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 한국불교 조계종에 대하여

윤사 한국불교 조계종에 대하여

작성일 2023.07.04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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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이 참선,선정,관심법을 중시한다는데..조계종이 뭔가요?? 쉽게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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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종교 중에 하나의 명칭입니다.

그런데 불교에는 여러 종파가 있습니다.

크게는 대승불교.소승불교가 있습니다.

정치로 말하면 한국이 종교라면 한국 안에 민주당도 있고,자유당도 있는 식입니다.

불교에서 각기 사람들의 개념 차이로 만들어진게 종단 이라고 합니다.

그 종단 중 하나가 조계종입니다.

즉 종단을 끝에 종 을 넣어 부릅니다.

조계종.태고종 등.

정식 명칭은 대한불교조계종.줄여서 조계종 이라함.

曹溪宗(조계종)

고려 시대에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합친 종파로, 천태종(天台宗)에 대하여 이르는 말.

구산(九山)이 모두 중국 선종 육조(禪宗六祖)인 조계 혜능 선사(曹溪慧能禪師)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기 때문임.

교회도 비슷합니다.

예를들면

예수교는 교파로 나누이고,이를 교단이라고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줄여서 장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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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답변드립니다.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법사단체로, 많은 사찰과 스님들이 속해 있습니다.

조계종은 선종에 속하며, 참선, 선정, 관심법을 중시합니다.

- 참선은 명상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 선정은 스님들이 사회적으로 적극적으로 관련 문제에 개입하고 해결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 관심법은 일상생활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면서 조계종은 사회적으로 실용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삶을 개선하려고 노력합니다.

조계종은 많은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도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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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종과 선종 ~

교종과 선종의 기본적 교리는 같습니다. 다만, 깨달음을 이루는 방식에 따라, 교종과 선종를 구별합니다.

즉, 교종은 연기설등 여러 논리적 교법에 따라서~~,

선종은 오직 무상무념의 참선이나, 화두에 의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구하는 목적이 같으므로, 교종과 선종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불교를 접하는 사람에게 선종만으로 설명을 하게 되면, 논리를 잘모르게 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선종이 주를 이루므로, 불교의 논리를 알리는데 소극적입니다.

고려 전기에, 의천은 교종을 중심으로 천태종을, 고려 후기에 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조계종을 만듬.

현재, 조계종(금강반야경을 기본경전으로 함)의 총본산은 조계사, 천태종(법화경을 기본경전으로 함)의 총본산은 구인사, 태고종의 총본산은 선암사.(조계종과 태고종은 원래 하나의 종파였으나, 기혼승에 대한, 승려인정 여부에 따라, 종파가 갈라짐)

참선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품성을 꿰뚫어 보기 위한 실천 수행법. 즉, 자신의 본래 면목인 자신의 참모습을 보기위해 자신을 성찰하고, 화두등으로, 마음의 고요함에 들어감으로서,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종교적 실천수행법.→ 마음의 본래자리(진여, 본래면목)를 보기 위해 고요함에 들어간다.→ 마음을, 번뇌가 없는 기초마음인, 원래자리로 돌아가는 "리셋"을 한다.(텅빈 마음상태로, 마음을 비운다)

약사보전 보광전 만월보전 유리광전 : 약사여래는 "널리 광명을 펼쳐, 보석처럼 밝게 온누리를 비춰주시는 분이라는 뜻"에서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을 보광전, 만월보전, 유리광전이라고도 부른다. 가운데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좌측에 일광보살, 우측에 월광보살을 모신다. 후불탱화는 12신장 또는 사천왕이 호위하는 동방약사유리광회상도가 봉안된다.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의 부처인데, 약사불은 동방정토의 부처이다.

그러므로, 약사전은 동쪽을 바라보고 짓게 되는데, 대개 극락전과 마주보고 짓는다. 약사여래는 과거세에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모든 중생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킨다는 12대원을 세워 이를 수행하였고, 이러한 공덕으로 부처가 되었다. 즉, 약사여래는 중생의 모든 질병을 치료해주고, 여러 고통을 없애주는 동방유리광세계의 부처님이다(아미타불은 보광명전, 약사불은 보광전).

