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사대문에 대해

서울의 사대문에 대해

작성일 2009.08.07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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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도서관에서

서울의 사대문 홍보지를 만드는데요,

선생님께서 공부해 오라고 하네요...

근데 마땅한 답변이 없어서 질문합니다.

제발 알려주세요~

하실 수 있으시면

내일 까지 부탁 드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  서울에는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워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성문의 이름을 붙인 유래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유학자였던 개국공신 정도전은 이들 성문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즉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의 오행(五行)을 따서 의미를 부여했다.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등에 조선의 통치철학이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사실 동대문, 남대문이란 이름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우리 역사를 깎아내릴 심산으로 개칭한 것이라 한다. 돈의문은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철거돼 지금은 서대문이란 지명으로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명으로 혹은 실제 현존하는 건축물로써 사대문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그동안 군사적인 이유 등으로 개방이 되지 않았던 북대문까지 일반에 공개되고 조만간 그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다.

 

서울의 성곽은 1396년(태조 5) 축조, 1422년(세종 4) 중수되었는데, 처음에는 석성과 토성이 섞여 있었으나, 세종이 중수할 때 전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이 성곽에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었는데, 이것을 통틀어 팔대문이라 하였다. 즉, 정북의 숙청문(북문), 정동의 흥인지문(동대문), 정남의 숭례문(남대문), 정서의 돈의문(서대문) 등의 사대문과 동북의 홍화문(중종 6년 혜화문으로 개명, 동소문), 동남의 광희문(수구문), 서남의 소덕문(후에 소의문으로 개명, 서소문), 서북의 창의문(자하문) 등의 사소문을합쳐 이르는 말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정남에 숭례문(지금의 서울 남대문), 정북에 숙청문, 정동에 흥인지문(지금의 서울 동대문), 정서에 돈의문을 세웠다.

 

서울성곽은 조선시대 한성의 도성으로서 지방과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교통로가 마련됨에 따라 동·서·남·북의 4대문과 그 사이에 4소문이 있어 모두 8개의 성문과 문루가 축조되었다. 태조 5년(1396)에 도성 축조를 마칠 때 대체적으로 성문과 문루가 만들어졌다. 성문은 모두 아래쪽에 월단(月團, 아치형 문) 즉 돌로 홍예(虹霓)를 만들고 그 홍예문 위에는 누각 즉 문루를 건축하였다. 당시에 건축되었던 도성 8문은 아래와 같다.

 

 

◐ 사대문(四大門)의 위치와 명칭.

 

정북 : 숙청문(肅淸門) (북대문)
정남 : 숭례문(崇禮門) 속칭 남대문
정동 : 흥인문(興仁門) 속칭 동대문
정서 : 돈의문(敦義門) 속칭 서대문
 
◐ 사소문(四小門)의 위치와 명칭.
 
동북 : 홍화문(弘化門) 속칭 동소문
서남 : 소덕문(昭德門) 속칭 서소문
동남 : 광희문(光熙門) 속칭 수구문(남소문)
서북 : 창의문(彰義門) (북소문)
 
 
 

▲  서울의 4대문과 4소문 개념도.

 

사대문 -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숙정문(북대문).

 

사소문 - 광희문, 혜화문, 창의문(자하문),소의문(서소문)

 

 

이들 성문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이는 도성 문에 유교국가의 정치이념인 인의예지(仁義禮智) 4대 덕목을 결부시켜, 조선왕조 수도의 상징으로서의 위상을 여실히 나타낸 것이었다.  세조 3년(1457)에는 한강진에서 서울 동쪽으로 왕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남산에서 장충동으로 이어지는 고개마루에 남소문이 개설되었다가 곧 폐쇄되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한성은 도성을 방어기지로 삼아 왜군과 전쟁을 해보지도 못하고 함락되고 짓밟혔다. 이로 말미암아 동대문·남대문·서대문 3개소를 제외하고 나머지 성문의 문루가 모두 없어졌다. 그후 숙종과 영조 때에 문루가 중건되는데, 북대문인 숙정문은 여전히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1898년 10월에는 서대문에서 청량리간에 단선 전차궤도 부설공사가 기공되고 같은 해 12월에 준공되었으며, 이듬해 5월 17일에 전차 개통식이 있어 도성 내에 최초의 전차가 등장했다. 이때에는 전차가 동대문과 서대문의 홍예 안으로 통행하였으므로 성곽과 성문은 철거되지 않고 유지된다. 그러나 1907년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좌우의 성벽을 철거하고 전차선로를 가설키로 결정되니, 전차로를 복선화 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단선일 경우는 성문 중앙으로 궤도가 설치되었지만 복선일 경우 성곽을 철거하지 않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성곽 철거는 1908년 3월에 동대문 좌우부터 시작되었고, 1910년 5월에는 그 동안 도로의 한쪽으로 설치되었던 전차선로를 도로 중앙으로 옮겨 건설하기 위해 측량작업에 착수하였다. 6월 1일에는 동대문 북쪽 성벽을 헐고 그 자리에 도로가 개통되었고 전차노선도 동대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이어 남대문 좌우의 성곽도 철거되었고 전차노선이 남대문 좌우에 부설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1913년 2월에 <시가지건축취체규칙>을 공포하여 기존 서울 시가지 모습을 그들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13년 9월에는 을지로에서 뚝섬간 전차궤도공사가 착공되었고, 12월에는 광희문·왕십리·진팔리 간의 왕십리선 전차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1915년 3월에는 총독부 토목국에서 서대문 철거를 위한 경매공고를 냈다. 이후 서대문과 서소문이 철거되었고, 도로 개설 또는 부지 개착으로 성곽 훼손이 여러 곳에서 자행되었다.
광복 이후 성곽 복원사업으로 숙정문 문루가 축조되었고, 혜화문이 복원되었다. 따라서 현재 서대문과 서소문을 제외하고 서울성곽의 6개 문은 보존·복원되어 있다.

