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리에서 질문이요!

가톨릭교리에서 질문이요!

작성일 2006.05.03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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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전 어렸을때부떠  독실한 기독교를믿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독실한개신교  신자구요    ..

 

그런데 점점 가톨릭에대한  교리가 마음에들고,또 가톨릭교리가 맞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게 있습니다. 그것은

 

"가톨릭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지만    타종교에대해서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

 

이게 정말인가요?               조금 놀랬습니다.

 

답변 부탁드릴게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만 이교리 하나가   마음에 걸립니다.

 

중학교 남학생이구요^^         신부님이나,현재가톨릭신자분이신분은

꼭 답변 바랄게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께 가득하기를)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 찬미 예수님.

 

이 부분은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문헌들을 통해서 알았으면 합니다.

가톨릭은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타 종교인들도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할

같은 세대를 살아가는 이웃인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내용과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 라는 책자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아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서 궁금하시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6&dir_id=60303&eid=alLYjhZ+F0dOJjrqhh2eSz3pLcXPRRNB

 

 

비록 무신론자라도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는 자를 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Anonynous Christian) 이라 한다.


1. 익명의 그리스도인

인간 쪽에서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무신론자일 수 있어도, 하느님쪽에서 보면 인간이 본성적으로 신적 성품을 모시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비(非)그리스도인, 설령 무신론자라도 그들의 구원 가능성에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 하기를 원하시는"(1디모 2,4)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원 가능성을 비관적(悲觀的)으로 본다는 것은 온 인류를 구원 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 뜻을 과소 평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란 단지 겉으로 드러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여, 무신론자나 다른 종교인들을 함부로 앝보거나 배척 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형제적 자세로 대화할 수 있으며, 인간 사랑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표현이다. 결코 무신론자나 타 종교인이게 그리스도교적 이름을 강제로 씌우려는 의도는 아니다.
진정한 자아사랑, 이웃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데 다른 종파라는 것이 제약이 될 수 없다. 무신론자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얼마든지 맹목적인 그리스도교 신자 이상일 수 있다.


2. 참된 그리스도인

그저 교적부에 이름을 올려 놓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서 인간에게도 요청하는 사랑의 정신("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을 구체화 시키는 사람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애를 연장(延長)하는 사람이다(마더 데레사 수녀, 안중근 토마스 의사 등, 1~2항 참조). 그리스도교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의 활동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3.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세례의 필요성을 명백한 말씀으로 강조하셨다. 모든 사람이 마치 문(門)을 통하는 것처럼 세례(洗禮)를 통하여 들어가는 교회의 필요성을 확인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구원의 정상적 방법이다. 그러나 본인의 탓 없이 복음(福音.그리스도)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만이 아시는 길로써 구원으로 이끄실 수 있다. 

 (답변자 의견 : 쉽게 말해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되며, 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방법)

그리고 형광펜 칠한 부분을 설명하자면...본인의 탓없이 즉, 시대적, 환경적 요인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중 양심에 따라 살아간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만의 방법으로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로 예수님을 거부를 했다면 본인의 탓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이 부분까지 가톨릭 교회에서는 구원 가능하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

 

 

출처 : 천주교 가두선교단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

DECLARATIO DE ECCLESIAE HABITUDINE
AD RELIGIONES NON-CHRISTIANAS
NOSTRA AETATE

1965. 10. 28.

하느님의 종들의 종 바오로 주교는 거룩한 공의회의 교부들과 더불어
영구적인 기록으로「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을 공포한다.

