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문화재

공주 문화재

작성일 2012.08.12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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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있는데 공주 문화재에 대해서 하고 있어요. 그래서 공주 문화재에 대한 사진과 설명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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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문화재 90가지를 올려드려요^^

 

(공주의 문화재)

 

1.계유명삼존천불비상


종 목  국보  제10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서광암(瑞光庵)에서 발견된 작품으로, 비석 모양의 돌에 불상과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사각형의 돌 전체에 불상을 새겼는데, 앞면의 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나머지 면에는 작은 불상을 가득 새겨 놓았다.


삼존불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반원형의 기단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4각형의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 옆에 협시보살이 서 있는 모습이다. 본존불은 옷을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상체가 많이 닳아서 세부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 특징적인 것은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이 무릎 아래로 길게 흘러 내려와 대좌까지 덮고 있다는 점이다. 양 옆의 협시보살도 손상이 많아 세부 모습을 살피기는 어렵지만, 무릎 부분에서 옷자락이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어 삼국시대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들의 머리 주위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조각된 머리광배가 다른 부분에 비해 파손이 덜 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삼존불상 외에도 사각형의 돌 전체에 일정한 크기의 작은 불상들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깨진 부분에 있었을 불상들까지 감안한다면 천불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다. 이들 작은 불상들은 모두 머리광배를 지니고 있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이 작품은 삼존불 좌우에 새겨져 있는 글을 통해 볼 때 신라 문무왕 13년( 67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유민들이 망국의 한과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작품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무령왕 금제관식

 

종 목  국보  제154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쌍이다.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이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을 뚫어서 덩굴 무늬를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 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 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두 가닥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변화를 주고있다. 앞면에는 전체에 걸쳐 구슬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았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서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백제 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중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3.무령왕비 금제관식

 

종 목  국보  제155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관(冠) 장식으로, 모양과 크기가 같은 한 쌍으로 되어 있다.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예리한 도구로 도려내어 무늬를 만들었는데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중심부의 연꽃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덩굴무늬가 있고 병 위에는 활짝 핀 꽃 한송이가 있다.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冠)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며,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백제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4.무령왕 금제심엽형이식

 

종 목  국보  제156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금 귀고리 한 쌍으로 길이는 8.3㎝이다. 왕의 널(관)안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호화로운 장식이 달려있다.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2가닥의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다.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 장식 끝에 금판으로 된 커다란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이 장식은 무늬가 없어 간소하지만 앞·뒷면에 타원형의 작은 잎을 하나씩 붙여 변화를 주었다. 옆으로 보면 안이 굽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통형의 중간 장식에는 금선과 금구슬을 이용해 장식한 마개가 있고, 서로 마주보게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둘렀다. 다른 한 가닥은 여러 개의 작은 고리로 이루어진 구슬 모양의 장식에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연결하고, 끝에는 금모자를 씌운 푸른 곱은 옥을 매달아 금색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런 2줄의 귀고리는 경주 금령총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5.무령왕비 금제수식부이식

 

종 목  국보  제157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귀고리 2쌍으로 길이는 11.8㎝, 8.8㎝이다. 왕비의 귀고리로,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작은 장식들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한 쌍은 복잡한 형식으로 길고 짧은 2줄의 장식이 달려 있고, 다른 한 쌍은 1줄로만 되어있다. 앞의 귀고리 중 긴 가닥은 금 철사를 꼬아서 만든 사슬에 둥근 장식을 많이 연결하였으며, 맨 밑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8개의 둥근 장식을 달고 그 아래 탄환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짧은 줄의 수식은 다른 한 쌍의 것과 거의 같은 수법이나 탄환 장식은 달지 않고, 잎사귀 모양의 장식과 담록색의 둥근 옥을 달았다. 

 

6.무령왕비 금제경식

 

종 목  국보  제158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비의 목걸이로, 길이는 각각 14㎝, 16㎝이다. 9마디로 된 것과 7마디로 된 것 2종류가 있는데, 발굴 당시 7마디 목걸이가 9마디 목걸이 밑에 겹쳐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활 모양으로 약간 휘어진 육각의 금막대를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하여 고리를 만들고 다른 것과 연결시켰다. 고리를 만들고 남은 부분을 짧은 목걸이의 경우 10∼11회, 긴 목걸이는 6∼8회 감아서 풀리지 않게 하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된 금막대마다 고리를 만들고 마무리를 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2개의 목걸이 모두 한쪽 끝에 몸에 걸기 위한 작은 고리가 끼워져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은 간단한 구조를 하고있다. 현대적 감각과 함께 매우 세련되어 보이는 작품이다.

 

7.무령왕 금제뒤꽂이

 

종 목  국보  제159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뒤꽂이 일종의 머리 장신구이다. 무령왕릉 나무널(목관) 안 왕의 머리에서 발견되었으며, 길이는 18.4㎝, 상단의 폭은 6.8㎝이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역삼각형 모양이며, 밑은 세가닥의 핀 모양을 이루고 있어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삼각형의 윗부분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고, 3개의 꼬챙이쪽은 긴 꼬리처럼 되어 전체 모습이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양 날개쪽 좌우에는 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찍었고, 그 아래는 서로 대칭으로 덩굴무늬를 빈틈없이 메꿔 놓았다. 새의 머리와 날개 부분의 테두리는 끌 끝으로 찍은 작은 점들이 열지어 있다. 여기서 사용된 문양은 모두 뒤에서 두들겨 솟아 나오게 한 타출법(打出法)을 사용하였고 ,세부 표현에는 선으로 새기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의 머리부분에서 발견되었고, 끝이 3개로 갈라진 점으로 보아 의례 때 쓰인 머리 장식품으로 보인다.

 

8.무령왕비 은제팔찌

 

종 목  국보  제160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 왕비의 나무널(목관)내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제 팔찌로, 바깥지름 8㎝, 고리지름 1.1㎝이다.

 

팔목이 닿는 안쪽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겼고, 둥근 바깥면에는 발이 셋 달린 2마리의 용을 새겼다. 용의 조각은 세밀하지는 않으나 힘이 있어, 묵직한 팔찌와 잘 어울리고 있다.

 

한 개의 팔찌 안쪽에 새긴 글로 보아 왕비가 죽기 6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만든 사람의 이름과 무게가 쓰여있다.

 

전체적인 윤곽이 깔끔하고 중후하며, 만든시기와 작가, 작품과 직접 관계된 글이 있는 예로, 고대 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9.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종 목  국보  제161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동거울로 청동신수경, 의자손수대경, 수대경 3점이다.

 

청동신수경은 ‘방격규구문경’이라는 중국 후한의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거울 내부에는 반나체 인물상과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한나라의 거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의자손수대경은 중국 한대의 수대경을 본떠 만든 복제품이다. 거울 중앙의 꼭지를 중심으로 9개의 돌기가 있고, 안에는 크고 작은 원과 7개의 돌기가 솟아있다. 내부 주위의 테두리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선명하지 못하여 알아볼 수 없다.

 

수대경 역시 한나라 때 동물 문양을 새겨 넣은 수대경을 본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 거울에 비해 선이 굵고 무늬가 정교하지 못하다. 

 

10.무령왕릉 석수


종 목  국보  제162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만들어진 석수이다.

 

석수란 돌로 만든 동물의 상으로 좁게는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워두거나 무덤 안에 놓아두는 돌로 된 동물상을 말한다.

 

무령왕릉 석수는 높이 30.8㎝, 길이 49㎝, 너비 22㎝로 통로 중앙에서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다.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다. 몸통 좌우, 앞·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무덤 수호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11.무령왕릉 지석


종 목  국보  제163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이 지석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뒷면에는 매지문(땅을 샀다는 문서)을 새겼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던 것이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2.무령왕비 베개


종 목  국보  제164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무령왕릉 목관 안에서 발견된 왕비의 머리를 받치기 위한 장의용 나무 베개로, 위가 넓은 사다리꼴의 나무토막 가운데를 U자형으로 파내어 머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표면에는 붉은색 칠을 하고 금박을 붙여 거북등 무늬를 만든 다음, 칸칸마다 흑색·백색·적색 금선을 사용하여 비천상과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봉황·어룡·연꽃·덩굴무늬를 그려 넣었다. 베개의 양 옆 윗면에는 암수 한 쌍으로 보이는 목제 봉황머리가 놓여 있는데, 발굴 당시에는 두침 앞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왕의 머리 받침은 거의 부식되어 두 토막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형체를 알 수 없다.
 


13.무령왕 발받침


종 목  국보  제165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무령왕릉 목관 안에서 발견된 장의용 나무 발 받침으로 왕의 발 받침대이다.