치성광여래 ~ 약사여래를 "치성광여래"라 부르기도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온세상 우주를 "불국토"라 한다. 이런 우주를 항하사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라 하여, "삼천대천세계"라 표현한다. 우주의 수많은 별들을 불국토로 생각하여, 밤하늘의 무한한 광명을 비추어주는 "북극성"을 "치성광여래"라 하였다.

서산 개심사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치성광여래도"에는 치성광여래의 좌우에, 붉은 해를 든 일광보살(소재보살), 달을 든 월광보살(식재보살)이 협시보살로 그려져 있다. 그 주변 좌측에 3위, 우측에 4위의 "여래"가 있는데, 이분들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여래이다( 약사전에는, 좌우측에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 불교와 관계없이, 북두칠성은 한민족의 하느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알려진 영험한 약사보살 기도처 ~① 창녕 관룡사 ~우리나라 최초의 약사 기도처. 창건할 때 용이 구름타고 올라 가는 것을 봤다하여 관룡사라 이름을 지었다함. 임진왜란때 모든 건물이 불탔는데, "약사전"만 불화를 면하여, 기이하게 여긴 스님이 대들보를 확인한 바, "영화5년기유"(349년)라는 글귀를 발견하였다 한다. 이때부터 화를 면한 소문으로, 관룡사에서 빌면,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는 소문이 널리 펴졌다

경산 불굴사 약사보전 ~불굴사의 약사기도 영험과 함께, 이곳 홍주암은 영험한 나반존자(독성) 기도처이기도 하다. 원효대사 최초 수행굴인 원효굴과 함께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기도하여 비법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이름이 비슷한, 경주 골굴사는 12개 석굴로 이루어진 석굴사원인데, "선무도"가 유명하다 ③ 대구(경산) 팔공산 선본사 갓바위 약사여래불(영험한 산신 기도처 이기도 함)

관악산 연주암과 함께, 연주대의 마애 약사여래불(연주대는 나한기도처로도 유명하며, 그 기도는 마애불 옆의 응진전에서 함) ⑤ 당진 상왕산 영탑사~ 유리광전에 모셔진 마애약사여래불은, 아픈 곳을 치유하고, 한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한다 ⑥ 부산 금정산 약수정사~"세상에 이런 일이" TV에 등장한, 폭우때 스스로 법당마당에 자리 잡았다는 마애약사불 ⑦ 양주 장흥 용암사 약사전~우연히 송추유원지 인근, 노송아래 땅속에서 발견한 영험한 약사여래불

⑧ ​서울 북한산 승가사 약사전~승가사 보물 215호인, 마애석가여래 영험과 함께, 승가대사의 좌상(보물1,000호)을 모신 약사전의 영험과 그 옆 약수물 효험이 유명하다(왕실기도처인, 승가사의 약수물을 세종임금의 왕후인, 소현왕후가 마시고, 병이 나은 후, 승가굴의 이름을 약사전으로 변경하였다한다. 약사전 입구 바위에 새겨진 초서글씨는, 추사 김정희 글씨로 알려져 있다).

추사 김정희는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인, 1816년, 승가사를 방문하여 승가사 바로 위에 있는 “비봉”에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비봉 바로 인근에 있는 “사모바위” 바로 아래에는, 1968년1월21일, 청와대습격을 위하여(1.21 청와대 습격사건), 북한 무장공비가 잠시 머물렀다는 암굴이 있다.

서울 강서구 방화동 약사사~ 당초 방화동 개화산 “개화사”였는데, “약사사”로 개칭함. 경내에 있는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삼층석탑(39호)”과 “대웅전” 모셔진, “석불입상(40호)”이, 고려 후기 양식을 지니고 있어, 고려말~조선초 사이에 창건되었다 추정한다. 1737년에 이르러, 영조임금시절, 우의정을 지냈던 송인명이 이곳 산사에서 공부하여, 재상이 된, 인연으로, 절을 중수하였고,

