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에 구원관에 대해 천주교인한테만 묻습니다 개신교분들은 대답하지...

천주교에 구원관에 대해 천주교인한테만 묻습니다 개신교분들은 대답하지...

작성일 2004.06.27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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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분들이 천주교괜히 음해할까봐요...
어떤천주교사람들이 그러더라구여
"하나님께선 속이 좁은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착하게산사람까지
지옥에 보내시지 않는다" 라고여
그리고 아무리 예수님믿어도 선행이 없으면 구원못받는다는 얘기도 들은거같습니다
진짜 천주교는 다른종교믿어도 구원받는다고 합니까
예를들면 어떤스님이 있엇는데 예수님을 안믿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냥 사람으로 믿었습니다
그스님은 불쌍한사람들을 상당히 많이 도와주고 다른사람한테 기분나쁘게도
안하고 암튼 착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스님이 구원받을수있다고 천주교는 생각하나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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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주객이 전도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전 천주교 신자입니다.) many72 수정


위의 질문은 누구나가 한번쯤은 해보았을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을 이야기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답변들은 하나 같이 주객이 전도된 오류 투성이 인것 같아서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답변을 올립니다.

먼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1.구원은 하느님의 은혜(인간의 의지나 행위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혜
적은총) 인 점. - 인간을 손수 지으시고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여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대속케하여주신 그리하여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분...

2.그러므로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신 점. - 구원을 해주시는 주체는 신부님도 목사님도 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느님 이신 점.

.............
위 의 2가지를 부정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 분명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닐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2가지는 개신교 천주교 모두의 신앙의 핵심적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2가지를 인정하신 다면 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위의 답변들에서 하나 같이 구원된다...아니다 지옥간다...거봐라...예수쟁이들의 말도 않되는 논리를...
성서에 천당못간다고 했다...그러니 당근 천당 못간다...등등등...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분들...
제가 한가지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느님 이십니까?

분명 구원을 하고 안하고는 구원의 주체인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옥간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착하게 산 불교신자가 당신과 함께 하느님전에 심판을 받으러 섰습니다.
하느님께서 둘다 천당에 가라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신다면...
당신은 하느님께 따지고 들겠습니까?
왜 이사람은 하느님을 믿지도 않았는데, 하느님 마음대로 구원을 하고 그러세요? 라고...
말씀이 틀리잖아요.성서에서는 하느님을 믿어야 구원된다고 해놓구선,,, 지금와서는
왜 말을 바꾸시고 그러나요?...라고 하느님께 따지 실건가요?..
진짜 물어보고 싶네요...

.........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것 같아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구원관에 대해
약간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구원은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야할 유한적인 존재인한 영원한 관심사
이며, 영원히 안고 갈 문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개신교와 천주교의 구원관을 보기 전에 개신교와 천주교의 성서해석의 방법차이를 설명드리는
것이 순서인것 같습니다.

1. 개신교의 경우 하느님의 뜻을 알수 있는 계시의 수단으로서 성서만을 유일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것을 성서에서 찾아야만 하는 한계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해석도 성서자체의 문구와 의미에 국한되게 되며 성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
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를 성서 근본주의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창조론의 에덴동산과 노아의 방주 바벨탑을 찾아다니는 순례단을 만들고 오늘도 위치를 찾기위해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이러한 성서해석주의에 기인하게 됩니다.
성서에서는 분명 원죄도 있으며 하느님을 믿는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있으니 당연히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이 안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개신교의 성서근본주의적 해석이 무리수를 낳을수 밖에 없는 부분도 구원론의 부분입니다.
분명 열심히 착하게 사회에 봉사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삶을 살아간 타 종교인들에게 지옥불
에 떨어진다는 구원관 . 교회에만 나오면 자기를 위해서 남을 돌아보지 않고 산다고 하더라도 하느님만
믿는다고 고백하면 천당과 영생의 영화를 누린다는 구원관 . 이런 설득력이 없는 구원관. 스스로가 주장
하면서도 뭔가 깨름직한 구원관을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결과에 다다르게 됩니다.

저는 위에서도 애기 했지만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구원을 해주실 분은 하느님이신데.
왜 인간들이 구원되니 마니 하시는지? 인간이 하느님이 아니신데...

2. 천주교의 경우 하느님의 뜻을 알수 있는 계시의 수단으로서 성서와함께 성전도 함께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전이란 예수님께서 세우신 초기 교회에서 부터 내려온 초기 교회 공동체의 전통적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성서뿐만 아니라 교회의 거룩한 전통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해석도 성서자체의 문구와 의미로 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의 해석도 성서자체의 문구와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교회의 전통과 성서전체에 흐르는
맥락등 여러가지를 고려해 진정 성서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성서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도 이러한 천주교의 해석방법에 의하여 보면 개신교적 구원관(예수천당, 불신지옥)과 약간의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천주교의 구원관의 핵심은 구원은 하느님의 시혜적인 은총이며, 구원의 주체는 오로지 하느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방향(하느님을 섬기고, 네 이웃을 사랑하며...)대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면 되며 그러한 삶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구원을 결정하실 것이란 것입니다.

별차이가 없으시다구요?

자 그럼 구체적인 차이를 보시죠.
위의 질문대로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아간 불교신자가
지옥에 가야 하나요?
개신교적 구원관에 의하면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가서 지옥불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적 구원관에 의하면 이 사람이 지옥에 갈지 천당에 갈지는 오로지 심판의 날 하느님의
결정에 따라 달라질겁니다. 왜냐하면 구원된다 안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이지 인간의 권능은 아니니
까요...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런 사랑의 하느님께서 어떠한 결정을 하실까요? ... 이것은 제가 볼때는 그를 지옥불의 고통속에 내버
려 두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이것은 저의 추측일뿐입니다. 실재 어떤 결정을 하실 지는 모르는 일이죠.)

가능성의 차이입니다.

가능성을 닫아 버리느냐? 가능성을 열어두느냐? 의 차이이며, 이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큰 차이로 다가 옵니다.

타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개신교와 천주교의 태도.
종교간 화해와 협력에 대한 개신교와 천주교의 태도.

부처님오신날 불상을 파괴하고 단군상의 목을 잘라버리는 태도와
부처님오신날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고 성탄절에 축하의 현수막이 절에 걸리는 태도의
차이...

모르겠습니다만, 진정 그리스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어떠한 것 일까? 생각해 봅니다.

질문 올리신 분에게 애기 하고 싶습니다.
천주교적 구원관에서는 그러한 분들에게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구요.
구원의 판단은 오로지 사랑이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으며,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의지 해야 한다구요...

질문에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먼저..... 반갑습니다.....

천주교의 구원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주교에서의 구원은 오직 세례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다면 구원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지않은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을 알지못하여 세례를 받지 않은 경우 (즉.. 님이 말한 스님)는

만일 그 사람이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그 사람이 세례를 받고 구원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여 천주교에서는 구원된다고 보고있습니다...

이는 계신교에서 말한 오직 구원은 교회 안에 만 있다는 것과 큰 차이점이죠..

이렇게 세례를 안 받고 죽은 사람이 정말 하느님의 뜻에 부응하여 산것을 혈세 또는 대세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아이의 죽음은 어떨까요....???

어린아이는 하느님을 아직 알지못하며 또한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런 경우는 오직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김니다....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이러한 아이들을 구원하지 않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살자의 경우는요.....

많은 계신교 사람들이나 천주교사람들이 자살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자살자라고 해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보는것은....

