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족과 토가족의 기념일과 관광지에 대해 가르쳐주세요

장족과 토가족의 기념일과 관광지에 대해 가르쳐주세요

작성일 2007.03.14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장족과 토가족의

기념일과 관광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세요

 

장족은 자치족에 편입되어있다고 하던데..

 

사진도 같이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올해로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30년이 됐으며 그가 주도한 문화대혁명 발발 40년, 종결 30년째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한 중국 정부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제한하고 있다.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중국의 대표적 관광지 장자제(張家界)가 있는 후난(湖南)성은 마오쩌둥의 고향이다. 그곳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 ‘부용진’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통제되고 있는지를 확인해준다.

 

<!----- CALVINTEXT ------->

<!--no title -->

장자제의 천자산.

태양이 붉다못해 하얗다. 후난(湖南)성의 여름은 이렇다. 햇볕에 나가자마자 살이 익기 시작하는지 피부가 따갑다. 한낮 기온이 보통 33∼34℃라는 일기예보를 이곳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보통 38℃를 오르내린다고 말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습도가 낮아 그늘에 들어가면 그래도 견딜 만하다.

장사(長沙)에서 마오쩌둥의 생가가 있는 사오산(韶山)으로 간다. 장사에서 약 150km, 버스로 약 2시간 거리다. 장사 일대를 하루에 모두 돌아볼 심산으로 택시를 빌렸다. 하루에 500위안, 우리 돈으로 6만원가량이다. 한국 사람이 마오쩌둥 생가를, 그것도 택시까지 대절해 간다고 하자 쩡(曾)씨 성의 기사는 신이 났다. 대부분의 후난성 사람들에게 마오쩌둥은 숭배의 대상이다. 택시기사 또한 마오교(敎)의 열렬한 신도다. 택시는 온통 마오쩌뚱으로 도배되어 있다. 마오쩌둥 사진에서부터 흉상까지 운전석 주위로 5개나 붙어 있다. 이것으로 부족했는지 그는 돌아오는 길에 마오의 사진이 박힌 장신구를 하나 더 사서 차 안에 걸었다.

오는 9월이면 마오쩌둥이 죽은 지 30년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여전히 중국의 심장인 톈안먼 광장에 누워 있고, 중국인의 가슴에 살아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인간 세계를 넘어 신이 되어간다. “마오 주석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중국인들, 가게나 집 한가운데 마오 사진을 걸어두는 중국인이 갈수록 늘고 있다. 사회 계층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특히 농민들에게 마오는 재물과 평화, 안녕을 가져다주는 신이다.

중국인 중에서도 운전기사들, 특히 남쪽 지방의 운전기사들이 마오쩌둥 사진을 부적처럼 차 안에 붙이고 다닌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이런 유래가 있다. 그러니까 1992년 마오쩌둥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 중국에서는 마오가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최초로, 그리고 대규모로 마오쩌둥 신드롬이 일어난다. 그해 광둥 지방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버스 교통사고가 났고, 큰 사고여서 버스에 탄 사람들이 모두 부상을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유독 한 사람만 멀쩡했는데, 그가 마오쩌둥 사진을 사들고 차에 탄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때부터 마오는 교통사고를 막아주는 수호신이 되었고, 마오 사진은 부적처럼 여겨졌다.

중국인이 이처럼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것을 외국인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외국인뿐 아니라 중국인, 특히 문화대혁명 때 고난을 당한 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를 중국인이 우매한 탓으로 진단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중국인에게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중 누가 나은지를 물으면 대다수 중국인은 이렇게 답한다.

“마오쩌둥은 중국인을 일어서게 했고, 덩샤오핑은 중국을 잘살게 해주었다.”

아편전쟁 후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100년 동안 시달린 치욕의 역사를 끝내고 중국을 다시 일어서게 한 사람이 마오쩌둥이고, 문화대혁명 때 잘못을 범했다고 하더라도 그 공로는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1일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이 이제 일어섰다!”

마오의 이 말에 중국인은 감격했다. 근대 100년 동안 겪은 굴욕과 설움이 씻겨 내려가는 기쁨을 맛본 것이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여느 사회주의 지도자나 정당과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중국인에게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단순한 사회주의 이념의 실천자가 아니라 민족해방을 가져다준 지도자이자 정당이다. 마오쩌둥이 중국인에게 영원히 살아 있는 이유다.

<!--no title -->

영화 ‘부용진’ 포스터.

거리로 나선 농촌 여성

예전에는 중국을 여행할 때 기차가 가장 편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고속도로가 속속 뚫리면서 중국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졌다. 장사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 정도 달리니 벌써 사오산 톨게이트다. 내년 9월이면 마오쩌둥 생가 앞까지 고속도로가 날 것이란다. 톨게이트에서 생가까지 2차선 도로로 한참 가는데, 1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여자들이 길가에 양산을 들고 듬성듬성 서 있다.

운전기사가 “뭐하는 여자들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점심 무렵이라 식당으로 손님을 끌어들이려는 호객꾼이려니 했는데, 둘러보니 주위에 그럴 만한 식당이 없다. 알고 보니 50위안, 우리 돈으로 6000원가량을 받고 몸을 파는 아가씨들, 중국어로 ‘샤오제(小姐)’란다. 기절할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아가씨들 뒤로 허름한, 우리로 치면 여인숙 같은 건물들이 있다. 시골 경제사정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이렇게 거리로 나서는 농촌 여성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원래 샤오제라는 말은 아가씨, 미스란 호칭으로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사라졌다가 마오쩌둥 시대가 끝나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가 열리면서 부활했다. 마오쩌둥 시대는 남녀 사이에 성적 구별이 없는 ‘무성(無性)의 시대’였다. 남성 같은 여성, 일 잘하고 힘세고 피부가 까만 여성이 제일이었다. 그 시절엔 남녀 모두 ‘퉁즈(同志)’로 불렸다. 그러던 것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가 시작되면서 여성을 가리키는 호칭이 생겨났는데, 바로 샤오제다. 샤오제는 무성의 시대가 끝나고 유성(有性)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런데 요즘 중국에서 음식점 종업원을 부를 때 ‘샤오제’라고 하기가 조심스럽다. 남쪽 지방일수록 특히 그렇다. 술집 접대부나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대낮에 대로상에서 공공연하게, 그것도 마오쩌둥 생가로 통하는 길에서 샤오제들이 버젓이 영업을 해도 되는 것일까. 단속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운전기사가 4자 대구(對句)로 답한다. “지방보호, 개혁개방!” 지방경제를 위해 단속을 하지 않는다, 지금은 개혁개방 시대가 아니냐는 것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엇갈린 평가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역설하면서 “파리, 모기가 들어오더라도 창문을 열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창문을 열어 파리, 모기가 들어와도 유분수지, 지금 중국엔 파리, 모기가 너무 많아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중국인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범죄와 부정부패, 사회 비리는 늘어나고 농민과 노동자는 좀처럼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 가운데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1년 사이에 부동산 가격이 배로 치솟아 횡재하는가 하면 부동산 개발 때문에 하루아침에 강제로 땅을 빼앗기고 거지 신세가 된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런 상황 때문에 중국 들 사이에서 신좌파가 등장하고, 개혁개방,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정당성과 방향을 둘러싼 새로운 사상논쟁이 베이징 사회와 정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후진타오도 사정이 다급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화해 사회’ 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그뿐 아니다. 농촌을 살리려는 ‘신농촌 건설’을 추진하고, 사회주의 가치와 목표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사설이 ‘인민일보’에 자주 실리면서 이데올로기 통제를 시도하고 있다. 흔히 중국의 문제는 농촌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개혁개방의 향방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미래가, 중국의 내일이 농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길가에 늘어선 ‘샤오제’들을 보면서 절감한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그늘이 짙어가고,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요즘 들어 마오쩌둥을 찾는 사람, 마오쩌둥을 기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마오쩌둥 시대야말로 중국 농민에게는 황금시대였다는 농촌 현장 보고서들이 나오기도 한다. 1992년 마오 탄생 100주년 이후 또다시 마오쩌둥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 더구나 요즘 중국에서는 이른바 ‘홍색 여행’이 유행이다. 공산 혁명의 성지(聖地)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절반은 관에서 주도하고 절반은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이뤄진다. 그 홍색 여행의 출발지는 대개 최초로 공산 소비에트가 건설된 징강산(井岡山)이거나 마오쩌둥의 생가다. 지난 6월30일에도 85차 홍색 여행단이 마오쩌둥 생가에서 발대식을 치렀다.

