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

마태복음 14장

작성일 2004.04.01댓글 2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마태복음 14장 전체 주석이 아니라요 13절에서 36절까지의 주석이 필요해요.ㅜ_ㅜ

이 시대의 배경이나 그런 것도 조금 필요한데 도무지 찾지를 못하겠습니다.+_+

시간이 여유가 없기에 내공도 더=_=많이 드리겠습니다.

도와주세요!!!ㅠ0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마태복음 14장 13절부터 36절까지의 라이프스타디의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참고바랍니다.

Ⅰ. 하늘에 속한 왕으로 하여금 빈들로 가시게 함

지금까지 우리는 영광에 이르는 노정에 있는 처음의 두 정거장을 보았다. 첫째 정거장은 타고난 지식에 의한 배척이고 둘째 정거장은 정치에 의한 배척이다. 문화와 정치에 의한 배척은 둘 다 하늘에 속한 왕으로 하여금 물러가도록 강요했다. 그분은 침례자 요한의 죽음을 들으셨을 때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사 홀로 빈 들에 가셨다』(14:13). 모든 종교적인 사람들과 문화적 배경이 있는 사람들과 정치적인 사람들의 배척 때문에 하늘에 속한 왕은 그들을 떠나 빈 들로 가셨다. 이것은 그 후부터 그분이 종교적이고 정치적이고 문화적 배경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문화가 없는 빈 들에 홀로 자신을 감추려 하셨음을 가리킨다. 그분이 배를 타고 이렇게 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교회를 통해 이렇게 하고자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화된 세상의 배척 때문에 주님은 언제나 교회를 통해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세계로부터 문화가 많지 않은 곳에 자신을 홀로 감추신다.
14장 13절의 후반절에서는, 『무리가 듣고 여러 도시들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늘에 속한 왕을 좇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도시들을 떠남으로써 주님을 따랐다. 왕이 그들을 방문하기 위해 그들의 도시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빈 들에서 그분을 따르기 위해 문화의 배경을 가진 그들의 도시들을 떠났다. 모든 시대를 통해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문화가 있는 세상 밖에서 하늘에 속한왕을 따르기 위해 문화적인 영역을 떠났다. 우리는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 중에 있다. 그분이 계신 곳으로 우리는 간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배척을 통과하여 그분을 따라 빈 들로 간다.


Ⅱ. 필요의 부족

A. 저녁에 황량한 빈 들에서

많은 경우 우리가 배척을 체험하고 그것을 통과했을 때 우리는 기쁘고 해방된다. 그러나 이 해방을 체험한 후 우리는 궁핍하고 생계를 위한 어떤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 부족하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 빈 들에 왔던 무리의 상황이었다. 나는 하늘에 속한 왕을 따라 빈 들에 왔던 무리가 행복하고 기쁜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들은 너무 행복해서 심지어 먹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15절은,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말하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무리가 빈 들에 있고 때는 저물었으므로 무리에게 먹을 것이 필요함을 예수님께 상기시키기 위해 아마 베드로가 앞장섰을 것이다. 그는 주님께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라고 제안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마치, 『주여, 지금은 저녁입니다. 무리를 여기에 머물게 하지 말고 그들을 보내소서.』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선한 마음에서 나온 좋은 생각이 아닌가? 오늘날의 베드로들은 모두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교회 생활 안에서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가끔 제안을 한다. 그런 베드로가 되지 말라.
B.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보기를 배움