우리들이 하느님의 생각과 사업에 손을 대는 일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분신자살한 사람들이나... 노동자들의 자살등이.... 정말 이러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자살자의 영혼도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겟습니다ㅏ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저는 유아세례를 받고 32년째 가톨릭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독실한 신자입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도 phw630님의 글이 100% 맞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보충할 것은 화세와 혈세가 무엇인가에 관해서 입니다.
질문자님은 제가 보기에 가톨릭신자는 아닌 것 같기에 화세와 혈세에 대해 생소하실 것 같아 보충합니다.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화세와 혈세라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예수님을 믿건 믿지 않건 모두다 구원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어떤 이가 비록 어쩔 수 없이 물의 세례(수세)를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그 사람의 살아서의 선행이 하느님의 원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열망의 세례(화세)를 받아 구원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죽은 순교자인 경우 피의 세례(혈세)를 받아 구원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대해 무조건 착하게만 살면 구원된다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phw630님의 글대로 착하게만 산 스님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지 않았다면 분명 구원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확실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 스님이 행한 살아서의 선행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면 우리가 알 지 못하는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구원의 문을 열어주실 가능성의 문이 완전히 닫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만인을 구원하길 원하시는 하느님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스님이 반드시 구원된다, 혹은 반드시 구원되지 못한다 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만...^^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999년 의화 논쟁 종식 이후 개신교(정통)나 천주교의 구원 관은 일치 합니다.
원래 구원은 하느님의 영역 이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에서는 옛날 부터 있어온 화세 혈세 등의 교리를 좀더 진취적으로 해석 할 뿐입니다.

소위 익명의 그리스도인 과 같은 논리 같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바로 그 스님은 구원 된다! 가 아닙니다.또 아무 종교를 믿어도 구원 되고 예수님을 사람 으로만 믿어도 구원 된다는 더욱 아닙니다.
구원에는 선행이 뒤 따라야 하지만 구원의 길은 오직 주 예수님을 통해야 함은 당연 한 진리 이지요

그러나 선행을 한 이 스님 같으신 분은 그 선행 자체가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모상대로 행했다고 보면서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아시는 방법으로 구원 받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위에서 말한 분의 자살도 마찬 가지 입니다 자살 자라도 다 구원이 없다고 할수는 없다는 이야기 이지 그것이 마치 자살 해도 다 구원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행만 하면 구원 받는다 라고 오버 하는 신앙 사조가 한국 가톨릭 내부의 소위 진보 주의 자들에 의해 확산 되고 있으나

구원의 문제를 마치 공의회가 열고 닫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되고 또 그럴 권한도 없습니다. 선무당이 사라 잡는다고 그렇게 들리도록 해도 안됩니다.

우리는 다만 교회의 가르침으로 이를 따를 뿐이지만 분명 한것은 구워능 하느님의 영역 이며 다만 교회의 가르침은 오직 우리 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 에서 그 가능성이 넓어진 것이 공식적으로 선언 되어 젔다고 인정 한 것 뿐 입니다.

2000년 동안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공의회를 백번 해도 진리는 변함 없을 것 입니다 다만 그 해석을 소위 자유 주의로 제멋 대로 하는 사람들이 문제 이지요
지금 그 스님이 확실히 구원 되었다 란든 가 확실히 구원 될수 있다는 사람은 천주교 신자이지만 올바른 신자는 아니니 흘려 들으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출처: 가톨릭굿뉴스- 가톨릭광장- 천주교묻고답하기- 게시물: 626번과 634번 작성자: 오성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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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의 구원관 (1) -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주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의 생애를 통하여 가르침을 주셨고

그 육체를 십자가에 희생하심으로써 구원을 성취하셨다. 그리하여

선택하신 사도들에게 명하시어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

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

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8-20)라고 말씀하셨다. 또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 16)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자비에 따라 구원을 받고 받지 아니하는 것은 사람의 자

유에 속한다. 그리하여 그 자유의 선택 결과도 그 사람의 책임으로

서 각각 그 개인에게 귀속된다.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

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갈라 6, 7).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

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

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니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

는 분이십니다."(2디모 2, 11-13).

 

 그리하여 믿고 영원한 삶에 들어가는 것도, 거절하고 끝이 없는 죽

음에 빠지는 것도 자유이다. 각자 구원의 실현은 그가 복음에 대하

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먼 옛날

에 이 큰 일을 간결하게 요약하여 "그대 없이 그대를 창조하신 분은

그대 없이 그대를 구원하실 수 없다."(Sermo 169, 13)라고 말하였다.

 

 

 이성(理性)에 눈뜬 자에게 구원은 단지 팔짱을 끼고 기다리는 종류

의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위격(位格)으로써 위격을 가진 우리를 대

하신다. 하느님이 그 신격으로써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전 인격을 가지고 이에 응답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

인격을 건 사활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주님은 우리 문 앞에 서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 말씀을

듣고 문을 열어 그분을 마중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분은 그 집에 들

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하실 것이다.(묵시 3, 20)

 

 

 

 구원의 실현은 하느님과 사람의 협력에 의한다

 

 인류의 구원은 역사를 통하여 실현되고 있다. 하느님의 계획이 수행

되는 데 있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 몸이신 교회를 위하

여 우리의 몸으로 채워야 한다(골로 1, 24). 그렇게 말함은 물론 그

리스도의 구속 사업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느님의 자

비가 충만한 공동 분배 사업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신다는 말이다.

 

 구원은 인간 제멋대로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는 프로테스탄

티즘의 고질병인 Mind Cure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부단한 인격

적 관계에 의하여 발전해 간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과 인간의 도덕적 노력의 교향곡이며 그 미묘한

조율은 골고타 언덕 위에서 이루어진 이래 점점 깊고 점점 넓고 전

인류를 그 속에 포괄시키지 않고는 그칠 줄 모르게 확대해 간다. 죄

중에 태어난 우리 처지로서 그러한 하느님의 대업에 협력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은총으로서, 본성에서 나온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진

리에는 사랑으로, 만사에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성장하기 위해

서이다(에페 4, 15-16).

 

 그리스도와 우리는 상호 유기적으로 서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신

비체인 교회를 조직하고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

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지체를 완

성해 나가는 것입니다"(에페 4, 16).

 

 즉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하여 우리를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

이다.

 

 

 

 

 구원의 개인주의적 해결

 

 

 우리는 여기서 가톨릭 신앙과 프로테스탄티즘의 분기점을 발견하게

된다. 후자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단지 불가시적(不可視的),

개별적(個別的) 교섭에 한정하려 하고, 전자는 이 영적 사실이 전 인

류를 유기적으로 단결시키는 가시적(可視的), 세계적 대교회로서 시

공간(視空間)에서 발현(發現)한다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티즘에 따

르면 각자의 영(靈)은 단독으로 그리고 직접 하느님에 의하여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종교적 존재로서 인간은 단체 생활

을 조건으로 하는 정치적 존재인 사회인과는 그 성질이 완전히 상치

되는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보는 종교는 순주관적(純主觀的)인

사사로운 일로서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사회성을 갖지 않는다. 고립

된 종교 신자와 공동 생활에 의해서만 완성되는 사회인이란 우연히

그 양자가 구체적으로는 동일인일 수 있다는 이외에는 본질상 아무

런 유기적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질적으로 그 자

신에게 있어 이원적(二元的) 존재로 분할되는 프로테트스탄트의 종

교적 체험은 주관 이외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할 고립된 현상으

로 되고 만다. 그리고 다른 이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음과 동시에 일

반적 타당성마저 절대적으로 결여된 결과 이른바 가르침이란 결합의

수단 없는 단원론(單元論)의 집합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와 같은 주관적 고립으로 폐쇄되어 있는 이들 종교적 로빈슨 크

루소 속에는 라이프니츠의 이른바 "예정 조화(豫定調和, Harmonie

Preetablie)"마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각각의 영(靈)이 나만이

하느님에게 연계된다는 확신 또는 의식을 가지고 만족해야만 한다.

 

 하느님이 일찍이 사람이 되시어 지상에 내려오시어 그 사람의 인성

을 통하여 인류에게 가르치셨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이 되는 사실마

저 특별한 의의를 잃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서 상술한 불가시

적, 개별적인 하느님과의 관계가 성립되기 위하여는 논리적으로 그

리스도의 강생(降生)은 필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이 옛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단지 직접

계시를 내리신 것에 그쳤다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치(理致)에 맞았

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성서 답변확정의 근거

를 유다인들의 얌니아 회의의 결정에 따르고 있는 것과 더불어 그리

스도의 강생 구속의 의의를 상실한 교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그리스

도교에서 벗어나 오히려 구약의 옛 율법에 얽매인 유다교의 모습에

가까운 것을 알게 된다.

