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죄요.

오역죄요.

작성일 2021.03.31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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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에 계신 부처님이 살았을 적에 고통스러우셨다는데,
제가 웃는표정을 짓었으면 오역죄를 짓은 건가요?
제발 작은 죄이길 바래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그런 것으로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석가 부처님은

자신은 적멸에 가더라도,

남은 자는~

자연의 법진리에 의지하며 살아라고 말씀하셨지요~

자등명 법등명~스스로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자등명), 부처님이 설하신 법의 등불을 밝혀서(법등명), 고해의 바다인 사바세계를 살아 가라는 가르침. 즉, 모든 중생은 본질적인 면에서 부처의 본성인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스스로의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우주의 본질인 반야(지혜)의 법에 의지하며 살아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승에서 껍데기인 육신의 감각에 의지하여 살아가지만, 스스로 우주의 본질인 마음의 행로를 밝히라는 뜻임.

(자연의 법칙이 심판자입니다)

하늘의 복은 누구, 누구를 가려서 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만인 평등으로 모두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하늘(조상, 보살등)은 만인 모두에게 차등없이 복을 주는데, 만인의 모두에게 주는 복을 마음의 업으로 인하여 스스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 인과의 법칙입니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누구를 가려서 비추는 것이 아니듯이, 하늘은 만인 모두에게 복을 주려 모두에게 태양빛을 비추어주고 있는데,

마음이 업으로 그늘이 만들어져서 또는 업으로 스스로 그늘로 들어 감으로서, 스스로 받지 못하게 업을 짓고 나쁜 행동할 뿐입니다. 마음에 새겨진 선업도 마음의 업이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한 자연적 법칙으로 이에 상응하는 보상의 복덕이, 악업을 행하면 이를 해소하기위한 마음의 자연적 법칙으로 이에 상응하는 고통이 주어지므로서, 마음의 업이 해소되는, 자연의 법칙으로 인과의 법칙입니다. 어떤 나쁜일을 행하였을 때, 현실 세계에서도 형벌이 주어지지만, 이것으로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업은 해소되지 못하고, 이승이든 저승이든 이러한 업의 해소를 위해 윤회를 계속한다는 것입니다.(즉, 자연의 법칙이 심판자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생각과 느낌은, 나 자신의 객체인 대상일 뿐이지, 나자신의 본체는 아니다. 그 생각이 들거나, 말거나, 그 느낌을 느끼거나 말거나, 그 생각과 느낌을 감지하는, 그것이 나의 본체이다. 나의 본체는 언제나 변하지 않고, 선악도 구분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 나 자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내 본체의 대상인 생각과 느낌이 시시때때로 변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본체는 어디에 머물고 있나? ]

*윤회~오온을 통한 생각과 느낌은 나의 본체가 아니고, 그 생각과 느낌을 감지하는 그것, 그 자체가 나의 본체이다. 나의 오온이 소멸하더라도(육신의 소멸, 죽음), 나의 본체는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저승이다. 혹시, 나의 본체가 미망으로, 이승에 미련과 집착과 원한등을 가지며, 이승에 간섭하려 하고, 이승에 머룰려고 집착하는 영혼이, 집착령, 원혼령등의 귀신이다.(죽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자살을 하게 되면, 그 속마음은 이승에 대한 원한이 깊어, 자살을 한 것이므로, 이승에 원한이 있는 일종의 원한령이다). 한편, 이승에 대한 원한과 집착을 버리고, 다음생을 기다리며 살게 되는 곳을 저승이라 하며, 이런 저승의 삶에서 업의 소멸을 위하여, 인연법으로 다시 이승에 오게 되는 현상을 윤회.(저승의 모습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원문 뜻해석"블로그 참조

더 자세한 것은 아래의 블로그를 참조하세요~

"불교의 사찰과 천수경 기도문" 블로그 바로가기

https://blog.naver.com/andsing/22195560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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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비방전문 답변자, 천주교인 magp~야

(천주교인이면서, 불자를 가장하여 비방하는 자인데, 답변글의 magp****의 (****)부분이 다른 3~4사람이, 조직적으로 번갈아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엉터리 교리가 들통나자, 불교를 전혀 모르면서, 아는체하며 불교를 비방하고 있지요. 답변자인 magp****의 답변확정 답변수가 모두 다름니다.

Magp****야, 그런다고 천동설의 가짜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 기독교(카톨릭,개신교)가, 진짜 하느님을 믿는 종교로 되살아나나? 열심히 하거라~)

* 물리학자도 아닌 사람이, 궤변을~ㅎㅎㅎ

영혼은 물질이야? 아니냐?

물질도 아닌것이 존재하므로, 공도 아니다.. 석가의 업과 번뇌를 가지는 마음의 본체에 대한 설명~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석가말씀)

물질=질량+위치= 측정가능.

물질의 원자이하는= 질량+위치모름, 또는 위치+질량모름,

즉,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또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다"(하이텔베르크말씀)

이것으로 노벨물리학상~

두 내용이 다르냐? 니가 노벨 물리학상을 사기로 판단하는 구나~

*미시적 우주론~물질은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 중간자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새로운 입자를 쿼크라 불렀는데, 이러한 불확정성의 원리로, 이론상 존재하지만 측정하기 어려워 top쿼크는 1995년도에야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즉, 양성자와 중성자는 6가지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자및중성자를 전자와 연결하는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로 구성되고, 전자는 6가지의 렙톤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입자물리학은 우주를 이루는 기본입자가 무엇인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핵물리학은 쿼크등 소립자가 어떻게 양성자와 중성자속에 들어가서 속박되게 되었고, 그러한 입자들이 모여서 무엇을 이루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이를 근거로 빛이 우주를 어떻게 이동하는가 하는것에 대하여 입자설과 파동설이 있습니다.