(1) 숭례문(남대문)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왕조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서울성곽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커 도성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숭례문은 1396년 1월 제1차 도성 수축 때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월단(아치)과 문루공사에 고도의 기술과 시일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제2차 축성이 이루어진 후 1396년 10월에 상량(上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962년 숭례문을 해체 수리할 때 '洪武二十九年 丙子 十月 初六日' 이라 쓰여진 상량문이 발견되어 확인되었다. 이후 태조 7년(1398) 2월에 준공되어 왕이 직접 숭례문으로 거둥하여 관람하였다. 따라서 상량에서 준공까지 16개월이나 소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후 세종 7년(1425)에는 흥천사의 종을 남대문에 걸게 하였고, 세종 30년(1448)에는  풍수지리설을 따라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숭례문을 다시 건축하였다. 이 사실은 1962년에 발견된 상량문에 '正統十三年 戊辰 三月 十七日'이라는 묵서명이 있어 세종 30년 3월 17일에 상량이 거행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재건축 논의가 있은 지 14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성종 10년(1479)에 숭례문이 기울어져 또다시 개축공사가 추진되었다가, 위태로운 지경이 아니니 그대로 두라는 왕명으로 중지되었다. 이때 옹성을 설치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 당시 공사 기록은 ≪성종실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1962년에 발견된 상량문에 '成化十五年 己亥 四月 初二日'이라는 묵서명이 있어 성종 10년 4월에 개수공사 상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도 남대문은 무사히 남아 있다가 1962년에 본격적인 해체 수리공사에 의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


숭례문 현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로 전해진다. 이 현판은 다른 도성문과는 다르게 가로로 쓰여지지 않고 세로로 되어 있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 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불이 타오르는 모양처럼 세워서 달았다는 것이다. 또 한강 건너 관악산이 오행의 화산에 해당되어 그 불기가 도성을 위협하게 되므로 숭례문 현판을 세워 달아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중국 사신 등 귀한 손님이 드나들게 되므로 서서 맞이하는 예의를 갖춘 모습으로도 해석된다.


남대문은 1934년 일제가 제정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의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광복 후 6·25한국전쟁으로 석축과 건물에 많은 피해를 입어, 1952년에 피해 부분 위주로 수리되었으며, 1954년에는 단청공사가 있었다.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전국의 문화재를 다시 지정하는 작업에 따라 남대문은 국보 제1호로 고쳐 지정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961년 7월부터 해체수리를 위한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고, 1962년 1월부터 건물을 해체하기 시작하여 1963년 5월 13일에 준공되었다.


성문은 거대한 육축(陸築) 중앙에 폭 7.1m 정도의 통로를 마련하고, 그 위에 중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홍예대석의 높이는 2.5m 정도이고, 홍예의 폭과 높이는 각각 4.8m 정도이다. 그리고 문루가 설치된 체성(體城)의 규모는 높이 7m, 폭 12m 정도로, 단층 문루가 설치된 다른 성문에 이어진 체성보다 높이 약 1.5m, 폭 약 4m 정도 더 크다. 남대문은 국가적인 의장 행렬이 통과하는 성문으로 그 규모가 다른 성문에 비해 컸던 것이다. 육축에는 성 안쪽으로 계단을 좌우에 대칭으로 설치하여 오를 수 있게 하였다. 또 문루를 에워싸는 전돌 여장을 둘렸고 계단으로 통하는 곳에는 협문(夾門)을 두었다.


건물은 중층 다포계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면적은 177.8㎡(53.8평)로 성문 건축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문루 아래층은 사방이 개방되었고, 다듬어진 초석 위에 원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기둥 상부에 창방(昌枋)을 걸고 평방(平枋)을 돌려 그 위에 다포 구조의 공포를 올렸다.


공포는 출목 간격을 360㎜로 동일하게 설정하고 상층의 외출목은 3출목, 나머지는 모두 2출목이다. 공포 구조는 살미가 웅건하게 뻗어 내리고 내단부는 교두형이며, 기둥에는 안초공이 없고, 보머리가 3분두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귀공포는 간결하게 처리되어 있다. 창덕궁 선정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조선 중기 다포 양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간포의 배치는 어칸은 4첩, 협칸과 측면은 각각 2첩씩 되어 있는데, 상층에는 기둥을 들여서 세웠기 때문에 차협칸과 측면은 각 1첩씩 배치되었다.


상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성 안쪽에서 보아 좌측 협칸의 성 안쪽에 설치되어 있다. 아래층 바닥은 우물마루, 위층 바닥은 널마루이다. 기둥 사이에는 중방과 창방 사이에 작은 광창(光窓)을 내었다. 상층의 벽은 사방에 판문을 설치하였는데, 독립적으로 여닫게 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이다. 1962년 수리공사 때 원래 팔작지붕이었던 구조가 우진각지붕으로 바뀐 것이 밝혀졌다.

 



 

(2) 흥인문·흥인지문(동대문)
 

 

흥인문(興仁門)은 태조 때 도성을 수축하면서 건설되었다. 그런데 태조 5년(1396) 1차 축성 때 흥인문은 완성되지 못하였다. 성문의 석축공사가 끝나지 못하였으므로 문루 공사는 시작도 못하였다. 그리고 지반이 낮고 습해 약하므로 기초공사로 돌을 채워 넣어 기반을 다졌다. 2차 공사를 완료한 같은 해 9월에 '정동(正東)은 흥인문이니 속칭 동대문'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성이 완성된 듯 보이나, 홍예문과 문루 공사가 늦어져 태조 6년(1397)에 완공되었다.

 

즉, 1397년 정월에 태조가 흥인문에 거둥하여 옹성 기지를 관찰하였고, 4월에는 흥인문에 거둥하여 옹성을 보고 성을 순행하여 동소문에 이르러 환궁하였다. 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흥인문을 보완하기 위해서 성문 중에서 유일하게 성밖으로 옹성을 쌓았는데, 1397년 1월에 착수하여 4월에 준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현재까지 수 차례에 걸쳐 수축과 개축이 있었다. 문종 1년(1451) 3월에는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군정을 동원하여 도성을 수축하게 하였는데, 예정된 기한보다 일찍 마쳤기 때문에 남은 9일 동안 동대문과 동소문을 수리하였다.


또 그해 10월에는 좌의정 황보인(皇甫仁)이 동대문의 역사를 감독하였는데, 정승이 감독하는 공사로 건물 자체를 규모 있게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단종 즉위년(1452) 2월에 선군(船軍) 100명으로 흥인문을 수리하게 하고, 기타 여러 곳에 분산된 역군을 세종의 영릉(英陵) 역사에 투입시킨 것으로 보아, 영릉의 역사 때문에 동대문 수리가 지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452년 9월에는 사간원에서 흥인문을 개축하는 것은 심히 기울어진 것도 아니고 산릉(山陵)과 창덕궁 역사도 같이 하니 정지시키기를 청했다.


그러나 동대문 개수공사는 강행되어 1453년 4월 사헌부에서 아뢰는 내용 중에 " 근래에 세종의 영릉과 문종의 현릉(顯陵)의 역사가 연이어 있고, 흥인문을 고치고, 이 역사가 끝나자 수문을 만들어 백성을 힘들게 하였다." 는 기록이 보인다. 동대문 개수공사는 계속되어 5월에도 공사를 끝내도록 지시하였고, 6월에는 흥인문 역사를 감독하는 영사와 권지직장에게 별사(別仕)를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어 9월에는 수양대군이 창덕궁과 흥인문의 역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바른 일이 아니라는 뜻을 단종에게 전했다.