 

윗부분이 넓고 아랫부분이 좁은 사다리꼴 통나무의 중앙을 W자로 깊게 파서 양 발을 올려놓게 만들었다. 전면에 검은색 옻칠을 하고 폭 0.7㎝정도의 금판을 오려 거북등 무늬를 만들었으나 일부는 떨어져 없어졌다. 6잎의 금꽃을 거북등 무늬 모서리와 중앙에 장식하고, 꽃판 가운데에 옛날 부인의 머리장식의 하나인 보요를 매달아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14.공주 의당 금동보살입상

 

종 목  국보  제247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1974년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보살상으로, 높이는 25㎝이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쓰고 있는데, 가운데에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어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마는 머리카락이 반쯤 내려와 덮고 있으며, 양 옆으로 땋은 머리는 귀를 덮고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다. 4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눈·코·입을 큼직하고 시원스럽게 표현했으며,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긴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그 목걸이에 연결된 구슬띠가 가슴 아래로 내려오다가 두 갈래로 갈라져 양쪽 무릎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체에 밀착된 얇은 옷은 넓은 양 어깨로부터 내려와 배 아래부근에서 X자로 교차되었다. 팔에 걸친 옷자락은 양 옆으로 내려와 대좌를 덮으면서 돌출되었다. 옷자락에 표현된 주름은 조각이 깊고 힘차게 되어있어 평온한 얼굴 표정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양 손에는 팔찌를 끼고 있는데, 오른손은 가슴부분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연꽃봉오리를 잡고 있으며, 아래로 내린 왼손에는 보병을 쥐고 있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는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는 엎어놓은 8장의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튀어나온 부분의 도금이 일부 벗겨졌을 뿐 금색이 우수하고 출토된 곳이 확실한 보살상으로 안정된 표현기법과 배꼽부분에서 교차된 구슬장식, 둥근 연꽃무늬 대좌 양식 등에서 7세기 백제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5.갑사 삼신불 괘불탱

 

종 목 국보 제298호  

지 정 일 1997.09.22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갑사

시 대 조선시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 그림은 길이 12.47m, 폭 9.48m의 크기로 전체적으로 상·중·하 3단 구도를 이루고 있다. 맨 윗부분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 제자상, 금강역사상 등이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비로자나불, 석가, 노사나불 등 삼신불을, 맨 아래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 사천왕상, 사리불 등이 묘사되어 있다.

 

가운데부분의 비로자나불은 등뒤로 광배를 가지고 있으며 둥근 얼굴에 두 어깨를 감싼 옷을 걸치고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싼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큰 얼굴과 큼직한 손에 비해 몸은 다소 왜소하며 어깨에 비해 무릎 폭이 넓은 모습이다. 비로자나불의 왼쪽에 있는 노사나불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려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의 석가불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의 손모양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비로자나불과 석가불은 기둥처럼 솟은 특이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맨윗부분은 붉은 색의 두광을 가진 관음·세지보살과 십방제불, 나한 등이 화려한 빛깔의 구름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천상세계를 만들고 있다. 비교적으로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맨아래부분은 사천왕과 문수보살·보현보살, 사리불이 배치되어 있다. 채색은 녹색, 홍색, 황색과 같은 중간 색조와 금으로 채색하여 화면전체를 밝고 화려하게 나타내었다.

 

이 괘불은 효종 원년(1650)에 제작되었는데 중단의 삼신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또한 그림에 괘불 조성에 필요한 많은 물품의 시주자를 적어놓고 있어 17세기 중반의 생활상과 사찰의 재정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6.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종 목 국보 제299호

지 정 일 1997.09.22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8 신원사

시 대 조선시대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노사나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길이 11.18m, 폭 6.88m 크기의 이 괘불은 노사나불이 단독으로 중생을 설법하는 모습으로,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10대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다. 단독으로 그려진 노사나불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손은 신체에 비해 큰 편으로 손바닥을 들어올려 설법하는 모습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녹색과 홍색, 분홍색 등을 이용하여 옷을 표현하였고, 5가지색으로 빛을 형상화하여 주변 배경을 표현하였다. 중심 불상의 좌우에는 각기 다른 물건과 두광이나 옷색의 차이 등을 이용해 10대보살들을 표현하고 있다. 보살 위의 10대제자들은 서로 다른 얼굴 방향과 표정, 각기 다른 옷과 물건, 자연스러운 동작과 모습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인조 22년(1644)에 제작된 이 괘불은 짜임새있는 구도, 섬세한 표현, 밝게 표현된 색조 등이 세련된 솜씨로 표현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화양식을 보여주는 17세기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17.중동 석조


종 목  보물  제14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국립공주박물관 정원에 있는 백제시대 석조로, 사찰에서 연꽃을 담아 장식했던 것이다.


원래는 공주시 반죽동의 대통사 터에 공주반죽동석조(보물 제149호)와 함께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일본군이 말구유로 쓰기 위해 옮겨가 제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1940년 이 곳으로 옮겨올 당시 중동초등학교에서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중동석조’라 부르게 되었다.


규모에 있어서 반죽동 석조보다 약간 작을 뿐 양식이나 조각 수법이 동일하여, 어느 한 건물 앞에 한 쌍으로 두기 위하여 동시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믿어진다.


석조를 받치고 있는 받침 기둥은 일본군에 의해 깨어져 없어지고, 이후 반죽동 석조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었는데, 원기둥에 연꽃을 둘러 새긴 모습이다. 석조는 굽이 높은 사발 모양으로 입구 가장자리에 굵은 돌기를 돌렸다. 바깥 면에는 2줄의 작은 띠를 돌려 새기고, 띠 위에 일정하게 연꽃을 장식하였는데 반죽동 석조에 비하여 많이 닳지 않아 문양이 훨씬 뚜렷하다.


대통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 7년(529)에 창건된 사찰이므로, 이 석조는 그 제작년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백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석조의 형태나 연꽃무늬는 백제의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므로 그 가치는 반죽동석조와 아울러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반죽동 석조


종 목  보물  제14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중동석조(보물 제148호)와 같이 대통사터에 있었던 백제의 유물로, 절에서 주로 연꽃을 담아 장식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940년에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중동석조와는 규모만 다를 뿐 양식이나 조각수법이 거의 같아서, 두 석조는 어느 한 건물 앞에 한 쌍으로 두려고 동시에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조는 굽이 높은 사발을 확대한 모양으로 네모난 바닥돌 이외에는 거의 동그란 구조이다. 바닥돌 위에 원기둥으로 된 받침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둥글고 큰 석조를 얹었는데, 석조는 화강암의 안을 파내어 만든 것이다.


받침 기둥에는 전형적인 백제 수법으로 12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겨 두었는데, 이 무늬는 공주지방에서 나온 기와무늬와도 같은 모양이다. 그 위로 놓여있는 석조는 입구 가장자리에 굽처럼 넓적한 띠를 돌리고, 중앙에는 2줄의 띠를 돌렸으며 띠에는 8개의 연꽃잎을 가진 꽃송이를 사방에 도드라지게 새겨 장식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직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연꽃잎을 장식한 받침기둥 위에 놓인 이 석조는 바깥 면에도 풍만한 연잎과 단아한 띠를 돌려 귀족적인 느낌을 준다. 현재 비바람에 의하여 장식무늬가 많이 닳아 있다.
 

 

19.반죽동 당간지주

 

종 목 보물 제15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죽동 301

시 대 통일신라

 

기도나 법회 등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사찰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성덕을 표시하는 기를 당이라 하며, 이를 달아매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이 장대를 양옆에서 지탱하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대통사의 옛터에 남아 있는 이 당간지주는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바깥쪽 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굵은 띠 모양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기둥머리 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았으며, 안쪽 위·아래 2곳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네모난 구멍을 파 놓았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지주의 받침돌과 한쪽 기둥의 아래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형태가 간결하다. 이 일대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백제의 유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받침돌에 새겨진 안상을 조각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20.갑사 철당간 

 

종 목  보물  제25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8 
시 대 통일신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갑사 동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네 면에 구름무늬를 새긴 기단 위로 철당간을 높게 세우고 양 옆에 당간지주를 세워 지탱하였다. 당간은 24개의 철통을 연결한 것인데 원래는 28개였으나 고종 30년(1893) 벼락을 맞아 4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당간을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으며 꾸밈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안쪽에 구멍을 뚫어서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다.

 

기둥머리의 곡선과 기단부의 단순한 조각이 잘 어우러져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 전기인 문무왕 20년(680)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의 양식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21.갑사 승탑

 

종 목  보물  제25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9 
시 대 고려시대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며 3단의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높직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은 아래·가운데·윗받침돌로 나뉘어지는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위층으로 갈수록 차츰 줄어든다. 아래받침돌에는 사자·구름·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으며, 거의 원에 가까운 가운데받침에는 각 귀퉁이마다 꽃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을 새겨 놓았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탑 몸돌 4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을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을 표현하는 등 지붕 모양을 정교하게 모방하고 있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후에 새로 만든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힘차고 웅대하나, 윗부분으로 갈수록 조각기법이 약해졌다. 특히 지붕돌이 지나치게 작아져 전체적인 안정감과 균형을 잃고 있다.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에 조각된 각종 무늬와 기법 등은 고려시대 부도탑들 중에서도 우수작으로 손꼽을 만하다.

