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종교에 집착하나요?특히 중동사람들

사람들은 왜 종교에 집착하나요?특히 중동사람들

작성일 2006.02.12댓글 2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무하마드 만화만평사건도 그렇고..

 

막 사람들이 사이비같은 데 빠지고나면

 

진짜 거의 반 미치잖아요.어디에 홀린것처럼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신'이라는 존재가

 

추상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몇천년 전부터  사람들은 왜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집착하는거죠?

 

특히 중동사람들은 더 그렇잖아요.

 

거의 '신'이라는 한 대상을 주체로 살아가는 것처럼요.

 

왜그런가요?

 

그러니까 제 질문을 종합해보자면요.

 

1)사람들은 왜 고대부터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집착했나요?

 

2)종교 즉,의지하고 믿는다는 어떤 대상이 생기면 뇌파나 어떤

몸에 분비되는 호르몬들이 달라지나요?

왜 그렇게 정신을 놓은것처럼 미친듯이 빨려가나요?

 

3)종교에 대한 집착이 다른나라사람들에 비해

중동지역은 왜 그렇게 심한건가요?

 

 


#사람들은 왜 모를까 #사람들은 왜 스타벅스로 가는가 #사람들은 왜 이상한 것을 믿는가 #사람들은 왜 연애를 할까 #사람들은 왜 내 영상을보고 화장실에 가나요 #사람들은 왜 내말을 안들을까 #사람들은 왜 모를까 해석 #사람들은 왜 뇌물을 받을까 #사람들은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사람들은 왜 mbti에 열광할까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사람들은 왜 고대부터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집착했나요?

좀 깁니다. 읽어보시면 계몽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어디에 살든지 관계없이, 종교가 수많은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힌두교를 믿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신들에게 코코넛, 꽃, 사과 등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행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승려는 신자들의 이마에 빨강이나 노랑 물감으로 틸라크라는 점을 붙여 줍니다. 또한 해마다 수백만 명이 갠지스 강에 모여 그 물로 정화를 받으려고 합니다.

 

가톨릭교를 믿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십자가상이나 묵주를 손에 쥐고 교회와 대성당에서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사리오 묵주는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의 수를 세는 데 사용됩니다. 그리고 수녀와 사제들은 검은 색 복장으로 뚜렷이 구별되므로, 알아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프로테스탄트교를 믿는 나라에는 교회당이 많습니다. 일요일에는 교구 신자들이 흔히 가장 좋은 옷을 입고 함께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듣습니다. 교직자들은 대개 검은 색 복장을 하고 뚜렷이 구별되는 교직자 칼라를 답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에서는 모슬렘 시보원(時報員), 무에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뾰족탑에서 소리를 질러, 살라트 곧 의례적인 기도를 위해 신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모슬렘은 성(聖) 쿠란(코란)을 이슬람교의 경전으로 여깁니다. 이슬람교 신앙에 따르면, 그 책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것으로, 예언자 무하마드(마호메트)가 기원 7세기에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받았다고 합니다.

 

불교를 믿는 많은 나라의 거리에서는 그 독실한 신앙의 표시로 대개 진노랑이나 검정 혹은 빨강 법의를 입은 불교 수도승들을 볼 수 있습니다. 평온한 불상이 전시되어 있는 옛 사원들은 불교 믿음의 오랜 역사의 증거입니다.

 

일본에서 주로 믿는 신도(神道)는 집안의 신도 제단과 조상에게 바치는 제물을 통해 일상 생활 속으로 파고 듭니다. 일본인은 극히 평범한 일에 대해, 심지어 입학 시험에서 합격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거리낌없이 기도합니다.

 

이처럼 세계 전역에 존재하는 매우 다양한 종교적 신념은 무엇을 알려 줍니까?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영적인 것을 필요로 하고 갈망해 왔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시련과 짐 그리고 죽음의 수수께끼를 포함한 의혹과 질문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 혹은 신들에게로 향하여 축복과 위안을 구할 때, 종교적 감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종교는 또한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류의 장래는 무엇인가?’ 등의 중요한 질문에 대해 설명하려고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가 없거나 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무신론자(無神論者)입니다. 또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라는 사람들은 아무도 하느님을 모르며 필시 알 수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원칙이나 윤리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종교를 가졌다고 공언하는 사람이라고 모두 원칙이나 윤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종교를 “어떤 원칙에 대한 신념; 철저한 충성 혹은 충실성; 양심적인 태도; 독실한 애정 혹은 애착”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은 그들의 생활 가운데 일종의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옥스퍼드 영어 소사전」(The Shorter Oxford English Dictionary).

 

더욱 빨라지는 교통과 통신 수단으로 인해 점점 더 좁아지는 세상에 너무나도 많은 종교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믿음이 미치는 영향을 느끼게 됩니다.

 

1989년에 일부 사람들이 ‘모슬렘의 배교자’라고 부른 사람이 쓴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라는 책에 대해 분노가 폭발한 일은, 종교적 감정이 어떻게 세계적인 규모로 나타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이슬람교 지도자들은 그 책을 금지시키고 심지어는 그 저자를 처형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종교 문제에 그처럼 격렬한 반응을 나타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 종교들의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제프리 패린더가 「세계의 종교―고대사에서 현대사까지」(World Religions―From Ancient History to the Present)에서 이렇게 기술한 바와 같습니다.

 

“다른 종교를 연구한다고 반드시 자기 믿음에 불충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진실을 찾으려 노력했고 그 찾는 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부요해졌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자기 믿음이 오히려 더 커질 수 있다.” 지식은 이해심으로 인도하고, 이해심은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용으로 인도합니다.