*거시적 우주론~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천문학, 천체물리학등 거시적 우주론에서 빛의 속도로 움직일수 있는 물체가 있다면, 뉴톤역학의 고전물리학도 적용될수 있으며, 블랙홀등 천문학상의 여러 사실 설명에도 이용되고 있으며, 또 상대성이론은 입자물리학, 핵물리학등 미시적 우주론에서도 양성자,중성자,전자등 상호간의 중력이 작용하는 양자역학, 소립자물리학등 미시적 우주론에서의 주도적 연구원리로 적용되고 있음.

미시적 우주론인 양자역학에 있어서, E=mc²에의거, 줄어든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만큼의 에너지가 생성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원자와 수소폭탄의 원리이며, 헬룸수소로 가득차있는 태양은, 헬룸수소 핵융합 반응이 계속 일어나면서 질량이 줄어들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뜨거움으로 인하여 급격히 팽창하여 적색거성이 되며, 그후 점점 식고 축소되어 백색왜성이 되면 수명을 다한다고 합니다.

즉, 물질로부터 "새로운 에너지"를 만드는 원자폭탄은,

고전 물리학의 에너지 보존법칙에 위반되므로, 존재하지 않는 사기 폭탄? ㅎㅎㅎㅎ

이런 것이 전부 사기라면, 너는 왜 노벨상을 못받았나?

니가 말하는 변하지 않는 물질은 어떻게 존재했는가?

천주교에서 말하는, 천동설을 진리라 말하는 사막잡귀가 만들었나?

석가는 물질은 인연법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창조주가 존재하여 물질을 창조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방을 하려면, 이런 인연법을 비방해고 천동설을 옹호해야 맞지 않나?

니가 천주교인으로서, 불교를 비방하는 것은 자유지만, 사실에 근거하여 비방해야 정신병자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다. 성서의 창조설이 맞지 않는 다면, 불교의 인연법이냐? 역학의 음양설이냐? 어느 것이냐?

너는 천동설을 믿지? 주변 사람에게도 천동설이 진리라 가르치나? ㅎㅎㅎㅎㅎ

니 마음을 보아라~~사실에 근거하여 비방하고, 그 근거를 제시해야, 정상적인 것이 아닌가?

미신인 천동설을 진리라 말하는 사막잡귀를 믿지 말고,

니 마음을 믿어라~~그게 부처의 말이고, 불교의 기본 교리다. magp~야 정신차려라~

너의 글 내용을 보면, 너가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수있다.

불교는 경전 전체가 마음이 어떻고, 이 마음을 어떻게 제어하는냐를 가르치는 것이다.

너의 머리가 아둔해서 이해를 못한다고, 불교가 모두 엉터리라 말하면 되겠나?

인연법에 의하면, 물질과 마음은 인연법으로 생기었고,

그 존재방식은,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중간개념이라는 것이 불교의 전체적 교리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생각과 느낌은, 나 자신의 객체인 대상일 뿐이지, 나자신의 본체는 아니다. 그 생각이 들거나, 말거나, 그 느낌을 느끼거나 말거나, 그 생각과 느낌을 감지하는, 그것이 나의 본체이다. 나의 본체는 언제나 변하지 않고, 선악도 구분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 나 자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내 본체의 대상인 생각과 느낌이 시시때때로 변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본체는 어디에 머물고 있나?

오온을 통한 생각과 느낌은 나의 본체가 아니고, 그 생각과 느낌을 감지하는 그것, 그 자체가 나의 본체이다. 나의 오온이 소멸하더라도(육신의 소멸, 죽음), 나의 본체는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발견하고, 공부하고, 스스로 깨닫고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너가 불교를 비방하려면,

사성제, 아뢰아식, 연기론, 중관(공)론에 대한, 이런 인연법을 비방해야 옳은 비판이다.

천주교에서 신을 믿는 자가, 불교도 신을 믿는 것으로 생각하여 말하므로 핀트가 한참 빗나갔다

불교는 자신의 마음의 정체를 밝히고, 그 마음에 대하여 논하고, 그 마음을 바라보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도 신을 믿는 것처럼 말하며 비방하니, 너가 초등학생 같다는 것이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세요

부처님 모르실 테니까

당신이 깨달으면 당신도 부처님 반열에 오르며 아라한이라 합니다

아래 읽어보시고 그렇게 해서 성불해보세요

갈애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을 해탈이라합니다

갈애가 떠오르면 알아차림하면

생각이 갈애로 부터 알아차림으로 바뀝니다

계속 떠오르면 계속 알아차림하면 안 떠오릅니다

마음이 그게 안되니까

이번에는 다른 것을 가지고 마음을 휘두릅니다

거기에 끌려가면 실력이 올라가지 않죠

원전을 잘 읽어보시고 이해하십시요

마음강화 하는 훈련이 불교 수행법입니다

아래와 같이 열심히 훈련해보세요

(1~5분 해보면 금방 알거예요)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면 후회스럽고

미래를 생각하면 두렵고 불안하죠

생각은 꼬리를 물고 끝없이 몰려와요

그래서

현재에 머무르는 훈련을 해야해요

몸을 편안히 한다음 움직이지 말고

눈을 감고

숨이 들어오면 하나

나가면 둘

하나 둘 하나 둘

다른 생각이 들어오더라도 무시하고 또는 빠르게 알아차리고

다시 하나 둘 하나 둘

그렇게 하면 그생각이 안 떠로르죠

그렇다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예요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귀찬아지지 않아요

