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마태 23장부터 보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언하시면서 그들이 회칠한 무덤같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간접적인 충고를 하신 것이었다. (23:27, 28) 무덤과 묘에 회칠을 해서, 사람들이 우연히 손을 대어 부정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 관행을 넌지시 언급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겉모습은 의롭게 보이지만 실은 “위선과 불법이 가득”(새번역)함을 밝히셨다. 함축된 의미가 있는 이 충고에 유의함으로써 우리는 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으며 “거짓[위선, 신세]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디모데 전 1:5; 잠언 3:32; 디모데 후 1:5.
마턔23:23.의 이해를 위하여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이 임의로 자신들을 구별짓는 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에게 영적 가치관이 없음을 정죄하신다. 예를 들면, 그들은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고 말한다. 그들은 성전 곧 숭배 장소의 영적 가치보다는 그곳의 금을 더 강조함으로써, 자기들이 도덕적으로 소경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전에 하셨던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이 하찮은 향료 식물의 십일조 곧 십분의 일을 바치는 데는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등한시하는 것에 대해 정죄하신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 소경된 인도자’라고 부르신다. 그들은 하루살이가 곤충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의식상 부정하기 때문에 포도주에서 걸러낸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역시 의식상 부정한 동물인 약대를 삼키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마태 22:41-23:24; 마가 12:35-40; 누가 20:41-47; 레위 11:4, 21-24.
포도원의 품꾼(마태16장)
예수께서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는 말씀을 막 끝내셨다. 이제 그분은 하나의 이야기를 말씀하심으로써 그 점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그분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집 주인이]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집 주인 곧 포도원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다. 포도원의 품꾼은 율법 계약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사도 시대에 살던 유대인들을 말한다. 품삯에 대한 약속은 하루 종일 일하는 품꾼들과만 맺어져 있다. 하루의 일에 대한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다. “제 삼시”는 오전 9시이므로, 제 3시, 제 6시, 제 9시 및 제 11시에 불림받은 사람들은 각각 9시간, 6시간, 3시간 및 1시간만 일을 하게 된다.
12시간 곧 하루 종일 일하는 품꾼은 종교적인 봉사에 계속 종사해 온 유대교 지도자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살아온 동안의 대부분을 고기잡이나 다른 세속 직업에 종사해 온, 예수의 제자들과는 다르다. 기원 29년 가을이 되어서야 “집 주인”은, 그러한 사람들을 모아 제자를 삼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 결과 그들은 “나중 된 자” 곧 제 11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이 되었다.
마침내, 상징적 작업 시간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품꾼에게 삯을 지불할 때가 온다. 나중 온 사람에게 먼저 지불하는 특이한 규칙을 따르게 되는데, 이렇게 설명된 바와 같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결론적으로 예수께서는 이전에 강조하셨던 점을 반복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데나리온을 받는 일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때가 아니라, “청지기”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때인 기원 33년 오순절에 있었다. 예수의 이 제자들은 “나중 온 자” 곧 제 11시에 온 품꾼과 같았다. 데나리온이 성령의 선물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 데나리온은 제자들이 이곳 땅에서 사용할 특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생계 곧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전파하도록 기름부음받는, 영적 이스라엘인이 되는 특권이었다.
곧 이어서 먼저 고용되었던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품삯을 받았다는 사실을 관찰하게 되었고, 제자들이 상징적 데나리온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먼저 고용된 사람들은 성령 및 성령과 관련된 왕국 특권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곧 포도원에 “나중 온” 품꾼들을 박해하는 형태로 불평과 반대를 나타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의 성취는 제 1세기의 그러한 성취에만 국한되는가? 아니다. 현 20세기에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그들의 지위나 책임 때문에 하나님의 상징적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먼저” 고용되었다. 그들은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와 연합한 헌신한 전파자들을,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있어서 도저히 정당하게 임명받았다고 여길 수 없는 “나중 된” 자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 데나리온—하나님의 하늘 왕국의 기름부음받은 대사로서 봉사하는 영예—을 받은 사람들은 교직자들이 경멸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마태 19:30-20:16.
마태 16: 17-19 의 이해를 돕는내용
베드로의 대답에 동의를 표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회중, 신세]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회중을 세울 것이며 죽음조차도 지상 행로를 충실하게 마친 회중 성원들을 속박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다음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
예수께서는 이러한 말씀으로, 베드로가 특별한 특권을 받게 될 것임을 밝히신다.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첫째 자리를 받거나 회중의 기초가 된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자신이 반석이 되셔서, 그 위에 그분의 회중을 세우실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가 받은 세개의 열쇠를 사용하여 여는 일, 이를테면, 여러 집단의 사람들이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열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기원 33년 오순절에, 회개한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첫 번째 열쇠를 사용하였다. 그 직후, 믿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베드로는 두번째 열쇠를 사용하였다. 그 다음 기원 36년에, 베드로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의 벗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세번째 열쇠를 사용하였다.
