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前대통령 대해서

김대중前대통령 대해서

작성일 2009.11.16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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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약칭 DJ, 1924년 1월 6일(호적상으로는 1925년 12월 3일) ~ 2009년 8월 18일, 전라남도 신안군 출생)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으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나 제5대 민의원과 제6·7·8·13·14대 국회의원(5선)을 지냈으며 민주화를 위해 오랫동안 군사 독재 정권에 항거하였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선구자였으며 ‘아시아넬슨 만델라’로 불리었다.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號)는 후광(後廣)이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忍冬草)’라 비유되며 불려졌다.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이다.

연설에 능하며,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1]6.15 남북공동선언북한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만나 발표하였다.

 

출생과 가계 [편집]

1924년 전라남도 목포 앞바다에서 뱃길로 2시간 거리인 남서쪽 해상 약 57.6킬로미터 거리의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하의도에서 한두 척의 어선을 가진 농어민 김운식과 장노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당시 하의도는 인구 1만 이내의 섬이었다. 구한말 덕혜옹주일본으로 시집갈 때 이 섬 한덩어리를 일본에게 팔아넘겨 하의도 섬은 섬 전체가 동양척식회사의 소유가 되었고 주민들은 일시에 소작농으로 전락해 버렸다.[2]:76

아버지 김운식은 소작인들을 대표하여 일인들에게 항의나 진정을 내곤 하였다. 설산 장덕수가 잠시 피신하러 하의도로 내려왔다가 김운식과 가깝게 친교가 있었고 설산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한다.[2]:76 김대중은 "내가 태어난 이러한 토양이 민족과 같이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주었다"고 추억하곤 하였다 [2]:77 증조부 김태현은 헌종 때 한성부좌윤을 지냈고, 조부 김제호는 오위장을 지냈다.[2]:78 이후 천주교 신자가 되어 "토마스 모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2]:86

학창 시절 [편집]

안기부 문서에 의하면 1936년 전라남도 목포로 이사를 했고, 중학교 진학을 위해 국민학교 4학년 때 하의도에서 목포북국민학교로 전학해 왔다.[2]:78 그뒤 목포제일보통학교를 거쳐 목포상업고등학교에 1등으로 합격하여 내내 급장을 지냈다. 이때의 죽마고우로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이 되는 임종기를 만나게 된다.[2]:78~79

목포상고 시절에는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한다. 그의 한 동창생은 한번은 일본인 교관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시국에 대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자 교관은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하자 김대중만이 입을 열었다. 질문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유럽 정세에 관한 질문이었던 것인데 교관도 답변을 하지 못하자 어물어물하여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2]:79

당시 창씨개명시의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豊田大中)이다.

청년사업가 시절 [편집]

1944년 3월 목포상업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목포상선회사에 입사하여 이후 회사 관리인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등 청년 사업가로 활동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몽양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좌경화 움직임이 보이자 곧 탈퇴하였다.

1946년 4월 목포 신민당 지부에 참여하였으나 좌경화 움직임이 보여 탈퇴하였고, 1946년 4월 9일 차용애와 결혼, 슬하에 김홍일·김홍업 두 아들을 두었다. 1959년에 차용애와 사별하였고, 1948년 10월 목포일보 사장으로 1950년 10월까지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시 사업관계로 서울 출장중에 6.25를 맞아 걸어서 목포로 귀가하였다.

1950년 9월 우익반동이라는 이유로 인민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총살 직전에 탈출 하였다. 1951년 3월 목포해운회사(흥국해운) 사장에 취임했고, 같은해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하였다.[3][4]

정치 입문 [편집]

초기 정치 활동 [편집]

졸업 후 선박회사에서 해운업을 하던 그는 1945년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선전책에 종사했으며 목포청년동맹에도 가담하였다. 그해 10월 건국준비위원회와 목포청년동맹이 해체되자 이채현의 추천으로 남조선신민당에 입당하게 된다. 신민당과 동시에 민주청년동맹에도 가입해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는데, 1946년 목포시민 항쟁의 날 사건의 배후로 지목, 구속되어 한민당 목포시 부위원장인 장인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사상 전향 서약서를 제출하고 훈계 방면되었다.

