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산가족상봉 무기한영기발표

남북이산가족상봉 무기한영기발표

작성일 2013.10.25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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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이산가족상봉 무기한 연기 발표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고 국가의 정치. 경제적이익과 국민 개개인의 행복중에서 어느것이 더 중요한지 자기의 생각을 서술하는게 문제입니다.

<질문>

국가의정치.경제적이이과 국민개개인의 행복중 어느것이 더 중요하나요??

 

중요하다면 중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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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해요!!!!!!!

내공 80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그렇줄 알았어요

북한은 원래 그래요

완전한 사기극이예요

진정성이  안보여요  

 

뉴스

 

술 마시는 평양여성...

이런 모습 처음이야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②]

 확 달라진 평양

 
13.10.01 14:22l최종 업데이트 13.10.01 14:34l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  고려항공 비행기에서 <로동신문>을 받았다.
ⓒ 신은미

 


"안녕하십니까."

고려항공 비행기 안으로 들어서자 스튜어디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인사 소리를 듣고 갑자기 귀가 번뜩했다.
"안녕하십네까"가 아니라 분명히 "안녕하십니까"로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 번이나 북한을 여행했으면서도 
평양사람들은 '~니까' 대신 '~네까' 그리고 '~니다' 대신 '~네다'고 발음한다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스튜어디스는 분명 '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했다.

▲  이륙을 위해 앉아있는 고려항공 스튜어디스
ⓒ 신은미

 


이륙을 기다리는 동안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 위해 또 다른 스튜어디스에게 말을 걸었다.

"평양에 몇 시에 도착하지요?"
"4시에 도착 예정입니다."

틀림없이 '~입네다'가 아닌 '~입니다'였다.
나는 왜 지금껏 평양 사람들의 발음을 잘못 들은 걸까.
아마도 선입견 때문이었을 게다.
 
방송이나 출판물들을 보면 대부분 북한사람들의 말투를 그런 식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 잘못 각인돼 있던 것이다.
 
이렇듯 선입견이란 무서운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들었을 텐데
그말이 "
안녕하십네까"로 들렸으니 말이다.

아마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마찬가지일 게다.
잘못된 선입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있으니 사실을 봐도 사실로 보여지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나 또한 북한을 여러 차례 여행했음에도 오늘날까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설경이를 만날 수 없다니요...

▲  북한의 관광 비자
ⓒ 신은미

 


비행기가 압록강을 넘어가고 있다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이제 북한의 영공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니 설경이,
그리고 현수와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를 접촉했던 일이 뇌리에 스친다.

우리는 원래 북한의 '조선국제려행사'를 통해 19박 20일의 비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올해부터 미국 국적자에게는 9박 10일 이상의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문제가 또 생겼다. 
 
이번 북한여행의 주목적이 설경이와 현수를 만나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인데,
관광 비자로 입국하는 사람들에게는 관광 외 다른 어떤 일정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 북한여행을 했음에도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한 통신사 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설경이와 현수네 집을 방문할 것이라고 이야기까지 했으니 나도 참 무지하고 순진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떻게 해야 수양딸과 수양조카의 집을 방문할 수 있겠냐'는
내 다그침에 조선국제려행사는 매우 난감해하며 "
혹시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해외동포 이산가족을 담당하는 '
해외동포위원회'에 접촉해 보라"고 전했다.

그러자 지난 연재 '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를 읽고 "글을 잘 읽었다"며
내게 메일을 보내온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유엔에 파견 나와 있는 북한외교관이며 참사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메일을 보내 우리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전화로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자꾸 약속장소 바꾸는 북 외교관... 왜?
"신 녀사님의 사정은 익히 알겠습니다만 실제 이산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은 좀 곤란합니다.
실제 이산가족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데 그렇지가 않으니…."
"참사님, 아무리 수양딸,
수양조카라고 해도 그렇지요. 
관광비자로는 만날 수가 없다, 
실제 이산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동포 위원회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뇨….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요."

"녀사님의 심정은 충분히 리해합니다.
그러나 공화국에도 지켜야 할 법이 있으니 리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도 안돼요.
세상에 이런 법은 없어요,
참사님!"

"녀사님,
조국은 전쟁이 끝난 이래 지금까지도 일종의 전시 상태에 있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과  경제 제재 속에 우리 인민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법도 생겨난 게니 리해해 주십시오."
"저,
있지요…. 
직접 만나뵙고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혹시 찾아가도 괜찮으신지요?"

"뭐, 오신다면 얼마든지 만날 수는 있습니다만 이런 일로 먼 캘리포니아에서 여기까지 오신다니까 좀…."

우리 부부는 난감한 심정을 안고 그 참사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다. 
만나는 장소를 정하는 데도 여러 번 전화 통화를 해야만 했다.

우리는 복잡한 뉴욕의 도심을 피해 교외의 한적한 곳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그런데 장소를 제의하면 전화를 끊고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나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바로,
북한 외교관들은 맨해튼 콜럼버스 서클을 중심으로
반경 25마일(약 40킬로미터)를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장소를 제의하면 그곳이 활동 반경 내에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외교관계가 없다고는 하나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에 파견된 일국의 외교관들을 이렇게 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북한은 미국인들에게 관광마저도 허락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북한 외교관들의 활동 반경 내에 있는 뉴욕 한인타운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만났다.
남편과 동갑인 이분은 원래 평양외국어대학 교수였다고 한다.
 
겉보기에도 이분은 외교관이라기보다 학자라는 인상을 더 짙게 풍겼다.
술 몇 잔이 돌자 그분이 내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최선 다해보겠다"는 말, 희망을 품었다

▲  북한의 일반 비자
ⓒ 신은미

 


"작년에 신 녀사님께서  <오마이뉴스>에 게재하신 연재 기행문을 빠짐없이 잘 읽었습니다.
정치적인 것을 떠나 객관적인 입장으로 민족을 생각하시는
녀사님의 글속에서 동포애를 많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글이었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해요.
저는 남쪽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남쪽의 시각에서 북을 바라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있어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상당히 힘들 때가 있어요.
혹시 글에서 북을 불편하게 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충분히 리해합니다.
물론 글속에서,
북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녀사님 말씀대로 남쪽의 시각으로 바라보시기 때문인데 그야 어쩔 수가 없지요.
전혀 개의치 마십시오. 
그런데 설경이하고 현수와 정이 참 많이 드신 모양입니다."
"그럼요,
여러날을 함께 다니며 마음이 통하다 보니 정이 듬뿍 들 수밖에요.
그런 설경이가 결혼을 하고 지금 아이를 가져 산달이 됐다고 하는데, 
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어 찾아가려고 합니다.
가는 길에 현수네 집도 들리면 좋겠고요."