이렇게 단종 때에는 선왕의 산릉과 창덕궁 역사가 있어 동대문 개수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사기간이 1년 정도 소요되었다. 태조 5년에 건립된 동대문이 57년이라는 기간에 두 번씩이나 개수된 것은 건물 자체 문제이기보다는 지반이 약하여 내려앉고 이에 따라 석축이 기울고 벌어졌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종 때의 개수공사 이후로는 동대문 보수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영조 즉위년(1724) 11월 국장도감(國葬都監)에서 발인 연습을 할 때 흥인문 홍예 높이가 상여 높이보다 두 자 낮으므로 문지방과 바닥의 박석을 제거하여 시행하였다.


지금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문루는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목조건물로 조선 말기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단종 때에 중건되고 410여 년이 지난 고종 5년 9월에 동대문이 전체적으로 낡아 수리가 시급하다고 보고되어 영건도감에서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3월에 준공되었으며, 배수를 위하여 근처에 수문 1개소를 만들기를 청하여 승락을 받았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의 구조적 기법과 목재 상태로 보아 이때의 수리는 대부분 해체하여 많은 양의 목재가 새 것으로 교체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흥인지문은 고종 때 문루가 재건되면서 규모는 숭례문과 비슷하나 구조기법상 크게 차이를 보이며, 조형미에서는 조선 말기의 특징을 보여 그 짜임새의 아름다움이 떨어진다고 말해진다.


흥인지문의 현액은 오행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동대문 일대가 도성 내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남쪽에 청계천이 흘러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고종 때 다시 지으면서 '之(지)'자를 보강하여 '흥인지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흥인지문은 도성 내에 가장 낮은 지역에 위치하여, 3m 내외의 성토를 하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조성된 육축(陸築) 위에 문루를 세웠다. 육축은 중앙 부분에 홍예를 두고 문비를 달았다. 성문은 거대한 육축의 중앙에 폭 7.1m 정도의 통로를 마련하고, 그 위에 중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홍예대석의 높이는 2.5m 정도이고, 홍예의 폭과 높이는 각각 4.8m 정도이다. 그리고 문루가 설치된 체성(體城)의 규모는 높이 7m, 폭 12m 정도로, 단층 문루가 설치된 다른 성문에 이어진 체성보다 높이 약 1.5m, 폭 약 4m 정도 크다. 흥인지문은 국가적 의장 행렬이 통과하는 성문으로 그 규모가 다른 성문에 비해 컸던 것이다. 육축의 내부 성 안쪽에 대칭으로 계단을 설치하여 문루에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흥인지문은 서울성곽에서 유일하게 성문 외부에 옹성을 둘렸다. 옹성은 반달 모양으로 북쪽 한 쪽을 개방하여 출입하도록 하고,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여 취약한 성문의 방어력을 보강하였다. 그러나 이 문은 옹성 시설을 갖고 있으면서도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옹성은 최대 직경 45m 정도이며 상부의 석축 폭은 6m 내외이고 북쪽 개구부 폭은 9m 정도이다. 옹성의 문은 정조 때 만들어진 수원 화성의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중앙에 설치되었는데, 동대문의 경우 측면으로 들어가도록 개구부를 설정한 것은 성문을 더욱 잘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낙산 줄기가 뻗어 내려온 북편으로 열려진 것도 지형조건을 잘 이용하여 방어기능을 더욱 높인 것으로 보인다. 또 옹성 북쪽에는 성곽이 ㄱ자로 돌출되어 치성(雉城)과 비슷한 모양으로 마련한 것도 같은 발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면적은 156.6㎡(47.45평)의 중층 건물로 아래 층은 사방이 개방된 형태이고,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귀퉁이의 우주(隅柱)는 고주로 하여 위층의 우주가 되도록 하였다. 위층은 기둥 사이에 판문을 달았는데 남대문의 것보다 크며 문짝 수가 적다. 이는 옹성이 설치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상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성 안쪽에서 보아 우측 협칸 성 바깥쪽에 설치되어 있다. 바닥은 누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지붕은 상하 겹처마로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아래층은 내3출목 외2출목이고, 위층은 내외 3출목으로 출목 수가 증가하고 내출목 간격이 외출목 보다 줄어들었다. 안초공을 두고 살미 내단부에 당초문양으로 장식하였으며, 보머리도 초각을 하였다. 그리고 첨차 등에서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 근정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조선후기 다포계 건물의 전형이라 하겠다.

 

 
 
(3) 돈의문(서대문)
 

 

돈의문(敦義門)은 태조 5년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으며, 이때 서쪽의 성문을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런데 창건 당시 서대문의 위치는 사직동 부근으로 후대의 위치보다는 훨씬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경희궁 서쪽 언덕으로 옮겨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렸다. 즉, 서대문이 건립된 지 17년 후인 태종 13년에 처음 축조되어 닫혀 있던 서대문을 폐쇄하고 서전문을 열었다. 즉, 풍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복궁의 지맥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돈의문을 폐쇄하고 그 남쪽에 문을 내어 서전문이라 하였다. 이후 세종 4년(1422) 2월에 도성을 고쳐 쌓으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 보다 남쪽 지점 지금 서대문 마루턱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태종 때 서전문을 열면서 왕래를 편하게 하려면 권신이었던 이숙번(李叔蕃)의 집 앞길이 적당하였으나, 이숙번이 권세를 이용하여 보다 남쪽에 있는 인덕궁(仁德宮, 정종의 궁) 앞길로 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세종이 즉위하여 그런 사실을 알고 인덕궁 대문 때문에 굽은 길이 되었던 것을 인덕궁 문을 옮겨 곧은 길로 만들었다고 한다. 즉, 석성의 문루를 옮겨 세웠다면 대단한 공역이 필요했을 것이나, 토성에 있던 문을 철거하고 다른 곳에 문을 내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공사였기 때문에 손쉽게 새로 문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세종 4년에는 도성의 대규모 수축공사로 대부분의 토성이 석성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서대문의 위치가 다시 변경되었다. 당시 도성을 석성으로 쌓으면서 서전문을 막고 돈의문을 설치하였으며, 성 안팎에 너비 15척의 길을 내어 순찰하는데 편리하게 하였다. 문을 옮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서전문이 경복궁에서 가까운 위치였고 고개 길이 굽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하여, 더 남쪽으로 지대가 전보다 낮은 위치인 서대문 고개에 옮겨 설치하면 통행하는 길도 넓어지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 4년에 새로 만들어진 돈의문은 임진왜란 때 문루가 파괴되었는지 숙종 37년(1711)에 광희문을 조성할 목재로 돈의문 문루를 조성하게 한 기록이 보인다. 이때에 중건된 돈의문은 잘 남아 있다가 1915년에 전차궤도 복선화 때문에 철거당했다. 세종 때에 곧고 넓은 도로에 돈의문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전차노선 설치에 따라 성문이 철거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돈의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돈의문 성문의 구조는 철거되기 전의 사진으로 대략 알 수 있는데, 장대한 무사석(武砂石)으로 높게 축조한 육축 중앙에 홍예를 두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육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으로 된 문루를 세웠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이었다. 돈의문이 복원된다면 거의 같은 구조로 축조되었을 창의문 등 서울성곽의 단층 문루 성문을 본보기로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돈의문은 이괄의 난과 을미사변을 겪은 성문이다. 안산(무악재)전투에서 패배한 이괄은 돈의문으로 도망하려 했으나 시민들이 문을 닫아 들어갈 수가 없어 겨우 남대문으로 입성하여 광희문으로 빠져나갔다. 한편 1895년 8월 20일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있었는데, 이날 새벽 일제 부랑인들은 공덕리 아소정으로부터 숨어서 거동한 흥선대원군과 돈의문 앞에서 만나 합류하여 파루 종이 울리면서 대문이 열리자 곧바로 경복궁을 침범하였던 것이다.