 

 구약 성서에서 보여지는 개인에 대한 개별적 계시를 강조하는 개신

교 신앙의 모습과 신약 성서에 근거한 전 인류의 구속 사업의 중요

성을 깨닫는 가톨릭 신앙의 구분은 이제 확연해진다.  

 

 그렇게까지 가시적으로 지상에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셨던 하느님의

업적이 왜 그들 프로테스탄트에게만은 불가시적이며 개별적인 분리

적인 사건이 되어 버렸는지.

 

 "모두가 하나 되기를."  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였던 사랑이

자아의 내부에는 이원적(二元的) 대립을, 그리하여 자타간에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분리된 주관의 대항과 투쟁을 만들어 내는 결과에 도달

하였는가. 이것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의 해석

 

 

 가톨릭주의는 종교 생활에서 개인주의의 정반대이다. 구원은 물론

각자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제공되어 사람에 따라 자유로이 받아들여

지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제공도, 그 자유로운 수용도, 단지 개

인의 마음 속으로만 행해지는 불가시적인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리스도는 가시적 교회를 통하여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할 인류

의 한 사람에게 작용하신다. 우리도 또한  그러한 영으로써 이에 대

하여 공공연한 태도를 가져야 할 필요에 직면한다.

 

 그것은 개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관련된  공사

(公事)이다. 그래서 공공연하여야 할 우리의 태도는 공정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타당성이 있어야 할

근본적 사안으로서 주관의 방종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이런 것은

물론 자유의 부정이 아니고 객관적 권위를 가지고 다가오는 일이기

때문에 도리어 도덕적 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취사(取

捨) 어느 것도 선이나 악에도 속하지 않는 주관적 평가나 기호의 문

제가 아니고 제공된 객관적 가치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문제이

다.  

 

 구원은 너와 나의 구별없는 일반적인 인간성에 기초를 둔  요청이

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천차 만별한 구체적 특질에 연계하지 말고

이에 대한 거취를 가려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순간 즉시 천차 만별의

개성을 포용하여 대동 단결하는 원칙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임에 자유로운  것은 프로테스

탄트와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유로운 선택은 더욱 고도로 도

덕적이고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연 권위를 떠나서

도덕이 있을 수 없고 또한 단지 자아의 일부분이나 전 인류와 분리

된 나로서 행하는 것보다 자기의 전 능력을 들어 전 인류와 연대 책

임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하는 행위 쪽이 훨씬 깊고 인격적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이른바 신앙

 

 

 프로테스탄트의 이른바 신앙이란 단지 자발적인 태도 또는 감정으

로써 본질적인 내용을 갖춘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이성(理性)은

거의 여기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의지나 또

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신뢰감으로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구속(救贖)이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등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그

에게 신앙은 신조(信條)의 승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받았다는

의식(意識),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닌지는 관심 밖이다.

 

 일종의 종교적 자기 암시 행위이며 최면 행위이다. 그것은 결코 고

도의 도덕적 자유에도, 또는 깊은 인격적 행위에도 속하지 않는다.

자기 신앙은 어디까지나 자기 것이고 타인의 그것과는 관계가 없으

므로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신앙 조항의 서로 다른

정도는 물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원래가 내 마음속에 있는 자기 일

이며 사회적인 나의 관여는 모르는 일이므로 자타의 관계를 타당화

하는 모든 가시적 제도나 교도권 등은 무용의 장애물이다.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가 그런 것을 제정하셨을 리가 없다고

프로테스탄트들은 생각한다.

 

 그렇다고 만일의 경우에 매달릴 아무 것도 없다면 외롭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많은 경우 단순히 형식적 교회 또는 성서만을 가

지고 있다. 형식적 교회는 본질적인 의의(意義)를 가지고 있지 않고

서적은 입이 없으니 방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성서는 자기가 편하

게 해석할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 필요에 따라 고등 비평(高等批

評)에 호소하여 사실성을 거부해도 좋고 혹 그것을 방패로 하여 상

대를 공격할 자료도 된다. 공방 모두 유리한 무기이다. 당면한 적

(敵)은 단지 나의 자유(주관적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주관적인 도

덕에서와 같이, 이 말은 깊은 도덕적 의의를 가지지 않는다.)를 구

속하려는 권위이며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가톨릭주의이다.

 

이것에 대하여 성전을 선포하는 것은 주관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생명

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단결의 원리로까지 살리는 길은 이 방

책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이 투쟁을 중지하는 순간 내용이 빈약한

데다 와해의 원리를 잉태한 프로테스탄티즘은 자연 붕괴되고 만다.

 

 가톨릭이 있고서 프로테스탄트이다. 옛말에도 적이 없으면 나라는

망한다고 하였다. 원래 자기 신앙에 타인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음과

동시에 타인의 신앙에도 간섭해서는 안 되었을 자가 달려드는 맹수

의 기세를 막지 못하여 자기의 영적 생명에 충실을 기하기보다는 교

권주의를 공격하는 쪽에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모

순을 탓하기보다는 도리어 그 초라함을 동정하는 것이 백번 옳을 것

이다.         

     

 

 

교회는 예수 강생의 계속

 

 우리는 종교 때문에 인간을 고립시키고 천박하게 유아 독선에 빠져

자가 모순을 고집하면서 남을 공격하는 것으로 겨우 존재의 이유를

유지하는 재앙을 면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가시적 길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계신

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이에 대하여 끊임없이 가시적으로도 대응

하며 또한 가시적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그 태도가 궤도를  벗어나는

지의 여부를 공평하게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 결과 가톨릭

신자는 안심하고 건전한 영적 향상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

여 진리와 사랑의 일치 속에 유형적으로 나타난 하느님 나라를 통하

여 주님은 구원을 풍요롭게 성취하신다.

 

 인간은 자타가 구원의 협력자로서의 영광을 얻고 또한 그 협력 때문

에 더욱더 상호 친밀하게 결합된다. 그리하여 강생의 현의는 교회의

신비로서 계속된다.

 

 

 그 옛날 아름다운 비유의 말씀으로 갈릴래아 군중을 가르치신 것처

럼 또한 말씀으로 죄를 용서하시며 고민하는 마음을  위로하시고 깨

끗이 씻어 주시고 안수로써 영을 내리시어 병을 고치신 것처럼 그리

고 마지막에는 상처 입으신 손, 발과 구멍 뚫린 옆구리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희생을 완수하신 것처럼 주님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시적

교회를 가지고 그 하시는 일을 계속하신다.

 

 성직 제도와 성사로써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생명에까지 탄생시킨 신

비체인 가톨릭 교회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계속하도록 전권

을 위임받은 유일한 단체이다. 거룩하고 보편되며 하나이고 사도로부

터 전해 오는 교회, 그 머리는 그리스도로서 신성한 교회, 주님은 하

나, 세례도 하나, 주님이 베드로를 그 후계자로서 지상에서의 그 대리

자로서 정하신 세계적 교회가 곧 그것이다.    

 

 

 

 

 교회의 본체인 그리스도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사회성이 자연히 만들어 낸 단체가 아니다.

또한 신자들의 종교 생활이 낳은 당연한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그

리스도의 신비체이며 그 신비체를 움직이는 영은 그리스도의  영 그

자체이므로 개개의 신자가 은총을 받은 다음에 교회가 성립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그 신비체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즉 윤리적 순서에 의하면 우선 교회가

존재하고 그런 후에 그 결과로서 개개의 영이 거룩해지는 것이다.

 

교회의 본체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모든 거룩해짐은 그리스도에 의하

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 17).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은 "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다."(루

가 10, 16)라고 말씀하신 "말씀의 일꾼"이다.

