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 처음에는 발레단의 무대 의상을 제작하다가, '샤넬 넘버 5'를 비롯한 고급 향수들을 만들었으며, 액세서리, 프레 타 포르테 등 패션을 창조했다.
샤넬 양은 벨 에포크 시대의 하늘하늘하고 부자연스러운 의상을 싫어하게 된 여성들을 위해 기발하고 독창적이며 단아한 스타일을 창조해낸 디자이너다. 그녀가 만든 단순한 저지 드레스와 승마용 상의와 바지 등은 해방된 여성들의 유니폼이 되었다.
가브리엘 샤넬은 1883년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고아가 된 그녀를 할머니는 수녀원으로 보내버렸다. 그녀가 "누가 코코(그녀의 별명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를 보았나요"라는 노래를 카페 콩세르에 부르던 중, 우아한 기병대 장교이던 에티엔 발상이 그녀의 연인이 되어 그녀를 성(城) 생활로 끌어들인다.
돈많은 여러 연인들이 출자를 해주어, 코코 샤넬은 제1차 세계 대전 전에 파리의 캉봉 거리와 도빌에다 부티크를 개설했다. 샤넬 양은 자신의 성공이 일부 전쟁의 덕을 보았음을 인정한 최초의 사업가 되었다. 사실 도빌은 그 당시에 멋쟁이 고객들의 피난처였다. 부티크의 성공에 힘입은 코코 샤넬은 남녀 양성적이고 단순화된 독특한 스타일을 세련되게 가다듬었다. 그녀는 자신의 갈색 머리를 자르고, 단순하고 입기 쉬운 드레스, 소매 없는 파티 드레스, 그리고 저 유명한 앙증맞은 검정 드레스와 2색의 구두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만든 '샤넬 넘버 5'가 1921년에 출시된다. 마릴린 몬로는 훗날 이 향수가 자신이 침대에서 입는 꼭 한 가지라고 말하게 된다.
샤넬에게 제2차 세계 대전은 1차 대전 만큼 그렇게 득이 되지는 못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그녀는 파리에 남아 있었고, 점령자 독일인들과의 관계는 해방 후 그녀에게 몇 가지 문제를 안겨주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녀는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가기로 결심하여, 회사는 1954년까지 문을 닫게 된다.
이로써 샤넬의 경력에 조종이 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코코 샤넬은 71세의 나이로 은둔해 있던 곳을 떠나와 다시금 파리에다 부티크를 열었다. 그때 그곳에서 그 유명한 장식끈을 단 트위드 투피스가 만들어졌고, 이 투피스의 성공으로 회사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샤넬은 그때부터 약간 엄숙한 복장을 진주 목걸이와 팔찌로 장식하였으며, 서슴지 않고 보석에다 환상을 가미시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스코트인 동백꽃이 그녀가 만드는 모든 상의 안쪽에 브로치로 부착되었다. 또 다른 마스코트로는 누비 식으로 속을 넣은 핸드백이 있으며, 1955년에는 C자가 서로 교차한 모양의 핸드백 잠금쇠가 만들어졌다.
코코 샤넬은 1971년 1월 10일 리츠에서 혼자 숨을 거두었다. 디오르 회사 뉴욕 지점의 디자이너 가스통 베르틀로가 4시즌 동안 샤넬 회사의 콜렉션을 주도했다. 그 후에는 발렌시아가 회사에서 베르틀로의 동료였던 라몬 에스파르자가, 그 다음에는 샤넬과 매우 밀접하게 일했던 아틀리에의 두 재봉 담당자가 애스파르자의 뒤를 이었는데, 이들은 샤넬의 스타일을 매우 충실하게 이어나갔다. 1983년에 칼 라거펠트는 샤넬 룩에 경의를 표하는 콜렉션들을 디자인함으로써 회사를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1991년 봄, 그는 형광색에다 번쩍이는 금속 조각으로 수를 놓은 투피스를 패션쇼에서 선보였다... 하지만 그가 1992-93년 가을에 생애 최고의 성공을 거둔 것은 검정 가죽으로 만든 오토바이 주자 스타일이었다. 박식하고 상식이 풍부한 그는 시대와 조화를 잘 이루면서도 코코의 불경한 정신을 잘 표현했다
필요하신게 이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답변이 도움이 됬으면 좋겠어요