가지고 자국의 국기를 만든 나라들이 많다.

아시아에서도 프랑스 3색기의 영향을 받았는데, 타이가 그 좋은 예이다. 타이는 근대화된 많은 나라들이 3색기를 사용하고 있는 데 자극을 받아 종래까지 사용해 오던 국기 대신 파랑 ·하양 ·빨강의 3가지 빛깔로 된 현재의 국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한편, 신흥 아프리카 제국(諸國)의 국기들도 3색기를 가지고 있는 근대시민국가 또는 독립 전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본국 국기의 영향을 받아 제정된 것들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는 3색기에 속하며, 실제로도 그들 대부분의 국기들은 3색기로 불리고 있다. 페루의 국기는 빨강 ·하양 ·빨강의 2가지 빛깔이지만 도안이 크게 3부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3색기라고 한다. 1794년제정

2. 프랑스(France)

유럽 대륙의 서부,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에 있는 나라.

프랑스 : 위치 서부 유럽

프랑스 : 면적 54만 3965㎢

프랑스 : 인구 5977만 3000명(2003)

프랑스 : 인구밀도 109.9명/㎢(2003)

프랑스 : 수도 파리

프랑스 : 정체 공화제

프랑스 : 공용어 프랑스어

프랑스 : 통화 유로화(Euro)

프랑스 : 환율 0.90Euro = 1$(2003.9)

프랑스 : 1인당 국민총생산 2만 2730$(2003)

프랑스 : 나라꽃 백합

3. 기후

프랑스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다양한 기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동부나 산간 지방을 제외하고는 눈이 그리 자주 오지 않는다. 북부는 멕시코만의 난류의 영향으로 겨울에 비교적 온난한 기후를 보이며, 특히 겨울엔 영국만큼이나 비가 자주 온다. 한편 남부는 이탈리아나 스페인과 비슷한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비가 그리 자주 오지 않는다. 동부는 중부 유럽의 공기의 영향으로 겨울엔 매우 춥고 눈이 오며, 여름에는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가 이어진다. 연평균기온은 지중해안의 코트 다주르에서 15℃, 파리의 북방에서는 10℃ 전후이다. 기후의 연교차(年較差)도 크지는 않으나 동쪽으로 나감에 따라 내륙적이고 연교차는 20℃ 전후가 된다. 강수량은 산악부에서는 2,000㎜가 넘고 내륙에서는 500㎜ 전후이다.

4,우리나라와의 시차

8시간

5.인사말

(여행회화 - 만날때, 헤어질때,기타

감사합니다=Merci

사랑합니다=Je t'aime

bonjour

Salut

Au revoir

6. 프랑스에서 유명한 인물 & 그 이유

Jean-Jacques Goldman 가수, 작곡가

쟌다크

루이 16세

나폴레옹

이브 몽탕

Édith Piaf

7. 주요 자원및 생산물

넓은 국토와 다양한 기후, 농업에 적합한 토지로 인하여, 유럽에서 드문 농업생산국이 될 수 있었다. 지역마다 특산품으로 포도주, 레몬, 올리브 등을 생산한다. 가전 제품, 컴퓨터, 가구 등의 제작기술이 뛰어나며, 철광석을 캐는 등의 광업이 존재한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자동차, 기계, 의류, 화장품, 전자제품 등이 있다. 랑콤, 루이 뷔통, 샤넬등의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가 있다.

G7및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며, 관광지로 루브르 박물관, 퐁피두 센터, 에펠 탑, 리옹 시등이 유명하다.

프랑스의 자동차들은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르노(이 회사는 제1차 세계 대전당시 탱크를 개발했다) 등을 꼽을 수 있다.

8. 풍습, 생활의 특징

프랑스의 음식 문화는 영국다음으로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서양 문화에서는 가장 엄격한 식사 예절이 있다. 이 나라에서는 식기 소리를 크게 하는 것은 금물이다. 국민성은 현실적이고 검소하며 인생을 즐긴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애착심이 남다르다. 유럽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9. 우리나라와의 관계

조선 후기에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포함된 천주교신자들을 조선정부가 탄압(병인박해)하면서 외교문제가 되었고 이를 빌미로 프랑스군대와 조선군이 격돌하는 사건 - 병인양요- 이 일어났다. 이때 강탈당한 외규장각 문서 등 문화재의 반환문제는 현재도 미해결상태로 남아 있다.

