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나라의 민속 공예품

다른나라의 민속 공예품

작성일 2007.11.0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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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학교에서

다른나라의 민속 공예품을

만든다는데요 뭐가 적절할지 몰라서요

내공 줌

부탁함~~~


#다른나라의 민속무용 #다른나라의 민속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도움이 되길 바라며...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3&dir_id=310&docid=597723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특징과 다른나라 현대 미술의 특징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3&dir_id=310&docid=578716

 

우리나라의 미술과 동양 미술의 시대별,영역별 특성 및 미적가치 조사하기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3&dir_id=310&docid=345371

 

서양과 우리나라의 작품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13&dir_id=130701&docid=320537

 

서양 미술 작품과 우리작품비교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3&dir_id=310&docid=526237

 

조선중기(정선미술이후)과근대서양미술(인상주의)비교!!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13&dir_id=130701&docid=278665

 

1) 우리나라 미술의 특징 (추상적)

 

모든 미술 작품이 작가의 사상, 생활, 감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한 나라의 미술은 그 민족의 민족성, 역사,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일찍부터 대륙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워 온 우리 민족은 자연 환경과의 조화 속에서 소박하고 창의성있는 조형세계를 이루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 미술은 우리 민족의 생활 정서와 감정이 솔직하고 수수하게 표현되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부드러움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담담하고 조용하여 다소곳한 미덕을 장점으로 하는 미술이다.

 

우리 나라의 미술은 선사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 현대 등으로 구분된다.

선사시대의 미술은 조형성(造形性), 구체성보다는 평면과 선에 의존하면서 추상주의적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선사시대에서 시작된 기하학적 무늬는 신라 토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원래는 북방적 추상양식 전통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삼국시대로 들어가면서 우리 나라 미술은 자연주의 양식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그것이 우리 민족의 자연에 대한 사랑, 자연에의 의존심에 뒷받침되어 우리 나라 미술 특유의 평화롭고 인간미 있고 인공의 가식이 없는 순수한 자연의 미를 나타내려는 한국적 미술양식을 형성해 나갔다.

 

2) 서양 미술의 특징 (사실적)

 

서양 미술은 구석기 시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알타미라 동굴 벽화),신석기시대,그리이스 미술(기하학적 양식 시대,헬레니즘 시대),중세의 회화(비잔틴 미술,모자이크,로마네스크 미술,고딕 미술)중세 말엽 ~ 르네상스 바로크 . 로코코양식,19세기 미술(고전 주의,낭만주의,리얼리즘,인상 주의),20세기 미술(모던 아트,야수파 ,표현주의,입체파,추상 미술,절대주의,미래파,오르피즘),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초 현실주의,순수 주의),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액션 페인팅,추상 표현주의,드립 페인팅,팝 아트,테크놀로지 아트 비데오 아트,미니멀 아트,개념 미술)등으로 구분된다.

 

서양화에는 서양사람들의 생각과 역사가 녹아있게 마련이다. 동양화는 선과 묵의 농담을 통해 주로 이상향이나 정신세계를 표현해왔다면 서양화는 색깔과 조형미를 중요시해 왔다. 바로 눈으로 보이는 현실세계다. 르네상스 이후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고 생각한 것과 무관치 않다.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특징을, 정물화에서는 구도와 함께 오감을 자극하는 사물에 대한 대상을, 풍경화에서는 기독교 사상이 배어 있는 이상향이나 아름다운 전원에 대한 그림을 그린것이 특징이다

내용출처: 검색

 

서양미술사의 발전순서에대하여 http://artworld.co.kr/art/body.htm

 

 

우리나라 미술(삼국시대~현대)

 

 

 

. 자연주의:

자연을 존중하는 태도, 나무를 반듯이 깍아내지 않고 사용한 한옥기둥, 운치있는 장독대, 성곽, 왕릉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

조형의 요소중에서 특히 선묘에 능했다. 우리나라의 산세의 모양, 한복의 곡선, 한옥의 곡선, 진경산수화, 문인화, 풍속화, 민화 등에서 나타나는 유려한 선을 잘 표현하였다.

 

. 정신적 표현:

서양의 물질적인 표현에 비하여 작가의 내면 또는 인물의 내면을 살리는 그림을 즐겨그림.

 

. 농담표현:

서양의 명망법에 견줄 수 있으며, 먹의 농담을 통해 사물을 표현함

 

우리 나라의 미술

우리 민족은 동북 아시아에 속하는 한반도를 무대로 인접한 대륙 문화와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가꾸어 왔다. 일반 건물의 위치, 마당, 담장에 이르기까지 지형을 이용한 자연미가 한껏 반영되었으며, 이러한 자연과의 음화적 감정은 유연한 곡선이라든지, 인위적 기교를 부리지 않는 소박성, 자연적 기능성에 치중함으로써 한국적인 독특한 멋을 창조하였다. 부드러운 선, 아담한 형태,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우리 미술의 특징이다.

 

1 . 선사 시대 미술

구석기 시대에는 몇몇 유적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며,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고인돌 선돌이 발달하였다.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다가 차츰 무문 토기로 바뀌었고, 독자적인 청동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2. 삼국 시대 미술

고구려 미술 국내성과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많은 분묘의 축조와 그 내부의 벽화를 통해서 뛰어난 건축술과 조형 기법을 발휘하였다 고분 벽화는 4세기에서 7세기까지 그려졌는데, 주된 주제는 영생 사상을 반영한 죽은 이의 생활이다. 고구려 미술의 특징은 씩씩하고 패기 넘치는 기상에 있다 또,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가 전래되어 불교 미술을 발전시켰다.

백제 미술 백제의 미술은 남조와의 빈번한 교류로온화하고 유려한 양식을 이루었으며, 일본과의 교류로 일본 불교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불교 미술 중 정림사지 5층 석탑, 미륵사지 석탑 등은 백제풍의 단순하고 균형 있는 절제된 정형을 보여 준다. 공예는 부여 귀암면 절터에서 발견된 화상전(산경문, 산수귀문 등)이 유명하다

신라 미술 적석총이 발달했으며, 석조 조각이 번성하여 능묘의 호석, 십이지신상과 반가사유상 양식,석조여래상을 비롯한 삼존불상 양식이 유명하다.건축은 사원과 석탑 등이 많이 축조되었다. 현재 첨 ,성대, 석굴암, 석가탑, 다보탑 등 일부 석조 건축물이 남아 있으나, 목조 건축물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이 시기에 축조된 첨성대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한국 고유의 풍토적인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라의 대표적인 공예품은 금동 장신구, 금관, 금귀걸이, 금띠, 금장도, 금팔찌 등 다양하고, 특히 순금공예품과 토기의 소박성은 귀중한 자료로서,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3. 고려 시대 미술

통일 신라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의 미술은 건축이나 불상, 도자기, 금속 칠기 공예 등 귀족적인 취향의 미술이 발달하였다.도자기는 상감 기법과 특유의 비색을 지닌 독창적인 상감 청자를 만들어 우리 나라 도자 공예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금속 공예로는 범종과 사리탑의 사리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불기가 있다. 또, 나전 칠기가 매우 발달하여 당시의 귀족적인 생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4. 조선 시대 미술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 시대 미술은 승문천기(崇文賤技) 사상이 예술을 지배하여 상류 계급에서 천시한 예술이 서민층으로 확대되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회화는 도화서를 중심으로 한 원체파(院體派)와 사대부 계급의 비 전문적인 문인화의 두 가지가 성행했다. 조선 시대의 대표 작가로는 안견,강희안, 최북, 정선,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 서예가였던 김정희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조선 시대에는 민

화가 발달하여 호랑이 그림, 용 그림을 위시해서 책거리, 화조도, 행락도, 풍속도, 십장생도 등을 그렸다. 조각은 불교의 쇠퇴로 불상 조각이 퇴조하게 되며, 건축은 궁전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지붕의 선, 창살의 다양한 형식 등 풍토미를 구현하였다.

공예는 소박하고 서민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도자 공예와 목공예, 나전 칠기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도자공예는 순백을 기조로 한 백자가 주로 제작되었으며,고려 청자의 고유한 비색을 잃게 되면서 출현한 분청사기와 청화 백자가 만들어져 함께 사용되었다. 목공예는 나뭇결의 무늬를 살려 서안, 문갑, 사방 탁자 등의 생활 용품이 만들어졌다.

 

5. 근·현대 미술

19세기 말에 서양 미술의 도입으로 우리 나라 미술은 새롭게 전개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덕수궁 석조전, 고딕식 건축인 명동 성당, 로마의 개선문을 모방한 독립문 등이 세워졌으며 점차 새로운 건축 기술의 발달로 기능미를 살린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었다.조소는 새로운 서양식 기법과 추상 조각이 도입되면서 더욱 발전하였으며, 대표적인 작가로는 김복진, 윤효중, 김종영, 권진규 등이 있다.

전통 회화의 작가로는, 구한말 어진 화가로 북화풍의 화풍으로 많은 초상화와 화조화를 그린 김은호, 간결한 구도와 현대적 감각으로 산수화를 그린 이상범, 거친 필치로 설경을 그린 변관식 등이 있다.또, 우리 나라에 서양화를 처음 들여 온 고희동 이후에 작가들이 외국에서 서양화를 배워 오면서 다양한 양식의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서양화가로는 도상봉,구본웅, 오지호, 김종태, 이인성,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이 있다.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재료가 개발되면서 표현 방법이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우리 나라의 현대 미술은 세계적인 미술을 지향하면서 각종 국제 교류전에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비디오 아트와 행위 예술과 같이 여러 가지 재료와 기법을 이용한 표현 방법의 다양화로 새로운 경향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연가7년명 금동 여래 입상(청동/높이16.2cm/539년/삼국시대 고구려 /국보 제119호(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현존하는 삼국시대 불상 중에서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목조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일본 국보 제1호/호류사 소장)머리 위의 보관이나 손 모양,앉은 자세들은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너무도 흡사하다.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청동/높이 93.5cm/7세기/삼국시대 신라/국보 제83호)살며시 고개 숙여 깊은 사색에 잠겨 잇는 표정에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서산마애 삼존불상(화강석/7세기경/높이2.8m/삼국시대 백제/국보 제84호)바위 면에 조각한 불상을 마애불이라 한다.흔히'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이 불상은 밝고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상(화강석/높이/326cm/8세기/통일 신라 시대) 대좌 위에 근엄하게 앉아 있는 본존불은 명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모든 신체 부위가 원만하고 형태와 균형이 조화를 이룬다.

 

 

 

경복궁 지붕 위의 잡상(조선시대)궁궐의 건축에서만 볼 수 있는 잡상은 원숭이를 비롯한 여러 동물들로 이루어져 있으며,지붕을 타고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기능을 한다.

 

 

 

선인 잡상(토우/높이37cm/조선 시대)잡상들 중에서 제일 앞에 있는 것을 '선인' 이라고 한다

현명(나무/높이165cm/1942년 작)윤효중(1917~1967한국) 동세와 질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소년(청동/높이140.5cm/1943년작)김경승(1915~1992한국)

 

 

작품s-75(나무/32X19X62cm/1981년 작)김종영(1915~1982/한국) 단순한 구조와 풍부한 양감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아그네스(청동/104X35X183cm/1954년 작)김세중(1928~1996/한국)

 

 

 

케이지(TV모니터,피아노선/183x61x228.6cm/1990년 작)백남준(1932~ /한국)첨단 장비와 재료를 이용하여 새로운 표현의 세계를 열었다.

 

 

 

작품 64-2 /김종영 (金鐘鍈:1915~82) / 1964년 / 동(銅) / 55.6×12.8×12.5cm http://hanson.new21.net/art/korean/k-img2/김종영1.jpg

 

해방 후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현실에 동요치 않는 선비적 체취와 과묵하고 성실한 예술가적 기질로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작가의 개성이나 기교에 치우치지 않고 동양의 관조적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자연이나 사물의 질서에 대한 관찰과 이해를 토대로 하여 생명의 내재율을 단순하게 형상화하였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구조주의적 경향의 추상조각을 시도하는데, 이 작품은 그의 몇 안되는 구상적 인물조각으로 재료 역시 드물게 사용한 브론즈이다. 한 손을 머리 뒤로 올린 채 서 있는 나부의 모습을 최소의 표현으로 만든 이 작품은 미완성된 듯한 소박한 형태에서 원시적인 생명감이 느껴지며, 잔잔한 터치의 표면처리로 포근한 느낌을 주고 있다.

 

물동이를 인 여인 /윤효중 (尹孝重:1917-67) / 1940년 / 나무 / 125×48×48cm

 

 

물동이를 이고 가는 전통 한국여인의 모습을 소재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현존하는 몇 안되는 초기작 중 하나로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었다. 억세어 보이는 팔을 걷어 부치고 물동이를 인 채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는 모습은 관념적인 인물이 아닌 현실 인물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또한 작품 표면에 남겨진 거친 칼자국은 토속적인 느낌과 함께 회화적인 효과를 주고있다

 

지원의 얼굴 /권진규 (權鎭圭:1922~73) / 1967년 / 테라코타 / 48.5×34.9×29cm

http://hanson.new21.net/art/korean/%B1%D9%B4%EB%C7%F6%B4%EB10.htm

 

그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비구니나 여인을 모델로 하여 많은 인물흉상을 제작하였는데, <지원의 얼굴>은 실제 인물에 기초한 초상조각으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권진규의 초상조각들은 로댕이나 부르델 같은 근대적 양식의 영향을 이어 받았지만 그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의 실존적 체험을 기반으로 명상적인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목이 긴 여인이 표정없이 고개를 들고 있는 이 작품은 의상이나 장식이 극히 단순화되어 금욕적이며, 허공을 응시하는 여인의 시선에서 고요한 침묵과 동양적 관조가 느껴진다

http://hanson.new21.net/art/korean/k-img2/권진규2.jpg

손 /권진규 (權鎭圭:1922~73) / 테라코타 / 27×25×61cm

 

토르소 (Torso) / 김정숙 (김정숙:1917-1991) / 1970년대후반 / 청동 / 41×38×93.5cm http://hanson.new21.net/art/korean/k-img2/김정숙1.jpg

 

그의 작품세계의 주된 소재는 바로 인체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추상화, 순수화 되는데. 특히 대리석, 나무, 청동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하여 제작된 <토르소>라는 일련의 작품들은 1967, 69, 70, 75, 80년 등 전생애에 걸쳐 나타난다. 이 작품은 1970년대 후반에 제작된 청동 작품으로 직선과 곡선이 적절히 배합되어 인체의 조형적 특성을 간결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 표면의 매끄럽고 차가운 금속적 느낌에도 불구하고 하단의 견고하고도 부드러운 수직적 구성으로 인해 인체가 마치 자라나는 나무와 같이 보이며 상단의 풍부한 표현은 여체의 부드러움을 상기시킨다. 김정숙 조각의 이러한 순수성, 자연적, 유기적 특성은 콘스탄틴 브랑쿠시 (Constantin Brancusi), 헨리 무어 (Henry Moore), 장 아르프 (Jean Arp) 등의 작품에서 그 맥락을 짚어볼 수 있다

 

고대 아부심벨신전 [ Abu Simbel Temple ]고대 이집트의 암굴신전(岩窟神殿).

