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전쟁 에 대하여....(내공 많이 걸께요)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전쟁 에 대하여....(내공 많이 걸께요)

작성일 2004.12.0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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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전쟁에 대하여 조사가 숙제인데요...

못찾겠어요... 내공 걸 수 있는 데 까지 걸테니깐 답변좀

해주세요 제발요... 목요일 까지 숙제인데 2일 남았음.. ㅠㅠ

빨리 해주세요 답변 빨리 해주시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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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란의 상황
이란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형성하였으며, 그리스, 아랍, 터키 및 몽고 등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에는 영국과 러시아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1925년에 팔레비 왕조가 건국되었고, 1935년에는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이란에서는 1962년 서구화 지향의 백색혁명이 시작되었는데, 1963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반백색혁명의 폭동으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고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는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5년간에 걸친 망명생활의 대부분을 이락에서 보내게 되면서 시아파 지도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1977년 재미 유학생들에 의해 반정부시위가 발생하고, 1978년에는 반정부 시위 활동이 이란의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팔레비왕 치하의 이란은 정치와 종교의 분권을 도모하였는데, 이로써 종교인의 사회적 지위 저하와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성직자 참여가 위축되었으며 독실한 신자의 불만을 격화시켰다. 이러한 불만이 계속되어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이 세속적인 팔레비조를 뒤엎게 되었다. 1979년 팔레비왕은 망명을 하게 되고, 호메이니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게 된다. 즉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성공을 이룬 것이다. 결국 국민투표로 이슬람공화국이 선포되고 이란 학생들에 의한 미대사관 인질사태가 발생하여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혁명정부는 신헌법을 제정하게 되고, 이러한 와중에 1980년에는 이락과는 국경분쟁으로 전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2. 이란의 이슬람혁명
1979년 2월에 일어난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팔레비 왕권의 지나친 친서구화 정책 및 권위주의적인 통치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장기간 정치·종교적인 면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호메이니에 의한 반서구 이슬람세력의 반발로 일어난 정통 이슬람주의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혁명으로 인하여 걸프연안의 세력 구도는 큰 변동을 겪게 되었다. 왕정제의 붕괴로 인한 걸프연안 왕정국들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즉 전통적 보수왕정제 국가들은 이 사건으로 자신들의 지배 체제가 시대적으로 변혁을 겪게될 것으로 예상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란의 시아파 지도자들은 혁명 직후 걸프연안 왕정국들에 거주하는 다수파인 순니파가 시아파 무슬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시아파 무슬림들은 일제히 봉기하여 걸프연안 왕정국가들을 타도하라고 부추기게 된다. 특히 이란의 호메이니의 혁명수출정책이 주변 지역으로 파급되어 이락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3. 이락의 상황
이락은 1932년 영국의 위임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였으며, 하심(Hashimite)왕가에 의하여 입헌군주제가 성립되었으며, 1958년 혁명 전까지는 친미·친서방 국가였다. 그러나 1958년 까심(Abd al-Karim Qasim)장군의 군사혁명으로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국으로 정치체계가 변화되었다. 혁명 이후 이락은 1968년 바크르 장군의 쿠데타까지 3 차례의 정권 변화를 경험하였다.
1963년 민족주의 청년 장교단 주도의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고, 바아스당 정권이 출현하면서 아레프(Aref)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6년 아레프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형인 모함맛 아레프(Mohammad Aref)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8년에는 바아스당내 온건파 쿠데타로 아레프 정권이 붕괴되고, 바크르가 집권하였다. 1975년 이란과 신국경협정(샤트 알-아랍수로 문제)을 조인(알제리 협정)하고, 쿠르드족과의 내전을 잠정적으로 종식하였다. 1979년 삿담 후세인(Saddam Hussein)이 바크르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게 되고, 1980년에는 이란과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후세인은 1980년 국민헌장에서 비동맹원칙을 발표하면서 아랍결속을 촉구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으로 상실한 지도력을 후세인 자신이 차지함으로써 아랍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하려는 의도와 함께 국제적으로 비동맹주의 원칙을 주장함으로써, 1982년 비동맹 정상회담을 바그다드에서 개최하고 국내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구축할 뿐만 아니라 비동맹세계의 지도자로 등장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락은 군사적으로는 구 소련으로부터 우수한 무기를 도입하여 지역 군사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또한 1975년 이란과의 국경분쟁과 쿠르드족의 분리 요구 문제 등으로 국방에 많은 지출을 하였다. 이락은 지리적으로 아랍국가로는 유일하게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이란인의 불만 등으로 대립 관계를 계속하였다.
1980년 9월 후세인은 알제리 협정을 폐기하고 샤트-알 아랍수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란은 이락 경비선에 공격을 명명하고 이락의 전면적 공세의 대응으로 이란-이락전쟁이 시작되었다.