느낌 같은것 들더라도 무시하고

계속 하나 둘 하나 둘 하세요

(응용해서 무자화두를 든다면

숨이 들어오면 무, 나가면 무, 무, 무, 무, 무,

생각이 들어오면 무, 나가면, 무, 무, 무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 마음의 변화가오죠

잠이 안오더러도 하나 둘 하나둘

우울한 생각이 들더라도 무시하고 하나 둘 하나 둘

안되면 소리 내면서 하나 둘 하나 둘

지루하면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드는데 엄청 편해져요

걸어갈 때는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

https://sati.center/

1. 유일한 길 :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 깜맛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바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정신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身隨觀)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 대념처경(大念處經, Mahasatipatthana Sutta)

부처님의 육성이 생생히 살아있는 초기경들 가운데서

실참수행법을 들라면

본경 「대념처경」과,

「중부」의 「들숨남숨에 마음챙기는 경」(Anapanasatii Sutta, 出入息念經, M118)과

「몸에 마음챙기는 경」(Kayagatasati Sutta, 念身經, M119)의 셋을 들 수 있다.

물론 「중부」의 「염처경」(M10)도 들어야겠으나

「염처경」은 사성제에서 고성제에 관한 부분만 제외하고는 본경과 그 내용이

일치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세 경들(대념처경, 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경, 몸에 마음챙기는 경)을

초기경들 가운데서 실참수행을 설하신 수행삼경(修行三經)이라 불러도 괜찮다.

이 가운데서 본경은 수행법을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의 네 가지 주제 하에 집대성한 것으로

초기 수행법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경이며 그런 만큼 유명한 경이기도 하다.

마음챙김으로 대표되는 초기불교 수행법은

이 경을 토대로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남방의 수행법으로 알려진 위빳사나 수행법은 모두 이 경을 토대로 하여

가르쳐지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본경은 「장아함 」에는 실려 있지 않고 「염처경」(念處經)으로 옮겨져서

「중아함」의 98번째 경으로 중국에 소개되었다.

2-1. 몸을 관찰(身隨觀): 들숨날숨에 마음챙김

2.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무는가?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아래 기거하거나, 외진 장소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겨 숨을 둘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하면서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도공이나 도공의 도제가

길게 돌리면서 '길게 돌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돌리면서 ;짧게 돌린다.'고 꿰뚫어 아는 것처럼,

그와 같이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신행(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신행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하면서 공부짓는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2-2. 몸을 관찰: 자세四威儀)에 마음챙김

3.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

서있으면서 '서있다.'고 꿰뚫어 알며,

앉아 있으면서 '앉아 있다.'고 꿰뚫어 알고,

누워있으면서 '누워있다.'고 꿰뚫어 안다.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2-3. 몸을 관찰: 거동에 마음챙김

4.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갈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의복·발우를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이와 같이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혹은 밖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안팎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法)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현상을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그는 '몸이 있구나.'라고 마음챙김을 잘 확립하나니

지혜만이 있고 마음챙김만이 현전할 때까지.

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http://blog.daum.net/gikoship/

7) 법륜(dhammacakka, 法輪)을 굴림

13. 그때 Bhagava(世尊)는 5bhikkhu 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bhikkhu여! 2가지 극단[dve anta, 兩極端]이 있다. 이것을 출가한 사람[pabbajita, 出家人]은 가까이해서는[sevita, 追求) 안 된다. 무엇이 2가지 극단인가? 하나는 감각적 쾌락(kāma, 愛慾)이다. 감각적 쾌락에서 발생하는 즐거움에 몰두하는[kāma sukha lika anuyoga, 沒頭愛欲樂] 것이다. 그것은 열등(hīna, 劣等)하고, 세속(gamma, 世俗)적이고, 범부행(pothujjanika, 凡夫行)이고, 성스럽지[ariya, 聖] 못하고, 유익(atthasaṁhita, 有益)하지 못하다. 다른 하나는 자기[atta, sk. ātman, 我] 몸에 스스로 고통(kilamatha, 苦通)을 가해 발생하는 괴로움에 몰두[anuyoga dukkha, 沒頭苦] 하는 것이다. 그것 또한 성스럽지 못하고 유익하지 못하다.

bhikkhu여! 나는 이와 같은 2가지 극단을 버렸다. 그리고 Tathāgata(如來)에 의해 새로운 실천방법[majjhima paṭipada, 中道]이 분명히 깨달아졌고[abhisambuddha,圓滿自覺, 圓覺], 눈을 뜨게 하고[cakkhu karaṇī, 開眼], 알게 하고[ñāṇa karaṇi, 敎], 고요하고[upasama, 寂靜], 원만한 지혜[abhiññā, 圓滿智, 殊勝智, 勝智), 올바른 깨달음[sambodhi, 正覺, 自覺], Nibbāna(涅槃)로 인도(saṁvattati, 引導) 한다.