 

 

(4) 숙청문·숙정문(북문·북대문)
 
 

 

숙청문(肅淸門)은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 때 건립된 북대문으로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북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그 뒤 태종 13년(1413) 이래 경복궁의 좌청룡 지맥을 보존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문이 닫혀 있어야 했다. 즉 풍수학생 최양선의 상소로 북소문인 창의문과 더불어 폐쇄되었는데 숙청문만은 그 이후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닫혀진 문이었다. 북문이 열리는 때는 주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행하는 시기뿐이었다.

 

숙청문이 이와 같이 폐쇄된 문이었기 때문인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주로 '북문(北門)'으로 칭하고 있으며, 중종 18년부터 '숙정문(肅靖門)'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후로는 두 명칭이 함께 쓰였다. 이름이 달라진 이유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으나 중종 26년 '북정문(北靖門)'이라는 표현과 선조 20년의 '숙정문(肅靜門)'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과, 북문이 주로 가뭄에 비를 빌기 위하여 열리면서 소음을 피하기 위하여 시장을 옮기고 북 치는 것을 금지한 것과 관련하여 정숙한 기운을 일으키는 의미에서 뜻과 음이 조용한 숙정문으로 바뀌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게 된다. 현재 새로 세운 문루에는 '肅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연산군 10년(1504)에는 숙청문을 막고 그 오른편에 새 문을 만들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 말기에는 각종 공사를 벌이는 명령을 마구 내는 시기이면서도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내용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숙청문을 옮겨 짓는 문제도 지시만 있었고 실행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숙청문을 닫아 두었던 것은 이 문을 열어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내 부녀자들이 놀아나게 되어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 둔다고 하였다. 이 문은 위치상 통행로로도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이 문에서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憮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거행하였다. 반면 가뭄이 극심하면 이 문을 활짝 열고 대신 남대문을 닫고 기우제를 거행했다. 이 제도는 예종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양기 많은 남대문은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놓음으로써 비를 맞아들인다는 것이다.


숙정문에 관해서는 보수 또는 개축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리고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도성 지도는 대부분 18세기 이후의 것으로 지도상에는 모두 문루가 없는 성문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한 이유로 북문은 창건 때부터 문루가 없는 암문 형식의 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편 숙정문의 규모와 형식은 혜화문 또는 창의문의 구조와 비슷하고, 창건 때에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다른 성문의 문루와 같이 없어졌으며, 영조 때 중건되는 과정에서 문루를 축조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1975년 삼청동지구 성곽 복원 때 숙정문 문루 존재 여부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잔존 석축 75% 정도에 고증을 거쳐 1976년에 문루가 건립되었다.


복원된 숙정문은 육축의 상부 천장을 특이하게 석재 홍예로 구성하였는데, 외벽 쪽의 일부 구간은 홍예를 1단 더 높여 아치를 만들어 문비를 다는데 편하게 하였다. 즉 성 바깥쪽 홍예는 다른 문과 같게 하였으나, 성 안쪽은 홍예가 병렬 축조되고, 중간부에는 안쪽 홍예 위로 한 단 높여 홍예를 구성하여 전체로 보면 높이가 다른 세 가지의 홍예로 되어 있다. 성문 체성의 높이는 5.5m, 폭은 7.6m이고, 바깥쪽 홍예의 높이는 3.05m, 폭은 3.14m, 안쪽 홍예의 높이는 4.09m 폭은 3.75m이다. 홍예 내부 통로 폭은 3.75m, 홍예 대석 높이는 1.5m이다.


성 안쪽으로 문루에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었으며, 문을 중심으로 계단도 대칭되게 하였다. 석축의 하단부는 규격이 큰 석재를 사용하여 지대석이 석축면에서 돌출되게 축조하였고, 석축 위로 가면서 석재면을 약간 후퇴시켜 쌓는 이른바 되물림쌓기를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성곽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석축의 상단에는 빗물이 흘러드는 것을 대비하여 물이 빠져 나가도록 한 면에 2개소씩 모두 4개소에 석누조(石漏槽)를 설치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지붕이다. 문루 내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구조는 창방 위에 화반(花盤)을 놓고 2익공을 두었다. 사각 초석 위에 원기둥을 사용하여 부연을 단 겹처마에 5량 구조이고 지붕마루는 삼회토로 싸바르는 양성마루를 하였고, 내림마루에는 잡상을 두었다. 문루 여장은 전돌로 쌓고 총안을 마련하였으며, 좌우 측면의 여장에는 문루로 출입하는 협문을 설치하였다.