 

 

22.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


종 목  보물  제26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시 대 고려시대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요사상으로 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불교경전이다.

 

이 책은 검푸른 종이에 금·은가루를 사용하여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있다. 우아한 무늬가 표현된 표지에는 금색으로 제목이 쓰여 있으며, 권의 첫머리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가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본문은 은색글씨로 바르고 근엄하게 쓰여져 있다.

 

연도를 측정할 만한 기록이 없으나 글씨의 풍이 고려 후기의 법주사자정국존비(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나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글씨와 표지의 장식이 훌륭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23.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


종 목  보물  제27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시 대 고려시대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된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간행된 경전이다.

 

이 책은 검푸른 종이에 금가루를 사용하여 불경을 옮겨 쓴 것으로, 묘법연화경 7권 가운데 권 제6에 해당한다.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4.8㎝, 가로 10.6㎝이다. 책의 끝부분에 있는 기록을 통해 고려 우왕 14년(1388)에 노유린의 시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표지 문양 및 글씨 등이 세련되지 못하여 전체적인 품격은 떨어지나 책의 끝부분에 간행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가치가 크다.

 

24.갑사 동종

 

종 목  보물  제478호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갑사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선조 17년(1584)에 만들어졌다.

높이 131㎝, 입지름 91㎝로 전체적으로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부터 입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있다. 종 꼭대기에는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다.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범자를 촘촘히 새겼다. 그 아래 4곳에는 사각형모양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는 가운데가 볼록한 연꽃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종의 몸통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따로 두었고, 그 사이에는 구름위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서 있다. 종 입구 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다.

 

이 종은 일제시대 때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되었다가, 광복 후 갑사로 옮겨온 민족과 수난을 같이 한 종이다.

 

 

25.월인석보목판


종 목  보물  제582호 
지 정 일 1974.12.3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갑사 
시 대 조선시대

 

이 판목은『월인석보』를 새겨 책으로 찍어내던 판각으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유일한 판목이다. 『월인석보』는『월인천강지곡』과『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연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석보상절』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 29년(1447)에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은 것이다.

 

『월인석보』는 본래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현재는 21권 46매만 남아있다. 이 판목은 선조 2년(1569) 충청도 한산에 사는 백개만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충남 논산 불명산 쌍계사에 보관하였다. 현재 갑사에 소장되어 있는데 70여 년 전에 입수하였다고 한다. 계수나무에 돋을새김으로 새겼고, 판목의 오른쪽 아래에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의 이름이 있다. 내용표기에 있어서는 방점과 글자획이 닳아 없어져 변모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불교대장경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15세기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국어변천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26.마곡사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799호  

지 정 일 1984.11.3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마곡사

시 대 고려시대

 

마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 김구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절마당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았고,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현재는 5층 지붕돌에만 1개의 풍경이 남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중국 원나라의 라마탑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길쭉한 감이 있어 안정감은 적으나 당당한 풍채로 버티고 서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머리장식의 독특한 모습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후기 즈음으로 여겨진다. 즉 고려 후기 당시 원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라마교 계통의 문화도 고려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탑은 그 문화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27.마곡사 영산전


종 목  보물  제800호 
지 정 일 1984.11.3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6-2 
시 대 조선시대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를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건물은 천불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키면서(1651) 고쳐 지은 것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해탈문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앞쪽에 걸린 현판은 세조의 글씨라고 하며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몄다.

 

짜임새를 잘 갖추고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 건축 양식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8.마곡사 대웅보전

 

종 목  보물  제801호 
지 정 일 1984.11.3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마곡사 
시 대 백제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킬 때(1651)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1층이 앞면 5칸·옆면 4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 위에 연꽃을 조각해 놓아 조선 중기 이후의 장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건물 2층에 걸려 있는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한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형태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을 2층 대들보와 연결하여 만들었고 마루도 널찍해 공간구성이 시원해 보인다.

 

조선 중기 2층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9.마곡사 대광보전

 

종 목  보물  제802호 
지 정 일 1984.11.3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마곡사 
시 대 백제


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신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해탈문·천왕문과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건물로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불에 타버렸던 것을 조선 순조 13년(18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앞면 5칸에는 3짝씩 문을 달았는데 문살은 꽃 모양을 섞은 조각으로 장식하였고 가운데 칸 기둥 위로 용 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고, 불단은 서쪽으로 마련하였는데 불단 위에는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닫집을 정교하게 꾸며 달았다.

 

안팎으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0.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


종 목  보물  제1260호 
지 정 일 1997.08.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마곡사 
시 대 조선시대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열 때 사용하던 대형 불화를 말하며, 이 괘불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그린 것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제자,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천자, 아수라, 용왕 등이 좌우 대칭으로 화면 가득히 그려진 모습이다. 석가모니불은 용화수가지를 양 손에 받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손이 다른 신체 부분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둥근 머리광배와 배 모양의 몸광배로 구분되는데 머리광배에는 작은 부처 여러 구를 그려 넣었다.

 

석가모니불을 좌우에서 협시하고 있는 제화갈라보살을 비롯한 6대보살은 관음·대세지·문수·보현보살로 구성되었으며 10대 제자상과 보향·명월천자가 상단 좌우 끝에 그리고 아수라 가루라 용왕들이 배치되어 있다. 남아 있는 글로 보아 시주자를 비롯한 여러 승려와 일반인들이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석가탄신일 외에도 수륙재와 49재에 쓰였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대형화면에 나타난 중후한 형태·화려한 색채 등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으로 본존불을 중앙에 크게 묘사하고 다른 무리들을 주위에 작게 배치하여 석가모니가 일반 대중들을 압도하는 듯한 인상을 전달하고 있다.

 

삼신불 가운데 석가불을 노사나불과 동일하게 보살형으로 형상화한 독특한 형태의 그림이며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이란 석가의 존명과 함께 각 상들의 명칭도 기록되어 있어 불화 연구에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다.

 

 

31.청량사지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284호

지 정 일 1998.09.15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시 대 고려시대

 

청량사터에는 칠층석탑과 오층석탑 등 2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두 탑을 가리켜 오누이탑 혹은 남매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 상원이라는 승려가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처녀를 업어다 주었다. 상원은 처녀와 남매로서의 관계만을 유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고, 처녀의 아버지가 그 갸륵한 뜻을 기려 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 탑은 그 중 오층석탑으로,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그 위에 둔 기단의 아랫돌은 각 4장의 돌로 짰다. 특이한 점은 기단의 가운데기둥을 별도의 돌로 끼워두었다는 것이다. 탑신의 각 층 지붕돌은 얇고 넓어서 균형과 안정감을 잃고 있다. 1·2층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2단인데, 모두 딴 돌을 끼워넣은 구조이다. 3·4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따로 한 돌씩이며, 4층의 지붕돌받침은 아래층들과 달리 1단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4층 지붕돌 위에 5층 몸돌이 있으나, 지붕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 비인오층석탑(보물 제224호)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와서 한 절에 각기 특징있는 두 가지 유형의 백제탑을 세운 것은 역사적, 미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32.청량사지 칠층석탑

 

종 목 보물 제1285호

지 정 일 1998.09.15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18

시 대 고려시대

 

1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워 두었으며, 전체적으로 폭이 좁고 길쭉한 형태이다.

기단은 각 면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을 딴 돌로 세운 점이 특이하다. 탑신은1층 몸돌의 한 면에 직사각형 모양의 감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이 2단이고 7층이 1단이며, 2·3·4층은 후대에 만든 것이라서 원래의 모습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2층 지붕돌 낙수면의 경사가 1층 보다 급하고, 2∼7층까지 몸돌이 줄어드는 비율이 그리 크지 않아 탑 전체의 안정감과 균형을 해치고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이를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익산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으로 이어지는 석탑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없어진 부분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과감하게 생략된 부분이 있고,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33.계룡산 중악단

 

종 목  보물  제1293호 
지 정 일 1999.03.02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산8 
시 대 조선시대


중악단은 국가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 5악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구릉지에 동북·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에 단묘 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라고 한다.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마련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설치하여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다.

 

1.5m의 높은 돌기단 위에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장식하여 화려하고 위엄있게 하였다. 또한 각 지붕 위에는 각각 7개씩 조각상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쓴 점도 특이하다.

