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 맹인

장례식장 맹인

작성일 2013.03.21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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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서 상주하고는 알겟는데 맹인은 몬뜻인가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맹인이라고도 하고요

보통 망인 이라고 합니다

약간에  지역적인  언어 차이입니다

맹인 : 눈으로 볼수 없는사람

망인 : 돌아가신 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돌아기신분"  볼수없다는 뜻이라고 이해하세요

다 같은 내용입니다

 

 

傳統 .喪. 葬禮 節次

 

전통(傳統) 상. 장례(喪. 葬禮) 절차(節次)

임종(臨終) 수시(收屍) 고복(皐復) 발상(發喪) () () ⇨소(小殮) 대렴(大殮)

성복(成服) 치장(治葬) 천구(遷柩) 발인(發靷) 운구(運柩) 하관(下棺) 성분(成墳)

반곡 (反哭)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 (三虞)졸곡(卒哭) 부제(祔祭) 소상(小祥)

대상(大祥 ) 담제 길제(吉祭)

 

초종: 초종(初終)이란, 보통 초상(初喪)이라는 말을 예문(禮文)에서 쓰는 말입니다.

그 본래(本來)의 뜻은 운명(殞命)에서 졸곡(卒哭)가지를 말하지만,

일반적(一般的) 로 말할 때에는 운명(殞命)에서 전()까지를 의미(意味)합니다.

 

1) 천거정침(遷居正寢)

患者 病勢 危急해 도저히 회춘(回春)할 可能性이 없으면 患者 정침(安房)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집 안팎을 깨끗하게 淸掃하고 患者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힙니다.

환자(患者)의 머리는 동(東)쪽을 향(向)하게 하여 북쪽 문 밑에 便安하게 모십니다.

네 사람이 조용한 가운데 환자(患者)의 팔과 다리를 주무릅니다.

천거정침(遷居正寢)은 가주(家主)에만 해당(該當)되고 가주 以外의 사람은 自己

거처(居處)하던 방(房)으로 옮깁니다.)

 

2) 유언(遺言)

患者의 병세(病勢)가 위급(危急)한 상태(狀態)에 빠지면 가족(家族)들은 침착(沈着)

태도(態度)로 주위(周圍)를 정돈(整頓)하고 운명(殞命)을 기다립니다.

이때에 病者에게 물어볼 말이 있으면, 病者가 대답(對答)하기 쉽도록 내용(內容)

간략(簡略)하게 묻고 그 대답(對答)을 기록(記錄)을 합니다.

병자(病者)가 자손(子孫) 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평소(平素) 미진(未盡)한 일이나 死後에라도 실행(實行)하고 싶은 일들에 대(代)

훈계(訓戒,)나  교훈(敎訓,) 그리고 재산분배(財産分配)에 대(代)한 유언(遺言)일 것입니다.

유언(遺言)은 원래(原來)자필(自筆)로 쓰는 것이 원칙(原則)이지만 시간적(時間的)

여유(餘裕)나 기력(氣力)이 없을 때는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른 사람이 대리(代理)로 써도 됩니다.

유언(遺言)은 이 세상(世上)을 영원(永遠)히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귀중(貴重)

말이므로 자손(子孫)들 친지(親知)들은 마땅히 그에 따라야 합니다.

 

3) 임종(臨終)

임종(臨終)이란 운명(殞命)이라고도 하는데 환자(患者)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손(子孫)들이나 친지(親知)들은 患者의 운명(殞命) 正中하고 경건(敬虔)하게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자(男子)의 임종(臨終) 여자(女子)가 지키지 않으며,

여자(女子)의 임종(臨終)은 남자(男子)가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손(子孫)일 경우(境遇)에는 이에 해당(該當)되지 않습니다.

 

4) 속광(屬纊)

환자(患者)의 손과 발을 잡고 患者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을 분명(分明)하게 알기 위해,

햇솜을 환자(患者)의 코 밑에 대놓고 患者의 숨을 그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속광(屬纊)이라고 합니다.

솜이 움직이지 않으면 완전(完全)히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患者 完全히 숨을 멈추지 않았을 때 곡성(哭聲)이 혼란(搖亂)하면, 운명(殞命)하는

이가 순간(瞬間)이 나마 마음이 不安하고 정신(精神)이 혼란(混亂) 할까 염려(念慮)

되므로 가족(家族)은 울음을 참고 조용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속광(屬纊)합니다

 

5) 수시(收屍)

숨이 끊어지면 눈을 감기고 준비(準備)한 햇솜으로

입, 코, 귀를 막은 에 머리를 높여 반듯하게 굅니다.

가족(家族)들은 자연(自然) 시신(屍身)을 붙들고 울게 되는데,

이때 친척(親戚)가운데 초종(初終)의 범절(凡節)에 익숙한 사람이 家族의 울음을 멈추게 하고,

시신(屍身) 굳기 전(前)에 손과 발을 주물러서 펴게 하고 수시(收屍)를 합니다.

收屍 을 닫고 하고, 屍體 安置 에는 불기운을 없애고 바닥에 짚을 깝니다.

백지(白紙)로 시신(屍身)의 얼굴을 덮고, 白紙나 베로 양쪽어깨를 반듯하게 묶습니다.

그 다음 턱을 괴고, 양손을 배 위에 올려놓는데 男子는 왼손을, 女子는 오른손을 위로 합니다.

白紙 또는 베로 시신(屍身)의 자세(姿勢)가 어그러지지 않게 팔과 다리를 묶습니다.

그런 다음 屍身을 시상(屍床) 위에 옮겨 누이고

홑이불로 덮은 후에 병풍(屛風)이나 가리개로 가립니다.

그 앞에 故人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양쪽에 촛불을 밝힌 다음,

중앙(中央)에 향(香) 피우고  곡(哭)을 합니다.

(이 수시(收屍) 절차(節次)를 소홀(疏忽)히 하면 손발과 몸이 뒤틀리고

오그라드는 경우(境遇)가   생기므로 정성(精誠)을 들여야 합니다.)

 

6) 고복(皐復)

고복(皐復)을 복(), 초혼(招魂), 또는 "혼(魂)을 부른다. "라고도 합니다.

죽은 사람의 흐트러진 혼(魂)을 불러 돌아오게 한다는 뜻으로, 사신(屍身)을 보지

않은 사람이 지붕 위로 올라가는데 남상(男喪)일 때는 男子가 올라가고, 여상(女喪)

일때는 女子가 죽은 사람이 입던 속적삼을 들고 올라갑니다.

쪽 끝으로부터 지붕의 中央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그 옷의 깃을 잡고 오른 손 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 쪽을 향(向)해 휘두릅니다.

이때 크고 긴 목소리로 "00 00 00 00 學生 000() 복 복 복!" 하고

외친다. 죽은 자가 관작(官爵)이 있으면 "00관() 0공()"이라 하고, 죽은 자가

여자일 때는 남편(男便)의 관작을 좇아 "00부인 0씨"라 하고,

관작(官爵)이 없으면 "유인(孺人) 00 씨"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고복(皐復)할 때는 상주(喪主)이하 모든 家族이 울음()을 멈추어야 한다.

이것은 떠나려는 혼(魂)이 다시 사신(屍身)으로 돌아와 되살아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살아나지 않으면 정말로 죽은 것이 확인(確認)되는 것입니다.

고복(皐復)한 후(後)의 옷[復衣]은 지붕 위에 그대로 놓거나 사체(屍體)의 가슴 위에 올려놓는 ,

각(各) 지방(地方)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또 지방(地方)에 따라서는 주소(住所)와 관작(官爵)과 성을 말하지 않고 "복! 복! 복!" 하기도 하고,

"돌아보고 옷이나 가지고 가시오! "라고 하기도 합니다.

죽음이 확인(確認)되고 사잣밥을 놓을 때에는 먼 하늘을 쳐다보고 고인(故人) 부르며 땅을 치고

곡(哭)을 합니다.

초혼 예 (招魂 ) "사바세계 해동(해동 대한민국)海東 大韓民國 00 (. )

00(. ) 00 (. . ) 00番地 00 학생. 유인(學生. 孺人)本貫 000

(. )00 00 00 00 000 0 별세(別世) 복! 복 ! 복! "

 

7) 사잣밥

고복(皐復)을 한 다음 밥에 밥 세 그릇과 술 석 잔과 백지(白紙) 한 권,

북어(北魚) 세 마리, 짚신 세 켤레, 약간(若干)의 동전(銅錢)을 얹어 놓고 촛불을 켜서 뜰아래나

대문(大門) 밖에 차려놓는데,  이것을 사잣밥이라 합니다.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사자(使者)를 시켜 사람의 목숨을 거두게 하는 것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에 그 저승사자(使者)를 대접(待接) 便安히 모셔가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8) 발상 과 상주(發喪 喪主)

고복(皐復)이 끝나면 아들, 딸, 며느리, 즉 자손들이 머리를 풀고

곡(哭)을 하며 옷을 갈아입는데, 남자(男子)는 심의(深衣)를 입고 섶을 여미지 않으며,

여자(女子)는 흰옷으로 갈아입고 모두 맨발로 신을 신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상제(喪祭)의 모습을 갖추고 초상(初喪) 난 것을 밖에 알리는 것을 발상(發喪)이라 합니다.

발상(發喪)과 동시(同時)에 상중(喪中), 기중(忌中) 또는 상가(喪家) 라고 써서

문(門)밖 또는 길목에 붙입니다.

이렇게 初喪이 나면 예제(禮制)에 따라 상주(喪主),주부(主婦),호상(護喪),사서(司書),

사화(司貨)를 정합니다.

상주(喪主)는 상사(喪事)의 중심(中心)이 되는 상인(喪人)을 가리키는데, 죽은 사람의

맏아들이 상주(喪主)가 되는 것이 원칙(原則)입니다.

맏아들이 없고 맏孫子가 있을 때는 작은 아들이 있어도 맏손자(孫子)가 상주(喪主)

되고, 상주(喪主)가 된 장손(長孫)을 승중(承重) 또는 승중손(承 重 孫)이라 합니다.