우리의 영적 필요를 의식함(마태5;1-10)
기원 31년, 예수께서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연설을 하셨습니다. 이 연설을 산상 수훈이라고 하는데,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허리에서 하신 연설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셨다. 그분이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에게로 왔다. 그러자 그분은 입을 여시고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말씀하셨다. ‘자기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첫마디로 하신 말씀을 직역하면, “영에 대해서 가난한 자들은 행복합니다” 또는 “영을 구걸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마태 5:1-3; 왕국 행간역; 신세계역 참조주 성서 각주 참조) 「오늘의 영어 역본」(Today’s English Version)에는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산상 수훈에서, 영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이 훨씬 행복하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죄 많은 상태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근거로 여호와께 용서를 간청합니다. (요한 첫째 1:9) 그렇게 하여 그들은 정신의 평화와 참다운 행복을 발견합니다. “그 거역 행위가 사하여지고 그 죄가 덮여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시 32:1; 119:165.
우리가 자신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면 날마다 성서를 읽게 되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적절한 때에” 나누어 주는 영적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며 그리스도인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됩니다. (마태 24:45; 시 1:1, 2; 119:111; 히브리 10:25)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영적 필요도 의식하여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됩니다. (마가 13:10; 로마 1:14-16) 우리는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해 줄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도 20:20, 35) 우리가 놀라운 왕국 희망에 대해 그리고 왕국이 가져올 축복에 대해 묵상하면 우리의 행복은 한층 더 깊어집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인 “적은 무리”의 경우, 왕국 희망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왕국 정부에 속한 성원으로서 누리는 불멸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누가 12:32; 고린도 첫째 15:50, 54) “다른 양들”의 경우, 왕국 희망은 그 왕국 정부 아래 지상 낙원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요한 10:16; 시 37:11; 마태 25:34, 46.
애통해하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
그다음 행복으로 예수께서 언급하신 말씀은 모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4) 우리가 어떻게 애통해하면서 동시에 행복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분이 어떤 종류의 애통에 대해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 야고보는 우리 자신의 죄 많은 상태가 바로 애통해할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우유부단한 사람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비참해하고, 애통해하고,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애통으로, 기쁨을 낙심으로 바꾸십시오. 여호와의 눈앞에서 자기를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야고보 4:8-10) 자신의 죄 많은 상태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고 여호와의 뜻을 행하여 진정한 회개를 나타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위로를 받습니다. (요한 3:16; 고린도 둘째 7:9, 10)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여호와와 귀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영원토록 그분을 섬기고 찬양하면서 살아갈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깊은 내적 행복을 가져다줍니다.—로마 4:7, 8.
예수의 말씀에는 지상에 만연해 있는 가증한 상태 때문에 애통해하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61:1, 2에 있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주권자인 주 여호와의 영이 내 위에 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온유한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보내어 마음이 꺾인 사람을 싸매게 하시고, ··· 애통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게 하셨다.” 이 사명은 아직 땅에 남아 있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데, 이들은 동료들인 “다른 양들”의 도움을 받아 그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그리스도교국을 상징하는 배교한 예루살렘] 가운데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한숨짓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상징적으로 표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9:4) 그처럼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왕국의 좋은 소식”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마태 24:14) 그들은 사탄의 악한 사물의 제도가 얼마 안 있어 여호와의 의로운 신세계로 대치될 것임을 알고서 행복해합니다.
성품이 온화한 사람은 행복하다
계속되는 산상 수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품이 온화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5) 성품이 온화하면 어딘가 약해 보인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성서 학자는 “성품이 온화한”으로 번역된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성품이 온화한] 사람의 최상의 특징은 자신을 완벽하게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기력한 부드러움이나 감상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이나 수동적인 무저항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제어된 힘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나는 성품이 온화하고 마음이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마태 11:29) 하지만 예수께서는 의로운 원칙을 옹호하는 면에서는 담대하셨습니다.—마태 21:12, 13; 23:13-33.
그러므로 성품의 온화함은 자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실상 사도 바울은 “영의 열매”를 열거할 때 온화와 자제를 나란히 열거하였습니다. (갈라디아 5:22, 23) 성품의 온화함은 성령의 도움으로 배양해야 합니다. 이것은 회중 안팎의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인 특성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동정심 어린 부드러운 애정, 친절, 자기를 낮춘 정신, 온화, 오래 참음을 입으십시오. ··· 계속 서로 참고 서로 기꺼이 용서하십시오.”—골로새 3:12, 13.
