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프랑스의 역사
프랑스는 유럽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한 인류사를 지니고 있다.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최고 10만 년도 더 된 것으로, 프랑스 지방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정착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BC 1200년경에 켈트계 갈리아인이 라인 강 유역으로부터 현재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향해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BC 600년경에는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이 마실리아에 상업식민지를 건설했다. 현재의 남프랑스 지역에서 수세기 동안 번창한 많은 이오니아인 취락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이 식민지가 오늘날 마르세유로 발전했다. BC 121년에 시작된 로마인의 갈리아 정복은 BC 58~5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복으로 끝났다. 갈리아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철저히 로마화되었다.
로마가 쇠퇴하면서 갈리아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5세기말까지는 프랑크계 살리족(支族)이 루아르 강 북쪽 지역을 점령했고, 서고트족이 아키텐과 프로방스를, 부르군트족이 론 강 유역을 차지했다. 살리족은 6세기에 메로빙거 왕조의 영도하에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8세기에 이르러 메로빙거 왕조의 왕권이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갔는데, 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인 샤를마뉴는 9세기초 서유럽의 대부분까지 제국을 넓혔다. 그의 죽음은 제국의 분할을 야기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샤를마뉴 제국의 가장 서쪽에 해당하는 영토는 프랑키아 오키덴탈리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이 987년에 서거하자 위그 카페가 프랑키아 오키덴탈리스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카페 왕조는 처음에는 힘이 약했지만 1328년까지 존속했으며, 플랑드르·브르타뉴·부르고뉴·아키텐을 제외한 현대 프랑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328년에 프랑스의 왕위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갔으며, 이것이 백년전쟁(1337~1453)으로 알려진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촉발했다. 이 전쟁으로 발루아 가문은 프랑스의 왕가로 확고히 자리잡았고,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영지를 전부 상실했다. 15세기말 부르고뉴와 브르타뉴가 발루아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프랑스의 영토는 오늘날과 거의 같게 되었다.
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트운동이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일련의 종교전쟁과 내란을 야기했다. 프로테스탄트(위그노)와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의 전쟁은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에 파리에서 약 3,000명의 위그노교도가 학살당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뒤이은 혼란 속에서 부르봉 가문의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드 나바르( 앙리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결국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낭트 칙령(1598)을 공포하여 위그노교도에게 상당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17세기에는 추기경 리슐리외와 마자랭 같은 뛰어난 정치가들이 국왕을 보필하여 프랑스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부르봉 가문의 후기 왕들, 특히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호화로운 궁전을 꾸미고 태양왕을 자임함으로써 프랑스의 절대왕권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막대한 비용을 들인 해외원정이 연이어 실패한 결과 프랑스는 여러 개의 해외영토를 상실하고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1789년에 일어난 혁명은 왕을 몰아내고 '인권선언'을 발표했으며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렸다. 프랑스 혁명은 유혈사태를 거쳐 5인 총재(總裁)의 약체 정부가 들어서는 것으로 끝났다. 정권은 이내 나폴레옹에게 넘어갔는데, 나폴레옹은 1799~1814년에 처음에는 통령으로, 후에는 황제로 프랑스를 지배했다. 나폴레옹의 대대적인 군사원정은 1815년 그의 몰락과 함께 끝났다. 제한적으로 복고된 왕정은 짧은 공화정 기간(1848~52)을 제외하고는 1871년까지 계속되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의 패전으로 인해 제3공화정이 들어섬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프랑스는 1871년에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빼앗겼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이곳을 되찾았다.