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금씨 족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봉화금씨 족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작성일 2020.06.1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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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정신건강이 안좋으셔서서 제 가문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는데요.

저는 봉화금씨입니다.

제 아버지 성함은 금병홍,
제 이름은 금O철입니다.

그리고 큰 아버지 성함이 금한수
큰아버지 첫째아들 금정O
큰아버지 둘째아들 금정O
큰아버지 아들은 정자 돌림입니다.

족보와 항렬을 보는 방법에 대해서 무지하여서 지식인 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어느 파의 몇대손인지 알 수 있을까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님의 재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봉화금씨 족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정신건강이 안좋으셔서서 제 가문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는데요.

저는 봉화금씨입니다.

제 아버지 성함은 금병홍,

제 이름은 금O철입니다.

그리고 큰 아버지 성함이 금한수

큰아버지 첫째아들 금정O

큰아버지 둘째아들 금정O

큰아버지 아들은 정자 돌림입니다.

족보와 항렬을 보는 방법에 대해서 무지하여서 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어느 파의 몇대손인지 알 수 있을까요?

답변 : 님은 봉화 금씨(奉化 琴氏) 판서공파(判書公派) 이시군요.

봉화 금씨 판서공파에 이어지 존재하는 돌림자는 없고. 님의 철자는 30세손에 존재합니다.

부친님 : 29세 응(應)○자 ○병(秉)자 ○현(絃)자 돌림이시나, 홍자를 쓰셨고,

님은 : 30세손 O철(喆)자 돌림입니다.

님의 봉화 금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 한문을 같이 쓰는 이유는 한문은 여러자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봉화 금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봉화 금씨(奉化 琴氏)에 대(對)하여

1. 봉화 금씨(奉化 琴氏) 시조(始祖) : 금응(琴應)

2. 봉화 금씨(奉化 琴氏) 유래(由來) :

봉화 금씨(奉化 琴氏) 금씨(琴氏)의 선계(先系)는 고대(古代) 기자(箕子)가 동(東)쪽으로 올 때 함께 건너온 금응(琴應)이 가문(家門)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고 하나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고증(考證)할 자료(資料)가 없다. 금응(琴應)의 후손(後孫)으로 고려초(高麗初)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태사(太師)를 역임(歷任)한 금용식(琴容式)도 시조(始祖)로 전(傳)하는데, 금용식의 6세손까지 기록(記錄)이 유실(遺失)되어 유래(由來)를 알 수 없다. 그래서 금씨(琴氏) 성(姓)을 쓰는 인물(人物)로는 우리나라 역사(歷史)와 문헌(文獻)에 최초(最初)로 등장(登場)하는 인물(人物) 금의(琴儀)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금의(琴儀)는 고려(高麗) 명종(明宗)과 고종(高宗)사이의 명신(名臣)이었는데, 1184년(명종 14)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뒤, 1217년(고종 4)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판리부사(判吏部事)를 거쳐 태보(太保)에 올랐다. 또한 당대(當代)의 명신으로 지공거(知貢擧)로 있을 때 많은 인재(人才)를 등용(登用)했으며, 특(特)히 문장(文章)에 뛰어나 금학사(琴學士)라 하였다. 봉화 금씨(奉化 琴氏)가 봉화(奉化)에 세거(世居)한 시기(時期)는 10세 금우공(琴遇工) 이후(以後)부터라고 한다. 금우공대 이전(以前)까지 금씨(琴氏)는 강화, 용인, 옥천, 담양, 영암 등지(等地)에 세거(世居)하였다가 금우공이 경상북도(慶尙北道) 봉화(奉化)에 입거(入居)한 이후(以後)로 봉화(奉化)를 관향(貫鄕)으로 정(定)하였다.

시조(始祖) 묘소(墓所) : 김포군 봉화산에 있으며 3월 9월중에 향사한다.