 

 

조사해 보아야 할 이유

 

‘나는 나 자신의 종교가 있다. 그것은 매우 사적인 문제다. 종교 문제로 다른 사람과 토론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거나 말한 적이 있습니까? 사실, 종교는 매우 사적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정신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친척에 의해 종교적, 윤리적 사상이 심어집니다.

 

그 결과, 우리는 대개 부모와 조부모의 종교적 이상을 그대로 따릅니다. 종교는 가족 전통의 문제가 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슨 결과가 초래되었습니까?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종교를 택해 주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단지 우리가 어디에서, 언제 태어났느냐에 좌우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가 지적한 대로, 개개인이 어떤 믿음에 고착하느냐 하는 것은 흔히 “태어난 곳의 지역성이라는 지리적 우연”에 의해 결정됩니다.

 

태어날 때 정해진 종교가 반드시 온전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적입니까? 만약 우리가 이탈리아나 남아메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우리는 선택의 여지 없이 십중 팔구 가톨릭교인으로 자랐을 것입니다.

 

만약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자동적으로 힌두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펀자브 지방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시크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부모가 파키스탄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슬람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지난 몇십 년 사이에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별 도리 없이 무신론자로 자랐을 것입니다.―갈라디아 1:13, 14; 사도 23:6.

 

그러면 태어날 때 정해진 종교가 자동적으로 참 종교 곧 하느님께서 승인하시는 종교입니까? 만약 사람들이 ‘내 조상들이 만족했던 것이라면 나도 만족하겠다’는 전제 아래, 수천 년 동안 그런 관념을 따랐다면, 아직도 인류 가운데 많은 수는 원시 샤머니즘(무속 신앙)과 고대 다산(多産) 종교를 믿을 것입니다.

 

과거 6000여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발전한 종교적 표현 방식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적어도 교육적인 일이고 정신의 폭을 넓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장래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희망을 갖게 하는 전망이 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의 법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 19:17, 18)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누가 6:27, 35)

 

“시험받는 여자”라는 제목 아래, 쿠란에서도 비슷한 원칙(수라 60:7)을 알려 줍니다. “알라는 너희와 너희가 원수로 여기는 그들 사이에 우정을 이루게 할 수 있으시니 실로 알라는 전능하사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시도다.”

 

관용과 이해심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종교를 평가할 것인가?

 

대부분의 종교가 신조 혹은 교리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체계는 흔히 일반 평신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신학 형태입니다. 그렇지만 인과 법칙은 모든 경우에 적용됩니다. 종교의 가르침은 신자 개개인의 성품과 일상적인 행실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각 사람의 행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그 사람의 종교적 배경을 반영할 것입니다. 당신의 종교는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당신의 종교는 더 친절한 사람이 되게 합니까? 더 관대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동정심 많은 사람이 되게 합니까?

 

이것은 이치적인 질문입니다. 위대한 종교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 7:17-20.

 

세계 역사를 살펴볼 때, 확실히 우리는 잠시 멈추어, 인류를 짓밟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한 많은 전쟁에서 종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또 죽임을 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자군, 종교 재판, 중동 및 북아일랜드의 분쟁, 이라크와 이란 사이의 살육전(1980-88년), 인도의 힌두교-시크교 간의 충돌―이 모든 일을 살펴보면서, 생각있는 사람들은 확실히 신앙과 윤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국 영역은 이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위선을 나타냈습니다. 양차 세계 대전에서, “그리스도교인” 정치 지도자들의 명령으로 가톨릭교인이 가톨릭교인을 죽이고 프로테스탄트교인이 프로테스탄트교인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육체의 일과 영의 열매를 대비해서 그 차이를 뚜렷하게 알려 줍니다. 육체의 일에 관해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

 

그렇지만 소위 그리스도교인들은 여러 세기 동안 이런 일을 해왔으며, 교직자들은 흔히 그들의 행실을 눈감아 주었습니다.―갈라디아 5:19-21.

 

그와는 반대로, 뚜렷한 영의 열매는 “사랑, 즐거움,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착함, 믿음, 온유, 자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하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이런 평화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의 현실이 그러합니까? 당신의 종교는 어떠합니까?―갈라디아 5:22, 23

 

그러므로 하느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을 세계 종교 전반에 걸쳐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까? 누구의 표준이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까?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

 

한 사전에 의하면, 종교는  “우주의 창조주이며 통치자로 인정되는 초인간적 능력자에 대한 사람의 신앙 및 숭상의 표현”이라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내 종교는 우주의 창조주이며 통치자 보시기에 만족할 만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경우에, 가납되는 행실과 숭배와 교리는 무엇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를 확립할 권리는 창조주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분은 자신의 뜻을 인류에게 계시하셔야 하며, 그 계시는 모두의 주위에 있어서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분의 계시는 여러 세기 간격을 두고 나타난 것이라 하더라도, 언제나 조화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도전이 되는 일을 제시합니다. 증거를 살펴보고 하느님께서 가납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직접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가장 오래 된 책 중에 하나는 성서(聖書)입니다. 성서는 또한 전체 역사를 통하여 가장 널리 배부되고 번역된 책입니다. 거의 2천년 전에, 성서 필자 한 사람은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느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 12:2)

 

그렇게 분별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같은 필자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요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의로 교육하는 일에 유익한 책입니다. 그것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합당하도록 완전히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감받은 성서가 참되고 가납되는 숭배를 가늠하는 믿을 만한 잣대 역할을 해야 합니다.―II 디모데 3:16, 17, 새번역.

