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불교 전래
한국의 불교는 인도나 중국불교의 단순한 연장도 퇴화도 아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해서 만주대륙과 한반도 등의 우리 민족문화권에로 동류
(東流)한 뒤, 우리나라의 지역과 풍토 및 민족성 안에서 독특하게 전개되었다.
1. 고구려
삼국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
는 약 2 · 3백년 후에 중국에 전파되었고, 중국에서 한반도에도 약 2 · 3백년 후에
전파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반화과정이 진행된 후에 왕실이나 국가에서
거국적으로 국교로 선포하기 때문이다.
372년(소수림왕 2) 국교로 선포된 불교는 전진의 왕 부견(符堅)이 보낸 순도(順道)를
법사(法師)로, 불상과 불경 등이 고구려 왕실에 전하여졌다. 이에 소수림왕은 사신을
보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2년 뒤인 374년에
는 진나라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왔다.
소수림왕은 그 이듬해 봄에 성문사(省文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세우고 순도와 아
도를 각각 그 절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 두 절은 한국 최초의 절이다. 고구려에서 처
음 받아들인 불교는 ‘인과적(因果的) 교리로서의 불교’ 또는 ‘구복(求福)으로서의
불교’로 보고 있으나 실은 토속적 기복(祈福)을 벗어나는 수복적(修福的) 불교이다.
이 수복적 불교의 증거가 고대 삼국국가 중 고구려가 제일먼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
성의 기틀을 잡게 한 획기적인 일이 그것이다. 수복(修福)은 수심신복(修心身福)의 의
미로 심신(心身) 을 잘 수행(修行)해야 복(福)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적극적인 인과의
개념인데 이를 기복(祈福)으로 오판함은 잘못이다.
391년(고국양왕 8)에는 임금이 교칙을 내려 ‘불법(佛法)을 숭신(崇信)하여 복(福)을
구(求)하라’ 하며 더욱더 불교를 장려하였다. 여기에서 불법(佛法)이란 인과응보 (因
果應報) 적 상대성 세계관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고, 숭신(崇信)이란 숭심신신 (崇
心身信) 즉 몸과 마음으로 믿고 받들어 수행하면 복이 있다는 수복(修福)적 의미의 교
시이다. 맹목적인 기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 백제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 (침류왕 1)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인도의 고승 마
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 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서울인 광주(廣州)의 남한산으
로 들어오자 왕은 그를 궁안에 머물도록 하였고, 그 이듬해 10명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526년(성왕 4)에는 인도에서 귀국한 겸익(謙益)을 맞이하여 불교가
크게 발전하였다.
3. 신라
신라의 불교수용은 순탄하지 않았다.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을 배경으로 발전하고 있었
던 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의 서북경 지방인 일선군 (一
善郡:善山)에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佛法)을 전하였으며,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최초의 신도가 되었다. 그때 중국의 사신이 향(香)을 가지고 왔으므로 묵
호자가 나아가 분향예불(焚香禮佛)하는 법을 가르치고 공주의 병을 완쾌시킴으로써 신
라왕실에서도 불교를 알게되었으나 별로 신도를 얻지 못하였다. 그뒤 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阿道)가 들어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 신봉하는 자가 늘어났다. 신라
에 왔던 이 아도는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며, 아도라는
이름은 머리가 없는 자라는 뜻으로 삭발승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보고있다. 그뒤에도
신라왕실은 불교공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씨족중심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씨족적 기반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확립하고자 했
던 왕실파(王室波)들은 법흥왕을 중심으로 불교를 새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서, 왕법(王法)과 불법(佛法)을 동일시하고 부처님의 위력을 왕의 위력으
로 대치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570년(법흥왕 7)에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조직에 관한 정비를 일단락지은 법흥왕
은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를 계기로 배불파(排佛派)를 제압하고 불교국
교를 선포하였으며, 529년에는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7년 뒤에는 그가 절을 만들고자 했던 천경림(天鏡林)에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
輪寺)를 창건하였고,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
(法空)이라고 불렀다. 이때의 불교는 ‘선행수복(善行受福)의 불교’ ‘인과응보적 권
선징악의 불교’였으며 고구려와 같이 토속신앙과 자연스럽게 혼합되었다.
* 불교의 대중화
원효의 정토사상, 즉 죽어서 서방극락정토에 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
대중화는 처음 불교가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왕실, 귀족 중심에서 서민 중심, 관
념적 불교에서 다시 생활 불교로 전이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