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고려,신라,고구려,백제,발해의 문화재

조선,고려,신라,고구려,백제,발해의 문화재

작성일 2009.09.06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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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금 문화재를 구하고 있는데

조선,고려,신라,고구려,백제 발해 문화재를 4개씩

사진하구 설명좀 붙여주세요^^

내공 100드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많은 도움이 되셧으면 ..

우선은 고려입니다

1.광통보제선사비 : 탄동리의 영릉( 경종릉), 봉동리의 영릉(충혜왕릉), 판문리의 영릉(숙종릉) 등 3개의 영릉이 개성의 동쪽과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이 지역은 현재 개성공단과 배후도시 예정지에 포함되어 있어 훼손이 우려되고 있다. 아울러 개성 주변에는 조선 초의 왕릉과 왕족의 무덤도 있는데, 조선 2대 정종릉인 후릉을 비롯하여 태조 이성계의 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이성계의 아들 방의, 방우의 묘가 있다. 주변에는 서경덕, 박지원의 묘도 있는데, 특히 박지원의 묘는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2.고려성균관 : 사적 50호.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 고려말 개혁에 앞장섰던 신진사대부들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건물은 남북 중심축을 따라 앞에 명륜당이, 뒤에 대성전이 배치되었다. 현재 성균관이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개성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뜰에는 주변의 절터에서 가져온 탑과 불상들을 모아 놓았다.

 


3.태조 현릉-왕건릉 :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에 위치. 943년(태조 26) 5월에 조성. 첫째 왕후인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묻혀 있다. 현릉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몇 차례 이장된 적이 있었다. 1018년(현종 9) 거란이 침입하자 부아산 향림사로 옮겼다가 다음 해 11월 다시 환장하였으며, 1217년(고종 4) 거란족이 국경이 침입하자 태조의 재궁(관)은 다시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 1232년(고종 19)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다시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개경으로 서울을 옮긴 1270년(원종 11)에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1276년(충렬왕 2)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현릉 자리가 처음 태조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인지는 알 수 없다. 이곳은 또한 1906년(광무 10) 도적들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나 1954년 복구한 적이 있다. 1992년 북한에서 발굴조사 후 새로 고치고, 1993년 5월 5일 한자로 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를 세웠다. 이때 12지신상을 새긴 본래의 병풍석들은 무덤 안쪽에 넣어 보존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굴할 때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는데, 그중 금동불상은 등신불로서 현재 개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덤안칸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동벽에 매화나무, 참대, 청룡이, 서벽에 소나무, 매화나무, 백호가, 북벽에 현무, 천장에는 8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4.나성: 사적 46호. 북쪽의 송악산(488m)으로부터 남쪽의 용수산(177m)로 연결되는 구릉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성. 1029년 완성. 둘레 약 23km. 본래 흙으로 쌓았으며, 고려말 내성을 쌓으면서 겹치는 서쪽과 북쪽의 성벽은 돌로 쌓았다. 밑면의 너비는 토성 부분이 7~8m. 석성 부분이 6m 정도이고, 높이는 모두 3~4m 정도이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25개의 성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 동쪽의 숭인문과 서쪽의 선의문, 남쪽의 회빈문과 북쪽의 태화문(북성문) 동남쪽의 장패문이 중요한 문이었다. 지금 제대로 남아있는 나성의 성문은 하나도 없다. 북쪽의 북창문과 서쪽의 눌리문 등 내성(반월성)과 겹치는 부분의 일부 성문이 누각 없이 돌문만 남아 있으며, 동남쪽 문인 장패문(보정문)과 그 옆의 수구문의 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5.대흥산성 : 사적 52호. 개성의 배후산성으로 조선시기 한양의 북한산성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처음 축성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대흥산성은 천마산과 성거산의 골짜기를 끼고 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10.1km이다. 이곳에는 4개의 큰 문과 사이 문이 있는데, 그중 북문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4개의 수구문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송도삼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이루는 북쪽 수구문이다. 대흥산성 안에는 대흥사와 관음사가 있다. 그중 관음사는 보물급 3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곳에는 대웅전과 7층석탑이 있다. 관음사 대웅전은 조선후기 목조건축물로서 남한에서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7층석탑은 고려시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궁궐터(만월대) : 사적 48호. 북쪽의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의 구릉지대에 전개되어 있다.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시대 궁궐이 대체로 평지에 건설된 것과 달리 흙을 높이 돋아 석축을 한 언덕진 곳에 자리잡은 것이 만월대 궁궐의 특징. 황성의 남문인 주작문을 지나고 궁성의 남문인 승평문을 들어서면 구정이 나오고, 구정을 지나면 다시 신봉문이 나오며, 신봉문을 지나면 본대궐의 중심전각인 회경전의 문인 창합문이 나오게 되는데, 회경전은 4개의 33단 돌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만월대에는 회경전 앞의 돌계단 외에는 중심전각이었던 회경전터를 비롯하여 신봉문 터, 창합문 터, 건덕전 터, 장화전 터, 중광전 터의 주춧돌만 드러나 있다. 개성역사박물관에는 만월대 궁궐의 모형이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