"아, 그러셨군요.
우리 민족은 정이 많아 만나서 몇 마디만 하면 금방 통하는데 수십 일을 함께 다니셨으니
아마 정이 많이 드셨을 겁니다."
"네,
그러니 제발 부탁드려요,
참사님."

"아,
이거 참 곤란하네….
그러면, 우선 관광 비자로 입국해 '
조선국제려행사'와 관광을 하세요.
그리고 설경이와 현수네 집 방문을 하기 위해 
해외동포로서 일반 방문 비자를 따로 신청하도록 해보십시오. 
사실 남쪽 출신의 해외동포가 관광객의 신분으로 북을 방문하고
북의 동포와 수양 가족 관계를 맺어
그 집을 방문한다는 일은 제가 알기로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여간 충분히 리해했으니 제가 평양에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 해보겠다'는 
그 외교관의 말에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일단 그분의 말대로 관광비자를 갖고 조선국제려행사와 열흘간의 관광을 먼저 한 다음,
서울에 가서 열흘을 지낸 뒤 또다시 일반 비자로 북한에 들어가
설경이와 현수네 집을 방문하기로 일정을 수정하고 수속을 밟았다.

미국에서 준비한 설경이와 현수의 선물만도 한 트렁크나 되는데 이 짐을 들고 북한을 들락날락해야 한다니…. 그 불편함은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다시 간다고 해도
과연 설경이와 현수네 집 방문을 허용해 줄 것인지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평양 순안공항은 변한 게 없구나

▲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내리고 있다.
ⓒ 신은미

 


지난했던 과정을 생각한지 얼마나 됐을까.
비행기에서 곧 순안공항에 도착하니 벨트를 착용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공항에 내리면 누가 우리를 맞아줄까.
만일 설경이와 현수가 우리를 맞아준다면 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으리라.

2013년 8월 17일,
1년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순안 공항은 여전히 시골의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임시 청사였다. 
지금까지 내가 눈여겨본 북한의 건물들은 마술이라도 부린 듯 삽시간에 완성됐는데,
순안공항만은 예외다.

공항은 그 나라의 얼굴이자 외국인에게 첫 인상을 심어주는 장소인데
2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대로니 대체 언제쯤 공사가 끝날는지….
관광객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아져 발 디딜 틈이 없다. 
 
짐을 실을 카트가 모자라 '카트 확보 쟁탈전'이라도 벌어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한마디 한다.

"아니,
관광객 맞을 준비나 제대로 해놓고 사람들을 받든가 말든가 해야지.
좋은 이미지를 심어줘야 관광객들이 돌아가서 알릴 거 아냐. 
첫 도착부터 생존 경쟁을 해야 하니 원!"

또다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걸어 다니는
폭탄 아저씨'와 함께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렸다.
군복 같은 청색 유니폼을 단정히 차려입은 한 아가씨가 어디에서 났는지 얼른 카트를 가져다줬다.
남편이 내뱉은 말이 온 공항청사에 메아리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  순안공항 임시청사 모습.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 신은미

 


그래도 전기 사정이 좋아졌는지 짐을 실은 컨베이어가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간다.
겨우 카트 두 개를 확보해 짐을 싣고 세관 앞에 섰다.
올해부터는 휴대전화도 갖고 들어갈 수 있어 세관 통과가 훨씬 간편해졌다.

이번에도 역시 지난 방북 때와 마찬가지로 세관신고서만 들여다볼 뿐 가방을 열어보지 않는다. 
북한법은 남한 제품의 반입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세관 통과가 간단할 줄 알았더라면 남한제품들을 사서 가져올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내가 평양에 갈 때마다 북한 동포들에게 남한 제품들을 전해주고 싶어했던 이유는,
최고 품질의 남한 제품을 북한 동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저 북한 동포들에게 남한 동포 노동자들의 손길이 묻어있는 물건을 전해주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북한여행을 통해 평양 순안공항의 세관이 전혀 까다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북한의 법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매번 안내원들과 북한의 동포들에게 전해 줄 선물을 살 때면 혹시라도
'한국산'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지 않나 노심초사하며 상표를 확인하곤 했다.

세관을 통과하자 낯익은 얼굴이 우리를 반긴다. 
북한 조선국제려행사 간부,
'머리 빠지는 것이 제일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라던 40대 초반의 '대머리' 리정 선생이다.

"아이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서 이리 짐 주십시오."

그는 처음 보는 두 사람과 함께 우리의 짐을 받는다. 
리정 선생과 함께 나온 두 사람은 앞으로 열흘 동안 우리와 함께 할 안내원이다. 
무척 반갑고 친근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을 해버렸다.

"아니, 높으신 분이 어떻게 몸소 나오셨어요?"
"두 분께서 이리도 자주 우리 조선국제려행사를 리용해 주시니 제가 직접 영접해야지요.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둘째 수양딸 리설향

▲  공항 주차장에서. 왼쪽부터 박영길, 리정, 나, 리설향.
ⓒ 신은미

 


그러던 중 선하고 곱게 생긴 아가씨가 리정 선생과 나의 대화를 차분하게 지켜보다
눈이 마주치자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리설향입니다."

이번 우리의 여행에 함께할 여성 안내원이다. 
직감적으로 내 둘째 수양딸이 될 것임을 감지했다.
가까이서 보니 맑고 큰 눈망울이 어느 순정 만화의 여주인공을 보는 듯하다.
갓 24세가 된 이 아이의 이름이 외양과 참 잘 어울린다.
첫째 수양딸의 이름은 '설경'.
묘하게도 두 아이의 이름이 '설'를 쓴다.

▲  설향이의 아이디 카드
ⓒ 신은미

 


옆에 서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고 있던 아저씨가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불평을 하며 악수를 청한다.

"아까부터 두 분에게 잘 보이려고 머리도 빗고,
헛기침도 하고, 안 바르던 향수도 바르고 왔는데….
설향이 향기에 취하셔서리 저는 박대하시기나요?"

