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정씨 제가 무슨 파에 몇대손인지 궁금해서 문의드립니다.

경주정씨 제가 무슨 파에 몇대손인지 궁금해서 문의드립니다.

작성일 2017.03.1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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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경주정씨입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어떤돌림인지는 모릅니다 존함은 정 윤현 입니다.

저희 아버지 돌림은 택자돌림 입니다.

저와 제동생은 영자 돌림입니다.

 

저희 가문? 에 제가 몇대손인지 무슨파인지 족보는 어떻게 되는지 등등 알고싶어서 문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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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주정씨입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어떤돌림인지는 모릅니다 존함은 정 윤현 입니다.

저희 아버지 돌림은 택자돌림 입니다.

저와 제동생은 영자 돌림입니다.

 

저희 가문? 에 제가 몇대손인지 무슨파인지 족보는 어떻게 되는지 등등 알고싶어서 문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 님은 경주 정씨이시군요.

님은 양경공파(良景公派) 항렬을 쓰셨습니다. 

 

조부님 : 70세 ○호(鎬)자 돌림이시나, 현자를 쓰셨고,

부친님 : 71세 택(澤)○자 돌림이시고,

님은 : 72세손 ○식(植)자 돌림이시나, 영자를 쓰셨습니다.

 

님은 경주 정씨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 이유는 한문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경주 정씨에 대한 정보 입니다.

 

 

경주 정씨(慶州 鄭氏)에 대()하여

 

1. 경주 정씨(慶州 鄭氏) 시조(始祖) : 지백호(智伯虎)

2. 경주 정씨(慶州 鄭氏) 유래(由來) :

 

경주 정씨(慶州 鄭氏)의 시조(始祖)는 지백호(智伯虎)이다. 신라(新羅) 초기(初期) 6부 중에 취산진지촌(聚散診支村)의 촌장(村長)으로 신라(新羅) 건국(建國)의 모태(母胎)가 되면서 지백호(智伯虎)(鄭氏)의 성()을 하사(下賜)받았다.

 

이후(以後) 지백호(智伯虎) 시조(始祖) 42대손(代孫)인 진후(珍厚)는 지백호(智伯虎) 시조(始祖)의 장종손가(宗孫家)의 가통(家統)을 그대로 이어왔다.

()이 태어나고 돌아간 연대(年代)는 기록(記錄)이 없고 다만 족보(族譜)에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당문학(政堂文學) 호부상서(戶部尙書) () 판군기시윤(判軍器寺尹) 평장사(平章事) 월성군(月城君) (文正公)으로 기록(記錄)되어 있고 또 가(家庭)에 전()하는 말에는 공()의 문장(文章)과 명예가 높아 남들이 따라갈 수 없다 하였다. ()히 이학(理學)과 문장(文章)에 밝았던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월성(月城)경주(慶州)의 옛 지명(地名)으로 후손(後孫)들이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하고 이후(以後) 진후(珍厚)경주정씨(慶州鄭氏)의 득관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3. 경주 정씨(慶州 鄭氏) 시조(始祖) : 진후(鄭珍厚)

4. 경주 정씨(慶州 鄭氏) 유래(由來) :

 

경주 정씨(慶州 鄭氏)는 신라(新羅) 초기(初期) 6(六村) 가운데 취산진지촌장(聚散珍支村長)의 지백호(智伯虎)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다른 5촌장(村長)과 함께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으로 추대(推戴)하고 좌명공신으로 낙랑후(樂浪候)에 봉()해졌으며, 3대 유리왕(儒理王) (鄭氏)로 사성(賜姓)되었다.

 

그 후 그의 42세손(世孫) 진후(鄭珍厚), 시호(諡號) (文正)가 고려(高麗)조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당문학(政堂文學호부상서(戶部尙書) () 판군기시윤(判軍器寺尹평장사(平章事) ()을 지내고 월성군(月城郡은 지금의 경주)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後孫)들이 그를 득관중조로 하고, 본관(本貫)경주(慶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여 오고 있다.

 

이렇게 경주 정씨(慶州 鄭氏)는 옛 본피부(本彼部) 사람들의 (正統) 후손(後孫)이요, 이른바 모든 (鄭氏) '큰집' 격으로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 동남안에 자리 잡고 살았던 선주민의 후예(後裔)이다.