마태의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책의 교리적인 배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많은 독자들은 마태복음을 이야기책이나 역사책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의 책이 아니라 교리의 책이다. 그러므로 16절에서 주님이 『그들이 갈 필요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신 말씀은 의미가 깊다. 제자들은 주님께 무리를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가서 스스로 음식을 사 먹게 하시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주님은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의 관념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율법의 원칙이다. 그러나 주님의 관념은 사람들에게 누릴 것을 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원칙이다. 제자들이 제안한 것은 전적으로 율법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16절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을 제지하셨다. 복음서들은 베드로가 제지된 것을 여러 번 기록한다. 그는 말에서 제지되는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체험이 많았다. 그가 산에서 장막 셋을 지을 것을 제안했을 때 그는 하나님에 의해 제지되었다. 성전을 위해 반 세겔을 받는 자에게 그가 주님도 내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주님에 의해 제지되었다. 주 예수님은 항상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제지하셨다. 만일 당신에게 그런 선한 마음이 없다면 주님은 당신을 제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에게 선한 마음이 있다면 주님에 의해 제지당할 준비를 하라. 당신의 선한 마음은 천연적이기 때문에 제지될 필요가 있다. 주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을 제지하셨다. 주님은 마치, 『무엇을 얻기 위해 뭔가를 하라고 무리에게 요구하지 말라. 그것은 율법이다. 너희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은혜이다. 나는 모세와 같이 사람들이 무언가를 얻으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려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는 은혜와 함께 왔다.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 뭔가를 준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왔지만 은혜는 나와 함께 왔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너희들은 아직도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하라고 말하는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너희 제자들은 완전히 틀렸다. 사람들이 배고픈가? 확실히 배고프다. 나는 이것을 안다. 나는 너희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시점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희들이 드러나게 되도록 저녁이 오기를 기다렸다. 만일 내가 무리의 필요를 위해서 어떤 것을 했다면 너희들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가끔 주의 회복 안에서 이런 경우가 발생한다. 주님은 천연적인 사람들의 인내를 끝내기 위해서 신중하게 어떤 일을 하셨다. 그러나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을 참을 수 없다. 가끔 끝나기 몇 분전에 그들은 제안을 한다. 만일 그들이 몇 분만 더 기다렸다면 그들의 어리석음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규례와 율법의 요구로부터 벗어나기를 배워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은혜를 알고 은혜 베풀기를 배워야 하며 은혜의 원칙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 주기를 배워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뿐이니이다』(17절)라고 말했다. 당신이 은혜를 베풀려고 할 때 당신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볼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단순히 요구만 한다면 당신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스스로, 『나는 얼마나 현명한가! 아무도 저녁이 온 것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안다. 심지어 나는 예수님께 지시할 수 있다. 주의 회복 안에서 나는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저것을 하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때를 알고 상황을 알고 말할 것을 알고 일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안다. 심지어 나는 어떻게 주 예수님께 요구할 것인가도 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제가 율법 아래 있을 때 저는 눈먼자이고 제 자신을 모릅니다. 율법 아래서는 저의 가난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은혜의 말씀을 하시는 주 예수님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은혜로운 말씀은 제 가난을 드러냅니다. 즉시 저는 제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봅니다. 저는 오직 요구하는 입만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요구할 수 있고 지시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지 만 줄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그다지 많이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베풀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가난이 드러난다. 우리에게는 남에게 줄 것이 없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들이 먹을 것도 없음을 본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이것을 다만 주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오천 명과 여자들과 아이들을 먹이신 이야기라고 생각지 말라. 당신이 이 기적의 이야기에는 익숙하더라도 이것이 포함한 계시나 빛은 여전히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비춤 아래 있다. 우리 모두는 베드로들이다. 우리가 할 일을 알고 있고 남에게 할 일을 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베드로이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항상 『주여, 저에게는 줄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 큰 필요가 있으나 저는 채워 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율법의 날이 아니라 은혜의 날임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줄 것이 없습니다. 은혜는 저를 드러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율법 아래 있는가, 은혜 아래 있는가? 만일 당신이 율법 아래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현명한 생각과 통찰력과 지식과 남을 지시하는 능력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어떤 것을 가졌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당신을 은혜 아래 놓으실 때 당신의 가난함과 무익함이 드러날 것이며, 당신에게 줄 것이 없고 심지어 당신 자신도 먹을 것이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의 원칙과 은혜의 원칙을 분명하게 본다.

C. 하늘에 속한 왕에게 모든 것을 드림

17절에 언급된 떡과 물고기에 대해 주님은 18절에서 『그것을 내게 가져 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가진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가져 갈 필요가 있다. 주님은 자주 다른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분께 드린 것을 사용하신다. 오늘날 주님께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도 역시 이런 방법에 의해서이다.
당신은 주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당신에게는 최소한 당신 자신이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릴 수 있음을 인해 주님을 찬양하자! 우리에게는 오직 가련하고 추한 자신밖에 없으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릴 수 있다. 심지어 아픈 사람도 자신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이든 그분께 드리자. 주님은 우리의 헌신을 필요로 하신다. 만일 우리가 가진 것을 우리의 소유 안에 붙잡아 놓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우리의 손을 떠나 주님의 손안으로 옮겨진다면 그것은 큰 축복이 될 것이다. 당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라. 당신이 가진 것을 그분께 드리라. 그럴 때 주님은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실 길을 갖게 되시며 당신은 그 축복에 포함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부분의 말씀에 있는 교리를 보아야 한다. 그 교리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어서는 안되고 은혜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의 가난과 무익함을 드러낸다. 아직 우리는 주님께 드리기 위한 우리 자신을 갖고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그분께 드릴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가진 것을 그분의 손안에 놓는다면 그것은 큰 축복이 될 것이다.

