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왜 인터넷 족보에 저희 아빠가 안나오죠?
학교 숙제로 집 본관을 알아오라고해서 부모님께 물어보고 조사를 하던 중 저희 아빠와 큰 아빠들이 인터넷 족보에 안떠요.
본관은 한산이씨고요
저 빼고 저희가족 모두 한산이씨 본관이 있는 충청북도가 고향이고
저희 아빠 그리고 두 큰아빠는 모두 “원”자 돌림이에요.
저랑 저희 오빠는 “영”자 돌림이고요.
오빠는 독자여서 집에서 맨날 독자독자 이름을 이어나가야 한다 이런얘기해요.
매년 저희 본관 조상님이신 목은 이색께 재사도 지내고 하는데 이런거 보면 성씨를 사온것 같진않고 진짜 호장공파 후손인것같은데 왜 족보에 아빠와 큰아빠들이 안나올까요?
답변 : 님은 한산 이씨(韓山 李氏) 호장공계(戶長公系)에서 분파(分派)한 목은공파(牧隱公派) 이시군요.
족보에 올려있지 않을 경우 일가친척이 너무 많아 올리지 않았을 경우와 또 집안에서 돈이 부족하여 올리지 못하고 누락을 시켰을 경우입니다. 이런 점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학교의 숙제를 맞춰 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전자 족보를 만들면 그때는 대한민국 한산 이씨 집안 전체를 올리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어떤 대종회에서는 자금이 부족하여 호소를 하더니 전자 족보를 만들어 놓고도 대종회에서 멈춰버린 대종회도 보았습니다. 그후 아직도 전자 족보를 이용하지 못하는 문중도 보았습니다. 무엇이든 돈이 문제입니다.
시조(始祖) 호장공계(戶長公系) 이윤경(李允卿), 중시조(中始祖) 목은(牧隱) 이색(李穡)입니다.
한산 이씨 항렬표 돌림자를 찾아본 결과로는,
호장공(戶長公)에서 분파(分派)한 목은공(牧隱公) 항렬표(行列表)를 본다면,
그리고 한산 이씨에서 인재공파는 찾지를 못했습니다.
만약에 인재공파가 있다면 계파에서 분파(分派)하고 다시 분파(分派)한 지파(支派)에 속(屬)해 있을 것입니다. 한산 이씨는 벼슬을 하여 출세한 분이 많기 때문에 찾아 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한산 이씨 대종회 02-734-7460으로 연락주시면 상세히 가르켜 드립니다.
돌림자는 중간자와 끝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부님 : 호장공 28세 / 목은공 22세 O복(馥)자 돌림이시고,
부친님 : 호장공 29세 / 목은공 23세 O원(遠)자 돌림이시며,
님은 : 호장공 30세 / 목은공 24세손 O준(濬)자 O수(洙)자 O식(湜)자 돌림이시나, 영자를 쓰셨습니다.
님은 한산 이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 한문을 같이 쓰는 이유는 한문은 각기 다른 한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해당 자료와 항렬자에는 녹색 글씨로 표기합니다.
아래는 한산 이씨에 대한 정보입니다.
한산 이씨(韓山 李氏)에 대(對)하여
1. 한산 이씨(韓山 李氏) 시조(始祖) : 이윤경(李允卿)
2. 한산 이씨(韓山 李氏) 유래(由來) :
한산 이씨(韓山 李氏)는 한 뿌리에서 각기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두 파(派)로 분적(分籍)되었다.
한산 이씨(韓山 李氏)의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하는 호장공계(戶長公系)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숙종(肅宗)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이윤경(李允卿)은 한산(韓山) 지방(地方)에 토착하여 세거(世居)해온 호족(豪族)의 후예(後裔)로 고려(高麗) 중엽(中葉)에 향리(鄕吏)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歷任)했고,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한편 한산 이씨(韓山 李氏)의 중시조(中始祖)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며 그의 아버지가 바로 가정(稼亭)이다. 이곡은 이윤경(李允卿)의 5대손으로 당대(當代)의 대(大) 문장가(文章家)이며, 우탁(禹倬) 이동(易東),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大家)였다. 그는 1320년(충숙왕 7)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는데 원의 벼슬로는 중서성좌우사원외랑(中書省左右史員外郞)을, 고려(高麗)에서는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한산군(韓山君)에 봉(封)해졌다. 그의 아들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세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封)해졌으므로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한산(韓山)으로 하였다.
권지공계(權知公系)의 시조(始祖) 이윤우(李允佑)는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문과(文科)에 올라 권지문하사사(權知門下司事) 혹은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를 지냈는데, 왕(王)의 신임(信任)을 얻어 동생 이윤경(李允卿)과 함께 각각(各各)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장공계(戶長公系)의 족보(族譜)에는 두 사람이 형제(兄弟)였다는 내용이 없다.