bhikkhu 여! 무엇이 Tathāgata(如來)에 의해 분명히 깨달아졌고[圓滿自覺], 눈을 뜨게 하고[開眼], 알게 하고[敎], 고요하고[寂靜], 원만한 지혜[圓滿智, 殊勝智, 勝智], 올바른 깨달음[正覺, 自覺], Nibbāna(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새로운 실천방법[中道]인가? 그것은 성스러운 8가지 길[ariya aṭṭhṅgika magga, 聖八支道]다. 예를 들면,

① 올바른 가치관[sammā diṭṭhi, 正見]

② 올바른 의도[sammā saṅkappa, 正思]

③ 올바른 말[sammā vācā, 正語]

④ 올바른 행위[sammā kammanta, 正業]

⑤ 올바른 직업[sammā ājīva, 正命]

⑥ 올바른 노력[sammā vāyāma, 正精進]

⑦ 올바른 알아차림[sammā sati, 正念]

⑧ 올바른 마음집중[sammā samādhi, 正定]

bhikkhu여! 이것이 Tathāgata(如來)에 의해 분명히 깨달아졌고[圓滿自覺], 눈을 뜨게 하고[開眼], 알게 하고[敎], 고요하고[寂靜], 원만한 지혜[圓滿智, 殊勝智, 勝智], 올바른 깨달음[正覺, 自覺], 그리고 Nibbāna(涅槃)로 인도(引導)하는 새로운 실천방법[中道]이다.

14. bhikkhu 여! 이것이 진실로 Dukkha(苦)의 실제진리[dukkha ariyasacca, 苦聖諦]다. 태어남도 Dukkha[jāti dukkha, 生苦], 늙음도 Dukkha[jarā dukkha, 老苦], 병듦도 Dukkha[byādhi dukkha, 病苦], 죽음도 Dukkha[maraṇa dukkha, 死苦]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Dukkha[appiya sampayoga dukkha, 怨憎會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Dukkha[piya vippayoga dukkha, 愛別離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Dukkha[piccha nalabhati dukkha, 求不得苦], 요약하면 5온(pañca khandha, 五蘊)에 대한 집착 그 자체가 Dukkha(pañca khandha upādāna dukkha, 五陰盛苦]다.

bhikkhu여! 이것이 진실로 Dukkha를 일으키는 실제진리(dukkha samudaya ariya sacca, 苦集聖諦)다. 새로운 삶의 조건[puna bhava, 再生]을 형성하고, 기쁨[nandi, 歡喜, 悅喜]과 탐욕(rāga, 貪欲)을 동반하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즐기려고 하는 욕락갈애(abhīnandanī taṇha, 欲樂渴愛)가 그것이다. 애욕갈애(kāma taṇha, 愛欲渴愛), 존재갈애[bhava taṇha, 有渴愛], 부갈애[vibhava taṇha, 富渴愛]가 그것이다.

bhikkhu여! 이것이 진실로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실제진리[dukkha nirodha ariya sacca, 苦滅聖諦]다. 곧 갈애에 대한 탐욕을 완전히 없애고[virāga taṇha, 離貪渴愛], 갈애를 소멸하고[taṇha nirodha, 滅渴愛], 갈애를 단념하고[cāga taṇha, 斷渴愛], 갈애를 버리고[paṭinissagga taṇha, 捨渴愛], 갈애로부터 벗어나고[mutti taṇha, 解脫渴愛], 갈애에 집착하지 않는 것[anālaya taṇha, 無着渴愛]이다.

bhikkhu여! 이것이 진실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제진리[dukkha nirodha gāminī paṭipadā ariya sacca, 苦滅引道聖諦]다. 이것이 8정도[ariya aṭṭhaṅgiko maggo, 聖八支道]다.

① 올바른 가치관[sammā diṭṭhi, 正見]

② 올바른 의도[sammā saṅkappa, 正思]

③ 올바른 말[sammā vācā, 正語]

④ 올바른 행위[sammā kammanta, 正業]

⑤ 올바른 직업[sammā ājīva, 正命]

⑥ 올바른 노력[sammā vāyāma, 正精進]

⑦ 올바른 알아차림[sammā sati, 正念]

⑧ 올바른 마음집중[sammā samādhi, 正定]

15. bhikkhu 여! 나는 이것이 Dukkha(苦)의 실제진리[dukkha ariyasacca, 苦聖諦]라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cakkhu uppjjati, 眼生], 앎이 생겼고[ñāṅa udapādi, 智生], 혜가 생겼고[paññā udapādi, 慧生], 밝음이 생겼고[vijja udapādi, 明生], 빛이 생겼다[āloka udapādi, 光生].