 

 하느님 나라가 넓어지는 것은 단지 불가시적인 은총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이 세상의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들의 선교에 의한 것이다.

단지 인간은 씨를 심었고 물을 준 싹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

십니다."(1고린 3, 6). 교회는 개개의 신자에게 내리신 은총으로 자

연히 성장한 것이 아니다. 또한 자발적으로 조직된 것도 아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

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직책을 두셨습

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요

셋째는 가르치는 사람이요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또 그 다

음은 병 고치는 능력을 받은 사람, 남을 도와 주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 등입니다."  "몸 안에 분열이 생기

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한 지

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기뻐하지 않겠습니

까"(1고린 12장).

 

이들 말씀 속에 하느님 나라인 교회의 질서 정연한 기구와 살아있는

발전이 명시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적극적인 하느님의 뜻에 따

라 제정(制定)된 것이다. 이 살아 있는 성전의 으뜸인 베드로가 "주

님은 살아 있는  돌… 주님께로 가까이 오십시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

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

여 드리십시오."(1베드 2, 4-5)라고 말한 데 대하여 같은 베드로가

일치의 표시로서 오른손을 준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도 또한 같은 말

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고 여러분은 하느님

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능

숙한 건축가가 되어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그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중히 생각해

야 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

른 기초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1고린 3, 9-11).

 

하느님 나라는 주님의 위임을 받은 건축가가 살아 있는 돌인 그리스

도의 기초 위에 질서 정연하게 쌓아 올린다. 인간은 이 진리를 인정

하고 하느님의 조수들의 권위에 따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일

원으로서 하느님 나라 건설의 밑돌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

와 사도들의 기초 위에 놓이지 못한 돌이기에 멀지 않아  황망한 폐

허에 놓인 돌이 되거나 두 길 중 한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주관적

프로테스탄티즘은 그야말로 자유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복종하느냐

안하느냐가 자유일수는 없다. 그들은 원하는 대로 주장하는 그 자유

의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다.

 

 

 

 

 

 

 -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 中에서 -

 

 

 

가톨릭의 구원관 (2) - 프로테스탄티즘의 귀착점은 자유 사상

 

 

하느님 중심주의와 자아 중심주의

 

 도대체 종교 생활의 진수(眞髓)는 하느님의 무한한 권위(權威)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사람의 아들로서

지상에 오신 살아 있는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주권

을 인정하고 예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하여 거룩해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교회의 활동으로서 하느님의 외

아들에게 있어 신성이 인성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교회의

본체인 그리스도도 또한 그 가시적 제도의 형태로서 우리에게 임하

심은 전술한 바와 같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감사하며 이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육체로 그리스도를 인정하면서 그 신비적 개체인 가시성을 부정함

은 결국 옛 도케티즘(Docetism: 물질은 그 자체가 악이라는 주의)  -

그리스도의 육적 존재를 부정한 이단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

께서 제정하셨다는 것을 무시하고 그들의 눈앞에 엄연한 가톨릭 교회

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바에 따라 하

느님의 모습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예배코자 하는 우상 숭배에 지나

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영적인 예배자라고 하여 주관으로 만들어

낸 신의 모습 앞에 무릎 꿇을 때 실은 자아의 모습을 우상 숭배하는

데 지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한다.

 

 한 프로테스탄트 저술가가 "인간은 하느님을 자기들의 모습과 닮게

만들었다. 이것이 모든 기성종교의 진수이다."(P. Gohre, Der Unbe-

kannte Gott, Leibzig, 1919, S.148)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것이야

말로 실로 지당한 말이다. 프로테스탄트인 그 저자는 교도권을 통하

여 계시를 받는 것을 몰랐음이 틀림없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자유라

고 하는 애매한 미명 아래 자기의  이른바 체험에 따라 제각기 마음

대로 하느님을 설명하는 데 기가 막혀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이미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슐라이어마허가 "가톨리시즘은 개인과 그

리스도의 관계를 교회와의 관계로 의존시키는데 반하여 프로테스탄

티즘은 개인과 교회의 관계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연유시키고 있다"

라고 말한 것은 옳은 것이다.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는 많은 점에서 공동 신조를 가질 수 있

으나 불행하게도 양자의 신앙 동기에서는 전연 그 모양을 달리 하고

있다.

 

 전자가 자신도 타인도 틀림없는 하느님의 위엄 앞에 엎드려 그 신조

를 구체적 교도권을 통하여 받아들이는가 하면 (그 교도권이 그리스도

에 의하여 제정되고 성령으로 지도받는 것을 승인하므로) 후자의 신앙

은 그 형식이나 내용은 여하튼 간에 결국은 자신을 직접 비판하는 결

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조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고 가톨릭 신자

처럼 그리스도가 명하는 바대로 주어진 그대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자신만의 신조를 스스로 발견해야만

프로테스탄트인 것이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신조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하여 그것

에 도달하였는가 하는 과정,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이것을 믿는가 하는

태도이다.

 

 그는 하느님의 진리가 이러이러하다고 권위를 가지고 자신에게 제

시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레싱처럼 말할 것이다.

 

 

 "하느님이 만일 오른손에 모든 진리를 들고 그 왼손에는 단 하나의

끊임없는 진리욕, 더욱이 영원히 헤맬 것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나에

게 선택하라고 하신다면 나는 하느님께 무릎꿇고 왼손을 잡고 말할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시여, 이것을 주소서. 진리 그 자체는 실로 당

신만의 것이니까요."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상에 오시게 된 것을 그

들은 어느 사이에 잊고 있다. 그러한 태도는 그 자신에게 프로테스탄

티즘의 사이비 겸손 - 숨어 있는 교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나는 여기서 프로테스탄트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것을 말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이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행

하게도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개종한 사람에 의하여 전해지는 것같은 좋

지 못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프로테스탄트는 가

톨릭에 대한 편견 또는 의식치 못한 무지와 놀라운 논리적 사색의 결핍

(물론 철저하게 반성하는 자가 영구히 만족하는 프로테스탄트인 것은

곤란한 일일 것이다.)을 빼놓으면 모두가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

들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그들 대부분은 이상과 같은 문구를 인용하거나 혹 그

와 비슷한 태도를 취할 때 결코 그 의의에 대한 깊은 자각에 의하여 하

는 것이 아니라 흔히 철학적 편견에 지배를 받아 진리 포착에 있어서의

깊은 문제를 생각하지 아니하거나 반성 없이도 번민하는 것이 어쩐지 용

하게 느껴서든 또는 사실 진리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어 그렇게 말할 수

밖에 다른 길이 없거나, 심지어는 그저 교단에서 누군가로부터 그렇게

말한 것을 들었다든가 어떤 책에서 우연히 그런 것을 읽은데 지나지 않

는다.

 

 그러나 가령 프로테스탄트 역사가 비네(Vinet)가 아주 솔직하게 고

백한 것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은 나에게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나

의 종교는 그 건너편에 있다. 나는 프로테스탄트로서 가톨릭적인 설

을 받드는 것도 가능하며 그리고 현재 그러한 두세 가지 설을 받들

고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절대적으로 배

척하는 것은 곧 권위이다."(Literature au XVII. siecle, t. III,

p.392)라는 명확한 주장을 하는 자도 얼만가는 있을 것이다. 이 고백

은 실로 프로테스탄트의 진수에 들어맞고 있다.

     

 그 외에 이른바 개신교의 여러 양상은 모두가 여기에 근원을 두고

출발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비로소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교의상 서로 다르거나, 신교의 개인주의나 주관에 기인한 끝없는 분

열의 깊은 골짜기,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의 발전 단계 최후에 나타나

는 유물주의와 무신앙으로의 추이가, 한 원칙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

관된 당연한 발전으로 이해될 것이다.

