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 근조화환 갯수 제한에 관해..

장례식장 근조화환 갯수 제한에 관해..

작성일 2013.04.1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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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식을 할때 커다란 근조화환들을 많이 보내쟎아요.

 

그런데 대학병원 장례식장의 경우 근조화환의 갯수 제한같은게 있는곳도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경우 일반적으로 몇개정도로 허용하는지 알려주세요.

 

병원마다 다르다는 답변보다 일반적으로 평균 몇개까지 되는지만이라도 가르쳐 주세요.

 

감사합니다..


#장례식장 근조화환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병원 장례식장에 면적에 따라서 다르지요

일반실,

특실,

VIP실

VVIP실등 각각 다릅니다

조화는 적으면 그렇고요

적정하면 좋겟지요

 

질문자 인사

궁금한 점이 시원하게 해결되었어요! 답변확정늦어서 죄송해요 ㅜㅜ 너무귀차나서 못햇어요 ㅎ

옛날 오늘날의 장례 모습 비교하기
옛날과 오늘날 장례 모습의 다른 점
구분 옛   날 오늘날
장소 병원, 전문 장례식장
옷차림 삼베옷, 짚신 검은색 양복이나 한복, 삼베 헝겊
기간 5일이나 7일 3일이나 5일
운반 상여 영구차
묘지 공동묘지, 납골당, 수목장 등
탈상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지냄. 49일이나 1년 만에 탈상을 함.

옛날과 오늘날 장례 모습의 같은 점
· 여러 사람들이 도와준다.
· 돌아가신 분이 좋은 곳으로 가길 기원한다.
· 돌아가신 분을 정성껏 받들고 예절을 지킨다.
· 가족, 친척, 이웃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슬퍼한다.
<옛날의 장례>
<오늘날의 장례>



 

절은 두번 절반 입니다

돌아가신분에게는

두번 크게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 허리를  반절 정도 굽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주에겐 한번, 한번은 크게 절하고 일어섰다가 

반절 구브리고 엎드려서  위로에 말을 전하면 되겠습니다

각 지역, 지방마다 조금씩은 다르오니 

먼저 앞서서 조문 하시는 분들을 보아서 눈치껏 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하게 망인에게는 두번

살아있는 상주에게는 한번입니다 

반절이란 일어섰다가 허리를 굽히는 것을 말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조문객의 옷차림(남성)

    검정색 양복이 원칙이다.

    갑자기 통지를 받았거나 미처 검정색 양복이 준비되지 못한 경우

    감색이나 회색도 실례가 되지 않는다.

    와이셔츠는 반드시 흰색으로 하고 넥타이, 양말, 구두는 검정색으로 한다..

 

- 조문객의 옷차림(여성)

  검정색 상의에 검정색 스커트를 입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주름치마는 폭이 넓어서 앉아도 신경이 쓰이지 않아 편리하다.

   검정색 구두에 무늬가 없는 검정색 스타킹이 좋다.

   그밖에 장갑이나 핸드백도 검정색으로 통일시키고,

   또한 되도록 색채화장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문요령

 

 

문상(조문)시 지켜야 할 예법

 


 


 

영정 앞에 절할 때는 남자는 오른손, 여자는 왼손을 위로

경사와 달리 애사 때는 자리가 자리인 만큼 최대한 격식을 차려야 한다.

상가집에 가면 빈소에 들어가 먼저 상주와 목례를 한 다음,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성냥이나

라이터로 향불을 붙이고 손바닥으로 바람을 일으켜 불을 끈 후 향로에 꽂는다.

간혹 입으로 불을 끄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실례이다.

 

향로에 향을 꽂은 후에는 영정을 향해 두 번 절을 해야 하는데 남자는 오른손이,

여자는 왼손이 올라가도록 해야 한다

(참고로 세배할 때는 정반대로, 남자는 왼손을,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한다).

절을 할 때 여자는 원래 의 원리에 따라 4배를 해야 하지만

최근에는 성별에 관계없이

* 재배로 바뀌고 있다.

 

고인에게 예를 다했다면 상주와 맞절을 한 번 하고

"삼가 고인을 명복을 빕니다",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라고 애도의 뜻을 전한다.

고인이 편하게 떠났거나 천수를 누렸다고 해도

"호상이라 다행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문상객의 자세가 아니다.

  

   * 재 배 

     선절()=한걸음 물러서 45도이상 깊숙이 숙이고 7초 정도 머무른다.
     앉은절남 :한걸음 물러서 재배한다.

                  여 :4배가 원칙이지만 재배도 무방하다.
  

상가의 문상예절을 따르는게 예의

상가의 종교가 자신의 종교와 달라 난처할 때가 있다.

종교마다 문상예절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는 자신의 종교보다는 상가의 종교에 맞는 예법을

따르는 게 좋다.

예컨대 영정 앞에 향 대신 흰 국화가 놓여 있다면

꽃을 제단 위에 놓고 묵념이나 기도를 올리면 된다.

사람들이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바로 꽃의 방향.

문상은 떠나간 고인에게 예를 다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받는 사람이 물건을 받기 편하게 드린다는

생각으로, 꽃의 줄기가 고인을 향하게 해야 한다.

 
여러 명이 문상을 할 때, 분향은 대표 한 사람만

문상을 여럿이 갔을 때 모든 사람이 다 분향해야 하는지,

아니면 한 사람만 해야 되는 것인지 몰라

우왕좌왕할 때가 있다.

두세 명 정도라면 한 사람 한 사람 분향해도 되지만,

그 이상의 숫자일 때는

대표 한 사람만 분향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 한국고전번역원의 조언이다.

또 여럿이 한꺼번에 고인이나 상주에게 절을 할 때

고개를 언제 들어야 할지 눈치를 보는 수가 있다.

먼저 고개를 들었다가 다른 사람이 아직 들지 않은 것을 보고

다시 고개를 숙이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이것은 꼭 통일해야 할 필요는 없고 자연스럽게 하면 된다.

다만 상주와 맞절을 할 때는 상주보다 먼저 고개를 들어 주는 것이 좋다.

 
향불은 세 개를 피우는 것이 원칙

향은 원래 세 개를 분향하는 것이 원칙이다.

세 개의 향불은 천신과 지신,

그리고 조상에게 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 개를 붙여도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

다만 홀수가 길한 숫자를 뜻하기 때문에 반드시 한 개나 세 개를 해야 한다.

영정 앞에서 올리는 절은, 한 번은 천신에게 잘 받아 달라는 의미,

두 번째는 지신에게 잘 떠나게 해 달라는 의미이다.

# 음양사상에 따르면 1양,  2을 뜻한다.

즉 살아 있는 사람이 이고 죽은 사람은 이기 때문에 고인에게는 절을 2번 한다.

상주와 하는 맞절은 상주의 조상들에게 상주를 잘 보살펴 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의금 봉투엔 '賻儀'

조의금은 봉투 겉에 '賻儀'(부의)로 쓰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며

謹弔(근조), 弔儀(조의), 香燭臺(향촉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등도 무난하다. 

 

문상예절

 

문상1

문상2

①외투는 대문 밖에서 벗어 든다.

②상제에게 목례

③영정 앞에 무릎꿇고 분향한다

(향을 한개나 세개를 집어 성냥불이나 촛불에 붙인 다음

 손가락으로 가만히 잡아서 끄던가 왼손을 가볍게 흔들어 끈 다음

 두손으로 향로에 꽂는다-절대로 입으로 끄지 말 것).

 문상3

문상4

④영정에 재배하고 한 걸음 물러선다.

⑤상제에게 절을 하며, 인사말을 한다.

상제의 부모인 경우 : "상사에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상제의 아내인 경우 : "위로할 말씀이 없습니다"

상제의 형제인 경우 : "상을 당하셔서 얼마나 비감하십니까"



조문(弔問)과 조상(弔喪)

상가에서 가서 상주에게 인사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것을 '조문'이라 하고,

반면 죽은 이에게 예를 올리는 것을 '조상'이라고 한다.
'문상'은 조문과 조상을 합한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 말들을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다.

 

- 가까운 친지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 -

    가까운 친척, 친지 가운데서 상을 당한 연락이 오면 가급적 빨리 상가에 가서

    상제를 도와 장의준비를 함께 하는 것이 좋다.
    상가에 가면 우선 상제들을 위로하고 장의 절차,

    예산관계 등을 상의하고 할 일을 서로 분담하여 책임감있게 수행해 준다.

    그러나 내용도 잘 모르면서 이일 저일에 참견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또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복장을 바르게 하고 영위에 분향재배하며,

    상주에게 정중한 태도로 예절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조문절차

(1) 외투는 대문 밖에서 벗어 든다.
(2) 상제에게 목례
(3) 영정 앞에 무릎꿇고 분향
(4) 향나무를 깎은 나무향이면 왼손을 오른손목에 바치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향을 집어 향로불 위에 놓는다.
(5) 만수향과 같이 만들어진 향(선향 : 線香)이면 한개,

     세개 집어 성냥불이나 촛불에 붙인 다음 손가락으로 가만히 잡아서 끄던가

     왼손을 가볍게 흔들어 끈 다음 두손으로 향로에 꽂는다.

     (입으로 불어 끄지 않도록 한다.)   

     선향은 하나로 충분하며,

     여러개일 경우 모아서 불을 끄더라도 꽂을 때는 하나씩 꽂아야 한다.
(6) 영정에 재배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상제에게 절을 하며,

      인사말을 한다.
(7) 인사말
    고인에게 재배하고,

    상주에게 절한 후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물러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며 또는 예의에 맞다.

    상을 당한 사람을 가장 극진히 위로해야 할 자리이지만,

    그 어떤말도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 더욱 더 깊은 조의를 표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굳이 말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삼가조의를 표합니다.',

   '얼마나 슬프십니까?'

    또는 '뭐라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정도로 간략하게 하는 것이 좋다.
(8) 조장(弔狀)·조전(弔電)
    불가피한 사정으로 문상을 갈 수 없을 때에는 편지(弔狀)나 조전(弔電)을 보낸다.
    부고(訃告)를 냈는데도 문상을 오지 않았거나 조장 또는 조전조차 보내오지 않은

    사람과는 평생동안 말도 않고 대면도 하지 않는 것이 예전의 풍습이다.
(9) 조위금(弔慰金) 전달

- 조위금 봉투에는 초상의 경우 '부의(賻儀)'라 쓰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며

    그밖에 '근조(謹弔)', '조의(弔 儀)', '전의(奠儀)', '향촉대(香燭臺)'라고 쓰기도 한다.

- 조위금 봉투 안에는 단자(單子)를 쓴다.

    단자란 부조하는 물건의 수량이나 이름을 적은 종이를 말한다.