 

성서의 가장 오래 된 부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종교 저술물보다도 더 오래 되었습니다. 토라 곧 성서의 처음 다섯 권은 모세가 영감을 받아 기록한 율법으로, 기원전 15세기 내지 16세기까지 소급합니다.

 

그에 비하여, 힌두교의 저술물 「리그-베다」(찬가의 수집물)는 기원전 900년경에 완성되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의 “삼장”(三藏)은 기원전 5세기로 소급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전달받았다고 하는 쿠란은 기원 7세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미국의 조지프 스미스가 모로니라는 천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모르몬경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의 주장대로 그 저작물 중 일부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면, 그 저작물에 제시된 종교적 지침은 처음으로 영감받은 자료인 성서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작품들은 또한 인류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몇몇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대답을 요하는 질문들

 

(1) 성서는 대다수의 종교들이 가르치고 많은 사람이 믿는 것과 같이, 인간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죽을 때 다른 영역 곧 “내세,” 천당, 지옥, 연옥 등으로 가거나 환생하여 돌아온다고 가르칩니까?

 

(2) 성서는 우주의 주권자이신 주께서 이름이 없는 분이라고 가르칩니까? 성서는 그분이 한 하느님이라고 가르칩니까? 아니면 한 하느님 안의 세 위라고 가르칩니까? 혹은 여러 신이라고 가르칩니까?

 

(3) 성서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지상에 살도록 창조하실 때 원래 목적이 무엇이었다고 알려 줍니까?

 

(4) 성서는 이 땅이 멸망될 것이라고 가르칩니까? 아니면 단지 타락한 세상 제도의 끝 곧 종결에 관해서만 알려 줍니까?

 

(5) 과연 어떻게 내적 평화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종교마다 대답이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결한 종교”를 찾을 때 마침내 도달해야 할 결론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결론이어야 합니다. (야고보 1:27, 미국 표준역, 제임스 왕역)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본 원칙은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느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로마 3:4.

 


종교―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종교의 역사는 사람 자신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습니다. 고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매우 “원시적인” 문명, 다시 말해서 미개한 문명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숭배의 증거가 발견됩니다. 실제로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학자들이 발견한 바로 볼 때, 어떤 의미로도 종교심이 없는 사람이란 어느 곳에도, 어느 시대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알려 줍니다.

 

종교는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하기도 합니다. 보르네오 정글의 사람 사냥꾼, 얼어붙은 북극 지방의 에스키모인, 사하라 사막의 유목민, 세계 대도시들의 도시 주민 등, 지상에 있는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들이 그 나름의 신이나 신들 그리고 그 나름의 숭배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의 다양함은 참으로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할 정도입니다.

 

논리적으로, 이와 같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이 모든 종교의 기원은 무엇인가? 종교들 사이에 유사점들 뿐만 아니라 뚜렷한 차이점들이 있는 것을 볼 때, 이들은 상호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는가, 아니면 하나의 근원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는가?’

 

사실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도대체 종교가 왜 시작되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종교와 신앙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는 데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의 기원에 관한 질문

 

종교의 기원에 관해 질문을 하면,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무하마드(마호메트), 붓다(부처), 공자, 예수 같은 이름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종교에서, ‘참 믿음’을 창시했다는 이유로 영예를 받는 중심 인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인습을 타파한 개혁가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도덕주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민중의 헌신적인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새로운 종교의 기초를 정립한 글이나 말을 남겼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이 말하고 행한 것들이 다듬어지고, 윤색되어, 신비한 영기(靈氣)를 띠게 되었습니다. 그 지도자들 중 일부는 신격화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요 종교들의 창시자로 간주되지만, 그들이 실제로 종교를 창시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 창시자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가르침의 근원이 신에 의한 영감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기존의 종교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니면 이러저러한 면으로 불만스러워진 기존의 종교 체제를 바꾸고 수정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비교적 정확한 역사에 의하면, 붓다는 왕자였는데 힌두교가 지배하는 사회 내에서 주변의 고통과 비참한 환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불교는 인생의 고통스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무하마드는 주변의 종교 의식에서 우상 숭배와 부도덕을 보고 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는 나중에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으며, 그 결과 쿠란(코란)이 만들어져서 새로운 종교 운동 곧 이슬람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교는 16세기 초엽 마르틴 루터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종교 개혁의 결과로 가톨릭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종교에 관한 한, 그 기원과 발전, 그 창시자, 그 경전 등등에 관한 지식은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 존재했던 종교들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된 종교들은 어떠합니까? 역사를 충분히 거슬러 올라간다면, 우리는 마침내 ‘종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부닥치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종교 영역을 벗어나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종교의 기원에 대한 많은 이론들

 