조선후기, 이곳에서 현령을 지냈던, 화가 “겸재 정선”은 "개화사"와 주변 한강풍경 산수화를 많이 남겼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대형 석불”은 영험이 있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면, 병이 치유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하여, 조선 순조이후에, “약사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나즈막한 야산인, 개화산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한강과 행주산성이 조망되며, 남쪽으로는 김포공항이 보인다. 개화산은 봉화가 있던,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과거 건물은 전란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 건물은 모두 198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에 모셔진 “대형 석불”은 가슴으로 모아진, 두손에, “약병”이 아닌, “꽃가지”를 들고있어, “미륵석불”임을 나타내고 있다(이 블로그 아래 쪽, “부처와 보살의 모습” 참조). 그러나, 치유영험의 “약사불”로 불리므로, 공식적으로는 그냥 “석불”이라 이름하고 있다.

삼척 두타산 삼화사 약사전~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로서, 후삼국의 통일을 기원하고 대업을 달성한 후, 후삼국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삼화사라 개칭 함. 약사불의 영험이 전해지며, 이곳에서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지었다고 하며, 인근에 무릉계곡과 용추폭포가 있다 ⑪ 장성 백양사 약사암과 영천굴~약사암의 약사여래불과 영천굴의 약수 영험이 유명하다. 아울러 인근 백양사의 칠성전은 영험한 칠성기도처로 알려져 있다.

*정읍 내장산 내장사와 벽련암~ 백양사인근의 단풍거리로 유명한 정읍 내장사는, 백제 무왕37년(636년)에 영은암으로 창건하였는데, 추후 이 영은암을 내장사로 바꾸게 되었고, 백제 의자왕20년(660년)에 창건한 내장사(백련사)를 백련암으로 바꾸었다한다. 추사 김정희가 이 백련암을 벽련암으로 바꾸고 현판을 써주었는데, 625때 현판과 함께 전각이 소실되었다. 현재는 백련암과 벽련암이 혼용되고 있다. 내장산 벽련암에는 자생 "차밭"과 함께 국내 최고령 단풍나무가 있다.

구미 금오산 약사암 약사전, 김천 수도산 수도암 약광전, 김천 황악산 직지사 약사전~ 이 세분 약사불은, 함께 방광을 하는 형제 약사불로 알려져 있다. * 금오산 약사암 약사불은, 광배가 있는 석조약사여래인데, 구미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금오산 기암 절벽에 자리하고 있다. 금오산은 골짜기 마다 기암괴석과 빼어난 경관으로 일명 소금강산으로 불리는데, 약사암과 범종각이 출렁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이 또한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약사암아래 절벽에는 암벽의 좌우로 조각되어 입체감을 주는 마애여래입상(보물490호)가 있다.

* 김천 수도산 수도암은, 859년 도선국사가 천하적지 수도명당이라는 "옥녀직금형" 명당자리에 사찰을 건립하고, 수도암이라 명명하였다한다. 수도암 약광전의, 광배가 있는 영험한 석조약사보살좌상은 보물296호이고, 대적광전안에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보물307호이며, 사찰마당에 있는 도선국사비는 신라명필 김생의 글씨로 밝혀 졌다고 합니다.

* 김천 황악산 직지사 약사전에는, 삼형제 약사불로 알려진, 영험한 광배가 있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319호)은, 얼굴 마모가 심하여 "직지성보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청풍료"에 모셔져 있고, 약사전에는 새로이 조성된 약사불이 모셔져 있다. 직지사는 사명대사의 출가 사찰이며, 대웅전에도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시고 있다. 직지사는 9월 중하순에 붉게 피는 꽃무릇이 장관을 이루는 데, 함평 용천사,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와 함께, 꽃무릇 군락지로 유명하다.

봉화 청량산 청량사 유리광전~ 영험한 약사여래를 모신 유리광전은 청량사의 주전각인데, 좌우에 지장보살과 문수보살을 모시고 있다. 이 유리광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 한다(이곳의 응진전은 영험한 나한 기도처).

* 구례 사성암~원효, 도선, 의상 그리고 고려 후기 진각스님의 4분 성인이 수도하였다하여, 사성암이라 함. 높이 20미터의 절벽에, 4미터되는 음각의 "마애약사여래입상"을 원효스님이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는 설화가 있다. 이곳 절벽에 기둥을 바치고 "약사유리광전"(약사전)이라는 암자를 지었다. 약사기도처인 이곳 인근에 "도선굴"과 소원을 들어 준다는 "소원바위"가 있다. 주변 바위의 형상이 뛰어 나며, 이곳에서 구례들판과 섬진강이 조망된다.