 

 

7.고려첨성대 : 만월대 서북쪽에 위치. 사적 49호. 이것은 고려시기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축대부분만 남아 있다. 축대는 동서남북 방위와 일치하며, 그 높이는 2.8m, 한 변의 길이는 2.6m이다. 첨성대와 멀지 않은 곳에는 인종대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목숨을 던져 왕을 구한 홍관(洪灌)의 비가 있었다.


 

8.수창궁 : 개성의 중심부인 십자가 근처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터에 학생소년궁전을 세워 놓았다. 그 근처에서 발견된 용머리 조각은 회경전 앞에 있었던 용머리 조각과 함께 현재는 성균관 대성전 뜰에 옮겨져 있다.

 

 

9.연복사종 : 동합금 주조. 높이 3.3m, 구경 지름 1.9m, 두께 23cm, 무게 약 14톤. 우리나라 5대 종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몸체는 여러 줄의 굵은 선으로 아래 위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으며, 여기에는 명문을 비롯하여 불상, 불경, 여러 가지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특히 물결 모양으로 만들어진 이 종의 구경 테두리에는 물결을 타고 움직이는 모습을 물고기·용·봉황·기린·게 등을 새겼으며, 그 위에 종을 만든 연대와 내력을 써놓았다.

  

 

10.영통사지 : 가장 많은 지정문화재를 남긴 영통사는 개성 나성밖 동북쪽인 개성시 용흥리 오관산 남쪽에 있다. 고려 초에 창건된 절로서 고려전기 화엄종단의 대표적인 절이다. 절터에는 현재 국보급으로 지정된 영통사5층탑(37), 영통사 서3층탑(38)을 비롯하여 보물급으로 지정된 영통사 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3기의 석탑은 모두 고려초기의 것으로 5층탑을 가운데 놓고 좌우에 3층탑이 동서로 서있다. 또 보물급 36호로 지정된 영통사대각국사비는 1125년(인종 3)의 것으로, 김부식이 지은 비문을 통하여 화엄승려로 활동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행적을 살필 수 있다. 이 비문은 본래 의천이 입적한 다음 해인 1102년 윤관이 지었는데, 김부식이 개찬한 것이다. 이 일로 윤관의 아들 윤언이와 김부식은 서로 사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현재 영통사지는 발굴과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11.현화사지 : 개성시 월고리 영취산 아래. 현화사와 관련된 지정문화재는 국보급인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과 보물급인 현화사당간지주(38), 현화사석등이 있다. 이중 석등은 서울의 덕수궁에, 7층탑은 개성시 역사박물관 주변에 옮겨져 있다. 현화사는 현종이 자기 부모의 원찰로 지은 법상종 계통의 절이다. 현종은 1018년(현종 9)에 국력을 기울여 현화사를 창건하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제공하였다. 1021년에 건립된 현화사비는 채충순이 썼는데, 여기에는 현화사의 창건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현종 때 현화사에는 토지가 2000경, 노비 100구를 비롯하여 많은 물자들이 있었으며, 학도들이 1000명이 넘었다. 현화사 창건 내력을 적은 비 앞면의 위 부분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까마귀와 토끼 조각이 있으며, 비 양 옆면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개성시 방직동 역사박물관 옆에 옮겨진 현화사7층석탑은 1020년에 만든 것으로 고려 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화사탑에는 탑신 받침.