여러 세기 동안,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태어나고 자기가 성장한 환경의 종교 전통을 받아들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선조들이 물려준 설명에 만족하면서, 자기들의 종교가 진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의심할 이유가 없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언제, 혹은 왜 시작되었는지를 조사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사실상, 여러 세기 동안 여행 및 통신 수단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 체제에 대해 아는 사람들조차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 양상이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화론이 세계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과학적 탐구 방법의 출현과 더불어, 진화론은 많은 사람에게 종교를 포함한 기성 체제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존의 종교 안에서 실마리를 찾는 것의 한계를 인정한 일부 학자들은 초기 문명의 유물이나 사람들이 아직도 원시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세계 곳곳의 오지로 향하였습니다. 그들은 종교가 어떻게 그리고 왜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실마리를 찾기를 바라면서, 그 일에 심리학·사회학·인류학 등등의 방법들을 적용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갑자기, 많은 이론들―조사자들만큼이나 많아 보이는 이론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조사자들끼리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으며, 저마다 대담성과 독창성 면에서 상대를 능가하려고 애썼습니다. 이 연구가들 중 일부는 중요한 결론에 이른 반면, 다른 연구가의 업적은 그대로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연구의 결과를 잠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교육적인 동시에 계몽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종교적 태도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흔히 애니미즘 곧 정령(精靈) 숭배로 불리는 이론은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1832-1917년)가 주창한 것입니다. 꿈·환상·환각 등을 경험하고 시체에 생명이 없는 것을 보면서, 원시인들은 몸속에 영혼(라틴어, 아니마)이 거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타일러는 말하였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그들은 사랑하는 죽은 사람들에 대한 꿈을 자주 꾸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영혼이 계속 살아있고, 영혼이 몸을 떠나서 나무·바위·강 등등에 거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침내, 죽은 자들 그리고 영혼이 그 속에 거한다고 하는 물체들이 신으로 숭배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종교가 탄생했다고 타일러는 말하였습니다.

 

영국의 또 다른 인류학자 R. R. 마렛(1866-1943년)은 정령 숭배를 다듬어, 애니머티즘 곧 유생관(有生觀)을 주창하였습니다. 태평양 군도의 멜라네시아인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원주민의 신앙을 연구한 후에, 마렛은 원시인들이 인격의 영혼 개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만물에 생명을 주는 비인격의 힘 혹은 초자연적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그 신앙은 사람 속에 외경심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그 감정이 원시 종교의 기초가 되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마렛이 보기에, 종교는 주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사람이 나타내는 감정적 반응이었습니다. 마렛이 가장 좋아했던 말은, 종교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춤으로 고무되는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1890년에 스코틀랜드의 고대 민속학 전문가, 제임스 프레이저(1854-1941년)는 「황금가지편」(The Golden Bough)이라는 널리 영향을 미친 책을 발행했는데, 그 책에서 그는 종교가 주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프레이저에 의하면, 처음에 사람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자기의 생명과 환경을 조종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천둥 같은 북소리를 내면서 땅에 물을 뿌리면 비를 오게 할 수 있다거나, 원수의 형상에 바늘을 꽂으면 그에게 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생활의 많은 분야에서 의식과 주문 그리고 주술적 물건들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기대했던 대로 작용하지 않을 때는, 그 일을 그만두려고 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능력자의 도움을 얻기 위해 비위를 맞추고 간청하였습니다.

 

의식과 주문이 제사와 기도가 되었고, 그래서 종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프레이저의 말대로라면, 종교는 “사람보다 우월한 능력자를 달래거나 회유하는 일”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정신 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년)도 그의 저서 「토템과 터부」(Totem and Taboo)에서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프로이트는 자기 직업에 어울리게, 최초의 종교가 아버지상(像)에 대한 노이로제라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야생말과 소떼의 경우처럼, 원시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씨족을 지배했다는 이론을 세웠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하기도 하고 선망하기도 하던 아들들이 반역을 하여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아버지의 능력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식인종 야만인들은 그들이 죽인 아버지를 먹었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하였습니다.

 

나중에, 아들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자기들의 행동을 속죄하기 위한 의례와 의식을 고안해 냈습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면, 아버지상이 하느님이 되었고, 의례와 의식이 최초의 종교가 되었으며, 살해한 아버지를 먹은 것이 많은 종교에서 행하는 영성체 전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이론들은 그 밖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론들은 대부분 잊혀졌으며, 그 이론들 중에는 실제로 다른 것들보다 더 믿을 만하거나 받아들일 만하게 두드러져 보이는 이론이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니라 그 이론들이 참임을 증명할 만한 역사적 사실이나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론들은 순전히 일부 조사자들의 상상 혹은 억측의 산물에 불과하였으므로, 오래지 않아 다음 이론이 등장하면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릇된 기초

 

여러 해 동안 그 문제로 씨름한 후에, 많은 사람은 종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에 이제 아무런 돌파구도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무엇보다도 첫째로, 옛날 사람들의 뼈와 유물은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혹은 왜 숭배를 했는지를 알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공 유물로부터 끌어낸 그 어떤 결론도 기껏해야 경험에 의한 추측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같은 오늘날의 소위 원시인들의 종교 의식이 반드시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행했거나 생각했는가를 측정하는 믿을 만한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세기 동안 그들의 문화가 변했는지의 여부 또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세계의 종교―고대사에서 현대사까지」(World Religions―From Ancient History to the Present)는 “현대의 종교사가들은 종교의 기원을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역사가들의 노력에 관하여, 그 책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과거에는 단지 종교를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려고 한 이론가들이 너무 많았다. 초기 형태의 종교가 환영에 근거한 것임이 드러난다면, 후기 고등 종교들의 토대가 허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의 마지막 말에는 종교의 기원을 조사하는 다양한 “과학적” 조사자들이, 지지받을 수 있는 설명을 도무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 주는 실마리가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정확한 결론은 정확한 전제로부터만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릇된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면, 건전한 결론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거듭해서 “과학적” 조사자들이 이치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견해의 근거가 되는 전제에 심각한 의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들은 미리 생각한 개념에 따라, “종교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여러 면에서 16세기 이전의 천문학자들이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론이 있었지만, 어느 것도 참으로 만족스럽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론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별과 행성들이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계의 중심인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그리고 가톨릭 교회가―기꺼이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실질적인 진전이 없었습니다.