누비아 지방의 아부심벨에 있으며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301∼BC 1235)가 천연의 사암층(沙岩層)을 뚫어서 건립했다.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러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되어 있다. 대신전은 정면 높이 32m, 너비 38m, 안쪽 길이 63m이며 입구에 높이 22m의 람세스 2세의 상(像) 4개가 있다. 제1실에는 람세스 2세를 오시리스 신을 본떠 만든 8체의 상과 6면의 넓은 전쟁화(戰爭畵)와 명문(銘文)이 있다.

제2실과 제3실의 벽화는 종교의식(宗敎儀式)에 관한 것이고 제4실에는 4개의 신상(神像:라호라크티, 아몬레, 프타하, 람세스)이 있다. 신상은 항시 어둠 속에 있으나 2월 20일경과 10월 20일경 두 번만은 아침 해가 신상의 전신을 비치게 되어 있다. 다만 죽음의 신 프타하만은 그때도 어둠 속에 있다. 이 날짜의 의미에 대한 정설은 아직 없다.

소신전은 대신전에서 90m 떨어진 북쪽에 있는데, 정면 높이 12m, 너비 26m, 안쪽 길이 20m이며 입구에 높이 10m의 상 6개가 있다. 4개는 왕을, 2개는 왕비를 나타낸다. 제1실에는 12개의 하트호르 여신상(女神像)의 기둥이 있으며, 각 기둥에는 왕과 왕비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벽면에는 왕이 포로를 희생으로 신에게 바치며 왕비가 옆에 시립해 있는 그림이 있고, 제3실에는 공물봉헌(供物奉獻)의 그림이 있으며 안쪽 중앙에는 소의 모습을 한 하트호르 신상이 있다.

아스완댐 건설에 따라 이 지점의 수위(水位)가 60m 높아져 수몰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으나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의 헌신적인 노력과 현대공학의 혜택으로 1963∼1966년에 이 신전을 원형대로 70m를 끌어올려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

고대

 

람세스 2세 상

사진제공 : ⓒ 이미지월드

아부 심벨 신전 조각(석회암/좌상 높이20m/B.C. 1250년경/이집트)파라오의 절대 왕권과 사후 세계를 중시한 이집트에서는 거대한 분묘 조각과 신전 조각으로뚜렷한 양감과 정면성의 법칙에 따른 부동적 표현을 중시하였다.

 

 

 

상처 입은 사자상(석회암/높이/53cm/7세기/메소포타미아)여러 민족의 흥망 성쇄가 거듭되었던 지역은 화려한 흙벽돌의 궁전 건축과 전투,사냥 등을 소재로한 조각이 발달하였다.

 

 

히두리아누스(대리석/높이61cm/117~138년/로마)거대한 로마제국은 그리스 미술을 바탕으로 합리성과 실용성을 추구하여 황제나 장군등의 사실적인 초상 조각이 주로 만들어졌다.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대리석/높이/242cm/B.C.175년경/그리스)서양문화의 모체라고 하는 그리스미술은 신전 건축과 인체조각이 발달하였다.

 

 

중세

 

http://life.edunet4u.net/contents/art/source/see/jpg0344.jpg

 

 

성모의 죽음(대리석/1230년경/스트라부르 대성당/프랑스)중세미술은 성서내용을 소재로 하여 교회의 내부와외부를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피에타(대리석/높이174cm/1498~1500년 작)미켈란젤로1475~1564이탈리아- 피에타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의몸을 안고 슬퍼하는 성모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을 말한다.

 

 

 

미켈란젤로1475~1564이탈리아- 다비드(대리석/높이5.49m/1501~1504년 작)-피렌치 시를 상징하는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 조각의 이상미와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지옥의 문(청동/높이635cm/1880~1917년 작)로댕(1840~1917프랑스)-로댕은 종래의 관습에서벗어나 인간을 새롭게 해석하여 강렬하고 대담하게 표현하였다.건물의 부속물로 여겨졌던 조각을 자유롭고 독립된 예술로 확립시겼으며,조소에 생명을 불어 넣어 현대조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옥의문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최대의 역작이다. 단테의 '신곡' 중에서 지옥편을 주제로 하여 만든

이 작품에는 고통과 절망에 빠진 180여명에 달하는 인물이 격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이 작품 속에 표현된 '생각 하는 사람' '세 망령' '입맞춤' 등은 독립된 작품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닌다.

 

 

로댕(1840~1917프랑스)-생각하는 사람(청동/높이200cm/1888년 작)거칠고 힘이 넘치는 인체표현으로 처참한 지옥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깊은 고뇌에 잠겨 있다.

 

 

지중해(청동/높이104cm/1902~1905년 작)마욜(1861~1944프랑스)

 

 

수탉(청동/높이103.5cm/1935년 작)브랑쿠시1876~1957루마니아;극도의 단순화 과정을 거쳐 공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왕과 왕비(청동/높이163.9cm/1952~1953년 작 무어1898~1986영국)인체의 변형을 통해 양감과 공간감을 표현하였다.

 

 

걸어가는사람(청동/높이47cm/1960년 작 자코메티1901~1966스위스

http://cbingoimage.naver.com/data2/bingo_64/imgbingo_63/jjeonim/19667/jjeonim_16_m.jpg

 

 

 

 

 

인디언 깃털(알류미늄판,스테인레스 강철,채색/높이347cm/1969년 작 콜더1898~1976 작은 흔들림에도 공간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둘러싸인 섬들(폴리프로렌 섬유/전체 길이11.2km 1980~83년 작 크리스토1935~불가라아->미국 자연 전체를 표현의 대상으로 삼은 대지 미술이다.

 

 

우연한 만남(석고,물감,금속 표지판 104 x140 x313cm /1997년 작 시걸1924~ 미국 일상적인 모습을 주제로 현대인의 삶을 반영하였다.

 

 

 

문화유산-

 

만리장성; 중국-원강 석굴

 

 

.[ 萬里長城 , Great Wall of China ] 중국 본토의 북변, 몽골 지역과의 사이에 축조된 성벽-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關]에 이르며,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5,000km에 이를 것이다. 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의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연(燕) ·조(趙) ·위(魏) ·초(楚)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BC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하자, BC 214년에 그때까지 연 ·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 ·개축하여, 서쪽의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서 황허강[黃河] 서쪽을 북상하여 인산[陰山]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뻗어 랴오둥[遼東]의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함으로써 흉노(匈奴)에 대한 방어선을 이룩하였다. 다시 한대(漢代)에 이르러 무제(武帝)는 BC 2세기 말에 영토의 서쪽 끝인 둔황[敦煌] 바깥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장성을 연장하였다.

진 ·한 시대의 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한 것은 거란(契丹) ·돌궐(突厥) 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즉, 북위(北魏)는 5세기 초에 장성을 보강하고, 중엽에는 수도 평성(平城) 부근에 또다른 성벽을 구축하였다. 또, 북제(北齊)는 6세기 중엽에 오늘날의 다퉁[大同] 북서쪽에서 쥐융관[居庸關] ·산하이관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하고 다시 뒤이어 현재의 네이창청[內長城]에 해당하는 곳에 중성(重城)을 구축하였다. 한편, 오늘날의 허난성[河南省] ·산시성[山西省] 경계 북부를 타이항 산맥[太行山脈]을 따라 남하하는 장성도 북주(北周) 방어대책으로 그 무렵에 축조된 것인 듯하다. 그 후 수(隋)나라는 오르도스[鄂爾多斯] 남변에 장성을 구축했고,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장성의 훨씬 북쪽까지 그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또 오대(五代) 이후에는 장성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치되었다.

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대(明代)에 들어와서였다. 영락연간(永樂年間:1403∼1424)부터 보강이 시작되어, 정통연간(正統年間:1436∼1449)에 내장성이, 성화연간(成化年間:1465∼1487)에 오르도스 남변의 장성이 수축(修築)되고, 다시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는 동쪽 일대의 장성이, 15세기 중엽∼16세기 초엽에는 오르도스 서쪽 끝에서 란저우[蘭州]를 거쳐 자위관에 이르는 장성이 완성되었다. 명(明)나라는 이 장성지대를 9개의 군관구(軍管區)로 나누어 구변진(九邊鎭)을 두고, 장성을 통과하는 교통요지, 즉 옌먼관[雁門關] ·쥐융관 ·구베이커우[古北口] ·장자커우[張家口] 등지에는 견고한 관성(關城)을 설치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의를 상실하고, 단지 중국 본토와 둥베이[東北:만주] ·몽골 지역을 나누는 정치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편, 축성의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전(塼) ·돌 등이며, 성벽은 높이 6∼9m, 폭은 상부 4.5m, 기부(基部) 9m이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윈강석굴 [ 雲崗石窟(운강석굴) ]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서쪽 15km, 우저우강[武州江] 북안에 있는 사암(砂岩)의 낭떠러지에 조영(造營)된 중국에서 가장 큰 석굴사원-전체길이는 동서로 약 1km에 이르며 석굴의 총수는 42개이다. 동쪽 언덕에 제1∼4동(洞), 중앙 언덕에 제5∼13동, 서쪽 언덕에 제14∼42동이 있다. 북위(北魏)의 역사서 《위서(魏書)》의 〈석로지(釋老志)〉에 따르면, 사문통(沙門統:종교장관) 담요(曇曜)가 당시 문성제(文成帝)에게 석굴 조영을 주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담요 오굴(五窟)'이라고 불리는 제16동에서 제20동까지가 이때에 만들어진 석굴로, 460년대 초에 조영된 것이다.

윈강석굴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의 양식은, 제20동의 노좌대불(露座大佛:높이 14m), 제19동의 대불(높이 약 17m)을 중심으로 하는 조상(彫像)에 초기 양식이 표현되어 있는데, 치졸하지만 소박한 면과 선으로 구성된 서방 양식이 풍부한 작풍이다. 담요 이후는 전통과 외래 양식이 혼합되면서 다양해졌다. 이 석굴의 융성기는 486년 전후였는데, 이 무렵의 불상은 중국 고대의 복제(服制)를 모방하였다. 신체보다도 복제 표현에 유의하여 조각하였고, 얼굴은 길며 매우 신비롭다. 북위불(北魏佛) 또는 육조불(六朝佛)이라 하여 후에 하나의 조상 기준이 된 것도 이 무렵의 불상이다.

이 석굴은 북위의 문화사적 유산일 뿐만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서북 인도·중앙 아시아와의 문화적 교류 및 한국과 일본의 고대문화를 만들어낸 아시아 문화 생성의 자취를 입증해 주는 중요한 유구(遺構)라고 할 수 있다

 

.타지마할-인도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1648년 건립자 : 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 우타르프라데시주(州) 아그라 교외 아그라성(城) 동쪽 약 2 km, 자무나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만들어진 궁전형식의 묘묘(墓廟)이다. 타지마할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으로, 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이 애비(愛妃) 뭄타즈 마할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1630년부터 18년 동안 국가의 재정이 기울어질 정도의 거액을 들여 완성하였고, 전제국(全帝國)의 재보(財寶)와 미술 ·공예품을 한데 모아놓았다.대문을 들어서면, 길 중앙에 있는 일직선의 풀이 양 옆의 나무의 녹색을 비추고, 우유 빛깔의 대리석으로 된 돔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태양 광선은 대리석을 그물모양으로 투조(透彫)한 2중장치를 통하여 돔 내부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곳에 황제부처의 묘관을 안치하였다. 특히 달밤의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 없으며, 인도 ·페르시아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서 세계적으로 이름높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모헨조다로-파키스탄

 

 

.모헨조다로유적BC 3000∼BC 1500년에 번영한 인더스문명의 중심을 이루는 도시유적.모헨조다로는 ‘죽음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파키스탄의 인더스강 서쪽 연안인 신드 지방의 라르카나 지구에 있다. 1921∼1931년 J.H.마셜, E.마케이 등이 발굴하였고, 1950년에는 R.휠러도 조사하였다.

도시는 남북으로 주축이 된 큰 통로에 의하여 바둑판처럼 구획되었고, 서쪽의 중앙에는 높게 기단(基壇)을 쌓은 성채가 있다. 동쪽의 시가지는 4개의 큰 통로에 의해 9블록으로 구획되었고, 다시 각 블록은 몇 개의 직교하는 작은 길로 나누어져 각 호(戶)가 배치되었으며, 가옥은 벽돌로 지었다. 성채는 성벽으로 둘러싸였는데, 높이는 최고 12 m이고 남북으로 긴 모양이며, 규모는 430×230 m 정도이다. 성채 안에는 사원으로 생각되는 대규모의 건물, 큰 욕장(浴場) ·곡물창고 ·회의장으로 추정되는 건물 등이 있는데, 특히 욕장은 욕통의 크기가 19×7.5 m, 깊이 2.5 m이다. 그 성격은 공공용(公共用)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채 ·시가지와 함께 배수설비도 완비되어 있어 각 호에서의 배수는 지하의 배수로에 의하여 큰길의 본하수도로 흐르도록 되어 있다.

이 면밀한 도시계획은 벽돌의 크기나 자 ·저울추의 출토에서 볼 수 있는 도량형의 규격화와 함께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그 밖에도 토기 ·동기(銅器), 아직 해독되지 못한 문자를 새긴 인장(印章), 장신구 등의 유물이 있다

 

.히메지성-일본;호류사 5층 목탑

 

[ 姬路城 ]히메지성-일본 효고현 히메지에 있는 성 소재지 : 일본 효고현 히메지 시대 : 1600∼1609년해발 약 45m인 히메야마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시라사기성[白鷺城]이라고도 한다. 1600∼1609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사위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가 건설하였다. 일본 성곽 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목조건축의 예술성과 장식면에서도 뛰어나다. 메이지 시대에 파괴되지 않았던 극소수 성곽 가운데 하나여서 대천수각(大天守閣)·소천수각·성문 등 주요 건축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약 15m의 돌담을 쌓고 그 위에 세운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으로서, 대천수각과 동·서·북서쪽 소천수각들의 사이를 연결한 천수각군은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를 이룬다. 천수각을 비롯한 모든 건축물에는 흰 회반죽이 칠해져 있다.

대천수각은 밖에서 보면 5층, 안은 7층인 성으로서 남아 있는 천수각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서쪽과 북서쪽 천수각은 밖에서는 3층, 안은 5층인데 북서쪽의 것은 2중 팔작지붕과 3중 팔작지붕을 직각으로 교차시킨 형식으로 되어 있다. 지붕에는 헌당 박공을 대었고 맨 위층 창문에는 회칠을 하였으며 금으로 꾸민 화두창(花頭窓)을 내었다.

