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back.net 단군박공이 운영하는 북한발 도메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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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11.0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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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back 이라길래 단 박.. 단군 박씨;;


북한 블로그 이게 누리꾼들이 만들어낸 루머 가십거리입니까


진짜 북한에서 이런 물밑 일을 합니까?


온갖 흥미거리로 포스팅해서 결국은 자주 들러서 읽다보면 북한의 사상이 심어지는;; 이런 곳들


웹서핑이 무섭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참고하세요

 

 

[단독]
, 해주·남포도 특구 추가
 
 입력 2012.08.16 00:53:45
수정 2012.08.16 00:53:45
 
서해 분쟁지역에 개방… ‘평화 제스처’ 주목
 
 
 
북한은 시장경제 체제가 도입되는 
경제특구를 황해남도 해주와 평안남도 남포를 포함해                
모두 7곳으로 확대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원하기 위해
50억∼60억달러의 상업차관을 제공할 것으로 전해졌다.

베이징의 북한소식통은15일
“중국을 방문 중인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북한의 경제개선계획을 설명하면서 경제특구를 확대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며,
중국 쪽도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기존의 나선, 황금평·위화도, 신의주, 개성 외 해주와 남포가
경제특구로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이 소식통은
“새 경제특구에는 남북 분쟁이 잦은 연평도 인근 해주가 포함된 점을 주목할 만하다”며
“여기에는 경제개방뿐 아니라 정치외교적으로 서해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복합적인 메시지를 대외적으로 보내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남북 간 충돌이 빈번한 연평도 등
서해지역에서 도발을 감행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여진다.
그는 “이는 북한의 개혁·개방과 한반도 안정을 바라는
중국의 이해에도 부합한다”고 말했다.

장 부위원장은 17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비롯 중국 지도부를 만나 당분간
핵무기·미사일 발사 시험이나 무력도발을 하지 않을 뜻을 전달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 외교소식통은
“장 부위원장이 이미 중국 쪽에 경제개발을 위해 100억달러의 차관을 요청했으며,
북·중은 50억∼60억달러 선에서 절충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중국은 유엔안보리 제재를 의식해 정부차관이 아니라
민간 차원의 상업차관 형태로 자금을 지원하고
북한은 이에 무산철광 등 광물자원 개발권을 제공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소식통은 “상업차관은 여러 은행이 채권단을 구성해 장기저리의 자금을 빌려주는
신디케이트론 형태로 북한에 제공될 것”이라면서
“중국은 이 자금이 핵무기 개발이나 통치자금으로 전용되지 않고
경제 개발과 각종 인프라 건설에 활용할 수 있도록
투명한 자금 집행을 요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방중 사흘째를 맞은 장 부위원장은
15일 창춘(長春)에서 쑨정차이(孫政才) 지린(吉林)성 당서기, 왕루린(王儒林) 지린성장을 만나
나선지구 투자에 적극 나설 것을 요청했다.
장 부위원장은 이날 저녁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으로 이동해
성 지도부에 황금평·위화도 공동 개발에 적극 나설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주춘렬 특파원 [email protected]  
 
 
 
 
[단독]
 남북 긴장지역에 ‘평화특구’ 프로젝트…
“北개혁 이정표
 
 
입력 2012.08.16 00:58:17
수정 2012.08.16 00:58:17
 
訪中 장성택, 해주·남포 경제특구 확대 제시
  
경제특구를 전면에 내세운 북한의 경제개혁이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북한이 중국에 나진·선봉과 황금평·위화도와 같은
경제특구를7곳으로 확대할 것을 약속하고
이를 북·중 공동발표문에 명기할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의 북한소식통은
“특구 확대는 북한이 시장경제 체제와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만하다”며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에 큰 변화가 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1980년대 동남아 화교자본을 유치,
사회주의 시장경제 건설에 나섰던 중국식 발전모델이
북한에 이식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북한의 개혁·개방 실험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국제사회의 제재로 특구 개발에 필요한 자금줄이 말라 있고
투자를 결행할 해외기업도 드물다.
이 때문에 북한의 특구 확대가
결국 선언적 수준에 그칠 수 있다는 회의론이 가시지 않고 있다. 
 
 
 
 
 
 
 
 
 
 
 
 
 
 
 
◆확대되는 북한의 경제특구
북한이 특구 지정을 확대하면서 해주경제특구 카드를 꺼낸 점이 주목된다.
해주특구 건설은
2007년 10월 4일 당시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서 가진 정상회담에서 합의했던 사안이다.
당시 해주 인근에 제2의 개성공단을 만들기로 했다.
서해평화특구로도 불렸다.

베이징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해주특구에 중국 산둥성에 진출한 한국의 섬유·신발·피혁업체를 적극 유치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중국 쪽에서는 별다른 경제 실익이 없는 노동집약형 기업의 이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소식통은
“중국쪽에서는 해주특구에 대해 경제뿐 아니라
정치·외교적 의의가 더 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특구 지정은 인근 분쟁 지역인 연평도에서
북한이 도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인 만큼
한반도의 안정을 바라는 중국의 이해에 부합한다”고 평가했다.
해주특구 카드는 경제·외교·정치 등 복합적인 의도가 깔려 있으며,
북한의 개방 수위와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가늠할 중요한 잣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또 평양과 붙어 있는 대동강 하구의 남포에도 경제특구를 건설,
전자와 정보기술(IT)산업과 경공업단지로 개발하기로 했다.
2002년 특구로 지정했다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신의주특구도 황금평·위화도특구와 연계해 공업,
상업, 금융, 물류중심지로 개발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북한의 개방지대가
북·중 접경지에서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베이징 외교가의 한 인사는
“중국은 일단 북한이 약속한 개혁·개방조치의 이행 속도와 상황을 봐가며
중국기업뿐 아니라 홍콩·마카오·
한국기업에 대해서도 대북 투자를 타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북한은2000년대 이후 줄곧 특구 개발을 통해
경제개발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를 되풀이했다.
정부 관계자는
“현재 북한이 진행 중인 경제개선조치는 아직까지 극히 제한적”이라며
“유엔의 제재가 이어지고 남북과 북·미관계가 풀리지 않는 한
북한의 개방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북한 평안남도 남포시에 있는 령남 배수리공장에 2호 도크가 건설돼 있다.

북한은 시장경제체제가 도입되는 경제특구를 기존4곳 외에도

황해남도 해주와 남포 등에도 추가하기로 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김정은의 조기 방중 가능성 대두
중국 지도부의 반응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한다.
소식통은
“중국이 조만간 북한의 경제관리개선조치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또 특구 개발과 경제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약50억∼60억달러의 상업차관을 제공하고 나선,
황금평 등 주요 특구지역의 인프라 건설 및 기업 유치에도
적극 나설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개방조치와 맞물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조기에 방중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베이징 외교가의 한 인사는
“현재 북한 쪽에서는 후계체제 안착과 경제 개방을 위해
김정은의 조기 방중을 중국에 적극 타진했지만 지도부 교체를 앞둔
중국 쪽에서 이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면서
“중국은 북한의 개혁·개방조치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면
올가을 제18차 공산당전국대표대회 전에라도
김정은의 방중이 성사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주춘렬 특파원

 

 

 

北 장성택 이 사진 봤으면…900억 대박날 이곳

 
 
[중앙일보]
 
입력 2012.08.16 01:42
수정 2012.08.16 05:54

[현장에서] 백두산 개방 땐 연 수백억 벌 텐데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한국과 중국 등의 관광객들이 정상 부근 주차장에 내려 걸어가고 있다.
하루 평균 2만5000명이 천지를 둘러본다. [창바이산=최형규 총국장]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
 
 
사진을 잠깐 보시지요.
나무 한 그루 없는 산등성이를 힘겹게 오르는 이 많은 사람들.
도대체 저 너머에 뭐가 있길래 애써 가는 걸까요.
다녀 오신 분들은 알겠네요.
이곳은 한(韓)민족의 성산
백두산(白豆山)이고 저 너머엔 천지(天池)가 있습니다.
한데 중국에서 올랐으니
사진 속 모습은 창바이산(長白山·백두산의 중국식 표기) 정상입니다.
지난주 출장 길에 운 좋게 천지를 봤습니다.
사진 속 중국인·한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말입니다.
검푸른 천지는 ‘성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천지까지 가는 길은 세 가지 공포와 싸워야 합니다.
자동차 사고와 인파,
그리고 소음입니다.
그것도 290위안(약 5만1466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말입니다.
창바이산 입구에 도착하면 두 장의 표를 삽니다.
하나는 입장권(125위안)이고 다른 하나는 버스 승차권(85위안) 입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끝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과 몸을 부대껴야 합니다.
대부분 중국 단체 관광객입니다.
소음의 고통도 견뎌야 합니다.
잣나무와 소나무,
이름 모를 수목 사이로 버스가30여 분 달리면 산 중턱에 도착합니다.
버스에서 내리면 정상까지 가는 10인승 승합차 승차권(80위안)을 또 사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또 공포입니다.
정상까지 구절양장(九折羊腸),
10.2㎞의 시멘트 포장2차로 도로인데 그 폭이 넓어야 6m 남짓입니다.
운전사는 ‘질주 본능’을 발휘합니다.
곡선이든 직선이든 가속기에서 발을 떼는 법이 없습니다.
코너를 돌 땐 찍 소리와 함께 타이어 타는 냄새도 납니다.
20분 만에 정상 도착입니다.
더 무서운 건 도로 중간 곳곳에 솟은 차선을 대신하는 철근입니다.
타이어가 철근을 스치기라도 하면 천길 낭떠러지입니다.
무려140대의 벤츠 승합차가 매일 이렇게 질주합니다.
하산할 땐 더 빨라15분 만에 주파합니다.
차라리 ‘인명재천(人命在天)’ 하며 눈 감는 게 상책입니다.