마오쩌둥 생가는 위치가 참으로 좋다. 앞에 호수가 있고, 뒤로는 작은 산이 있다. 별장 터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무더위 속에서도 생가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송곳처럼 찌르는 햇살 아래서 20분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은 사람이 적은 편이란다. 마오쩌둥의 아버지는 쌀장사로 돈을 벌었다. 그래서 그런지 집이 꽤 넓다. 돼지도, 소도 키울 정도로 부자였다. 마오쩌둥은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마오의 아버지는 아들이 일을 배우고 장사하기를 바랐지만, 마오쩌둥은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집 앞에 있는 서당은 마오가 어려서 고전을 공부하던 곳이다.

<!--no title -->

문화대혁명 40주년을 맞아 중국에선 마오쩌둥 상품이 인기다. 한 상점 판매대에 있던 마오쩌둥 그림.

최근 영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 소설가 장룽(張戎)이 마오쩌둥 전기를 내놓았고, 부시 미국 대통령이 그 책을 언급하면서 유명해졌다. 그 책에서 장룽은 책과 공부를 좋아하던 마오의 어린 시절에 착안해 마오는 다른 사람에게는 육체노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육체노동을 매우 싫어한 이중인격자였다고 묘사한다.

사실 장룽의 마오 전기는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 나오는 마오의 이미지와 대척점에서 마오를 묘사한다. 장룽에게 마오는 육체노동이 싫어서 프랑스 유학을 포기한 사람, 농민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 남의 공(功)을 가로채는 사람, 권력욕이 뛰어난 사람인 반면, 스노가 본 마오는 매우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총명하고, 독서광이고, 중국 농민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장룽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비극적 경험을 토대로, 마오가 얼마나 사악한 인물인지를 드러내려는 정치적 목표 아래 마오의 모든 것을 끌어다 해석한다. 만년(晩年)의 마오로 마오의 전 일생을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스노에게는 혁명 시기의 마오만 있고 건국 이후의 마오는 없다. 둘 다 마오의 부분적인 모습이다. 그 극단적 이미지 속에서 마오는 춤을 춘다. 중국에서도 그렇고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진시황에 대한 평가가 그렇듯 마오에 대한 평가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마왕두이 귀부인의 수모

마오의 생가와 마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세워진 거대한 마오 동상을 돌아보고 마을 입구에 있는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 메뉴가 한결같이 마오가 좋아하던 요리들이다. 마오가 가장 좋아했다는 요리는 삼겹살에 간장을 넣고 볶다가 찌는 훙사오러우(紅燒肉). 흔한 중국 요리다. 별 기대를 않고 그저 기념사진 찍는 심정으로 주문했는데, 맛이 일품이다. 시골 돼지라서 그럴까, 기름이 적당히 빠지고, 돼지고기 껍질과 비계, 살코기 맛이 제대로 어우러져 고소하다.

마오쩌둥 생가에서 다시 장사로 돌아와 한나라 때의 마왕두이 귀부인을 만났다. 후난 박물관은 오직 이 귀부인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2000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1973년에 우연히 발굴됐을 때 마치 한숨 낮잠이라도 잔 듯 생생하게 깨어난 여인, 방금 먹은 것 같은 생선뼈와 과자들, 여전한 피부색과 머리칼, 피를 주입하면 어느새 혈관을 타고 돌아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 것 같은 저 여인이 20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고대 중국의 문명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한나라 때 귀부인의 무덤이 이 정도라면, 진시황의 무덤은 대관절 어느 정도일까.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귀부인의 시대가 너무 찬란하고 아름다워 보여서일까. 154cm, 35kg의 가녀린 몸을 아홉 겹 비단으로 감싸고 있던 여인, 숱한 시종을 거느리고 악사를 불러 음악을 듣고, 도덕경을 읽고, 그림을 즐기면서 2000년 동안 평화롭게 지내던 귀부인을 잠에서 깨워 오장육부를 들어낸 뒤 하얀 천 하나로 몸 중앙만 덮은 채 눕혀놓아 숱한 사람의 시선을 받도록 한 지금 이 문명이 너무 난폭하고 야만스럽게 느껴지고, 저 귀부인이 한없이 안쓰러워 보인다. 당나라 때도 청나라 때도 그렇게 평화롭게 땅속에 있었는데 이제 땅 밖으로 나와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수모인가, 희생인가.

후난 박물관에서 나와 내친김에 마오가 다녔던 후난 제일 사범학교를 둘러본 뒤, “마오 주석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택시 기사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장자제(張家界)행 밤 기차에 올랐다. 영화 ‘부용진(芙蓉鎭)’의 무대인 왕춘(王村)으로 가기 위해서다. 왕춘은 장자제를 거쳐 가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 장자제에서 차로 2시간 거리다. 왕춘 인근의 멍둥허(猛洞河)가 래프팅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장자제엔 래프팅과 왕춘 관광을 묶은 당일 코스 패키지가 많다.

국내 최초로 공개 상영된 ‘중공 영화’

영화 ‘부용진’(1986)은 마오쩌둥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마오의 고향인 후난성에서 마오 시대를 비판적으로 반추하는 영화가 나온 것이다. 구화(古華)의 동명 소설을 셰진(謝晋) 감독이 영화로 만든 것으로,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마오쩌둥 시대가 어떠했는지, 문화대혁명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각별하다. 중국과 수교가 단절된 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개 상영된 중화인민공화국 영화이다. 1989년 호암아트홀에서 이 영화가 상영됐을 때 ‘중공’ 영화가 대관절 어떤지를 보려는 호기심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몰렸다.

 
<!----- CALVINTEXT ------->

<!--no title -->

마오쩌둥 탄생 110주년이던 2003년, 후난성 사오산에서 열린 기념행사.

영화는 부용진이라는 마을에서 1960년대부터 1970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정치운동을 다루고 있다. 이 마을의 유명한 쌀두부집이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격변 속에서 사라졌다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되살아나는 내용이다. 이 마을은 영화 때문에 왕춘이라는 원래 마을 이름보다 부용진(푸룽전)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장자제 일대는 중국의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토가족(土家族)이 사는 곳이다. 영화 배경이 된 왕춘도 그렇다. 요사이 중국에는 우리로 치면 민속촌 같은 곳을 관광하는 것이 유행인데, 이 마을은 토가족의 이국적인 정취와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서 중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이 마을에 도착해 가장 먼저 쌀두부를 먹으러 가면 이 영화를 본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 영화를 찍었다는 것 정도만 아는 사람이다. 이 마을에 토가족 전통 가옥이 보존된 곳은 극히 일부다. 영화를 찍은 골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가족의 전통 주택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다. 목조 건물들 사이로 난 조그만 골목이 영화의 주요 무대다. 장충동에 가면 집집마다 ‘원조 장충동 할머니 족발집’이라고 하듯이, 골목에 들어서자 온통 ‘류샤오칭 쌀두부집’이라고 적힌 간판이다. 류샤오칭은 쌀두부집 주인 호옥음 역을 맡은 여주인공 이름이다.

세상에 쌀두부도 있나? 쌀로 어떻게 두부를 만들까? 1989년 호암아트홀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난성 전 지역이 다 그렇지만 장자제 일대에서도 쌀이 많이 난다. 1년에 두 번 쌀농사를 짓는다. 쌀이 많이 나서 쌀로 술을 담그고, 엿을 만든다. 쌀로 두부도 만들어 먹는데, 토가족 전통 음식인 쌀두부는 이 영화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후난성의 매운맛

마을에서 한 어르신이 들려준 쌀두부 제조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먼저 쌀을 갈아서 끓인다. 여기까지는 일반 두부와 같다. 그런데 쌀두부는 쌀가루 끓인 것을 대나무 대롱에 한 숟갈씩 넣어 찬물에 떨어뜨린다. 찬물에 떨어뜨리는 것은 식혀서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서 쌀두부는 두부처럼 네모진 것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 하나 크기로, 길쭉하다.

