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사상의 특징

유교 사상의 특징

작성일 2003.10.09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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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사상의 특징에 어떤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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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동방 5천년 역사에서 인의예지의 인간성을 개발하여 삼강오륜을 실천하는 도덕철학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국방, 문학, 예술 등의 각 분야에서 주류 정통학문으로 정착한 역사상 천하의 일등 사상이요, 일류문화로서 공인된 사상입니다. 이 사이트는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맹자,정자,주자,송자로 이어 내려온 도통의 사상체계를 요약하여 기술하고 또한 앞으로 2천년대 유교발전의 새로운 시도로서 민중유교사상을 수록했으니 모두 새 시대를 위한 것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밝히고, 인간본래의 의미를 찾아서 행복이 넘치는 대동세계를 건설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유교의 진리는 공자(孔子)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이 어질다는 인(仁) 사상을 기초로 하여 인도주의를 주장하였다. 인은 사랑의 원리요, 착한 마음씨로서 모든 사람이 본디 타고난 고유한 인간성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늘 땅 사이의 만물 가운데서 가장 신령한 존재이고, 가정과 나라 및 세계를 경영하는 중심체이다.

인간다운 삶은 바로 이 인간성을 밝혀서 지혜롭고 착하고 용기있는 인격을 갖추어 자연법칙에 투철한 하늘 땅의 도덕을 지키고, 사회질서에 철저한 인생의 윤리를 실천하여 행복한 가정, 밝은 사회,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데서 인간의 본의(本義)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는 이와 같이 완전한 인격을 추구하므로 한 평생 배우기를 좋아하고 예절을 즐겨 찾는다. 유교의 경전을 4서5경이라고 하는데 그 학문범위가 대단히 넓은 것은 인간의 지식을 넓혀서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아름다운 문화사회를 경영하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함이다.

'논어' '대학''중용''맹자'를 사서(四書)라고 하는데 모든 유교인의 기본자질을 기르는 정치 도덕 사회 문화의 준칙을 설파한 내용이며, '주역''서전''시전''예기''춘추'를 오경(五經)이라고 하는데 공자가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교육과목이다.

'주역(周易)'은 사물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는 철학서요, '서전(書傳)'은 이상정치의 대도를 밝힌 정치서요, '시전(詩傳)'은 인생의 정서를 순화하는 문학서요, '예기(禮記)'는 국가의 제도와 가정의례를 밝힌 예법서요, '춘추(春秋)'는 사실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엄정하게 비판하는 역사서이다.

이러한 유교의 경전내용은 그 분야가 대단히 넓고, 그 깊이가 지극히 깊어서 간단히 요약하여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러나 그 요체를 정리하면 대개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논할 수 있다.

우주론

유교의 우주론은 천지개벽의 창조론과 만물생성의 진화론을 아울러 포섭하고 있다. 우주에는 대통일의 이치가 상대세계의 만물을 통일하여 주관한다. 우주는 하나의 기(氣)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생성변화작용에 의하여 하늘 땅과 만물이 생겨나왔는데 현상만물의 유전변화 속에는 태극(太極)의 원리가 있다. 따라서 물질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으므로(有物有則) 자연법칙은 천리(天理)로 존중하여 순리로 하면 생존하고 역리로 하면 멸망한다는 논리를 정리하였다.

인생론

유교의 인생론은 우주만물을 주체적으로 경영하여 가장 보람있는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삶이다. 인간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즉 사랑, 정의, 예절, 지혜, 믿음의 아름다운 인간성을 개발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어른과 어린이가 질서를 지키며, 벗을 믿어 의리를 지킨다. 사람이 더불어 삶에 있어서 성실성과 정직성 그리고 정확성은 공동의 선으로서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할 중요한 가치이다.

정치론

유교정치는 공도정치(公道政治)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성왕(聖王)이 대통(大統)을 이어가는 화평세계를 이상으로 한다. 국민은 나라의 근본이요, 정치는 민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최선의 길이다. 가장 훌륭한 어진이를 나라의 지도자로 추대하고, 능력자를 관료로 등용하여 도덕으로 다스리고, 민심을 받들어서 행정하는 것이다. 식량정책, 국방정책, 교육정책은 최우선으로 추진하고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오복(五福)을 누리게 하는 문명사회를 개척하는 것이 유교의 정치 이상이다.

교육론

유교의 교육론은 인간성을 함양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그 이념으로 한다. 옥돌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지 못하고, 사람도 배우지 않으면 도리를 알지 못한다. 태교(胎敎)를 비롯하여 유아교육, 소학교육,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 지, 덕, 체(知德體)를 골고루 발달시켜서 원만한 인격과 탁월한 능력을 배양하는 교육을 매우 중시한다. 스승은 어버이처럼 존경하고 학생은 제자로 삼아 너그럽게 사랑하여 차별없이 가르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역사론

유교의 역사론은 도덕적 사관으로 인류의 발전을 지향한다. 인류는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발전한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며 미래를 개척하는 원동력이다. 춘추대의(春秋大義)는 역사가의 양심에 의한 정직한 필법(筆法)을 생명으로 하여 도덕정치를 높이고 무력통치를 낮추며, 문화사회를 중심으로 하고 야만사회를 변두리로 하며, 선행을 표창하고 악행을 징계하여 인류역사의 영원한 발전을 추구하는 대원칙을 밝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한 분야 이외에도 유교의 진리는 대단히 많이 있는데 가령 사생관(死生觀)이라든가 절의정신(節義精神) 또는 관혼상제(冠婚喪祭-가정의례 사이트를 보세요)의 통과의례와 같은 것도 유교의 중요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교의 사생관은 순리적으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다는 생각이다. 이승과 저승이 결국 하나의 세계이므로 살아서는 조상을 섬기고, 죽어서는 자손으로부터 제사를 받으며 명복(冥福)을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인은 죽음을 자기집에 돌아가는 것(視死如歸)처럼 가볍게 여기면서 오히려 살아서 꿋꿋하게 절의를 지켜서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것을 더욱 중대하게 여긴다.

결국 유교의 진리는 인간 완성의 길을 현실 속에서 찾아 가장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자기인생을 개척하여 이승에서의 삶에 한을 남기지 않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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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사상


儒敎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

(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인 BC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

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또한 한자문화권인 한국·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전해져서 큰 영향을 주었다. 유학(儒學)과 유교는 서로 비슷한

말이지만,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학파를 의미하는 유가(儒家)나 학

문을 의미하는 유학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교라는 말은 외래의 불교에

대비시켜 300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듯하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주로 유(儒)·불(佛)·도(道)

3교를 병칭할 경우에 사용되었다.






유가·유학에 대해서 유교라는 말은 교화적(敎化的)인 면

을 중시하여 어느 정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본래가 사

대부(통치자 계급·)의 학(學)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가·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

다. 〔특색〕 유교는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수기(修己)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윤리의 학이다.







그러나 그 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치인(治人)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

한 정치의 학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는 법률이나 형벌로 백성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리와 언행을 통해 백성을 선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먼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이 필수가 된 것이다.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는데, 군자는 치

자(治者)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 반대는 <소인(小人)>인데, 피치자(被治者)인 소인에게는

스스로 수양하는 능력이 없고, 치자(군자)의 교화를 받아야 비로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지덕을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제왕

(帝王)으로서 천하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어 성인이 곧 왕자(王者)라고 하는, 세계

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왕(聖王)>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최고의 성인인 제

왕(성왕)을 정점으로, 사대부는 각기 쌓아올린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제왕을 보익(輔翼)하

고, 제왕이 도덕정치[德治]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의 일체화를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윤리설(倫理說)〕 근본사상은 <인(仁)>이

다. 인은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말하며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사랑에 가깝고

그 실천에는 특히 <충서(忠恕;진심과 배려)>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인은 먼저 부모·형제

등에서부터 점차 다른 사람에게로 미쳐야 하며 <효(孝)>를 다하는 것이 인의 첫째이고,

형제에 대한 <제(悌)>가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인은 이른바 인류애와

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인이 확대되어 서민대중에게 미치면 그것은 <인정(仁政)>이 되

고, 다시 그 인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그 사람은 성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적인

심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이 치정의 원리도 되는 것이다. 인은 원래 사람의 마음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情)으로 흘러서 발로(發露)를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

것을 억제하여 적절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의(義)>이다. <인의(仁義)>를 병칭하는 것은

맹자(孟子)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 유교의 덕목(德目)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예(禮)·

지(智)를 추가해서 <사덕(四德)>이라 부르며 여기에 신(信)을 추가해서 <오상(五常)>이라

고 한다. <예>는 원래 예의범절의 형식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대인관계를 원만하

게 하기 위한 규범·관습이다.








따라서 예의 형식을 배우는 것은 유가에게는 중요한 교과이지

만, 내면적으로 예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실행하는 겸허한 심성을 기르는 일이 필요하

다. <지>는 일반적으로 <덕>과 대조되는 개념이지만, 유교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지식으

로 보지 않고 사물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덕목의 하나로

꼽는다. <신>은 <충신(忠信)>이라고 할 경우 진심을 뜻하는 <충(忠)>이 말로 표현된

것을 뜻하지만, 오상에서 말하는 신은 양자를 합하여 거짓이 없는 마음의 상태와 태도를 말한다. 한편, 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에 서약하는 측면도 있는데, 신과 비








슷한 뜻인 <성(誠)>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길이며, 또한 천지간에 가득찬 정기(正氣)

로서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원리가 되기도 한다. 유교에는 또한 <오륜(五倫)>이 있다. 오

륜은 기본적인 대인관계를 5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변천〕

유교의 역사는 한나라 무제 때 국교화된 것을 중심으로 그 이전인 원시유교와 그 이후로 크

게 나누어지고, 다시 국교화 이후의 유교는 한나라 무제 때부터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 송(宋)나라 초기에서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宋明性理學), 청나라 때(淸朝考證

學)로 3분해서 고찰하는 것이 통례이다.







〈원시유교〉 춘추시대 말기의 난세에 노(魯)나라

에서 태어난 공자는 밖으로는 예를 실행하여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안으로는 인으로써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적·미신적인 하늘의 중압으로부터 사람을 해

방시키고,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폈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공명한 인사들이 그

의 문하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유교교단(儒敎敎團)이 발생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문인(門

人)들은 각지로 분산되어 교세를 넓혀 나갔는데, 이에 자극을 받아 묵가(墨家)·도가(道家)

등의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유가는 가장 유력한 학파로서 백가에 대항하면서, 또는 그 영

향을 받으면서 차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동안에 나타난 사람이 맹자와 순자(荀子)이

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통하여 공자의 윤리설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고, 왕도정치(王

道政治)를 주창하여 공자가 말하는 덕치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순자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는 선(善)해질 수 없다고 하여 예(사회적 규범)를 통한 검속(檢束)을 중시했

고, 아울러 객관적인 교학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서경(書經)》 《시경(詩經)》을 비롯한

오경(五經)은 순자를 전후한 무렵에 모두 갖추어졌는데, 경서의 학습을 필수로 교학의 지침

으로 삼은 것은 순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당훈고학(전통적 유교)〉 유교의 국교화는 BC

136년 오경박사제도(五經博士制度)가 설치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

교는 이미 오경의 학습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 유교는 늘 선왕(先王)의 도(道)를 찬

양하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왕(武王)을 성왕으로 앙모하고, 공자의 가르침의

연원(淵源)은 이들 성왕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오경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선왕의 도를 기록

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보다도 오경을 더 중시하였

다.







