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역사지도

신라의 역사지도

작성일 2009.09.01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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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ㅁ

신라의 역사지도 좀

알려주세요 내공냠냠등 그딴것 신고해버림

그리고 구체적으로 써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학교 숙제라서 ;; 선생님께서

구체적으로 안쓰면 죽음 왜냐하면 좀 까다로움.

암튼 신라의 인물 이랑 역사지도좀 이미지로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통일 신라의 지도,

 

 

신라의 9주 5소경
 

발해와 신라의 대외 관계
 

발해의 발전
 
 

신라의 불교 - 5교 9산
 
 

후삼국 시대
 
◐ 신라의 신라(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의 동남부 일대를 약 1000여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국가이다.
 
국호인 신라(新羅)에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으며,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그러나 6세기 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국민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으며 7세기경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698년 발해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쪽 축이 되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처음 이름은 후고구려)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 양국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여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사는 크게 상대, 중대, 하대로 나뉘는데, 상대는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의 28대 771년으로, 건국 이후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으로 고구려, 백제와 양립하던 시기이다. 중대는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8대 127년으로, 백제, 고구려 멸망 및 그 직후의 신라문화의 황금기이다. 하대는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의 20대 156년으로, 계속된 평화와 왕위 계승권 싸움으로 혼란해져 기울어간 시기이다.
신라의 왕은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 가며 왕이 되었다.
 
 ◐ 신라의 국호

계림, 사로, 서라벌 등으로도 불렸으나 지증 마립간 4년 504년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에서 "왕"으로 정했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 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 신라의  역사
 
 신라의 국가 성립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이사금 때에는 해안가에 나타나던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신라의 정치적 발전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신라의 팽창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고구려도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하지만 670년 옛 고구려의 영토인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고 발해가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발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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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신라(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의 동남부 일대를 약 1000여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국가이다.
 
국호인 신라(新羅)에는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으며,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그러나 6세기 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국민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으며 7세기경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698년 발해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쪽 축이 되었다.
 
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처음 이름은 후고구려)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 양국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 경순왕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여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사는 크게 상대, 중대, 하대로 나뉘는데, 상대는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의 28대 771년으로, 건국 이후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으로 고구려, 백제와 양립하던 시기이다. 중대는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8대 127년으로, 백제, 고구려 멸망 및 그 직후의 신라문화의 황금기이다. 하대는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의 20대 156년으로, 계속된 평화와 왕위 계승권 싸움으로 혼란해져 기울어간 시기이다.
신라의 왕은 박씨, 석씨, 김씨가 번갈아 가며 왕이 되었다.
 
 ◐ 신라의 국호

계림, 사로, 서라벌 등으로도 불렸으나 지증 마립간 4년 504년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에서 "왕"으로 정했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 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 신라의  역사
 
 신라의 국가 성립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이사금 때에는 해안가에 나타나던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신라의 정치적 발전 

신라는 내물 마립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신라의 팽창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고구려도 당나라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하지만 670년 옛 고구려의 영토인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고 발해가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발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역사지도의 뜻;옛날에 있었던일을들을 지도에 나타낸것

쓰임은 나라가 일어난곳과 그나라의 도읍지 및 경게애대해 알수있다.

전쟁후 영토의 변화에 대하여 알수있고,통신을 알수있고,문화재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도움 되셨길.....~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역사지도란?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지도로 나타낸 것을 역사지도 라고 한다

 

짧아서 죄송

그래도 도움돼시길...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녕하세요? 역사지도의 뜻: 옛날에 있었던 일들을 지도에 나타낸것입니다.

역사지도로는 먼 옛날 조상들의 삶의 흔적이 발견된곳, 주요사건이 일어난곳을 알수 있지요~~^^

또, 나라가 세워진 곳, 나라의 도읍지와 경계, 그곳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문화재, 교통,통신로 등을 알수있다. 전쟁의 경과, 영토이 변화를 알수있다..

 좋은 답이길.. 비네용~

 꼭 도움이 되시길..

신라의 역사지도

어~ㅁ 신라의 역사지도 좀 알려주세요 내공냠냠등 그딴것 신고해버림 그리고 구체적으로 써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학교 숙제라서 ;; 선생님께서 구체적으로 안쓰면...

신라의역사지도좀여

신라의역사지도좀여알려주면****을준다. 안녕하세요. 제 답변이 질문자, 네티즌 모두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Query(질문) : 신라의역사 지도 답변 57년 박혁거세...

통일신라의역사지도

저..... 누나아이디로한거지만 몰라서 했습니다 통일신라의역사지도 이미지좀 부탁합니다 네이버이미지에서 찾은겁니다 통일신라와 발해의 지도입니다 좋은 답변됬으면 합니다^^

신라의 역사지도 구해주세요(진짜 급해욧)

... 공격을 준비하는 반면 이제부터 전격 신라공격이 제대로 진행되던 때가 바로 백제가 사비성으로 도읍을 정할때부터 이어진다 맨 아래있는 지도가 신라 전성기떄 지도입니다

신라의역사...이후

저의 초등학교에서 경주를 가는데요 신라의 역사를 알아오래요.그런데 문제가 잇어요.... 동해안의 한 바닷가에서 어진 사제 의선의 지도를 받아 성장한 혁거세는 우리나라...

신라의 역사에 대해서

...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자를 대고 그은 것 처럼 보이는 부분이 보이죠 ? 실제로 그렇게 그렸다고 합니다. 신라가 과거에 당과 손을 잡고 나쁜짓을 했지만 지금은...

신라의 역사의 대해서

신라의 역사좀 빨리여 우리 담임쌤이 갑자기 신라를 물어보자나여... 님들... 지대로, 지도로, 지철로 500~514 제23대 법흥왕 원종 514~540 제24대 진흥왕 삼맥종...

신라 한일~~~~~~~~~

... 악 (1)신라의 한일 (2)신라의 역사지도 (이미지) (3)신라의 인물 그럼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공냠냠등 쓸데없는 말 쓰면 신고함 (1)신라의 한일 신라가 한일은 삼국통일과...

신라지도 유적사진을 구해주세요..^0...

제가 임원수련회를 갔다와서요 ㅋ// 숙제를 못햇거등요 ㅋ// 숙제가 신라 지도... 신라도읍지(경주) : 유물 유적지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