첫눈에 봐도 마음이 넉넉하고 넉살 좋은 이웃집 아저씨 스타일이다.
이름은 박영길.
원래는 일본어·중국어 안내원인데 "
요즈음이 제일 바쁜 관광철이라 영어과 안내원이 모자란다"며
우리 부부에게는 영어가 필요 없으니 대신 나왔단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마디 한다.

"누나라 불러도 되디요?"
"아니,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나를 누나라고 부른단 말이에요?"
"아, 새 손님을 맞는데 그 정도는 알고 나와야디요.
저는 올해 쉰하나입니다. 
제 바로 위의 누나가 년년생인데 신 녀사님과 동갑입니다."
"알았어요.
그럼 확실히 하세요."

그는 남편에게도 인사를 하며 '
형님'이라 불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언젠가 봤던
영화 속의 '조폭'들이 공항에서 만나 인사하는 장면 같아 웃음이 터진다.

차에 다가가자 운전기사 아저씨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긴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35세애기 아빠다.
이름은 리철남.
큰 눈이 웃을 때면 초승달처럼 모습을 감춘다.
 이번 여행에서 두 놀부 형님들(남편과 박영길) 사이에서
흥부 같은 아우(운전기사)가 힘든 일을 다 하게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라도 잘해줘야지.

우리는 열흘간 우리와 함께할 '삼천리'표 자동차에 올랐다.
1년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평양거리는 훨씬 활기 넘쳤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이라 온 거리가 싱그럽게 푸르다.

평양이 변하고 있다

▲  잔디가 보이는 평양 거리. 예전에 비해 훨씬 환해졌다.
ⓒ 신은미

 


▲  차가 부쩍 많아진 평양 시내
ⓒ 신은미

 


특히 평양 시가지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도로변을 따라 잔디를 심어놓아 눈에 띄게 환해졌다. 
 
'어두운 공산국가 거리' 이미지를 벗어던진 느낌이다. 
게다가 전에는 보지 못했던 고층 건물들도 많이 보인다.
 
자동차,
특히 승용차와 영업용 택시가 그새 부쩍 늘었다.
평양 공기가 좋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려나 보다.

평양에 왔음을 실감케 해주는 광경은 역시 뭐니뭐니해도 거리의 여성 교통안전원이다.
그런데 교통량이 많아져 곳곳에 신호등이 설치됐으니
언젠가 이 여성 교통안전원들도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바로 로비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웨이트리스가 우리를 알아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고려호텔 종업원들이 우리를 알아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라 그 감동은 예전만 못하다. 
되레 '이제 나도 북한사람이 다 된 것이 아닌가' 싶어 겁(?)이 덜컥 날 뿐이다.
나는 조선국제려행사 리정 선생에게 책 한 권을 꺼내줬다.

"제가 세 차례 이곳을 방문하고 난 뒤
서울에 있는 <오마이뉴스>라는 인터넷 매체에 기행문을 연재했어요.
 
연재가 끝나고 책이 나왔는데,
바로 이 책이에요. 
남한의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우수문학도서로 선정하기도 했는데,
책 속에 조선국제려행사가 잘 소개돼 있으니 회사에 가져다 놓으세요."
"아,
바로 이 책이군요.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북경에 나가 있는KITC 대표로 부터 이야기 들었습니다."
"KITC가 뭐예요?"
"우리 회사말입니다.
Korea International Travel Company의 략자, KITC.
우리는 우리 회사 조선국제려행사를 부를 때 KITC라고 부릅니다."

서슴없이 영어를 쓰는 이들의 모습에서 북한의 외국어 열풍을 감지한다. 
리정 선생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녀사님께서 우리 조국을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쓰셨다면서요?
우리 인민들은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에이,
그리고 '가난하다'가 뭡니까, 녀사님.
고저 '경제적으로 좀 부족하다' 이렇게 쓰셔야지."

남편이 "
어쨋든 알갔어,
알갔어"라며 평양말을 흉내내며 끼어들었다.

"여보,
빨리 그 대머리약 좀 꺼내드려."
"선생님!
'대머리약'이 뭡니까.
'머리 빠지지 않는 약', 이렇게 좀…."
"아,
이 사람! '대머리약'이나 '머리 빠지지 않는 약'이나 그게 그거지, 원…. 
그리고 젊은 사람이 머리가 그게 뭐야.
어서 가져가 발라봐.
더 이상 벗겨지지 않게."

설향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소하다는 듯 박장대소한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수양딸 설경이가 생각이 나 물어봤다.

"설경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지금 해산달이 다 되어가 오늘내일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두 분께서 설경이네 집에 가시고 싶어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관광객으로 오셔서는 불가능합니다.
일반 방문비자로 다시 오실테니 그때 가보시도록 해보세요."
"알고 있어요."
 
 
▲  커피숍에서 리정 선생의 설명을 듣고 있는 나, 그리고 설향이(왼쪽)
ⓒ 신은미

 


내가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분위기라도 전환하려는지 얼른 접대원을 불러
대동강 맥주와 탈피(마른 명태)를 주문한다.
'탈피' 소리를 들으니 이번엔 또,
별명이 '탈피'인 수양조카 현수가 떠오른다.

"현수는 지금 어디 있어요?"
"로력동원 나가서 한 달 정도 있어야 평양으로 돌아옵니다."
"네? 동원을 나가 한 달이나 있어야 돌아온다고요?"
"9월에 다시 오셔도 아마 현수는 못 만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부인하고 애라도 꼭 만나고 가야 해요."
"그때 가서 보십시오."

평양 '가스 맥주'를 아십니까

▲  평양의 한 가스 맥줏집
ⓒ 신은미

 


'로력동원'을 나간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가능한 한 그곳에 찾아갈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달래 듯 대동강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지만,
대동강 맥주의 맛은 일품이다. 
남편은 대동강 맥주 예찬에 여념이 없다.
옆에서 영길 아우가 한마디 거든다.

"형님, 여름에는 수요가 너무 많아 대동강 맥주가 아주 귀합니다.
공급이 채 따라오질 못하요.
지금 평양에는 가스 맥줏집도 많이 있습니다.
거기 맥주는 더 맛있습니다."
"가스 맥주가 뭐야?"
"맥줏집에서 맥주를 직접 자체 생산해 손님들한테 제공하는데 정말 시원합니다."
"뭐,
여기에 그런 데가 다 있다고?
말나온 김에 가서 한잔 할 수 없나?"
"가실라요?"
"응,
지금 당장."
"당장이요?
급하시기는…. 
그럼 우선 려장을 풀고 내려오신 다음에 식사를 하시고 가자요."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가스 맥주'집을 향해 호텔을 나섰다.
평양의 밤도 예전보다 훨씬 환해졌다.
일부 건물은 네온사인으로 뒤덮여 휘황찬란하다.