조선후기에 국교를 수립했으나 1905년을사조약에 의해 양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는 인정하는 분위기여서 프랑스 조계지역의 경찰들은 김구주석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이유에서일 뿐,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전쟁때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파병했다. 파리는 한국의 군사정권시기에는 정치적 망명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였다. 현재 한국과 프랑스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10. 특별히 알리고 싶은내용 - 관광명소 역사적 사건

Opéra Garnier

Louvre박물관

Palais du Luxembourg

개선문

노틀담 성당

에펠탑

샹젤리제 거리

베르샤유 궁전

11. 세계 지도 속 위치

12. 프랑스의 역사

프랑스는 유럽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한 인류사를 지니고 있다.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최고 10만 년도 더 된 것으로, 프랑스 지방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정착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BC 1200년경에 켈트계 갈리아인이 라인 강 유역으로부터 현재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향해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BC 600년경에는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이 마실리아에 상업식민지를 건설했다. 현재의 남프랑스 지역에서 수세기 동안 번창한 많은 이오니아인 취락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이 식민지가 오늘날 마르세유로 발전했다. BC 121년에 시작된 로마인의 갈리아 정복은 BC 58~5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복으로 끝났다. 갈리아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철저히 로마화되었다.

로마가 쇠퇴하면서 갈리아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5세기말까지는 프랑크계 살리족(支族)이 루아르 강 북쪽 지역을 점령했고, 서고트족이 아키텐과 프로방스를, 부르군트족이 론 강 유역을 차지했다. 살리족은 6세기에 메로빙거 왕조의 영도하에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8세기에 이르러 메로빙거 왕조의 왕권이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갔는데, 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인 샤를마뉴는 9세기초 서유럽의 대부분까지 제국을 넓혔다. 그의 죽음은 제국의 분할을 야기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샤를마뉴 제국의 가장 서쪽에 해당하는 영토는 프랑키아 오키덴탈리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이 987년에 서거하자 위그 카페가 프랑키아 오키덴탈리스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카페 왕조는 처음에는 힘이 약했지만 1328년까지 존속했으며, 플랑드르·브르타뉴·부르고뉴·아키텐을 제외한 현대 프랑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328년에 프랑스의 왕위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갔으며, 이것이 백년전쟁(1337~1453)으로 알려진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촉발했다. 이 전쟁으로 발루아 가문은 프랑스의 왕가로 확고히 자리잡았고,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영지를 전부 상실했다. 15세기말 부르고뉴와 브르타뉴가 발루아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프랑스의 영토는 오늘날과 거의 같게 되었다.

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트운동이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일련의 종교전쟁과 내란을 야기했다. 프로테스탄트(위그노)와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의 전쟁은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에 파리에서 약 3,000명의 위그노교도가 학살당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뒤이은 혼란 속에서 부르봉 가문의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드 나바르( 앙리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결국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낭트 칙령(1598)을 공포하여 위그노교도에게 상당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17세기에는 추기경 리슐리외와 마자랭 같은 뛰어난 정치가들이 국왕을 보필하여 프랑스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부르봉 가문의 후기 왕들, 특히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호화로운 궁전을 꾸미고 태양왕을 자임함으로써 프랑스의 절대왕권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막대한 비용을 들인 해외원정이 연이어 실패한 결과 프랑스는 여러 개의 해외영토를 상실하고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1789년에 일어난 혁명은 왕을 몰아내고 '인권선언'을 발표했으며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렸다. 프랑스 혁명은 유혈사태를 거쳐 5인 총재(總裁)의 약체 정부가 들어서는 것으로 끝났다. 정권은 이내 나폴레옹에게 넘어갔는데, 나폴레옹은 1799~1814년에 처음에는 통령으로, 후에는 황제로 프랑스를 지배했다. 나폴레옹의 대대적인 군사원정은 1815년 그의 몰락과 함께 끝났다. 제한적으로 복고된 왕정은 짧은 공화정 기간(1848~52)을 제외하고는 1871년까지 계속되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의 패전으로 인해 제3공화정이 들어섬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프랑스는 1871년에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빼앗겼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이곳을 되찾았다.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한 후 비시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친독일 정권이 수립되었다 (→ 제2차 세계대전).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장군의 영도하에 '자유 프랑스'가 결성되었고,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1944년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이어 제4공화정하에 의회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제4공화국은 1950년대에 인도차이나에서 민족주의자 게릴라들을 상대로 한 값비싼 전쟁과 알제리를 비롯한 프랑스의 식민지들에서 대두한 민족주의 운동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8년 공직생활로 복귀한 드골은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프랑스의 해외식민지들을 대부분 독립시키는 데 앞장섰다. 1981년 사회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88년에 재선되어 1995년 물러났다​