    단자는 흰종이에 쓰는데 단자를 접을 때 세로로 세 번 정도 접고

    아래에 1cm정도를 가로로 접어 올리며 가능하면

    조의(弔儀) 문구나 이름 등이 접히지 않도록 한다.

 

- 부조하는 물품이 돈일 경우에는 단자에 '금 ○○원'이라 쓴다.

    영수증을 쓰듯이 '일금 ○○원정'으로 쓰지 않도록 한다.

    부조하는 사람의 이름 뒤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되지만

   '근정(謹呈), 또는 '근상(謹上)'이라고 쓰기도 한다.

    단자의 마지막 부분에 '○○댁() 호상소 입납(護喪所入納)'이나

'상가(喪家) 호상소 귀중'과 같이 쓰기도 하나

     요즘은 호상소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쓰지 않아도 무방하다.

(10) 자기가 집안 풍습이나 신봉하는 종교가 다르더라도

      조상을 갔을 경우 해당 상가의 가풍에 따라 주는 것이 좋다.
(11) 망인이 연로하셔서 돌아가셨을 때 일반에서는

     호상(好喪)이라 하여 웃고 떠드는 일이 있으나 이는 예의가 아니며,

     돌아가신 분을 앞에 두고 호상이란 있을 수 없다.

 

* 상주 서는 위치
    신위 쪽에서 볼 때 왼편으로 상주가 늘어선다.

    안상주들은 오른편으로 서는데 장소가 좁다면 상주의 뒤쪽에 서 있어도 무방하다.

 

* 조문 받는 예절
    상주들 사이에 종교 때문에 논란을 벌이는 일이 있는데 고인 중심으로 생각한다.

    공수(拱手·손을 앞으로 모으는 것)는 흉사이므로 남자는 오른손이,

    여자는 왼손이 위로 가도록 포개 잡는다.

    상주는 조문객이 하는 절차에 맞춰 응접한다.

    맞절할 때 조문객이 자신보다 윗사람이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나중에 고개를 든다.

    조문객의 인사말에는

    ‘고맙습니다’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고 답한다.

 

* 호상소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거나 조객록에 서명한다.

    휴대전화를 끄고 재배할 때 담뱃갑이나 펜이 떨어지지 않도록 살핀다.

 

* 분향
    상주에게 목례하고 영정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분향한다.

    나무향이면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향을 집어 향로 속에 세 번 넣는다.

    긴 향은 한두 개 집어 불을 붙인 다음 향로에 정중히 꽂고 일어선다.

출처 : http://blog.daum.net/yescheers

*분향 예절*

홀수의 향을 집어 두 손에 맞잡고 가슴부위까지 들어 올린 후

故人을 향해 목례를 올린 후 향에 불을 지펴서 향로에 꼽은 후

목례를 올린후 한발 뒤로 물러서서 절을 올린다.

 

*헌화 예절*

두 손으로 꽃송이를 들고 가슴부위까지 들어 올린 후

故人을 향해 목례를 올린 후 영좌 앞에 꽃송이(꽃봉우리)가

자신 쪽(꽃대가 故人쪽)으로 되게 하여 헌화하고

목례를 다시 올린 후 한발 뒤로 물러서서 목례(기도) 또는 절을 올린다.

 

 

한국인의 죽음의 이해

죽음, 또 다름 삶

현재 한국사회에서 죽음은 삶의 자리에서 처리되지 않는다.

삶이 이뤄지던 집과 마을에서 병원이나 장례식장으로 옮겨 죽음을 처리하는 것은

이미 일반화되었다.

이렇게 죽음은 점점 삶의 현실에서 물러나는 중이다.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죽음은 달랐다.

죽음을 삶의 자리에서 맞이하였으며, 삶고 죽음은

단절되지 않았다.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또 다름 삶의 시작으로 여겨졌다.

죽은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산사람과 교류하며 관계를 유지하였다.

 

준비하고 맞이하는 죽음
흔히들 죽음이란 한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는 두려운 일로서,

죽음과 함께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산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여긴다.

이런 점에서 죽음은 회피의 대상이며,

이른바 상장례는 죽음을 확인하고 죽은 사람을 산 사람들의 세계에서 분리,

처리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죽음과 관련된 한국사회의 관행이나 상장례를 보면 이와는 다른 태도가 발견된다.

죽음을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준비하고 맞이할 것으로 여긴다.

한국사회의 죽음 관련 관행의 하나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나 그들의 가족이

죽음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노인들은 결혼식을 앞둔 젊은 남녀처럼 죽음을 준비한다.

묏자리를 미리 구해놓기도 하며, 수의도 미리 마련한다.

자식들 역시 나이가 많은 부모를 위해 그러한 준비를 해드리는 것을 효도로 여긴다.

이뿐만이 아니다. 노인들은 자손들과 죽은 뒤의 일처리 등에 대해 상의하기도 한다.

가족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돌아가시면 제사상에 제일 좋아하시던 음식을 놓아 드리겠다?는 말이 오고 가기도 한다.

이런 말에 노인들은 흐뭇해한다.

이러한 관행은 한국사회에서 죽음을 앞둔

노인이나 그 자식들에게 죽음은 금기의 대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축제의 자리인 상갓집
죽음을 단순히 회피와 금기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태도는

한국 사회의 상갓집 풍경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한국의 상갓집은 어두움과 슬픔이 짓누르는 무겁고 엄숙하기만 한 자리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호상好喪의 경우,

상갓집은 축제의 자리였다.

가족과 친지, 마을사람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술과 음식을 즐기고 춤과 놀이가 행해졌다.

심지어는 ?상주를 웃겨야 잘 하는 문상이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지금은 상장례 공간의 변화,

살아가는 일의 분주함으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마도 한국문화를 전혀 모르는 어떤 외국인이 그런 상갓집에 들어섰을 때

상갓집인지 잔칫집인지를 구분하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상갓집의 축제적 분위기는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긴 역사를 갖는다.

멀게는 이미 고구려 때부터 장송葬送에 가무歌舞를 행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부모의 장례 때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피리를 불면서

애통해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풍경은 각 지방에서 발인 전날에 행해졌던

손모듬, 대도름, 댓도리, 생여도듬, 다시래기 등의 상여놀이를 통해서 이어져왔다.

상여놀이는 출상 전날에 상여꾼들이 운구준비를 위해 발과 호흡을 맞출 겸

빈 상여를 메고 노는 놀이인데,

상갓집을 흥겨운 놀이판 분위기로 바꿔 버린다.

한국의 전통적 상장례에서는 축제적 분위기가 자연스러웠음을 말해준다.

그것이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은 죽음이 존재의 끝이나

소멸이 아닌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라는 이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죽음 : 새로운 존재의 시작
한국인이면 누구나 거치는 전통적인 상장례는 죽음을 확인한 뒤 죽은 사람을

산 사람들에게서 분리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죽은 자의 존재를 변화시켜 조상의 세계에 좌정시킨다.

그리고 조상으로 자리 잡은 죽은 자는 죽음 이후에도 후손들과 교류한다.

전통 상장례에서(육체적) 죽음은 혼()과 육체가 분리됨을 의미하며,

이는 보통 호흡 즉 숨의 끊김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이해는 상장례 전 절차에서 고르게 나타난다.

상장례 전 과정은 주검을 처리하는 절차(이른바 장례식)와 혼을 처리하는

절차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면, 혼과 육체의 분리 즉 죽음을 확인하고,

주검을 처리한 다음에 영을 모시는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발인 때의 장례행렬 역시 혼을 모시는 영여靈輿

혼이 빠져나간 육체를 모시는 상여喪輿로 구분한다.

이는 요즘의 장례행렬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요즘의 장례행렬은 영정을 실은 승용차와 시신을 실은 장의차로 이뤄지는데,

승용차는 영여, 장의차는 상여 역할을 한다.

 

주목할 것은,

상여에 실린 죽은 사람의 육체는 장지에 매장되어 집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데,

영여에 실린 죽은 사람의 혼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매장 이후 탈상까지의 상장례 절차는 육신을 장지에 묻고

집으로 돌아온 죽은 자의 혼에 대한 절차이다.

이런 절차를 통해 한국의 전통 상장례는 죽은 사람을 조상으로 새롭게 위치 짓는다.

즉 살아있는 존재(혼과 육체의 소유자)에서 과도기를 거쳐 몸 없이

영혼만을 가진 죽은 사람의 세계(조상의 세계)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상장례를 통해 조상으로 자리 잡은 죽은 자는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는 가족들과 여전히 관계를 유지한다.

돌아가신 조상의 신주를 모신 유교식 사당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집안에 조상을 모시는 공간인 사당이 있고 그것이 가정생활의 중심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집이란 조상과 후손이 함께 사는 장소이며,

조상 역시 살아있는 후손과 함께 가족의 성원 가운데 하나임을 말해준다.

조상은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았을 때처럼 가족공동체의 성원으로 남아있다.

민간의 가정신앙에서도 조상은 집안 신의 하나로서 조상단지나

그 외 다른 형태로 집안에서 모셔진다.

또한 기제忌祭, 시제時祭, 차례茶禮를 비롯한 다양한

유교제사를 통해 끊임없이 살아있는 후손들과 만난다.

 

이런 점에서 죽은 조상은 살아있는 후손들과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후손들과 공존하며 지속적인 상호관계를 유지한다.

한마디로 죽은 사람은 그저 죽어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a living dead)?이다.


삶과 분리되지 않는 죽음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죽음은 삶과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았다.

유교식 사당이나 가정신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집은 산 사람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같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또한 죽은 사람은 사후에도 여전히 산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전통 상장례의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죽음의 처리는 병원이나 장례식장에서 이뤄진다.

한 사람의 죽음을 판단하고 상장례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삶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병원의 의사나

장례식장의 장례 예식사, 각 종교의 사제들이다.

 

반면에 한국 전통사회에서 죽음의 처리는 죽은 자의 생전의 삶의 공간인 집에서,

함께 삶을 살아왔던 가족이나 마을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

망자는 자신이 기거하던 방에서 숨을 거두고,

자신의 삶의 공간이었던 집과 마을에서 진행되는 상장례를 거쳐

조상이 된 후 다시 가족들과 통합된다.

이처럼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처리하는 전통 상장례는

자연스럽게 죽음과 삶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상을 당한 가족만이 아니라 온 마을사람들이 참여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진행되었던 상장례 과정 역시 죽음이 누구나 거치는

자연스런 삶의 한 과정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이전 한국사회에서 한 개인의 죽음은 당사자와 그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속해 있는 마을과 같은 지역공동체 전체의 일이었다.

