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David(인명)
(Dauivd, David) 「사랑함」
이스라엘 제 2대의 왕(재위 BC 1060-1021, 1010- 971)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다 지파 이새의 막내 아들로 베들레헴에서 출생했다. 고대의 전설에 따르면, 다윗의 재위는 BC 1055- 1015이라고도 한다. 그의 출생도 BC 1085년, 또는 BC 1040년(삼하 5:4에 근거)설이 있어 구구 각각이다.
다윗에 관한 이야기는
① 사무엘상 16장- 열왕기상 2장 까지와,
② 역대상 2, 3, 10-29장의 기사,
그리고 ③ 많은 시편의 표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중에서 ①은 가장오래된 것으로서 가장 신빙할 만한다. 역대서에 기록된 역사의 대부분은 직접 사무엘서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또 이외의 자료에서 인용한 것도 적지 않다. 이 책에 기록된 다윗은 이상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건설자로서 경신자(敬神者)의 본으로 생각한 기원전 3세기의 경건한 유대인의 마음에 그려진 자이다.
또, 시편 중 73편은 그 표제에 다윗의 작품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다윗의 생애에 일어난 어떤 특수한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시편으로 다윗의 역사, 또는 성격을 증명하기란 어렵다. 따라서 다윗의 역사로서 우리가 증거할 것은 주로 사무엘 전후서(왕상 1,2장과같이)이다. 사무엘상 9-20장과 역대상 1, 2장의 기사는 가장 오래된 것이고, 가장 귀중한 것이고, 기타 저서는 비교적 만대(晩代)에 속한다고 한다. 이제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살펴보자.
(1)목동 다윗: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지냈다. 8형제 중 막내(삼상 16:10,11,17:12-14)인데, 계보(대상 2:13-15)에는 7명밖에 없다. 그 중 한 사람은 자식 없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새의 조상에 대해서는 사무엘서에 이것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룻기의 계보에 이새는 오벳의 아들, 보아스의 손자로 되어 있으며, 베레스까지 올라갔다(룻4:18-22). 다윗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섬긴 경건한 부인이었다(시 86:16,116:16). 그의 조상에 대한 기록은 아름답고 훌륭하나, 때로는 죄의 오점(汚點)도 섞여 있다(창37:26,27,38:13-29,43:8, 9, 44:18- 34, 민 1:7,수 2:121,룻 4:17-22).
소년 다윗은 혈색이 좋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삼상 16:12). 아버지의 명령으로 양을 지키고 있을 때, 덤벼드는 사자나 곰을 쳐 죽여 임무에 대한 충실성과 용기를실증했다(삼상 17:34-36). 음악적 소질이 비상하여 이 무렵 수금을 잘 탄다는 것이 알려졌고, 전술한 바와 같이, 후에는 시도 많이 썼다.
사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어 사울의 뒤를 이를 자로서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하였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가서 그의 아들들을 차례로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그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시므로써, 일곱 아들은 택하지 않으셨다. 이 때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던 막내 다윗을 불러오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 16:12)고 말씀하시니, 사무엘이 기름뿔을 취하여 다윗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그는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
그러나, 이 때 사울의 적의(敵意)를 일으키게 할까봐 아무런 공적 선언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 곳 장로들 앞에서 행해졌다는 점에 공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기사에 한해서는 이 기름 부은 목적이 사람들에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삼상 16:4,5,13). 그러나, 이새와 다윗에게는 말했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제 1의 전기(轉機)이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크게 임하셨다. 그러나, 그는 일상자기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2)사울을 섬긴 다윗: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했으며, 우울병에 걸려 광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고는 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의 병이 도질때, 그의 위로가 되게 수금을 잘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해서 가까이 모시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진언했다. 한 신하가 다윗을 추천하면서 수금을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라고 말했다.
