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와 개신교 구분법좀 알려주세요

천주교와 개신교 구분법좀 알려주세요

작성일 2008.10.08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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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들어가고싶은데 딴길로 샐까봐 두렵네요 -_-

 

'여기가 천주교다'라고 할 수 있는 느낌좀 알려주십쇼. 지식인들에게 도움요청합니다.

 

종교에 대해 공부하고싶은 어느 20살짜리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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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찬미예수님.

천주교와 개신교란 책의 내용인데,

제본을 하셔서 읽으셔도 되고 온라인 상으로도 읽으셔도 됩니다.

내용은 많지만 반드시 도움이 되실껍니다.

평화를 빕니다^^

1. 첫 대면

송양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송영애라고 하는 직장 여성이고 저의 종교는 개신교입니다.

박신부 예!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어쩐 일로 이렇게 사제관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송양 왜요? 저희는 사제관에 신부님을 찾아올 수 없나요?

박신부 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스스로 찾아주시니 너무 기뻐서 그러는 것입니다. 예! 어쩐 일이십니까?

송양 목사님! 아니 참 신부님! 미안합니다. 처음부터 실례를 하게 되었어요.

박신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 학생 하나가 며칠 전에 학교 선생님 앞에서 "선생님" 해야 할 것을 "신부님!" 했었대요. 그랬더니 선생님 말씀이 "네 입에는 그냥 신부님만 익어있구나."하더랍니다.

송양 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신부님? 저는요, 어릴 때부터 기독교 사정에 태어나서 기독교에서 세례까지 받았어요.

박신부 혹시 성당에서 세례 받은 것이 아닙니까?

송양 아니 기독교에서 세례를 받았다니까요.

박신부 그 기독교란 무슨 뜻인데요?

송양 아니 신부님도 참 웃기시네요. 기독교도 모르세요? 우리 개신교 말이에요.

박신부 처음부터 죄송합니다. '기독교'란 말은 '그리스도교'란 말의 한자표기어입니다. 한자로 그리스도를 기독(基督)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기독교라고 하면 불교나 유교와 구별되는 종교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교를 뜻합니다. 예컨대 가톨릭교,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등 모든 그리스도교인을 한자 표기로 해서 기독교 신자라고 하지요.

송양 아! 참 그래요? 그런데 밖에서는 그렇게 정확한 뜻으로 말하지 않아요. 그러면 가톨릭이란 무슨 뜻인데요?

박신부 아니, 오늘 송양이 저를 방문한 의도가 무엇인데 처음부터 화제가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송양 실은 오래 전부터 신부님을 한번 찾아 뵙고 여러 가지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을 직접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천주교의 여러 가지 모순점을 밝혀서 신부님과 교리 토론을 벌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박신부예! 좋습니다. 그럼 먼저 가톨릭이란 말의 뜻을 말씀드리지요. 우리 천주교의 세계적인 공통 용어가 곧 '가톨릭'입니다. 그 원어는 라틴어 Catholicus라는 형용사인데 그 뜻은 '보편된', '공번된'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전세계적이고 만인의 종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라틴어 어원에서 나온 말을 영어로는 Catholic이라고 하고 불어로는 Catholique 그리고 독일어로는 Katholik이라고 합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용어 문제를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천주교를 '가톨릭' 그리고 '구교', '성교회(聖敎會)' 또는 공교회(公敎會)라고 하고 가톨릭과 대조하여 개신교의 세계 공통 용어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하지요. 이 말은 1529년 독일 스파이어(Speyer) 회의에서 당시 일부 소위 개혁자들이 가톨릭 교회에 '프로테스트(항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개신교를 구교와 대조해서 신교라고도 합니다.

송양 오늘 신부님을 통해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극히 상식적인 것인데 이것을 이제야 알게 되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박신부 사람은 언제나 배워야 하는 법이지요. 그런데 송양이 가톨릭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송양 예! 죄송해요, 신부님! 오래 전부터 마음으로 생각했던 것이므로 오늘 솔직하게 털어놓겠어요!

천주교에서는 예수님보다 마리아를 더 공경하지요? 성당마다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고, 더구나 성서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일종의 우상숭배겠지요?

그리고 신부님도 천주교 신자들의 죄를 사해 주지요?

하느님 외에 누가 감히 사람의 죄를 사해줄 수 있겠어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고요. 그리고 천주교는 교권을 생명으로 내걸고 있고 교조주의 형식주의적인 의식위주의 종교가 아닌가요?

그리고 성서는 어떻게 되어 있어요? 신도들이 자유롭게 성서를 읽을 수 없고 또한 해석도 마음대로 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또... 이왕 말이 나왔으니... 천주교에서 옛날에 면죄부를 만들어 돈 받고 죄를 사해주었지요? 그리고 신부들의 독신생활은 성서에 어긋나는 생활이 아닌가요?

한마디로 천주교는 성서 말씀대로 하지 않고 교황의 말을 더 중요시해서 비성서적인 것 같아요.

박신부 예! 송양, 대단히 감사합니다.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많은 화젯거리를 주셔서 말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씩 한가지씩 말을 시작해 봅시다.

2. 가톨릭은 마리아 교회인가

박신부 송양!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어디지요?

송양 이스라엘 나라 베들레헴이지요. 새삼스럽게 이런 질문입니까?

박신부 죄송합니다, 송양!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을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송양 아직 가 보지 못했습니다. 차차 생활의 기반이 잡히면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할 계획입니다.

박신부 예?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을 왜 성지(聖地)라고 합니까?

송양 그거야 예수님이 그곳에서 태어나셨고 그곳에서 설교하셨고 드디어 거기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곳이기에 성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박신부 옳습니다. 저는 1970년에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에 소르본 가톨릭 학생 성지 순례단에 끼어 영광스럽게 성지 순례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송양, 예수님의 발자국이 지나간 그곳을 성지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를 당연히 성모(聖母)님이라고 해야겠지요?

송양 그건 그래요!

박신부 그렇다면 예수님의 발자국을 더듬어 보기 위해 수 만리 먼 나라에서 성지를 찾아 드는 그 정신이 옳다면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을 찾아 뵙고 존경과 경의를 표시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송양 글쎄요?

박신부 저의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 계십니다. 저의 어머니는 우리 신도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으시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도들이 "저 부인이 박 신부님의 어머니래!" 하면서 신부님을 존경하는 신도들은 당연히 그의 어머니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송양, 송양의 교회에 계시는 목사님의 어머님을 다른 평범한 사람의 어머니와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까?

송양 그러니까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한다는 것이지요?

박신부 그렇습니다. 성서를 펴 봅시다. 마태오 복음 1장18절부터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더불어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탄생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인류 구원을 위해 역사에 등장하시는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마리아라는 처녀를 특별히 간택하였습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할께 계신다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루가 1, 28-32)

성서에서 어느 누가 마리아처럼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하는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송양 예! 그건 그런데 말씀이지요, 여기 루가복음8장19절에서부터 보세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사람들이 많아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성서 구절은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박신부 개신교에서는 이 성서 구절을 내 세우면서 언제나 성모님은 그리스도로부터 외면 당한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올바로 알아듣는다면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부정한 뜻은 아닙니다. 육적인 어머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서로 형제들임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비록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니라고 했다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하면서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을 수락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육적으로 예수를 낳은 어머니시며 영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았기에 또 다른 의미에서도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든지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님이시라는 것은 부정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리아를 어머니로 생각하지 알았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마리아는 그 십자가 밑에서 아들의 고통을 슬퍼했을 것이며 더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 36-27)

이 말씀을 한번 분석해 봅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본 어머니 마리아를 버리고 얻은 새 어머니란 말씀입니까? 그렇지는 않지요. 즉시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아들로서의 슬픔이 너무나 컸기에 당신 사랑하는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는 인간 극치의 사랑이 아닙니까?

우리는 성서를 너무 편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서에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관계는 여러 군데 나오지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면 그를 낳은 어머니를 그렇게 냉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송양 예, 그건 다소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하는데 이건 좀 .

박신부 예! 우리가 성모님에게 기도를 하지마는 그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께 하는 기도와 다릅니다.

송양 그럼 기도도 종류가 여러 개 있나요?

박신부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송양! 구노의 '아베마리아'아시지요?

송양 예, 제가 좋아하는 클래식 중 하나입니다.

박신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베마리아, 그라씨아 플레나 ." 이 뜻은 바로 성서에서 제시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기뻐하소서‥‥‥" 하는 뜻이지요 그 아베마리아는 '성모송'이라는 가톨릭의 기도문입니다. 소개해 보겠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의 내용을 생각해 볼 때 기도문의 전반부는 모두 성서에 나타난 찬사를 딴 것이고 후반부는 "마리아여, 지금 그리고 특히 우리가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해 빌어 주소서."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유의할 것은 "우리를 위해 빌어 주소서." 이 내용입니다. 하느님께는 직접 "주님, 저의 잘못을 용서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지만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와 제일 가까운 분입니다. 송양도 개신교에서 어느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떤 기도를 부탁한 적이 있으시지요?

송양 예, 있습니다.

박신부 같은 내용입니다. 목사님의 기도가 보통 평신도의 기도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듯이 예수님을 낳아서 기르신 마리아의 기도는 어느 누구의 기도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송양 그러면 마리아의 기도가 더 큰 효과가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박신부 예, 그건 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2장을 펴 보십시오.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요한 2, 1-11)

이 성서 구절을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알아듣는지 궁금합니다.

첫째로 잔칫집에서 술이 떨어지면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성모 마리아가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자기의 아들은 하느님의 능력의 소유자임을 알았기에 마리아는 아들에게 그 난처한 잔칫집 주인의 입장을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하십니다.

셋째는 예수님은 스스로가 자기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란, 즉 기적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네 번째,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할 때가 아니었지마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었기에 감히 거절을 못하고 그곳에서 당신의 때를 변경시켜 첫 기적을 행하신 사실로 분석이 됩니다.

송양 그러니까 마리아의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인가요?

박신부 바로 그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께 직접 용돈을 타내기가 퍽 곤란할 때 어머니를 통해서 용돈을 타냅니다. 우리가 직접 하느님께 기도할 수도 있지마는 죄인인 우리가 또 감히 용기를 못 낼 때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기도합니다. 인간 마리아는 우리 인간의 조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에 대한 기도는 '대도(代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회에 송양에게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술을 마시면 죄가 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송양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술을 마시게 되면 과음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많은 탈선을 할 수 있으니까 못 마시게 하는 거지요!

박신부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께서는 잔칫집에 가서 술이 떨어진 것을 보시고 술을 만드신 기적을 행했습니까?

송양 ???

박신부 예수님은 최후 만찬 때도 제자들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루가 22, 17; 마태 26, 27) ?

그리고 술 자체보다 과음을 생각해서 마시지 못하게 한다면 밥도 과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밥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이론이 아니겠습니까? 송양, 마리아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시고 마리아에 대한 성서 내용을 진지하게 읽어 주시고 어떤 편견이라도 있으면 씻을 수 있는 진실한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송양 예! 옛날에는 퍽 오해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 어떤 분은 동정성을 부정하고 또 어떤 분은 예수를 낳을 당시에는 처녀였지마는 성서에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이 있으니 예수를 낳은 다음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는 분도 있는데 가톨릭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박신부 좋은 질문입니다. 먼저 마리아의 처녀성은 성서에서 명백히 밝혀집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통보를 했을 때에 마리아는 깜짝 놀라면서 하신 말씀이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천사는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루가 1, 34- 35)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처녀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다음에도 정혼한 일이 없으며 성서에서 말하는 예수의 형제들은 친형제가 아니고 사촌 형제들 또는 친척 관계의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의 친형제가 있었더라면 어찌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송양!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편견을 씻으십시오. 인류구원사를 살펴본다면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하여 주님의 사랑을 잃었을 때 하느님은 즉각 구세주를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구세주의 출현과 함께 구세주의 어미니 마리아에 대한 예고도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송양 그런 사실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박신부 있지요. 보십시오. 창세기에 뱀의 유혹으로 원조가 죄를 범한 다음 성서에서는 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으려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 15)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하는 마리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과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 7, 14)

여기서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아닙니까? "임마누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지 않습니까? 처녀가 예수를 낳는다는 사실에는 벌써 하느님의 영원한 구세사 속에서 마리아를 간택하여 구세주를 낳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초대 교회 때부터 마리아를 모든 사람 중에서 간택된 성모님이시고 가장 복된 자라고 믿어 오고 있습니다. 성서에 보십시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가 1, 42~43)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기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마리아 자신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종의 미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루가 1, 48~19)

결론적으로 말해서 마리아는 하느님이 특별히 간택하신 분이고 영원히 인류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복된 분으로 뽑으신 분입니다.

3. 가톨릭은 우상을 숭배하는가

송양 가톨릭 교회에서 성모상이나 예수상을 걸어 놓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는데 이것은 우상 숭배가 아닌가요?

박신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모상이나 예수상 그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뜻하는 보이지 않는 그분, 즉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보고서 실제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송양! 국민 의례를 할 때에 국기 안에 경례를 하지요?

송양 예, 합니다.

박신부 그건 우상이 아닌가요? 그 헝겊 조각 앞에 경의를 표시하니 말입니다.

송양 그건 다르지요. 국기는 국가를 표시하니까 국기 앞에서 국가에 대한 존경과 애국을 표시하는 거지요.

박신부 성모상이나 예수상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이 국기 앞에서 경례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인간은 무엇을 표현할 때에 말이나 글, 행동이나 모양으로써 표시합니다. 예컨대 "예수님" 했을 때 그 "예수님"이란 그 발음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 말이 뜻하는 그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고귀한 인격을 표시할 때에 김아무 박아무라고 하지요. '송영애'라고 했을 때 그 발음 자체가 송양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발음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필립 2, 10)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그분을 상징하는 예수상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송양, 부모님이 아직도 살아 계십니까?

송양3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작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박신부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모님 생각이 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송양 제 방에 모시고 있는 부모님의 사진을 보고 슬퍼합니다.

박신부 바로 그것입니다. 사진은 한 장의 두꺼운 종이입니다. 그러나 그 종이 위에 그려진 그분이 부모님이기에 그 종이를 특별히 액자에 넣어서 존경하지 않습니까? 퍽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송양 아버지의 사진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송양 어 아 ! 그건 안 되지요.그것은 바로 우리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신부 그런데 휴지 조각에다 침을 뱉는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송양 그거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박신부 송양! '아버지의 사진'이란 그 종이와 '휴지'라는 종이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요?

송양 물론이지요.

박신부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성인 성녀들의 모상이 그려 있는 성화나 성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지요?

송양 물론이지요.

송양 ?

박신부 너무 그렇게 좁게 편견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극히 인간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같은 이론이지요. 예수님이나 성모님이나 기타 다른 성인들의 사진이나 동상을 만들어 그분들께 경의를 표시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입니까?

송양 ???

박신부 서울 세종로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 돌맹이질을 한다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남산 위에 있는 바위에 돌멩이질을 하면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송양 그런데 성서 말씀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박신부 예, 송양이 말하고자 하는 성서 구절을 먼저 봅시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출애 20, 3-5)

이 성서 내용은 하느님 외에 다른 어떤 물건을 또는 잡신을 하느님처럼 만들어 공경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서를 똑바로 봅시다.

