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과 사비에 대해서..

금성과 사비에 대해서..

작성일 2009.09.1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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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초딩 4학년 인데요, 금성과 사비에 여러가지에 대해 조사 해 가야 되는데요, 금성과 사비의 문화재, 금성과 사비의 고분, 금성과 사비의 탑, 금성 삶들과 사비 사람들의 복장(옷차림), 금성과 사비의 산성. 등을 조사해 가야 합니다. 오늘까지 답변 부탁드릴게여!! 그거 알고 게시죠? 금성은 지금의 경주 이고요, 사비는 지금의 부여 랍니다.ㅋㅋㅋ 내공은 넉넉히 드릴게여. 빨리 좀 올려 주세여..       ...ㅎㅎㅎ(그림도 함께 올려 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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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과 사비의 문화재)

 

금성

 

1.경주 첨성대

 

종 목 국보 제3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 대 신라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2.금관총 금관

 

종 목  국보  제87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신라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금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출(出)’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머리띠와 ‘출(出)’자 장식 주위에는 점이 찍혀 있고, 많은 비취색 옥과 구슬모양의 장식들이 규칙적으로 금실에 매달려 있다. 양 끝에는 가는 고리에 금으로 된 사슬이 늘어진 두 줄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며, 줄 끝에는 비취색 옥이 달려 있다.

 

이 같은 외관에 대하여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가 관 밖에서 발견되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새날개 모양을 관모의 장식으로 꽂은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금관은 기본 형태나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할 만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3.금령총 금관

 

종 목  보물  제33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신라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에서는 가장 작고 간단한 형식으로, 높이 27㎝, 지름 15㎝의 금관이다.

 

중앙 정면과 그 좌우에 山자형 장식을 4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은 꽃봉오리형으로 마무리 했다. 山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사슴뿔 장식 가지 2개를 붙였다. 관 테와 5개의 가지에는 모두 같은 장식이 되어 있다. 표면 아래·위에 두 줄로 된 점무늬를 찍고, 그 사이에 나뭇잎 모양의 원판을 달아 장식했다. 관 테의 좌우에는 귀고리 형태의 드리개(장식)를 달았다.

 

이 금관은 다른 금관에서 볼 수 있는 옥 장식이 없고, 금으로만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다. 

 

4.서봉총 금관

 

종 목  보물  제33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신라


경주 노서동 신라 무덤인 서봉총에서 출토된 높이 30.7㎝, 지름 18.4㎝, 드리개(수식) 길이 24.7㎝인 금관이다.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상하에 점선으로 물결무늬를 찍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으로 장식했다. 관 테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세운 5개의 가지 중 중앙과 그 좌우의 3가지는 山자형 장식을 3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했다. 이 가지 주위에는 2줄씩 점선을 찍어 금판이 휘지 않도록 했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을 달았다. 山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끝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된 사슴뿔 장식을 세웠고, 이 곳에도 원판과 옥으로 장식했다.

 

내부의 골격은 2개의 금판대를 전후·좌우에서 관 테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교차시켰고, 그 위에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을 하나씩 붙였다. 관 테 좌·우에 길게 굵은고리(태환식) 귀고리 드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5.천마총 금관

 

종 목  국보  제188호 
지 정 일 1978.12.0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신라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금관이다. 천마총은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금관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높이 32.5㎝의 전형적인 신라 금관으로 묻힌 사람이 쓴 채로 발견되었다.

 

머리 위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는 산(山)자형 모양이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2줄로 있는 형태이다. 山자형은 4단을 이루며 끝은 모두 꽃봉오리 모양으로 되어있다. 금관 전체에는 원형 금판과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리고 금판 장식을 촘촘히 연결하기도 하였다. 밑으로는 나뭇잎 모양의 늘어진 드리개(수식) 2가닥이 달려있다.