 

조선시대 상악단과 하악단은 없어져서 그 유적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중악단이 잘 보존되어 있어 나라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일한 유적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34.갑사 석가여래삼세불도 및 복장유물


종 목  보물  제1651호 
지 정 일 2010.04.23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번지 갑사내
시 대 조선시대


공주 갑사 석가여래삼세불도는 18세기 초,중반 전라도를 중심으로 경상과 충청 지역에서 활동한 당대 대표적 화사인 의겸이 제작한 불화이다. 현재까지 작품을 비롯하여 화기, 사지, 발원문 등을 통하여 알려진 의겸의 작품은 39건으로 그 가운데 현존하는 불화는 21건 30점이며 작품을 통해서 볼 때 그의 활동 시기는 대략 1713년에서 1757년 무렵까지 약 40여 년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가운데 길이 4m에 이르는 3폭 형식의 삼불도는 갑사 삼세불도를 비롯해 운흥사 삼세불도, 화엄사 삼신불도 등 3건에 불과하며, 조선후기를 통틀어서도 이러한 대형의 3폭 삼불도 형식의 예는 희귀한 편이다. 비록 약사회 1폭은 없어졌지만, 450cm에 육박하는 대형의 화폭에 각 설법장면을 세련되고 유려한 필치, 짜임새 있는 구도와 조화롭고 안정감 있는 색채로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게 묘사한 18세기 전반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판단되었다.

 

특히 이 불화는 의겸의 초기화풍에서 후반기 화풍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있는 작품으로 그의 화풍연구에 있어서도 대단히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이와 더불어 1730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화복장을 남기고 있어 불상복장과 함께 불화 복장 의식을 연구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35.공산성

 

종 목 사적 제1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산성동 2외

시 대 삼국시대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에 있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36.송산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1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

시 대 백제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웅진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무덤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으나,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다. 이외에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평가된다.

  

 

37.학봉리 도요지

 

종 목 사적 제333호

지 정 일 1990.08.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22-1외

시 대 조선시대

 

요지란 도자기, 기와, 그릇 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유성에서 동학사쪽으로 들어가면 신도안과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 일대 계룡산 기슭에 여러 곳의 가마터가 분포한다. 그 중 이 학봉리 도요지가 중심이 되며,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에 조사된 보고서에 의하면 가마는 산록의 경사면에 여러 개를 축조하였고, 구조는 땅을 약간 파 길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천장과 벽을 진흙으로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라고 한다. 철화분청자·귀얄청자·백자 등이 출토되었고 그 가운데 철화분청자가 대표적이다. 그릇의 종류로는 대접·접시·술병·주전자 등 다양하며, 새겨진 무늬는 국화무늬·연꽃무늬·물고기무늬·새무늬 등 다양하다.

 

철화분청자의 대표적인 생산지로서 그 의미가 크며,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무늬를 새긴 것으로 유명한 가마터이다.

  

 

38.석장리 구석기유적

 

종 목 사적 제334호

지 정 일 1990.10.3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장기면 장암리 98외

시 대 석기시대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금강가에 있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돌을 깨뜨려 도구로 사용하고 사냥이나 물고기잡이, 식물채집을 통해 생활한 문화단계를 말하는데, 인류가 태어나 1만년 전까지의 시기로 보고 있다.

 

찍개·긁개·주먹도끼·새기개 등의 석기류가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후기 구석기층의 집자리에서는 숯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연대측정을 한 결과 약 2만 5천년에서 3만년전으 집터임이 확인되어, 당시에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알았고 전후 시기에도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꽃가루를 조사한 결과 이 일대에 소나무·전나무·목련·백합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 처음으로 알게해 준 중요한 유적이다.

 

  

39.우금치 전적지

 

종 목 사적 제387호  

지 정 일 1994.03.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학동 산78-1외

시 대 조선시대

 

우금치 고개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견준산 기슭의 고개로 우금고개, 우금재 또는 비우금 고개라고도 부른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일단 우금치를 장악하면 중부지역의 거점인 공주 점령의 기선을 잡을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다. 공주를 중심으로 향후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죽검으로 총에 맞서 싸우다 결국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우금치 싸움 후, 재기를 노리던 전봉준이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동학군의 넋을 달래기 위해 1973년에 이 고개의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졌으며, 동학농민전쟁 100년이 지난 1994년 이르러 우금치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역사발전의 큰 계기가 되었다.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걸고 마지막 항전을 이루어냈던 장소로, 한국 근대사의 한고비를 이루는 무대가 된 뜻깊은 장소이다.

  

 

40.장선리 토실유적


종 목  사적  제433호 
지 정 일 2001.09.1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탄천면 장선리 151-6외 
시 대 청동시대


충남 공주시 탄천면 장선리 및 안영리 일대에 위치한 토실유적으로, 천안 - 논산간 고속도로 휴게소부지 조성을 위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4기, 원형유구 30여기, 석관묘 1기, 옹관묘 1기, 적색마연토기 등을 비롯한 다수의 송국리형토기와 다양한 석기류, 마한시대 주거지로 추정되는 토실유구 39기, 장방형 주거지 5기, 장방형 수혈유구 15기, 횡혈묘 1기가 확인되었고, 장란형토기·심발형토기·시루·대접 등 다양한 생활용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모두 구릉 위 평탄한 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조는 타원형 구덩이와 그 주변에 기둥 구멍이 배치되어 있다. 이 주거지들은 송국리형 주거지의 형태로 시기적으로 송국리형 주거지의 중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과정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원삼국시대 유구로는 토실유구, 수혈주거지, 저장공 등 다양한 생활유적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토실 유구는 새롭게 확인된 유구이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대개 생활용 토기로 이곳이 생활유적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공주 장선리 토실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조사된 유적으로 문화사적·고고학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삼국시대 초기 주거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청동기 시대 유구와 철기시대 유구가 중첩되어 있어 이 지역에서의 주민 및 생활상의 역사적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41.수촌리 고분군

 

종 목 사적 제460호

지 정 일 2005.03.03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201 외 일원

시 대 백제

 

공주수촌리고분군은 공주시에서 계획한 의당농공단지 조성 예정부지에 대한 지표조사 후 유적의 존재가 확인되어 해당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각종유물이 발견되었다.

 

공주수촌리고분군 일대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백제시대 부묘(대형토광목곽묘, 횡혈식 석실분, 수혈식 석곽묘)등이 조사되었다.

 

초기철기시대 토광묘는 세형동검과 검파두식(검자루끝장식) 등 다양한 청동제품과 점토대토기(점토띠토기), 흑고장경호 등 토기가 매장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초기철기시대 묘제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백제시대 분묘는 공주지역 백제고분의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일 뿐만 아니라 출토된 유물이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에 조영된 것으로 짐작되어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금동관과 금동신발, 금제이식,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 중국제 흑유도기, 흑유 계수호(닭머리모양 주전자)등 위세품으로 판단되는 유물들이 함께 부장되어 있어 피장자의 신분이 당시 공주지역 유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한성 백제시대의 중앙과 지방의 상호관련성을 보여주는 백제사의 중요한 자료이다.

 

 

42.정지산 유적


종 목  사적  제474호 
지 정 일 2006.11.06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1 외 
시 대 백제

 
공주시 금성동 정지산의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유적으로 1996년 국립공주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국가적 차원의 제의시설로 추정된다.


유적지 내에서는 국가의 중요시설에만 사용된 8잎의 연꽃잎이 새겨진 수막새가 발견되었고, 이외에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받침 등 국가 제사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매지권에 기록된 신지(申地), 유지(酉地)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왕비의 시신이 사후 무령왕릉에 안치되기까지 2~3여 년간 수습되어 보관된 곳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건물의 기둥을 받쳐주는 초석이 없는 건물로 제작되어 영구적인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과 유적지 내의 대벽건물지에서는 얼음을 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도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43.유형장군 유물<교지.호패>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호 (공주시) 
지 정 일 1973.12.24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장기면 하봉리 산6-2 국립공주박물관 보관
시 대 조선시대 

 
이 유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인 유형(柳珩,1566∼1615) 장군의 유물로, 무과에 급제했다는 것을 알리는 나라의 교지와, 당상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가 사용했던 상아에 음각한 호패이다.

 

유형은 어려서부터 무술에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을 따라 강화에서 큰 공을 세웠고, 선조 28년(1595) 무과에 급제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노량대전을 통해 공을 세웠다. 노량해전에서 부상을 당했으나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러 차례 승진하게 된다. 또한 선조 34년(1601)에는 이순신 장군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 문화재는 교지 1매와 호패 1개 모두 2점이며, 임진왜란 때의 인물사 연구자료로 가치가 있다.

 

44.마곡사 동제은입사향로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지 정 일 1973.12.24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 대 고려시대

 

향로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의미를 가진 향을 피우는데 사용한 도구이다.

 

높이 20.2㎝, 입 지름 19.5㎝인 이 향로는 나팔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가지고 있다. 입부분은 넓은 테가 있고, 테에는 8개의 구름무늬를 새겼다. 몸통 가운데에는 4곳에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를 써 넣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덩굴무늬로 채웠다. 몸통 맨 아래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잎을 새겼다. 나팔모양의 받침대에는 윗부분에 구름과 엎어놓은 연꽃잎을 두었고, 아래에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몸통과 받침대는 따로따로 만들어 연결 시킨 것으로, 연결 부위에는 작은 반원 모양의 받침장식이 있다. 몸통 전체에는 무늬를 먼저 새기고, 무늬마다 은을 입혀 넣는 은입사 방법을 사용하여, 화려한 고려시대 향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불교 금속 공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45.신원사 오층석탑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

지 정 일 1974.09.0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8 
시 대 고려시대


계룡산의 산신제단인 중악단 남쪽에 서 있는 5층 석탑이다.