이렇게 만든 쌀두부는 파와 간장, 고춧가루, 그리고 잘게 썰어 볶은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다. 한 그릇에 2위안(240원)이다. 입에 들어가는 순간 사르르 녹을 정도로 부드럽다. 참으로 별미다. 내리 세 그릇을 먹고는, 옆자리에 앉은 홍콩 관광객의 눈길 때문에 그만둔 것이 지금까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런데 쌀두부를 먹을 때 함부로 고춧가루를 뿌려 먹지 않는 것이 좋다. 한국 사람들도 매운 것을 잘 먹지만, 후난성의 매운맛은 한국의 매운맛과 계보가 다르다. 후난성 사람들은 중국에서 가장 맵게 먹는 사람들이다. 중국에서 쓰촨(四川) 사람들이 맵게 먹기로 유명한데 후난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런 말이 있다. “쓰촨 사람들은 매운 것을 걱정하지, 겁내지 않는다.” 그런데 후난 사람들은 이보다 한술 더 떠 “혹시 음식이 맵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한다”고 한다. 쓰촨 매운맛이 박하처럼 톡톡 쏘면서 화한 맛이 곁들여진 매운맛(麻辣)이라면, 후난성의 매운맛은 단순하고 화끈하고, 지독하게 맵다(干辣).

중국인들은 쓰촨성 출신의 덩샤오핑과 후난성 출신의 마오쩌둥을 비교할 때 그런 매운 맛의 차이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쓰촨이 맵든 후난이 맵든 매우면서도 단맛이 녹아 있는 우리 매운 맛(甛辣)이 최고 아닐까. 사람이, 세상이 맵다 하더라도 달콤하면서 매워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오쩌둥도 후난 사람이어서 매운 것을 무척 좋아했다. 만두를 먹을 때 고추를 끼워서 먹기도 했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혁명가라는 이론을 설파하기도 했고, 매운 것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마오쩌둥은 혁명을 하면서 ‘붉은 고추의 노래’를 가장 즐겨 불렀다. 이런 내용이다. 사람들에게 반찬 노릇이나 하는 고추는 자기 신세가 불만스러웠다. 그러던 중 배추, 시금치같이 아무 생각 없이 바보처럼 세상을 사는 채소들을 선동하여 마침내 봉기한다. 마오는 어쩔 수 없는 후난 사람이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천성적인 혁명가다.

<!--no title -->

마오쩌둥을 강하게 비판한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공동 집필한 장룽과 그의 남편 존 핼리데이.

신민주주의 혁명 포기

영화에서 주인공 호옥음은 쌀두부 가게를 차려 돈을 번다. 돈을 많이 벌어 새로 큰 집을 짓고 개업 잔치를 하는 날, 당 간부 이국향이 마을에 들어온다. 그리고 평화롭던 마을에 정치운동이 시작되고, 여주인공과 이 마을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국향은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마을에 우파 분자들이 남아 있다면서 운동을 벌이기 위해 이 마을에 왔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여주인공 호옥음의 가게를 찾아가 이 집 수입이 고급 당원 수입에 맞먹는다면서 쌀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따지고, 결국 비판대회를 열어 마을 사람들 앞에서 아직도 자본주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경고한다.

중국학자 중에는 마오쩌둥이 건국 이후 중국 혁명의 원리였던 ‘신민주주의 혁명’을 포기하고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과격하게 중국을 사회주의 사회로 개조하려 한 데서 마오쩌둥 시대의 비극이 시작됐다고 보는 이가 많다. 대부분 역사가 그렇게 흘러간 것을 안타까워한다.

알다시피 마오쩌둥이 추구한 중국 혁명은 신민주주의 혁명이다. 서구 근대 사회와 같은 민주주의 혁명(마오의 표현에 따르면 구민주주의 혁명)도 이루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이를 토대로 사회주의의 길을 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마오쩌둥은 자본주의 근대를 거치지 않은 중국이 바로 사회주의 사회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마오쩌뚱의 이러한 혁명 노선은 당시 조선의 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으로 비쳤다. 서구 자본주의도, 소련식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 받아들인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개명한 부르주아와 소자산계급, , 노동자, 농민이 연합한 혁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마오가 구상한 신민주주의 혁명은 첫 단계가 민주주의 혁명이고, 두 번째 단계가 사회주의 혁명이다.

그런데 새로운 공화국이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은 1953년부터 신민주주의 혁명은 폐기된다. 마오쩌둥은 서둘러 중국 사회를 사회주의 방식으로 개조하려고 했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려 했다. 자본주의적인 것, 개인의 사유 재산을 모두 쓸어내야 한다는 마오의 생각은 그 과정에서 생겨났다. 영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신정권이 수립되고도 쌀두부 장사를 계속하며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신민주주의 혁명 노선으로 신중국이 건국됐기 때문이며, 1960년대 들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유로 자본주의 독초로 몰리게 되는 것은 중국이 사회주의적 개조의 길로 나아가면서 자본주의적인 것을 척결해 나갔기 때문이다.

호옥음은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잘살아 보겠다는 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잘못한 것이냐?”고 따지지만 이미 역사는 신민주주의 길이 아니라 사회주의 길을 가고 있었다. 차츰 조여오는 위험을 피해 호옥음은 그동안 번 돈을 한때 사랑했던 사이이자 의오누이 관계를 맺은 오빠에게 맡기고 잠시 친척 집으로 피신한다. 얼마 동안 피해 있다가 다시 마을에 돌아왔을 때 상황은 절망적으로 변해 있었다. 남편은 가정을 깨뜨리고 자신의 꿈을 앗아간 당 간부 이국향을 살해하려다 죽음을 맞았고, 돈을 맡았던 오빠는 자신이 혹시 위험에 빠질까봐 당에 호옥음이 돈을 맡겼다고 이실직고했다. 호옥음에게 쌀을 공급하던 곡연산도 감옥에 갇혔다.

‘한 쌍의 개 부부’

호옥음은 우파로 몰려 매일 비를 들고 마을 골목을 청소한다. 그녀 옆에는 이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자본주의를 찬양했다는 혐의로 우파분자 낙인이 찍힌 인물, 진숙전이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청소하던 골목이 바로 지금 토가족 민속 거리 중심에 있는 길이다. 두 사람이 거리를 청소하면서 비를 들고, “이, 얼, 싼…” 하면서 춤을 추는 것은 이 영화의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많은 사람이 ‘부용진’ 하면 이 장면을 떠올린다. 그 춤을 넣은 것은 진숙전 역을 맡은 장원(姜文)의 아이디어다. 훗날 영화감독으로 대성하는 장원의 자질이 여기서부터 드러났던 것이다. 둘이 빗자루 춤을 추는 장면은 영화의 무거운 분위기를 덜어낸다.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내는 밝고, 낭만적인 장면이 보는 이의 가슴을 덥힌다.

<!--no title -->

후난성 장사의 거리 풍경.

그렇게 거리를 청소하며 지내던 어느 날 호옥음이 병이 난다. 진숙전은 정성스레 간호하고 그런 가운데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하지만 당은 두 무뢰한에게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자 진숙전은 ‘한 쌍의 개 부부’라는 글을 써서 대문 앞에 붙이고 부부관계를 공식화해버린다. 두 사람은 몰래 술과 생선을 장만하여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두 사람에게 뜻밖에도 곡연산이 술을 들고 찾아온다. 감격한 호옥음이 말한다. “모든 간부가 반장님 같으면 세상 살기가 편했을 거예요.” 그러나 불법 결혼식을 했다는 이유로 남편 진숙전은 10년 징역형을 받아 마을을 떠나고 호옥음에게도 3년 징역형이 내려진다. 임신한 호옥음은 혼자 아이를 낳다가 생명의 위기를 맞는데 이번에도 곡연산이 그녀를 구한다. 곡연산이 자기 부인이라고 속여서 읍내 큰 병원에 입원시켜 목숨을 살린다.

곡연산은 혁명전쟁에 가담했던 옛 간부다. 영화에서 곡연산은 마을 사람들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진정한 간부, 진정한 공산당원으로 나온다. 이국향과 곡연산은 둘 다 공산당원이고 간부이지만 천양지차다. 이국향은 마을에 정치운동 풍파를 몰고 오고 마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렵게 사는 인민을 아랑곳하지 않고 닭다리를 뜯고 몰래 바람도 피운다. 영화는 중국인이 원하는 진정한 당 간부, 이상적인 지도자 이미지를 곡연산을 통해 보여준다.

결혼 때문에 3년형을 받은 호옥음은 마을 골목길을 청소하면서 혼자 아이를 키운다. 그러던 중 문화대혁명이 끝난다. 당에서 간부가 나와 호옥음의 쌀두부가게와 압수한 돈을 돌려준다. 다른 요구 사항이 더 없느냐고 묻자 호옥음이 절규한다. “내 남자를 돌려주세요!” 호옥음은 쌀두부가게를 다시 열고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호옥음의 요구대로 그녀의 남자, 진숙전이 돌아온다. 가족이 재회하고 영화는 끝난다.