 

 12.불일사지 : 951년 광종이 자기 어머니 원찰로 세운 것. 개성시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 기슭에 위치. 국보급 35호. 1959년 발굴하였으며, 그 다음 해 불일사5층탑을 개성 역사박물관으로 옮겼다. 불일사5층탑을 옮길 때 불일사탑에는 금동9층탑, 금동5층탑, 작은 돌탑 20여 개, 작은 청자 사리단지, 불경 등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지금 개성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3.선죽교 :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 국보급 36호. 이곳에서 고려말 정몽주가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의 옛 이름은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피살된 날 밤 다리 옆에 참대가 났기 때문에 이름을 선죽교로 고쳤다고 전한다. 선죽교에는 본래 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이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한석봉이 썼다고 전하는 ‘선죽교’라고 쓴 비석이 있다.

  


신라입니다(사지너도 못구함, 그리고 허접답변임)

 

 

1.불국사 : 명승 및 사적 제1호

지정연도 1963년 3월 28일

소재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

시대 신라

크기 면적 38만 8879㎡

종류 사찰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되었다고 하였다.

 


불국사 3층석탑: 국보 21호

 

불국사 다보탑: 국보 20호 
 


2.첨성대 : 국보 제31호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시대 신라시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포석정 : 사적 제1호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경북 경주시 탑정동

시대 통일신라시대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이 포석정에 대한 기록이 처음 쓰여졌으나,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4.안압지 : 674년(문무왕 14) 조(條)를 보면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하였다고 하였는데, 안압지는 바로 그때 판 못이며 임해전(臨海殿)에 딸린 것으로 추정된다

 

안압지

 

5.분황사 : 국보 제30호

지정년도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九黃洞) 분황사

시대 신라 선덕여왕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현존하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이라고도 부르며,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높이는 9.3m이다.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6.감은사지 3층석탑 :국보 제112호

소재지 경북 경주시 양북면 감은사지

시대 통일신라시대

크기 동·서 탑 모두 13.4m

 

감은사는 682년(신라 신문왕 2)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탑의 건립도 그 무렵으로 추정되어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석탑이다.

 

7.문무대왕릉 : 사적 제158호

소재지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봉길리(奉吉里)

시대 삼국시대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동해의 대석(大石)에 장사지낸 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8.석굴암 : 국보 제24호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경북 경주시 토함산

시대 신라

종류 석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祠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9.김유신 장군묘 : 사적 제21호

소재지 경북 경주시 충효동

시대 674년(신라 문무왕 13) 축조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문무왕은 채백(彩帛) 1,000필, 벼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내어 장사지내게 했으며, 비를 세워 공적을 새겨두고 수묘(守墓)하는 백성을 배정해주는 등 최고의 예를 베풀었음을 보아 그 무덤의 양식이 왕릉이나 다름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왕릉의 유적을 찾아보겠습니다.

 


 

-신라일성왕릉(사적 제173호)
신라 7대 일성왕(재위 134∼154)의 무덤.
왕은 북쪽 변방에 침입하는 말갈인을 막고, 농토를 넓혀 제방을 쌓는 등 농업을 권장했으며, 백성들에게 금·은·보석의 사용을 금지하여 사치풍조를 멀리하게 했다고 함.높이 5.3m, 지름 15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


-신라정강왕릉(사적 제186호)
경문왕의 둘째 아들인 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의 무덤.
정강왕은 형인 헌강왕에 이어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음.


-신라헌강왕릉(사적 제187호)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의 무덤.
헌강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함.


-지마왕릉(사적 제221호)
신라 지마왕(112∼134)의 무덤으로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음.


-경애왕릉(사적 제222호)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 포석정에서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왕.


