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교회가 분열되어 불편한점

동서 교회가 분열되어 불편한점

작성일 2023.05.2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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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교회가 분열되어 불편한 점이 뭐가 있는지 좀 알려주세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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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속의 동서 교회의 분열에 대한 평가

교회의 분열과 이교

“이교”(離教: schism)란 말은 “하나의 종교 단체가 둘 이상의 별개의 독립된 단체로 갈라지는 현상”이라고 정의되었다.

기원 330년. “그리스와 라틴 그리스도교국 사이의 이교. ··· ‘구 로마’ 대신에 ‘신 로마’ 곧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수도로 세운 일(330년)로 인해 그리스 동방 교회와 라틴 서방 교회간에 경쟁을 하게 할 씨가 심어졌다.”

—「종교 백과 사전」.

기원 330-867년. “콘스탄티노플 주교좌 시초부터 867년의 대이교가 있기까지 교회 내의 이러한 일시적 불화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 544년(323-867년)의 이 기간중 무려 203년 간 콘스탄티노플은 [삼위일체와 관련된 신학상의 논쟁과 형상 숭배 문제를 놓고 로마와] 이교 상태에 있었다.”

—「가톨릭 백과 사전」.

기원 867년. “콘스탄티노플 주교좌는 이른바 포티우스 이교중에 로마에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포티우스가 총대주교직에 등용된 일에 대해 교황 니콜라우스 1세가 이의를 제기하자, ··· 비잔틴 총대주교 포티우스는 승복하지 않았다. ··· 니콜라우스는 ··· 포티우스를 파문하였으며, 그러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한 공의회는 니콜라우스를 파문함으로 응수하였다(867년). 교황좌와 주교좌 사이에 맞붙은 문제는 교회 수위권, 전례, 교직자 규율에 관한 문제였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

기원 1054년. “동서 이교 즉 동방 [정통] 그리스도 교회[와] ···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의 최종 결별을 재촉한 사건.”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

기원 1378-1417년. “서방 [대]이교—서방 그리스도교국이 두 명 그리고 후에는 세 명의 교황 지배[로마, 아비뇽(프랑스), 피사(이탈리아)에 있는 경쟁하는 교황들] 사이에서 분열된 ··· 기간.”—「신 가톨릭 백과 사전」.

기원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관하여, ··· 가톨릭 교회는 대개 이교가 아니라 열교(裂教)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신(神)—신 가톨릭 백과 사전」(Théo—Nouvelle encyclopédie catholique).

기원 1870년. “교황의 ‘무류성’을 주창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구 가톨릭교인’의 이교가 초래되었다.”

—「라 크루아」(파리 일간지, 가톨릭).

1988년: “교황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무시함으로 가톨릭 교회에 이교를 야기하였으며 ··· 프로테스탄트교인을 열교인으로 여기고 교회 일치 운동을 마귀의 일로 보며 ‘근대주의자’ 교회와 화해하기보다는 기어이 파문당하기로 한” 르페브르 대주교로 인한 이교.

—「가톨릭 헤럴드」.

배교—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을 가로막다

그리스도교국의 처음 400년 역사는 매우 중요한 데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어린 시절의 처음 몇 년이—장래 인격의 기초가 놓이는 형성기이므로—중요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국의 처음 몇 세기는 무엇을 밝혀 줍니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한 가지 진리를 생각해 봅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편의주의의 길은 넓고, 올바른 원칙의 길은 좁습니다.—마태 7:13, 14.

그리스도교의 초창기에 그 인기 없는 믿음을 신봉하던 사람들 앞에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었습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원칙 및 성경에 고착하든지, 아니면 당시의 세상과 타협하는 넓고 편안한 길로 이끌려 가든지 해야 하였습니다.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교국의 처음 400년의 역사는 결국 대다수가 어느 길을 선택했는가를 알려 줍니다.