그리고 이후의 유교는 난해한 오경을 앞세우고 훈고학[註釋學], 즉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경학(經學)>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국교화한 당초 전한에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입각하여 경문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 한왕조의 출현을 정당화한, 정치색이 짙은 경학이다. 후한에 들어서자

이것과 병행하여 문자가 가진 의미에 유의하는 <고문경학(古文經學)>이 생겨서 훈고학으

로서의 경학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전한·후한 400년간은 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경학

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들어서 노장사상(老

莊思想)과 외래의 불교가 성행하자 유교는 쇠퇴하였고, 경전의 주석에도 노장적 색채가 가

미되었다. 당나라에 들어서자 남북조로 양분되어 있던 경학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오경정

의(五經正義)》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대비하여 경의(經義)를 국가적

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경정의》의 출현으로 경학이 고정되어 유

교가 활력을 잃었으며 이록(利祿)을 위한 학으로 전락해갔다.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철학이었다. 〈송명성리학(신유교)〉 송나라 때에 들어서면서 유

교의 현상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혁신적인 기운이 움텄다. 북송에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朱

熹;朱子)에 의하여 완성된 송학(宋學;朱子學)이 그것인데, 오경을 대신하여 사서(四書)를 존

중하고,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은 <이(理)>이다. 이는 순수지선(純粹至善)이고, 사람은 본성으로서 그 이

를 가지지만(性卽理), 동시에 육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인 기(氣)를 섞게

된다. 사람은 기에 의해서 가지게 되는 자기의 욕망(欲望;人慾)을 억제하고 본성(本性;天理)

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방법으로는 거경(居敬;마음을 純粹專一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

과 궁리(窮理;사물에 대하여 理를 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讀書問學)의 양면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처음에 이단시되었으나 뒤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어 융성하게 되었으

며, 원(元)나라 때에는 전통적 유교를 대신하여 국교가 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나라에 이르자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심학(心學)이 관학화(官學化)하여 주자학보다 활기

를 띠었다. 심즉리(心卽理)를 밝혀 이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마음이 이(理)

라고 하는 철저한 유심주의론(唯心主義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말류(末流)에는 극단으로

치달아서 독서를 멀리하고 경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청조고증학〉 명

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는 양명학의 말류를 비판하고 송·명 나라의 신유교를 공소(空

疎)하다 하여 배척하고 훈고학으로 복귀하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송학(宋學)은 여전히 관

학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학술의 주류는 한학(漢學)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한 때의 고문경

학을 기초로 해서 문자학(文字學)·음운학(音韻學)·역사학·지리학 등 여러 학문을 구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통하여 진리를 구하는 것)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증

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학의 관심은 점차 전한 때의 금문경학으로 옮겨갔다. 정치색이

강했던 금문경학은 청나라 말기의 동란기를 맞아 여러 종류의 개혁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

공하게 되었다. 캉유웨이[康有爲] 등에 의해 제창된 공양학(公羊學)이 바로 그것이다.










〈현

대중국과 유교〉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출현함으로써 성왕[天子]을 정점으

로 하는 유교의 정치학은 존재의의를 상실하였고, 그 윤리설 또한 자유평등을 부르짖는 시

대사조 앞에서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자측에서는 여전히 유교를 온존(溫存)

시키려는 동향이 있었고, 또한 효윤리(孝倫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도덕은 민중들 사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유교비판 풍조는 한층 강해졌다.









특히 문화혁명 이후 전개된 74년의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가장 격렬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이 이러한 정치운동에 이용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

며, 비공운동이 지나간 뒤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孔子廟)가 수복(修複)

되었고 일부에서는 유교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문

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선에서 머무르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서 얼마만큼이라도 현대적 의의

를 찾으려 하는가 하는 것은 이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 한국에 유교사

상이 전래된 시기는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BC 3세기 무렵 위만조

선(衛滿朝鮮)으로부터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되었

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

인다. 초기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체로 고래(古來)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점

차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가치관·생

활양식·법률제도 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가장 먼저 중국문화와 접촉하여 수용, 발전시켰으며, 백제가 해상을 통해 중국

과 교류함으로써 유교 및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지정학적

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

들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

였다. 또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래되어 건국 초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었

으며, 노자의 자연사상도 역시 혼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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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공자의 유교사상에 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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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을 드립니다, 부족하오나 참고하십시요,,,


가,유교에 있어서 인(仁)으로 최고지상의 전체의 덕은 知,勇,敬,忠,恕,誠,禮의 합일체이다
특히 논어에 유교경전으로는 四書三經(대학,중용,논어,맹자 그리고 역경,서경,시경)을
내세웠으며 구체적인 행실로는
1), 공자는 인에 대하여
ㄱ), 공손함과,
ㄴ), 너그러움
ㄷ), 미더움
ㄹ), 민첩함
ㅁ), 은혜로움이다라고,
2), 공자는 문을 나서면 사람을 귀한손님 대하듯이 하며,
3), 백성을 부림에 큰제사를 받드는것 같이 하고
4), 자기가 원하지 않는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했다.
5), 인은 먼곳에 있지 않고 자기가 인을 행하고자 하면 인은 곧 이른다.
6), 인의 사상은 언제나 지역과 혈연을 초월해 있음을 알수있다.
7), 군자가 조심하여 실수하는일이 없고 남과 접촉하는데 공손하고 예의가 있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의 형제들이다.
8), 인에는 가식이 없다.
9), 지혜가 나라를 다스릴만 하여도 인으로 그지위를 지키지 못하면 비록 그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잃을것이다.
10), 군자는 義를 이해하고 소인은 利를 이해한다.
11), 그는 할말을 먼저 실행하고 나서 그것을 말하느니라.
12), 군자는 한가지 그릇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13),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복습하는것은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14), 낡은것으로 말미암아 새로운것을 알라.
15), 아는것을 안다고 인정하고,모르는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것이 곧지식이다,라고 공자
는 정의하였다.
16), 修己行人과 克己復禮로 禮를 갖추라,
나, 유교의 중심사상은
1),天,仁,禮,義,孝,이다.
*결론;;특히 유교의 인의사상개념에는 더이상 나무랄데 없는 인간최고의 행실을 예시했으나
사후세계에 VISION이 없는 규례이라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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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공자의 유교사상에 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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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에 대해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인 BC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또한 한자문화권인 한국·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전해져서 큰 영향을 주었다. 유학(儒學)과 유교는 서로 비슷한 말이지만,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학파를 의미하는 유가(儒家)나 학문을 의미하는 유학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교라는 말은 외래의 불교에 대비시켜 300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듯하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주로 유(儒)·불(佛)·도(道) 3교를 병칭할 경우에 사용되었다. 유가·유학에 대해서 유교라는 말은 교화적(敎化的)인 면을 중시하여 어느 정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본래가 사대부(통치자 계급·)의 학(學)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가·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특색
유교는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수기(修己)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윤리의 학이다. 그러나 그 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치인(治人)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의 학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는 법률이나 형벌로 백성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리와 언행을 통해 백성을 선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먼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이 필수가 된 것이다.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는데, 군자는 치자(治者)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 반대는 <소인(小人)>인데, 피치자(被治者)인 소인에게는 스스로 수양하는 능력이 없고, 치자(군자)의 교화를 받아야 비로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지덕을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제왕(帝王)으로서 천하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어 성인이 곧 왕자(王者)라고 하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왕(聖王)>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최고의 성인인 제왕(성왕)을 정점으로, 사대부는 각기 쌓아올린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제왕을 보익(輔翼)하고, 제왕이 도덕정치[德治]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의 일체화를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윤리설(倫理說)

근본사상은 <인(仁)>이다. 인은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말하며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사랑에 가깝고 그 실천에는 특히 <충서(忠恕;진심과 배려)>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인은 먼저 부모·형제 등에서부터 점차 다른 사람에게로 미쳐야 하며 <효(孝)>를 다하는 것이 인의 첫째이고, 형제에 대한 <제(悌)>가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인은 이른바 인류애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인이 확대되어 서민대중에게 미치면 그것은 <인정(仁政)>이 되고, 다시 그 인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그 사람은 성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적인 심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이 치정의 원리도 되는 것이다. 인은 원래 사람의 마음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情)으로 흘러서 발로(發露)를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것을 억제하여 적절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의(義)>이다. <인의(仁義)>를 병칭하는 것은 맹자(孟子)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 유교의 덕목(德目)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예(禮)·지(智)를 추가해서 <사덕(四德)>이라 부르며 여기에 신(信)을 추가해서 <오상(五常)>이라고 한다. <예>는 원래 예의범절의 형식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규범·관습이다. 따라서 예의 형식을 배우는 것은 유가에게는 중요한 교과이지만, 내면적으로 예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실행하는 겸허한 심성을 기르는 일이 필요하다. <지>는 일반적으로 <덕>과 대조되는 개념이지만, 유교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지식으로 보지 않고 사물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덕목의 하나로 꼽는다. <신>은 <충신(忠信)>이라고 할 경우 진심을 뜻하는 <충(忠)>이 말로 표현된 것을 뜻하지만, 오상에서 말하는 신은 양자를 합하여 거짓이 없는 마음의 상태와 태도를 말한다. 한편, 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에 서약하는 측면도 있는데, 신과 비슷한 뜻인 <성(誠)>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길이며, 또한 천지간에 가득찬 정기(正氣)로서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원리가 되기도 한다. 유교에는 또한 <오륜(五倫)>이 있다. 오륜은 기본적인 대인관계를 5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변천
유교의 역사는 한나라 무제 때 국교화된 것을 중심으로 그 이전인 원시유교와 그 이후로 크게 나누어지고, 다시 국교화 이후의 유교는 한나라 무제 때부터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 송(宋)나라 초기에서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宋明性理學), 청나라 때(淸朝考證學)로 3분해서 고찰하는 것이 통례이다.




원시유교
춘추시대 말기의 난세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밖으로는 예를 실행하여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안으로는 인으로써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적·미신적인 하늘의 중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폈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공명한 인사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유교교단(儒敎敎團)이 발생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문인(門人)들은 각지로 분산되어 교세를 넓혀 나갔는데, 이에 자극을 받아 묵가(墨家)·도가(道家) 등의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유가는 가장 유력한 학파로서 백가에 대항하면서, 또는 그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동안에 나타난 사람이 맹자와 순자(荀子)이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통하여 공자의 윤리설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여 공자가 말하는 덕치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순자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는 선(善)해질 수 없다고 하여 예(사회적 규범)를 통한 검속(檢束)을 중시했고, 아울러 객관적인 교학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서경(書經)》 《시경(詩經)》을 비롯한 오경(五經)은 순자를 전후한 무렵에 모두 갖추어졌는데, 경서의 학습을 필수로 교학의 지침으로 삼은 것은 순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당훈고학(전통적 유교)
유교의 국교화는 BC 136년 오경박사제도(五經博士制度)가 설치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이미 오경의 학습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 유교는 늘 선왕(先王)의 도(道)를 찬양하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왕(武王)을 성왕으로 앙모하고, 공자의 가르침의 연원(淵源)은 이들 성왕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오경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선왕의 도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보다도 오경을 더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유교는 난해한 오경을 앞세우고 훈고학[註釋學], 즉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경학(經學)>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국교화한 당초 전한에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입각하여 경문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 한왕조의 출현을 정당화한, 정치색이 짙은 경학이다. 후한에 들어서자 이것과 병행하여 문자가 가진 의미에 유의하는 <고문경학(古文經學)>이 생겨서 훈고학으로서의 경학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전한·후한 400년간은 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경학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들어서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외래의 불교가 성행하자 유교는 쇠퇴하였고, 경전의 주석에도 노장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당나라에 들어서자 남북조로 양분되어 있던 경학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대비하여 경의(經義)를 국가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경정의》의 출현으로 경학이 고정되어 유교가 활력을 잃었으며 이록(利祿)을 위한 학으로 전락해갔다.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철학이었다.




