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책(마태복음)에있는 문장들 뜻풀이좀 해주실분.. ( 급함)

성경책(마태복음)에있는 문장들 뜻풀이좀 해주실분.. ( 급함)

작성일 2006.05.17댓글 5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성경 읽어도 뜻이 이해가 잘안갑니다..

 

너무 읽기가 어려워요..

 

밑에 쓴글들을 풀이좀 해주세요..

그리고 무엇에 비유되었는지도 알려주시면 감사요..ㅜㅜ

 

몇개 모르시더라도 아는한까지 답변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당...................

 

감사내공까지 다걸께요..

부탁드려요 최대한 빨리...

 

 

참고로 밑에있는글들은 전부 마태복음입니다.

 

 

5:1 - 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7 - 10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검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3:31 - 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51 - 52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16:17 -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8:12 - 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기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아니니라.

 

20: 1 - 16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같이 하고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 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의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잉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이 더 중한 바 의와 인과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23:2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님께 마태 23장부터 보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언하시면서 그들이 회칠한 무덤같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간접적인 충고를 하신 것이었다. (23:27, 28) 무덤과 묘에 회칠을 해서, 사람들이 우연히 손을 대어 부정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이 관행을 넌지시 언급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겉모습은 의롭게 보이지만 실은 “위선과 불법이 가득”(새번역)함을 밝히셨다. 함축된 의미가 있는 이 충고에 유의함으로써 우리는 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으며 “거짓[위선, 신세]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디모데 전 1:5; 잠언 3:32; 디모데 후 1:5.

 

 

마턔23:23.의 이해를 위하여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이 임의로 자신들을 구별짓는 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에게 영적 가치관이 없음을 정죄하신다. 예를 들면, 그들은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고 말한다. 그들은 성전 곧 숭배 장소의 영적 가치보다는 그곳의 금을 더 강조함으로써, 자기들이 도덕적으로 소경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전에 하셨던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이 하찮은 향료 식물의 십일조 곧 십분의 일을 바치는 데는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등한시하는 것에 대해 정죄하신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 소경된 인도자’라고 부르신다. 그들은 하루살이가 곤충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의식상 부정하기 때문에 포도주에서 걸러낸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더 중한 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역시 의식상 부정한 동물인 약대를 삼키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마태 22:41-23:24; 마가 12:35-40; 누가 20:41-47; 레위 11:4, 21-24.

 

포도원의 품꾼(마태16장)

예수께서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는 말씀을 막 끝내셨다. 이제 그분은 하나의 이야기를 말씀하심으로써 그 점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그분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

예수께서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집 주인이]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집 주인 곧 포도원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다. 포도원의 품꾼은 율법 계약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사도 시대에 살던 유대인들을 말한다. 품삯에 대한 약속은 하루 종일 일하는 품꾼들과만 맺어져 있다. 하루의 일에 대한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다. “제 삼시”는 오전 9시이므로, 제 3시, 제 6시, 제 9시 및 제 11시에 불림받은 사람들은 각각 9시간, 6시간, 3시간 및 1시간만 일을 하게 된다.

12시간 곧 하루 종일 일하는 품꾼은 종교적인 봉사에 계속 종사해 온 유대교 지도자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살아온 동안의 대부분을 고기잡이나 다른 세속 직업에 종사해 온, 예수의 제자들과는 다르다. 기원 29년 가을이 되어서야 “집 주인”은, 그러한 사람들을 모아 제자를 삼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 결과 그들은 “나중 된 자” 곧 제 11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이 되었다.

마침내, 상징적 작업 시간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품꾼에게 삯을 지불할 때가 온다. 나중 온 사람에게 먼저 지불하는 특이한 규칙을 따르게 되는데, 이렇게 설명된 바와 같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결론적으로 예수께서는 이전에 강조하셨던 점을 반복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데나리온을 받는 일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때가 아니라, “청지기”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때인 기원 33년 오순절에 있었다. 예수의 이 제자들은 “나중 온 자” 곧 제 11시에 온 품꾼과 같았다. 데나리온이 성령의 선물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 데나리온은 제자들이 이곳 땅에서 사용할 특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생계 곧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전파하도록 기름부음받는, 영적 이스라엘인이 되는 특권이었다.

곧 이어서 먼저 고용되었던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품삯을 받았다는 사실을 관찰하게 되었고, 제자들이 상징적 데나리온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먼저 고용된 사람들은 성령 및 성령과 관련된 왕국 특권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곧 포도원에 “나중 온” 품꾼들을 박해하는 형태로 불평과 반대를 나타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의 성취는 제 1세기의 그러한 성취에만 국한되는가? 아니다. 현 20세기에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그들의 지위나 책임 때문에 하나님의 상징적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먼저” 고용되었다. 그들은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와 연합한 헌신한 전파자들을,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있어서 도저히 정당하게 임명받았다고 여길 수 없는 “나중 된” 자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 데나리온—하나님의 하늘 왕국의 기름부음받은 대사로서 봉사하는 영예—을 받은 사람들은 교직자들이 경멸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마태 19:30-20:16.

 마태 16: 17-19 의 이해를 돕는내용

베드로의 대답에 동의를 표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회중, 신세]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회중을 세울 것이며 죽음조차도 지상 행로를 충실하게 마친 회중 성원들을 속박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 다음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

예수께서는 이러한 말씀으로, 베드로가 특별한 특권을 받게 될 것임을 밝히신다.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첫째 자리를 받거나 회중의 기초가 된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자신이 반석이 되셔서, 그 위에 그분의 회중을 세우실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가 받은 세개의 열쇠를 사용하여 여는 일, 이를테면, 여러 집단의 사람들이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열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기원 33년 오순절에, 회개한 유대인들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첫 번째 열쇠를 사용하였다. 그 직후, 믿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베드로는 두번째 열쇠를 사용하였다. 그 다음 기원 36년에, 베드로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의 벗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세번째 열쇠를 사용하였다.

 

우리의 영적 필요를 의식함(마태5;1-10)

기원 31년, 예수께서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연설을 하셨습니다. 이 연설을 산상 수훈이라고 하는데,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허리에서 하신 연설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셨다. 그분이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에게로 왔다. 그러자 그분은 입을 여시고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말씀하셨다. ‘자기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첫마디로 하신 말씀을 직역하면, “영에 대해서 가난한 자들은 행복합니다” 또는 “영을 구걸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마태 5:1-3; 왕국 행간역; 신세계역 참조주 성서 각주 참조) 「오늘의 영어 역본」(Today’s English Version)에는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산상 수훈에서, 영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이 훨씬 행복하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죄 많은 상태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근거로 여호와께 용서를 간청합니다. (요한 첫째 1:9) 그렇게 하여 그들은 정신의 평화와 참다운 행복을 발견합니다. “그 거역 행위가 사하여지고 그 죄가 덮여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시 32:1; 119:165.

우리가 자신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면 날마다 성서를 읽게 되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적절한 때에” 나누어 주는 영적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며 그리스도인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됩니다. (마태 24:45; 시 1:1, 2; 119:111; 히브리 10:25)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영적 필요도 의식하여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됩니다. (마가 13:10; 로마 1:14-16) 우리는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해 줄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도 20:20, 35) 우리가 놀라운 왕국 희망에 대해 그리고 왕국이 가져올 축복에 대해 묵상하면 우리의 행복은 한층 더 깊어집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인 “적은 무리”의 경우, 왕국 희망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왕국 정부에 속한 성원으로서 누리는 불멸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누가 12:32; 고린도 첫째 15:50, 54) “다른 양들”의 경우, 왕국 희망은 그 왕국 정부 아래 지상 낙원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요한 10:16; 시 37:11; 마태 25:34, 46.