철학의 유혹

역사가 윌 듀랜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이전 [이교] 로마에 널리 퍼져 있던 얼마의 종교 관습과 형식들을 받아들였다. 이교 사제들이 걸치던 영대(領帶)와 그 밖의 제의(祭衣), 정화례에서 사용하는 향과 성수, 제단 앞의 촛불들과 그곳에 계속 켜두는 등불, 성인 숭배, 바실리카 건축, 교회법의 근거로서의 로마 법, 지고의 사제를 뜻하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칭호, 그리고 4세기에는 라틴어[를] ··· 받아들였다.

오래지 않아 로마 장관들보다 오히려 주교들이 여러 도시에서 명령과 권력의 근원이 되었다. 수도 대주교 혹은 대주교들은, 속주 총독들을 밀어내기까지 하지는 않았어도, 그들을 후원하곤 하였다. 그리고 주교 대의원 회의가 속주 의회의 뒤를 이었다. 로마 교회는 로마 국가의 발자취를 따랐다.”—「문명의 이야기: 제3부—카이사르와 그리스도」(The Story of Civilization: Part III—Caesar and Christ).

이와 같이 로마 세계와 타협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교훈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바울은 이와 같이 분명히 교훈하였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리요]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리라 하셨느니라.]”—베드로 후 3:1, 2, 17; 고린도 후 6:14-17; 계시 18:2-5.

이와 같은 분명한 훈계에도 불구하고, 2세기의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로마 종교의 예복을 걸쳐 입었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성경적 기원에서 떨어져나가, 그 대신 이교 로마의 복장과 칭호를 받아들이고 그리스 철학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울프슨 교수는 「그리스도교의 시련」(The Crucible of Chris-tianity)에서, 2세기에 “철학 교육을 받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로 대규모 유입되는 일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그리스인의 지혜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리스 철학과 성경의 가르침 사이에 비슷한 점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울프슨 교수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때때로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인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고, 성경은 직접적 계시를 통해 유대인에게 주신 것이라는 취지로 그들의 생각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계속되는 그의 설명에 의하면, “교부들은 ··· 성경 표현에서 자주 사용된 소박한 언어 이면에 아카데미아, 리케이온, 포이킬레 등[철학 토론의 중심지]에서 만들어 낸 모호한 전문 용어로 표현되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이 숨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태도로 인해 그리스 철학과 용어가 그리스도교국의 가르침, 특히 삼위일체 교리와 영혼불멸 신앙 분야에 침투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울프슨이 기술하는 바와 같이, “교부들은 수많은 철학 용어 가운데서 두 가지 적합한 전문 용어를 찾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삼위일체 각 위의 개체로서 구별되는 실재의 명칭으로 사용할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위들의 공통된 일치성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사용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이성으로 풀 수 없는 불가사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갈라디아와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할 때 그와 같은 타락과 ‘좋은 소식을 변하려 하는 것’의 위험성을 분명히 인식하여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누가 철학[그리스어, 필로소피아스]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갈라디아 1:7-9, 골로새 2:8; 고린도 전 1:22, 23.

부활이 헛것이 되다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는 짧고 한정된 인간 존재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끊임없이 씨름했습니다. 독일의 저술가 게르하르트 헤름은 그의 저서 「켈트족—암흑으로부터 나온 사람들」(The Celts—The People Who Came Out of the Darkness)에서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는, 저승에서의 더 나은 생명이나 재생을 약속하는 것이든 아니면 두 가지를 다 약속하는 것이든 간에, 그 약속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언젠가는 자기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길이다.”

실제로 어느 종교든지,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며 영혼은 죽은 다음에 내세로 가거나 다른 생물로 윤회한다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의 종교들도 거의 모두 그런 신앙을 따릅니다. 20세기 스페인의 탁월한 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는 예수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방식대로 [나사로의 경우와 같은 육체의 부활을 믿었지, [그리스] 플라톤식의 영혼불멸을 믿지 않았다. ··· 정직하게 해석한 책이라면 어느 것을 보더라도 이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우나무노는 “영혼불멸이 ··· 이교 철학의 교의”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고민」[La Agonía Del Cristianismo]) 분명히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교 철학의 교의”는 그리스도교국의 가르침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습니다.—마태 10:28; 요한 5:28, 29; 11:23, 24.