4. 전쟁의 전개

1) 이란-이락전쟁 발발의 직접적 배경
이란과 이락간의 아랍권의 맹주권 및 영토 분쟁으로 인하여 발생한 1980년 9월의 이란-이락전쟁은 특히 양국의 국경지역인 샤트 알-아랍(Shatt al-Arab)수로에 관한 영유권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쟁 발발은 표면적으로는 샤트 알-아랍수로의 영유권 문제와 이란이 강제로 점령한 호르무즈 해협의 3개 도서의 반환 문제로 야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맹주권, 즉 이락의 후세인의 정치적 야망과, 혁명 수출을 위한 호메이니의 혁명관이 서로 상충하면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샤트 알-아랍 수로의 경우, 걸프만과 연결되어 있어 경제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므로 양국간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란과 이락의 관계에 있어 변수로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2년 이락이 독립하면서 이란과 이락간에 국경조정 문제가 제기된 이래 이 수로는 1937년 이란·이락의 국경협정에서 임시로 그 경계선을 수로의 동안으로 결정함으로써 이락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란측은 국제법상의 관례를 들어 수로의 계곡선을 국경선으로 정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영국이 이락측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이란은 수로의 경계를 계곡선으로 하기 위하여 이락과의 협상을 수 차례 시도했으나, 이락의 경우 일단 자국 소유로 인정된 지역을 이란에 반환할 의사는 당연히 없었다. 그리하여 수로 문제는 계속적인 문제점으로 남아 있었고, 1960년대 말∼70년대 초, 이락이 국내의 쿠르드족의 반란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을 때 이란은 쿠르드족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락은 1975년 알제리에서 개최된 이슬람국가들의 정상회담에서 이란측이 쿠르드족의 반란군에게 일체의 원조를 중단하는 대신에, 수로의 양국경계로서 계곡선으로 하는 지정 문제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1979년 후세인이 이락의 대통령이 되면서 알제리 협정의 폐기를 선언하였다. 그는 샤트 알-아랍수로의 이락 영유권을 선언하고, 1971년 팔레비 정권이 걸프만 안보의 보장이라는 명목으로 점령한 아부 무사, 톰브 등의 도서에서의 이란군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양국간의 국경 문제에 대한 충돌이 결국 이란-이락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전쟁의 발발
이락은 전쟁 초기계획으로 이란의 유전, 정유시설, 운반 루트의 파괴와 이러한 산업지역을 테헤란 정부와 단절시킴으로써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예상하였다. 이락은 바그다드와 가까운 중부 접경지대로 진격하고 다음 목표인 샤트 알-아랍수로를 넘어 후제스탄의 주요 도시인 호람샤흐르와 아바단을 점령하였다.
이락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양국간의 전쟁은 점차 이란의 반격으로 상호공방이 교차되면서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이란의 경우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혁명은 팔레비 정권을 붕괴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혁명 이전부터 계속된 시위와 파업은 다국적기업의 철수, 석유 수입의 감소 등으로 이란의 경제는 1982년 초 최하수준을 기록하였다. 또 산업생산 능력이 40%를 밑돌았고 실업률이 40%를 육박했으며, 전 분야에서 고질적인 부족 현상은 부품과 원자재, 섬유류에서 매우 극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쿠르드족과 발루치족 그리고 후제스탄 아랍인에 의한 소수민족의 소요와 자치 요구 및 1980년 사전 발각된 쿠데타 등으로 정치적 불안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란 내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과 이락의 침공은 이란에게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란은 위기를 이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즉 적의 조직적 근절과 성직자에 보다 의존하는 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위기를 이용하였다. 대중의 관심 대상을 국외에서 찾음으로써 국내적 불만이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 하였다. 또한 이 전쟁은 혁명에 대한 개인적 의지에 관계없이 모든 이란인을 전쟁에 참여시키는 민족적 동원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이란 혁명정권은 혁명임무가 완수되어졌다고 국내 정세를 평가할 때까지 이락과의 전쟁을 대가 없이 종결지으려 하지 않았다.