 

금관 안에 쓰는 내관이나 관을 쓰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널(관) 밖에서 다른 껴묻거리(부장품)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6.금관 및 수하식<98호북분>

 

종 목  국보  제191호 
지 정 일 1978.12.0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신라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금관이다. 신라 금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높이 27.5㎝, 아래로 늘어뜨린 드리개(수식) 길이는 13∼30.3㎝이다.

 

이마에 닿는 머리띠 앞쪽에는 山자형을 연속해서 3단으로 쌓아올린 장식을 3곳에 두었고, 뒤쪽 양끝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2곳에 세웠다. 푸른 빛을 내는 굽은 옥을 산(山)자형에는 16개, 사슴뿔 모양에는 9개, 머리띠 부분에 11개를 달았다. 또한 원형의 금장식을 균형있게 배치시켜 금관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는 좌·우 각각 3개씩 대칭으로 굵은 고리에 매달아 길게 늘어뜨렸다. 바깥의 것이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가면서 짧아진다. 장식 끝부분 안쪽에는 머리띠 부분과 같은 푸른색 굽은 옥을 달았고, 바깥쪽에는 나뭇잎 모양의 금판을 매달았다. 발견 당시 금관과 아래로 내려뜨린 드리개들이 분리되어 있었다.

 

이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어느 것보다도 굽은 옥을 많이 달아 화려함이 돋보이고 있다. 

 

7.경주계림

 

종 목 사적 제1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교동 1

시 대 신라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스러운 곳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가 남아있다.

 

8.포석정지

 

종 목 사적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배동 454-3

시 대 통일신라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사비

 

1.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 

 

종 목  국보  제287호 
지 정 일 1996.05.3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백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2.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 

 

종 목  국보  제288호 
지 정 일 1996.05.3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백제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나왔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높이 74㎝, 가로·세로 50㎝인 터널형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는데, 명문의 내용은 이 사리감은 성왕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위덕왕)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의 따님이자 창왕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다.

 

3.군수리사지 

 

종 목  사적  제4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19 
시 대 백제


부여 군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의 절터로,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5년 일본 사람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 결과 중문·목탑·금당·강당 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의 구조임이 밝혀졌다. 백제 사찰에서의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는 이 절터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는데, 이후 계속된 조사를 통해서 백제의 기본적인 가람배치로 알려졌다.

 

금당터의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것이 특징이며, 유물은 절터에서 골고루 출토되었다. 먼저 강당터 남쪽에서 금동관 조각이 나왔고, 금당터 주위와 탑터에서는 약 1,150점의 옥과 금당 서쪽에서는 금동제방울·구두 모양의 금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연꽃무늬·덩굴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상자 모양의 벽돌과 금제고리·작은 구슬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탑의 중심부에서는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제330호)·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29호)과 칠지도·철못·삼족토기를 비롯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칠지도이다. 칠지도는 중심에서 양쪽으로 각각 세가지씩 칼이 뻗어있어 7개의 칼날을 가지고 있는 칼이다. 이와 비슷한 백제 칠지도 하나가 일본에 있어 백제와 일본의 문화교류의 한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4.쌍북리 요지 

 

종 목  사적  제9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30 
시 대 백제


충남 부여군 쌍북리에 있는 백제 때 토기 및 기와를 굽던 가마터로, 1941년 5월에 부여 시가지 계획도로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가마는 땅에 묻힌 상태여서 분명하진 않지만, 폭 135㎝, 높이 90㎝ 정도의 크기였다. 굴뚝 부분에서 아래로 3㎝ 정도가 남아 있고 아궁이 부분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완성되면서 가마의 앞부분이 잘려져 낭떠러지로 되어 있으며, 시멘트로 석실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이 부근에서는 토기조각이나 가마에서 버린 물건들이 발견되지 않지만, 산등성이 너머의 경작지에서는 많은 수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널려져 있다.

 

지금은 가마의 일부만 남아있지만 부여읍 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토기 및 기와 가마터로서 그 의의가 크다.

