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판타지'라는 표현.. 진중권씨가 쓰는 걸 봤는데요 질문자님의 질문의 의도를 알 것 같네요. 왜냐면 솔직히 저도 한 때 질문자님의 고민과 같은 고민 중의 일부 고민에 아주 충만히(?) 빠진 적이 있었죠. 성령 받고 은혜 체험한 이후에도 그랬죠. 왜냐하면 나는 이성과 양심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죠. 그 심정 어느 누구보다도 이해가 됩니다. 질문자님! 말을 하게 되면 하게 될 말이 너무 많아질테니까 나름대로 깨달은 점 중에 몇 가지 주제로만 말할께요.
1. 성경의 판타지?
질문자님은 나사로의 부활은 판타지라고 생각하시면서 몇일전 KBS '아기' 다큐 프로에 나왔듯이 '정자, 난자가 수정되어서 발생 과정이 진행되고 어머니 양수 속에서 있다가 공기 중으로 나오면서 비로소 폐호흡을 시작하는 놀라운 과정'은 판타지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신가요?
또 '요나'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나오는 것은 판타지이고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수중 생활을 하면서 살다가 공기 중으로 나오면서 비로소 코로 숨쉬기 시작하는 것은 판타지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요나 사건의 사실성 여부에 대해 예수님이 친히 '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기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확증하셨어요.) 두려운 말씀입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의 물 속에 있을 때는 폐호흡을 하지 않기에 심장에서의 피의 순환 경로가 뱃속에서 나온 이후와는 다르더라고요. 비로소 공기중으로 나오면서 폐호흡을 시작함과 동시에 심장의 피의 순환 경로가 바뀌게 됩니다. 즉 어머니 양수안에서 혈액의 순환 경로 역할을 했던, 심장의 어떤 구멍이 폐호흡의 시작으로 필요없게 되자 자동으로 막혀져 메꿔지는 모습을 KBS에서 방영했어요. 놀라운 장면이었고 아무 것도 모르는 갓난 아기가 스스로 심장 수술을 한 것과 다름없는 이 장면! 분명히 판타지였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제 말의 요지는 바로 현실의 삶과 인간의 실존도 판타지라는 것이예요. 성경의 기적이라고 하는 것들이 특별한 기적이 아닐 정도로 느껴질 만큼...
지구의 공전속도는 초속 29.5Km라고 합니다. 지금 컴퓨터 앞에서 저의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도 질문자님의 몸이 총알 속도의 30배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이 엄청난 현실이 믿어지십니까?(지구가 태양 주위로 공전하는 속도를 말하는 거예요. 자전속도가 아닌...지구는 똑딱하는 순간에 29.5 키로미터를 날아갑니다. 마라톤 풀코스 42.195Km를 불과 2초도 안되어서 주파하는 속도입니다.)
질문자님 앞에 보이는 책상과 컴퓨터, 집, 아파트에 사신다면 아파트도 동일한 속도로 날아가는 거죠. 오대양 육대주의 광활한 바다와 땅과 높은 산과 남극과 북극, 이 모든 것이 함께... 그 속도가 무려 초속 29.5Km(29.5 Km/초)예요. 총알 속도의 무려 30배. 프로야구 150Km의 광속구 투수의 공의 속도(0.04166666...Km/초)에 비해 무려 708배, 음속에 비교하면 약 87배(=(29.5*1000)/340)...헉, 이것이야 말로 판타지가 아닌가요. 지금 저와 질문자님의 몸이 움직이고 있는 속도가 광속구 투수 공의 708배라...음속의 87배라... 어떤 때는 그 사실을 머리로 안다라기 보다 그냥 믿는 믿음이 필요하더라고요. 성경을 믿듯이요. 솔직히 도저히 실감이 안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빨리 우주를 날라가면서도 동전 100개를 쌓아 놓고 놔둬도 어떻게 몇년이 가도 끄떡없이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고 우리 몸은 조금의 현기증이나 미동도 느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지구가 등속도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근일점을 지날때는 속도가 빨라지고 원일점을 지날 때는 속도가 느려지는 가속, 감속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는 겁니다. 판타지임에 분명하고 믿음이 없이는 받아 들이기 어렵습니다.
성경의 어떤 기적들은 거기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연의 현실은 성경에 나오는 어떤 기적을 믿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자연의 현실적인 사실을 믿기가 더 어렵더군요.