5. 전쟁의 영향
장기전으로 약 8년간 교전했던 이락과 이란은 1987년 UN의 종전권고 결의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988년 8월에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란혁명,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이락전쟁은 걸프지역 국가들과 중동지역의 석유에 의존하는 서방세계에 대단한 충격을 주고 그 대책을 강구케 하였다.
1980년 미국의 카터는 걸프에서 미국의 이익이 외부 도발에 도전 받을 경우 군사력을 통해서라도 방어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카터 독트린'). 이러한 경고는 이란의 혁명(친서방적 팔레비 정권 붕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걸프 연안국들이 안보에 위협을 느낀 후에 취해진 조처이다. 이란-이락전쟁 발발 후 아랍국가들에게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심화된 양극화 현상이었다. 이란을 지원했던 아랍국가들은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사회주의)과 같이 친소련 국가들이었으며, 이락을 지원했던 국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및 걸프 연안국들이었다.

자료 : http://www.quran.co.kr 의 이성수교수의 홈페이지의 자료를 발췌함



걸프전


☆ 이라크-쿠웨이트 국경분쟁. 1990 ~ 1991 年

1. 개요

이라크와 쿠웨이트 사이의 국경분쟁은 1961년 6월 19일 쿠웨이트가 영국의 보호령으로부터 독립되면서 표면화되었다. 쿠웨이트는 최초 1756년 아라비아반도의 걸프지역에 국가체제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유목민들이 경계 없이 분산되어 생활)에서 왕국으로 탄생하였다. 당시 유목민의 실력파였던 앗 사바하족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여 군주제를 답변확정하고 '쿠웨이트 왕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그후 당시 중동지역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걸프지역의 지배권을 추구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에게 1829년 종주권을 인정하고 1852년에는 그 보호 하에 들어가기로 하였으며, 오스만 터키 바스라주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면서도 쿠웨이트는 내정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그 후 19세기 말 쿠웨이트는 영국을 보호자로 선택하였다. 당시 쿠웨이트 왕국을 수립한 사바하가와 이븐 라시도가가 이 지역에서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였는데, 이 기회를 틈타 영국이 사바하가에 접근하자, 사바하가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영국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되자 이 지역은 19세기 후반부터 서방 열강의 영토 쟁탈전 무대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아라비아반도에 대규모 유전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쿠웨이트의 전략적 가치가 급부상 되었다. 이에 영국은 쿠웨이트에 대한 종주국이라는 지위를 내세우면서 유전의 독점을 주장하였고, 미국 역시 이 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렇게 하여 영국과 미국은 쿠웨이트 유전을 놓고 상호 대립하였고, 두 나라는 마침내 1934년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회사(영국)와 걸프 석유회사(미국)가 공동 출자하여 '쿠웨이트 석유회사'(KOC)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쿠웨이트는 영국과 미국의 철저한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과정을 지내온 쿠웨이트는 1950년대부터 중동지역에 급속히 확산된 민족주의 조류(1956년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 1958년 이라크에서 혁명으로 친영국 왕정 붕괴 등)를 타고 1961년 6월 19일 독립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독립과 더불어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국경분쟁이 표면화되었다. 이라크의 혁명 정권은 쿠웨이트가 오스만 터키시대에 자신의 영토인 바스라주에 편입되었었다는 이유로 그 나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국경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라크보다 열세한 쿠웨이트는 과거의 보호국인 영국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영국도 막대한 국가이익이 걸린 석유자원 확보 차원에서 1961년 7월 1일 항공모함 1척과 해병대 병력을 쿠웨이트에 파견하였다. 이라크의 카셈 정권은 이와 같은 영국의 군사개입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1963년 10월 쿠데타 발생으로 카셈 정권은 붕괴되었으며, 그후 새로 출범한 정권은 쿠웨이트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면서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이로써 쿠웨이트의 독립과 더불어 발생한 이라크와의 국경분쟁은 무력 충돌 없이 종결되었다.