사울은 다윗을 불러다가 음악으로 위안을 받고, 그의 인품도 또한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드는 자로 삼았다(삼상 16:19-23삼하 18:15). 이렇게 비롯된 다윗의 새 일은 그에게 대하여 좋은 훈련이기도 하였다. 그는 군사와 정치를 배우고, 유능한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궁중 생활의 좋은 면 뿐만 아니라 나쁜 면도 관찰했다.
그러나, 아직 다윗은 상루 옆에 늘 붙어 있지 않고 사울의 병증세가 나을 때는 베들레헴에 돌아와 양을 쳤다(삼상 17:15). 다윗이 집에 있을 때에 블레셋 사람이 유대에 침입하여 베들레헴의 서쪽 24km 지점에 포진했다. 사울은 이스라엘 군을 이끌고 이를 맞았다. 다윗의 세 형은 이 군대에 들어가 있었는데, 종군 6주일 후 아버지는 그들의 위문을 위해 다윗을 보냈다. 다윗이 전장에 이르러 형들에게 문안할 때에 블레셋 사람의 싸움을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는 자가 항오에서 나와 도전하는 오만불손한 말을 듣자, 다윗의 마음은 끓어 올랐다. 이스라엘 군은 무서워 도망쳤다.
사울 왕은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는 많은 재물과 딸을 주고, 그 아비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하겠다고 현상을 걸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모욕을 제거해 주시리라 확신하고, 이렇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블레셋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다윗은 사울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의 결심을 표명하니, 사울은그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축복하고, 자기 군복과 놋투구, 그리고 갑옷을 입히고 칼을 채웠으나, 그는 이를 사양했다. 골리앗은 무거운 투구를 입고 있어 동작이 둔하여 접근하지 않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다윗은 매끄러운 돌다섯 개와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을 대적하러 나갔다. 하나님에게 대한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대적에게 향한 것이다. 골리앗의 큰 호통과 저주에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5-47)고 말하면서, 돌을 물매로 던져 골리앗의 이마를 치자, 그는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삼상 17:49).
다윗이 달려가서 골리앗의 머리를 베니 대적들은 도망치고 이스라엘과 유다 군은 대승하였다. 그는 골리앗의 머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칼은 성막에 바쳤다(삼상 17:54,21:9).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나갈 때, 또 승리자로서 돌아왔을 때, 그가 누구 아들인가라는 질문은 다윗의 가계(家系)에 대한 사울의 관심에 관계가 있었다(삼상 17:55). 왜냐하면, 사울은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는 딸을 주고, 그 아비의 집은 면세(免稅)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삼상 17:25,18:18). 사울은 다윗이 자기 사위로서 부끄러울 것 없는 가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골리앗에 승리한 것은 다윗 인생의 제 2의 전기였다.
이때부터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깊은 우정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나단은 그를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했다(삼하 18:1). 이 두 이야기를 조화시키려는 기도(企圖)가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행해졌으나, 이렇다할 만족을 얻지 못했다.
다윗은 그때부터 궁중에 있게 되고, 자기의 집으로 가는 것을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요나단은 그에게 겉옷˙군복˙칼˙활˙띠 등을 주었다. 다윗이 사울의 시키는 모든 일을 지혜롭게 잘 처리하니 왕은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다. 이렇게 그가 궁중에서 지위는얻었지만, 그의 명성때문에 사울의 질투를 받았다. 즉, 다윗이 개선할 때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여인들이 나와 노래하며, 춤추며, 북을 치면서 환영했는데, 그들은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뛰놀며 화창했다. 이 말을 들은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다(삼상 18:6-9). 나라를 자기보다 나은 자의 손에 주셨다는 사무엘의 예언(삼상 15:17-29)이 다윗에게 실현된다고 본 사울은,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했다(삼상 18:10,11).
즉, 왕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창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피하여 실패했다. 사울은 그를 두려워하여 멀리하기 위해 천부장으로 삼았다(삼상 18:13). 온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은 다윗을 사랑하였다.사울은 다윗의 아내로 주겠다던 맏딸 메랍을 아드리엘이라는 자에게 주어 그 약속을 어겼다(삼상 18:17-19). 또 사울은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블레셋 사람의 양피 100을 가져오면 딸을 주겠다고 말했다. 다윗도 미갈을사랑했으므로 그는 블레셋 사람 200을 죽이고 그 양피를 왕에게 바치고 사위가 되었다(삼상 18:20-27).