사도들이 죽은 후에 일어난 배교의 주 요인은 그리스 철학의 은밀한 영향력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영혼불멸 가르침 때문에, 죽은 다음에 영혼이 간다고 하는 여러 종류의 처소—천당, 지옥불, 연옥, 낙원, 림보—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사제 계급은 이런 가르침을 이용함으로써, 손쉽게 양떼를 계속 복종시키고 내세를 두려워하게 하여 선물과 헌금을 뜯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국의 구별된 사제 계급은 어떻게 생겨났는가?’하는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요한 8:44; 디모데 전 4:1, 2.

교직자 계급이 형성된 경위

배교의 또 다른 표는 예수와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전도 봉사에 참여하지 않고, 그리스도교국에서 발전한 사제직과 교계 제도에 속한 사람들만 그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태 5:14-16; 로마 10:13-15; 베드로 전 3:15)

1세기 당시, 사도들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 영적 자격을 갖춘 예루살렘의 다른 그리스도인 장로들과 함께 그리스도인 회중을 교훈하고 지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일이 없었습니다.—갈라디아 2:9.

기원 49년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 그리스도인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해결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 기록이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자유로운 토의가 있은 후에 “사도와 장로[프레스비테로이]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하였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은 널리 퍼져 있는 그리스도인 회중을 관리하는 통치 기구로 봉사하였음이 분명합니다.—사도 15:22, 23.

예루살렘의 그 통치 그룹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전체적으로 감독하기 위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마련이었다면, 지방적 수준에서는 각 회중에 어떤 지도 체제가 있었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회중에 감독자들(그리스어, 에피스코포스, “감독”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이피스커플”[episcopal]의 어원)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영적 장로들(프레스비테로이), 곧 그들의 행실과 영성으로 인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칠 자격을 갖춘 남자들이었습니다. (디모데 전 3:1-7; 5:17) 1세기 당시, 그 남자들은 별도의 교직자 계급을 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별되는 복장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구별시켜 준 것은 그들의 영성이었습니다. 실제로, 회중마다 군주제적 일인 통치가 아니라 장로(감독자)의 회가 있었습니다.—사도 20:17; 빌립보 1:1.

에피스코포스(감독자, 관리자)라는 단어가 “주교” 즉 자기 교구 내의 다른 교직자들을 관할하는 사제라는 뜻으로 의미가 바뀐 것은 세월이 흐른 후의 일이었습니다. 스페인의 예수회 수사 베르나르디노 요르카가 이렇게 설명하는 바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주교와 장로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없었으며, 다만 그 단어들의 의미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즉 주교는 감독자에 해당하는 단어였고 장로는 연로자에 해당하는 단어였다. ··· 그러나 두 칭호 사이의 구별이 조금씩 뚜렷해지면서, 주교라는 칭호에 더 중요한 감독자, 안수하여 사제직을 수여하는 최고 사제로서의 권위와 권한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가톨릭 교회사」[His-toria de la Iglesia Católica])

실제로, 주교들은 특히 4세기초부터, 일종의 군주 제도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교계 제도 곧 교직자로 이루어진 지배 계층이 성립되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최고 주교이자 교황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의 여러 교회에서 주교의 지위는 명성과 권력을 지닌 지위, 흔히 상당한 보수를 받는 지위이며, 대개는 각 나라에서 엘리트 지배 계급으로 인정받는 지위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교만하고 높여진 지위는, 그리스도와 초기 그리스도인 회중 장로 곧 감독자들의 인도 아래 있던 조직의 단순성과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또한 베드로와 바티칸의 호화로운 자리에서 다스리는 소위 그의 후계자들을 비교할 때, 어떤 현격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까?—누가 9:58; 베드로 전 5:1-3.