동쪽 소천수각은 외관 3층, 내부 4층으로 규모가 작다. 1993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일본 나라현 이코마군 이카루가정에 있는 불교유적-이카루가정[斑鳩町]에 있는 불교 건축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가장 대표적인 호류사는 607년 창건하였으나 벼락에 불타 711년 주요 건축물을 다시 세웠다. 금당과 5층탑이 있는 사이인[西院], 유메도노[夢殿]·전법당(傳法堂)·회전(繪殿)·사리전(舍利殿)이 있는 도인[東院]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서 2중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구조는 정사각형 모양이고 측주(側柱)와 입측주(入側柱)의 높이를 같게 만들었다. 건물 옆면에는 구름무늬를 음각으로 새긴 난간을 둘렀고 문은 노송을 통째 사용하여 만들었다.

아스카시대 양식의 5층탑은 7세기 말에 금당과 가까운 곳에 세웠다. 기단은 2중이고 평면 구조는 네모 모양으로서 1층부터 4층까지 각각 3칸씩이며 탑신은 급하게 가늘어진다. 1층 내부에는 가운데에 심주(心柱), 둘레에 사천주(四天柱)가 있다.

중문은 5층탑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아스카시대 양식의 건축물로서, 정면은 4칸이고 한가운데 기둥이 세워져 있다. 회랑은 단랑식(單廊式)인데, 안쪽 기둥 간격이 넓고 바깥쪽은 넓은 연자창으로 되어 있다.

쇼토쿠태자가 건립한 호키사[法起寺]에는 685∼706년에 걸쳐 완성된 가장 크고 오래된 3층탑이 있다. 각층의 규모와 형식은 호류사 5층탑의 영향을 받았다. 호린사[法輪寺]에도 3층탑이 있는데, 현재의 탑은 1944년 벼락으로 불에 탄 것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1993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앙코르와트와 인면상-캄보디아

 

앙코르와트 [ Angkor Wat ]캄보디아에 있는 앙코르문화의 대표적 유적.앙코르톰의 남쪽 약 1.5km에 있으며, 12세기 중반경에 건립되었다.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하지만, 반영구적 사원은 아니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神)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장식 ·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바깥벽은 동서 1,500m 남북 1,300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m의 해자(垓字)를 건너면 3기(基)의 탑(塔)과 함께 길다란 익랑(翼廊)이 있고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참배로(參拜路)를 따라 475 m쯤 가면 중앙사원에 다다른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 m)이 4 m, 제2회랑(115×100m)이 12m, 제3회랑(60×60m)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은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 m의 중앙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四角錐)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石彫裝飾)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全長) 760 m에 이르는 제1회랑벽(回廊壁)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泉水],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柱廊)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舞姬) 아프사라스,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뱀, 창문·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앙코르왕조는 13세기 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하여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와트도 정글 속에 묻혀버렸다. 1861년 표본채집을 위해 정글에 들른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곳을 발견, 그때부터 다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지역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전화(戰禍)와 약탈로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난 채 나뒹굴고 대부분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완전한 복구는 어려운 상태이다. 82년 집계에 의하면 앙코르와트의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 %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 ·파괴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83년 이 유적지의 복원을 위해 조사단의 파견을 캄보디아 당국에 통보한 바 있다

 

 

 

내용출처 - 대한교과서

 

35000 알타미라와 라스코의 동굴 벽화

4000 우르크의 지구라트

http://infobbs.net/sdata/2002/6%B9%DD/2629/a7.htm

출처

 

3000 이집트,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 출처

 

2000 스톤 헨지

 

크레타의 크노소스궁,

http://www.oldhome.pe.kr/losthistory/roma/creta.html

출처

 

투탕카멘의 묘 http://www.newtonkorea.co.kr/newton/magazine/newton/2003_02/description.htm

 

 

 

1000 바빌론,이슈타르문

http://bingoimage.naver.com/data2/bingo_35/imgbingo_46/chowonjung/17642/chowonjung_25.jpg

 

500 페르세폴리스의 궁전 http://chungbuk.ms.kr/social/10jang/4/perse.htm

 

 

438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도리스식)

200 사모드라케의 '니케'

http://www.newtonkorea.co.kr/newton/magazine/newton/2000_9/sub132.htm

 

 

100 라오콘 군상 http://baejeong.hs.kr/art/artex/greek/greek800/hele/hele1.htm

 

 

 

기원후

80 로마 ,콜로세움

 

120 판테온 신전 재건 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99462

 

 

 

 

900 퀼른 대성당

 

 

1118 피사 대성당(로마네스크 양식) http://www.arin.pe.kr/west_2_2.htm

 

 

 

1260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http://www.art2me.org/images/Chartres.htm

 

 

 

1300 대표적인 고딕 건축; 랭스 대성당

 

조토,아레나 예배당-프레스코

 

 

1432 도나텔로,'다비드'   http://www.arin.pe.kr/west_3_1.htm

 

 

 

반에이크,'겐트의 제단화' http://bonjour9.hihome.com/index-nation/y-Bavo.html

 

 

 

1480 보티첼리,'비너스탄생' http://www.arin.pe.kr/west_3_1.htm

 

 

 

1498 레오나르도 다 빈치,'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아테네 학당

 

 

http://211.114.54.26/dotom1/

 수업사진자료들/대한교과서/미술문.... 학습

 http://211.114.54.26/dotom1/%BC%F6%BE%F7%BB%E7%C1%F8%C0%DA%B7%E1%B5%E9/%B4%EB%C7%D1%B1%B3%B0%FA%BC%AD/%B9%CC%BC%FA%B9%AE%C8%AD%C0%AF%BB%EA%C0%C7%C0%CC%C7%D8.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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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소장

작가 : 신윤복

종류 : 비단 위에 채색

크기 : 114.2×45.7㎝

 

 

제작연도 : 18세기 말기~19세기 중기

세로 114.2㎝, 가로 45.7㎝이다. 비단 위에 채색을 하였으며,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윤복은 조선 후기 사람으로 김홍도(金弘道)·김득신(金得臣)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꼽힌다.

그의 풍속화들은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하여 준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는 짤막한 찬문(贊文)과 함께 자신의 관지(款識)와 도인(圖印)이 곁들여 있지만, 한결같이 연대를 밝히고 있지 않아 화풍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 작품은 신윤복의 사실주의적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그림으로, 머리는 트레머리라고 하는 가발을 얹어 장식하고, 저고리 춤이 짧고 너비가 넓은 치마를 입고 삼작노리개와 고름을 수줍은 듯 매만지고 있는 젊은 여인을 묘사하였다. 동그랗고 자그마한 얼굴에 둥근 아래턱, 다소곳이 솟은 콧날과 좁고 긴 코, 약간 통통한 뺨과 아담한 입, 가느다란 눈썹에 쌍꺼풀이 없이 긴 눈, 귀 뒤로 하늘거리는 잔 귀밑머리털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 미인상을 보여준다.

쪽물을 들인 회청색 치마에 받쳐 입은 남자주색의 삼회장저고리, 옆구리의 자줏빛 고름 등은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우리 나라 옷맵시의 멋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또한 말려올라간 치마 끝으로 한쪽만 살짝 드러나는 외씨버선과 고개 숙여 응시하는 여인의 표정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해준다.

신윤복은 이러한 전통적 미인을 섬세하고 깔끔한 선으로 그려내고, 엷은 채색을 함으로써 더욱 단아한 분위기를 나타내었다. 한편 기법상으로 볼 때 얼굴의 묘사에서 입체적인 표현을 하려는 의도보다는 단지 선으로 간명히 그리고 있어 사녀도 계층의 전통적 수법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왕족이나 사대부의 권위적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화로서의 예술성이 높은 걸작이다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했을 것 같은 신윤복의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빈치의 모나리자Mona Lisa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富豪)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를 위해 그 부인인 엘리자베타(Elisabetta)를 그린 초상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

작가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1452.4.15~1519.5.2

종류 : 패널화

크기 : 77×53cm

제작연도 : 1503∼1506년

소장 : 루브르미술관

유채(油彩) 패널화. 77×53cm. 루브르미술관 소장.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도 한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엘리자베타의 약칭이다. 조 콘다부인은 G.포지의 조사에서 피렌체의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라르디니의 딸임이 판명되었다. 이 작품은 부인의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이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었는데, 왕에게 4,000에큐에 팔려 퐁텐블로성(城)에 수장되었다. 때때로 세정(洗淨)도 하고, 광택용 니스를 바르기도 한 관계로 전체에 균열이 생겨 제작 당시의 시원스럽고 여유 있는 필치는 볼 수 없다.

 

이 초상에는 처음부터 눈썹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典型)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것을 그리기 위해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心氣)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神技)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기(傳記)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시대에 해당하는 1503∼15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風說)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다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일찍이 《모나리자》가 대낮에 루브르미술관에서 도난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물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

1935미인도 '조선 시대의 미인도‘ 를 감상하고 표현의 특징을 살펴본다.

 

빌렌도로프의 비너스(석회석/높이 11㎝/구석기 시대/오스트리아)

기원전 30000~25000년경에 만들어졌다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머리만 있고 눈과 입은 확실하지 않은 왜곡된 형태의 여인상으로, 지나치게 큰 유방과 기형적인 작은 생식기를 가졌다 이 여인상은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성적, 상징적 매력 때문에 그 당시에는 우상으로 섬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밀로의 비너스(대리석/높이 204cm/B.C. 2세기 후반/그리스)

고대 그리스의 조각 작품으로 1820년 키클라데스 제도의 하나인 밀로섬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된 대리석 아프로디테 (비너스)상이다. 여신은 앞으로 내민 왼발을 약간 위에 올려놓고, 오른발에 체중을 싣고 섰다.하반신은 옷으로 가려졌고, 상반신은 나체이며, 두 팔은 없어졌다. 온갖 경위를 거쳐 프랑스 주재 터키대사 드 리비에르가 이 상을 구입하여 국왕 루이 18세에게 증여하였고,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의 중요한보물 중의 하나이다.

 

 

조춘도(비단에 수묵/158×108cm/1072년 작)

곽희(1020?~ 1090?/북송 시대/중국)

곽희는 이성의 산수화법을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필세가 웅건하고 수묵이 간결하고 맑으며, 초기의 그림은 필법이 세공이었으나, 말년에는 웅장하고 높은 절벽을 자유분방하게 잘 그렸다. 그는 이론에 밝아 일찍이 임천고치집(林泉高致集)'이란 화론 속에서 삼원법을 논하여 동양화의 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산수화로 동양의 노장 사상에 가장 접근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대표작인 조춘도는 수려한 산수 속에 봄을 맞이하여 움틀대는 생동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1. 서양의 중세 종교 미술을 이해하였는가?

2. 동양의 사상을 지배하던 불교 미술을 이해하였는가?

 

 

 

밀라노 대성당(높이 108m/1577년 완성/이탈리아)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의 중심 도시, 예부터 알프스 이북의 여러 지방과 교통의 요충으로 번창했고, 중세 말기부터 르네상스기에는 베스콘디가(家), 스포르차가(家)가 지배하는 공국으로 큰세력을 행사했다. 중세기 이래의 여러 가지 모뉴멘트가 많아 14세기 이후에 착공한 밀라노 대성당은 이탈리아의 고딕 건축이다.

 

샤르트르 대성당 북쪽 현관의 조각 작품(1194년 작/프랑스)

고딕 미술의 조각은 전시대의 변형이나 과장과는 달리 사실에 의한 이상화 과정을 통해 풍부한 감동적 표현을 이루어 냈다. 성상들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으며, 그들이 두르고 있는 옷 주름의 흐름도 그 밑에 살아 있는 육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조각상들은 성인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들이 누구의 상(像)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앞에 세우고 있는 늙은 사람이 아브라함임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또한 모세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십계명이 새겨진 명판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하는 데 사용했던 뱀이 감긴 기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왼쪽에 있는 사람은 구약 성경(창세기 14장18절)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제사장이며, 전쟁

에 승리한 아브라함을 맞기 위해서 '빵과 포도주를 가져온'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다.

교과서 예시 작품 해설

 

왕좌에 앉은 성모와 아기 예수(목판에 템페라/81.5×49cm/1280년 경)

천사들의 보위를 받으며 옥좌에 앉아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제단화는 종교적 명상과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제작되었다. 옷 주름이 몸 전체를 감싸고 팔꿈치와 무릎에서 방사선처럼 퍼져 나가는방식이나 그림자가 지게 하여 얼굴과 손의 입체감을나타내는 방법, 더 나아가 성모의 옥좌 부분의 묘사

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과 연관이 있다.템페라는 주로 중세 제단화 제작에 사용되던 기법이다. 접착성이 강한 달걀의 흰자, 꿀, 송진 등에 안료를 섞어서 그리는 기법으로, 유리알처럼 윤택이 나는

표면 효과를 낼 수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13세기/프랑스)

고딕 건축의 중요한 특징인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서의 내용을 반투명 색유리 조각을 연결하여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어 '하느님의 집'에 알맞은 환상적, 천상적 공간을 연출해 내는 데 부족함이 없다. 샤르트르 대성 당에는 약 140개의 창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는데, 장미 형태의

창에는 기하학적 기본 도형 속에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서적 내용을 적과 청의 강렬하고 대담한 색면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은 빛이라는 중세인들이 갖고 있던 특유한 미의식을 읽을 수 있다

종교 미술

예배, 전래, 수신(修身), 포교 등의 종교 활동에 수반하여 전개되는 미술의 총칭이다. 종교의 형식에 따라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신 혹은 신적 인격의 회화나 조각에 의한 형상화이며, 그 자체가 예배의 대상이 된다. 특히, 기독교나 불교에서는 각각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의 언행을 중심으로 하는 성전이 중시되며, 그 도상(圖像) 표현이 많은 작품들을 창출했다. 물론 신의 집으로서의 신전, 성당, 사원들의 건축도 중요하고, 종교 의식에 사용하는 각종 소도구 등 공예품도 포함된다. 유태교나 이슬람교에서는 유일 절대신의 도상 표현은 불가능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물이 중심이 된다. 원래 종교와 예술은 인간 생명의 가장 원시적인 표현이

고, 종교 경험이나 예술 경험도 상상적인 의식의 고양과 긴장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친근성을 가진다. 따라서, 종교가 인간 생활을 강하게 지배하던 고대부터 중세까지 중요한 미술 작품의 대부분이 종교로 말미암아 생겨 났으며 ,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작품 없이는 종교 활동이 성립되기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현이 많은 작품들을 창출했다. 물론 신의 집으로서의 신전, 성당, 사원들의 건축도 중요하고, 종교 의식에 사용하는 각종 소도구 등 공예품도 포함된다. 유태교나 이슬람교에서는 유일 절대신의 도상 표현은 불가능하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물이 중심이 된다. 원래 종교와 예술은 인간 생명의 가장 원시적인 표현이고, 종교 경험이나 예술 경험도 상상적인 의식의 고양과 긴장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친근성을 가진다. 따라서, 종교가 인간 생활을 강하게 지배하던 고대부터 중세까지 중요한 미술 작품의 대부분이 종교로 말미암아 생겨 났으며 ,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작품 없이는 종교 활동이 성립되기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간다라 불상

파키스탄 북부, 대략 지금의 페샤와르에 해당하는,과거 간다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원초 수 세기간 번영했던 조각 위주의 불교 미술을 말한다. 이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동서 문화의 교류가 촉진되고 서방 요소가 짙게 나타나는 정형화된 불상 중심의 미술을 낳았다 또, 불교 미술은 인도, 중앙 아시아, 중국에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다

 

간다라 불상에서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고수 머리가 아니고 물결 모양의 장발이라는 점과, 용모는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것이 마치 서양 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또, 얼굴의 생김새가 인간적이고 개성적이라는 점, 착의(着衣)의 주름이 깊게 새겨져 있고,그 모양이 자연스러워 형식화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즉, 간다라 불상의 표현

은 그리스풍의 자연주의,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굽타 조의 미술

굽타 조는 320년 인도의 동부, 마가다 지방(현재의비할주)에서 흥기 (興起)한 후 영주가 계속 출현하여 인도의 북반 일대를 거의 지배하에 두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약 300년 간 지속하였다. 굽타 제국의 음성과 고전 문화의 전개, 확산을 배경으로 5~6세기에 높은

이념과 세련된 기법을 바탕으로 극히 수준 높은 미술을 개화시켰다. 불교 미술은 마투라와 사르나트가 제작의 중심지로 지도적인 구실을 했으며, 특히 불상에 있어서 원만하고 단정하며 엄격한 인도적 고전 양식을 완성시킨 것 외에도 굽타 문화권에 석굴 사원의 제2의 전성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또, 아잔타 석굴에는귀중한 벽화를 풍부히 남겨 놓았다.