서론
1. 우리 시대(Nostra Aetate)에, 인류가 날로 더욱 긴밀히 결합되고 여러 민족들의 유대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오늘날, 교회는 비그리스도교들에 대한 관계를 더욱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 사이에서 일치와 사랑을 촉진할 사명을 지닌 교회는 여기에서 그 무엇보다도 인간 공통의 문제와 상호 협력 증진에 관하여 숙고하고자 한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를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니1)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민족의 기원은 하나이고, 그 궁극 목적도 단 하나 곧 하느님이시다. 좋으신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계획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고,2)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거룩한 도성에 뽑힌 이들이 모일 것이며, 거기에서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빛 속에서 거닐 것이다.3)
사람들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인간의 마음을 번민하게 하는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여러 종교에서 찾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은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왜,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참 행복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죽은 뒤의 심판과 보상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저 궁극의 신비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다른 종교
2. 예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민족들은 사물의 변천과 인생사에 들어 있는 심오한 힘을 어느 정도 인식해 왔다. 때로는 최고의 신이나 아버지를 긍정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인식과 긍정은 그들의 생활에 깊은 종교적 의미를 불어넣는다. 종교는 문화 발전에 따라 더욱 정교한 개념과 고상한 언어로 이러한 인생 문제에 해답을 주려고 애써 왔다. 예컨대 힌두교에서는 사람들이 신의 비밀을 찾아 풍부한 신화와 뛰어난 철학적 탐구로써 그 신비를 표현하며, 금욕 생활이나 깊은 명상을 통하여 또는 사랑과 신뢰로써 신에게 귀의하여 인생고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추구한다. 불교에서는 여러 종파에 따라 이 무상한 세계의 근본적 불완전성을 긍정하고, 신심과 확신으로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거나 아니면 자기 노력이나 위의 도움으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 그 밖에 전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종교들도 교리와 생활 규범과 신성한 예식 등을 제시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 마음의 불안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그 길을 가르친다.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 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또 끊임없이 선포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한 14,6)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풍요로운 종교 생활을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당신과 화해시키셨다.4)
그러므로 교회는 지혜와 사랑으로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을 증언하는 한편, 다른 종교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자산과 사회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증진하도록 모든 자녀에게 권고한다.

이슬람교
3. 교회는 또한 모슬렘도 존중하고 있다. 그들은 살아 계시고 영원하시며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5)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유일신을 흠숭하며,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순종하였듯이 그들 신의 감추어진 뜻에 충심으로 순종하며, 아브라함에게서 이슬람 신앙을 이어받았다고 즐겨 주장한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예언자로 받들며, 또 그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여 때로는 그분의 도움을 정성되이 간청하기도 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어 공정하게 갚아 주실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따라서 그들은 도덕 생활을 존중하며 특히 기도와 자선과 단식으로 하느님을 섬긴다.
여러 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과 모슬렘 사이에 적지 않은 불목과 적대가 있었지만, 거룩한 공의회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서로 이해하도록 진심으로 노력하며 온 인류를 위하여 사회 정의와 도덕 가치, 평화와 자유를 공동으로 수호하고 증진하기를 모든 사람에게 권고한다.

유다교
4. 이 거룩한 공의회는 교회의 신비를 탐구하면서 신약의 백성을 아브라함의 후손과 정신적으로 결합시켜 주는 유대를 기억한다.
그리스도 교회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구원 계획에 따라 이미 성조들과 모세와 예언자들에게서 교회의 신앙과 선택이 시작되었음을 인정한다. 신앙에 따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인6)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조와 함께 부름을 받았으며, 선택된 백성이 종살이하던 땅에서 탈출한 사실도 교회의 구원을 신비롭게 예표한 것이라고 교회는 공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옛 계약을 맺으신 그 백성을 통하여 구약의 계시를 이어받았고, 이방인들의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가 접목된 좋은 올리브 나무 뿌리에서 자라고 있음을7) 잊을 수 없다.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키시고 당신 안에서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하셨음을8) 교회는 믿고 있다.
교회는 바오로 사도의 동족에 관한 말씀도 언제나 되새기고 있다. “나의 동족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느님의 약속이 있다. 그들은 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동정 마리아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도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다”(로마 9,4-5 참조). 그뿐만 아니라 교회는 교회의 토대이며 기둥인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한 초기 제자들 대부분이 유다 백성에게서 태어났음을 기억하고 있다.
성서의 증언대로,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구원의 때를 알지 못하였고,9)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뿐더러 복음의 전파를 방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10) 그렇지만 사도의 말씀대로 유다인들은 그들의 조상 덕택에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11) 교회는 예언자들과 그 사도와 함께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 날이 오면 만백성이 한 목소리로 주님을 부르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님을 섬길 것이다”(스바 3,9).12)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의 정신적 공동 유산이 이렇게 큰 것이므로, 이 거룩한 공의회는 특히 성서와 신학 연구 그리고 형제적 대화에서 얻는 상호 이해와 존중을 증진하고 권장하고자 한다.
비록 유다인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요하였지만,13) 당시에 살고 있던 모든 유다인에게 그리스도 수난의 책임을 차별 없이 지우거나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치 성서의 귀결이듯이, 유다인들을 하느님께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인 것처럼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리를 가르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복음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누구에 대해서든 모든 박해를 배격한다. 교회는 유다인들과 공유하고 있는 유산을 기억하며,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복음적인 사랑에서, 언제 누가 자행하든 유다인들에 대한 온갖 박해와 증오와 반유다주의 시위를 통탄한다.
교회가 언제나 주장하였고 또 지금도 주장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모든 사람의 죄 때문에, 자원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 따라서 교회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의 표지이며 온갖 은총의 원천으로 선포하여야 한다.