*청양 칠갑산 장곡사 ~보조국사가 창건한 영험 약사기도처이며, 우리나라 유일의 대웅전이 2개 있는 곳이다. 상대웅전(보물 162호)에는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58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보물174호), 미륵쾌불탱(국보300호)가 있고, 하대웅전(보물181호)에는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337호에서 최근 국보로 지정)이 있다.

*서울 북한산 흥국사 ~ 약사전을 주불로 모시는 흥국사는, 신라 문무왕 원년(661년)에, 원효대사가 도봉산 망월사 인근의 “원효사”에서 수행하던 중, 도봉산 넘어, 북한산의 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고 있어, 그 서기를 뒤쫒아, 서기를 찾던 중, 이곳에서 서기를 발하는 약사여래불 형상의 바위를 발견하였다. 그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앞으로 많은 성인이 배출될 것이라는 뜻으로, 흥성암이라는 이름을 짓었다고 한다[원효대사는, 도봉산 망월사 인근, “원효사”에서 수도하였고, 이곳 “원효사”에는 원효대사 동상이 있다(영험한 나한기도처~ 도봉산 “원효사”참조)].

그 후, 1770년 영조임금은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가 있는 인근 “소령원”(경기도 파주에 있는 데, 인근 "파주 보광사"에는 숙빈 최씨의 "어심각"이 있다)에 들린 후, 궁궐로 돌아 가던 중, 폭설을 맞아 부득이 이곳에서 하루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흥성암” 맞은편 북한산 설경에 반하여, 주전불의 “약사전”이라는 친필현판을 하사하였고,

주전불인 약사불이 나라를 흥하게 할 것이라는 뜻으로, 흥성암의 이름을 “흥국사”로 바꾸게 하였다. 나아가 궁궐의 상궁들이 번갈아 머무르고 “선학”을 공부하도록 하였으며, 왕실기도처로 삼았다고 한다. 현재 설법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미타전 안의 후면 “구품극락도”는 김홍도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다. 약사기도도량인 흥국사는 북한산 맞은편의 노고산(한미산)기슭에 있어, 북한산 조망이 뛰어나다.

*공주 갑사~춘마곡 추갑사라 하여, 봄에는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라 말하는 가을여행지인 갑사에서, 20미터쯤 떨어진 등산로 전각안에 충남도 유형문화재인 석조약사여래불이 있다. 갑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대장경판이라는 "월인석보판목(보물582호)"을 보관하고 있다. 또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를 모신 표충원이 있는 데,

이 갑사의 표충원과 유사한 곳이 밀양 표충사이다. 임진왜란의 유공자인 세분 스님 위패를, 밀양 죽림사에 모시고, 이름을 죽림사에서 표충사로 바꾸게 되었다. 인근 밀양 홍제사에는 땀흘리는 비석으로 유명한 사명대사 "표충비"가 있다. 갑사, 동학사(비구니스님들이 공부하는 승가대학이 있다), 신원사(왕실 3대 산신기도처인 "중악단"이 있다) 계룡산의 3대사찰이라 한다.

* 강화도 정족산 전등사~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하지만,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해가야(금관가야) 불교는, 김수로왕(42.3.16 ~199.3.23) 당시에 바닷길을 통해 전파되었고, 그 시절에 창건된 밀양 만어사와 밀양 부은사, 하동 칠불사가 있다. 이블로그 저 아래, 불교의 전래, 가야불교 부분 참조].

372년(소수림왕 2년) 중국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와 사신을 통하여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하였는데, 그로부터 2년뒤인, 374년(소수림왕 4년)에, 진나라로부터 승려 “아도”가 고구려에 왔다. 그 7년 뒤인, 381년에, 동진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여 가는 도중에, 강화도에 들리게 되어, 전등사의 전신인, “진종사”를 세웠다고 한다.