애통해하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

 그다음 행복으로 예수께서 언급하신 말씀은 모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4) 우리가 어떻게 애통해하면서 동시에 행복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분이 어떤 종류의 애통에 대해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 야고보는 우리 자신의 죄 많은 상태가 바로 애통해할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우유부단한 사람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비참해하고, 애통해하고,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애통으로, 기쁨을 낙심으로 바꾸십시오. 여호와의 눈앞에서 자기를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야고보 4:8-10) 자신의 죄 많은 상태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고 여호와의 뜻을 행하여 진정한 회개를 나타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위로를 받습니다. (요한 3:16; 고린도 둘째 7:9, 10)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여호와와 귀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영원토록 그분을 섬기고 찬양하면서 살아갈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깊은 내적 행복을 가져다줍니다.—로마 4:7, 8.

예수의 말씀에는 지상에 만연해 있는 가증한 상태 때문에 애통해하는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61:1, 2에 있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주권자인 주 여호와의 영이 내 위에 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온유한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보내어 마음이 꺾인 사람을 싸매게 하시고, ··· 애통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게 하셨다.” 이 사명은 아직 땅에 남아 있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데, 이들은 동료들인 “다른 양들”의 도움을 받아 그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그리스도교국을 상징하는 배교한 예루살렘] 가운데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한숨짓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상징적으로 표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9:4) 그처럼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왕국의 좋은 소식”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마태 24:14) 그들은 사탄의 악한 사물의 제도가 얼마 안 있어 여호와의 의로운 신세계로 대치될 것임을 알고서 행복해합니다.

성품이 온화한 사람은 행복하다

계속되는 산상 수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품이 온화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5) 성품이 온화하면 어딘가 약해 보인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성서 학자는 “성품이 온화한”으로 번역된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성품이 온화한] 사람의 최상의 특징은 자신을 완벽하게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기력한 부드러움이나 감상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이나 수동적인 무저항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제어된 힘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나는 성품이 온화하고 마음이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마태 11:29) 하지만 예수께서는 의로운 원칙을 옹호하는 면에서는 담대하셨습니다.—마태 21:12, 13; 23:13-33.

그러므로 성품의 온화함은 자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실상 사도 바울은 “영의 열매”를 열거할 때 온화와 자제를 나란히 열거하였습니다. (갈라디아 5:22, 23) 성품의 온화함은 성령의 도움으로 배양해야 합니다. 이것은 회중 안팎의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인 특성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동정심 어린 부드러운 애정, 친절, 자기를 낮춘 정신, 온화, 오래 참음을 입으십시오. ··· 계속 서로 참고 서로 기꺼이 용서하십시오.”—골로새 3:12, 13.

 하지만 성품의 온화함이 대인 관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주권에 기꺼이 복종함으로 자신의 성품이 온화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면에서 으뜸가는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곳 지상에 계실 때 성품의 온화함을 나타내어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셨습니다. (요한 5:19, 30) 땅을 맨 먼저 상속받는 분은 예수이십니다. 그분이 땅의 통치자로 임명되셨기 때문입니다. (시 2:6-8; 다니엘 7:13, 14) 그분은 “공동 상속자”들인 14만 4000명 즉 “왕으로서 땅을 통치”하도록 “인류 가운데서” 택함을 받은 자들과 함께 이 유산을 나누십니다. (로마 8:17; 계시 5:9, 10; 14:1, 3, 4; 다니엘 7:27) 그리스도와 그분의 보조 통치자들은 수많은 양 같은 남녀를 다스릴 것인데, 이들과 관련하여 다음의 예언적 시편이 행복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평화 가운데 참으로 더없는 기쁨을 얻으리라.”—시 37:11; 마태 25:33, 34, 46.

의에 굶주린 사람은 행복하다

 그 갈릴리 산허리에서, 예수께서 그다음으로 언급하신 행복은 이것입니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6)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호와께서 세워 놓으신 의의 표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사실상 하느님의 인도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불완전성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여호와 앞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신분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근거로 용서를 구하면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얻을 입장에 있게 된다는 것을 배워 알게 될 때 참으로 행복하게 됩니다!—사도 2:38; 10:43; 13:38, 39; 로마 5:19.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만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6, 공동번역)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 통치”하도록 부름을 받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위하여 의롭다”고 선언받습니다. (로마 5:1, 9, 16-18)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영적 아들로 출생시키고 입양하십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하늘 왕국 정부에서 왕과 제사장이 되도록 부름을 받아 그분과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요한 3:3; 베드로 첫째 2:9.

 기름부음받은 자들의 동료들은 아직 생명을 위해서는 의롭다고 선언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의를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2:22-25; 계시 7:9, 10) 그들은 “큰 환난” 때에 구출받을 대열에 있는 여호와의 벗으로서 의롭다고 간주됩니다. (계시 7:14) 의에 대한 그들의 목마름은 “새 하늘” 아래 “의가 깃들여 있을” 새 땅의 일부가 될 때 더욱 충족될 것입니다.—베드로 둘째 3:13; 시 37:29.

자비로운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을 계속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자비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7) 법적인 의미로 자비라는 말은 재판관이 범죄자에게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처벌을 내리지 않고 관용을 베푸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성서의 용례에서 “자비”로 번역되는 원어들은 대개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해 줌으로 친절한 배려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하기에 자비로운 사람은 동정심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예에 나오는 이웃다운 사마리아 사람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자비롭게 행한” 좋은 모범이 됩니다.—누가 10:29-37.

 자비로운 사람이 될 때 오는 행복을 경험하려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친절한 행동을 나타내야 합니다. (갈라디아 6:10)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보시고 동정심을 느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마가 6:34) 예수께서는 인류에게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이 영적인 것임을 인식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 즉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 줌으로 동정심 많고 자비로운 사람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태 24:14) 또한 우리는 연로한 동료 그리스도인, 과부, 고아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고, “우울한 영혼들에게 위안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첫째 5:14; 잠언 12:25; 야고보 1:27)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행복을 누리게 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자비도 받게 될 것입니다.—사도 20:35; 야고보 2:13.

마음이 정결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예수께서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행복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8, 9) 정결한 마음은 도덕적으로 깨끗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아 여호와께 향한 정성에서 하나가 된 마음입니다. (역대 첫째 28:9; 시 86:11) “평화를 이루는”으로 번역된 원어를 직역하면 “평화 조성자”를 의미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평화롭게 지내며, 할 수만 있다면 이웃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지냅니다. (로마 12:17-21) 그런 사람은 “평화를 찾아 그것을 추구”합니다.—베드로 첫째 3:11.

 마음이 정결한 사람으로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고 “하느님을 볼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에도 영으로 출생하여 여호와의 “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로마 8:14-17) 그들은 부활되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때 여호와께서 계신 곳에서 그분을 섬기면서 실제로 그분을 보게 됩니다.—요한 첫째 3:1, 2; 계시 4:9-11.