 

 
(5) 창의문·장의문(자하문, 북소문)
 

 

창의문(彰義門)은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 때 건립된 북소문으로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북악산)의 서쪽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 문에 대해서는 추가되는 공사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공식 명칭은 창의문이라 하였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종 이후로 장의문(藏義門·壯義門)으로 표현된 예가 많다. 성안에서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기슭에 장의동(藏義洞)이 있어 장의동에 있는 문, 즉 장의문으로 쉽게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창의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북문으로 구실하였으며, 일명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 최양선이 상소하여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하는 지맥을 온전하게 하도록 창의문과 숙청문을 열지 않도록 건의한 것이 답변확정되어 두 문은 계속 폐쇄되었다. 이후 세종 때에 도성 역사를 위한 작업 편의상 임시로 문을 열기도 하였다. 세종 4년 정월에는 도성 수축을 위해 숙청문과 창의문 두 문을 열어 군인들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편의에 따라 문을 열기도 하였으나, 세종 28년(1446)에는 왕명 외에는 항상 폐쇄하게 하였다. 이는 세종이 음양과 풍수의 말을 깊이 믿어서 승정원에 명한 것이다. 당시 술사 이양달(李陽達)이 장의문이 경복궁을 임하여 누르고 또 해가 있으니 사람의 자취를 통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여, 길을 막아 소나무를 심고 문을 폐쇄한 지가 오래 되어 통행하기에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 문종 2년(1452)에는 풍수학생 문맹검(文孟儉)이 "장의문은 천주(天柱)의 자리인데 인물이 밟고 다니는 것이 편하지 않으니 항상 닫고 열지 않아 천주의 자리를 보전하게 하소서." 라는 건의가  있었다. 이로 보아 창의문은 경복궁의 우백호 지맥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계속 폐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창의문은 인조반정군의 한 자루 도끼에 의해 열리기도 하였다. 광해군 14년(1623)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통하여 창덕궁을 장악함으로써 인조정권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영조 19년(1743) 기우제를 지내고 오던 길에 영조가 이 곳에 들러 이를 기리기 위해 시를 짓고 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게 하니, 이 현판은 창의문에 걸려 오늘에 전하고 있다.


영조 16년(1740)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 반정군)이 들어왔던 곳이므로 마땅히 개수하여 표시해야 한다고 아뢰자, 내년 봄에 개수하라고 명했다. 창의문 문루가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없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이 때까지도 중건되지 못하고 폐쇄된 문이었으므로 중건을 청하는 것이었다. 영조 17년(1741) 정월에 창의문에 초루(哨樓), 즉 문루를 설치하도록 명해 중건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언제 완공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1956년 창의문 보수공사 때 '乾隆六年 辛酉 六月十六日午時 上樑'이라 기록된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구성임의 건의로 문루공사에 착수하여 영조 17년 6월 16일에 상량이 있었으므로 영조 17년에 중건된 문루임이 확인된 것이다.


창의문은 도성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다른 문루를 복원함에 있어서 고증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성문은 장대형 무사석(武砂石)을 높게 쌓아 육축을 마련하고, 육축 중앙에 홍예를 설치하였으며 그 위에 문루를 조성하였다. 성문 체성의 높이는 5.5m, 폭은 7.62m이고, 바깥쪽 홍예의 높이는 3.75m, 폭은 3.87m, 안쪽 홍예의 높이는 3.75m, 폭은 4.83m이다. 홍예 내부 통로 폭은 4.83m, 홍예 대석 높이는 2.1m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지붕이다. 문루 바깥쪽으로 총안이 없는 전돌 여장을 둘렀으며, 좌우 측면의 여장에는 문루로 출입하는 등성계단과 협문을 설치하였다. 문루의 구조는 2익공 겹처마이며 기둥은 팔각초석을 사용하였고, 내림마루에는 잡상을 설치하였다. 바닥은 중앙 칸만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성문 안쪽으로 빗물의 배수를 위한 누조가 전후 각 2개씩 마련되어 있는데, 안쪽의 누조는 화분과 같은 받침형으로 조각된 것이 이채롭다. 창의문 구조의 특징 중 하나는 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석축의 하단부는 규격이 큰 석재를 사용하여 지대석이 석축면에서 돌출되게 축조하였고, 석축 위로 가면서 석재면을 약간 후퇴시켜 쌓는 이른바 되물림쌓기를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성곽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6) 홍화문·혜화문(동소문)
 

 

혜화문(惠化門)은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축조된 동소문으로 당시는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으며, 도성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성종 24년(1493) 창경궁을 조성하면서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하여 이 성문 이름과 혼동되었다. 이에 중종 때 이 동소문을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즉, 중종 1년에 처음으로 혜화문이란 이름이 등장하여 동소문의 명칭이 혜화문으로 개칭된 것은 중종 때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동지지≫에는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종 1년(1451)에는 동대문과 함께 동소문을 수리하였으나 공사가 완료되지는 않았다. 백성들이 힘들므로 급하지 않은 일은 정지하도록 지시하면서 동소문에는 우선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하게 하였다. 녹각성이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나무말뚝을 박아 설치하는 임시 방어용 목책을 의미하며, 마치 사슴뿔과 같은 장애물을 설치한 것이다. 이것은 동소문 자체가 훼손된 것이 아니라 동소문과 인접한 성곽이 붕괴되어 녹각성으로 임시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영조 15년(1739)에는 혜화문의 문지도리와 문짝이 부러지고 상하여 밤에 문을 닫지 못하므로 어영청(御營廳) 군인 10여명으로 지키도록 하였고, 영조 20년(1744)에는 예전에 문루가 없던 것을 어영청에 명하여 세우게 하고 편액을 걸었으며, 속칭 동소문이라 하였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문루가 파괴된 것을 이때 와서야 중건하였기 때문에, 예전에는 문루가 없었다고 표현된 것이다.


영조 때에 중건된 혜화문은 일제 때에 철거되었다. 일제는 1913년 <시가지건축취체규칙>을 공포하고 도성 내 성곽을 철거하여 신작로를 만들고 각종 공공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는데, 1911년부터 1917년 4월까지 도로 확장과 개설 계획에 따라, 혜화문은 1916년경에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28년에 문루가 철거되고 1939년에는 성문마저 철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혜화문은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해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으로, 여진의 지정숙소인 북평관이 동대문 안 동학(東學)이 있던 현 이화여대 부속병원 언저리에 있었으므로 그 통로가 되었다. 그리고 문루의 바닥 천장에는 대개 용을 그려 넣었는데 혜화문에는 성 밖의 새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봉황을 그려 모셨다고 한다.


현재의 혜화문은 원위치인 동소문로 가운데에서 서북쪽으로 약 30m 정도 옮겨 1992년 12월 29일에 이전·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15일에 완공되었다. 혜화문 터는 확장된 8차선 도로 중앙에 있었는데, 도로를 원 지반보다 약 5~6m 낮추어 조성하였기 때문에 문지는 완전히 훼손되었다.