13. 프랑스의 자연환경

프랑스의 국토는 3대 지질지역, 즉 헤르시니아 산괴들(아르덴 고원, 보주 산맥, 마시프상트랄, 아르모리캥 대산괴)을 이루는 고기 산맥의 잔구지역, 북부와 서부의 평야지역(파리 분지, 루아르 평야, 아키텐 분지, 알자스 평야), 남부와 남동부의 보다 높은 신기 습곡산맥지역(피레네·쥐라·알프스 산맥들과 인접한 손 평야와 론 평야 포함)으로 대별될 수 있다. 헤르시니아 산괴들 가운데 가장 큰 마시프상트랄은 면적이 약 9만 1,000㎢이고, 퓌드상시(1,886m)에서 최고 높이를 이룬다. 저지들은 해발 300m 이하이며 전국토의 2/3를 차지한다. 마시프상트랄의 북쪽과 북서쪽에 자리잡은 파리 분지에는 센 강과 그 지류들이 흐른다. 450km 이상에 걸쳐 뻗어 있는 피레네 산맥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자연 국경을 이룬다. 스위스까지 이어지는 쥐라 산맥은 습곡된 석회암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봉은 프랑스에 있는 네주 산(해발 1,723m)이다. 프랑스령 알프스는 제3~4기까지 계속된 일련의 습곡작용으로 형성되었으며, 최고봉은 몽블랑으로 해발 4,807m에 달한다. 이 신기 산맥들 사이에는 남쪽으로 론 강 삼각주까지 뻗은 손 평야와 론 평야가 있다. 삼각주의 서쪽에는 랑그도크 해안평야가 단조롭게 펼쳐져 있고, 동쪽에는 프랑스령 리비에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휴양지대인 코트다쥐르 지역이 있다. 프랑스의 하계(河系)는 북동부에 있는 보주 대산괴의 남쪽 부분으로부터 남부에 있는 마시프상트랄까지 뻗어 있는 주분수계(主分水界)에 의해 결정된다. 이 분수계에서 센 강과 루아르 강을 포함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대부분이 발원한다.​

14. 프랑스와 한국과의 관계

1) 개항 이전

프랑스는 가톨릭을 통해서 서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조선과 접촉했다. 1831년 로마 교황청이 조선교구(朝鮮敎區)를 창설했고, 1836년에는 앵베르 신부를 비롯한 3명의 선교사가 잠입하여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탄생시키는 등 선교활동을 폈다. 1839년 선교에 종사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희생당한 사건(기해박해)은 프랑스가 조선에 간섭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866년 신부박해사건이 일어나자 그해 11월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했다 (병인요). 그러나 이 싸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2) 개항 이후

1886년 6월 4일 프랑스측 전권특사 코고르당, 조선측 한성판윤(漢城判尹) 김만식(金晩植), 고종의 외교고문관 데니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조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양국은 천주교 문제로 만만찮은 갈등을 겪었으며, 특히 청일전쟁(1894~95) 후 프랑스는 러시아·독일과 더불어 3국간섭의 일원이 되어 경의선 부설권, 광산채굴권, 조선정부에 대한 차관공여 등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얻었다. 또한 조선의 농상공부 우체사무주임(우체국장, 1888. 12)에 클레망세가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철도·광산 등의 기술분야 및 법부고문에 프랑스인들이 등용되었다.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뮈텔주교는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종현성당(지금의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준공시켰고 드망주 신부는 1906년 10월 19일 주간지 〈경향신문 京鄕新聞〉을 창간했다. 주한 프랑스 총영사관에 근무한 쿠랑은 3,821권의 한국문헌을 〈조선서지〉(1896)로 펴내어 한국의 서지문화를 유럽에 처음 소개했다. 1905년의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이 모두 박탈되고 한국·프랑스 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도 끝났으나 프랑스는 주한공사관을 조선영사관으로 격하시킨 상태로 유지했다.​