D. 하늘에 속한 왕이 기적적인 축복에 의해 모든 필요를 돌보심

1. 사람들을 먹이심

19절은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먹이셨다. 그분은 무리에게 생명 공급을 분배하셨다. 무리를 잔디위에 앉히심으로써 그분은 사람들을 질서 있게 정돈하셨다. 이것은 주님의 지혜와 질서 있음을 보여 준다. 하늘을 우러러 봄으로써 하늘에 속한 왕은 그분의 근원이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이심을 가리켰다. 그런 후 그분은 떡과 물고기를 축복하시고 그것들을 쪼개셨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가져온 것은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기 위해서 쪼개어져야 함을 가리킨다.
주님은 그분께 헌신된 것은 무엇이든지 쪼개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헌신한 후에 그분에 의해 우리가 쪼개질 것임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주여, 제게 긍휼을 베푸사 저를 쪼개지 마소서. 주여, 제 아내가 저를 조각조각 부수고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저를 보존하시고 저를 아내의 쪼개는 손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해 왔다. 많은 자매들 또한 그들의 남편의 쪼개는 손에서 구원받기를 기도해 왔다. 그러나 당신이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쪼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빵이기보다 고무와 같다. 빵을 쪼개기는 쉽지만 고무를 쪼개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쪼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가끔 주님은 또한 우리를 끊어내신다. 나는 내 자신의 경우를 알기 때문에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무엇이든지, 당신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주님께 드려져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그분의 손안에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모든 것이 쪼개어질 것이다. 주님은 그분의 손안에 놓여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쪼개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쪼개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헌신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효과적이 아니다. 우리의 헌신은 오직 주님에 의한 우리의 쪼개어짐에 의해서만이 역사한다.
주님께서 떡을 떼신 후에 그분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떡은 제자들로부터 온 것이며 그들은 그 떡을 주님께로 가져갔다. 주님에 의해 축사되고 떼어진 후 그 떡은 무리에게 분배되기 위해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왔고 그 떡은 무리에게 큰 만족이 되었다. 이것은 제자들이 축복의 근원이 아님을 가리킨다. 그들은 단지 주님에 의해 사용된 통로였으며 주님이 사람들의 만족의 근원이셨다. 떼어진 떡은 제자들에게 주어졌고 제자들은 그것을 무리에게 분배하였다. 이 떼어진 떡은 모든 배고픈 사람들에게 만족이 되었으며 거기에 큰 축복이 있었다.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똑같다. 의심할 바 없이 이 나라에서의 주님의 회복 안에는 큰 축복이 있어 왔다. 더욱이 우리는 얼마의 사랑스런 자들이 그들 자신을 주님께 드렸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손에서 그들은 모두 쪼개어졌고 그 쪼개진 조각들은 축복을 가져 왔다.

2. 부활 안에서

요한복음 6장 9절은 우리에게 이 떡 다섯 개가 보리떡임을 말씀하신다. 상징적으로 보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레 23:10). 그러므로 보리떡은 우리에게 음식이 되시는,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떡은 식물의 생명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생성(生成)하는 방면을 상징하는 반면에 물고기는 동물의 생명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구속하는 방면을 상징한다. 우리의 영적 배고픔을 만족시키려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생명뿐 아니라 그분의 생성하는 생명도 필요하다. 이 두 방면이 작은 것들인 떡과 물고기에 의해 상징된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왕이 이 시대에 위대한 왕으로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 위에 왕노릇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먹이는 작은 음식으로 왔음을 가리킨다.