 평화를 이루는 “다른 양들”은 그들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는 훌륭한 목자 그리스도 예수의 인도 아래 여호와를 섬깁니다. (요한 10:14, 16; 이사야 9:6)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이후에 있을 최종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지상의 아들들로 입양되어 “하느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로마 8:21; 계시 20:7, 9) 그렇게 되기를 고대하면서 그들은 여호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들도 그분에게 헌신하여 그분을 생명의 수여자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4:8) 고대의 욥과 모세처럼 그들도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욥 42:5; 히브리 11:27)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통해서 여호와의 놀라운 특성들을 지각하며,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 그분을 본받으려고 노력합니다.—에베소 1:18; 로마 1:19, 20; 요한 셋째 11.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기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 애통해하는 사람, 성품이 온화한 사람,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정결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참다운 행복을 발견합니다.

님께서 유익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마태복음 5장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전도서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 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 심령의 가난함은 다음의 과정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세상은 악이고 하나님은 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선과 악의 기준을 나타낸 말씀은 잠언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잠언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 되도다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마음의 버림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란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만나는 것입니다. 이같이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갈라내고 찢어지게 하는 것이 마태복음 24장의 큰 환난에서 말하는 마음의 지진입니다.


불러내어진 뒤에는 마음에 있는 세상에 속한 것을 향한 마음을 정결하게 비우기 위하여 말씀을 전하고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 행한 대로 지혜를 깨닫게 하시고 부정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 갈수 있는, 즉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낮아지고 비워내는 것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전도와 고난과 핍박을 통한 소득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령의 비움과 낮아짐을 가르치시는 성령의 법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조건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그 말씀을 따라 비우지도 못하고 낮아지지도 못하고 또 세상에 속한 것을 통하여 번뇌하는 자신을 보면서 점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낮음 과 비움을 가르치시는 성령의 법의 깨달음이 없는 상태에서 낮아짐과 비움을 행하는 것은 사람 스스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인생이 자괴감을 갖는 것과 다르며 자포자기 하는 감전과도 다르며 허무주의와도 다른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버림이고 낮아짐이며 가난함을 느끼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향하여는 가난해지지만 세상에 대하여는 오히려 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들이 세상에서 느끼는 스스로의 나약함이나 초췌함에는 목적이 없으나 말씀을 따라 살며 느끼는 초췌함은 거룩함에 나아가게 합니다.  미물인 나에게 주어진 엄청난 기대에 숨쉬기도 벅찬 경험을 하고 나면 죽기까지 하나님 앞에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감하게 됩니다.

또한 시편의 말씀처럼 즐거워하는 중에도 떨어야 하는 것의 이유를 통감하게 됩니다.


시편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선택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 죽을 때까지 마음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시편 

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저희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도다


# 헛되이 피(희생)를 흘리며 하나님을 섬기며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애통해하는 자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위로는 지혜의 말씀인 성령의 법을 깨닫게 하시고 이전의 그릇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온유란 아무런 상대적 사고에 의한 기대가 사람에게 없는 상태에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들이 생각하는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 그 도란 성령의 법의 도, 즉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전도서말씀을 말합니다. 전도서의 깨달음이 없는 상태에서, 온전히 세상을 향한 것을 비워내게 하시는 말씀을 깨달음 받기 전에  사람의 마음이 사람을 향하여 온전히 온유해 질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치신 후에 다음의 말씀과 같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 땅이란 사람의 마음이며 풍부한 화평이란 마음에 세상을 향한 욕구가 전혀 없이 평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말씀으로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안식에 든 상태를 말합니다. 거룩함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마음에 부정한 세상에 속한 것을 따라감이 없다는 것이고 지혜를 구하며 말씀을 깨달아 가는 과정은 그렇게 온유함과 거룩함과 안식과 평안을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가르침에 의한 비움의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잠언을 보면 악인은 의인을 위한 대속 물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언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이 한마디 말씀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이 내 죄를 대속할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나는 비로소 그들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가 전하고 또 받는 핍박을 기쁘게 여기며 나를 핍박한 그들을 도리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사고하는 사람의 상태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막연히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란 사람의 지적능력의 범위를 벗어나 막연히 무속적 관점에서 갖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가르침은 철저하게 논리적이며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제시 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3차원에서 4차원으로 이어지는 깨달음을 3차원에서 가능하게 하십니다. 육으로 영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성경 외에는 어느 곳에도 그같이 3차원의 상태, 즉 육의 상태에서 영의 상태를 논리적인 사고를 통하여 4차원을 경험하게 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지 그저 막무가내로 내가 제일이라는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그 같은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이 성경에 밖에 없기 때문에 유일한 것이지 ‘하나님은 한분이다.’ 라는 개념에서 유일신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같은 주장을 세상에 하고 자기 또한 무속적 신앙이 아닌 이성적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법안에 들어 있는 구원의 논리를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의 신앙이라는 것은 타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무 논리, 무 이성적 신앙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잠언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 지혜의 말씀을 원하는 자에게 지혜를 원하는 만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두드리라 하셨습니다. 지혜 받기를 위해 두드리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7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또한 ‘무엇이든지’란 의에 속한 것 중에 무엇이든지를 말함이지 세상에 속한 것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서신의 여러 곳에서 썩을 것에 대하여 마음을 두지 말기를 권고합니다. 썩어 사라질 것, 영원하지 않은 것, 지나갈 형적은 모두 육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에 마음을 두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받아 누리고 저것도 받겠다는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성을 드러낼 사악한 인간들을 구원의 범주에서 처음부터 분명히 끊어 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속한 것을 많이 갖고 하나님께 받은 복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우상을 섬기는 자들 일 뿐입니다. 세상의 썩을 것에 주리지 말고 영원한 것, 영에 속한 것에 주려야 합니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잠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


# 위 잠언의 가난함은 지혜에 대한 가난함을 말합니다. 선행이란 인간의 윤리적 선과 악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깨달음 받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에게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다음 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 구하여 받은바 지혜가 있을 때 긍휼히 여김도 가능하고 줄 것도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모르는 자는 줄 것도 없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근거도 없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아는 자가 성령세례를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가르침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전하는 말은 요한의 세례이며 십자가의 도만 아는 것입니다. 공의 실현의 도는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행사가 악하다고 전해야하는데 세상의 행사가 왜 악한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인 잠언의 성령의 법을 알아야합니다. 그것을 모르고 전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 즉 공의 실현에 대한 원리의 이해만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성령의 법이 빠진 공의 하에서 전하던 것은 바로 그렇게 공의가 실현되었다는 사실만 전한 것입니다. 그것에는 구원의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거룩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아서 성화되어가야 한다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성화되어 가는 것인지는 모르는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모르고 저 사람도 모르므로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며 각각 분파 되어 갈라져 갔던 것입니다.

그 모든 흩음이 공의 관장 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른 길만 갔어도 성령의 법은 덮이지 않았을 것이고 없는 줄 알았다면 성경의 가르침대로 구해서 알았어야 했는데 아무도 지혜구함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은 이전 공의 관장 자들을 폐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보신 바와 같이 필자가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잠언의 말씀을 증거로 하여 의미를 기존의 육적인 관점과 다르게 영적인, 성경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전에 있었던 것을 관장 자들이 자기유익을 찾기 위하여 장로들의 유전과 같이 ‘변개’ 한 증거입니다. 그들이 덮었던 것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마음이 온유한 자는 무슨 이유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데 알 수 없음에 대하여 말씀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모두가 모릅니다. 그러면 관장 자들이 모른 다는 사실에 대하여 관할을 받던 자들은 또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또 모르는 관장 자들을 왜 따라갔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그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 사람이 성경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으며, 또 사람은 불완전한 것 아니냐” 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 합리화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완전하게 거룩함에 나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성경을 주신 것이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주신 것입니다. 자기가 나태해서 모른 것을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가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서 이전공의 관장 자들도, 또 그들에게 관할을 받던 자들도 모두 폐함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보겠습니다.