보편적 형제애
5.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형제로 대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모든 사람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이웃 형제들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1요한 4,8).
그러므로 인간 존엄과 거기서 연유하는 권리와 관련하여,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사이에서 차별을 초래하는 온갖 이론과 실천의 기반은 무너지고 만다.
인종이나 피부색, 신분이나 종교를 이유로 한 온갖 인간 차별과 박해는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교회는 이를 배척한다. 따라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라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단정히”(1베드 2,12) 하고, 할 수만 있다면, 힘닿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냄으로써,14) 참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를15) 간곡히 요청한다.

거룩한 공의회의 교부들은 이 선언의 모든 것에 낱낱이 찬성하였다. 본인은 그리스도께서 본인에게 부여하신 사도 권한으로 존경하는 교부들과 더불어 이를 성령 안에서 승인하고 결정하고 제정하며, 공의회에서 제정한 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포하기를 명령한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1965년 10월 28일
가톨릭 교회의 주교 바오로 자서
교부들의 서명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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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구원의 길은 사람들이 아는대로는 기독교 안에만 있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성경을 통한 하나님, 예수님을 믿는 보이지않는 교회 안에만 있습니다.

 

웅장하고 멋진 건물, 엄숙한 외형과 여러 근사한 형식 등이 마음에 드셔서 가시는 것이라면 아무도 말릴 수 없지요. 전부 자기 행동에 대하여는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이니까요. 하나님도 사람에게 권유만 하시지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  [전도서 11:9]

 

진정한 믿음은 종교가 아닙니다. 진리입니다.

또 분명하게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교리나 이론은 사람의 영혼을 건질 수 없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들의 보기에 그럴듯하고 너그럽고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사상도 포용할 것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그런 사상은 전혀 하나님께로서 온 사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 신의 사상입니다. 한번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성경이 어떤 책인가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에는 교직자들이나 특별한 사람들만 읽게 하였고, 번역도 못하고 베끼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성경이 사람에게 자유롭게 읽힐 수 있도록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의 피가 이 세상에 쏟아졌고 엄청난 노력과 재산이 이 지구상에 부어졌습니다.  어떤 유명하고 많이 읽힌 책보다 수만배 이상 읽혔으며,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되었습니다.  약 50년전만 해도 사람들은 진화론이나 철학에 미혹되어서 성경이 정말 사실인지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진화론은 붕괴되었고[잘 알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론도 성경을 거스르기 힘듭니다.  이제는 새로운 우주에서 인간이 왔다는 변종 진화론이 영화 등을 통하여 활개치고, 종교통합 운동이 커 지지만 성경을 보면 분명히 진리와 거짓이 구분됩니다.

 

다만 이제 엄청난 Internet 등, 영상문화와 스포츠, 오락 등에 사람들이 너무 바빠서 인생의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전부 바쁘다고들 합니다.  주의해서 앞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질문자님이 가리키시는 종교는 개신교입니다.

사실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이라면 문제점인데...

"기독교" "교회"라는 명칭을 너무 개신교에 한정되게 사용하여 종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잘못된 상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도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교. 곧 기독교입니다^^

 

 

정확히 그 부분에 대해서 하자면...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영역으로 남겨둔 것입니다.

감히 인간이 어찌 "이 사람은 천국행, 이 사람은 지옥행"이라고 단정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원주민들은 하느님을 알려고 해도 알지 못합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 그들도 지옥에 보내실까요?

옛 조선시대 사람들 역시 하느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그들을 지옥에 보내실까요?

 

반대로...

세상엔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죄를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훌륭하신 분들도 많지만 개신교의 일부 지도자들의 죄악도 이따금씩 터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누구보다도 믿는다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께서는 믿는다는 이유로 무조건 천국에 보내실까요?

 

 

 

가톨릭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구원의 영역을 하느님께 맡겨두는 것입니다.