이날 천지에 오른 사람만2만5000여 명.
입장 수입은12억8000만원.
한 달이면 대략384억원입니다.
만약 북한이 백두산을 한국에 완전히 개방한다면 어떨까요.
적게 잡아도 하루5000명은 가지 않을까요.
성산(聖山)에 오르면서 겪는 공포도 줄일 수 있을 거고요.
중국 입장료 기준으로 하면 하루2억5000만원,
연 수백억원 수입도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관광객들이 먹고 자는 데 쓰는 비용에 비하면 입장료는 ‘새 발의 피’겠지요.
마침 장성택 북한 국방위 부위원장이 창바이산 부근 지린(吉林)성에서
산업시찰과 투자유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백두산 하나만 개방해도 연900억원 투자유치 효과가 있는데….
맹자가 말했다지요.
‘사근구원(舍近求遠)의 우(愚)’를 범하지 말라고요.
멀리서 구하지 말고 가까이서
북한 경제개발의 묘수를 찾는 지혜가 아쉽습니다.
<백두산에서>

 

 

 

 

[최성재 칼럼] 

김정은을 종이비행기에 태우다가...

 

 

 

北 장성택의 다음 숙청은

조카 김정은! 언제쯤?

 

 

  • 최종편집 2012.07.30 11:49:42

  • 최성재 객원 칼럼니스트

 

김정은은 언제 숙청될까?  
  

 

지금은 장성택 시대,

김정은은 장성택의 종이비행기를 타고 있다. 

 

최성재    


   
세계유일의 공산왕조는 깡패국가(rogue state)이다.

깡패국가는 하나에서 열까지 폭력과 협박으로 유지된다.

폭력의 원천은 군대이고 협박의 원천은 국가보위부(정보부)와 인민보안부(경찰)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인민군의 원수이자 노동당의 총비서로서 폭력과 협박의 수단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중에서도 인민군의 폭력이 권력의 핵심이었다.

 

▲김일성과 김정일.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서,
김일성과 김정일은 인민군에 충견을 심었다.
뇌 한가운데 절대복종의 생체칩을 심어 두었기 때문에,
왕의 눈과 왕의 귀가 심지어 똥자리에서 잠자리까지 완벽하게 지켜보고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충견은 영원한 주인에겐 언제나 꼬리를 흔들 뿐 이빨은 꿈에도 드러내지 못했다.

김일성의 충견은 오진우였고,
김정일의 충견은 오극렬이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 하다가도 촘촘하다.
20년 걸릴 후계자 수업을2년 만에 속성으로 가르치던 중 독재자 김정일이 덜컥 죽어 버렸다.
총참모장 이영호(리영호라고 표기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있을진저!)가
김정일 장례위원 서열4번으로3대 독재자 김정은과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이영호는 제2의 오진우나 오극렬이 아니었다.
2012년 7월 15일 이영호(70)는 전격적으로 숙청되었다.
오극렬의 뒤는 누가 이어받을까.
현재로선 어린 시절 김정일의 의형제였던 군 총정치국장 최용해
(62, 최룡해라고 표기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있을진저!)다.

당 우위 정책에 의해 공산국가에서는 원래 군 총정치국장이 총참모장보다 높다.

그러나 북한은 권력이 유일 독재자와의 거리에 비례하므로 그것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직위와 무관하게 오진우나 오극렬은 김일성이나 김정일 외에는 누구의 명령도 안 받았던 것이다.

한편 김정일은 노동당 위에 국방위원회를 만들어 그것으로 깡패국가를 이끌었다.

현재로선 어느 부서가 폭력과 협박을 장악하고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조금씩 윤곽은 드러난다.

 


▲김정은, 고모 김경희, 고모부 장성택.

지금은 김일성의 사위이자 김정일의 매제이자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의 시대다.
김정은은 폭력도 협박도 이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성택은 별로 높지 않은 당 행정부장으로서 우선 협박의 수단을 장악했다.
국가보위부와 인민보안부가 현재 행정부장 산하에 들어가 있다.
문제는 그보다 센 인민군인데,
군부 내에서 나름대로 한 축을 이루던
장성택의 두 형이 김정일 생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건 결코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이번에 이영호를 숙청함으로써
장성택은 인민군의 폭력마저 간접적으로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평소에 그를 잘 따르던 최용해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한국과 미국, 일본 등에서 이른바 북한 전문가들이 이제
김정은이 권력을 확실히 장악하여 선군(先軍, 군 우위)에서
당 우위로 나아갈 것이라고 다투어 선무당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
하지만,
다들 헛다리짚고 있다.
여우 장성택의 다음 수순은 김정은 숙청이다.
과연 그 시기가 언제일까?
숙청 과정은 어떠할까?
 
▲김정일 시대의 2인자 장성택.

장성택은 김일성 시대에는3인자였고,
김정일 시대에는2인자였다.
김일성은 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모든 조직의 인사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여
노동당만이 아니라 인민군과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인민보안부)의 절대 충성을 확보했다.
한때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거기에 눈독을 들였다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에게 쫓겨났다.
김정일은 당 조직지도부를 접수하여 극도로 조심하며 김일성도 모르게 자신의 인맥을 구축했다.
김일성의 눈을 가리고 귀를 멀게 하기 위해,
김정일은 당의 선전선동부를 대대적으로 키웠다.
김일성을 붕붕 띄워 백두산을 넘어 북극 하늘에 닿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아첨과 거짓말이 좋아서 허허 웃다가 어느 날 내려다보니,
너무 높이 올라가서 문득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귀신도 머리를 풀어헤치고 곡할 정도로 권력이 찬탈된 것이다.
1972년부터1992년까지
김정일은 이렇게 20년에 걸친 작업 끝에 아비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것이다. 
 
장성택이 김정일을 계승해 제1부부장이란 직함(부장은 김정일)으로 당 조직지도부를 맡았다.
여동생 김경희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은 김정일로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대신 김정일은 손가락 하나 까딱함으로써
장성택이 대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두 번이나 장성택을 숙청했다.

장성택은 김정일 이상으로 권력의 속성을 아는 자다.
김정일도 눈치 채지 못하게 이전에
김정일이 수작하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당 조직지도부뿐 아니라3대 혁명소조를 통해,
기성세대와 신세대 양쪽에서 은밀하게 조직을 키웠다.

마침내 때가 왔다.

김정일이 3천 궁녀와 밤의 향락에 탐닉하다가

‘장수 만세’ 한국으로 치면 새파란 나이에 뇌졸중에 걸린 것이다.

그때부터 장성택은 여유만만 장성택의 마패를 만들어 세력을 키웠다.

뒤늦게 정신이 깜박깜박하는 김정일이 김정철과 김정은 사이를 오가다가

김정은을 낙점하여 속성으로3대 독재자로 키우기 시작했다.
 

▲현재 북한 1인지 장성택과 심복 최용해.

아마 장성택은 당의 선전선동부도 이미 접수했을 것이다.
그것으로 김정일이 작업하던 것처럼 애송이 김정은을 계속 종이비행기에 태울 것이다.
놀이공원에서 김정은이 청룡열차를 타고 희희낙락하는 사진이 전 세계로 뿌려졌는데,
그것도 장성택의 작품일 것이다.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국방위원장보다 높은 직위, 제1부위원장이라고 해야 국방위원장보다 낮게 됨.),
인민군 원수에 이어 머잖아 당 총비서로 ‘밀어 올릴지’도 모른다.
 
개혁개방?
그건 장성택도 할 줄 모른다.
흉내는 낼 것이다.
북한에는 당과 군대와 경찰에 대항할 세력이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국가권력과 수직적 연대(vertical solidarity)를 도모하여
권력을 나눠가질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면,
권력 자체의 속성에 의해 권력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는 코털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중국에는 모택동 사후 수구적(守舊的)4인방에 대항할 막강한 세력이 존재했었다.
등소평이 아니었어도 누군가 그 일을 할 사람들이 수두룩했던 것이다.
옛 소련과 동구와 동독에는 라디오와TV와 삐라와 인적 교류와 화룡점정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시장경제의KO승을 누구도 부인 못하게끔 됐다.
북한에는 이런 게 전혀 없다.
김씨공산왕조가 개혁개방의 씨를 말렸던 것이다.

한국의 얼빠진 정권들이 김씨왕조에게 연방 얻어터지고 협박 당하면서도
시퍼런 눈가를 계란으로 마사지하면서 기생처럼 방글방글 웃고
개처럼 꼬리를 말거나 흔들며 조공을 바치고 또 바치고,
안 바치면 한국판 선전선동부가 난리 법석을 떤 것도
공산군사독재왕조 유지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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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들이 화장실서 나오지 않아 들어가보니…"

 

입력 : 2012.04.28 03:06

수정 : 2012.04.28 15:54

 

탈북자 수기 공모전 시상
최우수상 김광일씨 - "버려진 날 키운 어머니…

죄스러움에 잠 못 이룹니다"
안보 부문 수상 김미연씨 -

"돼지풀로 지은 밥 먹은 아들 독이 올라 링거도 못 맞아…"

 
"라 40. 인민보안성 12교화소 복역자였던 내 이름.
내가 구류되어 있던 곳은 감방이 10호까지 있었다.
너비가 2.5m, 길이가 3.5m 정도이고 방 사이는
30cm 넘는 콘크리트 벽,
앞면에는 40mm가 넘는 철창이 있었다.
구석엔 높이 40cm쯤 되는 칸막이 뒤에 변기가 있었는데
말 그대로 '똥굴'이라 항상 악취가 푹 배어 있다.
" (김광일 '무죄')

2004년 7월 김광일(43)씨는 함경북도 회령역 앞에서
자신을 추격하던 보안원들에게 체포됐다.
북한에서는 조선인민부 군부대 군무원으로 일했다.
탈북 계획을 당국에 들켰기 때문이다.
법적 절차 없이 바로 구류장에 보내진 것은 '신분' 때문이었다.
김씨는 "비행사, 잠수함, 대남공작 요원들은 일가친척들이 살인을 저질러도
집행유예를 받지만 나는 예외가 될 수 없었다"고 했다.