 

아잔타 석굴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 주아우랑가바드 동북 약100km에 있는 불교 석굴사원이다. 미완굴을 포함하여 30굴의 석굴이 있고, B.C. 100년경부터 7세기 전기까지 계속 조성되었다. 기원 전후의 제1기 굴은 구조도 간단하고 조각도 거의 없으나, 굽타조 이후의 제2기 굴은 건축적으로도 정돈되고 조각과 장식도 화려

하다. 벽화는 약 반수의 석굴에 그림을 그린 흔적이 있고, 제9, 10 양굴은 기 원전으로 거슬러올라간 불교 회화의 최고의 유품이다. 벽화는 템페라 계통으로 그렸으며, 설화화, 존상화, 장식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제1굴 후랑벽의 ‘연화수보살' 과 제16굴 좌랑벽의'난다의 처의 탄식' 등은 솜씨가 탁월하다. 조각은 제

19굴과 제26굴의 풍부한 제존상과 설화도가 주목된다. 아잔타 석굴은 건축, 조각, 벽화 등 세 장르를 두루 갖춘 인도 유일의 유적으로서 매우 중요하며, 벽화는 동아시아 불교화의 원류로서 귀중하다.

 

윈강 석굴(높이 13.4cm/북위 460~467/중국)

중국 산서성 대동에서 서쪽으로 15km지점에 있는불교 석굴군을 말한다. 무주천의 남서 절벽에 조성되었으며, 옛날에는 무주새(塞)라 불렸다. 길이 약1km, 큰굴 21, 중굴 20 등 무수한 소굴과 불감(佛龍)으로 되어 있다. 석실은 밝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거의 전부가 북위 시대에 개착하였다. 『위서석

노지』에 의하면, 화평 원년(460)에 사문통 담요(沙門統 曇曜)의 발의로 선제(道武帝, 明元帝, 太武帝. 太子광)와 금상(今上 文成帝)을 위하여 5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최대의 석굴은 동형의 제19동인데, 높이16.48m의 좌불본존, 주위 벽에 천불. 좌우에 협시불

이 있는 협동(脇洞)으로 되어 있다. 제20동의 본존은높이 13.46m의 좌불로 앞벽이 떨어져 나가서 노좌이다. 어깨가 벌어진 상체와 융기선에 의한 옷주름은 아프가니스탄의 버미안 대불을 연상시키며, 평안하고 늠름한 면모는 운강 초기의 특징이다 초기의 신체에 밀착했던 옷과 융기선에 의한 무늬는 말기에는 전신을 덮는 두꺼운 주름살로 변하고 옷자락과 소매부분에서는 수건처럼 퍼진다  

 http ://www.arthall.net/khistory/bbo1396.htm

 

 

 

 

 

 

 

 

 

반가사유상

보살 사유상이라고도 한다.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그 무릎 위에 얹는 일종의 반가좌법의 불상으로서 대좌 위에 걸터앉아 바른 팔꿈치로 무릎을 짚고 그 손가락으로 바른 빰을 고이며 심사하는 자세의 보살상 을 말한다. 인도에서는 간다라와 마투라에 그 유례가 있다(3세기경). 불좌상의 양협시의 한 형식에서 출발하여 단독상으로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이미 5세기 말 윈강에 교각 미륵상과 불좌상의 협시로서 좌우 대칭적 상용으로 나타나는데, 동시에 불전에서의 태자 사유의 정경에 이 포즈를 써서, 단독상으로 태자 사유상이라 명하는 것도 있다. 이 상형은 6세기 후반의 북위 시대에 가장 성행하였고, 한국의삼국 시대에도 전래하여 많은 명작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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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ulkwang.org/1997/8/970822.html

 

 

석굴암 및 불국사

 

통일 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751년(경덕왕 10년), 당시 재상 김대성의 감독하에 조성되었다. 불국사는 임진왜란 때에 전소된 것을 40여 차례에 결쳐 중수하였다. 1972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하여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주요 문화 유산으로 다보탑(국

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등이 있다. 고도로 발달된 기하학을 응용해 빈틈 없이 설계된 석굴암은 완벽한 조화의 세계를 구현하였다. 중앙에 위치한 본존불은 높이326cm의 당당하고 원만한 풍채와 부드럽고 인자한 표정으로 종교적 숭고미와 완벽한 조각 예술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미륵하생경 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 비단에 채색/171.8×92cm, 부분/1350년 작/고려 시대)

 

도솔천의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당시까지 구제되지 못한 모든 대중을 성불 시킨다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도해한 것이다. 이 처럼 일종의 교화용 경변상도이지만, 본존 미륵불을 크게 클로즈업 시켜 화면을 압도하도록 구성했기 때문에 예배용 존상화적인 성격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화면은 크게 2등분되는데, 상부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들을 성불시키기 위해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고, 하부는 미륵하생경이 설해진 시두말대성(翅頭末大城)의 여러 가지 모습을 그린 설명적인그림인데, 상부 그림은 화면의 2/3를 차지하고, 하부그림은 화면의 1/3을 차지하기 때문에 하부 그림은화면 구성상에서도 상부 그림을 설명하는 부수적인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의 상부의 중앙에는

미륵불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불상 무릎 좌우로 두 협시보살이 좀더 크게 묘사되었는데, 이 삼존은삼각형 구도를 보여 주고 있다. 미륵불 주위로는 보살중 10대 제자들이 좀더 작게 그려져 있으며. 이 주위를 제석, 범천, 4천왕, 8부중 등이 둘러싸여 있다 발원자는 현철(玄晳) 스님이고, 미륵불이 하생해서설법하는 법회에 참석하여 언제나 법을 듣고 중생을제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에서 조성한 것이며 , 그림의 작자는 회 전(情前)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과서 예시 작품 해설

고사관수도(수묵/23.4×15.7cm)강희안/1417~1464/조선시대)

 

안견과 함께 조선 초기의 회화를 대표하는 강희안은 문인 사대부 화가이다. 그는 명대의 원체화풍 및 절파의 화풍을 그 나름대로 소화해 개성 있는 회화 양식을 창출해 내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대표되는 '고사관수도’ 는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을 배경으로 바위에 두 팔을 모아 턱을 괸 채 앉아 수면을 바라보고 있

는 선비의 모습을 다루었다.강렬한 흑백의 대비 효과와 속도감 있는 날렵한 필선, 거칠면서도 거침없는 먹의 사용은 격조 높은 문인화의 경지를 보여 준다.

 

초충도(채색/34×28cm) 신사임당(1504~1551/조선 시대)

 

신사임당은 시서화에 뛰어나고 자수도 잘한 조선의대표적 여류 화가이다. 이 '초충도’ 는 두 개의 수박을 중심으로 그 줄기와 화초, 생쥐, 나비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구성의 묘를 살리고 있다.

간단한 주제를 안정된 구도 속에 아담하고 음영을 살린 설채로 섬세하고 부드럽게 표현한 점이 사임당의 초충도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흑포도도(수묵/27×22cm) 황집중(1533~?/조선 시대)

 

조선 중기의 황집중은 특히 포도를 잘 그려 이정의 대나무, 어몽룡(魚.蒙龍)의 매화와 함께 3절(三絶)로 일컬어졌다. 이 흑포도도는 농묵을 써서 화면을 왼편으로 가로지르는 줄기를 배치하고 이와 평행하다가 교차하는 또 하나의 줄기를 담묵으로 묘사하여 변화감이 있으면서도 안정된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줄기들의 위쪽에 붙어 있는 포도 알들도 서로 다른 먹으로 음영을 구사하여 입체감이 변화감 있게 표현되었다.

 

고매서작(수묵/부분) 조속(1595~1668/조선 시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비 화가로 시서화에 뛰어났던 그는 까치와 물새를 소재로 한 수묵 화조화에서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화풍을 이룩하고, 조선중기에 있어서 이 분야의 제일인자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높은 매화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의 까치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는데, 안정된 구도와 섬세한 표현은 그의 명성과 화풍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달마도(수묵/83×57cm) 김명국(1600~?/조선 시대)

 

영조 때 도화서 출신의 화가로, 호탕한 솜씨로 수묵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다. 달마도는 선종(禪宗)의 시조인 달마 대사를 그린 선종화로서, 두포(杜浦)와 옷주름에 나타난 극히 함축적이고 생략된 몇 개의활달하고 생동감 넘치는 선들이 화면 전체에 강렬한느낌을 주고 있으며, 얼굴 부분의 담묵의 가는 필선은 9년 동안 면벽좌선(面壁座禪)으로 고양된 그의 내면의 세계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재빠른 필선의 속도에서 작가의 활기차고 호방한 기질이 느껴 진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대리석/높이/12m/조선 시대)

 

국보 제2호로 지정된 이 탑은 대리석으로 독특하게 만들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조각이 석재와 잘 어울린다.고려 시대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모양과 수법이 비슷하다. 기단부는 3층이며 아자형(亞字刑)으로 구성되었다. 각 층마다 여러 가지 형상을 조각으로 장식하고 있다. 아래에는 용, 사자, 연화문 등이 새겨져 있고, 중간에는 인물, 짐승, 나무, 궁전 등이 새겨져 있다. 위에는 나한과 선인들을 조각하였다. 4층부터는 사각형으로, 그 윗부분은 일반형 석탑과 그 형태가 같다.탑이 있는 일대는 세조 13년(1467)에 건립된 것이므로 이 탑도 이 때에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8, 9, 10의 3개 층은 오랫동안 지상에 내려져 있었으나 1947년 복원되었다.

 

분청사기·조화 쌍어무늬 편병(15세기/조선 시대)

 

납작하게 두들겨 만든 병에 물고기 두 마리와 꽃무늬가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려져 있다. 태질(胎質)은 거칠고 유약도 발색이 청아하지 못하나 이러한 조형과 소박한 의장에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종묘(1395년 창건/조선 시대)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의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유교적 전통 신전이다 종묘는 의례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제례를 지내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절제된 건축미와 엄숙한 제례 의식 유연한 분위기가 감도는 공간이다. 주요 문화 유산으로 정전(국보 제227호), 양녕전(보물제821호), 종묘 제례악(중요 무형 문화재 제1호), 종묘 제례(중요 무형 문화재 제56호) 등이 있다.

 

와이기(수묵 담채/27×22.7cm) 김홍도(1745~?/조선 시대)

 

김홍도는 산수, 영모, 화조화 등에 모두 능한 화가였다. 특히, 풍속화와 신선화에 기량이 뛰어난 화가였다.

기와이기는 모두 25점으로 이루어진 '단원 풍속화첩'의 한 작품으로, 기와를 이어 나가는 광경을 실감나게표현하였다. 배경은 생략되어 있고, 인물을 중심으로생활 속의 한 장면을 화면으로 구성하였다.인물의 동작과 표정에서 생동감을 느끼게 하며, 화면의 짜임이 자연스럽다.

 

묘작도(수묵 담채/93.7×43cm/17세기경) 변상벽(조선 시대)

 

변상벽은 도화서 화원으로 고양이를 잘 그려 변고양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졌다. 이 '묘작도’는 고양이와 참새를 소재 삼아 간결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구도

를 통하여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정확한 형과 정교한 필치로 그린 고양이와 고목의 메마른 듯한 거친 표현은, 조선 초 이암 등에 의해 이루어졌던 영모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재 초상(채색/97×56.5cm/18세기) 작자 미상(조선 시대)

 

이 작품은 18세기 초상화의 대표적인 명품으로 도암 이재(1680~1746)의 높은 학문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얼굴의 치밀한 필치와 대범하게 다룬 간절한 옷주름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인물의 높고 맑은 인상이잘 드러나 있다

 

금강전도(수묵담채/130.8×94cm) 정선(1676~1759/조선시대)

겸재 정선은 전통적인 관념주의적 화풍에서 벗어나경치를 직접 보고 그린 진경 산수화를 창출한 거장이다. 금강산 전체를 반부감법으로 포착하여 잡은 원형구도, 미점(米點)의 토산과 수직준의 암산이 이루는 대조, 실감나는 산의 분위기 묘사, 은은한 설채법 등은 그의 진경 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책거리(채색/53.6×28.5cm) 작자 미상(조선 시대)

‘책거리' (책꽂이)는 민화에서 자주 다루었던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 조선 시대의 서민 화가들이 글방의정경을 동경하여 밝고 화려하게 나타낸 그림이다.문방도 책거리 그림은 유교 사회의 문인 취향을 잘 표현한 그림으로, 주로 사랑방 서재 등을 주된 소재로 다루었는데, 글공부를 좋아했던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표현의 특징은 사물들이 장식성을 갖도록 매우 섬세하게 그렸으며, 한 곳의 시점 에서 보지 않고 사물마다 다른 시점에서 관찰하여 역원근법으로 나타냈다는 점이다.

 

영통동구(수묵 담채/32.8×54㎝) 강세황(1713~1791/조선 시대)

 

이 작품의 색감은 밝고 명랑하며, 구도도 매우 참신하다. 준법에서 벗어나서 대담하게 채색의 농담으로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산수 묘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다.

 

유압(수묵/119.5×47.8cm) 홍세섭(1832~1884/조선 시대)

 

이 작품은 대담한 시각 구성 법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화면 전체를 수면으로 가득 채우고 있으며,위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본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담묵과 여백을 교차하면서 표현한 물살은 힘찬 운동감과 함께 오묘한 입체감을 보여 준다.

