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화
한글창제
조선시대 문화적 성과 중 최고인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로 알려져 있는 한글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는 이두나 구결 등으로 한문에 토를 달아 의사표시를 하기도 했으나 일반 백성은 대개 문맹의 상태였다.
이에 세종은 누구나 쉽게 문자를 배워 쓰도록 하기 위하여 28자로 된 훈민정음을 창제하셨고 (1443년(세종 25)), 그 뒤 오랜 연구와 실제경험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 후 《용비어천가》를 비롯, 불교·유교의 여러 경전 및 농서·병서 등이 한글로 번역, 출판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한글소설·한글시가가 지어지면서 한글은 국자(國字)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문학
훈민정음이 창제 후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창작됨으로써 국문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고려 중기에 발생한 시조는 조선시대에 박인로·신흠·윤선도 등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박인로의 <조홍시가>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이 유명하다.
후기에 이르면서 서리나 기생 등으로 작가 층이 확대되었고, 영남의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규방가사가 성행하였다.
한편 국문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홍길동전》의 뒤를 이어 《장화홍련전》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옥루몽》 등의 많은 국문소설들이 많이 나왔다.
판소리는 18세기 호남지방의 무가에 기원을 두고 발생, 신재효가 사설을 정리하면서 급성장하여 사대부와 서민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김시습은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을 지었으며,박지원이 《열하일기》를 비롯, 당시 사회를 풍자한 <양반전> 등을 발표하였다.
미술
조선 초기의 그림은 양반들이 그린 북종화 계통의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남종화로 학풍이 바뀌어갔으며 한국적 특징을 나타내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후기에는 또한 수묵화를 주로 하는 문인화풍이 유행하였으며, 김홍도와 신윤복은 각자 독특한 풍속화를 개척하였다.
서예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송설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 들어와 김정희가 중국서예의 모방에서 벗어나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였다.
도자기 제조기술도 발달하여 우수한 분청사기와 백자 등이 많이 나왔다. 특히 백자는 담백하고 검소한 아름다움을 지닌 조선의 대표적인 공예작품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도시의 궁궐과 성곽·성문·학교 등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조선시대의 건축물은 대개 규모가 작고 소박하면서도 주위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서울의 숭례문, 개성의 남대문,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 등을 들 수 있다.
음악·연극·무용
세종 때 박 등은 악기를 새로 만들거나 개량하고, 악곡과 악보를 새로 정리하여 아악을 대성시켰다. 성종 때는 《악학궤범》, 그 뒤에는 《악장가사》 등의 음악서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궁중음악과는 별도로 민간에서는 가사·시조·가곡 외에 각 지방의 민요와 판소리 등이 발달하였다. 무용은 중기 이후 무당춤·탈춤·농악·승무 등 인간적인 내용을 갖춘 표현적인 춤으로 발전하였고, 탈놀이(가면극)인 산대놀이와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 등은 후기에 널리 유행하였다.
조선의 과학·기술
조선 초기에는 천문기기의 제작을 비롯한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유교의 정치철학에 있어서 왕도정치는 천도·천리와 합치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문기상의 변화는 임금의 덕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으로 여겼었고, 현실적으로도 주로 토지경제에 의존하는 농본사회였으므로 농업생산을 좌우하는 천문역상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종 때에는 중국의 역법을 참고하여 《칠정산내편》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었고, 이천·장영실에게 대소의 간의, 혼천의등 여러 천문기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특히 자격루와 현종 때 제작된 혼천시계 등은 매우 정밀하고 우수한 기기들로서 그때까지 알려진 모든 물리적 원리와 기술을 망라한 것이었다.
1442년(세종 24)에는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 각 도는 물론 군현에까지 배치하여 전국의 강우량을 측정하였다.
중농정책과 관련하여 농학이 발달하였는데, 세종 때 한국의 풍토에 맞는 농사기술과 품종의 개량을 소개한 《농사직설》이 편찬되었고, 후기에도《색경》 《농가집성》 《임원경제지》 등 많은 농서가 간행되었다.
농업기술에 있어서도 큰 발전이 있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 시비법이 개발됨에 따라 휴한법을 극복하고 연작법을 보급시켰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농업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수전은 직파법에서 이앙법으로, 한전(旱田)은 농종법에서 견종법으로 바뀌어갔다. 이앙법의 보급으로 삼남지방에서는 논에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널리 행하여졌다.
의학·약학에 있어서는, 세종 때 국산약재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향약집성방》과 의학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의방유취》가 편찬되었고, 1613년(광해군 5)에는 동양에서 가장 우수한 의학서의 하나로 꼽히는 허준의 《동의보감》이 총 23편으로 간행되었다.
이와 같은 의학서들과 함께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등 의사·의학자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의 왕권확립기와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기에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이 활발하게 펼쳐졌는데, 이에 따라 활자의 개량과 인쇄술의 발달이 촉진되어 계미자·갑인자등 정교한 활자가 많이 개발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서는 화차·비격진천뢰·거북선 등 여러 가지 무기가 개발, 주조되었는데 특히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서 임진왜란에서 크게 위력을 발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