"4호 감방에 배정됐다.
살인·강간 등을 저지른 강인범(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뜻함)들과
섞여8~15명이 한방을 썼다.
탈북을 시도했다가 걸린
'월경자'들이 절반을 넘게 차지했고,
이 중 80%는 여성이었다."

그간 어머니는 아홉 번 아들을 면회했다.
김씨가 태어난 지11개월 되던 해 오갈 데 없이 버려진 것을 데려다 키운 어머니였다.
알아볼 수 없게 변한 아들의 얼굴을 보며 어머니는 "으이그…으이그"만 반복했다.
74살이 넘은 노인은 법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제발 아들을 살려달라"며 빌었다.


 

27일 서울 강서경찰서에서 열린 북한이탈주민 수기 공모전 시상식에서 인권운동가인

수잔 솔티(사진 오른쪽) 북한자유연합 대표가 수상자에게 상장을 건네고 있다.

 /허영한 기자 [email protected]
"출소한 이듬해인 2009년 내 무릎을 베고 가셨다.
지금도 북한의 황망한 언덕에 누워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죄스러움에 잠도 이루지 못한다."

어머니를 보낸 김씨는 또다시 탈북을 감행,
2009년 한국땅을 밟았다.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긴 김씨는,
지난 27일 자유북한방송과 강서경찰서가 주최한
탈북자 수기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김씨는 "살아서 대한민국 품에 안긴 산증인으로
북한의 실상을 기록으로 남겨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밥 대신 풀을 먹다 식중독에 걸린 아들을 보며
탈북을 결심한 김미연(여·57·가명)씨가 쓴 '고난의 행군'은
이날 안보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래도11살 남자라고 홀로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30분이 지나도 아들은 나오지 않고 울음소리만 들렸습니다.
싸리 빗자루 꼬챙이를 꺾어 아들의 항문에 걸려 있는 똥을 꺼내 주었습니다.
능쟁이(돼지풀) 독으로 까맣게 탄 염소 똥처럼 딸랑딸랑 떨어져 나왔는데…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돼지풀로 지은 아침밥을 먹은 아들.
링거를 꽂아야 했지만 독이 올라 온몸이 부어오른 아들의 몸에서 혈관을 찾을 수 없었다.
울다 지쳐 들른 병원 화장실에선 밥 대신 쑥을 뜯어 먹다가
고열에 시달려 코가 문드러진 70대 노인을 만나기도 했다.

1999년과 2000년, 김씨는 두 번을 강제 북송당했다.
구류소에 들어가서는 중국에서 모은 돈을 빼앗길까 입으로 집어삼켰고,
배변과 함께 걸러져 나온 지폐를 줍다가 보안관에게 걸리기도 했다.

27일 오후3시 강서경찰서 강당에서 열린 탈북자 수기 시상식에 참석한
인권운동가 수잔 솔티(53) 여사는
"북한의 인권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밝혀지게 되어 기쁘다"며
"고통스러운 작업이겠지만 남한 사람들이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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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도깨비 사는 나라' 북한...

 다시 가기로 했습니다

 

 
 
 
미국에 돌아왔지만, 그리웠습니다
 
 
12.07.28 21:39l
최종 업데이트 12.07.28 21:39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 10월 이후 지난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5월에는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 굽 높은 신발을 신은 멋쟁이 북한 여학생 ⓒ 신은미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운명! 반쪽 몸으로 성한 몸인 것처럼 견뎌온

지난 세월이 비참하고 또 비참해 눈물이 난다.

지척에 서로의 반쪽을 두고서 왜,

무엇이 무서워 모질게 외면하며 살아왔던가.

녘 동포를 등지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온전한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남과 북,

한민족이 서로 보듬어 안아야 한다'는 생각을 내내 한다.

 

서울서부터 우리를 마중 나온 남편 친구와 보낸 북경에서의 하루도,

미국 땅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침울함만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남편 역시 한숨으로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다른 많은 나라도 여행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접해봤으나

이토록 마음을 비통하게 한 여행은 난생처음이다.

서로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형제의 아픔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내 마음에 가득했다.

남과 북,

우리는 같이 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고통을 덜어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가슴을 가득 채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여행서 돌아와 보낸 며칠.

이 시간은 마치 무의미한 영상필름을 보는 것처럼 스르르 지나갔다.

여전히 남편은 별다른 말이 없다.

'그저 밥맛이 없다'며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음이 지금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집 안 청소를 했다.

침울함이 지배하는 내 마음도 깨끗이 청소하고 싶어서...

깨끗한 빈자리를 소망과 희망으로 가득 채울 생각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 무슨 일이 있어도 여행 가방을 먼저 정리하고,

빨랫감을 다 빨아 해치우고 나서야 잠이 오는 나였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여행 후유증을 이기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몇 날 며칠을 방치해놨던,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여행 가방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갈 때와는 달리 헐렁해져 있는 가방 때문인지,

북한에 두고 온 것만 같은 내 호기심 보따리 때문인지 내 마음도 허전하다.

가방 속을 정리하자니,

그곳에서의 추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열흘이라는 시간은 그동안 수십 년을 방치해뒀던 민족애에 불을 지폈다.

마른 장작더미와 같았던 내 마음은 이내 활활 타올랐다.

애잔한 미소가 뜨거운 입김이 돼 내 눈동자를 붉게 물들인다.

내 마음속 '호기심'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사명감'이 차지했다.

 

북한 사람들의 미소에 친구들은 '충격'

 

▲ 갓 결혼한 북한의 신혼 부부와 친구들 ⓒ 신은미

 

전혀 연락도 닿지 않는 '무서운 나라'에 간

우리를 두고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쌓여가는 궁금증을 주체하지 못하게 돼 버린

가족·친구·친지 그리고 지인들이 우리 부부의 소식을 기다리다 못해 빗발치게 전화를 해댄다.

외국인 친구들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미국인 친구들은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우리도 북한 여행을 하고 싶다'며 이야기를 듣겠다고 난리다.

 

우리는 여러 팀으로 그룹을 나눠 사람들을 초대해 그곳에서 찍어온 천여 장의 사진들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마치 비밀리에 촬영된 첩보영화 시사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마냥 흥분에 들떠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들은 우리 부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처음 느꼈던 심정을 이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됐다.

아마 자신들이 마음에 품고 있었던 모습과 실상들이 확연히 달라서 배신감도 실망도 클 것이다.

아마 그들은 우리 부부의 말이나 사진 속에서 그들 머릿속에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나 역시 북한에 다녀오기 전에는 그랬으니까.

 

그러나 사진 속 활짝 웃고 있는 사람,

다정히 손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가족들...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순간들. 이런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던 그들은

북한을 '우리와 똑같은 한 세기를 공유하고 있는 이웃 나라',

그리고 북한 사람들을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또 다른 반쪽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민족'이라고 느끼며 충격을 받는 듯했다.

 

도깨비가 사는 북한? 정말 그럴까요

 

▲ 장난기 많은 얼굴의 북한 소녀 ⓒ 신은미

 

▲ 북한의 출퇴근 버스 ⓒ 신은미

 

내가 자라던 시절의 반공 교육에 의하면,

북한 사람들은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도깨비 악당'들이었다.

그들은 슬픔도 기쁨도 사랑도 연민도 인정도 웃음도 모르는,

그저 빨간 깃발 아래 총부리 겨누며 행진하는 무서운 로봇들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어린 소년을 무참히 죽일 것만 같았던 '짐승'같은 존재였다.

 

어린 시절 학교 교과서에서 본 북한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 논이든 공장이든

어디서든지 무서운 인민군들이 총대를 메고 감시하며 서 있는 곳,

자식이 부모를 신고해 자식이 보는 앞에서 부모를 꽁꽁 묶어 잡아가는 곳이었다.

때문에 미술시간에 북한 사람들을 그릴 때면 나도 그들의 얼굴을 도깨비같이 그렸으며,

얼굴에는 어김없이 빨간 색깔을 덧칠했다.

 

예전 한국에서 받은 반공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은 세대인 내 친구들.

그들은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이 있었다.

때문에 눈앞에 펼쳐지는 우리 부부의 여행 사진을 접하는 그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오래 전 여성들로 구성된 북한 응원단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 기자가

한 응원단원에게 다가가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 적이 있다.

당시 기자가 "북한에서도 연예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응원단원은 기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당시 나도 호기심을 품고 북한 여성의 대답을 기다리다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여성 응원단원이 왜 그 기자를 단박에 외면했는지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당시 기자는 비합리적인 반공 교육이 초래하는 부작용이나 역효과 또한 고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북한 여행사진을 보던 한 어르신이 한쪽에서 눈물을 닦으신다.

그분의 고향은 북녘땅.

그동안 꽉 닫아뒀던

'묵은지병'을 따듯 마음의 병뚜껑을 여니 슬픔과 그리움이 복받쳐 흐르셨나 보다.

 

 

▲ 다소곳이 인사를 하는 북한의 여학생 ⓒ 신은미

 

그동안 무관심했던 민족의 비극이 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 데이트 하는 북한의 남녀 ⓒ 신은미

 

내가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힘없고 무능한 내 자신이 너무 속상해서 나 역시 흔들어진 샴페인처럼 눈물을 쏟는다.

 

미국인 친구들은 미소 짓고 있는 북한사람들의 사진에 놀라워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북한 사람이 웃고 있는 사진을 처음 본다'고 한다.

 

그렇다.

미국 언론에 비친 북한의 모습 또한 왜곡돼 있기는 매한가지다.