그후 1970년대에 접어들어 이라크는 또 다시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요구하였다. 그 동안 걸프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쿠웨이트를 보호하여 오던 영국이 1960년대 후반부터 철수하고, 그에 따라 이 지역에 세력공백이 발생하자, 이라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다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 사우디아라비아가 영국군을 대신하여 쿠웨이트의 안전보장을 책임지기로 하였으나, 사우디아라비아가 쿠웨이트를 보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마침내 이라크는 1972년 말 국경지대의 쿠웨이트 영토인 앗 삼다지역의 조차권을 요구하였고, 이로 인하여 1973년 3월 양측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으며, 이라크가 이 국경지역을 점령하였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쿠웨이트를 지원하기 위하여 1만 명 이상의 군대를 파견, 이라크군과 대치하였다. 이 국경분쟁은 중동 각국의 조정과 양 당사자간의 협상으로 수습되어 이라크군이 1973년 4월 점령지역에서 철수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국경분쟁은 1980년대에 전개된 일련의 걸프지역 및 이라크 내 정세 변화와 연계되어 다시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국내정치가 점차 악화되자 걸프지역에서 세력판도가 변동되는 상황을 틈타 쿠웨이트와의 국경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당시 이라크는 이란과의 오랜 전쟁과 경제정책의 실패 및 유가의 계속된 하락, 그리고 서방국가들과 걸프 산유국들의 차관 공여 거부로 경제난이 가중되었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과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150여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가져왔고, 국가재정은 물론 국가경제를 파탄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전후에도 경제 재건 및 활성화보다 군수산업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의 불만이 누적되었고, 그에 따라 후세인의 정치적 기반도 도전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남부지역의 쉬아파 이슬람 세력과 북부지역의 쿠르드 게릴라 세력이 후세인 정권에 위협을 가중시켰다. 후세인은 결국 자신의 장기집권체제를 공고히 하고 국민의 누적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대외적 군사 모험이 필요하였다.

후세인의 정치적 야망은 걸프지역의 패권 추구로까지 연결되었다. 후세인은 이란과의 전쟁 이후 걸프지역의 세력판도가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안보적으로 취약한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바레인, 오만 등을 정복하여 명실상부한 패권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쿠웨이트를 합병하여 석유수출국기구(OPEC) 산유량의 40%를 점유함으로써 경제강국의 위치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낫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사망이후 쇠퇴한 범아랍주의를 부각시켜 자신의 바스당 통치이념을 바탕으로 아랍권의 통합을 추구하였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수행으로 경제가 피폐하였으나 군수산업이 발전되고 군비증강이 획기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군사강국이 되었고, 바로 이러한 군사역량이 걸프지역의 패권을 꿈꾸는 후세인의 정치적 야망을 자극하였다.

후세인은 이와 같은 복합적 배경에서 쿠웨이트를 희생양으로 선택하였다. 쿠웨이트는 해묵은 국경문제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얻을 것이 많은데다 안보,군사능력이 취약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1990년 7월 23일부터 쿠웨이트 국경부근의 유전지대에 전차와 장갑차로 무장한 최고 정예 부대인 공화국수비대 2개 사단 약 3만 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쿠웨이트도 전군에 비상사태를 발령하고 국경지역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① 루마일라 유전을 이라크 영토로 인정할 것, ② 이라크의 유전을 도굴한 배상금으로 24억불을 지불할 것, ③ 이라크가 쿠웨이트에게 진 부채 100억불을 탕감할 것, ④ 부비얀과 와르바 두 개 도서를 이라크에 할양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쿠웨이트로서는 이러한 이라크의 일방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후세인은 1990년 8월 2일 새벽 2시를 기해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였다. 공화국수비대 3개 사단을 선봉으로 병력 10만 명, 구소련제 전차 300대 이상, 헬기 300대 등이 사막의 경계선을 넘어 쿠웨이트를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이러한 이라크의 침공은 세계적 냉전이 종식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상황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은 이라크의 무력침공을 국제사회의 평화와 걸프지역의 안정에 대한 전면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유엔의 결의 아래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축출하기 위한 공세를 전개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은 1991년 1월 17일 새벽 2시 38분 이른바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한 이래 2월 23일 지상전을 포함한 전면전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이라크가 2월 28일 유엔안보리가 답변확정한 결의안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로 함으로써 걸프전은 작전 개시 100시간만에 종결되게 되었다. 이로써 이라크의 쿠웨이트 국경지역에 대한 영유권 요구는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2. 의미 및 영향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국경분쟁은 과거 열강에 의한 식민통치가 남긴 전형적 영토분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열강들은 식민지를 통치하면서 자신의 편의에 의해 경계를 확정하였는데,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그 유산이다. 이라크는 냉전 종식과 더불어 초강대국의 지역문제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자신의 패권적 야망을 충족시키고자 쿠웨이트를 군사적으로 침공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탈냉전시대에 분출될 수 있는 지역분쟁의 전형적 양상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국경분쟁은 아랍권 내부에 형제주의보다는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범아랍주의와 아랍민족주의가 쇠퇴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아랍의 여러 국가들이 이라크의 지역적 패권을 봉쇄하기 위해 이라크를 응징하는 다국적군 편에 가세하였으며, 이는 범아랍 명분보다 국가 실리가 우선함을 보여준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그에 대한 다국적군의 응징은 탈냉전시대 국제사회의 지역분쟁 해결 및 관리 방식을 예고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세계의 주요 국가들은 유엔의 이름 하에서 다국적군을 형성하여 이라크를 응징하였다. 냉전시대에 유엔은 국제분쟁의 관리나 세계평화의 유지 기능 측면에서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여 오지 못함으로써 그 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세계 주요 국가들은 지역분쟁을 해결,관리함에 있어서 유엔의 결정과 결의를 존중하게 되었다. 그 국가들은 유엔의 이름으로 병력을 파견하고 전비를 분담함으로써 지역분쟁에 대한 다국적 해결방식을 국제사회에 보편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사태는 또한 한국이 지역분쟁에 군대를 파견하고 전비를 지원하는 전례를 남겼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한국은 미국과의 쌍무적 관계 측면에서 월남전에 군대를 파견한 이후 유엔의 일원으로서 탈냉전 세계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지역분쟁의 해결에 군대를 파견하고 전비를 지원함으로써 세계 평화활동 참여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가 마련되었다. 한국은 그 이후 세계평화유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국경분쟁은 국제원유시장을 교란시키고 중동지역 전체를 불안정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는 물론 한국에게도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분쟁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방책과 노력이 요구된다.




