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박씨송당공파에대해서

밀양박씨송당공파에대해서

작성일 2017.02.12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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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아니라 제가알기론제가 밀양박씨송당공파로 알고있는데요정확히몇대손인지 알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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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다름아니라 제가알기론제가 밀양박씨송당공파로 알고있는데요정확히몇대손인지 알고싶네요.

 

답변 : 송당공파는 이파에 항렬표가 없습니다. 그리고 송당선생은 아래에 올려드릴테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님은 밀양 박씨 뼈대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행합니다. 이유는 한문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해당 자료와 항렬자에는 녹색글씨로 표기합니다.

 

아래는 밀양 박씨와 송당선생에 대한 정보를 올려드리겠습니다.

 

밀양 박씨(密陽 朴氏)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제54대 왕, 재위기간:917∼924)의 8대군 중 세자(世子)인 박언침(朴彦 )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져, 단일본관(單一本貫)으로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伐族)임을 자랑하여 왔다.

박씨(朴氏)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밀양 박씨는 중시조(中始祖) 언침(彦침)이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진 연유로 해서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8세손 언부(彦孚:문하시중을 지내고 밀성부원군에 봉해짐)를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8세손 언상)·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8세손 언인)·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8세손 양언)·판도공파(版圖公派:8세손 천익)·좌윤공파(左尹公派:8세손 을재)·동정공파(同正公派 :13세손 원광)·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15세손 중미)·정국공파(靖國公派:15세손 위)·규정공파(糾正公派:16세손 현) 등 크게 12파로 나누어져 아랫 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分派)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 박씨(靈岩朴氏)로 분적(分籍)하는 등 10여 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각 계통별로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종하(宗派)인 8세손 언부가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 신(權 臣), 최 충(崔 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중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銀山君) 영균(永均)을 비롯한 13개의 파가 형성되었다.
밀성부원군 언부의 차남 의신(義臣:고려 인종 때 공부 상서를 역임)의 후손에서는 사문진사(四門進士) 원(元:의신의 맏아들)의 계통과 의흥위(義興衛)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던 척(陟 : 의신의 현손)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원(元)의 8세손 의중(宜中)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장원하고 우왕(禑王) 때 대사성(大司成)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뒤에 공신(功臣)에 올랐으며, 조선이 개국(開國)하자 조 준(趙 浚)·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했고, 목은(牧隱) 이 색(李 穡)의 문인(門人)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우아한 문장(文章)으로 문치(文治)에 고명(高名)했다.
문종(文宗)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재직중 야인(野人) 토벌에 전공을 세웠던 거겸(居謙)은 의중의 손자이며 증판서(贈判書)인 경빈(景斌)의 아들로 성종(成宗) 때 좌리사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에 급제한 중미(中美:의신의 7세손)는 공민왕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보리공신(輔理功臣)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8 세손인 생원(生員) 사눌(思訥)의 아들 성(惺)이 한강(寒岡) 정 구(鄭逑)에게 글을 배우고 선조 때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들어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료로 종군,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大長)으로 활약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했으며 후에 공조 좌랑(工曹佐郞)과 안양 현감(安陽縣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상주(尙州) 싸움에서 순절한 호(호)의 아들 종남(宗男)은 선조 때 상주와 광주(廣州)의 목사(牧使)를 거쳐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영신(榮臣)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광해군의 뜻을 반대하다가 북관인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으나 장사(壯士)이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하여 진도(晋島)로 이배(移配)되었다.

인조 반정 후 경원 부사를 거쳐 풍천 부사(豊川府使)로 있을 때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다 포로가 되었는데, 그의 용맹을 알고 있던 이괄이 마음을 돌려 협력할 것을 간청했으나 굽히지 않고 달려드니 그의 기절(氣節)에 적장(賊將)인 이수백(李守白)도 감동하여 죽이기 아깝다고 하였으나 살려 두었다가 후환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참살(斬殺)하자, 피를 뿜으면서까지 욕을 했다고 한다.
조선 정종의 부마(駙馬)로 지돈령부사(知敦寧附事)에 오른 갱(갱)의 7세손 정원(鼎元)이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 도사(平安都事)를 역임했고, 그의 종손(宗孫) 신규(信圭)는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낸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목사(牧使) 율(栗:척의 11세손)의 아들인 이서(彛서)는 선조(宣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주서(住書)로 사관(史官)을 겸했고, 임진왜란 때는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어 분조(分朝)를 배종(陪從)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순찰사 종사관(巡察使從事官)으로 황해도 지방의 병량을 담당했다.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이 대두되자 여러 차례 대북파를 탄핵했던 그는 뒤에 무고를 받아 삭직되었다가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복직되어 전라도 관찰사 이창준(李昌俊)의 탐학 행위를 개탄하여 사직했다.
그의 아들 노(魯)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순검사 종사관으로 왕(王)을 강화(江華)에 호종한 공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고,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신(使臣)으로 적진에 세 변에 걸쳐 들어가 조약을 어기고 불법침입한 것을 공박하다가 40여일 간 잡혀 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을 역임했던 현(鉉)은 평장사 효신(孝臣)의 8세손으로 조선 개국과 더불어 집현전 부제학에 등용되어 수원 부사를 거쳐 안변 부사로 나가 임지(任地)에서 생을 마쳤다. 특히 그는 성리학에도 밝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淸白吏)로 세간(世間)의 칭송(稱頌)을 받았으며, 후대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규정공 현(鉉)의 손자 사경(思敬:좌랑 문유의 아들)은 고려조에서 전법 판서(典法判書)겸 상장군(上將軍)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推誠翊威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그의 아들 침(침)이 공민왕 때 전의 판사(典儀判事)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개성(開城)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침의 둘째 아들 강생(剛生)은 고려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사(議政府事)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으나 불취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태종(太宗) 때 등용되어 수원 부사로 재직중 과천 현감(果川縣監) 윤 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에서 금천 현감 김 문(金汶)이 과음으로 죽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세종(世宗) 때 안변부사를 지냈고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아들 심문(審問)은 세종조에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개척할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야인에 대한 안무책(安無策)을 건의 했고,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가 살해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조복위를 모의했으며,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義州)에 이르러 사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자결을 했다.