 

그러나 신라(新羅) 시대(時代)의 명벌로서 신라(新羅)에서 고려(高麗)에 이르는 천년(千年)동안 장상의 세가였다고 하지만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자세(仔細)한 것은 알 수 없다.

중시조(中始祖) 진후(鄭珍厚)의 묘소(墓所)는 경북(慶北) 월성군(月城郡) 내남면 노곡리에 있고, 매년 음력(陰曆) 10 10일에 향사(享祀)한다.

 

 

5. 경주 정씨(慶州 鄭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경주 정씨(慶州 鄭氏)는 크게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로 나뉘게 되며 이는 후손(後孫)들로 내려오면서 30여개 세파(世派)로 분파(分派)돼 명맥(命脈)을 이어오고 있다.

 

 

6. 경주 정씨(慶州 鄭氏) 집성촌(集姓村)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오지리

-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선산리

- 전라남도 고흥군 풍양면 고옥리

- 전라남도 순천시 별양면 대곡리

- 전라남도 순천시 황전면 회룡리

-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방월리

-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대전동

-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남곡동

-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율도리

-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면 신전리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추

- 함경남도 영흥군 진평면 한동리

 

  

7. 경주 정씨(慶州 鄭氏) 본관지 연혁(本貫地沿革)

 

경북 경주(慶州)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府)에 위치(位置)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紀元前) 57년에 6(六村)이 연합하여 고대(古代)국가(國家)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8. 경주 정씨(慶州 鄭氏) 대표적(代表的) 인물(人物)

 

그 후() 경주 정씨(慶州 鄭氏)는 시조(始祖)의 후대(後代)로 내려오면서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크게 4파로 갈라졌고, 지손(支孫) 계통(系統)에 서는 30여 본()으로 본적(本籍)되어 우리나라 모든 정씨(鄭氏)의 대종(大宗)을 이루었다.

 

() 계통(系統) 별로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첫째 문헌공파(文獻公派)에서는 시조(始祖) 42세손(世孫) 진후(診厚 : 검교첨의평리 극중의 맏아들)가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호부 상서(戶部尙書)와 정당문학(政堂文學) () 판군기시윤(判軍器寺尹)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그의 증손(曾孫)으로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위()의 아들 현영(玄英)은 호부 상서와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거쳐 벽상삼중대광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한 후 문헌(文獻)으로 시호(諡號)를 받았으므로 문헌공파(文獻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정헌대부로 이부 상서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종철(宗哲)의 둘째 아들 인조(仁祚)는 공양왕(恭讓王) 때 길주 목사(吉州牧使)와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歷任)한 맹장(孟將)으로 이성계와 함께 일본(日本)군 장군(將軍) 아지(阿只)를 격퇴시켜 더욱 무명(武名)을 떨쳤다.

 

조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홍덕(弘德 : 사간원 정언 인량의 아들)은 단종(端宗)이 손위하고 죽음을 당하자 팔순노모(八旬老母)와 함께 남원(南原)의 교룡산(蛟龍山) 아래에 은거(隱居)하며 단()을 만들고 단종(端宗)과 사육신(死六臣)의 기일(忌日)에 분향하고 곡()을 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의 아들 지년(知年) 1438(세종 20)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사헌부( 司憲府)?사간원(司諫院)을 거치면서 관직(官職)을 역임(歷任)하고 성균관(成均館) 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으며, 단종(端宗)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文宗)의 수탁 고명신(受託顧命臣)으로서 단종(端宗)이 손위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종숙(從叔)인 홍덕(弘德)과 함께 남원 교룡산에 은거하였다.

 

그의 아들 4형제(兄弟) () 장남(長男) 효항(孝恒)은 성종(成宗) 때 서거정(徐居正) 등과 더불어 동국여지승람 (東國與地勝覽) 동국통감 (東國通鑑)을 찬수(撰修)했다.