 

이처럼 죽은 자가 살았던 삶의 공간인 집과 마을에서 공동체적 방식으로 이뤄지던

한국의 전통상장례는 삶과 죽음을 분리시키지 않고,

죽음이 삶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반면에 병원이나 장례식장 같은, 일상의 삶의 공간이 아닌

죽음의 처리를 위해 설정된 별도의 기능적 공간에서 망자의 삶과는 무관한,

장례 업무를 전담하는 기능적 인물에 의해 처리되는 오늘날의 상장례 방식은

삶과 죽음의 분리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이렇듯 전통적인 죽음문화의 기저에는 죽음이 존재의 소멸이나 무화武火가 아닌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라는 이해가 놓여 있다.

죽음과 함께한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양태가 변화할 뿐이다.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서 그 관계를 지속해 간다.

죽음은 완전한 떠나감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 즉

조상으로 다시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죽음은 두려운 것도, 외로운 것도 아니다.

글 : 이용범 전북대학교 HK연구교수

사진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민속박물관,

연합콘텐츠

 

 

 

 

 

 

旺生(왕생)을 축원하는  이승의 마지막 길

사람의 죽음은 세가지가 있다.

죽음이 있어서 인간의 형이 상학이 시작되었다

심각한 의미의 죽음 철학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3인칭네 죽음이 있다

이는 아무나 겪는 무의미한 그와 그녀의 죽음이다

2인칭에 죽음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너나 당신의 죽음이니 죽음의 심각한 의미를 가진다

1인칭의 죽음은  있다.

나의 죽음이니 새삼스럽고 일련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새로운 차원의 죽음 철학이 마련된다  

 

 

죽음의 발명, 인간의 위대한 창조
우리의 전통적 문화재에서 창안한 죽음은

복수의 1인칭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차원과 양상이 달라진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놀이이자 신명이 시작된다.

우리의 죽음이므로 서로 애달파하고 슬퍼하면서 벌이는

잔치와 놀이의 창조가 죽음에서 시작된다.

죽음의 소중한 완성을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공동체적 신명으로 전환되는 것이 죽음의 신명난 마무리 놀이가 된다.

죽음에 대한 철학과 예술은 인간의 탁월한 발명품이다.

특히 죽음에 대한 신명난 놀이와 축제는

인간의 최고 발명적 고안이자 창조적 설계이다.

불교에서 이를 두고 생자필멸이라고 하는 명제로 간명직절하게 정리한 바 있는데,

이 말은 항구적 진리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어가며,

그러한 죽음이 저마다의 고유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한다.

 

진도 다시래기는 엄숙한 철학, 신명나는 축제 등의 다면적 면모를 가지고 있어

죽음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가 있다.

우리네 선인들의 죽음은 항상 이러한 충만한 철학적 자세와

신명나는 놀이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진도 다시래기는 일견 산만한 놀이 같지만 죽음의 철학과 신명을

극단적으로 예각화한 실례가 된다.


죽음의 신명, 놀면서 슬퍼하면서
다시래기는 전라남도 해안의 섬을 중심으로 전파된 특정한 놀이이다.

장례풍속에서 빈 상여놀이를 하는 전통이 특징적인데

이를 전남 진도와 같은 고장에서는

여러 가지 내용을 첨가하면서 다양한 구경거리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상을 당한 상주를 위로하고,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동 놀이로 새롭게 창안했다.

그러므로 빈 상여놀이를 하는 전통이 다면적으로 창안된 것이 바로 진도의 다시래기이다.

 

다시래기의 근간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빈 상여놀이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가령 타민족의 기록인

『수서隋書』 동이전 고구려조에서 우리네 장례 풍속을 두고서 말한

“초종을 치를 때는 모두 곡하고 울지만,

장사를 치르게 되면 북을 치고 춤추면서 죽은 이를 보낸다

初終哭泣 葬則鼓舞 作樂以送之.”는 기록은

우리네 장례 행위가 그들의 관점에서 특징적인

놀이의 형태로 부각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전통은 우리나라 전역에 흩어져 있는 점을 볼 수가 있으니,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를 대도둠이라 하고,

강원도나 경기도에서는 손모둠•걸걸이 등으로 지칭하고,

황해도에서는 생여도둠•영천도둠이라고 하며,

전라도에서는 상여 흐른다고 하거나

섬 지방에서는 밤달애•대울림 등으로 지칭한다.

이들은 일정한 상례 시에 이룩된 특정한 조직과 연관되고

이들의 계가 활성화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그 계꾼들이 모여서 일정한 놀이를 벌이는

전통이 일정하게 작동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상두계•향두계가 특히 중요하며,

이들이 일정한 조직으로 일정하게 놀이를 하는,

전통을 잇는 집단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래기가 창안된 전례는 단순하지 않다.

자체의 전통 속에서 우러난 것이지만 외지에서 들어온

특정한 놀이와 일정 부분 관련되어 있으며,

유력한 증거로 흔히 떠돌이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패 놀이와 유사함을 들어서

남사당패를 지적한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과연 남사당패였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와 동일한 성격의 집단은 오히려 사당패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쪽이든 다시래기에서 다양한 놀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자체의 전통과 외래의 전통을 융합하면서

새로운 놀이로 정한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시래기는 몇 가지 구체적인 놀이로 구성된다.

놀이의 바탕은 서로 유기적인 것은 아니고,

각각의 놀이 바탕이 자체적으로 완결되면서 삽화적 전개를 보인다.

주된 놀이 과정은

가상제놀이•거사와 사당놀이•상여놀이•가래놀이•뒤풀이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가상제놀이는 다시래기의 연희 목적을 해명하는 서장에 해당한다.

거사와 사당놀이는 장례의 근본 취지와 어긋나는 것으로 봉사•봉사처•중이

삼각관계를 벌이고 삼각관계 끝에 봉사처가 아이를 낳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죽음 끝에 성적인 탄생을 알리는 기이한 설정이 가장 특별한 내용이다.

상여놀이는 빈상여놀이의 전통 골격이 들어있는 대목이다.

이와 달리 가래놀이는 시신을 묻으면서 소리하는 전통을 재현한 것이다.

마지막에는 뒤풀이 여흥이 있다.


사람의 죽음이 발생하였는데 외설적인 성의 소재를 떠올리는 것은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의의가 있는 것임을 절감하게 한다.

죽음과 성은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서 기사회생하면서

죽음이 삶이게 하고 주검에서 생명의 환희로

전환하는 깊은 고민의 흔적이 반영되어 있다.

죽음은 사람의 갈등을 봉합하고 흩어진 사람을 모이게 한다.

화합의 극치가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지점과 바로 연결된다.

아이를 낳아놓고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탈춤에서도 이와 유사한 설정이 있다.

외설적 성이 소재가 아니라 외설적 성을 통해서 산 사람들의

새로운 길찾기가 시작되었음을 환기한다.

 

상여놀이는 상여를 두고 벌이는 놀이인데,

상두꾼들이 서로 발을 맞추고 상주를 태우면서 자신들이 진행해야 할

상여를 메는 놀이의 예행연습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상여놀이를 통해서 일련의 협화심을 발휘하고 놀이의 진행을 통해서

화합된 단결심을 구사하고 이 대목에서 상두꾼계의 위력이 발휘된다.

가래놀이 역시 매장 연습의 반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늘에 두둥실 올라가 구름을 타고 극락왕생을 위해서

저승길을 나서는데 치장을 아끼지 않는다.

삼색의 예단으로 상여를 장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죽은 인물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위해,

혼인식 가마를 꾸미듯 상여의 치장과 차비를 아끼지 않는다.

상여놀이의 전통을 상여와 관련지어서 보게 되면

상여놀이와 소리는 한바탕 그 자체로 축제이다.

상여소리의 형식은 진양장단•중머리장단•중중몰이장단•자진몰이장단의 놀라운

형식적 창조를 거듭해서 전국적으로 가장 특별한 소리를 창안하였으며,

그 점에서 가래소리 역시 같은 양상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의 길, 새로운 시
다시래기는 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지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전통적인 연희이다.

삶의 목표가 죽음인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죽음이 또 다른 시작임을 알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놀이임을 명시한다.

다시래기는 ‘다시 낳기’에서 왔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근거일 성 싶다.

다른 수식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네 삶의 근본적 양상이 바로 이와 관련된다.

근심과 즐거움, 신명과 슬픔은 서로 반대로 뒤집으면 된다.

그러므로 감정의 중도가 요구된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은 관련이 있는 핵심적 공통점에서

바로 극단을 넘어서는 중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다시래기에서 말한 슬픔과 신명은 서로 뒤집을 수 있는 근간이 된다.

슬픔이 신명이고,

즐거움이 근심이므로 망자의 극락왕생이 산 사람들의 기쁨이 된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길이 인생의 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 너머에 깊은 다시래기가 존재한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 이 세상에 길이 남기 위해

인간의 환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다시금 환기하게 된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순종하는 일이 필요하다.

무덤에 묻히는 주검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시래기의 근본 사상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영원 너머에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세계관적 믿음이 바로 다시래기의 미학이다.

글 : 사진·김헌선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 : 문화재청, 국립민속박물관

 

 

 

 

오늘날의 장례식 모습


① 3일 동안 치르는 집이 많으며,

    검은 색 양복을 입고 팔에 삼베 헝겊을 두릅니다.
② 장의 차를 이용하여 묘지로 갑니다.

 

장례식 복장(남자)
검정색 양복이 원칙이지만

미처 준비 하지 못한 경우 감색이나 회색 양복도 무방하다.

와이셔츠는 흰색으로 하고 넥타이, 양말, 구두는 검정색으로 한다.

 

장례식 복장(여자)
검정색 상의에 검정색 스커트 차림이 가장 무난하다.

구두, 양말(스타킹)도 검정색이 좋다.

화장도 연하게 하고 특히 핑크나 레 드 색상의 짙은 입술화장은 하지 않는다.

 

옛날의 장례식 모습

옛날 장례식에서는 힘을 모아 장례식을 도와주고

상여를 함께 메고 묘소까지 옮겨 주기도 하였습니다.
자식은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산소를 돌보며 살았습니다.

 

옛날 장례식 모습을 그려보면

     


① 5일이나 7일 동안 치르며,

    삼베로 지은 상복과 두건을 쓰고 짚신을 신었습니다.
② 온 마을 사람들이 와서 장례 일을 도와 주며

    상여를 메고 묘지까지 같이 갔습니다.

 

 조문은 글자 그대로 조문입니다

 

 

 

傳統 .喪. 葬禮 節次

 

전통(傳統) 상. 장례(喪. 葬禮) 절차(節次)

임종(臨終) 수시(收屍) 고복(皐復) 발상(發喪) () () ⇨소(小殮) 대렴(大殮)

성복(成服) 치장(治葬) 천구(遷柩) 발인(發靷) 운구(運柩) 하관(下棺) 성분(成墳)

반곡 (反哭)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 (三虞)졸곡(卒哭) 부제(祔祭) 소상(小祥)

대상(大祥 ) 담제 길제(吉祭)

 

초종: 초종(初終)이란, 보통 초상(初喪)이라는 말을 예문(禮文)에서 쓰는 말입니다.