차에서 내려 어떤 건물로 들어가는데 도저히 맥줏집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도무지 간판이 없으니 이곳이 아파트인지 맥줏집인지 알 길이 없다. 
북한의 유흥업소가 다 이런 식이다.
선전이나 광고가 별로 필요 없는지,
아니면 하지 않는 건지….
대부분 업소에는 간판이 없거나 있어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잘 꾸며져 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들어서서 보니 고급 술집 같이 꾸며놨다. 
그런데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세련된
옷차림을 한 여성들끼리 앉아 맥주나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장면이었다.
고급스러운 귀걸이를 한 여성들도 눈에 띄었다.
북한에 와서 여성들끼리 술집에 들어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다.

▲  두 여성이 평양 가스 맥줏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 신은미

 


나는 화들짝 놀라 설향이에게 물었다.

"어머,
설향아,
이곳에서도 여자들끼리 술집에 와서 술을 마시네?"

"녀성들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절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렇게들 마시고 있잖아?"
"그야,
뭐,
자기들이 원해서 하는 일이니 누가 뭐라고 할 수가 없지요.
하여간 저는 이런데 와서 제 동무들과 저렇게 앉아 술을 마시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다 설향이에게 다시 물었다.

"설향아,
혹시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도 있니?"
"담배를요?
오마(어머),
시집 다 가려고….
어떻게 녀자가 담배를 피웁니까.
아직까지 조국에서 담배를 피는 녀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근데 남조선에서는 녀자들이 담배를 피우기도 하나요?"
"응.
많이들 피워."
"오마니도 담배 피우시나요?"
"아니."
"야아,
다행입니다.
저는 녀자가 담배 피우는 것은 도저히 못 보겠습니다."
"어쩌면 먼 훗날 여기도 남한처럼 될 지 몰라."
"아니요,
오마니.
여기서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설향이가 웃으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 이곳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 저 여성들은 과연 누구일까. 
소위 고급 당 간부의 부인 또는 그 자녀들일까.
아니면,
이러한 광경은 평양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무척 궁금해졌다. 
나는 영길 아우에게 앞으로 열흘 동안 가능하면 이런 곳에 자주 가자고 부탁했다.

도착한 첫날부터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일은 황해도 쪽으로 관광을 간다는 일정을 전해 들으며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뉴스

"평양 간다"니까, 북한 여인이 내 손을 덥석...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①]

 
수양딸·조카 만나러 평양 가는 길
 
13.09.25 13:48l최종 업데이트 13.09.25 14:43l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2011년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에 이끌려 내 삶 속에서 전혀 일어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던 북한 여행을 하게 됐다. 
북한 여행 이전에 나는 북한이라는 나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 종교적 신념을 다해 노력해봐도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그런 나라였다.

그런 내가 2012년 5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40일 동안 북한을 여행했다. 
정말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북한 여행을 통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체험하고 민족애를 느꼈다.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게 됐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행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조국이 분단돼 있다는 현실에 가슴 아파해야 했던 '
내 생에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

남편의 제의로 떠난 첫 여행.
솔직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북한으로 출발하기 전에 '
북한사람들은 과연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 
'그 이질감의 골은 얼마나 깊을까' 등의 호기심만 있었다.
그러나 첫 여행을 통해 이질감은커녕 '
그들은 우리와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까'라는 동질감만 느끼고 돌아왔다.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조국이 분단돼 있다는 생각에 고통은 배가됐다.

북한 여행 중 내 관심은 '
북한이 얼마나 못 사느냐'가 아니라 '
이들이 우리와 함께 한 공동체를 이루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을까'에 쏠려 있었다.
우리가 지난 시절 경험해서 잘 알고 있듯이,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남북한 동포들이 이질감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면 통일은 한낱 꿈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북한에서 '
우리는 오랜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이뤄진,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발견했다. 
어려서 받은 반공 교육 때문에 북한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갖고 있던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고 한동안 당황하기까지 했다.

평양에 두고 온 수양딸 그리고 수양조카

▲  평양에 두고 온 나의 수양딸 김설경
ⓒ 신은미

 


▲  평양에 두고 온 난의 수양조카 방현수
ⓒ 신은미

 


지난 세 차례 여행 동안 우리 부부에게 수양딸(김설경)과 수양조카(방현수)가 생겼다.
이제 나 자신이 이산가족이 돼 이곳 미국에서 그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던 중 수양딸 설경이가 지난해 10월에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경이는 회사의 회식 때 처음 남편을 만났는데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결혼하면 집에서 살림만 하고 싶다며 빨리 아기를 갖고 싶다고 했으니
아마도 지금쯤 임신 중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남편은 설경이에게 "
쿠쿠 밥솥을 들고 결혼식에 가겠다"고 말했지만
우리 부부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대신 아쉬운 마음을 담아 곧 태어날 아기에게 필요한 물건들과
설경이의 가족들에게 전할 선물을 준비해 평양가는 길에 올랐다.
설경이의 신혼집에도 들르고,
조카 현수네 집에도 들러 그간 누리지 못한 가족의 정을 듬뿍 나누려 한다.

지난 여행 중 나를 "
오마니"라고 부르며 친딸같이 나를 챙겨주던 설경이. 
그리고 "
이모,
이모,
통일이 되면 내가 개 한 마리 목에 터억 걸치고 이모 찾아
서울로 갈게"라고 하던 현수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며 그리움에 목이 메어왔다.

사라져 가는 이산가족

▲  평양의 설경이와 현수에게 전달할 선물이 방안에 널려있다.
ⓒ 신은미

 


수양딸·
수양조카를 둔 나도 이럴진대 친형제·친부모와 헤어져 수십 년을 살아온
남북의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어떨지….
가족이 헤어져 서로의 생사도 모른 채 산다는 것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피붙이도 만날 수 없다니,
이보다도 더 잔인한 인권 말살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안될 일이다.