진종사는 900년 가까이 지난 뒤인, 1266년에 중창되었고, 1282년(고려 충렬왕 8년)에, 충렬왕이 태자였던 시절에 혼인을 하였던, “정화공주”가 대장경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고려 정화공주는 17년동안 태자비로 살면서, 왕비가 되기를 기다렸으나,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원성공주)에 밀려, 끝내 충렬왕의 왕비가 되지 못한 비운의 공주이다. 제국대장공주(원성공주)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이다.

“쿠빌라이”는 징기스칸의 손자로, 동부 유럽에 이르는, 대 몽고제국을 건설한 황제. 충렬왕이 원나라 볼모로 있을 때, 혼인동맹을 위해,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고, 결혼 후, 귀국하여 충선왕을 낳았다. 정화공주는 고려 충렬왕의 정실이지만,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에 밀려 제2비로 떨어졌다. 아들을 낳았지만, 왕위는 “제국대장공주”가 낳은, 원나라 황실의 외손자인 충선왕에게 돌아갔다. 세월이 흐른 후, 정화공주의 손자가 공양왕에 오른다.

그 후, 전등사는 1614년(광해군 6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1621년(광해군 13년)에 새로이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지어진, 보물 178호인, 전등사 대웅보전에는 특이한 것이 있다. 대웅전 네 모서리의 처마밑에 있는, 손바닥과 머리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조각상”이다.

알려진 내용에 의하면, 중창불사의 대웅전 건축공사를 맡은 도편수는 아랫마을 주막의 주모와 눈이 맞았고, 둘은 공사가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 함께 살기로 약속을 하였다.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건내 주었다. 그런데, 공사가 끝나기 직전, 주모는 도편수가 맡긴 돈을 전부 챙겨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이에 몹시 분노한 도편수는, 도망간 주모가, 두 손바닥과 온 몸으로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는 고통과 함께 벌거벗은 모습의 수치를 견디며, 법당에서 들려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참회하라는 뜻으로, 주모닮은 벌거벗은 여인상”을 대웅전 처마 네귀퉁이에, 새겼다고 한다.

더욱 해학적인 것은, 네귀퉁이 중에서, 두 귀퉁이의 “나상”은, 한손으로 만,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 마치 주모가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선조의 재치와 익살을 느끼게 하고 있다. 전등사에는, 대웅전(보물 178호), 약사전(보물 179호), 철종(보물 393호),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보물 1785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보물 1786호), 묘법연화경목판(보물 1908호)의 국가보물 6점을 보유하고 있다.

전등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2그루(수령 700년, 350년), 느티나무 2그루(수령 각 400년), 청단풍나무 1그루(수령 280년)가 있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주지스님이 과도한 은행나무 열매공물을 요구하는 관청에 대하여, 고민을 하던 중, 홀연히 나타난 “추송”스님과 동자승, 그리고 노스님이, 열매가 많이 열리도록 하는 3일기도를 올리게 되었다한다. 그런데, 3스님의 마지막날 축문은, 전등사의 은행나무가, 천년만년 더 이상, 열매가 맺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축문이 끝나자,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고개를 숙인 사이에, “추송”스님, 동자승, 노스님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은행나무에는 더 이상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고 하는 설화가 있다. 400년된 느티나무 2그루는, 대웅보전 뜰앞, 대웅전을 오르는 길목에 1615년 전등사를 중창하면서, “풍치목”으로 심었다고 하며, 대조루(대웅보전으로 가는 입구에 있는 누각식 건물) 동편에 심었다는 280년된 청단풍나무는, “초윤”주지스님이 대조루를 중창하면서, 1749년(영조25년)에 심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당초,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등 4곳에 보관하였는데, 유일본으로 남아있던, “전주사고본”을 임진왜란때, “묘향산사고”로 옮겼다가, “마니산사고”를 거쳐 1660년 이곳 “정족산사고”로 옮겼다고 한다. “정족산사고”에 보관 중이던, 왕조실록은 국권이 침탈된, 1910년 서울로 옮긴후,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존관리하고 있다. 현재의 “정족산사고”건물은 1931년 이후, 없어진 것을 1998년에 복원하였다.