그 본래(本來)의 뜻은 운명(殞命)에서 졸곡(卒哭)가지를 말하지만,

일반적(一般的) 로 말할 때에는 운명(殞命)에서 전()까지를 의미(意味)합니다.

 

1) 천거정침(遷居正寢)

患者 病勢 危急해 도저히 회춘(回春)할 可能性이 없으면 患者 정침(安房)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집 안팎을 깨끗하게 淸掃하고 患者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힙니다.

환자(患者)의 머리는 동(東)쪽을 향(向)하게 하여 북쪽 문 밑에 便安하게 모십니다.

네 사람이 조용한 가운데 환자(患者)의 팔과 다리를 주무릅니다.

천거정침(遷居正寢)은 가주(家主)에만 해당(該當)되고 가주 以外의 사람은 自己

거처(居處)하던 방(房)으로 옮깁니다.)

 

2) 유언(遺言)

患者의 병세(病勢)가 위급(危急)한 상태(狀態)에 빠지면 가족(家族)들은 침착(沈着)

태도(態度)로 주위(周圍)를 정돈(整頓)하고 운명(殞命)을 기다립니다.

이때에 病者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면, 病者가 대답(對答)하기 쉽도록 내용(內容)

간략(簡略)하게 묻고 그 대답(對答)을 기록(記錄)을 합니다.

병자(病者)가 자손(子孫) 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평소(平素) 미진(未盡)한 일이나 死後에라도 실행(實行)하고 싶은 일들에 대(代)

훈계(訓戒,)나  교훈(敎訓,) 그리고 재산분배(財産分配)에 대(代)한 유언(遺言)일 것입니다.

유언(遺言)은 원래(原來)자필(自筆)로 쓰는 것이 원칙(原則)이지만 시간적(時間的)

여유(餘裕)나 기력(氣力)이 없을 때는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른 사람이 대리(代理)로 써도 됩니다.

유언(遺言)은 이 세상(世上)을 영원(永遠)히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귀중(貴重)

말이므로 자손(子孫)들 친지(親知)들은 마땅히 그에 따라야 합니다.

 

3) 임종(臨終)

임종(臨終)이란 운명(殞命)이라고도 하는데 환자(患者)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손(子孫)들이나 친지(親知)들은 患者의 운명(殞命) 正中하고 경건(敬虔)하게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자(男子)의 임종(臨終) 여자(女子)가 지키지 않으며,

여자(女子)의 임종(臨終)은 남자(男子)가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손(子孫)일 경우(境遇)에는 이에 해당(該當)되지 않습니다.

 

4) 속광(屬纊)

환자(患者)의 손과 발을 잡고 患者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을 분명(分明)하게 알기 위해,

햇솜을 환자(患者)의 코 밑에 대놓고 患者의 숨을 그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속광(屬纊)이라고 합니다.

솜이 움직이지 않으면 완전(完全)히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患者 完全히 숨을 멈추지 않았을 때 곡성(哭聲)이 혼란(搖亂)하면, 운명(殞命)하는

이가 순간(瞬間)이 나마 마음이 不安하고 정신(精神)이 혼란(混亂) 할까 염려(念慮)

되므로 가족(家族)은 울음을 참고 조용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속광(屬纊)합니다

 

5) 수시(收屍)

숨이 끊어지면 눈을 감기고 준비(準備)한 햇솜으로

입, 코, 귀를 막은 에 머리를 높여 반듯하게 굅니다.

가족(家族)들은 자연(自然) 시신(屍身)을 붙들고 울게 되는데,

이때 친척(親戚)가운데 초종(初終)의 범절(凡節)에 익숙한 사람이 家族의 울음을 멈추게 하고,

시신(屍身) 굳기 전(前)에 손과 발을 주물러서 펴게 하고 수시(收屍)를 합니다.

收屍 을 닫고 하고, 屍體 安置 에는 불기운을 없애고 바닥에 짚을 깝니다.

백지(白紙)로 시신(屍身)의 얼굴을 덮고, 白紙나 베로 양쪽어깨를 반듯하게 묶습니다.

그 다음 턱을 괴고, 양손을 배 위에 올려놓는데 男子는 왼손을, 女子는 오른손을 위로 합니다.

白紙 또는 베로 시신(屍身)의 자세(姿勢)가 어그러지지 않게 팔과 다리를 묶습니다.

그런 다음 屍身을 시상(屍床) 위에 옮겨 누이고

홑이불로 덮은 후에 병풍(屛風)이나 가리개로 가립니다.

그 앞에 故人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양쪽에 촛불을 밝힌 다음,

중앙(中央)에 향(香) 피우고  곡(哭)을 합니다.

(이 수시(收屍) 절차(節次)를 소홀(疏忽)히 하면 손발과 몸이 뒤틀리고

오그라드는 경우(境遇)가   생기므로 정성(精誠)을 들여야 합니다.)

 

6) 고복(皐復)

고복(皐復)을 복(), 초혼(招魂), 또는 "혼(魂)을 부른다. "라고도 합니다.

죽은 사람의 흐트러진 혼(魂)을 불러 돌아오게 한다는 뜻으로, 사신(屍身)을 보지

않은 사람이 지붕 위로 올라가는데 남상(男喪)일 때는 男子가 올라가고, 여상(女喪)

일때는 女子가 죽은 사람이 입던 속적삼을 들고 올라갑니다.

쪽 끝으로부터 지붕의 中央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그 옷의 깃을 잡고 오른 손 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 쪽을 향(向)해 휘두릅니다.

이때 크고 긴 목소리로 "00 00 00 00 學生 000() 복 복 복!" 하고

외친다. 죽은 자가 관작(官爵)이 있으면 "00관() 0공()"이라 하고, 죽은 자가

여자일 때는 남편(男便)의 관작을 좇아 "00부인 0씨"라 하고,

관작(官爵)이 없으면 "유인(孺人) 00 씨"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고복(皐復)할 때는 상주(喪主)이하 모든 家族이 울음()을 멈추어야 한다.

이것은 떠나려는 혼(魂)이 다시 사신(屍身)으로 돌아와 되살아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살아나지 않으면 정말로 죽은 것이 확인(確認)되는 것입니다.

고복(皐復)한 후(後)의 옷[復衣]은 지붕 위에 그대로 놓거나 사체(屍體)의 가슴 위에 올려놓는 ,

각(各) 지방(地方)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또 지방(地方)에 따라서는 주소(住所)와 관작(官爵)과 성을 말하지 않고 "복! 복! 복!" 하기도 하고,

"돌아보고 옷이나 가지고 가시오! "라고 하기도 합니다.

죽음이 확인(確認)되고 사잣밥을 놓을 때에는 먼 하늘을 쳐다보고 고인(故人) 부르며 땅을 치고

곡(哭)을 합니다.

초혼 예 (招魂 ) "사바세계 해동(해동 대한민국)海東 大韓民國 00 (. )

00(. ) 00 (. . ) 00番地 00 학생. 유인(學生. 孺人)本貫 000

(. )00 00 00 00 000 0 별세(別世) 복! 복 ! 복! "

 

7) 사잣밥

고복(皐復)을 한 다음 밥에 밥 세 그릇과 술 석 잔과 백지(白紙) 한 권,

북어(北魚) 세 마리, 짚신 세 켤레, 약간(若干)의 동전(銅錢)을 얹어 놓고 촛불을 켜서 뜰아래나

대문(大門) 밖에 차려놓는데,  이것을 사잣밥이라 합니다.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사자(使者)를 시켜 사람의 목숨을 거두게 하는 것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에 그 저승사자(使者)를 대접(待接) 便安히 모셔가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8) 발상 과 상주(發喪 喪主)

고복(皐復)이 끝나면 아들, 딸, 며느리, 즉 자손들이 머리를 풀고

곡(哭)을 하며 옷을 갈아입는데, 남자(男子)는 심의(深衣)를 입고 섶을 여미지 않으며,

여자(女子)는 흰옷으로 갈아입고 모두 맨발로 신을 신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상제(喪祭)의 모습을 갖추고 초상(初喪) 난 것을 밖에 알리는 것을 발상(發喪)이라 합니다.

발상(發喪)과 동시(同時)에 상중(喪中), 기중(忌中) 또는 상가(喪家) 라고 써서

문(門)밖 또는 길목에 붙입니다.

이렇게 初喪이 나면 예제(禮制)에 따라 상주(喪主),주부(主婦),호상(護喪),사서(司書),

사화(司貨)를 정합니다.

상주(喪主)는 상사(喪事)의 중심(中心)이 되는 상인(喪人)을 가리키는데, 죽은 사람의

맏아들이 상주(喪主)가 되는 것이 원칙(原則)입니다.

맏아들이 없고 맏孫子가 있을 때는 작은 아들이 있어도 맏손자(孫子)가 상주(喪主)

되고, 상주(喪主)가 된 장손(長孫)을 승중(承重) 또는 승중손(承 重 孫)이라 합니다.

주부(主婦)는 여자(女子) 상주(喪主)로서 아내가 대신(代身)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장성(長成)한 아들이 있더라도 아버지가

주상(主喪)이 되며, 아내가 죽었을 때는 남편(男便)이 주상(主喪)이 됩니다.

 

9) 호상과 사서. 사화 (護喪 史書, 私和)

호상(護喪)이란 발상(發喪)이 끝나면  상주(喪主)를 도와서 상사(喪事)의 모든 일을

처리(處理)하는 사람으로 서, 상사(喪事)를 알리는 일에서부터 치상(治喪)의 범절

(凡節)까지를 주관(主管)합니다.

그러기에 호상(護喪)은 상가(喪家)의 모든 것을 잘 아는 친척(親戚) 또는 친구(親舊)가운데에서

상례(喪禮)에 밝고 경험(經驗)이 풍부(豊富)한 사람을 선임(選任)합니다.

사서(私書)는 상사(喪事)에 관계(關係)되는 모든 문서(文書)를 맡은 자(者)이며,

사화(私和) 장재(掌財)라고도 하며 장례(葬禮)를 치르는데 있어 물품(物品)

금전(金錢)의 출납(出納) 관리담당(管理擔當)하는데, 친척(親戚)이나 친지 중(親知 中)에서

선임(選任)합니다.