교황의 권력과 명성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로부터 지시를 받았던 초기 회중들 중에는 로마 회중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그리스도교 진리가 이른 것은 아마도 기원 33년 오순절이 지나고 나서 얼마 후였을 것입니다. (사도 2:10)

당시의 다른 그리스도인 회중들과 마찬가지로, 그 회중에는 감독자의 회로 봉사하는 장로들이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수위권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로마 회중의 초기 감독자들 중에는 동 시대 사람들로부터 주교 혹은 교황으로 여김을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당시에는 아직 로마의 군주제적 주교직이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군주제적 일인 주교직이 시작된 때를 정확하게 지적하기는 어렵습니다. 증거가 알려 주는 바에 따르면 2세기에 발전되기 시작하였습니다.—로마 16:3-16; 빌립보 1:1.

처음 두 세기 중에는 “교황”(아버지를 뜻하는 그리스어 파파스에서 유래)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예수회 수사였던 마이클 월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마 주교가 맨 처음 ‘교황’으로 불린 것은 3세기 무렵인 듯하다. 교황 칼리스투스[갈리스도]에게 그 칭호가 주어졌다. ··· 5세기 말엽에는 ‘교황’ 칭호가 일반적으로 로마 주교를 의미하였고 다른 누구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11세기에 이르러서야 교황은 비로소 그 칭호를 자기에게만 사용할 것을 주장할 수 있었다.”—「삽화로 살펴보는 교황의 역사」(An Illustrated History of the Popes).

교황의 권위를 강화한 초기의 로마 주교 중 한 사람은 교황 레오 1세(교황 재위, 기원 440-461년)였습니다. 마이클 월시는 더 나아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레오 1세는 한때 이교 칭호였던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자신의 칭호로 사용하였다. 이 칭호는 오늘날까지도 교황이 사용하는 것인데, 4세기 말경까지는 로마 황제가 지녔던 것이다.”

레오 1세는 마태 복음 16:18, 19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을 근거로 그런 일을 하였습니다. 레오 1세는 “성 베드로가 사도들 중에 첫째 사도였으므로, 성 베드로의 교회도 그와 일치하게 교회들 중에서 수위권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람의 종교」[Man’s Religions])

레오 1세는 이 조치를 통해, 황제는 동쪽의 콘스탄티노플에서 세속 권력을 쥐고 있고 자신은 서쪽의 로마에서 영적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 권력은 기원 800년에 교황 레오 3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롤루스(샤를마뉴) 황제를 대관시켰을 때 더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1929년 이래 세속 정부들은 로마 교황을 독립된 주권 국가인 바티칸 시국의 통치자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다른 종교 조직과 달리, 세계 정부들에 외교 사절 곧 교황 대사를 파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 18:36)

교황은 여러 가지 칭호로 영예를 받는데, 그중의 일부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도들의 으뜸인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보편 교회의 최상 주교, 서방 교회의 총주교, 이탈리아의 수석 주교, 바티칸 시국의 주권자 등이 있습니다.

교황은 거창한 의례와 의식으로 예우를 받습니다. 교황은 국가 원수에게 부여되는 영예를 받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초대 교황이자 로마 주교라는 베드로의 경우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 그 발 앞에 엎드렸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냈는가 유의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니라.]”—사도 10:25, 26; 마태 23:8-12.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배교한 교회는 어떻게 초기 몇 세기 동안에 그처럼 큰 권력과 명성을 획득하였습니까? 그리스도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단순함과 겸손함이 어떻게 그리스도교국의 교만과 허례로 바뀌었습니까?

그리스도교국의 기초

로마 제국에서 이 새로운 종교가 전환점을 맞이한 때는 기원 313년, 즉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로 소위 개종을 했다는 시기였습니다. 어떻게 이 개종이 있게 되었습니까?

콘스탄티누스는 기원 306년에 아버지를 계승하였으며, 마침내 리키니우스와 함께 로마 제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과 신의 보호에 대한 자신의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기원 312년에 로마 근처 밀비안 다리로 전투를 벌이러 가기 전,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그리스도교” 결합 문자—그리스도라는 칭호를 희랍어로 쓸 때 처음 두 문자인 그리스어 문자 키와 로—를 병사들의 방패에 그려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이 ‘성스러운 호부(護符)’를 가지고 적인 막센티우스를 무찔렀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지 얼마 안 되어, 콘스탄티누스는 자기가 신자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약 24년 후인 죽기 직전까지도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어 문자] 키-로[그림—그리스 문자]를 표장으로 택함”으로써, 제국 내에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로부터 지원을 얻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키-로는 이교와 그리스도교 양쪽에서 이미 합자[글자들을 합하여 한 글자를 만든 것]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그리스도교의 시련」, 아널드 토인비 편.