-신라내물왕릉(사적 제188호)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

 


발해입니다(조금 짧아요 사진은 못구함)

 

1.발해 돌사자상

 

이 사자상은 길림성 돈화현의 정혜 공주 묘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표면적으로는 당의 돌사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발해 왕실 문화가 당 문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용면에서 이 돌사자상은 당당하면서 힘있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곧 문화적 성격면에서 고구려 미술의 패기와 정열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발해석등

 

이 석등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에 남아 있다. 옛 발해의 영역이었던 상경 제1절터에서 나온 석등으로,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약 6.3m의 거대한 석등이다. 이 석등은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화사석, 상륜부의 일반적인 석등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8각의 하대하석 위에 복련의 연화하대석을 올리고, 8각의 간주석 위에


앙련의 연화상대석을 얹고 있는데, 하대석과 상대석에 장식되어 있는 연꽃 무늬는 강하고 힘차 고구려 미술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화사석은 팔각형으로 그 모서리마다 주춧돌과 기둥 및 주두를 정교하게 조각하였으며, 그 위로 팔각지붕을 이었다. 이것은 팔각정자와 그 모습이 거의 비슷한데 상경 궁전 정원의 팔각정자를 돌로 조각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구도에서는 안정감을 보이면서 균형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3.상경용천부터

 

오늘의 흑룡강성 영안시 동경성이 그 유적이다. 상경인 동경성은 용천부에 설치된 수도로 돈화 오동성으로부터 300리 떨어져 있었다. 상경은 제3대 문왕(대흥 18년)때인 755년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그 후 잠깐 동경 용원부로 가 있은 기간(785∼794)를 제외하고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 발해의 수도였으며 170여 년 동안 동방의 큰 도시로 번성하였다. 발해 상경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많은 변천을 가져왔지만 여기서 근래 수십년 동안에 옛날 대발해국의 수도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유적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4.정혜공주묘비

 

정혜공주는 발해 3대 문왕의 둘째 딸로서, 737년에 태어나 777년 4월에 4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묘비는 1949년 발굴시에 무덤 안에서 7조각으로 깨진 채 발견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진 규형이다. 크기는 높이 90cm, 너비 49cm, 두께 29cm이다. 현재 지린성 창춘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은 21행 725자로 그 중 491자는 명확하게 판독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1980년 정효공주 묘비가 발견됨에 따라 모두 보충할 수 있었다. 비문은 전형적인 변려체 문장으로 13행의 서문과 6행의 명문, 마지막 행의 비석을 세운 연월일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비는 정효공주의 것과 함께 발해사의 재구성에 있어 아주 진귀한 사료이다. 이 묘비가 발견됨에 따라 육정산고분군이 발해 초기의 왕실, 귀족들이 매장된 곳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초기 도읍지였던 동모산 지역이 바로 둔화시 일대라는 것이 확정되었다. 또 문헌 기록에는 없는 발해 문왕 때의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 즉 문왕의 존호와 연호 등을 알 수 있었는데, 특히 존호에 ‘금륜성법’을 덧붙인 것은 무왕이 불교의 전륜성왕을 군주의 이상상으로 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 비문에 의하면 공주는 3년장으로 치러졌는데, 이는 고구려의 3년장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사진은 못구함)

1.중원고구려비

종 목 국보 제205호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280-11
시 대 고구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된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제위’·‘사자’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2.충주장미산성

종 목 사적 제400호
지 정 일 1997.11.11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산77-1외
시 대 고구려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북쪽에 있는 절인 봉학사 지역 일부를 빼고는 성벽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돌을 대강 다듬어 직사각형으로 쌓았는데, 서쪽과 서남쪽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북쪽 정상부분의 성벽을 따라 있는 좁고 긴 군사용 참호는 주변 성벽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대림산성과 강 건너편 탄금대의 토성, 충주산성과 서로를 보호하며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제351호)과 지형조건이 비슷해 성을 쌓은 시대나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3.포천반월성지

종 목 사적 제403호
지 정 일 1998.02.20
소 재 지 경기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5-1외
시 대 고구려