다윗의 평판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사울의 두려움도 커졌다(삼상18:29,30). 이렇게 되니 다윗을 없애려는 살해 의도는 공공연하게 되었다(삼상 19:1). 사울은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공공연히 내렸던것이다.
다윗을 사랑하는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려하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무슨 일이 생기면 알리겠다"고 하고 왕에게 나가서 다윗이 아무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사울이 아들의 말을 받아들여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므로 다윗이 다시 왕 앞에 있게 되었다. 그 후 전쟁이 다시 일어나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무찔렀다(삼상 19:8). 사울에게 악신이 접하자, 수금타는 다윗에게 그는 또 창을 던졌으나, 이번에도 이를 피한 다윗은 그 밤에 집으로 도망쳐 갔다. 그리고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창문에서 달아 내리움을 받아 성밖으로 도망쳤다(삼상 19:17).
다윗은 그 길로 사무엘을 찾아 라마 땅 나욧으로 갔으나, 추격의 손길이 그 곳까지 미치었다(삼상 19:18-22). 그리하여 다윗은 요나단에게로 도망쳤다. 요나단은 다윗을 에셀 바위에 숨겨두고, 월삭제의 축연에 나가 다윗을 변명해 주다가 아버지 사울에게죽을 뻔 했다(삼상 20장).
(3)쫓기는다윗: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놉의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왕명이라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먹을 것과 칼을 얻었다. 여기서 다윗의 옛날 신앙과 용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삼상 21:1-9). 그 곳에서 다윗은 사울의 대적인 아기스에게 보호를 구하여 가드로 갔다.
그러나, 이 블레셋(가드는 그 5개 중요 성읍의 하나) 왕은 그의 보호를 거부하고 오히려 붙잡았으므로(삼상21:14,시 56편표제)다윗은미치광이를 가장하여 간신히 석방되었다(시 34편표제).그는신앙을다시 찾고(시 34편)유대로돌아와아둘람 굴에 숨었다(삼상 22:1).
그러나 그의 부모는 모압으로 도망갔다(삼상 22:3,4).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사모하여 부하로 따랐다. 그 중에는 놉의 제사장 아비아달과 선지자 갓도 있었으므로(삼상 22:5,20,26:6) 신앙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다윗은 그일라의 위급함을 듣자, 자신의 위험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구출했으나, 그는 배신하여 다윗을 사울에게 내어주려고 하였다.
이 때 요나단은 다윗을 찾아 위로하고 장래 다윗은 왕이 되고, 자기는 그 다음이 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갔다(삼상 23:1-18). 이 시기에 다윗은 몇 번씩이나 사울에게 목숨을 빼앗길 뻔한 아슬아슬한 일도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으므로 모면했다. 그는 어떤 때는 사울의 생명을 구해 주기도 했다.
한번은 다윗과 그 일행이 동굴에 들어가 있는데, 사울이 잠을 자기 위해 그 굴에 들어왔으므로 그를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기름부은 자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일행의 결행을 만류하고, 후일에 증거로 삼기 위해 겉옷 자락만을 가만히 벴다. 다윗은 그 후 사울에게 그 옷깃을 보이면서, 자기의 살의가 없음을 사울에게 애소하였다. 사울은 일시적, 또는 감정적이나마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삼상 24장).
다윗과 그 일행은이스라엘 사람의 재산을 도적의 손에서보호해 주고(삼상 23:1,25:16,21,27:8) 그 사례로써 식물을 받았으나, 조세와 같이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발의 무례한 거절에 대해서는 하마터면 큰 피를 볼 뻔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의 현명한 조처로 화를 면하고 후에 그녀는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삼상 25:24-34). 또 한번은 자기를 추격하는 사울과 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거느리는 정병 3,000의 진에 잠입하였다가 취침하는 사울을 죽이라는 부하를 타이르고 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서 아브넬의 불충을 책망하였다(삼상 26:5-16).