 

현재는 4층 지붕돌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2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을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는데 이것은 목조건축의 기둥을 모방한 것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처마는 거의 수평이다. 석탑의 서쪽에는 배례석(탑 앞에 두어 예를 갖출 때 쓰는 돌)이 마련되어 있다.

 

중후한 느낌을 주는 석탑으로,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1975년 12월 탑의 해체·복원 공사 당시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구와 함께 개원통보, 함원통보, 황송통보, 주둥이와 손잡이가 깨어진 자기주전자, 녹색 유리로 만든 목이 긴 병 등이 발견되었다.

 

46.쌍수정 사적비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14-4 
시 대 조선시대


공산성 진남루 서쪽에 자리한 비로, 조선시대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 일반적인 양식이다.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10일 동안의 행적, 왕이 머물렀던 공산성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 있다.


숙종 34년(1708)에 세운 비로,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47.명국삼장비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6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10-2 
시 대 조선시대


공산성 공북루 아래에 자리한 한채의 비각안에 3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들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 공주에 주둔해 있으면서 주민들을 왜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준 명나라 세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원래 선조 32년(1599) 금강변에 처음 세웠다가 홍수로 매몰되어 숙종 때에 다시 세워둔 것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왜구’등의 글자가 훼손되었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아무렇게나 매몰되었던 것을 광복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48.공북루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165

시 대 조선시대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이어서, 윗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랫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라고 쓴 현판은 성의 안쪽에 해당하는 추녀 밑에 걸려있다.

 

공북루는 송시열이 쓴 기록을 비롯해 여러 글이 걸려 있어 멋스러운 경치를 더해 주는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이다.

  

 

49.동원리 석탑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신풍면 동원리 380 
시 대 고려시대

 

동원리라는 마을 위쪽의 밭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탑 주변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유물은 없다.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현재 세번째 탑신은 없어졌다. 1 ·2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 갔고,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기단과 탑신 몸돌에 새긴 기둥조각 등은 정교하나,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또한 3층 몸돌을 잃어버려 아쉬운 감이 있다. 1962년 해체 ·복원시 곱돌로 만든 소탑과 동물모양의 돌 등이 발견되어 국립공주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중기 신풍현 현감이 풍수지리상 이 마을의 뒤쪽이 트여서 현의 수명이 짧고 동리에 질병이 잦은 것이라 하여 모든 액운을 제거하고자 현감과 주민들이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50.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시 대 고려시대


갑사 동쪽 계곡 약 100m 지점의 자연 동굴안에 있는데, 원래는 갑사 뒷산의 사자암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고 얼굴은 긴편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을 약간 노출시키고,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가슴 아래로는 반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었고, 왼쪽 어깨 부근에서는 한 가닥의 주름이 어깨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손모양을 살펴보면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구성미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51.갑사 석조여래입상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시 대 백제시대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갑사 뒷산 사자암에 약사여래입상, 갑사 부도와 같이 있던 것을 갑사 진해당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얼굴은 마멸이 심해 분명하지 않으나 코가 오똑하고 눈은 감은 듯 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한 자락이 오른손 손목을 거쳐 등쪽으로 넘겨졌다. 하체에 걸쳐진 옷은 선이 부드럽고 얇아서 신체의 굴곡을 충실히 표현하고 있다. 가슴부분의 오른손은 뭔가 들고 있는 듯 하나 분명하지 않고, 왼손은 팔을 내려 무릎 부분에서 목이 긴 병을 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잘록한 허리, 어깨 등 조각수법이 세련된 백제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52.갑사 사적비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 
시 대 조선시대


갑사의 창건과정과 역사를 적은 비로, 바윗돌 위에 사각의 비받침돌을 마련하여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에는 4면 모두 비문을 새겼는데 일부 손상된 부분은 읽을 수가 없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비석재 속에 금이 들어 있어 그것을 파내기 위한 소행이었다고 한다.

 

조선 현종 원년(1659)에 세운 비로, 비문은 여주 목사 이지천이 짓고 공주목사 이기징이 글씨를 썼다. 

 

53.오룡리 귀부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 296 
시 대 조선시대


귀부는 비받침부분을 일컫는 말로, 대개 거북 모양을 띠고 있다. 이 귀부는 조선 제 16대 임금인 인조의 아들 숭선군의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우는 비)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나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어 귀부만 남은 것이다.

 

숭선군은 이름은 징이고,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이다. 효종 2년(1651) 누이인 효명옹주의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역모에 관계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7년(1656)에 석방되어 벼슬과 지위를 되돌려 받았다.

 

귀부는 네모난 바닥돌과 큼직한 한돌로 만들었다. 앞으로 쑥 뻗은 머리부분은 용의 모습으로 변했고, 목에는 비늘무늬를 장식하였으며, 등에는 비를 끼우는 곳인 비좌를 갖추었다.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귀부에 비해 조각 솜씨는 떨어지나 전체적으로 힘차 보이는 조선 중기의 작품이다.

 

54.마곡사 동종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2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만들어진 전체 높이 107㎝, 몸체 높이 80㎝의 동종이다.

 

동종은 2마리의 용에 의해 매달려 있고, 몸통 어깨의 4곳에 정사각형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돌출된 9개의 유두가 있고, 유곽의 사이에는 위·아래 각각 원형 머리광배을 가진 보살상을 새겼다. 몸통의 윗부분에 2줄의 직사각형 띠를 만들어 그 안에 원을 그리고, 범자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아랫부분에는 연꽃과 보상화를 교차시킨 덩굴무늬 띠를 만들어, 종 표면의 문양에 통일감과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 동종은 마곡사 오층석탑 동쪽 심검당의 툇마루에 자리하고 있다. 종 몸체에 쓰인 글을 통해 조선 효종 5년(1654) 충청도 안곡사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지는 않지만 제작 연대와 장소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종이다.

 

55.공주향교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5호

지 정 일 1978.03.3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교동 21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에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지 못하나, 원래 웅진동 송산 기슭에 있던 것을 인조 원년(162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1954년 문묘·명륜당·동재·존경각 등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양쪽에 동재와 존경각이 있다. 뒤쪽 한층 높은 곳에 있는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당인 대성전이 있으며, 그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즉 교육공간은 앞쪽에, 제사공간은 뒤쪽에 구분하여 배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경장(1894) 이후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있다

  

 

56.신원사 대웅전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

지 정 일 1978.12.3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8 
시 대 조선시대


신원사는 계룡산 기슭에 있는 절로 백제 의자왕 11년(651)에 보덕이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번 다시 지어졌고, 지금의 대웅전 건물은 조선 고종 13년(1876)에 보연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처마의 끝을 살짝 올려 우아한 멋을 나타내었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 건물이며, 연꽃을 조각하여 장식하였고 매우 간략한 양식으로 되어있다.

 

내부에는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하여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불상 위에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하다.  

 

57.덕천군 묘 출토 분청이부호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1호 
지 정 일 1978.12.3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덕천군의 무덤를 이장하면서 출토된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분청이부호) 2점이다.


덕천군(1377∼1465)은 조선 정종의 10남으로, 세조 때 녹원공신으로 추대되었다. 원래 서울 성동구 거여동에 있던 무덤을 공주시 의당면 대산리로 이장하면서 유물이 발견되어, 덕천군 종친회에서 국립공주박물관에 기탁하였다.


한 점은 높이 29.5cm, 아가리 지름 10cm, 밑 지름 9.2cm의 분청상감포류문사이부 항아리로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져 있고, 목은 짧으며 어깨에 4귀가 붙어 있다. 백토를 상감하여 버드나무 무늬(포류문)와 꽃무늬를 몸체에 장식하였다. 몸체 일부는 파손되었지만 거의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 색은 옅은 갈색을 띤다.


다른 한 점은 분청삼이부 항아리로 높이 23.7㎝, 아가리 지름 12.1㎝, 밑 지름 10.6㎝이다. 분청상감포류문사이부 항아리와 비슷하나 크기가 작은편이고 무늬는 없다.
 

 

58.연평부원군 신도비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

지 정 일 1979.12.1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524 
시 대 조선시대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놓은 비를 말한다.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귀(1557∼1633)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귀는 이이·성혼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군인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힘썼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 인조반정때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그후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한돌로 이루어진 비몸과 머릿돌을 세웠다. 거북받침돌은 머리를 수평으로 내밀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을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나타내었다. 비문은 조익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여우징이 썼다.