2012년 4월 평양의 해방산호텔에서 목격했던 재미동포들의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떠오른다.
헤어졌던 가족이 두 손을 꼭 잡은 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아보려 고개를 젖혔지만,
마르지 않는 눈물은 주름살 가득한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런데 고작 100명씩 만나는 이벤트성 만남으로 그 많은 이산가족들이 언제 다 재회할 수 있단 말인가.
해외동포 이산가족들은 누구나 원하면 언제든지 북한에 가 헤어진 가족을 만날 수 있는데
왜 남과 북의 이산가족에게는 그게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통일의 날이 진정한 광복의 날"
평양으로 향하고 있는
오늘은 2013년 8월 14일. 
한국시각으로는 8월 15일 광복절날이다.
비행기 안에서 "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라고 말씀하시던 재미동포 의학자 오인동 박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에 희생된 조선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지금까지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실이 오늘따라 더 가슴을 깊게 후벼판다.
이런 날에 평양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를 만나러 간다.
우울함과 기쁨이 교차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북한에 갈 때마다 남북관계·북미관계는 최악이었다.
2011년 10월 첫 여행 때는 천안함·연평도 사건 후유증으로,
2012년 두 차례의 여행 때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거에 이은 로켓 발사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공위성 발사와 3차 핵실험·한미합동 군사훈련과 개성공단 문제 등으로
남북관계·북미관계가 위태위태한 상황이다.

이런 정황 속에서 또다시 북한에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이제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구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친지분들을 뒤로한 채 우리 부부는 북한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 핸드백 안에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읽으려고 넣어둔 북한 방문기가 들어 있다.
아쿠다가와상 수상자며 우리에게 <풀하우스> <온에어> 등으로 잘 알려진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의 <평양의 여름 휴가 : 내가 본 북조선>
한국어판이었다. 
스스로를 '
뿌리없는 풀'이라 불렀던 유미리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조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유미리는 북한에 가기 전 열 차례 정도 조부모의 고향인 한국에 다녀갔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왜 한국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북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써내려간 걸까.

로스앤젤레스를 떠난 우리는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인천공항에 내렸다.
이곳에서부터 평양까지는 비행기로 불과 몇십 분밖에 걸리지 않는데,
우리는 지금 그곳을 가기 위해 중국에 가야만 한다.
남한에서 평양에 가는 길은 베이징을 통한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북한에 갈 때마다 들른 인천공항에서 안타까움과 슬픈 감정을 삼켜야만 했다.

인천.
한국전쟁 때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상륙작전을 했다고 학교에서 배운 곳이다. 
공항이 있는 곳마저 현대사의 비극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라니.
수양딸과 수양조카를 만날 수 있다는 흥분은 이내 사라지고 마음속에는 우울함만이 가득하다.

베이징의 북한 레스토랑 '천지'

▲  베이징의 북한 레스토랑 '천지'
ⓒ 신은미

 


침울함과 함께 도착한 베이징.
거리는 차와 매연으로 숨쉬기조차 불편하다.
시장경제에 익숙해진 중국인들은 바쁘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인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무질서와 다툼이 보인다.
솔직히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북한도 경제가 발달하면 이렇게 변해갈까. 
아니면 아름답기 위해서는 가난해야만 하는걸까.
언젠가 북한도 분명 경제가 발달할 것이다.
매번 북한에 갈 때마다 경제가 나아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동포들의 생활이 조금씩 향상되는 것을 볼 수 있어 흐뭇했다. 
그러나 사람만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그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베이징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어놓은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떠나기 전에 미리 알아 둔 북한식당 '천지'를 찾았다. 
최근에 생겼다는 고급 레스토랑인데 내부는 조선식과 중국식을 혼합해 놓은 듯하다. 
손님 대부분은 중국인들이다.

▲  공연중인 북한 레스토랑 '천지'의 여직원들
ⓒ 신은미

 


이곳에서 여러 가지 북한 요리를 주문하니
여느 북한식당들과 마찬가지로 예술단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선사한다.
내 전공이 음악인지라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공연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저런 솜씨는 적어도 대학에서 전공하지 않으면 갖출 수 없는 실력이라고 느꼈다.

외국 노래들도 많이 불러 깜짝 놀랐다.
그룹 아바(Abba)의 <댄싱 퀸>(Dancing Queen)을 원곡보다 더 아름답게 불러
나도 모르게 공연자들과 어울려 춤을 추기까지 했다.
평양 모란봉 악단을 떠올리며 변화하는 북한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공연자들은 연주가 끝나고 얼른 옷을 갈아입은 뒤 웨이트리스 일까지 겸하는데,
외국어 실력이 상당하다.
각자가 맡은 외국어가 있는지 영어·중국어·일어로 유창하게 손님을 접대한다. 
이들의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연주를 마친 한 공연자가 우리 일행에 다가오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작년에 재미동포 예술단으로 평양에 오시지 않았습네까?"
"네,
그랬어요."
"맞았네요.
공연 장면을 록화 중계로 보았습네다.
해외동포가 우리 노래를 부르니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릅네다."
"참, 잘도 기억하시네요.
북경엔 언제 오셨어요?"
"한 6개월 됐으니 2년 반 정도 있으면 조국으로 돌아갑니다.
저,
녀사님,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르니 우리 노래 한 곡 불러 주십시요."

나를 알아보는 북한 사람이 있다니!
나는 이미 통일 조국에서 살고 있는 느낌이다.
지난해 4월,
재미예술단 자격으로 평양에 가 공연했을 당시 서양의 노래를 부르지 않고
북한 노래를 부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북한 노래,
그야말로 나 자신의 생애를 뒤돌아보게 한 노래 <생이란 무엇인가>를 불렀다.

설경이와 현수를 찾아 평양으로
베이징의 한 호텔에서 하루를 보낸 우리는 평양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북한 고려항공 카운터로 간다. 
'고려항공'이라는 글자 아래 주욱 늘어선 줄에 달라붙어 차례를 기다린다.
수양딸과 수양조카를 만날 수 있다는 흥분이 다시 고개를 든다.
어제의 우울함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

체크인을 마치고 탑승구에 다다르자 귀국하는 북한 사람들과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벌써 도착해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 북한 여행 때가 생각났다.
막상 김일성 주석의 배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을 처음 보고 얼마나 놀라고 긴장했었는지….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앉아 있으며 느끼는 감정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한 북한인 부부에게 말을 걸었다.