 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0m이다. 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4.동수묘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고분. 북한 국보 제28호. 안악 제3호분이라고도 하며, 북한의 지정 명칭은 ‘하무덤’이다. 높이 7m, 남북 길이 33m, 동서 길이 약 30m에 이르는 방대원형의 토분으로, 1949년에 발굴 조사하였다. 널방 안에 진나라 때 사경체로 쓴 묵서가 있어 이 고분이 357년(고국원왕 27)에 조성된 한국 최고의 벽화고분임이

밝여짐

5.장군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석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에는 광개토왕릉비와 고구려 최대형급의 무덤인 태왕릉, 사신총 등 석릉과 토분 1만 기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6.광개토대왕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 비신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백제예요. 사진은 못구함)

 

미륵사지5층석탑, 부여고분,

제1호-정림사지 5층석탑
백제의 문화재 중에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는 곳이 고작 미륵사지와 정림사지 밖에 없다.비록 터밖에 없지만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의 대표선수다.그리고 감은사지 내에 마애불이 있는데 비바람 때문에 희미해져 2000년부터 보존할 건물을 짓고 있다.
제2호-무령왕릉
공주에 위치했다.고분군 중에서 6호분을 발굴하다가 지석(죽은 왕의 출생년,사년,이름등의 적혀있는 비석)을 발견했다.곧 그것이 무령왕릉인 것을 밝혀 냈으며 나머지 것은 왕족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현재 내부 공개는 안 되고 있다.그러나 무령왕릉 안을 재연한 박물관을 짓겠다고 했다.현재 임시 박물관으로 내부 속을 추측할수가 있다.
제3호-궁남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말 그대로 궁의 남쪽의 위치한 연못이다.지금은 실제의 3분의 1밖에 안되지만 옛날에는 궁녀들을 태울 배가 있을 정도로 컸다.
제4호-공산성
공주에 위치한다.무령왕릉이랑 가깝다.공산성에는 안에 마을도 있으며,절도 있다.그정도로 성이 크다.공산성이 위치한 산은 공산이다.때맞춰서 가면 공산성 근무 교대식을 볼수있는 즐거움을 느낄수 있다.
제5호-고란사,낙화암
부여에 위치한다.고란사는 현재 남아있는 건물이 법당과 범종각뿐이어서 한적함을 더해준다.여기는 의자왕이 마시고 간 고란초 약수가 유명하다.고란초 약수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약수 위에 고란초를 띄어 놓았는데,지금은 사람들이 가져가서 말린 잎만 있다.고란초 약수의 효능을 알수있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고란초 약수를 마시고 온다고 한 할아버지가 밤 늦게까지 안오자 약수로 갔는데,글쎄 할아버지는 없고 할아버지의 옷 속에 아기가 울고 있었다.먹으면 3년 젊어진다는 걸 모르고 몸에 좋다고 무조건 많이 마신 것.
옆에는 낙화암이 있는데,백제 말기,도적들이 쳐들어 오자,궁녀들은 어쩔쭐 몰라서 백마강 아래로 몸을 던졌다.가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는데 고란사와 낙화암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를 볼려면 백마강 유람선을 타는게 좋고,반대로 백제의 숨결을 흠뻑 맛보고 싶으면 공산성과 낙화암에서 내려가면 된다.