지금 이 순간도 서울도, 부산도, 한반도도 태평양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도 모두 모두 광속구 투수 공의 708배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현실...판타지 중의 판타지라고 봅니다. 서울 부산의 고속도로 연장 거리인 428Km를 14~15초에 주파할 수 있는 속도죠.
지구의 크기도 실감이 안나쟎아요? 지구 둘레가 40,000Km라고 말은 해도 땅덩어리 크기가 실감이 안납니다. 그래서 고속버스(100km/시간)로 밤 낮 쉬지 않고 지구 둘레를 일주한다고 가정하면 17일 정도 걸립니다. 대략 올림픽 치르는 기간 정도 쉬지 않고 달려야 지구 한바퀴를 돌 정도로 큰 땅덩어리인데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는 현실...판타지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이 인정하든 안하든 간에요..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그렇게 우리 몸은 잠자는 중에도 항상 날라가고 있고 달리기를 할 때에도 날아가고 있고요 태양계 안에도 소행성이 엄청나게 많다고 하는데 아주 아주 위태로운 우주 여행을 평생하면서도 별로 사람들은 걱정없이 태연합니다. 또 전체 우주에 비하면 태양계 또한 극히 점에 불과합니다...누군가 지켜 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태양의 크기는.. 지름이 140만 Km입니다(고속버스의 속도로 밤낮 달려서 태양의 표면을 한 바퀴 돈다고 가정(뜨거워서 달리지도 못하겠지만요^^)하면 5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중1짜리가 고3 수험생이 될 때까지 그렇게 달려야 고속버스가 태양표면을 일주하는 셈이죠. 그렇게 큰 태양이 1억 5천만 Km 밖에서 태양 빛을 비춰 줍니다.
그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가 1억 5천만 Km 떨어져 있다고 하는 그것도 실감이 안납니다.(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고속버스로 밤 낮 쉬지 않고 달린다고 또 가정한다면 171년이 걸립니다. 인간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의 대까지 달려야 지구에서 우리가 매일 대수롭지 않게 한번 쳐다보고 마는 저 태양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천체의 크기를 상대적으로 비교해 본다면,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의 지름의 크기를 1Cm(대략 사람의 손톱크기?)로 기준을 잡아 가정했을 때, 태양의 크기는 지름이 4 미터가 되는 애드벌룬과 같죠. 농구 골대 림의 높이가 3.05m 이므로 태양의 지름은 농구 골대 높이보다도 1m가 큽니다.(달의 지름을 1Cm로 기준을 잡았을 때 그렇다는 말이예요.)
이러한 태양에 비교한다면 지구는 탁구공보다도 약간 작은 크기의 비율이 됩니다. 그 이유는 요...
달의 적도 지름은 3,476Km이고 지구의 적도 지름은 12,756Km이므로 그 비율은 1/3.67입니다. 아까 달의 지름을 1Cm로 가정했다고 했는데 그랬을 경우 지구의 지름은 3.67Cm이 되는 셈입니다. 탁구공의 지름은 4Cm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구는 탁구공보다도 작은 크기의 비율이 됩니다.(달의 지름을 1Cm라고 기준 잡았을 때요)
더욱 놀라운 것은 천체간의 그 놀라운 비율에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요..태양과 달의 크기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구에서는 거의 같은 크기로 보인다는 점이예요. 엊 그제 일본에서 일본 열도가 들썩인, 수백년 만의 금환일식이 일어났잖아요? 태양과 달이 거의 겹치는 현상이죠. 바로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지구에서 관찰되는 태양과 달의 크기는 대략 그 크기가 같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달의 크기를 손톱크기(?)로 가정했을 때 태양은 그 지름이 농구 골대보다도 높은 애들벌룬의 크기이기 때문이죠. 엄청난 크기의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크기가 지구에서 거의 같게 보이는 현상...판타지입니다.
그 신비한 현상의 이유는 바로 천체 사이의 거리 비율과 천체간의 지름의 비율의 일치성에 있습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380,000Km인데요...즉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에 비해서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50,000,000(1억5천만)Km로서, 약 400배이고요 동시에 달의 지름(3,476Km)에 비해서 태양의 지름의 크기가(1,400,000Km)로 마찬가지로 약 400배가 되기에 지구에서 보는 태양과 달의 크기가 거의 같게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장엄한 우주의 신비..분명 판타지입니다.
그 외에 인체의 신비를 비롯한 그러한 자연의 세세한 조화의 신비를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2. 6일 창조?