패션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옷을 입고 걸어가는 시민들,

텅 빈 평양 거리,

인상 쓰고 있는 군인들,

호전적으로 비치는 군대의 행진...

이것이 서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북한이다.

 

한국의 경우,

남북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지만,

미국은 왜 북한을 그런 식으로 왜곡하는지 모르겠다.

일부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미국의 군산복합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미국에 위협이 되는 '대상'이 필요하며 북한이 그 중 하나라고 한다.

엄청난 군사력을 갖고 있는 미국이,

북한 국방비의 몇백 배에 달하는 돈을 국방비로 쓰고 있는

미국이 북한을 '위협을 가할지 모르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니...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된다.

 

한국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친구들도 자신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는 사진을 보니 북한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 것 같았다.

 

'다시 가자'... 다시 밟고 싶은 우리 땅 

슬라이드 쇼를 하는 동안 9명의 한국 친구들(모두 미국시민권자)과 7명의 미국 친구들이

'북한 여행을 함께 다시 하자'며 간절히 청했다. 

나 또한 지난번 여행 때 북한의

뿐만 아니라 전쟁기념관의 여성군관 해설원이 추천한 '민족의 기상이 깃들어 있다'는

백두산을,

남의 나라인 중국 땅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땅을 밟고 가 보리라'는 깊은 바람도 마음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여행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다시 북한으로 떠날 채비를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2011년12월 중순부터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두 번째의 북한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논의와 조정 끝에 어렵사리 

2012년5월8일부터5월19일까지 11박12일의 일정이 잡혔다.

 

 

▲ 북한 조선중앙TV가 지난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열차에서 현지지도 중 과로로

   사망했다고 보도한 가운데, 12월19일 오후 서울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 모니터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그러던 중 김정일 위원장 사망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는 매시간 특집으로 이 뉴스를 온종일 내보냈다.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을 가리키며 

'진짜가 아닌 가식'이라는 등의 해설을 붙이며 장례식 장면도 보여줬다.

 

극소수이긴 하나 일부 미국 전문가가 텔레비전에 나와 

'북한 사람들의 통곡이 진심 어린 행동일 수 있다'는 견해를 펼치기도 했다. 

어떤 미국 방송에서는 정치학자들과의 좌담을 통해 마치

한반도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2012년 1월 10일께가 되니 9명의 한국 친구들 중4명이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는

북한에 갈 수 없겠다며 두려운 심정을 전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이 열심히 여행계획을 짜고 있는데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한다는 것이었다. 

이 뉴스가 나오자 또 다른3명의 한국 친구들이 여행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7명의 미국 친구들은 모두 '계획에 변화는 없다'며 혹시

'우리 부부도 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해 매일 우리를 떠보려 전화를 걸었다.

 

 

▲ 설경이와 함께한 즐거웠던 한 때 ⓒ 신은미

 

오히려 그들은 북한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호기심에 더 흥분이 된다'며 마치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들떴다.

이들은

'왜

한국 친구들이 여행을 취소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이 미국 친구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땅에서 지척에 철조망을 쳐 놓고 총부리를 겨누며,

언제든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과 불안감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

게다가 나보다 힘센 사람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전전긍긍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이런저런 일로 인해 남은 사람들은 한국인 부부 한 쌍과 미국인 친구7명,

그리고 우리 부부를 포함해 모두 11명이 됐다.

 

어느새 내 마음은 이산가족이 돼 평양에 두고 온 딸,

설경이와 사랑을 듬뿍 주고 싶은 리만룡 안내원, 

리인덕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

그리고 스쳐 지나간 정겨운 북녘 동포들을 향해 날개치듯 달려가고 있었다.

  © 2012 OhmyNews
 
 
 

 

북한 김정은 최대 고민은 성병, 왜?

 

 

2012-05-08 00:52

 

북한 정권을 장악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최대 고민이
성병인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8일 북한 전문온라인매체 뉴포커스(www.newfocus.co.kr)가
소식통을 통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김정은 제1비서는 내부적으로
평양 소룡1동에 위치한 ‘평양피부성병원’을 성병전문병원으로 지정했다.
‘평양피부성병원’은 피부질환(피부과에 해당) 치료가 전문이지만
평양을 비롯한 전국에 넘쳐나는 성병환자들을 위해
보건2국에 성병전문병원으로 사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했다.
 
북한의 내각 보건성은 1국(북한 간부담당)과 2국(일반병원 담당)으로 나뉘는데
북한 당국이 직접 2국에 성병전문치료와 관련해 지시를 내린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라고 뉴포커스는 지적했다.
이것은 현재 북한의 성병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것.
 
김정일 정권 때에도 성병은 북한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지난 2002년 북한 전 지역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두 차례나 성병검사를 실행했다.
처음 전국검사 때에는 성병에 걸린 남녀환자들을 해당 소속 기관에 통보해
특별관리하게 했지만 그 통에 많은 성병환자들이 사실을 숨기고
치료를 기피하자 이후 공개하지 말도록 했다.
 
당시 국제의료단체들에서도 은밀하게 진행되던
북한의 성병 치료약 구매 사실을 알고
지원해주겠다고 제안했었지만 북한 정권은 성병은 자본주의가 낳은 퇴폐병이라며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에이즈가 없는 나라,
성병이 없는 청결 사회주의국가라는 체제자존심을 내세워 거부했다.
 
김정일은 국제사회의 의료지원을 받지 않는 대신
자체적으로 성병 약을 연구개발하라고 지시했지만 현재까지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특히 임질같은 경우 약이 없어 페니실린 400대를 수개월에 거쳐 주사하는
치료방법이 고작인데 병의 고통보다 치료 고통이 더욱 커 포기하는
바람에 만성환자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자료=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이에 김정은 제1비서는 보건2국에 성병과 관련한 강력한 대책을 주문하고
‘평양피부성병원’을 선택한 배경에 대해 소식통은
“최초의 성병환자들이 특정부위의 가려움 통증을 호소하며
평양피부성병원을 찾게 됐다.
환자들도 산부인병원이나 비뇨기병원보다 피부성병원 출입을 더 원했다.
북한 보건국은 환자들의 심리적 편의를 위해
피부성병원의 성병치료를 허용하게 됐는데
그 과정에 평양피부성병원은 성병과 관련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갖게 됐다.
그러나 나니 평양피부성병원이 지금은
북한에서 최고의 성병전문병원으로 됐다”고 설명했다.
 
뉴포커스에 따르면 성병 전파의 주된 원인 경제난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량아사와 함께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여성들이 밥 한 끼에도 몸을 파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통신원은 성병을 전국으로 빠르게 전파시킨 주역들이
북한군인들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북한은 군사복무기간이 10년인데 표창휴가,
부대이동,
자택치료 등의 이유로 선군정치의 나라답게 군인들의 이동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런 군인들을 상대로 하는 매춘도 늘어나면서
성병은 통제 불능으로 확산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북한 역 주변에는 일명 ‘꽃바꾸’(꽃과 성을 바꾼다는 의미)라는
이름으로 군인만을 상대로 매춘하는 여성들이 북적인다고 한다.
 
탈북자의 인터뷰를 통해 북한 성교육의 실태를 전했다. 
탈북자 박현숙(가명 33세)에 따르면
“북한의 청소년들은 성교육을 거의 받지 않으며,
 대학교가서야 생물과목에서
인체의 구조에 관해 배우는 정도”라고 말했다.
 
북한의 보통 주민에게는 먹고사는 기본적인 조차 힘들기 때문에,
성교육까지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계층사회의 특성상 간부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성범죄들과 그것을
모방한 일반인들의 성범죄도 다양하지만 성차별이 합법이나
다름없는 북한이어서 성희롱이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피해자는 아마도 ‘여성’일 것이다.
한 예로 버스등 혼잡한 대중교통과 잦은 정전으로 인한 지하철 안에서도
성추행이 수시로 발생하지만,
남성 중심적 가치관이 강한 북한의 여성은 수치심을 느껴
제대로 신고하기도 쉽지 않다.
 
1990년대 전 북한여성들은 위생유지,
육아법 정도만 교육받았는데,
1990년대 중반부터 청소년들 간에 풍기문란정도가 심해지자,
그동안 가사교육만 받던 여학생들이 남녀 간의 신체구조차이와 각종성병,
생리현상 및 피임방법, 이성교제시의 주의할 점에 대해 교육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선 그런 교육과목을 “위생”이라고 한다.
 
[email protected]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소지품 두고 내려오라는 안내원, 왠지 불안하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17]

시작된 봄축전 공연, 그리고 재회

 
 
12.08.06 21:31
최종 업데이트 12.08.07 09 :05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마지막 리허설을 마친 날 오후,

휴식을 위해 우리는 김일성 광장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광장에서 춤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박물관에서 한 여자가 뛰어나와 우리의 손을 잡아 흔들며 반기는 것이 아닌가!

지난번 방문 때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것이 남편을 잘 만나서 그런 것 같다"고 농담했던 바로 그 해설원이다.


너무나 놀라며 "어떻게 또 왔느냐"고 묻는다. 

재미동포 예술단원으로 왔다고 하자 자기도 꼭 구경하러 가겠단다. 

나를 아는 북한 사람이 객석에 앉아

내 공연을 지켜본다는 것을 상상하니 갑자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의 도시 '평양'

 

▲ 다시 만난 조선미술박물관 해설원. ⓒ 신은미

 

▲ 개막식 공연 장면. ⓒ 신은미

 

이날 저녁,

우리는 봄축전 개막식에 참가했다.

'재미동포 예술단'이라는 푯말을 앞세우고 어린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동평양대극장'에 입장했다.

지난번 뉴욕필하모니가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공연을 했다는 바로 그 극장이다.

과연 뉴욕필하모니가 칭찬할만하다.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평양은 '공연장의 도시'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극장들이 도처에 널려있으니 말이다.

북한 사람들에게 음악은 생활화돼 있는 듯하다.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안단다. 