주부(主婦)는 여자(女子) 상주(喪主)로서 아내가 대신(代身)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장성(長成)한 아들이 있더라도 아버지가

주상(主喪)이 되며, 아내가 죽었을 때는 남편(男便)이 주상(主喪)이 됩니다.

 

9) 호상과 사서. 사화 (護喪 史書, 私和)

호상(護喪)이란 발상(發喪)이 끝나면  상주(喪主)를 도와서 상사(喪事)의 모든 일을

처리(處理)하는 사람으로 서, 상사(喪事)를 알리는 일에서부터 치상(治喪)의 범절

(凡節)까지를 주관(主管)합니다.

그러기에 호상(護喪)은 상가(喪家)의 모든 것을 잘 아는 친척(親戚) 또는 친구(親舊)가운데에서

상례(喪禮)에 밝고 경험(經驗)이 풍부(豊富)한 사람을 선임(選任)합니다.

사서(私書)는 상사(喪事)에 관계(關係)되는 모든 문서(文書)를 맡은 자(者)이며,

사화(私和) 장재(掌財)라고도 하며 장례(葬禮)를 치르는데 있어 물품(物品)

금전(金錢)의 출납(出納) 관리담당(管理擔當)하는데, 친척(親戚)이나 친지 중(親知 中)에서

선임(選任)합니다.

사화(私和)가 일을 진행(進行)시킬 때는 공책(空冊)을 세권(券)을 만들어 놓고,

에는 물품(物品)이나 금전(金錢)의 출납(出納)을 기록(記錄)하고,

다음 한에는 조문객(弔問客)의 부의금(賻儀金) 기록(記錄)하는 책(冊)으로서

그 책의 이름을 부상(父喪)일 때는 조객록(弔客 錄)이라 쓰고,

모상(母喪)일 때는 조위록(弔慰錄)이라고 씁니다.

 

10) 전()

전()이란 고인(故人)이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섬기기 위해 술,

과일 을 차려 놓은 것으로,

집사(執事)가 포()와 식혜(食醯),과일 을 탁자위에 놓으면 축관(祝官)이 손과 술잔을 씻고

술을 따라 올립니다.

술은 잔에 가득 차게 부어 시신(屍身)의 오른쪽 어깨에 가까운 곳에 놓습니다.

이것을 염습(殮襲)이 끝날 때까지 날마다 한 번씩 행(行)합니다.

집사(執事)와 축관(祝官)이 전()을 올리는 이유(理由)는 주상(主喪)은 슬프고 애통 (哀痛)해 하므로

자신(自身)이 올리지 못하기 때문에 집사(執事)가 대행(代行)하는입니다.

단 절은 하지 않습니다.

 

11) 복인(服人)

복인(服人)의 범위(範圍) 故人의 8 以內의 친족(親族)으로 합니다.

복인(服人) 男子 상제(喪制)들은 흰 두루마기를 입되 부상(父喪)이면 왼쪽소매,

모상(母喪)이면 오른쪽 소매에 팔을 꿰지 않고 소매를 빼서 뒤로 넘깁니다.

섶을 여미지 않은 채 안옷고름으로 조금 매기만 합니다.

여자상제(女子喪祭)들은 머리를 풀고 흰 옷을 입습니다.

 

12) 치관(治棺)

호상(護喪)이 목수(木手)나 관장(棺匠)을 시켜 나무를 골라 관(棺)을 만들게 합니다.

나무 중(中)에는 유삼(油衫)이 제일(第一)이고 잣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그리고 오동나무 순 입니다.

관재(棺材)는 천판(天板), 지판(地板)을 한 장씩, 사방판(四方板) 네 장을 準備합니다.

두께는 세치(약9센티)나 두 치 반(약 7.5센티)으로 하며, 높이와 길이는 屍身의 길이

와 부피에 맞도록 합니다.

칠성판(七星 板)은 염습(殮襲)할 때 시신(屍身)밑에 까는 널빤지로 두께가 다섯 푼이라 합니다.

옛날에는 父母가 회갑(回甲)이 지나면 이미 관재(棺材)를 준비(準備)하고 옷 칠을

하여 소중(所重)히 보관(保管)했다가 사용(使用)하는 예(例)가 많았습니다.

 

13) 부고(訃告)

부고(訃告)는 호상(護喪)이 상주(喪主)와 의논(議論)해 친척(親戚)과 친지(親知)에게

신속(迅速)하게 전(傳)합니다. 부고장(訃告章)은 백지(白紙)에 붓글씨로 쓰는 것이 正中하지만

장수(張數)가 많을 때는 인쇄(印刷)로 하고 봉투(封套)만 붓글씨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부고(訃告)를 알리는 方法으로는 전인 부고(專人 訃告 : 直接 사람이 하는 訃告),

우편(郵便 訃告,) (新聞 訃告)가 있습니다.

사후(死後)의 칭호(稱號)는 부고(訃告)를 보내는

것이므로 喪主의 아버지면 대인(大人), 어머니면 대부인(大夫人), 할아버지면 왕대인(王大人),

할머니면 왕대부인(王 大夫人), 아내일 때는 망실(亡室) 또는 합부인(閤夫人),

同生일 때는 망제(亡弟)라 씁니다.

 

14) 습(襲)

습(襲)은 사체(屍體)를 닦고 수의(壽衣)를 입힌 뒤 염포(殮布)로 묶는 절차(節次)로서

엽 습(殮襲) 또는 습염(襲殮)이라 합니다.

먼저, 향(香)나무 삶은 물이나 쑥을 삶은 물로 시신(屍身)을 정하게 씻기고 나서

수건(手巾)을 닦고 머리를 빗질하고 손톱과 발톱을 깍 아 주머니에 넣습니다.

이것이 끝나면 시신(屍身)을 침상(寢牀)에 눕히고 수의(壽衣)를 입히는데,

옷은 모두 오른쪽으로 여밉니다.

다음으로 습전(襲展)이라 하여 제물(祭物)을 올리고 주인이하 (主人以下)모두가 자리에서

곡(哭)을 합니다.

이어 시신(屍身)의 입 속에 구슬과 쌀을 물려주는데 이를 반함(飯含)이라 합니다.

염습(殮 襲)의 절차(節次)가 끝나면 집사자(執事者)는 이불로 시신(屍身)을 덮습니다.

이를 졸습(卒 襲)이라 합니다.

이때 화톳불을 피우고 영좌(靈 坐)를 꾸밉니다.

교의에는 혼백(魂帛)을 만들어 얹고 명정(銘旌)도 만들어 세워 놓습니다.

이 의식(儀式)이 끝나면 친족 친지(親族 親知)들이 들어가서 곡(哭)을 합니다.

 

15) 소렴(小殮)

소렴(小殮)이란 시신(屍身)을 옷과 이불로 싸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다음날 아침 날이 밝으면 執事者 小殮에 쓸 옷과 이불을 준비해 놓습니다.

머리를 묶을 삼끈과 베 끈을 준비(準備)하고, 소렴 상(小殮 床)을 마련하고 시신

(屍身)을 묶을 베와 이불과 옷도 준비(準備)합니다.

이것이 끝나면 제물(祭物)을 올린 다음에 소렴(小殮)을 시작(始作)합니다.

우선 屍身을 소렴 상(小殮 床)에 눕히고 옷을 입히는데, 옷은 좋은 것으로 골라서

입히고 이불은 겹으로 합니다.

옷을 입힐 때는 왼편으로부터 여미되 고름은 매지 않으며,

손은 악수로 싸매고 선(綿) 목으로

눈을 가리고 폭건(幅巾)과 두건(頭巾)을 씌웁니다. 이불로 고르게 싼 다음,

장포(長布) 두 끝을 찢어 각각 매고 속포(贖布)로 묶습니다.

이때 속포(贖布) 한쪽 끝을 세 갈래로 찢어서 아래로부터 次例로 묶어 올라갑니다.

 

16) 대렴(大殮)

대렴(大殮)이란 소렴(小殮)이 끝난 뒤 시신(屍身)을 입관(入棺)하는

의식(儀式)으로서 소렴(小殮)을 한 이튿날,

즉 죽은 지 사흘 째 되는 날에 합니다.

날이 밝으면 집사자(執事者)는 탁자(卓子)를 가져다가 방 동( 東)쪽에 놓고,

옷 한 벌과 이불 둘을 준비(準備)합니다.

시신(屍身)을 맬 때는 세로는 한 폭을 셋으로 쪼개서 소렴(小殮) 때와 같이 하고 가로는 두 폭을 씁니다.

다음으로 관(棺)을 들여다가 방 서( 西)쪽에 놓고 입관(入棺)하는데

이때 제물 (祭物)을 올리는 것은  소렴(小殮)때와 같이 합니다.

이때 자손(子孫)과 (女)들은 손을 씻습니다.

대렴 면(大殮 錦)으로 시신(屍身)을 싸되 먼저 발을 가린 다음

머리를 가리고 또 왼쪽을 가린 뒤에  오른쪽을 가립니다.

장포(長布)와 횡포(橫布)順으로 맨 다음 시신(屍身)을 들어서 관속(棺屬)에 넣습니다.

生時에 빠진 이나 먼저 깎은 손톱발톱을 담은 주머니를 관(棺) 귀퉁이에 넣습니다.

이것이 끝나면 병풍(屛風)이나 포장(布帳)으로 관(棺)을 가린 뒤 관 동( 東)

쪽에 영상(靈床)을 마련하고 제물(祭)을 올립니다.

 

17) 성복(成服)

대렴(大 殮)이 끝난 이튿날,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하는 의식(儀式)입니다.

날이 밝으면 오복(五服)의 사람들이 각각(各各) 그 복(服)을 입고, 제 자리에 나간

에 조곡(弔哭)을 하고 서로 조곡(弔喪)을 합니다.

<喪禮秘要>에 보면 사람들이 차마 그 父母가 죽었다고 생각(生角) 할 수 없어서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대렴(大殮)을 하고 그 날로 성복(成服)을 하는 수가 간혹(間或)

있는데 이는 예(禮)에 어긋난다고 씌어 있습니다.