 

5.궁남지 

 

종 목  사적  제135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시 대 삼국시대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6.정림사지 

 

종 목  사적  제301호 
지 정 일 1983.03.26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7.화지산 일원 유적


종 목  사적  제425호 
면 적  95,942㎡
지 정 일 2001.01.04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05번지 외 
시 대 백제


부여 궁남지( 사적 제135호) 동쪽에 위치한 화지산(해발 10∼48m인 야산)은 백제 이궁지인 망해정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서, 지난 '86년에 충남대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초석과 와편들이 다량 출토된 유적지이다.

 

2000. 5월부터 8월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추가 발굴조사한 결과에서도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친 건물지, 분묘, 목책시설 등 다양한 유구 및 유물(건물지5, 석곽묘11기, 토광묘<민묘>18기, 석축시설, 출토유물 50점 등)이 확인되어 이 일대가 백제시대 이후 계속적으로 거주지 또는 묘역으로 활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8.왕흥사지


종 목  사적  제427호 
면 적 200,170㎡
지 정 일 2001.02.0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37-2번지외 
시 대 백제


부여군 규암면 신구리 속칭 왕은리 마을 일대 부소산성과 낙화암, 고란사, 그리고 구드래 나룻터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아주 빼어난 곳에 위치한 이 절터에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 등 백제시대 유물들이 많이 흩어져 있고, '왕흥'이라는 이름의 명문와편이 발견되었다.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 등의 문헌기록과 함께 절터에 남아있는 네모난 초석 등의 석물, 쇳떼배기의 구전 등으로 왕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가 그 후 훼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9.관북리 백제 유적


종 목  사적  제428호 
면 적 95,484㎡
지 정 일 2001.02.0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외 
시 대 백제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725번지에 위치한 이 유적은 현재 왕궁지로 알려져 있으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남쪽일대 184필지 95,048㎡(28,780평) 중 33필지 2,102㎡는 '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 전백제왕궁지로 지정되어 있다.

 

'82년부터 이 일대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여 '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가 발견되었고, '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삼국시대의 궁궐 중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신라와 백제의 왕궁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0.능산리사지


종 목  사적  제434호 
면 적 28,989㎡
지 정 일 2001.09.29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5-1 외 
시 대 백제


능산리 절터는 부여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과 부여나성(사적 제58호) 사이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유적으로, 1992년부터 2000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이른바 일탑일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가람형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93년 이 절터 내의 공방으로 생각되는 건물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출토되어 백제의 높은 금속공예기술 수준과 예술 역량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향로와 함께 출토된 '백제창왕명사리감(국보 제288호)'에는 사리를 모신 때와 공양자 및 절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사리감에 새겨진 기록으로 보아 이 절은 왕실에서 지은 국가 사찰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축원을 빌기 위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창건연대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역사학과 건축공학, 고고학, 미술사학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11.금강사지


종 목  사적  제435호 
면적 35,006㎡
지 정 일 2001.09.29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은산면 금공리 13-1외 
시 대 백제


금강사 터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이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까지 계속하여 법등이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절로, 1964년과 1966년 두 차례 발굴조사 결과 초창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중건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금강사'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금강사로 불리던 절의 폐사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초창의 가람은 백제시대의 것으로 목탑을 갖춘 일탑일금당식의 가람 형식인데 남북을 축으로 한 남북방향이 아니고, 동서를 축으로 한 점이 특징이다. 동쪽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이어지고 중문에서 강당에 걸쳐 회랑이 돌려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건축에 있어서 기단은 건물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금당의 경우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추고 네 귀퉁이에는 동자주를 세운 형식이고, 강당과 승방은 지대석이 없이 판석을 세워 축조하고 있다. 목탑지 기단은 2층 기단이었다고 추정되었으며, 그 지하 6척(尺) 깊이에서 발견된 심초는 자연의 풍화암반을 이용한 특이한 것이었다.