"속죄판은 마치로 두드려 늘여서 거룹(천사의 이름 저자 주)둘이 양쪽에 자리 잡게 만드는데 거를 하나는 이쪽에 또한 거룹은 맞은쪽에 자리 잡게 만들어라."(출애 25, 18-19)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민수 21, 6)

자! 송양! 보십시오. 천사 거룹도 만들라고 하셨고 구리뱀도 만들라는 성서 말씀을 어떻게 봅니까? 우리는 성서를 접할 때 자기 구미에 맞도록 그리고 너무나 편견적으로 좁게 해석을 하면 하느님의 구원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겸손하게 구원의 진리를 고백해야 합니다.

송양 ???

박신부 저는 가톨릭의 성상과 성화를 일종의 인류 문화재라고도 하고 싶습니다. 유럽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의 교리를 모르고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가 아닙니까?

오늘 이왕 이런 말이 나왔으니 가톨릭의 성상과 성화의 의미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성상과 성화는 성전(聖傳)을 거룩하게 장식합니다. 구약 시대 솔로몬도 "한 거룹의 한쪽 날개가 한 벽에 닿았고 다른 거룹의 한쪽 날개가 다른 벽에 닿아 있었으며 각각 나머지 날개는 전의 중앙에서 서로 잇대어 있었다. 솔로몬은 거룹에 금을 입혔다. 그는 전의 온 벽을 돌아가며 거룹과 종려나무와 핀 꽃 모양의 돌을 새김으로 새겨 놓았다. 또 성전 안팎의 바닥을 금으로 입혔다."(1열왕 6, 27-29)

구약의 성전을 장식하기 위해 이렇게 정성을 기울였다면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신약의 성전을 예수님의 상이나 성화 기타 사도들의 성상이나 성화로 장식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로 성상과 성화는 신앙 교육에 있어서 시청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고통을 말로써 여러 번 되풀이하는 것보다 실상 그 고통의 십자가상을 한번 보여 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처음으로 성당에 들어가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보고서 그리고 성당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의 길을 묘사한 그림을 보고서 진정 예수님의 고통을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개신교의 카브코(KAVCO-한국 기독교 시청각)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성서에 묘사된 그림을 통해서 선교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뿐입니까? 정부에서 국민들의 계몽을 위해 적절한 포스터를 그려 붙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 성상이나 성화를 이용한다고 해서 그것을 어찌 우상 숭배로 배척하는지 저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성화나 성상이 없는 교회당은 어쩐지 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 가톨릭 신자 가정에는 예외 없이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무언의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실내와 장식을 보고서 그 집주인의 성품과 교양의 도를 알 수 있습니다. 모나리자의 그림을 걸어 놓는다든지 밀레의 만종을 걸어 놓는다든지 .

가톨릭 신자들은 방 안에 십자가상을 모시고 성화를 모시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신앙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외적 신앙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네 번째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나 초상화 안에서 누구나 경건한 자세로 경의를 표합니다. 그분의 업적을 기리는 방법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의 많은 성인 성녀들의 성상이나 성화를 통해 그들의 생활에 자극을 받게 되고 그들의 성덕 생활을 본받게 되는 생활의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 그렇게 외곬으로만 생각한다면 개신교 신자들은 어떤 조각도 그림도 그릴 수 없겠네요! 조각이나 그림을 부인한다면 그 사람이 진정 문화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개신교 신자들은 조각가도 화가도 될 수 없단 말입니까? 예술도 없단 말입니까? 교회마다 지붕에 십자형은 왜 달아 놓았습니까?

4. 사람이 어찌 죄를 사하는가

송양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신부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신부님은 신도들의 죄를 사해 주는 고해 성사가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신부도 사람인데 어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해 줄 수 있습니까?

박신부 이 먼저 고해성사(告解聖事)라고 하셨는데 그 성사(聖事)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송양그냥 고해 성사를 통해 신도들의 죄를 사해 준다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박신부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2천 년의 전통을 가진 가톨릭 교회에만 정화한 성사가 있습니다.

성사란 무엇인가 한다면 "성사는 예수님이 설정하신 것으로 인류에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주시기 위한 유형(有形)한 교회의 의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사론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송양! 성서를 펴 봅시다.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 13)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야고 5, 14)

송양, 개신교에서 목사님들이 환자를 찾아가서 기름을 바르는 것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송양 그냥 병자를 위한 심방과 기도하는 것은 보았지만 기름을 바르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박신부 성서에는 분명히 기름을 바르라고 했지요? 가톨릭에서만이 기름을 환자에게 바르면서 그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을 병자 성사라고 합니다. 개신교에는 교파가 너무나 많아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파마다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 그런데 예를 들면 루터파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세례 안수식 성찬식 등이 종칠 의식의 중심이 되고 있지마는 가톨릭에서는 7성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7성사는 곧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만드신 은총의 전달 조건이 됩니다. 간단히 소개한다면 성세성사(聖洗聖事)(요한 3, 5), 견진(堅振) 성사(사도 8, 14-17), 성체(聖體) 성사-이 성사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 자세하게 이야기해야 될 줄 믿습니다. -네 번째로 고해 성사 그리고 병자 성사와 결혼 성사(마태 19,4-6), 마지막으로 성품성사(聖品盛事)(루가 6, 13)입니다.

송양이 가톨릭을 더 깊이 알고 싶으시면 개신교에 전연 없는 7성사의 개념과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송양 차차 시간이 되면 공부할 수 있겠고요. 우선 고해 성사에 대해서 말씀 듣고 싶습니다.

박신부 송양! 먼저 제가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은 이 인간 박신부가 내 개인의 자격으로 고해 성사를 집행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여 둡니다.

먼저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법정에서 죄수들을 앞에 놓고 재판장은 무죄 석방 또는 사형 선고를 선언합니다. 법관도 사람인데 어찌하여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판결을 내립니까?

송양 그거야 당연하지요 국가로부터 사법권을 가지고 있으니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아닙니까!

박신부그렇습니다. 가톨릭의 신부도 그리스도로부터 사죄권(赦罪權)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죄를 사합니다.

송양 그리스도로부터 사죄권을 받았다고요?

박신부개신교에서는 감히 이런 말도 할 수 없으며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서 개신교는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이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2천 년 전통의 교회로서 바로 그리스도께서 직접 인류 구원의 사명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가톨릭의 한 신부라는 점에서 저에게 부여된 사제로서의 신권(神權)은 곧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소급이 되고 있음에 신부로서 긍지와 자부를 갖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다른 개신교에서는 없는 성품 성사가 있기에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주어진 권한 안에서 신권을 이행합니다.

송양 성서의 근거를 듣고 싶은데요?

박신부예! 예수께서 중풍 병자에게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 9, 2)하시며 사죄권을 행사했을 때에 율법학자들은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면서 하느님 이외에 누군들 사죄할 수 없음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이 세상의 죄악을 없애고 인류를 진리의 나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역설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사죄권은 세상 끝날 때까지의 모든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죄권이 그의 제자들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지 않고 있다면 오늘 우리의 사죄에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이 세상 마칠 때까지 계승하여 전 인류가 구제를 받기 위해서 그의 전권을 제자들에게 부여하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6, 16-19)

이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 그리고 그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죽음 의 힘', 즉 어떤 오류와도 세상의 어떤 사조와도 아랑곳없이 굳건히 커 가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송양, 개신교에서는 이 성서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시는지 아십니까?

송양 글쎄요?

박신부 그들은 정통적인 베드로의 교회를 부인하기 위해 인간 베드로에게 약속한 교회가 아니라 그의 신앙 위에 세운 교회라면서 신앙만 있으면 구원이 된다는 이론을 펴 나갑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인격을 무시한 그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란 상식적으로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이 반석 위에 ",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이런 표현은 베드로의 인격에다가 하신 말씀입니다. 신앙 위에 그런 권리를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성서의 전후를 보면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을 고백했기 때문에 수위권(首位權)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런 권리를 받을 수 있었던 조건이고 그것을 받은 인격의 주체는 곧 베드로입니다.

어떤 국가의 원수가 어떤 총명한 사람에게 어느 나가 대사로 임명하면서 전권을 부여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그 인격체에게 주어진 권한이지 그것이 그의 해박한 지식이나 수완에 부여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특별히 사죄권을 주신 기록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0-23)

이 이상 더 명확한 말씀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사죄권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고 이 사죄권을 또한 그들의 제자들에게 전승해준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2고린 5, 18-20)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한 것은 곧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그리고 참회를 할 때마다 나타나셔서 그에게 죄를 사해 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사죄권을 맡겨 대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구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실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그 대업을 모세에게 맡기셨습니다. 파라오의 추격을 당할 때에도, 사막 가운데서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에도 하느님이 직접 하시지 않으시고 모세에게 모든 권한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사죄권을 사람들에게 맡기신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이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켜 호소하시는 말씀입니다."(2고린 5, 18-20)

"그리스도의 사절" 또는 "우리를 시켜", 이 말씀은 곧 성품 성사를 받은 제자들을 말합니다. 개신교는 그리스도와 연결이 끊어진 교회이기 때문에 사죄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해 성사를 이해 못합니다.

송양 그런데 신부님들은 죄를 어떻게 합니까?

박신부 아무리 법정에서 재판권을 행사하는 법관이라도 지를 범하게 되면 또 다른 법관에게 재판을 받아야 하듯이 신부들도 다른 신부들 앞에 가서 죄를 고백하고 고해 성사를 받습니다. 주교들도 추기경들도 교황님도 신부 앞에서 고해 성사를 받습니다.

송양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신부 앞에 가서 고백만 하면 죄가 사해지니 결국 더 쉽게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박신부역시 고해 성사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인데 고해 성사는 일종의 재판이라고도 한 수 있습니다. 재판장은 고백을 듣는 신부이고 원고는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고 피고도 동시에 고백하는 당자입니다. 결국 자기 죄를 자기가 스스로 고발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이 재판, 즉 고해 성사에는 어떠한 변호인도 증인도 어떤 증거물도 필요가 없는 가장 완전한 재판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자백하는 그 마당에는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해 성사의 핵심은 그 죄에 대한 참회의 자세입니다. 또한 남에게 끼친 정신적인 손해나 물질적인 손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해당하는 보속을 해야 합니다. 결국 고백자는 이러한 조건이 구비된 재판소에서 다시 그런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적어도 그 순간만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형사 재판을 받은 죄수가 감옥 생활 5년을 치르고 나왔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죄를 다시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도리어 송양에게 묻고 싶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직접 하느님께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도리어 죄를 더 쉽게 지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송양 어째서요?

박신부 보십시오. 스스로 자기 죄를 하느님 앞에서 고백했지 마는 하느님은 그 죄에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보상을 요구하면서 꾸중을 하십니까? 범죄한 데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교훈을 주십니까? 하느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죄를 어떤 모양으로 짓든지 모두 혼자서 하느님과 해결해 버린다면 사죄의 방법이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더 쉽게 범할 수 있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진정 하느님이 죄를 사해 주셨는지 에 대해서 어떻게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매일같이 하느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없어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송양 하지만 신부 앞에서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어쩐지 ?

박신부역시 고해 성사의 뜻을 모르는 말씀이지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데 있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해결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실리오 성인의 말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고백에 있어서는 육체의 병을 치료하듯이 해야 한다. 병자가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는 함부로 치료를 받지 않고 의학과 지식이 겸비한 의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병 증세를 자세히 고하고 그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영혼의 병인 죄를 없애고 치료받기 위해서도 사죄권을 가진 자 앞에서 죄를 고백해야 한다."

초대 사도들의 교회에서도 죄를 고백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도들이 와서 자기들이 과거에 한 일을 낱낱이 털어놓고 자백하였다."(사도 19, 18)

그리고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모든 것을 풀고 매는 권한을 가진 교회가 그들이 범한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풀고 매는 권한을 발동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죄는 언제나 그 죄에 해당되는 보상, 즉 보속이 따라야 합니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 죄에 해당되는 옥고를 치러야 되듯이 하느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범한 죄를 알지 않고는 정확한 교정이나 죄에 해당되는 보속을 줄 수 없습니다.

송양! 소위 '범죄인의 심리'라는 특수한 인간 양심의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범죄한 그만큼의 보상을 치러야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고 또 아무도 몰래 범한 죄일지라도 그것을 토로하지 않고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독약을 마셨으면 그것을 토해야 하고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혀 있으면 그것을 뽑아 버려야 근본적으로 치료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범한 다음 그것을 토해 버려야 근본적인 양심의 상처가 아무는 것입니다.

요즈음 소위 '정신 요법'이란 정신과 의사들의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신 요법이란 결국 그 사람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털어 내어놓고 정리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어떤 정신과 의사가 가톨릭의 고해 성사를 연구한 다음 한 말이 너무나 유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간 최대의 심리학자였으며 인류 최초의 정신 분석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옛날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교훈은 무엇을 뜻합니까? 범죄 수사관들의 말을 들으면 숨어 있는 악한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면서 하는 말들이 "이제야 안심이다." 한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의 죄가 드러났고 드러난 그만큼의 보상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사제 생활 근 35년간의 가장 보람되었던 것이 있다면 고해 소에서 많은 죄로 신음하던 그들이 죄를 다 털어놓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신도들의 모습입니다. 더구나 제가 25세 때 신부가 되어 고해소에 있으면 국회 의원, 법관, 대학 교수들이 무릎을 꿇고 죄 고백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진정 그들의 겸손한 자세는 하느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줄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다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무거운 심판을 거부할 능력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진정 한 인간 신부 앞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는 그러한 겸손한 자세가 없이 뻔뻔한 자세를 취한다면 어떻게 감히 우리가 주님 앞에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개신교의 목사님도 신도들의 신앙 생활 지도를 하시고 때로는 죄의 고백도 듣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각 학교마다 카운슬링을 맡은 선생님들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살다보면 부부끼리도 할 수 없는 얘기, 부자간에도 할 수 없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독신자 신부 앞에서, 더구나 그리스도로부터 사죄권을 받은 사제 앞에서 다 털어놓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그 아름다움은 경험을 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송양 대략 알아들을 만합니다만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신부님들이 신도들의 죄를 듣고 남에게 누설을 할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박신부 역시 고해 성사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의 말씀이지요! 고해소에서 일어난 사실은 거기에서 끝나고 맙니다. 고해 비밀은 사제들이 생명을 걸고 옹호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도 가끔 그런 사실을 보지 않습니까? 생명을 걸고 고해의 비밀을 지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이 2천 년 가톨릭 교회 역사상 신부들이 인간적으로 타락한 적은 많아도 고해의 비밀을 폭로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도리어 고해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은 순교자들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서울 명동성당에 임시로 있을 때입니다. 밤중에 누군가가 거칠게도 저의 방문을 두들겼습니다. 문을 열어 보니 험상궂은 젊은 청년이 찾아와서 "신부님, 오늘 저녁에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죄를 고백하기 위해 신부님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아무런 종교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앙심의 가책을 막을 길이 없어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죄를 범하는 인간 범죄의 불안한 상황입니다.