수면에 잠긴 수초(水草)는 아주 엷은 먹으로 나타내고 그 위로 다시 농묵으로 물가의 풀잎을 표현하여 그 입체감은 더욱 살아나고 있는데, 군데군데 찍혀 있는 수묵의 반점들이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호취도(수묵담채/135.4×55.8cm) 장승업(1843~1897/조선 시대)

 

장승업은 산수, 인물, 사군자 등 모든 영역에서 그 기량이 뛰어나 화원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활발한 필력과 속기 없는 마음씨로 호탕한 그림을 그렸으며 대륙의 화풍을 받아들였다. 그의 개성이 잘 나타난 '호취도’는 고목의 줄기를 몰골법으로 표현하여 힘찬 필세를 보여 주며, 원가지의 꺾임새에서는 필묵의 멋이 한껏 느껴진다. 고목의 잎은 윤기 있는 설채로 운치를 살렸고, 두 마리의 독수리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계산무진/김정희 (1786~1856/조선 시대)

 

호는 추사, 완당이며, 조선 후기 최대의 서예가, 실학자, 금석학자이다. 그의 추사체는 독창적인 글씨체로,필획이 생동하여 점·획과 자형의 변화가 무쌍하다.전통적인 서법에서 벗어난 자유스런 구도와 강한 필선에서 작가의 독특한 필법을 느낄 수 있다.

 

신부성적(수묵 채색/47.5×67cm/1929년 작)

 

김은호(1892~1979/한국)

이 작품은 별도의 배경은 그리지 않았으나 중앙의 신부를 주인공으로 하여 더울세라 부채질을 하며, 한편에선 머리 매무새를 만지는 나이 든 여인들을 마치 삼존불(三尊佛)과 같은 구성으로 보여 주고 있다.출가를 앞둔 신부와 그 측근에 있는 두 여인들의 무표정해 보이는 모습을 통해 이별에 따른 애틋한 감정을차분하게 그려 내었다

 

산가청류(수묵 담채/60×130㎝/1960년 작)

 

이상범(1897-1972/7!7)

전통적인 산수화 기법을 현대적이고 개성적인 필치로 표현한 작품으로, 소재와 구도, 필묵법 모두 '청전양식'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 준다. 길게 흐르는 시냇물, 낮은 언덕에 가난한 오두막집과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소를 화폭에 그려 넣었다. 짙고 옅은 먹빛의 변화와 완숙한 붓놀림으로 한적한 시골의 정경을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다.

 

자화상(유채/61×46cm/1915년 작) 고희동(1886~1965/한국)

호는 춘곡(春谷)으로 최초로 서양화를 우리 나라에 도입하였다. 그는 생애의 중요한 시기에 서양화를 버리고 동양화로 복귀하여 전통 미술과 현대 미술 사이에서 고뇌를 겪었던 작가이다. 그의 자화상은 우리나라 양화의 효시로서 그가 남긴 몇 점의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남향집(유채/79×64㎝/1937년 작) 오지호(1905~1982/한국)

이 작품의 핵심은 집 앞의 고목이 밝은 빛을 받으면서 푸른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것에 있다. 집과 돌과 지붕들은 인상파 기법대로 색채 분할법으로 표현되어 밝은 햇살의 강도를 더욱 느끼게 해 주며, 문지방을 넘어서려는 소녀와 담장 밑 하얀 개의 표정에서 한낮의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다.

 

창신동집(유채/80×60.6cm/1950년 작) 박수근(1914~1965/한국)

 

이 작품은 확실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고, 색조는 토속적인 깊이와 질감이 조화를 이루는 황갈색의 분위기이지만, 소년과 소녀들의 옷색은 한결 다채롭게 표현되어 있다.

두텁고 우둘두툴한 질감과 색채 표현으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했던 박수근은 서민적이고, 향토적인 풍경을 정감 있게 표현한 작가이다.

 

작품(애칭/60.5×43.5cm/1973년 작) 박내현(1920~1976/한국)

 

 

운보 김기창의 아내인 박내현은 한때 비정형적 회화의 영향을 받아 그림이나 직조물에 생기는 우연한 비정형적 요소에 크게 비중을 두기도 했는데, 그는 의도적으로 그와 같은 성향을 절제하려는 또 하나의 의지를 뚜렷하게 대비시키고 있다.크고 작은, 불규칙적인 원형이 주요 형태 단위로 등장하는 이 판화는, 그 섬유적인 구조의 특성이 겉으로 두드러지며, 구성 의지가 매우 강한 그림이다.

 

내금강 단발령(수묵 담채/43×130cm/1969년 작)

 

 

변관식(1899~1976/한국)

소정(小亭) 변관식은 파묵과 적묵의 수법으로 한국의 산천을 그려 낸 화가이다. 그의 그림에는 한국의 풍토가 가지고 있는 소담하고 거친 정서가 담겨 있다. 단발령 고개에서 멀리 솟아오르는 금강산 1만2천 봉우리들이 병풍을 친 듯하여 화면에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단발령 고개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S자로 휘어뻗었다. 엷은 먹으로 설채하여 골짜기 산의 모습을 여

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무수히 반복적으로 찍은 점들은 절묘한 조형 효과를 낳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부감법이라는 시각 방식, 즉 마치 헬리콥터를 타고 항공촬영한 듯한 조망법을 통해 산천을 시원스럽게 화면에 전개해 주고 있다. 고개 너머 금강산과의 사이에 여백으로 남겨진 흰 안개 띠가 화면에 신비감을 더해 준다.

 

문자추상(종이에 구아슈/100×81cm/1979년 작)

 

 

이응로(1904~1989/한국)

한글 서체를 변형시킨 간결하고 단순한 형태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된다.문자가 가지는 특별한 이미지를 추출해 내거나 혹은 그 변형을 통해서 특별한 느낌을 연출해 내는 이 작품에서 , 고전적인 육중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것은 도상이나 그 바탕에 상당한 무게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춘몽(청동/43×30×55cm) 김경승(1915~1992/한국)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어깨를 치켜 올린 포즈에 여체의 매력이 구현되어 있으며, 살며시 감은 눈매에서 그의 꿈꾸는 마음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양감이나 모델링 등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된 작품이다.

 

황소(종이에 유채/30.5×41.3cm) 이중섭(1917-1956/한국)

이중섭은 인간적인 매력과 생애의 비극적인 종말 때문만 아니라 독특한 예술 양식으로 현대 미술의 기틀을 닦은 작가이다. 이중섭이 즐겨 다룬 소재는 동자가족, 풍경, 소, 닭 등이고, 모든 소재가 그와 동일시되고 있다. 이 작품은 소의 힘찬 모습을 분방한 터치로 그렸다. 단순한 형상의 묘사를 넘어서서 감정의 한 상태를 투시해 주는 깊이를 느끼게 한다. 이중섭이 소를 즐겨 그리게 된 동기는, 일제의 압박에서 시달리고 저항했던 민족 혼의 한 상징으로서 맑은 눈빛, 그 선한 일생, 때로는 분노하고 저항하는 소를 통하여 현실과 역사 의식을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날으는 새 두 마리(유채/46×56cm/1962년 작)http://deepen.namom.net/

 

 

김환기 (1713~1974/한국)

김환기는 한국 근대 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제시한 선구자로, 화면을 명쾌한 면 분할로 구성하고, 직선과 곡선, 색의 대조와 대비로써 경쾌한 그림을 그렸다.작품의 경향은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에서 출발하여 한국적인 형태를 바탕으로 한 반추상의 세계를 보이다가 미국 이주 후에는 완전히 추상화로 전환하였다.

 

물동이를 인 여인(나무/높이 128cm/1940년 작)

 

 

윤효중(1917~1767/한국)

고무신에 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걷는 모양을 나타내었다. 특별히 기교를 부리지 않은 사실적인 조각이다. 칼자국으로 거칠고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한국적인 시골 여인의 느낌을 한층 더해 주고 있다.

 

군마도(수묵 담채/149×320cm) 김기창(1914~2001/한국)

 

 

고개를 번쩍 들거나 고꾸라질 듯 달리는 말들의 생명력과 달리는 준마의 약동성이 잘 표현되어 있고, 갈기나 몸매의 붓선과 말들의 야성적인 모습이 예리하게 나타나 있다. 짙은 빛깔과 엷은 빛깔의 말이 알맞은 비율로 조화를 이뤄 수묵을 위주로 한 담채인데도 풍부한 색감을 느낄 수 있다

 

페왕의 환상(유채/150×200cm/1984년 작) 남관(1911~1990한국)

 

 

청색의 변화 있는 바탕에 적·녹색 등이 어우러져 화면을 활기 있고 화려하게 만들고 있다. 또, 화면에는 환상적인 상들이 상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침울하고 어두운 지난 날의 영상들은 생기 있고 동적인 상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는 1980년대에 이르러 밝고 생동적인 표현으로의 발전적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죽음의 영상, 태고의 잔영, 피해의 흔적 등과 같은 어두운 세계가 점차 빛이 있는 밝고 생기찬 세계로 전환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참고 사항 및 관련 자료

 

이삭줍기(유채/83.5×11㎝/1857년 작)

 

 

 

밀레(Millet, Jean Francois/1814~1875/프랑스)세 명의 농촌 아낙네들이 추수 후에 떨어진 이삭을줍고 있고, 멀리서는 수확을 마친 일꾼들이 많은 양의 농작물을 싣고 있다. 누그러진 황금빛 광선이 인물에 숭고한 위엄을 부여한다. 이 작품은 빈곤한 농민 계급에 대한 혹독한 사회적 비평을 담고 있다 밀레는 비참한 빈곤의 광경을 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해,농민들의 숭고한 노동과 흙에 대한 친근감을 묘사하면서 서사적인 영웅적 행위로 변형시켰다

 

안녕하십니까? 쿠르베씨(유채/129×149㎝/1854년 작)

 

 

 

쿠르베(Courbet, Gustave/1819~1877/프랑스)

쿠르베가 그의 후원자인 브뤼이아스로 하여금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게 해서 예술가의 면목을 의기양양하게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한다. 연장을 짊어지고 있는 화가의 모습은 쿠르베가 리얼리즘을 세계에 전파하는 사도로서 길을 떠나는 뜻이 담겨 있다. 쿠르베는 일상적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해돋이 인상(유채/50×65cm/1872년 작)

 

 

 

모네(Monet, Claude/1840~1926/프랑스)

마네를 중심으로 모였던 젊은 화가들이 살롱전에서 모두 낙선을 하자, 그들은 1874년에 낙선화 전시회를 열었다. 모네는 그 전시회에 '해돋이 인상'을 출품하였다. 신문 기자 루이 르루아가 그 전시회를 비난하는 뜻으로 인상파라 부른 것이 이 화가들의 역사적인 명칭이 되었다. 잔잔한 강 위로 붉은 기운을 뻗치며 막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돋이 순간의 인상을 빠른 붓놀림과 거침없는 필치로 표현하였다. 모네는 포구 풍경을 그렸다기보다는 자기 눈에 비친 색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유채/116×90㎝/1892년 작)

 

 

 

르누아르(Renoir, Pierre Auguste/1841~1919/프랑스)이 작품은 화사한 색채와 풍부한 양감으로 다정하게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의 모습을 정겹고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르누아르는 특히 여인의 그림들에서 다양한 기법과 형태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밝고 따뜻한 색감으로 풍만한 육체의 여인을 많이 그렸다.이와 같이,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통하여 가장 감각적인 인상주의 화가로 자리매김 하였다.

 

피리부는 소년(유채/161×97cm/1866년 작)

 

 

마네(Manet Edouard/1832~1883/프랑스)

근위군와 고적병(鼓笛兵)인 소년이 아무 것도 없는'사라진 배경' 앞에 서 있을 뿐이며 손과 발 부분을 제외하면 그림자 비슷한 것도 없고, 푸른색, 흰색, 빨간색 등으로 미묘하게 살을 붙인 넓은 색면에 의한구성은 기념비적인 위대성을 느끼게 한다. 대상을 이처럼 '공기로 감싸는' 수법을 그가 벨라스케스로부터 배운 것은 에스파냐에서 팡탕-라투르 앞으로 보낸 편지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유채/202×300cm/1884~1886년 작) 쇠라(Seurat, Georges/1859~1891/프랑스)

 

 

 

그랑자트는 파리 북서쪽 센강에 있는 섬의 지명이다.이 작품은 쇠라가 그 곳 일요일 오후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풍경이나 인물의 습작을 거친 이 작품은 처음으로 색조를 분할해서 시각적으로 혼합한 과학적인 회화 이론에 의해 실현된 대작이다. 처음 전시되었을 때 많은 미술가와 비평가들의 비난을 받았다. 당시 그들은 '점묘파'로알려진 쇠라의 혁신적인 회화 기법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림의 표현은 불연속이며, 물감은 순수한 색점의 형태로 캔버스에 칠해졌다. 멀리서 보면 이 점들은 함께 섞여서 밝은 색채로 된 마법적인 안개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쇠라는 32세의 나이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사과 광주리가 있는 정물(유채/65.5×81.3cm/1890~94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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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Cezanne, Pau1/1839~1706/프랑스)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세잔은 시골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파리에서 법학 공부를 하다가 미술로전향했다. 그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빛과 색채에 대한 탐구보다는 그림의 형태에 더 애착을 보였다. 1877년 고향인 프로방스로 간 후 비로소 그의 미술은 성숙하기 시작하였다. 시각 위주의 표현보다는 자신의 주관과 감정을 표현한 세잔은 모든 대상을 구,원뿔, 원기둥의 기하학적인 기본 형태로 보았다. 또한 모든 형상과 색채의 기본 구조는 근본적으로 같다고 생각하여 색채에도 기하학적 구조를 사용했다. 작은색 조각들을 부분에 칠하여 형태를 만들고 통합하여 입체적인 이미지를 쌓아 올렸다.'사과 광주리가 있는 정물'도 이런 이론적 기초 위에 그려졌다. 그는 기존의 공간 개념이나 원근법, 고유의색을 포기하고 모든 형태를 시각적으로 분석, 종합했다. 그의 사상과 이론은 20세기 현대 미술,특히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까마귀가 날으는 밀밭(유채/51×103.5cm/1890년 작)

 

 

 

고흐(Gogh, Vincent van/1853~1890/네덜란드)

이 작품은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의 마지막 작품이다.대지에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바다처럼 물결치듯 동요하는 것은, 이미 생 레미 시절부터 볼 수 있는 수법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은 창조의 카오스가 아니라 종말의 흔돈이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고흐는 분명히 종말을 예견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전망은 어둡다. 나는 미래를 행복한 빛 속에서 볼 수가 전혀 없다.’ '내 생활은 뿌리째 뽑히고, 내 발걸음은 비틀거리고 있다.' 그의 이 작품은 언어 이상으로 절망을 똑똑히 예고하고 있다.