 

많은 이론이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자, 개방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사의 전제를 재검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종교의 기원에 관한 조사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무신론이 등장하고 진화론이 널리 받아들여짐에 따라, 많은 사람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가정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종교의 존재에 관한 설명을 사람 자신에게서―사람의 사고 과정, 사람의 필요, 사람의 두려움, 사람의 “노이로제”에서―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볼테르는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하느님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라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이 하느님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이론이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그 조사들이 근거하고 있는 전제를 재검토해 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똑같은 전철을 밟으며 헛수고하는 것보다는, 다른 곳에서 답을 찾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기꺼이 개방적인 정신을 가진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이치적인 동시에 과학적이라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아주 적절한 본이 있습니다.

 

 

고대의 탐구

 

통용 기원 1세기에, 그리스, 아테네는 학문의 탁월한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 중에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같이, 신들에 관하여 각기 그 나름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학파가 많았습니다. 그 여러 사상에 근거해서, 많은 신들이 경배를 받았고, 서로 다른 숭배 방식이 발전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 도시에는 사람이 만든 우상과 신전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사도 17:16.

 

기원 50년경,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아테네를 방문하여, 아테네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견해를 제시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사도 17:24, 25.

 

다시 말해서, 바울은 아테네인들에게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참 하느님이 사람의 상상으로 지어낸 분이거나 사람이 고안한 방법대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참 종교는 단지 사람들이 심리적 필요를 채우거나 두려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기울이는 일방적인 노력이 아닙니다.

 

그와는 달리, 참 하느님은 사람에게 사고 능력과 추리력을 주신 창조주이시므로, 인간이 하느님과 만족스러운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그분이 직접 제시하신다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느님은 바로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셨으니] ··· 이는 사람으로 하느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사도 17:26, 27.

 

바울의 말의 요점에 유의하십시오. 하느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많은 민족을 이루어 온 땅에 퍼져 살고 있지만, 실제로 과학자들은 모든 인류가 같은 혈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개념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온 인류가 같은 혈통이라는 말은 단지 인류가 생물학적, 유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상으로 훨씬 많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다른 면으로도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의 숭배 설화」(Story of the World’s Worship) 책에서 사람의 언어에 관해 알려 주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세계의 언어들을 연구하고 서로 비교해 본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다름아니라 모든 언어는 어족 혹은 어군들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 모든 어족은 하나의 공통 근원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의 언어들은 진화론자들 때문에 사람들이 믿게 된 것과는 달리 각각 독자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진화론자들은 아프리카, 유럽 및 아시아의 혈거인(穴居人)들이 꿀꿀거리고 으르렁대는 것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그들 나름의 언어를 개발했다는 이론을 내세웁니다. 실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증거는 그 언어들이 “하나의 공통 근원에서 출발”했음을 알려 줍니다.

 

만약 그 사실이 언어와 같이 인간적인 그리고 인간 특유의 것들에 들어맞는다면, 하느님과 종교에 대한 사람의 사상도 당연히 하나의 공통 근원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적이 아니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종교는 사고 방식과 관련되어 있고, 사고 방식은 사람의 언어 사용 능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모든 종교가 실제로 하나의 종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과 개념들이 종교 사상의 어떤 공통 기원 혹은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습니까? 그리고 사람의 종교가 실제로 하나의 단일 근원에서 생겨났다면, 그 근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습니까?

차이점이 있지만 비슷하다

우리는 언어학 전문가들이 언어의 기원에 관한 해답을 얻은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 언어를 나란히 놓고 서로 비슷한 점들에 유의함으로써, 어원학자들은 여러 언어를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러 종교를 나란히 놓고 그 교리, 전설, 의례, 의식, 제도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통된 주체에서 비롯된 일관된 줄거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 일관된 줄거리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오늘날 존재하는 많은 종교가 서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윤색에 불과한 것과 나중에 더한 것들을 빼거나, 발상지의 풍토·언어·특수한 조건 및 그 밖의 요인들에서 기인한 차이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종교가 놀라우리 만큼 비슷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은 그 어떤 두 종교도 서양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양의 불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은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에 기인한 차이점들을 제외하고 나면,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두 종교간에 공통점이 매우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와 불교는 모두 의례와 의식에 흠뻑 젖어 있습니다. 그중에는 촛대, 향, 성수(聖水), 묵주 혹은 염주, 성인의 형상, 찬가와 기도서, 심지어 십자가 표시를 사용하는 일까지 포함됩니다.

 

두 종교 모두 남녀 수도승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사제 혹은 승려의 독신제, 특별한 복장, 성일(聖日), 특별한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전부를 다 열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요점을 예시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종교가 그렇게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 두 종교를 비교해 봄으로써 계몽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처럼, 다른 종교들을 비교해 볼 때도 비슷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비교해 보면, 특정한 가르침과 신앙들이 그 종교들 가운데 거의 보편화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대부분은 인간 영혼의 불멸, 선한 사람은 모두 받는다는 하늘의 상, 악인들이 지하 세계에서 받는다는 영원한 고초, 연옥, 삼신 혹은 많은 신으로 이루어진 신격, 그리고 신의 어머니 혹은 하늘 여왕 여신 같은 교리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도 똑같이 공통적으로 퍼져 있는 전설과 신화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불법적으로 불멸성을 얻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잃게 된 일,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을 바쳐야 할 필요성, 생명 나무나 청춘의 샘을 찾는 일, 신과 반신 반인(半神半人)들이 인간들 사이에 살면서 초인간적 후손을 낳은 일, 그리고 거의 모든 인류를 멸망시킨 홍수 재난에 대한 전설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사실로부터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이런 신화와 전설들을 믿은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들의 문화와 전통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사회 관습은 서로 아무 관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종교 문제에 관한 한, 그들은 그처럼 비슷한 사상을 믿었습니다.