이후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해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 다시 해운업에 손을 댔고, 해군 소령급의 신분으로 해상방위대 부단장, 목포일보사 인수, 노조관계 관여 등의 사회활동을 하였다.[2]:82 그뒤 목포일보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1954년 목포에서 무소속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해운회사를 처분하고 서울에 상경한 그는 잡지 《태양》을 발행하면서 웅변학원을 운영했고, 1955년 10월에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상계》에 노동문제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정계진출의 꿈을 키운다.[5]

그러던 중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장면 저격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장면과 인연을 맺은 그는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장면 전 총리를 대부로 삼고 노기남(당시 서울대교구장) 대주교 집무실에서 천주교 영세를 받는다. 이후 강원도 인제에 출마해 연거푸 두 차례(4대, 5대)[6]의 낙선을 맛보았고, 조강지처인 차용애의 사망(음독자살)으로 힘겨운 정치 초년기를 보낸다.

1957년에는 민주당 중앙상임위원으로 지내고, 1960년에는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이 되었다. 이철승조병옥장면으로 양분된 민주당에서 장면을 찾아 신파의 소장 실력자로 데뷔하자 김대중도 장면을 찾아 민주당 신파로 정치적 인연을 쌓았다.[2]:86

반독재 민주화운동 [편집]

국회의원 활동 [편집]

1961년 5월 14일, 자유당 소속 현역의원의 공민권 박탈로 강원도 인제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민의원에 당선 되지만 이틀 뒤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원 선서도 해보지 못한 채 첫 임기를 허무하게 마친다. 5.16 이후 이철승 등 일부가 정치정화법에 묶여있을 때 민주당 선전부장, 당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2]:86 이후 이희호를 만나 재혼했고, 1963년에 민주당 소속으로 고향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재선 국회의원이 된다.

1967년 2월에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정무위원 겸 대변인으로 취임했다. 이후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1968년 당수 유진오로부터 원내총무 후보자로 지명을 받았으나 동료의원들의 인준을 받지 못해 김영삼에게 패배하기도 했다.[2]:88

1970년에 치러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김재광과 제휴해 김영삼을 40여표 차이로 꺾고 과반수선을 얻어 역전승, 대통령 후보자에 지명되었다. 1970년 1월 24일,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면서 만일 71년 선거에서 또다시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2]:89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공원 유세에서 총통제 가능성을 다시 폈다.[2] 이 때문에 허위사실 유포 등 선거법 위반사범으로 입건도 되었다. 그러나 같은해 10월에 10월유신이 발생하자 "이처럼 되었는데도 내가 선동가냐"며 반문하였다.[2]

대선출마, 외국 반독재운동 [편집]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539만표를 얻어 634만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였으나 당시 정치환경으로 볼 때 대단한 선전이었다.대선 후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김대중에게 박정희는 위기감을 느꼈다. 선거 얼마 뒤에 김대중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고, 골반 부위를 다쳐 다리를 절게 됐다.

이후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이듬해인 1972년 10월에 일본에 체류하던 중,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등을 결성하여 언론과 교포사회를 통해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진행하였다.[7]

1972년 일본 도쿄에서 유신 반대 첫 성명 발표,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발표하였다. 1972년 10월 19일 귀국 비행기표를 예약해놓고 10월 17일 오전에 일본인 후쿠다 다케오를 만나고 오후에 참의원 의장 고노 겐소를 접견했다.[2]:43 그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고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이듬해인 1973년 1월 1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2]:44 1973년 1월 3일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조윤형, 김상현의 구속 소식을 접하였다.[2]:44

김대중 납치사건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김대중 납치사건입니다.

김대중은 도쿄에서 피랍된 뒤 129시간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난 사건이다. 1973년 8월 8일 그는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反)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한국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을 받아 가진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야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일본 경찰청은 현장에서 주일 한국대사관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지문 등을 채취하고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의 일본 주권침해라는 한일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김 서기관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활동면책, 김종필 당시 총리의 사과방일 등을 약속 받고 물러섰다. 그러나 미국의 조정 및 한일간의 막후절충으로 김동운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 등이 합의됨으로써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도쿄에서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에 귀환하면서 귀국하자마자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발언하면서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 이어 1977년 7월 1일에 일본 교토통신과의 회견에서 증언을 두고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발언한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를 비난하면서 "한·일 두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명예와 신뢰성에 상처를 입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에 대한 양국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다면, 더욱 상세한 사실을 밝혀 양국 정부의 죄상을 고발하겠다"라고 밝혔다.