사화(私和)가 일을 진행(進行)시킬 때는 공책(空冊)을 세권(券)을 만들어 놓고,

에는 물품(物品)이나 금전(金錢)의 출납(出納)을 기록(記錄)하고,

다음 한에는 조문객(弔問客)의 부의금(賻儀金) 기록(記錄)하는 책(冊)으로서

그 책의 이름을 부상(父喪)일 때는 조객록(弔客 錄)이라 쓰고,

모상(母喪)일 때는 조위록(弔慰錄)이라고 씁니다.

 

10) 전()

전()이란 고인(故人)이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섬기기 위해 술,

과일 을 차려 놓은 것으로,

집사(執事)가 포()와 식혜(食醯),과일 을 탁자위에 놓으면 축관(祝官)이 손과 술잔을 씻고

술을 따라 올립니다.

술은 잔에 가득 차게 부어 시신(屍身)의 오른쪽 어깨에 가까운 곳에 놓습니다.

이것을 염습(殮襲)이 끝날 때까지 날마다 한 번씩 행(行)합니다.

집사(執事)와 축관(祝官)이 전()을 올리는 이유(理由)는 주상(主喪)은 슬프고 애통 (哀痛)해 하므로

자신(自身)이 올리지 못하기 때문에 집사(執事)가 대행(代行)하는입니다.

단 절은 하지 않습니다.

 

11) 복인(服人)

복인(服人)의 범위(範圍) 故人의 8 以內의 친족(親族)으로 합니다.

복인(服人) 男子 상제(喪制)들은 흰 두루마기를 입되 부상(父喪)이면 왼쪽소매,

모상(母喪)이면 오른쪽 소매에 팔을 꿰지 않고 소매를 빼서 뒤로 넘깁니다.

섶을 여미지 않은 채 안옷고름으로 조금 매기만 합니다.

여자상제(女子喪祭)들은 머리를 풀고 흰 옷을 입습니다.

 

12) 치관(治棺)

호상(護喪)이 목수(木手)나 관장(棺匠)을 시켜 나무를 골라 관(棺)을 만들게 합니다.

나무 중(中)에는 유삼(油衫)이 제일(第一)이고 잣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그리고 오동나무 순 입니다.

관재(棺材)는 천판(天板), 지판(地板)을 한 장씩, 사방판(四方板) 네 장을 準備합니다.

두께는 세치(약9센티)나 두 치 반(약 7.5센티)으로 하며, 높이와 길이는 屍身의 길이

와 부피에 맞도록 합니다.

칠성판(七星 板)은 염습(殮襲)할 때 시신(屍身)밑에 까는 널빤지로 두께가 다섯 푼이라 합니다.

옛날에는 父母가 회갑(回甲)이 지나면 이미 관재(棺材)를 준비(準備)하고 옷 칠을

하여 소중(所重)히 보관(保管)했다가 사용(使用)하는 예(例)가 많았습니다.

 

13) 부고(訃告)

부고(訃告)는 호상(護喪)이 상주(喪主)와 의논(議論)해 친척(親戚)과 친지(親知)에게

신속(迅速)하게 전(傳)합니다. 부고장(訃告章)은 백지(白紙)에 붓글씨로 쓰는 것이 正中하지만

장수(張數)가 많을 때는 인쇄(印刷)로 하고 봉투(封套)만 붓글씨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부고(訃告)를 알리는 方法으로는 전인 부고(專人 訃告 : 直接 사람이 하는 訃告),

우편(郵便 訃告,) (新聞 訃告)가 있습니다.

사후(死後)의 칭호(稱號)는 부고(訃告)를 보내는

것이므로 喪主의 아버지면 대인(大人), 어머니면 대부인(大夫人), 할아버지면 왕대인(王大人),

할머니면 왕대부인(王 大夫人), 아내일 때는 망실(亡室) 또는 합부인(閤夫人),

同生일 때는 망제(亡弟)라 씁니다.

 

14) 습(襲)

습(襲)은 사체(屍體)를 닦고 수의(壽衣)를 입힌 뒤 염포(殮布)로 묶는 절차(節次)로서

엽 습(殮襲) 또는 습염(襲殮)이라 합니다.

먼저, 향(香)나무 삶은 물이나 쑥을 삶은 물로 시신(屍身)을 정하게 씻기고 나서

수건(手巾)을 닦고 머리를 빗질하고 손톱과 발톱을 깍 아 주머니에 넣습니다.

이것이 끝나면 시신(屍身)을 침상(寢牀)에 눕히고 수의(壽衣)를 입히는데,

옷은 모두 오른쪽으로 여밉니다.

다음으로 습전(襲展)이라 하여 제물(祭物)을 올리고 주인이하 (主人以下)모두가 자리에서

곡(哭)을 합니다.

이어 시신(屍身)의 입 속에 구슬과 쌀을 물려주는데 이를 반함(飯含)이라 합니다.

염습(殮 襲)의 절차(節次)가 끝나면 집사자(執事者)는 이불로 시신(屍身)을 덮습니다.

이를 졸습(卒 襲)이라 합니다.

이때 화톳불을 피우고 영좌(靈 坐)를 꾸밉니다.

교의에는 혼백(魂帛)을 만들어 얹고 명정(銘旌)도 만들어 세워 놓습니다.

이 의식(儀式)이 끝나면 친족 친지(親族 親知)들이 들어가서 곡(哭)을 합니다.

 

15) 소렴(小殮)

소렴(小殮)이란 시신(屍身)을 옷과 이불로 싸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다음날 아침 날이 밝으면 執事者 小殮에 쓸 옷과 이불을 준비해 놓습니다.

머리를 묶을 삼끈과 베 끈을 준비(準備)하고, 소렴 상(小殮 床)을 마련하고 시신

(屍身)을 묶을 베와 이불과 옷도 준비(準備)합니다.

이것이 끝나면 제물(祭物)을 올린 다음에 소렴(小殮)을 시작(始作)합니다.

우선 屍身을 소렴 상(小殮 床)에 눕히고 옷을 입히는데, 옷은 좋은 것으로 골라서

입히고 이불은 겹으로 합니다.

옷을 입힐 때는 왼편으로부터 여미되 고름은 매지 않으며,

손은 악수로 싸매고 선(綿) 목으로

눈을 가리고 폭건(幅巾)과 두건(頭巾)을 씌웁니다. 이불로 고르게 싼 다음,

장포(長布) 두 끝을 찢어 각각 매고 속포(贖布)로 묶습니다.

이때 속포(贖布) 한쪽 끝을 세 갈래로 찢어서 아래로부터 次例로 묶어 올라갑니다.

 

16) 대렴(大殮)

대렴(大殮)이란 소렴(小殮)이 끝난 뒤 시신(屍身)을 입관(入棺)하는

의식(儀式)으로서 소렴(小殮)을 한 이튿날,

즉 죽은 지 사흘 째 되는 날에 합니다.

날이 밝으면 집사자(執事者)는 탁자(卓子)를 가져다가 방 동( 東)쪽에 놓고,

옷 한 벌과 이불 둘을 준비(準備)합니다.

시신(屍身)을 맬 때는 세로는 한 폭을 셋으로 쪼개서 소렴(小殮) 때와 같이 하고 가로는 두 폭을 씁니다.

다음으로 관(棺)을 들여다가 방 서( 西)쪽에 놓고 입관(入棺)하는데

이때 제물 (祭物)을 올리는 것은  소렴(小殮)때와 같이 합니다.

이때 자손(子孫)과 (女)들은 손을 씻습니다.

대렴 면(大殮 錦)으로 시신(屍身)을 싸되 먼저 발을 가린 다음

머리를 가리고 또 왼쪽을 가린 뒤에  오른쪽을 가립니다.

장포(長布)와 횡포(橫布)順으로 맨 다음 시신(屍身)을 들어서 관속(棺屬)에 넣습니다.

生時에 빠진 이나 먼저 깎은 손톱발톱을 담은 주머니를 관(棺) 귀퉁이에 넣습니다.

이것이 끝나면 병풍(屛風)이나 포장(布帳)으로 관(棺)을 가린 뒤 관 동( 東)

쪽에 영상(靈床)을 마련하고 제물(祭)을 올립니다.

 

17) 성복(成服)

대렴(大 殮)이 끝난 이튿날,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하는 의식(儀式)입니다.

날이 밝으면 오복(五服)의 사람들이 각각(各各) 그 복(服)을 입고, 제 자리에 나간

에 조곡(弔哭)을 하고 서로 조곡(弔喪)을 합니다.

<喪禮秘要>에 보면 사람들이 차마 그 父母가 죽었다고 생각(生角) 할 수 없어서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대렴(大殮)을 하고 그 날로 성복(成服)을 하는 수가 간혹(間或)

있는데 이는 예(禮)에 어긋난다고 씌어 있습니다.

조곡(弔喪)을 할 때는 오복(五服)의 차례 대(次例 代) 하는데, 여러 자손(子孫)

들은 조부(祖父)와 아버지 앞에 가서 끓어 앉아 슬피 운 다음

조모(祖母) 및 어머니 앞에 가서 또 이와 같이 합니다.

女子는 먼저 조모(祖母)와 어머니 앞에 가서 곡(哭)한 다음에

조부(祖父) 및 아버지 앞에 가서 남자(男子) 의식(儀式)과 같이 합니다.

 

18) 상복(喪服) 입기

상복(喪服)을 입는 절차(節次)를 성복(成服)이라 합니다.

대렴(大 殮)한 그 이튿날로서 죽 은지 4째 되는 날입니다.

차마 부모(父母)가 죽은 것으로 여길 수가 없어서 급(急)히 성복(成服)을 하지 않고

4이 된 후(後)에 성복(成服)을 합니다.

이렇게 생각(生角)하면 대렴(大 殮) 成服을 같은 날 하는 것은 잘못 된 일입니다.

3이 지난 대렴(大殮)을 하고 바로 그날 성복(成服)을 하니 이것은 본래(本來)

예()에 어긋나는 행위(行爲)입니다.

대렴(大 殮)한 이튿날 날이 밝을 적에 오복(五服)을 입을 사람들이 각자(覺者) 그 복(服)

입고 들어가서 제자리로 간 후(後) 아침의 곡(哭)을 하고 조곡(弔喪)합니다.

상복(喪服)은 머리를 걷고 단정(端整)히 상관(喪冠)을 쓰되, 효건(孝巾)으로 받들고,

그 위에 수질(首姪)을 맵니다.

치마를 입고, 교()와 요질(腰紩)을 띠며 짚신을 신고 기년복(朞年服) 以上은 모두

지팡이를 짚습니다.

婦人은 머리를 걷었던 것을 버리고 관()을 쓰고 최상(최)을 입으며,

요질(腰紩)을 띠고 짚신을 신으며 지팡이를 짚습니다.