 

한편 단종(端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壯元)했던 효상(孝常 : 지년의 둘째 아들, 효항의 아우)은 예종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남 이(南 怡)와 강 순(康 純)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익대 3등공신(翊戴三等功臣)에 책록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으며, 통덕랑(通德郞) 인필(仁弼)의 아들 지운(之雲)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조화(造化)의 이()를 규명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著述)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을묘 왜변(乙卯倭變)에 추자도(楸子島)에 서 수 차례 전공을 세워 함흥 판관(咸興判官)에 제수되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던 승복(承復)의 아들 사준(思竣)과 사횡(?)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서 역전의 무공을 세워 헌종(憲宗) 때 창의비(倡義碑)와 대첩비(大捷碑)가 세워져서 가문(家門)에 절맥(節脈)을 세웠으며, 호조 참의(戶曹參議) 윤근(允謹)의 아들 창문(昌文)은 부친이 임진왜란에 진주성(晉州城)에 서 순절하자 원한(怨恨)을 마음속에 새겨 정유재란 때 10촌 형() 원길(元吉)과 함께 남원(南原) 율치(栗峙)에서 적군 수십명을 사로잡았으나 용성(龍城) 북문(北門)에 서적의 계략에 휘말려 순절하였다.

 

양경공파(良景公派)의 인맥(人脈)으로는 공민왕(恭愍王) 때 일기도주(一岐島主)의 모반사건을 토벌하여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이 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휘()의 아들 희계(熙啓)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창업(朝鮮創業)에 훈공(勳功)을 세워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그의 현손(玄孫) 승조(承祖)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及第)하여 감찰(監察)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검열(檢閱)에 재직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은 사사(賜死)되고, 그는 곽산(郭山)에 유배(流配)되었다가 풀려나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學文)연구(硏究)에 만 진력했다.

 

주자학(朱子學)의 충효양전(忠孝兩全)을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때에 효()를 버리고 충()을 택했던 발()은 부산진 첨사(釜山鎭僉使)로 나가면서 늙고 병들었던 어머니에게 허락을 청했다. 이에 어머니 남궁씨(南宮氏)는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충() 속에 효()가 들어있다면서 개념(槪念) 말고 나라를 위하라고 타일렀다.

 

기재잡기(寄齋雜記)조야첨재(朝野僉載)에 의하면 임진년에 왜군이 늑병(勒兵) 25만 명과 병선 4만여 척을 거느리고 부산을 쳐들어왔다. 이에 아군은 혼비백산하여 거의 도주하였으나 발()을 중심으로 한 정예군만이 용기를 내어 활을 쏘아 무수한 적을 죽여 세곳에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화살이 다하자 한 비장(裨將)이 발()에게 도주할 것을 종용하자 도망갈 것을 종용하는 자는 중벌하겠다.”하고 백병전에 돌입했다가 발은 총에 맞아 장렬하게 순절(殉節)했다.

 

()의 아들 흔()은 정유재란 때 조정(朝廷)에 서 복수청(復讐廳)을 창설하여 젊은 장정(壯丁)을 모집하자 나라에 은혜를 보답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모집에 응하고는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에 힘썼으며, 사량 만호(蛇梁萬戶)가 되어 왜군을 섬멸하여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승진(昇進)되었고 첨정(僉正)과 정선 현감(旌善縣監) 등을 역임했다.

 

그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서 돌격대장이 되어 당포(唐浦)?노량(露梁) 해전에 서 적선 300여 척을 대파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던 호()와 인조(仁祖)때 강화(講話)에 항거(抗拒)하다가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어 화원(花源)에 살았던 응신(應莘), 숙종(肅宗) < 오사인 (五士人)>의 한 사람으로 4대신(四大臣 : 조태채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과 더불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수호했던 인중(麟重),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시휘(時輝)와 동윤(東潤)등이 양경공파(良景公派)를 대표했다.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금실(金實)의 아들로 부마(駙馬)가 되어 월성위 (月城尉)에 봉해졌던 이기(?)의 후손에 서는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올랐던 구()의 아들 광업(光業)과 홍업(弘業) 형제가 유명했다.

 

선조(宣祖) 때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歷任)했던 광업(光業)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숙부 원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참전(參戰)했다가 장렬(壯烈)하게 순절(殉節)하였고, 그의 아우 홍업(弘業)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었다.

 

1581(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공청(公淸)은 진도 군수(珍島郡守)를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호신(好臣)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안강(安康)?경주(慶州)?울산(蔚山)?동래(東萊)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무공을 떨쳤다.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손경(遜卿)의 둘째 아들 극온(克溫)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북벌남정(北伐南征)에 대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랐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판삼사 참지정사(判三司參知政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필( )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

重大匡)으로 중추원사( 中樞院使)와 한림학사(翰林學士)?평장사(平章事) 등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사후(死後)에 계림군(鷄林君)에 추봉되었다.