송명성리학(신유교)
송나라 때에 들어서면서 유교의 현상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혁신적인 기운이 움텄다. 북송에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朱熹;朱子)에 의하여 완성된 송학(宋學;朱子學)이 그것인데, 오경을 대신하여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은 <이(理)>이다. 이는 순수지선(純粹至善)이고, 사람은 본성으로서 그 이를 가지지만(性卽理), 동시에 육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인 기(氣)를 섞게 된다. 사람은 기에 의해서 가지게 되는 자기의 욕망(欲望;人慾)을 억제하고 본성(本性;天理)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방법으로는 거경(居敬;마음을 純粹專一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과 궁리(窮理;사물에 대하여 理를 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讀書問學)의 양면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처음에 이단시되었으나 뒤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어 융성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전통적 유교를 대신하여 국교가 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명나라에 이르자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심학(心學)이 관학화(官學化)하여 주자학보다 활기를 띠었다. 심즉리(心卽理)를 밝혀 이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마음이 이(理)라고 하는 철저한 유심주의론(唯心主義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말류(末流)에는 극단으로 치달아서 독서를 멀리하고 경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청조고증학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는 양명학의 말류를 비판하고 송·명 나라의 신유교를 공소(空疎)하다 하여 배척하고 훈고학으로 복귀하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송학(宋學)은 여전히 관학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학술의 주류는 한학(漢學)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한 때의 고문경학을 기초로 해서 문자학(文字學)·음운학(音韻學)·역사학·지리학 등 여러 학문을 구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통하여 진리를 구하는 것)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학의 관심은 점차 전한 때의 금문경학으로 옮겨갔다. 정치색이 강했던 금문경학은 청나라 말기의 동란기를 맞아 여러 종류의 개혁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캉유웨이[康有爲] 등에 의해 제창된 공양학(公羊學)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중국과 유교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출현함으로써 성왕[天子]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의 정치학은 존재의의를 상실하였고, 그 윤리설 또한 자유평등을 부르짖는 시대사조 앞에서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자측에서는 여전히 유교를 온존(溫存)시키려는 동향이 있었고, 또한 효윤리(孝倫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도덕은 민중들 사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유교비판 풍조는 한층 강해졌다. 특히 문화혁명 이후 전개된 74년의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가장 격렬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이 이러한 정치운동에 이용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공운동이 지나간 뒤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孔子廟)가 수복(修複)되었고 일부에서는 유교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선에서 머무르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서 얼마만큼이라도 현대적 의의를 찾으려 하는가 하는 것은 이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
한국에 유교사상이 전래된 시기는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BC 3세기 무렵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부터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되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체로 고래(古來)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점차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가치관·생활양식·법률제도 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가장 먼저 중국문화와 접촉하여 수용, 발전시켰으며, 백제가 해상을 통해 중국과 교류함으로써 유교 및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래되어 건국 초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었으며, 노장의 자연사상도 역시 혼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었고 후기에는 종교로서의 도교를 수입함으로써 유·불·도교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세워 상류계급의 자제를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교과내용은 오경과 삼사(三史), 《문선(文選)》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국가체제와 문물의 정비, 유학의 정치원리에 입각한 통치, 유교경전 학습을 통한 인재의 배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건국 초부터 역사 기록을 중시하여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을 편찬하였으며, 경전을 통해 왕도정치(王道政治)·덕치주의(德治主義)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이 밖에 예제(禮制)나 생활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숭배에 더욱 집착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예법에 따라 국사(國事)와 종묘를 새로이 세우고 중시하게 되었다. 백제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질서를 수립하고 중국문화 수용도 고구려보다 빨랐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경학·의학 등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앞장서서 일본문화의 개창자적 역할을 하였다. 유교의 법식은 백제인의 의례와 윤리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제사나 묘제 등에도 유교적인 의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신관(神觀)·사생관·윤리의식이 점차 유교화되었다. 한편, 일찍부터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신찬(百濟新撰)》 《서기(書記)》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였으며, 4세기 후반부터는 유학이 본격적으로 성행하여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들 수 있는데, 근초고왕 때 아직기는 일본에 유학을 전하고 일본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의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하고 그곳에서 왕실의 스승이 되었다. 이 밖에 무녕왕 때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도 일본에 유학을 전하는 등, 백제는 일본에 학술과 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고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유교의 전래가 가장 늦었다. 그러나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유효 적절하게 토착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지증왕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교의 뜻에 따라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뜻을 취해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상복법을 제정·공포하고 율령의 반포, 공복을 제정하는 일 등은 모두 넓은 뜻에서 유교사상이 국가현실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교사상과 화랑도(花郞道)와의 관계도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화랑도는 본디 사람들을 모아 선비를 선발할 목적 아래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교육하였으니, 이는 치국의 대요(大要)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인용하여 <현좌충신(賢佐忠臣)과 양장용졸(良將勇卒)이 화랑도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임신서기석(壬申書記石)에 화랑들이 《시경》 《상서》 《예기》 등을 배울 것을 하늘에 맹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도 화랑도와 유교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문무왕의 뒤를 이어 위민(爲民)·보민(保民)·안민(安民)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의 유학은 당나라로부터 문화를 도입하여 교육사상을 확립함과 동시에 유학자라고 할 만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 특색이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는데, 그 편제나 교과 내용이 모두 유학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이는 골품제에 대한 비판·견제로 이루어진 개혁으로서, 과거제의 선구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




고려시대
고려 초기에는 태조 왕건(王建)이 불교를 숭상한 영향을 받아 유교적 정치사상과 이념의 현실적용이란 특성 아래 유교적인 교양이 사이에 일반화된 상태였지만 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치중하였기 때문에 유학사상이 아직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태조 때는 학교를 창설하여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광종 때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관료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답변확정하여 정치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여기에는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신(儒臣)의 활약이 컸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사장(詞章)에 치중하던 초기 단계와는 달리 점차 통경명사(通經明史)에 힘써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심화되었다. 또 정치에 실제적인 적용이 증대한 것 이외에도 한당유학(漢唐儒學)의 내용이 다른 학문이나 사회적인 측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문종 때 유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리던 최충(崔沖)은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고 구경(九經)과 삼사로써 후진을 가르쳤는데, 뒷날 이를 본받아 유신들이 다투어 사학을 열어 십이공도(十二公徒)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예종·인종 때 발달한 강경제도(講經制度)는 군주에게는 유학적 교양 배양과 통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문신들에게는 부화(浮華) 방지와 국가경륜 연마 및 군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예종은 문무칠재(文武七齋)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는 등 국자감 부흥에 힘써 유학 기풍이 날로 높아졌다. 이와 함께 고려 초기 수사사업(修史事業)의 흐름 속에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사실 기록을 넘어서는 유학적 역사의식과 역사서술 체계를 갖춘 역사서로 평가된다. 한편 관학이 부흥하고 강경제도가 발달한 반면 예종 때부터 문사(文士) 우대 경향이 극심해져 문벌귀족의 전횡이 노골화되었다. 그리하여 의종 때에는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무단정치를 함으로써 유학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침체된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반성적 기풍이 조성되었고, 중국의 송학, 즉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이 도입되었다. 안향이 원나라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들여옴으로써 전래된 주자학은 백이정·우탁(禹倬)·권부(權溥) 등 신진학자들의 수용단계를 지나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길재(吉再) 등에 이르러 학문적으로 심화, 정착되었다. 주자학자들은 송대 성리학 벽불론(闢佛論)과 도통론(道統論)에 근거,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가정책과 이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 초기 이래 경세론적 특성을 가졌던 유학은 철학적 논리와 체계를 갖춘 성리학 수용으로 학풍이 일변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조선의 유교입국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유교는 조선시대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유교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세종 때 유교문화가 꽃을 피운 이래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문물제도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엽부터 영남의 사림파(士林派)가 정계에 진출한 이래 훈구파와 대립하여 사대사화(四大士禍)가 일어났다. 특히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향촌자치제와 왕도정치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에게 몰려 몰락하였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로는 사림들이 정계 진출을 단념하고 향촌으로 내려가 학문에 주력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학문 경향도 사색과 이론 탐구에 치중하면서 발전하였는데, 서경덕(徐敬德)과 이언적(李彦迪)은 조선 성리학의 선구였다. 그 뒤를 이어 명종·선조 때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성리학은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가 대표적인 학자로, 그 학풍이 후세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이이와 성혼(成渾)간의 사단칠정이기론변(四端七情理氣論辨)을 거쳐 학문적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후 이황 계열의 영남학파에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 계열의 기호학파에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는 등 학파에 따라 학설이 양분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황·이이 등 여러 학자들이 성리학을 연찬한 뒤 유교철학은 고도로 발달하여 국내적으로 전성시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영향을 미친 바가 크다. 특히 이황의 학설은 야마사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일본 주자학파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는 국가체제와 사회질서 확립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예학이 성립되어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裂) 등이 17세기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이어 17세기 후반부터는 알맹이 없이 서로 헐뜯는 학설로 전락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론(禮論)의 대립을 지양하고 원시유교의 근본정신에 입각,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利用厚生)·실사구시 등을 부르짖는 실학사상이 대두하여 박제가(朴齋家)·정약용(丁若鏞) 등이 영·정조시대를 전후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해지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 뒤 서학(西學)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운동(守舊運動)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 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維新精神)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국권피탈 이후 일제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 유학자류(儒學者流)를 이용, 성균관을 경학원(經學院)으로 격하시켜 한국 유교의 맥을 단절시키고자 하였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부설하여 황도유교(皇道儒敎)를 선전하는 등 기형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전국 유림(儒林)의 총의로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고 46년 전국 유림의 결합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함과 동시에 성균관대학교를 창설하여 유학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유교/용어