 

 

 

 자아 중심주의는 루터에서 시작

 

  사람에 따라서는 그러한 경향이 이른바 종교 개혁의 개조(開祖)들

에 의하여 시인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할지도 모른다. 시험 삼아 루터

주장의 변천 등을 점검해 보면 이 점에 관하여 아주 암시에 가득찬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루터가 1513년 대사(大赦)문제

에 관하여 처음 항의하였을 때는 그 선포가 마침 아우구스티누스 수

도회의 경쟁자인 도미니칸에 맡긴 것이 원인이 되어 대사의 남용에

반대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그는 얼마 되자 않아 대사 자체를 반대

하여 그 결과 선한 일의 뜻마저도 부정하게 되었다. 그 때는 그래도

아직 로마 교회의 교도권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교황에게 제소하겠

다고 하였으나 1523년 거절되자 교황에게 공의회에 제소한다고 주장

하고 나아가서는 공의회의 권위마저 거부하여 드디어 계시의 원천으

로서는 단지 성령의 개인적 영감에 의한 성서의 해석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신자가 사제가 되어 성직 제도는 물론, 교회의 가시

성, 성사의 의의 등이 뒤를 이어 부정되었다. 후년에 칼뱅이 제네바

에서 조직적으로 수행한 일의 앞잡이가 되어 재침례 교도 등에 대해

서는 다시 교회의 가시성을 주장하였다는 것은 흥미 있는 모순 덩어

리이다. 그것은 아마도 현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과 무교회주의주의

자들과의 반목의 전초전이었을지 모른다. 어쨋든 이들 루터의 변설

(變說)은 언제나 교도권에 반항하여 자기의 종교적 체험에 따라 이

루어졌다. 혹은 사실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루터 자신은 그렇게 주장

했다는 역사는 전술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진수라고도 할 두 가지 점,

교단의 배척과 신앙의 기준으로서의 종교적  체험이 처음부터 종교

개혁의 기조가 된 것을 증명하고 있다.

 

 

 

 

순체험주의(純體驗主義)로의 추이와 그 모순

 

 

 윌리엄 제임스가 그의 저서 ’종교적 체험’ 속에 "내면 생활의 방향

으로 발전한 결과 그리스도교는 더욱 구원의 내적 위기에 중점을 두

게 되었다. 로마부터 루터에, 그리하여 칼뱅으로, 또 칼뱅주의로부터

웨슬리에로, 그리고 다시 메서디스트주의에서 드디어 순수한 이른바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Mind Cure 식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이들 서로 다르게 이어지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형식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영적 구제의 관념으로 향하여 부단한 진보를 인정할 수 있

다. 그리하여 이 직접적인 영적 구제의 체험은 교의적 배경(Appareil

doctrinal)이나 위로하는 제식(祭式) 등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형평을

잃은 개인이 경험한 것이다."(프랑스어 번역, p.179)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루터 이후 프로테스탄트의 변천을 적절히 요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최후의 "교의적 배경과는 관계없는 것으로"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종교적 체험은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교의적 배경 없이는 존

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 이후 그 흐름을 이은 것은 그가 칼뱅교

도(장로교도)이건, 메서디스트(감리교도)나 얀센파에 속하건 여기에

말하는 직접적 구제는 반드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총이나 하느님

앞에서의 의리, 또는 예정설(豫定設)의 관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것은 체험적 프로테스탄티즘에 내재한 모순에 기인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신앙이 진리의 승인이 아니라 하느님에로의 인격적 신뢰

라든가 사랑의 관계(지적 요소를 제외한 인격적 관계도 있을 수 있다

고 본다.)라고 정의해도 적어도 그 체험하는 하느님이란 무엇인가, 그

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하느님 앞에 우리는 무엇인가 등 교의적 배경

없이 위에서 말한 관계가 성립될 수는 없다. 그래서 체험주의의 무교

회론자가 성서에서 제시한  대로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동료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비난하거나 가톨릭주의의 공격에 "성령

이냐 교도권이냐" 하는 어이없는 논문(?)을 쓰게 된다.

 

 가령 그가 무신론자라 해도, 유리론자(唯理論者) 또는 유물론자(唯

物論者)라 해도 위에서 말한 인격적 신뢰나 사랑의 관계가 가능하다

면 구원은 그리스도에 의해야 한다는 이유는 소멸하게 된다. 또한 신

앙이 전연 진리의 승인과 관계가 없는 일이라면 성서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를 인정하건 않건 또는 교도권을 주장하건 말건 그러한 교

의적 문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파사현정(破邪顯

正)의 글을 쓰는 것은 성서에 제시한 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교

도권을 승인해서는 하느님에로의 인격적 신뢰도 사랑의 관계도 불가

능하다고 믿으므로 -결국 신앙과 교의는 뗄레야 뗄수가 없으므로-

그러한 불신 완고한 도배(徒輩)의 무식을 깨닫게 하려고 크게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사도신경의 승인이 신앙이

라면 크리스찬보다 악마가 더 잘 알고 믿고 있다고 말하는 프로테스

탄트들의 논법은 첫째로 가톨릭 교회의 주장으로 거론되는 전제가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둘째로 "신앙으로만 의롭다."고 주장하는 개신

교에 대하여 "특히 신앙만이"라고 루터가 고의인지 잘못해서인지 성

서를 오역(誤譯)한 것이 실로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완전히 유효하나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난으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루터에 의하여 지푸라기 서간이라고 무시되었으나 가톨릭 교회에

의하여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의 정전으로 쓰이고 있는 야고보서

에서는 일찍이 여기에 대하여 답하고 있다.

 

 즉 "당신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좋은 일입니

다. 그러나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

이여,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닙

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그의 믿음은 행동과 일치했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

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

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이와같이  창녀 라합도 유

다인들이 보낸 사람들을 친절히 맞아들였다가  다른 길로 떠나 보낸

행동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영혼

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

입니다." (야고 2, 19-26).                

 

 

 모든 그와 같은 오해나 모순은 신앙과 신뢰, 그리고 신뢰와 신뢰의

감정 또는 의식을 혼동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특히 현대인에게 있

어 이와 같은 생각의 배경에는 적어도 무의식적으로 근대 철학의 주

관주의(主觀主義)가 잠재해 있어 그것으로 화를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경향의 실례로 가톨릭 신앙은 "신조의 Furwahrhalten(진리로

보는 것)이다."라는 정의로 설명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의 서적에

서도 볼 수가 있다.

 

 주관적 인식론(오캄의 유명론(唯名論)에 근거한)에 입각한 그들은

여기서 말하는 wahr(진실)의 뜻을 스스로  단순한 관념적 진실-주관

이 진실로 보는 뜻으로 풀이하고 객관적 실재 파악의 뜻으로는 풀이

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의 존재를 Furwahrhalten(진리로 보는

것)한다는 것은 단지 "하느님이 계시다고 생각하고 또는 상상하는 것

뿐인 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오해는 깨닫지 못하고 "교리만으로 어째서 진리를 전하

지 못하는가.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를 죽어 있는 형태로 독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 신조 중에 묶여 들어가 있을 때 어째서 종교

에 생명력이 없어지는가. 그것은 살아 있는 종교 진리를 죽어 있는

고정된 신조 조항 속에 가두어 두고 신앙의 자유로운 성장을 저지하

기 때문이다."(三谷降正 지음, ’신앙의 논리107’, pp.130-131 참조)

라는 결론을 내린다.

 

 다른 신앙에 관하여는 모른다고 치고 그러한 견해는 현실주의에 입

각한 가톨릭 사상을 표현하기에는 가장 부적당하고 진상을 아주 심하

게 왜곡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이른바 복음주의라 불리우는 개신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이론이라는 것이 그 뒤의 가면을 벗기면

결국 주관주의의 조잡한 철학에 지나지 않음을 세상 사람들은 거의 깨

닫지 못한다. 뒤에 진정한 가톨릭 신앙관 - 그것은 교회관과도 뗄 수

없는 것이다.- 을 말하기 전에 종교 개혁에 기원하는 자기 중심주의의

신앙관이 현대 사조에서 어떤 사상으로 끝을 맺었는가를 기술하는 것

은 현대의 개신교 근본주의자들 - 자칭 복음주의자라 말하는 - 의 좋

은 참고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칼뱅의 반동적 객관주의

 

 현대 프로테스탄트 일부에서도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종교 혁

명은 당초부터 주관주의의 혼란에 지쳐서 그것을 어느 범위 내에서

가두어 두려고 하는 노력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루터의 폭발적

프로테스탄티즘을 라틴 민족적으로 질서 지우려 한 것이 칼뱅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독재적 권위 하에서 제네바에 신정(神政)을 펴고 시민

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고 이른바 개별적 견해(個別的見解, Opinions

Particulieres)에 대해서는 화형(火刑)에 제소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

던 프랑스 개혁가는 게르만 민족의 개인주의를 철저히 방어할 수 있었

을까.