송양 한 가지 더 묻고 싶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개신교의 참회 행위를 어떻게 보십니까?

박신부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목사님들은 어떤 신권(神權)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개신교에는 성품 성사가 없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면 그 교회의 근원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소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의 사함도 고작 하느님 앞에서의 참회로만 일관합니다.

가톨릭에서도 진실한 참회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도 가르칩니다. 또는 극기, 희생, 자선 행위 등으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참회가, 그 극기가 어느 정도냐가 언제나 문제로 남아 있고 그런 행위는 많은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행위일 뿐 성사적인 입장에서 어떤 확신을 줄 수 없기에 일차적으로 가톨릭에서는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사죄권을 가진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송양 사죄권을 갖지 않은 신부도 있습니까?

박신부예, 있습니다 고해 성사를 하나의 재판 형식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어떤 법관이 재판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관할권을 통한 상부의 권한 위임을 받아야 하듯이 고백을 듣는 신부도 사죄권을 교회를 통해서 정식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죄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오해가 소위 면죄부란 사건이지요.

5. 소위 면죄부 사건의 진상

송양 그렇지 않아도 이 문제를 갖고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요.

박신부 어찌 되었건 오늘 참 좋은 기회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정확하게 한번 알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면죄부(免罪符)'란 번역 자체가 너무나 비약적입니다. 역시 가톨릭의 교리를 모르는 소치에서 나왔다고 보는데요. 여기 국어 사전에 보십시오.

'면죄부'(역)(Indulgence) 중세기 로마의 천주교에서 금전 재물을 바친 사람에게 그 죄를 면한다는 뜻으로 교황이 발행하던 증서(신기철, 신용철 편저, 1975년도 삼성출판사 간, '새 우리말 큰 사전').

물론 역사적인 사건을 국어학자에게 문의한다는 것도 바른 태도가 아닌 줄로 압니다만 더군다나 영문으로 Indulgence라는 단어까지 소개를 하면서 어떻게 그 말을 '면죄부'라고 번역을 했는지 묻고 싶어요. 오역도 이만저만한 오역이 아니지요!

먼저 인둘젠스(Indulgence)라는 단어의 근원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Indulgentia(관대, 은사, 후하게 베풀어 줌)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며 이 단어는 동시에 Indulgers(관대하게 처리하다. 용서해 주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기에 어원을 둔 인둘젠스는 '관대' '용서' '호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가톨릭적인 교회 용어로는 '대사(大赦)'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려면 '대사부(大赦符)' 또는 '대사령(大赦令)'으로 해야만 옳았을 것입니다.

송양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런 어려운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고 당시 교회에서 금전 거래를 통해서 죄를 사해 준 사실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박신부 역시 그것도 큰 오해지요. 우선 소위 면죄부사건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대사' 문제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대사'라고 하는 것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 있었던 고해 성사를 딴은 사람들이 고해 성사로 죄는 사함을 받았지마는 그 죄에 따라오는 잠벌(暫罰)의 일부나 혹은 그 전부를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로써 면제해 주는 은전(恩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송양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박신부다시 말씀드리면 죄와 벌을 구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해 성사를 통해서 죄는 사해졌지만 그 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비유컨대 급성 맹장염 환자가 수술을 받았으면 근본적으로 죽음은 면했지만 그 수술의 통증은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오는 통증, 즉 그 벌은 보속을 통해서 없어지는데 교회가 부여하는 대사를 통해서도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국가의 원수가 국가의 경축일에 특사를 베풀어 투옥된 죄수들에게 감형을 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교권으로 현재 매 25년마다 소위 '성년(聖年)'을 선포하고 특별히 대사의 은혜를 베푸는 제도도 있습니다.

송양 그런데 그대사령이 어떻게 면죄부사건이 된 것입니까?

박신부 16세기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현재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립을 위해 세계 교회를 통해서 모금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레오 10세 교황이 '대사'를 받을 수 있는 일반적인 조건에다가 성 베드로 대성전 건립을 위한 응분의 헌금 조항을 하나 더 첨부 한 것이 소위 '면죄부' 사건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이 헌금의 목적이 어떤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의 성소(聖所)를 마련하여 길이길이 뭇 백성들의 중앙 성전을 건립하고자 하는데 있었으므로 하등의 잘못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로마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 최대의 베드로 성전이 세워진 그곳이 성 베드로가 순교했던 유서 깊은 성지입니다. 구약의 모세도 성소를 장식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헌금을 요구했다면 더구나 교회를 짓기 위해서 교회에서 특별 헌금을 받는다고 해서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대사령이 독일에 와서 그 전달되는 방법에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당시 독일 교회의 대사 담당 추기경이었던 알베르트(Albert) 대주교는 이 대사령을 널리 선전하며 많은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 대사 교리와 그 선전 방법에 관해서 장문의 교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 교서에 열거된 대사 받는 조건으로는

1. 과거에 범한 죄를 참회한 후 고해 성사를 받아야 한다.

2. 적어도 지정된 일곱 성당을 순례하고 성당 순례 때마다 그리스도의 오상(五傷), 즉 십자가에서 못 박힌 양손과 양발 그리고 창으로 찔린 옆구리의 상처를 묵상하는 뜻으로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다섯 차례씩 외우든지 또는 시편 50편을 외워야 한다

3.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한다.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3항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천국은 부자나 빈자가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공개되었은즉 돈 없는 빈자들은 헌금 대신 기도나 단식으로 대사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명백히 밝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알베르트 추기경의 교서에서는 위의 1항과 2항을 실천한다는 조건하에서 먼저 헌금을 하는 이에 게는 헌금 수령 증서를 주었습니다. 이 증서를 가진 자는 고해 신부의 선택에 있어서 자유로이 할 수 있다는 특권이 부여되었습니다. 이 헌금 수령증서가 와전되어 소위 '면죄부'라는 이름이 붙어 허무맹랑하게 돈을 주면 죄가 사해진다는 비약적인 언사로 변화된 것입니다.

송양 고해 신부 선택의 권리란 무슨 뜻입니까?

박신부 조금 전에 고해 성사에 대해서 언급할 때 약간 말이 나왔습니다만 사죄권은 하나의 관할권 문제이므로 교회법상 사죄권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신부의 지위 여하에 따라 또는 죄의 경중에 따라 또는 관할권의 문제 등으로 자기에게 부여된 권한 내에서만 신부는 사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 건축 헌금을 한 헌금 증서만 지참하면 어떠한 교회법적인 제한 없이 어떤 신부에게 가서도 죄를 고백할 수 있고 또 그 신부는 헌금 증서 소유자에게는 제한 없이 교회로부터 받은 사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교회 일부에서는 이 헌금 증서를 내세우고 지나친 모금에만 몰두한 나머지 정도에 지나친 남용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소위 종교 개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인 스캔들을 내세워 일반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송양 모든 것이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그런데 가톨릭의 교권, 특히 교황권에 대해서 좀 알고 실어요. 가톨릭은 너무나 교권주의 위주 같아요.

6. 가톨릭의 교권

박신부흔히들 그러지요. 가톨릭은 권위주의요, 교권(敎權) 위주의 교회이며 교황과 주교득의 권위 의식에 사로잡힌 교회라고 합니다.

우선 '교회'라는 개념의 문제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사명을 그대로 그리스도를 대리해서 인류 구원의 기관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하신 그리스도의 사명은 세 가지로 분석됩니다.

첫째 "진리요", 즉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르치는 그리스도, 그래서 이것을 받은 교회는 '교도권(敎導權)'의 주인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구원의 진리를 교회는 그대로 가르칠 의부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 20)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루가 10, 16)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다면 교회의 가르치는 사명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잘못 전달된다고 생각했을 땐 우리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가르치는 스승은 언제나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치는 사명을 띠고 있다면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서 당신 진리의 정확성을 보증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베드로라는 말은 반석이라는 뜻-저자 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의 힘"은 진리를 거스르는 오류를 뜻합니다. 세상의 어떤 이단도 이설도 베드로의 교회를 없애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즉 "내가 세상 마칠 때까지 끝까지 보존하기 위해서 교도권을 동시에 부여받은 것입니다.

인간 베드로에게 절대적인 보장은 너무 벅찬 것이었던지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시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 14, 15-1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 13)

이와 같은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영원히 함께 계실 성령", 그리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이것은 교회의 교권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는 교도권의 행사로서 구원의 참뜻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의 진리이신 성령께 처음으로 약속 받았던 교회는 오직 가톨릭뿐이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교리가 서로 다른 잡다한 종과 속에서 어떻게 진리의 성령이 그리스도의 정통 진리를 가르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나는 길이요", 이 말씀은 양들을 다스리는 목자로서의 '사목권(司牧權)'을 뜻합니다. 교회는 진리를 가르치고 동시에 그들이 올바로 하늘 나라에로 가도록 인도하는 목자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시 사목권, 즉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을 베드로에게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요한 21, 15-18)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같은 물음을 세 번씩이나 다짐하시고 드디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송양 그런데 교회가 신자들을 다스리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합니까?

박신부 예, 교회의 사목권은 쉽게 이야기해서 교회의 행정권이지요. 그러니까 인간 단체의 일종인 교회이기 때문에 물론 신앙인의 모임이며 동시에 하늘 나라로 향한 인류 구원의 목적을 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룩된 교회이지만 어떻든 인간들의 모임이 아닙니까?

개신교에도 교회 안에 청년회가 있고 학생회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회장도 있고 회칙도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도 행정권의 책임자이신 교황을 위시해서 주교, 신부들,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 필요한 교회법 등이 있어 교회는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송양 성서에 어디 교회가 교권을 행사하라는 말이 있습니까?

박신부지금까지 말씀드린 바 있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은 교회는 당연히 행정권을 수행해야 하며 더구나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또 성서에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 17)

그리고는 계속하시기를, 즉 당신이 세우신 교회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8, 18)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신자들의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교회에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세 번째로 "나는 생명이다", 이것은 교회가 지닌 핵심적인 요소지요. 다시 말해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전달해 주는 유일한 지상의 인간 단체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원한 은총, 즉 영생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교회에 '사제권(司祭權)', 즉 '성품 성사(聖品盛事)'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 문제와 연결된 것이 가톨릭의 성체성사(聖體聖事)입니다. 이 성사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이야기가 나와야 될 것 같습니다.

송양 그러면 한마디로 그리스도는 교회를 주로 베드로에게 세웠다는 얘기가 되는데 .?

박신부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 중에서 첫째 제자로서 수위권을 받은 그리스도 교회의 첫 책임자였습니다. 오늘 이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교황입니다.

송양 그런데 성서에 예수님에서 베드로를 저주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박신부좋은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에서 처형될 것을 미리 말했을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 23)

이 구절 하나를 들어 베드로는 예수님과 상극의 관계였다고 잘라 말한다면 그는 진정 성서를 너무나도 곡해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스승의 구원 계획을 잘 몰랐었고, 너무나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던 베드로에게 하신 스승 예수님의 꾸중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장애물이었던 베드로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고 또 그리스도의 양을 돌보는 책임을 받았고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이제는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 너희를 제멋대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다오"(루가 22, 31 32)

인간 베드로의 회심을 위한 기도였고 또한 베드로는 세 번이나 그리스도를 배반했지만 드디어 자신의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맡은 것입니다.

성서의 한 구절만을, 더구나 앞뒤의 연관성 없이 외곬으로 알아듣는다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3, 22)

이 말의 해석을 잘못하게 되면 예수님은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지요?

송양 하하하, 그런 구절은 처음 듣는 것 같아요.

박신부 성서를 손에 들고 있다면 그 내용을 옳게 알아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교도권, 사목권, 사제권을 행사하는 명실 공히 그리스도의 대리 기관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에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세워진 교회인 가톨릭은 교권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이단과 세속 사조 속에서 정통적인 구원의 권리를 조금도 변함이 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늘의 개신교도 궁극적으로 가톨릭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그리스도의 정통한 가르침을 알아보기 위해서도 가톨릭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송양 그러니까 가톨릭 교회의 교권은 베드로의 권리라고 볼 수 있겠네요?

박신부그렇습니다. 이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12제자 중에서 베드로를 수제자로 뽑아 "천국 열쇠"를 맡기면서 교회의 총수로 내세웠습니다. 피 베드로의 후계자가 오늘의 교황입니다.

송양 그렇다면 천주교의 초대 교황이 베드로라는 뜻인가요?

박신부그렇습니다. 성 베드로가1대 교황이고 2대 교황은 성 리노, 3대 교황은 성 아나클레토, 4대 교황은 성 클레멘스, 이렇게 내려와서 오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64대째 베드로입니다.

송양 그러니까 초대 베드로와 연결된 교황이란 말이지요?

박신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천주교야말로 그리스도의 정통교회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모든 베드로의 권한을 오늘날 교황이 그대로 이어받아 교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송양 예수께서 주신 베드로의 교황권을 실제로 행사한 성서적인 근거가 있습니까?

7. 베드로(교황)의 수위권 행사

박신부 교회도 인간의 단체입니다. 물론 그 설립자가 예수님이시고 인류 구원이란 뚜렷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일반 세상 단체와는 그 성격이 다르지만 인간을 위한 인간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회사에는 사장이 있고 군대에는 사령관이 있고 배에는 선장이 있듯이 교회라는 단체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단체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세계적으로 인류의 가장 큰 단체이지만 교황의 권위에 의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가 인류 구원의 진리를 선포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여기에 반대되는 이단적인 진리를 경고하고 신자 대중을 올바로 다스려 나가는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도 유다교에서는 사제인 레위인이 권리를 행사한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사는 성 안에서 살인 사건이나 민사 사건이나 폭력 사건이 생길 경우 . 사제인 레위인에게 제출하면 너희에게 판결을 내려 줄 것이다 . 그 판곁을 어김없이 따르도록 하여라 . 재판관의 말을 업신여기고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지 사형에 처하여라. 그리하여 이런 나쁜 일을 이스라엘에서 송두리째 뿌리 뽑아야 한다."(신명 17, 8-12)

신앙과 진리의 일치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권위 행사가 필요합니다. 국가마다 나라를 다스리는 원수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우리 교회의 우두머리는 하느님 자신이다."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궤변입니다. 교회가 갈라져서 싸움을 할 때 하느님이 직접 나타나서 중개한 사실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교회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네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시면서 '천국의 열쇠' 곧 지상의 권한을 상징하는 수위권을 주신 것입니다. 개신교에는 하느님이 임명하신 우두머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게 되어 어느 교파가 진정 그리스도의 가르침인지를 분간하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송양 개신교의 분열은 사실 문제가 있어요!

박신부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주신 모습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이것은 그에게 맡길 사명의 성격으로 보아서 예수께서 직접 주신 개명된 이름입니다. 성서에서 새 이름을 주시는 것은 새로운 지위나 사명을 뜻합니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리니,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모든 이의 아버지)이라 불리리라."(창세 17, 5)

그리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할 때에도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태 1, 21)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시몬은 베드로(반석)가 된 것입니다. 그 반석 위에 튼튼한 교회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반석이란 말은 성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반석이시니 그 하시는 일이 완전하시고 ."(신명 32, 4) "하느님은 나의 반석 나의 성채 내 구원자이시오니 ."(시편 17, 3)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하신 말씀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기초로 삼겠다는 뜻이며 이 교회는 세말까지 계속되는 튼튼한 기반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 24-B6)

예수께서 또 이어서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고 하셨습니다. 열쇠가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송양 열쇠는 열고 닫는 권한이 아니겠습니까?