하지만 성품의 온화함이 대인 관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주권에 기꺼이 복종함으로 자신의 성품이 온화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면에서 으뜸가는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곳 지상에 계실 때 성품의 온화함을 나타내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셨습니다. (요한 5:19, 30) 땅을 맨 먼저 상속받는 분은 예수이십니다. 그분이 땅의 통치자로 임명되셨기 때문입니다. (시 2:6-8; 다니엘 7:13, 14) 그분은 “공동 상속자”들인 14만 4000명 즉 “왕으로서 땅을 통치”하도록 “인류 가운데서” 택함을 받은 자들과 함께 이 유산을 나누십니다. (로마 8:17; 계시 5:9, 10; 14:1, 3, 4; 다니엘 7:27) 그리스도와 그분의 보조 통치자들은 수많은 양 같은 남녀를 다스릴 것인데, 이들과 관련하여 다음의 예언적 시편이 행복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평화 가운데 참으로 더없는 기쁨을 얻으리라.”—시 37:11; 마태 25:33, 34, 46.
의에 굶주린 사람은 행복하다
그 갈릴리 산허리에서, 예수께서 그다음으로 언급하신 행복은 이것입니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6)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호와께서 세워 놓으신 의의 표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사실상 하느님의 인도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불완전성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여호와 앞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신분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근거로 용서를 구하면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얻을 입장에 있게 된다는 것을 배워 알게 될 때 참으로 행복하게 됩니다!—사도 2:38; 10:43; 13:38, 39; 로마 5:19.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만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6, 공동번역)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 통치”하도록 부름을 받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위하여 의롭다”고 선언받습니다. (로마 5:1, 9, 16-18)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영적 아들로 출생시키고 입양하십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하늘 왕국 정부에서 왕과 제사장이 되도록 부름을 받아 그분과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요한 3:3; 베드로 첫째 2:9.
기름부음받은 자들의 동료들은 아직 생명을 위해서는 의롭다고 선언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의를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2:22-25; 계시 7:9, 10) 그들은 “큰 환난” 때에 구출받을 대열에 있는 여호와의 벗으로서 의롭다고 간주됩니다. (계시 7:14) 의에 대한 그들의 목마름은 “새 하늘” 아래 “의가 깃들여 있을” 새 땅의 일부가 될 때 더욱 충족될 것입니다.—베드로 둘째 3:13; 시 37:29.
자비로운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을 계속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자비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7) 법적인 의미로 자비라는 말은 재판관이 범죄자에게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처벌을 내리지 않고 관용을 베푸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성서의 용례에서 “자비”로 번역되는 원어들은 대개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해 줌으로 친절한 배려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하기에 자비로운 사람은 동정심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예에 나오는 이웃다운 사마리아 사람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자비롭게 행한” 좋은 모범이 됩니다.—누가 10:29-37.
자비로운 사람이 될 때 오는 행복을 경험하려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친절한 행동을 나타내야 합니다. (갈라디아 6:10)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보시고 동정심을 느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마가 6:34) 예수께서는 인류에게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이 영적인 것임을 인식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 즉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 줌으로 동정심 많고 자비로운 사람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태 24:14) 또한 우리는 연로한 동료 그리스도인, 과부, 고아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고, “우울한 영혼들에게 위안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첫째 5:14; 잠언 12:25; 야고보 1:27)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행복을 누리게 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자비도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20:35; 야고보 2:13.
마음이 정결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예수께서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행복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8, 9) 정결한 마음은 도덕적으로 깨끗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아 여호와께 향한 정성에서 하나가 된 마음입니다. (역대 첫째 28:9; 시 86:11) “평화를 이루는”으로 번역된 원어를 직역하면 “평화 조성자”를 의미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평화롭게 지내며, 할 수만 있다면 이웃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지냅니다. (로마 12:17-21) 그런 사람은 “평화를 찾아 그것을 추구”합니다.—베드로 첫째 3:11.
마음이 정결한 사람으로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고 “하느님을 볼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에도 영으로 출생하여 여호와의 “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로마 8:14-17) 그들은 부활되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때 여호와께서 계신 곳에서 그분을 섬기면서 실제로 그분을 보게 됩니다.—요한 첫째 3:1, 2; 계시 4:9-11.
평화를 이루는 “다른 양들”은 그들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는 훌륭한 목자 그리스도 예수의 인도 아래 여호와를 섬깁니다. (요한 10:14, 16; 이사야 9:6)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이후에 있을 최종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지상의 아들들로 입양되어 “하느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로마 8:21; 계시 20:7, 9) 그렇게 되기를 고대하면서 그들은 여호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들도 그분에게 헌신하여 그분을 생명의 수여자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4:8) 고대의 욥과 모세처럼 그들도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욥 42:5; 히브리 11:27)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통해서 여호와의 놀라운 특성들을 지각하며,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 그분을 본받으려고 노력합니다.—에베소 1:18; 로마 1:19, 20; 요한 셋째 11.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기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 애통해하는 사람, 성품이 온화한 사람,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정결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참다운 행복을 발견합니다.
님께서 유익을 얻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