3) 일제강점기

프랑스의 대한정책은 원래 극동에서 팽창해가는 일본 세력을 막아 자신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를 보존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는 무관하게 프·일협상(1907. 6. 10)을 체결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한인들의 망명·정치 활동을 묵인했으며, 조선은 독립을 요구하는 외교 채널로 프랑스를 이용하였다.​

4) 8·15해방 이후

프랑스는 1949년 2월 15일 대한민국을 정식승인하면서 국교를 재개했고, 같은 해 4월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6·25전쟁 때는 국제연합(UN)군 산하 프랑스 지상군이라는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1958년 10월 10일 한국·프랑스 양국은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는 등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1960년대에 한국은 명분위주의 1950년대 외교방식에서 탈피해 프랑스·서독·영국 등 서구 선진국과의 경제외교에 주력하게 되었으며 한국·프랑스 간에는 상표협력협정(1961. 2), 관세협정(1963. 4), 특허권 상호보호협정(1963. 4), 문화 및 기술협력협정(1968. 5), 한국-프랑스 기술초급대학설립협정(1971. 12), 민간항공협정(1974. 6),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협력협정(1974. 10), 투자보장협정(1975. 1), 이중과세방지협정(1979. 6), 어업협정(1980. 9), 과학기술협력협정(1981. 4) 등이 체결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외교적인 면에서도 프랑스 주재 대사관을 아프리카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프랑스는 한국의 주요 교역상대국으로 1996년 현재 대한 수입 11억 9,698만 달러(송신기기, 컴퓨터 부품, 섬유류, 선박), 대한 수출 22억 574만 달러(원자로·전동기·철)를 기록했다. 1989년 10월부터 한국인들의 프랑스 입국사증(비자)이 폐지되었으며, 1997년 현재 교민 1,099명, 체류자 9,643명이 거주하고 있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에는 418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에 이어 1989년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파리를 방문했고 1993년에는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데 즈음하여 경부고속전철차량선정에 프랑스의 TGV가 지정됨으로써 양국 협력관계는 매우 긴밀해졌다. 1995년 3월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다.

5)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 공식적인 수교관계는 없으나 1984년 12월 파리 주재 북한통상대표부를 총대표부로 승격시켜 주었다. 따라서 북한은 외교적 지위만 갖지 않을 뿐 내용면에서 일반 대사관에 준하는 대표부를 갖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북한을 승인하기 위한 전단계 조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으나 1985년초 파비위스가 프랑스 총리로는 처음 내한해 북한불승인을 재확인했다. 북한의 대프랑스 주요수출품은 금·아연·연괴 등이며, 수입품은 각종 기계류와 밀가루 등이다.

[ 백과사전]일부인용

15. 프랑스의 음식문화

프랑스의 지정학적 위치와 음식과의 관계

“프랑스인들은 이빨로 무덤을 판다.” 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지나칠 정도로 먹는 데에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왜 프랑스인들이 이토록 식생활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됐을까? 프랑스인들이 먹는 음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흔히 양식이라고 불우는 프랑스의 음식문화에 대해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보도록 한다.

프랑스의 위치를 보면 추운 북쪽과 더운 남쪽의 땅에서 한대성 식물과 열대성 식물이 골고루 자라므로 추운 나라인 영국, 도이칠란트, 스칸디나비아에서 나지 않는 남쪽 채소, 과일 등이 풍부하고 더운 나라인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 나지 않는 북쪽의 채소와 과일도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 북쪽의 대서양에서 잡히는 한류의 물고기와 해산물, 따뜻한 지중해에서 잡히는 난류의 물고기와 해산물 등 수산자원이 풍부한 이점이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기름진 평야를 독차지하여 품질 좋은 곡식과 포도가 얼마든지 걷히고 끝없는 초원지대에 5천만 마리에 달하는 가축에게서 얻는 고기와 젖도 이들이 식생활을 풍부하게 해준다.

게다가 여러 다른 민족이 얽혀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색다른 음식 맛을 예로부터 익혔고 왕들과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까다로운 입맛이 프랑스 요리를 계속 고급으로 몰고가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프랑스 요리가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는 이유를 프랑스 요리의 특징과 요리의 종류, 식탁예절, 그리고 주변 국가들과 우리나라의 음식문화와 다른 점이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도록 한다.