개물성무 開物成務 인지(人智)를 계발하고 사업을 완성시킨다는 말. 만물과 인사(人事)의 공용(功用)을 이름을 말한다.
거경궁리 居敬窮理 정주학에서의 학문 수양의 두 가지 과제. 거경은 마음을 근신(謹愼)의 상태로 유지하고 기거동작(起居動作)을 성실하게 절제하는 것이며, 궁리는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격물치지 格物致知 《대학》 8조목에 나오는 학문과 수양의 방법론. 사물이나 현상 속에 내재한 이치를 탐구하여 나의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뜻이다.
경 敬 성리학에서 함양(涵養)공부의 요체가되는 핵심문제.
계선성성 繼善成性 음양(陰陽)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실천결과를 나타낸 말. 《주역》 <계사(繫辭) 상>에서 <한 번 양하고 한 번 음하는 것이 도이니, 이를 계승하는 것이 선이고 이를 이루는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계왕개래 繼往開來 선왕의 도를 계승하고 그것을 후세에 전승하는 것. 주희(朱熹)가 공자를 가리켜 한 말이다.
괴력난신 怪力亂神 상도(常道)에서 벗어난 패역(悖逆)한 일과 인간이 이성(理性)으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나 현상들을 일컫는 말.
궁리진성 窮理盡性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다한다는 말. 사물·인사(人事)의 법칙에 대한 탐구와 그것이 인간에게 내재화한 것으로서의 본성을 발휘하는 것의 일관성을 나타낸다.
극기복례 克己復禮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라는 말.
내성외왕 內聖外王 유교에서 추구하는 인격수양의 이상적 상태. 안으로 자신을 수양하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고 밖으로 민중을 선도하여 천하에 태평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동 大同 모든 사람의 신분적 평등과 재화(財貨)의 공평한 분배, 그리고 인륜의 구현으로 특징되는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형태로 상정(想定)하는 사상.
대성지성 大成至聖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완정(完整)된 학문과 성스러운 인격을 기리는 말. <대성>이란 전인(前人)의 주장과 학설을 집대성하여 완정된 이론체계를 이룬 데 대한 칭송의 말이며, <지성>이란 넓은 학식, 고상한 인격, 비범한 지혜를 가진 사람에 대한 경칭이다.
대일통 大一統 중국의 고대사회에 있어 종법(宗法)의 근간이 된 것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의 제도적 통일을 주장하는 사상.
덕본재말 德本財末 정치의 근본이 경제적 충족보다 윤리적 교화에 있다고 하는 유교의 보편적 사고방식.
만물개비어아 萬物皆備於我 만물의 이치가 모두 인간의 마음[心] 속에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말.
명교 名敎 명분(名分)과 명예를 중시하는 가르침. 좁은 뜻으로는 예교(禮敎)와, 넓은 뜻으로는 유교와 같은 말이다.
명덕 明德 인간내면에 있는 본래의 밝은 덕.
무극이태극 無極而太極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거가 되는 근원적 실체의 무형성(無形性)과 실재성(實在性)을 함축한 말.
박문약례 博文約禮 널리 학식을 쌓고 그것을 예(禮)로써 집약하는 일. 학문연구와 도덕적 실천의 방법을 말한다.
반구저기 反求諸己 인식과 수양에 있어 내면적 반성을 강조하는 말.
변화기질 變化氣質 기질의 편탁(偏濁)을 교정하여 본연지성(本然之性)을 회복한다는 성리학의 수양법.
사단칠정 四端七情 인간의 착한 본성의 발로인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마음과, 인간 감정의 총칭으로서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7가지 감정을 이르는 말.
사대 事大 약소국이 강대국에 정치적·외교적으로 복속(服屬)함으로써 자국의 존립과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
사문 斯文 유교에서 자교(自敎)의 학문을 가리켜 이르는 말.
삼강 三綱 동양 고대사회의 기본적 인간관계인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관계를 도덕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유교의 전통적 질서의식.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을 이르는 말이다.
삼불후 三不朽 영원불멸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 3가지 일. 입덕(立德)·입공(立功)·입언(立言)을 말한다.
생생지도 生生之道 역(易)의 순환론적 우주관을 나타내는 말. 우주만물이 끊임없이 생성·순환(循環)하는 천도(天道)의 무궁한 변화상을 가리키는 말로,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처음 보인다.
성 性 선험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상정(想定)된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 성리학에서 주요 문제로 다루어진다.
성상근 습상원 性相近習相遠 인간의 선천성은 동일하나 후천적인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질 수 있다는 말.
솔성지위도 率性之謂道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라는 말. 유교에서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제이다.
시중 時中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알맞게 대처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
신독 愼獨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뜻으로, 개인의 내면적 충실을 강조한 덕목.
양지양능 良知良能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인식과 능력.
역자이교지 易子而敎之 자제(子弟)를 직접 가르치지 않고 남과 바꾸어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 방법론.
예약형정 禮藥刑政 유교정치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4가지 통치방법을 가리키는 말. 예는 예법, 악은 음악, 형은 형벌, 정은 정령(政令)을 각각 가리킨다.
오륜 五倫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5가지 관계, 즉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관계를 확정하기 위해 제시된 유교의 기본윤리.
오상 五常 사람이 항상 행해야 하는 5가지 덕목. 인(仁)·의(義)·예(禮)·지(智)·(信)을 가리킨다.
위기지학 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
위정척사 衛正斥邪 정학(正學;儒學)의 도통을 지키고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유교의 벽이단(闢異端) 사상.
이 理 모든 사물·현상에 내재한 법칙이나 원리, 혹은 그것들을 성립하는 법칙성.
이단 異端 유교에 있어서 주류를 차지하는 학파가 자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타교(他敎)를 부정하여 가리키는 말.
이용후생 利用厚生 편리한 기구 등을 잘 이용하며 삶에 부족함이 없게 한다는 말.
적연부동 감이수통 寂然不動感而遂通 역(易)은 아무런 작위도 없이 고요하다가 감응(感應)하게 되면 사물의 모든 원리에 통한다는 뜻. 역의 본체와 작용을 통일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존덕성 도문학 尊德性道問學 유교에서 제시하는 도덕수양의 두 가지 방법. 존덕성은 인간에게 부여된 선한 덕성을 수양을 통해 높이고 보존하는 방법이며, 도문학은 학문을 통해 덕성을 배양하는 방법이다.
중도 中道 극단을 배제하는 유교의 윤리사상을 나타내는 말. 중(中)에 처하여 도(道)를 얻는다는 뜻이다.
지행합일 知行合一 인식과 실천의 합일을 주장하는 왕수인(王守仁)의 학설.
진덕수업 進德修業 유덕한 군자가 자기의 덕을 날로 새롭게 진보·향상시키고 그것을 실제의 일에 응용하여 자기의 일을 훌륭하게 처리한다는 뜻.
천인합일 天人合一 하늘과 인간의 선천적 동일성과 그에 따른 인간의 실천적 당위성을 밝히는 유가사상의 핵심적인 이론.
추기급인 推己及人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理解)를 포함한 대타적(對他的) 관계의 전실천과정에 있어 자기의 도덕적 본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
춘추필법 春秋筆法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간결한 문장을 통해 엄격하게 포폄(褒貶)을 한 《춘추》의 독특한 필법을 이르는 말.
충 忠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성실을 다하는 것.
충서 忠恕 자신의 정성을 다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
치중화 致中和 정(情)의 미발(未發)을 중, 발하여 중절(中節)된 상태를 화라 하여,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의 한 방법.
태극 太極 만유(萬有)의 본원(本源)으로서,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궁극적 실체.
하학상달 下學上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이고 비근한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높은 진리에까지 도달한다는 공자의 학문방법.
혈구지도 자로 물건을 재듯이 내마음을 자로 삼아 남의 마음을 재고, 내 처지를 생각해 남의 처지를 아는 방법.
호연지기 浩然之氣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게 가득찬, 넓고도 큰 원기(元氣). 전(轉)하여, 도의(道義)에 뿌리를 박고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를 이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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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중국의 3대종교(유교·불교·도교)의 하나. 도학이라고도 한다. 도교는 중국민족의 고유한 생활문화 속에서 생활신조, 종교적 신앙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이다. 이는 한(漢)시대 이전의 무속신앙과 신선사상,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한대에 황로신앙(黃老信仰)이 가미되어 대체적으로 후한 말부터 육조시대(六朝時代)에 걸쳐서 형성되었고, 현재까지도 타이완이나 홍콩 등지에서 신앙되고 있다. 초기의 도교적 신앙은 불로불사의 신선(神仙)을 희구(希求)한다든지 무술이나 도술에 의한 치병(治病)·재해 퇴치 등 현세의 행복추구에 그 중점을 두었으나, 유교나 불교와 경합(競合)하고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내적 수양과 민중적 도덕의식의 견지(堅持)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도 중요시하게끔 발전했다.

도교의 개념
도교란 사상·교리·기술(技術)·사회·교단(敎團)·신앙대상 및 신앙의례 등 모든 요소를 함유하는 문화복합체이다. 그것은 중국의 역사와 풍토, 지역적 조건 안에서 정치와 사회·문화 등과 관련되면서 전개된 생활문화를 기초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민족 고유의 종교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한 유형으로 발전한 것에 유교가 있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유교가 중국의 사회·국가의 질서, 그리고 학문·기술을 통치자의 입장에서 구명(究明)하고자 한 것과는 달리, 도교는 종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의 질서 및 학문·기술을 민중의 입장에서 밝히고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유교에서 배격한 미신이나 온갖 도깨비·변괴귀물(變怪鬼物) 등 무축적 귀신신앙(巫祝的鬼神信仰)도 포함한다. 이 도교의 개념은 <민중도교>와 <교회도교>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민중도교는 농민이나 민중 일반의 신앙과 생활신조, 그리고 그것에 의해 조직된 집단이나 결사를 말한다. 이는 후한 말에 태동하고 있었는데, 특히 송대 이후의 서민사회의 발전에 대응하여 유교나 불교 등과의 합일(合一)하에서 전개된 것이다. 한편, 교회도교는 국가나 왕조에 의하여 공인된 도교의 교단·교파이며, 5세기의 구겸지(寇謙之)의 <신천사도(新天師道)>가 그 최초이다. 천사도는 원래 <삼장>인 장릉(張陵)·장형(張衡)·장노(張魯)의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불리었으며, 후한 말에 일어난 농민을 주체로 하는 초기의 민중도교였지만, 위(魏)·진(晉)의 정권밑에서 발전한 신오두미도(新五斗米道) 즉 신천사도는 북위(北魏)왕조의 공인(公認)에 의해서 교회도교가 되었다.



각종 도교의 용어
도교의 원뜻은 <도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도(道)>란, 유가(儒家)나 도가(道家)를 비롯하여 중국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설명하는 학설의 중심으로, 중국인의 의식의 기초에 존재하는 것이다. <도교>라는 말은 선진(先秦)시대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처음에는 <성인(聖人)의 도의 가르침>이란 의미를 가지고 유교를 지칭(指稱)하고 있었다. 또, 불교 전래 뒤로는 불교를 의미했던 시대도 있었다. 즉, 이것들은 <선왕(先王)이나 성인의 도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인 것으로, 오늘날 일컬어지는 중국의 민족종교로서의 도교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이 <성인의 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과 술(術)을 <도술(道術)>이라고 하였다. <도술>이란, 원래 <성인의 도의 술>, 치세치민(治世治民)을 위한 정치의 술이었다. 한편, 선인(仙人)이 되기 위한 방법, 또는 선인과 교감(交感)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선방술(神仙方術)>, 의료기술로서의 <의방술(醫方術)>, 그 밖에 과학적 기술과 주술 등 여러 가지의 방술이 존재해 있었다. 이 도술을 행하는 자가 도사(道士)이고, 방술을 행하는 자가 방사(方士)이다. 도술과 방술의 차이를 굳이 말한다면, 전자가 국가·정치에 관한 경세(經世)·치민(治民)의 술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개인적·종교적 성격을 가지는 일이다. 그렇지만 후한대로 들어서자 이 양자는 혼동되었다. 따라서 후한대에는 도술의 범위가 매우 넓어져, 정치술이나 과학적 기술에서 주술과 예언·복점(卜占) 등의 종교적 영력(靈力)을 포함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행하는 자는 도술의 사(士), 즉 <도사>라고 불리었다. 이 경우의 도사는, 원래의 <성인의 도의 도술>의 사로서의 <도사>라기보다는 종교적 요소를 지닌 <도사>였다. 무의(巫醫)의 주술과 부적을 사용하는 종교집단은 <귀도>라고 불렸다. <태평도>나 삼장의 <오두미도> 등도 귀도를 중요한 요소로 삼은 초기의 도교적 집단이다. 또 귀도에 대하여 <신도>라는 성어(成語)가 다루어졌다. <귀신(鬼神)>의 <귀(鬼)>에 연관되어서 <귀도>가 생겨났고, <신(神)>에 연관되어서 <신도>가 생겨났다. <신도>는 우선 신을 제사지내는 <단(壇)>과 통하는 도를 의미했으나, 점차로 신앙의 객체인 신 그 자체, 또는 신신앙(神信仰)에 기초하는 종교집단과 가르침도 뜻하게 되었다. <도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이지만, 전국시대에는 유가·법가(法家)·묵가(墨家) 및 방기(方技)·신선(神仙) 등과의 교류가 있었고, 진(秦)·전한대를 거쳐서, 후한대에는 <도가>의 개념 안에는 종교적 요소도 섞여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즉, 도가라는 개념은, 오늘날 말하는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사상·철학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도가뿐만 아니라, <도술> <방술>까지를 포함한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되었다.



