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분이 잘 답변 해 주었기에 저는 연옥에 관해 좀 더
알려 드리기 위해 아래 글을 올립니다 참고 하세요
이글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교보문고) 에서 발췌 했습니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연옥 교리
개신교에서 제1경전만 인정하다 보니 또 하나의 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16세기까지 보편적으로 믿어 오던 연옥교리가 갑자기 없어진 것입니다.
연옥이란 영원한 복을 누리는 천국과 악인들이 영원한 벌을 받는 지옥과의 사이에 중간 장소 또는 형태로서 작은 죄를 지은 상태로 죽은 사람이나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주님의 공의를 완전히 보상하지 못하고 돌아간 영혼들이 정화되어 승천할 때까지 단련을 받게 되는 곳을 연옥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개신교 형제들은 연옥은 성경에 없는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그 교리가 들어 있는 구약성서 마카베오서 상하권을 모두 없애 버렸으니 성서에는 찾아 볼 수도 없으며 신약에서도 여러 곳에 암시되어 있으나 이를 구구각각 자유 해석을 하고 있음으로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예수를 믿던 어떤 사람이 병상에서 잠시 간병하는 가족들에게 화를 냈거나 남의 흉을 보며 욕을 했거나 예를들어 “바보 또는 미친놈“이라고 하며 눈을 흘기다가 죽었다면 이 영혼이 즉시 천국에 갈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의 신념으로 왜 못 가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흔히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바보 또는 미친놈이라고 하는 말을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미친놈” 이라는 말을 한 사람은 비록 예수를 믿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예수님께서 성경에 직접 말씀하신 대로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마태 5,22) 수밖에 없으며 “바보” 라고 욕한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마태 5,22)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즉 천국은 아무리 작은 죄라도 하느님의 신성이 이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또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성서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묵시록 21,27).
비록 그 죽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 생명의 책에 자기 이름이 올라 있다고 굳게 믿고 천국행을 확신했을 지는 몰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소망일 뿐이지 확약된 사항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공의(公儀)가 그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소죄 투성이의 영혼일지라도 육신을 떠난 그 순간 즉시 하느님 앞에 나아가 결백한 천사들의 대열에 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또 어떤 이는 죽기 전에 죄사함 다 받고 왔다고 항변할지는 모르나 그 사람이 죄사함 다 받았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는 자기가 하느님으로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아니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소죄를 가진 영혼이 간음자나 살인자들과 같이 지옥 불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아야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공의(公義)와 인자(仁慈)가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상식 판단으로라도 일종의 중간 처소나 상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성서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자기의 공적대로 갚아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즉, 순결하고 착한 사람에게는 천국 영복을 주시고 흉악한 죄인에게는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주시며 작은 죄만 있는 영혼에게는 연옥 잔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에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나는 너의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하여 상을 가지고 가겠다”(묵시록 22,12).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Ⅰ고린토 3,14-15)
이와같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불 속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서 이 지상에 살아 있는 우리는 기도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사도신경” 나오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모든 성도의 교통함을 믿으며)”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연옥교리는 구약성경 마카베오 하권 12장 41절부터 45절 사이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으며 유다 민족이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 봉사하던 것은 역사적 문서로도 충분히 인정되는 사실입니다. 개신교에서는 마카베오서를 빼어 버렸으니, 여기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그들은 숨은 일을 모두 드러내시는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Ⅱ마카베오 12,41-45) 라고요.
그러나 16세기의 소위 종교 개혁자들은 이 구절 속에 대사 문제가 함축되어 있고 이것을 소위 면제부 사건으로 끌고 가려면 이 성서의 몇 구절을 바꾸어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판단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되 무엄하게도 마카베오서 모두를 성서에서 없애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음험한 자가 반대편의 증인을 암살하듯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부활한 나자로를 살해하여 예수의 전능의 증거를 없애 버리려던 당시 유다인의 심술과도 같다” 는 혹평을 받고 있습니다.
마카베오서는 다른 성서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인 정경입니다. 원래 정경, 위경 판정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직접 교회에 주신 권위로서만이 판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도 그랬거니와 신약시대에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주전 150년이래 약1700여 년을 정경으로 인정해 오던 이 성경을 소위 종교개혁이란 이름 하에 모인 몇 사람이 자기들 마음대로 떼어버림에 대한 배반과 모순은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교회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몇몇 사람이 세운 교회를 우리로 하여금 식별케 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선 유다교 법전 중 쓸모 없는 조문을 빼어 버리시고 그 교리 중 조작된 전습(傳習)부분은 과감히 폐기하여 그를 정화시켰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남을 돕는 일조차 못하게 하던 바리사이파들을 꾸짖으셨고 또 그들의 교리와 규칙의 모순점을 낱낱이 지적하여 그들을 호되게 나무라셨습니다.(마태23,)
그러나 당시 유다인 사이의 전통적 관행인 사후 중간 장소 존재를 믿는 마음으로 죽은 이를 위한 기도 행위에 대해서는 비난하시거나 꾸짖으신 적이 전혀 없습니다. 꾸짖으시기는커녕 오히려 연옥에 존재에 대하여 아주 똑똑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 라는 말씀은 내세에도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있다는 의미가 함축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닙니다. 천국에는 아주 작은 죄라도 갚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으며 지옥의 벌은 그야말로 영벌(永罰)이므로 사죄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일종의 중간 장소 존재로서 “거기서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까지는 풀려나올 수 없는 곳” 입니다. 이곳이 연옥 존재이며 이것은 사도이래 순교한 많은 교부들로부터의 전통적 해석입니다.