그런데 이들에게 음악이란 단순히 즐기는 오락만은 아닌 것 같다.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사상을 고취하고 단결을 도모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하다. 

거의 모든 예술 작품들이 그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드디어 연주회 날이 밝았다. 

내 노래를 들어 줄 북한동포들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그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북한 성악가들이 마이크 쓰지 않는 이유, 따로 있었네

 

▲ 같은 날 공연하는 외국 예술단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 신은미

 

평양음대 연주홀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온 유럽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리허설을 하고 있다.

무대 조명 및 소도구 등을 챙기는 아저씨들과 음악감독 아저씨도 분주히 오간다. 

도대체 누가,

몇 시에,

몇 번째 순서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이곳 연주홀에 오기까지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의 안내원 아저씨들에게 물어봐도 "공연 시작할 때가 돼봐야 압네다"라는

말 한마디뿐이다. 

도저히 공연이 제대로 진행될 것 같지 않았다.

 

"마지막 점검 순서가 됐다"며 

한 남학생이 분장실로 나를 찾으러 온 것을 보니 오늘 연주를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교복으로 보이는 하얀 셔츠에 검정색 치마 내지는 바지를 입은 학생들이 열심히 경청하고 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음악감독이 "마이크 없이 한 번 더 불러 주시겠습네까"란다. 

예전에는 모든 음악에 무조건 마이크를 사용했는데, 

요즘 들어 마이크 없이 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의 성악가들에게

다른 나라들의 성악가들처럼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방도를 찾으라고 생전에 지시했다고 한다.

그 대책의 일환으로 이탈리아의 

'벨칸토식' 창법을, 1년에 몇 개월씩

외국에서 성악가를 초빙해 특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수년 뒤에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며 들어왔던

북한식 전통 창법은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특별히 음악감독 선생이 내게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부르라고 한 것도

 아마 학생들에게 교육 차원에서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분장실에 돌아오니 

남편이 중요한 비밀정보라도 입수한 듯 헐레벌떡 분장실로 뛰어들어왔다.

공연장의 여러 사람한테 물어서 어렵사리 알아냈다며 정확한 내 연주 차례를 가르쳐 주고 갔다.

그나마 그 정보가 정확한지 조차 의문이다.

과연 정상적으로 연주가 진행될 수 있을는지 내 눈에는 모든 정황들이 어설프게 보인다.

 

북한의 성형수술 그리고 멋부리는 여자들 

반주자 박혜영 선생은 옆에서 열심히 치장을 하고 있다.

크고 예쁜 눈을 더 크고 더 예뻐 보이게 하려는지 

눈꺼풀 위에 쌍꺼풀을 만들어주는 임시 테이프를 붙이고 있다.

예전에 내 친구가 자기 눈이 작다면서 틈만 나면

테이프 같은 것을 열심히 눈에 붙이던 기억이 살아나서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김정남 안내원이 그 광경을 지켜보더니 한마디 한다.

 

"아무튼 우리 딸을 비롯해서 여자들 맵시(모양) 내는 것은 아무도 못 말립네다.

머리에 물들이는 것을 그렇게 단속해도 소용이 없습네다.

(조그마한 소리로 귀에다 대고는) 요즈음 들어서는 쌍꺼풀 수술이 유행입네다.

엉터리 시술사한테 해서 실패하는 녀성들도 꽤 있답네다.

오죽하면

'수술하는 것은 말리지 않으니 제발 정식 병원에 가서

제대로 쌍꺼풀 수술을 받으라'고 하겠습네까?"

 

그러고 보니 쌍꺼풀 수술을 한 여성들,

그리고 머리카락을 밝은 색상으로 물들인 여성들이 종종 눈에 띈다.

 

▲ 쌍꺼풀 수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 여성 ⓒ 신은미

 

내 관심은 

'내 순서는 몇 번째며 언제 무대 뒤로 나가 있어야 하는지'였다.

하지만 김정남 안내원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선생님 순서가 되면 부르러 오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사라졌다.

이런 상황이 매우 익숙한지 박혜영 선생 또한 별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머리를 동네 미장원에서 하고 왔는데,

어색해 보이지는 않습네까"라며

화장을 하다 말고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해 한다.

 

내가 "아니야,

너무 예뻐.

마치 궁전 안을 거닐고 있는 공주 같아"라고 말해 주니

'다행이다' 싶은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멋진 포즈를 잡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박혜영 선생의 예쁜 모습에 빠져 정작

나는 무대에 오를 때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 게 좋을지 정하지도 못했다.

 

사실 나는 외국 노래를 부를 생각에 서양 드레스에만 신경을 써 가지고 왔는데,

이곳 노래를 부르게 됐으니 드레스보다는 한복을 입는 게 나을 듯했다. 

혹시나 해서 미국서 가져온 한복을 입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동포 예술단 중 어느 누구도 한복을 입은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조선 옷은 단아해야지요... 요새 옷들은 촌스러워요"

 

▲ 분장실에서 대기 중인 필자 ⓒ 신은미

 

북한의 여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복을 즐겨 입는다.

그것도 화려한 디자인의 한복을 말이다.

이들 한복에 비하니 내 한복은 초라하기 그지없어 불쌍해 보일 지경. 

그래도 나는 한복을 입기로 결정했다.

 

정신없이 치장하고 있던 박혜영 선생이 한복 입은 나를 보더니,

"선생님, 너무 좋습네다.

빨간 저고리에 단순한 문양의 하얀 치마가 너무나 고와 보입네다"라고 말한다.

한복이 초라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들통 났는지,

박혜영 선생의 위로는 끊이지 않는다.

 

"선생님,

자고로 조선 옷은 단아하고 정숙해야 지조 있어 보이지

요즘처럼 너무 화려하게 만들어진 조선 옷은 멋져 보이기는커녕 촌스러워 보입네다." 

 

박혜영 선생의 말 한마디에 위로가 된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 고맙게 느껴진다.

 

드디어 시작된 평양 공연 

연주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복을 차려입은 안내원들이 줄지어 들어오는 관객을 객석으로 안내한다. 

남성 관객들은 신사복이나 인민복,

여자들은 한복이나 정장을 차려입고 왔다. 

극장 안내원은 바지를 입고 온 한 여성 관객에게

'다음부터는 치마를 입고 오라'며 정중한 주의를 주기도 했다.

 

관객들은 자리에 앉아 엄숙한 자세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경연대회의 심사위원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이내 주의사항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공연 중 옆 사람과 얘기를 한다든가,

껌을 씹는다든가,

손전화를 켜놓고 있다든가 하는 행동을 자제해 주십시오."

 

▲ 관객들의 모습 ⓒ 신은미

 

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과연 저 딱딱한 모습의 사람들에게

내 마음이 노래로 전달될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게다가 죽 늘어선,

중계방송을 위한 텔레비전 카메라들이 내 마음속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무대 뒤에 있는 연습실로 향한다. 

오로지 내 마음이 공연장을 찾은

저 북한동포들에게 순수히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박혜영 선생과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 연습에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제법 지나 김정남 안내원이 허겁지겁 나를 찾아왔다.

다음에 무대에 올라가야 하니 준비하라고.

 

▲ 한복을 화려하게 차려 입은 공연 사회자 ⓒ 신은미

 

▲ 공연 중인 필자 ⓒ 신은미

 

화려한 한복을 멋지게 입은 사회자가 내 차례를 소개한다.

살짝 객석을 내다보니 빈자리 없이 꽉 차 있다.

마음이 어느새 벅찬 감격으로 흥분된다. 

 

드디어 나는 무대의 중앙에 섰고, 

화려한 불빛 조명을 받았다. 

박혜영 선생의 감미로운 전주곡이 시작된다. 

마치 심사위원처럼 심각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들 사이에 작은 파장이 인 듯하다. 

앞서 연주한 사람들 모두가 서양음악을 연주했는데,

내 차례가 되고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니 전주서부터 벌써 관객들은 감흥을 느낀 듯하다.

 

민족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의 소망이 노래를 통해

저들의 마음으로 흘러들어 감을 느낀다.

저들은 한 소절,

한 박자도 놓침이 없이 내 마음을 꼭 안아 준다.

어느새 내 영혼도 동포들과 하나가 돼 그들의 마음속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낀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모습들이 보인다. 

나 또한 눈물을 떨군다.

목이 메이면서도 노래는 저들과 나를 이어주고 있다.

 

문득 지난해 10월, 

눈물의 연속이었던 첫 북한 여행 당시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 공연마저도 아직 그 연장선 상에 있는 모양이다.

 

"재청! 재청! 재청!"

 

공연장에 울려 퍼지는 관객들의 목소리. 

'아!

내 생애 최고의 공연이구나. 

음악을 공부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로 북녘 동포들과 한 마음을 이뤘으니...

 

헤어진 가족, 60년 만에 다시 만나다 

공연을 마치고 호텔 식당으로 들어섰다. 

황연희 아가씨가 예쁜 미소로 우리를 반긴다.

 

"선생님 공연 잘 하셨습네까?

저도 꼭 보고 싶었는데... 

아마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을 겁네다.

이런 귀중한 공연들은 방송국에서 녹화해 두고두고 보여줍네다."

 

그리고

"제가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제가 접대하고 있는 분이 공연에 초대돼 오신 분들인데,

가서 공연을 보라'고 했습네다"라고

진심 어린 말을 건넨다. 따스한 미소 만큼이나 마음도 따뜻하다.

 

우리 식탁 건너편에는 애절해 보이는 여러 가족이 앉아 있다.

텔레비전에서 혹은 말로만 듣던 이산가족 상봉식이었다. 

식탁에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음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서로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만 닦고 있다. 

각자의 사연들을 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상봉 장면은 내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 여인은 사업상 남쪽에 내려가 있는 남편을 찾아 뱃속의 아이와 두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 가기로 결심한다. 