전도서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성경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힘이 있는 곳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제의 교훈에서 구제는 구원을 얻게 하는 말씀의 전함을 말함이지 돈을 주어 구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사람에게 대가를 바라고 말씀을 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므로 영적인 것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영적인 것을 육적으로 해석을 하고 세상에서의 유익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또한 선행이라는 말도 인간의 윤리적 차원을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말씀이 왼손에 관한 말씀입니다.


시편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 복으로 세상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손, 즉 오른 손에만 가득하면 어째서 평온한 것일까요? 지혜의 말씀을 오른손에 받아 갖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라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무엇에라도 나의 마음을 섞지 않고 있는지 각자 자기의 양손을 보십시오. 오른손에 말씀을 많이 받아 가졌는데 왼손을 보니 역시 왼손에도 가진 것이 많다면 그간의 수고한 것이 헛수고가 되지 않게 어서 왼손에 쥔 것을 나누어 주거나 마음에서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에는 오른 손에 가득한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두 오른 손은 비어있는 채로 왼손에만 가득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오른손이 한일이 없으니 왼손에 있는 것은 모두 무엇입니까? 세상에 속한 악을 쥐고 있는 것이고 모두 그 왼손에 가득한 자를 따라 자기의 왼손을 채우기 위하여 길을 가고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한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이 말씀의 본뜻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악에 속하지 않은 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청결한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성령의 법을 다시 회복시키셨으므로 마음이 청결할 수 있는 말씀을 나타내셨으니 그길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모두 마음이 부자가 되어 있어서 버리고 오는 것이 부자 청년과 같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편 

여호와의 거룩한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시편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 왔다가 문둥병의 나음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답례품을 주려고 하자 엘리사가 거절을 합니다. 그때 그 종 게하시가 나아만의 뒤를 따라가 그 답례품을 탐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나아만이 게하시를 만나 그의 신분을 확인하는 말이 “평안이냐?”입니다. 평안하냐? 가 아니라 평안이냐? 이고 게하시는 “평안입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사건의 기록은 하나님의 구원의 궁극적 목적이 평안임을 나타내는 기록입니다. 평안이란 쉼, 안식을 얻은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쉼이고 안식이냐 하면 세상에 속한 악한 것들로부터의 쉼이고 안식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향한 마음으로부터 인생은 고민과 근심을 하게 되고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를 얻습니다.

시편말씀의 ‘땅에서 하늘에서의 날을 산다.’는 것은 하늘, 즉 천국에서의 삶은 땅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뜻입니다.

엘리사가 이 ‘화평케 하는 자’이며 예수님이 또한 그러하며 성령세례를 주던 모든 이들이 그러합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는 말에서 ‘하나님으로’ 가 ‘성령의 법으로’입니다. 성령의 법은 그렇게 화평을 가능하게 하는 ‘교본’입니다. 사람은 논리적 사고를 하고 그 논리적 사고를 통하여 이성을 가진 상태에서 그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만일 이성이 배제 되고 논리적 사고가 배제된 상태에서의 쉼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웃고 다니는 정신 나간 사람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성을 가진 인생을 만드셨고 이성을 가진 인생이 사고하는 능력으로 하나님이 주신 교본을 따라 가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법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영이 살수도 없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을 스스로 따라가고 또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고난과 핍박을 받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미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잠언의 초반에서 나의 신을 부으리라 하셨고 그 신은 곧 지혜임도 확인을 하였고 그 지혜를 받고 또 전하면 그것이 화평을 전하는 것이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칭함을 받은 것이 곧 아들은 아닙니다. 세상에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사람은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므로 지혜로운 자는 초상집을 찾는 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의에 속하면 그 즉시로 사단과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사단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등을 돌리도록 그들의 마음을 조종하고 할 수 있는 한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로 괴롭힙니다. 그 현상이 곧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단이 괴롭혔다는 것은 곧 선을 행하거나 말했다는 것입니다. 선을 말하고 행하는 것을 굽히지 않는다면 당신이 곧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어떤 말을 했을 때 그들이 당신을 핍박하거든 하나님이 그 때 당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 학문적으로 소위 팔복이라고 명명된 것을 다 알아 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 길로 접어드는 한가지의 복을 받은 자에게 일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현상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것에서 열외 된 현상은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여덟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신 것뿐입니다.

결국 성령의 법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무 것에도 해당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법의 존재로 모르는 채 산상수훈이나 팔복을 언급하며 나름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무수한 책들은 다 무엇을 논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자기를 나타내려는 수단으로 자기의 말을 한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의 학문적 이론이 바로 사람의 손으로 조각한 우상입니다.    

 

 

2. 겨자씨 비유


* 마가 4장 30-32절: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내면 좋을 까요? 그것은 마치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됩니다.


* 마태 13장 31-32절: 또 비유를 베풀어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 누가 13장 18-19절: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을 비할꼬, 그것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습니다.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습니다.