복원된 성문은 장방형 무사석으로 육축을 높게 마련하고 그 가운데에 홍예를 두어 통로를 마련하였다. 체성은 높이 5.3m 폭 8.6m이며, 홍예의 높이는 3.9m 폭은 3.75m이다. 홍예 내부 통로의 폭은 4.37m이고, 홍예대석의 높이는 1.98m이다. 육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지붕을 두었다. 문루의 구조는 원형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2익공에 창방 위에 화반을 두고 겹처마에 양성마루를 하였다. 바닥의 중앙 칸에는 장마루를 깔고, 판벽을 설치하였다. 문루 둘레에는 높이 1.4m 폭 0.6m의 전돌 여장을 둘렀으며, 원·근총안을 설치하고 안쪽 좌우에는 등성계단과 협문을 두어 문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7) 소덕문·소의문(서소문)


소의문(昭義門)은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축조된 서소문으로 당시는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 이 문은 도성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강화·인천 방향과 서북방으로 직결되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서소문 문루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으나 재정 여건상 중건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 숙종 45년(1719)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가 " 도성의 문에 누각과 현판이 있었으니 해당 군문에 분부하여 현판을 써서 걸게 하고, 서소문에는 누각을 설치한 후 현판을 걸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고 건의하였다. 당시는 아직 문루가 중건되지 못하여 문루 현판도 없어 재건을 논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서소문 문루가 중건된 것은 영조 20년(1744)이었다. 소덕문을 속칭 서소문이라 불렀는데 옛날에는 누각이 없었고 금위영에 명하여 세우게 하였으며, 이때 액호도 소의문으로 개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서소문의 명칭이 바뀌는 시기에 대해 성종 3년(1472)에 예종의 비를 장순왕후(章順王后)로 추존할 때 시호에 '소덕'이 들어 있어 이를 피하는 뜻으로 소의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러한 내용을 ≪성종실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영조 때에 중건된 서소문은 1914년경 도로확장으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발행된 <경성부명세신지도>에 서소문이 표기되어 있으나, 이후의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소의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세상을 떠나 도성 서쪽 방향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었다. 그리고 이 서소문 밖에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시전(市廛)인 칠패시전이 있어 상업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소의문의 형태는 남아 있는 사진을 통하여 대략 살펴볼 수 있다.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소의문은 장방형 무사석으로 높게 육축을 축조하고, 육축 중앙에 홍예를 앞뒤로 설치하여 통로를 마련하고, 그 위에 문루를 조성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지붕이며, 문루 바깥 사방에는 총안이 없는 전돌 여장을 둘렀으며, 좌우 측면의 여장에는 문루로 출입하는 협문을 설치하였다. 성문 안쪽으로 빗물 배수를 위한 누조가 전후 각 2개씩 마련되었다. 그리고 육축에 이어진 성벽에는 원·근총안이 설치되어 있는 평여장이 연결되어 있다.


한편 소의문이 있던 자리는 현재 왕복 8차선의 서소문로가 조성되어 그 터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언덕을 형성하고 있는 지형에서 내리막길이 시작하는 지점을 그 터로 추정할 수 있다.

 

(8) 광희문(수구문)
 

광희문(光熙門)은 태조 5년(1396)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이다.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 이를 흔히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렀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수구문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구문은 실제로는 시구문(屍口門)으로 이용되었으니, 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 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때 기록을 보면 남소문과 광희문의 자리를 혼동하기도 하고, 성문 터과 군영의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파괴된 도성을 수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광희문은 도성 수축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숙종 37년(1711)에 중건에 착수하는데, 수구문을 다시 쌓고 아울러 문루도 조성하게 하였다. 이때 금위영에서 수구문을 축조한 후 문루는 재목을 갖추어 나중에 조성하고자 하니, 재목을 다른 아문에 나누어 주어 돈의문 문루를 조성하게 하였다. 수구문은 심하게 파괴되어 석축을 새로 개수하는데 시일이 많이 걸리므로 서대문 지역을 담당하는 아문에 목재를 넘겨 주어 돈의문 문루를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성문이 수축되고 그 이후 언제 문루가 중건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숙종 45년(1719)에 수구문은 옛 이름이 광희문이니, 해당 군문(軍門)에서 액호를 써서 걸 것을 요청하자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영조 때에 도성의 문루가 없는 성문을 중건하게 하였는데 그 대상에 광희문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175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성도>에는 당시 문루 유무에 따라 성문을 그렸는데 수구문에는 문루가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광희문은 숙종 때에 재건된 것으로 확인된다.


광희문은 일제가 전차궤도를 부설하면서 성곽을 철거할 때도 문과 문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문루가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후 1975년에 도로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옮기는 이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준공되었다. 광희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갔고, 병자호란(1636) 때에는 임금이 역시 이 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일본 사신들은 옥수동 두모포나루로 한강을 건너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숙소인 동평관으로 향하였다.


성문은 서울성곽의 다른 소문과 같이 장방형 무사석으로 높게 축조한 육축을 마련하고, 육축 가운데 홍예를 앞뒤로 설치하여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문루를 조성하였다. 석축 체성의 높이는 6m, 폭은 7.98m이며, 바깥쪽 홍예의 높이는 4.18m, 폭은 4.58m이며, 내측 홍예의 높이는 4.68m, 폭은 5.18m이다. 홍예 내부 통로의 폭은 5.16m이고, 홍예 대석의 높이는 2m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계 단층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사각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내림마루에는 양성마루를 하고 잡상을 설치하였으며, 바닥은 중앙 칸만 장마루를 설치하였다. 문루 바깥 사방에는 총안이 없는 전돌 여장을 둘렀으며, 좌우 안쪽에 등성계단과 협문을 마련하였다. 여장의 높이는 1.02m, 폭은 6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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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사대문과 사소문에 관한 간략 서술.

 

 


◐ 서울의 사대문(四大門)

 

 

◎  숭례문 - 국보 1호

 

숭례문은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여 1448년(세종 30)에 개축하고, 1479년(성종 10) 다시 개축한 것을, 1962년 중수해서 오늘에 이른다.

 

남대문(숭례문:嵩禮門)은 오행상 火요, 禮를 상징한다.  숭(崇)자는 원래 염(炎)자와 同一하며, 비상(飛上)을 상징한다. 이는 궁궐을 직면하는  관악산이 불 산이라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함이다. 지금 광화문 앞의 해태상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남대문.

 

도성의 문의 현판은 모두 가로로 쓰여져 있으나, 숭례문은 세로로 쓰여져 있다. 이것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것이다. 바로 보이는 관악산이 불꽃모양을 한 화산의 형태이므로 경복궁에 화재가 나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추사 김정희도 이 현판글씨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  흥인지문 - 보물 1호.

 

흥인문은 1396년에 축조했는데,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을 쌓았다. 축조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에 개건하고, 1868년(고종 5)에 개수한 것을 1958년에 보수공사를 하였다. 원래 이름은 흥인문이다. 그런데 문의 이름에 갈지(之)자를 넣은 것은 동대문이 위치한 낙산의 지형이 낮아 갈지(之)자를 넣어 약한 기운을 보완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실제 타락산의 지세가 낮아 방어에 취약하기 때문에 4대문 중 유일하게 동대문에만 옹성을 건설하였다.