2006년 2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1947년부터 1974년 사이의 비공개 외교문서를 공개하였고, 이로 인해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8][9]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편집]

1974년 8월 22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반독재 선명야당 체제’의 구축을 위해 김영삼 총재의 당선을 적극 지원하였고, 11월 27일에 가택연금 속에서 재야 반유신 투쟁의 결집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였다. 1976년 3월 1일에는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1977년 3월 23일에는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형을 확정(긴급조치 9호 위반) 받은 후 옥고를 치렀다.

1977년 5월 7일에는 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접견 제한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했으며, 같은해 10월 31일에 진주교도소 수감중 격려차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과 면담하였고, 이후 12월 22일에는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어 수감 되었다. 1978년 9월 6일 서울대병원 이송후 교도소 때보다 제한(접견 차단, 창문 봉쇄, 서신제한, 운동금지)이 더욱 심하자 항의 단식하면서 같은해 1978년 12월 27일에 옥고를 치르면서 2년 9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된 후 장기 가택연금을 당했다.

1979년 4월 4일에는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과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결성 주도하여 공동의장으로 반독재투쟁에 앞장, 3차례 연행당하였다. 1979년 12월 8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 당하여 사망한 후 10.26 사태로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고 가택연금에서 해제 되었다.[10]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입니다.

1980년 신군부시절,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세계 각국의 양심적 들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인 1981년 1월 23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82년에 형집행이 정지되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11]

독일 사민당(SPD)의 1980년 9월 17일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당시 사민당 총재는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번 판결이 집행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으므로 대통령이 판결이 수정되도록 조치할 것을 긴급히 요청한다”며 “김대중씨 구명에 모든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긴급히 요청한다”고 말했다.[12]

김대중이 무기 징역으로 감형받는 데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1980년 12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 김대중의 형량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직후인 이듬해 2월 14일 2차 편지를 보내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13]1983년에는 1월 31일에는 ‘뉴스위크’지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했고,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과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14]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1985년 2월 8일 귀국하였다.

그러나 불과 1년 6개월 전인 1983년 8월, 필리핀의 야당 인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길에서 돌아오다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기에, 당시 김대중의 귀국 결정에 대해 주변 인물들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도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조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귀국을 강행하였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남아있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 교도소에 재수감하겠다고 경고하였고, 이에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당시 논의중이던 전두환의 방미를 백지화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김대중에 대해 가택연금 외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그래도 전두환 정부의 김대중 암살을 우려한 미국 하원 의원 토머스 폴리에타와 에드워드 페이언을 비롯한 여러 저명인사들이 김대중을 에워싸고 김포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한 덕분에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15]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1986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11]

김대중 구하기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그레그 CIA 지부장이 89년 주한대사로 부임하게 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서한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나는 개인적으로 귀하가 대사로 오게 돼 기쁘다. 왜냐하면 귀하는 1973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나의 목숨을 살려줘 내가 깊이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라며 은인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16]

2004년, 이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79년 12·12사태와 80년 5·18을 전후해 발생한 신군부의 헌정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에 해당,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17]

정계 은퇴 [편집]

1987년 4월에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통일민주당을 탈당, 11월 12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표 겸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후 야당 후보였던 김영삼과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611만 표를 얻고 낙선했다. 1988년에는 제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0년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3당합당 때 3당 야합 반대 투쟁을 선언하며 규탄하였다.[18]1991년 4월 15일에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재창당한 뒤 총재에 취임했고, 곧 이기택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이어 1992년 5월 15일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804만 표를 얻었으나 190만여표 차로 낙선하였다. 그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며 12월 19일에 정계 은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정계 복귀와 대선 출마 [편집]

1993년 1월에 영국으로 출국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하다가 1993년 7월 귀국, 1994년 12월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통칭 아태재단)를 설립하고, 상임공동의장에 취임했다.[11] 3당통합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김영삼 정부의 철학과 비전의 부족은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수월하게 하여, 정계 은퇴를 번복하게 된다.[19]

1995년에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후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하였으나 13번까지만 당선되어 낙선하게 된다. 1997년 10월에는 자민련의 총재였던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1033만 표를 획득해 이회창을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재임시 [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국민의 정부입니다.