문혁, ‘소수의 악인’이 주도?

마을 사람들이 호옥음의 가게에 모여 즐겁게 쌀두부를 먹는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쌀두부를 먹는 것으로 끝난다. 첫 장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즐겁게 쌀두부를 먹는 마을 사람들 곁으로 혁명운동에 부화뇌동하면서 역사에 농락당했던 왕추사가 정신 이상이 되어 징을 들고 다니면서 “운동이야, 운동!”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왕추사는 문혁이라든가 여러 정치운동의 이념에 동의해서 가담하고 앞장선 것이 아니다. 그는 정치운동 때문에 더없이 신나게 살았고 정치운동 때문에 재미를 보았다.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에서 아큐가 혁명이 일어나자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잘사는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것이 통쾌하고, 갖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고, 갖고 싶은 계집을 모두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혁명당에 가담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왕추사도 그런 아큐의 후예다. 그러니 왕추사에게 있어 운동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래서 문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운동이야, 운동’을 외치고 다니는 것이다. 왕추사에서 보듯 마오 시대 역사의 상처와 후유증은 아직 남아 있지만, 마을을 비극과 재난으로 몰아넣었던 정치운동은 결국 끝이 나고 마을은 평화로워졌다. 그리고 쌀두부가게가 다시 회복되었듯 마을도, 역사도 정상으로 회복됐다.

그런데 이렇게 문혁을, 마오쩌둥 시대를 기억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영화 속 문혁의 기억은 선명한 이원대립 구도 속에서 이뤄진다. 그 대립구도는 ‘곡연산·진숙전·호옥음과 이국향·왕추사’로 갈린다. 인 진숙전은 우파로 몰리지만 호옥음의 힘이 되어주고 보호하는 인물이고, 옛 혁명 간부인 곡연산은 인자하고 선량할 뿐만 아니라 역사의 재난에 굴하지 않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한다. 이에 비해 혁명운동을 주도하는 이국향과 왕추사 등은 혁명의 대의를 앞세우지만 기실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감정 때문에 상대방을 우파로 몰고, 인민과 유리된 관료주의자, 도덕적으로 파탄난 사람들이다.

영화 속 인물 사이의 대립은 ‘다수의 선량한 사람과 소수의 악인’ 사이의 대립이라는 도덕적 대립 구도인 것이다. 그럴 때 문혁은 이렇게 이해된다. , 옛 혁명 간부, 선량한 농민, 부지런히 일해 돈을 벌려는 사업가 등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선한 다수의 사람이 소수의 악한 사람에게 무고하게 희생당하고, 고통당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no title -->

후난성 관광 코스의 백미, 톈먼산에 있는 ‘하늘로 통하는 문’ 톈먼둥.

“중국에 문혁 연구는 없다”

문혁이 왜 일어났는지, 문혁 때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문혁에 앞장섰는지를 이렇게 도덕의 차원, 소수 몇몇 개인의 자질 차원에서 추궁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문혁의 실상을 깊이 있게 드러내고, 제대로 반성하는 데 함량 미달이다. 하지만 적어도 1980년대까지 중국 대륙에서 문혁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이런 차원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이 영화 또한 그런 문혁에 대한 기억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러한 문혁 기억을 제조한 사람은 대부분 이고, 이러한 문혁 기억이 중국에서 폭넓게 퍼진 건 덩샤오핑 정부가 시도하는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과거사 정리 작업과 코드가 맞았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정부는 중공당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비판 작업을 진행했고, 그래서 문혁의 착오는 당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4인방과 같은 소수 개인의 탓으로 돌려졌다. 더구나 개혁개방 정책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만 문혁을 기억하고, 해부하도록 통제했다.

‘부용진’은 그러한 새로운 정권의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문혁을 기억하고 비판한 영화다. 이국향은 문제가 있지만 중공당에는 이국향뿐 아니라 곡연산도 있다, 노력해서 부자가 되는 건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런 소수 부자가 나와야 중국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문혁이 종결되면서 비로소 역사가 제자리를 찾았다, 마오쩌둥 시대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문혁 시기까지는 역사의 궤도에서 일탈한 시기였다 등으로 이루어진 문혁에 대학 기억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과 코드를 같이한다.

요컨대 ‘부용진’에서 문혁에 대한 기억은 민간의 기억이자 덩샤오핑 정권의 기억이다. 이 영화가 1980년대 중국에서 크게 흥행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일부에서 당시 문혁을 다룬 영화와 소설을 두고 또 다른 ‘관방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문혁 기억의 정치성 때문이다.

올해는 문혁 발발 40년, 문혁 종결 30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문혁에 대한 토론이나 공개적인 논의를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중국 정부와 중공당이 규정한 문혁에 대한 해석과 기억 이외의 다른 문혁 기억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여지를 차단하려는 의도다. 지금 중국에는 중국 정부가 허용하는 문혁 기억만 유통되고 있다. 그럴수록 문혁이라는 비극이 벌어진 원인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연구는 불가능하다. 영화에서처럼 소수의 악인,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만 문혁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왜 그토록 많은 중국인이 문혁에 가담했는지, 중국 농민과 노동자에게 문혁은 무엇이었는지 등의 문제는 여전히 쌓여 있다. 그래서 문혁은 중국에 있었지만, 문혁에 대한 연구는 중국에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문혁에 대한 기억을 봉쇄하고 있음에도 개혁개방의 혜택에서 소외된 농민과 노동자 계층은 문혁 시기를 그리워한다. 중국에서 문혁의 기억은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된 원인의 대부분은 중국 정부가 문혁 기억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제대로 된 문혁 청산을 방해하는 데 있다.

영화 ‘부용진’은 중국의 전형적인 문혁 기억을 보여준다. 그 기억이 문혁의 실체를 얼마나 여실하게 드러냈고 문혁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재연되지 않도록 하는 데 얼마나 유용할 것인지는 별도의 문제다. ‘부용진’에 담긴 문혁 기억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마오쩌둥 시대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문혁의 기억이 왜, 어떻게 제조되고 있는지, 그런 문혁의 기억 속에 어떤 정치적 동기가 개입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후난성 여행의 세 가지 맛

후난성엔 다양한 볼거리가 널려 있다. 후난성을 돌아보는 길은 대략 세 갈래 코스로 나뉜다. 먼저 빼어난 자연 경치와 독특한 소수민족 문화를 감상하는 코스다. 최근 들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장자제를 중심으로 위안자제(遠家界), 그리고 톈먼산(天門山)을 보고, 장자제에서 2시간 거리의 왕춘(일명 푸룽전)에서 토가족의 거주지와 문화를 체험한 뒤, 다시 여기서 2시간 거리인 펑황(鳳凰)으로 가서 묘족 문화를 체험하는 코스다.

영화 ‘부용진’의 배경이 된 왕춘의 쌀두부집 골목.
담백하고 고소한 훙사오러우(좌)와 입안에서 살살 녹는 쌀두부.

이 코스의 백미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인의 패키지 코스에 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톈먼산과 펑황이다. 톈먼산은 장자제 시내에서 케이블카로 올라간다. 해발 1500m의 깎아지른 절벽을 장장 7200m 길이의 케이블을 타고 오르는 경험은 어느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보다 스릴 있다. 특히 999개의 계단을 올라 절벽 바위 사이에 뻥 뚫린 높이 1300m, 폭 150m의 구멍, 일명 하늘로 통하는 문, 톈먼둥(天門洞)에 서는 순간 쏟아져 오는 맞바람에 두 팔을 벌리면 그 맞바람을 타고 그대로 하늘로 오늘 것만 같은 황홀함과 장쾌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톈먼둥까지 일부러 99개의 굽이를 만들고 999개의 계단을 만들어 9에 하나를 더하면 질적 비약이 일어나듯이 999개의 계단을 올라 한걸음만 더 내디디면 하늘로 오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그 인문적 상상력을 위한 헌신과 노고가 존경스럽다.