 

59.선화당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지 정 일 1980.12.2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3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곳이다. 도내의 일반 행정·군사·조세 및 중요한 재판이 행해졌다. 원래 태조 4년(1395)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선조 35년(1602)에 공주로 옮겨와 충청도 전체를 관장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여지도서』에는 선화당을 비롯하여 50여 채의 건물과 칸수를 기록하고 있으나,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만 남아있다. 지금의 선화당 건물은 순조 33년(1833)에 지은 것으로, 원래는 공주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193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앞면 8칸·옆면 4칸의 규모인데, 원래는 앞면 9칸·옆면 5칸이었던 것이 옮기면서 축소되었다. 지붕의 옆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내부는 칸을 막지 않고 전체를 통칸으로 하여 넓은 공간을 마련하였고 2열로 기둥을 세웠다. 중앙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주위의 퇴간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임금의 덕을 드러내어 널리 떨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임을 뜻하는 ‘선화당’이라는 현판을 앞면 중앙에 달았다.

 

조선 중기의 수법이 남아있는 조선 후기의 관아 건축으로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0.포정사 문루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 

지 정 일 1980.12.2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3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선화당 앞에 서있던 정문이다.

 

공주는 충청도 전체를 관장하던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감영에는 50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 만이 남아있다. 원래는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옆에 있었는데, 옛 공주군청 옆으로 옮겨지어 공주 제2감리교회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1993년 선화당 앞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포정사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문루건물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진각지붕집이다. 우진각 지붕은 지붕면이 4면으로 경사진 지붕을 말하며, 이 건물에서 지붕 모양 이외에는 문루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 1층의 양 옆은 판자벽으로 막고 가운데 3칸만 문을 만들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2층은 누마루로 난간을 돌리고 서쪽에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었다. 교회·사무실 등으로 사용되어 내부와 창틀 등이 개조되었으나, 겉모습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삼문은 솟을지붕 형태로 공포를 짜지 않은 소박한 민도리집 계통이며, 양 옆칸은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교동에 있던 것을 1993년 선화당 앞에 복원하였다.

 

포정사 및 삼문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변형이 있었지만 조선 후기 관아건물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61.상신리 당간지주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

지 정 일 1981.06.16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66 
시 대 통일신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당을 꽂아두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두 기둥만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마을 입구의 민가 뒷돌담에 서 있다. 남아있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 한쪽 기둥은 잘린 채 떨어져 있고, 다른 한쪽도 파손이 심하다. 기둥의 받침대는 여러 개의 돌로 조립되어 있으며, 옆면에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마주보는 면에는 아래위 두 곳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파놓았다. 바깥면의 가운데에는 넓은 띠를 도드라지게 새겨놓았고, 앞뒷면은 가장자리에 테두리선을 넓게 둘러놓았다. 기둥사이에는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이 놓여 있는데, 그 윗면에 동그란 홈을 두어 당간을 꽂아두도록 하였다.

 

돌을 다듬은 솜씨나 각 부분의 꾸밈새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62.갑사 강당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5호

지 정 일 1981.12.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52 
시 대 조선시대


갑사는 계룡산 기슭에 있는 삼국시대의 사찰로, 백제시대에 아도화상이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크게 다시 지으면서 신라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다.

 

해탈문과 대웅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강당은 승려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뒤로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의 옆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의 기둥 위에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를 짰는데,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단청은 완전히 퇴색되어 무늬의 흔적만 남아 있으며, 문짝은 많이 변형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절도사 홍재의가 쓴 ‘계룡갑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전체적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은 조선시대 후기의 웅장한 건축물이다. 

 

 

63.갑사 대웅전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

지 정 일 1984.01.1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52 
시 대 조선시대

 

갑사는 계룡산 아래에 있는 절로 백제 구이신왕 1년(420년)에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과 556년에 혜명이 지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679년에 의상이 수리해서 화엄종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다. 859년·889년에 새로 지었으나 정유재란(1597)으로 인해 건물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7년(1604)에 다시 지었다.

 

갑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에 있는 법당으로 원래는 현재 대적전이 있는 근처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다시 지을 때 이곳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1층이며, 옆면이 사람인(人)자 모양으로 가장 단순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가운데 3칸은 기둥 간격을 양 끝칸 보다 넓게 잡아 가운데는 공포를 2개씩, 끝칸에는 1개씩 배치하였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되어있고, 불단을 만들어 석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그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다.

 

갑사 대웅전은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64.갑사 대전적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6호

지 정 일 1984.01.1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52 
시 대 조선시대


갑사는 계룡산 아래에 있는 절로 백제 구이신왕 1년(420)에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설과 556년에 혜명이 지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679년에 의상이 보수하여 화엄종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10찰의 하나가 되었다. 859년·889년에 새로 지었으나 정유재란(1597)으로 인해 건물이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7년(1604)에 다시 지었다.

 

갑사 대적전은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삼신불(석가모니·아미타불·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원래의 금당지 옆에 있던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가운데 칸은 공포가 2개이며, 양 끝칸은 1개의 공포로 이루어졌다. 내부에는 불단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보현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석가모니불 위에 천장을 한단 올림으로써 닫집의 효과를 나타내었다.

 

65.포저유서 및 송곡문집판각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지 정 일 1987.12.3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567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문신인 포저 조익(1579∼1655)과 그의 셋째 아들 송곡 조복양(1609∼1661)의 시문집을 새긴 목판으로, 모두 633매이다.

 

조익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음서로 정포만호가 되고 선조 35년(1602) 별시과에 내과로 급제한 이래 여러 벼슬을 거친 후 대사헌, 좌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이, 성혼의 문묘종사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사직했다. 성리학의 대가로 예학에 밝았다.

 

조복양은 김상헌의 문인으로, 인조 11년(1633) 사마시에 합격하고 여러 직을 거쳐 부교리로 붕당의 폐를 한탄하여 사직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후 시강관으로 궁중음악의 타락을 지적했고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조익의 셋째 아들이다.

 

조익의 시문집『포저유서』를 찍은 목판은 377매이고, 송곡의 시문집『송곡집』을 찍은 목판은 256매이다.

 

 

66.마곡사 심검당 및 고방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지 정 일 1991.12.03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 대 조선시대

 

마곡사는 충남지방의 모든 사찰을 통괄했던 큰 사찰로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재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재위 1455∼1468)가 이곳에 와서 `영산전´이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내렸고 잡역을 면제하는 교지를 내렸는데 모두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졌다. 효종 1년(1650)년부터 주지스님인 주순의 노력으로 절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데, 정조 6년(1782)년에 다시 큰 불이 일어나 대광보전을 비롯한 1,050칸이 모두 불에 탔다.

 

마곡사 심검당은 대광보전 5층 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이며, 고방은 창고건물이다.

 

심검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1년(1797)년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기록과 편액에 적힌 글에 의하면 철종 7년(1856)년에 고치고 1909년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고 한다.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1층의 기단을 형성하고 주춧돌을 놓은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고방은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남향집이다. 

 

 

67.남평조씨 병자일기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3호

지 정 일 1998.07.25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성강 20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남이웅(1595∼1649) 선생의 부인이 쓴 일기로, 인조 14년(1636) 12월 5일부터 피난길에 오르면서 인조 18년 8월 9일까지의 일기이다.

 

이 일기는 필사본으로, 4년여 동안 식솔들을 거느리면서 실제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기록하였다. 총 72매의 분량으로 91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된 일이 있다.

 

이것은 병자호란에 대한 기록을 보충해 줄 뿐만 아니라 남이웅 선생의 가족사를 뒷받침해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68.마곡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상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85호

지 정 일 2007.09.2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 대 조선시대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대웅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이다. 17세기 이후 우리나라 불상의 형식으로 정착하는 석가, 아미타, 약사불의 삼세불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아미타, 왼쪽에 약사불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 위치한 석가불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에 왼손은 무릎에서 수평으로 뉘어 2지와 3지를 거의 직각에 가깝게 구부렸다. 아미타여래상은 중품하생인, 약사불은 반대의 중품하생인의 수인을 하였으나 약함은 놓여 있지 않다.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를 둥글게 덮은 변형식의 편단우견을 입었으며, 양쪽의 여래상들은 속에 편삼을 입은 모습이다.

 

세 여래상은 착의법과 수인형식을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형상인데 전체적으로 얼굴이 작고 신체의 비례가 짧은 작고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주름들이 한 번씩 반전되어 접혀져 내려오면서 대의의 끝단을 둥글게 처리한 점이나 양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들이 가파른 속도감을 보이면서 양측으로 접혀져 흘러내린 모습, 왼쪽 무릎에 유난히 크게 표현된 소매자락 등이 특징적이다.

 

머리의 육계는 밋밋하며 중간계주와 정상계주는 따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얼굴은 둥글고 작으며 거의 일자에 가깝게 처리된 얇은 입술이나 구부린 손가락의 표현 등은 같은 시기 다른 불상에 비해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이다.

