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모태신앙이고 가족, 친척 모두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전 모태신앙이고 가족, 친척 모두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작성일 2011.08.1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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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에 저는 천국에 대해서만 생각해왔습니다. 영생을 누리는 것,

주님을 찬양하고 또 이 땅에서 형통하게 되는 것만 생각해왔는데요.

 

지옥에 대해 상상해보게 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옥에서는 수많은 영혼들이 엄청난 울부짖음을 하고 있고

지옥 불에서 상상도 못 할 고통을 받고 있으며, 진짜 무서운 것은 앞으로 영.원.히

고통 받는다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영원히 말입니다.

 

이걸 상상할 수 있나요?

 

지옥이란 존재를 만들고 인간들이 지옥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 걸

방관하시는 주님은 선하시고 공평하신 신이실까요?

 

지옥이란 존재를 방관한 채 우리는 천국에서 행복해도 되는 걸까요..

그 지옥 속에는 우리랑 관계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비 기독교인들은

나중에 삶을 마치고 영.원.히 고통 받아야 하는 겁니까?

소름끼칩니다. 그렇다면 지금 모든 기독교인들은 진정 성경을 믿는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금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전도를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기독교인들이 착하고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다니는 건 알고 있지만

엄청나게 잔인한 교리를 가지고 있고, 진짜 무서운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지옥이란 것에 대해

다들 실감을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영원한 고통. 지옥에 대해서 말입니다.

 

법정스님께서는 “자기의 자식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보내는

당신네들의 신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지옥에 가서 그 불쌍한 영혼들을 구제하겠다.“

라고 하셨고,

 

아인슈타인은 “나는 자신의 피조물을 지옥으로

보낸다는 신을 상상할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원래 지옥이 사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전지전능하신 신은 사탄을 없애지 못합니까?

사탄은 어떻게 창조되었나요?

 

저도 영생을 누리고 싶습니다. 천국가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교회 다닐 거고, 기도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옥이란 존재를 인정해야 되는 것이 걸림돌입니다..

 

기독교카페에서 숱하게 질문했지만 다 강제탈퇴 당하거나, 무응답이네요.

모두들 사탄의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걸까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이 땅에서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맹목적이고 틀에 박힌 신앙관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신 듯하군요.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8 2 22, 2008 6 28, 그리고 2010 12 6 등 여러 번에 걸쳐, 비슷한 문제에 대하여 제 ID(heilmann)로 답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다른 분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했던 글을 조금 수정하고 보충하여 다시 한 번 올려 봅니다. 답변의 길이는 다소 길다는 점, 그리고 특정 교파의 교의적 입장을 대변할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라는 점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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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종교에서든, 신앙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라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 종교의 교리 경전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정 종교가, 또는 그 종교의 교리나 경전이 과연 진리 그 자체이고 절대적인 것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죠.

 

종교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최소한 고등종교란 상대적이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의 섭리’, 진리에 접근하고 이를 통하여 유한성의 굴레에 얽매여 있던 자아를 해방시키고 인간소외의 상황을 극복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 궁극적 실재를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죠.

 

그런데 궁극적 실재의 섭리’, 진리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을 기록하고 궁극적 실재의 섭리를 설명할 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궁극적 실재의 섭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려는 노력을 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교리와 경전이라는 수단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리와 경전은 종교적 전통을 보존해 주는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매개체이지, ‘진리 그 자체일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영역인데 인간의 언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고 한계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리와 경전이 진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전적으로 완벽하게 전달해 줄 수도 없는 것이죠. 교리와 경전은 인간의 언어가 갖는 한계, 그리고 나아가 인간의 지식과 통찰력 자체가 갖는 한계를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종교인들은, ‘불완전하게나마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수단으로 간주해야 할 교리와 경전을 진리 그 자체와 혼동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서와 기존 교리의 무오류성을 강조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신봉자들이 주로 이러한 왜곡된 신앙행태를 보여 왔고, 다른 종교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기 종교를 절대화하는 행태를 보이는 신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종교 교리와 경전의 우월성 내지 배타적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러한 신앙인들이 종교 간의 갈등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를 나타내는 것은 개신교 내의 근본주의 성향 신앙인들입니다.