 

국민의 정부 출범하기 전 김영삼 정부 말년에 발생한 IMF 외환위기로 한국은 사상초유의 국가 부도에 직면해 있었다.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여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2000년 6월 15일에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같은해 분단 이후 최초로 선편을 통한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되었다. 정주영 회장이 정부와 남북협상을 협조하기위해 현대아산을 설립하여 소떼 방북 등으로 대북 사업의 중심에 섰지만, 불법적인 외환 송금은 문제가 되기도 했다.[20]1999년 5월에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고,[21]2000년에는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노벨상 로비설"을 제기하며 김대중 노벨상 수상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 의원들이 노르웨이를 방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위원회는 김대중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일생의 투쟁과 평화를 위한 노력의 공로로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은 노벨상 로비설에 대해 “매우 무례하며, 위원회의 심사 절차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대중 측이 아닌 오히려 김대중의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으며, 한국 내 특정지역으로부터 노벨상 수상을 반대한다는 편지 수천 통이 전달되었다”고 했다.

동티모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조제 하무스 오르타는 로비설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22] 이후 김대중은 2003년 2월 24일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이후 [편집]

2004년 1월 29일, 재심을 청구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판결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5월 10일 유럽 3개국(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에서 순방과 함께 OECD, 노벨위원회, WHO에서 연설을 했다.[11]

11월 14일, 그는 8박 9일 동안의 유럽 순방 일정을 마치고 낮 인천 공항을 통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귀국했다. 유럽 방문 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11월 18일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열리는 클린턴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순방 일정에 따른 피로 누적으로 미국 방문계획을 취소하고 조기 귀국했다. 6일 스웨덴 스톡홀름을 방문한 데 이어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고, 로마에 본부를 둔 세계식량계획(WFP)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로마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서 "북핵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하고 핵문제에 있어서 이중잣대는 안된다는 점 등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모두 반영된 최종 선언문이 답변확정됐다"고 말했다.[23]

1983년부터 현재까지는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위원회, 국제고문희생자 구원위원회 고문과 미국 피츠버그 La Roche 대학교 이사로 있다.

자신이 지도자로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이 2004년을 기점으로 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분열하였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민주당은 김대중의 지지를 기대하였지만 오히려 그는 열린우리당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인정하였으며, 그를 지지하던 많은 세력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으로 둥지를 옮긴다.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뀐 뒤에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하였다.

2004년 3월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당하자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국면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하였다.[24]

2008년 10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100억 원대 CD를 비자금으로써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박지원 의원이 의혹이 있으면 즉각 수사하라며 반박했다.[25] 검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자금 추적 결과 김 전 대통령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26]

2009년 6월 11일 저녁 7시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특별강연자로 참석해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시작된 한반도 위기와 노 전 대통령 사망, 민주주의의 위기 등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에 비유하며 이명박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북핵 위기와 관련해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을 동시에 비판했다.[27]

2009년 8월 18일,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은 18일(현지시간) KRB 한국라디오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핵 문제로 얼어붙은 북미관계를 풀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고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조선 방문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올해 초 오바마 대통령에게 난항을 겪고 있는 북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조언하는 편지를 써 달라고 김 전 대통령에게 요청했고, 이에 따라 지난 5월 북조선을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편지가 전달됐다는 것이다.[28][29]

한·미·일 110명의 평화선언 [편집]

2009년 8월 20일 한국·미국·일본의 들이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남북화해와 동북아의 평화를 촉구하는 3개국 110명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번 성명이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받은 점도 밝혔다.