*  겨자씨란 ‘말씀’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하여 말씀이 마음에 심겨져 말씀을 따라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고 자기주변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스스로 된  어떤 ‘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을 사람의 마음에 심겨진 ‘말씀’으로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한데 혹 내가 잘못 배웠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마음에 심긴 사람이 말씀을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는 길로 들어가 씨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씨보다’라는 말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것인데 ‘작다’ 하는 것은 상대적인 비교의 바탕 위에서 나올 수 있는 판단입니다. 따라서 모든 씨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모든 사람, 즉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의 눈에 내가 가장 작게 비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람사이에서 ‘높음’을 추구하며 삽니다. 태어나서 받는 교육이 그렇고 교육을 마치고 하는 사회생활이 그렇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남보다 나음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누가복음 16장 15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이 마음에 심긴 후에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이 작은 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첫 과정인 것이며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첫발을 내딛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고난’의 길을 가게 하는 듯이 여겨지지만 사실은 세상에 속한 것들로부터의 ‘쉼’이 그 첫 번째 목적이며 그 다음은 인간의 성정이 아닌 하나님의 성정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백지가 되어 있어야 그 위에 하나님의 성정을 써 넣을 수 있습니다. 내 종이 위에 잡다한 것이 적혀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해야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성경을 주고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 ‘신’의 상태, 즉 그리스도를 맏아들로 한 ‘신의 자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흠이 없는 거룩함에 나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사람이 스스로 신의 위치에 다다를 수 없기에 그것을 돕기 위하여 사람의 종이 위에 있는 낙서들을 지우게 하기 위하여 성령의 법이라는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물론 낙서를 한 것은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한 것이지 하나님이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쉼을 얻는 길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는 말을 하는데 사실 그것은 앞뒤를 모두 잘라먹고 중간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앞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왜 사랑하는지가 먼저 설명되어야 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맨 처음에 설명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헛됨을 자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전도서는 헛되다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하고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글을 읽는 당신은 전도서로 전도를 받지도 않았고 전도서로 전도를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 사랑하신다는 말을 전하고 그 다음에는 ‘그러니 그길로 가자’가 아니라 ‘떨며 두려운 마음으로 가자’가 전도의 결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알 수 있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식을 낳아본 경험이 있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인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사람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신을 만들고 신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흙이 신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흙으로 인형을 만들었는데 그 인형이 어느 날 귀도 팔도 떨어지면 당신은 그 인형을 보고 그 인형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낳은 아이와 같은 동질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신의 속이 상할 뿐이며 곧 그 인형은 버려집니다. 그 차이를 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사람에게 주신 것이고 사람은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미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나는 팔다리도 없고 귀도 잘려나갔지만 버려져 흙으로 돌아가는 인형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아버지’ 라는 말을 함에 있어서 두려움과 떨림이 없는 상태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돌아보십시오. 당신은 과연 자신의 존재를 알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성경의 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자신을 일컬어 ‘미물이다’, ‘티끌 같은 존재다’, ‘죄인중의 괴수다’, ‘벌레만도 못하다’라고 말을 한 것은 과장된 표현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씨는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아무도 그를 자기보다 크다고 생각하지 않게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가면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말씀’인 ‘물’ 혹은 앞의 비유에서 본 것과 같이 ‘습기’를 하나님께 받습니다. 그러면 그 때 내게서 씨인 나를 감싸고 있는 세상에서 가지게 된 껍질이 썩게 될 때 그 마음이 습기인 말씀을 받아 싹이 트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싹이 마음에 트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자기의 껍질을 벗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싹이 트고 자란다는 것은 예언서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새순’이 나는 것이며 레위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듯이 하나님의 지혜로 인하여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순’이라고 이름 하는 자는 그리스도며 나의 생활권에 대하여는 주변의 사람들에 대하여 내가 ‘새순’의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심긴 말씀을 바탕으로 말씀을 따라가며 계속해서 지혜를 구하여 받아 깨닫게 되는 말씀이 곧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법’이며 그 법을 깨달아 나를 ‘산제사’ 드리는 데까지 다다르면 그가 바로 ‘레위’ 즉 그리스도께서 제사장 삼으신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싹이 나고 자라가면 새가 깃들일 정도가 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뿌려진 씨를 먹어버리는 공중의 새는 말씀을 거짓으로 증거 하는 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선지자인 것처럼 위장하고 영을 살리는 말이 아니라 죽이는 말을 합니다. 자기에게로 오면 세상에 속한 것을 하나님께 복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세상에서도 잘 살고 천국도 가자는 두 마음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습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은 영이 죽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라고 하는 세상에서의 길은 이미 당신이 배우고 또 향하고 있는 대로 높음과 채움의 길이며 하나님이 가라고 가르치시는 길은 비움과 낮아짐의 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당신의 마음이 높음과 채움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날고 있다면 당신이 전해들은 말은 거짓증인의 말입니다. 그들은 죽은 짐승의 시체나 작은 짐승을 사냥하여 먹고 사는 대머리독수리 같은 새들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높아지게, 잘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사람 앞의 공표와 밤을 새며, 새벽으로, 혼자서, 무리를 지어서 하나님께 세상에서 잘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썩기를 거부하고 모든 씨 중에 가장 큰 씨가 되기를 바랄뿐인 것입니다.


본 비유에서 깃들이는 공중의 새는 자기를 썩게 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뢰하고 공중의 새를 하나님이 먹이시듯이 자기 또한 먹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기의 목숨을 공중 나는 새처럼 하나님께 의뢰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의 메시지에 사용된 모든 용어들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표현하는 용어를 제외하고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기위해 사용된 용어들은 모두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공중 나는 새’도 그렇고 소금도 정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으면서 싹이 날 수 없는, 멸하는 의미로도 사용이 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믿음’ 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이는 것, 눈앞에 있는 것에 대하여는 ‘믿는다.’라는 표현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밥을 먹고 있으면서 “나는 내가 밥을 먹고 있다고 믿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내일 일을 모르고, 하나님을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이 말씀만을 보고 “그렇게 될 거야”라고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사람이 인식 가능한 잘 먹고 잘사는 ‘현실적인 천국’입니다. 성경에도 없는 용어인 ‘천년왕국’이론과 육체가 아닌 영체의 부활을 이미 서신에서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인식 가능한 육적 ‘육체의 부활’을 말하는 것과 역시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현실적인 하늘로부터의 그리스도의 재림’등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단도 공중의 새이고 세상에 속한 자기를 부인한 자도 공중의 새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거짓 선지자도 참 선지자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겉으로 표방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이므로 그들을 따라간 것은 일차적으로 ‘모르고 따른 것’이기 때문에 ‘사냥꾼의 올무에서 나와라, 벗어나라’는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공중 나는 새가 된 자들을 성실히 먹이시고 보살피신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거룩한 땅에 들어갔을 때 모세는 그의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땅과는 분리가 안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는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신발을 신은 그 상태가 공중에 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처음 보낼 때는 신발을 ‘신지 말고’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신고 가라” 하시고 또 신발을 더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씀의 신발 외에 다른 신발이란 인간의 사사로운 지혜나 지식의 신발을 말합니다. 말씀을 처음 받았을 때는 이전에 신고 있던 신발, 즉 이전의 낡은 가죽 부대를 버리고, 신을 벗고 세상으로 가서 세상이 악하다고 증거 하는,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하여  비움을 행하라는  전도를 행해야합니다. 채움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비움을 전해야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과 부딪히지 않으면 핍박을 받을 수 없고 핍박을 받지 못하면 지혜의 깨달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는 벗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의 전도는 사람을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핍박을 받아 자기를 연단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믿음이란 혼자말로만 중얼거린 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전하는 행함으로 믿음의 증거를 보여야하고 전하려면 자신의 속에 있는 세상에 속한 것을 향한 마음을 비워내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그다음에 전할 수 있으므로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발을 벗고 다니며 지혜를 깨달아 새 공의, 새 신발이 마련되면 그때부터는 다시 언제나 신어야 합니다. 이렇게 같은 신발이라도 자라가야 하는 순서를 따라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깃들이는 것은 전도자가 전도를 하여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공중 나는 새가 되어 나의 나무에 머무르며 나의 제자가 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도구 삼아 말씀을 배우고 그 역시 나와 같이 나무가 되기 위해서 깃들이는 것입니다.

도를 가르치는 것은 육신의 눈을 기준으로 할 때는 다시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전도명령입니다. 다 장성하기까지는 내 나무에 ‘깃들이다가’ 다 자라면 다른 곳으로 가서 그 땅에 심겨져 또다시 그도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무의 수가 늘어난 것을 ‘산’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래서 선민의 산은 나무 없는 대머리산인 ‘자산’이 되었다고 예언서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명의 형태만 보아도 마가와 마태와 누가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모르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유하여 설명을 할까?”하시고

마태는 천국의 복음을 마음으로 받는 사람들이므로 즉시 ‘천국은’이라고 전제하고 설명하십니다.

또 누가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서 알고는 있으나 실제로 가본적은 없으므로 설명을 하기는 하되 무엇으로 비유를 할 필요는 없으므로 비유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 성경의 말씀에 비하여 설명을 하십니다.

마가는 땅에 심기는 것으로, 마태는 말씀을 받은 자기의 마음 밭으로, 누가는 그들이 이미 아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채소밭으로 설명을 하십니다. 그들이 아는 채소밭의 의미는 구약성경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채소는 뒤의 신명기 설명을 참고하십시오).