 

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동쪽은 오행상 木이요, 仁을 상징한다.  동대문만 유일하게 흥인지문이라 하여 之자가 첨가된 것은, 옛부터 동쪽이 낮아 왜구의 침입을 많이 받으므로 동쪽의 기운을 높이는 뜻에서 산맥을 뜻하는 之자를 첨가 하였다고 전해온다..

 

 

◎  서대문 - 정식 명칭은 돈의문 - 현재는 없는 문

 

돈의문(서대문)은 도성 축조 때에 현재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운 듯한데, 1413년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 남쪽(옛 서울고등학교 서쪽)으로 옮겨 서전문이라 하였다가, 1422년(세종 4) 다시 그 남쪽(현 서대문 마루턱)에 이건하여 문의 이름을 도로 돈의문으로 하였다.

 


철거 전의 돈의문.

 

 

서대문(돈의문:敦義門)은 서대문은 본래 흥인지문에서 광화문을 통과하는 일직선상에 있었으나, 그 문밖의 경사가 가팔라 통행에 지장이 많다하여, 세종 연간에 약간 남쪽으로 옮겨 문을 새로 내었다.   그래서 오늘날 ‘새문안’이니 ‘신문로(新門路)’니 하는 지명의 흔적을 남기고, 그나마 일제에 의해 헐리어 없어졌다. 오행상 金이요, 義를 상징한다.

 

1711년(숙종 37) 문루를 개건하였으나,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돈의문은 시대에 따라 서전문, 신문, 새문으로 불리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서대문으로 불러왔다. 조선시대 5백년 간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었다. 조선말에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친일정권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킬 때, 바로 이 돈의문 앞에서 흥선대원군과 불량배들을 끌고 들어왔다. 일제 침략기 때 시구역 개수계획이라는 명분으로 헐리고 말았다. 일제는 돈의문의 목재와 기와를 경매하였는데 그 속에 불상과 보물이 많이 나와서 이 문을 샀던 사람은 큰 횡재를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  북대문 - 정식 명칭은 숙정문 - 평상시에는 닫혀있던 문

 

숙청문은 축조한 지 18년 만인 1413년(태종 13)에 문을 폐쇄하였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동쪽으로 약간 자리를 옮겨 지었는데, 그때에는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것을,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연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걸었다.

 


북대문-숙정문.

 

 

원래 이 북쪽문은 지(智)자를 빼고 청(淸)자를 넣어서 숙청문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북쪽문은 지형이 험난하여 사실상 사람이 왕래할 수 없었으며 특별한 행사가 없으면 항상 닫혀 있어 굳이 지(智)자를 쓸 필요가 없었다.

 

북대문(홍지문:弘智門)은 북문은 오행상 土요, 智를 상징하며, 현재 삼청동 터널 위쪽에  복원해 놓은 숙정문(肅靖門)이다. 그런데 이 숙정문은 본래 방위에 맞추어 문을 내기는 했지만 문의 구실을 하지는 않았다. 숙종문 이후에는 풍수설에 의해,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淫氣)가 침범하여 서울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 진다 하여, 문을 만들어 놓기만 했을 뿐, 그곳을 통해 드나들지는 않았다. 대신 숙정문에 들어 서북쪽으로 약간 비껴 오늘날 상명대학교 앞쪽에 홍지문(弘智門)을 내고 그쪽을 통해 다니게 되었다

 

 


 

◐ 서울의 사소문(四小門)

 

◎  창의문 - 북대문의 역할을 했던 문

 

도성 4소문의 하나로 태조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 풍수설에 따라 숙정문과 함께 폐쇄되었다. 현재의 문루는 영조17년(1741)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목조 문루는 튼튼하고 정교하며, 석문은 아담하다. 문에는 지금도 성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 일대를 자하동이라고 하였으므로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현재 서울의 4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원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문 위에는 나무에 새긴 닭을 걸어 두었는데, 문 밖의 땅이 지네와 비슷한 모양이어서 닭을 매달아 지네의 기운을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항상 숙정문이 닫혀있어 북쪽의 대문역할을 했었다.

 

◎  광희문 - 시체가 드나들던 문

 

흥인지문(동대문)과 숭례문(남대문) 사이에 있는 4소문의 하나로 태조 5년(1396) 도성을 쌓을 때 창건되었다. 개천수구와 가까이 있어 수구문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문을 통하여 죽은 사람의 시신이 많이 나간다고 하여 시구문이라고도 하였다.

 

소의문(서소문)과 함께 서울 백성들이 죽으면 상여에 싣고 시체를 한양 밖으로 운반하던 저승문이었다. 조선 초에는 도성에서 한강나루로 가려면 광희문을 이용했는데 거리가 멀어 불편했다. 그래서 남산 타워호텔 부근에 새로운 남소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남쪽의 소문이 두 개였던 것이다. 현재의 문은 94년에 복원한 것이다.

 

◎  혜화문 - 잘못 복원된 문

 

홍화문을 동소문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문으로는 동북지역 관민들과 여진족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그런데 성종이 14년(1483) 창경궁을 짓고 그 동문을 홍화문이라 불러 동소문과 혼란을 일으키자 중종 6년(1511) 동소문의 이름을 혜화문으로 바꾼다. 본래 이 혜화문은 문루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나서는 한동안 문루가 없는 암문 형태의 ‘무지개 문’으로 남아 있었다.

 

현재 혜화로터리에 있다. 다른 문들은 모두 바닥에 용이 그려져 있지만 이 문은 바닥에 봉황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새떼가 많아서 새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 중의 왕인 봉황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이 문은 새로 만들 때에 새로 난 신작로로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해 절벽 위에 세워졌다

 

◎  소의문 - 조선시대 죄수들을 처형하던 사형장

 

소덕문은 도성의 서남쪽 숭례문과 돈의문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고 도성의 4소문 중의 하나로서 태조 5년(1396)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건설되었다. 그러나 성종 3년(1472) 소의문이라고 개칭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종이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에게 ‘휘인소덕’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는데 이 시호와 소덕이라는 문 이름이 같으므로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소덕문을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소덕문도 태조 5년(1396)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 그 시기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문루가 없었던 것을 영조 19년(1743)에 금위영에 명하여 동년 8월에 문루를 건축하였다. 도성내의 시체는 광희문과 소의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으므로 도성내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시체는 모두 이 문을 통하여 나갔다. 500여 년을 내려오던 이 소의문은 일제 때인 1914년 도시 계획이라는 구실로 모조리 철거하였고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서소문동이라는 동명만이 남아 그 옛날의 소의문을 연상케 한다.