bhikkhu 여! 나는 이 Dukkha(苦)의 실제진리[苦聖諦]를 정확히 이해[pari jānāti, 遍知]해야 한다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bhikkhu 여! 나는 이 Dukkha(苦)의 실제진리[苦聖諦]를 이미 정확히 이해[遍知]했다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bhikkhu 여! 이것이 진실로 Dukkha(苦)를 일으키는 실제진리[dukkha samudaya ariya sacca, 苦集聖諦]다라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bhikkhu 여! 이것이 진실로 Dukkha(苦)를 일으키는 실제진리[苦集聖諦]는 당연히 끊어버려야 한다[pajahati, 斷]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bhikkhu 여! 이것이 진실로 Dukkha(苦)를 일으키는 실제진리[苦集聖諦]는 이미 끊어버렸다[斷]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bhikkhu! 이것이 진실로 Dukkha(苦)를 소멸시키는 실제진리[dukkha nirodha ariya sacca, 苦滅聖諦]라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bhikkhu 여! 이것이 진실로 Dukkha(苦)를 소멸시키는 실제진리[苦滅聖諦]는 당연히 증득(sacchakaroti, 證得)해야 한다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bhikkhu 여! 이것이 진실로 Dukkha(苦)를 소멸시키는 실제진리[苦滅聖諦]는 이미 증득(證得)했다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bhikkhu! 이것이 진실로 Dukkha(苦)의 소멸로 이끄는 실제진리[dukkha nirodha gāminī paṭipadā ariya sacca, 苦滅引道聖諦]라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bhikkhu 여! 이것이 진실로 Dukkha(苦)의 소멸로 이끄는 실제진리[苦滅引道聖諦]는 당연히 수행(bhāvanā, 修行)해야 한다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bhikkhu 여! 이것이 진실로 Dukkha(苦)의 소멸로 이끄는 실제진리[苦滅引道聖諦]는 이미 수행해 마쳤다는 이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는 Dhamma(法)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眼生], 앎이 생겼고[智生], 혜가 생겼고[慧生], 밝음이 생겼고[明生], 빛이 생겼다[光生].

16. bhikkhu 여! 만약 내가 4가지 실제진리[catū ariya sacca, 四聖諦]를 이와 같이 3번씩 12단계로 아주 분명히[suvisududdha, 善淸淨], 있는 그대로[yathā bhūta, 如實] 알아보지[ñāṅa dassana, 智見] 못했다면, bhikkhu 여! 나는 Deva(天神), Samāra(惡魔), Brahma (梵天), Samaṇa(沙門), Brahmaṇa(婆羅門), 인간(manussa, 人間)의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스승이고[anuttara, 無上師], 스스로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고[sammā sambuddha, 正自覺], 혼자 힘으로 원만히 깨달음을 성취[abhisambuddha, 圓滿自覺, 圓覺]했다고 스스로 선언(paṭijānāti, 宣言)할 수 없는 것이다.

bhikkhu 여! 만약 내가 4가지 실제진리[四聖諦]를 이와 같이 3번씩 12단계로 아주 분명히 있는 그대로 알아보았기[如實智見] 때문에, bhikkhu 여! 나는 Deva(天神), Samāra(惡魔), Brahma(梵天), Samaṇa(沙門), Brahmaṇa(婆羅門), 인간(人間)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無上師), 스스로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고(正自覺), 혼자 힘으로 원만히 깨달음을 성취(圓滿自覺, 圓覺)했다고 스스로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지견(智見)을 갖추었다. 나의 마음해탈[cetovimutti, 心解脫]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삶의 조건[有]이니 지금부터 다시는 새로운 삶의 토대를 갖추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Bhagava(世尊)가 설법하자 5bhikkhu 는 매우 기뻐했고[attamana歡喜], Bhagava(世尊)가 한 법문[abhinadati, 法門]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설법(veyyākaraṇa bhaññati, 說法, 問答, 記說, 授記)이 행해지고 있을 때 Koṇḍāñña(憍陳如) 존자(āysmato, 尊者)가 먼지가 없고[viraja, 無塵], 때가 없는[vitamala, ,無垢] 법안(dhamma cakkhu, 法眼)을 얻었다. 그리하여

「발생한 Dhamma[samudaya dhamma, 生法]는 무엇이나 모두 소멸하는 Dhamma[nirodha dhamma, 滅法]다.」

라고 깨달았다.

17. Bhagava(世尊)가 진리의 수레바퀴[dhamma cakka, 法輪]을 굴리자 땅의 신[ bhumma deva, 地神]이 소리쳤다.

Bhagava(世尊)가, 지금 Bārāṇasi Isipatana Migadāya(鹿野園)에서 최상법륜(anuttara dhammacakka, 最上法輪, 無上法輪)을 굴렸다. 이것은 Samaṇa(沙門), Brahma (梵天), Deva(天神), Samāra(惡魔), Brahmaṇa(婆羅門) 등 세상의 어느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땅의 신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 Cātu mahā rājika deva(四大王神)이 외쳤다. Tāvatiṁsa deva(三十三天神)도, Yāma deva(夜摩神)도, Tusita(兜率天神)도, Nimmāna ratī(化樂天神)도, Para nimmita vasavattī(他化自在天神)도 외쳤다. 그 외침을 듣고서 Brahma kāyika(梵身天)도 외쳤다.

Bhagava(世尊)가, 지금 Bārāṇasi Isipatana Migadāya(鹿野園)에서 최상법륜(最上法輪, 無上法輪)을 굴렸다. 이것은 Samaṇa(沙門), Brahma (梵天), Deva(天神), Samāra(惡魔), Brahmaṇa(婆羅門) 나 등 세상의 어느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외침은 순시간에 Brahma (梵天)까지 그 소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 일천세계(dasa sahassi lika dhātu, 一千世界)가 격렬하게 진동(saṁkampi, 振動)하고 Deva(天神)의 위엄(anubhāva, 威嚴)을 능가하는 한없이 장엄한 빛[uḷāra obhasa, 莊嚴光明]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때 Bhagava(世尊)는

「오 나의 벗이여! 참으로 Koṇḍañña(憍陳如)가 깨달았다[aññāsi, 阿若, 開悟)]. 참으로 Koṇḍañña가 깨달았다.」

라고 감흥을 읊었다. 그때부터 Koṇḍañña 존자는 Aññā Koṇḍañña(阿若憍陳如)로 불리어졌다.