이욱연
● 1963년 광주 출생
● 고려대 중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중국 베이징 사범대 대학원 고급진수과정 수료
● 現 서강대 중국문화과 교수
● 논문 및 저서 : ‘중국 사회의 새로운 동향’ ‘소설 속의 문화대혁명’ ‘개혁 개방 이후 전통 문화의 재평가와 변용’ ‘전환기의 중국 사회’1, 2(공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노신 산문선집’ 등

후난성 여행에서 고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는 코스는, 우선 장사 시내의 후난성 박물관에서 2000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불가사의한 미라의 주인공 마왕두이 귀부인을 만나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런 뒤 성리학을 세운 주희가 후학을 양성했던 웨루서원(岳麓書院)을 둘러보고, 장사에서 배를 타고 샹장(湘江)을 유람하면서 고대 시인들이 시를 읊었던 둥팅후(洞庭湖)로 가서 악양루(岳楊樓)를 보는 코스다.

근현대 중국의 역사를 느끼려면 역시 마오쩌둥의 흔적을 따라 나서는 것이 좋다. 사오산의 마오쩌둥 생가와 마오쩌둥이 다녔던 후난 제1사범학교를 돌아보는 것이다. 후난성은 역대 가장 많은 정치 지도자를 배출했다. 가깝게는 주룽지(朱鎔基)부터 후야오방(胡耀邦), 류사오치(劉少奇)가 후난성 출신이어서 이들 생가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근대로 내려가면 황싱(黃興), 탄쓰퉁(譚嗣同)과 쩡궈판(曾國藩)의 생가와 무덤도 후난성에 있다.

   (끝)

 

 



베이징에서 티베트 라싸까지 48시간, ‘칭짱철도’ 탑승기
13억 꿈 실어나를 철마… 고공 인해전술은 시작됐다!
정호재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email protected]

‘세계의 지붕’으로 부르는 티베트 고원에 철마가 달리기 시작했다. 7월1일 개통된 ‘칭짱철도’는 평균 해발고도 4500m, 최고 5072m 고지까지 올라간다. 총 구간 4064㎞, 베이징에서 티베트의 중심도시 라싸까지 시원하게 뚫렸다. 이 철길은 중국과,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해온 티베트 양쪽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듯하다.
<!----- CALVINTEXT ------->
<!--no title -->

“워샹취라싸(我想去拉薩·라싸에 가고 싶어요)! 커이마(可以?·가능한가요)? 플리즈(Please), 아 제발….”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자리가 없을 것 같은데….”
“롼쭤(軟座·일반좌석), 잉와(硬臥·2등 침대칸)? 에브리싱 아임 오케이!”

7월18일 오전 8시.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1등석 침대칸을 비췄다. 잠에서 깨어보니 공장에서 갓 출시된 호사스러운 기계 덩어리가 레일 위를 부드럽게 내달리는 게 느껴졌다. 창 밖으로는 한창 자란 옥수수 사이로 듬성듬성 옛 도시의 상징인 시뻘건 벽돌이 보이기 시작한다.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다.

1시간 뒤면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역에 도착한다. 전날 밤 9시30분에 베이징 서역에서 출발한 티베트 라싸행 T27열차는 중간에 단 한 번 정차했을 뿐 무려 12시간을 내리 달려왔다. 하지만 침대칸이 주는 안락함 때문인지 그보다는 짧게 느껴졌다.

물론 겨우(?) 시안을 목표로 중국에 온 것은 아니다. 궁극적인 종착역은 모든 여행자의 꿈인 티베트, 중국명으로 시짱(西藏)성의 수도인 라싸(拉薩)다. 그것도 비행기가 아닌 열차로 가야 한다.

7월1일, 5년여의 난공사 끝에 거얼무(格爾木)에서 라싸를 잇는 1142km ‘칭짱철로’가 개통됐다. 이 소식이 전세계에 퍼졌을 때 가장 기뻐한 이는 중국 대도시의 여행사였던 것 같다. 중산층으로 격상한 중국의 대도시 주민들은 이상적인 여행지로 티베트를 꼽으며 철길이 열리기만을 기렸다고 한다. 올여름 중국에선 티베트 여행이 대유행이다.

중국인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곳

베이징에서 라싸행 열차표를 구하는 일은, 조금 과장하면 ‘후진타오 주석을 만나는 일’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베이징의 여행사마다 주말에 당도한 기자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주에 라싸에 가겠다고요? 허허. 7월 말까지는 ‘절대’ 표를 못 구합니다. 13억 중국인이 모두 가고 싶어하는 곳이 티베트예요. 무모하군요. 칭짱철도 타겠다고 무작정 베이징에 오다니.”

물론 준비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여행업에 종사하는 한 선배는 “가능성은 50% 미만이지만 직접 부딪치면 ‘한 장’쯤 웃돈을 얹어 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 말을 듣고 한달음에 베이징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라싸는커녕 시안행 열차표마저 휴가철 수요로 매진된 현장과 맞닥뜨려야 했다.

베이징 서역에서 지루한 줄서기를 반복한 끝에 월요일인 7월17일 밤에 출발하는 T27 시안행 표(417위안, 약 5만4000원)를 손에 쥐고 기차에 올랐다. 마침 이 열차의 종착역이 라싸다. 중국까지 와서 티베트행을 포기할 수는 없어 우선 시안까지 가서 여행허가증을 만들고, 칭짱철도의 마지막 탑승지점인 시닝(西寧)으로 이동해 승부를 걸어볼 작정이었다.

7월18일 오전 9시20분, 시안 도착 10분 전이다. 승무원은 보이지 않는다. 잠자코 내릴 생각이던 내게 일말의 희망을 안긴 건 옆 좌석의 이름 모를 중국인이었다. 새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는 그는, 다행스럽게 영어를 할 줄 알았다. 내 사정을 듣더니 뜻밖에도 “차장에게 목적지를 연장할 수 있는지 물어봐주겠다”고 호의를 베푼다. 아무리 만석(滿席)이라고 해도 한 좌석쯤 여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명이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무슨 주문을 외듯 마냥 “워샹취라싸(라싸에 가고 싶어요)∼”를 읊조렸다.

<!--no title -->

라싸행 T27열차 침대칸 내부. 거센 바람과 잦은 소나기에 철로 주변 토양이 유실되는 것을 막으려고 바둑판 무늬 형태로 돌을 쌓아놓은 모습이 이채롭다. 칭짱선 마지막 탑승지점인 시닝역(위에서부터).

극적인 대반전을 눈앞에 뒀지만 맘은 편치 못했다. 티베트 입경을 위한 ‘여행허가증’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곧장 라싸까지 갈 기회를 예상했다면 베이징에서 미리 준비했을 텐데…. 후회막급이다.

기차가 시안역 플랫폼에 다가갈 때쯤 승무원이 다가와 복음을 전한다.

“커이(可以·가능해요), 커이. 시안에서 하차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승무원을 와락 껴안았다. 드디어 라싸에 갈 수 있는 걸까. 기차는 시안에서 10분을 정차하고 곧장 다음 역인 란저우(蘭州)로 향했다. 여행허가증이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승무원이 다른 객실로 안내한다. 여권을 슬쩍 확인하더니, 1등석 침대칸이 남아 있다는 말과 함께 라싸까지의 추가비용 1013위안(약 13만원)을 부과했다(베이징에서 라싸까지 1등칸은 1262위안(약 16만4000원)).

걱정하던 여행허가증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철도 개통 후 지난 3주간 이 열차를 이용한 10여 명의 한국인이 여행허가증 제시를 요구받지 않았고 한다. 한국인은 중국 사람과 닮아서 승무원이 모르고 넘어간 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칭짱철도 탑승시 여행허가증이 필요없다’는 소문이 적어도 내 경우엔 사실로 확인됐다. 그러나 베이징 서역의 공고문은 여전히 외국인의 경우 티베트 여행허가서를 지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비행기를 타고 라싸에 가려면 반드시 여행허가증을 지참해야 한다.

티베트의 정치상황이 불안하다보니 중국은 여행허가증제를 엄격하게 실시해 티베트를 국제사회와 격리해왔다. 그렇다면 이제 중국은 티베트를 ‘완전한 중국 영토’로 자신하게 된 걸까. 칭짱철도가 갖는 의미는 이토록 중차대하다.

1등 침대칸을 차지하다니 운이 좋다. 앞으로 35시간 가까이를 기차에서 지내야 하는데, 일반좌석이었다면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할 뻔했다. 베이징에서 라싸까지 총 4065km 가운데 이제 겨우 4분의 1을 지나왔을 뿐이다.