3. 봉화 금씨(奉化 琴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봉화(奉化)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봉화군(奉化郡)의 옛 지명(地名)으로 신라(新羅) 때에는 고사마현(古斯馬縣)이라 불렸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옥마현(玉馬縣)으로 바뀌었고, 내령군(奈靈郡: 榮州)의 영현(嶺縣)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봉화현(奉化縣)으로 개편(改編)되어 현재(現在)의 지명(地名)을 갖게 되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안동(安東) 속현(屬縣)이었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監務)를 설치(設置)하여 독립(獨立)하였는데, 이때 안동부(安東府) 소속(所屬)의 미량부곡(彌良部曲)·매토부곡(買土部曲)을 편입(編入)하였다. 조선초(朝鮮初)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현이 되었다. 1457년(세조 3)에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으로 순흥부가 혁파되어 문수산 이동지역을 나누어 받았다가 1683년(숙종 9) 순흥이 복구되면서 이양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후 선조 대에 오지인 이 고을 태백산 각화사 근처에 선원각과 실록 등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설치되어 태백산 사고로 불렸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안동부(安東府) 봉화군(奉化郡)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慶尙北道)로 이속되었다. 1913년에 교통편의를 위해 군 청사를 춘양면(春陽面)으로부터 봉화면(奉化面)으로 옮겼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으로 군내면과 북면이 봉성면으로 통합(統合)되었고, 1956년에 내성면이 봉화면(奉化面)으로 개칭(改稱)되었으며, 1978년 봉화면(奉化面)이 봉화읍(奉化邑)으로 승격(昇格)되었다.

4. 봉화 금씨(奉化 琴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금씨(琴氏)의 본관(本貫)은 봉화(奉化) 외에도 계양(桂陽: 김포), 강화(江華), 안동(安東), 평해(平海), 문화(文化)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봉화 금씨(奉化 琴氏)의 分派이고, 봉화(奉化)의 옛 이름이 봉성(鳳城)인 까닭에 봉성 금씨(鳳城 琴氏)라고도 하였으나, 현재(現在)는 모두 봉화 금씨(奉化 琴氏)로 단일화(單一化)되었다.

부위공 미파(副尉公美派)

동래공 휘파(東萊公徽派)

군위공 계파(軍威公啓派)

장사공 척파(長沙公滌派)

관찰공 숙파(觀察公淑派)

사정공 주파(司政公柱派)

판서공 유파(判書公柔派) 등(等)

5. 봉화 금씨(奉化 琴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세(世)

26

27

28

29

30

항렬자(行列字)

기(基)

수(銖)

석(錫)

용(鏞)

연(淵)

락(洛)

수(洙)

병(秉)

동(東)

하(夏)

창(昌)

섭(燮)

세(世)

31

32

33

34

35

항렬자(行列字)

중(中)

교(敎)

재(在)

모(謨)

호(鎬)

도(道)

한(漢)

휴(休)

식(植)

진(晉)

병(炳)

세(世)

36

37

37

39

40

항렬자(行列字)

철(喆)

종(鍾)

영(永)

상(相)

영(榮)

세(世)

41

42

43

44

45

항렬자(行列字)

중(重)○

○진(鎭)

태(泰)○

○근(根)

형(炯)○

세(世)

46

47

48

49

50

항렬자(行列字)

○배(培)

-

-

-

-

5-1. 봉화 금씨(奉化 琴氏) 각파(各派) 항렬표(行列表)

世 派

癸丑

丁丑

副尉公

派譜

東來公

派譜

軍威公

派譜

長沙公

派譜

觀察公

派譜

司政公

派譜

判書公

派譜

24세

○孝

扌部

25세

錫○

26세

○洙

致○

○淳

27세

○柱

聖○

東○

28세

榮○

舜○

○淵

29세

基○

應○

30세

鍾○

煥 昌

○喆

31세

敎○

○浩

○海

善○

○調

32세

○鎬

梧○

相○

○燮

○洙

33세

漢○

○燮

○勳

鎬○

基○

34세

○植

圭○

埈○

○植

尙○

35세

炳○

○鉉

○鎭

炳○

○樹

36세

○喆

泓○

洋○

○喆

37세

鍾○

○模

○杓

鍾○

38세

○永

炳○

烋○

39세

相○

○均

○坤

40세

○榮

鏞○

鈺○

41세

重○

42세

○鎭

43세

泰○

44세

○根

45세

烔○

46세

○培

(註)• 본표는 六간 계해보 세대 항차표와 봉성 금씨선세록의 각 파보 항렬자와의 대조표이며 참고로 기재 함.