 

미국에서 유래한 근본주의 성향 신앙인들은 한국 개신교계에서만큼은 주류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근본주의 신봉자는 사실 미국에서도 전체 개신교인의 1/4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외에는 캐나다와 호주 등의 앵글로-색슨계 국가들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정도이고 유럽 대륙에서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적 교파가 개신교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는 지구상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합니다. 현대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학문적 수준을 인정받는 신학자 중 그러한 근본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근본주의 성향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 왔던 신자들의 특징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 교리를 절대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사탄의 미혹에 빠져 있는 것이고 내세에 지옥에 가게 된다라는 근본주의의 교리는 무조건적인 절대성을 갖는 하나의 도그마(dogma)입니다. 그리고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하루빨리 신자로 만들어서 내세에 지옥에 가지 않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라는 주장이 하나의 정언명령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종교 간의 화합이란 사탄과 손잡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이처럼 특정한 교리를 만고불변의 진리 그 자체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모든 종교에 있어서 신앙인들의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해 왔습니다. 그리고 궁극적 실재의 섭리를 인간의 능력으로 완벽하게 파악하고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사상체계의 발전에 따라 그처럼 관념이 변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즉 특정 시대의 특정한 신앙관에 그에 따라 형성된 교리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관은, 오늘날의 기독교나 유대교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구약성서 초반부에서 하나님께서 이민족들을 섬멸하라고 명하셨다라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관(神觀)의 한계를 반영합니다. 일신숭배(monolatry - 유일신 신앙과는 다른 개념입니다)적 관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기원전 6세기 이전 유대인들 중 상당수는, 하나님을 우리 민족의 번영만을 보장해 주시는 신으로 여기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죠(성서를 완전무결한 계시 그 자체로 간주하는 근본주의 성향 신앙인들이나 역겨운 학살극만을 담은 쓰레기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안티 네티즌 모두에게서 공격을 받을 각오를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만, 현대의 신학계에서는 당연한 정설로 간주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유다가 바빌로니아에게 완전히 정복을 당하면서 우리 민족의 번영만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거기에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특정 민족의 신이 아닌 보편신(普遍神, universal God)’이라는 발전된 신관을 갖게 된 것이죠. 이처럼 신의 본질에 대한 관념에서부터, 야훼 신앙은 인간의 지식과 사상의 발전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해 왔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타종교를 사탄의 흉계라 말하곤 하지만, 사실 사탄에 대한 관념 역시 페르시아 종교와의 접촉 이후 형성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본래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로서의 사탄이라는 관념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후대의 문헌인 욥기나 스가랴서에서 사탄으로 지칭된 존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당시에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고소하고 고발하는 일종의 검사 정도로 여겨졌으며 하나님과 대적하는 존재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는 아니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과 반목하고 대립하는 존재라는 관념은, 기원전 6세기 후반 이후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페르시아 종교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고 세상에 존재하는 의 요소를 인격적 존재로 나타낸다는 관념을 배움으로써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신앙관과 교리는 결코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만고불변의 보편성을 갖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사후에 지옥에 가게 된다라는 관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물론 질문자님께서 야훼 신앙관의 변천사를 알고자 질문을 올리신 것은 아닐 줄 압니다.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질문자님보다는 이 글을 읽는 근본주의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구약시대, 특히 바빌로니아 포로기 이전의 히브리인들은 매우 현세지향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내세에 대한 관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죠. 내세에서의 삶에 대한 관심은, 히브리인들보다는 오히려 이집트인과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등 다른 민족들의 종교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이었습니다.

 

물론 구약에도 히브리어로 스올(Sheol)’라 하는 죽은 자들이 가는 장소가 종종 나타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의미했던 것은 죽은 자들이 누워 있는 곳일 뿐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내세관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사후에는 생전의 신앙이나 행실에 관계없이 그저 어두컴컴하고 별다른 것이 없는 곳으로 간다라는 어렴풋한 관념이 전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 전체를 통틀어 형벌 장소로서의 지옥을 의미하는 단어는 나타난 바가 없습니다. 시편 88편이나 116편 등의 내용은, ‘스올이 실질적으로 의미했던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형벌을 받는 장소보다는 그저 죽은 자들이 누워 있는 곳 또는 살아 있지 않은 상태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스올은 개역한글판 성서에서 음부, 공동번역에서는 지옥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간된 가톨릭 성경에서는 지옥이라는 번역이 이 단어의 본래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저승으로 변경하였습니다. 표준새번역에서도 음부라는 번역어를 형벌 장소로서의 지옥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발음 그대로 스올로 표기하였습니다).