* 교부들의 증언
연옥에 관한 교부들의 증언은 너무도 많아서 여기 저명한 것들만 골라 세기별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1세기: 성 야고보 사도의 경본, 성 마르코의 경본, 초대교황 베드로의 경본에는 한결같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이 실려 있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 4세기: 성 에프렘: “형제들이여 나 죽은 뒤에 기도하러 모이거든 나에게는 향액을 주지말고 기도로 도와 달라 죽은 자의 영혼의 산 성인의 기도로 큰 이익을 얻는 법이다”(Apud Faith of Catholics Vol Ⅲ. p162) 라고 하였습니다.
- 5세기: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사제인 아들에게 언제든지 주의 제대에 설 때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유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마음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머니 죄를 위하여 주께 간구 하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상처의 구속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쉬게 하여 주소서. 주여 또한 내 마음과 소리와 붓으로 봉사하는 나의 형제들로 하여금 이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주님 제대 앞에서 주님의 종 모니카를 기념하도록 북돋아 주시옵소서”(Confessiones Book Ⅸ).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9세기에 로마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간 정교회의 예절 경본에도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이 들어 있습니다. 연옥이 없다면 이들은 무엇 때문에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했겠습니까?
이 교리 역시 유독 개신교만이 부정하고 있으며 성경이나 성전이나 이성의 아무런 근거가 없는 “사견” 만으로 죽은 부모, 형제를 위한 한마디의 기도도 드리지 않음은 정말 이만저만 냉혹한 것이 아닙니다.
여행 중인 형제의 안전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 사람의 정이거든 하물며 죽음에 괴롭고 먼바다를 건너 영원의 피안에 이르는 그를 위하여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죽음이란 다만 육신과 영혼의 분리입니다.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나 영혼은 생존하며 영원히 움직이는 존재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육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생활하고 그 의사와 기억과 애정이 그냥 계속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현세에도, 무덤의 저편 세계에도 다 통치를 하십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죽은 지 2000년 후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삭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마르코 12,26-27)라고 하셨습니다.
기도가 산 이를 돕는다면 어찌 죽은 이를 돕지 못하겠습니까?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 또한 제가 가톨릭 신자가 되어 크게 행복을 느끼는 것 중 하나입니다.
저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다른 죽은 형제들과 또 살아 있는 형제들을 위해 꼭 같이 기도 중에서 매일 만날 수 있어 더욱 행복합니다.
- 이 교리를 부정하던 개신교에서도 최근 한 신학교에서 이 연옥 교리를 믿고 지지한다고 나섰기에 퍽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든 개신 교회가 이 교리를 믿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 우연히 기독교 유선TV방송(CH42)에서 어떤 목사님이 심판에 관한 토론식 설교를 하는 것을 유심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여(女) 집사님의 믿는 자의 심판과 불신자의 심판과의 차이에 관한 질문에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불신자는 안 믿었으니 무조건 지옥이다. 그런데 믿는 성도들의 심판은 하나님 앞에 가서 그가 세상에서 한 모든 일을 셈 바쳐서 매우 잘한 이는 주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꾸지람을 듣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기가 벌써 하느님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모든 영혼의 천당과 지옥을 분류하였으나 그가 이미 연옥에 관한 교리를 인정한 것을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은 자” 는 주님과 함께 바로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영혼 즉,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은 영혼” 은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연옥 단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목사님은 연옥에 존재를 함축한 성경 구절들을 발표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즉,
- “누가 너를 고소하여 법정으로 끌고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어 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마태 5,25).
-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유혹에서 건져내시고 악인들은 심판 날까지 계속 벌을 받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특히 육체의 더러운 욕망에 빠져 사는 자들과 하느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자들을 벌하실 것입니다”(Ⅱ베드로 2,9).
- “그리스도께서는 갖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Ⅰ베드로 3,19-20).
-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라면 하느님께 간구 하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죄인을 살려주실 것입니다. 사실 죽을죄가 있습니다” (Ⅰ요한 5,16).
-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 16,27)
- “심판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Ⅰ고린토 3,13)
- “네가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 할 것이다”(마태 5,26).
- “산 사람 모두에게 너그럽게 은덕을 베풀 것이며 죽은 사람에게도 은덕을 베풀어라”(집회 7,33).
그러나 사실 연옥이란 말은 확실히 명시적으로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연옥에 관한 교리도 성서에 분명하게 써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연옥에 관한 믿음은 오래되었고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성서의 분명한 가르침'에 뿌리박고 있음만은 분명합니다.
연옥에 대한 믿음은 또한 하느님을 뵙기 위해서 성덕이 필요하고 용서받은 죄에 대하여는 현세적 벌이 있다는 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연옥이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 이 죽음 속에서 맞는 하느님과의 해후의 순간으로서 정화되는 만남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문제는 연옥조차 갈 수 없다고 여겨지는 파문된 죄인이 아무 뉘우침도 없이 왜 제2경전을 빼어 버렸나 하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연옥이 있다고 믿는다고 해서 모두 천당에 가는 것도 아니고 연옥이 없다고 믿는다 해서 모두 지옥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연옥이란 하느님께서 아주 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선하지도 않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만드신 일종의 반 지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 교회는 죽은 이들의 위하여 기도 드리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 식사 후에 기도 중에, 미사 중에 그리고 특별히 매년 11월을 위령의 달로 따로 정하여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한다면 우리를 사랑하던 그들의 고통을 잊고 살수는 없습니다.
저는 연옥 영혼 중에서도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하느님 품안에 평안히 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교회는 신자 모두가 좀더 아름다운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위령기도, 위령 호칭기도, 죽은 부모, 형제, 친척, 은인을 위한 기도, 문상 때, 성묘 때의 기도 등을 표본으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매일 드리는 “세상을 떠난 부모를 위한 기도”를 소개합니다.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