그 부분은 질문자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창조과학회에서 지구역사를 6000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 해석적 오류입니다. 그리고 지구적인 '날(day)의 개념으로 6일 동안 창조했다는 좁은 해석에 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글리슨 아처, 황영철 역, 성경난제 백과사전, 생명의 말씀사, 1992, P78~84 참조)
구약성경의 '날(day)'은 히브리어의 '욤'이라는 말이 원어입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분(벧후 3:8)이십니다. 인간의 지구상에서의 24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날'의 개념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한 단적인 이유로, 성경에서 지구가 창조된 것은 둘째날 이후로 묘사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날(day)'의 개념은 이미 첫째날(the first day(KJV, NIV)/ one day(NASB)에 '빛(light)'이 창조될 때부터 날(day)의 개념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창세기1:3~5,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첫째날이니라)
즉, 지구가 창조되기 전부터, 지구적 의미에서의 '날(day)'의 개념이 있기 전인 첫째날의 창조부터 '날'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단적인 이유는... 창세기 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여섯째 날이니라'고 하였습니다.(이 말씀이 마치 문자적으로 단지, 지구적 의미로서의 여섯째날 하루 동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으로 눈을 돌려 보면 아담의 창조와 하와의 창조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적어도 몇개월의 간격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와를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연사 속에서의 중요한 임무를 주셨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에덴 동산에서 발견되는 동물과 새의 모든 종들(species)을 분류하게끔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들을 일일이 붙이게 하는 임무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 임무는 절대로 문자적인 '여섯 째'날의 하루 동안에는 끝마칠 수 없는 임무였습니다.
에덴 동산은 네 개의 큰 강과 넓은 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적어도 수백 종의 포유류, 파충류, 곤충, 새, 그리고 히브리적 표현으로 날아다니는 곤충('op)이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웨덴의 과학자 린네(Linnaeus)가 18세기의 유럽 과학자들에게 알려진 모든 종을 분류하는데 수십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어쨋든 아담이 각각의 종들을 조사하고 그에 적당한 명칭을 결정하기 위해서 상당한 연구를 했을 것입니다. 특히 명칭에 관한 한 아담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조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에덴 동산에 살고 있던 모든 새들과 짐승, 곤충들의 광범위한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서 그는 여러 해, 적어도 몇 개월을 노력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 과업이 완료 되자 아담은 새로운 공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20은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는 말로 끝납니다. 독신 남자로서의 오래고도 불만족스러운 기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아담이 정서적으로 부인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셨습니다. 마침내 창세기 2:2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심으로 배필을 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치, 여섯째 날 오전에 아담을 지으시고 그 날 오후에 아담에게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지으라는 과업을 주시고 아담이 오후 늦게 그 과업을 완수하고 그 날 저녁 무렵에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기에 하와를 창조하시는 식으로 지구적 의미에서 하루에 이루어진 일들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는 '첫째날(욤 에하드, day one)'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The first day라는 식의 해석은 옳은 번역이 아닙니다.(성경난제 백과사전 참조) 그래서인지 NASB 성경에는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넷째날, 다섯째날'이 정관사가 아닌 부정관사가 붙어서 " one day, a second day, a third day, a fourth day, a fifth day'로 번역되어 있더군요.
3. 지구의 역사가 6000년?
지구의 수명을 수억년으로 제시하는 지질학적인 지층속에서의 화석이나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 등의 과학적 사실 등으로 볼 때 지구역사가 6000년이라는 말은 성경을 너무 좁게 해석한 결과라고 생각되네요.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인간처럼 하루 이틀에 연연하는 분이 아니시지요.
수학에 자연 로그(e를 밑수로하는 로그)가 있지요. 자연계에서 이 자연로그는 전기 공학적인 법칙의 계산에서도 정확히 오차없이 적용이 되고 방사성 동위 원소의 반감기의 장구한 연대를 측정할 때나 또 세균의 번식 개체수를 계산을 하는데 사용되는 등 자연계에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엄연히 이러한 자연계의 대법칙을 부정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한 자연계의 법칙 조차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속에 내재된 놀라운 법칙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다면 자연법칙을 설명하는 수학과 과학의 원리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저도 창조과학회에서 굳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외에 창조과학회에서 지적 설계자로서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창조주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의 산물인, 그 외의 많은 자료들은 매우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들은 직접 확인하시면 크게 동감하게 되는 내용들도 매우 많을 것입니다.(솔직히 창조과학회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해요, 그 학회의 분들이 보신다면 너그러운 지도편달 바랍니다.)
어쨌든 깊이 있는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신학적,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영적인 모든 방면에서의 소양들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쉬울 수가 없습니다.