마가는 ‘심긴 후에’이며 마태는 ‘자란 후에’이고 누가는 ‘자라’입니다. 마가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먼저 심겨야 하며 마태의 말씀을 듣는 이미 심긴 사람들은 자란 뒤라야 하며 누가의 말씀을 듣는 이미 율법의 지팡이를 잡고 있는 선민들은 이미 선택받아 심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라기만 하면 됩니다.


마가는 큰 가지를 냅니다. 나무란 전도자를 말합니다. 마태는 ‘나무’가 됩니다. 하지만 마가는 나무가 되지 않고 ‘큰 가지’가 됩니다. 누가는 나무가 되는 것은 같으나 말미가 다릅니다. 마태는 ‘되느니라’라고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미 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채전에 심어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 이미 나무된 선민들 중에 제자들이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깃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2절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할 것이다.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으라.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며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며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이며 채소 위에 단 비이다.

시편 104장 13-14절

여호와께서 샘으로 하여금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시어 들판의 각 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 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무 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합니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습니다.


* 하늘이란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펼치신 하나님의 뜻, 즉 공의를 말하며 구름이란 비를 내리는 것입니다. 구름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을 보호하시는 뜻이며 비란 은혜로 주어지는 인간생존의 근원입니다. 물이 없으면 채소가 자라지 못하고 채소가 자라지 못하면 인류는 멸망합니다. 복잡한 DNA구조를 풀어내는 세상이 되어 있고 컴퓨터가 등장하여 온 세상을 순간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놀랍게 문명이 발달되었지만 땅에서 자라는 채소가 없으면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또 비나 구름의 근원은 역시 ‘해’에서 시작을 합니다. 해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에게 부여하신 ‘말씀’을 뜻합니다. 그것이 곧 ‘빛’입니다.

바울은 만물에 하나님의 뜻이 모두 나타나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와 같은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이 바울의 말입니다.


로마서 1장 18-2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려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리인 성경의 말씀을 비 진리와 섞어 말하므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질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나중에 이런 핑계를 댈 것입니다. “하나님 제게 언제 그런 길을 알려주셨나요?”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성경의 말씀을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제 전하려는 성경에 있는 말씀이 이미 모든 만물에도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미 성경에 마련해 놓으신 진리의 길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중에 하나님께 아무런 핑계를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상에 속한 것을 달라고 기도하고 또 세상에 속한 자기를 부인하라는 복음을 들어도 감사는커녕 무슨 하나님이 고통만 주느냐고 말하고 여전히 헛된 인생을 잘 사는 것에만 마음이 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엔 진리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똑똑한 줄 알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미련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가져다가 비 진리로 바꾸어 말하며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높아지고 잘 사는 것이 진리라고 가르칩니다. 서로 경쟁적으로 높아지려고 서로 가짜라고 말하다가 결국에 둘 다 가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성경에 마음을 둔 것이 아니라 학벌이 좋거나 말 잘하는 사람을 따라가거나 비 진리적, 비이성적 이적이나 표적을 나타내는 사람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곳에 모이니까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학벌을 따고 비이성적 이적을 나타내려 애쓰다가 그리스도의 말씀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게된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하는데 참 딱한 현실입니다.

※ 가능한 개역성경의 원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풍년과 흉년, 건기와 우기, 기근과 이른 비와 늦은 비, 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성경의 동* 식물의 생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경의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 또한 서신에서 만물에 대한 이치로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칩니다.

-------------------------------------------------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 당신이 만일 이전공의 관장 자였다면 당신만큼 옛것이 새것과 비교했을 때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잘 아는 사람은 없기에 이전에 당신의 집안에 사람들이 있었듯이 여전히 그러한 집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당신은 좋은 일군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 있게 행하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옛것이란 행위의 율법이며 새것이란 예수님의 마음의 법입니다.

 

 

-------------------------------------------

 

나머지 말씀은 너무길어서 올리지 않습니다.

이글의 출처로 가시면 비유는 비유대로 가르침은 가르침대로 모두 해제되어 있는 게시판이 있습니다. 회원가입안하셔도 모든 글을 읽고 퍼가시는 것도 가능하니 가셔서 유용하게 쓰십시오.  말씀전체에 대한 해제가 실려 있는 까페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5:1 - 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7 - 10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검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산산 수훈의 팔복 내용으로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13:31 - 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천국의 비유로

겨자는 배추과의 일년생 또는 이년생 풀로서, 씨가 많고 향기롭기 때문에 양념과 약재로 사용되며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이용된다.  겨자씨는 다른 모든 씨앗 보다 작은 것(32절)이지만 생장력(生長力)이 대단하여  보통 1m 정도로 크게 자라며, 특히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약 3m 가량 자라 마치 나무처럼 무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는 그것을 정원수로 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겨자씨를 예수께서 천국에 비유하신 것은 겨자씨가 지니는 몇 가지  특성 때문이다.  (1) 은밀성.  겨자씨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성장해 나간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확연히 노출되지 않은채 조용히 성장해 간다.  (2) 확장성.  겨자씨와 마찬가지로 천국이 비록 현재는 미약하고  보잘
것 없게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나중은 창대해질 것이다.  (3) 변화성.   겨자씨는
크기에 반해 놀랄만한 변화를 남긴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
의 아주 작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크고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마  17:20).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시작과 성숙한 끝맺음의 유기적 결합(Dahl)
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고대하는 바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크고 웅장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예수의  사역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임하였다.  또한 살아있는 씨앗처럼 생명력을 가진 복음의  결
과로서의 교회는 예수 - 12제자 - 120문도에 의해서 발전되어 현재는 온 인류의  구원
을 가능케 하는 큰 나무로 성장하게 되었다.

 

13:51 - 52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 이 난해한 비유에 관한 해석은 참으로 다양하다.  

(1) '천국의 제자가 된 서기관'이라고 말하는가하면(Jeremias),

(2) '기독교 공동체에 연합하게 된 유대 서기관'(Hummel),

(3) 교회 안에서 마치 유대 서기관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 율법사'를 가리킨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Kilpatrick).  