 

 자기의 성서 해석을 가지고 가톨릭 전통으로 바꾸어 개인의 권위를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과 바꾼 것은 우연히 개인주의의 무서

운 적용의 일면을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실례는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중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칼뱅의 상

상할 수 없는 굳은 의지가 일시적 강제성을 성취했다 해도 로마 교

도권에 대하여 반항한 것 같은 그 힘이 개인적 권위에 대하여 반항

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하물며 그의 교설(敎說) 자

체가 적지 않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데는 어찌하랴.

 

 즉 한편으로 칼뱅에 의한 이 새로운 교파는 내심의 성령의 증명을

가르침과 동시에 개별적 견해를 허용하지 않는 가시적 교회 제도가

되었다. 은총은 잃을 수 없는 것이고 구원은 자기 구제 예정의 확신

- 이것은 물론 주관적인 것이다 - 과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결합되

어 있었다.

 

 여기에도 하느님의 절대 규범의 의지가 인간의 자유를 사실 무가치

한 것,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다만 칼뱅은 좋은 일을 신자가

자기의 구원 예정을 믿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뜻으로 이것을 긍정하였

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러한 견해는 - 일종의 Petitio Principii(논점

회피, 論點回避)인 것이다.  

 

그렇게 루터도 칼뱅도 인간의 도덕적 자유를 부정하였는데도 불구하

고 그 뒤를 따른다고 자칭하는 현대의 프로테스탄트가 흔히 도덕 운

운하고, 그런 데다가 도덕적 자유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왜냐하면 도

덕적 가치의 기준은 객관적 권위에 바탕하는데 프로테스탄트들은 모

든 객관적 권위를 배척하기 때문에) 이른바 "신앙의 자유" - 그것은

결국 자기 편의에 맞게 생각한다는 종교상의 Freigeisterei(무신론사

상, 無神論思想)에 지나지 않는다 - 를 도덕적 자유라도 되는 것처럼

주장한다. 특히 이 점을 가지고 가톨릭주의를 공격하는 도구로 삼으

려는 것은 그들의 사상적 혼란이 얼마나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개신교의 귀착점은 자유 사상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어지는 변천을 본질적인 것으로 설명하고자 희

망한다. 그리하여 그 설명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제1 단계는 윤리와 실제 두 가지 방면에서 그들의 주장이 결국 여러

가지 폐해를 일으킨다는 지적을 받는데 대하여 우선 그런 결과가 절

대로 생기지 않는다고 항변한다.

 

제2 단계로는 사실 처음의 예견이 적중하자 그 진상을 직시하는 것을

피하여 반대자가 폐해라고 말하는 것을 도리어 희망적인 것이라고 말

한다.

 

 예컨대 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크리스찬을 공격

하는 프로테스탄트에게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흐트러짐을 이론과 실제

현실 양쪽 모두를 제시하면, 신앙은 성령에 의한 것이기에 만일 통일

이 필요하다면 성령 자신이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 성령은 서낭당을 믿

으라고는 하지 않으실 것이므로 신앙의 통일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우연히 어느 크리스찬이 서낭당을 믿었다고 해도 그것은 좋지 않은가.

각자 그 나름대로의 신앙이야말로 진실된 신앙이다라고 말하는 부류이

다. (’성서의 연구’, 334호, p.14 참조).

 

 

 과거에는 가톨릭도 프로테스탄트도 그리스도교 진리는 변하지 않는

다는 주장에는 일치했었다. 이렇게 변화한 것은 가톨릭 측으로서, 개

신교는 사실 초대 교회를 부흥시킨 구교에 지나지 않는다고 프로테

스탄트들은 주장하곤 하였다.

 

 

 그러나 객관적인 역사적 연구가 그들의 억지 주장과 궤변을 곤란하게

만들었을 때(하긴 일본의 무교회주의 창시자 우치무라 칸조의 초대 교

회론에 따르면 베드로도 요한도 바오로도 모두 현대의 무교회주의자

같은 평신도였다고 그들은 주장하지만.) 그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변화

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본질이라고 말을 바꾸어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변설(變說)에 대하여는 우리는 조금도 이의가 없다. 그것은

단지 거역하기 어려운 사실의 승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하 독자

들이 참고할 철저한 외국의 프로테스탄트의 언설(言說) 두세 가지를 소

개하여 주관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맹신자들이나 무교회주의자가 만일 처

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의 주관을 일관시키려고 하면 당연히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그들 사상의 마지막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옛날 종교의 가치 판단 기준은 그 제도나 교리의 불변성에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변화를 알리는 것은 훌륭한 사람들에게 철회할 수

없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에 반하여 생명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진화가 있고, 운동이 있고, 유기적 변화가 있다(J. Reville,

Le Protestantisme liberal., p.23).

 

 

 이것으로는 아직 선명치 못하다면 프랑스 교육계에서 숨길 수 없는

저명인사인 프로테스탄트 뷔송(Buisson)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

 

 

 

 그 일반적 정신이나 원동력적인 방법에 대해서만 말하면 두 가지 프

로테스탄티즘이 가능하다. 그리고 역사는 실제 끊임없이 서로 다투어

평행적인 발전을 한 두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하나는 종교 개혁으로

서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운동의 기점으로 하고 다른 것은 거치지 않

았으나 그것을 넘어서는 안 될 과정의 종점이 된다. 진보적 프로테스

탄티즘은 움직일 수 없게 된, 즉 퇴보하는 프로테스탄티즘에 끊임없는

불안의 근원이 되고 있다.

 

 

 전자는 무제한으로 "주리적(主理的) 자유주의를 실행하는"  것이고,

후자는 "뼈 빠진 잠재적 가톨릭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테스탄트는 이 두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선택은 이미 끝났다…. 나에게는 자각하고 철저한 프로테스탄티

즘은 자유 사상(libre pensee)의 방법 그 자체의 최초의 응용에 지나

지 않는다. 그리하여 철학 체계와 같이 종교관이 분류된 것은 그 방

법에 따라서이다. 세상 사람은 때로는 프로테스탄티즘은 자유 사상에

도달한다고 말하나 그것은 이미 자유 사상 그 자체인 것이다. 적어

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암묵 상태이다. 자기 행위에 이유를

붙여 스스로 심적 상태에 대하여 반성하는 프로테스탄트는 모든 외부

적 권위, 모든 교리적 또는 역사적 경험을 거부하고, 또한 쉽게, 그

대소를 막론하고 모든 초자연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성이 통하는 이

밖의 모든 절대적인 것 혹은 절대자의 이른바 계시를 배척하는 사람

이다. 그렇다면 원컨대 어떤 점에서 자유 사상가는 프로테스탄트보다

도 더 해방된 인간인가를 제시하라(Libre Pensee  Protestantisme

liberal, par F. Buisson et Ch. Wagner, Paris, 1903, p.15).

 

 

 

 과연 그렇다면 우리도 역사가 가브리엘  모노(Gabriel Monod)의 말

을 가지고 결론을 짓자.

 

 

 

 프로테스탄티즘은 자유 사상의 종교적 형성에 나타난 연계(聯繫)

또는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Revue Historique, mai 1892, p.130).   