현대 중국의 역사적 승리

칭짱철도는 ‘벼락스타’다. 18세기에 발명된 기차가 보급기(19세기)와 전성기(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도 화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바로 티베트라는, 인류문명의 마지막 원시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로이기 때문이고, 보다 정확하게는 티베트가 지닌 ‘분쟁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실제 공사는 2005년 10월에 끝났다고 알려졌지만 그간 ‘기술결함설’이 나돌며 실제 운행을 확신하지 못해왔다. 그런데 7월1일, 중국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프로젝트를 전세계인에게 깜짝 공개했다. 중국의 철저한 언론통제가 진가를 발휘한 셈인데, 고지대 구간 공사 중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희생됐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공식 명칭이 칭짱선(靑藏線)인 이 철도를 해외 언론에서는 ‘라싸 익스프레스’라고 부르는데, 중국인은 최고 높이 5072m인 기찻길의 이름을 ‘티엔루(天路)’, 즉 ‘하늘길’이라 부르고 있다. 드넓은 중국대륙에 불과 1142km의 철로가 연장된 것에 불과하지만, 중국인들은 이를 ‘21세기의 만리장성’이니 ‘신(新)실크로드의 완성’이니 하면서 뜨거운 관심을 내비친다.

<!--no title -->

이 프로젝트는 2001년 처음 공개됐다. 무려 330억위안(약 4조3000억원)을 투입한다는 거얼무-라싸 철도공사는 초기부터 ‘과대망상적 광기’라는 비판이 따라붙었다. 스위스의 세계 최고 터널을 건설한 업자조차 얼음산 때문에 공사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공사의 5분의 4 이상이 해발 4000m가 넘는 원시고원에서 진행돼야 했다. 이 정도 높이면 산소량이 지표면의 60%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사인부는 산소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공사가 절대 불가능한 환경은 아닐지 모른다. 문제는 철로가 놓이는 지반이다. 티베트고원은 얼어붙은 땅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치산치수(治山治水)가 이뤄진 적이 없었다. 급작스러운 폭우나 폭설로 인해 새로이 물길이 생기고, 순식간에 지형이 바뀌는 곳이다. ‘세계의 지붕’이라 부르는 땅에 철길이라니….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근대문명의 상징인 철로에는 말 그대로 치명적인 여건이다.

육중한 기차가 레일 위를 통과하면 철로를 받치는 지반이 녹아들 수 있다. 이 경우 레일이 뒤틀리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중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선의 상당 부분이 땅 위에 설치되지 않고, 노반에 통풍용 관로를 묻고 그 위에 자갈과 흙으로 새 길을 만들어 선로를 얹는 첨단 건설기법이 동원됐다고 한다. 아예 새롭게 길을 만든 셈인데, 칭짱선 사진을 보면 교량이 눈에 많이 띄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공사비, 지형을 바꾸는 공사,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심정적 저항. 그럼에도 중국은 1958년 이후 50여 년에 걸쳐 흔들리지 않고, 이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1984년 시닝-거얼무 (814km) 구간을 개통한 데 이어 2005년에 라싸까지 역사적인 철길이 완성됐다.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히말라야 고원을 넘는 친디아(Chindia) 철도를 계획하고 있다. 중국 인민들이 칭짱철도에 열광하는 이유는 티베트를 비롯한 서방 이민족에 억눌려온 과거를 잊게 할 현대 중국의 역사적 승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대륙을 기차로 횡단하는 여정은 매력적이다. 50여 년간 ‘죽의 장막’에 가려 있던 중국은 현대 한국인에게 어쩌면 아메리카 대륙보다도 낯설다. 대륙적인 풍광을 구경하는 것 외에 철도여행의 또 다른 장점이란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중국인민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표가 없는 불안한 신분에서 벗어난 만큼 기차의 맨 앞부터 뒤까지 차근차근 순례했다. T27열차(중국인들은 ‘칭1호’라 부른다)는 2량의 1등칸, 8량의 2등칸, 3량의 3등칸, 그리고 1량의 식당칸으로 구성됐다. 800명에 달하는 승객 가운데 서구인은 4~5명에 불과하다. 한국인과 일본인도 몇 명은 있을 텐데 중국인과 닮아서인지 분간할 수 없다. 중국인들은 긴 기차여행을 위해 가방 가득 음식을 싸왔고, 3등칸에선 언제나 그랬다는 듯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있는 승객들도 있다.

중국인의 ‘서부개척시대’

꼬박 48시간을 좁은 기차에서, 그것도 말동무 없이 지낸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옆 좌석의 중국인들과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4인 1실의 침대칸에는 두 가족이 탑승했는데, 양쪽 모두 어머니와 아들인 점이 특이했다. 모두 칭짱철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먼저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는 황위(黃羽·21)씨. 베이징 인근의 자그만 도시가 고향이라는 그는 50대의 어머니와 함께 티베트로 가는 중이다.

“아버지가 칭짱철도 공사 일을 하셔서 티베트에 계세요. 그래서 오랜만에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이에요.”

두 번째 가족은 칭짱철도의 후폭풍을 짐작하게 했다. 중국 남부의 우한(武漢)에서 베이징을 거쳐 왔다는 40대 여성과 아들 유웨이팅(尤偉廷·20)씨. 이들은 커다란 가방을 무려 3개나 안고 있어 한눈에도 평범한 관광객으로 보이지 않았다.

“티베트에서 장사를 해볼까 해요. 사실은 한국에 가서 일하고 싶었는데, 신천지인 티베트로 방향을 돌렸어요. 혹시 티베트가 맘에 들지 않으면 한국에 갈지도 모르니까, 연락처를 좀 주세요. 호호…”

젊은 모자는 필자에게 연락처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한창 혈기왕성한 아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원했는데, 자신의 영어가 부족하다고 느끼자 급기야 우한에 살고 있다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통역을 부탁하는 투지까지 보였다. 그의 여자친구가 통역해준 내용은 이렇다.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조캉 사원 앞(왼쪽).포탈라궁을 배경으로 한 길 이름이 ‘베이징 중루’라니 티베트의 중국화는 이미 진행 중인 모양이다.

“한국은 내게 꿈의 신천지예요. 제 휴대전화는 삼성 제품이고, 음악은 한국가수 것만 들어요. 특히 이효리와 장나라가 좋아요. 이번 월드컵에서도 한국을 응원했다니까요. 나중에 한국에서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이 두 모자와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중국인의 티베트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 티베트는 중국인에게 거대한 기회의 땅으로 부상했다. 막대한 지하자원의 존재는 차치하더라도 사시사철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특히 중국인에게 티베트는 값싼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제 중국은 칭짱철도를 활용해 본격적인 ‘식민경영’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친다. 마치 1930년대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철로가 놓일 때처럼.

“56년간 중국 땅이었지만…”

유웨이팅 모자의 집요한 등쌀에 잠시 식당칸으로 몸을 피했다. 한 젊은 미국인 관광객이 중국인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티베트에 대한 서구인의 생각이 궁금해 말을 걸어봤다. 그런데 조금은 귀찮다는 표정이다. 그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중국인 친구와 함께 티베트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글쎄…중국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했다고 하는데 아직까진 별 차이를 못 느끼겠다. 비행기의 반값이긴 한데 지겹다. 앞으로 또 티베트에 갈 기회가 있다면 비행기로 가야 할 것 같다.”

미국인과 동행한 중국인 여성에게 “어째서 중국인들이 칭짱철도에 이처럼 열광하고 티베트로 몰리느냐”고 물었더니 재미있는 예를 들어 답한다.

“만약 북한으로 철길이 뚫려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한국인들은 북한으로 안 갈 건가? 중국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티베트는 56년간 중국 땅이었지만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역사와 문화가 겹치지 않은 티베트를 자연스럽게 중국 영토라고 말하는 중국인의 대담함이 무섭게 다가왔다.

중국의 장기 프로젝트, ‘칭짱철도’.
시닝-거얼무 1차 구간을 1979년 완공, 1984년 개통한 데 이어 2005년 2기 공정을 마무리 지었다.

간쑤(甘肅)성 란저우에 닿은 것은 오후 4시. 바깥 풍광은 점차 대륙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산세가 험해지는 것은 물론, 하천 또한 깊은 침식작용으로 위협적인 협곡의 형상을 드러냈다.

기차 여행을 하면 매순간 허기를 느낀다. 그런데 같은 도시락을 여러 번 사먹고 보니 또다시 식당칸으로 향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정차역에서 파는 과일과 옥수수에 손이 갔다.