그 후에도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어 유대를 떠나 블레셋(가드)으로 다시 건너가 아기스 왕에게로 갔다. 그는 시글락이라는 한 성읍을 얻어 거기서 살았다. 그는 생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구원<舊怨>도 있지만) 아멜렉을 쳐서 우양을 노략질하고도 아기스에게는 유다를 쳤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또 실수를 했다. 거기서 그는 1년 4개월지냈다(삼상 27장).블레셋사람과사울이 길보아에서 싸울 때에, 다윗은 다행히 참전을 면했다(삼상 28:1,2,29장).
이 전쟁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그 부자(父子)를 위해 애가(哀歌)를 지었다(삼하 1장).
(4)유다왕으로써의 다윗:
사울의 죽음으로 다윗은 유대 사람에게 왕으로 추대되어 헤브론에서 살면서 유다를 다스렸다(삼하 2:1-10). 때에 그의 나이는 30세였다(삼하 5:4). 그리고 이스라엘의 다른 11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2년 간양 자의 사이에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이 전쟁은 이스보셋이 암살됨으로써 끝났다(삼하 2:12-4:12).
다윗의 헤브론 시대는 7년 반 계속 되었으며, 점점 강하여져 여섯 아내로 부터 여섯 아들을 얻었다. 이것은 가정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아 다윗에게 대립시킨 것은 아브넬의 소위(所爲)인데, 그는 자만하여 사울의 첩과 상통하였는데 이스보셋이 이를 책망하자 아브넬은 다윗에게 충성키로 하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베냐민인을 규합하여 다윗에게 귀순하였다. 그의 태도는 야비하나, 다윗을 이스라엘 전국 왕으로 추대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삼하 3:1-21).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했을 때, 다윗은 이를 슬퍼하여 장사하고 애가를 지어 부르니 전 국민의 신뢰감은 더욱 두터워졌다.
(5)이스라엘 왕으로써의 다윗:
이스보셋의 사망으로 다윗은 이스라엘 12지파 전체로부터 왕으로 추대를 받음과 동시에, 왕국 확립 사업에 착수하였다(삼하 5:1-5). 당시 이스라엘의 성읍 몇 개는 블레셋과 가나안 사람에게 빼앗겼었다. 다윗은 우선 여부스사람이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것을 수도로 하였다. 이 도성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경계에 있으므로 양자의 반목을 완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도성이 가나안 사람의 손에서 해방된 것은 남북의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왕국의 결합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후 블레셋 사람이 두번씩이나 침입했으나, 다윗에게 완패하여 왕국은 평정되었다(삼하 21:15-22). 나라가 안정되자 다윗은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에게 빼앗겨 기럇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다(삼하 6장).이때다윗은소를잡고 전 국민과 더불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노래 부르며 춤추었다. 다음에는 예배 의식을 성대히 정하고(대상 15,16장)웅장한성전건축을 계획하였다(삼하 7장,대상17장).나라의안전을공고히 하기 위하여 또 우상 종교로부터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계속적으로 주변 제국과 싸워 이를 정복하여(삼하8장, 10장, 12:26- 31) 그 국경은 옛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까지 확장되었다(창 15:18).
또한 다윗은 사울의 유족을 찾아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자처럼 후대하여 옛 친구의 은혜를 갚는 것도 잊지 않았다(삼하 9:9-13). 다윗 왕권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융성하였으나, 한 큰 범죄로 그의 영혼은 급전직하 흑암의 무저갱으로 떨어지게되었고, 가정은 고통 당하게 되었다.