 

한편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에 유일로 천거되어 과천(果川)?의성(義城) 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했던 기()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내고 봉렬대부(奉列大夫)로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에 추증되었으며, 슬하에 아들 5 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평장공파(平章公派)의 중추적인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조선 세종(世宗)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언양 현감(彦陽縣監)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던 차온(次溫)은 상주 판관(尙州判官)을 거쳐 권농병마절도사(勸農兵馬節度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 하자 평양 판관(平壤判官)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생강학에 진력했으며, 그의 아우 차량(次良)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의 셋째 아들 차공(次恭)은 세종(世宗) 때 등과(登科)하여 영천군수(永川郡守)와 평산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를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봉직되었으며, 기의 넷째 아들 차검(次儉)은 수의교위(修義校尉)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했다.

 

청백수절(淸白守節)은 정()이요 정직무사(正直無邪)는 간()이라 하여 정간(貞簡)으로 시호(諡號)를 받았던 차양(次讓) 1452(문종 2)에 학행으로 봉직랑(奉直郞)에 천거되어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냈으며, 단종( 端宗)이 폐위되자 형()들과 더불어 5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랐다가 고향에 돌아오면서 함께 다리를 건너 왔는데, 세상(世上) 사람들은 이 다리를 < 오영교 (五榮橋)>라 불렀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견()의 아들 대영(大英)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사촌(四寸)동생 대방(大方 : 후의 아들)과 더불어 망우당(忘優堂) 곽재우(郭再) 휘하에 서 창의(倡義)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으며, 대방(大方)은 대구(大邱) 팔공산(八空山)에 서 권 제(權 濟)?최 입(崔 笠)?조호익(曺好益)?정경세(政經世) 31명과 회맹(會盟)하고 전투에 임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대영(大英)과 더불어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선조 때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지냈던 구()와 함께 경주 정씨를 더욱 빛냈다.

 

 

9. 경주 정씨(慶州 鄭氏) 항렬표(行列表)

 

문헌공파(文獻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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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공파(良景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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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위파(月城尉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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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장공파(平章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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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경주 정씨(慶州 鄭氏) 주요(主要)세거지(世居地)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오지리

-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선산리

- 전라남도 고흥군 풍양면 고옥리

- 전라남도 순천시 별양면 대곡리

- 전라남도 순천시 황전면 회룡리

-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방월리

-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대전동

-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남곡동

-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율도리

-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면 신전리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 함경남도 영흥군 진평면 한동리

 

 

11. 경주 정씨(慶州 鄭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경주 정씨는 94,465가구 총 303,44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빌겠습니다.

경주정씨 무슨파에 몇대손

경주정씨 무슨파에 몇대손인지 알고 싶습니다.... 훈자돌림)입니다. 자식들은 어떤 돌림자를 써야... 종회로 문의하세요. 호적등본, 제적등본 찾는 법 (tistory.com)...

경주정씨 무슨몇대손인지 궁금해서...

분명 경주정씨라고 한 것은 같은데요. 제가 무슨몇대손인지를 몰라서 글 올립니다.... 흔히 항렬(돌림자)대로 이름을 사용치 않는 경우도 있으니 족보나 어른께 문의하세요.

무슨몇대손인지 궁금해서 문의...

안녕하세요.경주김씨 무슨몇대손인지 궁금해서 문의 드립니다. 저의 아버님은 김유ㅇ ("유"자... (海) (濟) 집(集) 표(杓) 현(炫) 형(炯) 희(禧) 철(喆)...

경주정씨 몇대손인지좀...

제가요 경주정씨 몇대손인지 궁금해서요 이름은 정광민 나이는 만14세 아빠는 정태종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그거 본가 말고 무슨 파같은것도 있는데요? 예를들면 안동김씨 **파...

경주정씨 파가 어떻게되나요?? (내공 35)

... 저희집 파에 대해 알고싶어서요 얼마전에 할아버지가... ㅋㅋ 그럼 부탁드립니다 내공은 35//ㅋㅋ 님의 질문에... 이곳은 경주정씨(慶州鄭氏) 일문의 터밭이다. (鄭)씨가...

경주김씨 무슨몇대손인지 궁금해서욤?...

... 드립니다ㅠㅠ 경주 김씨 무슨몇대손인지 궁금해서... 모르신다면, 경주김씨_종친회_등에 문의를 하셔야... 이것은 경주김씨중에서도, "계림군파 및, 계림군파에서 분파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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