芳荑洞百濟古墳群 백제 초기의 무덤군. 서울특별시 송파구(松坡區) 방이동에 있다.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 문화공보부 문화재연구소의 합동조사에 의하여 8기의 고분이 확인되었으며, 75년 잠실지구의 신시가지 건설작업으로 몇 기의 고분이 발굴, 조사되었다. 제 1 호분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지름 12m, 높이 2.2m이다. 제2·제 3 호분은 발굴을 하지 않아 내부구조를 알 수 없으나 그 크기는 제 2 호분이 지름 13.4m, 높이 2.7m, 제 3 호분은 지름 13.12m, 높이 2.9m이며, 봉분의 서쪽 밑둘레에 큰 돌로 2∼3관의 둘레돌[護石]이 둘러져 있다. 제 4 호분은 지름13m, 높이 2.3m인데, 능선 위에 축조되어 있어 봉분의 북단이 남단보다 2m 정도 높다. 돌방[石室] 각 벽의 접합부분은 돌들이 엇물리도록 쌓았다. 제 5 호분은 제 4 호분에서 북쪽 20m 지점으로, 방이동고분군 중 제일 높은 위치이며 그 중심부가 된다. 제 6 호분은 제1·제2·제 3 호분과 한무리를 이루고 있는 해발고도 40m 지대로 방이동고분군 중 제일 낮은 지역이다. 지름 10.6m, 높이 2.1m로 돌방 중앙에 돌벽을 쌓아 서쪽 주실과 동쪽 부실로 나뉘는 특이한 구조이다. 또 돌방 내부의 중간벽 북단에 영공(靈孔;근대의 부부합장무덤에서 창을 뚫어 부부의 혼이 통할 수 있게 한 것과 같음)이 뚫려 있어 특이하다. 제1∼제 6 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굽다리접시[高杯]와 그 뚜껑, 쇠못·쇠편[鐵片]·인골 등이 있다. 특히 굽다리접시는 그 생김새가 전형적인 신라토기로, 신라의 북진(北進)과 신라·백제의 교역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사적 제270호.

신봉동 백제고분군 (사적 제 319호)
총 면적 58,000평의 신봉동 백제고분군은 백제시대의 대규모 고분 유적으로 청주 시가지에서 북서쪽으로 낮은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명심산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도굴이 수없이 자행되다가, 1982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긴급 발굴하여 총 4차 발굴까지 백제 시대의 토기류 33점, 철기류 72점 등 총 105점이 출토되었고 출토된 유물로 보아 4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는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백제권역에서는 처음으로 철제단갑이 출토되었고, 파배와 삼족토기등 토기류, 철기류 등 총 486점, 금동제호록금구와 화살통, 각종 토기류와 철기류, 유리구슬 목걸이, 금동귀걸이, 곡옥 등 908점이 출토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권 최대의 토광묘 밀집지역으로 확인되어 백제의 영토와 청주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자료가 되고 있으며 다양한 마구류의 출토로 백제시대의 마구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마지막 조선,사진은 못구함)

 

조선의 문화재를 가르쳐드릴게요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이다. 조선의 태조는 1392년 7월 개성의 수창궁에서 왕위에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3년(1394)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왕궁을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태조 3년 12월 4일 개토를 시작하여 태조 4년(1395) 9월 경복궁이 조성되었다.

 경복궁사진 ->http://myhome.naver.com/jdkim2137/frame2.htm

 

-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사진

 

- 훈민정음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이게훈민정음입니다

 

- 앙부일구(해시계)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작은 크기로도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다.


- 자격루(물시계)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 못하였고, 중종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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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백제밖에 몰라서 ㅈㅅ

 

대신 사진도 올립니다 나머지는 ㅠㅠ ㅈㅅ

 

답변확정 해주시면 감사하고요 퓨

 

<백제의 문화재>


※ 무령왕릉


공주에 위치했다. 고분군 중에서 6호분을 발굴하다가 지석(죽은 왕의 출생년도, 사년, 이름 등의 적혀있는 비석)을 발견했다. 곧 그것이 무령왕릉인 것을 밝혀냈으며 나머지 것은 왕족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현재 내부 공개는 안 되고 있다. 그러나 무령왕릉 안을 재연한 박물관을 짓겠다고 했다. 현재 임시 박물관으로 내부 속을 추측할 수가 있다.


※ 정림사지 5층 석탑

 

백제의 문화재 중에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는 곳이 고작 미륵사지와 정림사지 밖에 없다 .비록 터밖에 없지만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우리나라의 석탑의 대표 선수다. 그리고 감은사지 내에 마애불이 있는데 비바람 때문에 희미해져 2000년부터 보존할 건물을 짓고 있다.

 

※ 궁남지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말 그대로 궁의 남쪽의 위치한 연못이다. 지금은 실제의 3분의 1밖에 안되지만 옛날에는 궁녀들을 태울 배가 있을 정도로 컸다.