18. 진실로 Aññā Koṇḍañña 존자는 Dhamma(法)를 보았고[diṭṭha dhamma, 見法], Dhamma(法)를 성취했고[patta dhamma, 得法], Dhamma(法)를 알았고[vidita, dhamma, 知法], Dhamma(法)를 꿰뚫었다[pariyogāḷha dhamma, 通法]. 의심을 극복했고[tiṇṇa vicikicchā, 度疑], 불확실함을 제거했고[vigata kathaṅkhatha, 離惑], 완전히 자기확신에 도달해 두려움이 없고[vesārajja patta, 得無畏], Buddha 가르침[satthusāsana, 師敎] 이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됐다[aparappaccaya, 無依存]. Aññā Koṇḍañña 존자가 Bhagava(世尊)에게 다음과 같이 청했다.

「Bhante(師)시여! Bhagava(世尊)시여! 저는 Bhagava(世尊)에게 출가(pabbajja, 出家)해 Upasampadā(具足戒)를 받고 싶습니다.」

Bhagava(世尊)가 말했다.

「오라 Bhikkhu 여[ehi bhikkhu, 善來比丘])! Dhamma(法)는 이미 잘 설해 놓았다[svākkhato dhamma, 善說法]. 올바르게 Dukkha(苦)를 소멸시키고자 하면 청정한 수행[brahmacariya, 梵行]을 하라.」

Aññā Koṇḍañña 존자는 이렇게 해서 Upasampadā(具足戒)를 받고 최초의 Bhikkhu 가 됐다.

19. 그때 Bhagava(世尊)는 나머지 Bhikkhu에게도 Dhamma(法)를 설했다. 그때 Vappa 존자와 Bhaddiya 존자가 먼지가 없고, 때가 없는 법안(法眼)을 얻었다. 그리고

「발생한 Dhamma[生法]는 무엇이나 모두 소멸하는 Dhamma[滅法]다.」

라고 깨달았다.

진실로 두 존자는 Dhamma(法)를 보았고[見法], Dhamma(法)를 성취했고[得法], Dhamma(法)를 알았고[知法], Dhamma(法)를 꿰뚫었다[通法]. 의심을 극복했고[度疑], 불확실함을 제거했고[離惑], 완전히 자기 확신에 도달해 두려움 없게 되고[得無畏], Buddha 가르침[師敎] 이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됐다. 그들은 Bhagava(世尊)에게 다음과 같이 청했다.

「Bhante(師)시여! Bhagava(世尊)시여! 저는 Bhagava(世尊)에게 출가(出家)해 Upasampadā(具足戒)를 받고 싶습니다.」

Bhagava(世尊)가 말했다.

「오라 Bhikkhu 여! Dhamma(法)는 이미 잘 설해 놓았다[善說法]. 올바르게 Dukkha(苦)를 소멸시키고자 하면 청정한 수행(梵行)을 하라.」

두 존자는 이렇게 해서 Upasampadā를 받았다.

Bhagava(世尊)는 탁발(piṇḍā, 托鉢) 해 온 음식을 먹고 난 뒤, 다시 나머지 Bhikkhu 에게 Dhamma(法)를 설했다. 이렇게 Bhagava(世尊)와 Bhikkhu는 3명이 탁발해 온 것으로 6명이 생활했다. 그리하여 Mahānāma 존자, Assaji 존자가 먼지가 없고, 때가 없는 법안(法眼)을 얻었다. 그리하여

「발생한 Dhamma[生法]는 무엇이나 모두 소멸하는 Dhamma[滅法])이다.」

라고 깨달았다.

진실로 두 존자는 Dhamma(法)를 보았고[見法], Dhamma(法)를 성취했고[得法], Dhamma(法)를 알았고[知法], Dhamma(法)를 깊이 꿰뚫었다[通法]. 의심을 극복했고[度疑], 불확실함을 제거했고[離惑], 완전히 자기 확신에 도달해 두려움 없게 되고[得無畏], Buddha 가르침[師敎] 이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됐다. 그들은 Bhagava(世尊)에게 다음과 같이 청했다.

「Bhante(師)시여! Bhagava(世尊)시여! 저는 Bhagava(世尊)에게 출가(出家)해 Upasampadā( 具足戒)를 받고 싶습니다.」

Bhagava(世尊)가 말했다.

「오라 Bhikkhu 여! Dhamma(法)는 이미 잘 설해 놓았다[善說法]. 올바르게 Dukkha(苦)를 소멸시키고자 하면 청정한 수행[梵行)을 하라.」

두 존자는 이렇게 해서 구족계를 받았다.

8) 무아법문(anttaparyyāyo, 無我法門)

20. 그때 Bhagava(世尊)는 5Bhikkhu 를 불러 말했다.