 

그 민족들 모두가 앞서 언급한 것을 다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민족들은 모두 그중의 일부를 믿었습니다. 분명하게 제기되는 질문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종교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마치 각각의 종교가 그 기본 신앙을 이끌어 낸 공통의 근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기본 사상들은 윤색되고 수정되었으며, 그로부터 다른 가르침들이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본 골자는 명백합니다.

 

논리적으로, 세계의 많은 종교의 기본 개념들이 비슷하다는 것은 그 종교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종교들의 사상이 나온 하나의 공통 기원이 있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 기원은 무엇이었습니까?

 

 

초기의 황금 시대

 

흥미롭게도, 많은 종교의 공통된 전설 중 하나는, 사람이 무죄하였고 하느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살았으며 병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황금시대로부터 인류가 출발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세부점은 다를지 모르지만, 한때 존재했던 완전한 낙원에 관한 똑같은 개념이 많은 종교의 저술물과 전설들에서 발견됩니다.

 

고대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는 아후라 마즈다(창조자)와 대화를 나누었던 최초의 멸성 인간인 “훌륭한 이마, 선한 목자”에 관해 알려 줍니다. 이마는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내 세상을 가꾸고, 다스리고, 보살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모든 생물을 위한 땅 속의 거처인 “바라”를 지어야 했습니다. 그 속에서의 생활은 이와 같았다고 합니다.

 

“뽐내는 일이나 천박한 일이 없었고, 어리석은 일이나 폭력도 없었으며, 가난이나 속임수도 없었고, 연약한 것이나 기형적인 것도 없었으며, 보통 이상으로 큰 이빨이나 체구도 없었다. 그 거민들은 악령의 더러운 행위로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향기로운 나무와 황금 기둥 사이에 거하였는데, 그것은 땅에서 가장 크고 가장 좋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들 자신부터 키가 크고 아름다운 인종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 가운데, 헤시오도스의 시 「노동과 나날」(Works and Days)은 “사람의 다섯 시대”에 관해 알려 주는데, 그 첫째 시대는 사람들이 온전한 행복을 누렸던 “황금 시대”였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늘 궁정을 거니는 불멸의 신들,
처음에 황금 인종으로 사람들을 만들었도다.
사람들은 신들처럼 살았으니, 행복하고 근심없는 영혼으로,
수고와 고통을 모르고;
조금씩 비참하게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온통 잔치로 지내는 삶, 그리고 그들의 팔다리는 변할 줄을 몰랐어라.”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에피메테우스가 올림피아의 신 제우스에게서 선물로 받은 아름다운 판도라를 아내로 맞아들였을 때, 그 전설의 황금시대를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판도라가 큰 단지의 뚜껑을 열었는데, 갑자기 그 속에서 골칫거리와 괴로움과 병이 빠져나왔으며, 인류는 결코 그것들을 원래대로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대 중국의 전설 역시 기원전 26세기에 백 년 동안을 다스렸다는 황제(黃帝) 당시의 황금 시대에 관해 알려 줍니다. 그는 문명과 관련된 모든 것―옷과 집, 운송 수단, 무기와 전쟁, 토지 관리, 제조술, 양잠, 음악, 언어, 수학, 달력 등등―을 발명했다고 합니다.

 

그의 통치 때는 세상이 이와 같았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도둑이나 싸움이 없었고, 사람들은 겸손하고 평화스럽게 살았다. 때에 알맞은 비와 날씨로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가장 놀라운 일은 심지어 야생 동물들도 살생하는 일이 없었고, 육식을 하는 새들도 해를 입히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중국의 역사는 낙원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황제의 자손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 역사 시초의 행복하고 완전했던 때에 관한 비슷한 전설 기록들은 그 밖의 많은 민족―이집트인, 티베트인, 페루인, 멕시코인 등등―의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고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 및 관습을 가지고 있던 이 모든 민족이 자기들의 기원에 관해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단지 우연이었습니까?

 

그 모든 민족들이 자기들의 시작을 똑같은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한 것이 단지 우연의 일치였습니까? 논리와 경험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과 그 종교의 시작에 관한 진실의 몇몇 공통 요소가 이 모든 전설 가운데 서로 얽혀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사람의 시작에 관한 서로 다른 온갖 전설 중에는 많은 공통 요소들이 눈에 띕니다. 그것들을 함께 모아 놓고 보면, 더 완전한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그림은 하느님께서 첫 남녀를 어떻게 창조하셨고 그들을 어떻게 낙원에 두셨는가를 알려 줍니다.

 

그들은 처음에 매우 만족스럽고 매우 행복했지만, 오래지 않아 반역하게 되었습니다. 그 반역으로 인해 완전한 낙원을 잃게 되었고, 수고와 고역, 아픔과 고통이 낙원을 대신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인류가 너무 악해지자, 하느님께서는 큰 홍수를 내려서 한 가족만 빼고 모두 멸망시키셨습니다. 이 가족의 수가 늘어나면서, 후손 중 일부가 무리를 짓고 하느님께 도전하여 거대한 탑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그들을 땅 끝까지 흩으심으로써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셨습니다.