즉, 그가 헷 사람 우리아에 대해 큰 죄를 범했는데, 이것은 대(對) 암몬 전쟁때의 일이다. 다윗이 왕궁에서 낮잠을 자다 깨어나 충장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목욕하는 것을 보고 음욕이 일어 불러다가 간음하여 잉태케했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일선에서 우리아를 소환시켜 그 아내와 동침시키려고 했으나, 충성스러운 우리아는 일선 장병을 생각하고 왕의 귀가 권유를 사양했다. 다윗은 음모가 실패하자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아를 사지에 몰아넣도록 하여 죽게 했다. 그리고 밧세바를 아내로 취하였다(삼하 11장).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비유를 들어 죄를 핑계치 못하게 한 다음, 단도직입적으로 책망케했다(삼하 12장).이에다윗은즉시진심으로 회개하였다(시 51편).하나님의 징계는 일부는 직접, 일부는 이후의 사건 중에 당연한 결과로써 나타났다. 불의의 씨인 아들이 죽고(삼하 12:19) 불법적인 욕정과 복수는 그의 가족을 파괴했다. 불효한 왕자의 야심은 내란으로까지 발전하고(삼하 13-19장)이때의여파는그 후 다시 한번 세바의 반역으로 나타났다(삼하 20장).즉,이복남매암논이 다말을 욕보이고,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암몬을 죽이고 도망쳤다.
그 후 부왕의 용서를 받고 귀국한 압살롬은 인심을 얻어 왕인 아비에 반역했므로, 다윗은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고,압살롬은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러나 다윗 군과 압살롬의 군이 싸울 때에 압살롬은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 살해되었다.
내란이 일단 끝나자, 다윗은 민심을 잘 수습하지 못한 채 환궁하였다. 국권이 회복되자,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병원수(兵員數) 증강을 위해 인구 조사를 하므로써 인본주의, 교만죄에 걸려 하나님의 징계를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갓을 통하여 ⓧ 3년 흉년, ⓨ 3개월 대적에게 쫓김, ⓩ 전국에3일간의 온역, 이 세 가지 중에서 택일하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께 징계 받기를 원해ⓩ을 택했다. 그 결과 죽은 자가 7만 명에 달했다.
다윗의 치세는 솔로몬의 즉위 확정, 요압과 시므이에 대한 처벌 및 바실래의 후손에 대한 후대를 유언함으로써 끝났다(왕상 1장,2:1-11).
그는 40년 치리했는데, 7년 반은 헤브론에서, 33년은 예루살렘에서 하고, 71세에 사망했다(삼하 5:4,5,왕상 2:11).
결론적으로 다윗은 일찍부터 이스라엘의 가인(歌人)으로서 명성을 떨쳤다(삼하 23:1). 히브리 전설에서는 시편의 태반은 상술한 바와 같이 다윗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가 음악을 애호한 것, 수금을 잘 탔다는 것, 성전에서 부를 찬송가를 지었다는 것 등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삼상 16:18-23,삼하 6:5,대상 6:31,16:7,41,42,25:1, 암 6:5,스 3:10,느 12:24,36,45,46). 시편 중 73편은 히브리어의 표제로 다윗의 작품이라고 한다.
59편과 7편은 아직 다윗이 사울의 궁전에 있을 때,34˙52˙54˙56˙57˙63˙117의 각 편은 피난의 곤란한 시기에, 그리고 3˙18˙30˙51˙110편 등은 그가 왕이 되어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있을 때의 작품이다. 그는 큰죄를 범하여 흑암의 시기도 있었으나, 총체적으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 13:14)이라고 부르기에 합당하였다.
그는 우리아의 일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왕상 15:5).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다(행 13:36). 그가 인류에게 준 감화는 너무나 크다.
그의 시편은 몇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 교회에서 애창되어 그의 영적 영향이 후대에 까지 미치고 있다. 다윗이야말로 다음에 오신 `다윗의 자손'임과 동시에 `다윗의 주'이신 분을 위해 그 조상들의 계보 사슬 중에서 특히 중대한 고리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마 1:1,22:4145).
<참고>
약속된 크신 임금, 즉 메시야도 역시 '다윗'이라고 불리운다(렘 30:9,겔 34:23,호 3:5). 오래전부터 메시야의 나라도 '다윗의 나라'라고 불리워 오고 있다(막 11:10).