3. 넘쳐흐름

20절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게 거두었으니』라고 말한다.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다는 것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무한하고 무진장한 분일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공급이 풍성하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을 가리킨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여자들과 아이 외에 남자들만 약 오천 명을 만족케 했다(21절). 우리가 주님께 드린 것은 매우적을지라도 축복은 크고 넘쳐흐르고 남으며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클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드린 것은 고갈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풍성하고 심지어 남도록 축복하시기 위해 주님에 의해 사용되며, 이것이 주님의 놀라운 역사라는 것을 간증하기 위해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 이 이적의 기록에서 성령의 의도는, 하늘에 속한 왕을 따르는 자들의 진정한 필요는 그들의 배고픔을 채울 합당한 음식이라는 것을 그분의 감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것을 몰랐고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도 몰랐다. 하늘에 속한 왕은 이것을 알았으며 그들의 진정한 필요와 그 필요에 대해 그분이 준비하신 것으로 그들에게 인상 주기 위해 이적의 일을 행하시고자 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이 이적에서 상징된 대로 그들의 영적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그분의 부활의 생명이었다.
하늘에 속한 왕이 행하신 것은 또한 이 배척하는 세상 가운데서 그들이 그분을 따를 때 주님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가리킨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헌법에서, 왕국 백성은 무엇을 먹을까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그분의 말씀과 일치한다(6:31-33).
배척받으신 왕을 따르는 데 있어서 우리는 많은 종류의 배척을 통과해야 한다. 배척받은 후에 우리는 부족하게 되며 어떤 필요가 있게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필요나 그것들에 관해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들을 돌보시며 심지어 날이 저물 때 빈 들에서도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길을 갖고계신다. 단순히 당신의 어떠함과 당신이 가진 것을 그분의 손안에 드려서 그분으로 하여금 드린 것을 쪼개시도록 하고 그 쪼개진 제물로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도록 하라.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만족을 누릴 것이며 넘치는 잉여분이 있게 될 것이다.
14장 14절부터 21절까지에서 배척받으신 왕이 하신 것은 단지 사람들을 먹이는 이적이 아니었다. 여기의 이적은 배척받은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적당하고 충분하고 풍성한 생명 공급을 가지셨음을 나타낸다. 그분은 우리의 외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를 돌볼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배고픔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명공급을 하신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배척을 통과한 후 우리가 부족함이 있는 상황 안으로 왔음을 간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돌보셨으며 우리는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물질적인 공급을 주의하지 않았고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을 만족시키기 위한 생명 공급에 주의했다. 우리가 배척받은 왕을 따라서 영광에 이르는 노정을 갈 때 우리는 생명 공급을 누리고 있음을 간증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먹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누림 후에도 여전히 열두 바구니에 가득한 생명 공급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노정이 매우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배척과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분이 우리의 생명 공급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외적인 필요를 돌보시며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풍성한 생명 공급을 심지어 넘치도록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는 내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는 풍성하고 만족하며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다. 그분에게서 우리는 물질의 공급과 생명의 공급을 얻는다. 우리가 그분을 따를 때 심지어 빈 들에서도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생명의 근원으로 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소유하는 한 모든 것이 좋다. 우리는 배척을 환영하며 어떤 의미에서 심지어 부족함이 있는 상황도 환영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필요는 그분께 우리를 위해 뭔가를 행하실 뛰어난 기회를 드린다.


Ⅲ. 길에 있는 폭풍

우리가 영광에 이르는 노정에서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먼저 배척을 체험하며 그런 다음 우리의 매일의 필요의 부족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그후 우리는 길에 있는 폭풍을 체험한다(14:22-33). 14장에 있는 폭풍은 배척받으신 왕을 따르는 노정에 항상 문제가 있을 것임을 나타낸다. 13장 끝 부분부터 16장 끝 부분까지에는 많은 소극적인 것들이 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영광에 이르는 노정에서 우리가 배척받으신 왕을 따를 때 좋은 것이라곤 없다. 모든 것이 문제처럼 보인다. 당신은 배척받기를 좋아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일상생활을 위한 필수품의 부족을 누리는가? 당신은 바다의 폭풍에 감사하는가? 만일 우리의 노정에 배척과 매일의 필요의 부족과 폭풍이 없다면 사실상 우리가 이 노정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영광에 이르는 노정에 있다면 우리에게 문제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A. 제자들이 배-교회-를 타고 감

22절은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라고 말한다. 갑자기 주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분을 떠나도록 재촉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가지 않으셨다. 주님은 아버지께 은밀히 기도하는 시간을 더 얻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그분을 떠나도록 재촉하셨다. 23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분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주님이 그들을 보내시기 전에 제자들은 주님의 공급을 누림에 참여했다. 필요의 부족은 매우 기쁜 체험을 가져 왔다. 제자들은 주님의 공급을 누리고 있었으며 그들은 매우 행복했다. 만일 우리가 거기 있었다면 우리는 확실히 기뻤을 것이다. 내가 믿기로, 베드로는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는 『요한, 이것이 놀랍지 않은가? 주님이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하신 일을 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때 주님은 마치, 『말하지 말라. 배를 타고 나보다 앞서 건너편으로 가라. 너희들이 누림 있는 시간을 가진 것을 알지만 그러나 지금 너희들은 가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제자들은 아마, 『주님, 우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때 주님은 『아니다, 너희들만 가라. 나는 기도하러 산에 가겠다.』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많은 경우 주님을 즐겁게 누린 후에 즉시 주님은 우리에게 바다에 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를 떠나신다. 이것은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묘사이다. 주님은 산으로, 즉 하늘로 가셨다. 그러나 그분이 그분의 교회에게는 바다로 앞서가라고 지시하셨으며 바다에는 때때로 역풍과 폭풍이 있다.