이 기차는 48시간 동안 6번 정차하는데, 란저우는 거리나 시간상으로 꼭 중간쯤에 위치한다. 란저우는 시안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철길 실크로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간쑤성의 수도인 란저우에서 서북쪽으로 향하면 우루무치가 나오고 곧장 서쪽으로 향하면 칭하이(靑海)성의 시닝에 도달한다. 언론에 크게 보도되진 않았지만 2001년에도 칭짱선의 개통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 있었다. 신장(新疆)성의 수도인 우루무치와 최서단 국경도시인 카슈가르를 잇는 1500㎞의 남신강철도가 완공된 것이다. 신장 지역 또한 독립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이때도 중국은 떠들썩하게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열차는 말 그대로 최신형에 최신식 시설을 자랑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내부의 모든 시설에 친절하게도 중국어 외에 티베트어로 된 설명서가 있다는 것. 티베트인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라싸행 열차에 조금은 어색하게 비쳤다. 1등석 객실에는 4개의 개인용 LCD-TV가 부착돼 있다. 채널은 여러 개지만 단 한 채널에서 영화를 방영할 뿐 나머지는 칭짱철도에 대한 홍보물로 도배가 돼 있다시피 하다.

티베트 제2의 도시, 시닝

란저우에서 다음 정차역인 시닝까지는 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흔히 칭짱철도의 시작점을 거얼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새로 개통된 출발점이지, 티베트땅을 지나는 칭짱선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그 시발점은 시닝역이라고 해야 옳다. 시닝은 티베트 제2의 도시로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관문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1950년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점령한 이후 한반도 면적의 세 배가 넘는(72만㎢) 북부 지역이 티베트에서 분리됐고, 중국식으로 칭하이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은 누구도 이 땅이 티베트 영토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몽골로 따지면 내몽골 지역과 비슷한 셈이다.

교통의 요지라는 점말고도 시닝이 중요한 점은 또 있다. 시닝시 남서쪽에 타얼사(塔爾寺)라는 라마교 절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황마오파이(黃帽派)의 시조인 쫑커파(宗喀巴)의 탄생지다. 노란 모자를 썼다는 의미의 황마오파이는 밀교의 전통을 지닌 동시에 승려의 도덕과 절제를 강조하는 라마교의 한 종파인데, 현재 티베트와 몽골의 라마교는 절대 다수가 이 황마오파이의 후예다. 시닝이 티베트 땅이라는 일종의 증거인 셈이다.

티베트의 지정학적 중요성

칭짱철도의 개통일인 7월1일은 중국 공산당 창당 85주년 기념일이다. 후진타오 주석은 이날 시닝을 거쳐 거얼무로 이동했는데, 시닝에는 지금도 개통식의 자취가 남아 있다. 화려한 꽃과 곳곳에 내걸린 찬양 구호들. 거얼무에서 열린 개통식에서 후 주석이 내뱉은 일성은 “칭짱철도 건설정신을 이어받자, 서부 대개발의 새로운 진전을 이룩하자!”였다고 한다.

후 주석이 칭짱선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그의 이력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후 주석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급박하던 시기인 1989∼92년에 티베트장족자치구 당서기라는 한직으로 내몰렸다. 그는 이 자리를 반등의 기회로 삼고자 했는데, 때마침 불어닥친 1989년 3월의 티베트 독립운동이 계기가 됐다. 베이징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후 주석은 당시 계엄령을 선포하며 철저한 무력진압에 나서 공산당 내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한때 티베트를 지도한 적이 있는 그가, 이제는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성공해 마오쩌둥 이래 중국 지도자들의 꿈이었다는 칭짱선 개통을 선포했으니 그 감격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no title -->

하지만 전문가들은 후 주석이 티베트를 중시하는 이유를 개인적인 인연 혹은 티베트 자체의 막대한 지하자원에서 찾지 않는다. 그 대신 인도와의 직접통로라는 지정학적 이유를 거론한다. 2003년 후 주석이 취임 직후 가장 먼저 시작한 외교작업은 바로 인도와의 국경분쟁을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1962년 인도와 중국의 국경분쟁 이후 40여 년간 중국과 인도를 잇는 실크로드인 나투라 고개는 폐쇄됐다. 인도 역시 티베트의 독립을 은근히 지원하며 중국을 견제했다.

그런데 2003년 6월23일 체결된 새로운 중-인 합의는 두 나라 역사를 새로 쓰게 했다. 이 같은 변화는 티베트의 희생 위에 가능했다. 당시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 총리의 방중기간에 체결된 9개 합의문 가운데 ‘인도는 시짱(西藏·티베트)을 중국 영토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간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실질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할 정도로 인도는 티베트인의 든든한 후원자였지만, 냉엄한 국제질서는 약소국인 티베트에 기회를 더는 주지 않았다. 중국이 티베트를 양보할 수 없는 것은 티베트를 소유하지 않고는 인도와의 통로가 막혀 대륙에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시닝에 들어서자 기차는 눈에 띄게 천천히 움직였다. 시닝의 고도는 약 2000m.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내일 새벽에는 거얼무에 도착해 있을 텐데. 아침 6시경에 잠에서 깨서 거얼무를 볼 수 있을지 미지수다.

한여름의 만년설

번쩍이는 햇빛에 눈을 떠보니 아침 8시. 이미 거얼무를 한참 지나 있었다. 창밖을 보니 모든 환경이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끝 간 데 모를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저 멀리 험준한 산맥들이 병풍처럼 칭짱철도를 호위하고 있는데, 그 산 위를 하얀 만년설이 덮고 있다는 사실이 여행객을 흥분시켰다.

기차의 속도는 시간이 갈수록 더뎌졌다. 밤새 고지를 올라왔는데도 아직 올라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일정표에 따르면 오후 4시에 나취(那曲) 지역을 통과하는데, 그곳이 바로 해발 5000m에 이르는 이 지역 최고 고도다. 앞으로도 반나절 가까이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는 얘기다.

점심시간 전에 승무원들이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강확인서 제출을 요구했다. 고산지대에 적응할 수 있다는 일종의 각서였다. 구체적으로는 ‘1. 나는 고원지대 여행의 주의점을 알고 있다 2. 나의 신체상황은 3000m 이상의 고지대를 여행하기에 충분하다’. 두 문장 옆에 확인 표시를 그려넣어야 했다.

오전 10시경. 양떼와 목동들이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칭짱고원의 설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 승객들이 일제히 통로로 집결해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이 지역은 1년 중 8개월은 온통 하얀 눈밭이라고 한다.

오전 11시가 되니, 귀가 멍해지고 뒷골이 땅긴다. 말로만 듣던 고산증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신체 건장한 젊은이’라 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힘에 겨운 증상이 나타나니 당황스럽다.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은 몇 발짝만 걸봐도 금세 느낄 수 있다. 숨이 가빠져 호흡을 바삐 해야 안정이 된다. 앉았다 일어서는 데도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할 정도다. 이 증세는 갈수록 심해졌다.

중국 당국은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를 승객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특수열차를 제작했는데, 우선 객차마다 농축산소 공급장치를 갖췄다. 또 평지에 비해 1.6배 강력한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창문을 특수 코팅했다고 한다. 객실에서 바삐 숨을 쉬고 있으니 옆 좌석의 중국인들이 웃는다. 결국엔 탑승할 때 건네받은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야 했다. 좌석 옆에는 산소연결구가 마련돼 있다. 산소호흡기까지 착용하니 정말 칭짱고원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2년의 오체투지 끝에 닿는 라싸

오후 3시, 시짱성의 첫 번째 정차역인 안둬(安多)에 도착했다. 정식 정차역은 아니고, 잠시 쉬어가는 역이다. 아직도 햇볕이 머리 위에서 내리쬔다. 티베트는 경도상으로 보면 베이징보다 3시간쯤 늦어야 하지만 ‘중국 영토’이기 때문에 베이징 시간을 적용한다. 파란 하늘, 푸른 초원 너머 도시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티베트인들은 기차가 신기한지, 기차역 가득 모여들어 승객들과 손 인사를 나눈다. 이곳에 사는 티베트인들의 얼굴은 까맣다. 고산지대라 강한 자외선에 피부가 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후 5시, 라싸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정차역인 나취역을 지났다. 이제 곧장 라싸로 직행한다. 중국인들도 긴장되나 보다. 연신 티베트 땅을 둘러보며 경계심을 드러낸다. 산세가 험해지니 중국인의 휴대전화가 간간이 먹통이 됐다. 이런 오지에까지 중국의 이동통신 네트워크가 뻗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우리 휴대전화가 터지니까 독도는 우리땅이다”라는 이동통신 광고 카피가 떠올랐다.