 

구약에는 인간이 내세에서 맞이하게 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구절이 사실상 없으며, “사람이 죽고 나면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특정한 장소로 가게 된다 또는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영원히 존속한다라는 내용도 없습니다. 이는 구약 시대 대부분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히브리인들은 내세에 대한 뚜렷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묵시문학에 속하는 문헌인 다니엘서의 12장에서는 영생을 말하고 있으나, 사실 구약 시대의 묵시문학에서 주장한 영생 육신과 분리된 영혼만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사람들이 온전한 육체를 가지고 영생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신앙이나 행실에 대한 상과 벌은 현세에서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관념은, 민족 전체나 통치자 개인이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는 내용의 구절들(그러한 구절은 매우 많습니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역대기는 각 왕들이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현세에서 상이나 징벌을 받았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형벌 장소로서의 지옥이라는 관념은 상당히 늦은 시기에 나타난 것인데, 이에는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이 국가의 멸망 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계 셀레우코스 왕조 등 이민족의 지배를 계속 받고 이러한 이민족 지배자들의 종교를 거부하여 순교를 맞이하는 유대인들의 운명을 현세에서의 상벌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되면서, 내세에 진정한 상과 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에 페르시아 종교의 경전인 아베스타(Avesta)에서 볼 수 있는 악인들은 끓는 물에 잠겨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라는 내용이 지옥에 대한 이미지를 제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 시기에 새로이 나타난 묵시문학에서는 페르시아 종교의 영향으로 최후에 심판에 대한 믿음이 나타났고, 이에 연계하여 죽은 자들이 이 심판 때에 부활하리라는 신념이 생겨났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다니엘서 12장의 내용도 이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독일 루터파 교회 목사였으며 역사상 가장 탁월했던 신약학자로 알려진 루돌프 불트만이 자신의 저서 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Das Urchristentum im Rahmen der antiken Religionen)에서 적절하게 설명한 바 있어 그 내용 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이 지금 정복당하여 천대받고 있는 민족을 해방시켜 다시 영화롭게 해 주리라는 희망이 살아 있었다.

 

전통적-일반적 형태에서의 희망은 민족적 희망, 즉 다윗혈통의 왕인 메시아가 지배하는 다윗 왕국의 재건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민족적 희망의 상()이 결코 동경과 기대를 표현한 유일한 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묵시문학에서는 바빌론 및 이란(페르시아) 신화의 영향 하에서 우주적 종말론이 발전되었는데 이 종말론은 물론 민족적 희망과는 전혀 다른 유형에 속하는 것이지만, 서로 다소간 결합될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마지막 때는 죽은 자들의 부활 및 심판과 함께 올 것으로 생각되었다, 구약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사상인 죽은 자들의 부활은 명백히 유대교가 이란 종교에서 받아들신 표상인데, 이것은 예수 시대에는 이미 대중화되어 있었고 바리사이인들도 이것을 신봉했으나 사두가이인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운명은 멸망 아니면 지옥 불에서의 영원한 고통이다. 이때 비로소 - 이란(페르시아) 종교의 영향 하에서 - 구약에는 아직 없던, 피안의 고통의 장소로서의 지옥에 대한 표상이 받아들여졌다. 지옥은 과거에 몰록 신에게 어린이를 제물로 드리던 게힌놈 골짜기의 이름을 따서 게헤나라고 불렸다.

 

Rudolf Bultmann, 허혁 옮김,기독교 초대교회 형성사 : 서양고대 종교사상사(서울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3), pp. 82~89에서 발췌.

 

 

 