어린이도 성인(成人)과 같은데 다만 관()과 수질(首絰)이 없을 뿐입니다.

남자(男子)는 널 쪽에 西쪽을 해 자리를 잡고 각각(各各)차례(次例)로 복(服)을 입으며

모두 슬피 조곡(弔喪)합니다.

초상(初喪)때에는 성복이전(成服以前)에는 조례(弔禮)와 배례(拜禮)가없습니다.

요즘 들어 아침에 전()을 올리고 나서 성복(成服)하기 전(前)에 절을 하곤 하는데

이것은 예의(禮意)에 어긋납니다.

상관(喪冠) : 두꺼운 종이로 심을 넣는데 폭은 5인치 2푼 반을 베로 싸되,

베의 샛수는 최에 비하여

조금 가는 것으로 합니다.

三年喪은 다듬어 빨지 않는 것, 기년(朞年) 이하는 빨아서 다듬어 둔 것으로 세 줄을 접습니다.

효건(孝巾) : 을 받드는 것을 말합니다.

수질(首絰) : 위에 쓰는 것으로서 삼으로 두 가닥을 서로 꽈서 만듭니다.

꽈놓은 둘레가 참최는 9인치 재최는 7치2푼, 대공에는 5치7푼, 소공에는 4치6푼,

시마에는 3치5푼으로 합니다.

치마 : 앞폭 여섯 폭, 뒤폭도 여섯 폭으로 앞은 웃옷 앞섶과 같이 떠놓습니다.

요질(腰 姪) : 교대(絞帶) 위에 매는 것으로 허리띠를 말함.

짚에 삼을 섞어서 굵은 동아줄 같이 만 듦 니다.

그 굵기가 참최는 7치 2푼, 재최에는 5치 7푼,

대공에는 4치 6푼, 소공에는 3치 5푼,

시마에는 2치 8푼으로 합니다.

짚신 : 참최에는 짚신, 재최에는 삼신(삼신), 소공이하는 보통 신을 신습니다.

지팡이 : 대나무로 만드는데 높이는 가슴에 닿게 하고, 재최에는 오동나무를 깎아서

네모 버드나무로 대용(代用)해도 무방(無妨)합니다.

복제도(服 制度)는 참최에 3년입니다.

그 정복(正服)은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입습니다.

적손(適 孫)이 아버지가 죽어서 할아버지나 曾祖. 高祖를 위하여 승중(承 重)을 하는

자와 비록 아버지가 적자(適 子)가 되어서 후계(後繼)가 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승중(承重)은 되었으나 3을 못 입는 까닭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 적자(適者)가 폐질(廢疾:못된 병)이 있어서 종묘(宗廟)에 주장(主張)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

둘째 : 가계(家繼)에 전통(傳統)을 잇는 것을 전(傳)하는데 정실(正室)의 몸이 아닌 것 다시 말해서

서손(庶孫)이 후계(後繼)가 된 사람.

세째 : 몸이 정실(正實)이 아닌 것. 즉 서자(庶子)를 세워서 후계(後繼)를 삼았을 때.

네째 : 정실(正實)이되 몸이 아닌 것. 즉 적손(適孫)을 세워 후계(後繼)를 삼은 경우 등(境遇 等)입니다. 以上은 정복(正服)을 말한 것이고 의복(衣服)은 며느리가 시 부모(始 父母) 하는 것과

남편(男便)이 숭중(崇重)되었을 때에 따라서 입는 복(服)들도 이와 같습니다.

또한 그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복)을 입다가 소상 전(小喪 前)에 죽으면 다시

그 아들이 소상(小喪)때부터 복(服)을 받아 입습니다.

이것을 대복(代服)이라 합니다.

물론(勿論) 이것은 가례(家禮)에는 실려 있지 않으나 의리(義理)에 속한 일이며,

초상(初喪)에는 하루도 주상(主喪)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이 있어 집상(執喪)을 하지 못하거나 상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죽으면

그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代身)해서 복(服)을 입는 것은 부득(不得)이한 일입니다.

참최의 상복(喪服)은 석세 베(三升布)로 만듭니다.

이것을 참()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몹시 애통(哀痛)하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최() 역시 효자(孝子)의 애통(哀痛)하는 뜻을 밝힌 것이라 합니다.

삼년 복(三年服)을 입는 것은 실로 잠깐 사이의 일이지만,

너무 짧다고 계속(繼續)해 입다 보면 한(恨)이 없겠으므로

예경 칙령(禮經 勅令 : 예(例)에 관(關)한 글을 나라에서 만든 칙령(勅令)으로

적당(適當)히 제정(制定)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3이란 위로는 하늘을 본받고 아래로는 땅에서 하며,

가운데로 사람에게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재최(齊 衰)도 3입니다. 재최 (齊 衰) 는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 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계신데 어머니가 죽었거나 딸이 시집을 갔으면 어머니를 위해서 3 을 입지 못합니다.

시집갔다 돌아와 집에 있는 女子나 서자(庶子)가 그 어머니를 위해 입는 도 마찬가지입니다.

맏손자(適孫)가 그 아버지가 죽었을 때 祖母. 曾 祖母. 高祖母를 위해서 승중(承重)

와 어머니가 적자(適者)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복(衣服)에 있어서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해서와 남편(男便) 승중(承重)

따라서 입는 과 남편(男便) 계모(繼母)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첩(妾)의 아들이 적모(嫡母)를 위해서도 같고,

계모(繼母)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어머니를 위하는 것이 나, 아버지가 죽 은지 3 안에 어머니가

죽으면 그대로 기년(朞年)만복을 입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빈소(殯所)를 모시지 않고 있다가 어머니가 죽으면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합니다.

장기(杖朞) : 막대기를 짚고 기년(祈年)을 입습니다.

그 정복(正服) : 제상(齊衰)은 맏 孫子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가 계신데 할머니를 위한 입니다.

승중(承重)했을 때는 증조모(曾 祖母.) 고조모(高祖母)의 경우(境遇)도 같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계신 때 어머니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모(繼母.) 고모(嫡母)나 자모(子母)에게도 의복(衣服)을 입습니다.

또한 시집간 어머니와 쫓겨난 어머니를 위하는 것은 아버지의 뒤이면 복(服)을 입습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계시는데 시어머니를 위해서도 衣服을 입습니다.

부장기(不杖朞)(막대기를 짚지 않고 기년(祈年)을 입습니다.)

그 정복(正服)은 조부모 (祖父母.) 백숙부모(伯叔父母.) 형제(兄弟.)

중자(衆子)를 위해서 입는 복(服)입니다.

누이가 시집을 가지 않은 境遇나 시집을 갔다가 쫓겨 온 境遇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시집을 갔지만 남편(男便)이나 자식(子息)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女子 男便 兄弟의 아들을 위해서, 첩(妾)이 큰 婦人을 위해서, 男便의 여러

아들을 위해서, 始 父母가 맏며느리(長子 斬衰 該當한 이의 아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父母가 계시는데 양부모(養父母)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자(衆子) : 맏아들 의 모든 아들)

다섯 달(五月)을 입는다. 그 정복(正服)은 증조부모(曾祖父母)를 위해서 입습니다.

의복(衣服)으로는 계 증조모(繼 曾 祖母)를 위해 입습니다.

석 달(三月)을 입는다. 정복(正服)은 고조부모(高祖父母)를 위해서 입습니다.

의복(衣服)은 계 고조모(繼 高祖母)를 위해서 입습니다.

대공(大功)에는 아홉 달(九月)입니다.

그 정복(正服)은 종형제(從 兄弟)와종자매(從 姉妹)를 위해 입는 것입니다.

즉 백부(伯父)나 숙부(叔父)의 아들. 딸을 말합니다.

중손(衆孫) 男女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녀(孫女)가 시집갔다가 쫓겨 왔거나 서자(庶孫)에 승중(承重)이 된 이도 같습니다.

적자(嫡子)가는 데 長孫을 위하는 것과 지자(支子)가 嫡孫을 위하는 것도 같습니다.

대공. 소공(大功. 小功) : 공()은 베()를 다듬는데 있어서의 공적(功績)을 나타내므로

자세(姿勢)하고 거친 것을 말합니다.

소공(小功)에는 다섯 달(五月)입니다.

그 정복(正服)은 종조부(從 祖父)와 종조모(從祖母,) 형제(兄弟)의 손자(孫子,) 종형제(從 兄弟)

아들, 재종형제(再從兄弟)의 경우(境遇)에 입는 복(服)입니다.

외조부모(外祖父母)와 외숙(外叔,) 생질(甥姪)의 경우(境遇)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복(衣服)으로는 종조모(從祖母)와 남편(男便)의 형제(兄弟.) 손자(孫子.)남편 종형제

(男便 從 兄弟의 아들을 위해서 입습니다.

형제(兄弟)의 아내와 남편(男便)의 형제(兄弟)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부(弟夫)와 사부(私夫)끼리도 소공 복(小功 服)을 입습니다.

질부. 사부(姪婦. 私夫) : 兄弟의 아내끼리 서로 를 때, 맏며느리가 다음 며느리를

부를 때 제부(弟夫,) 그리고 제부(弟夫)가 맏며느리를 부를 때 사부(私夫)라 합니다.

시마(緦麻)에는 석 달(三月)이다. 그 정복(正服)은 종증조부(從 曾祖父,)

증조모(曾 祖母,) 증조(曾祖)의 형제(兄弟)와 자매(姉妹,)

그리고 형제(兄弟)의 증손(曾孫)과 증조부(曾祖父,) 증 조모(曾 祖母)를 위해서 입습니다.

종형제(從 兄弟)의 자매(姉妹,) 외손내외(外孫 內外 從 兄弟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복(衣服)으로는 남편형제(男便兄弟)의 증손(曾孫)과 남편(男便)의 손자(孫子)

남편 종형제(男便 從 兄弟)의 아들에게도 역시 같습니다.

서모(庶母.) 유모(乳母.)사위. 장인(丈人)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죽은 것()을 위해 입는 복()은 차례로 한 등(等)씩 내려갑니다. 보통 8에서 11 사이에

죽은 경우(境遇)는 하상(下喪"일찍 죽을 "),12에서

15 사이에 죽은 경우(境遇)는 중상(重喪,)16에서 19 에 죽은 경우(境遇)

장상(長上)이라합니다. 8가 못되면 복(服)이 없는 상(喪)이니 그저 곡(哭)만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아이로 죽은 것이 기년(朞年) 복(服)에 친(親)이면 열흘에 사흘씩 곡(哭)을 하고,

시마(緦麻)에 친(親)이면 사흘로 제한(制限)합니다.

낳은 지 석 달 미만(未滿)은 고 도 하지 않습니다.