그저 모든 영혼이 천국으로 가길 기도하는 것이죠.

 

 

 

그리고, 가톨릭에선 연옥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죠.

지옥에는 아예 구원의 희망이 없지만 천국에 가기는 부족한 영혼들이 가는 곳이 연옥입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는 부분이죠.

다만 개신교에서 외경 7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연옥교리가 성경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궁금증이 풀리셨나요?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구원은 하느님의 영역 입니다.

우리가 열려 있다 없다고 할수 없는 영역이고 다만 구원의 가능 성을 이야기 한것 뿐 입니다

우선 구원에 관하여 조금은 어렵 겠지만 아래 를 참조 하세요

 

salvation


   “도와 건져 준다”로 풀이되는 구원이란 말은 누가 남을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아울러 먼저 상태로 회복시키거나 보다 나은 상태에 놓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 ‘구원’이란 단어는 위험을 제거하는 것과 마음의 위안을 제공하는 양면이 있는 동시에, 건져 주는 이와 건져진 이가 서로 불가결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구원행위를 표현하는 말은 다양하나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살린다’라는 동사가 상황의 긴박함을 잘 말해 주는 바와 같이, 구원은 인생의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인간은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에 대하여 불안감이나 부족함을 느끼면서 행복을 갈망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볼 때, 현인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제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이 발견한 구제 방법들을 아낌없이 남에게 가르쳐 왔다. 그리고 자의로 해탈에 도달하려는 불교마저도 중생을 고해에서 극락세계로 인도하고 제도하는 보살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은 도와주되 자기 자신을 위하여는 도움을 거절하는 현인들을 볼 때, 공교롭게도 그들은 현세에 대하여 비관과 절망에 빠져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공통된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구태여 우리가 속해있는 현실세계를 등지고 살아야만 되는가? 또한 고대 그리스 현인들처럼 물질세계에 속하는 육체를 버리고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후세에까지 미루어야 하는가? 이를 잘못 이해하면 구원이란 선각자의 고답적인 지혜와 도피생활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을 아예 기대하지도 않고 인생을 운명으로 초연히 받아들이며 죽음을 헌거롭게 대면하는 태도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현세에 머무르는 인간의 실패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을 통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색적인 주장은 성서 가르침의 주축이요 교회 가르침의 기초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현세를 낙관적으로 볼 때, 자기가 사는 세계에서 소외된 인간을, 바로 이 세계에서 출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비결은 하느님의 개입에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현세상에 개입하시어 모든 인간을 위하여 당신과 일치하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은 ‘속량’(贖良)이란 개념뿐 아니라 구원이란 단어로도 표현된다.

   외연이 넓은 구원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죄의 용서(루가 9:49-50, 19:9-10), 성세(1베드 3:21), 은총(에페 2:8, 사도 15:11), 부활(에페 2:6), 하느님과의 일치(베드 1:4-5) 등은 실제로 구원의 여러 과정을 말해 줄 뿐이다. 또한 구원이란 말을 대신하여 쓰이는 해방, 화해, 완성은 신인관계와 대인관계의 여러 관점을 표시하며 이들은 구원 개념에 귀착된다. 구원이란 말은 부정적으로 알아들을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하기 위하여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 전통에서 볼 때도, 교부시대부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이어받고 개발해 온 독특한 표현들, 예컨대 ‘구원계획’, ‘구세사’, ‘구원경륜’, ‘구원의 시기’, ‘구원의 수단’, ‘구원의 표시’ 등을 살펴 보건데, ‘구원’이란 단어는 다소 복잡하고도 함축성 있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1. 인간을 위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 : 구원이란 우선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뜻한다. 하느님의 개입이 가능하냐는 문제가 처음부터 제기된다. 인간자유를 해친다거나 단순히 하느님초월성을 보호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은 미흡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의 개입, 심지어 하느님존재문제마저도 선결문제는 아니다. 성서신학은 그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사실부터 출발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 정체의 일부라도 관상(觀想)하며 표현하려 한다. 그래서 철학가들의 신이 못하시는 일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은 해 내신다는 결론부터 인정해야 한다. 인간하느님의 개입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하느님의 활동 및 하느님의 정체를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하느님다운 하느님, 즉 자기 피조물에 구애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자기 신성(神性)에도 구애받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인간신성인간성의 상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부와 성자성신으로 현존하시는 하나이신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시니만큼, 신성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피조물들과 새로운 차원에서 관계를 맺으신다. 성부께서 보내신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인간으로서도 계신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개입 자체는 창조와는 다르게 인간을 상대방, 즉 인격자로 삼으시어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부여하기 위하여 함께 하신다. 인성(人性)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신 아드님께서는 영원히 변함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본성의 차원에서 벌어진 하느님인간 사이의 틈을 없이 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은 삼위일체의 대내관계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특히 인간 구원에 있어서 신인관계의 발판이 된다. 인격의 차원에서 인간을 당신의 상대방으로 삼으심으로써 인간의 개성을 요구하며 또 확정하신다. 왜냐하면 구별과 일치의 원천이신 성령께서 신인관계를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간은 개성을 상실하기는커녕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 살고, 몸의 부활로서 전인(全人)으로 완성된다. 하느님인간을 인격자로 보심으로써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불가침해성을 보장하신다. 하느님의 개입은 인간의 진상을 은폐하기보다도 오히려 인간이 범하는 죄악을 문제시함으로써 죄악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죄악의 성격을 드러내시면서 죄악을 없애 주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따지시는 것은 죄악이 인간의 구성요소가 아님을 드러내시는데 있으며, 인간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것은 단지 인간을 본상태로 되돌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상태로 올려 주심을 뜻한다.

