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박사의 생애
의학공부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사이에서 작은 아들로 태어났으며, 송도고보와 경성의전을 졸업하였다. 외과의사 백인제 박사의 제자로서 수련하였다. 당시 병원에 입원 중이던 문학가 춘원 이광수가 장기려 박사를 소설 《사랑》 의 주인공 "안빈" 의 모델로 삼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장기려 박사 자신은 안빈은 춘원이 창작한 인물이라며 부인했다.
의료봉사활동
1940년 나고야제국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교수를 지냈다. 1950년 12월 처자를 두고 차남 장가용과 함께 월남하여 1951년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무료진료소 "복음병원"을 세워 의료봉사로 사회에 이바지하였다.
장기려는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고, 1975년 청십자의료원을 설립해 직접 환자들을 진료했으며, 장미회(간질환자 치료모임)을 창설, 부산 생명의 전화 설립, 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 창립에도 앞장섰다.
장기려는 1976년 국민훈장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으며, 1995년 인도주의 실천의사상을 받았다. 노년에 병고(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 받고 있다.
장기려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별세하였고, 묘지는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 내에 있다. 1996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에 헌액되었다.
종교활동
장기려 박사는 장로교회 (예수교장로회 고신) 장로였지만, 무교회주의자인 함석헌, 김교신과 교제했으며, 32년간 무교회주의 성격의 "부산모임" 집회를 자신의 집과 사무실에서 주관했다. 뿐만 아니라, 국제 교회개혁 모임인 종들의 모임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종교 개혁" 과 같은 기독교변혁이 필요하다는 신념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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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봉사를 하신 것이 아니라 삶...그 자체였습니다.
불우하고, 배고프고, 아프지만 돈 없어서 치료 못하는 사람과 함께하셨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가 아닌 성자(聖者)였습니다.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아름다운 일화를 많이 남겼다.
어느 해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박사 곁에서 자고 일어난 애제자가 잠자리를 정돈하고 먼저 세배를 올렸다.
장기려 박사는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덕담을 해주었다.
"금년엔 날 좀 닮아서 살아보아."
스승의 큰 사랑에 어리광을 부리던 제자가 재롱삼아 말을 받았다.
"선생님 닮아 살면 바보 되게요."
그러자 장기려 박사는 껄껄껄 웃으며 다음과 같이 토를 달았다고 한다.
"그렇지, 바보 소리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냐?"
혹여 세상 사람들은 늘 불쌍한 환자들에게 무료진료를 해주던 장기려 박사를
'저 사람 바보아냐?' 하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퍼주던 그에게 내심 '이상한 사람'이라고 빈정거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장기려 박사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바보로 살기'로 작정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춘원 이광수 선생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을 때 담당 레지던트였던 장기려 박사를 가리켜
'당신은 바보 아니면 성자'라고 한 말이 실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