즉, 거기서 주님은 '다윗의 위'에 앉아 다스리며(렘 22:2,4),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계 3:7). 이 모든 표현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한량없으신 자비를 말하며(사 55:3,삼하 7:12), 곤고한 날에 이스라엘의 의지와(시 89:3,4,20,35,49,렘 23: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행 2:29)을 말하며, 특히`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마 1:1,막 10:47,눅 20:41)으로도 발견된다.
바벨론의 포로 이후 메시야의 내림의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야를 다윗의자손으로서 다윗의 왕국을 재현할 이상의 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삼하 7:12,13,사 9:7,16:5,렘 23:5,30:9,겔 34:23,24,37:24).
이와 같은 배경에서 메시야는 다윗의 가계(家系)와 연결되는 관계상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의 칭호이다. 마태의 계보(마 1:1)는 물론 바울도 로마서 1:3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혈통(씨)에서 나셨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자칭한 일은 없지만, 최후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소경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부르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으셨다(막 10:47). 메시야인 예수를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에는 계보 이외에도 이 호칭이 눈에 띄게 많다(9:27, 12:23, 15:22, 20:30, 31, 21:9, 15).
또, 주의 통치에 대하여 예루살렘 거민 중에서 가장 약한 자가 그날에는 다윗과 같게 된다는 예언도 있다(슥 12:8).
유다인들이 처음에 시편을 부른 이름은 ‘기도(트필롯)’였어요. 그러다 후대에 가서는 ‘찬양(트힐림)’ 또는 ‘찬양의 책’이라 불렀어요. 구약성서에서 찬양하라는 동사(hll)의 2/3 이상이 시편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아무튼 기도와 찬양은 시편의 두 측면이죠. 그리스어 성서는 시편이 “현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그리스어 psallo)” 것이라 하여 ‘프살모이(psalmoi, 찬미가)’라 불렀어요. 시편의 영어 이름(psalms)도 여기서 연유하였죠. 우리 말 성서 이름 ‘시편’은 시모음집이라는 뜻의 중국어 성서 이름 ‘시편(詩篇)’을 딴 것이구요.
시편 이외에도 성서에 나오는 노래는 적지 않아요. 이런 노래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었기 때문에, 원작가를 밝히기가 쉽지 않아요. 시편에도 첫머리에 다윗, 아삽, 코라의 후손, 모세 등의 작품이라고 나와 있으나, 이들의 작품으로 확인할 수는 없어요. 시편은 사실상 하느님 백성 전체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다만, 다윗은 음악을 즐기고 시와 노래로 하느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린 대표적인 인물이기에, 자연스럽게 시편의 대부분을 그의 작품으로 여기게 된 것이죠.
시편은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었어요. 아마도 대부분은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황금시기인 기원전 10세기와 가장 어려웠던 시대인 바빌론 포로기 전후에 생겨났을 거에요. 이런저런 시들이 한데 모아져 현재와 비슷한 꼴로 형성된 것은 대략 기원전 2세기경으로 여겨져요. 그때 모세오경을 모방해서 시편을 다섯 권(시편 1-41; 42-72; 73-89; 90-106; 107-150)으로 나누었을 거에요.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가리켜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책과 시편들”(루가 24,44)이라 했어요. 즉 시편은 그 때까지도 완결되지 못한 성문서를 대표하는 성서로 꼽힌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유다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두루 애송하는 성서는 아마도 시편일 거예요. 하느님의 백성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고 어려운 처지에서는 구원을 탄원해 왔기 때문이죠. 비단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가 드리는 전례에서도 시편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죠.
시편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응답의 성서’라고 할 수 있어요. 오경 전체가 하느님이 하신 큰일을 전하고 예언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면, 시편은 하느님의 그 일과 말씀에 대한 하느님 백성의 응답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하느님이 하신 큰일들을 체험한 이들은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당신 백성을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아니 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며 사는 하느님의 백성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우리와 함께 해주시며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을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시편 19,14)라 고백해 왔던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시편 하나를 암송하시고 자주 되새겨 보십시오. 그 시편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바꿔 서로 나눠 보십시오.