   하느님의 개입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소개해 주는 성서하느님의 의도를 부분적으로나마 암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자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다”(로마 8:30).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네 단계로 나누어진 구원과정은 하느님께서 구원될 자들을 예정하신다는 사실부터 시작된다. 예정론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자유, 헤아릴 수 없는 자비, 구원의 무료성(無料性)을 뜻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1요한 4:19)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하느님이 사람을 예정하셨다 해서 어떤 사람은 이미 배척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의도를 존중하여, 살리시는 하느님께 절대로 의지할 뿐이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1디모 2:4) 는 말씀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실 것이다.”(2데살 1:8-9)는 말씀은 서로 모순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하여 다음의 몇 가지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구원을 제공하시지 않으신다. 당신과 인간 사이에 중개역할을 맡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디모 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듯이(에페 1:4-12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사도 17:31, 1베드 4:5, 히브 6:2). 따라서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취한 태도에 따라 우리의 구원이 결정된다. 인간이 예수를 위하여 하는 일도 결정적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우리 세상에는 지옥이 없다. 즉 이 지상에서 하느님께로부터 결정적으로 떼인 자는 없다(로마 5:8-11).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2고린 5:15)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모든 인간이 구원을 향하게 되었는데, 신앙으로 응답하기만 하면(로마 10:9-10)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이다(에페 2:5, 사도 15:11). 성서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무료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문제를 다룰 때 하느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꼭 구별하면서, 인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개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 역사 속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 시간초월하시는 하느님의 결의 및 심판역사 안에 머무르는 인간의 반응을 같은 차원에서 언급할 수는 없다. 즉 구원의 영원성과 시간성, 그리고 하느님의 역할과 인간이 몫을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인간을 일치시키는 구원을 세상에 제공된 구원과 심판으로 확정된 영원한 구원으로 나누면서, 이 두 단계의 연관성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정론이 구세사를 필요 없게 만드는 결정론으로 변하여 신뢰보다는 공포감을 일으킨다든가, 또는 하느님의 요구를 무시한 채 구원을 현세상에 제한시키는 세속주의가 생긴다든가, 또는 하느님이 보편적 구원의 의도를 가지신다 해서 지옥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미망에 빠져 무책임하게 사는 위험들이 종종 있어 왔다.