조곡(弔喪)을 할 때는 오복(五服)의 차례 대(次例 代) 하는데, 여러 자손(子孫)

들은 조부(祖父)와 아버지 앞에 가서 끓어 앉아 슬피 운 다음

조모(祖母) 및 어머니 앞에 가서 또 이와 같이 합니다.

女子는 먼저 조모(祖母)와 어머니 앞에 가서 곡(哭)한 다음에

조부(祖父) 및 아버지 앞에 가서 남자(男子) 의식(儀式)과 같이 합니다.

 

18) 상복(喪服) 입기

상복(喪服)을 입는 절차(節次)를 성복(成服)이라 합니다.

대렴(大 殮)한 그 이튿날로서 죽 은지 4째 되는 날입니다.

차마 부모(父母)가 죽은 것으로 여길 수가 없어서 급(急)히 성복(成服)을 하지 않고

4이 된 후(後)에 성복(成服)을 합니다.

이렇게 생각(生角)하면 대렴(大 殮) 成服을 같은 날 하는 것은 잘못 된 일입니다.

3이 지난 대렴(大殮)을 하고 바로 그날 성복(成服)을 하니 이것은 본래(本來)

예()에 어긋나는 행위(行爲)입니다.

대렴(大 殮)한 이튿날 날이 밝을 적에 오복(五服)을 입을 사람들이 각자(覺者) 그 복(服)

입고 들어가서 제자리로 간 후(後) 아침의 곡(哭)을 하고 조곡(弔喪)합니다.

상복(喪服)은 머리를 걷고 단정(端整)히 상관(喪冠)을 쓰되, 효건(孝巾)으로 받들고,

그 위에 수질(首姪)을 맵니다.

치마를 입고, 교()와 요질(腰紩)을 띠며 짚신을 신고 기년복(朞年服) 以上은 모두

지팡이를 짚습니다.

婦人은 머리를 걷었던 것을 버리고 관()을 쓰고 최상(최)을 입으며,

요질(腰紩)을 띠고 짚신을 신으며 지팡이를 짚습니다.

어린이도 성인(成人)과 같은데 다만 관()과 수질(首絰)이 없을 뿐입니다.

남자(男子)는 널 쪽에 西쪽을 해 자리를 잡고 각각(各各)차례(次例)로 복(服)을 입으며

모두 슬피 조곡(弔喪)합니다.

초상(初喪)때에는 성복이전(成服以前)에는 조례(弔禮)와 배례(拜禮)가없습니다.

요즘 들어 아침에 전()을 올리고 나서 성복(成服)하기 전(前)에 절을 하곤 하는데

이것은 예의(禮意)에 어긋납니다.

상관(喪冠) : 두꺼운 종이로 심을 넣는데 폭은 5인치 2푼 반을 베로 싸되,

베의 샛수는 최에 비하여

조금 가는 것으로 합니다.

三年喪은 다듬어 빨지 않는 것, 기년(朞年) 이하는 빨아서 다듬어 둔 것으로 세 줄을 접습니다.

효건(孝巾) : 을 받드는 것을 말합니다.

수질(首絰) : 위에 쓰는 것으로서 삼으로 두 가닥을 서로 꽈서 만듭니다.

꽈놓은 둘레가 참최는 9인치 재최는 7치2푼, 대공에는 5치7푼, 소공에는 4치6푼,

시마에는 3치5푼으로 합니다.

치마 : 앞폭 여섯 폭, 뒤폭도 여섯 폭으로 앞은 웃옷 앞섶과 같이 떠놓습니다.

요질(腰 姪) : 교대(絞帶) 위에 매는 것으로 허리띠를 말함.

짚에 삼을 섞어서 굵은 동아줄 같이 만 듦 니다.

그 굵기가 참최는 7치 2푼, 재최에는 5치 7푼,

대공에는 4치 6푼, 소공에는 3치 5푼,

시마에는 2치 8푼으로 합니다.

짚신 : 참최에는 짚신, 재최에는 삼신(삼신), 소공이하는 보통 신을 신습니다.

지팡이 : 대나무로 만드는데 높이는 가슴에 닿게 하고, 재최에는 오동나무를 깎아서

네모 버드나무로 대용(代用)해도 무방(無妨)합니다.

복제도(服 制度)는 참최에 3년입니다.

그 정복(正服)은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입습니다.

적손(適 孫)이 아버지가 죽어서 할아버지나 曾祖. 高祖를 위하여 승중(承 重)을 하는

자와 비록 아버지가 적자(適 子)가 되어서 후계(後繼)가 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승중(承重)은 되었으나 3을 못 입는 까닭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 적자(適者)가 폐질(廢疾:못된 병)이 있어서 종묘(宗廟)에 주장(主張)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

둘째 : 가계(家繼)에 전통(傳統)을 잇는 것을 전(傳)하는데 정실(正室)의 몸이 아닌 것 다시 말해서

서손(庶孫)이 후계(後繼)가 된 사람.

세째 : 몸이 정실(正實)이 아닌 것. 즉 서자(庶子)를 세워서 후계(後繼)를 삼았을 때.

네째 : 정실(正實)이되 몸이 아닌 것. 즉 적손(適孫)을 세워 후계(後繼)를 삼은 경우 등(境遇 等)입니다. 以上은 정복(正服)을 말한 것이고 의복(衣服)은 며느리가 시 부모(始 父母) 하는 것과

남편(男便)이 숭중(崇重)되었을 때에 따라서 입는 복(服)들도 이와 같습니다.

또한 그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복)을 입다가 소상 전(小喪 前)에 죽으면 다시

그 아들이 소상(小喪)때부터 복(服)을 받아 입습니다.

이것을 대복(代服)이라 합니다.

물론(勿論) 이것은 가례(家禮)에는 실려 있지 않으나 의리(義理)에 속한 일이며,

초상(初喪)에는 하루도 주상(主喪)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이 있어 집상(執喪)을 하지 못하거나 상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죽으면

그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代身)해서 복(服)을 입는 것은 부득(不得)이한 일입니다.

참최의 상복(喪服)은 석세 베(三升布)로 만듭니다.

이것을 참()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몹시 애통(哀痛)하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최() 역시 효자(孝子)의 애통(哀痛)하는 뜻을 밝힌 것이라 합니다.

삼년 복(三年服)을 입는 것은 실로 잠깐 사이의 일이지만,

너무 짧다고 계속(繼續)해 입다 보면 한(恨)이 없겠으므로

예경 칙령(禮經 勅令 : 예(例)에 관(關)한 글을 나라에서 만든 칙령(勅令)으로

적당(適當)히 제정(制定)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3이란 위로는 하늘을 본받고 아래로는 땅에서 하며,

가운데로 사람에게서 한 것이라고 합니다.

재최(齊 衰)도 3입니다. 재최 (齊 衰) 는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입는 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계신데 어머니가 죽었거나 딸이 시집을 갔으면 어머니를 위해서 3 을 입지 못합니다.

시집갔다 돌아와 집에 있는 女子나 서자(庶子)가 그 어머니를 위해 입는 도 마찬가지입니다.

맏손자(適孫)가 그 아버지가 죽었을 때 祖母. 曾 祖母. 高祖母를 위해서 승중(承重)

와 어머니가 적자(適者)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복(衣服)에 있어서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해서와 남편(男便) 승중(承重)

따라서 입는 과 남편(男便) 계모(繼母)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첩(妾)의 아들이 적모(嫡母)를 위해서도 같고,

계모(繼母)가 장자(長子)를 위해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어머니를 위하는 것이 나, 아버지가 죽 은지 3 안에 어머니가

죽으면 그대로 기년(朞年)만복을 입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빈소(殯所)를 모시지 않고 있다가 어머니가 죽으면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합니다.

장기(杖朞) : 막대기를 짚고 기년(祈年)을 입습니다.

그 정복(正服) : 제상(齊衰)은 맏 孫子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가 계신데 할머니를 위한 입니다.

승중(承重)했을 때는 증조모(曾 祖母.) 고조모(高祖母)의 경우(境遇)도 같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계신 때 어머니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모(繼母.) 고모(嫡母)나 자모(子母)에게도 의복(衣服)을 입습니다.

또한 시집간 어머니와 쫓겨난 어머니를 위하는 것은 아버지의 뒤이면 복(服)을 입습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계시는데 시어머니를 위해서도 衣服을 입습니다.

부장기(不杖朞)(막대기를 짚지 않고 기년(祈年)을 입습니다.)

그 정복(正服)은 조부모 (祖父母.) 백숙부모(伯叔父母.) 형제(兄弟.)

중자(衆子)를 위해서 입는 복(服)입니다.

누이가 시집을 가지 않은 境遇나 시집을 갔다가 쫓겨 온 境遇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시집을 갔지만 남편(男便)이나 자식(子息)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女子 男便 兄弟의 아들을 위해서, 첩(妾)이 큰 婦人을 위해서, 男便의 여러

아들을 위해서, 始 父母가 맏며느리(長子 斬衰 該當한 이의 아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父母가 계시는데 양부모(養父母)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자(衆子) : 맏아들 의 모든 아들)

다섯 달(五月)을 입는다. 그 정복(正服)은 증조부모(曾祖父母)를 위해서 입습니다.

의복(衣服)으로는 계 증조모(繼 曾 祖母)를 위해 입습니다.

석 달(三月)을 입는다. 정복(正服)은 고조부모(高祖父母)를 위해서 입습니다.

의복(衣服)은 계 고조모(繼 高祖母)를 위해서 입습니다.

대공(大功)에는 아홉 달(九月)입니다.

그 정복(正服)은 종형제(從 兄弟)와종자매(從 姉妹)를 위해 입는 것입니다.

즉 백부(伯父)나 숙부(叔父)의 아들. 딸을 말합니다.

중손(衆孫) 男女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녀(孫女)가 시집갔다가 쫓겨 왔거나 서자(庶孫)에 승중(承重)이 된 이도 같습니다.