B. 하늘에 속한 왕이 산에서 기도하심

23절은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날이 저무니 거기 혼자 계시더니』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며(3:17) 사람의 위치에 서 있는(4:4) 하늘에 속한 왕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 은밀히 기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 목적은 천국의 수립을 위해 아버지와 하나 되고 땅에서 무엇을 하든지 아버지와 함께 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이것을 빈 들에서 하시지 않고 홀로 아버지를 접촉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을 떠나 심지어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떠나 산에서 기도하셨다.

C. 제자들이 탄 배가 바람이 거슬리므로 파도를 인해 시달림

24절은 『배가 이미 육지에서 여러 스다디온이나 떠나서 바다 가운데 있어 바람이 거슬리므로 파도를 인하여 시달림을 당하더라』고 말한다. 주님은 배가 폭풍으로 시달림을 당한 사실을 확실히 아셨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그분보다 먼저 가라고 재촉하셨을 때 그분은 폭풍이 오고 있음을 미리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기도하러 산에 가셨다. 오늘날 주 예수님은 산에, 즉 하늘에 계시며(롬 8:34, 히 7:25) 교회는 바다에 있다. 매일매일 우리는 역풍을 만난다. 우리가 처음 아나하임에 온 그날부터 역풍이 불어 왔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교회-배-는 지속적으로 시달림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주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의 근원이다. 우리는 역풍이 얼마나 강하든지 상관하지 않는데, 이는 주님이 산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 폭풍은 반대자들의 통제 아래 있지 않고 주님의 발아래 있다.
역풍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들로 인해 방해받을 필요가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간증할 수 있다. 내가 매일밤 잠을 푹 자고 매일 오후에도 달콤한 낮잠을 자며 걱정이 없음을 내 아내가 간증할 수 있다. 가끔 내 아내는, 내가 문제들로 인해 걱정하지 않음을 보고 놀란다. 나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으므로 잘 쉬는 것은 내 의무이다. 우리의 운명은 주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역풍과 반대는 그분의 발아래 있다. 주님은 높은 산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중재하고 계신다. 그분은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 아신다. 그러나 그분은 바람을 보고 웃으시면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작은 바람아, 너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너는 내 교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사실상 그들은 바로 나다. 나는 여기 하늘에 있지만 또한 나는 그들과 함께 있다.』 높은 산과 괴롭히는 파도와 역풍과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그림인가! 바람과 파도는 모두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함께 역사한다. 당신은 반대자들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가? 확실히 그러하다. 우리는 아나하임에서 반대자들이 우리를 위해 한 일이 얼마나 유익이 되었는지를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심을 믿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나를 정죄했다. 그들은 내가 너무 내적이어서 항상 여러분에게 하늘을 쳐다보지 말고 당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주목하라고 말했다고 나를 비난한다. 우리는 진리의 두 방면을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주목해야 하며, 『오, 주예수여, 당신은 제 안에 거하시는 것이 기쁘십니까? 당신은 이 장소를 누리십니까?』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볼 필요가 있다. 그분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아야 한다. 만일 그분이 멀리 계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누릴 수 없다. 둘째로, 주님을 신뢰하기 위해서 우리는, 권위를 갖고 앉아 계시며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는 곳인 하늘에 계신 그분을 주목해야 한다. 그분은 속히 우리에게 오실 수 있다. 할렐루야,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며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계신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본다면, 배가 그분의 배요 교회가 그분의 교회라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어떠한 폭풍에 의해서도 시달리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바다는 배를 손상시킬 수 없다. 반대로 바다는 배를 섬긴다. 우리가 보겠지만 바람과 파도는 베드로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D. 하늘에 속한 왕이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심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25절). 로마 시대에는 밤에 파수를 보았는데 일몰부터 일출까지 네 번의 파수가 있었다. 첫 번째 파수는 저녁 파수이고, 두 번째는 자정 파수, 세 번째는 닭 우는 때의 파수, 네 번째는 새벽 파수이다(막 13:35). 네 번째 파수, 즉 사경은 아마 오전 3시부터 6시까지일 것이다. 25절은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오셨다고 말한다. 그분의 제자들이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주님은 파도 위를 걸으셨다. 이것은 그분이 우주의 창조자이며 우주의 통치자임을 증명한다(욥9:8).