▲  해외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한 북한동포 부부와 베이징 공항에서.
ⓒ 신은미

 


"평양에 가시나요?"
"네."
"저희도 평양에 가는 길이에요."
"아,
그렇습네까?
무슨 일로…?"
"관광 가는 중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평양에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살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도 만날 겸 가는 거예요."
"지금 오데 살고 있습네까?"
"미국이요."
"아,
재미동포시군요.
그런데 오떻게 해서 평양에 양딸과 양조카가 있습네까?"
"저희는 이미 평양에 세 차례나 관광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 저희를 안내했던 사람들과 친척 관계를 맺었어요."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인이 내 손을 덜컥 잡는다.
부인은 눈시울을 적시며 말을 이어간다.

"그랬군요.
우리 어서 통일을 해 오손도손 함께 살아야 합네다.
이렇게 만나면 다 한 식구가 되는데…."

▲  통일 이야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적시며 내 손을 잡으려는 북한동포
ⓒ 신은미

 


이 부인 역시 여느 북한동포들과 마찬가지로 통일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데 왜 북한동포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통일 이야기를 할까. 
이들이 말하는 통일이 우리가 반공 교육을 통해 배웠던 '
적화 통일'을 의미할까.
그렇지 않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남한은 어떤가.
남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별 관심조차 없는 듯하고,
통일을 이야기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까지 한다.

어찌 됐든 참 해괴한 일이다. 
진보는 이념에 따라 움직이고 민족 문제는 보수가 챙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남한의 경우에는 그 반대인 듯하다. 
소위 보수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민족 문제에 관심이 없는 듯하고,
진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민족 문제를 이슈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김일성 주석 배지를 단 사람들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주고받다니….
내게 이념적 변화가 생기기라도 한 걸까. 
내가 내 자신을 '보수적인 아줌마'라고 불렀던 것은 내가 이념적으로 보수라서가 아니라,
기독교(장로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 생활을 한답시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어려서 받은 반공 교육에 따라 '
묻지마 반공'을 하는 것을 보며 주위 사람들이
나를 '꼴통 보수'라고 불러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방면에 무지해 이념이 파고들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 내게
이념적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내가 변한 것이 있다면
북한 동포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이 달라졌다는 사실뿐이다.

▲  평양행 고려항공 탑승구의 전광판
ⓒ 신은미

 


이것저것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지고 골치만 아프다. 
때로는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게 속 편하고 좋다. 
평양에 살고 있는 수양딸 설경이와 수양조카 현수를 만날 생각만 한다. 기분이 좋아진다.

나 같은 보통 사람에게 민족이나 통일이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저 가고 싶을 때 가고,
보고 싶은 사람을 언제든지 가서 만날 수 있는 것.
이런 평범한 일인 것이다.

드디어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귀국하는 그 북한 부부와 함께
우리는 그리던 수양딸과 수양조카를 만나러 가기 위해 고려항공 비행기로 향했다.
태그:북한, 통일, 이산가족태그입력

 

 

 

 
 

조선로동당이 날 보잔다,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또 가다④] 북한의 농촌 그리고 장수산

 
 
13.10.16 16:12l최종 업데이트 13.10.16 17:45l
 
 
지난 세 차례 북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내게는 북한에 두고 온 수양딸과 수양조카가 생겼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정을 나눈 그들이 다시 보고 싶어서,
더 많은 북한 동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올해도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지난 8월 15일부터 8월 26일까지 한 차례
그리고 9월 4일부터 13일까지 또 한 차례 북한을 여행했다.
새 연재 '재미동포 아줌마 또 북한에 가다'를 통해
북한 동포들의 지금과 북한의 여러 명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기자말

▲  정방산 입구 개울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설향이가 환한 미소를 짓는다.
ⓒ 신은미

 


성불사에서 내려와 보니 개울에서 밥을 짓던 아이들은 벌써 점심을 다 끝내고
개울물에 설거지를 하고 있다. 
우리 '벤또'를 그들의 식사와 바꿔 먹으려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
무척 아쉽다. 
아이들과 어울려 냄비를 둘러싸고 앉아 찌개를 한 숟갈 떠먹고 싶었는데….

개울가를 조금 지나치니 시멘트로 만든 테이블들이 마련돼 있다. 
우리는 그곳에 자리 잡고 호텔서 가져온 도시락을 펼쳤다.
무장아찌·
생선튀김·
닭날개조림·
장조림·
가자미식해·
삶은 달걀까지 진수성찬 도시락이다.
설향이도 즐거운지 삶은 달걀을 테이블 위에 '톡톡' 치며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어릴 적 소풍갈 때면 빠지지 않고 늘 엄마가 싸주시던 삶은 달걀!
그 시절이 떠올라 나 또한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  정방산 입구 개울에서 매미를 갖고 노는 아이들
ⓒ 신은미

 


저만치에서 어린 여자 아이들이 테이블에 뭔가를 올려놓고 노는 모습이 보인다.
어서 떠나자는 영길 동생의 재촉을 물리치고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가서 아이들을 보니 잡은 매미를 가지고 놀고 있다.
아이들이 수줍음을 많이 타서 그런지 말을 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이름을 물어보니 겨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오늘은 여기서 이 아이들과 함께 동심으로 돌아가 매미나 잡으면서 놀다가 그냥 평양으로 돌아가고 싶다.

북한의 농촌에 원두막이 생긴 이유

▲  북한 농촌의 모습. 가정에 있는 '텃밭'의 모습이 보인다.
ⓒ 신은미

 


우리 일행을 태운 차는 장수산을 향해 논밭을 따라 쉼없이 달리고 있다.
빈 땅이 하나도 없다.
도로변에도 콩이나 참깨같은 작물들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가파른 산비탈까지 빽빽히 뭔가를 잔뜩 심어놨다. 
키가 큰 것이 옥수수같아 보인다.
북한의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은 남편이 영길 동생에게 물었다.

"올해 농사는 어떤가?"
"올해는 잘 됐습니다.
큰 물피해도 없고….
그동안 시험적으로 해오던 분조제를 올해 처음 전국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영길 동생이 분조제에 대해 열심히 설명한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협동농장을 작은 단위로 나눠 한두 가족에게 경작하게 한 뒤,
수확물의 30%를 국가에 내고 나머지는 농민이 가진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수확물의 개인 소유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  논밭 위에 있는 원두막. 개인 소유가 인정되면서 늘어난 듯하다.
ⓒ 신은미

 


자동차가 시골 동네로 접어든다. 
온갖 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울타리에는 호박 넝쿨·수세미 넝쿨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고, 
앞마당에는 푸성귀들이 먹음직스럽게 터를 잡고 있다.
자기 집 마당의 경작지를 텃밭이라고 부른다는데 30평까지 가능하단다. 
텃밭 경작만 잘해도 1년 부식 거리는 해결될 것만 같다.
하여튼,
올해 북한의 농업생산량은 틀림없이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이다.
'소유' 만큼 더 큰 인센티브는 없다.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면 탈북자들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1월 남한 입국 탈북자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언론들은 그 이유로 '국경 경비 강화'를 꼽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5월 연길에서 나진-선봉으로 들어가며 봤던 개천 같은
두만강은 아무리 경비를 강화해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넘어갈 수 있어 보였다.
나는 남한 입국 탈북자 감소 현상을 북한의 식량사정 개선 그리고 생활수준의 향상과 연결해서 생각해본다.