먼저 시편은 사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른 아야기식 성서처럼 그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자주 읽으면서(가능하면 외우면서) 단어와 구절에 함축된 깊은 뜻을 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그 시편 저자의 내면세계로 들어가 그것을 느끼고 공감하며 더불어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죠.
또 시편은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 나아가 신약성서를 포괄하는 성서 전체의 맥락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시편 한 구절, 또는 한 편을 이해하려면 시편 전체의 흐름과 함께 성서가 대변하는 이스라엘의 신앙 맥락과 연관시켜 보아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훼는 나의 목자”(시편 23,1)란 구절만 보더라도, ‘야훼’라는 하느님 이름이 성서에서 드러내는 깊은 뜻과 그에 대한 다양한 신앙고백이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또 ‘목자’라는 말 속에는 자신이 양이라는 고백과 함께, 목축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생활양식은 물론 거기서 비롯된 목자와 양의 실질적 관계, 이 관계를 유비시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간의 관계를 가리켰던 다른 성서 표현 등이 다 담겨 있지요.
시편은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크게 찬양시, 탄원시, 감사시, 그밖의 시로 나뉩니다. 여기서도 그렇게 몇 가지로 나눠 함께 감상해 보겠습니다.
1. 찬양시
유일하신 절대자 하느님, 창조주 하느님,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따르는 하느님을 기리고 찬양하는 시편들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권유로 시작하여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나열한 다음, 다시 하느님을 찬양하거나 짧은 축복문 및 기도문으로 마무리하는 꼴로 짜여 있습니다. 대개 시편 8; 19; 29; 33; 67; 95-100; 103-106; 111; 113-114; 134; 136; 145-150편 등을 찬양시로 봅니다. 일례로 시편 8편을 감상하겠습니다.
시의 첫머리와 끝머리에서 시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기립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너무나 크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서 중심이 되는 하느님의 업적은 창조사업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타나는 창조 업적이 시인의 입을 빌어 다시금 묘사됩니다.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당신 창조의 중심에 놓으시고 뭇 만물을 돌보게 하셨는지, 시인은 다만 감격하여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본래부터 그럴 만한 자격이나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의 히브리서 저자는 이 시편을 빌어 예수님을 노래합니다(히브 2,6-9). 이 시편에 나오는 인간상이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던 것이죠. 여하튼 우리는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새삼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의 위치와 사명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가득이나 생태계의 위기를 느끼는 이 시대에, 이 짧은 시편의 울림은 크게 크게 번져 갑니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노래하면서.
2. 탄원시
박해를 받거나 죽음이나 질병 같은 심각한 고통을 받을 때 하느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구원해 주실 것을 탄원하는 내용이지요. 시인은 먼저 자신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뒤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합니다. 이어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하느님께 구원을 간청합니다. 이러한 탄원은 한 개인이 드리기도 했고,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와 예루살렘의 파괴 같은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집단적으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 유형이 시편에서 가장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탄원시는 시편 3; 5; 22; 25; 28; 44; 60; 74; 78-80; 83; 85; 90; 94; 102; 123; 137편 등입니다.한 예로 시편 22편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 시편은 울부짖음으로 시작합니다. 그 울부짖는 소리가 중반 이후까지 이어지다가, 구원자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마감됩니다. 지금 “뼈 마디마디 드러나 셀 수 있는” 처지에 빠진 이 시인이 겪고 있는 곤경과 어려움은 몹시 심각합니다. 그런 처지에서도 시인은 끝끝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의 구원을 맡겨 드립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감사시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행위의 위대함을 노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입니다. 시작은 찬양시와 비슷한데, 본문에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나열하면서 하느님께 영원히 찬미를 드리겠다는 약속과 지속적인 신뢰심을 표현한 다음, 끊임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함을 공동체에 권유하면서 미래지향적으로 끝맺고 있어요. 감사시에도 부분적으로는 탄원과 찬양의 내용이 들어 있어요. 사실 이 세 가지는 서로 어울려 다니거든요. 대표적인 감사시인 시편 18; 30; 32; 34; 40; 66; 92; 116; 118; 124; 129; 138편 등에서 18편을 살펴 보겠습니다.