E. 하늘에 속한 왕이 그분의 임재로 말미암아 제자들에게 용기를 줌

주님을 유령이라고 생각하여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소리질렀다(26절). 『예수께서 즉시 일러 말씀하시되 용기를 내라 내니 두려워 말라』(27절). 하늘에 속한 왕은 그분의 임재로 말미암아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셨다. 그들이 주님을 유령 또는 망령이라고 오해했을 때 그분은 『나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격려하셨다.

F. 제자들이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에 의해 폭풍 속에서 걷기를 배움

28절은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하되 주여 만일 당신이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라고 말한다. 주님께서 『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29절). 오직 베드로만이 이렇게 할만큼 담대했다. 나는 우리 중에 누가 베드로만큼 담대했는지 의심스럽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파도 위를 걸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우리의 행동이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어떤 방향으로 가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결정하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 믿음은 단순히 우리가 매우 약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감히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그 말씀을 받았으며 그것에 근거하여 행동했고 파도 위로 걸어갔다. 당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자신을 시험한다면 당신의 믿음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스스로 『나는 믿음 안에서 강한가? 내 믿음은 충분한가?』라고 묻지 말라. 만일 당신이 스스로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은 즉시 파도 밑으로 빠질 것이다.
30절은 베드로에 대해 『강한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소리질러 말하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주님의 말씀 안에 있는 믿음으로 파도 위를 걸었다(29절). 그러나 그가 강한 바람을 보았을 때 그의 믿음은 사라졌다. 그는 환경을 보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걸어가야 했었다(고후 5:7). 베드로가 도와 달라고 소리질렀을 때,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시되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절)라고 하셨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오라』(29절)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 말씀 위에 서서 의심하지 않아야 했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를 책망하셨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에서 오고 주님의 말씀에 입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이 있는 한 우리는 단순히 그분의 말씀을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배 안에, 즉 주님의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어떤 폭풍에 의해서도 괴로워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없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없더라도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산에서 중재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다. 심지어 그분이 배로 오고 계시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분이 산에서 중재를 하시든 파도 위로 걸어서 우리에게 오시든 우리는 혼란 되지 말아야 한다. 많은 때 우리는 내적으로 평강을 가질 뿐 아니라 심지어 그분으로부터 파도 위를 걸으라는 말씀을 받는다. 우리가 그런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단순히 폭풍이 있는 바다를 걸어야 한다. 반대와 핍박에 괴로워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는 그분을 만나기 위해 걸어갈 수 있으며 심지어 모든 반대를 통과하면서 말씀을 근거로 걷고 있다.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베드로가 믿음이 적다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배 안에 있었던 모든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는 첫번째로 주님의 임재를 누린 사람이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너무 느리고 소심하다. 다른 사람들이 너무 빠르다고 비판하지 말라. 당신은 가끔 빨라질 필요가 있다. 당신은 베드로와 도마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가? 베드로는 담대했지만 도마는 소심했고 조심스러웠다. 교회들 안에 주의 깊고 조심성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베드로는 조심스럽지 않았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배에서 물위로 내렸다. 조심성 있는 사람들은, 『그러나 베드로는 그를 구원해 달라고 소리질러야 했었다. 우리는 도와 달라고 소리지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여기 배 안에서 안전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배 안에서 안전하지만 당신은 주님의 임재 안에 있지 않다. 당신은 첫 번째로 주님의 임재 안으로 돌아간 베드로와 같지 않다.
베드로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빠른 사람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반면 소심한 사람은 결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소심한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주님의 임재 안에 오지도 않는다. 조심성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몇 년이 지나도 모든 것이 조용하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은 항상 일을 저지른다. 그들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만 주님에 의해 구출되며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조심성 있는 당신들 중 얼마는 작은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있으며 구원해 달라고 주님께 소리지르며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조심성 있는 사람들과 빠른 사람들 중 누가 주님을 더 누린다고 생각하는가? 그 대답은 확실히 빠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심한 사람들은 『잠자자. 빠르건 늦건 주 예수님은 오실것이다. 우리는 물에 들어가서 문제를 일으키고 구출해 달라고 소리지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빠를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조심하고 조용하면 주님은 오실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한 면으로는 조심성 있는 사람들이 옳고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이 틀리다. 그러나 담대한 사람들은 소심한 사람들보다 주님에 대한 누림이 더 많다. 그러나 결국에는 주님의 임재가 베드로와만 함께한 것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모든 제자들과 함께 했다.