 

이 불상과 관련된 복장물은 아직 조사된 바 없어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불상이 안치된 대웅보전은 각순대사와 공주목사 이주연이 1651년에 중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이 시기인 1650~1659년 사이에 마곡사 주지를 지낸 운혜는 당시 유명한 조각장인으로 「사적기」에는 그가 편수를 맡았다는 기록도 있어 이 불사에 총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삼세불상은 17세기 중엽에 조성된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목조삼세불상은 17세기의 시대적 특징을 보이면서도 둥글고 작은 얼굴에 짧은 비례라든지 주름의 폭이 넓으면서 그 끝단을 부드럽게 둥글게 처리한 점, 그리고 왼쪽 무릎 위에 유난히 크게 표현된 소매자락 등은 같은 시기 다른 불상과는 다른 점이다. 17세기 삼세불상을 대표하는 목조삼세불상 가운데 하나로 조형적으로 우수하고 연구가치도 높다. 

 

 

69.마곡사 영산회상도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91호

지 정 일 2007.10.3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 대 조선시대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대웅보전 후불탱화로 걸려있는 불화이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한 모임을 도상으로 옮긴 불화이다.

 

화기에 따르면, 마곡사 영산회상도는 정조 12년(1788) 동홍 등 15명의 화승이 함께 조성하였다. 대형의 화면에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장면인 설법회를 짜임새 있게 그렸으며 비교적 탁한 색감과 도식적인 음영표현 등 18세기 후반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70.송선군 묘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 산2-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군의 묘소이다. 군의 이름은 징이며, 시호는 효경이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으로 인조를 따라 공주(公州)로 잠시 피신한 일이 있었는데, 궁으로 돌아와서도 항상 공주를 그리워하더니 숙종 16년(1690) 세상을 떠날 때 공주에 묻어 줄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왕족의 무덤은 도성에서 90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중단되었고 그 후 후손에 의해 다시 이곳으로 옮겨져 만들어졌다.

 

묘 주위에는 ㄷ자형으로 담장을 쌓았으며, 묘 앞에는 묘비와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에는 무인석과 문인석이 1쌍씩 세워져 있다. 봉분 아랫부분은 화강석으로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비에 쓰여진 기록을 통해 숭선군과 부인의 합장묘로 영조 42년(1766)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71.김옥균선생 유허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1976.12.06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 
시 대 조선시대

 

김옥균 선생이 6세까지 살던 생가지로, 김옥균 생애비가 있는 곳이다. 원래는 김옥균 생가를 비롯하여 8∼9호의 민가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화재로 모두 없어졌다.

 

김옥균(1851∼1894)은 조선시대 말엽의 정치가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외치며 개화사상을 주장하였다. 고종 21년(1884)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만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4년에는 한·중·일 삼국의 제휴라는 삼화주의를 주장, 청나라의 실력자 리홍장을 만나러 상해를 방문하던 중 수구파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 당했다. 청나라와 수구파 세력에 의해 빼돌려진 시체는 한국으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다. 갑오개혁(1894)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된 후에 총리 김홍집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었으며, 1910년에는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처음에는 일본 동경의 청산외인무덤에 묻혔는데, 1914년 아산군수였던 그의 양자 김영진이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로 옮겨와 부인 유씨와 합장하였다. 

 

72.김종서장군 묘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16호

지 정 일 1977.01.06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산4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단종 때의 충신인 절재 김종서(1390∼1453) 장군의 묘소이다.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한 후 함길도 도절제사 등 여러 관직을 엮임하였다. 세종 16년(1434)에 6진을 개척하여 국토 확장의 위업을 이룩하여 현재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이때에 확정되었다. 또『고려사』,『고려사절요』,『세종실록』등의 편찬에 참여하여 학자적인 면모도 보여주었다.

 

단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으로 어린 왕을 보필하다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뒤의 세조)에 의해 단종 1년(1453) 두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현재의 묘비와 ‘충신정려’의 현판은 영조 22년(1764)에 세운 것이며, 묘역은 약 200평으로 둥근 담과 삼문시설은 근래에 설치한 것이다.

 

 

73.계룡산 초혼각지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18호

지 정 일 1977.07.04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산789 
시 대 조선시대

 

세조(재위 1455∼1468)가 단종을 폐위할 때 뜻을 굽히지 않고 절의를 지켜 죽어간 사육신 이하 여러 충신들의 혼을 모셨던 곳이다.

 

세조가 왕위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황보인, 김종서는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하였고, 왕위를 찬탈한 다음해인 세조 2년(1456)에는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모두 참형 당했다.

 

같은 해 생육신인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 계룡산에 와서 제단을 마련하고 이들을 위해 초혼제를 지내어 영혼들을 위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후 세조 4년(1458) 조정에서는 단종을 비롯하여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 등 당시 죽음을 당한 280여 위패를 모시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초혼각을 세웠다고 한다.

 

세조 12년(1466)에 김시습 등이 건물을 더 짓고 매년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오다가, 영조 4년(1728) 화재로 타버린 것을 고종 원년(1863)에 만화스님이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1904년 숙모전이라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74.구룡사지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39호

지 정 일 1982.12.3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389외 4필지 
시 대 통일신라


계룡산의 북으로 뻗은 중턱에 절터가 있으며 이 지역을 법당골, 부도골 등으로 부른다.

 

마을에는 많은 석조물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주변에서‘구룡사’ 라고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구룡사터라고 부르고 있다.

 

절의 입구에는 당간지주가 서 있으며, 주춧돌과 장대석, 부도의 받침돌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당시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로 보아 백제 후기나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만든 것으로 보여진다. 

  

 

75.충현서원 유적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46호

지 정 일 1984.07.26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학자인 서기(1523∼1591)가 중국의 주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기는 서경덕, 이지함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지리산과 계령산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한 분이다. 처음에는 ‘박약재’라는 이름으로 세우고 이존오·이목·성제원 등을 추가로 모셨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광해군 2년(1610)에 복원하고 조헌을 추가로 모셨으며 인조 3년(1625)에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충현’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뒤 김장생·송준길·송시열 등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지방 유생들을 교육하는 기능도 함께 수행해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폐쇄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6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대전∼공주간 국도에 인접하여 세운 이 서원은 사당과 재실, 서원의 유래를 적은 비석들로 구성된 조촐한 규모이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인데 안쪽에는 주자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7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76.세조대왕 연

 

종 목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4호

지 정 일 1986.11.1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567 
시 대 조선시대


연은 임금이 거동할 때 타는 가마를 일컫는 것으로, 이 가마는 조선 세조가 마곡사에 올 때 타고 온 것이다.

 

4명이 들 수 있도록 한 긴 멜대 위에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사각형의 몸체를 올리고 지붕을 덮은 모습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파손된 부분도 있고 채색도 희미한데,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 하다.

 

마곡사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세조가 매월당 김시습을 찾아 연을 타고 이 절에 왔다가 매월당이 떠나고 없는 것을 알자, ‘김시습이 나를 버리니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하며, 타고 왔던 연을 절에 내버려 둔 채 소를 타고 돌아갔다고 한다.

 

 

77.동화사 삼성각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7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789 
시 대 조선시대


동학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3년(724) 상원사라 하여 처음 지은 절이다.

 

삼성각은 삼성(칠성·산신·독성)의 탱화를 모신 곳이다.

 

칠성은 북두칠성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맡고 있으며 산신은 우리민족 고유의 토속신으로 호랑이와 더불어 나타나며 재물을 담당한다. 독성은 홀로 깨닫고 성인이 되어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리는 존재이다. 이것은 불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도교, 토속, 불교 등 여러 신앙요소가 합쳐진 형태이다. 불교 밖의 신앙대상을 모셨으므로 건물 이름을 전이라 하지 않고 각이라 하였다.

  

 

78.동학사 삼층석탑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789 
시 대 조선시대

 

동학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청량사(남매탑이 있는 곳)’라는 암자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1층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인데, 탑신부의 3층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의 맨 윗돌은 탑신의 지붕돌과 같이 윗면에 비스듬한 경사를 두었다. 탑신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적당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규모가 작은 탑으로, 통일신라 선덕왕 23년(723) 동학사를 처음 지을 때 함께 세워두었다 하나, 탑의 양식이나 다듬은 솜씨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79.삼은각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789 
시 대 조선시대


고려 때 절의를 지킨 포은 정몽주·목은 이색·야은 길재 등 삼은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정몽주는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1362년 예문관에 들어갔으며 이성계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색은 고려말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충목왕 4년(1348)에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 생원이 되었으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으며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길재는 고려말∼조선초의 학자로 공민왕 23년(1374)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우왕 9년(1383)에는 사마감시에 합격하였다. 창왕 2년(1390)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와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후학 교육에 힘썼다. 67세에 죽으니 후일 세상사람들이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이라 일컬었다.