   그 다음, 하느님께서 구원을 제공하시는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선하게 창조된 인간자유를 악용하여 창조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고 죄를 범하고 말았다. 죄 속에 사는 온 인류(로마 3:10-20)가 유죄 판결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로마 5:16.1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행하실 심판을 포기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 주셔서 죄를 단죄하시고(로마 8:3) 모든 인간을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셨다(로마 5:21). 그분은 우리 죄의 용서뿐 아니라 당신의 생명까지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벌하는 정의가 아니라 살리는 정의를 드러내 보이셨다(로마 3:21-24).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신(1디모 1:9) 구원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로마 10:9)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유죄 판결이 없다(로마 8:1 · 34). 그러나 이 기회를 거부하는 자는 역사를 끝맺는 최후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마르 3:29, 8:43-48). 따라서 지옥에 가는 자는 이중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후심판은 창조주를 거부하고 그분께 도전하는 자들과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는 구원을 거부하는 자를 단죄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무력하고 결백한 자를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되찾는 길을 알면서도 하느님이 베푸시는 생명을 거부하는 자들만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진행 중인 구원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일단 포기하시고 구원의 길을 더 주심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활성화시키셨다. 실제로 죄 때문에 불안 속에 떨며 현실을 외면하는 인간은 위축된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고 만민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면서부터 (창세 12:2-3) 결판을 보게 될 종말까지 역사를 안내하심으로써 역사의 양극을 제정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심으로써 역사 한 가운데에 규범과 기준을 세워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일반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용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신다. 사실 성신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구원과 멸망을 가지다 주는 사건들을 가리신다(요한 16:12-13). 즉 사건과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말씀으로 구성된 계시를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상황 속에서 구세사를 형성하신다. 하느님의 개입방법(여러 차례의 제약들)과 범위(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민에게)를 드러내는 구약시대가 구세주이신(루가 2:11) 하느님의 도래를 준비하였다.

   예수(“주님이 살리신다”, 마태 1:21)라고 불러진 하느님의 아들은 환자들을 치유하신 때나(마르 3:4, 5:23 · 28, 6:56, 10:52), 제자들을 구제하실 때나(마태 8:35, 14:30),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신앙을 구함으로써 구원의 성격을 드러내셨다. 그분은 잃어버린 것(루가 9:56, 19:10), 즉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요한 3:17, 12:47) 오셔서 말씀하신다(요한 5:34). 남을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시지는 못하지만(마르 15:30) 죽음부활로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다(히브 5:7-9). 실제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예수의 이름밖에 없다(사도 4:12). 그래서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을 유태인(사도 13:26)과 외교인(사도 13:47, 28:28)을 위한 구원의 말씀이다(로마 1:16). 인류 구원에 있어서 당신 몸인 교회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에페 5:23)께서 필요하듯이, 교회도 필수적이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는 격언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계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이미 보여 주신 대로 인간을 단체로 부르시고 구원하셨듯이, 오늘날도 온 인류를 당신의 백성으로 모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온 인류를 구세주(사도 5:31)가 되셨기에, 교회도 모든 이에게 파견된다. ‘일치의 성사’, 곧 구원의 성사인 교회는 인류를 대표하여 주님이 마련하신 구원을 기념하고 실현하는 제사를 올리고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따라서 모든 믿는 이들은 바울로가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뿐 아니라(로마 11:14 · 26) 외교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였듯이, “하느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사도 28:28) 세상 끝까지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외교인들에게 늘 회개은총을 베푸시며,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 많은 이들이 양심대로(로마 2:14-16) 살기로 이미 ‘실존적 기본 결단’을 내리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선교사인 믿는 이들은 그들의 죄를 일깨워 주면서 하느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곧 예수 그리스도신비)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을 단죄하기보다도 그들이 회개하고 교회 품에 들어오도록 구원의 길을 터 주어야 한다(마태 5:44-45). 이렇게 함으로써 믿는 이들은 남을 구원한다기보다도 구원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응답할 뿐이다. 믿는 이들은 성서를 연구하면서(2디모 3:15) 자기 구원(필립 2:12)과 남의 구원을 위해 일한다(1고린 9:22, 10:33). 오늘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2고린 6:2). 구원의 상속자(히브 1:14)가 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았다.(로마 8:24). 그래서 온갖 선행을 하면서(야고 2:14)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주신 날”(히브 9:28)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로움을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될 것이다(로마 5:9). (文世華)

 아마도 이런 것을 가지고 말했을수도 있겠네요

파스카 신비의 은총은 비단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의의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고 인간의 최후 목적도 신적인 것 하나뿐이므로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아시는 방법으로 파스카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교회선교사명 10항 참조)

라는 말씀이 확대 내지는 비방 으로 까지 이어 지는 듯 하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성경위에서 만들어진 교파는 맨 먼저 유태교가 있고 그 다음이 구교이며 개신교가 그 뒤를 잇습니다.