* 시인이 하느님을 “나의 무엇”이라고 부른 열한 가지 표현을 찾아 보십시오(18,1-2. 28).
시인은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분이 베푸신 구원행위를 나열합니다. 하느님은 그를 “원수의 손에서”(3,17절), “거센 물 속에서 건져 주시고”(16절), “어깨를 펴게 해 주시고”(19절), “상을 내리시고”(20절), “붙들어 주시고”(26절), “적대자들 위에 높여 주셨습니다”(48절). 그렇기에 시인은 “그 고마움을 어찌 만민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당신의 이름을 노래하지 않으리이까?”(49절)하며 토로합니다.
시인이 고백하는 하느님은 “하늘을 밀어 제치시는”(9절) 자연의 주재자이시고, “옳게 살았다고 상을 내리시는”(20절) 정의의 하느님이십니다. 결국 시인은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인간이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뿐이시며(31절), “한마음으로 당신을 위하면 당신께서도 한마음으로 위해 주신다”(25절)고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사무엘 하권 22장에서 다윗의 노래로 나올 만큼 오래 된 노래입니다.
4. 그밖의 시편들
시의 주요 내용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사는 길을 일러주는 시편들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 곧 토라와 하느님의 말씀을 성실히 지키면 주님의 굄을 받지만, 그 말씀을 어기고 듣지 않으면 멸망에 이른다는 교훈을 심어 주지요. 대표적인 시편은 1; 9-10; 14; 19; 37; 73; 112; 119; 127-128; 133편 등이지요.
1편은 지혜시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시편 전체의 서시(序詩)이기도 해요. 비록 여섯 줄밖에 안 되는 짧은 시이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이 시는 행복으로 가는 길과 멸망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요.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고 그것을 위해 온갖 애를 다 쓰지만, 누구나 행복하진 않죠. 또 참된 행복이 무언지도 아리송하구요.
1편이 보여주는 행복한 사람은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2절)입니다. 여기서 법은 토라(율법)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전체, 곧 성서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지요. 되새기는 일 역시 머리 속으로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체험하고 고백하는 일이죠.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그 말씀에 젖어 사는 이들은 날마다 도처에서 자신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게 되죠. 그런 사람은 늘 싱싱하게 살며 제 철 따라 열매를 맺게 되어요. 반면에 아무리 부와 명예를 누려도 악인의 길은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이”(1,4) 아무 소득 없는 멸망의 길이라고 일러 주어요. 마치 이 시편은 격렬한 일생을 마치고 인생의 황혼에서 던져주는 한 선배 그리스도인의 충고이자 유언 같지 않으셔요?
이스라엘의 왕이 지녀야 할 덕과 해야 할 바를 알려 주며, 아울러 당신이 세우신 그 왕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았지요.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께서 ‘기름부은 자’였는데, 포로기 이후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가 다시 올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 곧 메시야로 이해되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시편들은 메시야 시편이라고도 불려요. 주요 시편은 2; 20-21; 45; 72; 89; 101; 110; 132; 144, 1-11 편 등이지요.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의 통치자는 절대주권을 갖지 않고 하느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느님의 주권을 벗어버리려는 헛일을 꾸미는가 묻습니다(1절). 하느님의 주권 아래서 그분의 가르침을 좇을 때만이 통치자의 권한은 정당성을 갖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은 하느님의 가소로움과 분노를 사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시편은 사도행전 4,25-26과 13,33에 인용되었죠. 물론 하느님의 말씀이 메시야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밝힙니다.
이외에도 시편은 하느님의 현존장소인 예루살렘을 기리는 시온시(46; 48; 76; 84; 87; 122편),순례시(121편), 전례시 등으로 나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