적자(嫡子)가는 데 長孫을 위하는 것과 지자(支子)가 嫡孫을 위하는 것도 같습니다.

대공. 소공(大功. 小功) : 공()은 베()를 다듬는데 있어서의 공적(功績)을 나타내므로

자세(姿勢)하고 거친 것을 말합니다.

소공(小功)에는 다섯 달(五月)입니다.

그 정복(正服)은 종조부(從 祖父)와 종조모(從祖母,) 형제(兄弟)의 손자(孫子,) 종형제(從 兄弟)

아들, 재종형제(再從兄弟)의 경우(境遇)에 입는 복(服)입니다.

외조부모(外祖父母)와 외숙(外叔,) 생질(甥姪)의 경우(境遇)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복(衣服)으로는 종조모(從祖母)와 남편(男便)의 형제(兄弟.) 손자(孫子.)남편 종형제

(男便 從 兄弟의 아들을 위해서 입습니다.

형제(兄弟)의 아내와 남편(男便)의 형제(兄弟)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부(弟夫)와 사부(私夫)끼리도 소공 복(小功 服)을 입습니다.

질부. 사부(姪婦. 私夫) : 兄弟의 아내끼리 서로 를 때, 맏며느리가 다음 며느리를

부를 때 제부(弟夫,) 그리고 제부(弟夫)가 맏며느리를 부를 때 사부(私夫)라 합니다.

시마(緦麻)에는 석 달(三月)이다. 그 정복(正服)은 종증조부(從 曾祖父,)

증조모(曾 祖母,) 증조(曾祖)의 형제(兄弟)와 자매(姉妹,)

그리고 형제(兄弟)의 증손(曾孫)과 증조부(曾祖父,) 증 조모(曾 祖母)를 위해서 입습니다.

종형제(從 兄弟)의 자매(姉妹,) 외손내외(外孫 內外 從 兄弟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복(衣服)으로는 남편형제(男便兄弟)의 증손(曾孫)과 남편(男便)의 손자(孫子)

남편 종형제(男便 從 兄弟)의 아들에게도 역시 같습니다.

서모(庶母.) 유모(乳母.)사위. 장인(丈人)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죽은 것()을 위해 입는 복()은 차례로 한 등(等)씩 내려갑니다. 보통 8에서 11 사이에

죽은 경우(境遇)는 하상(下喪"일찍 죽을 "),12에서

15 사이에 죽은 경우(境遇)는 중상(重喪,)16에서 19 에 죽은 경우(境遇)

장상(長上)이라합니다. 8가 못되면 복(服)이 없는 상(喪)이니 그저 곡(哭)만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아이로 죽은 것이 기년(朞年) 복(服)에 친(親)이면 열흘에 사흘씩 곡(哭)을 하고,

시마(緦麻)에 친(親)이면 사흘로 제한(制限)합니다.

낳은 지 석 달 미만(未滿)은 고 도 하지 않습니다.

약혼(約婚)했거나 결혼(結婚)했으면 상(喪)(:일찍 죽을 )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라는 것은 사람의 으로 인연(因緣)한 것이라 곡(谷) 肉 이라는 것은

어른이나 어린이나 다를 것이 없으니 아이들이 죽은 복(服)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모든 남자(男子)가 남의 후계자(後繼者)가 된 사람과 여자(女子)가 남에게 간 사람이

자기(自己) 친당(親黨)을 위하는 데는 모두 한 등(等)씩 내려갑니다.

딸이 남에게 간 사람은 복(服)이 내려갑니다.

그리고 제상(除喪)이 되기 전에 쫓겨났으면 그 위 본복(本服)을 입습니다.

이미 제상(除喪)했으면 을 다시 입지 않습니다.

부인(婦人) 男便의 당()을 입을 때에 상사(喪事)를 당(黨)하여서 쫓겨났으면

을 벗습니다.

(妾)이 자기친당(自己 親 黨)을 위해 입는 복(服)은 일반(一般)사람과 같이 합니다.

마음으로 슬퍼하기를 3을 합니다.(心喪三年) 심상(心喪)이란 몸에 베옷을 입지 않고

마음으로 슬퍼 한다는 것은 원칙적(原則的) 의로는 스승에게 해당(該當)되는데,

마음으로 3을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년(祈年)을 입되 3을 펴는 신()것은 아버지가 계시는데 어머니를 위하는 것,

적모, 계모(嫡母, 繼母)도 같습니다.

또는 쫓겨나간 어머니, 시집간 어머니, 父母가 계신데 양부모(養父母,)

적손(嫡孫)이 할아버지가 계신데 할머니(증 고조(曾 高祖)가 계신데 증고조모(曾 高祖母)

같습니다.)그리고 본생부모(本生父母,) 며느리가 시(始)아버지가 계신데 어머니를 위함과

첩(妾)의 아들의 처(妻)가 남편(男便)의 적모(嫡母), 남편(男便)의 승종 (承從)

그의 부모(父母)를 위하는 것 등(等)도 마찬 가지 입니다.

또한 庶子로서 아버지의 뒤가 된 자는 어머니를 위하는 것은 시마에 3을 펴는 것

이며, 출모(出母) 家母를 위하는 것은 비록 은 없으나 3을 펴는 것입니다.

조복(弔服)에 삼()을 더합니다. 복(服)이 없는 부인(夫人)이나 일가(一家)고모(姑母,)

맏누이 혹은 누이동생(同生)

으로 시집을 간사람 또는 친구(親舊)들이나 선비(先妣,) 종들이 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 한 가닥으로 태두리 를 하여 머리에 쓴다는 것이 어려워서 그저 흰 띠로 석 달이면

정(情)을 편다고 합니다.

성복(成服)한 날 주인 형제(主人 兄弟)들이 처음으로 죽을 먹습니다.

아들들은 죽을 먹습니다.

처(妻)나 첩(妾) 또는 기녀(妓女)이나 아홉 달 복(服)을 입는 사람들은

거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맛있는 나물이나 일은 먹지 않습니다.

다섯 달 복(服)이나 섯 달 복(服)을 입는 사람들도 술을 마시고 고기는 먹되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이때부터 연고(緣故)가 없으면 밖에 나가지 않고 만일 부득(不得)이한 일로 출입

(出入)하게 되면 순박(淳朴)한 말에 베 안장을 하거나 흰 가마에 베 주렴 한 것을 탑니다.

 

19) 문상(聞喪)

객지(客地)에 나가 있다가 부모(父母)의 상()을 듣고 돌아오는 것을 일컫습니다.

부음(訃音)을 듣는 즉시 곡(哭)을 하며 부고(訃告)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절을 하고

흰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상복(喪服)으로 다시 갈아입고 시신(屍身) 앞에 나아가 슬피 곡(哭)을 합니다.

심상(心喪) - 실제(實際)로 상복(喪服)은 입지 않은 채 마음으로 3 동안 슬퍼하는 것을 말 합니다.

원래(原來)는 스승을 위하여 행(行)하는 것이나 아버지가 계실 때 어머니를 위해서나

또는 적모(嫡母)나 계모(繼母,)(改嫁)在家한 어머니를 위해서도 이와 같이 합니다.

조상(弔喪) - 조상(弔喪)은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빌고 유가족(遺家族)

위로(慰勞)하기 위하여 찾아가 인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통식(傳統式) 상례(傳統式 喪禮)의 경우 조상(境遇 弔喪)은 원래(原來) 성복(成服)후(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복 전(成服 前)에는 가까운 일가친척(一家 親戚)이나 친(親)한 친구(親舊)가 가서

상주(喪主)에게만

인사하고 영구(靈柩)에는 절을 하지 않습니다.

성복 후(成服 後)라도 망인(亡人)과 생시(生時)에 안면(顔面)이 없었거나 여자(女子)

경우(境遇) 빈소(殯所)에는 절하지 않고 상주(喪主)에게만 인사합니다.

조객(弔客)은 먼저 호상(護喪)에게 성명(姓名)을 말하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상주(喪主)는 일어나서 '애고 애고…'하고 곡(哭)을 한다.

호상(護喪)이 조객(弔客)

안내(案內)하여 영좌(靈座)앞으로가면 조객(弔客)은 '허희 허 희'보통(普通)은 '어이 어이…')하고

슬피 곡(哭)을 한 뒤 두 번 절을 합니다.

향(香)을 피우고 무릎을 꿇고 앉는다.

집사(執事)가 무릎을 꿇고 잔을 조객(弔客)에게 주고 술을 따릅니다.

조객(弔客)이 이것을 다시 집사(執事)에게 주어 영좌(靈座) 앞에 놓게 하고 일어서면,

호상(護喪)이 상주(喪主)의 곡(哭)을 그치게 합니다.

축관(祝官) 西쪽을 하여 무릎을 꿇고 제문(祭文)을 읽고 조객(弔客)이 가져온

부의(賻儀)의 명세(明細)를 바치고 나면 조객(弔客) 喪主가 모두 슬피 을 합니다.

고인(故人)에 대(代)한 인사가 끝나면 弔客은 상주(喪主)와 맞절을 한 다음 무릎을 꿇고,

"상사(喪事)를 당하시어 얼마나 망극(罔極) 하십니까."

또는 "상사(喪事) 말씀, 무슨 말씀으로 여 쭈 오리 까"

또는 병환("病患) 심중(沈重)하시더니,

상사(喪事)를 당하시어 얼마나 망극(罔極) 하십니까." 라고 인사를 합니다.

상주(喪主)는 머리를 숙여 슬픈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대답(對答) 代身하기도 하고,

망극("罔極) 하옵니다.

" 원로(遠路)에 수고하시니 죄 송(罪悚)합니다."라고 대답(對答)하기도 합니다.

부의(賻儀) - 상가(喪家)에 부의(賻儀)를 보낼 때는 백지(白紙)에 단자(單子)를 써서

봉투(封套)에 넣어 보냅니다.

단자(單字)를 쓰지 않을 때는 봉투(封套)에 물목(物目)을 기록(記錄)합니다.