에스카르고(escargot)

에스카르고는 프랑스어로 달팽이 또는 나사 모양을 뜻하는 말이며, 주원료인 헬릭스포마티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달팽이 요리로 더운 전채요리에 속한다. 달팽이를 데친 것에 마늘과 파슬리, 버터를 잔뜩 넣어 구운 음식이다. 달팽이가 껍질 째 식탁에 올려지며, 왼손으로는 달팽이요리용 집게(tong)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포크로 껍질 안에 담겨져 나오는 달팽이를 먹는다.

헬릭스포마티아는 포도나무 잎을 좋아하기 때문에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의 달팽이가 맛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와인으로 특히 유명한 부르고뉴와 샹파뉴(샴페인의 프랑스식 발음) 지방의 에스카르고가 최고로 분류된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미식(美食)의 하나로 여겨졌고 BC 50년경에 이미 양식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것이 전해져 프랑스의 에스카르고 요리가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20가지 이상의 조리법이 알려져 있다.

조리에 앞서 날달팽이를 깨끗이 씻은 다음 딱지를 떼고 소금을 넣은 식초에 약 2시간 동안 담근다. 다시 물로 씻은 후 끓는 물에 넣어 데쳐 나사 모양의 껍데기에서 살을 빼내어 깨끗이 손질한다. 일반적인 요리법은 끓는 물에 백포도주·당근·양파를 조금 넣고 향초(香草)를 섞어서 3시간 정도 끓인다. 이것을 살과 함께 껍데기에 다시 넣고 버터에 레몬즙, 파슬리 다진 것을 섞어 갠 것을 그 위에 채우고 껍데기째 오븐에 굽는다. 다 익으면 그대로 접시에 담아 오르되브르로 이용한다.

이 밖에 살만을 빼내어 스튜로 만들기도 하고, 한번 삶아 익힌 에스카르고를 버섯·마늘 등과 함께 버터로 볶아 파슬리 다진 것을 뿌려서 내기도 한다. 뜨거울 때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으며 버터소스가 나올 때는 빵과 에스카르고에 소스를 듬뿍 묻혀 먹는다. 달팽이는 동면에 들어가기 직전의 것을 사용해야 영양 상태가 좋아 맛이 좋다고 한다.

치즈

프랑스의 치즈는 400여 종 이상으로 종류마다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니고 있는데, 지방의 함량이 많을수록 고소하고 부드러우며, 단백질의 함량이 많으면 뻑뻑한 느낌이 강합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치즈에는 흰곰팡이를 접종시켜 숙성해 만든 순한 맛의 카망베르, 양젖에 푸른곰팡이를 접종하여 만든 로크포르, 염소젖으로 만든 염소치즈, 지방함량이 많아 부드러운 브리, 스위스 음식인 퐁듀에 사용되는 에멘탈, 원산지가 네덜란드인 순한맛의 고우다 등이 있습니다.

해산물 스프(seafood soup)

crepe

★브르따뉴

해산물이 풍부하여 멸치에서부터 가자미 대구, 도미, 가오리, 참치 등이 쿠르부용(court -bouillon : 포도주와 후추로 만든 소스를 친 생선요리)으로, 튀김으로 또는 철판에 굽거나 그라땡(gratin:빵가루를 입혀 구운 요리) 등으로 요리된다. 갑각류외에도 굴, 섭조개, 대합, 성게 등이 있다. 경단고둥, 작은 새우, 게, 가리비 등은 익혀서 먹는다. 연어, 곤들메기, 뱀장어, 새끼뱀장어, 송어 등외에 최근에는 바다송어도 많이 잡는데, 이것은 살이 통통하고 분홍빛을 띠고 있다. 풍부한 목초지에서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생산하며, 이것은 소시지, 순대, 파테(pat )등을 만드는데 주로 쓰이며, 이 지방의 낭트에서는 버터와 소금으로 간한 돼지고기 요리가 있다. 과일로는 프루 가스텔(plou gastel)의 딸기를 빼놓을 수 없으며 이는 리큐르 술의 기본재료로 사용된다

★갈레뜨( galette)

브르따뉴의 위쪽 지방의 갈레뜨(galette:빵과자), 브르따뉴 서쪽지방의 크레쁘는 메밀가루, 황밀로 만들며 설탕 혹은 소금을 치고 속에는 초콜릿등을 넣어서 굽는다. 노르망디 지방과 마찬가지로 이 지방 역시 시드르(cidre)를 생산하며 그 외에도 디제스띠프(dig stif)혹은 아뻬리띠프(ap ritif)로 마시는 꿀로 만든 술이 있다.