약혼(約婚)했거나 결혼(結婚)했으면 상(喪)(:일찍 죽을 )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라는 것은 사람의 으로 인연(因緣)한 것이라 곡(谷) 肉 이라는 것은

어른이나 어린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 아이들이 죽은 복(服)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모든 남자(男子)가 남의 후계자(後繼者)가 된 사람과 여자(女子)가 남에게 간 사람이

자기(自己) 친당(親黨)을 위하는 데는 모두 한 등(等)씩 내려갑니다.

딸이 남에게 간 사람은 복(服)이 내려갑니다.

그리고 제상(除喪)이 되기 전에 쫓겨났으면 그 위 본복(本服)을 입습니다.

이미 제상(除喪)했으면 을 다시 입지 않습니다.

부인(婦人) 男便의 당()을 입을 때에 상사(喪事)를 당(黨)하여서 쫓겨났으면

을 벗습니다.

(妾)이 자기친당(自己 親 黨)을 위해 입는 복(服)은 일반(一般)사람과 같이 합니다.

마음으로 슬퍼하기를 3을 합니다.(心喪三年) 심상(心喪)이란 몸에 베옷을 입지 않고

마음으로 슬퍼 한다는 것은 원칙적(原則的) 의로는 스승에게 해당(該當)되는데,

마음으로 3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년(祈年)을 입되 3을 펴는 신()것은 아버지가 계시는데 어머니를 위하는 것,

적모, 계모(嫡母, 繼母)도 같습니다.

또는 쫓겨나간 어머니, 시집간 어머니, 父母가 계신데 양부모(養父母,)

적손(嫡孫)이 할아버지가 계신데 할머니(증 고조(曾 高祖)가 계신데 증고조모(曾 高祖母)

같습니다.)그리고 본생부모(本生父母,) 며느리가 시(始)아버지가 계신데 어머니를 위함과

첩(妾)의 아들의 처(妻)가 남편(男便)의 적모(嫡母), 남편(男便)의 승종 (承從)

그의 부모(父母)를 위하는 것 등(等)도 마찬 가지 입니다.

또한 庶子로서 아버지의 뒤가 된 자는 어머니를 위하는 것은 시마에 3을 펴는 것

이며, 출모(出母) 家母를 위하는 것은 비록 은 없으나 3을 펴는 것입니다.

조복(弔服)에 삼()을 더합니다. 복(服)이 없는 부인(夫人)이나 일가(一家)고모(姑母,)

맏누이 혹은 누이동생(同生)

으로 시집을 간사람 또는 친구(親舊)들이나 선비(先妣,) 종들이 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 한 가닥으로 태두리 를 하여 머리에 쓴다는 것이 어려워서 그저 흰 띠로 석 달이면

정(情)을 편다고 합니다.

성복(成服)한 날 주인 형제(主人 兄弟)들이 처음으로 죽을 먹습니다.

아들들은 죽을 먹습니다.

처(妻)나 첩(妾) 또는 기녀(妓女)이나 아홉 달 복(服)을 입는 사람들은

거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맛있는 나물이나 일은 먹지 않습니다.

다섯 달 복(服)이나 섯 달 복(服)을 입는 사람들도 술을 마시고 고기는 먹되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연고(緣故)가 없으면 밖에 나가지 않고 만일 부득(不得)이한 일로 출입

(出入)하게 되면 순박(淳朴)한 말에 베 안장을 하거나 흰 가마에 베 주렴 한 것을 탑니다.

 

19) 문상(聞喪)

객지(客地)에 나가 있다가 부모(父母)의 상()을 듣고 돌아오는 것을 일컫습니다.

부음(訃音)을 듣는 즉시 곡(哭)을 하며 부고(訃告)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절을 하고

흰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상복(喪服)으로 다시 갈아입고 시신(屍身) 앞에 나아가 슬피 곡(哭)을 합니다.

심상(心喪) - 실제(實際)로 상복(喪服)은 입지 않은 채 마음으로 3 동안 슬퍼하는 것을 말 합니다.

원래(原來)는 스승을 위하여 행(行)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해서나

또는 적모(嫡母)나 계모(繼母,)(改嫁)在家한 어머니를 위해서도 이와 같이 합니다.

조상(弔喪) - 조상(弔喪)은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빌고 유가족(遺家族)

위로(慰勞)하기 위하여 찾아가 인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통식(傳統式) 상례(傳統式 喪禮)의 경우 조상(境遇 弔喪)은 원래(原來) 성복(成服)후(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복 전(成服 前)에는 가까운 일가친척(一家 親戚)이나 친(親)한 친구(親舊)가 가서

상주(喪主)에게만

인사하고 영구(靈柩)에는 절을 하지 않습니다.

성복 후(成服 後)라도 망인(亡人)과 생시(生時)에 안면(顔面)이 없었거나 여자(女子)

경우(境遇) 빈소(殯所)에는 절하지 않고 상주(喪主)에게만 인사합니다.

조객(弔客)은 먼저 호상(護喪)에게 성명(姓名)을 말하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상주(喪主)는 일어나서 '애고 애고…'하고 곡(哭)을 한다.

호상(護喪)이 조객(弔客)

안내(案內)하여 영좌(靈座)앞으로가면 조객(弔客)은 '허희 허 희'보통(普通)은 '어이 어이…')하고

슬피 곡(哭)을 한 뒤 두 번 절을 합니다.

향(香)을 피우고 무릎을 꿇고 앉는다.

집사(執事)가 무릎을 꿇고 잔을 조객(弔客)에게 주고 술을 따릅니다.

조객(弔客)이 이것을 다시 집사(執事)에게 주어 영좌(靈座) 앞에 놓게 하고 일어서면,

호상(護喪)이 상주(喪主)의 곡(哭)을 그치게 합니다.

축관(祝官) 西쪽을 하여 무릎을 꿇고 제문(祭文)을 읽고 조객(弔客)이 가져온

부의(賻儀)의 명세(明細)를 바치고 나면 조객(弔客) 喪主가 모두 슬피 을 합니다.

고인(故人)에 대(代)한 인사가 끝나면 弔客은 상주(喪主)와 맞절을 한 다음 무릎을 꿇고,

"상사(喪事)를 당하시어 얼마나 망극(罔極) 하십니까."

또는 "상사(喪事) 말씀, 무슨 말씀으로 여 쭈 오리 까"

또는 병환("病患) 심중(沈重)하시더니,

상사(喪事)를 당하시어 얼마나 망극(罔極) 하십니까." 라고 인사를 합니다.

상주(喪主)는 머리를 숙여 슬픈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대답(對答) 代身하기도 하고,

망극("罔極) 하옵니다.

" 원로(遠路)에 수고하시니 죄 송(罪悚)합니다."라고 대답(對答)하기도 합니다.

부의(賻儀) - 상가(喪家)에 부의(賻儀)를 보낼 때는 백지(白紙)에 단자(單子)를 써서

봉투(封套)에 넣어 보냅니다.

단자(單字)를 쓰지 않을 때는 봉투(封套)에 물목(物目)을 기록(記錄)합니다.

부의(賻儀)는 돈이나 상가(喪家)에서 필요(必要)한 물건(物件)으로 합니다.

 

20) 치장(治粧)

옛날에는 석 달 만에 葬事를 지냈는데,

이에 앞서 葬事를 지낼 만한 땅을 고릅니다.

묘(墓) 자리를 정(定)하면 이어 장사(葬事) 지낼 날짜를 잡습니다.

날짜가 정(定)해지면 영역(靈域)에 산역(山役)을 시작(始作)하고 토신(土神)에게

사토 제( 沙土 祭)를 지냅니다.

천광(穿壙) : 사토 제(沙土 祭)가 끝나면 드디어 땅을 파기시작(始作)하여 광중(壙中)을 만듭니다.

공중(壙中)을 팔 때는 금정기(金井機)를 땅위에 놓고 역사(役事)를 시작(始作)합니다.

금정기(金井機)는 나무 막대기 네 개를 가지고 정()자 모양(模樣)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관(棺)의 크기를 짐작(斟酌)하여 반듯하게 놓고서 네 모퉁이에 말뚝을 박아 표시(表示)한 뒤

그 모양(模樣)대로 파 들어갑니다.

구덩이를 다 파고 나면 석회(石灰)에 모래를 섞어 발라서 이 들어갈 정도(定度) 크기의

곽()을 만듭니다.

 

21) 발인(發靷)

관(棺)을 방(房)에서 들고 나와 상야(喪輿)로 옮기는 것을 천구(遷柩)라 합니다.

상여(喪輿)가 상가(喪家)를 떠나 장지(葬地)로 출발(出發)하는 것을 발인(發靷)또는 출상(出喪)이라 합니다. 발인 시(發靷 時)에는 반드시 발인제(發靷祭)를 지냅니다.

발인제(發靷祭) 때 관(棺)의 위치(位置)는 천구(遷柩)하여 관(棺)을 상여(喪輿) 앞에 두고

발인제(發靷祭)를 지내는 경우(境遇) 영구 관(靈柩, )을 상여(喪輿) 위에 올려 모셔 놓은 다음

발인제(發靷祭)를 지내는 경우(境遇)가 있습니다.

발인제(發靷祭)는 간단(簡單)하게 제물(祭物)을 차리고 발인 축(發靷 祝)을 읽고, 맏 상주(喪主)

두 번 큰 절(단작이배 : 單酌二拜)을 합니다.

발인제(發靷祭)를 지내고 상여(喪輿)꾼들이 상여(喪輿)를 처음 들어 올렸을 때

망자 (亡者)의 집 쪽으로 향(向)하여 세 차례 상여(喪輿)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망자 (亡者)가 집을 보고 마지막 하직(下直)인사라 합니다.

상두(喪頭)꾼은 보통 남자(普通 男子)들이지만 상여(喪輿)가 나갈 때 상여(喪輿)의 뒤쪽에

광목(廣木)을 길게 늘어뜨려 부인(婦人)들이 이것을 잡고 따라 가기도 하는데 이를

'설매' 또는 '배줄'이라 하고 혼(魂)이 저승 갈 때 타고 가라는 뜻입니다.

 

22) 운구(運柩)와 노제(路祭)

발인 후 상여(發靷 後 喪輿)를 장지(葬地) 운반( 이동運搬 移動)하는 것을

운구 '運柩' 또는 '운상(運喪)'이라 하거나 행상('行喪) 나간 다' 고 합니다.

운구(運柩)를 담당(擔當)하는 일꾼은 상두('喪頭)꾼'이라 하며, 상여(喪輿)노래의 앞소리를 하는

사람을 선('先)소리 꾼'이라 합니다.