평화선언을 제안한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 교수는 “성명서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당시 북한의 로켓 발사와 유엔 제재 등 악순환이 이어지자 3국의 들에게 공동선언을 제안했다. 들이 호응했고 곧바로 문안 작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문안 합의를 위한 들의 토론이 길어지면서 문구 수정 작업에 반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와다 교수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명운동을 벌인 후 꾸준히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대표적인 지한파다.[30]

사망 [편집]

2009년 7월 13일, 흡인성 폐렴 증세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31]이명박 대통령,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과 박근혜, 박희태 한나라당 전·현직 대표,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민주당 정세균 대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 UN 사무총장 반기문, 마틴 유든 주한 영국 대사, 캐서린 스티븐슨 주한 미 대사, 청융화 중국 대사, 여성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등 각계의 인사들이 문병을 왔으며, '쾌유기원' 촛불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32][33][34]

초기엔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점차 악화되어 결국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1달여에 걸친 투병 끝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하였다.[35][36][37][38][39].

각계의 애도 [편집]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의 영혼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맡기시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평화와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의 축복을 진심으로 간구한다"고 밝혔다. [40]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조문에서 "김 전 대통령의 1998년 런던 방문과 그 다음해 이뤄진 저의 공식 방한 당시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른다"며 "김 전 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분이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정말 기뻤다"고 밝혔다. [41] 또한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은 격동의 시기에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금융위 기 때는 빠른 경제 회복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헌신한 분"이라면서 "영국 정부를 대신해 한국 국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고 밝히고 "김 전 대통령과 일본 정계 지도자들이 합심해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등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관계를 구축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을 "중국 국민의 가까운 친구"라면서 "중국 정부와 국민은 그가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 쏟았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 앞으로 조문을 보내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한국 민주화와 인권, 동북아 평화와 안전을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은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독일은 좋은 친구를 잃었다"고 애석해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공식 성명에서 "민주화와 인권의 용감한 투사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역동적인 민주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 희생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 한국을 움직인 용감하고 비전에 찬 지도자였다.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의 길을 놓았고, 국제사회의 인권을 지켰으며, 따라서 노벨평화상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었다. 햇볕정책은 한국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에 지속적인 평화를 주었다"고 평가했다.[42]

또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이 만난 6.15 공동선언을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서도 서해직항로를 이용한 특별기편으로 조문단을 파견하였기도 하였다.

장례 [편집]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정해졌으며, 영결식은 23일 여의도 국회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장례를 주관하는 장의위원장은 한승수 국무총리가 단독으로 맡았다. 이상은 사망 이튿날인 2009년 8월 19일 오후 8시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결정되었으며 유족측과 이명박 정부는 서로 합의하여 국장으로 치루되 경제위기를 고려해 6일장으로 결정하였다.[43]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되었다. 당초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 국립 5∙18민주묘지, 고향인 신안군 하의도, 용인의 가족묘 등이 거론되었는데, 유족들의 뜻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된 것이다.[44]

2009년 10월 5일에는 그의 비석이 세워졌는데 충남 보령의 오석(烏石)으로 제작된 묘비에는 전면과 측, 뒷면에 각각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묘'란 문구와 고인의 주요 공적, 경력, 가족사항 등이 기록돼 있다.[45]

상세 사망 정보 [편집]

  • 2009년 7월 13일 오후 4시40분, 폐렴 증상으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입원
  • 2009년 7월 15일 오후 1시, 폐렴 확진 판정 후 중환자실로 이동
  • 2009년 7월 16일 오전 3시, 인공호흡기 부착
  • 2009년 7월 19일 오후 2시20분, 인공호흡기 제거
  • 2009년 7월 22일 오후 4시, 일반병실로 옮김
  • 2009년 7월 23일 오전 7시, 인공호흡기 재부착, 중환자실로 옮김
  • 2009년 7월 29일 오후 4시 15분, 기관절개 수술
  • 2009년 8월 9일 새벽 병세 악화, 오전 10시 45분 정상수치 회복
  • 2009년 8월 10일, 유동식 공급 재개
  •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사망

수상 경력 [편집]