북한 쌀의 60%, 이곳에서 나온다

▲  농촌에서 볼 수 있었던 각종 구호들
ⓒ 신은미

 


어쨌든 이곳 사람들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북한은 제일 먼저 식량 증산에 '혁명적 사활'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경공업 발전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성대국'이란 헛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상품의 다양화와 품질 향상으로 인해
북한산 제품들이 중국산 제품들을 조금씩 대신해 나간다"는
설향이의 말을 들어보면, 당연히 북한 정부도 이를 잘 알고 있으며 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설향이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제 군사강국을 이루어 어느 누구도 우리를 침략할 수 없을 겁니다.
남녘의 대통령께서 '머리 위에 핵을 이고 살 수는 없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발밑에 미군의 핵을 깔고 수십 년을 살아 왔습니다.
올 봄에도 미국이 핵폭격기니 핵잠수함이니 이런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동원해서
침략전쟁 연습을 해댔는데, 
우리 인민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중국이나 러시아와 함께 외국 군대가 없는
남조선을 향해 허구한 날 핵전쟁 연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남조선 동포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민들 고생 많았습니다.
지금부터는 '
경제발전에 박차를 가해 인민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곳에는 내가 본 북한의 어느 지역보다 논이 많다.
영길 동생의 이야기에 따르면 북한에서 생산되는 쌀의 60%가 이 지역에서 나온다고 한다.
갈라지는 길가에 '재령'이라고 쓰여진 교통표지판이 보인다.
아,
이곳이 바로 중학교때 지리 시간에 배운 북한의 곡창지대라는 재령평야였구나.

시골길을 따라 보이는 이곳 농촌의 모습은 내가 어려서 본 남한의 농촌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단지,
그 시절 남한 농촌의 가옥은 초가집이었는데 이곳의 가옥은 기와집이다.
그런데 일부 가옥들이 너무 오래되고 낡아 보인다.
그동안 힘든 경제로 인해 보수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인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와집들이 농촌에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북한은 매우 풍요로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  얼음과자를 파는 시골 아주머니.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 신은미

 


▲  북한의 '모범농장'
ⓒ 신은미

 


시골길 골목, 
오밀조밀한 노점상들이 보인다.
여름철이라 그런지 동네 아이들이 냉차·얼음과자통 주위를 맴돌고 있다.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은 커다란 양푼에 뭔가를 담아들고 나와 벌려놓은 채 담소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다.

팔러나온 닭과 새끼 돼지를 나무에 매어놓고 누워 있는 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여자들 틈이라 낯설은지 멀지감치 떨어진 곳에서 편한 자세로 누워 계신다.
강 기슭과 개울가를 보니 아이들이 지칠 줄 모르고 물장구치며 놀고 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저기 깨끗한 기와집들로 이뤄진 마을도 인상 깊다. 
설향이의 설명에 따르면 그곳은 모범농장이라고 한단다. 
앞으로 북한의 모든 농촌마을이 이런 모범농장들처럼 변한다면,
북한의 농촌은 조선의 고유한 특색이 잘 나타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설향이 아버지와 밤낚시를 할 수 있다면...
논이 많아 그런지 대형 저수지가 두 개나 보인다.
동녕저수지와 은파저수지. 
특히 은파저수지의 규모는 엄청나다. 
한쪽에서는 낚시를 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남자가 미역을 감고 있다.

벌거벗고 멱을 감는 남자를 본 영길 동생이 그냥 못본 척 지나갈 리 없다.
이내 짓궂은 농담으로 순진한 설향이의 얼굴을 붉혔다.
남편이 영길 동생에게 "
주책 좀 그만 부리라"라고 한 마디 내던지더니 화제를 돌려 설향이에게 말을 건다.

"설향아,
여기 앉아서 밤낚시 하면 붕어 엄청 잡겠다."
"오마,
낚시 좋아하세요?
우리 아버지도 낚시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어떤 날은 밤을 새고 들어오십니다.
고기는 잡아서 다 이웃들에게 갖다주시면서 말입니다."
"설향이 아버님이 낚시를 좋아하시는구나.
함께 낚시를 할 수 있다면 아마 최고의 여행이 될 텐데 말이야."
"관광 일정에 함경도 마전해수욕장이 들어있는데, 거기 가서 해보십시오."
"아니,
그게 아니고, 설향이 네 아빠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이야.
갈라진 조국에서 그동안 떨어져 산 우리들의 이야기 등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야. 
아마 그럴 수만 있다면 나에게는 최고의 관광이 될 것 같아. 
성불사 같은 곳 백 군데를 다니는 것보다 더…."

이를 듣고 있던 영길 동생이 끼어든다.

"형님, 참 이상하디요.
형님도 똑같은 말씀하시네요.
일전에 호텔에서 유럽 관광객과 얘기를 나누다가 그 사람한테 '
이번 여행 중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었더니 평양지하철이라는 기야요.
기래 제가,
'당신네 나라에는 지하철이 없냐'고 물으니까 하는 말이,
지하철을 타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만원 지하철에서 평양 사람들과 부딪혀 가며 
서로 쳐다보면서 웃었던 그 경험이 이번 여행에서 최고로 좋았다는 겁니다.
아니 기게 뭐가 좋다고, 참…. 
리해가 안됩니다."
"영길이,
바로 그거야.
여행을 가서 그 나라의 명승지를 보는 것도 즐겁지만, 
그보다 더 흥분되고 의미있는 일은 그 나라 사람과 앉아 세상 사는 일 등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거야. 
우리야 한민족이고 말도 통하니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이렇게 이야기도 하고 
또 차에서 내리면 주민들과 소통하며 지내지만,
외국인들은 어떻겠어?
인민대학습당 구경시키고 김일성광장에 풀어놓고,
주체사상탑에 올려보내고,
호텔로 다시 데려오고….
얼마나 답답하고 지루하겠어. 
생각을 해봐."
"아,
그러니까 '대민접촉', 이 말씀이디요?"
"대민접촉?
그래 그래,
대민접촉. 바로 그거야."
"가서 토의해 보갔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유머, 좀 짓궂구나
우리가 탄 차는 탐스럽게 익어가는 논밭을 지나간다.
설향이와 내가 차를 세우고 조금 쉬었다가 가자고 운전사 철남 동생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생리 현상이 극에 달했다. 
설향이와 숨바꼭질하듯 일을 치르고 돌아오니 짓궂은 영길 동생이 한마디 한다.