 

 

 

 프랑스 속담에 "천재와 바보의 거리는 단지 종이 한 장 차이(Du

sublime au ridicule, il n’y a qu’un pas)"라는 것이 있다. 스스

로 경계하지 않으면 이른바 성령과 자유 사상의 거리도 결코 그렇

게 멀지는 않다는 것이다.

 

 

 

 

 

 

 

 

 

 -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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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굿뉴스홈페이지- 가톨릭광장- 천주교묻고답하기- 게시물: 537번 작성자: 오성훈님

 

[考察] 비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해서 - 익명의 그리스도인

 

 

예전에 교리 공부하면서 모아 놓은 자료입니다.

 

 아래 올린 가톨릭 교회 밖의 구원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상세한 고찰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

 

니다.

 

 

 

1. 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과거의 교회입장

 

불과 2000여년 전에 출현한 그리스도 교회는 100만년 내지 200만년

으로 추산되는 기나긴 인류역사에 비해 극히 짧은 역사에 속합니

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교회는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스스로 절대

적 진리의 종교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교회는, 인간이 구원되려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고백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

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출현 이후에는 늘" 교

회 밖에서는 아무런 구원이 없다"는 정식이 교의화 되어 가르쳐져

왔습니다.

 

 3세기에 이미 치쁘리아누스는 그러한 사실을 가르쳤는데, 즉 교회

는 인간이 구원되려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고백

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442년 플로렌스공의회

에서 선포된 교의는 이러한 입장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공의회는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의 말씀으로 설립된 로마 성교

회는’ 가톨릭 교회 밖에서 존재하는 사람들, 즉 이교인뿐만 아니라

유다인도, 이단자도, 열교자(裂敎者)들도, 만일 이들이 죽기 전에

가톨릭 교회에 들어오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고 오히

려’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 영원한 불에 빠지

게 되리라고 굳게 믿고 고백하고 선포한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가톨릭이라는 문에 들어서지 않고는 결코

구원되지 못한다는 강력한 경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어찌보면

너무도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표현이며 자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신자는 물론 타종교인 무신론자들은 구원

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던 배경도 결코 간과할 수

는 없습니다. 즉 이러한 타종교에 대한 부정은 유대인이나 회교도

들의 존재가 교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도 교회는 그 속에서 교회의 구성원들을 잃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또 타종교에 대한 우위를 주장함으로써 타종교의 도전을 막아보려

는 의도에서,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에서 교회를 보호하려는 의도에

서 그러한 입장을 끝내 고수했던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이후의 구원문제

 

이러한 타종교와 무신론자에 대한 배타적인 관념들은 중세를 지나

도록 지속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차츰 완화되었으며 마침내

타종파와 타종교 그리고 타세계관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고 교회 안팎으로부터 평가받고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에 이르러서는 많은 변화를 보게 됩니다.

 

이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聖傳)에 의거하여 나그네 길에 있는 이

교회가 인간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리스

도 한 분만이 우리의 중재자시요 구원의 길이시며, 이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신자가 되는 것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교회는 한편으로는 구원을 받는데에 있어 교회의 필요성을

가르치면서 다른편으로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명백히 가르

칩니다. 즉 하느님은 이교인에게도 충분한 은총을 부여하시고, 이

은총은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도 도달될 수 있다고 가르

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부분적으로 내린다는 주장을 부인하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만인을 위해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사실 교회는 이미 중세 때부터’열세(熱洗:열망의 세례)에 대한 가

르침을 통해서 비 그리스도인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해 왔습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구원에 있어서 교회의 필요성을 가르

치는 한편, 교회 밖에서의 구원 가능성 또한 명백히 천명하고 타종

교와 타세계관과의 허심탄회한 대화와 협력을 추구하는 자세를 보

여 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교회는 극복할 수 없는 오류의 처지에서

자기 탓 없이 교회 밖에서 생활하는 인간에게 구원 가능성을 배제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그들에 대하여 긍정적인 최

종 판결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일은 아직 없습니다. 성서에서도 신

약이나 구약 그 어디서도 타종교에 관하여 절대적으로 명료한 판결

을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상황 속에서 비그리스도인의 구원문제와 비그리스도교

적 집단-타종교 및 무신론 등의 구원의미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체계

있게 구명(究明)한 신학자가 바로 K.라너 입니다. 그는 60년대 초부

터 ’익명의 그리스도인’ 또는 ’익명의 그리스도’론이라는 학설을 통

하여 이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의

이론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3.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

 

 이 이론의 근거는 우선’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 즉 누구나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라너는

인간은 자신이 구태여 의식하지 않아도 또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 행위가 하느님게 지향되도록 창조된 존재라고 합니다. 즉 인간

이 어떤 완전성(선하게 살려는 의지, 올바른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려는 의지)에로 나가기 위한 모든 행위들 속에는 이미 그렇게 되

도록 유도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전제되고 그 모든 행위는 바로

그분께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여러가지 은총

과 사랑 속에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 주시는데 그러한 행위

의 절정은 바로 당신이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며 인

간은 바로 이러한 은총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된 존재라고

합니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구원되

었음이 드러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구원을 위해서는 하느님 은총이 필요한데 비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잠재적 신앙행위(완전성에 나아가기 위한 모든 행위속에 하

느님의 능력이 전제되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 향하게 됨)를 통해

신앙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인간은 누

구나 잠재적으로 이미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믿어야 할 것들을 자신의 의지나 자유,의식 보다 앞서 존재

하는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너는 여기서 ’하느님의 계시인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곧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을 말하며 이 받아들

임은 참된 이웃사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참된 이웃사

랑은 함축적으로 하느님을 긍정하며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포함하고 있고 이 ’이웃사랑’은  바로 ’하느님사랑’ 이라는 것입니

다. 여기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

하는 것이 되는가를 쉽게 설명해 봅시다.

 

하느님은 분명 지극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선 자체이시기에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게,올바르게 생각

하고 또 살아가는 심성을 지니게 마련입니다.(콩을 심으면 콩이나

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

께서 주신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

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

랑이 되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받

아들이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

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

한 의미로서 라너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비그리스도인도 결국 함축

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라너는 타종교와 무신론자들 속에서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보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여기서도 기본적인 전제는 바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 즉 모든 이가 구별없이 구원되기를 바

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타종교나 무신론자들도 제외되지 않

습니다. 즉 어떤 종교이든 한 시대에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하

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하는 정당한 종교는 있게 마련이고 거기

에 소속되어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옛날 조선시대를 보면 당시에는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았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인간이 살아가

는 올바른 길을 가르쳤던 대표적인 정당한 종교는 유교였습니다. 물

론 당시에도 신의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속적인 신앙

도 있었고 그들 나름대로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의 개념은

아니지만 ’천지신명’이라고 해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뭏든 당시에 근간을 이루었던 종교는 바로 유교였습니

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도덕과 윤리가 있었고 올바른 사람의 도

리가 있었으며, 그 도리를 따라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갔던 사

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것인가? 구원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하느님을 믿지않았

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인가?

 

라너는 복음이 한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에로 도달하기 이전까지는

이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 허용에 따라서’ 자기가 생활하는 사회에

서 지배적인 세력을 지닌 종교안에서 구원이 제공된다고 보고 있습

니다. 결국 비록 당시에 하느님의 복음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더

라도 당시에 지배적인 세력을 지닌 종교(유교 )안에서 구원이 제공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종교의 이상과 소속된 사람들의 심성은 선하고 올바른 삶을 지

향하고 있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매

순간 보다 나은 삶 즉 초월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것이므로 그들

은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매순간 끝없이 대상으

로 삼고 살아가는 그 존재 즉 초월자는 바로 하느님이시고 그분은

태초이래 유일한 초월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라너는 무신론 속에서도 익명의 그리스도교를 보고 있습니다.