3. 추후 전망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빚어진 걸프전쟁은 1991년 2월 28일 이라크가 사실상의 항복문서와도 같은 유엔 결의안 12개를 모두 받아들여 무조건 이행할 것임을 선언하고 미국이 정전 조치를 취함으로써 종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국경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기 위한 별도의 공식적인 조치는 오늘날에도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걸프전쟁은 다른 전쟁의 경우에서와는 달리 공식적인 휴전협정이나 종전협정 없이 이라크가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무조건 이행키로 약속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유엔안보리가 1991년 3월 답변확정한 종전 결의문은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국경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전쟁을 종결함에 있어서 이라크의 책임과 의무만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분쟁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경분쟁은 당사자간의 협상과 합의에 의해 진정된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감독과 응징에 의해 억제되고 있는 것이다. 양국간에는 전쟁의 종결에도 불구하고 국경 인정과 준수에 관한 아무런 협정과 합의도 없다. 다만 유엔의 이름 하에서 미국이 주도하여 이라크의 침략 행동을 봉쇄 내지 차단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양국간의 국경분쟁은 언젠가는 다시 문제화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라크는 자신에 대한 국제사회의 감독과 통제력이 이완되고 쿠웨이트의 자체 방위능력이 미흡하다고 판단할 경우 언제든지 쿠웨이트를 다시 침범할 가능성이 있다.