 

부르타뉴 여인들(유채/66×92.5㎝/1894년 작)

 

 

 

고갱(Gauguin, Eugene Henri Pau1/1848~1903/프랑스)

남태평양 타이티섬 원주민들과의 생활을 이국적인 색채와 단순한 형태로 표현하였다.대담하고도 자연스러운 구도법이 주목되는 이 작품은 앞쪽의 인물 부분과 윗쪽 풍경 부분으로 화면이 사선으로 구분하여 양자 사이에 교감(交感)을 형성하고 있다. 고갱이 사용한 단순하고 강한 원색은 야수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칼레의 시민(청동/높이 230cm/1884~88년 작)

 

 

 

로댕(Rodin, Francois Auguste Rene/1840~1917/프랑스)

로댕이 노년에 제작한 작품 중에는 제작 당시에 인정받지 못한 것도 있는데, 특히 '칼레의 시민'은 당시 로댕에게 도시의 역사와 시민 정신을 나타내는 조각을 주문하여 제작되었으나, 영웅적인 모습을 바랐던 시민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 작품은 영국의 침범으로 칼레의 시민들이 학살 위기에 놓였을 때,시민 지도자 여섯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겠노라고 나섰고, 헌신적인 희생 정신에 감복되어 모두를 풀어 주었다는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로댕은 이들을 영웅화하지 않고 죽음에 직면하여 겪는 회의와 기독교적 숙명, 인간으로서의 반항과 슬픔등 복잡한 감정을 표출하였다.천천히 움직이는 각기 다른 시민 지도자들의 표정,동작과 의상을 통해 로댕은 인간의 존엄성과 용기,절망 등 내면의 심오한 감정과 정신을 표출하였다

 

지중해(청동/높이104cm/1902~1905년 작)

 

 

마욜(Maillol, Aristide/1861~1944/프랑스)

그리스 아르카익 조각의 단순성과 근대 정신의 역동성을 풍부한 양감으로 조화시킨 마을은 고향 지중해의 따뜻한 느낌을 단순한 형태와 부드러운 곡선, 풍부한 양감 등으로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움직임이 크지 않으면서 동세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힘있는 작품이다

 

 

피에로의 매장(색종이/42.5×65cm/1943년 작)

 

 

마티스(Matisse, Henri/1869~1954/프랑스)

말년에 병상에 눕게 된 마티스는 색종이 오려 붙이는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종이에 조각가가 돌에 직접 새기는 것처럼 직접 가위로 그리는 이 행위는 마티스에게는 생애의 화업의 총결산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색채 바로 그것 속에서 데생한다.' 는 호화로운 환희 속에 그를 잠기게 했다. 색채와 절묘한 구성력을 인정받은 마티스는, 이 색종이 그림 속에서 가장 순수한 색과 형의 결합을 실증하게 된다.

 

세네치오(유채/40.5×38cm/1922년 작)http://cbingoimage.naver.com/data3/bingo_95/imgbingo_96/hyeonghuii/28321/hyeonghuii_28_m.jpg

 

 

클레(Klee, Paul/1879~1947/스위스)

가면과 알록달록한 어릿광대 의상을 나타내는 원 속에 평면적이고 기하학적인 사각형들이 있다. 이 작품은 회화의 기본 요소인 선, 색면, 공간이 화가의 내면

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의해 움직인다는 클레의 미술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상상력이 넘치는 낙서를 통해 그 자신의 말대로 '선과 함께 산책하는 것' 을 좋아했다. 그는 바우하우스 디자인 학교에서 교육자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 주었다.

 

파란 풍경 속의 연인(유채/131×109cm/1945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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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Chagall, Marc/1887~1985/러시아→프랑스)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남자는 얼굴을 거꾸로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고, 원으로 둘러 있는 소박한마음을 따뜻하고 넓은 색면으로 채색하였다. 샤갈의작품에 나타나는 많은 이미지들은 어린 시절에 자주들었던 유태인 전설에 바탕을 둔다. 인간이나 동물,연인이 자유롭게 무중력 공간을 날고 있는 장면을 환상적으로 표현하였다. 꿈과 현실 세계를 풍부한 색채로 표현한 그의 회화 양식은 지적이면서도 유아적인 면모를 지닌다.

 

샘(오브제/높이 63cm/1917년 작)

 

 

 

뒤샹(Duchamp, Marcel/1887~1968/프랑스)

뒤샹은 변기에 R..뮤트라고 가명으로 서명하고 이를 전람회에 출품했다. 이 기괴한 물품은 일상 사물을 정상적인 환경에서 분리해 새롭고 낯선 환경으로 옮겨 놓는 개념의 실례를 보여 준다. 뒤샹은 바로 이 작품을통해 '레디 메이드오브젤’ 개념을 최초로 정의했으며,우연적인 한 기성품을 선택하여 제작하는 방법은 현대미술에 새로운 표현 방법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Maiastra(청동/높이 61cm/1912년 작)

 

브란쿠시(Brancusi, Constantin/1876~1957/루마니아)

브란쿠시는 현대 추상 조각의 선구자로서, 생략된 간결한 형태로 상징성이 강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는 로댕의 조수가 되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자신의 독특한 조형 세계를 펼쳐 나갔다.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여 동물이나 물질의 근원적인 생명감에서 나오는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를 통해 구상적인 요소를 신중하게 제거하여 갔다.

재질에 대한 예민한 감각, 볼륨을 주위의 공간으로 개발시키는 조형적 사고는 현대 조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곱 인물과 하나의 두상으로 된 구성(숲)(청동/45.7×58.4×57cm/1950년 작)

 

 

자코메티(Giacometti, Alberto/1771~1966/스위스)

거칠게 패이고 표면 질감이 강조된 이 여윈 기념비적인 인물에는 쉽게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힘이 있다. 부자연스럽고 길게 늘려진 형태를 통해 인간의 허약함과 존재의 덧없음을 강조한다. 자코메티는 금속 뼈대에 찰흙을 덧붙인 후 이를 다시 청동으로 주조했다.

 

와상(청동/35.5×77×33cm/1957년 작)

 

무어(Moore, Henry/1898~1986/영국)

기념비적이고 원시적인 속성을 지닌 이 소조는 인간보다는 자연의 힘에 의해 창조된 것처럼 보인다. 여성 신체의 부드러운 곡선과 흐르는 듯한 윤곽선을 세부적인 표현은 생략하고, 단순화된 덩어리로 형태를표현하여 공간감을 잘 살렸다. 고대와 원시 조각이 지닌 생명력에 영감을 받은 무어는 돌이나 나무를 직접조각하는 전통을 부활시켰다. 재료의 자연적 질감을강조하였으며, 대규모 작품에서는 의식적으로 풍경과암석의 외형, 특성을 반영하였다.

 

타코트 이 스라이만(아크릴/305×610cm/1967년 작)

 

 

스텔라(Stella. Frank/1936~/미국)

http://imagebingo.naver.com/album/icon_view.htm?uid=bell205&bno=14705&page=

 

이 작품은 조형의 단위를 최소한 집약하여 엄격하고 비개성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 스텔라는 종래의 캔버스 개념을 버리고 자유롭게 변형된 형태의 화면 구성을 전개하였다.

 

회화(아크릴/61×80cm/1948년 작)

 

 

 

폴록(Pollock, Jackson/1912~1956/미국)

폴록은 액션 페인팅으로 유명한 미국 추상 표현주의작가로서, 이전의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캔버스를 이젤에 세우지 않고 바닥에 커다랗게 깔았다. 그리고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의감정을 표현했다. 폴록에게 있어 화면은 실재의 대상을 재현하고 분석하여 표현하는 공간이라기보다 행위의 장으로서, 하나의 순간을 강조하는 장소였다. 또,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형태가 지니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새로운 질감 표현에 있다.

 

마릴린 먼로(실크 스크린/92×92cm/1967년 작)

 

 

 

워홀(Warhol, Andy/1928~1987/미국)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스크린 판화 방식을 이용해 열가지 색 조합으로 여배우의 화상을 놀랄 만큼 섬뜩하게 묘사하였다. 마릴린 먼로는 워흘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주제이다. 이 작품을 포함하여 먼로를 다룬 워홀의 다른 작품들은 선전용 스틸 사진을 이용해서 만들어 낸 차가운 이미지로 인물의 보편적인 흡인력을 증대시켜 준다. 먼로를 마치 대중 문화의 산물로 그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미국의 팝 아트 운동과연관지을 수 있다.

 

야구 방망이(강철, 알루미늄/높이 30.5cm/1977년 작)

 

올덴버그(Oldenberg, Claes/1929~/스웨덴→미국)

팝 아트의 대표적인 작가로, 대중에게 친숙한 작은 일상 용품을 거대하게 제작하여 독특한 환경성을 제공하였다. 야구 방망이 작품을 설치하여 야구로 유명한 도시의 이미지와 상징성을 반영시키고 있다. 금속을 용접하는 방법으로 제작하였고,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며, 하늘로 높이 치솟는 상승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스픈 브릿지-올덴버그

 

NORAX(아크릴/96×87㎝/1985년 작)

 

바자렐리(Vasarely, Victor/1905~/헝가리→프랑스)

체스 판의 무늬처럼 배치된 보라, 연녹색의 기하학적 형태들은 캔버스 위를 떠다니며 캔버스를 왜곡시킨다. 바자렐리는 서로 반대되는 원근법 체계와 극도로 대조되는 색채를 사용하여 착시 효과를 연출하고 그림에 운동감을 주었다. 따라서, 그림의 형태들은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1960년대에 팝 아트와 더불어 전개된 옵 아트는 시각적인 효과를 창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착시를 유도한다. 바자렐리는 옵 아트로 알려진 시각 예술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바자렐리는 지각의 개념, 정확한 기하학적원리를 이용해서 얼마나 사실적인, 혹은 모호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해 몰두하였다.

 

쇼핑용 수레를 미는 여인(폴리에스테르, 기타 161cm/1969년 작) 핸슨(Hanson, Duane/1925~/미국)

 

핸슨은 하이퍼 리얼리즘을 가장 실감나게 실천한 미국의 조각가로, 그의 인물 조각은 현대 미국인들의직장과 생활상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경비원 여행객,슈퍼마켓에서 물건 사는 할머니 등이 주를 이룬다.그의 인물 조각은 사람들이 말을 걸 만큼 실제 사람과 닮았다. 생명만 없을 뿐 인물 조각이 입은 옷이나 신은 구두, 안경, 시계도 실물과 똑같다 인체의 표면은아주 매끄럽게 만들고, 실물처럼 채색하며, 실제 털을 사용하여 눈썹을 붙이고 유리로 된 눈도 붙인다.그의 작품 '쇼핑용 손수레를 미는 여인'은 듬직한 체구에 편한 신발을 신고 느긋한 오후에 슈퍼마켓으로 쇼핑을 나온 미국의 40~50대 주부의 모습이다. 쇼핑용 손수레에 잔뜩 실은 물건은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와 소비 성향을 느끼게 하며, 팽팽한 치마와 머리에 감은 스카프, 팔에 걸친 팔찌, 입에 물고 있는 담배등은 여인의 호탕한 기질을 엿볼 수 있도록 세밀하게표현되어 있다.

 

공간 개념(유채/52×52㎝/1962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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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bingoimage.naver.com/data/bingo_41/imgbingo_93/idviki98/20053/idviki98_16_m.jpg 63키네틱 폰타나-빨강

폰타나(Fontina, Lucio/1899~1968/이탈리아)

푸른색으로 칠한 캔버스를 날카로운 칼로 수직으로 일곱 차례 베었다. 캔버스를 베어 버림으로써 그는 팽팽한 긴장감을 없애고 관람객이 캔버스 뒤편의 공간을 볼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의의는 전통적인 회화 체계를 거부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나무틀 위에 팽팽하게 펼쳐졌던 이차원적 평면에서 상징적이고 물리적인 탈출을 의미한다. 폰타나는 우리의 시선을 캔버스 뒤의 공간으로 이끓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창조하고 무한한 감정을 전달한다

 

세 개의 깃발(캔버스에 밀랍/76.5×116cm/1958년 작)

 

 

존스(Johns, Jasper/1930.5.15~/미국)1947∼1948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에서 배운 후 런던·뉴욕 버펄로 등의 여러 미술관에서 일하고, 1950년대 중반부터 R.라우션버그와 함께 팝아트의 선구적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8년, 1960년, 1961년, 1963년, 1966년, 1968년 뉴욕주(州) 레오카스텔리에서 개인전을 가진 한편, 1959년, 1961년 파리, 1959년 밀라노, 1960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州) 컬럼비아의 컬럼비아미술관, 1962년 파리, 1964년 뉴욕시 및 런던, 1965년 캘리포니아주(州) 패서디나미술관, 1966년 스미스소니언연구소, 1974년, 1975년 영국의 미술평의회 등에서 각각 개인전을 가졌다.

국기·표적·알파벳·숫자 등 신변에 있는 제재를 적극적으로 답변확정하여, 사물과 회화 이미지로 융합시킨 새로운 시야를 개척함으로써 종래 전위예술의 주류였던 추상표현주의를 네오다다이즘으로 발전시켰다. 주요작품으로는 《필드 페인팅》 《채색 브론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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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경부터 미국 국기, 미국 지도, 알파벳, 표적 등의 기호를 추상 표현주의풍의 필치로 그림으로써,‘그린다' 라는 행위와 '현실‘ 을 동일시했다. 뒤상으로 통하는 관념 사고가 강한 타입의 예술가로 '칠해진 브론즈' 등의 오브제, 혹은 타블로에 오브제를 도입한 작품도 제작했다. 또, 1958년 개인전 때에 '네오다다'라는 말이 붙여졌다. 라우션버그와 함께 추상표현주의에서 팝 아트로의 전환점에 위치한 작가로,1960년대 이후의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달리는 울타리(천/길이 약 39.4km/1972~1976년 작)

 

 

크리스토(Christo, Javacheff/1935~/불가리아→미국)

환경 조각가인 크리스토는 사물을 포장하는 것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큰 충격을 주는 것으로 작품이 화랑과 같은 실내 공간에 전시된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산과 제품의 일부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대지 미술(earth art)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대지 미술이란 자연을 표현의 재료 및 대상으로 삼아 자연이나 자연력을 긍정하고 이용하는 경우와, 자연을 강하게 변형시키거나 자연에 존재하는 조화를 깨뜨리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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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simage.naver.com/view?vn=vol2&id=23971

현대조소의 다양성-프랭키,코론...

http://210.204.226.10/artedu/hans-pic/dopan/c-3/data/3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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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edu4u.com.ne.kr/

 

박대주의 미술세계 - 뒤샹, 올덴버그, 스미슨, 크리스토 등 현대조각가 소개, 미술교육이론 수록.

 

 

 

 

 

 

서양미술

<<원시미술>>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미술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랜 된것은 구석기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년전의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그려지고 조각된 것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술적인 것으로 사료된다. 창에 찔린 동물들을 보면서 동물보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공포심을 제거하여 자신있는 사냥을 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미술속의 형상은 현실적인 것과 똑같은 힘을 같는다고 믿었으므로 다산을 기원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기원전 15,000~10,000 오스트리아)를 만들기도 하였다.