G. 하늘에 속한 왕의 임재로 인해 폭풍이 그침

32절은 『배에 함께 오르니 바람이 그치는지라』고 말한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이 기적은 주님이 하늘과 땅의 통치자일 뿐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영광의 노정에서 그분을 따르는 동안 어려움을 당할 때 그들의 어려움을 돌보심을 증거한다. 우리가 배 안에서 주님을 소유할 때 바람은 그친다. 이 장에 기록된 두 기적은 그리스도가 종교적인 사람들과 정치적인 사람들에 의해 배척을 받았을 때 그분과 그 분을 좇는 자들이 황량한 빈 들에 있었고 폭풍이 있는 바다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고 어려움을 뚫고 그들을 인도하실 수 있다.
주님의 임재는 폭풍을 멈추었다. 나는 이것을 여러 번 체험했다. 내가 지난 50년 동안 얼마나 많은 폭풍을 통과했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폭풍이 멈추었다. 어떤 폭풍도 삼 년 내지 오 년 동안 계속되지 않았다. 사실상 삼 년 내지 오 년은 긴 시간이 아니다. 주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께 겨우 몇 분에 불과하다. 놀라지 말라. 모든 폭풍은 멈출 것이다.

H. 하늘에 속한 왕을 경배함과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함

주님께서 바람을 멈추게 하신 후,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말하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33절).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식하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하심을(요 5:18)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신성을 인정했음을 가리킨다(마 1:23, 3:17).
14장 22절부터 33절까지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초상화를 본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와 같고 다른 사람들은 도마와 같다. 어떤 사람은 빠르고 담대하며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실수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소심하며 조심성 있고 잠을 잔다. 소심한 사람들은 담대한 사람들에 대해, 『어느 형제는 너무 빠르다. 나는 이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틀렸다. 그러나 나는 느리고 조심성이 있다.』라고 불평할지 모른다. 나는 빠른 사람들과 조심성 있는 사람들에 관하여 교회들 안에 있는 상황에 대해 매우 분명하다. 나는 담대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과 조심성 있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을 안다. 나는 모든 조심성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조심스럽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 사람들은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 파도 위를 걷도록 일으켜질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주님을 배로 모셔 올 것이다. 조심성 있는 사람이나 소심한 사람이나 느린 사람이나 주의 깊은 사람들은 결코 주 예수님을 배로 모셔오지 않는다. 조심성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주님은 친히 배로 오셔야 한다. 만일 주님이 이렇게 하신다면 주님은 조심성 있는 사람들이 자고 있음을 발견하실 것이다. 아무도 주님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후 조심성 있는 사람들은 『주여, 당신이 여기 계십니다. 이것은 상당히 좋습니다. 이것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다시 잠을 잘 시간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느리고 주의 깊은 사람들은 어떤 사고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는 빠르고 담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빠르고 담대하게 배에서 내려 바다 위를 걷는 데 있어서 우리는 네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행동하며 그분으로부터 말씀을 듣기 전에는 행동하지 않는다. 둘째로, 우리의 방향은 주님 자신을 향한다. 셋째로,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며, 넷째로, 우리는 배로 되돌아온다. 만일 우리가 이 네 가지를 주의한다면 심지어 틀리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옳을 것이다.