※ 낙화암,고란사

 

부여에 위치한다. 고란사는 현재 남아있는 건물이 법당과 범종 각뿐이어서 한적함을 더해준다. 여기는 의자 왕이 마시고 간 고란초 약수가 유명하다. 고란초 약수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약수 위에 고란초를 띄어 놓았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가져가서 말린 잎만 있다. 고란초 약수의 효능을 알 수 있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고란초 약수를 마시고 온다고 한 할아버지가 밤늦게까지 안 오자 약수로 갔는데, 글쎄 할아버지는 없고 할아버지의 옷 속에 아기가 울고 있었다. 먹으면 3년 젊어진다는 걸 모르고 몸에 좋다고 무조건 많이 마신 것.

옆에는 낙화암이 있는데, 백제 말기,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궁녀들은 어쩔쭐 몰라서 백마강 아래로 몸을 던졌다. 가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고란사와 낙화암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를 볼려면 백마강 유람선을 타는게 좋고, 반대로 백제의 숨결을 흠뻑 맛보고 싶으면 공산성과 낙화암에서 내려가면 된다.


※ 공산성

 

공주에 위치한다. 무령왕릉이랑 가깝다. 공산성에는 안에 마을도 있으며, 절도 있다. 그 정도로 성이 크다. 공산성이 위치한 산은 공산이다. 때맞춰서 가면 공산성 근무 교대식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사진

 

무영왕릉

 

 

고란사

 

 

낙화암

 

 

정림사지 5층석탑

 


공산성

 

 

궁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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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한수(漢水 : 한강)의 북쪽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고대 국가의 쟁취의 대상지역이 되었다. 한양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충렬왕대에 양주(楊州)·남경(南京)이라 불리던 이곳을 한양부로 고침으로써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1394년(태조 3)에 수도를 한양에 정하고 한성부를 설치함으로써 조선의 정치·행정의 중심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서울특별시

 

한양의 자연환경;

 

한양의자연환경과 풍수지리

 

한반도의 중앙을 굽이쳐 흐르는 한강변 일대의 북쪽과 남쪽에 걸쳐 자리잡고 있는 서울은 오래 전부터 지정학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한강 유역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문화유적을 남긴 지역으로 한국인 조상들의 생활터전이었고, 문화의 발상지였다. 상류로부터 하류에 이르기까지 한강 유역권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사유적지들이 있다.

한양은 오늘날 서울의 사대문 안쪽이고, 모악은 신촌·서강 일대이다. 모악은 하륜(河崙)이 거의 독단적으로 주장하였던 땅으로 나라의 중앙에 있어 교통도 편하고 수리의 이점도 있으나, 불행히 한 동네에 위치하여 궁전과 종묘를 넓게 잡을 수 없으며, 명당 좌처(坐處)가 협착하고 주산이 저미(低微)하여 겨울철 한랭한 북서계절풍을 막기 어렵고, 수구(水口)가 관쇄(關鎖)하지 못하여 한양에 비길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개경과 한양은 거시적 안목에서 보자면 매우 비슷할 수도 있지만 국토의 통할이라는 측면에서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특히, 추가령지구대를 이용하여 함경도지방과의 유통을 꾀하는 데 있어서는 한양의 입지가 개경보다 월등한 편이다. 또한 규국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한양이 탁월하다.

한양은 풍수상 장풍과 득수를 고루 갖춘 전형적인 풍수 명당의 지세이다. 현무인 주산은 북악산이 되고 청룡은 낙산(駱山), 백호는 인왕산이며, 주작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안산은 남산, 조산은 관악산이다. 외수(外水)인 객수(客水)는 한강인데, 안산과 조산 사이를 빠져 흐르며 명당을 크게 감싸안고 있는 형세를 취한다.

내수(內水)인 명당수는 청계천인데, 객수인 한강과 명당수인 청계천은 그 흐름의 방향을 반대로 하는 내외수류역세(內外水流逆勢)의 형국이다.