 

이 조각 그림은 순전히 누군가가 머리 속에서 꾸며낸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그 그림은 성서 창세기(創世記)의 처음 11장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서의 확실성에 관해 논하지는 않지만, 많은 전설에서 발견되는 핵심 요소들에 사람의 초기 역사에 관한 성서 기록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 기록은 인류가 메소포타미아에서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기억과 경험 및 사상을 가는 곳마다 함께 가지고 갔음을 밝혀 줍니다. 그것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듬어지고 변화되어, 세계 모든 곳의 종교를 구성하는 날실과 씨실이 되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앞서 사용한 유추로 다시 돌아가 볼 때, 창세기의 기록은 세계 여러 종교에서 발견되는 사람과 숭배의 시작에 관한 기본 사상들이 나온 최초의 순수한 근원 역할을 합니다. 종교마다 그것들에다 독특한 교리와 의식들을 더하였지만, 그 연관성은 명백합니다.

 

 

사람에게는 왜 종교심이 있는가?

 

존 B. 노스는 그의 저서 「사람의 종교」(Man’s Religions)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모든 종교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사람이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고립되어 있을 수도 없음을 알려 준다. 사람은 자기 외부의 자연 및 사회에 있는 세력들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으며, 심지어 그것들에 의존하기도 한다. 희미하게든 분명하게든, 사람은 자기가 세상으로부터 고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 독자적인 힘의 중심이 아님을 안다.”

 

  그와 비슷하게, 「세계의 종교―고대사에서 현대사까지」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종교를 연구해 보면, 종교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인생의 가치에 대한 갈망, 인생이 우연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신앙임이 드러난다.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인간보다 더 큰 능력자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고,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삶에 대한 최고의 가치관을 유지하려는 의도와 뜻을 가진 우주적 혹은 초인간적 정신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음식이 우리의 굶주림을 충족시켜 주듯이, 종교는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켜 줍니다. 우리는 배고플 때 아무 것이나 마구 먹어도 굶주림의 고통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일입니다.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건강에 좋고 자양분이 풍부한 식품을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건전한 영적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서는 우리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신명 8:3.


내용이 길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종교는 공통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오늘날까지 발전하여 왔습니다. 그것은 조물주가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을 갈구하는 특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것 아닌가요?

 

 

 

2) 종교 즉, 의지하고 믿는다는 어떤 대상이 생기면 뇌파나 어떤 몸에 분비되는 호르몬들이 달라지나요?

왜 그렇게 정신을 놓은것처럼 미친듯이 빨려가나요?

 


종교인에 대한 뇌파변화나 호르몬 분비에 대한 차이에 관한 자료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정신을 놓은 것처럼 미친듯이 빨려가는에 대해서는 지식적인 측면과 체험적인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을 탐구하는 면에서 몰입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몰입하여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까지 합니다. 흔히 도박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청소년들이 컴퓨터 게임에 심취하여 공부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도 그 속에 그만큼 매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심취해보면 사명감을 느끼고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광신적인 것 같은 행동을 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3) 종교에 대한 집착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중동지역은 왜 그렇게 심한건가요?

 


중동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종교는 대부분이 이슬람교입니다. 이 종교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종교라기보다 생활입니다. 그리고 교리 자체가 정대적인 복종을 강조합니다.

 

이슬람이라는 이름이 복종 혹은 굴복―이 경우에는 알라의 법과 뜻에 대한 복종 혹은 굴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복종 혹은 굴복의 길을 따르는 사람을 가리켜서, 이슬람이란 단어의 능동형 분사인 “모슬렘”(이슬람교인)이라고 부릅니다.

 

이슬람교인이 복종해야 하는 대상은 알라입니다. 고유한 이름으로 생각되는 알라는 “하나님”을 뜻하는 아라비아어 알-일라의 축약형입니다. 이 이름은 쿠란에 약 2,700회 나온다고 합니다.

 

이슬람교는 생활 방식 전체로서, 국가, 법률, 사회 제도 및 문화를 포괄하는 것이며, 따라서 단순한 종교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초기 이슬람교」(Early Islam) 책에서, 600여 년 동안 “이슬람교는 가장 강력한 정치력과 가장 중요한 문화를 지닌, 세계에서 가장 도전적인 종교였다”라고 기술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이슬람교인들은 자신들이 최종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리의 선언을 코란 속에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였”다고 저술가 데즈먼드 스튜어트는 설명합니다. 그들은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이미 전부 알려져 있으며, 비이슬람 사상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스스로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고집 세게 저항”하였습니다.

 

참다운 복종에는 하느님과 그분의 법 및 그분의 대표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마호메트는 아라비아의 아랍 부족들을 연합시키는 데 성공하여, 자신과 쿠란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설립하였습니다. 그것은 복종의 힘으로 한 지도자 아래 사람들을 형제로 결속시키는 종교 국가였습니다.

 

이슬람교는 아랍 부족의 원수들과의 싸움에서 칼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이 칼은 이슬람의 제국과 종교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호메트가 죽자, 폭력적인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할리파(칼리프) 곧 지도자를 택하는 문제로 일어난 정치적 불화였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기 형제들과 싸우기 위해 칼을 뽑았습니다. 종교와 정부의 병합은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데 한몫을 하였습니다. “복종”은 사람들을 한 지도자 아래 연합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슬람교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이슬람교의 다섯 기둥은 이슬람교인들에게,

 

적어도 한번은 샤하다로 알려진 신앙 고백―“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 마호메트는 하나님의 예언자다”―을 공개적으로 할 것,

 

하루에 다섯번씩 기도할 것,

 

지금은 보통 자진적으로 모금하지만 의무적 세금인 자카트를 낼 것,

 

제 9월 즉 라마단중에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금식할 것,

 

재정적으로 가능하다면 적어도 한번은 메카에 하지(순례)를 다녀 올 것

 

등을 요구합니다.