• 부위공파와 판서공파는 자파에서 제정한 배항표(配行表) 에 의하여 실행중임.

6. 봉화 금씨(奉化 琴氏) 인물(人物)

인명 자 호 생몰년 본관 합격등급

금유(琴柔) ? ~ ? 봉화(奉化) 병과(丙科) 2위

금이영(琴以詠) ? ~ ? 봉화(奉化) 병과2등(丙科二等) 4위

금곤(琴崑) ? ~ ? 봉화(奉化) 병과(丙科) 5위

금숭(琴嵩) ? ~ ? 봉화(奉化) 정과(丁科) 1위

금의(琴椅) 중재(中材) 1489 ~ ? 봉화(奉化) 병과(丙科) 17위

금개(琴愷) 언강(彦康) 1562 ~ ? 봉화(奉化) 병과(丙科) 18위

금업(琴) 언신(彦愼) 1557 ~ ? 봉화(奉化) 병과(丙科) 19위

금충달(琴忠達) 신경(藎卿) 1594 ~ ? 봉화(奉化) 병과(丙科) 22위

금시조(琴是調) 경평(景平) 1584 ~ ? 봉화(奉化) 병과(丙科) 6위

금상현(琴尙絃) 이원(以援) 1587 ~ ? 봉화(奉化) 병과(丙科) 13위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

금 의는 충헌의 신임을 얻어 요직을 두루 거쳤다 강종이 즉위함에 금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책명할 때 금나라 사신이 궁궐의 정문으로 들어오고자 하거늘 조정에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고 서로 힐난했다. 왕이 금 의에게 명하여 금나라 사신을 설득케 했다. 금 의가 금나라 사신에게 ‘만약 그대나라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어느 문으로 들어올 것인가’ 하고 물었다, 금나라 사신은 ‘황제의 출입이 정문이 아니고 어느 문이겠느냐’하고 답했다, 이 말을 받아 금 의가 ‘그렇다면 정문은 천자의 출입문인데 감히 신하가 되어 정문으로 들어옴이 옳겠는가’ 하니, 금나라 사신이 크게 탄복하여 주장을 굽히고 서문으로 들어왔다” (고려사 기록)

“ 70에 늙음을 이유로 벼슬 물러나기를 빌거늘, 벽상공신(벽에 이름을 기록하는 공신)을 가하고 물러나게 했는데 거문고와 바둑으로써 스스로 즐기다가 고종 17년에 돌아가니 78세라, 왕이 부음을 듣고 슬픔이 심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상례를 하고 영렬(英烈)이라 시호를 내렸다“ (고려사열부)

금의의 비문은 백운 이규보가 지었으며 여기에 기록된 바둑이야기는 우리나라 국기사에 최초의 비문으로 기록돼 있다.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금의

한림별곡은 고려 고종 때 한림의 여러 유생들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기체가로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을 보면 당시 금학사(琴學士)라 불리웠던 영열공 금의를 찬양하는 내용이 나온다.

元淳文(원슌문) 仁老詩(인노시) 公老四六(공노륙)

李正言(니정언) 陳翰林(딘한림) 雙韻走筆(솽운주필)

冲基對策(튱긔) 光鈞經義(광균경의) 良鏡詩賦(량경시부)

試場(시댱)ㅅ 景(경) 긔 엇더니잇고.

葉(엽) 琴學士(금)의 玉笋門生(옥슌뮨) 琴學士(금)의 玉笋門生(옥슌뮨)

위 날조차 몃 부니잇고.

(풀이)

유원순의 문장, 이인로의 시, 이공로의 사륙병려문.