그 여인의 엄마, 즉 아이들의 외할머니는

'곧 전쟁이 마무리될 덴데 홀몸도 아니고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니까 

걸을 수 있는 여섯 살바기 큰딸만 데리고 가고,

두 살짜리 여자 아이는 내가 보살피마'라고 말씀하셨단다.

 

그 후 헤어져 살게 된 60여 년의 세월. 

두살바기 여자 아이는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후 한 많은 세월을 살았단다.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돌아가신 외할머니 또한 어린 손녀딸을 혼자 남겨 놓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지...

그 심정, 미루어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연로해 거동이 불편한 애기 엄마는

평생을 북쪽에 남겨놓고 온 딸 생각으로 살아도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한 채 사셨단다.

마침내 이들 가족은 남겨 두고 온 딸을,

동생을, 누나를 한 번이라도 만나 볼 생각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단다.

 

다행히도 애기 엄마는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육십 노인이 돼 버린 두 살바기 어린 딸을 만날 수 있었단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 엄마는 북한에 올 수 없다고. 

여섯 살 언니와 뱃속 남동생이 엄마 대신 기회가 닿는 대로 북한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나마 엄마는 큰딸과 아들이라도 두 살바기 딸 아이를 만나보고 올 수 있으니

그 희망으로 남은 여생을 버티신단다.

 

"이산가족은 이 순간에도 고통 안고 죽어갑니다"

아무리 자주 찾아와 본들 지난 60년의 그리움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그저 일주일 내내 서로 붙잡고,

 껴안고, 울고 또 울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섯 살바기 언니는 훌쩍 늙어버린 사위와 며느리를 데리고 온

두 살바기 동생이 못내 안쓰럽고 가여워 눈물을 닦아줄 힘마저 없어 보인다.

 

한편, 

한 할아버지는 그 옆 테이블에 앉아 한 할머니와 60대로 보이는

남성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전쟁 때 헤어진 부인과 아들이란다. 

부인은 남으로 간 남편이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아들을 키우며 일생을 혼자 살았단다.

 

이 이산가족들이 옆에서 함께 눈물을 닦고 있는 우리에게 한마디 한다.

 

"그래도 우리는 외국 시민권을 갖고 있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쓰라린 고통을 안고 죽어 가는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분들께 너무나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이런 비극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으랴. 

피붙이를,

내 형제,

내 자매,

내 부모를 생이별하고 남북 두 나라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끊어진 인연의 끈을 방치하고 있는

두 나라에 어떤 벌이 내려질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 비극은 그 어떤 번드르르한 말로도,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밤은 너무나도 길고, 또 슬프다.

미어지는 가슴을 추스르기 힘들어 창문을 연다. 

하늘의 별빛이 희망의 속삭임으로 다가와 조금은 위안이 된다.

 

이틀 동안 재미동포 예술단은 같은 연주홀에서 두 번의 공연을 더 했다.

공연은 회를 거듭할수록 

서로를 향하는 뜨거운 민족애와 하나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채워졌다.

노래를 부르는 나도, 

내 노래를 듣는 북한동포들도 마음에 드리우고 있던 잿빛 장막을 걷어 올리고 자유롭게 교감했다.

같은 언어,

같은 정서를 공유한다는 것이 이렇게 따스함으로,

친근함으로 다가올 줄이야. 

몇십 년을 살아온 미국에서도 사람들로부터 이와 같은 친화력을 느껴보지 못했다. 

분명 내 민족,

내 나라에서만 느껴 볼 수 있는 감정의 하모니였다.

 

김일성 주석 기리는 열병식... 정말 보고 싶었지만

 

▲ 대성산 공원 입구에 있는 남문 ⓒ 신은미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의 '100주년 탄생 기념일'이다.

북한의 제일 큰 명절이요,

축하행사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날이란다. 

그 축하 행사의 백미는 예전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그리고 내 머리 신경세포를 쭈뼛 세우게 한 '열병식'이란다.

 

남편은 당연

'열병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에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이나 외국 초청 손님들은 김일성 광장에서 벌어지는 열병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같은 시각, 

'대성산 공원'이라는 곳에서 친선 도모를 위한 공연 관람 및 체육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남편은 열병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학수고대하고 있다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말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체육대회 같은 것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 대체 수단이었다.

안내원은 대성산에 가자며 우리를 부르러 방에 올라왔다.

남편은 호텔에서 쉬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안내원 이야기로는,

열병식 대열이 호텔을 끼고 있는 양쪽 도로를 지나가기 때문에

호텔 안의 모든 투숙객들은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한다.

순간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친다.

 

"여보,

아마 오늘 대성산에 가면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설경이'라는 말에 침대에 누워있던 남편이 벌떡 일어난다.

 

"설경이를 만날 수 있다고?"

"아니...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왜냐면 모든 외국 관광객들이 대성산 유원지에 모인다는 데

설경이네 팀도 그곳에 오지 않겠어요?"

 

북한에 다시 닿은 뒤 한순간도 설경이와 만룡 안내원,

그리고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를 잊은 적이 없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조선국제려행사'라고 쓰여 있는 버스를 보면 혹시 그들이 아닐까 눈이 빠질 듯,

목이 빠질 듯 쳐다봤다.

 

운좋게도 그저께는 우리 호텔 앞에

'조선국제려행사'라고 써 붙인 자동차가 서 있었다.

그 운전사에게 리인덕 운전사의 안부를 물었다. 

마침 그 운전사는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와 잘 아는 사이여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줬다. 

우리는 전화가 터져라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우리는 서로 반가움에 울먹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의 말이

"설경이는 판문점 쪽에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연락을 해봤으나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만룡 안내원은 대학원에 진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 전화가 안 된다고 했다.

리인덕 아저씨만이라도 통화가 된 것이다.

당시의 반가움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비록 1%의 확률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대성산 유원지에 가야 한다는 희망적인 '명분'임은 분명했다.

 

우리 부부는 쏜살같이 대성산 유원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안내원들은 문제아 학생들을 개과천선시킨 것 마냥 흐뭇하게 우리를 반긴다. 

 

대성산 유원지에 도착하니 관광객을 실어 나른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그 중 많은 버스들이 

'조선국제려행사'에서 온 것들이었다. 

우리의 기대는 확률적으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남편은 설경이를 찾는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도 나름 한쪽으로 안내원들의 지시 사항을 준수하며 다른 한쪽으로는 신경을 곤두세워

'설경이 찾기'에 온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그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 외국인들을 위해 공연을 베풀어준 어린이들 ⓒ 신은미

북한에 들어와 있는 모든 관광객,

그리고 외국 손님들은 다 이곳에 불러 놓은 모양이다.

한쪽에서는 흥겨운 밴드 연주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춘다.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를 위해 공연을 하러 온 어린 아이들과 사진을 찍기 바쁘다.

그 와중에 주최 측 지침에 잘 따르고 있는 일부 모범생 외국 손님들은 주최 측에서

정성스레 준비해온 체육대회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청군·홍군 모자를 쓰고 말이다. 

가끔씩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왔다갔다하는 남편의 모습이 애절해 보인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다.

이제는 나도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며 설경이를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로 찾아다닌 보람이 있는 지 설경이가 이곳에 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우리 부부는 안달이 나 설경이를 찾아다녔다. 

설경이 뒷모습을 닮은 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멀리서 나를 다급히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순간

'찾았구나'라며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꿈인지 생시인지 남편이

설경이 손을 꼭 잡고서 뛰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서로 얼싸 안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눈물로 반가움과 기쁨을 표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겁네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기쁜 일이... 

꿈은 아니갔지요?

4월에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5월에 오실 거라는 소식은 회사에서 말해줘서 알고 있었습네다."

 

설경이는 차오르는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한다. 

나 역시 어떤 말로도 이 반가움을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그저 우리 셋은 잡은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마음을 대신했다.

 

▲ 다시 만난 설경이 ⓒ 신은미

 

시간은 무심하게도 빨리 지나갔다. 

또다시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됐다.

남편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설경아, 우리 다음 달에 다시 보자.

너를 꼭 우리 안내원으로 해 달라고 부탁해 놨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우리는 서로 갈 길을 향해 이별의 손짓을 해야 했다. 

마음뿐 아니라 무엇이라도 주고파서 뒤돌아 보는 설경이를 쫓아갔다.

그리고,

내가 차고 있던 팔찌를 설경이에게 채워줬다. 

설경이는 팔찌를 채워주는 내 손을 물끄러니 쳐다보며 내 손등에 눈물을 떨군다. 

 

호텔로 돌아와 침울한 마음으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안내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든 소지품을 호텔방에 놔두고 로비로 내려오란다.

특히 남편의 담배는 물론이고,

라이터는 더더욱 안 된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 2012 OhmyNews

 

 

뉴스

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안내원에게 '아오지' 보내달라고 했더니...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30-끝]
라진의 '에덴동산' 신해리와 두만강역
 
 
12.10.11 19:56l최종 업데이트 12.10.11 19:56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5월에는 3주 동안 라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한시라도 더 빨리 사촌 동생네 집에 닿기 위해 서둘러 준비하고 아침 식사를 마쳤다.
문호영 안내원을 불러 사촌 동생네가 사는 신해리로 당장 가자고 재촉했다.
문 안내원은 알았다며 누군가를 전화로 부른다.

"김철 동지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도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구리스 선생 식구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해리에 간다는 말을 듣고 가는 길에 함께 가자고 해서요.
이곳 사람들은 모두 신 녀사님 사촌 동생 가족분들을 좋아합니다.

저도 관광 안내 일정 중 신해리 가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경치도 좋고 또 손님들이 체험학습 '로동'을 하는 동안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 구경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구리스 선생 부인께서 만들어 주시는 서양 료리를 맛보는 것도 정말 좋고요.