도교의 원류(源流)
이상과 같은 도가와 도교의 개념의 변천은 그대로 도교 성립의 전사(前史)와 관계된다. BC 3세기 무렵의 전국시대에 연(燕)·제(齊;河北省·山東省) 지방에는 <방선도(方僊道)>라 불리는 신선방술(神仙方術)을 위주로 하는 종교집단이 존재했다. 일찍이 제나라에는 민간의 무축(주술사)에 의거하는 농작(農作)을 위한 산천제(山川祭)와, 그것을 토대로 하여 왕후(王侯)들이 풍작을 기원하는 팔신(天主·地主·陰主·陽主·月主·日主 등)에게 지내는 팔신제가 있었다. 이 팔신제에 그 당시 이미 발달되어 있었던 경락의경(鍼灸醫療學)이나 본초경방(漢方醫藥學)의 학문과 보인(步引)·안마·복이(服餌)·황야(黃冶;體操·食物·鍊金養生) 등의 신선술(神僊術)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 방선도이다. 방선도는 신선방사에 의한 종교집단으로, 그들 방사의 말을 믿고서 제나라나 연(燕)나라의 왕후귀족, 또는 진나라의 시황제(始皇帝) 등이 불로불사의 신선약을 얻기 위하여 신선이 산다는 발해만 위의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에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방사에게 신선의 약, 특히 황금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먹음으로써 불사의 몸이 되려고 하였다. 연금술에 의해 만들어진 황금은 불사의 약 중에서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진시황제는 이들 방사가 설명하는 봉선설(封禪說)에 의해서 팔신 가운데의 지주(地主)라 여겨지는 태산(泰山)과 그 지봉(支峰)인 양부(梁父)에서 천지의 신을 제사지내고, 천신과 교감하여 죽지 않는 몸이 되고자 했다. 전국시대의 제나라는 위왕(威王)·선왕(宣王) 때가 최성기였으며, 그 도읍인 임치(臨淄)에는 중국 각지에서 여러 학자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중국문화와 학술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나라의 학자인 추연(鄒衍)은 음양오행설을 제창하여 당시 최고의 학자로 칭송되었다. 방사들은 이 음양오행설을 도입하여 신선설이나 봉선설에 교묘히 이용하였다. 방선도의 발흥은 연·제나라의 해류(海流)에 의한 해상교역과, 명산에서 약초나 황금을 구하는 방기(方技)의 무리들의 활약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며 한반도에서의 신선설의 형성이나 기타의 전설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신화 속에서 중국의 조물주라 여겨지는 황제(黃帝)는 전국시대부터 방선도나 의방술과 연결되어 신선의 조상으로 여겨졌다. 신선이 된 황제와 도가의 노자가 결합되어서 <황로의 말씀>이 세상에 퍼져나갔다. 전국 말기부터 진대(秦代)·한초에 걸쳐서 <도가><법가> 일체의 정치가 행해졌는데, 도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황로의 말씀>에 기초한 <황로의 술(術)>에 의한 정치였다. 황제와 더불어 노자의 신선화(神仙化), <황로>의 신선적 객체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후한대에 와서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예언서를 기초로 하여, 전한 말에는 이미 일어나 있었던 참위설(讖緯說)이 도교적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참위설은 유가의 경(經)의 설을 음양오행설이나 <수술(數術)>계의 다른 학설에 의해서 보완하고, 주로 사회적·정치적 현상에 대한 예언을 그 내용으로 삼는 학설이다. 이 참위설에 불교의 영향도 덧붙여져 <황로도(黃老道)>가 일어났다. 불교와 중국문화의 상호 영향의 결과, <황로>는 부도(浮屠;佛陀의 옛 漢譯)와 같은 종류로 생각되어 노자의 신격화(神格化)가 횡행했고 신앙의 객체로서의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성립되었다. 후한 중기로부터 말기에 걸쳐 황로도나 주술을 위주로 하는 무축도(巫祝道;鬼道)가 모태가 되어서 농민·민중의 종교결사인 태평도(太平道)·오두미도가 생겨났다.



도교 각파의 성립
태평도는 후한 중기의 간길(干吉)이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태평청령서(大平淸領書)》, 즉 태평경을 전수받은 일에서 시작된다. 이 경전을 종교운동의 지주로 삼아 허베이[河北]의 장각(張角)이 태평도를 조직했다. 그러나 장각이 후에 반란을 일으켜서, 태평도는 멸망하고, 민간에 남은 잔당이 오두미도와 합류했다. 그 오두미도는 장릉(張陵)이 쓰촨[四川]의 청두[成都]지역에서 시작한 종교집단이다. 도가의 사상을 중심으로 주술적인 치병(治病)을 하고, 그 사례로 쌀 5두(한국의 약 5升)를 헌납케 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 병자를 조용한 방에 앉혀 놓고 과거의 죄를 반성케 하되 천(天)·지(地)·수(水)의 신, 즉 천관(天官)·지관(地官)·수관(水官)의 삼관에게 자기의 이름과 과거의 죄과를 써 넣은 서장(書狀) 3통을 바치고 속죄를 위한 공양물이나 노동력을 제공하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과거의 죄과로 인해서 질병이 일어난다는 사고방식은 태평도에도 있었다. 오두미도가 종교 교단으로서의 조직을 확립한 것은 장릉의 아들인 장형(張衡)과 손자인 장로(張魯)의 시절에 이르러서부터였다. 특히 장로 때에는 처음에 익주(益州)의 장관의 보호를 받아 흥왕했으나, 후에 압박을 받게 되자 쓰촨 동부에서 산시[陝西]의 한중(漢中)에 걸친 땅으로 옮기고,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여 그 제후가 되고 나서 관동(關柬)의 호족·귀족과 농민들 사이에서 그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 관동의 오두미도는 원시적인 주술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에서 호족·귀족과 관계를 맺고 신선방술과 다른 도술을 위주로 하는 교단으로 변해 갔다. 이 계통의 오두미도는 강남(양쯔강 이남)에까지 퍼져 갔는데, 귀족형의 오두미도 신앙과 동진(東晉) 말기의 손은(孫恩)에게 인솔된 농민·민중형의 종교반란을 야기시켰다. 한편, 화북지방에 유포된 오두미도는 불교와 경합하기도 하고 유교적 질서를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구겸지(寇謙之)의 <신천사도(新天師道)>로 발전했다. 또 장쑤[江蘇]·강남의 호족층을 기반으로 하여 후한 말로부터 육조시대에 걸쳐, 신선도(神仙道)에다 제자(諸子)·황로의 사상과 여러 가지의 도술 및 참위사상 등을 복합화한 도술적 종교가 생겨났다. 한말의 전란을 피하여 강남으로 갔던 도사 좌자(左慈)에 의하여 정리되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갈현(葛玄) 일족에게 계승되었던 이 계통의 도술적인 종교는 <갈씨도>라고도 불리었다. 갈현의 종손인 갈홍(葛洪)은 《포박자(抱朴子)》를 저술하고, 이 계통에서 전해지는 연금술에 의한 신선방술을 집성했다. 또 갈씨 일족에 의하여 뒷날의 《영보경(靈寶經)》의 기본부분이 만들어졌다. 이 경전은 그 뒤 이 계통의 도교 경전류가 되어서 계승되었다. 오(吳)나라 재상의 자손으로 알려진 육수정(陸修靜)은 본래 천사도 계통의 도사였는데, 제국(諸國)을 순례하는 동안 《상청경(上淸經)》을 입수하여 그것을 정리했다. 그는 또 <갈씨도>에도 통하고 있었으므로 초기의 《영보경》도 정리하고, 뒤의 도교 경전의 집대성인 <도장(道藏)>의 분류체계 <삼동설(三洞說)>을 확립했다. 육수정의 뒤를 이어 경전을 정비한 사람이 도홍경(陶弘景)인데, 그는 모산(茅山)을 거점으로 《상청경》을 대성하여 이른바 <상청파>를 확립했다. 그의 사상은 과학적인 의경(醫經)·경방(經方)·신선의 학(學)을 기초로 한 것으로, 거기에 다시 불교와의 교류도 있었는데, 그는 처음으로 이론적인 도교 교학을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육조말에서 수대(隋代)까지 화베이[華北]에 신천사도, 강남지역에는 천사도와 상청파가 각각 전개되어 갔다. 당(唐)대로 들어오자, 상청파의 본거지인 모산을 중심으로 해서 남북 도교의 통합과 교류를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도홍경의 교학을 받은 당(唐) 초의 상청파 도사 왕원지(王遠知)는 처음에 신천사도에서 수행했으며, 제자인 반사정(潘師正)은 모산에서 신천사도의 거점인 쑹산[嵩山]으로 옮겨 살았다. 이같은 상청파의 활약으로, 모산은 당대 도교의 중심적인 고장으로 되었고, 상청파는 천사도와 함께 도교의 2대 유파로 육성되었다.



도교와 불교의 교류
북위의 태무제(太武帝)는 재상 최호(崔浩)의 권유에 따라서 구겸지의 신천사도를 국교로 삼았으며, 연호도 태평진군(太平眞君)이라고 하였다. 도교를 믿는 한인 호족인 최호는 오랑캐의 가르침인 불교가 왕조의 재정을 좀먹자, 불교를 배제시키고자 태무제에게 권고해서 446년에 불교 탄압을 감행케 했다. 태무제 뒤에 불교는 다시 부흥하였으나,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때에는 다시 탄압당했다. 북주의 무제는 유교적 왕조체제에다가 불(佛)·도(道) 양교를 순응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572년의 법론에서 무제는, 삼교의 순위를 유·도·불로 하였지만, 574년의 도·불의 법론에서는 도사 장빈(張賓)이 불교측에 의해서 논파되었으므로 마침내 불(佛)·도(道) 양교를 함께 폐하고 승과 도사를 환속시켰다. 이어서 <현도관(玄都觀)>을 <통도관(通道觀)>으로 개칭하여 국립종교연구소로 만들었고, 3교의 스승 중 우수한 자를 통도관학사로 삼아 거기에서 불·도 2교의 유교화(儒敎化) 연구를 하게 했다. 송대의 진종(眞宗)은 도교 존중정책을 강화하고, 1015년에는 용호산 천사도(天師道)의 제24대 천사 장정수(張正隨)를 불러들여 왕조와 천사도의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이 무렵부터 도관(도교의 사원)을 고급관료가 관리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진종은 재상 왕흠약(王欽若)을 총재로 삼고, 도사들을 동원하여 도장(道藏)을 편찬시켜 《보문통록(寶文統錄)》을 편집하였다. 이어서 1013년에는 도사 장군방(張君房)에게 정비케한 도장 《대송천궁보장(大宋天宮寶藏)》을 완성하게 했다. 장군방은 그 정요(精要)를 뽑아 《운급칠첨》을 저술했다. 송은 국난(國難)을 당하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행할 뿐만 아니라, 도교의 힘까지 빌리려고 했다. 불교의 중국 전래에 의하여 그때까지의 중국문화 안에서의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대립과 융합에 더하여서 유가·도가 대(對) 불가의 문화마찰이 격심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삼가(三家) 상호간의 경합이나 불가의 유가화(儒家化)로 인해서 유두도불양각형(儒頭道佛兩脚型)의 3교 관계가 생겨나게 되어 유가·도사·사문(沙門)의 삼교겸수(三敎兼修)가 확산되었다.