청계천이 동쪽으로 도성을 관통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데 대하여, 한강은 서진(西進)하기 때문에 명당수와 객수는 완연히 역세의 국면을 가지게 된다.

좀더 부연하면 한강은 서울 부근에서 한양을 북으로 감싸듯 돌며, 서울 남쪽을 지나 북서진하는 대규모의 곡류하천 형태를 취한다.

이때 현재의 동작·영등포·노량진·강서구 일대가 곡류하천의 공격면이 되고, 용산·서빙고 쪽이 포인트바(point-bar) 면을 이루기 때문에 한강이 범람하는 경우에도 포인트바 쪽인 도성 안은 비교적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그에 겹쳐 내외 수류가 역세이므로 심한 범람이 일어나는 경우라 할지라도 도성 안이 침수되는 것을 방지하여 주고 있다.

청계천은 포인트바 쪽인 뚝섬에서 한강에 합류하기 때문에 홍수 발생시 도성 안의 하수와 지표수를 쉽게 배수할 수 있는 이점을 갖는다.

즉, 공격사면 쪽에서 유입되는 지류가 본류의 수압 때문에 배수 불능이 되는 경우일지라도 포인트바 쪽은 본류의 수압이 휠씬 낮기 때문에 지류의 배수가 공격사면 쪽보다는 휠씬 유리하다.

그러나 북악산과 인왕산을 연결시켜 주는 부분인 한양의 건방(乾方북서쪽)이 허결(虛缺)하여 황천살(黃泉煞)로 볼 수 있는 단점이 있다.

 

서울의 문화재

 

1.숭례문

 

종 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소실되었다.

 


2.원각사지 십층석탑

 

종 목 국보 제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3.흥인지문

 

종 목 보물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 대 조선시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4.서울성곽

 

종 목 사적 제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 대 조선시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5.경복궁

 

종 목 사적 제11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6.서울사직단

 

종 목 사적 제12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사직동 1-28

시 대 조선시대


 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7.창덕궁(비원포함)

 

종 목 사적 제122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8.창경궁

 

종 목 사적 제123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들의 침전이 있었으며,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9.종묘

 

종 목 사적 제125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훈정동 1-2

시 대 조선시대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0.운현궁

 

종 목 사적 제257호

지 정 일 1977.11.22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운니동 98-50

시 대 조선시대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아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란을 제거하고 인사·재정들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북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11.경희궁지

 

종 목 사적 제271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시 대 조선시대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12.덕수궁

 

종 목 사적 제124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중구 정동 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3.선농단

 

종 목 사적 제436호

지 정 일 2001.12.29

소 재 지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274-1

시 대 조선시대


선농단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던 곳이다.

 

선농의 기원은 기록에 의하면 멀리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래 역대 임금들은 이곳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선농제를 지냈다. 또한 제를 올린 뒤에는 선농단 바로 남쪽에 마련된 적전(籍田)에서 왕이 친히 밭을 갊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일이 소중함을 알리고 권농에 힘쓰기도 한 우리나라 전통 농경문화의 상징적 유적이다.

 

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는 제도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3년(1909)을 마지막으로 일제하에서 폐지되었으며 지금은 사방 4m의 돌단만이 남아 있다.

 


14.독립문

 

종 목 사적 제3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시 대 조선시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우연히 지나가던 뉴 곰탱이남 인데요, 저도 지금 하고 있는중이라서 몇가지만 알려 드릴께요.

 저 시간없어서 ㄷㄷ;;

 

고구려

 

안악 3호분의 벽화

안악3호분묵서명에는 동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서술하고있다.

 

대동문

대동문은 대동갑을건너 남쪽으로 통하는문으로서 평양성의 성문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성문이었다.

 

을밀대

평양특별시 중구역 금수산에있는 누정사허정 이라고도 한다.

 

광개토 대왕릉비

 

고구려 19대 왕으로 재위391~412동안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며,재위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다.

 

장군총

중국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 시대석류

 

 

죄송하지만 고구려 밖에 없어서 다음번에 시간되면 올려 드릴수 있음.

수고하세세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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