부의(賻儀)는 돈이나 상가(喪家)에서 필요(必要)한 물건(物件)으로 합니다.

 

20) 치장(治粧)

옛날에는 석 달 만에 葬事를 지냈는데,

이에 앞서 葬事를 지낼 만한 땅을 고릅니다.

묘(墓) 자리를 정(定)하면 이어 장사(葬事) 지낼 날짜를 잡습니다.

날짜가 정(定)해지면 영역(靈域)에 산역(山役)을 시작(始作)하고 토신(土神)에게

사토 제( 沙土 祭)를 지냅니다.

천광(穿壙) : 사토 제(沙土 祭)가 끝나면 드디어 땅을 파기시작(始作)하여 광중(壙中)을 만듭니다.

공중(壙中)을 팔 때는 금정기(金井機)를 땅위에 놓고 역사(役事)를 시작(始作)합니다.

금정기(金井機)는 나무 막대기 네 개를 가지고 정()자 모양(模樣)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관(棺)의 크기를 짐작(斟酌)하여 반듯하게 놓고서 네 모퉁이에 말뚝을 박아 표시(表示)한 뒤

그 모양(模樣)대로 파 들어갑니다.

구덩이를 다 파고 나면 석회(石灰)에 모래를 섞어 발라서 이 들어갈 정도(定度) 크기의

곽()을 만듭니다.

 

21) 발인(發靷)

관(棺)을 방(房)에서 들고 나와 상야(喪輿)로 옮기는 것을 천구(遷柩)라 합니다.

상여(喪輿)가 상가(喪家)를 떠나 장지(葬地)로 출발(出發)하는 것을 발인(發靷)또는 출상(出喪)이라 합니다. 발인 시(發靷 時)에는 반드시 발인제(發靷祭)를 지냅니다.

발인제(發靷祭) 때 관(棺)의 위치(位置)는 천구(遷柩)하여 관(棺)을 상여(喪輿) 앞에 두고

발인제(發靷祭)를 지내는 경우(境遇) 영구 관(靈柩, )을 상여(喪輿) 위에 올려 모셔 놓은 다음

발인제(發靷祭)를 지내는 경우(境遇)가 있습니다.

발인제(發靷祭)는 간단(簡單)하게 제물(祭物)을 차리고 발인 축(發靷 祝)을 읽고, 맏 상주(喪主)

두 번 큰 절(단작이배 : 單酌二拜)을 합니다.

발인제(發靷祭)를 지내고 상여(喪輿)꾼들이 상여(喪輿)를 처음 들어 올렸을 때

망자 (亡者)의 집 쪽으로 향(向)하여 세 차례 상여(喪輿)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망자 (亡者)가 집을 보고 마지막 하직(下直)인사라 합니다.

상두(喪頭)꾼은 보통 남자(普通 男子)들이지만 상여(喪輿)가 나갈 때 상여(喪輿)의 뒤쪽에

광목(廣木)을 길게 늘어뜨려 부인(婦人)들이 이것을 잡고 따라 가기도 하는데 이를

'설매' 또는 '배줄'이라 하고 혼(魂)이 저승 갈 때 타고 가라는 뜻입니다.

 

22) 운구(運柩)와 노제(路祭)

발인 후 상여(發靷 後 喪輿)를 장지(葬地) 운반( 이동運搬 移動)하는 것을

운구 '運柩' 또는 '운상(運喪)'이라 하거나 행상('行喪) 나간 다' 고 합니다.

운구(運柩)를 담당(擔當)하는 일꾼은 상두('喪頭)꾼'이라 하며, 상여(喪輿)노래의 앞소리를 하는

사람을 선('先)소리 꾼'이라 합니다.

운상(運喪)때는 맨 앞에서 부터(銘旌)영여(靈與) 만장(輓章)운아삽(雲亞삽)상여(喪輿)

상주(喪主,) 백관(百官,) 조문객(弔問客)의 차례(次例)로 줄을 잇습니다.

노제(路祭)를 안 지낼 수도 있지만 운구 도중(運柩 途中)에 보통(普通) 한차례(次例)

를 지냅니다. 로제(路祭)는 주로 망령(亡靈)의 친구(親舊)들이 주제관(主祭管)이 되어 지내므로

원(願)하는 우인(友人)들이 많은 경우(境遇)는 두서너 차례(次例) 지내기도 합니다.

로제(路祭)의 장소(場所)는 마을 어귀·골목 어귀·삼거리 등(等) 망령(亡靈)과 추억(追憶)이 깃든

장소(場所)를 지날 때 지내는데,

친구(親舊)들이 사자(死者)와의 마지막 하직(下直)인사로 지내는

것으로 사자(死者)와 이별(離別)을 섭섭하게 여겨서 행(行) 하는 제사(祭祀)입니다.

 

23) 하관(下棺)과 부수 제례(祭禮)

상여(喪輿)가 장지(葬地)에 도착(倒着)하기 전(前) 장지(葬地)에서 일하는 일꾼을

산역('山役)꾼'이라 합니다.

산역(山役)꾼과 지관(地官)은 장지 근처(葬地 近處)의 바위나 개울가에 가서 술,

과일 어포(魚脯) 차려 놓고 ' 오늘 이산(山)에 손님이 들어오니 산신(山神)께서는

손님을 잘 보살펴 달라'고 빌면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냅니다.

그리고 (墓)를 쓸 자리에 명태(明太)를 막대기나, 삽에 묶어 꽂아 세우고,

그 주위 (周圍)에 술을 뿌리고는, 개토제(開土祭)를 지냅니다.

(墓) 자리를 조성(造成)하기 위해 구덩이를 팔 때는 묘터(墓攄) 上. 中, 下

술을 붓고, 술을 부은 자리에 괭이로 각기 흙을 파기 시작(始作)합니다.

이 광중(壙中)을 파는것을 청광('淸光) 낸다.' 또는'굿 낸다.'고 합니다.

하관은 청광(淸光)이 끝나면 지관(地官)이 잡아준 하관시간(下官時間에) 맞추어서

상제(喪制)들이 모신 상(床)에서 관(棺)을 운반(運搬)하여 와서

베 끈을 잡고 천천히 하관(下棺)을 합니다.

하관(下棺)을 할 때 상주(喪主) 곡(哭)을 하지 않습니다.

하관(下棺)은 시신(屍身)의 머리는 쪽으로 발은 쪽으로 하게 하여 하관(下棺)을 합니다.

하관(下棺)때 시신(屍身)을 관(棺)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묻는 동천('動天蓋')는 쓰지 않고

관(棺)채로 묻는데, 이때 지관(地官)이 하관(下棺)을 보면 해롭다고 정(定)해주는

나이의 사람이 하관(下棺)을 보게 되면 중상(重傷)을 당(黨)한다 하여 하관(下棺)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발인(發靷)날이 말날(午日)인 경우(境遇) 쥐띠인 사람과 죽은 이와 상극(相剋)

띠를 가진 이가 하관(下棺)을 보면 죽은 사람이나 산사람 모두에게 해롭다고 하여보지 않습니다.

상주(喪主)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관(下棺)이 끝나면 지관(地官)은 관(棺)을 바로 잡고 평평(平平)한지 여부(與否)를 살펴

이상(理想)이 없으면 흙덮기에 들어가는데 복토(' 覆土)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봉분(封墳)이 완전(完全)히 성분(成墳)되었을 때 주과포(酒·果·浦)를 차려서

평토제(平土祭)를 지냅니다.

평토제(平土祭)를 지내고 나면, 집사(執事)가 영좌(靈座 : 영혼(魂靈)을 안치(安置)

하는 장소(場所)를 철거(撤去)하고 상주(喪主)는 영여(靈與)에 혼백(魂魄)을 모시고

왔던 길로 되돌아 집으로 오거나, 상여(喪輿)가 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되돌아온다.

(다른 길로 와야 鬼神이 못 따라 온다고 합니다).

되돌아올 때 상주(喪主)들은 영여(靈與)를 뒤따르는데 이를 반혼(返魂)이라 합니다.

집에 돌아오면 안 상주(喪主)들이 곡(哭)을 하면서 혼백(魂魄)을 맞이합니다.

혼백(魂魄)은 빈소(殯所)에 모십니다. 그러면 망자(亡者)에게 반혼(返魂)을 고(告)하는

제(祭)를 지내는데 이를 반혼제(返魂祭)라 합니다.

앞에 주과포(酒·果·浦(식혜)醯를 진실하고(차려놓고)술을 치고 축(祝)을 읽고 상주(喪主)들이

두 번 절합니다.

 

24) 기제사(忌 祭祀) 전의 각종의례(各種儀禮)

영좌(靈座)를 장지(葬地)에서 반혼(返魂)하여 와서 혼백(魂魄)을 다시 모시고 난 후 부터

담제(嬉祭)를 지내기 까지 지내는 各種 祭祀를 묶어 흉제(凶祭)라 합니다.

忌 祭祀지내기 各種 祭祀는 담제(嬉祭)를 지내므로 써 보통(普通) 끝이 납니다.

우제(虞祭) 갓 돌아가신 영혼(靈魂)을 위로(慰勞)하는 뜻으로 지내는 제(祭)로 일종(一種)

위령제(慰靈祭)입니다.

우제(虞祭)는 세 번 지내는데,

세 차례 모두 다 그 집안의 기제사방식(忌 祭祀方式)

(家門에 따라 다름)과 동일(同一)하게 지내고 곡(哭)을 하는 것이 보통(普通)입니다.

초우제(初 虞祭) 반혼(返魂)한 혼백(魂魄)을 빈소(殯所)에 모시며 제사(祭祀)를 지내는데

이를 초우제(初 虞祭)라 합니다.

초우제(初虞 祭)와 반혼제(返魂祭)를 함께 하는 경우(境遇)가많습니다.

초우제(初 虞祭)

장사 당일(葬事 當日)에 지내야 합니다.

초우제(初 虞祭)를 지내고 나면 상주(喪主) 이하(以下) 상제(喪主 以下 喪制)들은 비로소

목욕(沐浴)

할 수 있지만 빗질은 하지 못합니다.