  • 1981년 -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 1987년 - 미국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 인권상(조지 미니상)
  • 1987년 -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 1993년 - 한국애서가클럽 애서가상
  • 1994년 - 미국 유니온신학대학교 유니온메달
  • 1998년 -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 1998년 - 무궁화 대훈장
  • 1998년 - UN 인권협회 인권상
  • 1999년 - 미국 필라델피아시 자유메달
  • 2000년 - 라프토 인권상
  • 2000년 - 노벨 평화상
  • 2000년 - 국제평화상
  • 2000년 -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
  • 2001년 - 세계정치지도자상
  • 2002년 - 국제행동을 위한 의원연합의 민주주의 수호자상
  • 2003년 - 늦봄통일상
  • 2003년 - 제7회 만해상
  • 2003년 - 칠레 대십자 훈장
  • 2003년 - ‘춘사 나운규 영화제’ 공로상
  • 2006년 - 코리아 소사이어티 선정 밴플리트상
  • 2007년 - 제1회 자유상(베를린 자유대학)

학위 [편집]

저서 [편집]

  • 《분노의 메아리》 (1967년)
  • 《내가 걷는 70년대》 (1970년)
  • 《독재와 나의 투쟁》 (1973년, 일본어판)
  • 《김대중 옥중 서신》 (1984년)
  • 《행동하는 양심으로》 (1985년)
  • 《대중경제론》 (1986년, 한 영어판)
  •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 (1987년)
  • 《공화국 연합제》 (1991년)
  •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1992년)
  • 《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 (1992년)
  • 《한국의 통일》 (1993년)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3년)
  • 《나의 길 나의 사상》 (1994년)
  • 《김대중의 21세기 시민 경제 이야기》 (1997년)
  • 《나의 삶 나의 길》 (1997년)
  • 《대중참여경제론》 (1997년)
  • 《내가 사랑한 여성》 (1997년)
  •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 (1997년)
  •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8년)
  • 《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1998년)
  • 《경천애인》 (2002년)
  • 《21세기와 한민족》 (2004년)
  • 《통일지향의 평화를 향하여》 (2007년)

가족 [편집]

차용애에게서 2남, 이희호에게서 1남을 각각 뒀다.

김대중前대통령 대해서

... [11] 김대중 구하기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그레그 CIA 지부장이 89년 주한대사로 부임하게 되자 김대중대통령은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서한에서 김대중 전...

김대중 前대통령대해서...

... 햇볕정책에 대해서 쓸라면 너무나 시간이 오래걸릴것 같아서 생략은하겠습니다만... 한나라에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이 당연히 책임지고 욕을먹어야 마땅하다고 봄니다....

김대중 前대통령 , 故 노무현...

... 언급되는 前 대통령 두 분의 구체적인 실정(失政)에 대해서는 개인의 의견이... 김대중의 업적 1. IMF 당시 거품물고 반대했던 여당측 회생안을 고대로 차용 -당시 유명했던...

김대중 前대통령의 사상

김대중 前대통령의 사상에 대해서 좀 가르쳐주세요 내공 20 드리겠습니다. 온건한 민족주의자 입니다. 김구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식인에서 그런 심오한...

김대중대통령이 많이 위독한 상태인가요?

... 앞에서 김대중대통령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남호진기자> ㆍ의료원장... <이용균·김지환기자 ****@**********.***> [관련기사] ▶ 김대중 前 대통령 병세 한때 악화...

김대중 前대통령께서는 천국에 가셨을까요?

... 그리고 북한 핵에 대해서는 핵을 만들면 당신께서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김대중대통령님을 추모하며 답변을 합니다. 질문자님 그분의 신앙과 삶이 북한의 핵과...

박정희 前대통령대해서..

...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김대중대통령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린건 확실한...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고싶군요. 근대사에 대한 역사말입니다. 박정희 정권때...

故 노무현 前 대통령님에 대해서...

... 요새 故 노무현 前 대통령님이 서거하셔서 온 나라가...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회견 때 이에 대해서 '대우 사장... 없어짐) = 김대중, 노무현 = 한겨레, 경향 경상도 지역...

김대중대통령대해서

... ㅠㅠㅠㅠㅠㅠㅠ 김대중대통령의 모든것을 해주세-요ㅕ ㅠㅠㅠ 제가 월요ㅕ일까지... 임동원 전 국정원장에 대해선 징역 2년을 구형했고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과 최규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