박신부 그렇습니다 성서의 예를 봅시다.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내 손에 쥐고 있다."(묵시 1, 18)

"내가 또한 다원의 집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이사 22, 22)

열쇠는 모든 권한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교회의 전권을 받은 베드로에게 이젠 구체적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길 것을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 15-17) 거듭 세 번씩이나 부탁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이제는 키로 밀을 까부르듯이 너희를 제멋대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피어 다오."(루가 22, 31-32)

이렇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교회 총수로 뽑으시고 후속 조치를 하십니다. 이제는 실제로 베드로가 수위권을 행사한 사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열두 사도 중에 제일 먼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사도 3, 6-8)

그리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에 첫번으로 설교한 사실입니다. 사도 행전 2장 14절입니다. 그리고 고르넬리오를 비롯하여 이방인들을 최초로 참 교회로 개종시킨 사실이 또 있습니다. 사도 행전 10장을 보십시오. 그리고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새로운 제자를 뽑는 과정에도 그 모든 주관을 베드로가 한 것입니다. 사도 행전 1장을 보십시오.

"교우가 백 이십 명 가량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 베드로가 일어나 이렇게 말하였다. '교우 여러분 유다에 관하여 그는 본래 우리 열두 사람 중 하나로서 주님을 판 돈으로 ."(사도 1, 15-18)

그리고 교회 창림 이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가 있었습니다. 이 회의에서도 사도 베드로가 모든 주관을 해서 수위권을 행사하였어요. 보세요!

"오랜 토론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내 입을 빌려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믿게 하시려고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뽑아 주셨습니다 '".(사도 15, 7)

그리고 베드로는 그의 권위로 사도들을 속인 아나니 아를 크게 벌 준 사실도 있습니다.

"그 돈의 일부를 빼돌리고 나머지만 사도들 알에 가져다 바쳤다. 그 때에 베드로가 그를 이렇게 꾸짖었다. ' 사탄에 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사도 5, 1-6)

이상 볕 가지 성서적인 근거를 보아서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수위권을 받았고 실제로 그것을 수행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를 '제1의 사도'라고 했으며, 에우세비오 같은 학자들도 베드로를 '사도의 수령' 또는 '사도직의 원수'가고 표현했니다

송양 그러니까 베드로의 수위권을 고대로 받은 오늘의 교황도 교회의 수위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박신부 그렇습니다. 우리 천주교의 최고 통치자는 교황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 끝까지 함에 있겠다고 했고, 성령이 인도하는 교회라고 하셨기에 천주교는 순수히 인간의 모임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로마 시대 네로 황제가 교화 말살을 시도했지만 교회는 더욱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2천 년간 오면서 그 많은 시련이 있었고 이단들도 있었지만 정통 교리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대원군을 비롯해서 천주교 말살 정책을 써서 근100년간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사라졌지만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오늘의 교황님도 보십시오. 바티칸의 원수이기도 하지만 그분은 무기도 없고 커다란 영토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인들이 존경하는 세계적인 정신 지도자가 아닙니까? 교황님의 나들이를 TV에서 그리고 신문에서 많이 보셨지요? 모두들 교황님을 '슈퍼스타'라고 합니다.

송양 우리 나라에도 한두 번 오셨지요? 천주교의 일치 단결은 참말 부럽기도 합니다.

박신부 나무는 그가 맺는 열매를 보고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진정 예수를 믿는 교회가 전 세계적으로 수백 종파나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모두가 예수님의 참 가르침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는 데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두가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진리의 기록은 하나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선은 가설이거나 근거 없는 기록일 수밖에 없습니다.

송양 결국 문제는 성서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느냐가 되겠지요. 개신교는 성서 자유 해석인데 ?

8. 성서 해석 문제

박신부 사실은 성서 문제가 맨 먼저 이야기되었어야 했을 텐데 순서가 뒤바뀐 기분입니다. 먼저 여쭈어 보겠습니다. 송양, 개신교의 성서가 모두 몇 권이나 되지요?

송양 신구약 다 합해서 66권입니다.

박신부그런데 가톨릭은 73권의 성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송양 어마! 어떻게 된 것입니까?

박신부 또 하나,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66권의 성서를 어디서 가지고 온 것입니까?

송양 그거야 따지고 올라가면 가톨릭에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신부옳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첫 주인으로서 성서를 간직해 온 가톨릭은 73권이고 여기서 떨어져 나간 개신교에서는 66권이니 여기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다고 보아야 옳지 않겠습니까? 저도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어찌하여 73권의 성서 중 7권은 버려 두고 66권만 가지고 나갔는지 말이에요

송양 그건 전연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성서는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다 같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

박신부송양, 개신교에서 혹시 '성 베드로 복음'이니 '성 야고보 복음'이니 하는 성서 본 일이 있습니까?

송양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신부옛날에는 그런 가짜 성서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를 보더라도 예수님이 직접 성서를 저술한 사실은 없고 처음부터 성서 목록이 만들어져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서 목록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우선 성서 목록 경로를 보기로 합시다.

금방 말씀드린 대로 구약에서 내려오는 책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쓰여진 책들 중에서 어느 것이 진정 하느님의 계시가 담겨 있는 성서인지를 판명하여 성서 목록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크게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누구도 의심 없이 처음부터 성서라고 인정이 되어 온 성전 중심에서 나타나는 책들을 모은 것이 소위 제1 경전(第一經典)이고, 제1 경전 목록이 생긴 다음 얼마 후에 다시 지방에 따라 의심스러웠던 책들이 시일이 지남에 따라 성서로 밝혀진 성서를 제2 경전이라 해서 두 차례에 걸쳐 73권의 성서 목록이 완성된 것입니다.

신앙의 유일한 규범은 성서뿐이라고 주장하는 개신교에서는 어찌하여 부분적인 성서만으로 만족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송양 가톨릭 교회가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성서의 목록을 정확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보관해 온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성서보다도 교권이 앞서고 교회의식이 더 중요하고 전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박신부 그 말씀도 지나친 편견적인 생각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서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사고 방식이지요. 송양! 여기 그 옛날 공자님의 어려운 문장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니면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의 어려운 영어 문장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문장이 있다는 것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권위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서만이 유일한 신앙의 규범이라고 하고 그것을 자유 해석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려운 문장을 앞에 놓고 이것을 각자 마음대로 해석하시오, 한다면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 해석은 하지마는 그것이 얼마만큼 그 문장이 뜻하는 진리에 가까울 수 있는가는 문제입니다. 개신교에서 성서 자유 해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정확한 신앙의 기준이 없고 그러니까 분열의 결과만을 가지고 오고 있지 않습니까? 성서가 중요하지마는 그것을 올바로 가르치는 교회의 권위가 없다면 그것은 신앙의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의 종교 의식은 교회에서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성서와 성전(聖傳)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송양 성전은 가톨릭의 전통을 말하는 것입니까?

박신부 그것은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성서의 해석을 위해서는 권위가 있는 교회의 가르침이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성서 자유 해석을 주장하고 성서만이 구원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한다면 개신교에서 어찌하여 주일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합니까? 어찌하여 주일 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칩니까? 어찌하여 신도들은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입니까? 성서 자유 해석이란 이름 하에 얼마나 많은 교회 분열을 가지고 왔습니까? 그 종파가 모두 하느님의 진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2베드 1, 20)

"필립보가 달려갔을 때 그는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그래서 필립보는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내시는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자 .."(사도 8, 30-31)

성서 자유 해석은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성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처음으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성서 책만 내민다면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소화시키겠습니까? 성서는 그것이 쓰여진 때가 벌써 수천 년 전의 일이요. 그것을 쓴 성서 기자는 사고 방식이나 문화권이 우리와 전혀 다른 데서 그리고 우리의 표현 방법이 아닌 고대어로 썼습니다. 그것을, 그것도 우리말로 번역된 그 성서를 20세기에 사는 우리 한국인이 아무런 기존 지식도 없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처음 예비 신자들에게 성서를 주지 않고 성서에 나타나는 교리를 간추려서 만들어진 교리서를 먼저 줍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송양이 질문한 가톨릭의 성전(聖傳)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송양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전부 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송양 글쎄요?

박신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깡그리 성서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 마는 예수님은 성서의 기록을 통해서 가르칠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오늘날 신문 기자들처럼 따라다니면서 속기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극히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4복음서의 마지막 성서인 요한 복음사가가 그의 복음을 무슨 말씀으로 결론을 했습니까? 요한 복음 제일 끝 부분을 한번 펴 봅시다.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요한복음 마지막 절)

이 얼마나 명백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기록되지 않은 것도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기록되지 않고 전해 오는 예수님의 말씀을'성전(聖傳)'이라고 합니다.

기록되지 않고 말씀으로만 전해진 구원의 말씀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얻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생환 원칙으로 삼으시오."(2디모 2, 13)

"나에게 들은 건전한 말씀"으로 보아서도 글보다 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쓰여진 성서가 오늘날 분실된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 편지를 읽고 나서는 라오디게이아 교회도 읽게 해주시고 또 라오디게이아 교회를 거쳐서 가는 내 편지도 꼭 읽어 주십시오."(골로 4, 16)

여기서 보면 라오디게이아 서간도 있었음이 드러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서간이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분실되어 없어졌습니다. 그 뿐만도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쓴 편지에서 음란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 ."(1고린 5, 9)

여기서 우리는 고린토 서간이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마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송양 저는 그렇게까지 세밀히 성서 공부를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서 이외에 또 내려오는 구원의 진리를 성전이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성전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하나 말씀해 보시면 좋겠어요.

박신부 예, 먼저 하나 물어 보겠어요. 개신교에서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고 있지요? 성서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성서에는 분명히 안식일을 주장했고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어찌하여 성서에도 전연 없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까?

송양 ?!

박신부성서에는 그런 말이 전연 없습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내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을 신약 시대의 중심일로 생각하고 사도들이 정한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가톨릭에서가 아니면 어느 종파에서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밖에도 연옥설이라든지 성령께 대한 기도라든지 유아 세례의 전통 등등 한마디로 성서에 불투명하게 되어 있는 것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은 곧 성전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전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전의 요람은 가톨릭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아 신약 성서 중에 제일 먼저 쓰여진 것이 마태오 복음 혹은 마르코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 복음은 적어도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 약 10년 후에야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전에는 신약 성서가 없었고 오로지 성전뿐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입으로만 전해 오던 것을 후에 기록한 것이 성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기원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부정하면 자연 성서도 부정되는 결론입니다.

송양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는 성서대로 하지 않는 것이 많다고 하던데요?

박신부 예컨대 어떤 것입니까?

송양글쎄요? 구체적으로는 예를 들면 교회의 의식이라든지?

박신부 우리는 하느님의 진실 앞에 어떤 편견이나 고집은 겸손하게 버려야 할 것입니다. 내 구원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서 이외의 것도 가톨릭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성전에 의한 것입니다. 문제는 성서와 위배되는 것이 있는지를 살펴 야겠지요.

송양 예, 예컨대 가톨릭의 독신 제도 아닙니까?

박신부좋습니다. 가톨릭의 독신 제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얘기하고요. 실제로 개신교에서 성서대로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송양 뭔데요? 구체적으로.

박신부고린토 서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머리, 곧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 만일 여자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아도 된다면 머리를 깎아 버려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운 일이니 무엇으로든지 머리를 가리우십시오."(1고린 11, 5-6)

그래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당 안에서의 공식 기도 때는 여자들은 꼭 미사포를 쓰지요. 개신교에서는 저는 이런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송양 ???

박신부 저번에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야고보서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야고 5, 14)

여기서 앓는 사람에게 바르는 기름이 개신교에 있습니까?

이왕 말이 나왔으니 일화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날 대구 신부님 한 분이 기차를 타고 서울서 대구로 오는데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옆자리에는 개신교 여집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집사님은 물었습니다.

"신부님! 성서의 어디에 담배를 피우라는 구절이 있습니까?"

신부님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답변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차가 대전역에 멈추었습니다.

신부님은 집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사모님, 여기서 내리시지요."

"아니, 저는 부산까지 갑니다."

신부님은 말했습니다.

"성서 어디에 기차를 타고 다니라는 구전이 있습니까7"

성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가르쳐 주신 계시의 원천입니다 성서 말씀을 잘못 알아듣는 다면 우리 구원에 직접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이 배의 방향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다면 배 안의 승객들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에로 가야 하는 인간 구원 경륜을 앞에 놓고 성서 해석이 제멋대로 구구하다면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 교회에서 이렇게 저 교회에서 또 저렇게 말을 한다면 우리의 구원 문제는 진정 불안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절대 진리 앞에는 어떤 편견도 고집도 체면도 다 끊어야 합니다. 진리 앞에는 겸손해야 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약 성서가 생기기 이전에 벌써 교회는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송양은 어떻게 생각해요? 교회가 먼저입니까, 성서가 먼저입니까?

송양 모든 것이 성서 중심이니까 성서가 앞서는 것 아니겠습니까?

박신부 큰 착각입니다. 교회가 먼저냐, 성서가 먼저냐에 대한 문제인데, 우선 교회라는 개념부터 시작해야겠지만 성서보다 교회가 먼저입니다. 구약 시대로 올라가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생기겠지만 신약의 역사를 본다면 분명히 교회가 먼저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의 출범일을 성령 강림일로 봅니다. 제자들과 성모 마리아가 예수 승천 후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10일 후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제자들에게 선교의 힘을 주시면서 교회는 출범했습니다. 그 때는 신약 성서가 한 권도 없었습니다. 전번에 말씀드렸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입으로 입으로 가르치다가 기록된 것이 신약 성서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구약의 성서와 신약의 성서 목록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없었더라면 성서도 보존될 수 없었습니다. 성서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권위 있게 가르쳐 온 교회가 어느 교회라고 생각합니까?

송양 그거야 역사적으로 보아서 가톨릭 교회 아니겠습니까?

박신부 송양! 인간 구원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어느 교회를 찾아야 하겠습니까? 루터가 만든 교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입니까? 인간은 언제나 깊은 통찰을 통해서 자기의 편견을 씻을 수 있어야 진리에 접근합니다.

성서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성서의 관리자, 성서 목록 제정자, 그것을 보관한 교회가 없었더라면 성서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조물자가 있었기에 이 우주가 존재하듯이 성서 관리자가 있었기에 우리 구원의 진리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길을 열어 주는 뿌리는 곧 권위 있는 교회입니다.

9. 가톨릭의 독신 제도

송양 그런데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독신제는 성서 어긋나는 것 같아요. 성서 말씀을 보세요.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 .(창세 1, 28)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박신부 예,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인류 번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초대 인류와 조상이었던 아담에게 한 말씀입니다.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가톨릭에서 독신 제도를 인정한다고 해서 결코 결혼을 경멸한다든지 등한시하진 않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없는 결혼 성사를 통해서 결혼의 신성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송양! 성당에서 하는 결혼 성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송양 전연 없습니다.