 

탑·금당·중문의 기단 축토가 판축법에 의해 축성되었음이 처음 확인된 절터 유적으로 역사적, 미술사학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12.부여 석조 

 

종 목  보물  제19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백제


부여현의 동헌건물 앞에 있었던 것을 일제시대에 옛 박물관 뜰로 옮겼다가 현재의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부여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는 백제시대의 유물로, ‘工’자형의 받침대 위에 둥근 꽃망울 형태로 올려져 있다. 받침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결한 모양이다. 그 위에 놓인 석조는 입구가 약간 오므라들면서 밖으로 둥글게 원호를 그리며, 바닥은 평평한 듯 하나 완만한 곡선이다.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개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고,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의 1층 탑몸돌에 새겨진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과 같은 글을 새기려던 흔적이 보인다.

 

이 석조에는 연꽃무늬 장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찰과 관계된 유물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가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쓰이던 석련지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된 석조로,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이 잘 나타나 있다.

 

13.금동석가여래입상 

 

종 목  보물  제19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삼국시대


하나의 광배에 불상·보살상을 함께 주조한 삼존불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배의 뒷면에는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아내를 위하여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저승길을 잘 가게 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본존불의 얼굴은 갸름하면서 살이 오른 모습으로 눈·코·입의 윤곽이 큼직해서 시원해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U자형의 주름을 지으면서 묵중하게 흘러내렸는데, 양 팔에 걸친 옷자락은 새의 날개깃처럼 양 옆으로 길게 뻗쳐있다. 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끝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의 양쪽 끝에는 합장하고 있는 두 협시보살이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수법이며 길게 날리고 있는 옷자락은 광배의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다. 왼쪽 협시보살은 얼굴만 남아 있고 신체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머리광배 위에는 연꽃속에 앉아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작은 부처 1구가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조각양식이나 표현 수법이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과 같은 계통으로 중국 북위시대에 유행한 불상양식을 수용한 것이다.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이나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과 같은 양식에 속하지만 그보다 조각수법이 약간 떨어지고 무늬가 간략화 되었으며 조형적인 탄력도 많이 감소되었다. 

 

금성과 사비의 고분

 

금성

 

1.무열왕릉

 

종 목  사적  제20호 
면 적 14,169㎡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2 
시 대 삼국시대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가치가 있으며, 1972∼1973년에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문무대왕릉

 

종 목  사적  제158호 
면 적 123,951㎡
지 정 일 1967.07.24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해중(대왕암) 
시 대 신라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3.서악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42호 
면 적 9,745㎡
지 정 일 1964.08.29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750 
시 대 통일신라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뒷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이곳의 무덤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무덤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4.선덕여왕릉

 

종 목  사적  제182호 
지 정 일 1969.08.2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79-2 
시 대 신라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5.황남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0호 
면 적 201,945㎡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황남동 6-1 
시 대 신라


경주시내 평지 무덤들 가운데 서남쪽에 있는 신라의 무덤들이다.

 

크고 작은 무덤 20여 기가 남아 있는데, 1973년 ‘대릉원’이란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이 안에는 천마총·황남대총·검총 등과 미추왕릉이라고 전하는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대부분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보인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곽)을 설치하고 자갈과 냇돌로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 중 천마총은 금관·금제허리띠(금제과대)등을 비롯하여 각종 호화로운 유물이 나왔으며, 색이 칠해진 천마도가 나와 신라시대 그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높이 23m, 남북 길이 120m, 동서 직경 80m로 경주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은 표주박 모양으로 연결된 두 개의 무덤으로, 남자와 여자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금관·금제허리띠·마구류를 비롯하여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경주 황남리 무덤들은 현재 땅 위로 봉분이 남아있는 것은 20여 기이지만, 땅 속에 작은 무덤들이 무수히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일부이지만 독무덤(옹관묘) 등 여러 가지 형식의 무덤이 섞여 있어 신라 무덤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비

 

1.능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15 
시 대 백제


부여 능산리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시대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최근 무덤들 서쪽에서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지역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2.능안골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20호 
지 정 일 2000.07.22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75-7외 
시 대 백제


백제 능산리 무덤 동쪽에 있는 백제나성(사적 제58호)이나 청마산성(사적 제34호)과 함께 있는 백제 무덤이다.