바빌로니아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에게 서서히 내세에서의 지옥이라는 관념이 싹트기 시작한 사실을 보여 주는 문서로 묵시문학 문헌 중의 하나인 1에녹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기독교 교파와 유대교에서 정경이 아닌 위경(pseudepigrapha)으로 분류된 문헌이지만, 묵시사상과 내세관의 발전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자료로 꼽힙니다. 이 제1에녹서에서는 죄인들에 대한 내세에서의 형벌 장소로서의 지옥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 시대인 서기 1세기경에는 유대교에서 내세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합의된 교리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수의 신앙인들은 지옥의 형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복음서(특히 마태복음) 저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지옥에 대하여 언급했다는 기사들을 다소나마 남기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옥의 이미지들은 대부분 마태복음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특징으로는 유대인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점과 유대인들의 전통에 충실하다는 점, 그리고 구약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는 점 외에 지옥에 관하여 다소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기록자가 지옥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 그리스(헬라)어 단어는 게엔나(geenna)’였는데, 이것은 본래 과거에 일부 유대인들이 아이들을 이민족 신에게 제물로 바쳤던 예루살렘 외곽의 한 장소인 힌놈의 아들 골짜기(구약의 역대하와 예레미야서 등에 언급되었습니다)’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에 대한 끔찍한 이미지가 워낙 강하여,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한편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다룬 누가복음 16 23절에서 음부(개역한글판 기준)’로 번역된 용어는 본래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하데스(hades)’인데, 이 구절의 문맥상으로는 죄인들이 형벌을 받는 곳만을 지칭하는 것인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을 통칭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있지만 사실 이 단어는 그리스 문화권에서 명계(冥界) 자체 또는 이를 관장하는 신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였습니다. 이는 내세에서의 지옥이라는 개념이 본래 없었기 때문에 이를 지칭하는 어휘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며, 내세에서의 지옥에 대한 표상 자체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던 사정을 반영합니다(‘여호와의 증인 등 일부 종파는 게엔나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그 단어는 복음서상에서도 내세에서의 지옥이 아니라 실제 예루살렘 외곽의 특정 골짜기를 지칭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신약성서가 기록되고 기독교가 확립된 이후에도, 가장 순수한 형태를 유지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내세에 어디로 갈 것인가의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단어를 입력하여 성서 본문을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들(http://www.holybible.or.kr )에서 지옥이라는 단어로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 성서의 내용을 검색해 보시면, 성서상의 지옥에 대한 언급이 의외로 적다는 점에 놀라시게 될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구약의 스올, 표준새번역에서는 신약의 하데스 지옥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이 역본들에서는 상대적으로 이 단어가 많이 나타나고 있지만, ‘스올이나 하데스 게엔나와는 달리 ‘형벌 장소로서의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명계를 통칭하는 말에 불과하므로 개역한글판의 경우처럼 음부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서기 1세기 말엽부터 내세에 대한 관심이 점진적으로 대두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집단에서는 재림에 대한 기대가 팽배했었는데, 그 기대가 실현되지 않자 성도들의 내세가 관심 대상으로 부각된 것이죠. 그리하여 히브리서 9 27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각 사람이 내세에 심판을 받으리라는 관념이 부각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세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증대되었습니다.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의 전통에 속하는 문헌으로 서기 4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바울의 묵시록(물론 바울 사도가 직접 기록한 것일 가능성은 없습입니다)에는 지옥의 모습이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서기 1~2세기경에까지도 내세에 관한 문제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처럼 인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내세의 지옥이 기독교 교리의 중요 부분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 3세기 이후의 일인데, 이는 교부철학(patristic philosophy)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교리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사상의 틀에서 정립된 사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주의는 영혼은 영원하고 고귀한 이데아(idea)의 세계에, 육신은 유한하고 천한 현상계에 속한다라는 이른바 -육 이원론을 강조하고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였고, ()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관념이 상당 부분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플라톤 사상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교부들의 신앙관에 반영된 것이죠.

 

그리하여 구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영-육 이원론과 영혼의 불멸이라는 관념이 기독교의 내세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플라톤주의(넓은 의미에서는 신플라톤주의도 포함)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은 신학자로는 오리게네스(Origenes; 국내에서는 영어식 철자 ‘Origen’을 문자 그대로 읽어 오리겐이라 할 때가 많습니다)과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영어식으로 어거스틴(Augustine)’으로 불리기도 합니다)가 있는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세관을 포함한 서방측 교회의 교리체계 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지옥에 대한 관념이 정립되는 과정에서는 상당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으며, 그 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교리가 확립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전반적으로 만인구원론과 그에 반대하는 입장 사이의 대립 양상으로 벌어졌습니다.

 