이규보와 진화의 쌍운을 맞추어 내려간 글.

유충기의 대책문, 민광균의 경서 해의(解義). 김양경의 시와 부

아아, 과거 시험장의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 (참으로 굉장합니다.)

금의가 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제자들, 금의가 배출한 죽순처럼 많은 제자들.

아아, 나를 위시하여 몇 분입니까? (참으로 많습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금문(琴門)

조선초(朝鮮初) 금문은 한차례 시련을 겪게 되는데, 다름아닌 제2차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일문이 화를 입게 된다. 영열공 금의의 후손인 금인배는 딸을 태조 이성계의 넷째아들 방간(회안대군)에게 시집 보내 이성계와 사돈간이 된다. 그러나 새 왕조가 열린지 10년도 안돼 권력을 놓고 왕자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소동이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지는 데, 금문의 사위인 방간은 방원과 맞섰다가 패배, 귀양가고 그와 함께 처족인 금문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조(朝鮮朝)에서 금문의 이름을 높인 인물은 세조 때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금휘, 청백리로 대사성에 오른 금유, 그리고 금난수, 금응내, 금보, 금응훈, 금천, 금제순, 금서, 금앙성, 금응석, 금응상 등 퇴계문하의 일단의 학자들이다. 특히 금휘는 세종 때 문무양과에 급제하였고, 세조와는 주석에서 주고받은 시가 유명하다. 전라감사를 지낸 금유는 김종직과 시작교류를 가져 김종직 문집에는 그의 시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과 금문의 인연

조선(朝鮮)중엽(中葉), 금문과 퇴계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퇴계의 맏며느리가 바로 금문의 딸.

당시 금문은 봉화, 안동 일대에서 행세하는 토박이 양반가문인데 비해 퇴계의 6대 선대는 아전에 불과해서 금문의 완고한 노인들은 퇴계집안과의 혼사를 반대해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혼사가 이루어졌다. 한 때 퇴계를 푸대접했던 금문이지만 이를 인연으로 많은 금문의 젊은이들이 퇴계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과 문장으로 저마다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 중에도 성재(惺齋) 금난수와 매헌(梅軒) 금보는 퇴계가 매우 아꼈던 제자로서 매헌 금보는 특출한 필체로 스승이 돌아간 후 비문을 직접 썼다.

일세를 풍미했던 대학자 퇴계는 기고봉(대승)이 아니면 비문을 지을 수 없고, 금매헌이 아니면 글씨를 쓸 사람이 없다”고 유언했다.

그 외 한말 금석주는 일제침략에 국권이 위기에 처하자 1896년 인근유림들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고산정(孤山亭)과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一歲中間六度歸 한 해에 여섯 번이나 왔었지만

四時佳興得無違 사시의 경치 어김이 없었다네

紅花落盡靑林暗 꽃잎 떨어지자 녹음은 짙어가고

黃葉飄餘白雪飛 낙엽 구른 뒤엔 흰 눈이 날리네

砂峽乘風披裌服 단사벽에서 바람 쐬니 겹옷 펄럭이고

長潭逢雨荷簑衣 메네 긴 소에서 비 만나 도롱이 걸쳤네

箇中別有風流在 이 속에 인간사 재미 있으니

醉向寒波弄月輝 취해 찬 물결 향해 달빛 감상하네

惺齋集 권1, 「孤山精舍」

日洞主人琴氏子 날골이라 그 주인 금씨네 아드님

隔水呼問今在否 지금 계신지 강 건너로 물어 보네

耕夫揮手語不聞 농부는 손 저으며 내 말 못들은 듯

悵望雲山獨坐久 구름 낀 산 바라보며 한참을 앉았네

退溪集 권2, 「書孤山石壁」

금문의 인물가운데는 벼슬을 했다가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는 가풍을 지켜온 사람이 많다. 성재 금난수가 대표적인 인물인데 퇴계의 제자로 1561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잠시 지내다 낙향,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봉양을 위해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로로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동계서원(東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성재 금난수는 월천(月川) 조목의 매부이기도 했는데, 월천 조목 역시 퇴계의 큰 제자로서 밑으로는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가르쳤다.