 

 

<<고대미술>>

 

1)이집트 미술 (B.C 3500-500)

 

기원전 5000년경에 이집트, 인도, 중국 등지에 흐르고 있는 나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인더스, 황해등의 비옥한 유역에서 각기 거창한 문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시대로의 생활양식의 전환이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관념없이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사지의 육체를 떠나 따로 삶은 누린다고 믿었다.

이러한 고대 이집트인의 사고 덕택에 이집트의 미술은 초시간적, 영속적기능을 하게된다. 또한 죽은자를 위한 미술이므로 아름다움보다는 미술작품에 영원성을 담으려했다. 예로 파라오 왕이 죽은후에도 생전과 같은 절대권력의 소유와 승천을 돕기 위한 [피라미드]를 들수있다. 그리고 그들은 명확하고 완전한 묘사를 위해 특징적인 각도와 전형적인 상황을 묘사했는데, 주인은 종보다 큰 점, 좌상의 경우 두손은 무릎위에 놓는 점, 남성의 피부색이 여성보다 검은 점, 모

든 인물이 어떤 기저선상에 놓이는 점 등이 예라 할 수 있다.

3000년간 지속된 이집트 미술은 비교적 정확한 부분묘사와 균형있는 신체비례를 보이는데, 이는 그들의 질서감각과 기하학적 규칙성을 보여준다.

 

 

2)메소포타미아 미술

 

기원전 3500년경에서 3000년에 걸친 기간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낀 비옥한 땅에서 수메르인들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태동한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는 모두가 신의 소유로서 신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그래서 신을 대신하고 있는 신관이 모든 국가의 행정을 통치하고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신전을 중심으로 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메르의 조각은 건축보다 많은 양의 작품을 아직까지 남기고 있는 데 그것이 바로 돌로된 소형 인물상군이다. 수메르의 조각가는 금속이나 나무를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고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이집트 미술가와 비교하여 훨씬 규칙에 속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그리스 미술 (B.C 7 - 4)

 

그리스 미술에서는 사물을 보는 시점이 이전의 왜곡된 방식이 아닌 올바른 방식으로 발전하여 이집트 미술에서 보이는 평면성에서 벗어나 공간감을 얻게 되었다. 공간감의 획득은 형상이나 인물 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설득력 있게 전달할수 있도록 하였고, 이것을 그리스 미술의 서술적기능(Narrative function)이라 한다.

그리스 미술을 크게 전기, 후기 헬레니즘으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전기 그리스미술 (B.C7 - 5)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미술이 극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미술의 서술적기능이 태동한 시기이다. 또한 원시적인 신들에 관한 전설이나 신화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함으로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시기이다. 따라서 기하학, 자연과학, 철학등의 학문이 아울러 발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미술로 도리아식 신전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을 들 수 있다.

 

후기 그리스미술 (B.C5-4)

페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여 정치적 번영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다양성을 후기 그리스 미술의 특징으로 들 수 있으며 대표작품으로 갸날픈 기둥에, 곡선이 가미된 기둥머리를 지닌 이오니아 양식으로 건축된 [에렉테움 신전]을 들 수 있다.

 

헬레니즘 미술 (B.C4-A.D1)

알렉산더 제국하의 미술양식을 말한다. 소아시아와, 인도국경, 이집트까지 영토확장을 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서방의 문화가 혼합되었고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이전의 기둥양식 보다 훨씬 강하고 화려한 인상의 코린트식 건축 양식을 들수 있다.

또한 조화와 균형보다는 제국의 위용에 걸맞는 강렬한 극적효과, 거칠고 인상적인 효과에 주력하였다.

격렬함과 긴장감으로 충만되어진 리시포스의 [라오콘]상은 이러한 특징을 잘 나타낸다. 대표작품으로 사모트라케섬의 [니케상], 밀로의 [비너스]를 들수 있다.

 

4) 로마 미술

 

그리스 패권을 둘러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헬레니즘 제국과 카르타고의 싸움이 치열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 공화국이 그리스인들보다 정치력과 군사적으로 우세한 힘을 기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리스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의 그리스 세계정복은 평소 그리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의 미술을 단번에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을 전파하게 된다. 그리스와 로마 미술이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로마 시대때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리스 출신이던가 거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로마인들은 그리스 시대의 미술품을 복제하거나 수집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그리스 미술을 그대로 복제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리스 형식을 변형하였다.

 

 

5)비잔틴 미술

4세기로부터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 데, 이를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서양 중세 미술

로마의 쇠퇴기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간의 미술이다. 로마의 미술이 현실적인 데 비하여, 중세의 미술은 초자연적이고도 상징적, 종교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다. 서양의 중세 미술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중세 미술에서 건축은 모든 미술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회는 신의 권위

의 상징이며 민중 신앙의 중심지로서, 위안을 얻으며 쉬는 장소로서, 중세적 사회 생활과 문화의 중심체였다. 따라서, 모자이크화나 프레스코화, 벽면 조각, 스테인드 글라스 등은 교회의 절대적 권위와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교회 건축의 부속물로 발전하였다.

1, 초기 기독교 미술

카타콤은 기독교도들이 지하에 묘소를 만들어 예배와 장례의 장소로 사용했고, 때로는 박해를 피하는 장소로 삼았던 곳이다. 카타콤은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데, 제실의 천정과 벽면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눈길을 끈다. 기독교의 묘소에 알맞은 평화스런 목가적 주제나 성서적 내용을 다루고 있다.

2. 비잔틴 미술

고대 로마 미술 및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에 고대 아시아의 오랜 전통 더 나아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등이 더해진다 건축에 큰 돔(dome)을 도입하여 육중한 구형과 방형의 조화에 의한 역학적인 미를 자랑

함과 동시에 거대하고 장엄한 내부 공간을 창출하고,화려한 색채의 모자이크화가 성당의 벽면을 풍부하게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벽면 장식은 초현세적이고, 영적인 세계의 가시화를 목적으로 하였으

며 비잔틴 제국의 부를 한껏 반영하고 있다.

3. 로마네스크 미술

교회의 권위가 강해져 로마 건축을 본떠 크게 안정된 느낌을 주는 건축 양식으로, 신의 성채라고 불리기도한다. 석조 건축물로 벽채는 두껍고 견고하며 창을 넓게 만들지 않아 중후한 외관과 유암(幽暗)한 내부공간이 특징이다. 넓은 벽면과 천장에 성상화를 프레스코화로 그려 장식하였다.

4. 고딕 미술

기독교 미술의 절정기의 미술 양식이다. 첨탑이 솟아오르는 수직선을 강조하여 인간의 열렬한 신앙심을나타냈으며, 안정감과 권위보다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 육중한 벽과 기둥 대신 가는 기둥과 넓은 창이특징이다. 따라서, 로마네스크 시대에 성했던 벽화는후퇴하고 성당의 큰 창에 빛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행하였다.

 

 

제단화

성당의 제단 위나 뒤에 안치하는 제단 가리개로 만든회화 작품이다. 가리개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으로서 병용하는 수도 있는데, 조각만으로 장식하는 것은 제단 조각이라 한다. 중앙 패널 양측에 날개 패널을 나란히 놓고 문처럼 개폐한다 삼련 제단화(三連祭壇畵)가 많이 보이지만 날개가 많은 것도 있고, 또 휴대

할 수 있는 소형의 이련 제단화도 있다 삼련 이상의것으로는 성서적인 주제 가운데서도 근원적인 주요주제를 중심으로 한 대작이 많다.

 

<<<중세미술 MIDDLE (A.D 5c - A.D 15c)>>

 

중세는 초기 500년동안은 전쟁과 약탈, 혼란한 정치가 계속되는 일종의 암흑시기(Dark age)였다. 그리고 예술은 기독교 교리전달의 보조수단이라는 신(神) 중심의 인간관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였으므로 예술에 있어서도 암흑시기였다.

중세는 초기미술과 로마네스크, 유비법 붕괴 이후의 고딕양식으로 분류된다.

 

1)중세초기

미술은 단지 문맹자들에게 신의 섭리와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보조수단이라는 생각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그들은 신(神)적이고, 영원하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바꾸는 데 미술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미술가의 재능은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 이므로 당연히 신에게 바쳐져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이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뚜렷히 통일된 하나의 양식이 나타나지 않은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로마네스크 미술

 

11세기 후반에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로마네스크 미술은 “교회의 승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전역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의 일반이 교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대 로마의 건축양식과 흡사한 교회가 많이 건축되었으며, 단단하고 육중한 모습의 석조건물로서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전투적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조각이나 회화는 중세초기에 비하여 비교적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우나 여전히 교리전달의 보조수단이므로 교회의 내부장식에 이용되었다.

 

3)고딕양식 (A.D13c-14c)

 

12C 말 프랑스 북부에서 발생한 미술양식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의 세계를 가시화 시킬수 없으므로 인간능력의 것을 충실히 나타내려는 시도(유비법의 붕괴)가 생기면서 원근법, 인체묘사, 형태등에 관심을 쏟아 이후 르네상스 발생의 초석이 된다.

로마네스크의 둥근 아치와는 달리 뾰족한 첨형아치가 특징이다. 또한 로마네스크 교회건축물과는 대비적으로 가느다란 석재기둥 및 유리(스테인드 글라스)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내부가 밝고 넓어지게 된다. 대표적 건물로 프란체스코 교회를 들수있다.

 

유비법이 붕괴되었고 이후 르네상스의 초석이 된다.

건축물은 첨형아치와 스테인드 글라스가 사용되었다.

 

 

4) 르네상스

RENAISSANCE (A.D 1400 - A.D 1600)

 

 

르네상스는 부활(復活), 재생을 뜻하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 번영을 꿈꾸며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배경을 보면 첫번째, 이탈리아에선 귀족계급과 부유한 부르조아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두번째,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는 등 고전시대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 번째,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의 기회가 많았다는 것등이다. 중세 봉건영주, 귀족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권리와 능력을 자각한 시민계급의 등장은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낳았고, 이는 중세를 지배하던 신중심의 시선을 인간중심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피렌체의 메디치가 처럼 부를 축적한 상인계급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여 미술의 새로운 후견인이 되었다.

 

초기 르네상스(Quatrocento, 1400년대)

현실적, 객관적 정확성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그림전체의 조화로운 구성에는 아직 소훌하였다. 화면속 대상 개체의 사실적인 묘사에만 주력하였으므로 개체는 날카롭고 명확한 윤곽선으로 도려지게 되었다. 격렬한 동세를 하고 있는 소재들은 고전작품에의 제재를 따온 것으로 파악된다.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을 보면 이러한 아직은 미숙한 르네상스의 미술의 특징을 잘 알수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도나텔로(1386-?)<성지오르지오상>, 보티첼리<비너스의 탄생>을 들수 있다.

 

전성기 르네상스(Cirquecento, 1500년대)

이성적 규칙을 통한 객관적인 정확성과 조화와 균형이라는 미의 이념이 잘 구현된 황금기다. 다른 어떤 세기보다 많은 천재들이 나타났으며 가장 두각을 나타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이다.

 

후기 르네상스 (Mannerism, 16c중엽부터 말)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경향들을 이르는데 흔히 평가절하되어 온 경향이기도 하다. 즉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형식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전대의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했다고 간주되어 창조성에서 의심을 받았다. 전반적인 그림들에서 느겨지는 불안감, 신비감,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에서 시대정신의 한 면의 표출로 보기도 한다. 특히 파르미지아노(1503-1540), 틴토렛토(1518-1594), 코렛지오(1489-1534), 엘 그렛코등이 대표적인 매너리즘 작가로 꼽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양식적 특징으로는 인체의 장신화, 차갑고 선명한 색조, 표면처리의 매끈함, 원근법의 과장, 비논리적인 공간배치 및 대가그림의 일부 차용 등을 들수 있다. 반면에 긍정적인 측면을 들수도 있다.

이전 르네상스 양식의 이성적 접근은 미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며, 새롭고 색다른 감성적 시도를 하였다는 점에서 매너리즘은 긍정적이다. 이러한 점은 이후 바로크 미술의 계기가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파르미지아노의 <목이 긴 성모>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틴토레토의 <최후의 심판, 만찬>을 들수 있다.

후기 르네상스는 매너리즘으로 불리며 예술적 기교에 치우친 타성적 예술이다.

 

 

5) 바로크 BAROQUE(A.D 17C)

 

 

1600년부터 1750년 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르네상스의 이성적 규칙에 의한 지나친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부터 발전한 미술양식을 뜻한다. 바로크는 포르투칼어의 '비뚤어진 진주'라는 뜻으로 르네상스가 지닌 단정하고 우아한 고전양식에 비해 장식이 지나치고 과장된 미술양식에 대한 경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혹은 르네상스가 지니고 있는 고전적인 균형, 조화의 세계에 비하여 유동적이고 강렬한 남성적인 감각이 강조되어 붙어진 이름이라 한다.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으로 카라밧지오<야경>, 베르니니<다윗>, 루벤스<루시퍼스의 딸들의 능욕>, 램브란트<자화상> 등을 들 수 있다.

 

6) 프랑스식 고전주의 CLASSIC IN FRANCE (17C)

 

17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풍요롭고 강력한 국가였다. 그 결과 예술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적 철학의 영향과 루이14세에 의한 정치적, 경제적 안정은 프랑스를 바로크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독자적인 양식을 갖도록 하였다. 대표적인 작가로 니콜라 푸생을 들수 있는데 그의 작품 <사비니 여인들>을 보게 되면, 감상보다는 지성에 호소하는 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구도나 형태만이 강조되고, 색채는 아에 뒷전에 밀리게 되었다. 영웅적인 인물들은 일반화 되었으며, 동작은 조각처럼 굳어져 있다. 이들의 묘사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에서 빌려온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7) 로코코 ROCOCO(A.D 18C)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 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조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되었다.

 

8) 신고전주의 NEO CLASSIC(A.D 18C말)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등이 우선시 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리클라네움, 파에스툼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근대미술>>>

 

 

1) 낭만주의 (A.D 19C 초)

 

간단히 말해 감성적 분위기의 작품들을 발전시켜 나간 형태라 할수 있다.

현실적인 사건을 주제로 다루기도 하고 이성의 규칙과 속박에서 벗어나 느낌에 따른 재현을 하였기 때문에 낭만주의로 불린다. <메뒤사의 뗏목>(1819, 제리코)이라는 작품으로 대표되는 데 사선구두와 명암의 극적대비, 어둠 침침한 단색조를 보인다. 낭만주의는 전시대의 미술들이 버리지 못했던 현상이나 사물의 재현이라는 모방론적 입각을, 에술가의 감정이나 정서의 표현이라는 표현론으로 바꾸게데 그 의미가 있다. 따라서 예술이 다양해지는 계기가 된다.