강생(剛生)의 손자로 세조 때 정난이등공신(靖難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진 중손(仲孫:좌찬성 절문의 둘째아들)은 대사헌(大司憲)과 공조를 비롯한 4조의 판서(判書)를 거쳐 밀산군(密山君)에 개봉(改封)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남(남)이 부사를 지냈고, 차남 미(楣)는 대산간과 예조 참의를 거쳐 「여지승람(與地勝覽)」을 편찬했으며 시문(詩文)에 현달했고, 막내 건(楗)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으로 5대의 왕조(王朝)를 거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에 책록되어 밀산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찬성공(贊成公) 신생(信生:규정공 현의 현손, 전서공 침의 막내아들)의 현손 영(英:이조 참판 수종의 아들)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자로 주역(周易)·천문·지리·의술 등에 능통했으며, 무예(武藝)에 뛰어나 용맹을 떨침으로서 중세의 명인(名人)으로 이름났다.

특히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기 한 벌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통(家統)이 있었다. 어느날 저녁 무렵 화려한 옷차림에 준마을 타고 남소문(南小門)을 지나는데, 골목 어귀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부르므로 그가 말에서 내려 따라가니 집이 깊숙한 곳에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그 여인은 그를 대하자 홀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귓속말로 “공의 풍채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인하여 비명에 죽겠소”하였다. 그가 무슨 뜻인가를 따져 물으니 미녀는 “도적의 무리가 나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죽이고, 입은 옷과 타고 온 말과 안장을 나누어 갖고 살아온 지가 해포가 되었습니다. 내가 매일 이 곳에서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도둑의 일당이 많으므로 잡혀서 죽임음 당할까 두려워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나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하였다.

그는 칼을 빼어 들고서 잠을 자지 않고 있었는데, 밤중이 되자 방의 윗쪽 다락으로부터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서 큰 밧줄이 내려왔다. 그는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 급히 여자를 업고 몇겹의 담을 뛰어넘어 나와서는 여인이 붙잡는 옷자락을 잘라 버리고 달려 나왔다. 그 이튿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善山)으로 돌아와 무인(武人)의 노릇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고, 옷자락이 잘린 옷을 보이면서 항상 손자들에게 경계하였다고 하다.
그는 낙동강변에서 두문불출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며 아래와 같은 시(詩)로 마음을 달랬다.
멀고 먼 남쪽 변방에 바닷 기운이 어두워 오는데
투구 쓰고 갑옷 입던 바다를 지키는 늙은 왕손일세.
기린각 위에 이름을 남길 생각은 전혀 없고
낙동가 언덕 마을에 내 집이 있도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원근의 학자들이 모두 〈송당선생(松堂先生)〉이라 일컬어 스승으로 섬겼다고 하며, 의서(醫)로 「경험방(經驗方)」과「활인신방(活人新方)」을 저술했다.
존성재(存誠齋) 미(楣)의 아들 6형제 중에서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으로 문의(文義)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던 의영(義榮)과 폐비 윤씨(尹氏:연산군의 생모)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목천(木川)에 유배당한 광영(光榮:중종 때 형조 참판을 역임), 성종 때 호당(湖堂)에 뽑히고 교리(校理)를 지낸 증영(增榮), 황해도 감사를 지내고 부제학에 올랐던 소영(召榮), 승지(承旨)를 지낸 안영(安榮) 등이 유명했으며, 증영의 아들 훈(薰)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신진사류로 조광조(趙光組) 등과 함께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가 의주에 이배(移配)되어 15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밀성군(密城君) 광영의 손자인 냑촌공(駱村公) 충원(忠元:별좌 조의 아들)은 명종 때 단종의 원령(怨靈)으로 잇따라 7명이 죽어가는 영월 군수를 자청하여 부임해 가서 제물(祭物)을 갖추어 제사지내며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왕실(王室)의 맏이요, 유충(幼沖)하신 임금으로 마침 비색(否塞)한 운수를 당하시어 바깥 고을로 손위(遜位)하시었으니, 한 조각 청산(靑山)이요, 만고의 고혼(孤魂)이라, 바라건데 강림(降臨)하시어 향기로 운 제전에 흠향하소서〉하며 원령을 위로하여 그후부터는 변고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유천차기(柳川箚記)」에 의하면 지금까지 사시행사(四時行祀) 때마다 이 글을 제문에 쓴다고 한다.