박신부밖의 미 신자들도 가톨릭 교회에서 하는 결혼 성사를 보고는 모두 결혼의 신성성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송양이 성서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신약 성서에 독신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나머지 독신 생활을 권고하신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파 사제들이 이혼 문제를 들고 나와서 예수님의 의견을 들으려고 했던 장면과 더불어 독신의 의미를 설파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예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 8-12)

이 말씀을 하나하나 분석해 봅시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첫째로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 이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성의 불구자로 태어난 고자를 뜻합니다.

둘째로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은 개인적으로 성의 불구자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여건 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셋째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결혼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마는 더 높은 하늘 나라를 위해서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을 받아들인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다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하늘 나라를 위해서 아름다운 순결을 바칠 뜻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일종의 권고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독신 생활은 어디까지나 자유 선택의 문제입니다.

송양 그런데 천주교 신부님들은 모두가 독신 생활을 하잖아요?

박신부 그렇습니다. 가톨릭의 독신 생활은 복음 성서의 권고 말씀을 따라 교회에서 교회 법령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톨릭 신부들의 독신 생활의 교회법은 오늘이라도 얼마든지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송양 그렇다면 예컨대 로마의 교황님이 신부들의 독신 제도를 폐지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지요?

박신부그렇습니다. 그러나 현 교회법상에는 스스로가 독신을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성품 성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서 신부들의 독신 제도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우리 교회 안에서의 독신 생활 그 자체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를 볼 것 같으면 독신 생활의 고귀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말씀드린다면 초대 교회에서는 가톨릭의 성직자들도 결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일반 평신도들이 성서에서 말씀하신 독신의 고귀성을 깨닫고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사막으로 들어가서 독신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 자신을 깡그리 바치는 생활을 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은수자(隱修者)'라고 했으며 이들이 모여서 결국 가톨릭의 수도회(修道會)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독신이었고 그가 간택한 세자 요한도 독신이었으며 열두 제자 중에서 독신이었던 사도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신 것이라든지 또는 요한의 묵시록에서 볼 수 있는 독신자의 특은을 봅시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구출된 십 사만 사천 명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숫총각들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닙니다."(묵시 14, 3-4)

독신자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표시하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태 19, 27)

이 고백을 보아서 그는 처음에는 결혼을 했던 사람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다음부터는 하늘 나라를 위해 부인과 별거했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들입니다. 그가 부부 향락과 자녀들과의 가정의 단락을 누리면서 어찌 감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까?

독신 생활은 인간 자연적인 욕망의 부정은 아닙니다. 더 큰 것을 긍정하기 위해 그것들을 버린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독신이었던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과 과부들에게는 나처럼 그대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1고린 7, 8-9)

바오로의 말대로 독신이 더욱 좋지만 "자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독신 생활의 근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나 처녀는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남편이 있는 여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1고린 7, 32-34)

진정 하느님만을 위해 모든 생을 바치겠다는 성직자라면 예수님의 복음 정신에 철두철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양! 우리 한번 솔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 두 성직자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한 사람은 부인과 다섯 아들을 가진 성직자요, 다른 하나는 오로지 하느님 사업만을 위해 사는 독신자라고 생각합시다. 주일 연보를 앞에 놓고 우선 처자가 있는 성직자는 그 돈으로 아들 미국 유학시킬 생각을 먼저 할 것이고 50평 짜리 맨션 아파트를 사고 싶은 것은 당연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처자가 없는 독신 성직자는 그 돈으로 교회 신축, 복음화를 위한 자금, 불우 이웃을 위한 방법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아 봅시다. 처자가 있는 서울 모모 큰 교회 목사님에게 저기 섬나라 거제도나 완도 교회로 가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같은 교직자로서 자기만은 꼭 서울 중심가의 부자 교회의 목사님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가톨릭의 성직자는 예컨대 서울 명동성당 주임 신부로 있다가 저기 산골 미리내 정당으로 가라면 아무런 반응 없이 주님의 뜻을 따라 떠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주님의 진정한 복음 사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 정신보다 십일조에 눈이 어두운 목회자가 있다면 그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독신 제도의 말씀을 하신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의 성직자는 성품 성사를 받은 사제(司祭)들입니다. 개신교에는 '사제'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신부들을 목사님들처럼 생각하려고 합니다 구약 성서에 비친 사제들의 모습을 잠깐 봅시다.

"'거룩한 떡밖에 없소이다. 한데 장군의 부하들은 여인을 가까이한 일이 없는지요?'하고 묻자, 다윗이 대답하였다. '나는 이번 길을 떠날 즈음해서 며칠 동안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 오늘만은 절대로 깨끗합니다.' 그제야 사제는 거룩한 떡을 그에게 주었다."(1사무 21, 4-6)

이와 같이 거룩한 빵을 얻어먹기 위해서도 몸이 깨끗해야 했다면 더구나 제단에서 성제(聖祭)를 집행하늘 성직자의 독신은 당연한 결론일 것입니다.

송양 신부님 말씀에는 다 일리가 있긴 있는데요, 실제로 보면 가끔 여자 관계로 신부직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결과적으로 독신 제도가 주는 악한 평판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박신부 사실대로 말씀드려서 가톨릭 신부로 살다가 독신 생활에 자신을 잃고 환속하는 사제들도 있습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그 첫 공식 케이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송양 신부가 환속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박신부현 교회법상으로는 공식적인 성직 생활을 할 수 없고 이런 경우에 교황청의 허락을 받으면 결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평신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송양 이상 독신 제도에 대해서 말씀이 나왔으니 가톨릭의 수도 생활에 대해서도 좀 알고 싶어요.

박신부수도 생환의 기원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가톨릭 신자들이 초대 교회에서 더욱 완전한 자 되기 위해서, 더욱더 복음대로 살기 위해서, 예컨대 마태오 복음 19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을 따라 살아 보겠다는 데서 수도 생활이 출발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이런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더욱 완전한 자 되기 위해서 모여 사는 사람들이 곧 수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밖에서는 수도 생활의 참된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수도자들은 '현실 도피주의자들' 또는 '염세주의자들' 또는 '사랑에 실패한 군상들'이라고도 합니다.

참된 수도자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저는 저의 가슴에 타고 있는 값진 사랑을 잠시 지나가는 인간에게 바치고 싶지 않고 영원한 그분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에서는 수도자들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가치스러운 영원한 하늘 나라의 보화가 있다는 절대적인 가치를 생활을 통해서 증명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복음의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송양 그런데 가톨릭에서 보면 메리놀파니 바오로파니, 또 무어라든가 , 살레시오파니 하면서 많은 파가 있는 것 같아요.

박신부 역시 가톨릭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씀이지요. 개신교에서 장로 교파니 침례 교파니 하면서 종파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말씀입니다. 메리놀회니 가르멜회니 하는 것은 수도회의 이름들입니다. 가톨릭에는 여러 가지의 수도회가 있습니다. 사회 봉사의 성격에 따라 또는 복음화의 방법에 따라 그리고 수도원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다양한 수도회가 있습니다.

송양 그 많은 수도회를 다 알 수는 없을 것 같으니 근본적인 수도 정신이 무엇인지만 알고 싶습니다.

박신부예. 금방 말씀드린 대로 교육 사업만을 하는 수도회, 사회 복지 사업, 또는 매스컴을 통한 복음과 사업 등등의 그 봉사 방법만 다를 뿐 수도회의 기본 정신은 다음 세 가지고 모두 공통됩니다. 즉 청빈, 정결, 순종입니다.

청빈 정신은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개인 소유권 없이 사는 생활, 즉 물질 속에 살지마는 물질을 초월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정결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 있는 독신 생활을 통한 전인격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생활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의 정신, 즉 하느님의 복음 정신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동시에 수도원 장상들에게 순종하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하느님의 어떠한 말씀에도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순종의 생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즉 수도 생활에 대해서 잘 알고 싶으시면 '결혼 성소와 수도 성소'(가톨릭출판사 간)라는 책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끝으로 하나 참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프랑스 '테제'란 곳이 있어요. 거기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교회 일치의 광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놀란 것은 거기에는 거의 많은 기독교 종파들이 모여 있는데 개신교 청년들이 독신 생활을 하면서 수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0. 미사 성제와 성체 성사

송양 독신 제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신부를 사제(司祭)라고 하셨고 또 성품 성사를 말씀하셨을 때에도 소위 신권(神權)이란 표현을 하셨는데 신부를 사제라고 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박신부 송양, 혹시 가톨릭에서 바치는 '미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송양오래 전에 친구와 함께 성당에 꼭 한 번 가 본 적이 있어요.

박신부 그것으로써 가톨릭을 알 수는 없습니다. 가톨릭의 종교 의식의 핵심이 곧 '미사'입니다.

미사는 한마디로 종교적인 제사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절대자에 대한 경신 행위로서 종교 의식이 있고 고기나 기타 곡물로써 제사를 바치는 종교 의식으로 나타납니다. 구약 시대에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제사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나의 이름은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말라 1, 11)

구약의 카인과 아벨이 하느님께 제사를 바친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창세 4장)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바쳐진 유일 무이한 완전한 제사를 기념하는 종교 의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밖에 없었던 가장 완전한 제사, 이것으로 인해서 인류가 하느님과 궁극적으로 화해되면서 새로운 구원의 길이 열린 십자가상의 제사, 이것을 재현해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은혜를 받는 길이 곧 미사 성제(聖祭)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제사의 주역들을 '제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톨릭의 신부들은 단순한 설교자만이 아니라 제단에서 제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입니다.

이 미사 제사와 연결된 성체성사(聖體聖事)는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최후 만찬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서 "내 살이요 내 피니라."하신 말씀을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성변화(聖變化)되는 성체(聖體) 성사의 신비는 역시 가톨릭에만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관 미사 성제와 성체 성사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 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9, 11-1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번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그분은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주셨습니다."(히브 10, 12-14)

예수님의 희생의 제사가 인류 구원의 필수 조건이었다면 오늘날 예수님의 그 희생의 은혜를 받는 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미사 성제입니다. 십자가상의 제사가구체적으로 최후 만찬 시에 미사의 형식으로 변한 것입니다.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음식을 나눈 뒤에 또 그와 같이 잔을 틀어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하셨다."(루가22, 19-20)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이 성찬식을 지내 왔으며 오늘까지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원의 신비를 이 미사 예식을 통해서 기념하면서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송양 성서대로 보면 "이것을 행하라."고 했지 그것이 직접 우리 구원에 어떤 연결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 개신교에서도 성찬식을 하고 있습니다.

박신부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성찬식은 하나의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행되는 상징적인 뜻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의 미사 성제는 그 빵과 포도주가 곧 예수님의 진실한 몸이요, 피가 된다는 성체의 실재를 의미하는 신비의 제사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빵과 포도주가 사제인 신부의 축성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참된 몸과 피로 변한다는 성변화(聖變化)의 교의입니다.

송양 성서에 정확한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박신부예, 4복음서에 예수님의 성체 교리만큼 자세하게, 그리고 여러 번 되풀이된 내용은 없습니다. 실제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며 이것을 먹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이 교리는 알아듣기에는 너무나 벅찬 신앙 개조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곧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 것뿐입니다. 송양, 요한 복음 6장을 잘 살펴 읽어보십시오. 요한 복음 6장에는 처음에 빵의 기적이 나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일러주시기 위한 서론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생명을 위한 빵을 주신 다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빵을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 47-51)

송양! 우리 구원에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을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처리합니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I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 16)

하신 말씀을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자", 여기서 믿음의 내용 중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믿고 먹는 사랑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예수님은 못을 박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개신교에서는 이 빵을 예수님의 참된 몸이라고 믿지를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누가 믿겠습니까?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요한 6장 참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고 하셨을 때 그 때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산 사람의 살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어떤 상징적인 것이었다면 예수님이 친절하게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은 말 그대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6장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고 반문하시면서 "물러가려면 물러가라 내 말은 진실되기에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그 때 열두 제자 중 으뜸 제자였던 시몬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 63-68)하고 말했습니다.

자!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성서에서 우선 세례의 중요성을 얘기하셨고 다음에는 당신 몸을 받아먹는 성체 성사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이 얼마나 명확한 말씀입니까?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서를 읽고 그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지난날의 편견을 버리고 어떤 고집도 비판도 버리고 진실로 성서 말씀에 귀를 기울여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체면이나 위신의 문제도 아닙니다. 진실하고 겸손한 신앙의 차원입니다.

송양 그렇게까지 깊이 성서를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가톨릭의 신부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제권(司祭權)에 의해서 성체 성사를 진행한다는 뜻이군요.

박신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오는 신권의 소유자이며 동시에 사제들이며 그래서 미사 성제를 집전하고 그 성체를 성당에 모셔 두기 때문에 가톨릭의 교회당은 예배당이 아니고 성당(聖堂)이라고 합니다. 예배만을 보는 교회당만은 아닙니다. 예배도 드리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제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모시는 장소입니다.

송양 신부님,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지난날 저의 신앙은 너무나 일방적이었고 편견적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가톨릭의 의식 위주의 사상은 어떻게 보십니까?

11. 가톨릭의 종교 의식

박신부 흔히들 말합니다. "가톨릭은 형식주의적인 종교이다." 그러나 종교학적인 입장에서 말한다면, 무릇 참된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즉 교의(敎義), 종교, 윤리, 그리고 종교 의식(儀式)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에서든지 종교 의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종교에 있어서 의식의 필요성은 근본적으로 종교의 주체가 '인간'이란 점에서 비롯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신적인 요소와 물질적인 요소인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정신 작용을 하면서 동시에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행위를 하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감각적인 외적 행위를 종교에서는 '의식'이라 하고 일반 대중 사회에서는 '형식' 또는 '예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송양 그런데 가톨릭교는 지나치게 의식 위주의 종교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박신부예, 외부에서 볼 때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차근 차근 '형식' 또는 '예식'이란 문제점을 얘기해 봅시다.

저는 우선 사회에 있어야 하는 소위 '형식'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하면서 '형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내용을 담는 그룻이다."라고 답변하고 싶어요. 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에 손을 잡고 악수를 합니다. 결국 '악수'라는 형식인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우정의 표시가 아니겠습니까?

송양 그야 물론이지요.