 

2) 사실주의 (A.D 19C 중엽)

 

19C 이전까지는 자연주의로서 사실주의가 정의되어왔다. 그것은 성실하고 정확한 '자연의 모방' 더 나아가 그것의 '완벽한 이상화된 재현'으로서 사실주의 였다. 19C 이르러 사실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사실주의 등장 이전의 낭만주의는 그 개념적인 면에서 대조가 된다. 낭만주의는 '감정'이 중요하고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 낭만주의 회화는 격정적이며 현실을 떠난 이상향을 쫒거나 이국적인 소재등에 깊은 관심을 회화로 표현한다. 표현에 있어서는 색채에 비중을 두고 화려하고 열정적인 화면을 구사한다. 현실을 떠난 상상력을 부추기는 소재는 따라서 시적이며 신화적인 주제를 취했다.

사실주의는 낭만정신에 전적인 반대 표명과 비판을 가한다. 특히 19C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쿠르베,도미에,밀레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관심사는 [현실을 보는 눈] 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쿠르베는 '천사를 보여주면 그리겠다'는 공언으로 사실주의의 개념을 대변하며 '상상력'으로 집약되는 낭만주의와는 대조를 보인다.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소재자체가 대조적인데서 비롯되어서 [사르드나팔르의 죽음] [메뒤즈의 뗏목]은 내용 자체가 극적이며 등장인물

도 격정적인 자세의 불안할 정도의 공간배치가 나타난다. 반면 사실주의는 [돌깨는 사람] [만종]등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정적인 모습과 그들의 현실공간을 재현해서 단순하고 차분한 구성을 나타낸다. 19C는 과학과 기술의 태동 이성주의의 팽배를 부른 계몽주의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실증주의는 경험과 관찰에 입각한 과학적인 지식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시민정신에 평등사상을 고취하는데 역할하였고 민주사상에 이어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더 이상 고고한 가식적 주제가 아닌 평범한 삶의 세속성이 주제로 등장하는데 정신적인 역할을 했다.

 

3) 인상주의 IMPRESSIONISM (A.D 19C 말)

 

인상주의

인상주의는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형태의 변화 색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미술양식을 말한다. 본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 정신은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 없는 사물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태양광선의 미묘한 조화를 쫓기위해 이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튜브형 물감과 접히는 이젤의 발명은 그들의 야외작업을 가능케 해주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선은 빠른 필치와 붓놀림을 요구하고 빠레뜨에서 색을 섞기 보다는 직접 화폭에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노리며 순색을 이용한 색체분할법(필촉분할법)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인상주의가 출현하는데는 사진기의 출현에 따른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회화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입증해준다.

대표적인 작가인 모네의 [건초더미] [루앙 대성당][수련]등의 연작에 있어

작품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은 태양광선을 위한 부차적인 소재인 것이다. 이 그림은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해야 윤곽과 형태가 드러난다. 화면의 구성도 삼각형구도나 소실점이 한두개로 축약되는 선원근법적이 아닌 대기원근법을 사용한다. 그 효과는 자칫 어수선해보이나 자연스럽고 우연한 느낌의 스냅사진과 같은 연출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화를 환영으로서 인식하기를 그만두고 '평면

성'의 회화를 구축하고 있다.

또한 직관에 의한 뉘앙스 이미지의 연출은 곧 추상회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것이라 할수 있겠다. 대표적인 작가로 마네, 모네, 르느와르, 드가, 로댕 등을 들 수 있다.

 

신인상주의(Neo impressionism)

신인상주의는 G.쇠라와 P.시냑으로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등의 이론과 수법 및 그 운동을 말한다. 그들은 광학이론과 색채학에 따른 과학적 이론에 기초한 색채분할을 구현하였다.

이들은 인상주의가 사용한 기법을 과학적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반발하였다. 인상주의가 본능적, 감각적이라면, 신인상주의는 과학적이며 분석적이라 할수 있다.

 

후기인상주의(Post impressionism)

인상주의의 단계를 거치면서도 그 양식의 한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갖가지의 방향으로 인상주의

를 넘어선 일군의화가들을 가리킨다.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독자적으로 해결책을 추구하던 이들 작가군을 인상주의 이후의 세대라는 포괄적인 관점에서 `후기인상주의 화가'라는 명칭을 얻게된다. 이들은 이상주의가 지나치게 순간적인 시각세계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믿었기에 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해야함을 표방했다. 세잔느, 고갱, 고흐로 대표된다

 

 

<<<현대미술>>>

 

1) 야수파 (A.D 20C 초)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회화 운동으로 수년간 유사한 테크닉에 관심을 보였던 화가들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미술운동이다.

이 운동은 순수 색채의 고양에 주력했다.이 새로운 화법은 1899년, 그룹에서 주도적 인물이었던 마티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야수파라는 명칭은 당시의 비평가 루이 복셀이 1905년 가을 마르케의 15세기풍의 청동조각을 가리켜 마치 "야수의 우리 속에 갇혀있는 도나텔로 같다"라고 평한데서 유래되었다. 이 운동의 동인은 귀스타프 모로의 문하생이었던 마티스, 마르케, 루오, 앙리 샤를르 망갱, 샤를르카무엥 그리고 장 퓌이등과 '샤토'로부터 블라맹크와 앙드레 드랭, 그리고 프리츠, 브라크, 뒤피의 그룹이 융합된 것이었으며 네덜란드 화가 반동겐도 참여 했다. 그들은 고호, 고갱, 신인상주의, 세잔느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 작품들의 특징은 강렬한 순수 색채에 있었으며 색채는 때로는 세잔느처럼 공간 구성에도 사용했지만 대부분 감정 및 장식적 효과를 위해 임의적으로 사용했다.

 

2) 입체파 (CUBISM A.D 1900 - 1914)

 

190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운동을 말한다.

1908년 마티스가 브라크의「에스타프 풍경」이란 연작을 평하면서 '조그만 입체 덩어리'라고 말한데서 유래되었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발전한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세잔느풍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잇다. 입체파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쓴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야수파의 주정적(主情的) 인 표현을 폐기한 대신 시점(視點)을 복수화하여 색 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 시켰으며,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로 구축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피카소, 브라크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고 그 밖에 몽파르나스에서 화면에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F. 레제와 R. 들로네가 있고, 화면의 구성원리를 추구하여 추상예술의 길을 열었던 쿠프카와, 비용, 뒤샹등이 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3) 표현주의 (EXPRESSIONISM A.D 1911 - 1920)

 

표현주의는 야수파, 초기의 입체파, 인상주의,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연의 모방을 거부한 다른 여러 화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 비평가들이 1911년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다.

1911년 마르크와 러시아 출신 칸딘스키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절대 순수를 표현하고자 함으로써 절대주의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표현주의는 독일을 풍미하게 되었다. 청기사 그룹의 미술 가들은 더욱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을 제작했고 후배 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 미래파 (FUTURISM)

 

미래파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위예술 운동을 일컫는다. 이 운동은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효시인데, 마리네티는 기존의 낡은 예술을 모두 부정하고 기계 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다이내믹한 미를 창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자극되어 이듬해 2월 카를로 카라, 옴베르토 보치오니, 지노 세베리니, 루이지 루솔로, 쟈코모 발라의 5인의 화가가 연명으로 미래주의 화가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미래주의의 커다란 공적은 기계가 지닌 차가운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조형 예술의 주제로까지 높였다는 것과 스피드감이나 운동을 표현하기 위해 회화에 시간의 요소들을 도입하려고 시도한데 있다.

이 유파가 뛰어난 조형작품을 낳았다고 할 수 없지만, 현대에 있어서 예술의 소재에 대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한 의의는 크다.

 

5) 다다이즘 (DADAISM)

 

다다이즘은 1915~22년경 스위스, 독일, 프랑스등의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문명, 반합리적인 예술운동을 일컫는다.

제1차 세계대전을 낳게 했던 전통적인 문명을 부정하고 기성의 모든 사회적·도덕적 속박에서 정신을 해방, 개인의 진정한 근원적 욕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 이 운동의 근본 정신이었다. 이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또는 전후에 세계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독일에서는 반전운동과 코뮤니즘에 결합된 베를린 다다가 1919년에 결성되었다. 미국에서는 1912년경부터 프랑스의 화가 마르셀 뒤샹이 만 레이와 함께 뉴욕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뉴욕 다다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경향으로는 소위 레디메이드의 오브제 또는 움직이는 오브제, 콜라주 또는 앗 상블라주로 통하는 메르츠 빌트등이 시도되었던 점이다. 기계적, 성적인 이미지의 사용도 특색이다. 이들 수법은 다다의 강렬한 가치 부정적 관념과 함께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60년대 예술 등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6) 추상 표현주의 (ABSTACT EXPRESSIONISM )

 

 

일반적으로 1940년대와 50년대에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미국 회화사상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회화의 한 양식이다. 본래 추상 표현주의라는 용어는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에 대해서 사용했던 말로, 미국의 평론가 알프레드 바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의 초기작품에 대해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썼었다.

이 용어가 부적당하다는 견해도 있어서 비평가가 해롤드 고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추상표현주의는 서구 근대미술의 복합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야수파, 표현주의,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한 계보와 인상주의, 입체파, 기하학적 추상의 계보를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전통적인 추상은 구상 회화의 경우처럼 인간, 사물, 풍경등을 표현 대상으로 삼지 않지만 삼각형이나 원 따위, 선이나 면에 의해 생성되는 형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것은 현대 회화의 한 특성으로 화면은 원근감을 잃고 평면화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라운드와 전경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는 구상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간에 지시성과 방향성을 거부한다.

 

7) 미니멀 아트 (MINIMAL ART)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최소한의 조형 수단으로 제작했던 회화나 조각을 가리킨다. 여기서 최소한이란 일루전의 극소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회화의 감동, 마티에르의 풍부함 내지 자기 표현은 곧 예술이라는 신화를 기본으로 하는 종래의 예술 개념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엘즈워드 캘리, 프랭크 스텔라, 도널드 주드, 케네드 놀런드, 잭 영거맨, 래리 푼즈, 모리스 루이스 등을 들 수 있다.

 

 

8) 팝 아트 (POP ART)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구상 회화의 한 경향이다. '팝'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포플러(popular)'의 약자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통속적인 이미지, 다시 말해서 일상 생활에 범람하는 기성의 이미지에서 제재를 취했던 이 경향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1950년대 초기의 미국 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팝 아트는 미국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선배 작가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를 들 수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적인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 작품으로 전환시키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 다.

팝 아트의 작가들은 일상의 이미지를 인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호나 기호체계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앤디 워홀, 로히 리히텐스타인등은 사회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 - 예를 들면 마릴린 먼로의 얼굴,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 -을 작품 속에 도입함으로써 기초 체계와 그들 자신의 테마를 겹쳐서 표현하고 있다.

 

9) 극사실주의 (HYPER REALISM)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경향의 회화와 조각을 일컫는다.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극히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특징으로 한다.주관을 적극 배제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과 같이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는데 주로 의미없는 장소, 친구, 가족등이 대상으로 취급된다.

극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사실주의로, 특히 팝 아트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팝 아트처럼 평상의 생활 즉 우리의 눈앞에 늘 있는 진부한 이미지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팝 아트와는 달리 그것은 극히 억제된 것으로써 아무런 코멘트도 없이 다만 그 세계를 현상 그대로 다룰 뿐이다. 대표적인 작가로 척 클로즈, 하워드 캐노비츠, 맬컴 몰리, 필립 펄 스타인, 시드니 틸림등의 작가가 있다.

 

10)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포스트 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기 모더니즘은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의 각 장르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건축 비평가들이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유행하던 엄격한 사각형 형태의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건축물에 대해 쓴 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이 분화되지 않은 과거의 예술을 소생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시대, 다른 문화로

부터 양식과 이미지를 차용하는 예술은 모두 '포스트 모던'의 자격을 얻는다.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또 다른 주된 특징은 모더니즘 문화와 사고 방식이 세워놓은 엄격한 지배의 틀을 거부하는데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소통이 불가능한 정치, 문화, 전문화의 영역을 깨뜨리고, 삶과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술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끌여 들여 비판적으로 다룬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아직은 확정된 일관성 있는 체계는 아니며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욕망에 의해 촉발된 회의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이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의 폐허를 헤치고 나가며, 모더니즘의 부정이라는 가시적인 대안을 세우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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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9

re: 우리나라와 다른나라의 미술작품및비교 어케 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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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답변확정률 11.1%

2007.12.1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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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다른나라의 미술작품및비교 어케 해여?(더 궁금하신 분들)

2007.12.1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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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들어가면 좀더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용이 너무 길고 정리가 안 돼 있어서....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13&dir_id=130701&docid=320537

출처 : iishw 찍어주세요~~~

다른나라의 민속공예품

... 다른나라 민속공예품의 예 1가지 2. ↑다른나라 민속공예품의 재료. 3. ↑다른나라 민속공예품의 특징. 4. ↑다른나라 민속공예품의 쓰임새. ↑요렇게 깔끔하게 정리해주신...

다른나라의 민속 공예품

저희 학교에서 다른나라의 민속 공예품을 만든다는데요 뭐가 적절할지 몰라서요 내공 줌 부탁함~~~ 도움이 되길 바라며...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1id=3&dir_id=310...

만들기 쉬운 다른나라의 민속 공예품

... 뭐 쉽게 만들 수 있는 다른나라의 민속공예품 없을까요? 내공은 후하게 드리구요. 장난답변 신고 들어가시는 것 아시죠~?^^ 미국의 민속품입니다.

여러 나라 민속 공예품

... 제가 미술수업(여러나라의 옷을 입은 인형 만들기)을 하다가 갑자기 궁금해 진건데요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나라의 민속 공예품에 대해 궁금해 졌어요. 답변내용에 1....

세계 여러나라의 민속 공예품

... 세계여러나라의 민속공예품 사진이나 그림 그리고 그 민속품에 대해서 설명까지 다 해주세요,.,.. 다른 곳에 있는 것을 빼고요... 답변이 질문자에 의해 러시아 전통 인형...

여러나라 민속 공예품!(급해여)

저 초6인데요....선생님께서 내일 여러 나라 민속 공예품에 알아오라구 해서요....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구...그래서요 ㅋ 저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채택 기다리고 있기때문에...

우리나라와 다른나라의 민속 공예품 차이점

저 오늘 숙제인뎅 내일까지인뎅 아무리 쳐봐도 나오질 않네요 오늘이나 내일 아침까지라도 재발 도와주세요 우리나라와 다른나라의 민속 공예품 차이점 재발 도와주세요 흠...

여러나라의 민속 공예품

여러 나라의 민속 공예품 좀 알려 주세요!!!! 그리고 특징과 사진도 부탁 드립니다........ 양식의 항아리이다. 다른사람이 한것이지만.. 많이 요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여러나라의 민속공예품

여러나라의 민속공예품 (하나만) 만든 시대적,문화적배경,용도,만드는... 코린트 양식의 항아리이다. 다른사람이 한것이지만.. 많이 요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라의 민속공예품에 관해서

... 각 나라의 민속 공예품(자료 첨부)-종류, 재료, 용도, 특징 등 2. 공예품의 특징 비교... 정교한 그림이 그려진 통통한 인 형을 돌려서 열면 그 안에서 또 다 른 인형이 나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