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한 후 비시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친독일 정권이 수립되었다 (→ 제2차 세계대전).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장군의 영도하에 '자유 프랑스'가 결성되었고,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1944년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이어 제4공화정하에 의회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제4공화국은 1950년대에 인도차이나에서 민족주의자 게릴라들을 상대로 한 값비싼 전쟁과 알제리를 비롯한 프랑스의 식민지들에서 대두한 민족주의 운동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8년 공직생활로 복귀한 드골은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프랑스의 해외식민지들을 대부분 독립시키는 데 앞장섰다. 1981년 사회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88년에 재선되어 1995년 물러났다
13. 프랑스의 자연환경
프랑스의 국토는 3대 지질지역, 즉 헤르시니아 산괴들(아르덴 고원, 보주 산맥, 마시프상트랄, 아르모리캥 대산괴)을 이루는 고기 산맥의 잔구지역, 북부와 서부의 평야지역(파리 분지, 루아르 평야, 아키텐 분지, 알자스 평야), 남부와 남동부의 보다 높은 신기 습곡산맥지역(피레네·쥐라·알프스 산맥들과 인접한 손 평야와 론 평야 포함)으로 대별될 수 있다. 헤르시니아 산괴들 가운데 가장 큰 마시프상트랄은 면적이 약 9만 1,000㎢이고, 퓌드상시(1,886m)에서 최고 높이를 이룬다. 저지들은 해발 300m 이하이며 전국토의 2/3를 차지한다. 마시프상트랄의 북쪽과 북서쪽에 자리잡은 파리 분지에는 센 강과 그 지류들이 흐른다. 450km 이상에 걸쳐 뻗어 있는 피레네 산맥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자연 국경을 이룬다. 스위스까지 이어지는 쥐라 산맥은 습곡된 석회암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봉은 프랑스에 있는 네주 산(해발 1,723m)이다. 프랑스령 알프스는 제3~4기까지 계속된 일련의 습곡작용으로 형성되었으며, 최고봉은 몽블랑으로 해발 4,807m에 달한다. 이 신기 산맥들 사이에는 남쪽으로 론 강 삼각주까지 뻗은 손 평야와 론 평야가 있다. 삼각주의 서쪽에는 랑그도크 해안평야가 단조롭게 펼쳐져 있고, 동쪽에는 프랑스령 리비에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휴양지대인 코트다쥐르 지역이 있다. 프랑스의 하계(河系)는 북동부에 있는 보주 대산괴의 남쪽 부분으로부터 남부에 있는 마시프상트랄까지 뻗어 있는 주분수계(主分水界)에 의해 결정된다. 이 분수계에서 센 강과 루아르 강을 포함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대부분이 발원한다.
14. 프랑스와 한국과의 관계
1) 개항 이전
프랑스는 가톨릭을 통해서 서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조선과 접촉했다. 1831년 로마 교황청이 조선교구(朝鮮敎區)를 창설했고, 1836년에는 앵베르 신부를 비롯한 3명의 선교사가 잠입하여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탄생시키는 등 선교활동을 폈다. 1839년 선교에 종사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희생당한 사건(기해박해)은 프랑스가 조선에 간섭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866년 신부박해사건이 일어나자 그해 11월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했다 (병인요). 그러나 이 싸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2) 개항 이후
1886년 6월 4일 프랑스측 전권특사 코고르당, 조선측 한성판윤(漢城判尹) 김만식(金晩植), 고종의 외교고문관 데니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조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양국은 천주교 문제로 만만찮은 갈등을 겪었으며, 특히 청일전쟁(1894~95) 후 프랑스는 러시아·독일과 더불어 3국간섭의 일원이 되어 경의선 부설권, 광산채굴권, 조선정부에 대한 차관공여 등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얻었다. 또한 조선의 농상공부 우체사무주임(우체국장, 1888. 12)에 클레망세가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철도·광산 등의 기술분야 및 법부고문에 프랑스인들이 등용되었다.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뮈텔주교는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종현성당(지금의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준공시켰고 드망주 신부는 1906년 10월 19일 주간지 〈경향신문 京鄕新聞〉을 창간했다. 주한 프랑스 총영사관에 근무한 쿠랑은 3,821권의 한국문헌을 〈조선서지〉(1896)로 펴내어 한국의 서지문화를 유럽에 처음 소개했다. 1905년의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이 모두 박탈되고 한국·프랑스 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도 끝났으나 프랑스는 주한공사관을 조선영사관으로 격하시킨 상태로 유지했다.
3) 일제강점기
프랑스의 대한정책은 원래 극동에서 팽창해가는 일본 세력을 막아 자신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를 보존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는 무관하게 프·일협상(1907. 6. 10)을 체결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한인들의 망명·정치 활동을 묵인했으며, 조선은 독립을 요구하는 외교 채널로 프랑스를 이용하였다.