그 결과 그리스도교국의 기초가 놓였습니다. 영국의 방송인 맬컴 머거리지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국의 종말」(The End of Christendom)에서 “그리스도교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썼습니다.

그렇지만, 머거리지는 이와 같은 예리한 논평도 덧붙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교국이 시작되기도 전에 친히 그것을 멸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은 그분의 말씀 전체를 통틀어 가장 널리 영향을 미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적·정치적 통치자들이 흔히 가장 무시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요한 18:36.

콘스탄티누스의 후원으로, 그리스도교국의 종교는 로마의 공식 국교가 되었습니다. 종교학 교수, 일레인 페이걸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때 체포, 고문, 처형의 표적이던 그리스도교 주교들이 이제는 세금을 면제받고, 황실 금고로부터 선물을 받고, 명성을 누리며, 심지어 법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하였다. 교회는 새로이 부와 권력과 탁월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주교들은 황제의 벗, 로마 세계의 벗이 된 것입니다.—야고보 4:4.

콘스탄티누스와 이단 그리고 정통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습니까? 교리 면으로 분열되어 있던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에 그가 황제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국의 연합을 원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어를 말하는 주교들과 라틴어를 말하는 주교들 사이에는 “예수로 화신한 ‘말씀’ 혹은 ‘하나님’의 ‘아들’과 당시 ‘아버지’—그분의 이름 야훼는 대체로 잊혀져 있었음—로 불리던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일고 있었습니다. (「컬럼비아 세계사」[The Columbia History of the World])

일부 사람들은 성경에서 뒷받침하는 견해, 그리스도 즉 로고스는 창조된 분이고 따라서 아버지께 종속된다는 견해를 옹호했습니다. (마태 24:36; 요한 14:28; 고린도 전 15:25-28) 그중에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가 있었습니다.

사실상 신학 교수인 R. P. C. 핸슨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4세기에] 아리우스 논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동방 교회나 서방 교회 어느 쪽에도, 어떤 의미에서든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신학자가 아무도 없었다.”—「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 교리 탐구」(The Search for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종속된다는 견해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한술 더 떠서 예수를 “하나님의 화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나 핸슨 교수는 문제의 시기(4세기)가, “합의되고 정착된 [삼위일체] 정통 교리를 규제받지 않은 이단[아리우스주의]의 공격으로부터 변호한 역사를 담고 있지 않다”고 기술합니다.

“당시는 주된 논쟁의 대상이 된 그 문제에 관한 정통 교리가 아직 없었”습니다. 핸슨 교수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가 제각기 자기들의 견해를 지지해 주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저마다 상대방을 비정통이고, 전통에 어긋나며, 비성경적인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 신학 논쟁으로 인해 종교계는 철저하게 분열되었습니다.—요한 20:17.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영토 내의 연합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기원 325년에, 신도시 콘스탄티노플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제국 동쪽의 그리스어를 말하는 영역에 위치한 니케아에서 주교들의 공의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참석한 주교는 250명 내지 318명 가량으로, 전체 숫자에 비할 때 단지 소수에 불과했으며, 참석자 대부분은 그리스어를 말하는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교황 실베스터 1세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격렬한 논쟁 후에, 대표성이 결여된 그 공의회는 삼위일체 사상으로 심하게 편향된 니케아 신경을 답변확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리 논쟁을 가라앉히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신학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할을 분명히 밝히지 못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끝내 일치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더 많은 공의회의 소집, 여러 황제의 권위, 유형을 보내는 방법 등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신학 쪽에는 승리였고 성경에 고착하는 사람들에게는 패배였습니다.—로마 3:3, 4.