민중도교의 전개와 신도교
당실(唐室)의 도교신봉책 때문에 교회도교의 교역(敎域)은 확실하게 중국 전토로 퍼져갔다. 당말 이래 각지로 전파된 도교는 그 지역의 습속과 결합하여 삼교합일의 민간신앙(민중적 도교신앙)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송대에 이르러서는, 서민사회의 발전을 배경으로 해서 삼교합일의 새로운 민중도교가 전개되었다. 송대의 민중도교의 특색은 유불도 3교의 합일·혼합적 형태를 취하고, 사서(士庶) 모두에게 통용되는 선(도덕)을 실천하였으며, 타인에게도 권장함으로써 생활문화 안에서 민중적 도교신앙을 깊게 하는 경향이 강했다. 민중도교에서는 민중의 주체성이 강한 민중적 도덕 실천을 강조하는 《공과격(功過格)》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민중사회에 밀착된 신도교 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산둥[山東]의 유덕인(劉德仁)은 <진대도교(眞大道敎)>를 창시하였는데, 교단의 교법에서는 하늘에 대한 기념(祈念)을 통해서 훈주사음을 금했으며, 충효 등 일상윤리의 견지가 설파되었다. 뒤에 가장 유력한 도교 교단이 된 <전진교(全眞敎)>는 왕중양(王重陽)에 의해서 창시되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유불도 삼교동원(儒佛道三敎同源)의 입장을 취하고, 《반야심경(般若心經)》 《효경(孝經)》 《도덕경》 《청정경(淸淨經)》 등을 경전으로 삼아 읽었으며, 부주(符呪) 등의 술을 물리치고,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신선설에 의하지 않는, 오직 내외 양면의 수행(自利利他의 眞功과 眞行의 실천)을 주장했다. 또 서민의 도덕의식의 고양(高揚)에 의해서, 일상 윤리의 실천이 종교화된 것으로 선서(善書)가 있다. 이는 권선(勸善)의 서(선행을 권고하는 책)이며, 서민적 도덕의 기초 위에 도교신앙과 불교사상에 의거해서 서민의 생활윤리를 설파하는 민중도덕서이다. 대표적인 선서인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이 강남의 하층 독서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던 것도 이 무렵이다. 송대 이후의 신도교 교단은 용호산의 정일교(天師道가 正一敎로 불리게 된 것은 元代부터이다) 등 구(舊)도교 교단과 함께 명조 이후, 왕조에 따라서 보다 강하게 관리되었다. 원의 세조(世祖)는, 강남의 도교는 정일교에, 화베이의 도교는 전진교에 그 관리권을 주었으며, 도첩(度牒)의 발급과 지방의 도관(道官)의 임명권도 부여했다. 명조에서는 예부(禮部)에 도록사(道錄司)를 두고, 정일(正一)·전진(全眞)으로 나누어서 관리했다. 다시 용호산에다 정일진인 이하의 도관을 두었고, 모산·태화산(太和山) 등에도 도관을 두었다. 원말(元末)부터 정일교와 왕조의 결합이 강화되었고, 특히 명초에는 정일교의 부참(符讖)이 명조와 정일교의 연결을 밀접하게 했다. 이리하여 명조는 정일교 교단을 중심으로 도교계를 관리했다. 또 명의 영종(英宗)은 1445년 《정통도장(正統道藏)》을, 신종(神宗)은 1601년에 《만력속도장(萬曆續道藏)》을 편집케 했다. 이것이 현재 널리 행해지고 있는 도장(道藏)이다. 왕조의 관리하에서 불·도 교단은 그 활력을 잃었고, 그 위에 15세기 후반부터 재정 보전(補塡)을 위하여 승(僧)·도(道)의 매첩(賣牒)을 단행했으므로 승·도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었고, 민간의 종교 결사가 많이 생겨났다. 청조는 명조의 정책을 답습해서 불·도 양교 및 민간의 종교결사의 관리·단속을 엄중히 했으며, 정일천사(正一天師)의 관품(官品)을 낮추었다.



현황
청말로부터 5·4문화운동 시기에 걸쳐서 미신과 구종교의 배제운동이 높아졌다. 중국국민당은 1928년에 <신사존폐표준(神祠存廢標準)>을 발표하고 미신적 신사(神祠)를 배제했다. 이 정책은 현대의 타이완에도 계승되고 있다. 한편, 중국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시하는 입장에서 도교·유교·불교를 배척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모든 종교가 배제되었고, 문화대혁명에 의해서 많은 문헌 및 사적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백운관(白雲觀) 등 각지의 대표적 도관이 부활되고 있다.



경전
본래 도교의 경전류에는, 옛날에는 후한의 태평도의 《태평경(太平經)》, 오두미도의 《노자》 또는 육조 초기의 《상청경(上淸經)》과 《영보경》이 있었지만 이것들과는 별도로 각 교단이나 결사에 전해진 신으로부터 전해졌다고 하는 경전과, 부적·신도(神圖) 등 다종다양한 것이 있었다. 갈홍의 《포박자》 안에는 4세기 초기의 경전류의 목록이 있고, 초기 경전류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도교 경전에 하나의 분류 기준을 만든 것이 육수정이며, 그 삼동설(三洞說)에 따라서 《상청경》은 <동진부(洞眞部)>에, 《영보경》은 <동현부(洞玄部)>로, 《삼황경(三皇經)》은 <동신부(洞神部)>로 나누어졌다. 그 뒤 6세기 전반에 <사보(四輔)>의 사고방식이 성립되고, 동현(洞玄)을 보좌하는 경전으로서 <태현부(太玄部)>, 동진(洞眞)을 보좌하는 <태평부>, 동신(洞神)을 보좌하는 <태청부(太淸部)>, 삼동 모두를 보좌하는 <정일부(正一部)>의 각 부가 부가되어, <삼동사보(三洞四輔)> 현재의 도장 분류가 확립되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태현부는 《노자》를 중심으로 하는 것, 태평부는 《태평경》, 태청부는 연금술 관계, 정일부는 오두미도(천사도)의 계통에 속하는 경전이다.



한국의 도교
중국에서 성립된 도교가 한국에 전래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624년(영류왕 7) 오두미교가 고구려에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전해져 주로 왕가에서 신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1110년(예종 5) 송나라의 도사 2명이 들어와 복원궁(福源宮)을 세우고 제자를 택하여 서도(書道)를 가르친 것이 그 시초이다. 복원궁은 나라에서 마련한 도관으로 재초(齋醮)의 장소였고 우류(羽流;道敎徒)들이 머물렀다. 조선시대에는 소격서(昭格署)가 설치되어 고려 때의 재초소가 합쳐졌고, 여기서 병이나 재난을 막고 국가안태를 기원하는 초제를 지냈다. 이와 같은 도교는 국가의 제례를 위한 조정기구(朝廷機構)의 하나였고 한 왕조에서도 국왕의 신봉 여부에 따라 흥쇠를 반복하였다. 민간도교는 일찍이 고대사회에 전파되어 민중 사이에 유행한 성상(星相)·복서(卜筮)·점험(占驗)·수선(修仙) 등의 신앙과 그 맥을 같이 하며, 세시적(歲時的)도교로서 수성(壽星)·선녀(仙女)·직일신장(直日神將)의 그림, 갈(葛)·주(周) 두 장군의 문배(門排), 단정파의 장생불사에서 유래한 민간장생법 등의 신앙적 행위를 들 수 있다. 이론적 도교사상은 선파(仙派)·칠현(七賢)·청담가(淸談家)·단학파(丹學派)라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연구되었는데 대표적 인물은 신라의 최승우(崔承祐)·김가기 (金可紀)·최치원(崔致遠), 고려의 강감찬(姜邯贊)·한유한(韓惟漢)·이약곽(李若郭), 조선의 조여적(趙汝籍)·남추·김시습(金時習) 등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에는 불교·유교의 교지를 융합하고 대중을 교도로 삼은 결사적 민중도교가 속출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중국의 민중도교인 일관도(一貫道)가 전해져 그 분파인 보제불교(普濟佛敎)와 함께 포교되어 왔다. 오늘날의 도교는 사회 표면에 뚜렷이 부각되지 않고 있으나 민간신앙 속에 뿌리가 이어져 하나의 토속종교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도법과 도교의례


도법(道法)

도법은 도술(道術)의 사(士 ; 道士)의 <행법(行法)>, 즉 수행법(修行法)과 교단(敎團)의 <경참(經懺)> <부록> 및 <재초(齋醮)>, 즉 제사의 법을 포함한다. 도법의 <과범위의(科範威儀)>, 즉 규칙·의례를 <과의(科儀)>라고 부른다. 과의 중에서도 주요한 것은 <재초과의>이다. 각종 도법은 <무술(巫術)> 및 <방기(方技)> <수술(數術)> 계(系)의 도술에서 성장하고 있다. 도술적 행법의 대표적인 것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① 부해(符劾 ; 부적에 의한 주술)·금주(禁呪 ; 주술)·역사귀신(役使鬼神 ; 귀신을 구사한다)·금가요병(禁架療病 ; 邪惡을 統制하는 治病)·삼충(三蟲 ; 三尸, 뱃속의 도깨비 같은 존재) 등.
② 천문(天文)·별점[星占]·풍각점후(風角占候 ; 風占)·은둔(隱遁)·변형(變形)·상요(祥妖 ; 吉凶)·재이(災異)의 참위(讖緯 ; 예언) 등.
③ 벽곡(·穀 ; 穀物을 안 먹음)·복이(服餌 ; 仙藥을 복용)·황야(黃冶 ; 鍊金術)·금단(金丹 ; 最上의 약)·안마(按摩)·도인(道引 ; 柔軟체조)·우보(禹步 ; 步行法)·복기(服氣)·조식(調息)·태식(胎息 ; 以上은 호흡법)·좌망(坐芒 ; 無我의 경지에서 道와 一體가 된다)·존사(存思 ; 정신통일)·수일(守一 ; 우주의 根源과 一體가 되는 법)·음도방중(陰道房中 ; 養生術로서의 房中法) 등.
①②는 무술(巫術)·수술계(數術系)의 도술이고, 그 도술 터득을 위한 행법이다. ③은 방기(方技) 가운데 <신선> <방중(房中)> 계(系)의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하는 행법인데, 여기에다 의경(醫經)·경방계(經方系)의 기술(技術)을 부차적으로 합쳐 여러 행법이 종합되어서 <양생법>이 생겨났다. 금단(金丹)에는, 단사(丹砂)로부터 황금을 화성(化成)해서 복이하는 법(外科)과, 금단 화성의 과정을 수행(修行)의 내용으로 삼고 의경 이론 등을 하나로 합하여 신체를 내정(內鼎 ; 부뚜막)에 견줌으로써 정(精)·신(神)·기(氣)를 안에서부터 연단(鍊丹)하는 법(內丹) 등이 있다.





도교의례(道敎儀禮)

도교 교파의 성장과 함께 경법·참법(懺法)·부록·재초 등의 도법이 성립했다.
경법(經法)·참법(懺法) 경(經)·참(懺)의 송습(誦習)을 위한 수련.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따르면, 수행의 단계에 따라서 오천문록(五千文·)·동현록(洞玄·)·상청록(上淸·) 등이 있으며,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 이하의 각 경전의 송습종료(誦習終了)의 자격 증서인 <경록(經·)>이 스승에게서부터 제자에게 주어진다. 경록은 후세에 정일파(正一派)의 경록·첩록(牒·), 전진교(全眞敎)의 계첩(戒牒) 등이 되었다. 참법은 참회의 법이란 뜻이다. 참문을 신 앞에서 꿇어앉아 외는 법, 즉 <궤참(·懺)>과, 천존(天尊)·성호(聖號)를 예배하고 참회멸죄(懺悔滅罪)를 간구하는 <예참(禮懺)>이 있다. <재초과의>에서는 경문·참문(懺文)을 소리내어서 읽게 된다.
부록(符·) <부(符)>와 <녹(·)>은 글자의 뜻은 같으며, 모두 신의 이름으로 내려주게 되는 문서이다. 부에는 <호부(護符)>와 <진택부(鎭宅符)>처럼 부해(符劾)·주부(呪符)의 효험(效驗)을 지니는 천(天 ; 星辰)과 귀(鬼)·신(神)의 문자·도문(圖文)이 기록된 부적이 많다. 수법(修法)의 수준을 표시하는 증서 <녹(·)>과 <부명(符命)> <참언(讖言)>이 기록된 문서를 모두 부록이라고 일컫는 경우도 있다. 또 부가 섞인 녹도 부록이라 한다. 하늘이나 신이 내려주는 <부명>을 기록한 특별문서를 <천서(天書)>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재초(齋醮) <재(齋)>란 재계를 이르는 말이다. <초>는 제(祭)와 같은 뜻이다. 공희(供犧)만을 초(醮)라고 일컫는 경우도 있다. 제초(祭醮)의 의례(儀禮)에서는, 우선 재의(齋儀)하고 나서 초의(醮儀)가 행해지므로 <재초(齋醮)>라고 병칭되는 일이 많다. 재초를 지낼 때, 태을(太乙)·오성(五星)·북두(北斗) 등 하늘의 별과 천지산천(天地山川) 등의 신을 제사지낼 때, 희생을 바치고 상장(上章)·축문(祝文)을 아뢴다. 축문·상장은 유교의 제례규칙 속에 정해져 있는데, 도교의 제초의례 속에도 규정되어 있다. 상장·축문·참문은 도장경전(道藏經典) 가운데에 거둬들여져 있는데, 청대 《가례대성(家禮大成)》에는 서민적 유교의 축문이 집록(集錄)되어 있고, 민간에 유통된 《만법귀종(萬法歸宗)》에는 도사가 재초를 할 때에 외우는 상장·축문이 집록되어 있다. 제초행사는 교파나 교회도교가 행하는 경우와, 촌진(村鎭 ; 취락)과 방회(會結 ; 社集團)가 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후자에서는 초주(醮主)·노주(爐主)가 도사에 대해 베푸는 것 또는 공희(供犧) 기타의 경비를 부담하며, 희대(臺)를 마련하여 희극(劇)을 구경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오늘날 타이완 등지에서 벌이고 있는 재초의례의 대표적인 것은 일천초(一天醮 ; 하루로 끝내는 祭醮)·삼천초(三天醮)·오천초 등인데, 이천초·칠천초도 있다.