서소문 공원은 죄인을 처형하던 장소였다. 조선시대 반역 등 국가의 중대범죄를 저지른 죄인은 서소문 밖에서 목을 베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죽이고 왕에 오르는 것을 끝가지 반대한 사육신이 죽은 장소도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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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한번 가보시구요~~

 

사대문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정남에 숭례문(崇禮門:지금의 서울 남대문),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興仁門:지금의 서울 동대문),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을 세웠다.

서울의 네 대문.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청문

서울흥인지문(동대문) 서울興仁之門(東大門)
지정번호
:
보물 제1호
지정연월일
:
1963년 1월 21일
  시 대
:
조선 고종 6년(1869)
  규모·양식
:
1동, 정면 5칸, 측면 2칸, 2층의 우진각지붕 다포집
  재 료
:
석조기단 목조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69

서울흥인지문은 서울성곽의 동쪽 문으로서 인(仁)은 오행의 목(木)에 속하고 목은 동(東)에 해당하므로 흥인(興仁)은 곧 동방을 의미한다고 하며, 흔히 동대문(東大門)이라고 부른다. 또한 '흥인문'이 '흥인지문'으로 언제 개칭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철종 말까지의 ≪실록≫에는 흥인지문이란 명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 때에 고쳐 짓고 흥인문을 흥인지문으로 개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지문은 문을 창건한 지 50여 년이 지난 문종 원년(1451)과 단종 원년(1453)에 일부 보수가 있었고, 그 후 400여년이 지난 고종 5년(1868)에 개축한 기록이 있다. 당시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공사를 완료한 다음 광화문 밖 좌우편에 나열되어 있는 의정부·호조·이조·중추부·사헌부 등의 관아를 중수하는 동시에 흥인문을 개수하였는데, 《고종실록》에는 동대문 전체가 썩고 상하여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개수하였다고 한다. 1958년 동대문 보수공사를 할 때 문루 천장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공사를 담당, 고종 5년(1868) 10월 2일에 착공하여 고종 6년(1869) 2월 20일 정초(定礎), 3월 11일에 상량하고 같은 달에 완공하였는데, 문루가 매우 낮아 문지(門址)를 8척 돋우고 그 위에 새로 홍예(虹霓)를 쌓고 초루(譙樓)를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고종 5년의 흥인문의 공사는 완전히 개건한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옹성도 고종 5년의 문루 건축 때에 새로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그 형태가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높은 기둥을 일렬로 배치하고 위·아래층의 큰 들보는 모두 이 기둥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천장은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흥인지문은 다른 문과는 달리 옹성(甕城)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은 곡성(曲城) 또는 치성(雉城)이라고 하며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문을 둘러쌓은 작은 성으로서 적을 방어하고 지키기에 편리한 것이다. 동대문의 옹성은 태조 6년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공하였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이 옹성을 쌓아서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흥인지문 주변의 성벽은 일제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융희 2년(1908) 3월부터 동대문 북쪽과 남쪽의 성벽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광무 3년(1899) 5월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가 개통되면서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숭례문(서울 남대문)

요약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 성문.

서울도성의 4대문 중 남쪽에 있어서 남대문이라고 불린다.

설명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있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 성문.

서울도성의 4대문 중 남쪽에 있어서 남대문이라고 불린다. 이 성문은 전형적인 다포양식으로 창건연대를 알 수 있으며, 견실한 목조건축물의 수법을 보여주는 한국 건축사상 중요한 건물의 하나이다.

1396년(태조 5) 축조된 서울도성의 정문으로 1398년 준공되어 1447년(세종 29)과, 1479년(성종 10)에 각각 개수, 증축되었으며, 1961~1962년에 해체수리되었다.

화강암으로 된 홍예형(虹霓形)의 누기(樓基)와 마름석축으로 이루어진 기층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판문에 철갑을 씌운 두 짝의 문이 달려 있다. 석축기단 윗면에는 전돌로 쌓은 여장(女墻)을 돌리고 동서 양쪽에 협문을 1개씩 두어 계단을 통하여 오르내리게 하였으며, 문의 앞뒤와 여장 밑에 석루조(石漏槽)를 각각 4개씩 설치하였다. 기단 양측은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순종 2) 길을 내기 위하여 헐었다.

건물의 평면은 아래층·위층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건물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중앙칸을 제외하고는 흙바닥이며 위층은 널마루이다. 기둥은 모두 굵직한 두리기둥이며 위층에는 기둥 사이의 중방(中枋)과 창방(昌枋) 사이에 작은 창이 나 있다. 공포는 외삼출목칠포작내이출목오포작(外三出目七包作內二出目五包作)이고, 천장의 가구(架構)는 연등천장이다. 지붕은 아래위층이고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씌우고 추녀마루에 잡상(雜像)과 용두를 올려놓았고 용마루 양끝에 취두(鷲頭)를 올린 우진각지붕이다.

《지봉유설》에 <숭례문(崇禮門)>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 국보 제1호.

숙청문(북대문)
서울 4대문 중의 하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한다.

설명

서울 4대문 중의 하나.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한다. 백악산(白岳山) 동령(東嶺)에 있으며 1395년(태조 4)에 삼청공원 뒤에 건립한 북문이다. 1413년(태종 13) 최양선(崔揚善)이 풍수지리학상 이곳의 문 폐쇄를 주장하여 이후 길에 소나무를 심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이 문은 산중턱에 있어 교통에 지장이 없었으므로 닫아두었으며, 가끔 한재(旱災)가 심할 때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여는 풍속이 있었다. 1976년 대통령의 특명으로 복원할 때, 문루를 건축하고 《중종실록》 이후 역대 각 실록에 기록된 이름인 <숙정문(肅靖門)>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다락 없는 암문(暗門)인 것이 특색이며 거의 닫혀 있었기 때문에 창의문(彰義門;紫霞門)을 이에 대신하여 북문이라 하였다.

돈의문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있던 조선시대 성문.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 하며 1915년 철거되었고, 그 자리는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설명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있던 조선시대 성문.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 하며 1915년 철거되었고, 그 자리는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으로 보아 견고한 돌축대 중앙 위쪽에 홍예문을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했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이나 1413년에 폐쇄되었다가 태종 때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 출입문으로 사용했는데, 세종 때 서전문은 헐고 돈의문을 세웠다. 이 문은 숙종 때 개건되어 조선시대 내내 서울 북서쪽의 관문으로 쓰였다.
 
 
 
여기서 퍼온 것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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