<!--no title -->

젊은 티베트인 인터뷰
“우리의 지도자는 달라이 라마… 민중의 마음은 중국도 어쩔 수 없다”

2006년 여름의 라싸는 새로운 활력으로 충만했다. 세계 유명 브랜드 매장이 중심가에 진출해 있고, 유리로 치장된 최첨단 건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히말라야 트레킹족의 거점도시 혹은 티베트 불교를 접하기 위해 찾아오는 단순 관광지 같은 과거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발돋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같은 변화를 중국인이 아닌 티베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라싸의 전통 찻집에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로 넘쳐났지만 자신의 속내를 낯선 이방인에게 드러낼 사람은 흔치 않았다. 식민지 젊은이들의 삶은 이토록 간단치 않다. 우연치 않게 친해진 한 티베트인은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구했다. 혹시나 가족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서다. 그의 이름과 나이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
▼ 티베트의 인구통계가 다 제각각이다.
“누구도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다. 중국 당국은 소수민족 인구를 제대로 조사해 발표하지 않는다. 티베트에 거주하는 중국인 인구를 합치는 경우도 있어 혼란스럽다. 티베트 내의 순수 티베트인은 300만명 내외라고 보면 된다. 1000만이라는 통계는 인도와 네팔 등 해외에서 유입된 인구를 합친 숫자이다.”
▼ 소수민족에겐 ‘1가구 2자녀’가 허용되니 티베트인의 수가 늘어날 수 있을 듯한데.
“하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도 자녀의 양육비와 교육비 때문에 많이 낳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인이 저렇게 몰려드는데….”
▼ 조선족은 50년 이상 중국 국민으로 살다보니 정체성이 중국인화했다. 티베트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인가.
“아직은 아니다. 자신을 티베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그런데 점차 동화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간 여러 모로 변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의 20대만 해도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국어를 배웠지만, 지금은 2학년부터 배우기 시작하는 식이다.”
▼ 티베트의 문명이 4000년을 헤아리는데, 100년을 점령당한다고 바뀌겠나.
“서서히 바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도 이미 다 없어지다시피했다. 하지만 우리는 불교를 중심으로 단결돼 있기 때문에 그 기간이 조금 더 지속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 불법이다.”
▼ 달라이 라마를 존경하는가.
“(한참을 주저하며) 솔직하게 말하면 국가지도자라고 생각한다. 티베트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그렇게 배운다. 민중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중국 당국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 한국도 일본에 36년간 점령당한 적이 있다. 티베트의 상황도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인도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에서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티베트인들에게는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다. 우리 언어로 된 언론도 존재하지 않고…. 100년 정도는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200년 이상 걸릴 수도 있겠다.”
▼ 자녀들에게 티베트의 독립을 교육시킬 의지는 있나.
“나로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 티베트 역사는 어디서 배웠나.
“물론 학교에서 배웠다. 정규교육보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교육이 이뤄지는지는 모르겠다.”
▼ 티베트의 근대화 전략이 궁금하다. 티베트 들은 국가의 장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능력 있는 이들은 다 국외로 나갔고, 안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1980년대 무장투쟁을 하다가 감옥에도 많이 갔고, 싸울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겐 문제가 좀 많다. 차나 마시고 도박이나 하고 있다.”
▼ 칭짱철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단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장사도 잘 되고 사람들 생각도 많이 트일 것 같다는 점에서는 기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쁜 점도 많다. 중국인이 대거 유입되면서 티베트 내 중국인 비중이 높아진다는 점이 그렇다.”
▼ ‘자원 수탈용’이라는 지적도 있는데.
“그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지난 50여 년간 계속된 과정이다.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도 하루 수백여 대의 트럭이 티베트의 자원을 실어 날랐다. 티베트인들도 변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보고 싶다.”

<!--no title -->

티베트 전통 건축양식과 현대 양식이 조화를 이룬 라싸역.

라싸로 향하는 길에는 놓쳐서는 안 될 풍경이 많다. 칭짱선이 쿤룬산맥의 옆구리를 감거나 뚫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티베트인들이 가장 신성시한다는 카일라스 산이 기차에서 보인다고 하는데, 정보가 없으니 어느 산이 카일라스 산인지 통 구별할 수가 없어 아쉬웠다. 티베트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인 남쵸(納木錯) 호수는 멀리 스쳐지나갔다. 그 길 옆으로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해서 라싸로 향하는 라마 승려도 보인다. 모든 라마교 신자는 일평생 한 번은 라싸에 가야 한다. 더욱이 오체투지로 간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일 뿐 아니라, 높은 승려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한다. 단 한 번의 기회를 기다려온 라마승이 온몸으로 땅과 싸워가며 2년이란 시간을 들여 라싸에 가는 반면, 이 기차는 단번에 중국인 800명을 실어나른다.

칭짱철도의 후폭풍

밤 9시. 기차가 천천히 라싸역 플랫폼에 들어섰다. 애당초 깜깜한 밤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시차 때문에 아직도 태양의 빛이 남아 있다. 티베트 전통 건축양식과 현대 양식이 조화를 이룬 라싸역은 마치 신공항처럼 크고 멋지다. 이제 동승했던 중국인들과 헤어질 시간이다. 악수를 하고 서로 티베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기원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인의 휴대전화를 빌려 호텔을 예약했다.

라싸역에서 도시 중심부까지는 버스로 30여 분이 소요됐다. 네온사인에 겹쳐 저 멀리 포탈라궁(布達拉宮)이 보이자 관광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지리부도에서 봤던 포탈라궁. 모두 ‘드디어 라싸에 도착했다’는 감격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칭짱철도의 개통으로 티베트의 변화를 예측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달라이 라마는 일찍이 이 철도가 티베트의 중국화를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3박4일에 걸쳐 중국 대륙을 횡단해 라싸에 당도하며 목격한 티베트의 변화는 이렇다.

인구 20만의 도시에 하루 5000명의 외지인이 밀려들어온다. 4편의 기차와 10여 편의 비행기가 실어나르는 외지인 중 중국인 비중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다. 라싸의 대표적 관광지인 포탈라궁은 하루에 1000여 명이 입장할 수 있는데, 이미 수용인원을 5배나 초과하고 있는 상황이다. 조캉 사원 앞에는 참배하는 신도보다 사진 찍는 관광객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관광객이 뿌리는 돈의 90% 이상은 중국인의 수중에 들어간다고 한다.

티베트는 중국 문명과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명을 일궈왔다. 예외가 있다면 몽골족이 세계를 지배하던 원나라 때인데, 이때조차 티베트는 몽골인에게 종교와 문자를 전수하며 오히려 문화적 스승 노릇을 했을 정도다. 강대국 청나라가 멸망한 1911년 티베트는 사실상의 독립을 획득했다. 잠시 영국의 간섭을 받긴 했어도 줄곧 독자성을 유지했는데, 1950년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중공군으로 말미암아 식민지가 된다.

이제 라싸의 인구비중에서 중국인의 숫자가 티베트인을 넘어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인력거와 택시 기사 가운데 상당수가 티베트인이었지만 이제는 중국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젊은이들은 티베트어보다 중국어를 편하게 느낀다. 1989년의 시위를 끝으로 티베트의 독립 논의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그라진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값싼 곡물이 철도를 타고 들어오고, 티베트의 지하자원이 이 철도를 타고 중국으로 반출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누구에게도 이 변화를 막을 힘은 없어 보인다.

칭짱철도의 개통, 그리고 중국과 인도의 관계 복원으로 인해 티베트의 독립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한 국제정세 변화, 혹은 중국의 대분열이 오더라도 독립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과연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한 ‘프리티베트(Free Tibet)’ 진영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돌아오는 길은 중국 남부의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를 목적지로 택했다. 비행기에서 쓰고 남은 중국 돈을 정리하다보니 50위안짜리 지폐가 눈에 들어온다. 뒷면에는 포탈라궁이 아로새겨져 있다. 티베트는 이미 중국의 새로운 식민지이면서 정신적 고향이 된 것일까. 머지않은 미래에 서울에서부터 라싸까지 기차로 여행할 생각에 설레면서도 인류의 고결한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다는 생각에 침울해졌다.



    test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