성재 금난수는 1563년,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둔 별경’인 가송협에 고산정을 지어 독서를 하며 자연과 벗하였다. 고산정은 일명 ‘일동정사(日洞精捨)라 불리는데 성재의 아들인 금각(琴恪)의 ’일동록‘에 고산정 건립의 기록이 전해져 온다.

고산정 주위의 풍광을 읊은 선현들의 시문집인 <고산지(孤山志)>라는 책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현재 전해지지 않고 그 서문만이 남아있다. 서문은 소무헌(素無軒) 금서술(琴書述)이 썼다.

청량사와 추원제(追遠齋) 행사에 대한 약간의 단상(斷想)

(아래글은 2001년 11월, 추원재 행사에 참여하고 난 후 여행기 형식으로 인터넷에 올렸던 글 중의 일부입니다.)

이름 그대로 청량함과 고귀함을 간직하고 있는 청량산... 설악산을 비롯한 강원도의 산들은 다양한 기암괴석들이 화려하고 현란한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삐죽빼죽한 바위와 암봉들이 차가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에 비해 청량산은 기묘한 암봉들이 우뚝 우뚝 솟아있음에도 끝부분이 둥그스름하고 나무로 뒤덮여 있어 육중하지만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연로하신 어르신 몇 분은 밑에 남아있고,10여명이 청량사로 향했다.

모든 고찰들이 명당에 자리 잡고 있지만 청량사 또한 참 기가막힌 명당자리에 세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육중하지만 온화한 암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깊은 산속의, 세인들의 발길이 적은 소담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산사다.

일주문부터 대웅전에 이르는 길과 절채 사이를 모두 침목으로 깔아 놓았는데, 참 인상적이다. 경사도 완만하게 해 놓아 발바닥으로부터 탄력을 느끼며 기분 좋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대부분의 절에서처럼 침목이 아니라 기계로 깍은 차가운 느낌의 돌들로 계단을 해 놓았더라면 절집 분위기가 꽤나 황망했으리라. 만만찮은 공력이 들어갔을 침목계단을 보노라면 스님들의 수고와 자연과의 조화와 절을 찾는 중생들의 걸음 하나하나에 따뜻함을 제공하려는 석지현 주지스님의 깊은 혜안에 머리가 숙여진다.

경내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이란 전통찻집이 있는데, 여기에서 ‘명시’와 ‘명차’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1)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아무도 모르는 세계의 저쪽

아득한

어느 먼 나라의 눈 소식이라도 들릴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저녁연기 가늘게 피어

오르는

청량의 산사에 밤이 올까

창호 문에 그림자 고요히

어른거릴까 -----------(청량산인)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2)

그의 소리를 만나면

나도

바람이 된다

가을 잎 떨어지는

어느 저녁 무렵

내가

그의 소리를 만나면

그는

웃음이 될까 아니면

우수수

사랑이 될까 ---------(청량산인)

이 찻집은 석지현 주지스님이 오대산에서 너와나무를 직접 베어다가 지붕으로 얹고, 흙벽돌을 손수 찍어 지은 집이라 한다. 여기에 “솔잎이 바람을 만났을 때”란 명차가 있는데, 한 잔 마시면서 추사 김정희의 흉내를 잠시 내보는 것도 일생의 추억의 되리라.