 

 

카리지파는 “지하드”(“성전[聖戰]” 혹은 “거룩한 투쟁”)를 여섯째 기둥으로 생각하지만, 보통 이슬람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그 목적이 “개개인을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제반사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그 사회를 이슬람교의 원칙과 일치하게 운영하는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쿠란은 “정당한 원인 이외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영혼을 죽이지 말라”라고 말하면서, 그와 같은 “성전”을 허용합니다.―수라 17:33.

 

이러한 신조들은 이슬람인이 아닌 외부에서 보기에는  자기 종교에 대한 집착이 비이치적으로 강하게 느껴집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제가 답변을 달기는 좀 뭣하지만 단순히 여행중에 느끼고 겪은것을 바탕으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이슬람이란 종교가 아니라 그냥 생활 자체입니다.

가장 개방화 되어있다는 중동의 싱가폴이라는 아랍에미레이츠 공화국의 두바이 (두바이산 원유, 각종 축구대회가 열리고 외국인이 인구의 70%라는 곳....)조차도 달력이 여기랑 좀 다르죠. 여자들이 사회활동을 안하는것도 그렇구요.

예를들어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에 유교는 학문이자 종교이긴 했지만 완전 생활속으로 흡수가 되어서 그 자체로 문화이고 생활이 되어버린 경우라고 생각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1) 고대에는 산업이 발달되지 못한 관계로 초자연적인 현상(지진, 화재, 폭풍 등)에 대해 인간들이 두려움을 느껴 절대적인 힘을가진 어떤 존재를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님이 말하신 고대가 지질학적 의미에서 고대인지, 역사학적 의미에서 고대인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인간은 존재하면서부터 절대적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에 대한 개념은 좀 다르기도 했었죠. 예를들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 등입니ㅏ.

 

2)3)은 위에서 말씀 드린대로입니다.

종교에 대한 집착이라고 보기 보다는 그들의 생활과 문화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지요. 만일 그들이 종교적 적대감이나 집착이 강하다면 관광오는 사람이나 이교도를 보자마자 알라 믿으라고 전도하고 난리 칠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종교에 대해선 한마디도 서로 이야기 하지않고 조심하려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 님의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해 특별히 나쁜점을 부각시켜서 동네방네 욕하고 대자보까지 붙여서 헐뜯는다면 아마 님도 그만큼 흥분하는 호르몬이 분비되어서 저항하지 않을까요?

그런의미로 생각하시면 될것 같습니다..

왜 종교에 집착하나요?특히 중동사람들

... 사람들은 왜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집착하는거죠? 특히 중동사람들은 더 그렇잖아요. 거의 '신'이라는 한... 대해서 집착했나요? 2)종교 즉,의지하고 믿는다는 어떤...

사람들은 개신교를 거짓인 줄 아나요?

...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를 본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 이를 본받아 기독교는 553년~중동지역의 태양신 숭배의 상징인,십자가 대속신앙을 도입함. ⑥(미트라종교)...

한국 사람들은 무슬림 싫어하나요?

... 안먹으니까 사람들이 저한테 안먹냐고 그러니까... 대중화에 성공한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외 타종교에 대해선 배타적인 면을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특히 중동이라는...

배우자랑 같이 사는 사람이 더 오래 사는...

배우자랑 같이 사는 사람이 더 오래 사는건가요? 추가3)...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기에 돈에 집착할 필요가... (배우자) 사람이 있는 것은 중간 정도(종교가 있는 것도...

사람에게 종교 필요하죠?

... 중동의 대부분의 전쟁은 종교전쟁이라죠 -_____-; 서로... 사람 생겨났으며 어떻게 태어났는가? 사람은 어디서... 길 (특히 옛적 길이라는 점에 주목), 품성의 변화를...

종교에 광적인사람들 왜그런가요?

... 암튼,그래서 1번 답변은, 사람은 한가지에 광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한가지에 집착하면 미친 상태 같이 빠진다는 것이죠. 흔히 '낙시광'이라는 말같이. 낙시광은 괜찮고,종교...

사람들은 종교를 믿는건가요?

사람들은 종교를 믿는건가요? 존재하지도않는 보이지도않는 예수 부처 등등 허상에 집착하고 매달리며... 페르시아의 전성시기에 페르시아 제국은 지금의 중동지역...

종교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중에는 ?

... 특히 경제가 어려워 살기 힘든 사람등... 하여튼 우환이 끓이지 않는 가정이나... 종교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콩가루 집안이 많다고 하지요. 예절도 모르고 위아래도없구...

교회다니는사람들은 왜이리...

... 타종교 욕하는것도 못봤고 강요하는거 한번도 본적없습니다... 교회다니면 착해야지 그런거 하냐? 맞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안다니는 사람보다 더 잘해야겠죠? 그런데요....

개고기 식용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왜...

... 먹는사람 보고 뭐라 그러는지도 이해 안 가구요 또 먹을 것도 많은데 우리나라 문화랍시고 개고기에 집착하냐... 그리고 특히 사람을 공격한 개는 도살하여 식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