4. 성경 해석시에 고려할 점
하나님이 계시의 말씀을 고대인들에게 주실 때에는 그들의 입장도 참작하셨다는 점입니다. 미개하여 모두 천동설을 생각하던 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이성적, 심리적인 동요를 굳이 유발하시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지식 수준에 맞는 말씀으로 계시하실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느닷없이 뜬금없이 땅이 돈다(지동설)는 식의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면 그것이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는 과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되겠지만 고대인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는 커녕 도깨비나 귀신의 말로 불신하면서 오히려 혼비백산하여 도망갔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성경 해석 시 영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Inspiration 또는 God-breathed)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들을 감동시키실 때에 인간의 감정과 의지, 지식까지 존중하시며 그것을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로보트가 받아 적듯이 적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스피레이션으로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에 목적이 있지 논문이나 신문기사처럼 문자적으로 사실의 정확한 전달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기록도 있지만 시도 있고 스토리텔링도 있고 산문도 있고 예언과 묵시도 있습니다. 약1500년간에 걸쳐서 약40명의 저자에 의해 씌여진 고대 문학의 장대한 파노라마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그 모든 예언이 역사적으로 모두 성취(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로마 등)되었고 동시대에 살아본적이 없는 저자들이 쓴 각 책의 주제가 하나나의 귀결로 일치하고 있는 사실은 성경의 불가사의인 측면인 동시에 실질적인 저자가 하나님 한분 이심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문기사처럼 정확한 사실 전달만을 목적으로 한 책이 아닙니다. 신혼 부부가 웨딩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하지 않은 뒷배경은 때로는 흐릿하게 처리하고 촛점은 신랑 신부에게 맞추듯이, 전체 사실을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주제에 촛점을 맞추기 위해서, 웨딩사진을 그렇게 처리하듯이 때로는 성경도 그렇다는 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제가 감히 사족을 달지 않겠습니다. 이런 분야에 관해서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이신 '권연경 교수'의 탁월하고 깊이있는 강의를 직접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해석과 관련한 깊은 통찰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CBS TV방송의 '성서학당'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열강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어요. 혹시 다시 보기가 될지도...)
질문자님이 많은 의문을 가지고 계신데 의문으로만 끝나지 말로 훌륭한 학자분들의 저서 등을 직접 접하면서 의문을 풀어가시기 바랍니다. 신학분야에서도 의외로 많은 학자들이 깊이 있게 연구해 놓은 업적들이 많습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것들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5. 존재의 근원에 대한 놀라운 하나님의 선언
하나님이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원하셨던 목적은 '히브리 민족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그들과 인격적 언약 관계를 맺은 그 주 하나님이야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유일한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그들 주위의 고대 이방인들의 종교적 관념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고대 이방민족들은, 설명할 수 없는 힘의 자극을 받아서, 기원을 알 수 없는 선재하는(preexistent) 물질로부터 여러 신들이 연속적인 단계로 출현한다고 가정했습니다)
바로 창세기1장은 고대 세계의 이방 문화의 미신적인 우주 기원론을 완전히 근거없는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배격하는 웅장한 선언문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물질 이전에 먼저 전능자 하나님이 스스로 계셨고 그 자신의 말씀에 의해서 물리적 우주 전체를 존재케 하셨으며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서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이방의 타락한 유치한 상상력에 의해 배태된 충돌하고 다투며 변덕스러운 그러한 작은 신들과는 강력한 대조를 이룹니다.
결국, 인류의 철학적, 과학적인 궁극적 최대 난제인 '제일 원인'에 대해 하나님은 출애굽기 3장 3:14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 / I AM WHO I AM)
이것은 하나님 당신 스스로가 '결과 이자 동시에 원인'이 되는 불가해의 존재가 된다는 말씀으로서 그야말로 인간의 모든 언어가 그쳐지게 되는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상상력과 이성의 한계 선상에서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인간 실존을 향한 초월적이고 신비한 선언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나 동양인은 보통 '자연(nature)'(스스로자, 그러할 연)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바로 '스스로 그러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됨으로써 내포적으로 자연(nature)이 '자존자'가 됨을 은연 중에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말 속에는 그 기본 의미 상, 자연이 자존자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 말을 쓰는데 꺼리낌이나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연에는 자존자라는 표현을 쓰면서 유독 하나님이 자존자라는 표현에는 사람들이 반기를 듭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게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내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시면서 '자연'이 '자존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존자라고 선언하십니다. 고대에 이러한 선언이 존재했었다는 자체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6. 방언의 신비
방언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불가불 적어 볼께요. 저보다 더욱 신령한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도 많을 거예요. (그런 분들이 계시면 이런 곳에 글을 올려서 궁금증을 함께 풀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아직도 궁금한 점이 있거든요)
방언이 어떤 것인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다른 교인들이 하는 방언을 들으면서 부럽기도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언을 받기 위해서 3일 동안 물만 먹고 기도해서 총 40일을 채워 기도한 적도 있었어요. 정말로 몸부림도 쳐보았답니다. 그래도 방언의 은사를 못받었어요. 정말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아름다운 발음으로 방언 찬송하는 것을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사람이 인위적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어떤 힘이 도와서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옆에서 들으면서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안 주셔서 솔직히 자존심도 상하고 낙심해서 방언을 받는 것을 포기했어요. 그런데 방언을 사모하기 시작한지 13년 이상 되었을 때 기도원에서 심장 부근의 병의 치유와 함께 우연히 방언을 받았어요.