재우제(再虞祭) 원래(原來)는 초우제(初虞 祭)를 지내고 난 다음날 또는 그 하루 거른 다음날

아침에 지냅니다.

보통(普通)은 초우 제(初虞 祭) 지낸 다음날 아침에 지냅니다.

삼우제(三虞祭) 재우 제(再虞 祭) 바로 다음날 아침에 지냅니다.

삼우제(三虞祭)를 지내고 나서 상주(喪主)는 비로 서 묘역(墓域)에 갈 수 있습니다.

상주(喪主)는 간단(簡單)한 묘제(墓祭)를 올리고 성분(成墳 : 封墳)이 잘 되었는지 묘역(墓域)

잘 조성(造成)되어 있는지를 직접(直接) 살 피고 잔손질을 합니다.

최근最近에 와서는 상기(喪期)를 단축(短縮)할 경우(境遇) 삼오(三五)날 (三虞祭날) 가서 봉분(封墳)

옆에 흙을 파고 혼백(魂帛)을 묻습니다.

이를 매혼(埋魂)이라 합니다.

졸곡제(卒哭祭)

삼우제(三虞祭)를 지내고 3個月 이후(以後) 날을 잡아 졸곡제(卒哭 祭)를 지냅니다.

최근(最近)에는 상기(相忌)가 짧을 경우 삼우제(境遇 三虞祭)가 끝난 뒤 첫 강일

(剛日)에 지내기도 합니다.

졸곡제(卒哭祭)를 지내고 나서  상주(喪主)는 아침저녁으로 조석(朝夕)을 올릴 때만

곡(哭)을 하고,

평시(平時)에는 빈소(殯所)에서 곡(哭)을 하지 않습니다.

졸곡제 전(卒哭 祭 前)에는 문(門)에 상주(喪主) "소자(疏者)○○"라 쓰지만

졸곡 후(卒哭 後)에는 효자("孝子)○○"라고 씁니다.

부제(祔祭) 졸곡제(卒哭 祭) 다음에 지내는 제사(祭祀)로 신주(神主)

조상신주(祖上神主)곁에 붙여 모시는 제사(祭祀)입니다.

사당(祠堂)이 있는 境遇 망위(亡位)의 신주(神主)를 모셔가서 이미 봉안(奉安)되어 있는

선망신위 (先 亡 神位)들과 존비(尊卑)·위차(位次)에 맞게 자리매김하여 제사(祭祀)를 모십니다.

철상(撤床) 후(後) 빈소(殯所)로 신주(神主)를 다시 모셔옵니다.

소상(小祥) 사망 후(死亡 後) 1 만에 지내는 제사(祭祀)로 제사(祭祀) 방식(方式)

우제(虞祭)와 비슷합니다.

먼 친척(親戚)도 오고 문상 객(問喪 客) (주로 初喪 弔問오지 못한 사람)도 많이 오므로

음식(飮食)을 많이 장만해 대접(待接)합니다.

소상(小祥) 을 치르고 나면 일반적(一般的)으로 바깥상주(喪主)와 안 상주(喪主)

요질(腰絰)과 수질(首絰)을 착용(着用)하지 않습니다.

대상(大祥) 사망 후(死亡後) 2 만에 지내는 로 소상(小祥)과 같은 방식(方式)으로 지냅니다.

소상(小祥) 때 보다 많이 오는 큰 행사(行祀)입니다.

보통대상(普通大祥)이 끝나면 사당(祠堂)이 있는 경우신주(境遇 神主)

사당(祠堂) 에 안치(安置)하고 영좌(靈座)는 철거(撤去)합니다.

담제(禫祭)를 따로 지내지 않는 경우(境遇)는 이날 바로 탈상(脫喪)하고 상기(喪期)를 끝내기도 합니다.

담제(禫祭) 대상 후(大祥 後) 두 달째 되는 날을 잡아 제사(祭祀)를 지내고 이날 탈상(脫喪)

하는 것이 원칙(原則)이었습니다.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습니다.

담제(禫祭) 때 탈상(脫喪)하고는 사당(祠堂) 고사(告祀)를 한 번 더 지내는데 이를

길제(吉祭)라 합니다. 지금은 이 길제(吉祭)도 사라졌습니다.

이후(以後)의 제사(祭祀)는 기제사(忌 祭祀)로서 이는 제례(祭禮)에 포함(包含)시키고

상례(喪禮)에는 포함(包涵)시키지 않습니다.

 

 

 

“이런 미친”

  엽기적인 장례식에 조문객들…

 

 

 

기사입력 2013-03-09 03:00:00

기사수정 2013-03-09 17:23:49

 

 

 

[토요뒷談]
黑雨 김대환을 기리는 기이한 추모제
북 쓰즈미 기타 아리랑 탱고…
소리의 대동제를 바칩니다

 

 


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원서동 북촌창우극장에서 열린

김대환 추모 콘서트의 서막을 열어젖힌 것은

이광수(가운데 꽹과리 든 이) 사물놀이패의 타악이었다.

시원한 빗소리가 쏟아지듯 신명나는 두드림의 초혼(招魂)이었다.

변영욱 기자 [email protected]

 
 

#1. 2013년 3월1일 오전 9시 - 형님, 봄입니다.

‘김대환 형님 봄입니다. 13. 3. 1.’

영하 2도.
삼월이라지만 봄치곤 좀 추운 아침이었다.
서울 세검정 자택에서 장사익은 붓을 들어 이렇게 썼다.
오후에 있을 어떤 제사 생각에 그는 설렜다.
이날은 ‘
형님’이 죽은 날이었다.
타악 연주자,
세서가(細書家),
모터사이클 광,
또는 다 합쳐 자유인.
누군가는 기인,
광인.
다른 이는 천상예인이라 부르는 사람,
고(故) 김대환 형님(1933∼2004).

#2. 2013년 3월 1일 오후 3시 - 무대 위의 ‘빅 브러더’
서울 종로구 원서동,
창덕궁 옆에 볕이 들었다.
궁 서쪽 담벼락 밖에 있는 북촌창우극장에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대 위 왼쪽에는 장사익이 아침에 쓴 ‘
김대환 형님 봄입니다’가 걸렸다.
오른쪽에는 일본의 전통음악 명인 오쿠라 쇼노스케가 당일 써내려간 반야심경이 붙었다.
그 아래는 남유소 화백이 그려온 그림이 차지했고,
이 모두 위에 스크린이 자리했다.
가운데는 김대환의 자리였다.
꽁지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끼고 왼손으로 턱을 괸 모습이 마치
오늘 무대를 감시하는 ‘빅 브러더’ 같다.
큰형님?
그래.
오늘 모인 사람들은 그를 형님,
큰형님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그냥 ‘
크신 분’이라 일컫기도 했다.

#3. 2013년 3월 1일 오후 4시 - 영정, 살아나다
100석짜리 극장에 관객 180명이 들어찼다.
넘쳐난 사람들이 객석 사이 계단에,
무대 위 양편 가장자리에까지 흘러 앉았다. 범람 같았다.
20명 넘는 연주자들도 숨는 법 없었다.
그들이 양반다리인지 똬리인지를 틀고 앉은 무대 한쪽이 곧 대기실이었다.

무대 위 스크린에 김대환의 영상이 나타났다.
검은 재킷에 검은 선글라스,
검은 모자를 눌러쓴 그의 나이는 가늠하기 힘들다.
열 손가락 사이사이에 북채,
장구채,
드럼 스틱을 섞어 총 6개의 채를 야무지게 틀어쥔 그가 내리치는
북에서 천둥과 비의 소리가 들고났다.
김대환의 호는 흑우(黑雨·검은 비)다.
밤에 쏟아 붓는 검은 비처럼 보이지 않지만 죽비처럼 인간을 깨우는,
존재의 소리.
1994년, 김대환이 일본의 부토(일본 현대무용의 한 갈래) 단체를 방문했을 때
연주한 실황 영상이었다.
연주가 그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또 다른 폭우를 만들어냈다.
무대 오른쪽으로 일본인들도 보였다.
일본 전통 북 연주 명인 오쿠라 쇼노스케도 있었다.
시작이었다.
한바탕 춤판,
소리판,
웃음판.
유쾌한 김대환 9주기 추모 콘서트의,
눈물 한 방울 없는 발칙한 추모제의 시작은 더 발칙했다.
엽기적인 장례였다.

 

추모 콘서트 무대에 오른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4. 2004년 3월 1일 밤 - 이런 장례 봤소?
서울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큰 소리가 났다.
‘소리만 좇던 큰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우리까지 조용해지면 되겠느냐’는 숙덕임이 신호였다.
고 박병천 선생의 씻김굿이 시작됐다.
춤꾼 이애주의 살풀이와 장사익의 소리가 더해졌다.
아예 김대환이 생전에 녹음한 음반이 틀어졌다.
여기 강은일의 해금,
허윤정의 거문고가 섞여들며 산 자와 죽은 자의 기묘한 합주가 시작됐다.
진혼을 위한 즉흥연주가 시작됐다.
옆 빈소에서 들고 일어났다.
“숙연한 자리에 웬 딴따라들이 몰려와서 소란이오?!”
“이거,
미친 것들 아냐!?”
항의하러 온 다른 조문객들은 장례식장에서 펼쳐지는 이색 풍경에 이내 빠져들었다.
예인들의 악기와 목청에서 폭우처럼 넘쳐나는 곡(哭)인지 곡(曲)인지 모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한 추모였고 그 나름대로 처연한 의식과도 같았다.

#5. 2013년 3월 1일 오후 4시 30분 - 사물놀이
징,
꽹과리,
장구,
북. 이렇게 사물(四物)이 늘어서자 무대 위가 꽉 찼다.
앞선 영상 속 고인의 연주를 이으려는 듯 한국 타악의 진수인 사물놀이가 펼쳐졌다.
‘타다앗 타다앗 탓 타다다앗.’
이광수 선생의 꽹과리가 장단을 주도하는 가운데 무대 위 스크린에 김대환의 생전 사진이 나타났다.
선글라스를 끼고 꽁지머리를 늘어뜨린 채 앞에 놓인
오토바이 헬멧을 장갑 낀 손으로 그러쥐고 있는 야무진 모습.
사물은 모터사이클이 구동되듯 일사불란하게 음의 공간을 질주했다.