유태교는 자신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으로 유태교를 유지하고 있고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종교는 각각 다른 두개의 구원론을 뼈대로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두 종교 모두에 이 뼈대가 없습니다. 결국 성경위에 형성되어 있는 모든 종교에 이 뼈대가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유태교에는 그들의 성서에 예고된 '메시아'가 없고 그리스도교에는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성경적 논증이 없습니다. 

그나마 유태교는 모세율법이라는 구원의 법, 즉 '구원론의 기초'인 구원의 '방법론'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는 '구원' 에 대한 '주장'은 있을지언정 그 방법론도 없고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성경적 논증도 없습니다.

기독교에 종교성립의 기본조건인 '구원론'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만 사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려 어떤 철학자가 "신학대학엘 가서 공부를 해봤는데 거기에는 구원의 길이 없더라." 라고 주장한 것이 '학문적 논리'의 견지에서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철학자는 구체적으로 기독교에 구원론이 없음을 논증하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논증을 했다면 지금쯤 기독교는 사멸되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미 학문적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상태이며 '성경논리'에 입각한 '메시아 구원론' 을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복음서' 에 제시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기독교'상태는  마치 어떤 가설로서의 학설이 존재하다가 정설이 나타나면 자연히 가설들이 사멸되는 것과 같이 논증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는 위태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무속종교로 남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속적인 부분은 이미 유태교가 점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라는 66권의 책은 다섯 가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1,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는 역사적의 기록입니다.

2, 다음 욥기부터 아가 까지는 유태와 신, 구교가 공히 '성문서' 로 분류합니다.

3, 이어서 선지 서라는 예언서가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이어져 있고

4. 그 다음이 '4복음서' 이며

5, 나머지는 사도들의 편지글이며 마지막에 계시록이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3번 까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나름의 교리를 말하며 기독교는 복음서와 서신을 추가하여 교리를 만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꼬리에 해당하는 계시록으로 무수한 사이비 종교도 낳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현재 유태교는 '예수'를 일개 사이비랍비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 근거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탈무드는 이것을 문제 삼아 그리스도교를 '구멍 난 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신학의 구멍 1, 

복음서의 차이와 상반에 대한 필연성 증명의 부재.

복음서는 4권의 책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그중에 3권을 일컬어 '공관복음' 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공관복음' 이라는 세책에 '비유'로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세 사람이 자기의 시각에서 각각 기록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책들이 사소한 기록뿐만 아니라 핵심이 되는 '가르침'의 내용에 있어서까지도 각각 상반되거나 큰 차이를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완전한 계시' 라고 말하는 정통기독교는 이 차이와 상반의 '필연성'을 지금까지 증명하지 못했고 유태교는 이점을 문제 삼아 그리스도가 '메시아' 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이비종파들은 이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서 "성경은 완전한 계시가 아니다." 라고 말하며 몰몬교나 통일교 같이 또 다른 경전을 가져다 붙이고 자신들만의 구원논리를 만들어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 다원주의나 초교파주의 같은 이념은 이러한 논리적 문제가 양산한 변종들인 것입니다.   


구멍 2,  유태교제사장인 '레위' 에 대하여 기독교의 '만인제사장제' 성립의 논증 부재.

유태교도 기독교도 모두 변경할 수 없는 성경의 논리가 있는데 그것이 이 '제사장 제도' 입니다.

제사장직의 이월문제를 기독교는 성경적으로 논증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성경적 논리로는 하나님이 세운 '종교의 지도자'가 성경을 바탕으로 한 종교집단의 리더가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성경적으로 합당한 논증이 없는 상태에서 '지도자' 라는 직위를 가지는 것은 '성경적' 으로 '불법'입니다. 유태인에게는 모세의 율법이 있고 '레위' 라는 제사직분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가 성경내용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기독교'는 '만인제사장제' 라는 이론을 주장하지만 이것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모세율법에 보면 이 제사장 직의 '이월' 에는 '규례'가 있습니다.

'선민'이라는 기득권을 가진 유태인의 관점에서 예수가 정말 메시아라면 기독교는 모세율법의 '이월규례'에 따른 '만인 제사장제'를 주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약에 이은 신약 적 구원론이 논리적 타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타당성이 확보되어 있으면 유태교가 인정을 하든 말든 일단 '종교'로서의 기본요건은 갖추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신약이라는 성경 안에는 그리스도가 모세율법의 뒤를 이어 제사장으로 삼아졌다는 것을 논증할 자료가 없습니다.