1995∼1996년 사이에 조사되어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30여기, 돌덧널무덤(석곽묘) 20여기, 독무덤(옹관묘) 4기 등을 발견하였다. 홑무덤(단장묘)이나 합장묘, 어린아이 무덤 등 다양한 형태로 매장되었는데, 주·사 등의 옷감 및 금귀고리, 은제관장식과 띠드리개장식(요대장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6∼7세기경 백제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백제 후기 무덤형식과 의복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금성과 사비의 탑

 

금성

 

1.분황사석탑

 

종 목 국보 제3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 분황사

시 대 신라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2.다보탑

 

종 목 국보 제2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3.석가탑(불국사 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2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4.고선사지 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3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5년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탑신도 여러 개의 돌을 조립식으로 짜 맞추었으나, 3층 몸돌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면서 밝혀졌다. 지붕돌은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는데, 아래로 미끄러지는 네 귀퉁이에서 또렷이 들려있어 경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밑면에는 계단 모양으로 5단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시대 전기인 7세기 후반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 탑과 함께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에서 시작되어 이후 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5.감은사지 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11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

시 대 통일신라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청동제사리(보물 제366-1호)와 청동제사각감(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6.경주 서악리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6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92-1

시 대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무열왕릉 동북쪽 비탈진 곳에 서 있다. 모전탑은 전탑(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을 이른다.

 

기단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데, 남산리 석탑에 3단의 층급이 있는 것에 비하면 간략화된 것이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탑은 독특한 기단 형식으로 미루어 보아 경주 남산리동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남산리동삼층석탑이 기단 위에 3단의 층급을 둔 것에 비해 여기서는 1장의 돌로 이루어진 생략된 형식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주며 보존상태도 좋지 못하다.

 

사비

 

정림사지 오층석탑

 

종 목  국보  제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시 대 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금성과 사비의 성

 

금성

 

1.경주월성

 

종 목 사적 제1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387-1

시 대 신라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임해전으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2.남산성

 

종 목  사적  제2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탑동,남산동,배반동,배동 
시 대 신라


경주 남산의 북쪽에 있는 신라 산성으로 ‘신라 남산신성’이라고도 한다.

 

신라 진평왕 13년(591)에 쌓았다고 전하며, 신라 문무왕 19년(679)에 성을 크게 고쳐 쌓았는데, 지금 성벽이 잘 남아있는 부분은 이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남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돌로 쌓았으며, 성 안에는 3개의 커다란 창고가 있어 무기와 식량을 저장하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성 부근에서 발견된 남산신성비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와 일정한 길이의 성벽을 맡아 쌓았으며, 만일 3년 이내에 성벽이 무너지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서약의 글과 함께 관계한 사람들의 벼슬·성명·출신지를 새겨져 있다.

경주평야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산성은 서쪽의 서형산성과 동쪽의 명활성, 그리고 북쪽의 북형산성과 함께 신라의 왕도를 호위했던 성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지금도 큰 창고 자리에서는 불에 탄 쌀이 나온다고 한다. 

 

3.명활산성

 

종 목  사적  제4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천군동, 보문동 
시 대 신라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겨우 몇 군데에서만 옛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진흥왕 때의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으며, ‘명활산성비’로 보이는 비석조각이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선덕여왕 때는 비담이 이 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이 평정하기도 했으며, 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여 경주를 지키는데 큰 몫을 한 곳이다.

