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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육원(www.uniedu.go.kr)에서 발간한 '2012 통일문제이해' 제5장 통일미래의 비전과 과제, 제1절 분단국의 통일사례와 교훈(153페이지~157페이지)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독일은 동독이 자체적으로 서독 체제로의 편입을 결정하고 서독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한 사례에 속한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의 결과 동서 냉전 체제가 와해되고, 동유럽권 국가들이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함에 따라 동독 주민들도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에 동독 정권은 근본적인 개혁보다는 지도층 교체로 대처하는 등 개혁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당시 동독을 철권통치하고 있던 공산당 서기장인 호네커가 실각되고, 크렌츠로 지도자가 교체되었다. 그러나 개혁과 통일을 염원하는 동독 주민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이 지도층이 재편되는 와중에 동독 주민들은 시위를 확산시켰으며, 급기야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동서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더 이상 동독이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존립하기가 힘들게 되었다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어 동독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들어서고,1990년 3월 동독에서 역사적인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여기서 선출된 드메지어 수상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정부는 서독의 콜 정부와 신속하고 집중적인 협상을 전개하여, 통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 조약에서 서독의 법체계를 동독지역에 확대한다는 원칙을 세움으로써 서독이 동독을 편입하는 형태로 통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독일의 통일은 통일을 위한 서독 정부의 꾸준한 노력과 동독의 변화, 국제협력, 집단안보체제를 통한 안보 불안요소의 제거, 냉전체제의 붕괴 등 통일 환경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가능하였다.
서독은 1969년 브란트 수상이‘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적극 추진하였다. 1972년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여 경제,과학·기술, 문화, 통신, 스포츠, 환경보호 분야의 교류에 합의하고 각각 상주대표부를 설치하였다.
서독의 적극적 포용정책은 양독 간 교류협력의 활성화를 가져왔다.경제교류는 1970년대 초 50억 마르크 수준이던 것이 1980년에는 약 120억 마르크로 확대되었고 통일 직전에는 200억 마르크를 상회하였다.
동서독 간 경제교류의 활성화는 서독 정부의 포용정책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포용정책은 동독의 변화를 수반함으로써 지속성을 가질 수 있었다. 사회문화적 교류를 주저했던 동독은 결국 방문협정, 교통협정, 우편 및 통신 협정의 체결에 동의하였다.
1973~1985년 사이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 주민은 매년 130~150만 명에 달하였으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 해인 1988년에는 거의 7백만 명에 달하였다.
서독이 적극적으로 포용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을 통하여 동독에 대해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집단안보체제의 확립으로 안보 불안요소가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서독은 동독이 소련의 승인 없이 서독의 정책을 수용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소련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적극 전개하였으며, 아울러 동구권의 관계개선을 위해서도 힘썼다.
특히 1975년에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개최되고‘ 헬싱키 의정서’ 가 답변확정되면서 참가국의 주권 및 영토존중, 상호간 경제·과학·기술·환경 분야 협력, 그리고 인권보호에 합의하였다.
독일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분할 점령하였던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제외한 승전국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통일독일의 국제적 위상 강화를 경계하면서 독일의 통일에 반대하였다. 특히 소련은 독일이 통일될 경우 NATO의 병력이 동진하면서 자국의 안보를 저해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서독은 독일통일에 유일하게 찬성하고 있던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점차 다른 국가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1990년 9월 개최된‘ 2+4 회담’에서 동서독과 승전 4개국 외상은‘ 독일문제의 최종 해결에 관한 조약’에 합의하였으며, 이로써 독일통일에 대한 국제적 장애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독일의 통일에 있어서 서독 정치교육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서독은 정치교육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을 공고히 하고, 사고의 지평을 독일 중심에서 유럽의 평화와 안보 등 국제적 차원으로 확대하였다. 특히 정치교육은 동독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하였다. 동서독 간 경제교류의 활성화는 서독 정부의 포용정책의 결실
이라고 할 수 있지만, 포용정책은 동독의 변화를 수반함으로써 지속성을 가질 수 있었다.
사회문화적 교류를 주저했던 동독은 결국 방문 협정, 교통협정, 우편 및 통신 협정의 체결에 동의하였다. 1973~1985년 사이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 주민은 매년 130~150만 명에 달하였
으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 해인 1988년에는 거의 7백만 명에 달하였다.
서독이 적극적으로 포용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을 통하여 동독에 대해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집단안보체제의 확립으로 안보 불안요소가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서독은 동독이 소련의 승인 없이 서독의 정책을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소련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적극 전개하였으며, 아울러 동구권의 관계개선을 위해서도 힘썼다. 특히 1975년에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개최되고‘ 헬싱키 의정서’가 답변확정되면서 참가국의 주권 및 영토존중, 상호간 경제·과학·기술·환경 분야 협력, 그리고 인권보호에 합의하였다.
독일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분할 점령하였던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동의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제외한 승전국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통일독일의 국제적 위상 강화를 경계하면서 독일의 통일에 반대하였다.
특히 소련은 독일이 통일될 경우 NATO의 병력이 동진하면서 자국의 안보를 저해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서독은 독일통일에 유일하게 찬성하고 있던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점차 다른 국가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1990년 9월 개최된‘ 2+4 회담’ 에서 동서독과 승전 4개국 외상은‘ 독일문제의 최종 해결에 관한 조약’에 합의하였으며, 이로써 독일통일에 대한 국제적 장애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독일의 통일에 있어서 서독 정치교육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서독은 정치교육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을 공고히 하고, 사고의 지평을 독일 중심에서 유럽의 평화와 안보 등 국제적 차원으로 확대하였다.
특히 정치교육은 동독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가 되었다. 서독인들이 동독인을 비하하는‘ 게으른 동쪽 것(Ossi)’ 그리고 동독인들이 서독인들을 비하하는‘ 거만한 서쪽 것(Wessi)’이라
는 용어는 동서독 주민 간 편견과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통일 독일은 동독의 경제가 활성화되고 동독 출신의 정치인이 총리가 되는 등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찾아감에 따라 동서독 주민간‘ 마음의 벽’도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물론 독일의 내적 통합은 물질적·정치적 기회의 균등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존중의 가치와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시키려는 제반 사회단체의 역할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연방정치교육센터가 독일의 분단, 통일, 역사라는 복합적 주제로 실시한 정치교육도 동서독 주민 간 갈등을 완화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 베트남과 예멘의 통일과정과 사례를 통일교육원 홈페이지에서 pdf화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통일과 통일부에서 하는 일에 대해 많은 관심과 협조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