▲ 참고자료

△ 주요 일지

1961년 6월 19일 쿠웨이트 독립과 함께 이라크는 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
1961년 7월 1일 영국, 석유자원 확보 차원에서 항공모함 1척과 해병대 병력을 쿠웨이트에 파견
1963년 5월 쿠웨이트 유엔 가입
1968년 영국군, 쿠웨이트에서 철수
1973년 3월 양국간 국경 무력충돌 발생
1973년 4월 이라크군 점령지역에서 철수
1990년 7월 24일 이라크, 2개 사단을 쿠웨이트 국경지대로 이동 전개
1990년 8월 2일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점령,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괴뢰정부 수립
1990년 8월 8일 이라크, 쿠웨이트 합병 선언
1990년 8월 10일, 아랍연맹 회원국, 걸프지역 국가들 이라크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랍군대를 파견한다는 데 동의
1990년 8월 12일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외국군대의 걸프지역 철수와 대이라크 경제제재 해제 등을 전제조건으로 쿠웨이트로부터의 군대 철수 시사
1990년 8월 21일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걸프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제의
1990년 8월 25일 유엔안보리, 대이라크 경제제재를 위한 걸프지역에서의 무력사용 승인 결의안 통과
1990년 8월 30일 이라크,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주로 편입 선언
1991년 1월 16일 유엔, 이라크가 유엔이 결의한 철군 시한을 넘기자 평화 논의 일체 취소
1991년 1월 17일 걸프전 발발(이라크군: 사우디 정유공장에 포격, 미군: 이라크 바그다드 공습)
1991년 1월 18일 이라크,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및 예루살렘 등에 미사일공격
1991년 1월 18일 다국적군, 이라크 내 군사 및 산업시설 공습
1991년 1월 25일 이라크, 다국적군 해상작전의 봉쇄를 위해 대규모 원유 걸프해 유출
1991년 2월 22일 이라크와 구소련, 이라크군의 무조건 철군과 8개 항의 걸프전 평화안에 합의, 미국은 이러한 평화안을 거부하면서 이라크에 대한 철군 조건 9개 항 발표
1991년 2월 22일 미군, 이라크 영내로 진격
1991년 2월 23일 이라크, 미국의 철군안을 수락하고 유엔안보리에 통고
1991년 2월 26일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즉각 철군 명령을 발표, 미국은 전쟁 지속 선언
1991년 3월 3일 이라크, 다국적군과의 회담에서 휴전조건 수락
1991년 4월 UN, 국경선 재설정 및 PKO(UNIKOM) 파견 결의
1992년 6월 이라크, 신국경선 설정 관련 UN 결의안 거부
1993년 5월 UN, 이라크 영토이던 루마일라유전 및 움카슬지역 일부를 쿠웨이트영토로 편입(신 국경 확정), 이라크는 신 국경 인정 거부
1994년 10월 이라크, 국경부근에 대규모 병력 집결
1994년 11월 9일 이라크, 쿠웨이트의 주권을 공식 인정
1999년 9월17일 쿠웨이트-이라크 국경 비무장 지대에서 총격전으로 쿠웨이트 군 2명 사망
1999년 11월 미국, 쿠웨이트 군용 비행장 방어능력 증강 및 여단 사령부 설치 계획




△ 참고 사항

쿠웨이트: 면적 1만 7818 평방킬로미터; 인구192만명(98.7); 주민 쿠웨이트인 45%, 아랍인 35%, 남아시아인 9%, 이란인 4%; 언어 아랍어(공용어), 영어; 종교 이슬람 85%(쉬아파 30%, 순니파 45%, 기타 10%); PGDP 22,300(97); 세계 제3위 산유국; 육군 1만1000명, 해군 1800명, 공군 2500명(97)
한국관계: 79 대사급 외교 수립; 94.6 한-쿠웨이트 이중과세 방지협정 체결; 한국인 체류자 400명; 대한 수출 13억 2797만불, 수입 5억 2680만불(98)
틀릴수도 있습돠..
함 읽어보시고 괜찮으면 해가세요..
홧팅!`

전쟁 에 대하여....(내공 많이 걸께요)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전쟁에 대하여 조사가 숙제인데요... 못찾겠어요... 내공 걸 수 있는 데 까지 걸테니깐 답변좀 해주세요 제발요... 목요일 까지 숙제인데 2일 남았음.....

이란에 대하여 알아보기! 숙제를...

... 이란에 유명한유적지,음식,유명한 인물,에 대하여... 미국·이스라엘 등의 국제사회와 갈등을 빚고 있다.... 둘러싸고 이라크와 8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페니키아 , 이스라엘대하여.

... 이스라엘대하여 지금배우고 잇는 여자아이입니다.... 현재 많이 압박 . 그니깐 그 땅을가지기위해... 앗시리아가 멸망한 다음 지금의 이라크 땅에서 새로 생겨난...

"이란"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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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문화와 유적에 대하여

... 유적에 대하여 어느정도 많이 찾아주세요. 내공은 50만... 전쟁 시에는 이란을 지원, 이라크로부터 단교(斷交) 조치를 당하였다. 1973년 10월에는 이스라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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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의 여러문제들.(내공 50걸께요)

... 내공 50걸겠습니다. 테러리즘 폭력적인 공포정치 또는... 했고, "이스라엘" 등도 비록 실험은 실시하지... 국가들"에 대하여 핵사찰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 분쟁에대한 배경지식과 논쟁

... 대한 미군전초기지화 하는데 주력 2.이스라엘... 최근 이란 미사일 개발은 중동지역 새로운 전쟁의 불씨를 안겨다주게된것입니다 이라크전쟁이 종전 단계에...

고대로마

... ㄳ 내공 많이 걸께용 고대로마였던 나라 - 초기로마는... 레바논,요르단,, 이스라엘, 루마니아, 그리스, 알바니아... 지금의 이라크이란 동부 까지 공격할만 큼 강했다....

유명한전쟁작전들

...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전쟁 이틀만에 이스라엘 공군이 총출동해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하고 6월 6일에는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