 

이곳은 조선 정종 1년(1399)에 고려 유신 유방택이 삼은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해에 공주목사 이정간이 건물을 세우고 삼은의 제사만를 지내 삼은단이라 하였다. 세조 때에는 유방택과 이숭인, 나계종을 추가하여 6인의 제사를 지냈으나 이름은 그대로 삼은각이라고 하였다. 

 

 

80.충현서원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0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 
시 대 조선시대

 

주자를 비롯하여 이존오·이목·성제원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주자(1130∼1200)는 중국 송나라 유학자이며 성리학의 대가로, 순수한 사고와 이성만으로 사물을 의미하는 사변철학과 실천윤리의 체계를 확립하였다.

 

서기가 조선 선조 14년(1581)에 세운 충현서원은 인조 2년(1624)에 ‘충현’이라는 현판을 나라에서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숙종 15년(1689)에 김장생·조헌·송준길을 더하여 모시고, 숙종 39년(1713)에는 송시열을 모셨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25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서원 안에 있는 건물로는 사당, 재실, 충현서원사적비(충청남도기념물 제 46호), 충현서원사실, 우암송선생추향기비석 등이 있다.

 

사당에는 주자를 중앙에 두고 그 좌우에 나머지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81.덕천군 사우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 10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정종(재위 1398∼1400)의 열번째 아들인 덕천군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덕천군은 가난한 백성을 정성껏 도왔으며, 왕자의 신분에도 들에 나가 농사를 지었다. 또한 여름에 홍수로 수백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구제하였으며, 덕을 쌓은 어른이라 하여 적덕공이라고도 불렀다.

 

처음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있던 건물이 낡아 조선 영조 15년(1739)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82.마곡사 천왕문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2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 대 일제강점기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에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절 경내에는 천왕문을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대광보전, 홍성루 등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천왕문은 조선 후기에 세웠으며, 건물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1910년에 고쳐 지었다고 한다.

 

절 입구에서 두번째 있는 문인 천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천장은 지붕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안쪽에는 동서남북 4지역을 지키는 사천왕상과 그림이 있다.

 

 

83.마곡사 국사당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3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 대 조선시대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에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절 경내에는 국사당을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대광보전, 홍성루 등 많은 건물이 남아 있다.

 

국사당은 절을 세운 이나, 훌륭한 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승려들에게 국사라는 최고의 승려가 되기까지 많은 수행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운 것이다. 조사전·조사당·국사전이라고도 한다.

 

 

84.마곡사 명부전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4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 대 일제강점기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에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절 경내에는 명부전을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대광보전, 홍성루 등 많은 건물이 남아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모시고 있어 지장전·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모든 인간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며, 시왕은 염라대왕을 비롯한 10명의 지옥 심판관이다.

 

 

85.마곡사 응진전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5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 대 조선시대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에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절 경내에는 응진전을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대광보전, 홍성루 등 많은 건물이 남아 있다.

 

응진전은 철종 3년(1852)에 새로 보수한 것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짜올렸다.

 

안쪽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86.마곡사 해탈문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 
시 대 조선시대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에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절 경내에는 응진전을 비롯하여 대웅전, 영산전, 대광보전, 홍성루 등 많은 건물이 남아 있다.

 

해탈문은 마곡사의 정문으로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중앙 통로 양쪽 편에 금강역사상과 문수동자상 등을 모시고 있다.

 

87.숙모전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789 
시 대 조선시대

 

단종(1441∼1457)과 단종의 죽음을 막기 위해 노력한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단종은 아버지 문종에 이은 조선 6대 왕이다.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많은 충신들의 도움으로 정치를 하던 중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곳은 원래 초혼각으로 사육신의 시신을 장례한 후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영조 4년(1728)에 불탄 것을 순조 27년(1827)에 다시 세웠고, 고종 1년(1864) 초혼각 북쪽에 단종의 위패를, 동벽에 고려 후기 충신 7위를, 서벽에는 사육신 등 7위를 모셨다. 고종 41년(1904)에 이름을 ‘숙모전’이라 바꾸고 단종의 부인이었던 정순왕후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88.남산영당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2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성강리201-2 
시 대 조선시대


남이웅(1575∼1648)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광무 10년(1906) 유림들이 세웠다.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정치가였던 선생은 평소 법을 준수하고 사치를 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광해군 5년(1613)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병조좌당 등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가 중국 심양으로 잡혀갈 때 극진히 모시고 따가갔다와 후에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조 16년(1638) 대사헌이 된 후 법을 철저하게 집행하였으며, 미신을 없애려고 무당을 박해하기도 하였다.

 

사당 뒤쪽으로 선생의 묘소와 묘비가 있다.

 

89.김종서 유허지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4호

지 정 일 2005.10.3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38-2외 
시 대 조선시대


절제 김종서 선생의 생가지이면서 그의 가족이 평생을 살았던 곳으로 의당 초등학교와 인접합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의당 초등학교 개교(1927년) 이후 현재까지 학생들의 역사 교육장소로 관리해 왔으며, 의당 초등학교 건립 시 동 부지를 확보하여 관리하였다. 비계실이라는 자연마을 사람들은 이 터를 <정승의 집터>라고 일컬었으며, 절제선생의 순천 김씨 가문이 멸문을 당한 이후 현재까지 다른 가옥이 건축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면서 <김종서 생가지>로 불리웠다.

 

1960년대까지 의당 초등학교에서 학교와 학생 중심으로 관리하던 생가지는 1981년 공주시에서 <충익공절제김종서장군유허비>를 세우고 주변을 정리하여 향토문화재자료로 선정되었다.

 

90.보광사 산신도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7호

지 정 일 2007.09.20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장기면 은용리 400-1 
시 대 일제강점기

 

보광사 산신도는 소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산신과 호랑이, 그 옆으로 쟁반에 주전자와 찻잔을 든 동자, 그리고 포도와 산삼, 영지버섯을 들고 있는 동자로 구성되어 있다. 배경으로 붉은 해와 둥근 모양으로 잎을 채색한 소나무, 먼산의 능선은 푸른색으로 가까이 있는 산은 검은색으로 능선을 그리고 푸른 태점으로 마무리하였는데 마치 민화 그림을 보는 듯 경쾌하고 재미있는 모습이다.

 

보광사 산신도는 흐트러짐이 없이 안정된 구도에 민화성이 강조된 그림이다. 투명한 망건 등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산신과 같은 비율로 그려진 동자의 모습이라든지 구체적이고 정확한 지물의 표현 등이 특징이다. 특히 민화 또는 무속화와 불화가 결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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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있는데 공주 문화재에 대해서 하고 있어요. 그래서 공주 문화재에 대한 사진과 설명 좀 해주세요. 공주의 문화재 90가지를 올려드려요^^ (공주의...

공주 문화재

공주문화재 석장리 좀 간단하게 요약해주세요 방학숙젠데요 일주일 남았어요ㅠㅠ 가능하면 8월 28일 금요일 전까지 빨리 알려 주시면 감사하고 감사하겠습니다^^ (내공...

공주 문화재에대하여....(웅진)

제가 내공도 드릴게요 제가 여태까지 준사람이 10명도넘어요 꼭 공주 문화재 최대한많이 조사해주세요. 알쪄? 최대한 내가 좋은 내공으로 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공주 문화재

... 공주의 유적지, 백제시대문화재, 생가, 사찰, 사당 및 역사적 무덤, 사적지, 산성, 전설 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요. 꼭 답해 주세요 우선 공주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는...

충청남도 공주 문화재..

... 충청남도 공주 문화재루 올려주세요.. 사진두 함께 올려주시는 분께 채택해 드릴께요~ 제발부탁 ㅠㅠ 머리가 지끈지끈 너무 길게는 노~ 짧게 올려주세요 내공냠냠...

공주 문화재 사전조사

... 6.문화재 1)공주 공산성 종 목 사적 제1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산성동 2외 시 대 백제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에 있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부여&공주 문화재 좀 알려 주세요~~

공주&부여 문화재 좀 알려 주세욤~♥ 최대한~~~~빨리 알려주시면 감사~~♥ 욕설이나 관계없는 글 올리면 신고~!!!! 빨리 해주세여~♥ 내공 10드림 저두 먹고는 살아야...ㅋ 네 공주...

공주 문화재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 문화재 보호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제발 오늘 9시까지 공주, 부여, 서울 이 3가지 를 다 해주시면 내공 20드릴게요. 제발요 부탁드려요. ㅠㅠ 1. 백제...

공주문화재

... (내공냠냠 사양이에요) 음. 사진은못붙였고요 ㅈㅅ 공주문화재를알려드릴개요 공산성,가척리석탑,송산리고분,황새바위,곰나무사당 ㅈㅅ이것들밖에모르겠내염 그럼 ㅂ2ㅂ2

공주문화재

공주문화재를 알려주셈요! 오늘 밤 8시 까지염 마곡사 계룡산국립공원 무령왕릉 국립공주박물관 공산성 동학사 갑사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왕금관식 백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