서기 2세기 말과 3세기 초엽에 활동한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Alexandrinus Clemens) 지옥 형벌은 회개와 교정의 과정이다라고 주장했으며, 이후 지옥에 떨어진 자들에 대한 구원 가능성에 대한 논쟁은 가열되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지옥 형벌에 처해진 자들도 결국 구원될 것이다라는 내용을 담은 아포카타스타시스(Apocatastasis)’ 이론을 주창했는데, 이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로 꼽히는 플로티노스(Plotinos)의 스승인 동시에 오리게네스의 스승이기도 했던 암모니오스 사카스(Ammonios Sakkas)의 이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암모니오스 사카스가 플라톤주의를 어떻게 재해석하여 전파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플로티노스 이후 신플라톤주의가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의 근원인 일자(一者; hen)’으로의 회귀를 추구하게 된다라고 주장한 것과 오리게네스의 아포카타스타시스는 모두 암모니오스 사카스의 이론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포카타스타시스의 성서적 근거로 사도행전 3 21절과 고린도전서 15 25~28, 그리고 디모데전서 2 4(“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기를 원하신다”) 등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본래의 플라톤주의가 강조한 이원론적 구도에 상대적으로 더욱 충실하였으며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죄의 숙명을 안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혜택을 입지 못하는 한 그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취지에서 지옥 형벌의 영원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마태복음 25 41절과 46, 베드로후서 2 4, 요한계시록 20 10절 등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이론이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지지받는 등 초기 가톨릭 교회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오리게네스의 아포카타스타시스는 이단적 사상으로 규정되었고 지옥에 한 번 떨어진 자들은 영원히 그 상태에 머물게 된다는 이론이 교리로 답변확정되었습니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앞에서 언급한 요한계시록 20 10절에 의거하여 지옥에서의 형벌은 최후의 심판 뒤 시작된다고 보았으나, 서기 7세기 이후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주장에 따라 지옥에 가게 될 자들은 사후(死後)에 즉시 그곳으로 가게 된다는 관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교부철학 시대 기독교가 플라톤주의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고 내세에 대한 교리를 정립하게 되면서,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내세에서의 개인적 영혼구원이 강조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혼과 육신은 이원론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후 중세의 스콜라 철학 시대에 접어들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이 플라톤의 이원론과는 대비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수용하여 영혼과 육신을 두 개의 실체가 아닌 단일한 존재로서의 인간 안의 두 형이상학적 원리로 간주하였고, 이로 인하여 기존의 관념이 재검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 신앙인들의 머리 속에는 영-육 이원론이라는 관념이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잡아 왔기 때문에, 토마스의 이론은 이들의 내세관을 그다지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새로이 나타난 개신교는 가톨릭 이상으로 이원론적 관념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계승하는 수도회 출신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원론적 사고에 더욱 충실했던 장 칼뱅(Jean Calvin)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 인간의 무력함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이론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설(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도 이것만큼은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습니다)’을 재해석하여 이중예정설을 주장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지옥이나 사탄, 예정설 등의 교리가 나타난 기원을 알고자 질문을 올리신 것은 물론 아닐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들은 초기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결코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나 보편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만고불변의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 위해 몇 마디 쓴 것입니다.

 

이처럼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대인들은 당시의 고등종교였던 페르시아 종교에서 새로운 관념을 받아들였으며,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초기 신학자들은 플라톤 사상을 위시한 그리스 철학을 토대로 하여 기독교의 교리와 신조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인간의 인지능력이 궁극적 실재의 섭리를 완벽하게 파악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것인 이상, 당대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사상적 기반 위에서 신앙관이 도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인 것은, 특정 시대와 특정 문화권의 상황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신앙관이 교리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도그마가 됨으로써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는 상황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사후에 지옥에 간다’, 그리고 지옥의 형벌은 영원하다라는 관념이 형성된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그러한 관념들을 가변적인 것이 아닌 만고불변의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이 문제라는 것이죠.

 

아우구스티누스가 사상적 기반으로 삼은 플라톤주의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사고의 틀을 규정하는 매트릭스(matrix)였지만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보편적으로 그러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따라서 플라톤주의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이는 그의 이원론적 사고, 그리고 거기에서 도출되는 교리 역시 만고불변의 절대성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근본주의적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내세에서는 무조건 지옥에 떨어진다라는 관념을 아직까지도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지만, 이러한 관념은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하는 비() 근본주의 신학자들에게는 이미 설득력을 상실하였습니다. 현대신학에 있어서, 내세에서의 지옥이라는 관념은 그다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옥을 언급하는 신학자들도, 이제는 이 지옥을 특정한 장소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리(遊離)된 소외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지옥이라는 영원한 고통의 세계가 현실적, 구체적 상황에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대한 교의적 진술은 내세에서의 어느 장소를 지칭하는 것보다는, 인간 실존에 관한 의미 차원의 진술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죠.

   

물론 내세에서의 상벌에 대한 확신 자체를 무가치한 거짓 믿음으로 폄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관념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운명을 맞이해야 했던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나 로마 제국 시대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는 신앙인들이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러한 관념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존립에 기여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및 현대의 상황에서 이러한 관념은 더 이상 그 타당성이나 존립가치를 인정받기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작성하는 이 글의 취지는, ‘지옥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교의적 차원의 논쟁에 있어서 없다라고 하는 쪽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19세기에 미국에서 문자적 성서해석을 절대시하는 신앙인들이 형성한 종파들 중, 성서의 몇몇 구절들을 근거로 지옥은 없다라는 주장을 아예 교리로 내세우는 종파들도 있습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여호와의 증인 ). 그러나 저는 이러한 종파의 신앙행태가 근본주의에 비하여 바람직하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종파들은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어떠한 측면에서는 더욱 철저하게) 특정한 도그마에 대한 맹종을 신앙의 본질로 착각하고 이 도그마를 신자들에게 강요하는 집단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이 주장하는 교리의 타당성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이 교리체계 진보의 원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정립된 특정한 교리가 만고불변의 절대적인 진리일 수는 없는 것이죠. 이 점에 대해서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조직신학자였던 파울 틸리히가 적절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의 저서 믿음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에서 일부분을 인용합니다.