★크레프 오 프뤼 드 메르 (crpes aux fruits de mer)

우유와 계란, 밀가루 등을 섞어 종이처럼 얇게 부쳐 안에 각종 해물을 싸서 먹는다. 갖가지 잼을 발라먹거나 초콜렛, 시럽 등을 발라먹기도 한다. 원래 롤 모양으로 많이 만들어 먹고 4등분으로 접어서 먹기도 한다. 접대할 때는 크레프를 놓고, 안에 넣어 먹을 재료를 따로 담아내어 손님들이 직접 돌돌 말거나 접어서 먹는다. 이 때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거나, 그냥 손으로 집어먹기도 한다

★북동지역

★알자스(Alsace): 스위스와 독일의 국경지역 알자스

라인 강과 보쥬 산맥 사이에 위치한 알자스 지방은 라틴과 게르만의 접경 지대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은 알자스 지방의 역사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면적으로 보면 프랑스에서 제일 작은 지방이지만 독일과 스위스와 접해 있어 다채로운 풍경을 연출하는 흥미로운 곳이다. 역사의 질고를 겪어낸 만큼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자랑하는 알자스는 와인 산지로 유명하며 식도락의 고장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곡물과 채소를 재배하는 광대한 평야, 포도가 잘 자라는 토질과 과수원, 생선이 많이 서식하는 작은 강등의 여건들이 알자스를 풍요한 요리의 본고장으로 만들었다.

요리를 살펴보면 양배추절임(사워크랍), 알자스 산돼지고기(훈제한 비계, 스트라스부르산 소시지 햄), 또한 간이 들어간 파이가 있는데 이 요리는 콩타드(Contades)원수의 전속요리사인 장 피에르 클로즈(Jean Pierre Clause) 가 발명한 요리이며 쇠고기를 갈은 후 여러 가지 향신료와 간을 넣어 몰드에 채운 다음 익혀서 차게 먹는다.

코코뱅(chicken braised in red wine)

닭고기와 야채에 포도주를 부어 조린 프랑스 전통 요리이다. 이름은 '포도주 안의 수탉'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농가에서 즐겨먹던 요리에서 시작되었으며, 크리스마스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코코뱅의 유래는 큰닭의 질긴 육질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하여 고안된 요리라는 설과 백성들의 가난한 생활을 본 왕이 일요일에 닭을 먹으라고 명령하여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와인의 풍미와 담백한 닭고기가 잘 어우러진 요리로, 포도주를 많이 생산하는 부르고뉴주에서 특히 발달하였다. 알자스주에서는 화이트와인을 사용한다.

재료는 밀가루·파슬리·닭·올리브유·양파·당근·버터·양송이·브랜디·레드와인·설탕·소금·후춧가루가 필요하다. 만드는 방법은 먼저 닭을 조각으로 잘라 깨끗이 씻은 다음 물기와 핏기를 제거한다. 밀가루에 파슬리·소금·후춧가루를 섞어 닭에 밑간을 한다. 냄비에 올리브유와 버터를 넣고 양파가 갈색이 나도록 볶는다.

당근과 양송이를 넣고 3분 정도 더 볶은 다음 야채를 모두 건져내고 닭을 굽는다. 껍질 부분부터 구워서 노릇하게 구워지면 뒤집어서 안쪽을 굽는다. 브랜디를 넣은 후 냄비를 흔들어 불을 끈다. 와인·설탕 등을 넣고 한번 끓어 오르면 약한 불로 줄인다. 뚜껑을 덮어 1시간 정도 조린다. 와인이 자작하게 되면, 양파·버섯·당근을 넣고 5분 정도 더 조린다.