박신부 그런데 그 우정의 농도에 따라 그 악수의 행동도 달라집니다. 별로 달갑지 않은 친구라면 그냥 힘없이 슬쩍 손만 잡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우정에 넘치는 친구끼리라면 팔이 떨어져라 흔들어 댑니다. 그 때 그 우정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에 아마 그들은 "저 사람들 돌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형식 또는 의식이 많이 있는데 그것의 근본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가톨릭의 의식이 그만큼 성대하고 엄숙하고 장엄한 것은 그만큼 더 큰 하느님의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이 되겠고 또는 경신 행위의 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그 의식의 뜻을 모르는 데서 '형식주의'라는 표현이 나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어버이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뜻에서 명절이 오면 큰절을 합니다. 그 형식은 자녀된 자로서의 어버이에 대한 존경의 표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큰절을 하기 위해서 먼저 좋은 옷차림을 하고 얼굴도 깨끗이 씻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 나타난 인간의 경신 행위에도 최대의 화려함과 성대한 의식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필립 2, 10-11)

여기서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하느님을 찬미함은 지당한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도 지상 생활에서 많은 형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시어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마르 7, 33-35)

"손가락을 귓속에 넣고", "침을 발라", 이따위 형식적인 행동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필요했던 것입니까?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감각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 의식에서 일어서고 앉고 무릎을 꿇고 하는 자연스러운 종교 의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최후 만찬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루가 22, 19)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그리고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신 이 말씀을 보아 종교 의식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명령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도 보면,

"야훼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긴 다음 다윗은 살진 황소를 잡아 바쳤다. 그리고 다윗은 모시 에봇을 입고 야훼 앞에서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나발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야훼의 궤를 모시고 올라왔다."(2사무 6, 13-15)

"솔로몬 왕은 자기에게 모여 온 이스라엘 회중을 이끌고 궤 앞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과 소를 제물로 잡아 바쳤다. 그리고 나서 사제들은 야훼의 계약궤를 성전 밀실 안 지성소로 모셔다가 거룹들 날개 아래에 안치하였다."(2역대 5, 6-7)

구약 시대의 종교 의식은 너무나 세부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특히 '레위기'에 나타나는 제사는 종칠 의식으로 일관되어 있지 않습니까?

학생들이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받는 졸업장도 '졸업식'이란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나는 사람들에게 '장례식'이란 고별식이 있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부부 계약을 위해서도 성대한 '결혼식'이 있다면 더구나 하느님과의 영원한 행복과 생병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종교에 있어서 그만큼 성대하고 엄숙한 '의식'이 따라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인간이 하느님을 믿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신앙 행위는 마땅히 인간적이어야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이 인간이 볼 수 있도록 사람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인간입니다. 천사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닙니다. 그리고 동물도 아닙니다. 영육의 결합체인 인간이기에 인간적인 요소가 담긴 종교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부처님 앞에서 절하고 비는 종교적인 의식을 우리는 어떻게 형식주의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3 1절에 우리는 기념식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순수한 형식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2. 연옥에 대해서

송양 성전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 연옥(煉獄)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박신부 먼저 하나 여쭈어 보겠는데요 개신교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까?

송양???

박신부 개신교는 너무나 많은 교파가 있고 또 교파마다 주장하는 교리가 나르기 때문에 개신교 교리를 획일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마는 일반적인 개신교의 교리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옥 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송양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우리 교회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박신부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에는 연옥의 교리가 있습니다 즉 사람이 죽은 다음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전연 죄의 그림자도 없는 깨끗한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대죄 중에서 하느님과 영영 등을 진 사람들은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이란 단련을 받는 곳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그 죄에 해당되는 보속을 치르는 곳이지요.

송양 그 기간은요?

박신부그 기간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법정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극형에 처하는 방법으로 사형 언도가 있고 아무런 죄도 없는 자들은 무죄 석방이 되지만 그밖에 죄에 따라 유기 징역이 있지 않습니까? 그 유기 징역의 기간은 죄와 정비례하지요. 연옥의 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 연옥이 없다면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마태 16,27) 하신 하느님의 공의(公義)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겠어요. 송양! 솔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송양이 지금 죽는다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송양 ???

박신부 그렇게도 자신이 없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듭니까?

송양글쎄요. 그렇게 질문을 받으니 연옥이 있으면 정말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박신부 순수히 어떤 위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극히 상식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송양그런 것을 상식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성서의 근거가 있습니까?

박신부 저번에도 말씀드린 대로 성서 이외에 성전의 권위를 먼저 알아야겠지요. 연옥설은 주로 성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만 성서에도 그 뜻이 밝혀져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 보면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 43-45)

그런데 저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 소위 종교 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부정하고 이 마카베오 성전을 성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생각하는 연옥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송양 신약 성서에는 연옥에 대해서 어떤 子절이 있습니까?

박신부 신약성서에는 구약성서처럼 명확한 기록은 없지마는 연옥을 암시하는 구절은 있습니다. 예컨대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 32)

여기서 내세에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암시가 있지요. 그러니까 연옥에서 천국에 가기까지 죄의 벌을 받는 곳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 25-26)

이 옥은 연옥을 의미합니다. 지옥도 옥은 복이지만 거기서는 나을 수 있는 옥은 아닙니다. "나을 수 있는 옥"은 곧 연옥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할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1고린 3, 13-14)

공심판 때에 인간의 업적을 시험하는 것은 불입니다. 그런데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들"은 곧 연옥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송양 그런데 연옥에도 불이 있다는 뜻입니까?

박신부연옥 단련은 불로써 이루어집니다. 연옥의 영혼들은 감옥살이하는 사람들과 같아서 자기들 힘으로는 그 보속을 경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사람들이 바치는 기도와 희생을 통해서 그들의 보속은 경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위령 미사'를 위시해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진정 하느님께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거지요.

송양 전통상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전통을 들 수 있습니까?

박신부유명한 성인이신 아우구스티누스 아십니까?

송양 어거스틴 성인 말이지요?

박신부예, 영어 발음으로는 어거스틴이라 하고 라틴어 본 발음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의 대학자이며 가톨릭 주교였습니다. 그분이 쓴 '고백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는 구절이지요.

"내 마음의 천주님, 내 모친의 죄를 위하여 주께 간구 하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상처로 구원을 받을 수 있기에 기도드립니다. 저의 어머님이 저의 아버님과 함께 편안히 쉬게 하소서."(고백록에서)"

이렇게 대성인 아우구스티누스도 돌아가신 어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송양! 혹시 로마에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송양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박신부 언젠가는 가시는 기회가 있겠지요. 로마에 가면 초세기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모여서 기도했던 그 옛날 무덤들인 카타콤바라는 지하 무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그 당시 2, 3세기 신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 흔적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송양 그렇게 중요한 교리인 연옥에 대해서 개신교에서는 왜 말이 없는지 전연 모르겠네요?

13. 소위 종교 개혁의 문제

송양 그 동안 가톨릭의 교리를 대충 들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신부 소위 종교 개혁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을 여기서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만을 얘기하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그 당시 가톨릭 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이 타락했습니다.

송양 그래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 때 타락한 가톨릭 교회 앞에서 새로운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명을 느꼈다고 주장합니다.

박신부예, 잘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 당시 교회 일부 성직자들의 부분적인 타락이었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의 타락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송양! 그 당시 가톨릭에서 가르친 교리상의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송양 그건 잘 모르겠지만 실제로 "면죄부사건" 또는 "종교재판" 등등 가톨릭에서 너무나 지나친 일을 저질렀지요!

박신부송양, 우리 정신을 차리고 얘기합시다. 전번 소위 "면죄부"사건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도 말이 있었지마는 일부 몇몇 성직자들의 비행을 교회 전체에 연결시킬 수 없으며 더구나 그것이 가톨릭의 정통 고리와는 전연 관계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가끔 목사님들의 재산 문제, 권력 투쟁, 신도 유도 작전 등등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도 또 개혁을 해서 전연 다른 교회를 만들어야 된다는 원칙을 주장한다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문제는 마르틴 루터의 소위 종교 개혁은 근본적으로 그 각도와 측면이 엉뚱한 데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타락한 성직자들을 상대로 개혁을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정통 교리를 자기 임의로 뜯어고쳐 놓고는 종교 분열을 조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 개 혁"이라 하지 않고 "종교 분열"이라고 표현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부 정치인들의 타락을 내세우고 민주주의의 자체를 제거하고 공산주의나 기타 다른 독재 정치를 내세웠다면 그것이 진정 가장 건설적인 개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송양 정통적인 교리라니요?

박신부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교회의 기본 교리를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왔어요. 루터의 신학 이론은 세 가지로 요약되지요.

첫째로 신앙의 규범은 성서뿐이고 또 성서는 자유 해석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런 주장을 내 세우면서 교회의 교도권(敎導權)을 완전히 무시해서 전통적인 사도들의 가르침을 내동댕이쳤습니다. 저번에 성서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도 얘기가 있었지마는 성서 자유 해석은 드디어 종교 분열의 종파주의만을 조장했을 뿐입니다. 같은 성서 구절을 놓고 저 목사님은 저렇게, 이 목사님은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붙이니 그 어느 것이 진정 하느님의 가르침인지를 분간하기 어렵고 그러니까 결국 많은 종파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 자유 해석이 저지른 결과는 한국에만 해도 지난번 문공부 통계에 의하면 개신교의 66종파, 세계적으로는 약 5백 종파의 개신교들이 난립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피 많은 종파가 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의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종파가 되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그분의 말에 의하면, 개신교의 종파 싸움에 환멸을 느꼈다고 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한 교리 안에 통일된 가톨릭에 와서 진정 참된 진리 위에 위로를 받았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실은 개신교 안에서의 종파심은 심각하지요. 남의 집안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송양 신부님! 저희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성서 해석은 각자 하되 성령의 가르침에 의해서 한다고 하시던데요?

박신부 성령의 이름을 대는 목사님은 그래도 훌륭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아 성서 해석을 한다는데, 그렇다면 한 분이신 성령은 그 가르침도 같아야 되겠지요?

그런데 같은 성령이 왜 그렇게 서로 다른 성서 해석을 합니까? 성령이 型개졌다는 말입니까? 성령이 수백 개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송양 그건 교파의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요.

박신부송양이 성서를 읽을 때에 성령이 직접 그 의미를 가르쳐 줍디까? 많은 사람들이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서 말씀 잘못 알아듣고 구원의 길을 놓쳤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루터에 의하면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해서 성서 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개신교에서는 그렇지요?

송양 성서 내용이 중요합니다.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박신부옳은 말씀입니다. 저번에 성서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도 그런 얘기가 있었지만 가톨릭에서도 성서를 대단히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우선 성서 중심 그리고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성전을 중요시하고 나아가서는 교회의 교도권에 의한 가르침 이것입니다. 개신교에서도 성서에 없는 것을 많이 하고 있어요?

송양 예컨대 뭔데요?

박신부개신교에 있는 권사니 집사니 하는 직책, 특히 요즈음 와서는 "명예"를 붙여서 주는 직책들 그리고 수십 종에 달하는 교회 헌금, 이런 것은 성서에 없습니다.

송양 성서에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있어요!

박신부예, 있습니다.

"십분의 인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마태 23, 23)

이 말씀 중에서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의 질서입니다. 자선 행위를 하면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송한 얘기지만 개신교 신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목사님 설교, 특히 부흥회의 설교의 기본 내용이 주로 돈 얘기, 십일조의 얘기라고 듣고 있습니다.

그 십일조가 정의롭게 사용되고 있는지, 정말 복음적으로 처리가 되는지 잘 모릅니다. 성서를 너무 자기 위주로 해석하고 성서에 없는 것도 적당하게 자신의 유익에 맞추어 하는 목회도 많지 않습니까?

송양 신부님, 그 말씀에는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교회와 돈', 이 문제는 약간 심각한 것 같아요.

박신부 죄송합니다. 돈이 많으면 부패가 따라오는 것이 원칙적인 이야기입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성서 자유 해석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집을 찾아가는 데 길은 하나이고 정확해야 하는데, 구원으로 가는 길은 제멋대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우리 구원의 문제입니다.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 하는 인생의 가장 귀중한 문제입니다.

송양 신부님 말씀을 듣고 보니 성서 자유 해석과 '성서만의 규범'이라는 설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 같아요!

박신부둘째로 루터의 교리는 "신앙만으로 구원."

이런 이론입니다. 인간의 어떤 선행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 28)

이 말을 인용하여 인간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내 세우면서 야고보서에 있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 26)

이 말이 극히 못마땅해서 그는 야고보서는 성서가 아니라고까지 했습니다.

이 얼마나 개인주의적인 신앙 태도입니까? 아마 그가 가톨릭의 신부로서 독신 생활까지 하느님 앞에 엄숙히 약속을 하고도 그것을 쉽게 팽개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미 이런 이론에 근거를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소위 종교 개혁을 했다는 장본인인 루터가 가장 신성한 독신의 약속을 깨뜨리고 수녀와 결혼을 했고 흐리고 세 번째로 그의 신학 이론으로 "인간은 원죄로 속속들이 부패되어 다시 재기될 수 없다."고 했는데, 인간은 죄로 근본적으로 타락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선행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어쩌면 자신이 선언한 하느님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그것을 거룩하게 변명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송양 가톨릭에서는 언제나 교권이니 제도니 의식이니 전통을 주장하는데 애초의 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고, 또 그것은 진정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은 어떤 제도나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신부 믿음이 중요합니다. 성서에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에서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특히 믿음을 강조한 것은 유다인들와 지나친 율법 정신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래서 그리스도의 믿음을 강조했지만 로마서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율법을 준행해야 함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할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받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알은 사람이라도 율법이 명하는 것을 잘 지키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도 할례 받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아주실 것이 아닙니까?."(로마 2, 25-26)

송양 뭐니 뭐니 해도 믿음이 제일 중요해요!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로마 3, 33)

박신부 믿음이 중요해요!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송양그럼 또 무엇이 필요한가요?

박신부 성서를 바로 읽어봅시다. 그리고 부분적인 성서 구절로 전체의 성서 뜻인 양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선 믿음을 갖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계명을 지키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했듯이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듯이 실천이 없는 믿음은 분명히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육체를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로마 8,13) "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과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욕망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진노를 살 것입니다."(골로 3, 5-6)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가 13, 3)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29-31)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며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 거룩해지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브 12, 14)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1요한 5, 3)

보십시오. 사랑의 계명이 더 중요합니다. 송양! 개신교에 십계명이 있지요?

송양 예, 있습니다.

박신부 솔직히 말해서 십계명을 지져야 한다는 정신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냥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주장입니다.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라는 5계명에서 천주교에서는 자살이나 낙태를 크게 중죄시 합니다. 개신교에서 낙태나 자살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합니까?

송양 ?

박신부이상 말이 나왔으니 . 성서에 이혼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 5-6)

분명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은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이혼도 큰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십일조'는 강조합니까?

송양 ?

박신부 성서에 분명히 이혼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십일조'는 구원과는 별로 관계없는 것입니다.

송양십일조는 하느님에게 바치는 것인데 ?

박신부 훌륭한 믿음은 있는데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개신교에서 말하는 "믿음만으로 구원"이라는 교리에는 모순이 있지 않습니까?

송양 똑바로 얘기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박신부이건 중요한 '구원'의 문제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구원의 진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낙태를 해도 괜찮고, 강간을 해도, 도둑질을 해도, 살인을 해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진정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까?

송양 ?

박신부말이 나왔으니 '믿음만으로 구원'이라면 교회에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집에서 개인적으로 믿음을 키우면 됩니다.

송양 그건 아니지요. 교회에 나가서 선교 말씀을 듣고 믿음을 키워 나가야지요! 학생들이 학교 가서 선생님으로부터 지식을 배우듯이 말입니다.

박신부옳은 말씀입니다. 구원의 기본 조건이 '믿음'만이라면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믿음'을 키울 수 있습니다.

송양이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개신교 일부에는 '무교회주의자'가 있습니다.