#6. 2004년 3월 3일 오전 - 도심을 흔든 기이한 노제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 번쩍이는 거대한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30대가 늘어섰다.
건널목에 멈춰 선 시민들의 눈길이 거기 고정됐다.
‘국장(國葬)이라도 열린 걸까.
어마어마하군.
’ 저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행렬은 광화문 앞을 빠르게 지나쳤다.
고인이 30년간 고행 같은 연습을 했던 인사동을 한 바퀴 돌아 대학로로 향했다.
운구 행렬이었다.
노제의 선두에 김대환의 유구가 있었다.
대학로의 재즈카페 ‘
천년동안도’와 길에서도 큰형님을 추모하는 산 자들의 풍악이 이어졌다.

그는 생전에 오토바이광이었다.
그의 연습실을 2층에 인 서울 인사동 아리랑 명품관 앞에 할리 데이비슨 한 대가 멈춰서 있으면
‘여기 김대환 연습 중’이라는 뜻이었다.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는 노래도 있지만 그는 오토바이로 리듬을 탔다.
무대 위에 거대한 오토바이를 올려두고 ‘투두두두 투두두두 툿 투두 툿 투두’ 하는
배기통 소리에 맞춰 북을 두들기던 유명한
‘오토바이-타악 협연’은 전설이 아닌 실제였다.

#7. 2013년 3월 1일 오후 5시 - 한국의 아버지, 절 받으세요
사물이 연주를 그치자 이날 공연의 사회를 맡은 백발동안의 전통공연 연출가 진옥섭이 입술을 뗐다.
“오늘 이 자리에는 정말 많은 분들이 자리했습니다.
앞서 영상에서 잠깐 봤던 일본의 부토 무용가분들을 모시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진청색 의상을 맞춰 입은 일본 여성 둘,
가가야 사나에와 도모에 시즈네가 무대에 올랐다.
명상음악을 배경으로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매우 느리게 팔다리를 움직이는 부토를 췄다.
부토는 일본의 전통예술인 가부키와 노에 서구 현대무용이 결합돼 만들어진 전위 무용의 일종이다.
그들의 유장한 춤은 9분간 이어졌다.
세로로 선 북을 난타하는 김대환 선생의 전신이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연주곡 ‘사막’이 무대를 이어받았다.
스페인풍의 우수에 찬 기타 연주가
달콤쌉싸래한 분산화음과 신경질적인 트레몰로를 오가며 5분 30초 동안 객석을 사로잡았다.

일본전통 타악 연주의 명인으로 꼽히는 오쿠라 쇼노스케가 바통을 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연주자들이 3·1절에 벌이는 묘한 이어달리기였다.
그는 무대에 오르자마자 객석을 등지고 중앙의 김대환 사진을 향해 큰절부터 올렸다.
이어 작은 장구처럼 생긴 일본 전통 타악기 쓰즈미를 왼쪽 옆구리에 끼고 두들기며
‘이야우허우허!’ 하는 기이한 구음을 내기 시작했다.

음악적 부친에 대한 예였다.
오쿠라는 김대환을 ‘한국의 아버지’라 부른다.
김대환은 1980년대부터 일본 무대에 진출했다.
기존 박자체계를 해체하고 무질서 속에 질서를 담아내는
그의 절묘한 프리재즈 타악 연주를 먼저 알아본 건 재즈 마니아가 많은 일본이었다.
오쿠라는 1990년대 김대환을 만나고 음악적 교류를 이어갔다.
그는 김대환 추모 콘서트에 1회 때부터 빠짐없이 참석했다.
오쿠라는 “
김대환 선생은 음악적 테크닉과 인격 양면에서 내가 만나본 최고의 인물”이라며 “
추모제의 장소는 좁지만 (그를 그리는) 생각은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오쿠라의 연주에 경기민요 소리꾼 김보라의 구음이 겹쳐졌다.
한일 음악인의 즉흥교감은 제3의 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음은 오쿠라의 구음과 타악에 요코자와 가즈야의 전통 피리 연주,

아키 와쿠나이의 일본어 시낭송이 합쳐졌다.

 

 


 

1일 오후 김대환 추모 콘서트의 마지막 무대는 장사익의 노래였다.

김대환의 생전 사진(뒤)이 무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변영욱 기자 [email protected]

 
 
▼ 예인, 기인, 광인, 아니 그냥 ‘크신 분’에게 ▼
요코자와는 가슴팍에 오카리나와 닮은 피리를 곱게 받쳐 든 채
구음을 했는데 음성이 피리에 닿으며 나는 배음(倍音)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객석은 알 수 없는 언어와 낯선 소리의 이채로운 조합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장사익은 “
추모 콘서트가 시작된 초기에는 객석에서 ‘
3·1절에 일본의 뿌리가 담긴 전통음악이
한국 땅 가운데에서 당당히 울려 퍼지는 게 말이 되느냐’는 큰소리도 나왔다”고 회고했다.

공연 열기는 중반을 넘어서며 달아올랐다.
해금 연주자 강은일은 신시사이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와 함께 산조 자진모리와 리베르탱고,
밀양아리랑을 넘나들었다.
고석진의 신명나는 모둠북 연주는 원로 트럼펫 연주자 최선배와의 협연으로 이어졌고,
허윤정의 거문고와 원일의 징이 가세하며
음계와 박자 체계의 경계는 흐물흐물해졌고 무대는 뜨거워졌다.

고인의 연주가 다시 등장했다.
유명한 북과 오토바이 배기통의 생전 협연 장면이 스크린 위에 흘렀다.
그 음파가 무대 위 연주자들의 실시간 연주와 겹쳐졌다.
생과 사가 교감하고 소통하기 시작했다.
9년 전 고인의 장례식장에서 열린 기괴한 합주가 재연되는 영험한 순간이었다.

시간은 어느새 7시를 향하고 있었다.
진옥섭은 “여러분의 방광이 2배가 되는 이 공연,
올해는 다행히 약간 짧아진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떤다.

피날레를 장식하러 장사익이 무대에 올랐다.
김광석의 기타 반주에 맞춰 ‘
빛과 그림자’로 목을 푼 그는 ‘잘 있거라 나는 간다∼’ 하며 ‘
대전 블루스’를 구성지게 뽑았다.
객석과 무대는 비로소 하나가 돼 ‘대전발 0시 50분’을 제창했고 장사익은
‘김대환∼ 김대환∼ 김대환의 블루스’로 노랫말을 바꿔 불렀다.
이제 ‘추모’는 온 데 간 데 없다.
함께 웃고 노래하는 잔치가 됐다.
손으로 턱을 괸 채 심각한 표정을 한
김대환의 영정까지도 신명과 해학의 일부가 되는 듯했다.
어느새 곡목은 ‘봄날은 간다’로 바뀌었다.
고석진의 북,
최선배의 트럼펫 연주가 가세했다.
“C  아니,
C로,
‘돌아가는 삼각지’ 한번 해봐∼
” 장사익의 주문에 최선배의 트럼펫이 먼저 운다.

양악과 국악,
고전과 즉흥,
한국과 일본의 정신이 한데 어우러지는 이런 무대를 어디 다른 곳에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할 때쯤 무대에 출연진이 모두 올라온다.
늘 마지막은 이거다.
‘아리랑’.

“일본분들도 1원 한 장,
국물 하나 없어요.”(장사익)
‘노 개런티’, 출연료 없는 공연이다.
근데 한 500만 원씩 받은 이들처럼 죽기 살기로 연주한다.
신명을 길게 끈 연주가 끝나자 장사익이 영정에 대고 선창한다.
“대환 형님,
빠이빠이!”
“빠이빠이!!”
무슨 추모가 이래?

#8 2013년 3월 1일 오후 9시 - “형님, 빠이빠이!”
서울 인사동 한식집 ‘양반댁’.
1만 원씩 내면 김대환 추모 콘서트 뒤풀이에 누구나 동석할 수 있다.
밥만 먹는 게 아니라더니 과연 그렇다.

된장찌개를 곁들인 식사에 텁텁한 막걸리까지 한 순배 돌고 났다.
무대 위에서 한바탕 놀았던 연주자들이건 객석에서 한바탕 놀았던
관객들이건 구분 없이 70여 명이 하나가 됐다.

참가자들이 깨끗이 비운 밥상을 무르자
식당 방 두 칸을 이어붙인 공간이 그대로 마당이 되고 작은 콘서트장이 됐다.
사물놀이를 이끌던 이광수 명인이 ‘수덕사의 여승’을 ‘
땡기’자 고석진이 엿장수 가위 연주로 좌중을 압도했다.
김광석,
장사익,
최선배,
김보라,
오쿠라,
요코자와가 번갈아가며 못다 한 노래와 연주를 들려줬다.
술기운 올라 듣는 질박한 트로트는 프리재즈와 다른 맛을 보여줬다.
이날의 이상한 추모는 마지막까지 그 이상함의 근원인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3·1절 만세삼창도,
곡도 아닌 이런 것으로.
“사랑은,
아름답게!
우정은,
길게!
인생은,
즐겁게!…
행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울 인사동 김대환 박물관에 전시된 고인의 손톱 크기의 세서(細書) 작품.

그는 역동적인 타악 연주와 대비되는 반야심경과 금강경 쓰기에도 혼신을 다했다.