4) 8·15해방 이후
프랑스는 1949년 2월 15일 대한민국을 정식승인하면서 국교를 재개했고, 같은 해 4월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6·25전쟁 때는 국제연합(UN)군 산하 프랑스 지상군이라는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1958년 10월 10일 한국·프랑스 양국은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는 등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1960년대에 한국은 명분위주의 1950년대 외교방식에서 탈피해 프랑스·서독·영국 등 서구 선진국과의 경제외교에 주력하게 되었으며 한국·프랑스 간에는 상표협력협정(1961. 2), 관세협정(1963. 4), 특허권 상호보호협정(1963. 4), 문화 및 기술협력협정(1968. 5), 한국-프랑스 기술초급대학설립협정(1971. 12), 민간항공협정(1974. 6),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협력협정(1974. 10), 투자보장협정(1975. 1), 이중과세방지협정(1979. 6), 어업협정(1980. 9), 과학기술협력협정(1981. 4) 등이 체결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외교적인 면에서도 프랑스 주재 대사관을 아프리카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프랑스는 한국의 주요 교역상대국으로 1996년 현재 대한 수입 11억 9,698만 달러(송신기기, 컴퓨터 부품, 섬유류, 선박), 대한 수출 22억 574만 달러(원자로·전동기·철)를 기록했다. 1989년 10월부터 한국인들의 프랑스 입국사증(비자)이 폐지되었으며, 1997년 현재 교민 1,099명, 체류자 9,643명이 거주하고 있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에는 418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에 이어 1989년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파리를 방문했고 1993년에는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데 즈음하여 경부고속전철차량선정에 프랑스의 TGV가 지정됨으로써 양국 협력관계는 매우 긴밀해졌다. 1995년 3월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다.
5)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 공식적인 수교관계는 없으나 1984년 12월 파리 주재 북한통상대표부를 총대표부로 승격시켜 주었다. 따라서 북한은 외교적 지위만 갖지 않을 뿐 내용면에서 일반 대사관에 준하는 대표부를 갖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북한을 승인하기 위한 전단계 조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으나 1985년초 파비위스가 프랑스 총리로는 처음 내한해 북한불승인을 재확인했다. 북한의 대프랑스 주요수출품은 금·아연·연괴 등이며, 수입품은 각종 기계류와 밀가루 등이다.
[ 백과사전]일부인용
15. 프랑스의 음식문화
프랑스의 지정학적 위치와 음식과의 관계
“프랑스인들은 이빨로 무덤을 판다.” 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지나칠 정도로 먹는 데에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왜 프랑스인들이 이토록 식생활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됐을까? 프랑스인들이 먹는 음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흔히 양식이라고 불우는 프랑스의 음식문화에 대해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보도록 한다.
프랑스의 위치를 보면 추운 북쪽과 더운 남쪽의 땅에서 한대성 식물과 열대성 식물이 골고루 자라므로 추운 나라인 영국, 도이칠란트, 스칸디나비아에서 나지 않는 남쪽 채소, 과일 등이 풍부하고 더운 나라인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 나지 않는 북쪽의 채소와 과일도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 북쪽의 대서양에서 잡히는 한류의 물고기와 해산물, 따뜻한 지중해에서 잡히는 난류의 물고기와 해산물 등 수산자원이 풍부한 이점이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기름진 평야를 독차지하여 품질 좋은 곡식과 포도가 얼마든지 걷히고 끝없는 초원지대에 5천만 마리에 달하는 가축에게서 얻는 고기와 젖도 이들이 식생활을 풍부하게 해준다.
게다가 여러 다른 민족이 얽혀 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색다른 음식 맛을 예로부터 익혔고 왕들과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까다로운 입맛이 프랑스 요리를 계속 고급으로 몰고가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프랑스 요리가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는 이유를 프랑스 요리의 특징과 요리의 종류, 식탁예절, 그리고 주변 국가들과 우리나라의 음식문화와 다른 점이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도록 한다.
에스카르고(escarg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