송양 그건 무슨 뜻인데요?

박신부개신교의 정신대로 성서만 있고 그것의 믿음만 있으면 구원이 가능하고, 집에서 개인적으로 성서를 읽고 깊이 예수만 믿으면 구원이 되니까 구태여 교회가 필요 없다는 주장입니다. 개신교의 가르침대로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무교회주의자'들의 말도 뜻이 있습니다.

송양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들이 성당에 나가는 이유는 뭔데요?

박신부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의 목적으로 세우셨고 목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는 신권(神權)을 주셔서 성사를 집행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는 귀한 하느님의 제사(미사)에 참례하고 하느님의 몸인 성체(聖體)를 모셔서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처럼 순수히 예배만 바치는 교회와 성체와 제사인 미사 그리고 일곱 가지 성사를 집행하는 천주교와는 근본적으로 교회관이 다릅니다. 그래서 진정 구원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면 천주교가 주는 구원의 길,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정통 신앙을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 구원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개신교 형제들은 자기들의 편견만을 내세우는데 진정 구원이 무엇이며 그 구원을 전해 주는 교회의 사명을 다른 각도에서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송양 어떤 각도에서요?

박신부 지금 이 시간에 '인간 구원론'에 관한 신학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간곡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2천년의 교회 전통을 가진 가톨릭의 교리를 진심으로 한번 연구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시간 관계로 지금까지 송양과 이야기한 것 다 그만두고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송양 예!

박신부송양! 아까도 말씀드렸지 마는 전 세계에 5백여 종의 그리스도교 종파가 있는데 그 교회가 모두 子원의 진실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송양 ???

박신부2+2=4라는 진리는 천고 만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닙니까? 이것이 미국에서는 6이 되고 한국에서는 4가 된다는 원리가 있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더구나 구원, 즉 영원한 삶의 길인 신앙의 진리를 이렇게 저렇게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많은 교파들이 다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송양 신부님! 신앙의 진리는2+2=4라는 수학적인 진리와는 다릅니다.

박신부옳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그것이 2+2=4라는 수학적인 증명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래서 오늘도 성서를 손에 들고 얼마나 많은 사이비 종교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수백 종의 종파 중에서 어느 하나만이 진실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송양, 여기서는 어떤 고집이나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구원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송양! 가톨릭 교회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흑은 구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송양 글쎄요!

박신부 송양이 속해 있는 교파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합니까?

송양그야 말할 것 없지요. 구원이 있지요.

박신부 만일 제가 천주교에서는 구원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송양글쎄요. 그렇게 질문을 하시니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박신부 먼저 진실한 마음의 자세를 가집시다. 구원 문제입니다. 어떤 개신교 신자들은 천주교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송양! 만일 천주교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한다면 개신교가 이 세상에 나기 전 약 천 오백 년 동안은 전연 인류 구원이 없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송양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박신부그 때에는 이 세상에 천주교밖에 다른 개신교 종파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송양 ???

박신부적어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 구원 사업을 하셨다면 예수님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천주교를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천주교에 구원이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결국 허수아비였고, 마르틴 루터에 의해 인간 구원이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송양 ?

박신부송양! 내 구원의 문제입니다. 진실합시다. 이 세상을 다 얻어도 내 영혼 구원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성서에는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통한 구령이냐, 아니면 마르틴 루터를 통한 구령이냐?" 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루터는 성인도 성자도 아닙니다. 고작 "루터 선생"으로 통하는 극히 평범한 인간이었고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타락된 가톨릭의 한 신부에 불과합니다.

송양! 진정 생각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루터 선생님입니까?

가톨릭이 그 당시 많은 스캔들을 주었던 타락된 교회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구원의 교회를 악용한 일부 성직자들의 잘못입니다. 어찌하여 구원의 교회를 한 인간이 자기 임의대로 개조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는 그 개조된 그룻된 종파에서만 구원이 있다고 합니까? 송양! 백 보를 양보해서 가톨릭에서도 구원이 있고 5백여 파의 모든 종파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합시다. 그렇다면 그 믿는 신조가 다른데 어찌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그렇게도 멍청한 분입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합시다. 개신교에서는 저마다 성서 해석을 성령의 가르침이라고 하는데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성령의 가르침도 하나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분열되었다는 것입니까? 예컨대 가장 중요한 성서 내용 중에, 저번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성체 교리가 있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 53-54)

이렇게 명확하게 영생을 얻는 말씀을 놓고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고 천주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진실한 몸과 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이고 하나는 긍정적입니다. 이 둘 중에 하나는 진리일 것이고 하나는 허위일 것입니다. 둘 다 진리일 수도 없고 둘 다 허위일 수도 없습니다.

이 귀한 영생의 진리 앞에서 우리는 다소곳이 겸손해야 합니다. 내 구원의 문제입니다. 송양은 어느 진리를 선택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사제권(司祭權)을 주시어 당신의 진실한 살과 피를 축성해서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정통적인 천주교의 가르침과 타락한 천주교의 신부였던 루터의 가르침을 놓고서 어느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까?

우리는 어떤 체면이나 위선이나 개인 주관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 구원이란 진리 앞에는 어떤 편견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송양 그렇다면 가톨릭에서만 구원이 있고 우리 개신교에서는 구원이 없단 말입니까?

박신부 그것은 간단히 답변할 수 없습니다. '구원 신학'이란 딴 문제입니다. 이것을 더욱 깊게 알고 싶으시면 제가 쓴 책입니다만 '가톨릭 사상 강좌'를 참고하십시오. 여기서는 인류 구원의 신학적인 문제를 다를 시간이 없습니다. 많은 개신교의 종파 의식과 진실한 그리스도의 교회인 가톨릭 교회와의 근본적인 문제만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송양 신부님, 솔직히 말씀드려 서 옛날에는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지를 못했습니다. 단순히 개신교 신자니까 이렇게 믿어 왔고 또 가끔 개신교에서 가톨릭을 비판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만 있었는데 오늘 신부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

박신부 좋은 얘기했습니다. 어떤 개신교 신자가 교회당에서 목사님이 선교할 때 가끔 천주교를 치는 설교를 듣고는 '왜 그럴까? 무언가 천주교에 대해 열등 의식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무언가 천주교가 더 좋은 점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하고는 천주교 교리를 연구한 끝에 개종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예배당에서는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치는 설교를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어떤 문제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특별히 교리 시간 이외에는 성당에서 설교 중에 남의 종파를 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어떤 사이비 종교가 나타나도 가톨릭은 태연 자약합니다. 왜냐하면 2천 년간 너무나 많은 이단과 싸워 온 베드로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요즈음 한국에서 보면 성서를 들고 이상한 소리를 하고 나오는 사이비 종파가 일어나면 개신교에서 서로가 이단이라고 싸움질을 하는 것을 보는데 .

송양! 한국의 실정만 봅시다. 스스로가 "재림 예수"라하고, 스스로가 하느님의 사신이라 하며 ○○장로니, ××장로니 하고 일어나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진실한 교리를 믿는 올바른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송양 아니지요

박신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아니라고 합니까?

그렇다면 송양이 속해 있는 그 개신교도 진실한 그리스도의 교리를 믿는 참 종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있다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송양이 주장하는 같은 근거를 두고 사이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들고 나오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송양 ?

박신부송양! 제가 가톨릭의 신부니까 아전 인수격으로 송양을 우리 교회에 끌고 오기 위한 방법으로만 생각하시면 퍽 혼란합니다. 오늘 우연히 송양이 저를 찾아 주셨기에 진심으로 진실 자체를 말한 것뿐입니다. 이런 기회에 한번 그리스도 교회의 진상을 그리고 구원의 근본 문제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송양 그런데 신부님!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 아닙니까?

박신부그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표현이 아무리 정확하다고 해도 '절대자'를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용어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송양 아니지요! 말이 중요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절대자 유일신을 믿기 때문에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쓰는 '하느님'이라고 하는데 그건 기독교의 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박신부 송양이 문제를 걸고 나왔으니 저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우리 나라 말에서 숫자로 인격을 지칭하는 법은 없습니다. 예컨대 한 분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태양도 하나뿐입니다.

그렇다면 태양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집에 강아지가 두 마리 있습니다. 그것들은 '둘님'입니다. 병아리가 세 마리 있습니다 그것들은 '셋님'입니다. 송양! 그렇지요?

송양 아이구 신부님, 어떻게 그렇게 따집니까?

박신부하나밖에 없는 '신'이니까 그분이 '하나님'이라면서요. 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한자로 표현해 봅시다. 하나 둘을 한자로 일(一), 이(二)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자로 '일님'이 됩니다. "일님 아버지시여 ." 그렇게 해 보세요. 그리고 개신교에서도 신(神)자를 쓰지요?

송양 그래요. 신학교 또는 신학(神學)이란 말을 씁니다.

박신부이 신(神) 자야말로 귀신 신 자입니다. 원천적으로 이 신(神) 자는 기독교의 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신(神)자는 쓰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말, 하늘에 계신 절대자를 표시하는 '하느님'이란 말은 왜 외면합니까? 그렇다면 신학(神學)도 "일학(一學)"이라고 해야지요.

너무 고지식하게 일반적인 사고 방식은 대중의 공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람'이란 말을 생각해 봅시다. 보통 쓰는 '사람'은 기독교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진정 기독교적인 개념으로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사람이란 말 대신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써 보십시오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우리와는 더불어 살수 없는 이방인들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송양 그렇게까지 생각합니까?

박신부 그러니 처음부터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용어에 대해서는 말을 그만두자고요. 천주교는 '개신교의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데 개신교신자들이 괜히 이런 문제를 가끔 걸어요.

송양 신부님,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끝으로 가톨릭 교회의 참모습이라 할까 가톨릭 교회의 특징이라 할까, 가톨릭의 교회관을 듣고 싶습니다.

14. 가톨릭 교회관

박신부 이제 마지막으로 가톨릭적인 교회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인류 구원의 사업은 2천 년 전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 마칠 때까지의 전 인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육성을 들을 수도 없고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를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대리 기관으로 이 세상에 열두 사도들을 모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모든 권한을 주시면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이 약속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의 사명이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하신 말씀으로 표현이 되었다면 오늘 이 시대의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통해 그분이 말씀하신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분이 지시하신 구원의 길을 볼 수 있고 그분이 십자가의 제헌으로 이룩한 새로운 하느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이란 구원의 진리를 전제로 한다면 이것은 오늘에 있어서는 '교회를 통한 인간 구원'이란 말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가 인간 구원의 방법으로 이 지상에 오셨듯이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의 방법을 총대리하는 구원의 전당입니다.

그러니까 흔히 "나 요즈음 교회에 나간다." 하는 얇은 표현으로 나타나는 그런 교회의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곧 천국으로 인간을 인도하는 다리(교량)의 역을 하는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신학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몸 '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또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도 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교회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교회를 이렇게 정의(定義)하고싶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세우신 성사적(聖事的)인 인류의 집단.'

이 정의에서 교회의 요소를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의 창설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어떤 인간이 창설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주는 자연적인 구원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구원을 주는 초월적인 교회입니다. 석가 세존은 불교를, 노자는 도교(道敎)를, 마르틴 루터는 많은 종파를 만든 인간이었지마는 가톨릭 교회의 창설자는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둘째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즉 '인류 구원을 위한'교회입니다. 그 창설 목적이 어떤 상품을 만들어 돈을 모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 어떤 집단과 대결하기 위한 권리를 과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교회의 사명은 곧 그리스도의 사명인 인류 구원에 있습니다. 교회가 인류 역사에 참여하고 어떤 제도나 조직을 하고는 있지마는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인류 구원이란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창설 목적으로 보아 세상 어느 인류 집단과는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세 번째는 그것이 성사적(聖事的)이란 초자연적인 은총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구원은 어떤 인간적인 조건만으로써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새로운 의미, 즉 영성을 위한 구원은 다분히 하느님스러운 요소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 하느님의 요소, 즉 초월적인 은총의 요소가 곧 성사라는 내용으로 표현됩니다. 이 성사적인 요소가 있기에 그 목적인 인류의 子원이 가능하며, 또 다른 인간의 집단과도 근본적으로 그 내용을 달리하는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성사적인 요소가 없다면 하나의 인류 집회요, 때로는 어떤 사업의 집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예수님이 주신 일곱 가지 성사를 가진 유일한 초월적인 교회입니다.

네 번째는 소위 '인류의 집단'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집단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요소를 가진 교회간 뜻입니다. 인간적인 요소란 많은 부족과 결함 그리고 나약성을 지닌, 어떤 점에서는 뭔가 불완전한 내용의 교회란 뜻입니다. 때로는 제도와 조직이 범하는 과오도 있을 수 있는 교회, 성서 말씀대로 선인과 악인이 같이 있는 교회란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들 중에서도, 때로는 성직자들 중에서도 많은 스캔들을 주는 인간 나약성을 안고 있는 인간의 집단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교회 지도자들의 스캔들을 보고 또는 신도들의 스캔들을 보고서 교회를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이 모으신 열두 제자 중에도 유다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 그리스도 교회의 인간적인 일면을 보여 주는 좋은 교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 네 가지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를 말씀드렸습니다. 한마디로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 교회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면서 그 교회가 인류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데 틀릴 수 없도록 보장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다 .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 15 이하)

15. 가톨릭 교회의 특징

박신부 송양! 이왕 가톨릭적인 교회론이 나왔으니 가톨릭 교회만이 가진 네 가지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지일성(至一性)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씀드린다면 하나인 교회란 뜻입니다. 전 세계 10억 가톨릭 신도들은 어떠한 파벌 의식이 없이 한 교황님 밑에서 하나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진리의 교회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미국의 교회나 프랑스의 교회나 한국 교회나 그 설교의 내용이 같고 가르치는 교리가 동일하고 종교 의식이 동일하고 같은 성사 같은 기도 안에서 하나로 일치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어떤 교리나 윤리 도덕적인 관점에서 어떠한 분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뜻이고 동시에 예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1-23)

예수님의 기도는 교회가 분열되지 말고 하나의 교회로 하나의 신앙으로 뭉쳐지기 위해서 입니다. 또 예수님은 이르셨습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는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요한 10, 16)

예수님은 벌써 많은 종파가 떨어져 나갈 것을 예견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송양! 진심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이 성서 구절을 읽어봅시다.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양들"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양 우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진정 내 구원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어떤 편견이나 고집이나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둘째 가톨릭 교회의 특징은 지성성(至聖性)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그 본질상 거룩하고 엄숙해야 합니다. 교회당에서 잡스러운 행동이 용납될 수 없고 성스러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무수히 많은 성인 성녀를 배출했습니다. 때로는 인간적인 나약성으로 스캔들을 보이는 교회이긴 하지마는 근본적으로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수도자들의 거룩한 생활, 교회 의식의 엄숙성 등등 교회의 본질은 하느님의 성성(聖性)을 표현하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교회의 지공성(至公性)이라고 합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 자체가 '공번된' '보편된' 교회라는 뜻이 아닙니까?