장승윤 기자 [email protected]

 
 
▼ 타악-재즈 접목한 거장 김대환의 삶과 기행(奇行) ▼

■ 한국 최초 록그룹 드러머… 프리재즈 서막

“그분은 ‘
음악 하는 사람’이 아니라 ‘
 다른 사람’이었어요.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그분 인생을 어떻게 정리해?
몇 시간 취재해서 몇 자 끼적일 거면 쓰지도 마요.
여기 옛날 기사들 있어.
이거 종합해서 대강 마감하든지.
”(유재만 ‘아리랑 명품관’ 사장)

5일 오후 만난 유 사장은 20년간 김대환을 후원하며 임종까지 지켰다.
1970년 베트남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에서 사병으로 복무 중이던 유 사장은 당시
한국 위문단장으로 온 김대환을 안내하며 인연을 맺었다.
1985년, 소음 문제 때문에 아무도 연습실을 내주지 않자 초조한 마음에 인사동을 배회하던
김대환과 우연히 해후한 뒤 당시 ‘
인사 슈퍼마켓’(지금의 아리랑 명품관 자리) 2층의 작은 공간을 연습 장소로 내줬다.
김대환은 매일 오전 6시 할리 데이비슨을 가게 앞에 세워두고
연습실로 올라와 오후 10시까지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터지도록 북을 두들겼다.

김대환은 ‘최초’와 ‘극단’을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다.
록과 헤비메탈,
국악과 재즈를 넘나들다 결국 뿌리인 타악의 세계로,
소리의 우주로 들어갔다.

1933년 인천에서 태어난
김대환은 1950년대 말 인천 동산고 2학년을 중퇴하고 미8군 무대에서 드러머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신중현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그룹사운드라 불리는 ‘애드포’를 결성했다.
1965년과 66년에는 KBS와 MBC의 전속 악단에서 드럼 스틱을 잡았다.
1970년 신중현의 그룹 ‘퀘션스’에 합류했다.
1971년에는 그룹사운드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조용필도 김대환을 통해 프로 음악계에 입문했다.
김대환이
최이철(‘사랑과 평화’),
조용필과 결성한 ‘김트리오’를 통해서였다.

록의 대부로 자리매김한 그는 미련 없이 록을 떠났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서울 계동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강태환(색소폰),
최선배(트럼펫)와 결성한 ‘강트리오’로 10년간 활동하며 한국 프리재즈의 서막을 열었다.

1985년 강태환과 함께 대한해협을 건너가 일본 재즈계에 진출했다.
이 무렵,
한 톨의 쌀알에 직접 만든 도구로 반야심경 전문 283자를 새겨 넣었다.
이 고금에 유례가 없는 세서(細書) 작업은 1990년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연주 활동을 하던 그는
1993년 서울 문화일보홀에서 할리 데이비슨 배기통과 협연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칠순을 바라보던 2000년까지 그는 프랑스 아비뇽국제음악제,
일본 오사카 간사이 페스티벌,
영국 애든버러 국제 재즈 페스티벌 같은 굵직한 국제 행사에 초청됐다.
그는 외국에서도 고집스레 오토바이 투어를 이어간 속도광이었다.
고교 중퇴의 그는
2004년 1월에는 한성대(당시 한완상 총장)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존의 예술적 범주와 틀을 뛰어넘어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소리와 글씨의 영역에서 뼈를 깎는 아픔을 통해
파격적으로 승화시킨 예술인’이라는 게 학위 수여의 변이었다.

2004년 폐렴이 악화돼 입원하고 그해 3월 1일 결국 숨을 거두기 한 달 전까지도
그는 오토바이 헬멧과 여섯 개의 북채를 놓지 않았다.
연습 벌레였던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데 시간을 쏟기 아깝다며
혀끝을 잘라버린 이야기도 유명하다.

유 사장은 “1990년대 중반,
일본 음악가 기타로(‘실크로드’ 등 TV,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인물)와
도쿄 산토리홀에서 연 합동 콘서트는 그의 명연주 중 하나”라며 “
수십 대의 신시사이저로 화성의 벽을 쌓은 기타로를 북 한 대를 내세운 원초적 타악으로 압도한
그는 북채를 내려놓고 ‘
낙엽귀근(落葉歸根)’이란 서예를 쓰고는 무대를 내려왔다.
화성과 박자의 잎사귀는 화려해 보이지만 음악의 뿌리는 두드림이라는 의미였던 듯하다.
그에게 반한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여 두 시간 동안 사인회를 이어간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김대환은 세 차례 솔로 음반(‘흑우’ ‘묵우’ ‘흑경’)을 냈지만 지금은 모두 절판돼 구하기 힘들다.
진옥섭은 “
즉흥이란 말을 너도나도 쓰고 싶어 하는 세상이 됐지만
김대환 선생이 선구한 즉흥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탐내는 즉흥”이라고 했다.

김대환은 숨은 재능을 꿰뚫어보는 데 탁월했다고 지인들은 입을 모은다.
풍물패에서 태평소를 불던 장사익의 음성을 알아보고 ‘
산토끼를 불러보라’고 한 뒤
‘박자를 세지 말고 거기서 자유로워지라’며
개성 있는 보컬리스트로서의 재능을 깨운 일화도 회자된다.
장사익은 “
머금지 않고 물을 스쳐 흘려보내고도 난(蘭)이 꽃과 향기를 피워내는 이치처럼
김 선생이 스치듯 던진 한 마디의 무게가 엄청났다”고 했다.

강은일은 “
1989년 김덕수 사물놀이 대회에서 제 연주를 듣곤 ‘
악기를 들고 날 찾아오라’고 하셨다.
1990년 일본 공연을 함께하고 ‘흑우’라는 음반도 함께 내게 됐다”고 했다.
그는 “
대학교 3학년 때 간절히 꿈꾸던 동아 콩쿠르 대상을 받은 뒤
목표를 잃은 상황에서 선생은 신세계를 열어보여 주셨다.
‘음악을 깨라’
‘해금에서 징 소리를,
색소폰 소리를 내보라’던
그의 일갈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고 했다.

북촌창우극장을 세운 연극연출가 허규(1934∼2000)의 딸인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도
김대환을 통해 음악의 신세계에 눈을 떴다고 했다.
그는 “
아버지를 통해 김 선생을 알게 됐고 강은일이 국악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도 참여하게 됐다.
그는 사물이 통하는 이치를 아는 진정한 예술인이었다”고 돌아봤다.

흑우의 이름 아래 모인 이들은 내년 10주년 추모제를 ‘
종일 축제’와 전시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벌써 세우고 있다.

임희윤 기자 [email protected]

[채널A 영상]“댄스 타임!” 클럽 뺨치는 ‘국악 공연장’ 인기
[채널A 영상]한의사와 국악인의 만남…치유 공연으로의 초대
김대환| 추모제
 
 
 

 군부독재 시절 문익환 목사 등 만나...

 

 

 "생사를 함께 맛본 식구"

김종희

문익환 목사,

함석헌 선생,

안병무 교수 등 기독교계에서 가깝게 지낸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기억에 남는 인연이나 사건이 있나.

"문익환 목사의 가족과는 혈연관계나 마찬가지였다.
문익환 목사의 부모인
문재린 목사나 김신묵 여사는 나를 성이 다른 아들로 여겼다.
나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깍듯이 존대했지만,
심정적으로 나를 아들로 느꼈다.

문익환 목사와는 가장 밀착된 형제였다.
둘이 만나면 좋아서 껴안고,
춤추곤 했다.
서로 나이 차는 있었지만,
문 목사는 나이 차이 같은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주 무서운 분이다.
어린아이와도 친구가 되는 사람이다.
그런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다.
나는 문 목사 안에 진화가 안 되는 소년이 들어 있다고까지 말했다.
어린아이와 같았다.
이런 특별한 인물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기이했다.

1983년,
크게 알리지 않고 이상화 교수와 결혼했다.
결혼식을 세상에 펴서 장 보는 것처럼 하는 것보다 뜻이 있는 사람들과
깊은 축복 속에서 하면 좋겠다고 여겼다.
당시 나는 사회 속에서 정치적으로 깊이 들어가 있었으니까….
안병무 교수 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정했다.
문익환 목사,
박용길 장로,
안병무 교수,
박영숙 여사,
이문영 교수,
김석중 여사,
이해동 목사,
이종옥 여사 등이 함께했다.
함석헌 선생이 주례하고,
문익환 목사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축도하고,
문익환 목사가 긴 두루마기를 입고 축시를 읊고,
백낙청 교수가 축사했다.
사회는 리영희 교수가 했다.
동지들만 100여 명 모였다."

▲ 고은 시인과 문익환 목사 고은 시인(사진 왼쪽)은 문익환 목사(사진 오른쪽)와

   형제처럼 지내는 각별한 사이였다.

   문 목사가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감옥에서 잠깐 나와 장례를 치른 적이 있었다.

   사진은 빈소를 찾아 온 고은 시인과 문 목사가 서로 반기며 춤을 췄던 모습.

ⓒ 통일맞이

 


김응교 /
<바람의 사상>에 문익환 목사를 처음 만난 얘기가 나온다.
"오늘은 윤동주의 어릴 때 동무 문익환을 만났다.
문익환은 목사다.
마고자를 입고 나왔다.
그의 웃음이 시원시원했다.
앞으로 자주 만나기로 했다.
얼핏 릴케 번역을 했다는 얘기,
성서 번역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1975년 42세 1월 29일).
" 각별한 사이였던 문 목사와 같이 춤췄던 사진이 유명하다.
이것은 언제 찍은 사진인가.

"문익환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여론의 영향도 있었으니까,
잠깐 장례 기간에만 나올 수 있었다.
장례식장 안에 교도관이 들어와 있었다.

나도 빈소에 갔는데,
들어서자마자 문 목사가 일어나서 나에게 붙었다.
서로 반가워서 껴안고 있다가 춤을 췄다.
빈소는 애도하고 언동을 조심하는 자리인데,
상제(喪制)가 벌떡 일어나서 껴안고 춤추고 하니까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시간이 좀 지나니까 그 자리가 축제처럼 되어 전부 박수 치며 즐거워했다.
문 목사는 장례를 치르고 다시 감옥에 갔다.

우리는 같이 교도소에 있으면서 서울 용산 육군 본부로 이동할 때 같은 호송차에 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 상황을 같이 견뎠다.
생사를 함께 맛본 식구다.
생사의 밥을 같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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