언젠가는 감자로
'포테토샐라드샌드위치'라는 것을 만들어주셨는데,
감자로 그렇게 맛있는 양념빵을 만들 수 있다니 깜짝 놀랬드랬습니다.
'아,
정말 감자로 별걸 다 만들 수 있구나' 했습니다.
근데 오늘은 서양 료리 안 하실 겁니다.
서양 손님들 올 때만 하시는데 선생님들은 조선 사람들이니 조선식으로 상을 차리실 겁니다."

손님들이 '로동'을 하는 동안 쉴 수도 있다며 자기도 빨리 신해리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일행 다섯 명은 소풍 가는 심정으로 신해리를 향해 산길로 들어섰다.
산길은 가까이 동해를 내려다보면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운치 있게 펼쳐진다.

"신선놀음"이란 말에 북한주민 "얼마나 고생한지 아십니까"
▲  사촌 동생 은영이네 가족이 살고 있는 신해리  ⓒ 신은미

 


"참 좋네요.
이렇게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라 동생이 오래도록 여기서 살고 있나 봐요.
조카들도 미국에 오면 빨리 신해리 집으로 가자고 하고..."

남편은 한술 더 뜬다.

"나도 이런 곳이라면 살아보고 싶네.
매일 낚시하고 신선한 생선도 먹고...
뒷산에다 야채도 심고 산행도 즐기고...
신선놀음이 따로 없겠구만!"

김철이라는 분이 우리의 대화가 철딱서니가 없어 보였는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한소리 한다.

"선생님,
이 산동네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촌 동생분 가족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셔 가면서리 이렇게 해 놓은 건지 아시기나 합니까?
지금은 최근에 집도 멋있게 잘 지어 놓으시고
'체험학습 로동관광' 손님들을 위해 큰 강당 건물도 지으시고,
공장도 세우시고 했지만 그전에는 오랫동안 움집 같은 데서 사셨습니다.

또 도로가 다 뭡니까.
한 번 시내로 나오려면 몇 시간에 걸쳐 험한 산길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나마 눈 오는 추운 겨울에는 꼼짝달싹도 못하고 말입니다. 전기가 들어오길 합니까,
물이 나오길 합니까.
도로를 내고, 버스들도 이곳으로 다니게 하고,
풍력발전소도 어렵사리 가동시켜서 전기도 들어오게 하고...
물론 전기사정은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보통 일이 아니었지요."

김철 선생은 계속해서 동생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나한테 전한다.

"또 식수며
비닐하우스 야채재배며, 염소농장이며...
그것뿐인가요?
필수품 생산 공장도 운영하시면서 이곳 주민들을 잘살게 해 주시고...
참,
얼마 전에는 해삼 전복 양식장 공사까지 시작하셨습니다.
지금은 서로 들어와서 살려고 하는 마을이 됐단 말입니다."

김철 선생의 말 속에서 이 마을이 이렇게 살기 좋고 윤택한 마을이 되기까지는
뼈를 깎는 듯한 인고의 세월이 지나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다시 만난 사촌 동생 부부
▲  최근에 지었다는 신해리 사촌 동생 은영이네 집  ⓒ 신은미

 


저만치 집이 보인다.
반가움과 동시에 안쓰러움이 교차해 눈물이 왈칵 솟구친다.
우리가 닿을 때를 학수고대했는지
세 명의 사랑스러운 조카들이 집으로 들어서는 산길 입구까지 나와 있다.
자동차를 보더니 두 손을 흔들면서 팔짝팔짝 뛴다.
내 마음도 조카들을 향해 성큼성큼 달려간다.

우리의 도착을 알았는지 사촌 동생네 부부도 뛰어나온다.
보기 좋고 아름다운 가족 상봉.
자동차에서 내린 우리 부부는 집으로 들어갈 새도 없이
한참을 자동차 앞에 서서 그간 쌓아뒀던 그리움을 풀어놓는다.

▲  왼쪽부터, 신해리에 함께 사는 미국인 수의사 선생님, 조카 예솔 그리고 지성.

    금세 뒷산에 가서 캐온 더덕을 다듬고 있다.  ⓒ 신은미

 


집안에 들어가니 음식 향기가 코를 찌른다.
동생이 우리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나와 동생은 점심 준비를 마저 하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선량하게 생긴 한 미국인 아저씨가 집에 들어온다.
동생이 자기들과 함께 이곳 신해리에서 살고 있는 수의사라고 소개해준다.
이 수의사도 이곳에서 산 지 10여 년이 넘었단다.
자기네들과 신해리 정착 초창기부터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봉사하며 살고 있단다.
평온하고 선한 얼굴 인상에서 이분이 걸어온 삶의 여정을 읽을 수 있었다.

수의사 선생님이 조카들을 부르러 왔단다.
귀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더덕과 산나물을 캐오겠다고.
그는
"더덕, 산나물 맛이 일품"이라며
"꼭 먹어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조카들도 "더덕과 나물을 캐와서 이모한테 꼭 맛을 보여줄 거예요"라며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아이들마냥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신바람 나게 집을 나선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과 수의사 선생님이 신이 나서 들어온다.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뒷산 초입에서 크고 신선한 더덕과 나물들을 다 캐왔다고.
오자마자 숨도 안 돌리고 더덕을 다듬기 시작한다.
더덕 향기가 사방에 진동한다.
아무런 양념 없이 고추장에 찍어만 먹어도 그 맛이 어떨지 짐작이 된다.
군침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커다란 문어 잡아온 북한 주민,
돈 건네자...
▲  신해리 주민이 잡아온 문어 요리  ⓒ 신은미

 


그때,
이 마을 사람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커다란 문어를 들고 온다.
아이들이 반기며 안기는 것을 보니 친하게 지내는 이웃임이 틀림없다.
동생이 말을 건넨다.

"어머나,
지금 잡으신 문어인가 봐요. 와 크다.
그런데 왜 이걸 들고 오세요?"
"구리스 선생님 댁에 친척분이 오셨다는데...
이 문어,
반은 데쳐서 드시고 반은 회 쳐서 드십시오."
"이 귀한걸...
내다 파셔야 할 텐데..."
사촌 동생은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에 문어 값에 해당하는 돈을 들고 나온다.
아저씨에게 돈을 전하려 하자...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제가 구리스 선생님 댁에 문어를 드리고 돈을 받으라고요?
이러지 마시라요.
섭섭합니다."
"아저씨,
그러지 말고 받으세요."
"신해리에서 누가 구리스 선생님한테 돈을 받습니까,
큰일 나려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훈훈한 모습.
덕분에 우리 일행은 신선하고 맛있는 북한산 동해 문어를 맛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조카들과 수의사 선생님이 캐온 산더덕과 나물들,
사촌 동생의 특기인 중국식 만두와 이 동네 사람들이 직접 재배한 유기농 야채들,
기가 막히게 맛이 좋은 김치까지...
북한 식당에서 먹은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북한 주민이 바다에서 직접 잡은 문어를 손님 대접으로 얻어먹었으니
내 생에 최고의 식사라고 할 만하다.
식사하는 내내 문어를 잡아온 그 아저씨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고마워요. 아저씨!'

북한에 전복·해삼 양식장을 짓겠답니다
▲  문호영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소쟁기를 끄는 필자  ⓒ 신은미

 


▲  아기 염소와 함께  ⓒ 신은미

 


식사 후에 우리는 사촌 동생네 집 주위를 구경하러 나간다.
크리스의 안내로 염소 농장과 비닐하우스를 둘러봤다.
그리고 산을 개간해서 밭을 일구고 있는 주민 아저씨 덕분에 '소쟁기'도 끌어봤다.
보기에는 쉬워 보여 큰소리치고 덤볐다가 아저씨가 일궈놓은 밭만 망쳐놓고 말았다.

염소 농장에 닿은 우리.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끼 염소를 안아봤다.
이 염소가 자라 북한 아이들에게 젖을 먹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이 새끼 염소가 동물이 아니라 천사처럼 느껴진다.
▲  신축 중인 전복 해삼 양식장  ⓒ 신은미

 


사촌 동생이 지금 공사 중인 '해삼·전복 양식장'을 구경시켜 준단다.
양식장은 산 밑에 있는데 바닷가에 접해 있었다.
덕분에 바닷가 옆에 있는 어촌 마을을 둘러볼 수 있었다.
마을에 있는 집들의 겉모습은 초라하고 누추해 보여 내 마음이 안쓰러워진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엿보이기도.
사촌 동생은
"풍부한 수산물 덕분에 이곳 어촌 사람들은 바다에 고마워하면서
자족하는 마음으로 걱정 없이 살고 있다"고 귀띔해준다.
밝게 웃으면서 사촌 동생을 반기는 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서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 마음 역시 풍요로워진다.

이곳 신해리 사촌 동생네 집에 오니 흘러가던 시간조차 멈춰버린 것처럼 여유롭고 평온하다.
사촌 동생네 가족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얼굴도 햇살처럼 따스하다.
서로가 한마음이 돼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는 모습은
불협화음 하나 없는 심포니 연주를 듣고 있는 듯 아름답다.

"미국에서 잘나갔다던데...
왜 여기서 고생합니까"
▲  크리스(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이)가 우리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신은미

 


사촌 동생네 집 거실에 앉아서 여유롭게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사촌 동생네 부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김철 선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남편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 사촌 동생분은 미국에서도 좋은 교육을 받고,
유능한 컴퓨터 공학자로 대접도 잘 받고 직장도 훌륭했다고 들었는데,
왜 이곳에 오셔서 어려운 고생길을 마다치 않고 계시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늘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궁금해서리..."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김 선생님도 저분이 기독교인인 것 아시지요?"
"네,
잘 압니다만,
그것이 어떻게 련계가 되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참 설명이 힘든 이야기인데...
기독교인들은 하늘에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니 우리 인간들은 그 신의 자식인 겁니다.
우리가 그 신의 자식이니 그 신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니 신의 자식인 우리도 그 뜻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믿고,
행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거지요.
또한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신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잘 모르긴 하지만 대충 그런 이야기입니다.
솔직히 나도 집사람이 교회에 나가니까 가끔 골프 약속 없을 때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정도라서...
충분히 설명을 잘 못하겠네요."

