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특히 검색을 보다 보면 십일조에 대한 비판, 십일조에 대한 질문이 자주 등장합니다.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비난할 때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불신자들이 십일조 문제를 자주 거론하는 것은
(ㄱ) 현대 교회가 물질적으로 타락했다고 믿고 있으며
(ㄴ) 그것을 보여주는 큰 지표의 하나가 바로 “교회의 십일조 헌금 강요”라고 믿고 있어서 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크리스천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1) 우선 일반적인 십일조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려는 쪽과
반대로
(2) 십일조에 메일 필요가 없다고 하는 쪽입니다.
어떤 크리스천은 (2)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일단 불신자들의 비난을 방어할 수 있다는 이유로 (2)에 대해 암묵적 동의를 하기도 합니다. 왜냐면 (2)를 주장하는 크리스천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을 불신자에게 이야기하기 때문에 좋은 방어 수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1)의 견해가 (2)의 견해보다 편협하고, 극단적이며 반대로 (2)의 견해가 관용적이며 합리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이미 많은 이에게 (2)의 견해가 지지를 얻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이런 “세상적인 시각”을 잠시 접어두고 이에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먼저 성경에는 십일조가 25절에 걸쳐 29번 나옵니다.
한편 창세기 14장 20절에는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하며 십일조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그 원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9번의 십일조 관련 말씀 중 말라기만큼 명확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 3: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물론 여기서의 시험은 예수님이 사단에게서 받는 시험이 아닙니다. 우리말은 같은 단어이지만 원어에는 말라기에 나오는 시험은 Test이고 사단의 시험은 Temptation입니다.
크리스천 중에도 위의 (2)와 같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구약의 많은 율법이 그러하듯 십일조의 일종의 “폐지된 율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면 맞는 말 같기는 합니다. 그런데 관연 그럴까요?
예수님은 재물과 관련하여 다음의 말씀을 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 19:24, 막 10:25, 눅 18:25)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청년이 무엇이 부족하냐고 물었을 때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 19:24)
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을 곡해하여 “부자는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말이겠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처럼 물질에 대한 욕심에 대해 강조해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물질은 너무나 강한 유혹이고 끝까지 놓기 싫은 부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물질은 인간에게 너무나 강한 우상인 것입니다.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바알신도 “풍요의 신”으로서 물질 욕심에 대한 우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물론 십일조자체가 믿음의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즉, 십일조를 낸다는 사실 자체로 그 사람이 진정한 믿음이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에도 역사하는 살아계신 말씀으로 믿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십일조를 합니다. 이것의 대우명제인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이 없다” 역시 참일 것입니다. 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앞에 말한 “십일조를 내면 진정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명제 P: 십일조를 낸다. 명제 Q: 진정한 믿음이 있다 고 하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는 어떤 집사는 십일조를 내는데도 불구하고 이러이러하다”고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물질에 대한 우상으로 돌아가면, 이 부분은 사실 불신자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질만능주의” 등은 이러한 현실태를 집약적으로 나타내주고 있기도 합니다. 세태가 이렇다보니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장학재단에 쾌척한 한 할머니는 큰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쓰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교회에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이기주의, 물질주의가 팽배한 현 시대에 귀감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믿는 사람이 저렇게 자신의 욕심을 먼저 챙기기보다는 내 놓을 줄 안다”는 말이 불신자의 입을 통해서도 나와야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현실은 십일조가 오히려 불신자에게는 교회와 믿는 자를 공격하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회에 대한 고착된 부정적 이미지가 큰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저 스스로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 언론 등에 보도된 교회의 재정비리 등으로 교회에 엄청나게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저의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이지 못했습니다. 한국에는 10만 명의 목회자가 있습니다. 이 중에 0.1 %의 목회자가 금전적인 잘못을 저질러도 그 숫자는 100명입니다. 언론에서 그 사실을 1년에 한 번만 써도 1백년은 쓸 기사량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목회자가 일반인은 상상도 못하는 청렴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은혜교회 김광신 목사는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낼 돈도 없었습니다. 성전의 임대료를 못내는 교회도 허다합니다.
그러니 교회에 대해 비판적이고 감시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은 필요할지언정 무조건적인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며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불신자도 있을 것입니다.
“좋다. 청렴한 목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목사나 교회가 가난하게 계속 살면 되지 왜 십일조는 내라고 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되게 대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에 대해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목사 자신이 그 말씀을 100% 실천하지 못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 말씀은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는 말씀도 비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 못하는 성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이유에 대해 목회자는 직, 간접 경험, 자신의 영적인 응답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목회자라면 물질의 유혹에 망설이는 성도에게 십일조에 대한 진실을 주저없이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참존화장품 회장 김광석 장로는 십일조를 낼 때 말라기의 말씀처럼 자신이 물질적 축복을 받는 것을 경험하고 아예 십일조를 두 배로 내어 그에 합당하게 두 배의 물질적 축복을 받은 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은혜교회 김광신 목사는 신학생 시절, 아직 벌지 않았지만 앞으로 벌 돈의 십일조를 미리 내어 축복받은 사실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식구가 먹을 쌀도 없는데 갑자기 생긴 쌀에 대해 십일조를 낼까 말까 밤새워 망설이다 결국 울면서 십일조를 낸 한 성도의 집에 엘리야를 대접한 과부의 뒤주 기적이 생긴 것에 대해 간증하고 있습니다. 박순애 전도사는, 어렸을 때 성도 중 가장 가난하면지만, 쫒겨나게 된 시골 교회에 가장 많은 건축헌금을 하겠다고 새벽기도 때 울면서 기도하였고 40일 만에 그것을 실현하게 된 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말라기의 말씀이 죽은 말씀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할 때, 즉, 자신의 물질을 바침으로써 더 큰 축복을 받는 것이 진리라고 할 때 이것을 성도에게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진정한 목회자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은혜교회의 한 성도는 수입이 몇 배로 늘어나서 십일조도 덩달아 몇 배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예컨대 40만원을 십일조로 내다가 400만원을 십일조로 내게 되었는데 그 돈이 너무 아깝게 여겨져 시험에 들고 그래서 김광신 목사에게 전화해서 시험든 사실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김광신 목사는 “그러면 십일조가 절대 40만원이 넘지 말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같이 기도합시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 성도는 그 기도를 결코 못하게 하였지요.
믿는 자는 그래서 하나님께 1백만원을, 1천만원을, 1억원을 십일조로 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돈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기에 그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 중에는 “어쨌든 교회가 그렇게 많은 돈이 왜 필요하냐?”고 여전히 반문할지 모릅니다. 이런 분은 언론에 보도되는 극히 일부 목회자의 사치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러실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교회는 돈이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는 아직도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미전도 종족이 있습니다. 예배드릴 곳이 없는 동토의 땅도 너무나 많습니다. 며칠을 굶다가 돌처럼 딱딱한 빵을 구해 들고 눈물의 감사기도를 드린 선교사의 일화는 우리의 풍요의 일부를 나눌 곳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교와 관련해서는 다른 꼭지에서 더 자세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요컨대 십일조는 상당수 불신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부 목회자가 치부(致富)의 목적으로 지어내거나 과장한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흔히 십일조 관련 설교를 극히 부담스러워하거나 부정적으로 여기며 심지어 그런 설교를 하는 교회는 가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십일조 관련 설교를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가 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라기의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말씀을 죽은 말씀으로 여기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일이 펼쳐지기는 지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불신자들은 십일조에 대한 오해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기를 바라며 믿는자들은 십일조에 대해 더 정확하고 담대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