 

4.관문성

 

종 목  사적  제4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산122,울산 북구 달천동,중산동 
시 대 통일신라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모벌관문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비

 

1.석성산성

 

종 목 사적 제8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석성면 현내리 산83

시 대 삼국시대

 

연산의 황산성, 노성의 노성산성 및 금강 건너의 성흥산성, 뒤쪽의 금성산성과 연결되는 백제의 수도 사비 남쪽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안쪽에 성을 세운 후, 다시 성 밖에 2개의 골짜기를 따라 성을 쌓았다. 현재는 성문터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게 하던 수구문, 그리고 우물터와 건물터들이 남아있다. 6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둘레 약 1,600m, 폭 약 5m, 높이 4m 정도로, 바깥쪽은 돌을 쌓아 올리고 안쪽은 흙을 파서 도랑(호)처럼 만들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벽은 모두 무너졌고, 성벽이 통과하는 계곡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수구(水口)도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오른쪽의 수구에 해당하는 부분은 좌우로 성벽과 연결되도록 돌덩이들을 3∼4m정도의 높이로 쌓아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 안의 가운데 산등성이에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이 많이 널려있어 건물터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은 사비성이 함락된 뒤에도 당나라군과 신라 및 백제부흥군이 치열한 전투를 했던 곳으로 유서 깊은 유적이다.

 

2.성흥산성

 

종 목 사적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백제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3.부소산성

 
종 목  사적  제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 대 삼국시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자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금성과 사비의 의복

 

사비(백제)

 

1.왕의 복장 

중국의 당나라 시대의 역사에 따르면 백제 시대의 왕은 긴소매의 자주색 외투와 푸른 바지를 입었습니다. 그는 손질하지 않은 가죽 벨트로 외투를 묶었고 검정 가죽 구두에 머리띠와 함께 비단 모자를 썼습니다. 개인적인 장신구들은 무령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내용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비단 벨트에는 끝에 버클과 5각형의 금장식이 붙어 있었습니다. 비단 모자 양옆에도 금장식이 붙어 있었습니다. 검정 구두는 후에 금 구두로 바뀌었습니다.

 

2.왕비의 복장

왕비는 저고리, 바지, 외투를 입었습니다. 외투의 바탕은 진한 자주색이며 붉은 끼가 있는 3색 비단으로 끝마무리를 하였습니다. 귀고리, 팔찌, 반지, 비단 벨트 끝단의 5각형 모양의 장식 등의 장신구들은 무령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내용을 모델로 하였습니다.

 

3.사절의 복장

중국의 양나라(541)에 공물을 바치는 그림에서 백제의 사절은 마루를 끄는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 모델들은 소매, 옷단, 옷깃 주위에 진한 자주색 천 띠를 덧댄 녹색의 외투에 녹색 벨트를 했습니다. 바지는 오렌지색으로 바지 끝단에 진한 자주색 천을 덧대었으며 아래쪽 끝 부분은 느슨했습니다. 검정 비단 모자와 가죽신을 했습니다.

 

금성(신라)의 의복

 

1.왕의 복장

왕은 재킷, 바지, 그리고 외투를 입었습니다. 이것들은 한국의 고대에 왕의 옷의 3가지 기본적인 품목입니다. 소매, 옷단, 그리고 목의 칼라는 폭이 넓은 대비되는 재료의 띠로 덧대었습니다. 외투 위에 왕은 금속 장식과 금편을 늘어뜨려 장식한 금관을 씁니다.

 

2.귀족 여성의 복장 

삼국시대에 여성은 치마 위에 저고리를 입었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저고리 위에치마를 입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치마끈은 중국 당나라 패션의 영향으로 가슴 위로 묶었습니다. 이 위에 그들은 소매가 짧거나 소매가 없는 조끼와 무릎 밑에까지 늘어지는 어깨를 덮는 긴 장옷을 입었습니다. 구두는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들어 신었습니다. 머리는 말아 올려 핀으로 고정한 후 비녀를 꽂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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