Bhikkhu여! rūpa(色)는 anatta(無我)다. 만일 Rūpa가 atta(我)라면 Rūpa에 병(ābādha, 病)이 생기지 않아야 하고, Rūpa(色)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어야[labbhati, 可能] 한다. 그러나 Bhikkhu 여! 어떤 것이라도 Rūpa(色)는 Anatta(無我)다. 그래서 Rūpa(色)에 병이 생기고, Rūpa(色)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Bhikkhu 여! Vedanā(受)는 Anatta(無我)다. 만일 Vedanā(受)가 Atta(我)라면 Vedanā-(受)에 병이 생기지 않아야 하고, Vedanā(受)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Bhikkhu 여! 어떤 것이라도 Vedanā(受)는 Anatta(無我)다. 그래서 Vedanā(受)에 병이 생기고, Vedanā(受)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Bhikkhu 여! Saññā(想)는 Anatta(無我)다. 만일 Saññā(想)가 Atta(我)라면 Saññā(想)에 병이 생기지 않아야 하고, Saññā(想)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ㅂ힉 쿠 여! 어떤 것이라도 Saññā(想)는 Anatta(無我)다. 그래서 Saññā(想)에 병이 생기고, Saññā(想)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Bhikkhu 여! Saṅkhāra(行)는 Anatta(無我)다. 만일 Saṅkhāra(行)가 Atta(我)라면 Saṅkhāra(行)에 병이 생기지 않아야 하고, Saṅkhāra(行)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Bhikkhu 여! 어떤 것이라도 Saṅkhāra(行)라는 Anatta(無我)다. 그래서 Saṅkhāra(行)에 병이 생기고, Saṅkhāra(行)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Bhikkhu 여! Viññāṇa(識)는 Anatta(無我)다. 만일 Viññāṇa(識)가 Atta(我)라면 Viññāṇa(識)에 병이 생기지 않아야 하고, Viññāṇa(識)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Bhikkhu 여! 어떤 것이라도 Viññāṇa는 Anatta(無我)다. 그래서 Viññāṇa(識)에 병이 생기고, Viññāṇa(識)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21. Bhkkhu 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Rūpa(色)는 Anicca(無常)인가?

Bhante(師)시여! Anicca(無常)입니다.

그러면 만일 어떤 것이든지 Anicca(無常)라면 그것은 Dukkha(苦)인가 Sukha(樂)인가?

Bhnate(師)시여! Dukkha(苦)입니다.

그러면 만일 어떤 것이든지 Anicca(無常)하고, Dukkha(苦)하고, 변하는 Dhamma[vipariṇāma dhamma, 變法]를 이것은 나[eso aha asmi, 我]이고, 나의 것[etaṁ mama, 我所]이고, 나의 Atta[eso me atta, 我我]라고 볼[samanupassati, 看做] 수 있겠는가?

Bhnate(師)시여!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Bhikkhu 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Vedanā-(受)는 Anicca(無常)인가?

Bhnate(師)시여! Anicca입니다.

그러면 만일 어떤 것이든지 Anicca(無常)라면 그것은 Dukkha(苦)인가 Sukha(樂)인가?

Bhnate(師)시여! Dukkha(苦)입니다.

그러면 만일 어떤 것이든지 Anicca(無常)하고 Dukkha(苦)하고, 변하는 것[變法]을 이것은 나(我)이며, 나의 것[我所]이며, 나의 Atta[我我]라고 볼 수 있겠는가?

Bhnate(師)시여!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Bhikkhu 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Saññā(想)는 Anicca(無常)인가?

Bhante(師)시여! Anicca(無常)입니다.

그러면 만일 어떤 것이든지 Anicca(無常)라면 그것은 Dukkha(苦)인가 Sukha(樂)인가?

Bhante(師)시여! Dukkha(苦)입니다.

그러면 만일 어떤 것이든지 Anicca(無常)하고, Dukkha(苦)하고 변하는 것[變法]을 이것은 나[我]이고, 나의 것[我所]이고, 나의 Atta[我我]라고 볼 수 있겠는가?

Bhnate(師)시여! 그렇게 불 수 없습니다.

Bhikkhu 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Saṅkhāra(行)는 Anicca(無常)인가?

Bhnate(師)시여! Anicca(無常)입니다.

그러면 만일 어떤 것이든지 Anicca(無常)라면 그것은 Dukkha(苦)인가 Sukha(樂)인가?

Bhnate(師)시여! Dukkha(苦)입니다.

그러면 만일 어떤 것이든지 Anicca(無常)하고, Dukkha(苦)하고, 변하는 것[變法]을 이것은 나[我[이고, 나의 것[我所]이고, 나의 Atta[我我]라고 볼 수 있겠는가?

Bhnate(師)시여!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ㅂ힉 쿠 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Viññāṇa(識)는 Anicca(無常)인가?

Bhnate(師)시여! Anicca(無常)입니다.

그러면 만일 어떤 것이든지 Anicca(無常)라면 그것은 Dukkha(苦)인가 Sukha(樂)인가?

Bhnate(師)시여! Dukkha(苦)입니다.

그러면 만일 어떤 것이든지 Anicca(無常)하고, Dukkha(苦)하고, 변하는 것[變法]을 이것은 나[我]이고, 나의 것[我所]이고, 나의 Atta[我我]라고 볼 수 있겠는가?

Bhnate(師)시여!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22. Bhikkhu 여! 그러므로 어떤 Rūpa(色)에 대해서도 과거(atīta, 過去)의 것이든, 현재(paccuppanna, 現在)의 것이든, 미래(anāgata, 未來)의 것이든, 내적인 것[ ajjjhatta, 內的]이든, 외적인 것[ bahiddha, 外的]이든, 거친 것[oḷārika, 麤]이든, 섬세한 것[sukhuka,(細]이든, 열등한 것[hīna, 劣]이든, 뛰어난 것[māha, 優]이든, 멀리 있는 것[dūre, 遠]이든, 가까이 있는 것[santika, 近]이든, 모든 Rūpa(色)는 내[我]가 아니고, 나의 것[我所]이 아니고, 나의 Atta[我我]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如實) 올바른 지혜[sammā paññā, 正慧]로 보아야 한다.