Ⅳ. 치료의 능력

예수님과 제자들이 게네사렛 땅에 오신 후 그곳 사람들은 모든 병든 자를 주님께 데려왔다. 36절에서는 『다만 예수의 옷깃만이라도 만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만진 자들은 다 완전히 나음을 얻으니라』고 말한다(36절). 치료하는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닌 그분의 옷깃에서 나왔다. 주님의 겉옷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들을 상징하고 옷깃은 하늘에 속한 다스림을 상징한다(민 15:38-39). 하늘에 속한 다스림을 받는 그리스도의 행동들로부터 나온 것이 치료하는 능력이 되는 미덕이다. 민수기 15장에 따르면, 옷깃은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걷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덕을 상징한다. 옷깃은 파란색 띠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그들의 매일의 행함이 하늘에 속한 색인 파란색에 의해 암시된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다스림에 의해 조정됨을 계시한다. 예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이렇게 걸어가셨다. 그분의 매일의 걸음은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명령에 의해 조정되었다. 그러므로 그분께는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흘러나오는 미덕이 있었다.
교회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치료는 주 예수님의 내적 존재로부터 나오는 주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의 인간 생활의 미덕으로부터 나오는 기초적인 산물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역풍의 중심부에 있으며 바다 위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한다. 그분의 임재는, 병든 자들에게 도달하여 그들을 치료하기 위한 그분의 미덕이 흘러나오는 길을 준비한다. 이런 종류의 치료는 신성한 능력에 의한 기적적인 치료와는 다르다. 예수님의 옷은 그분의 신성을 상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분의 인성의 의로운 행동들을 상징한다. 그분의 인성은 파란색 끈, 즉 하늘에 속한 다스림에 의해 조정 받는다는 표시를 지녔다. 이것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미덕을 산출했다. 이런 종류의 미덕은 예수께서 임재하시는 합당한 교회 생활 안에서만이 표현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2장 2절은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이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다고 말한다. 예표론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는 주님의 거룩한 생명을 나타내고 잎사귀들은 주님의 인간 행동들을 나타낸다. 주님의 거룩한 생명인 열매는 우리를 양육하기 위한 것이고 주님의 인간 행동들인 잎사귀들은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을 것인데, 즉 그리스도의 인성의 미덕이 사람들을 치료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배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 주님의 인간 행동의 미덕이 매우 유용하게 되었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병자들이 치료되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임재와 함께 합당한 교회 생활을 할 때 우리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높이 올려진 인성이 있다. 이 높이 올려진 인성은 그리스도의 옷깃에 의해 상징된 미덕을 가지고 있다. 만일 교회 사람들인 우리가 합당한 교회 생활을 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산다면 우리는 그분의 높이 올려진 인성을 살아 나타낼 것이다. 이런 종류의 생활 안에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는 미덕이 있을 것이다.
예표론에서, 배가 해안에 도착한 후 주님이 방문하신 땅은 천년 왕국의 예표이다. 천년 왕국에는 수많은 치료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 왕국에서 있게 될 치료는 오늘날 체험되어야 한다. 교회 사람들은 천년 왕국을 미리 맛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을 치료할 수 있는 미덕을 갖기 위해서 예수님의 높이 올려진 인성을 살아 나타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치료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타락된 성품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교회 생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둠과 타락 안에 있다. 그러나 만일 교회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높이 올려진 인성을 살아 나타낸다면 이것은 그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 치료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심지어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치료될 것이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결론은 14:23에 있습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내적평안과 확신입니다.이것은 본인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야만 된다는 것입니다.오병이어의 기적은 보잘것없는 도시락을 싸가지고왔겠지만 사람들이 많은 군중들앞에 보잘것없는 자기것을 감히 내어놓지 못하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의 초라한 도시락일망정 떼어 축사하시고 내어놓자 그제서 모두들 싸가지고온 것을 서로 나누어서 먹고도 남았다는 비유로 그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론 예수님 말씀에 모두 큰 은혜를 받은 후 성령충만으로 모든게 차고넘쳤다는 내용입니다.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소리를 듣고 믿으라고 크게 고함치지 않는다는것입니다.(시46:10)^^

마태복음 14장

마태복음 14장 전체 주석이 아니라요 13절에서 36절까지의 주석이 필요해요.ㅜ_ㅜ 이 시대의 배경이나 그런 것도 조금 필요한데 도무지 찾지를 못하겠습니다.+_+ 시간이 여유가...

마태복음 14장~16장

오늘안에 마태복음 14장~16장 전체 써주세요 14장 1절이면 14:1,14장 2절이면 14:2 이렇게요 세례 요한의 죽음(막 6:14-29; 눅 9:7-9) (마 14:1)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마태복음 14장

마태복음 14장에서 폭풍을 만나는데 폭풍만나기전 출발지점이 어디죠? 정확히 언급되지 않습니다만 갈릴리 호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게네사렛 지방에 도착했다고 나오는데...

마태복음14장32절물위를 걸으신 베드로...

물위를 걷는 베드로 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구주라고 믿고 천국갈수있다 하나님아들이라 믿으면 증표로 수영장에서 무림인 처럼 경공으로 물위걷듯 걷지 안을까요 믿음 있으니...

마태복음예수께서행하신일

... 마태복음 14장 13~21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심 11. 마태복음 14장 22~33 물 위로 걸으심 12.마태복음 27장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마태복음 14장 15절

저는 이 성경책에 글자가 목록에 적혀있던 신약성경 마태복음 14장 15절에 읽은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태복음 8장부터 끝장까지 다 써주세욤!!

마태복음 8장에서 끝까지 다 써주시면 감사하겠쑵니다!! 힘드시면 첫번째분이 8장~14장까지 쓰셨으면 그 다음분이 15장~21장까지 써주시구욤,.ㅠ 그다다음분은 22장~28장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