"그리스도 교인들은 다 그렇게 삽니까?"
"천만의 말씀.
다른 사람 말 꺼낼 것도 없이 우선 우리 집사람 하는 것만 봐도..."

잘 나가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막말인가.
굳이 이런 식으로 질책하지 않아도 내가 살아온 오십 평생을 송두리째 내려놓고 반성하고 있던 참인데...
남편은 인정사정없이 내 상한 심정을 한층 더 도리질한다.
아마 골프나 치고 보트 타고 나가 낚시질이나 하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반성해 보며 자기 몫까지 내게 빗대 꾸짖고 있는 것이겠지.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집이 떠나갈 듯이 웃으며,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끊임없이 이야기보따리들을 풀다 보니 이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됐다.
따뜻한 마음을 안고 우리는 이별을 고했다.
"우리, 내년8월에 또 올게.
" 섭섭한 마음을 위로해가며 자동차에 올랐다.
"이모,
가지 말고 우리랑 오래 오래 함께 있다가 가면 안 되요?"라고 조르며
사정하던 막내 조카 예솔이는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만다.
나 역시 마찬가지...
자동차가 산비탈을 돌아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촌 동생네 가족들은 손을 흔든다.

우리는 이산가족도 아니며,
또 언제든지 이곳에 올 수 있다.
그러나 마치 남북정상회담을 하듯,
가물에 콩 나듯,
그것도 한 번 만나면 끝이 돼버리는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의 심정은 어떨까.
그나마 상봉이라도 하신 분들은 다행이지만,
대다수의 이산가족들이 서로의 생사조차 모른 채 세상을 떠나고 있는 현실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오지'라는 말에 깜짝 놀란 남편
 
▲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조개무덤이 발견된 웅기읍 굴포리
ⓒ 신은미
▲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조개무덤이 발견된 웅기읍 굴포리
ⓒ 신은미
▲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조개무덤이 발견된 웅기읍 굴포리  ⓒ 신은미

라진-선봉에서의 4박5일도 어느새 마무리되고 있다.
우리는 어느새 북-중 국경의 북한 측 출입국 사무소가 있는 원정리로 돌아가고 있다.
원정리로 가는 길에,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서 관광 일정에 넣지 않는 곳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의미가 깊은 곳을 들를 예정이란다.
이순신 장군께서 여진족을 물리치셨다는 곳인데 그곳이 우리나라의 맨 끝이라는 설명이다.
북한의 마지막 기차역인 두만강역도 그곳에 있단다.
또 그곳에 가면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가는 모습,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를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아,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의 맨 끝으로 가는구나. 생각지도 않았던 일정이다.
북한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내 가슴은 쿵쿵거린다.

올 때와는 다른 길을 탔다.
올 때는 원정리에서 라진으로 직접 들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두만강 하구로 먼저 가 국토의 맨 끝을 본 뒤,
두만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원정리로 간다고.
라진을 출발해 선봉을 지나는데 문호영 안내원이 이곳의 옛 이름이 웅기였다고 설명한다.
남편이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

"이곳의 옛 이름이 뭐라고?"
"웅기라고 합니다." 
"아,
여기가 바로 웅기였구나.
굴포리가 어디쯤인가?"
"아니,
어떻게 굴포리를 다 아십니까?
이제 곧 호수가 나오는데 그 근처가 굴포리입니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조개무덤이 있는 곳이 바로 웅기읍 굴포리란다.
선사시대에 관심이 많은 남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부터 '선봉'으로 바뀌었나?"
"오래됐지요,
'수령님'께서 살아 계실 때니까요.
한 30~40년 됐습니다.
지명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원래 이곳이 경흥군인데 지금은 은덕군으로 바뀌었고 또 군내의 웅기,
아오지 등 옛 이름들이 모두 새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뭐라 그랬어?
아오지?"
"네. 바로 요 옆입니다.
아오지란 옛 이름을 아십니까?"
"잘 알지.
그곳에 탄광이 있다고 배웠지."
"남조선에서 학교 다니실 때 말씀이십니까?"
"응."
"남조선에서도 북조선 지리를 다 가르치는가 보지요?"
"그럼 물론이지.
근데,
문 안내원,
내년8월에 우리가 여기 올 때,
아오지에 한번 가볼 수 없나?"

"가 보실 수는 있는데...
그곳에는 관광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저 산업지역입니다."
"아니,
학교 때 배운 곳이라 어떤 곳인지 그냥 궁금해서..."
"그럼 다음에 오실 때 가보실 수 있도록 일정을 조직해 보겠습니다.
가 보셔야 그저 공장하고 탄광인데...
근데 참 이상합니다,
선생님.
외국서 오신 손님들은
'체험학습'이라 해서 로동을 일부러 하질 않나 아니면 선생님처럼
광산이나 공장을 관광하시겠다고 하질 않나...
혹시 선생님,
아오지에서 '체험학습 로동'해 보시려는 것은 아니지요?
'체험학습 로동'은 구리스 선생 농장에서만 가능합니다."

"아오지에서 무슨 체험학습이야.
난 크리스네 집에서도 제대로 안 했잖아.
걱정하지마. 그런데,
아오지에는 꼭 가지 않아도 돼."
"하여간 원하시면 구리스 선생 크라훈 회사에 말씀하십시오."

아, 나의 조국이여!
▲  우리나라 국토 끝 농촌 마을  ⓒ 신은미

 


우리는 호숫가를 따라 국토의 가장자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 국토 끝에는 호수가 많이 보인다.
이곳에 큰 호수가 세 개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만포'라는 호수를 지나고 있다.
낚시하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눈에 보인다.

좀 더 달려가니 주위에 있는 논의 흙 색깔이 시커먼 색이다.
이런 색의 논은 처음 본다.
멀리 논 한가운데 큰 탑이 보인다.
저게 뭐냐고 물으니 석유 시추를 하고 있단다.
학자들의 조사 결과 이곳에 석유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커
시추탑을 세우고 파고 있다는 설명이다.
생각해본다.
'우리 한반도에서도 석유가 나올 수 있다면...'
▲  우리나라 맨 끝 기차역인 두만강역.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이 역 앞을 지나고 있다. ⓒ 신은미

 


이제 거의 다 왔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서번포'라고 불리는 호수가 있고 왼쪽으로 기차역이 보이는데
'두만강역'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는 얼른 차를 세워 달라고 했다.
이곳이 우리 국토의 마지막 기차역이다.
아이들이 걸어간다.
아,
이 국토의 끝에도 우리말을 하고,
우리 음식을 먹고, <아리랑>을 부르는 우리 아이들이 살고 있구나.
얼른 뛰어가서 안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  우리나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만나는 지점. 왼쪽 건물들이 있는 곳이 중국이고

    그 아래 보이는 철교가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철도다.  ⓒ 신은미

 


차가 작은 동산에 오르니 두만강이 굽이쳐 동해로 흘러가고,
강 너머로 넓은 평원이 보인다.
동산 위에 이순신 장군 기념관이 있고,
그 옆에는 이순신 장군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후손들이 여진족을 토벌한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에 세운 것이란다.
우리는 이곳에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중국-러시아 대륙을 바라본다.

왼쪽의 중국은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국경이 끊어져 바다가 없다.
그 바로 옆으로는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철교가 놓여 있다.
이곳에 와 보니 왜 라진-선봉이 이들 나라에게 그리도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아,
천혜의 황금 같은 라진-선봉.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이 대륙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관문임을 온몸으로 느낀다.
▲  국경으로 가는 차 안에서 문호영 안내원이 우리에게 흐느끼며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신은미

 


우리는 두만강을 오른쪽에 끼고 국경 출입국사무소가 있는 원정리로 달려가고 있다.
차 안에서 문호영 안내원이 이별의 슬픔을 삼키며 울부짖듯 애절하게 <아리랑>을 부른다.
반대 방향으로 중국의 화물차들과 승용차들이 끊임없이 줄지어 오고 있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외국인들은 분초를 다퉈 이곳에 몰려들고 있는데,
내 나라 한국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운전기사
'사슴' 아저씨,
문호영 안내원의 눈가에도...
강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고개를 돌려 북한 땅을 바라본다.
내려서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본다.
2011년 10월,
평양에서 시작된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 오늘 조국의 북쪽 끝에서 그 막을 내리려 한다.

내 마음에 드리워져 있던 두터운 차단의 장막을 조국의 최북단,
이곳에 흐르고 있는 두만강 물결에 훨훨 던져 동해로 흘려보내련다.
잠시 멈춰 있었던 찬란한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함께 써 내려가길
간절히 기도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불러 본다.

"아, 나의 조국이여!"

덧붙이는 글 |이번 여행기를 마지막으로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연재가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신은미 시민기자의 연재 여행기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은미(eunmishin)쪽지보내기찜하기RSS 
     
    이화여대 음대 졸업 후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전직 성악교수 이며 크리스찬 입니다.
    국적은 미국이며 현재 켈리포니아에 살고 있습니다.
    2011년 10월, 2012년 4월, 5월 세 차례에 걸쳐 40여일간
    북한 전역을 여행한 후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북한여행 중 찍은 수 천장의 사진들을 오마이뉴스와 나누고 싶습니다.
 

© 2012 OhmyNews오탈자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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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back 이라길래 단 박.. 단군 박씨;; 북한 블로그 이게 누리꾼들이 만들어낸 루머 가십거리입니까 진짜 북한에서 이런 물밑 일을 합니까? 온갖 흥미거리로 포스팅해서 결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