Bhikkhu 여! 그러므로 어떤 Vedanā-(受)에 대해서도 과거의 것[過去]이든, 현재의 것[現在]이든, 미래의 것[未來]이든, 내적인 것[內的]이든, 외적인 것[外的]이든, 거친 것[麤]이든, 섬세한 것[細]이든, 열등한 것[劣]이든, 뛰어난 것[優]이든, 멀리 있는 것[遠]이든, 가까이 있는 것[近]이든, 그 모든 Rūpa(色)는 내[我]가 아니고, 나의 것[我所]이 아니고, 나의 Atta[我我]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如實] 올바른 지혜[正慧]로 보아야 한다.

Bhikkhu 여! 그러므로 어떤 Saññā(想)에 대해서도 과거의 것[過去]이든, 현재의 것[現在]이든, 미래의 것[未來]이든, 내적인 것[內的]이든, 외적인 것[外的]이든, 거친 것[麤]이든, 섬세한 것[細]이든, 열등한 것[劣]이든, 뛰어난 것[優]이든, 멀리 있는 것[遠]이든, 가까이 있는 것[近]이든, 그 모든 Rūpa(色)는 내[我]가 아니고, 나의 것[我所]이 아니고, 나의 Atta[我我]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如實] 올바른 지혜[正慧]로 보아야 한다.

Bhikkhu 여! 그러므로 어떤 Saṅkhāra(行)에 대해서도 과거의 것[過去]이든, 현재의 것[現在]이든, 미래의 것[未來]이든, 내적인 것[內的]이든, 외적인 것[外的]이든, 거친 것[麤]이든, 섬세한 것[細]이든, 열등한 것[劣]이든, 뛰어난 것[優]이든, 멀리 있는 것[遠]이든, 가까이 있는 것[近]이든, 그 모든 Rūpa는 내[我]가 아니고, 나의 것[我所]이 아니고, 나의 Atta[我我]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如實] 올바른 지혜[正慧]로 보아야 한다.

Bhikkhu 여! 그러므로 어떤 Viññāṇa(識)에 대해서도 과거의 것[過去]이든, 현재의 것[現在]이든, 미래의 것[未來]이든, 내적인 것[內的]이든, 외적인 것[外的]이든, 거친 것[麤]이든, 섬세한 것[細]이든, 열등한 것[劣]이든, 뛰어난 것[優]이든, 멀리 있는 것[遠]이든, 가까이 있는 것[近]이든, 그 모든 Rūpa는 내[我]가 아니고, 나의 것[我所]이 아니고, 나의 Atta[我我]가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如實] 올바른 지혜[正慧]로 보아야 한다.

23. Bhikkhu여! 이와 같이 들은 것이 많은 나의 성스러운 제자[suta ariya sāvaka, 聲聞聖第子]라면, 그들은 Rūpa(色)에 대해서 싫어하고[nibbindati, 厭離], Vedanā-(受)에 대해서 싫어하고, Saññā(想)에 대해서 싫어하고, Saṅkhāra(行)에 대해서 싫어하고, Viññāṇa(識)에 대해서 싫어한다. 그것[存在]에 대해서 싫어하게 됨으로써 그것[存在]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벗어났다[virajjati, 離貪]. 그것[存在]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그것[存在]의 구속으로부터 해탈(vimuccati, 解脫)했다. 그것의 구속으로부터 해탈했기 때문에 해탈해있음[[vimuttamhī, 解脫]을 스스로 알고[ñāṇa, 智] 선언하는 것[bhavati, 有]이다.

「나의 태어남은 끝났다[jāti khīṇa, 生滅].

청정한 수행은 완성되었다[brahmacariya vusita, 梵行終].

해야할 것을 모두 실천했다.

지금 이 삶[itthatta] 이외의 다른 삶[apara]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pajānāti, (了知].」

24. Bhagava(世尊)가 이와 같이 설하자, 기쁨으로 충만된 5Bhikkhu 는 그 기쁨[歡喜]을 Bhagava(世尊)에게 말했다. 그렇게 법문이 설해지자 5Bhikkhu는 집착(upādiyati, 執着)이 사라지고, Āsava(流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했다[citta vimuccati, 心解脫]. 그때 이 세상에는 Arahant가 6명이 되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 살았을 때 고통스러웠다는 말은 이상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이 맞다면 극락에 계신 부처님은 죽었다는 말이 되니까요.

극락에 계신 부처님은 죽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웃음이 죄가 되는가 하는 것은

그 웃는 마음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남의 불행을 보고 웃는 것이라면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그것은 악업이 됩니다.

그러나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남의 행복을 즐거워하는 웃음이라면 그것은 선업입니다.

오역죄란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는 것,

부처님 몸에 의도적으로 피가 나게 하는 것,

아라한을 죽이는 것

스님들의 화합을 깨는 것

이상 다섯 가지인데요.

부처님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을 보고 웃는 것으로는 오역죄는 아닙니다.

그냥 악업입니다.

오역죄요.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 살았을 적에 고통스러우셨다는데, 제가 웃는표정을 짓었으면 오역죄를 짓은 건가요? 제발 작은 죄이길 바래요. 마니 부처님께 귀의하옵고...

오역죄요.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 살았을 적에 고통스러우셨다는데, 제가 웃는표정을 짓었으면 오역죄를 짓은 건가요? 제발 작은 죄이길 바래요. 아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