어떤 민족이나 어떤 지역이나 어느 시대에 구애 없이 만민이 받아들여야 하는 보편된 교회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진리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네 번째 사도 전래성(使徒傳來性)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파가 약5백여 종이나 됩니다. 그 많은 그리스도교 종파 중에서 진정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사도들이 전해 준 교회는 유일한 가톨릭 교회 뿐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파들은 기껏해야 그 역사가3, 4백 년밖에 더 되지 않지마는 가톨릭만이 서력 기원의 주인공인 그리스도의 탄생과 연결된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유일한 그리스도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언급이 필요 없겠지요, 송양?

송양 신부님, 신부님의 얘기를 듣고 보니 제가 너무나 편견을 가진 그리스도인임을 느꼈습니다. 진실로 가톨릭교회가 그런 것인지는 전연 몰랐습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인간적인 어떤 체면이나 편견이 문제가 아니라 내 구원에 직결되는 문제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나의 구원 문제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던지고 덤벼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오늘 신부님의 말씀은 저에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톨릭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어찌 되었든 오늘을 계기로 가톨릭교리를 공부해야겠습니다. 신부님, 끝까지 저의 영혼을 이끌어 주십시오

박신부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 성서에도 이 세상을 다 얻어도 영혼 구제를 받지 못한다면 무슨 뜻이 있겠느냐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송양신부님, 가톨릭 교리 서적을 몇 가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박신부 예, 좋습니다. 우선 미국에서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개종하게 한 유명한 책인 '교부들의 신앙'을 소개합니다. 장면 박사가 번역한 책인데 개신교와 가톨릭의 문제를 상세하게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정식 가톨릭 교리서로는 제가 쓴 책입니다만 '가톨릭 사상 강좌', 그리고 대중용으로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책을 소개합니다.

송양 대단히 감사합니다.

끝으로 신부님,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문제에 대해서 인데요,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신부 개신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교리를 연구하고는 진실로 가톨릭만이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체면 때문에, 자신의 위신 때문에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이 내 구원에 관계되는 문제라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송양? 부디 가톨릭 교리를 연구하시면서 다시 찾아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고적으로 '18인의 개종 실기'라는 책이 있어요. 18인의 개신교 신자들의 개종담을 실은 책인데 그중 두 사람의 것만 여기에서 제가 소개해 드리지요. 그냥 참고로 보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종교 문제를 놓고 서로 비난하고 분파 싸움을 결코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 앞에는 겸손해야 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 천주교에서는 개신교 신자들을 '떨어져 나간 형제'라고 합니다. 절대로 이단시하든지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 21)

예수님이 하신 이렇게 진실한 기도를 바칠 뿐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질문자님께서는 기독교가 가톨릭,정교회,성공회 개신교로 구분되어 잇다는것을 아시는군요

개신교도 유럽계개신교인 루터파및 개신교성향인 성공회가 유럽계이며

그외는 감리교가 유럽계에 가깝습니다  장로파 침례파등 기타파는 미국계입니다

한국에서 판치는 개신교파가 대부분이 미국계입니다 

 

가톨릭및 장교회는 사도적전승을 유지하는 종단이며

그외 성공회 개신교는  사도적전승이 끊어진 종단들입니다

 

성경으로 1차구분이됨니다

가톨릭및 정교회는 성경이 73권이상과 성전을 교리로 인정을 합니다

개신교중  성공회 루터파는  66권을 성경을 사용하며  그외 7권이상을 참조를 합니다

                 특히 성공회는 전승이 연결ㅇ리 안되어도 전례등을 상당수 거행합니다

                   루터피도  교리등에서  외경을 참조합니다

개신교중 미국계교회는 외경참조가 거의 없으며  사도적전승을 이행하는것도 없습니다

즉  완전이 다른 전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가톨릭및정교회와 개신교가 다른점은 성경해석입니다

가톨릭은 자유해석을 금합니다 반드시 지도를 받아서 사도로부터 전승된 교리를 가르칩니다

개신교는 자유해석에 만인사제제도로  전승된 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단이 계속 분파되고 잇습니다

그러면서 다른종단은 이단이라고 하는종단이 갈수록 많이 생김니다 

 

가톨릭은   성직자가  주교--사제--부제로 이어집니다

정교회는   성직자가    주교--사제--보제로 이어집니다

즉 사도적 전승이 그대로 보존되고  잇습니다

 

미국게개신교는 개별교회중심이며  목사중심제도입니다

따라서  이웃에 같은종차개신교가 있어도  멀어도 자신이 처음다닌곳에 나갑니다

그리고 같은개신교라도 교리적 차이가 생김니다 그이유는 성경 자유햐석이 빛아내는것입니다

 

가톨릭및정교회는 

2대교리를 중점으로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가 교리의 중심입니다

그사랑은 내가정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가정생활로서 모범을 보여주셧습니다

 

개신교는 하느님말씀인 성경대로가 교리의 중심입니다  즉 오직믿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전중에서스여진것입니다  개신교는 성전을 중시안합니다

뿐만아니라  가톨릭의 73권성경보다 적은 66권을 사용하믈로서 바진교리들이

잇습니다 연옥교리및  성인들의 통공 성모공경교리등이 없습니다

 

그와 더불어 오직믿음이다보니  믿으면 잘못을 할수 없는식으로 교리를 가르칩니다

참회및죄의 보속을 개인이 합니다    가톨릭은 참회및죄의 보속을 사제를 통하여 하게 됨니다

 

물론 개신교분류중 성공회는 그러하지아니하며  루터파도 그리심하지 아니합니다

감리회도 그리안심한것으로 압니다

 

오직장로파  침례파등 미국게교회가  심하게 다루며   이들교회는 개별교회중심이며

중앙연합은 느슨한 연결입니다

 

가톨릭및 정교회는 중앙연합이 강력하며   전세계 어디가나 전례및 교리가 같습니다

 

가톨릭은 성당성직자를 신부님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은 주교님의 명을 받아서 주교님의 업무를 분담하는분입니다

기톨릭의 최고성직자는 주교님입니다 

주교님중의 대표최고성직자를 교황님이라고 부릅니다  

 

가톨릭을 들어온다고  금시환경이 좋아지거나 바뀌는것이 아님니다

자신의 노력에 달린것입니다

먼저 입교하시고져 하신다면  성당을 찾으시고  성당사무실에 문의를 하시면

아르켜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초보자임을 밣히면 가르쳐주는이들이 많습니다

아는체하거나  묻지아니하면 가르쳐드릴이 없습니다

찾을때는 체면을 버리고 찾으시면 길이열립니다

 

도움이되길바랍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많은 사람들이 아시겠지만은 천주교와 개신교는 정말 다릅니다.  우선 저는 개신교인 기독교 침례회에 다니고있는  30대 집사입니다.   뿌리가 천주교인 것은 맞지만 개신교는 진리를 위해 개혁한 종교입니다.

마틴루터 시대의 천주교는 너무나 부패하였었습니다.  (생략)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기위해 마틴루터가 개혁아닌 개혁이 되었지요,,(생략)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입니다. 하늘의 신이란 말이죠,,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유일신입니다.  천주교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들지 말라는 사람의 우상들이 너무나 많죠,  성인의 우상도 사람들이 그것을보고 기도하고 만지며 소원을 빈다면 부처와 다른점은 무엇일까요? 너무나 많지만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진리 ...  기독교는 진리를 위해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처럼요,,

가장 정확한 것은 하나님께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시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실것입니다. 기도해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맡겨보세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시고 목자이시며, 앞서가신 또 구원하실분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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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히 말씀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와 기독교가 같은 성경을 읽으므로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두 종교 신앙의 차이에 대해서 공부하고 아는 사람이 많지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와 기독교는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같은 성경(기독교와 천주교가 공유한 성경 66권외에 천주교는 외경 7권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을 읽으며 정반대로 믿는 교리가 너무 많습니다.

천주교는 겉으로는 기독교회를 갈라진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천주교 교리를 하나라도 안 믿는 곳은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단으로 봅니다.

기독교회 중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천주교나 불교나 이슬람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회에서 성경대로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성경대로 믿는 곳에 구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경대로 믿는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하나님의 성회 등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입니다.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등은 성경을 왜곡하여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났으므로 이단으로 분류합니다.

마틴 로이드 목사님의 천주교 사상평가를 보면 천주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의 차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 회심한 '릭 존스 외 다수'가 쓴 '천주교와 기독교가 다른 서른 일곱가지 이유'라는 책은 천주교 교리와 성경말씀을 비교하여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확실히 분석한 책입니다.

유선호 목사의 '천주교와 기독교가 다른 일곱가지 이유'라는 책도 천주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는 훌륭한 책입니다.

불교나 힌두교, 이슬람교까지다 다루려면 지면이 많이 필요하니 생략하겠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은

천주교는 성경 66권 외에도 외경이나 전승이나 유전이 모두 다 진리라고 믿습니다.

기독교는 오직 성경 66권 만이 하나님 말씀임을 믿습니다.

 

천주교는 교황이 신앙이나 윤리도덕의 선포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교리로 믿습니다. 한마디로 교황의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교황도 사람이므로 신앙이나 윤리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실제 역사를 통하여 교황의 오류는 수도 없이 많이 드러나 있습니다. 

 

천주교는 신부에게 사죄권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가 죄를 사해주고 보속이라는 것을 시킵니다.

기독교는 사람은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은 죄도 없고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 직접 회개하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죄를 씻음받습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 창조주의 어머니, 성령의 배필, 무염시태., 평생동정녀, 몽소승천, 기도의 중보자, 교회의 어머니, 구원으로 인도하는 분...으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여 믿고 마리아가 성령님이 하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마리아상을 만들어 절하고 섬기는 우상숭배의 행위를 합니다.

기독교는 마리아를 예수님 육신의 어머니(창조주 하나님에게는 어머니가 없습니다, 성령님에게는 배필이 없습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죄인, 동정녀로서 예수를 낳은 이후에 요셉과의 부부관계를 통하여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 누이들을 낳음, 죽어서 장사됨, 기도의 중보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심,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심, 교회에는 어떤 형상도 세워 절하고 기도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천주교는 천국과 지옥 외에 연옥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만한 공로가 부족한 사람들이 연옥이라는 곳에서 남은 죄를 불로서 고통받고 정화받는 장소라는 곳으로서 성경에는 연옥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고린도서에서 성경 한 구절을 가지고 상상하고 추측하고 비약하여 만든 가상의 장소가 연옥입니다. 언제 연옥에서 천국으로 구원받을 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연옥에 있다고 추측되는 천주교를 믿다가 죽은 자들을 위하여 헌금하고 위령미사를 계속 드리는 것입니다.  불신자로 죽은 자들을 위하여도  헌금하고 기도하며 지옥을 면하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기독교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천국과 지옥 두 장소 만이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상속받습니다. 예수를 믿지않은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심판받고 지옥에 들어 갑니다.

 

천주교는 예수를 믿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어도 착하고 선하게 살면 구원받을 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는 예수 외에는 어느 종교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정반대로 가르치고 믿는 천주교와 기독교 중에서  어느 쪽이 진리를 좇고 있다고 옳바르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척도인 성경말씀 밖에 없습니다.

 

이 두가지 상반되는 신앙이 같은 것이라고 억지로라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된장과 똥이 비슷하게 보인다고 해서 모두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다를바 없습니다.  하나님이 흑과 백이 같은 색이라고 인정한다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진리만을  붙잡고 비진리를 분별하고 버리라고 누누히 강조하셨습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동시에 진리가 되고 혼합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섞이는 순간 진리의 빛은 비진리에 섞여서 빛을 잃어 버립니다.

흰색에 검은 색을 조금만 섞어도 더 이상 순수하지 않습니다.

카레에 똥이 조금 섞였는데 그래도 카레의 비중이 많으니 카레라고 생각하고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진리에 비진리가 섞이면 더 이상 진리는 없습니다. 비진리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두가지 상반되는 신앙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양심이 말한다면 어느 누구든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는 진리를 좇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참된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회에 함께 하셔서 성경말씀의 진리를 좇게 하시고, 참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찬미예수님~

 

저는 아직 예비자랍니다.

 

아직 교리 공부중이고 하지만..

 

저는 열심히 성경책도 잇고 가톨릭에 관한 책도 있고 평화방송도 보고..인터넷 가톨릭 도 다니면서 신앙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저는 성당 다니는거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희 사촌오빠가 교회 목사님으로 있어 개신교 다니라는 압박도 많이 받아 왔지만..

 

저는 어릴때부터 성당마당에 들어가면 참 따뜻함을 느꼈어요..

 

만약 종교를 가지게 되면 가톨릭이나 불교를 다닐꺼라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님 마음이 가톨릭으로 향하신다면...가톨릭으로 오세요...

 

주님은 항상 저의 마음속에 계시니깐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내일 그리고 영원히 라는 책 권해 드리고 싶어요~~~

천주교와 개신교 구분법좀 알려주세요

... 느낌좀 알려주십쇼. 지식인들에게 도움요청합니다. 종교에 대해 공부하고싶은 어느 20살짜리 청년... 찬미예수님. 천주교와 개신교란 책의 내용인데, 제본을 하셔서 읽으셔도...

천주교와 개신교의차이

... 예배와 미사 순서도 서로 다르고요 예배는 순서가 간단해보이지만 미사는... 알려주세요 일단은 천주교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가면서 자신들이 마음에 드는 것만...

천주교와 개신교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점을 알려주셧으면 합니다. 저는 개신교 부모님께서는 천주교... 적어주세요 +찬미예수님 너무나 방대한 양이네요... 개신교와 가톨릭은 멀리서...

천주교와 개신교 차이

천주교와 개신교 차이 알려주세요!! 예를들어 교황이나 그래서 좋으점고ㅏ 나쁜점좀... 윗 글 어느 형제님의 글에서도 그런 글이 보입니다만,^^ 5. 말이 나왔으니 교회...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알려주세요...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에게 질문합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알려주세요... 때문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만 크게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점

... 개신교의 주 관념(신념)과 천주교의 신념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저는 최대한 중리적인 답변을 원합니다. *그외... 따라서 전문적인 수준에서는 틀린 내용이 지적될 수도...

개신교천주교의 교리 좀 알려주세요

개신교천주교의 교리 좀 알려주세요ㅜㅜ 알기 쉽게 간단히 답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독교 = 가톨릭 + 개신교(개신교를 일반적으로 기독교라고 부르는데 잘못된...

천주교와개신교..갈등되요 봐주세요

... 근데 제게 하나님이 계시다는걸 알려준분들이 개신교분들이에요. 정말정말 착하고... (아..어떤이유든 욕은하지말아주세요..) 개신교천주교 별로사이가 안좋은거같던데...

천주교와 개신교 중 진실은 어느쪽?

... 개신교가 옳다 생각하시는 분은 타당한 이유를 들어주세요! 뭐 예를 들어 '천주교는 마리아 한테도 기도를 한다... 암튼 성모님께 하는 기도중 유명한 성모송을 알려드릴께요....

천주교와 개신교 차이점 ?

천주교 하고 개신교 차이점좀 알려주세요 인터넷에서 천주교하고 개신교 찾았는데 다... 윗 글 어느 형제님의 글에서도 그런 글이 보입니다만,^^ 5. 말이 나왔으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