"녀성들이 일보러 갈때 보면 거리만 봐도 나이를 알 수 있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별 볼일 없는 늙은이들은 대충 가까이서 일을 치르는데
시집 안 간 처녀들은 꽤나 멀리가서 일을 보니까 말입니다.
해외동포도 별반 다르디 않구만요."
"그래,
나 별 볼일 없는 늙은이야!
영길 아우 한 번 당해 봐, 단단히 벼르고 있을 거야!"

북한에 오기 전, 
내가 생각했던 북한 사람들은 농담도 전혀 안 통하는,
매우 경직된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에 와서 사람들을 대해 보니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들의 농담과,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
육담'(음담패설)은 대단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짓궂게 말하는 영길 동생의 '
육담'은 미혼인 설향이를 무척이나 괴롭게 한다.

▲  장수산 절벽 위에 있는 절. 사진 가운데 절이 보인다.
ⓒ 신은미

 


어느덧 장수산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가파른 절벽에 조선 시대때 세워졌다는 절이 하나 '매달려' 있는데,
어떻게 저기에다 절을 지었을까 신기하다.
대체 사람들은 저런 곳에 어떻게 올라가 공사를 했는지…. 
콩알만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절과 함께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망원렌즈로 당겨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있다.
북한영화 <홍길동> 촬영을 이곳 장수산에서 했다는데,
저 절벽 위 절에서 많은 장면을 찍었단다.

▲  장수산 거북바위. 마치 거북이가 절벽 틈에 끼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신은미

 

 
설향이가 매표소에 가더니 해설원을 동반하고 돌아왔다.
장수산은 12구비로 이뤄져 있으며,
우리는 지금부터 걸어서 그 12구비를 감상할 것이란다.
남편이 "
자동차를 타고 차가 갈 수 있는데까지만 돌아보면 안될까요?"라고 간청해봤지만, 
해설원은 "
각기 다르게 펼쳐지는 풍경과 령험한 산의 기운을 직접 걸어가며 느껴봐야 한다"며
우리 부부의 팔을 끌어안고 장수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큰소리로 장수산에 얽힌 전설과 사연을 거침없이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 해설원 또한 '육담'에 능하다. 
12구비에 얽힌 사연 모두 '육담'이다.
설향이가 불평하듯 말한다.

"KITC(조선국제려행사)에다 장수산을 관광코스에 넣지 말라고 해야겠습니다.
외국손님들을 모시는데 이 해설을 부끄러워 어떻게 통역하라는 말입니까."

장수산은 굽이쳐 올라가는 계곡을 따라 여러 형상 뽐내는 기암절벽을 감상하다가
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시 한 수 읊으면 딱 좋은 산이다.
정이 많아 아쉬워 하는 해설원과 어렵게 작별을 하고 
우리는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  벌써 조금씩 누렇게 익어가는 벼(사진 촬영은 지난 8월 말)
ⓒ 신은미

 


바짓자락을 둘둘 말아올린 채 곡괭이를 어깨에 멘 농부가 집으로 향하고 있다.
매년 봄·가을이 오면 농촌으로 '
로력동원'을 간다는 수양딸 설경이의 말이 생각난다
(관련기사 : 비통한 판문점... 느닷없이 북한 군인이 달려왔다).

"꾸부리고 모를 심다 허리를 펴면 땀이 주르르 흐르는데 심어논 모를 바라보면 정말 보람이 있습니다.
그러다 홍수라도 나서 다 자란 벼가 쓸려나가기라도 하면 그 쓰라린 가슴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헤르만 헤세였나. 
포도가 무르익어 향긋한 포도주를 담그게 햋볕을 쬐어달라고 신에게 기원했던
독일계 스위스 시인의 말을 빌려 나도 간절히 기도한다.

"신이여!
벼가 무르익어 황금 벌판이 출렁이도록 따스한 햇볕을 한 번만 더 내리 쬐어 주소서."

다시는 북한동포들에게 악몽과도 같았을 '
고난의 행군'이 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으면서,
푸른 북녘의 들판을 바라보며 평양으로 가고 있다.

'조선로동당'에서 나를 보자고?

▲  "당(조선로동당)에서 누나를 보자고 하는구만요"라는 영길 동생의 말에 우리는 흠칫 놀랐다

      (2011년 10월 북한 여행 당시 평양 조선로동당 기념탑 앞에서 찍은 사진).

ⓒ 신은미

 


차안에서 남편이 "영길이,
우리 평양에 도착하면 '가스맥주집'에 가서 한잔하자"고 제안한다.

"어젯밤에도 가셨는데 또 가시렵니까?
아니,
평양의 맥주를 형님이 다 드시면 우리 인민들은 뭘 마시란 말입니까?"
"아,
이 사람이…. 
맥주 한잔 마시고 가자는데 허풍에다 생색은…."
"어제 갔던 데로 가시렵니까,
아니면 새로운 데로 가시겠습니까?"
"이왕이면 새로운 곳으로 가지."

어디로 갈까 설향이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영길 동생이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심각한 모양새로 통화를 한다. 영길
동생이 전화를 끊더니 입을 연다.

"형님,
일단 호텔로 돌아가야겠는데요."
"무슨 일인데?"
"당에서 누나를 보자고 하는구만요."

나는 깜짝 놀라 영길에게 물었다.

"당이라니?"
"당 말입니다.
조선로동당."
"거기서 왜 나를…?"
"아니,
왜 놀라십니까?
당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야요.
긴데 정말 이상하네.
왜 누나를 보자 기럴까."

무슨 일일까?
혹시 내가 지난 번에 쓴 북한 기행문이 잘못이라도 된 것일까?
궁금해 하는 우리를 태운 차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평양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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