철종(보물 393호)은, 중국 북송때인, 1097년 하남성 “송명사”에서 조성한 것으로, 한국종과 다르게, 상부의 음통이 없다. 전등사 예전의 동종은 일제시대때 징발되었는 데, 해방후, 이 동종을 찾기 위해, 인천항을 샅샅이 뒤졌는데, 우연히 중국에서 일본군에 의해 징발된 종을, 일본군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고, 이 철종을 전등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전등사가 있는 뒷산은 세발달린 솥을 엎어놓은 형태라 하여 정족산(231m)이라 한다(가운데 정상은 높고, 좌우 능선은 낮은, 정상을 기준으로, 남동쪽을 향해, 좌우로 능선이 있는 형태이다. 이런 형세 때문에, 정족산성(삼랑성)에 있는, 전등사에 들어가려면, “종해루”가 있는 남문이나, 문루는 사라지고 둥그런 홍예문만 있는 동문을 통해서만 들어 갈수 있다).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을 “정족산성”이라 말하기도하고, 삼랑성이라 말하기도 한다. 단군의 세아들인, “부소”, “부우”, “부여”가 쌓았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삼랑성(정족산성) 안에는, 전등사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 가궐지(고려 항몽시기의 임시 대궐터), 왕실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다. 삼랑성(정족산성) 성곽에 오르면(둘레 약 2.3키로, 높이 2~5미터), 전등사가 한눈에 보이며, 멀리 마니산도 보인다.

이런 강화도에, 프랑스군이, 1866(병인년) 10월16일, 프랑스 선교사 처형을 구실로, 프랑스 “리델”신부와 최선일, 최인서, 심순녀등 3명의 조선 천주교도의 수로안내를 받으며, 군함 4척, 상륙군 900명을 동원하여, 갑곶진에 상륙하고, 강화부를 점령하였다. 프랑스 점령군은, 처형당한 선교사의 복수를 한다며, 닥치는 대로, 양민을 학살하고, 방화,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1866.11.7일, 양헌수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프랑스군에 의해, 해상봉쇄된, 강화바다를 은밀히 건너, 정족산성에 잠입하였다.

1866.11.9일, 낡은 구식의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잠복과 근접 작전으로,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던, 신식총으로 무장한, 프랑스군 160여명중, 6명 사망자를 포함한 80여명 사상자를 내게 하고, 물러나게 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결국, 중국 기지로 철수하였다. 이런 대승을 거둔, 양헌수”장군의 전승비정족산성(삼랑성) “동문” 안 있다("병인양요"원인과 전투 승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블로그 저 아래 부분인, “절두산” 부분 참조/ 병인 양요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을, 우리 힘으로 물리친 전쟁이다​)

금강산은 법기보살(80권본의 화엄경에는, 동북방 청량산 다음에, 해중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거쳐하며, 1만2천의 권속을 거느리며, 반야를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금강산 1만2천봉"이라는 말의 유래이다), 오대산은 문수보살, 장흥의 천관산은 천관보살(천관산은 "지제산"이라고도 하는데, 화엄경에 따르면 지제산에는 천관보살이 상주하고 있다고 한다. 천관은 하늘의 천자가 쓰는 면류관을 말한다),

양양의 오봉산 낙산사는 관음보살(관음보살의 상주처는 남방의 보타낙가산(낙산)인데, 이를 한역하면, 소백화산이라는 뜻이며, 낙산사는 여기에서 따온 말이므로, 즉, 낙산사는 관음보살의 백화도량이라는 뜻이된다. 남해의 보리암, 강화의 보문사, 여수의 향일암등 4대 관음성지중에서, 강화 보문사도 낙가산이지만, 이런 이유로, 의상대사가 창건한 양양의 낙산사를, 첫번째 관음보살의 상주처로 꼽기도한다), 연천의 보개산은 지장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블로그 참조

불교사찰과 불교기도문 불교의 진언 부처와 보살의 모습 ~블로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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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 한국불교(원효,의천,지눌) 질문

... 그럼 한국 불교는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을 받아온... 하여) "선종"으로 "조계종"을 창종하였다(선종 1대 달마, 2대... 세상 삼라만상의 본질에 대하여, 유식은 중생심(유위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