구멍3. 신약이 주장하는 마음의 법으로서의 온전한 율법의 부재.

만인 제사장 제를 주창하려면 마땅히 제사장이 관할하는 '법' 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의 율법을 관장하는 직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그들이 만든 '교리'는 있을지언정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법을 주관하는 사람인데 법이 없으니 제사장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인 제사장제' 는 신약의 서신내용을 인용하여 만들어낸 것이지만 논리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가설'도 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신학의 범위 안에서 만인 제사장제의 성경적 논증은 불가능합니다. 이 사실을 신약성경의 내용으로 간단히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성경배열 순서대로입니다.

요한복음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 복음서의 가르침은 모두 비사, 즉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내용은 밝히 이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요한복음은 복음서의 마지막 책인데 감당치 못하므로 다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 사도행전 초반의 부활이후 첫 전도 때 베드로가 한말입니다. '보고 듣는 이것'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의 실체가 요한 계시록 이전의 서신에 있느냐하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온전한 것이 아직 안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 에베소서의 기록은 '비밀'을 '대강'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이렇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온전한 율법, 즉 불완전한 모세율법이 아닌 또 다른 '들여다보는' 율법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그것을 보는 것이 곧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이 들여다볼 수 있는 온전한 율법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서신에는 온전한 것의 '예고'나 혹은 '이미 있는 것'에 대한 '간접적' 서술만 있을 뿐이며 이외에도 그 실체가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문구는 매우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한 것의 실체인 완성된'들여다보는 율법'이 있기는 있는데 신약성경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신학 안에는 이'들여다보는 율법'이 분명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신학은 그리스도의'공의 실현'이라는 논리를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신학에는 '공의실현논리'는 있는데 그 실현의'과정'에 관한 논리만 있고'결과'에 대한 논증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대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 무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무속적인 주장들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어 졌으니 그것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하나님은 사랑이니 사랑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등등의 무 논리적 주장들이 공의 실현의'결과'인'온전한 율법'이 없다는 사실을 가리는 수단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결과'없는 과정논리는 종국에 '그냥 믿어'라는 결론을 도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신경정신과 적으로 문제 있는 환상, 환청과 같은 무속적 신비주의에 힘을 실어 주게 되었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 끌리는 인생들의 마음은 그리로 향해 갔던 것입니다.


# 공의 실현의 결과'로서의 구원론의 실체, 솔로몬의 잠언.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신약성경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부여될 완전한 법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기록입니다.)


이 새로 부여된 '마음의 법'이 바로 솔로몬의 잠언입니다.

마음의 법인 솔로몬의 잠언은 유태인들의 손을 통하여 미리 준비된 것이었으나 그 안에 있는 가르침의 논리가 하나님의 결자해지라는 공의 실현이 빠진 상태에서는 '마음의 법' 이 될 수 없는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전체를 알 수 없으므로 낱개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잠언은 총 3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9장까지는 서론이고 10장부터가 본론입니다. 그런데 이 본론이 '한 구절'이 '한 법'으로 되어있고 전체를 알아야만 한 구절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내용이 마치 형이하학적 처세술을 논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형이상학적'마음의 법'을 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정작 지혜서라고 말은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의 실현엔 관심 없는 유태인도 그 내용을 모르고, 공의 실현을 아는 기독교지도자들은 마음이 젯밥에만 향해 있으니 그것을 읽는 것조차 불가능 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지혜의 왕인지에 관하여는 오늘날 아무도 아는 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역으로 잠언의 구원논리는 신약의 십자가 사건의 기록만으로는'결자해지'를 논증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은 구약 안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신약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 한 것이어서 객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문학의 꽃이라고 불리는 '욥기'에는 바로 그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증거기록이 있습니다. 이전 제사장인'레위'에서 그리스도로 제사장 직이 이월되었다는 증거기록이 '하나님의 판결'로 명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 역시 복음서의 비유와 같은 방식으로 '비유'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사용된 용어의 본래 의미를 모르면 읽는 것조차 불가능하여 등장인물인 욥과 세 친구와 엘리후와 하나님이 각각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왜 이 같은 말을 각 사람이 하는 것이고 또 왜 하나님은 그 같은 판결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도록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역시 유태교도 모르고 기독교도 이 내용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실현과 그리스도의 메시아 증명에 있어서 '욥기와 잠언'은 신약의 구원론의 타당성을 논증하는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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