4세손 이무(李茂)가 충렬왕(忠烈王)때 사설직장(司設直長)이 되고 신호위낭장(神虎衛郎將)으로 공(功)을 세워 대호군(大護軍)에 오르고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에 이르러 한주군(韓州君)에 봉(封)해진 이후(以後)로 후손(後孫)들이 한산(韓山)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호장공계(戶長公系)의 세록편(世錄編)에는 이윤경(李允卿)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그 이전(以前)에도 선조(先祖)가 있었겠지만 지금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한 권지공계(權知公系)의 세록편(世祿篇)에서도 이윤우(李允佑)를 시조(始祖)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조(始祖) 이전(以前)은 전(傳)하는 바가 없어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윤경(李允卿)과 이윤우(李允佑)가 형제(兄弟)인지는 정확(正確)히 알 수 없으나, 한산 이씨(韓山 李氏)는 이들을 시조(始祖)로 각기(各其) 분파(分派)되었으며 그 중 이곡·이색을 배출(輩出)한 호장공계(戶長公系)의 후손(後孫)이 크게 번창(繁昌)하였다.
3. 한산 이씨(韓山 李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한산(韓山)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서천군(舒川郡)에 속(屬)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本來) 백제(百濟) 때에는 마산현(馬山縣), 우두성(牛頭城)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가림군(嘉林郡: 林泉)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한산으로 고쳤다. 1175년(명종 5) 감무(監務)를 두었고 홍산(鴻山)을 겸임(兼任)하였고, 후에 지한주사(知韓州事)로 승격(昇格)되었다가 1413년(태종 13) 한산군(韓山郡)이 되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홍주부 한산군(韓山郡)이 되었다가, 1896년에 충청남도(忠淸南道) 한산군(韓山郡)이 되었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으로 서천군(舒川郡)에 병합(倂合)되어 지금은 한산면(韓山面)으로 남아 있다.
4. 한산 이씨(韓山 李氏) 가문(家門)의 번영(繁榮)
고려말(高麗末)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이개, 대문장가 이산해(李山海) 등으로써 이름난 한산이씨는 조선시대(朝鮮時代) 상신 4명, 대제학(大提學)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 195 명을 배출(輩出)했다.
이종선(李種善)은 명문(名門)으로서 여흥부사 등을 지내고 1417년 풍해도와 충청도(忠淸道)의 도관찰사를 역임(歷任)한 후 문성유후(門城留後)에 이어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냈다.
이맹균은 1385년 문과에 급제, 성균직학(成均直學)을 거쳐 조선개국 후 1418년 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가되고 이듬해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425년 진위사(陳尉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와 병조의 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고려말(高麗末)의 석학(碩學)이요, 대유(大儒)로서, 조선조(朝鮮朝) 성리학(性理學) 발전(發展)에 공헌(公憲)한 이색(李穡)은 원나라 제과에 급제,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하자 여주, 장흥 등지로 유배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여강(驪江)으로 가던중 간신들에의해 주중폭사(舟中暴死)하였다.
유명한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 또한 한산이씨 가문을 불사이군의 충절로서 빛낸 인물이었다. 그는 1436년 문과에 급제하여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1456년 직제학에 이르렀다. 성삼문(成三門),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근세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를 들 수 있다.
5. 한산 이씨(韓山 李氏) 시조(始祖)
시조(始祖) 이윤경(李允卿) 선조(先祖)는
한산 이씨의 시조(始祖) 이윤경(李允卿)은 한산 지방에 토착세거(土着世居)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중엽에 향직의 우두머리인 권지호장직(權知戶長職)을 역임했고,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건지산(乾至山) 밑에 있는 시조 윤경(允卿)의 묘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으로 알려졌으며, 본래 한산군의 동헌(東軒)이 있는 곳이었는데 관가의 현감(縣監)이 앉는 널판지가 지기(地氣) 때문에 자꾸 썩어가는 것을 눈여겨 보고 지혈(地穴)이 바로 그 자리임을 익혀 두었다가 묘를 썼다고 한다.
시조이신 호장공의 묘소에 얽힌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자손들이 한산고을에서 여러 대를 거쳐 호장으로 봉직할 때 하루는 동헌 마룻장이 뒤틀려 있고, 마루틈으로 안개 같은 기운이 스며 올랐습니다.
이것을 수상히 여긴 후손이 마룻장 밑에다 계란을 파묻어 두었다가, 얼마 후에 꺼내 보니 상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하도 신기하여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바로 이곳이 필시 명당일 것 같아 원님 몰래 밤중에 호장공을 평분으로 입장해 놓았다고 합니다.
묘소를 평분으로 만든 까닭에 세월이 흐르자 실전되었던 것을 호장공의 24세손인 휘 승오 삼은공께서 고종 15년 충청도 관찰사로 도임하여 퇴락한 관부를 수리하다가 발견하여, 현재와 같이 재봉축하고 표석을 세웠습니다.
지관들은 이 묘자리의 형세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금계포란형"이라 하였고, 묘소앞에는 이를 상징하는 3개의 알봉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6. 한산 이씨(韓山 李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호장공계(戶長公系) : 목은공파(牧隱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공무공파(恭武公派)
광목공파(光牧公派)
문열공파(文烈公派)
문혜공파(文惠公派)
순절공파(順節公派)
양도공파(良度公派)
직강공파(直講公派)
진목공파(晉牧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총제공파(摠制公派)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권지공계(權知公系):경력공파(經歷公派)
동추공파(同樞公派)
통례공파(通禮公派)
한천군파(韓川君派)
현령공파(縣令公派)
7. 한산 이씨(韓山 李氏) 항렬표(行列表)
호장공(戶長公) 23세 목은공(牧隱公) 1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