여러 세기에 걸쳐, 삼위일체 가르침이 초래한 한 가지 결과는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여호와를 하나님이 곧 그리스도라는 그리스도교국 신학의 진창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논리상 그 신학의 다음 결론은, 만약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화신이라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당연히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마리아를 여러 가지 형태로 경배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를 낳은 비천한 생모로서의 역할 외에 마리아의 중요한 역할에 관해 알려 주는 구절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하였습니다. (누가 1:26-38, 46-56)

여러 세기에 걸쳐서 하나님의 어머니 가르침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발전되고 장식되었으며, 그 결과 많은 가톨릭교인은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보다 마리아를 훨씬 더 열심히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국의 분열

배교의 또 다른 특징은 분열과 분파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이런 말로 분명히 교훈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배교와 분열은 곧 뿌리를 내렸습니다.—사도 20:29, 30; 고린도 전 1:10.

사도들이 죽은 지 몇십 년밖에 안 되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미 분열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윌 듀랜트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켈수스[2세기 그리스도교의 반대자] 자신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많은 분파로 갈라져 있어서, 사람마다 자기 당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기원] 187년경에 이레나에우스는 그리스도교의 변형을 스무 가지나 지적했으며, [기원] 384년경에 에피파니우스는 여든 가지를 들었다.”—「문명의 이야기: 제3부—카이사르와 그리스도」.

콘스탄티누스는 오늘날의 터키에 거대한 새 수도를 건설함으로써 자기 제국의 동쪽 곧 그리스 쪽에 호의를 나타냈습니다. 그는 그 도시를 콘스탄티노플(현대의 이스탄불)로 명명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톨릭 교회는 여러 세기에 걸쳐 양극화되고 언어와 지리 양면에서—라틴어를 말하는 서방의 로마와 그리스어를 말하는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갈라졌습니다.

당시 발전중이던 삼위일체 가르침의 몇몇 부면에 대한 분열시키는 논쟁은 계속해서 그리스도교국 내에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의 특징을 규정하기 위해서 기원 451년에 칼케돈에서 또 다른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서방 교회는 이 공의회에서 답변확정된 신경을 받아들였지만, 동방 교회는 의견을 달리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이집트와 아비시니아의 콥트 교회 그리고 시리아와 아르메니아의 “야코부스파”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일치성은 난해한 신학 문제에 관한 의견 차이, 특히 삼위일체 교리의 정의에 관한 문제 때문에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습니다.

분열의 또 다른 원인은 형상 경배였습니다. 8세기중에, 동방의 주교들은 이 우상 숭배에 반기를 들었으며, 성상 파괴 혹은 형상 파괴 시대로 불리는 시기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다시 성상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출애굽 20:4-6; 이사야 44:14-18.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양쪽 모두로부터 나왔음을 나타내기 위해, 서방 교회에서 니케아 신경에 필리오퀘(“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라틴어 단어를 부가했을 때, 더 큰 시련이 닥쳤습니다. 6세기에 있은 이 신경 정정의 최종 결과로 균열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윽고 “876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주교] 대의원 회의는, 정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와 필리오퀘라는 이단 문구를 정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황을 단죄”하였습니다.

“이 조치는 교회에 대한 교황의 보편적 관할권 주장을 동방 교회가 전면 배척하는 조치의 일환”이었습니다. (「사람의 종교」) 1054년에 교황의 대표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파문하였고, 총대주교는 그에 대한 반발로 교황을 저주하였습니다. 이 분열의 결과로 마침내 동방 정교회—그리스, 러시아, 루마니아, 폴란드, 불가리아, 세르비아 및 그 밖의 나라들의 자치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또 다른 운동도 교회에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12세기, 프랑스 리용의 피에르 발도는 “몇몇 학자들을 고용하여 성경을 남프랑스 랑그 도크[오크어; 지역 언어]로 번역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번역본을 열심히 연구하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사도들과 같이—개인 재산이 없이—살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믿음의 시대」[The Age of Faith], 윌 듀랜트 저)

그는 발도파(발두스파)로 알려지게 된 전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발도파는 가톨릭의 사제직, 면죄부, 연옥, 성변화(聖變化) 및 그 밖의 전통적 가톨릭 관습과 신앙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로 퍼져 들어갔습니다.