일반적으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란 예수 당시의 서기관들의 역할, 즉 율법 및 경전에 대한 해석과 율법 교육은 물론하고 그 이외에도 하늘나라에 대한 교훈을  깨닫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한 가지 더 붙는 새로운 의미에서의  서기관을 가리킨다.  결국 이 말은 '모세 율법의 제자된 유대 서기관'과는 질적으로  다른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그에 준하여 생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가리킨다.  실로 그들은 예수의 발 아래서 겸손히 배우고 소박한 마음으로 그 진리를 수용한 자들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해를 겸비combination)한 랍비가 유대인들의  서기관보다 더 탁월하고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일 것이다.
   새 것과 옛 것 -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깨달을 수도 없었던 것이었으나 예수께서 새롭게 계시하신 새 진리가 새 것이라고 한다면 오래 전부터 알려지고 깨우쳐진 옛 진리, 곧 구약의 율법을 옛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나치게 자구(字句)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키지 못했고 전체 율법 속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간과(overlooking)해 버렸으며 다만 교조적(敎條的)으로 옛 것(율법과 전승)만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고 암송하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천국의 제자'된 자는 이러한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 예수로 인해 시작된 새 것과 전해오던 옛 것을 동시에 취합(聚合), 활용할 수  있는자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사실은 계시는 오직 하나이며 그 계시의 초점은 "옛 것"을 성취하며 새롭게하는 '새 것'에 있다는 점이다(Bonnard).   실로 구약의 율법과 신앙은 물론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들도 모두 '새 것'을 이끄신 예수의 인격안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새롭게 변화된 시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꺼내어 온다.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 여기서 '곳간'은 데사우로스)이란 말은 주로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말이다(12:35).  따라서 본문은 천국 제자가 된 서기관이 그의 마음, 곧 그의 지각과 인격과 그 존재  자체 내에서 그 무엇을 꺼내어 온다고 이해해야 한다.  특별히 본문의 곳간은 진리가  전수되고, 보관되어 오는 곳으로서, 구약과 신약을 모두 포함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사건의 역사가 쌓인 마음의 창고이다.  따라서 집주인과 같은 주의 제자들은 주께서  맡기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비밀들을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끄집어 내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제공하고 그 의미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16:17 -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 본문은 사 22:22에서 유래한 내용으로서 그곳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절대 주권을 예언하고 있다(계 3:7). 한편 여기  '열쇠'는 청지기로 임명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창고관리에 대한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표식, 문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천국'은 지금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교회, 곧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 실로 예수께서는 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장차 세워질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대상에 대해서 몇 가지 대별(大別)되는  견해가 있다. (1)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으로서 베드로 한 사람에게 그  약속이  주어졌고, 역사적으로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그 권한이 계속 부여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하여 천년 왕국 기간 동안 이 세상을 통치할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A.J. McClain).(3) 특히 그 중에서도 베드로에게 더욱 많은 권한이 주어졌다는 견해이다(Plummer). (4) 12사도를 대표하는 베드로와 12사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18:12 - 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기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아니니라.

 

천국시민의 윤리관적인 입장를 언급하고 소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맗나다.

만일 찾으면 - 이 말은 잃어버린 양 가운데는 찾지 못할 양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실로 잃어버린 양이 자신을 찾는 주인의 애절한 음성을 외면하고 끝끝내 제 고집대로 행동한다면 그 주인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 겸손히 주인의 음성을 듣는 양에 대해서만은 주인은  어떤 대가르르 치러서라도 찾고 찾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이다.
   더 기뻐하리라 - 아흔 아홉마리보다 한마리를 더 아낀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이 안전한 곳에 있는 아흠 아홉마리보다 더 불쌍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큰 배려를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건강한 자녀보다 병약한 자녀에게 더  큰 애정과 보살핌을 주듯이 말이다. 더욱이 '찾는 수고'의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찾은 기쁨'이 상승하게 마련인 것이다.

 

20: 1 - 16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포도원"을 천국(교회)에 비유함은 구약에서부터 내려오는 어법이었다.  왜 포도원은 그렇게도 많이 천국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는가?  그 이유는, (1)팔레스틴 지방에는 무엇보다도 포도원이 많은 까닭이며, (2)또 그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것을 심은 자 곧, 농부가 있음이, 마치 교회의 설립자(하나님)와 관리자(그리스도)가 계심과 같기 때문이다.  (3)포도원은 목재를 얻으려 함이 아니고 열매를 얻기 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은 영적 열매를 얻으려고 하시는 까닭이다.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잉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이 더 중한 바 의와 인과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박하와   십일조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지목(指目)된다. 비판의 내용은 그들이 사소하고 세분된 규정과 전통에는 아주 민감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십일조 - 소출의 10분의 1을 바치는 율법의 규정으로서 그 기원은 족장 시대에  두고 있었는데(창 14:20;28:22) 모세의 계명에서 법제화되었다(레 27:30;신  14:22-27).
이 십일조의 근본 취지(趣旨)는 (1)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인정과
(2) 이웃 사랑(구제) 및 성전 운영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발적 사랑의
예물로서가 아닌 강제적 의무 규정으로 고착화 시켜, 이것을 통해 유대인됨과 율법 완
수자됨의 규준(規準)으로 삼았다.
   박하 - 헬라어로 '헤뒤오스몬'이라고 하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mint)이다. 이는 유월절 쓴나물의 양념으로 쓰였으며(출 12:8) 그 향내로  인해 회당의 방향제(芳香劑)로 쓰였다고 한다.
   회향은 헬라어로 '안네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나리과의 식물이며 양념에 사용되는 식물로서(anise, dill) 약품과 향료에도 사용된다.
   근채는 '퀴미논'이라고 부르는 식물로서 이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양념이나 약품으로 사용된다. 근채를 다른 말로 구민초(cumin)라고도 한다.이상에서 나열한 식물 종류는 이스라엘의 농작물 중  매우 사소한 수확물이다. 따라서 이와같이 사소한 종류를 나열한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레 27:30의 규례(規例)에 따라 얼마나 십일조에 철저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비판은 이렇게 세세한 십일조 생활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에 나오는 그들의 행실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비적으로  그들의  십일조 생활을 강조한다.
    의(義) - 헬라어로 '크리시스'라고 부르는 이 말은 종말적 심판의 의미를 나타내기도하고 재판,  판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옮음(right)와,  공의(justice), 의(righteousness)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에서의 '의'는  정당하고 공정한 뜻으로서 '정의'라는 의미와 더불어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간 관계의 올바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를  분명하게  하도록  돕는다(신 16:19;사 1:17;렘 5:13).
   인(仁) -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는데  공동번역에서는  '자비'(mercy)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자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또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22:37-40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信) -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 신뢰, 신용(faith,  truth), 약속, 서약, 증거, 담보, 보증, 확신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히 11:6)와 이웃에 대한 신뢰(시 15:3,4)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가지 종류의 단어, 의(義),인(仁), 신(信)의 개념은  설명할  수 있거나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속에서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십일조는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보일 수 있지만 의(義), 신(信), 인(仁)은 삶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예수의  치밀함을  엿보게 된다. 예수께서 보신 유대인의 십일조 행습(行習)은 무조건 비판을 가할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모두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의미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는 예수의 선언(5:1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는  형태로 번역되어 있다.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23:2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이 본문은 일곱번째 저주 선언문이다(29-36절).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지만 그 전체 내용상 그릇된 율법주의에  심취(心醉)한 유대인들이라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 추앙(推仰)받은 사람이나 영웅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유대교의 전통적 관습이었다. 더욱이 성전 금고의 일부분이 그 일에 사용될 만큼 전국민의 관심사였다. 그런 까닭에 유대 사회에는 자연 무덤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많은 기념비와 무덤들(스가랴, 압살롬,  여호사밧, 야고보 등)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게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근본적인 동기는 그 선열들의 발자취를 좇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를 고쳐나갈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위선된 자신들의 신앙을 드높이려는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이상입니다.  아구 분량이 많아요. 그래도 한번 읽어보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성경은 비유입니다.

비유를 풀려면 지혜를 가져야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순전(단순하고 순수하게) 생각해야합니다.

남을 돕는 마음을 가지고 읽어야합니다.(직접 도우면 그 글이 이해될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해설(설교) 된 것은 단지 참고일 뿐입니다.

그리고 중심은 이스라엘의 백성과 유대의 땅입니다.