 

 

종교회의, 주교회의, 또는 교리서들은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무오성의 개념을 확립시키면서 의심을 믿음의 요소에서 배제시켜 버렸다. 그들은 스스로 분투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에 복종해야 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후부터 그들은 믿음에 대한 무오한 진술에 의심의 개념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결국 믿음은 정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믿음은 믿음의 행위 안에 있는 단정적인 궁극성으로 정의되었으며, 그 구체적인 요소들 역시 종교적 권위에 의해 공식화되었다. , 믿음은 질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일시적이고 조건적인 것들까지 정형화된 궁극성을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것들은 의심이라는 위험 위에서 고상함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들은 성경 저자의 진술에서부터 동시대인들의 말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내용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였다. 이러한 정적인 종류의 믿음 안에 있는 맹신주의와 첫 번째로 대항한 사람들은 바로 개신교도들이었다. 하지만 개신교 역시 계몽운동에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정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개신교는 본질적으로 믿음을 부정하지 않고, 심지어 교리적 공식화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역동적 믿음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의심을 자신의 한 요소로서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떻게 믿음의 공동체의 교리적 진술들과 연합할 수 있는가? 대답은 다음과 같다. 믿음의 공동체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인 교리적 표현은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교조적이고,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모든 것들은 그 자체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Paul Tillich, 최규택 옮김, 믿음의 역동성(서울 : 그루터기하우스, 2005), pp.65~66에서 발췌.

 

 

 

고대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종교와의 접촉 이후 기존의 편협하고 유치한 신앙관을 지식과 사상의 발전에 맞춰 재정립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더욱 설득력 있는 신앙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신앙관과 교리체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듯, 새로이 발전한 신앙관과 교리체계 역시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궁극적 실재의 섭리에 대한 인간의 깨달음은 항상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지식과 사상의 발전에 따라 계속 진보해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기독교가 새로이 정립된 이후 정형화된 교리와 경전에 기반을 두고 유지됨에 따라, 어디까지나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인 교리와 경전이 자체적으로 절대성을 갖는 것처럼 인식되는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사상이 발전해 감에 따라 종교인들의 신앙관 역시 그에 발맞추어 진보해 나아갈 필요가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화석화된 교리와 경전이 그러한 진보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 것이죠.

 

페르시아의 고차원적인 종교사상을 접한 유대인들이 기존의 편협하고 유치한 신앙관에서 벗어날 필요성을 발견했듯이, 기독교인들은 근대 이후 진화론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발달과 타종교와의 접촉, 그리고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의 발전을 통하여 기존의 관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신앙관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는, 기존의 틀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일부 사람들의 저항에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저항의 가장 강력한 형태가, 19세기 이후 미국에서 나타났고 한국에 철저하게 뿌리내린 근본주의이죠.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신봉해 온 교리가 타당하지 못한 것이었을 가능성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지금까지 신봉했던 교리들이 만고불변의 절대적 진리이며, 반드시 그 교리들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증거하고 있다라고 강변한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성서라는 경전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게 되며, ‘축자영감설과 같은 타당성이 없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근본주의는 이러한 성격 때문에 다른 종교에 대한 종래의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데에 집착하게 되고,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민족 종교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현대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려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근본주의적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타종교는 사탄의 흉계이다’, ‘()기독교인은 내세에 지옥에 가게 된다라는 관념은 절대성을 갖는 도그마입니다. 그러한 도그마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이상 이들은 편협하고 저급한 수준의 신앙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에 관한 근본주의자들의 관념 역시 하나의 도그마입니다. 이들은 구원의 의미를 내세에 지옥이 아닌 천당에 가는 것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신학에서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보통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내세에서의 천당행보다는 역사 안에서 인간의 실존적 곤경과 인간을 억압해 왔던 기존의 질서를 극복하고 이 땅에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것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화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관점 역시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신앙관에서는 복음화를 ()기독교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정의해 왔고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그러한 관념을 버리지 않고 있지만, 현대신학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는 복음화는 세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종 강요는 더 이상 복음화의 적절한 수단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배타적 절대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요한복음 14 6)”,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사도행전 4 12)”등의 성서 구절들을 전가의 보도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교리와 마찬가지로 경전의 내용 역시 상대적인 것이며, 성서의 내용은 일차적으로 계시에 대한 기록자 나름대로의 증언과 해석의 결과물이며 결코 계시 그 자체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구절들은, 기독교와 타종교 간의 관계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진리에 대한 저자 나름대로의 고백의 표현입니다. 또한, 설령 이 구절들의 내용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기독교라는 특정한 종교의 신자가 되지 않은 사람은 사탄의 미혹에 빠진 것이며 내세에 지옥으로 간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이없는 비약임을 쉽게 알 수 있죠.