도교의 신들

유교의 제상례(祭喪禮)에 나오는 신들에 대응하는 민간생활문화의 신들과, 불교 등 외래종교의 영향에서 오는 여러 신들이 도교의 신들이다. 민간의 신들 중에는 도가(道家) 및 신선성조(神仙聖祖)로부터 온 신들, 생활문화 본래의 신들, 즉 농촌생활·양생의료(養生醫療)관계·길드적 생활의 신들, 푸젠[福建] 등 특수지역문화(뒤에 타이완·동남아시아로 넓혀짐) 등의 신들이 있다. 민간신들이라 하나, 종사(宗祠)관계만은 유교적 모습을 유지하며 존재하고 있다.
민간생활문화의 신들의 대부분은 세시(歲時) 연중행사의 신들이 되고, 또한 《왕갑기(王匣記 ; 道藏本과 民間本 등에 있음)》나 민간의 <제신성탄일표(諸神聖誕日表)> 속에 표시되어 있다. 그 신들의 도상(圖像)은 <연화(年畵 ; 新年에 가옥안팎에 붙이는 吉祥을 빌기 위한 木刻版畵)> 속에서 발견된다.
관제(關帝) 촉한(蜀漢)의 무장 관우(關羽)가 신격화된 것. 무신(武神)이 된 것은 8세기 말 무렵부터였다. 9세기 초에는 가람신(伽藍神)이 되기도 했는데, 송대에는 도교신앙의 무신(武神)으로서의 지위가 높아졌고, 왕조의 제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 민간신앙에서는 재신(財神)으로서 제사지냈다. 명말에는 관성제군(關聖帝君)의 호(號)가 주어졌고, 민중도교의 신으로서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한국·일본 등 각 지방 중국인의 관제묘(關帝廟) 등 사묘(寺廟)에서 제사지내고 있다.
낭낭(娘娘) 도교의 여신.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비롯하여 다수의 여신이 있다. 그 공덕과 은혜를 믿고 신앙된다. 송자낭낭(送子娘娘 ; 자식을 줌)·자손낭낭(자손번영)·두진낭낭(痘疹娘娘 ; 천연두를 고쳐줌)·최생낭낭(催生娘娘 ; 출산을 촉진)·안광낭낭(眼光娘娘 ; 눈병을 고쳐줌) 등이 있다.
동악대제(東岳大帝) 유교의 예(禮)에서는 오악(五岳)은 제사의 대상이고, 오악의 제1인 태산은 한(漢)나라 때에 와서 민간에서 태산부군(泰山府君 ; 太山府 君)이라 불리었다. 당나라 때에는 천제왕(天齊王)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태산부군은 천제의 손자이며, 사람의 혼백(마음과 육체)을 가져오게 하여 생명의 장단(長短)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신앙되었다.
마조(·祖) 푸젠의 퓨텐현(田縣) 임씨(林氏)의 딸. 태어날 때부터 신령(神靈)을 나타냈으며, 사람의 화복을 예언했다. 관음(觀音)신앙이 배를 타고 다니는 장사치들 사이에서 임씨의 딸 신앙과 합체(合體)됨으로써, 해난구조(海難救助)의 신이 되었다. 오대민국(五代國) 때 시작되어, 송·원시대의 해상무역의 번성과 함께 항해신으로 정착했다.
문신(門神) 만귀(萬鬼)가 드나드는 귀문(鬼門)에는 신도(神·)·울루(鬱壘)의 문지기가 있어서 중귀(衆鬼)를 감찰·제어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일반 민간의 문신이 되었다.
문재신(文財神) 은(殷)의 주왕(紂王)의 충신인 비간(比干)이 신격화된 것. 민중도교신앙에서 관제의 무재신(武財神)과는 대조적으로 문재신으로서 제사지낸다.
문창제군(文昌帝君) 북두칠성의 제1성 이외의 6성을 문창부(府)라 한다. 사람의 운명을 관장한다. 과거(科擧)를 보는 사인(士人)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또, 서점·붓가게 등의 길드신이 되기도 한다.
북두진군(北斗眞君) 북두칠성이 신격화된 것. 7성에다 2성을 합쳐서 북두구궁(北斗九宮)의 성군(星君)을 9성이라고 일컬으면서 신앙하는 일이 화난[華南]에서 동남아시아지역에 걸쳐 특히 성행되고 있다. 북두에 대비(對比)하여 남두육성(南斗六星 ; 司命·司祿 등)도 신앙되고 있다.
삼관대제(三官大帝) 오두미도의 <삼관수서(三官手書 ; 3官, 즉 天地水의 3神에게 上奏하는 참회문)>의 삼관에서 시작된다. 천지에다 물을 더하는 것은, 인도·티베트 등 서쪽으로부터의 영향이 있기 때문인 듯하며, 육조시대에 상·중·하 삼원(三元) 및 불교신앙과 결부되어 상원천관(上元天官)·중원지관(中元地官)·하원수관(下元水官)이 되었는데, 각각 상원(1월 15일)·중원(7월 15일)·하원(10월 15일)에 생겨났다고 하여 그 날이 제삿날이 되었다.
삼시(三尸) 한(漢)나라 때 의방(醫方)에서는 뱃속의 벌레[蟯蟲]를 없애는 얘기가 설명되었다. 한대의 위서가(緯書家)는 요(蟯)를 인간의 뱃속의 도깨비와 두억시니(사나운 귀신의 하나)의 일종이라고 하여 그것을 삼충·삼시라고 불렀고, 천문(天文)·역보(曆譜)·잡점(雜占)의 사상을 혼합해서 경신(庚申)의 날에 삼충삼시는 하늘로 올라가서 인간의 잘못을 신에게 고한다는 설을 주장했다. 이 위서가의 설은 갈홍에 의하여 도교신앙 속에 도입되었다.
서왕모(西王母) 곤륜산(崑崙山)의 왕모(王母)인데, 전국시대의 곤륜산 신선설 중에서 신선화(神仙化)되었다. 전한 말에는 여선(女仙)으로서 신앙의 객체가 되고, 후한시대에는 태산신앙(泰山信仰)인 동태산(東太山)에 배우(配偶)하는 서왕모가 되어, 도교의 신이 되었다.
성황(城隍) 성곽이 있는 도시의 수호신. 토지신의 으뜸이 되고, 현(縣)성황의 총괄신은 도성황(都城隍)으로서 신앙되었다. 육조시대에 시작되어 송나라 때에는 전국적으로 민중신앙으로서 확산되었다.
시왕(十王) 명계(冥界)의 십전(十殿)의 명왕. 불교의 명계와 중국 전통사상의 것이 모아져서 당나라 말 5대 무렵에 시왕(閻羅王·轉輪王·五官王·泰山王 등)이 되었다.
여조(呂祖) 당나라 때의 신선(神仙)으로 전해졌으나, 사실은 송초(宋初) 무렵의 도사였다. 자(字)는 동빈(洞賓), 호는 순양(純陽). 전진교(全眞敎) 교단에 의해서 종조(宗祖)의 한 사람이 되었고, 원대(元代)에는 부우제군(孚佑帝君)이라는 호가 주어졌다.
오현재신(五顯財神) 은(殷)의 주왕(紂王)의 신하 조현단(趙玄壇)을 중심으로 4신을 합쳐서 오현재신이라 한다. 사방오로(四方五路)의 재물을 모으는 신으로서 오로재신이라고도 한다. 송대 무렵부터 이 신앙이 굳어졌고, <오성(五聖)> <오통(五通)>이라는 신명도 쓰였다.
옥황상제(玉皇上帝) 천(天)·상제(上帝)·천제(天帝)가 도교신화한 것. 옥황이라는 이름은 당(唐)나라 때 시작되었는데, 가장 높은 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의 아칭(雅稱)인 <옥제(玉帝)>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육조시대의 상청파(上淸派)의 신통보(神統譜) 《진령위업도(眞靈位業圖)》 가운데의 최고신이 원시천존인 데 비하여, 삼교합일(三敎合一)의 민중적 신앙으로 성장하다가 송나라 때 와서는 최고신으로 확정되고, 교회도교(敎會道敎)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용왕(龍王) 한나라 때에는 천둥과 번개[雷電]·구름비[雲雨]와 관련되어서 용의 설화가 전해졌다. 거기에 불교의 팔대(八大 ; 十大) 용왕설이 들어가, 당(唐)나라 이래 지금까지 내려오는 중국 설화와 결부되어서 민간신앙의 신이 되었다. 송나라 때는 천하의 오룡(五龍 ; 靑·赤·黃·白·黑)신에게 봉호(封號)가 주어져, 각 지역에 있어서의 한발기우(旱魃祈雨)나 수해(水害)막이신으로 정착했다. 저장강[浙江]의 금룡사대왕(金龍四大王)이 그 한 예이다.
원시천존(原始天尊) 유교에서 말하는 천신(天神)·지기(地祇)의 천신이 도교신화한 것으로, 도교에서 가장 높은 신이다. 육조시대의 상청파 사이에서 이 신의 이름이 쓰여졌고, 그것이 당나라 때부터 도교 각파를 통해서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 뒤 옥청원시천존(玉淸元始天尊)·상청영보천존(上淸靈寶天尊)·태청도덕천존(太淸道德天尊)의 3신을 합쳐서 <삼청(三淸)>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유맹장(劉猛將) 메뚜기의 피해로부터 농작물을 지키는 신. 송나라 무렵부터 일어났는데, 화중지역에서의 이 신의 축제가 유명하다.
자고(紫姑)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의 자사(刺史)의 처가 첩인 하미(何媚 ; 紫姑)를 질투한 나머지, 측간(厠間) 안에서 그녀를 암살하자, 천제는 이를 가엾게 여겨 측신(厠神)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며, 세상에선 <삼고(三姑)>라고 부른다. 삼고는 점복을 잘한다.
태상노군(太上老君) 황제노자신선사상(皇帝老子神仙思想)에서 노자의 신격화가 진행되어, 후한대에 태상노군이 되었다. 구겸지의 신천사도에서 가장 높은 신이다.
토지신(土地神) 원래 유교의 사직(社稷 ; 토지와 五穀의 神)의 예(禮)에 대응하는 민간, 특히 농촌의 토지[農作地] 및 농민(생활)을 수호하는 신이었다. 한나라 때에 이미 사공(社公)이라는 이름이 쓰여졌다. 그러나 중국 촌락의 토지신에서는 다른 나라 민간신앙의 씨신진수적(氏神鎭守的) 성격은 볼 수가 없다. 중국에서는 사적(社的) 신앙과 종사적(宗祠的) 신앙이 민간신앙 가운데서도 엄중하게 구별되어 있다. 사공토지신(社公土地神)에는 한나라 때부터 이사(里社)·촌락수호신의 면(面 ; 後世, 福德正神의 이름이 됨)과 이사민(里社民)의 관리·감찰신의 면이 병존했다. 후자는 그 토지민의 명계(冥界)를 관장하는 신이 되기도 하고, 명계신 태산(太山)의 하료(下僚)가 되었다.
풍도신(·都神) 육조시대 상청파(上淸派) 사이에서 만들어진 도교의 지옥신이다.
현천상제(玄天上帝) 북방 하늘의 상제. 하늘의 중심인 북극성을 신격화한 것. 북극성신앙은 주(周)나라에서 보였지만, 도교의 신으로서 정착하게 된 것은 당(唐)나라 말 이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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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가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한 유파로 그 계통을 이은

일군의 정치 사상가에 대한 총칭입니다. 특히 유가 사상과의 대립 ·항쟁

과정에서 발달하였으며, 전국시대의 전제적 지배를 지향한 군주에게

채용되어, 진·한나라의 통일제국 성립을 뒷받침한 중요한 사상이

되었습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신상필벌의 질서 있는 정치를 주장한 장점이 있고, 오로지 형법에

의거하여 때로는 육친의 정까지도 저버린 것이 단점이라는 평도 있습니다.