처음의 방언 소리는 '랄 랄 랄 라...'였고 이상하고 유치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남몰래 집에서만 했는데 어쨌든 내 혀와 입술이 저절로 힘이 막 들어오면서 움직이는 것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어서 길가면서도 '랄랄라'를 하고 다녔어요.
나중에는 방언의 소리가 계속 바뀌는 것을 경험했답니다. 꼭 어린아이가 말배우는 방식하고 똑 같아요. 랄 랄 라로 시작되었는데 몇 개월 동안 바뀌지가 않더니 나중에는 희한한 발음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단음절의 온갖 희한한 발음들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나왔어요.(꾜렬, 뀌렬 이런 발음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나네요, 도무지 상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던 발음들이었어요. 그 외의 많은 발음들은 이제 다 망각속으로 사라진 발음들이되었어요.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나의 의지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맨정신에는 기억이 잘 안나요. 이제까지 계속 바뀌었고 현재도 바뀌고 있기 때문이예요.)
그러면서 그러한 발음 연습(?)의 과정이 또 몇개월이 지나자 한국말의 단어들이 분명히 섞여 나오기 시작했어요(이것도 통역인가요?)
어쨌든 그 이후에는 한국어 단문장으로 바뀌고 다시 오랜 시간 후에는 한국어의 장문장으로 말이 섞여 나왔어요. 그러면서 방언은 처음보다 듣기에 좋은(?) 발음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어린애가 말배워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과 같은 것 같아요
한번은, (만학도로서) 학교에서 MT를 갔는데 춤도 못추는 나는 겨우 막걸리 먹으면서 노래 부르는 것 자체는 좋아하기 때문에 같이 분위기 적당히 맞춰주고 유행가 부르고 막걸리 정도만 마셨는데 솔직히 그렇게 취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죄책감이 전혀 없었고 정말로 아무 생각자체가 없었는데 방언 기도 중에 내 입에서 '술 취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로 갈라디아서의 지혜를 배우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와서 성경 갈라디아서 5장을 읽어 보니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었어요. 그 이후에는 술을 볼 때 크게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래서 성령의 깨우쳐 주심으로 죄가 되는 것을 깨달았어요. 취하든 취하지 않던 술먹는 것 자체를 하나님이 싫어 하시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여러 경우에 잘못들을 일깨워 주시고 미래를 말씀해 주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에게 방언의 유익은 참 많은 것 같습니다.(로마서 8:26 ...성령도 너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제가 느끼는 방언의 신비는 요...
* 방언을 하려는 마음을 먹는다 - 저절로 입술과 혀에 힘이 생기면서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상한 언어가 발생되어 나온다 - 그래서 나의 의지는 하나님의 영의 의지에 복종된다라는 점이 있고요
* 방언을 그만 하려는 마음을 먹는다 - 저절로 움직이던 입술과 혀에 힘이 사라지면서 언어 발생이 중지된다 - 그래서 나의 의지에 하나님의 영이 따라 주신다라는 점이 있어요
바로 위의 두가지 점이 극히 상반되는 점으로써 방언을 현재도 하면서 느끼는 신비입니다.
어떤 경우는 기도 중에 육신이 지치게 될때는 머리속으로는 한국말로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 입으로는 또한 전혀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한국말로 동시에 하고 있다는 점이죠. 이것은 절대 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항상 기도할 때마다 가끔 느끼는 저만의 신비이기도 하답니다.
어쨋든 너무 길어져서 두서가 없이 맺을까 하네요. 그 모든 과정을 딛고 부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시는 형제님이 되시도록 또한 기도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