 

현대의 신학자들은, 서기 1세기의 팔레스타인이라는 시공간에서 활동했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가 선포했던 메시지는 이제 나를 신으로 숭배하는 기독교라는 새 종교를 창설했으니 이 종교의 신자가 되면 내세의 구원이 보장된다라는 것이 아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 하층민 출신이었던 예수는, 오히려 유대교 영성의 틀 안에서 궁극적 실재의 섭리를 새로이 발견한 인물, 낡은 도그마에 얽매여 사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에 도달하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 인물, 그리고 인간이 곤경에서 해방되고 기존의 억압적 질서가 극복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될 것임을 선포하는 인물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점차 그리스 철학의 틀 안에서 복음이 재해석되고 선포하는 자였던 예수가 선포의 대상이 되면서, 기독교의 성격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되어 간 것이죠(물론 이러한 견해는 기독교는 애당초 실수에 의하여 잘못 태어난 종교이다라는 식의 유치한 주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신학자들은 기독교가 예수에 대한 종교에서 예수의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의 믿음을 따르고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실현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새로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취할 때,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집착하여 타종교인들을 기독교 신자로 만들겠다라는 목표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기보다 타종교의 가치를 존중하고 이 땅 위에서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종교 교리의 배타적 절대성이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혀 다른 종교를 사탄 숭배 미신이니 하는 말로 깎아내리려 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독선과 증오심에 일침을 가할 만한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인용문의 출처는 () 변선환 박사의 추모논문집 변선환 신학 새로 보기에 실린 한동대학교 지승원 교수의 글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 - 밥상을 어떻게 차릴까?입니다.

 

  변선환 박사는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장을 지낸 신학자였습니다그는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했다는 이유로 1992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파문당하고 목사와 교수 자리를 박탈당한 뒤 1995년 작고하였는데, 이 소위 종교재판 사건은 저의 소견으로는 미래에 한국 개신교계가 두고두고 수치스러워하게 될 일입니다. 한편 제가 인용한 글의 작성자인 지승원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법철학자이며, 다릿골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해 오기도 했습니다.

 

 

사례 1 : 한 어머니의 길

 

  한때 우리 교회에 나오시던 어느 집사님 집안의 형제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의 간곡한 소원은 홀로 되신 어머니께서 교회에 나오시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녀들의 강권에 못 이긴 어머니께서 아들들을 따라 교회에 나가셨다. 예배가 끝난 후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다 좋은 말씀이다. 하지만 나는 너희 아부지 계시는 데 갈란다.” 하셨다. 이후 아들들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는 교회 가자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그 아버지와 그 어머니는 다 불교도이셨다. 그리고 이 집사님, 필자가 종교간 대화에 관한 설교를 했을 때 이렇게 코멘트하셨다. “목사님, 우리는 그거 벌써 하고 있심더.”

 

  여기 이 아들들은 어머니가 얼마나 힘겹게 혼자 힘으로 자신들을 가르치셨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홀로 되신 어머니를 아들들도 깊이 사랑했고 그 사랑이 결국 어머니를 교회로 인도하여 구원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들은 어머니를 놓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강인하고 인자하기 그지없던 어머니 마음속에 남편에 대한 그토록 진한 그리움이 숨겨져 있었음을 안 이상 이들이 할 일이란 이것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이들은 그 고귀한 사랑을 더 이상 교회 밖에 구원 없다라는 도그마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오히려 예수의 마음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어머니를 걱정했던 인간 예수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을까? 결국 이들은 불교도인 어머니의 사랑을 접함으로써 예수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고, 교회가 도그마에 가두어 둔 예수를 풀어드렸던 것이다. 오직 예수의 절대성만을 지키려고 고심하는 성직자들보다 연기(緣起)의 물결 위에 갈댓잎 하나 띄워 어머니를 태워 보내 드린 이 아들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더욱 잘 실천한 사람들이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 이들은 사랑이 주도하는 한, 연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결코 카르마의 굴레에 속박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는 점에서 이미 불교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해탈은 꼭 연기를 벗어나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임을 누가 쉬이 알겠는가만, 삶의 진실은 이와 같이 의외의 곳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예수=하나님의 등식을 고집할 때 생겨나는 현상일 뿐, 이 등식의 원천인 인간 예수’(“그를 본 자는 그 안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보았다.”)는 결코 대화를 방해하거나 타종교인을 하나님으로부터 가로막는 인의 장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간절한 사랑으로 연기(緣起)에 몸을 맡긴 이 땅의 한 이름없는 불교도 어머니는, 이렇게 아들들에게 불교와 기독교 모두의 진리를 가르치고 떠났다.