그 뒤 충원은 좌통례(左通禮)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관)을 겸하여「중종실록(中宗實錄)」「인종실록(仁宗實錄)」편찬에 참여했고, 1566년(명종 21) 이퇴계(李退溪)의 뒤를 이어 양관 대제학을 거쳐 선조 때 우찬성·이조 판서를 역임한 수 지중추부사로 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이 세도가(勢道家)인 윤원형(尹元衡)이 사위를 삼고자 청하는데 면전에서 거절하여 외임(外任)의 벼슬로만 돌았던 계현(啓賢)이며, 계현의 손자가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승종(承宗)이다.

광해군의 폭정 속에서 영산(領相)에 올랐던 승종은 항상 오리알만한 근 비상을 차고 다니며 말하기를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이 물건이 없어서 되겠는가”하며 광해군의 비리적 행동에 항상 진정하지 못하고 방안에 한가해 있으면서 흐느껴 울기도 했으며, 폭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이조반정(仁組反正)이 일어나던 날 그는 이 반정에 참여하고자 군사를 모으로 있던 아들 자흥(自興:이이첨의 사위, 참판을 역임)을 불러 마음속에 있는 바를 써 놓고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했다.

한편 충원(忠元)의 6대손 성원(聖源)은 도암(陶菴) 이 재(李縡)의 문인(門人)으로 영조(英組)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간관(諫官)을 거쳐 참판으로 치사(致仕),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문장(文章)에 뛰어나 「예의류집(禮疑類集)」·「돈녕록(敦寧錄)」·「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한편 강계(江界)의 3대 유배명인으로 손꼽히는 근원(謹元)은 시정(寺正) 빈(빈)의 셋째 아들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대의 권신 윤원형과의 암투로 일생을 살았다. 그가 사관(史官)인 한림(翰)의 벼슬에 있을 때 윤원형의 악행을 사초(史草)에 적었더니, 동료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지워버리자 그는 재차 썼다. 다시 지우니까 또 써 끝내 미움을 받게 되었다.

선조 때 동서 분당으로 논쟁이 심해지자 동인의 중진(重鎭)으로 송응개(宋應槪)·허 봉(許 ) 등과 함께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있던 이 이(李 珥)를 탄핵하여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나와 청한직(淸閑 )을 지내며 청백한 관리로 소문났었다.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의하면 늙어서 사람들이 그의 청백함을 칭송하자 “나의 청백은 윤원형이 만들어 준 인생의 선물이다”하며 웃었다고 한다.

복야공파(僕射公派) 언인(彦仁)의 후손에서는 우리나라 〈삼대악성(三大樂聖)〉으로 손꼽히는 난계(蘭溪) 연(堧:언인의 9세손)이 뛰어났다. 1378년(우왕 4) 삼사 좌윤(三司左尹) 천석(天錫)의 맏아들로 태어나 태종 초에 문과에 급제한 연은 세종이 즉위하자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 정리와 악보찬집(樂譜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편경(編磬) 12매를 제작, 자작한 음률(音律)로 연주케 했고, 조정의 조회(朝會)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하는 등 궁정 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1445년(세종 27)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인수부윤(仁壽府尹)과 중추원 부사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으며, 단종 원년에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그의 셋째 아들 계우(季愚)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반대하던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으나 그는 3조(三朝)에 걸친 원로로서 죽음을 면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落鄕)하였다.

우리나라 국문학사상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는 승의부위(承議副尉)를 지낸 석(碩)의 아들로 경북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시명(詩名)을 떨친 그는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別侍衛)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의 막하로 종군, 공을 세우고 1598년 왜군이 퇴각하자 군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 수문장·선전관을 지낸 후 조라포 수군만호(助羅浦水軍萬戶)로 부임하여 군비를 확충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고, 1630년(인조 8) 노인직으로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이 되었다. 도학(道學)과 조국애, 그리고 자연주의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천재적인 창작력을 발휘, 전쟁중에도 서정과 조국애가 넘치는 작품을 썼으며 무인다운 기백과 신선미로 웅장한 시풍(詩風)을 이룩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계승하여 가사문학(歌辭文學)을 발전시켰고, 시조 60여 수가 전한다.

조선 실학(實學)의 태두(泰斗) 제가(齊家)는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이덕무(李德懋)·류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더불어 〈시문4대가(詩文四大家)〉로 일컬어 졌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한 「북학의(北學議)」를 작성하여 그를 바탕으로 기구와 시설의 개선, 불합리한 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문경(聞慶)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과 항전했던 세화(世和)가 학문과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중빈(重彬)은 1943년 대법문(大法門)을 강설하여, 한일합방 후 의병을 모아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영철(永哲)과 함께 명문(名門) 밀양 박씨를 빛낸 굴지의 의인(義人)으로 손꼽혔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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