툴루즈 공의회는 1229년에 성경을 소지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그들을 제지하려고 애썼습니다. 단지 전례서만, 그것도 사어(死語)인 라틴어로 된 것만 소지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한 종교적 분열과 박해가 또 있게 되었습니다.

알비파에 대한 박해

12세기에 프랑스 남부에서 또 다른 운동—알비파(카타리파로도 알려짐)—이 시작되었습니다. 알비파란 그 추종자들이 많이 살던 알비라는 읍의 이름을 딴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나름의 독신 교직자 계급이 있었으며, 교직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인사를 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가리켜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 상징적인 의미라고 믿었습니다. (마태 26:26) 그들은 삼위일체, 처녀 탄생, 지옥불, 연옥 등의 교리를 배척했습니다. 그와 같이 그들은 로마 교회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이노센트) 3세는 알비파를 박해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교황은 “필요하다면, 칼을 사용해서라도 억누르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군이 그 “이단자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가톨릭 십자군들은 프랑스, 베지에에서 2만 명의 성인 남녀와 어린이를 살육하였습니다. 엄청난 유혈 행위가 있은 후, 1229년에 알비파의 붕괴와 함께 소요가 가라앉았습니다.

나르본 공의회는 “평신도가 성경의 그 어느 부분도 소지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문제의 뿌리는 평민의 언어로 된 성서가 존재하는 데 있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교회가 취한 그 다음 조치는 종교 재판, 즉 이단을 억압하기 위한 사법 기관을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편협한 정신에 사로잡혀 있어서, 미신을 따르고 언제라도 “이단자들”을 린치하고 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13세기의 상황은 교회가 권력을 남용하기에 적당하였습니다. 한편 “교회에 의해 이단자로 단죄받은 사람들은 ‘세속 권력’—지방 당국—에 넘겨져 화형을 당했”습니다. (「믿음의 시대」) 교회는 실제 처형하는 일을 세속 당국에 넘김으로써, 표면상으로는 유혈죄가 없는 체하였습니다.

종교 재판과 더불어 종교 박해의 시대가 시작되어, 감히 교회와 다른 믿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 대한 학대, 익명의 거짓 고발, 살인, 강탈, 고문, 고통스럽게 서서히 죽이는 일이 자행되었습니다. 종교적 표현의 자유는 억압당하였습니다.

[각주 부가 자료]

“불멸의 영혼,” “지옥불,” “연옥,” “림보” 등의 표현은 원래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경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부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아나스타시스)는 42회나 나온다.

그리스어 단어 에피스코포스는 문자적으로 ‘지켜보는 사람’을 뜻한다. 라틴어로 에피스코푸스가 되었고, 고기 영어에서 “비스콥”으로 변형되었다가, 나중에 중기 영어에서 “비숍”(주교)이 되었다.

널리 알려진 전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인 호크 시그노 빈케스”(이 기호로 정복하라)라고 쓴 라틴어 글자와 함께 십자가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 글자가 그리스어로 된 “엔 투토이 니카”(이것으로 정복하라)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한다. 이 전설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로부터 의심을 받는다.

「옥스퍼드 교황 사전」(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은 실베스터 1세에 관해 이렇게 기술한다.

“교회와 관련하여 극적인 사태 전개가 있었던 시대인 콘스탄티누스 대제 재위 기간(306-37년)중 거의 22년에 걸쳐 교황으로 있었지만, 그는 당시에 일어난 큰 사건들에서 미미한 역할밖에 못한 듯하다. ··· 콘스탄티누스가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기고 교회 정책을 함께 의논하는 몇몇 주교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실베스터]는 그중에 포함되지 않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이름으로 혹은 예수의 어머니로 4복음서의 스물네 구절에 그리고 사도 행전에 한 번 언급된다. 사도들의 편지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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