운상(運喪)때는 맨 앞에서 부터(銘旌)영여(靈與) 만장(輓章)운아삽(雲亞삽)상여(喪輿)

상주(喪主,) 백관(百官,) 조문객(弔問客)의 차례(次例)로 줄을 잇습니다.

노제(路祭)를 안 지낼 수도 있지만 운구 도중(運柩 途中)에 보통(普通) 한차례(次例)

를 지냅니다. 로제(路祭)는 주로 망령(亡靈)의 친구(親舊)들이 주제관(主祭管)이 되어 지내므로

원(願)하는 우인(友人)들이 많은 경우(境遇)는 두서너 차례(次例) 지내기도 합니다.

로제(路祭)의 장소(場所)는 마을 어귀·골목 어귀·삼거리 등(等) 망령(亡靈)과 추억(追憶)이 깃든

장소(場所)를 지날 때 지내는데,

친구(親舊)들이 사자(死者)와의 마지막 하직(下直)인사로 지내는

것으로 사자(死者)와 이별(離別)을 섭섭하게 여겨서 행(行) 하는 제사(祭祀)입니다.

 

23) 하관(下棺)과 부수 제례(祭禮)

상여(喪輿)가 장지(葬地)에 도착(倒着)하기 전(前) 장지(葬地)에서 일하는 일꾼을

산역('山役)꾼'이라 합니다.

산역(山役)꾼과 지관(地官)은 장지 근처(葬地 近處)의 바위나 개울가에 가서 술,

과일 어포(魚脯) 차려 놓고 ' 오늘 이산(山)에 손님이 들어오니 산신(山神)께서는

손님을 잘 보살펴 달라'고 빌면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냅니다.

그리고 (墓)를 쓸 자리에 명태(明太)를 막대기나, 삽에 묶어 꽂아 세우고,

그 주위 (周圍)에 술을 뿌리고는, 개토제(開土祭)를 지냅니다.

(墓) 자리를 조성(造成)하기 위해 구덩이를 팔 때는 묘터(墓攄) 上. 中, 下

술을 붓고, 술을 부은 자리에 괭이로 각기 흙을 파기 시작(始作)합니다.

이 광중(壙中)을 파는것을 청광('淸光) 낸다.' 또는'굿 낸다.'고 합니다.

하관은 청광(淸光)이 끝나면 지관(地官)이 잡아준 하관시간(下官時間에) 맞추어서

상제(喪制)들이 모신 상(床)에서 관(棺)을 운반(運搬)하여 와서

베 끈을 잡고 천천히 하관(下棺)을 합니다.

하관(下棺)을 할 때 상주(喪主) 곡(哭)을 하지 않습니다.

하관(下棺)은 시신(屍身)의 머리는 쪽으로 발은 쪽으로 하게 하여 하관(下棺)을 합니다.

하관(下棺)때 시신(屍身)을 관(棺)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묻는 동천('動天蓋')는 쓰지 않고

관(棺)채로 묻는데, 이때 지관(地官)이 하관(下棺)을 보면 해롭다고 정(定)해주는

나이의 사람이 하관(下棺)을 보게 되면 중상(重傷)을 당(黨)한다 하여 하관(下棺)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발인(發靷)날이 말날(午日)인 경우(境遇) 쥐띠인 사람과 죽은 이와 상극(相剋)

띠를 가진 이가 하관(下棺)을 보면 죽은 사람이나 산사람 모두에게 해롭다고 하여보지 않습니다.

상주(喪主)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관(下棺)이 끝나면 지관(地官)은 관(棺)을 바로 잡고 평평(平平)한지 여부(與否)를 살펴

이상(理想)이 없으면 흙덮기에 들어가는데 복토(' 覆土)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봉분(封墳)이 완전(完全)히 성분(成墳)되었을 때 주과포(酒·果·浦)를 차려서

평토제(平土祭)를 지냅니다.

평토제(平土祭)를 지내고 나면, 집사(執事)가 영좌(靈座 : 영혼(魂靈)을 안치(安置)

하는 장소(場所)를 철거(撤去)하고 상주(喪主)는 영여(靈與)에 혼백(魂魄)을 모시고

왔던 길로 되돌아 집으로 오거나, 상여(喪輿)가 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되돌아온다.

(다른 길로 와야 鬼神이 못 따라 온다고 합니다).

되돌아올 때 상주(喪主)들은 영여(靈與)를 뒤따르는데 이를 반혼(返魂)이라 합니다.

집에 돌아오면 안 상주(喪主)들이 곡(哭)을 하면서 혼백(魂魄)을 맞이합니다.

혼백(魂魄)은 빈소(殯所)에 모십니다. 그러면 망자(亡者)에게 반혼(返魂)을 고(告)하는

제(祭)를 지내는데 이를 반혼제(返魂祭)라 합니다.

앞에 주과포(酒·果·浦(식혜)醯를 진실하고(차려놓고)술을 치고 축(祝)을 읽고 상주(喪主)들이

두 번 절합니다.

 

24) 기제사(忌 祭祀) 전의 각종의례(各種儀禮)

영좌(靈座)를 장지(葬地)에서 반혼(返魂)하여 와서 혼백(魂魄)을 다시 모시고 난 후 부터

담제(嬉祭)를 지내기 까지 지내는 各種 祭祀를 묶어 흉제(凶祭)라 합니다.

忌 祭祀지내기 各種 祭祀는 담제(嬉祭)를 지내므로 써 보통(普通) 끝이 납니다.

우제(虞祭) 갓 돌아가신 영혼(靈魂)을 위로(慰勞)하는 뜻으로 지내는 제(祭)로 일종(一種)

위령제(慰靈祭)입니다.

우제(虞祭)는 세 번 지내는데,

세 차례 모두 다 그 집안의 기제사방식(忌 祭祀方式)

(家門에 따라 다름)과 동일(同一)하게 지내고 곡(哭)을 하는 것이 보통(普通)입니다.

초우제(初 虞祭) 반혼(返魂)한 혼백(魂魄)을 빈소(殯所)에 모시며 제사(祭祀)를 지내는데

이를 초우제(初 虞祭)라 합니다.

초우제(初虞 祭)와 반혼제(返魂祭)를 함께 하는 경우(境遇)가많습니다.

초우제(初 虞祭)

장사 당일(葬事 當日)에 지내야 합니다.

초우제(初 虞祭)를 지내고 나면 상주(喪主) 이하(以下) 상제(喪主 以下 喪制)들은 비로소

목욕(沐浴)

할 수 있지만 빗질은 하지 못합니다.

재우제(再虞祭) 원래(原來)는 초우제(初虞 祭)를 지내고 난 다음날 또는 그 하루 거른 다음날

아침에 지냅니다.

보통(普通)은 초우 제(初虞 祭) 지낸 다음날 아침에 지냅니다.

삼우제(三虞祭) 재우 제(再虞 祭) 바로 다음날 아침에 지냅니다.

삼우제(三虞祭)를 지내고 나서 상주(喪主)는 비로 서 묘역(墓域)에 갈 수 있습니다.

상주(喪主)는 간단(簡單)한 묘제(墓祭)를 올리고 성분(成墳 : 封墳)이 잘 되었는지 묘역(墓域)

잘 조성(造成)되어 있는지를 직접(直接) 살 피고 잔손질을 합니다.

최근最近에 와서는 상기(喪期)를 단축(短縮)할 경우(境遇) 삼오(三五)날 (三虞祭날) 가서 봉분(封墳)

옆에 흙을 파고 혼백(魂帛)을 묻습니다.

이를 매혼(埋魂)이라 합니다.

졸곡제(卒哭祭)

삼우제(三虞祭)를 지내고 3個月 이후(以後) 날을 잡아 졸곡제(卒哭 祭)를 지냅니다.

최근(最近)에는 상기(相忌)가 짧을 경우 삼우제(境遇 三虞祭)가 끝난 뒤 첫 강일

(剛日)에 지내기도 합니다.

졸곡제(卒哭祭)를 지내고 나서  상주(喪主)는 아침저녁으로 조석(朝夕)을 올릴 때만

곡(哭)을 하고,

평시(平時)에는 빈소(殯所)에서 곡(哭)을 하지 않습니다.

졸곡제 전(卒哭 祭 前)에는 문(門)에 상주(喪主) "소자(疏者)○○"라 쓰지만

졸곡 후(卒哭 後)에는 효자("孝子)○○"라고 씁니다.

부제(祔祭) 졸곡제(卒哭 祭) 다음에 지내는 제사(祭祀)로 신주(神主)

조상신주(祖上神主)곁에 붙여 모시는 제사(祭祀)입니다.

사당(祠堂)이 있는 境遇 망위(亡位)의 신주(神主)를 모셔가서 이미 봉안(奉安)되어 있는

선망신위 (先 亡 神位)들과 존비(尊卑)·위차(位次)에 맞게 자리매김하여 제사(祭祀)를 모십니다.

철상(撤床) 후(後) 빈소(殯所)로 신주(神主)를 다시 모셔옵니다.

소상(小祥) 사망 후(死亡 後) 1 만에 지내는 제사(祭祀)로 제사(祭祀) 방식(方式)

우제(虞祭)와 비슷합니다.

먼 친척(親戚)도 오고 문상 객(問喪 客) (주로 初喪 弔問오지 못한 사람)도 많이 오므로

음식(飮食)을 많이 장만해 대접(待接)합니다.

소상(小祥) 을 치르고 나면 일반적(一般的)으로 바깥상주(喪主)와 안 상주(喪主)

요질(腰絰)과 수질(首絰)을 착용(着用)하지 않습니다.

대상(大祥) 사망 후(死亡後) 2 만에 지내는 로 소상(小祥)과 같은 방식(方式)으로 지냅니다.

소상(小祥) 때 보다 많이 오는 큰 행사(行祀)입니다.

보통대상(普通大祥)이 끝나면 사당(祠堂)이 있는 경우신주(境遇 神主)

사당(祠堂) 에 안치(安置)하고 영좌(靈座)는 철거(撤去)합니다.

담제(禫祭)를 따로 지내지 않는 경우(境遇)는 이날 바로 탈상(脫喪)하고 상기(喪期)를 끝내기도 합니다.

담제(禫祭) 대상 후(大祥 後) 두 달째 되는 날을 잡아 제사(祭祀)를 지내고 이날 탈상(脫喪)

하는 것이 원칙(原則)이었습니다.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습니다.

담제(禫祭) 때 탈상(脫喪)하고는 사당(祠堂) 고사(告祀)를 한 번 더 지내는데 이를

길제(吉祭)라 합니다. 지금은 이 길제(吉祭)도 사라졌습니다.

이후(以後)의 제사(祭祀)는 기제사(忌 祭祀)로서 이는 제례(祭禮)에 포함(包含)시키고

상례(喪禮)에는 포함(包涵)시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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