고요히 앉아

차를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

묘용(妙用)의 때에

물은 흐르고

꽃은 피도다

(중략) 어찌보면 제사라는 게 죽은 조상을 받들고 섬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산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제사는 가문의 결속과 질서를 세우는 중요한 형식으로 작용하는, 죽은 조상을 통한 산 자손들의 만남이라는 속뜻이 서려있다는 말이 맞다. 갈수록 삭막해지고 핍박해져가는 우리네 삶에 그나마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고 우리의 우수한 전통과 문화와 공동체적인 삶의 끈을 이어주게 하는 게 바로 제사라는 훌륭한 의식이 아닌가 한다. 동양에는 특히 우리나라는 ‘제사’라는 훌륭한 죽음에 대한 문화가 있지만, 서양에는 아예 장례에 관한 문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제사가 꼭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쁜 면 보다는 좋은 면이 훨씬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점점 사라져가는 제례문화가 그나마 금문에서는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중략) 나는 이 지역을 올 때마다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전통의 '과잉'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의 '결핍'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암 박지원 선생은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기초로 새로움을 추구한다.)이라 했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해오고 있지 못하다. 서양문물이 우리 전통문화를 일방적으로 잠식해 왔던 것이 우리 근대역사의 자화상이 아닌가?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지 못하는 민족은 그 정체성이 균열되고 세계역사의 주역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지만 정작 우리자신은 우리의 옛 문화와 전통을 업신여기고 홀대하고 있는 기막힌 역설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시제가 모두 끝나고 음복을 위해 떡과 고기와 과일들이 참여한 모든 종친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졌다. 묵과 온갖 나물들이 얹어진 밥 한공기와 따뜻한 국물로 점심을 달게 먹은 후, 언제 또 다시 오랴, 쉼 호흡 크게 한번 하고 뿌우연 서울로 향했다.

7. 봉화 금씨(奉化 琴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 경상북도 봉화군

- 경상북도 문경시

- 경상북도 영양군

8. 봉화 금씨(奉化 琴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봉화금씨는 6,476가구 총 21,07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봉화금씨 족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 봉화금씨 족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봉화(奉化) 병과(丙科) 13위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 “ 금 의는 충헌의 신임을 얻어...

봉화 금씨 족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 저는 봉화금씨입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금영구 저희 아버지 성함은 금산 제 이름은 금O심입니다. 족보와 항렬을 보는 방법에 대해서 무지하여서 지식인 분들에게 여쭙고...

봉화 금씨 저희 가문이 궁금합니다

... 제가 봉화금씨입니다 안녕하세요? 덕수이씨 문정공종회 홈 제작자 이재윤입니다. (이메일 : ***********@*****.***) (종중홈 : https://blog.naver.com/munjunggong/) 본인의 족보...

신평이씨 족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 신평이씨 족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신평이씨 종파가 6개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작하여 (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로 순행 5. 신평 이씨(新平 李氏) 계파...

저의 족보궁금합니다.

... 저의 족보궁금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찍 돌아가시고... 봉화(奉化) 병과(丙科) 13위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 “ 의는 충헌의 신임을 얻어 요직을 두루 거쳤다...

김해김씨 삼현파 족보에 대해서...

... 또한 궁금합니다. 꼭좀 답변해주세여 김해김씨 무슨파인지 좀 알수있을까요..... 김해김씨 삼현파 족보에 대해서 부탁드립니다 내공 꼭좀 문의 드리고 싶은게 있어서...

연일정씨족보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제가 연일정씨 입니다 만, 파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를 못해서... 속하는지 궁금합니다. 3) 저의 어머님이 생전에 경북 오천에 찾아가서 확인 하신것은 ,몇 년에 한번씩 족보를...

평택임씨 항렬 및 족보에 대해서..

... 궁금합니다.. 설명좀 디테일하고 이해하기 쉽게 답변좀 해주세요. 족보는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 잘 안되서 ..... 토 수 목 화 토 수 세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항렬...

연일정씨 족보에대해서

... 집안에대해서! 님의 1:1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제가 연일정씨 포은공파라는데 몇대인지 궁금합니다. 저희... 못하고 족보(族譜) 및 종친회(宗親會)를 각각(各各) 다르게...

영일정씨 도암공파 족보에대해서

제가 영일정씨 의 도암공파입니다 족보를 보니... (西面)·봉화(奉化)등지에, 만호공파(萬戶公派)는 경주(慶州)... 23세 (金)○ 34세 ○수(洙) 45세 ○주(柱) 24세 ○제(濟) 3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