아페리티프(한두잔의 술) →전채 (조금더 형식을 갖춘 식사에선 오르되브르)→앙트레(생선 또는 고기, 즉 육류가 섞이지 않은 요리)→포도주 (해산물이나 생선 요리엔 흰 포도주, 고기를 먹을 때는 붉은 포도주가 나오고 경우에 따라 고급인 샹파뉴도 나옴)→생선요리→쇠고기또는 돼지고기,양고기(닭고기는 일요일에먹음)→소르베(과일즙을 얼려만든 아이스크림 비슷한 청량 음식)→다시한번 생선→육류→조류순서로 맛을 즐긴다음 샐러드를 먹고 프로마주 (치즈)→파이,케이크,아이스크림→커피→코냑인것입니다

16. 프랑스의 의상

1. 남성 복식

① 블루즈(blouse)

남성의 대표적 복식의 하나로 야채상인, 석공, 상품배달부가 최근까지 입었다. 1914~1918년까지의 스포츠 육성에 힘입어 울과 가죽점퍼 형식의 상의가 눈에 띄게 발달하는 바람에 이러한 플레어나 주름이 있는 형식의 블루즈가 자취를 감추어 차례로 지방복식에서 소멸했다.

② 부르타뉴 지방의 상의와 조끼

메탈의 버튼과 금, 은, 견등의 장식끈이 해군 군복의 소매장식처럼 붙어있는데, 이러한 2중 3중의 가장자리 장식은 부르통(Bruto n) 남성복식의 특징이다. 기원은 부르타뉴 지방이 세력 신장을 할 당시 해군에 들어간 부

르타뉴인들이 세계와의 교류를 이루었으며, 제1 제정 시대에 징병에 끌려간 젊은이들이 다른 문화에 접하게 되었으며 낡은 군복을 입고 돌아와 지방의 양복에 영향을 주게 된 것이라고 한다.

③ 부르그 다 바 (Bourg de Batz)

부르타뉴 지방의 오래된 바지.

④ 천의 폭이 넓은 새시(sash) 풍의 벨트

넓은 새시를 하고 있는 농부들

부르타뉴 지방, 피레네 지방, 아란곡의 농부, 베르마르곡의 목자나 프로방스의 바스크(Basque) 지방의 민속무용 의상 등에 현존하고 있다.

2. 여성복식

① 누빔

여성의 지방복식에 자주 보이며 이것은 중세에 아직 울의 사용이 일반적이지 못했던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현재의 스웨터 대신 2매의 린넨을 합쳐 박아 그 사이에 솜을 넣어 눌러 박았으며 이 기법은 실루엣에 영향을 주어 심을 통한 라인의 변형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② 코르셋(corset)

코르셋을 하고 있는 어린이

웨이스트까지 오픈되어 끈으로 엮은 짧은 조끼.

다수의 지방 및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이며, 겨울에는 코르셋의 안쪽에 모피를 달기도 한다.

③ 피쉬(fichu)

아를르 지방의 피쉬

모든 지방의 여성복에서 나타난다. 기원전 2400년에 라가슈의 부인상에서 이의 원형이 보이는데, 현대 지방복에 영향을 준 것은 마리 앙뜨와넷의 궁정 관습의 모방이다.

④ 머릿 장식(hair dress)

알사스(Alsace)지방에는 로브의 재단법, 색, 형 및 본네(bonnet)의 장식기술에 특징이 있다. 유명한 '검정나비묶음 리본'은 그림 엽서에 빠지지 않고 나올 정도로 유명하고, 이런 코이프는 독일의 지배하에서 반동으로 나타났다.

옛 원형은 다색의 꽃을 금은직으로 한 면에 자수를 놓거나 짠 것이거나, 주름잡은 섬유나 레이스에 장식이 된 넓은 것과 차양이 전혀 없는 것 등이다. 스트라스부르의 남쪽지방의 고르마뉴 지방에서 볼 수 있으며, 그 외에 태양이 강한 남 프랑스의 랑그독그지방, 프로방스(Provence) 지방, 니스(Nice)등지에 예전부터 차양이 넓은 밀짚모자를 볼 수 있다.

⑤ 브레스 (Bresse:소누강과 쥬라산맥의 중간지역)의 코이프

검정색 코이프를 쓰고 민속 무용을 하고 있는 사람들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코이프

19세기부터 농민들이 썼으며 스페인 귀족영양의 시중드는 할머니들이 검은 레이스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몇몇 현은 스페인의 지배하에서 이를 답습하여 프랑드르의 프랑슈 콩테(Franche Conte)의 부유한 부인들로부터 나타나 오늘날 부르고뉴 지방의 축제나 민속무용에 남아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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