 

 

사례 2 : 정신대 할머니 자매

 

  몇 년 전 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이 사시는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중 한 분이 목사님 오셨다고 무지무지 기뻐하셨다. 알고 보니 이 분이 교회에 다니시는 것이었다. 그 시설은 스님이 운영하는 곳으로 나머지 분들은 모두 다 불교인들이었는데, 주일이 되면 그 젊은 스님이 이 할머니를 차로 교회까지 태워다 드린다고 했다. ‘참 괜찮은 스님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할머니께서 동생을 소개하셨다. 그 동생 역시 다른 할머니들과 마찬가지로 불교인이었다. 그러니 언니는 교회에, 동생은 절에 다니는 셈이었다. 두 분이 꼭 붙어 서서 인사를 하는데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자매가 어찌하다가 같이 정신대로 붙들려갔는가. 그리고 또 그 지옥불을 용케도 살아서 빠져나와 이렇게 같이 살고 계신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서 가르쳐 왔던 대로라면, 죽어서 언니는 예수께서 계신 천국에 가고 동생은 또다시 꺼지지 않은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 동생 할머니는 살아서도 지옥, 죽어서도 지옥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언니인들 천국에 있는 것이 편안할까? 그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일 리가 없다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면, 이런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혹시나 지옥의 마지막 한 사람이 해탈할 때까지 눈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서원이 아직도 내 영혼의 한 자락을 메우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강단에 서면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자매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꼭 붙어 있던 이 자매를 떼어 동생 할머니를 지옥에 보낼 용기 있는 사람 나와 보라라고 한다. 그러면 팽팽한 긴장감으로 넓은 강의실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교회의 도그마는 예수의 본 모습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무자비하기 그지없는 냉혈동물이 되게 할 때가 많았다. 이 치명적인 만성질환은 ‘(예수가 아니라)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종교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처방전에는 아마 이렇게 적혀 있을 듯하다. “야 임마, 너거는 전파 과정에서 피를 흘리지도 않고 피를 흘리게 하지도 않은 불교(야스퍼스를 봐!)’에게서 뭔가 좀 배워야 해!” 불교는 이미 쓴물이 되었을지도 모를 마라(기독교)의 샘물(예수)을 단물 되게 하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뭇가지일지도 모른다( 15:25 참조). 기독교가 살고 예수가 살기 위해서라도 기독교는 불교를 알아야 한다.

 

  이 동생 할머니가 자신들을 덮쳤던 그 무시무시한 운명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죽음마저도 그 언니와 동생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그런 언니를 통해 예수께서 그 할머니의 고난을 자신이 지셨던 십자가와 동일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 가르치실 것이라는 점뿐이다(다석 유영모도 인간의 고난을 주님의 십자가를 나누어 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남을 위해 죽은 사람, 억울하게 죽은 사람, 핍박받고 죽은 사람, 이들은 모두 예수가 흘린 피에 못지않은 대속을 하고 죽어간 사람이다.” 다석 유영모 어록, 박영호 편, 두레, 서울, 2002, 409). 교회가 괜히 끼어들어 이 언니더러 동생을 버리라고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즉 교회가 예수를 화석으로 만들지만 않는다면, 예수는 거꾸로 불교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수 있다.

 

  극도의 고난도 한갓 자신의 업을 불사른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불교적 인간관이라면, ‘대속 다른 사람들의 업까지도(아니 이것이 오히려 본질이다) 불사르는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 간에 진정한 대화가 있다면 불교인들은 대속의 교리를 이렇게 불교식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기독교인들 역시 대속이 그저 예수에게만 일어난, 언제나 의문 속에 남겨진 교리가 아니라 자신 속에 살아 계시는 예수의 생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대화 가운데 예수는 이렇게 불교인과 기독교인을 가리지 않고(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나리시듯)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해방자가 되신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간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코드 고난의 신비와 만나게 된다.

 

지승원,불교와 기독교의 만남 - 밥상을 어떻게 차릴까?, 변선환 신학 새로 보기(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5)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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