이 무신론은 어떤 이론이나 교의가 아닙니다. 단지 자신을 무신론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부터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는 구체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여기서 무신론자란 하느님의 존재를 배제하고 그

리스도를 인류의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들의 그러한

태도와 원인, 동기는 다양합니다. 라너는 이러한 유형을 네가지로

보는데 그중에서 양심을 따르는 결단 속에서 신적인 체험들을 자유

롭게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올바로 해석되지 않고 불확실한 처지에

서 사는 사람들에게 무죄한 무신론을 보며,신적인 체험이 잘못 해

석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결단 속에서 양심을 거스르면서 거절하는

사람들은 구원이 배제되는 탓이있는 有罪한 무신론이 된다고 규정

합니다. 이 내용을 예를 들어가며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공자,맹자 시대 이후에는 신개념보다는

도덕과 윤리가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근대에 들어서면

서 공산주의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 에서는 신의 존재를 인

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의 예와같은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을 신개념이 올바로 해석되지 않고 불확실한 처지에

서 사는 사람들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은 하느님의 존재도 모르

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무죄한

무신론자들 이며 이 무신론을 ’익명의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유죄한 무신론은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을 향한 심성을 갖

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유죄한 무신론이

란, 바로 ’스스로 이런 양심을 거스르면서 하느님 존재를 거절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들은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 무신론자가 자기 자신을 적극적

으로 받아들이느냐 않느냐의 여부입니다. 그가 설령 명시적으로 알

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참으로 무조건적인 신의, 절대적 진실성,

타인의 복지를 위한 몰아적 헌신과 이와 비슷한 인간의 기본행동을

알고 있다면, 그는 하느님께  관하여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무신론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지칭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라너의 이러한 이론은 여러가지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비

그리스도인의 구원가능성을 가르치는 교회의 입장과 부합하고, 성

서와 교리전통에 상응한 학설이라고 일단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

면 이제는 교회의 공식적 입장이라 할 수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

회의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먼저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2항 에서는 여러 종교를 언급하면

서 이러한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것을 아무것도 배척하

지 않음과, 그네들의 가르침이 가톨릭의 그것과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는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의헌장 16항에서는 자기의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

로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며 동시에 의식적으로 하느님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종교문제

를 회피하여 양심의 명령을 거스릴 때에는 탓을 면할 길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공의회는 여러 가르침을 통하여 타종교인들에 대한 구원

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 뿐만

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고, 성령께서는 하느님 께서만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신비에 참여할 가능성을 주

셨음을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탓이 없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당신만이 아시는 길로’신앙에로 이끄실 수 있음을 믿어

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단,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

은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즉 구

원은 하느님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고

없고를 결정하여 말할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하느님 외에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양심

에 입각하여 정말 성실하고 부끄러움 없이 모범적으로 산 사람들에

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교의를 말씀드린다면 "가톨릭 이외의 사람들도 구원받는다"가 아니

고 "가톨릭 이외의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

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5. 제기될 수 있는 의문점들

 

자, 이제 비 그리스도인의 구원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가 되셨

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즈음에서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의 측면에서 볼때,  비

록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자신이 정말 부끄러움이 없이 올바로 살

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구원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다

면 구태여 그가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그냥 그대로

옳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는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구태여 다른 사

람들에게 전교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

다.

 

어떻습니까? 이제 이 문제가 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 제 예상이

맞았군요. 그렇다면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지요? 그러면

이 문제를 쉬운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 된다면 구태여 성당에 다닐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나 능력의 차이를 갖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학원

을 몇군데 다니며 기를쓰며 공부해도 3류 대학에 밖에 갈 수가  없

는데, 반면 어떤 사람은 자기할 것 다  하면서 공부하는데 늘 수석

을 하고 일류대학에 진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통 인간은 자

신의 노력에 따라 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더우기 타인

의 올바른 도움을 받는다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음도 사실입

니다.

 

 간단한 예로 운전면허를 생각해 봅시다. 여기  계신 분 중에서 운

전면허를 갖고 계신분이 분명 있을텐데, 보통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자동차학원 입니다. 그곳

에서 운전도 배우고  간단한 정비지식도 배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돈을 들여가며 학원에가서 그것을 배웁니까? 돈도 아까운데  책

을 구입하여 스스로 배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먼저 학원으로 달려갑니다. 그것은 단시일내에 가장 정확하

게 배우고 신속하게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  혼자 올바르게 살아

가려고 노력하는것은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살아가면서

잘못된 것이나 혹은 올바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도

를 받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혼자 노

력하는것 보다 훨씬 쉽지 않겠습니가? 바로 그러한 길을  제시해주

는 곳이 교회이며, 잘  살려고하는 의지를 굳게  해주어 보다 쉽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협력자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운전

연습을 혼자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쉽듯이 교회를

통하여 지켜나갈 도리를 배우고 자신의 노력만이 아닌 하느님의 도

우심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면 훨씬 쉽지 않겠습니까?  

 

2) 그렇다면 신앙을 갖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되는가?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즉 학원

에 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는 없는것입니다.

학원에 등록만 해놓고 게으름을 피우며 잘 다니지도 않고 공부하고

연습하는것을 소홀히 한다면 그런 사람은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어

렵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의 이 의견에 동의하시지요? 예. 그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물어보건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무조건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일반 사회에서도 그러하듯이 신자가 되면 권리도 생기지만 나름대

로 의무사항이 생깁니다. 물론 그것이 교회법과 계명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강요의 의미를 지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자 개

개인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올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안내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것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살아가야만 구원에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학원에 열심히 다녀야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것처럼.... 이

해 잘 되시지요?

 

3) 비그리스도교인도 구원될 수 있다면 구태여 전교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느님은 어떤 사람들이 구원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드렸지요? 예.

아주 잘 기억하고 계시군요. 선한 사람들만이나 아니면 죄인들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이들이  구원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찾은 구원의 길을 다른이들에게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고여있는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항상 신선함

을 유지할 수 있듯이 하느님의 복음말씀도 한곳에 머물러 있게되면

그것은 하느님의 원의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죽은 말씀이 되

고 맙니다. 나 자신만이 구원되는것 보다는  모든사람들이 복된 말

씀을 듣고 함께 구원되어 하느님 나라를 하루속히 앞당긴다면 그것

보다 바람직한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위에서 말씀드린 것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

니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것이 더 유익

하고 또 그 길을 모든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우리는 주님의 가르

침대로 전교에 힘쓰는 것입니다.    

 

4) 만일 타 종파에서도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도입하여 익명의

불교 혹은 유교인 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결국 종교는 하

나라고 말할수 있거나 아니면 종교가 필요없다고 볼수도 있지 않는

가?

 

예.좋은 질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중요한 사실들을 다시한번 인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머리 속

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비그리스도

인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가 가장 정당한 종교라는 사실 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는 자연

종교이지만 그리스도교는 계시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전제로

다음의 예를 잘 들으시면 이 문제는 어느정도 쉽게 이해가 갈수 있

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초월자이신 하느님께 도달하는 최후의 목적지를 부산이라고 가정하

고 그 출발점을 서울이라고 해 봅시다.

 

그 사이에는 많은 길이 있는데 그중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도착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바로 고속도로 입니다.

이 고속도로를 하느님께서 인간들이 당신에게 도달하도록 직접  만

들어 놓으신 계시종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편  국도는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자연종교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부산으로 갈때 (평상시 길이 막힌다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닌경우)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이용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고속도로

입니다. 그러나 지방도로나 국도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부산에 도착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속

도로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다소 늦고 불편함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것을 정리해서 말씀드린 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시를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계시종교 이기에 하느님께

도달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하느

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반면에 그 길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길을 이용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완전함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이 완전함의 차원은 종교마다 다릅니다.그러나 그

것은 결국 올바른 삶을 향하고 있기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렇게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타종교인)

도 구원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즉 계시

종교이기 때문에 가장 정당한 종교가 되는 그리스도교 내에 구원이

있지만(고속도로를 통한 부산도착) 타종교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맞

는 것들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그것에 충실한 사람들에게도 (국도나

지방도로를 통한 부산도착)구원이 배제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한번 확실하게 강조하지만 구원의 결정

은 인간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결정한다는 것입니

다. 즉 그것은 인간의 영역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영역이라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비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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