위나라의 문후를 받들어 부국강병의 실적을 올린 이회, 진나라의 재상으로

국내개혁을 달성한 상앙, 저서를 통하여 진시황을 감탄시킨 한비,

진 통일제국의 기초를 구축한 이사, 전한의 중앙집권화에 힘쓴 조조,

무제 때의 유능한 경제관료 상홍양 등이 법가의 대표자들입니다.

현대에 와서 중국은 유가들이 노예주인 귀족층의 세습적 권리를 옹호한 것

에 대하여, 법가들은 새로운 봉건 지주계급을 대표하여 국내통일에 공헌하

였다는 평가를 하고있습니다.

그리고 한비자는 중국 전국시대 말기 한나라의 공자로 법치주의를 주창한

한비와 그 일파의 논저로서 55편 20책에 이르는 대저로, 원래

《한자(韓子)》라 불리던 것을 후에 당나라의 한유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

에 혼동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되어 왔습니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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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공자의 유교사상에 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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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여러가지사상이 있다

공자든 우리나라의 이성계든 비슷하지만 조금의 차이는 있다

우리나라 유교는 부모를 섬기는 것 임금을 섬기는 것 등이지만 공자는 스승의 섬기는 것 등 아주 조금의 차이가 있다

내가 알기로는 이렇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것밖에...

이거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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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공자의 유교사상에 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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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사상


儒敎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

(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인 BC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

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또한 한자문화권인 한국·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전해져서 큰 영향을 주었다. 유학(儒學)과 유교는 서로 비슷한

말이지만,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학파를 의미하는 유가(儒家)나 학

문을 의미하는 유학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교라는 말은 외래의 불교에

대비시켜 300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듯하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주로 유(儒)·불(佛)·도(道)

3교를 병칭할 경우에 사용되었다.






유가·유학에 대해서 유교라는 말은 교화적(敎化的)인 면

을 중시하여 어느 정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본래가 사

대부(통치자 계급·)의 학(學)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가·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

다. 〔특색〕 유교는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수기(修己)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윤리의 학이다.







그러나 그 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치인(治人)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

한 정치의 학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는 법률이나 형벌로 백성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리와 언행을 통해 백성을 선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먼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이 필수가 된 것이다.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는데, 군자는 치

자(治者)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 반대는 <소인(小人)>인데, 피치자(被治者)인 소인에게는

스스로 수양하는 능력이 없고, 치자(군자)의 교화를 받아야 비로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지덕을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제왕

(帝王)으로서 천하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어 성인이 곧 왕자(王者)라고 하는, 세계

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왕(聖王)>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최고의 성인인 제

왕(성왕)을 정점으로, 사대부는 각기 쌓아올린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제왕을 보익(輔翼)하

고, 제왕이 도덕정치[德治]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의 일체화를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윤리설(倫理說)〕 근본사상은 <인(仁)>이

다. 인은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말하며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사랑에 가깝고

그 실천에는 특히 <충서(忠恕;진심과 배려)>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인은 먼저 부모·형제

등에서부터 점차 다른 사람에게로 미쳐야 하며 <효(孝)>를 다하는 것이 인의 첫째이고,

형제에 대한 <제(悌)>가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인은 이른바 인류애와

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인이 확대되어 서민대중에게 미치면 그것은 <인정(仁政)>이 되

고, 다시 그 인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그 사람은 성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적인

심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이 치정의 원리도 되는 것이다. 인은 원래 사람의 마음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情)으로 흘러서 발로(發露)를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

것을 억제하여 적절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의(義)>이다. <인의(仁義)>를 병칭하는 것은

맹자(孟子)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 유교의 덕목(德目)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예(禮)·

지(智)를 추가해서 <사덕(四德)>이라 부르며 여기에 신(信)을 추가해서 <오상(五常)>이라

고 한다. <예>는 원래 예의범절의 형식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대인관계를 원만하

게 하기 위한 규범·관습이다.








따라서 예의 형식을 배우는 것은 유가에게는 중요한 교과이지

만, 내면적으로 예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실행하는 겸허한 심성을 기르는 일이 필요하

다. <지>는 일반적으로 <덕>과 대조되는 개념이지만, 유교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지식으

로 보지 않고 사물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덕목의 하나로

꼽는다. <신>은 <충신(忠信)>이라고 할 경우 진심을 뜻하는 <충(忠)>이 말로 표현된

것을 뜻하지만, 오상에서 말하는 신은 양자를 합하여 거짓이 없는 마음의 상태와 태도를 말한다. 한편, 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에 서약하는 측면도 있는데, 신과 비








슷한 뜻인 <성(誠)>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길이며, 또한 천지간에 가득찬 정기(正氣)

로서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원리가 되기도 한다. 유교에는 또한 <오륜(五倫)>이 있다. 오

륜은 기본적인 대인관계를 5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변천〕

유교의 역사는 한나라 무제 때 국교화된 것을 중심으로 그 이전인 원시유교와 그 이후로 크

게 나누어지고, 다시 국교화 이후의 유교는 한나라 무제 때부터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 송(宋)나라 초기에서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宋明性理學), 청나라 때(淸朝考證

學)로 3분해서 고찰하는 것이 통례이다.







〈원시유교〉 춘추시대 말기의 난세에 노(魯)나라

에서 태어난 공자는 밖으로는 예를 실행하여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안으로는 인으로써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적·미신적인 하늘의 중압으로부터 사람을 해

방시키고,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폈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공명한 인사들이 그

의 문하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유교교단(儒敎敎團)이 발생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문인(門

人)들은 각지로 분산되어 교세를 넓혀 나갔는데, 이에 자극을 받아 묵가(墨家)·도가(道家)

등의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유가는 가장 유력한 학파로서 백가에 대항하면서, 또는 그 영

향을 받으면서 차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동안에 나타난 사람이 맹자와 순자(荀子)이

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통하여 공자의 윤리설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고, 왕도정치(王

道政治)를 주창하여 공자가 말하는 덕치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순자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는 선(善)해질 수 없다고 하여 예(사회적 규범)를 통한 검속(檢束)을 중시했

고, 아울러 객관적인 교학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서경(書經)》 《시경(詩經)》을 비롯한

오경(五經)은 순자를 전후한 무렵에 모두 갖추어졌는데, 경서의 학습을 필수로 교학의 지침

으로 삼은 것은 순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당훈고학(전통적 유교)〉 유교의 국교화는 BC

136년 오경박사제도(五經博士制度)가 설치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

교는 이미 오경의 학습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 유교는 늘 선왕(先王)의 도(道)를 찬

양하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왕(武王)을 성왕으로 앙모하고, 공자의 가르침의

연원(淵源)은 이들 성왕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오경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선왕의 도를 기록

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보다도 오경을 더 중시하였

다.







그리고 이후의 유교는 난해한 오경을 앞세우고 훈고학[註釋學], 즉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경학(經學)>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국교화한 당초 전한에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입각하여 경문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 한왕조의 출현을 정당화한, 정치색이 짙은 경학이다. 후한에 들어서자

이것과 병행하여 문자가 가진 의미에 유의하는 <고문경학(古文經學)>이 생겨서 훈고학으

로서의 경학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전한·후한 400년간은 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경학

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들어서 노장사상(老

莊思想)과 외래의 불교가 성행하자 유교는 쇠퇴하였고, 경전의 주석에도 노장적 색채가 가

미되었다. 당나라에 들어서자 남북조로 양분되어 있던 경학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오경정

의(五經正義)》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대비하여 경의(經義)를 국가적

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경정의》의 출현으로 경학이 고정되어 유

교가 활력을 잃었으며 이록(利祿)을 위한 학으로 전락해갔다.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철학이었다. 〈송명성리학(신유교)〉 송나라 때에 들어서면서 유

교의 현상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혁신적인 기운이 움텄다. 북송에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朱

熹;朱子)에 의하여 완성된 송학(宋學;朱子學)이 그것인데, 오경을 대신하여 사서(四書)를 존

중하고,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은 <이(理)>이다. 이는 순수지선(純粹至善)이고, 사람은 본성으로서 그 이

를 가지지만(性卽理), 동시에 육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인 기(氣)를 섞게

된다. 사람은 기에 의해서 가지게 되는 자기의 욕망(欲望;人慾)을 억제하고 본성(本性;天理)

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방법으로는 거경(居敬;마음을 純粹專一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

과 궁리(窮理;사물에 대하여 理를 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讀書問學)의 양면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처음에 이단시되었으나 뒤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어 융성하게 되었으

며, 원(元)나라 때에는 전통적 유교를 대신하여 국교가 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나라에 이르자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심학(心學)이 관학화(官學化)하여 주자학보다 활기

를 띠었다. 심즉리(心卽理)를 밝혀 이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마음이 이(理)

라고 하는 철저한 유심주의론(唯心主義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말류(末流)에는 극단으로

치달아서 독서를 멀리하고 경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청조고증학〉 명

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는 양명학의 말류를 비판하고 송·명 나라의 신유교를 공소(空

疎)하다 하여 배척하고 훈고학으로 복귀하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송학(宋學)은 여전히 관

학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학술의 주류는 한학(漢學)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한 때의 고문경

학을 기초로 해서 문자학(文字學)·음운학(音韻學)·역사학·지리학 등 여러 학문을 구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통하여 진리를 구하는 것)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증

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학의 관심은 점차 전한 때의 금문경학으로 옮겨갔다. 정치색이

강했던 금문경학은 청나라 말기의 동란기를 맞아 여러 종류의 개혁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

공하게 되었다. 캉유웨이[康有爲] 등에 의해 제창된 공양학(公羊學)이 바로 그것이다.










〈현

대중국과 유교〉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출현함으로써 성왕[天子]을 정점으

로 하는 유교의 정치학은 존재의의를 상실하였고, 그 윤리설 또한 자유평등을 부르짖는 시

대사조 앞에서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자측에서는 여전히 유교를 온존(溫存)

시키려는 동향이 있었고, 또한 효윤리(孝倫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도덕은 민중들 사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유교비판 풍조는 한층 강해졌다.









특히 문화혁명 이후 전개된 74년의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가장 격렬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이 이러한 정치운동에 이용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

며, 비공운동이 지나간 뒤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孔子廟)가 수복(修複)

되었고 일부에서는 유교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문

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선에서 머무르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서 얼마만큼이라도 현대적 의의

를 찾으려 하는가 하는 것은 이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 한국에 유교사

상이 전래된 시기는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BC 3세기 무렵 위만조

선(衛滿朝鮮)으로부터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되었

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

인다. 초기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체로 고래(古來)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점

차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가치관·생

활양식·법률제도 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가장 먼저 중국문화와 접촉하여 수용, 발전시켰으며, 백제가 해상을 통해 중국

과 교류함으로써 유교 및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지정학적

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

들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

였다. 또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래되어 건국 초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었

으며, 노자의 자연사상도 역시 혼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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