그러면 몇가지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것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이 복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실행하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천국과 같은 세상을 말하며 그것을 맞이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돈 많다고해서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으로 피자 불러먹고 패스트 푸드를 즐기면 천국과 같은 세상이 오기도 전에 어려운 때가 오면 화를 입습니다.

어른들의 경우는 부동산 투기하고 외식을 즐기는 것을 심령(생각)이 가난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남의 어려움을 지나치는 사람은 어려움(고난)을 무시함으로써 돕지 않게되고 그로인해 자신이 어려울때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옛날 것만 중시하는 사람도 옳지 않고 새것만 좋아하는것도 옳지 않습니다.
항상 모든 것을 준비하고 필요할 때 내어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오래 믿는다고 잘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은 가르침이 알려졌을 때 바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확한 뜻은 항상 나중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5:1-10

이 말씀을 산상 수훈 또는 행복 선언 이라 하며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따르는 활동을 (자기 만의생각이나 지식이나 이론 말고)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임하심을 선언ㄴ 하시는 것이며 세계속에 하느님 자신의 정의를 현존케 합니다.

한가지 예만 든다면 하느님 의 정의를 추구 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남한 사람 애통 하는 사람 온유 한 사람 등등 의 사람 들 이라는 것이며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 말로 하느님 나라에서 행복을 영원 토록 누릴 수 있는 사람 이라는 것 입니다.

 

 

13: 31-32

이 세상 구조와 활동 앞에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들인 우리들의 활동은 힘 없어 보이고 우습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활동 은 성장 하고 온 세상에 미칠 것 입니다.

 

16:17-19

이 세상 어느 누구 어는 교파가 뭐라 해도 이는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께서 지옥의 문이 처 이기지 못할 베드로의 반석 위에 (교도권과 교정권 위에) 교회를 세우심을 선언 하시는 말씀 입니다

 

18:12-14

공동 체 내에서 명성과 권력을 추구 하는 자들이 깔보기 때문에 멀리 하거나 떠나갔던 사람들의 회심을 기뻐 해야 하고 맞아 들여야  한다는 말씀  입니다

 

20:1-16

하느님 나라 에서는 따돌림 당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인간이 정의라고 생각 하는 모든 기준을  뛰어 넘는  하느님의 선 하심과 자비 로우심에 참여할 똑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기와 질투가 들어살 자리가 없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공덕을 쌓았다고 자부 하는 사람 일수록 이는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3:23

모든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 하시고 단죄 하십니다

이는 개신교와 천주교이 구별이 따로 있을수 없으며 중세와 현세의 구별도 없는 것 입니다

 

23:29

율법 주의와 형식 주의적인 종교는 구원의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자기 무덤을 파도록 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말씀 입니다

 

*비유에 관하여

비유 (比喩)

1. 의의: 비유란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어떤 사물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도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셨다. 특히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심원한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들려주셨다.

2. 분류: 율리허라는 사람은 복음서의 비유들을 ‘비유(比喩)’, ‘이야기’, ‘예화(例話)’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비유’를 ‘은유나 직유’로, ‘이야기’를 ‘비유’로 바꾸기도 한다.

예수님 비유의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의 참모습을 보여주고(포도밭, 양과 은전, 두 아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며(구마)’,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 완전히 드러날 것(심판 관련 비유)’으로 요약된다.

3. 비유의 예: 1) 순수한 비유(比喩) - 모래 위에 세운 집(마태 7), 빵을 구하는 친구(루가 11),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루가 18), 돈놀이꾼(루가 7), 무자비한 종과 잃은 양(마태 18), 두 아들을 둔 아버지(루가 15), 두 아들(마태 21), 악한 소작인들(마르 12), 큰 잔치(마태 22) 등이 있다.

또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루가 13), 열 처녀(마태 25), 포도원 주인(마태 20), 달란트(마태 25), 약은 청지기(루가 16), 씨 뿌리는 사람 및 저절로 자라는 씨앗(마르 4), 밀과 가라지 및 그물(마태 13), 겨자씨와 누룩(마르 4), 보물과 진주(마태 13), 최후 심판(마태 25) 등이 있다.

2) 직유(直喩)나 은유(隱喩) - 소금(마르 9), 빛(마르 4), 눈은 몸의 등불(마태 6), 무화과나무(마르 13), 밭가는 종(루가 17),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마태 11), 간청하는 아이들(마태 7), 제자와 스승(마태 10),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마태 15), 인간을 더럽히는 것(마르 7), 숨겨진 것은 드러남(마르 4), 두 주인(마태 6), 나무와 열매(마태 7), 집주인(마태 13) 등이 있다.

그리고 독수리, 도둑과 집주인, 충성스럽거나 불충한 종(마태 24), 집주인의 방문(마르 13), 의사의 자기 치유(루가 4), 의사와 병자, 신랑, 헌 옷과 헌 술부대(마르 2), 망루 쌓기와 전쟁 준비(루가 14), 베엘제불(마르 3), 재판받으러 가는 길(마태 5), 잔치 자리(루가 14), 상 밑 빵 부스러기(마르 7) 등이 있다.

3) 예화(例話): 착한 사마리아인(루가 10), 바리사이와 세리(루가 18), 어리석은 부자(루가 12), 부자와 라자로(루가 16) 등이 있다.


Matthew 2, Luke 2 (마태복음 2장...

... 10문장 입니다. 성경책이 있다면 쉽게 할 숙제이지만 저는 불교이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더욱 빨리 주시고, 내용이 적합하면 많은 내공...

[★급함 내공35★] 중고등학생부 교회...

... 김장로 : 아, 잠깐 조용히 좀 해 주십쇼. 질문할 것부터... 마태복음? 5다시 43? 이씨 : 그.... 그건... (잠시 눈을 감고... 손에 검정색 성경책이 들려져 있는 거 보니까 교회...

급함)내공25)인터넷 강의추천좀 해주세요

... 모의고사 문제풀이가 여러개있는데 아무거나 선택해서... 우선 영문장700(심화)추천해드립니다... 외국어 영역... 추천해주실겁니다...물론 처음강의듣는다는 말도 하세요......

자살하면지옥갑니까(성경적으로풀이부탁)

자살하면지옥갑니까(성경적으로풀이부탁) (사람을 이 세상에 있게도 하고 없게도 하는... 되어 있는 것도 모른 채 절대로 알 수도 없고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으며...

기독교(개신교)도로써 바라본 개신교의...

... 기도제목은 마태복음 6:33절(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흥분을 해버려서 문장이 뒤죽 박죽 입니다. 이제부터... 교제를 성경책(신약4복음서 와 바울서신 등)으로 선택 하여...

하나님을경외하는법

... (1) 복음서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약어표는 성경책 앞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단락표시로 ○이 있는데 이는 구절 또는 문장과...

조지뮬러에 대해 역사적평가 좀 해 주세요

조지뮬러에 대해 역사적평가 좀 해 주세요 급해요ㅠ... 성경책을 읽기보다는 놀음 빚을 갚기 위해 자기 손목... 죠지가 카이저를 둘러보자 그는 마치 몇 동안 기절해 있는...

한국 일부 교회의 잘못된 구원관 비판.

...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8:1) 2.... 길지만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구원의 조건... 마태복음 10장 32절부터 33절까지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기독교 성욕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마태복음 5장 28절: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안해주실까요 담배도 피고요 이 두문제로 너무 힘들어요... 나와 있는 것 같이 사람의 힘으로 귀신을 물리칠 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